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직 신앙고백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표준 신앙 고백을 말하라고 하면 벨직 신앙고백이라 하겠다.

16세기 화란에서는 천주교 정권에의하여 개혁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때에 개혁주의자들은 그 박해에 대항하면서 오직 성경에서 주장하는 참된 진리를 외치게 된다.

이들의 선언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등에 채칙을맞아도, 혀가 칼로 잘려도, 입을 지지고 막아도, 우리 온 몸이 불살라지더라도 진리를 양보할 수 없다.”라 하며 어떠한 박해에서도 진리를 포기하지않겠다고 선포한다.

이때 이들의 진리 선포는 약 2년전 죤 캘빈에 의하여 쓰여진기독교 강요에 기본한 것으로 드 브라스라는 분에 의하여 주창된다.

1566년에 벨직 신앙 고백의기초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후, 1618-1619 년에 있었던 화란에서 있었던 돌트 종교 회의에서 공식적으로개혁주의 신앙 고백으로 채택된다.

 

 

1   유일하신하나님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으로 불리는 유일하시며 단일 본질의 영적 존재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그는 영원하시며다 알 수 없으며 보이지 않으며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정의로우시며 선하시며 모든 선이 넘쳐 흐르시는 원천이시다.

 

2   하나님의인식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을 두 방법으로 안다.

 

첫째는, 우주의 창조와 유지와 통치를 통한 것인데, 이 우주는우리 눈 앞에 있는 가장 훌륭한 책과 같고 그 안에는 있는 크고 작은 많은 피조물들은  글자와 같아서 그것들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1:20)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과 같은 하나님에 관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충분히 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변명할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더 분명하고 충분히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신다.즉 현세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만큼 우리에게 알리신다.

 

3   성경에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뜻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고 사도 베드로가 말한 대로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대로 쓴 것이라고 믿는다.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에 쓰셨다. 나중에 하나님은 우리의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종들, 즉 예언자들과 사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글로 쓰도록 맡기셨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글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4   성경의정경들에 관하여 :

 

우리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의 두 책으로 되어 있고 이 책들은 정경이어서 이 책들에 대한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 책들은하나님의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구약성경의 책들 :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 열왕기 상.,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세 책들, 즉 잠언,전도서, 아가서; 네 대예언자들,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다니엘;그리고 12 소 예언자들, 즉 호세아,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

 

신약성경의 책들 : 4복음서들,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바울의 14편지들, 즉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 히브리서; 다른 사도들의 일곱 편지들, 즉 야고보가 보낸편지, 베드로전후., 요한1.2.3, 유다서; 사도 요한의 계시록 등이다.

 

5   성경의권위에 관하여 :

 

우리는 이 모든 책들을 우리의 신앙의 조정과 토대와 확인이 되는 거룩한 정경으로 믿는다. 교회가 이책들을 정경으로 받고 또 동의하였기 때문만이 아니고 그 책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과 또 그 증거가 그 책들 자체 안에 들어 있음을 성령이 우리마음에서 증거하기 때문이다.

 

6   정경과외경의 구별에 관하여 :

 

우리는 이러한 성경을 외경과 구별한다. 즉 제 3, 4 에스드라서, 토빗트, 유딧,지혜서, 예수 시락, 바룩, 에스더 부록, 가마솥 속의 세 자녀의 노래, 수산나의이야기, 벨과 용의 이야기,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 상.하의 책들이 외경이다. 이 모든 외경들은정경의 책들과 일치하는 한 교회가 읽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외경들은 우리가 그 책의 증거에서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어떤 핵심을 확정할 만한 힘과 효과를 얻기에는 거리가 먼 책들이다. 더구나 이 외경들이정경의 권위를 저하시킬 수 없다.

 

 

7   성경의완전성에 관하여 :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사람이 구원을 위하여 믿어야 할 것은 거기서 충분히 가르치고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전체 방식이 성경 안에 대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사도라 할지라도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부당하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1:8) “그러나 우리나 하늘로부터 천사라도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어떤 것을 보태든지혹은 거기서 어떤 것을 빼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은 가장 완전하고 완성된 것이다. 사람이 쓴어떤 신성한 책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지고하기 때문에 관례,대중, 고전, 연륜, 전승, 회의들, 법령들, 혹은 제도 등등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거짓과 더불어 스스로 속고 속이며공허 그 자체보다도 더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것이든지 이 절대무오한 규칙과 조화되지않는 것을 마음을 다하여 거짓으로 배격하는 것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대로이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요이 1:10-11) “누구든지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8   동일신성의 삼위일체에 관하여 :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데, 그는 하나의 단일 신성을 가지신 삼위이며,그 삼위의 교환할 수 없는 특질, 곧 성부, 성자 및 성령은 실질적으로,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구별된다.성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원인이며 기원이시다. 성자는 말씀이니,성부의 지혜이며 형상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영원한 능력이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에 의하여 하나님이 셋으로 분리되지 않았으니, 성경이 우리에게가르치는 바대로 성부, 성자 및 성령은 각각 자기 품격을 가지시며 그들은 각각의 특질에 의하여 구별된다.그러나 이러한 모양으로 삼위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성부는 성자가아니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또한 성령은 성부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별된 삼위는 나눠지거나 서로 혼합되었거나 혼돈되지 않는다. 성부는 육신을 입지 않으셨고 성령도 또한 그러하고 성자만이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성부는성자 없이, 또한 성령 없이 계신 적이 없으셨다. 왜냐하면 삼위는 다같이영원하고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진리와 능력과 선과 자비에 있어서 삼위는 한분이시기 때문에 첫째되는분도, 또 나중되는 분도 없다.

 

9   성경이증거하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

 

이 진리는 성경의 증거들은 물론 삼위의 역사, 특별히 우리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가안다. 이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경의 증거들은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을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1 26,2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또 창세기 3 22절에서 말하기를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하나 같이 되었으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로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 안에는한 품격 이상의 품격들이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말할 때는 통일성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몇 품격이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것이 사실이지만 구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애매했던 것이 신약성경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 주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부의 소리가 들렸다.

 

3:21-22백성이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자가 물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성부께서 친히 들리는 소리로 선포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은 또한 모든 신자의 세례의식에 쓰이도록 그리스도가 제정하셨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누가복음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 우리 주님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또 같은 모양으로 고후 13:1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위의 모든 곳에서 보면, 세 품격이 계시되 한 거룩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이 교리는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되 내세에는 완전한 지식과 은총을향유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이제 각 삼위의 특수한 직책과 역사(役事)를 살펴야 한다.성부는 그의 능력에 따라 우리의 창조주로, 아들은 그의 피에 따라 우리의 구주이며구원자로, 그리고 성령은 우리 마음에 내재하심에 따라 성화자라고 불리운다.

 

 

사도시대 이후로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는 유대교인, 마니교인, 어떤 거짓크리스찬들과 이단들, 곧 마르키온, 프라키아스, 사벨리우스, 사모사태누스, 아리우스와 그리고 정통 교부들로부터정식으로 정죄된 사람들에 대항하여 이 삼위일체 교리를 언제나 변호하고 보존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우리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받아들인다. 또한 이 신조들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고대의교부들이 합의한 신조들도 받아들인다.

 

10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신성에 따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며 그는 지음을 받지 않고(만일 그렇다면그는 한 피조물일 것이다) 영원부터 탄생하셔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가지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는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셨으며 모든 것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하심을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아들이시니, 우리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때부터만이 아니고 영원부터 아버지의 아들이시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하였다. 요한은 만물이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또 사도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이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으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아들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그가 만물이 창조되던 그 때에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예언자미가가 말하기를 (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사도는 말하기를 그는 생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참된, 영원한, 그리고 능력 있는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그를찾고 예배하며 섬기는 것이다.

 

11   성령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 :

 

우리는 또한 성령이 영원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므로 그는 지음을 받거나 창조되거나 또는 탄생하신 분이 아니고 다만성부와 성자 두 분에게서 발생하신 분임을 믿고 고백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순서에 있어서는 세째의 위격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같이 하나의 동일한 본질과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분이며, 따라서 성경이 우리에게가르치듯이 성령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12   세계의 창조와 천사에 관하여 :

 

우리는 성부가 그의 아들인 말씀으로 자기 뜻에 따라 무에서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개개의 피조물에 존재와형태와 모습과 창조주를 섬길 몇몇 직책들을 주셨다고 믿는다. 그는 인류를 다스리며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의 영원한 섭리와무한한 능력으로 피조물들을 지금도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은 또한 천사도 선하게 창조하시사주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로서 봉사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탁월한 성질에서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다른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종 여일하게본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악마들과 악령들은 타락하여서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하나님과 모든선한 일의 원수가 되어서 교회와 교회의 개개 회원을 유린하려고 지켜보며 또 그들의 악한 획책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살인자들처럼 행한다.그리하여 자기들 자신의 악 때문에 영원한 정죄를 받아 날마다 무서운 고통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물들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과오와 또한 악마들은 독자적인 기원을 가진 존재라든지 또 부패된것이 아니고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마니교도들도 우리는 배격하며 혐오한다.

