2. 중생에 관한 잘못된 견해

1) 세례 중생설의 오류

가장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중생이 외적 예식이나 세례를 통해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의 빛이 이토록 밝게 비치는 이 시대에,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영혼의 영적 유익에도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주장을 옹호하면서도 오히려 성령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데도 복음 진리를 수호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회의 강당과 언론에서 이런 교리를 얼마나 열심히 전파하고 있는가! 그래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교리를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로 받아들이고, 파멸로 이끄는 이런 착각 속에서 살다가 죽어 가고 있다.

오, 기독교의 모든 목사들이 구원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령님께 그 진리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요한복음 3장을 연구한다면, 단지 세례만 받아도 중생하게 된다는 세례중생설을 주장하는 이단은 금세 교회의 강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사악하고도 치명적인 오류 위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밝히 임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례식에서 물을 어떤 형태로 사용하든지, 그 물 자체는 인간에게 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만한 효험이 전혀 없다. 물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인간의 영혼에 그 어떤 영적 생명도 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 출생에 대해 기록하면서 매우 강하고 분명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거듭나다", "성령으로 거듭나다",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영적 생각이 깊은 영혼이라면, 신성한 예식에서 물을 뿌리는 것이 위에 언급된 구절이 의미하는 엄청난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기 위하여 세례라는 예식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도 역시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다. 세례는 우리가 은혜의 수단으로 여기며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만약 세례 예식을 행하기 전에 중생되지 않았다면, 단지 세례라는 외적 예식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주어질 수는 없다. 그런 말씀은 진리의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세례식과 성찬식이라는 이 두 예식은, 전능하신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효과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심어진 은혜가 더 자라날 수 있도록 영적 자양분과 격려를 제공하는 공급원 정도로만 여겨져야 한다. 특히 세례식은 이미 존재하는 은혜에 대한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더 옳고, 성찬식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증가시키고자 제정하신 예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이 두 예식을 영적 생명의 원인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비성경적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예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현재 필연적으로 실제로 중생을 경험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세례중생설이 맞다면, 공적으로 고백만 했을 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영원한 처지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죽는 날이 결국 그가 불멸하는 영광스러운 세상에서 태어나는 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토록 끔찍한 오류가 우리가 방금 말한 그들의 주장에서 정당하게 추론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례중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정당하고도 논리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 예식을 통해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게 된다면, 결국 현재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있지 않아야 할 절망의 땅에 갇혀 있는 셈이다. 여러 기록들이 증언하듯이, 세례를 받았더라도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죽을 때에 그들의 양심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공포로 인해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반대로, 만약 세례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면,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도 영광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세례라는 외적인 예식 말고 다른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를 증명하는 많은 사례 중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성경 그 어느 곳에도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므로 어린 시절에도 세례를 받았을 리가 없고, 죽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한 이방인 범죄자가 가장 비참한 순간에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는 세례에 사용되는 물 대야에서 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매달려 있던 그 십자가에서 왕국과 왕관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물세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강도가 겪은 놀라운 회심과 승리의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유아기에 세례를 받았든 장성에서 받았든,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 세례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사람도 불신자일 수 있다. 또는 재료를 받지 않은 사람도 구원받았을 수 있다. 다음의 말씀은 세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여러분은 세례를 통해서 그 어떤 생명의 원리도 주입받지 않는다. 세례는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줄 수 없다. 여러분은 반드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야 한다.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겨야 한다. 이 땅에서 은혜의 왕국에 들어가거나 하늘에서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어야 한다.


옥타비우스의 '성령님의 구원사역' 중에서(54-57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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