 

13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그것들을 저버리시거나 혹은 운명과 우연에 맡기시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그것들을지배하시고 통치하셔서 그의 작정 없이 아무것도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으나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시며 또 범행된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는분으로 믿는다.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은 너무도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며 악마와 악인들이 비록 불의하게 행할 때일지라도 그는가장 탁월하고 정의로운 모양으로 자기 일을 정리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가 사람의 이해를 능가하여행하시는데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허락되는 한도를 넘는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우리는 최대의 겸손과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리워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찬양하며, 우리의 피조물의한계를 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만을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으로 족하게 생각한다.

이 교의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까닭은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닥치지 않고 오직 가장 은혜로운하늘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생기는 것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배려로써 우리를 염려하여 주시고 자기에게 속하는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며 우리의 머리털 한 가닥도(왜냐하면 그 털들은 모두 헬 수 있기 때문에),또 참새 한마리도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하나님을 참으로 완전하게 신뢰하는 가운데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 까닭은 그의 뜻과 허락 없이는 그어떤 악마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도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철저히 통제하시고 제압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상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우연에 맡겨 두신다는 에피큐리안들의 사상의 저주할 만한 과오를우리는 배격한다.

 

14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지으시고, 모든 일에있어서 그의 뜻에 일치되게 사람이 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는다. 그러나사람이 그러한 영예로운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예를 이해하지 못하며 또 자기의 탁월한 상태를 깨닫지 못한 가운데 오히려 악마의 말에귀를 귀울임으로 자신을 죄에 복종 시키고 그 결과 죽음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이때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생명의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되었다. 따라서 죄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자기의 본성이 전부 부패되었고 이에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악하게 되고 왜곡되고 그리고 자기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부패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받았던 자기의 탁월한 소질들을 다 상실하고 다만 그 소질들의흔적으로서 약간만 남아 있으니 이것으로써도 자신의 죄악과 부패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사람이 변명할 수 없게 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왜냐하면 인간 안에 있는 모든 빛은 어둠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니, 성경이 우리에게가르치는 대로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그 빛을 알지 못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사람을 어둠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모든 교훈을 배격한다. 사람은 죄의노예에 지나지 않으므로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으니 누가 스스로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감히 자랑할 수 있을까?육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누가 자신의 뜻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겠는가?

자연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누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인가? 요컨대 우리자신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런 자격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알면 누가 감히 자신의 어떤 생각이 자신의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것을 올바로 그리고 확고하게 주장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일을하도록 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이해에 일치할수 있는 뜻과 이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실때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15   원죄에 관하여 :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미쳐간 것을 믿는다. 그 죄는인간성 전체의 타락이며 유전적인 병이며, 이 병 때문에 유아라 할지라도 모태 안에서 전염되는 것이며,사람 안에서 모든 종류의 죄를 만들어내는 죄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아주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모든 인류를 정죄하시기에 넉넉하다. 이 원죄는 세례의식으로도 박멸되거나제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치 물이 샘에서 솟아나듯이 죄가 이 무서운 원천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그들로 멸망하게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자비로 용서를 받기때문이다. 이에 그들은 죄 가운데서 안주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타락을 의식하고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고자신자들은 성령으로 탄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는 다만 모방함으로 생긴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파의 과오를배격한다.

 

 

 

 

16   선택에 관하여 :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최초의 부모의 죄로 인해 모든 아담의 후손이 멸망과 파멸로 떨어졌음을 믿는다. 이때 하나님은여전히 자기 본연의 존재, 즉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분으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것으로 믿는다.그는 자비로우시사 사람들의 행위에 따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영원한 불변의 뜻과 선의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선택한 사람들을 멸망에서 구출하시고 보존하신다.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그들을 내버려 두시사 자기들이 범한 죄악과 타락에 따라 스스로 멸망토록 하신다.

 

 

17   타락한 인간의 회복에 관하여 :

 

우리는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놀랄 만한 지혜와 은혜로써 이렇게 육체적 및 영적 죽음에 떨어져서 자신을 전적으로 비참하게만들고 있는 인간을 살펴보시고 자기의 목전에서 두려워 떨면서 도망치는 자를 마음을 다하여 찾으시고 위로하시며 자기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아들은여자에게서 나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인간을 본연의 자리로 회복 하실 분임을 믿는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하여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옛날에 조상들에게 거룩한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가 정하신 때에 자기의 독생자이신 영원한 아들을이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이것을 이루신 것을 믿는다. 그 아들은 종의 형상을 취하셔서 사람과 같이 되셨고, 모든 연약함을 지닌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으나 사람의 방법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복된 동정녀 마리아의 태내에서 수태되었다.그는 다만 몸으로만 인간성을 취하신 것만이 아니고 참 사람이 되기 위하여 참된 인간의 영혼도 취하셨다. 그가 몸과 영혼을 다 구원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다 취할 필요가 있었던 까닭은 영혼과 함께 몸도 타락하였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의 몸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재세례파 신도들의 이단설을 반대하고 그리스도는어린이들과 같은 몸과 피를 공유하고 계심을 믿는다. 즉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씨에서 태어나셨다.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의 씨, 여자에게서 나시사 다윗의 후손 이새의 뿌리에서 나셨고유다의 지파이시다. 육신으로는 유대인에게서 나셨고, 아브라함의 씨를받아 모든 것에 있어서 죄를 제외하고는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하여 참으로 그는 우리의 임마누엘,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다.

 

19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과 구별에 관하여 :

 

우리는 이 수태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품격이(Person) 인간성과 불가분리적으로 연합된 것을 믿는다.그리하여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두 품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단 하나의품격안에서 연합되었다. 그러나 각 본성이 그 자체 독특한 자질을 보유한다. 그리하여 그의 신성은 언제나 창조된 것이 아닌 비피조물로서 유지되면서 시작하거나 끝나는 날도 없이 하늘과 땅을 채우신다.한편 그의 인성도 그 자질을 잃지 않고 유한한 존재인 피조물로서 남아 있게 되는데 이는 그 시작하는 날이 있고 실제 몸에속하는 모든 특성을 보유한다. 그리고 그가 부활하여 그의 몸을 불멸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인성에 있어서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우리의 구원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성에 의존한다.그러나 그의 신성과 인성은 한 품격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합되었으므로 그가 죽을 때에도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죽으실 때 그의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은 그의 몸에서 떠나던 진짜 사람의 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연합하여 그가 무덤 속에 누워 있었을 때에도 함께 하였으며 그의 신격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재하신적이 없었으니 그의 유아기에는 그 신격이 비록 얼마 동안에는 크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역시 같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즉 자기 힘으로 사망을 정복하신참 하나님이시며, 자기 육신의 연약함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있던 참 사람이시다.

 

20   그리스도의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관하여 :

 

우리는 완전하신 자비하심과 전적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사 불순종을 저질렀던 인간 본성을 취하게 하시고그 본성 안에서 가장 괴로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죄의 값을 치르도록 죄의 형벌을 짊어지게 하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자기에게 돌리셨을 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대하여 자신의 거룩한 공의를 나타내셨고, 그리고 죄를 짓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단순하고 완전한 사랑으로 자신의 자비와 선의를 쏟으셨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겨 주시고, 그리고 그를 통하여 우리가 불멸과 영생을 얻을수 있도록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게 하셨다.

 

21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하여 :

 

예수 그리스도는 맹세를 통하여 멜기세덱의 반렬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에 임명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서 십자가의제단에 자신을 바쳤을 뿐더러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값진 피를 뿌리셨다. 이에 아버지의 거룩하신  진노를 가시게 하기에 충분한 보상을 치르신 것으로 우리는믿는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말한대로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으며, 우리의 악행 때문에 찢기셨고 그가 징벌을 받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고 그가 매를 맞고 우리를 고쳐 주셨고 그는 어린 양처럼 도살장으로이끌려 가서 사형 죄수들의 하나가 되어 죽게 되었다. 이는 본디오 빌라도가 처음에는 그를 무죄로 선언하였으나범인으로 정죄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이 빼앗아갈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주셨으며 또불의한 자를 위하여 의로운 분이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의 몸과 영혼이 다같이 우리의 죄 값에 해당하는 무서운형벌을 경험하셨다. 그가 기도하실 때 그의 땀은 땅에 쏟아지는 핏방울처럼 되었다.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고 부르짖으셨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존귀함으로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고 또 쓰레기로 여겼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상처에서 우리는 온갖 모양의 위로를 얻는다.신자가 영원히 완전할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친히 바치신 그 한 번만의 이 희생 밖에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어떤다른 방법을 찾거나 발견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예수 즉 구주라고 불렀으니 그 까닭은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22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관하여 :

 

성령은 이 위대한 신비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참된 신앙을 불어 넣어주심을 우리가 믿는다. 신앙은 모든공로를 가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를 소유하며 그 분 밖에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사람들만이믿음을 통하여 그 분 안에 있는 완전한 구원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그리스도 밖에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대단히 큰 모독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는 반구주(半救主)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믿음만으로, 혹은 행위 없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고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그까닭은 믿음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우리를 위하거나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신 많은 거룩한 공로와 일들이 우리에게 유일한 의가 되신다. 그리고 믿음은우리가 그의 모든 은총 안에서 그와 계속 교통하도록 해주는 도구이니, 그 은총들이 우리의 것이 될 때 그것들은우리의 죄를 사면하기에 충분하다.

 

23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의 의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용서에 있으며, 또 하나님 앞에 내놓을 우리의 의도 예수 안에 있다고 믿는다.다윗과 바울은 이것이 사람의 행복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로를 묻지 않고 의롭게여기시는 자를 복있는 자라 말한 바와 같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또 그에게 있는 구원을 통하여 거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우리는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며 우리 자신이 그 앞에서 겸손하여 이 튼튼한 터전을 언제나 견지하며, 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이러함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있는 아무 것에도 혹은 우리의 공로에도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순종에만 의지해야 하나니, 우리가 그를 믿을 때 그의 순종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죄과를 가리우며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자신감을 우리에게 주기에 충분하다. 즉 두려움과 떨림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처음 시조 아담의 모범을 따르지 않으니, 그는 두려워서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기자신을 가리우려고 하였다. 따라서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려 할 때 우리자신이나 또는 아무리 작은 다른 피조물에라도 의지하면 우리는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다윗처럼기도해야 한다. “오 주여 당신이 당신의 종을 심판하지 마소서, 당신앞에서는 살아 있는 그 누구라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24   사람의 성화와 선행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하여 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람이 얻는 이 참된 믿음이 사람을 중생시켜서 새 사람을만들어서, 새 생활을 하게 해 주며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 원천이 된다. 경건에 게으른 상태나또는 다만 자기 사랑만을 위하여 살던지 아니면 저주가 무서워서 두려워 행하는 것은 의롭게 하는 믿음을 소유한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것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신앙이 사람에게 있어서 결실이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는 헛된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니 이 믿음은사람을 격려하여 하나님이 자기 말씀으로 명령하신 일들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이 행위들은 신앙의 좋은 근원에서생긴 것이므로 선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상할 만한 것이니 그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성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데는 아무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행을 행하기전일지라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한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나무 자체가 선하기 전에는 그 나무의 열매가 좋은 것이될 수 없는 사실 이상으로 우리의 행위가 선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되 그것으로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무슨공로를 세울 수 있겠는가?). 아니, 우리는 우리가 선행을 행하기 위하여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그의 기뻐하실 일을 뜻하게 하시며또한 그 일을 행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을 경청하자. 너희가 명령대로 이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할 일을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한다.

때가 오면 하나님이 선한 일에 보답하실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으나 그러나 그가 자기의 상을 주심은 자기의 베푸신 은혜에갚으시는 것이다.더구나 우리가 선행을 행하여도 그 일에서 우리의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욕심으로 오염되어서 벌을 받을 만한 일 밖에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이러한일들을 행할 수 있을지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이 그 일들을 배격하시기에 충분하다. 이때우리의 빈약한 양심이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아무 확실성 없이 의심을 품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할 것이며,계속 고민하게 될 것이다.

 

25   의식의 율법의 폐지에 관하여, 구약과 신약의 일치에 관하여 :

 

우리는 율법의 의식과 표상들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 폐지된 것과, 또 모든그림자가 성취된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크리스챤들 사이에서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진리와 실체는 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복음의 교리를 우리가 확신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정직하게 조정하기 위해서 율법과 예언자들에게서취하여 낸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한다.

 

26   그리스도의 중보에 관하여 :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변호자이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믿는다. 그는 이일을 위하여 사람이 되어 한 품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었고 그리하여 사람이 거룩하신 주재께 접근할 수 있게 하였으니, 이 접근을 방해할 것이 없다. 그런데 성부가 자기와 우리 사이에 임명하신 이 중보자는 그의위엄으로써 결단코 우리에게 겁을 주거나 혹은 우리가 공허한 생각으로 다른 중보자를 찾도록 만들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늘이나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니, 그는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셨으나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사람과 종의 형상이 되어서 모든 것에 있어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던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찾는다면 누가 우리를 사랑하여 줄 것이며, 또 비록 우리가 원수일 때라도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시키신 그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여 줄 중보자가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또 만일 우리가 능력과 권세를 가진 자를 찾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에비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보다 더 빨리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때문에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고려하여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공로에의지하기 때문이니 그의 의로움이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의 어리석은 공포심이나 혹은 불신을 우리에게서 제거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올바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그 분(예수 그리스도)은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그분은 친히 고난을 당하시고 유혹을 받으셨기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실 수 있다. 또 우리를 격려하기 위하여 더 말씀하신다.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심을 알고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굳게지키자. 우리의 대제사장은 연약한 우리를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분이다. 그러나 죄를 지으시지 않았다.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총의옥좌로 가까이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또 같은 사도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예수의 피의 덕분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기때문에 그분의 제사장직은 영구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언제나완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다. 그분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해서 중보자의 일을 하신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변호자로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다른 변호자를 찾겠는가?우리가 찾을 수도 없는 다른 변호자를 취하거나 찾고 또 찾기 위하여 그를 저버리지 말자. 하나님이 그를 우리에게 주셨을 때 우리가 죄인들이었음을 그가 잘 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주의 기도에서 가르치시는 대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아버지에게 부르짖을 수 있다.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아버지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실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27   공동 교회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의 카톨릭, 즉 공동(共同)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받아 구원 받을 것을 바라는 참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하나의 거룩한 회중이며 회합이다.

이 교회는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이시므로 백성 없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온 세상의 격렬한박해를 막으시는 하나님이 보존하시고 지원하신다. 교회는 한 때 사람들 눈에는 아주 작고 그리고 아무 것도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니, 이것은 아합의 위험한 통치 기간을 보기로 들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때에도 주께서는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명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셨다.

더구나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혹은 어떤 인물에게 국한되거나 구속되어 있거나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온세상에 퍼져서 확장되어 있다.그러면서도 믿음의 힘으로, 또 하나의 같은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연결되고 연합되어있다.

 

28   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교통에 관하여 :

 

우리는 이 거룩한 회중과 회합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회합이며 그 밖에서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지위나 상태의 인물이든지그 회중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살기 위하여 자신을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이 그 회중에 들어가서 일치하며 교회의 일치를보존하며 교회의 교훈과 훈련에 복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목을 굽히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재능에 따라 같은 몸의 공통된 지체와 같이형제들의 건덕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보다 잘 지켜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분리되며, 어디든지 하나님이 설치하신 회중에 가입하는 일은 정부 관료나 군주의칙령이 반대하거나 심지어 죽음이나 육체의 형벌을 과하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신실한 신자들의 의무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에서 후퇴한 사람이나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다 하나님의 명령에 위반하게 된다.

 

29   참된 교회의 표지에 관하여 :

 

우리는 열심히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오늘세계에 있는 모든 분파가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참교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 성도 들과 함께 섞여있는 위선자들을 말하는 것은아니다. 다만 스스로 교회라고 자칭하지만 참된 교회가 아닌 자들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

 

참된 교회를 인식하기 위한 표지는 다음과 같다. 교회가 순수한 복음의 교훈을 설교하고 있는지 않는지,그리스도가 명령하신 바와 같은 순수한 성례전을 베풀고 있는지 않는지, 교회의 권징이죄를 벌하기 위하여 사용되는지 않는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되고있는지 않는지, 그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격되는지 않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되고 있는지 아닌지, 이러한 표지로써 참된교회를 분명히 알며, 이러한 참된 교회에서 분리되어도 괜찮은 권리는 그 어떤 성도도 갖지 않는다.또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알 수 있는표지로는 믿음이다.

믿음은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이에 죄사함을 얻으며 죄에서 해방되고 의를 구하며 하나님과 이웃을참으로 사랑하며,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그들의 죄성을 그 죄성의 열매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연약한 바가 없는 바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그들의 생애의 모든날에 자신의 연약함과 쉬지 않고 싸우며  예수의 피와 죽음과 수난 및 복종에 언제나 끊임없이 의지하며, 예수 안에서 그들은 믿음으로말미암아 언제나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거짓된 교회를 논한다면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회자체와 교회의 규정들에 더 큰 힘과 권위를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멍에 하에 교회 전체를 복종시키지 않으려 한다. 또 이러한 거짓 교회는 그의 말씀으로 지정된 성례전들을 집행하지 않고그 성례전을 자의로 가감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의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며 그 교회의 과오와 탐욕과 우상예배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박해한다.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는 쉽게 알 수 있고 서로 구별이 된다.

 

30   교회의 행정에 관하여 :

 

우리는 이 참된 교회의 영적 정책에 따라 통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주님이 자기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으로믿는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성례전을 집행할 목사들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목사들과 함께교회의 정책 기관을 구성할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참된 종교가 보존되며 참된 교리가어디서든지 전파되며 또한 범죄자들이 처벌되며 영적인 방법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질서바르고 겸손하게 모든 것이 실시되면 그때에는 성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시한 규칙에 따라 신실한 사람들이 선택된다.

 

31   목사, 장로, 집사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과 장로와 집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시듯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질서에 따라 교회의 정당한방법에 따라 각기의 직무에 피택되어야 하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각자가 부정한 수단으로 자기를 밀어 넣지 않도록 주의하고 자기가부름 받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소명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확신하기 위하여 증거를 갖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는 유일하신 총감독 또는 유일한 교회의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예수님께서 부여하시는 권력과 권위를 동일하게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거룩한 규약이 침해되거나 혹은 경시되지 않도록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역자들과 교회의 장로들을아주 높이 평가해야 하며 또 불평이나 경쟁이나 혹은 싸우는 일이 되도록 없이 하여 그들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는 바이다.

 

32   교회의 질서와 기강에 관하여 :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어떤 규약을 만들어서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로 인하여 유익함을 얻는다고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주이신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람이 만들어낸 어떠한 착상도 거절하며 그러한 것을 예배 법률로 만들어 어떤 모양으로든지신앙의 양심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인본적 법률들을 배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로 일치와 통일을 신장하며 보존하는 것만을 인정한다. 이 목적을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출교처분, 혹은 교회 기강을 세워야 하는 필요들을 보게 된다.

 

33   성례전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의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결점을 보시고 이를 돕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례전을 제정하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이성례전을 통하여 그의 약속의 징표를 보며 우리를 향한 그의 선의와 은혜를 확인한다. 또한 성례는 우리의 신앙을기르며 강화하시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복음의 말씀에 성례전을 추가로 연합시키시고 그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상징으로 주신 성례전의 의미를 알게 하시며, 또한 우리 마음 안에서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우리의 감관(感官)에 성례를 제시하시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보장하시며확실케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볼 수 있는 상징들이며 또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역사하시는 방편이 되는 내적인 보이지 않는 표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례전의 상징들은 공허하거나 무의미한것이 아니며 속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들이 제시하는 참된 대상이며 그분 없이는 그것들은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례전의 수를 만족하게 생각하니 그것은 세례의 성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거룩한 성찬의 단 두 가지 뿐이다.

 

34   세례에 관하여 :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흘림으로써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위하여 구속의 상징으로 삼았던혹은 삼으려던 모든 동물들의 피흘림의 종말이 된 것을 믿고 고백한다. 또 그는 피로써 행한 할례를 철폐하시고 그대신 세례의 성례전을제정하셨는데,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용납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타종교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며,우리가 전적으로 그에게 속하게 되며 그의 기장(旗章)과 깃발을 지니는 것이며, 그는 영원히 우리의 은혜로운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심을 우리에게 증거로삼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순수한 물로 세례를받을 것을 명하셨다. 세례가 우리에게 상징하여 주는 것은 마치 물이 세례받는 사람의 몸에 뿌려질 때 몸의때가 씻겨 없어지듯이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세례 받는 사람의 영혼에 내적으로 뿌려져서 죄를 씻어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를 진노의 자식들로부터변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중생 시킨다. 이것은 외부적인 물의 힘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피를 뿌림으로 효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홍해이니, 우리는이 홍해를 통과하여 바로 왕 폭군, 즉 악마를 피하여 가나안의 영적인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그러므로 교역자들이 성례전을 행하며 그것은 외부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우리 주님이 세례의식으로 우리에게 보장하여 주시는것은 여러 가지 은사들과 보이지 않는 은혜, 씻음, 정화,아주 더럽고 불의한 것들을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제거하는 일, 우리 마음을 새롭혀서모든 위로로써 채우는 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선의에 대한 참된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히고 옛 사람을 모든 행동과 함께 벗겨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이 세례만을 받아야 하되 같은 세례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가 두번 중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세례는 우리에게 물을 뿌리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 만이 아니고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서도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세례파의 과오를 배격한다.그들은 그들이 전에 받은 단 한 번의 세례에 만족하지 않으며 또 신자들의 유아들의 세례를 정죄하지만 우리는 그 유아들도이전에 이스라엘의 어린 아이들이 우리의 유아들에게 주신 같은 약속으로 할례를 받았듯이 계약의 상징으로서 세례를 받고 인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또 사실은 그리스도는 장년들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어린이들의 정화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 그러므로 유아들도 그리스도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신 일의 상징과 예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율법에서 명령하신대로 유아들도 출생 직후에 그들을 위하여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성례전을 받도록 되어야 한다.더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할례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세례와 같다. 그리고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다.

 

35   성만찬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중생하여 그의 가족, 즉 그의 교회에 연합된 사람들을 먹이시며 유지시키기 위하여성만찬의 성례전을 제정하신 것을 믿고 고백한다. 이제 그들 중에 중생한 사람들은 이중의 생활을 하는데,한 가지는 육신적 또는 현세적인 생활인데, 이것은 그들이 처음 출생했을 때부터 하는생활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영적이며 천상적인 생활인데, 두번째의 출생이며 이것은 복음의 말씀에 따라 또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를 통하여 효과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삶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특별한 것이다. 이와같이하나님은 육신적인 지상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상적이고 일반적인 빵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빵은 육신생활에 유익하며, 삶 그 자체처럼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그러나신자들이 영위하는 영적이며 천상적인 삶의 유지를 위하여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 즉 예수 그리스도를보내셨으니, 신자들이 그를 먹을 때, 즉 성령안에서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일때 그가 그들의 영적인 삶을 풍부하게 하시며 강화하신다. 우리에게 이 영적인 하늘의 떡을 제시하시기 위하여그리스도는 자기 몸의 상징으로서 지상의 보이는 떡을 제정하셨고 또 그의 피의 상징으로서 포도주를 제정하셔서 이것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손에 이 상징물들을받아 쥐고 입으로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삶이 나중에 살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것은 우리 영혼의손과 입이 된다)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의 참 몸과 피를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하여 우리의 영혼에서 분명히받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성례전을 공연히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듯이 그는 우리안에서 마치 성령의 역사가 감춰져 있어서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성례전의 이러한 상징물들에의하여 우리에게 그가 제시하시는 그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가 먹고 마신 것은그리스도의 자연적인 몸과 본래의 피였다고 우리가 말할지라도 잘못된 말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이 성례전을받는 모양은 입으로서가 아니고 신앙을 통하여 성령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언제나 하늘에서 아버지의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교통하게 역사하신다. 이 만찬은 영적인식탁이며 거기서 그리스도가 자기의 모든 축복을 가지고 우리와 사귀시며 거기서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고난과 죽음의 공덕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그것을 즐기게 하시며, 그의 살을 먹음으로 우리의 가난하며 위로가 없는 영혼들을 먹이시고 강화하시며,또 그의 피를 우리가 마심으로 그 영혼들을 살리며 소생케 하신다.

더 나아가서, 성례전들은 그것들이 상징하는 것과 연결되지만은 성례전에 참예하는 모든 사람이 이 두 가지를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불경한 사람은 실은 성례전을 받으면서도정죄를 받는 자리에 나가게 되는데 이는 성례전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법사인 시몬이 성찬을받았으나 실은 그 성례전이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참 신자들은 성례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받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찬을 겸손과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회합에서 받으며, 감사하는마음으로 우리 신앙과 우리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죽음을 교인들과 함께 거룩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미리 올바르게 자신을 반성해 보지 않고는 이 식탁에 와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이 떡을 잘못 먹고 이 잔을 잘못 마심으로 스스로 멸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 성만찬 예전을바르게 대하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전에 사람들이 첨가하는 예식이나 또는 혼합시키는 모든 제도들과 저주를 받을 새로운 의식들을 성례전의모독으로서 배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제도로 만족해야하며 그 성례전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순종해야 할 것을 확언하는 바다.

 

36   관공리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의 은혜로운 하나님이 인류의 타락 때문에 왕과 군주와 관리들을 지명하시고 세계가 어떤 법률과 정책으로 통치되기를원하신다고 믿는다.그 결과 사람들의 황폐가 저지되고 모든 것이 질서 있고 보기좋게 운영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집정관에게 무기를 쥐어주셨으니, 악행자들을 벌하시며 선행자를 상주시기위함이다. 그들의 직책은 단지 국가의 복지를 존중히 여겨서 지켜보는 것만이 아니고 거룩한 목회사업을 보호하며,모든 우상숭배와 거짓된 하나님 예배를 제거하며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즉 적 그리스도의왕국이 파괴되며 그리스도의 왕국이 신장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정관들은 어디서든지 복음의 말씀의 설교를경청하여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령된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존귀와 예배를 받게 되어야 한다.

더구나 어떤 지위나 신분이나 조건의 사람일지라도 집정관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즉 세금을바치며, 그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복종하는일이다. 또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집정관들을 지배하시며 그들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도록 그들을 위하여 대신기도할 것이며, 또 우리가 경건하고 정직하여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세례파의 과오와 그 밖의 선동적인 사람들과 또 일반적으로 높은 권세와 집정관들을 배격하여 사회의 질서를파괴하며 동등을 주장하여 강제로 모든 것을 획일화 시키려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고상하고 선한 질서를 혼란시키는 사람들로여기며 이들을 혐오한다.

 

37   최후심판에 관하여 :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지정하신 때(이 때는 모든 피조물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가 오면, 또 선택된 자의 수가 찰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지고 보이게,즉 그가 크신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승천하셨듯이 하늘에서 오셔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을 선포하시며,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불과 불꽃으로써 이 낡은 세계를 태워버리실 것을 믿는다. 그때에 남자와여자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고 모여 들어서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신 대 재판관 앞에 직접나타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이 땅에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영혼이전에 있었던 본래의 몸들과 연합될 것이다. 그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었던 사람처럼 죽지는 않을 것이되 순간적으로변하여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는 책들이 펼쳐지고 죽은 자들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이 세상에서 그들이 행한 일에 따라 재판을 받을 것이다. 아니,모든 사람이 세상에서는 한갖 오락과 농담으로만 간주되던 자기들의 쓸데 없는 말에 관하여 일일이 설명해야 할 것이다.또 그 때 사람들의 비밀과 허위가 드러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개될 것이다. 그러므로이 재판을 생각한다는 것은 악한 자와 불신자에게는 바로 무서운 것이지만 의롭고 선택된 자들에게는 가장 바람직하며 통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의 완전한 해방이 성취될 것이며, 그들이 짊어졌던 노고와 고난의 열매들을거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백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질 것이며 이 세상에서 그들을 가장 잔인하게 박해하고압박하고 괴롭혔던 악인들은 하나님이 처벌할 무서운 보복을 받을 것이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의 증거에의하여 고발된 것이며, 또 불멸할 것이므로 악마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에서 고통을 받을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신실하고 선택된 사람들은 영광과 영예로써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가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밝힐 것이다. 모든 눈물이 그들의 눈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지금 많은 재판관들과 집정관들에게서이단으로 정죄된 사건들이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생각할 수없는 그러한 은혜로운 보답으로서 주께서는 위대한 영광을 준비하셔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대한 날이 와서 드디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충분히 즐길 수있기를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한다. 주여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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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직 신앙 고백서 강해(2)

출처:  이승구 교수님 블로그  http://blog.daum.net/wminb/13718831

  벨직 신앙 고백서 강해(2) :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관련해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에 대해서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공간의 어느 한 점이나 한 영역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시공간을 전혀 초월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전혀 내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초월만을 인정하여 내재성을 전혀 부인해 버리려는 20세기 초의 사상을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초절주의"(超絶主義)라고 번역하여 그 특징을 분명히 표현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초절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말하려는 내재주의(內在主義, immanentism)에 대한 좋은 반발과 반박이 되지만, 이 역시 한 극단으로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과 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과 관련한 무한성은 편재성(遍在性, 어디에나 계시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시간 안에 내재하시며,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따라서,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초월과 내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시간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조차도 상대화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늘날 많은 잘못된 신학자들과 함께, 문자적 성육신은 모순이요 부조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바로 이해하는 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시간 안에로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벨직 신앙 고백서에서는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그저 그의 "무한성"이란 말에서만 시사되고 있으나, 공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충만히 채우시며, 오히려 모든 공간을 창조적으로 붙드시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시다고 가능성에 대한(per potentiam) 진술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질로(per essentiam) 어디에나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없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잘 깨달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시 139:10)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향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는 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으신 분(God is in becoming을 강조하는 융엘 등), 아니면 적어도 변하실 수 있음을 한 측면으로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려는 것(과정신학 등)이 오늘날의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상 전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아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없으시다 거나, 아주 답답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을 따라서, 말라기 3:6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 야고보서 1:17의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시를 믿을 만하게 하는 것이 그의 불변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시는 일에서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 3:6의 진정한 의미도 이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시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온전히 소멸하지 않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으신다는 특성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변성은 후의 언약의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변하지 않고 당신님의 존재를 유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지 않은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능성은 우리가 후에 생각할 창조와 역사를 그 목적에로 까지 인도하여 가시는 통치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른 위치에 잇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열심인 것도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어, 그 전능성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실 때에도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끊고서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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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채우병
Homepage
http://gumsaram.com
Subject
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 이승구 교수님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1)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 교회가 좀더 개혁신학이 지향하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서,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인 벨직 신앙 고백서에 대한 강해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7년 개신교회의 순교자로 소천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 s, 1522-67)가 1561년에 당시에 스페인의 천주교 정부에 의해서 박해받던 프란덜스(Flanders)와 네덜란드(Netherlands) 교회들의 변호를 위해 불어로 작성한 것을 1566년 안트베르프(Antwerp) 대회(Reformed Synod), 1571년 엠덴(Emden) 대회, 1574년 도르트 대회(Dort Synod)와 1581년 미델부르그(Middelburg) 대회에서 수납하고,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때인 1619년에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거쳐 도르트 전국 대회(the National Synod of Dort)에서 개정하여, 지금까지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과 도르트 신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고 있는 귀한 개혁파 신조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1 조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de Natura Dei)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단순하시고 영적인 한 존재가 계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영원하시고, 불가해적이시며[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으시며], 보이지 아니하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모든 선의 넘쳐흐르는 원천이시라는 것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칼빈과 그의 학생이었던 앙뜨안느 드 라 로셰 샨디우(Antione de la Roche Chandieu)가 작성하여 1559년 파리 대회(a synod at Paris)에서 개정되어 받아들여진 프랑스 신앙 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 제 1 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유일하며 단순한 본질을 가지신, 영적이고,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불변하시며, 무한하시고, 불가해적이며(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으시고), 이루 말할 수 없으며(ineffable),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전히 선하시고, 온전히 의로우시며, 온전히 자비로우신 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벨직 고백서는 하나님을 "단순하시고 영적인 유일하신 존재"(one only simple and spiritual Being)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신 6:4; 왕상 8:60; 고전 8:6; 딤전 2:5;). 그런데 그 유일하신, 하나이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십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인 얼굴, 눈, 코, 입, 등, 손, 손가락, 발 등을 가지고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일종의 의인법적 표현, 정확히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을 볼 때에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성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이렇게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1:20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라고 말한 것에 의존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영적인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디모데 전서 1:17과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이시니"라고 말하는 디모데 전서 6:16의 말씀도 같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이지 아니하시고 볼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해당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하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을 뵈옴(visio Dei)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디모데전서의 말씀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볼 자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월필드는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뵌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당신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뵌 이는 그 자신이 피조물로서, 더구나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는 무자격함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께서 조인을 받아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감격과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6], p. 491). 이렇게 진정한 신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이렇게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더욱 더 분명히 하나님을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은 단순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하다는 말은 사람이 단순하다고 말할 때의 단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본질이 복합적이지(compositeness) 않으시다, 따라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지거나 할 수 없다(free from division into parts)는 뜻에서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즉, 전통적 신학이 늘 강조해 온 바와 같이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을 일으킬 수 없게 하나로 있다는 뜻에서의 단순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 속성이, 그 절대적 온전성 때문에, 그의 존재 전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each of the properties of God, because of their absolute perfection, is identical with His Being). 이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벨직 고백서의 내용에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자체를 생각해 보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알아 가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한 기쁨의 근원이 되듯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묵상 자체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2)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 하나께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관련해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에 대해서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공간의 어느 한 점이나 한 영역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시공간을 전혀 초월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전혀 내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초월만을 인정하여 내재성을 전혀 부인해 버리려는 20세기초의 사상을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에 "초절주의"(超絶主義)라고 번역하여 그 특징을 분명히 표현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초절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말하려는 내재주의(內在主義, immanentism)에 대한 좋은 반발과 반박이 되지만, 이 역시 한 극단으로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과 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과 관련한 무한성은 편재성(遍在性, 어디에나 계시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시간 안에 내재하시며,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따라서,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초월과 내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시간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조차도 상대화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늘날 많은 잘못된 신학자들과 함께, 문자적 성육신은 모순이요 부조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바로 이해하는 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시간 안에로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벨직 신앙 고백서에서는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그저 그의 "무한성"이란 말에서만 시사되고 있으나, 공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충만히 채우시며, 오히려 모든 공간을 창조적으로 붙드시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시다고 가능성에 대한(per potentiam) 진술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질로(per essentiam) 어디에나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없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잘 깨달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시 139:10)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향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는 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으신 분(God is in becoming을 강조하는 융엘 등), 아니면 적어도 변하실 수 있음을 한 측면으로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려는 것(과정신학 등)이 오늘날의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상 전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아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없으시다 거나, 아주 답답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을 따라서, 말라기 3:6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 야고보서 1:17의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시를 믿을 만하게 하는 것이 그의 불변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시는 일에서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 3:6의 진정한 의미도 이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시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온전히 소멸하지 않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으신다는 특성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변성은 후의 언약의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변하지 않고 당신님의 존재를 유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지 않은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능성은 우리가 후에 생각할 창조와 역사를 그 목적에로 까지 인도하여 가시는 통치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른 위치에 잇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열심인 것도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어, 그 전능성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실 때에도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끊고서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3)

공유적 속성들(1)

지난번까지 논의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아주 독특하게 하나님께서만 가지신 속성들입니다. 이번에 생각하려는 속성들도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마는, 어떤 제한된 의미에서는 피조물인 우리도 그런 속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선배들은 이를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공유적'이라는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공유적 속성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절대적으로, 가장 뛰어나게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피조물 수준에서 반영하는 정도로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공유적 속성들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공유적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이런 용어를 써 왔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공유적, 비공유적이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항상 그만한 차이가, 천지의 차이,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금 개혁파의 후렴 어귀의 하나인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지혜로우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각하면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는" 것입니다(고전 1:25). 따라서 하나님께서만이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와 과정과 관련해서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과정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가는 과정을 경탄하며 보아야 합니다. 창조와 섭리와 구속 사역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십시다. 그는 의 자체이시고, 그에게는 불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본성이 의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법(eternal law), 또는 영원법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서 그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주장하고 나가시는 데서도 당신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공의를 행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창 18:25).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고, 온 세상에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선하십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이는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그저 선한 사람, 선한 선생님으로 보고 인간적인 한도 내에서 아주 선하다고 하는 뜻의 "선한 선생님이여"라는 말에 대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선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그 수준에서, 즉 신성의 수준에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fons omnium bonum)이십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약 1:1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체적으로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은혜로우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선(summum bonum)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선의 원천이시라는 이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항상 옳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도 할 수 있고 (시73편, 렘 12장, 하박국 1장, 욥기), 하나님께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 마지막에 도달하게 될 때 온 세상은 그저 그 입을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우심을 생각하면서 다시 그 입을 벌려서 그저 그분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혜와 의로우심과 선하심,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적 신정론(eschatological thedic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세상 끝에 가서야 하나님이 옳은지 아니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 끝에는 그 옳으심이 온전히 선언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어느 시점에서나,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옳으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항상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특히 공유적 속성을 연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혜로우려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만이 지혜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려고 하는 이도 하나님을 가까이해야만 합니다. 선한 것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반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여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을 지혜롭게 살피고 판단하며, 항상 옳고 의로운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며, 선한 성품을 드러내서 참으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오래 참아 나가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당신님의 성품을 잘 깨닫고 반영할 존재들을 두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의미이고, 구속의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비록 피조물의 수준에서나마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고귀한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고 개혁된 형상을 지닌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4)

공유적 속성들(2):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께서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시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는 그 지혜로우심의 한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지식은 이 세상 진리의 원천이고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둘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2) 그의 피조계 전체에 대한 지식.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다 아신다(comprehension)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지 않을 실 수 없는 지식이요, 그의 의지의 작용의 결과로 아시는 지식이 아니라는 뜻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예로부터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이라고 불려져 왔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신학(theologia Dei)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와 의식 전체를 온전히 다 아십니다. 이것을 우리 선배들은 "하나님께는 존재와 의식과 지식이 동연적(同延的, coterminu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잠재 의식이나 무의식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다 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점차 알아 가시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에 숨기어졌던 자신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영원적 지식(eternal knowledge)을 가지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종합적 지식일 수 없으며, 논의적(discursive) 지식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은 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계에 대해서도 온전한 지식을 가 지십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그가 알지 못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피조계에 대한 참(진리)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실재적인 세상에 대해서는 결국 자신 의 온 세상에 대한 불변하는 온전한 작정(decree)에 근거해서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 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 은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의 우연적 존재(contingent beings)인 이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근거해서 알고 계신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찰적으로(intuitive) 단번에 아시는 것입니다(scientia visionis). 하나님께서 무엇을 관찰하시거나 추론해서 어떤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지식의 증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연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이런 인식을 바르게 가진다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학적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된 문제, 섭리와 관련된 문제, 십자가의 구속의 범위와 관 련된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적 지식도 아니고, 우연적 지식도 아닌 소위 '중간 지식'(scientia media)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 이런 문제의 해결이 더 쉽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에 대해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 하시는 자"(시 94:10)이신 하나님께 그 무엇이라도 숨 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웃기는 (ironical) 상황입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숨기려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 있을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라고 외칩니다(사 29:15). 그러므로, 한나의 기도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이 온전하신 "지식의 하나님께" 우리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삼상 2:3).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듯이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해 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러내고 있는 이런 태도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사야는 이렇게 묻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 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사 40:37). 그렇게 생각하거나 묻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구 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마 6:8). 이처럼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신학적 질문을 모두 답해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천적 문제들도 거의 다 해결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한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해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우리도 하나 님의 온전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생각하시는 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지식을 갖 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인지적 사명(cognitive mandat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식에 따라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인(analogical) 관계 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원형적 지식(original knowledge, archetypical knowledge)이라면, 우리의 지식은 유비적 지식(analogical knowledge)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 유비성에 충실할수록 우리의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 그 자체는 우리가 능히 다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수사적으 로 묻고 있듯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전 2:16). 그러나 하나님 께서 드러내 주신 바 계시가 있으므로,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2:16). 그리고 자신이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말합니다(고전 2:13). 그러므로 우리의 유비적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드러내어 보이신 계시에 의존하는 지식, 계시 의존적 사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에 신학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 학문(scientia christiana)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 나님의 온전하신 지식을 우리의 피조물의 수준에서 유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지식 이고, 참된 학문입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 분과가 추구하는 진리의 기 준이 바로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부디 우리의 인지 적용이 이렇게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생각하는 바르고 온전한 인지 작용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는 실천적 의미의 하나가 바로 이런 우리의 인식 작용이 바르게 작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게 하나님의 지식과 이에 대해 유비적인 우리의 지식 활동을 논할 때 이 를 공유적 속성으로 언급했던 우리 선배들의 의도가 부분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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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 이승구 교수님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1)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 교회가 좀더 개혁신학이 지향하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서,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인 벨직 신앙 고백서에 대한 강해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7년 개신교회의 순교자로 소천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 s, 1522-67)가 1561년에 당시에 스페인의 천주교 정부에 의해서 박해받던 프란덜스(Flanders)와 네덜란드(Netherlands) 교회들의 변호를 위해 불어로 작성한 것을 1566년 안트베르프(Antwerp) 대회(Reformed Synod), 1571년 엠덴(Emden) 대회, 1574년 도르트 대회(Dort Synod)와 1581년 미델부르그(Middelburg) 대회에서 수납하고,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때인 1619년에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거쳐 도르트 전국 대회(the National Synod of Dort)에서 개정하여, 지금까지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과 도르트 신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고 있는 귀한 개혁파 신조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1 조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de Natura Dei)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단순하시고 영적인 한 존재가 계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영원하시고, 불가해적이시며[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으시며], 보이지 아니하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모든 선의 넘쳐흐르는 원천이시라는 것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칼빈과 그의 학생이었던 앙뜨안느 드 라 로셰 샨디우(Antione de la Roche Chandieu)가 작성하여 1559년 파리 대회(a synod at Paris)에서 개정되어 받아들여진 프랑스 신앙 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 제 1 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유일하며 단순한 본질을 가지신, 영적이고,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불변하시며, 무한하시고, 불가해적이며(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으시고), 이루 말할 수 없으며(ineffable),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전히 선하시고, 온전히 의로우시며, 온전히 자비로우신 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벨직 고백서는 하나님을 "단순하시고 영적인 유일하신 존재"(one only simple and spiritual Being)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신 6:4; 왕상 8:60; 고전 8:6; 딤전 2:5;). 그런데 그 유일하신, 하나이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십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인 얼굴, 눈, 코, 입, 등, 손, 손가락, 발 등을 가지고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일종의 의인법적 표현, 정확히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을 볼 때에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성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이렇게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1:20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라고 말한 것에 의존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영적인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디모데 전서 1:17과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이시니"라고 말하는 디모데 전서 6:16의 말씀도 같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이지 아니하시고 볼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해당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하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을 뵈옴(visio Dei)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디모데전서의 말씀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볼 자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월필드는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뵌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당신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뵌 이는 그 자신이 피조물로서, 더구나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는 무자격함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께서 조인을 받아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감격과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6], p. 491). 이렇게 진정한 신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이렇게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더욱 더 분명히 하나님을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은 단순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하다는 말은 사람이 단순하다고 말할 때의 단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본질이 복합적이지(compositeness) 않으시다, 따라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지거나 할 수 없다(free from division into parts)는 뜻에서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즉, 전통적 신학이 늘 강조해 온 바와 같이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을 일으킬 수 없게 하나로 있다는 뜻에서의 단순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 속성이, 그 절대적 온전성 때문에, 그의 존재 전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each of the properties of God, because of their absolute perfection, is identical with His Being). 이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벨직 고백서의 내용에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자체를 생각해 보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알아 가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한 기쁨의 근원이 되듯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묵상 자체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2)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 하나께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관련해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에 대해서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공간의 어느 한 점이나 한 영역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시공간을 전혀 초월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전혀 내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초월만을 인정하여 내재성을 전혀 부인해 버리려는 20세기초의 사상을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에 "초절주의"(超絶主義)라고 번역하여 그 특징을 분명히 표현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초절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말하려는 내재주의(內在主義, immanentism)에 대한 좋은 반발과 반박이 되지만, 이 역시 한 극단으로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과 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과 관련한 무한성은 편재성(遍在性, 어디에나 계시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시간 안에 내재하시며,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따라서,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초월과 내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시간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조차도 상대화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늘날 많은 잘못된 신학자들과 함께, 문자적 성육신은 모순이요 부조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바로 이해하는 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시간 안에로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벨직 신앙 고백서에서는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그저 그의 "무한성"이란 말에서만 시사되고 있으나, 공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충만히 채우시며, 오히려 모든 공간을 창조적으로 붙드시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시다고 가능성에 대한(per potentiam) 진술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질로(per essentiam) 어디에나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없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잘 깨달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시 139:10)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향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는 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으신 분(God is in becoming을 강조하는 융엘 등), 아니면 적어도 변하실 수 있음을 한 측면으로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려는 것(과정신학 등)이 오늘날의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상 전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아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없으시다 거나, 아주 답답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을 따라서, 말라기 3:6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 야고보서 1:17의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시를 믿을 만하게 하는 것이 그의 불변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시는 일에서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 3:6의 진정한 의미도 이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시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온전히 소멸하지 않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으신다는 특성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변성은 후의 언약의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변하지 않고 당신님의 존재를 유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지 않은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능성은 우리가 후에 생각할 창조와 역사를 그 목적에로 까지 인도하여 가시는 통치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른 위치에 잇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열심인 것도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어, 그 전능성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실 때에도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끊고서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3)

공유적 속성들(1)

지난번까지 논의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아주 독특하게 하나님께서만 가지신 속성들입니다. 이번에 생각하려는 속성들도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마는, 어떤 제한된 의미에서는 피조물인 우리도 그런 속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선배들은 이를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공유적'이라는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공유적 속성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절대적으로, 가장 뛰어나게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피조물 수준에서 반영하는 정도로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공유적 속성들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공유적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이런 용어를 써 왔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공유적, 비공유적이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항상 그만한 차이가, 천지의 차이,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금 개혁파의 후렴 어귀의 하나인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지혜로우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각하면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는" 것입니다(고전 1:25). 따라서 하나님께서만이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와 과정과 관련해서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과정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가는 과정을 경탄하며 보아야 합니다. 창조와 섭리와 구속 사역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십시다. 그는 의 자체이시고, 그에게는 불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본성이 의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법(eternal law), 또는 영원법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서 그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주장하고 나가시는 데서도 당신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공의를 행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창 18:25).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고, 온 세상에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선하십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이는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그저 선한 사람, 선한 선생님으로 보고 인간적인 한도 내에서 아주 선하다고 하는 뜻의 "선한 선생님이여"라는 말에 대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선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그 수준에서, 즉 신성의 수준에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fons omnium bonum)이십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약 1:1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체적으로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은혜로우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선(summum bonum)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선의 원천이시라는 이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항상 옳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도 할 수 있고 (시73편, 렘 12장, 하박국 1장, 욥기), 하나님께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 마지막에 도달하게 될 때 온 세상은 그저 그 입을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우심을 생각하면서 다시 그 입을 벌려서 그저 그분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혜와 의로우심과 선하심,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적 신정론(eschatological thedic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세상 끝에 가서야 하나님이 옳은지 아니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 끝에는 그 옳으심이 온전히 선언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어느 시점에서나,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옳으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항상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특히 공유적 속성을 연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혜로우려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만이 지혜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려고 하는 이도 하나님을 가까이해야만 합니다. 선한 것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반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여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을 지혜롭게 살피고 판단하며, 항상 옳고 의로운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며, 선한 성품을 드러내서 참으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오래 참아 나가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당신님의 성품을 잘 깨닫고 반영할 존재들을 두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의미이고, 구속의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비록 피조물의 수준에서나마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고귀한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고 개혁된 형상을 지닌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4)

공유적 속성들(2):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께서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시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는 그 지혜로우심의 한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지식은 이 세상 진리의 원천이고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둘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2) 그의 피조계 전체에 대한 지식.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다 아신다(comprehension)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지 않을 실 수 없는 지식이요, 그의 의지의 작용의 결과로 아시는 지식이 아니라는 뜻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예로부터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이라고 불려져 왔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신학(theologia Dei)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와 의식 전체를 온전히 다 아십니다. 이것을 우리 선배들은 "하나님께는 존재와 의식과 지식이 동연적(同延的, coterminu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잠재 의식이나 무의식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다 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점차 알아 가시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에 숨기어졌던 자신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영원적 지식(eternal knowledge)을 가지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종합적 지식일 수 없으며, 논의적(discursive) 지식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은 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계에 대해서도 온전한 지식을 가 지십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그가 알지 못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피조계에 대한 참(진리)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실재적인 세상에 대해서는 결국 자신 의 온 세상에 대한 불변하는 온전한 작정(decree)에 근거해서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 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 은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의 우연적 존재(contingent beings)인 이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근거해서 알고 계신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찰적으로(intuitive) 단번에 아시는 것입니다(scientia visionis). 하나님께서 무엇을 관찰하시거나 추론해서 어떤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지식의 증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연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이런 인식을 바르게 가진다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학적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된 문제, 섭리와 관련된 문제, 십자가의 구속의 범위와 관 련된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적 지식도 아니고, 우연적 지식도 아닌 소위 '중간 지식'(scientia media)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 이런 문제의 해결이 더 쉽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에 대해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 하시는 자"(시 94:10)이신 하나님께 그 무엇이라도 숨 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웃기는 (ironical) 상황입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숨기려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 있을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라고 외칩니다(사 29:15). 그러므로, 한나의 기도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이 온전하신 "지식의 하나님께" 우리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삼상 2:3).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듯이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해 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러내고 있는 이런 태도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사야는 이렇게 묻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 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사 40:37). 그렇게 생각하거나 묻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구 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마 6:8). 이처럼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신학적 질문을 모두 답해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천적 문제들도 거의 다 해결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한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해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우리도 하나 님의 온전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생각하시는 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지식을 갖 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인지적 사명(cognitive mandat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식에 따라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인(analogical) 관계 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원형적 지식(original knowledge, archetypical knowledge)이라면, 우리의 지식은 유비적 지식(analogical knowledge)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 유비성에 충실할수록 우리의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 그 자체는 우리가 능히 다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수사적으 로 묻고 있듯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전 2:16). 그러나 하나님 께서 드러내 주신 바 계시가 있으므로,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2:16). 그리고 자신이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말합니다(고전 2:13). 그러므로 우리의 유비적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드러내어 보이신 계시에 의존하는 지식, 계시 의존적 사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에 신학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 학문(scientia christiana)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 나님의 온전하신 지식을 우리의 피조물의 수준에서 유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지식 이고, 참된 학문입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 분과가 추구하는 진리의 기 준이 바로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부디 우리의 인지 적용이 이렇게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생각하는 바르고 온전한 인지 작용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는 실천적 의미의 하나가 바로 이런 우리의 인식 작용이 바르게 작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게 하나님의 지식과 이에 대해 유비적인 우리의 지식 활동을 논할 때 이 를 공유적 속성으로 언급했던 우리 선배들의 의도가 부분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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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교회의 4가지 신앙고백서


 개혁주의 신조는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신경,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벨직 신앙고백


1.벨직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1년, 화란의 개혁교회가 핍박받고 있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다. 화란을 다스리던 필립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아버지 찰스 황제처럼 가톨릭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 당시 화란은 프랑스와 긴밀한 교류 있었고, 프랑스에 확산되었던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개혁의 움직임을 언짢게 여겨왔던 필립 2세는 이 개혁을 근절하기 위해 Spanish Inquisition(스페인의 탄압)이라는 스페인의 종교탄핵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시의 분위기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자연의 모든 위대한 힘이 이 핍박에 동원되었다. 불은 사람을 태우는 데, 물은 사람을 수장시키는 데, 공기는 공중에 사람을 매다는 데, 흙을 사람들을 생매장시키는 데에 사용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립 2세는 개신교인을 살려두기보다는 네덜란드를 초토화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필립 2세 아래서 순교당한 개혁교회 성도의 숫자가 1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초대교회 때에  로마 황제 아래서 순교당한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 터툴리안이 말하기를 "기독교회가 부흥한 데 있어서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강한 개혁교회가 세워진 밑거름에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다. 개혁교회의 전통 위에 있다는 것은 순교의 전통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참된 기독교 신앙은 순교 신앙이다. 개혁주의적인 신앙고백자는 순교적 삶을 살아간다. 순교 신앙은 자신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하여 그리고 아직도 교만한 자신에 대해서 철저히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매일 죽는다"라고 말하는 바울의 신앙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Daily dying and rising. 성공적인 신앙의 비결은 매일 자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개혁교회에서 아주 강조하는 것이다. 실지로 육적인 죄의 생각이 죽으면 행복해지고, 아주 편해진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먼저 죽으시고, 부활의 영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 부활의 영의 능력이 아닌 자기의 육적인 에너지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힘들고 어려워진다.


벨직고백서는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귀도 드 브레스(Guido De Bres)가 작성하였다. 가톨릭신자였다가 금서였던 성경을 읽고 개혁주의를 전파하다가 1567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의 처절한 편지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을 준다. 벨직고백서는 신학자의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작성된 것이다. 벨직고백서는 순교자의 신앙의 생명력을 표현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칼빈주의 맥락 속에서 발전된 신앙고백서이다.


2. 벨직 신앙고백서의 내용적 특색


1). 하나님을 아는 방법(1-9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주셨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보여주셨으나 우리 맘이 어두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계시인 성경으로 분명히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이 고백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방편으로서의 성경에 대해서 먼저 논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함께, 혹은 성경보다 전통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계시인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주어지는데, 자연계시(일반계시)에서도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evidence)를 주셨다는 것이다. 자연과 이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아퀴나스는 거듭나지 않은 지성을 가지고도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지성으로는. 구원에 대한 지식,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 등은 알 수가 없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2중 구조를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칼빈은 자연신학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지침과 척도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죄의 문제는 자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의 증거로만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의 증거를 보면서 살지만, 그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증거를 보는 즉시 눈을 감아 버리고, 특별 계시에로 나아가지 않고, 부인해 버리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안의 부패성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로서, 마음이 부패한 문제이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문제이다.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을 왜곡시켜 버리고, 부인해 버린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시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논쟁을 벌였다. 에라스무스는 우리 안에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유의지가 철저히 손상되었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의지밖에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에 메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 전에는 죄의 결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가 선을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어쩔 수가 없이 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의지적으로 죄를 원하고, 그것을 선택한다(롬 7장).  우리는 자신들의 부패한 마음에 부합되는 부패한 길만을 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돌이킬 수가 없다. 우리는 육신의 범죄에 속한 것만을 선택을 한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선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육신의 범주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좀 더 고상한 것을 선택한 것이지만, 육적인 동기로 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행위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기 원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작용한 결과이다. 이것이 Total Depravity(전적부패)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10-21장).


기독론의 맨 앞부분에서 선택(election)을 다루고 있다. 왜 선택이 이 부분에 나오는 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적 부패를 다루고 난 다음에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도록 선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구원을 이루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오직 삼위하나님께서만이 전적으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셔야 한다. 바로 그 구원사역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불의한 자를 위한 죽음이다. 그는 죄인의 자리에서 지옥을 맛보셨다. 그 대가로 우리는 완전한 의인의 자리에서 그 축복을 받게 됐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전충족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다. All sufficiency of Jesus' atoning work


3).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방법(22-37장).

 

22장은 믿음을 다룬다.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그 방편이 믿음이다. 믿음은 성령의 은혜다. 믿음은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게 아니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공로나 조건이 되지 않는다. 구원의 근거로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의 은혜가 주어지는데, Sola fide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믿음이 공로적인 측면에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방편이다( instrument channel))이다. 믿음은 구속의 은혜가 이루어지는 통로, 그릇(vessel)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로 믿음의 그릇도 만들어서 내려주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혜의 산물이다.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선재하여, 믿음을 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믿음은 지적 승인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예수님의 축복과 예수님을 분리하지 않는다. J. I. 패커 "믿음이란 예수님의 공로를 움켜잡는 빈 손이다." 믿음은 자기를 의존하지 않고 예수와 그의 의만 절대적으로(only and entirely) 의존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교만을 죽이는 것이다.


24장에서는 성화와 관련해서 믿음이 어떤 것인가 다룬다. 우리를 new man으로 볼 뿐 아니라, new generated man으로 본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연결시킨다. 이 믿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믿음이다. 순종을 가능케 하는 믿음이다. 온전히 순종하는 것과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온전한 순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믿음이란 우리로 선행의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행의 열매를 맺으니까. 성화에 대한 믿음도 우리로 자랑할 게 없게 만든다.


의롭게 하는 믿음과 성화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가? 의롭게 하는 믿음은 수납한다(reception)는 것이고. 성화의 믿음은 역사한다는 것이다(operation). 24장 첫 부분은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뒷부분은 구별성 강조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 결과 의롭게 산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낸 의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한 순간이라도 자기 공로로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 거절하신다.


성령론을 그 다음에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은 객관적(objective)이다. 이 객관적 사역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관적(subjective)인 체험이 되도록 전환하는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다. 성령께서는 과거의 주님이 현재의 주님이 되도록 한다. 역사적인 주님이 오늘날의 실존적인 주님으로 만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Christ for us -> Christ in us. )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2000년 전의 역사적인 예수를 믿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에 모셔드리고, 그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성화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소유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실제화하고 주관화시키는데, 성령께서는 예수와 내가 생명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Union with Christ).

 

27-29항까지 참 교회의 표식 세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 말씀전파(순수한 복음설교), 바른 성례의 시행, 권징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참된 영적인 성숙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키프리아누스가 했다. 어거스틴도 주장했다. 칼빈도 말했다. 모든 교인은 교회에 속해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조장하지 않는다. 그 다음 마지막 부분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정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그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재세례파와 같이 교회의 신자들은 정부를 거스림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벨직 신양고백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칼빈주의 맥락에서 발생한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에 기초를 제공했다. 초대교회에서는 기독론과 삼위일체 논쟁의 가열에 따라서 그에 대한 신앙고백의 항목이 확대가 되고, 증보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이후에는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에 대한 항목들이 증보되었다. 또한 그와 관련된 여러 부분의 교리들이 재조정되고 확대됨으로써 교리의 내용은 조직신학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벨직 신앙고백서와 같은 역사적인 신조를 통해서 오늘날의 완성된 조직신학적인 교리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6maZ&articleno=15711268&looping=0&long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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