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을 위할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 2018. 8. 23. 10:12◈하나님은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만 돋보여집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할 때, 문자 그대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이나 어떤 행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어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요리문답 1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부정적으로는’ 그에게 부가적인 영광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완전하시고 영광스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본질적인 영광에 조금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긍정적으로는’ 인생들이 그들의 삶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만물도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만(롬 1:20),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진 못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declare, 시 19:1)”라는 말씀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법정적으로 선포(선포는 법정적 용어, 요 6:35; 롬 1:4)할 뿐, 그것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돋보여내질 못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연은 ‘자발성’과 ‘의도성’을 가진 인격이 아니기에, 인격자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돋보여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반면 인간은 자발성을 가진 하나님 형상의 인격자이긴 하지만, 죄로 인한 불완전함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돋보여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흠하시고 자발성을 가진 하나님 형상의 인격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돋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과 결부시킨 것은 두 인격이 불가분리인 일체이며, 각 위의 영광의 돋보임이 서로에게 의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각 위(位, personality)가 개별로서는 영광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영광의 돋보임인 서로에게, 혹은 서로의 사역에 의존돼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성부의 영광의 돋보임이 성자에 의존돼 있음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다음 구절은 ‘성자의 영광’의 돋보임이 ‘성부의 영광’과 불가분리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면서 성부와 연결지어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이라 했음은, 독생자의 영광의 발원지가 성부이시고 성자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과 함께 돋보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전적으로 무능해진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간을 위할 뿐입니다. 이를 인정치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려다 사달(事端)이 납니다.
특히 율법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율법적 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다 율법의 정죄를 받은 것은, 교회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궤적(軌跡)들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다가 저주에 떨어졌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했으며 인간들을 얼마나 무능하게 했는지를 모르는 데서 기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가 컸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데는 인간은 전혀 무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내실 때 염두에 두신 것은 성자 그리스도였습니다. 죄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아는 이도, 율법의 의를 이루어 자신의 진노를 풀어줄 이도 성자뿐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율법의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죄로 절망하여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께 피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려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은 구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뿐더러, 구원 이후의 하나님 섬김 역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참 그리스도인’의 표상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함(빌 3:3)”이라고 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봉사 동력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하나님 섬김은 그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일하심입니다. 곧 성도 안의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절들입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선행)를 보고 만족해 하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인간의 행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 행위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심으로서입니다.
그들의 봉사, 선행이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는 것은 선행 자체의 가치보다, 그것을 있게 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없었다면, 그들의 봉사도 불가능했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 3:17)”고 한 것도, 우리의 봉사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 봉사를 있게 하는 예수의 이름을 가치롭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보다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여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벧전 4:11).”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도 그들의 기도를 열납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공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신 것도(요 14:13-14)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께 열납 돼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기도의 응답을 이끌어 냅니다.
이 점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공로)을 돋보여 내는 통로입니다. 인간의 봉사나 기도는 모두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할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나 자연 만물 같은 피조물들에 의해 증거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웅큼으로 태평양 바닷물을 측량하고, 줄자로 오대양을 측량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됩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하나님은 오직 삼위 하나님에 의해서만 자증(自證, one's own evidence)됩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와 성령에 의해서만, 성부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요 5:32)”,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리고 이 삼위 하나님의 자증(自證)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룬 복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곧 복음 안에서 역사하여 이루신 삼위 하나님의 자증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자증인 복음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증거됩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무한자 하나님을 유한자 인간이 증거할 수 없다는 전제와 인간의 복음전파 없이는 하나님이 증거될 수 없다는 두 전제의 충돌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에는 인간의 ‘역할’과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이 측면들이 다 충족돼야 합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자증인 복음을 ‘전파하는 자(proclaimer)’로 한정시킴으로서 충족됩니다. 복음에 인간의 지혜가 가미되면 삼위 하나님의 자증 능력이 훼손을 입기에,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도록 ‘전파자(proclaimer)’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바울이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쉽게 말하면, 복음 전파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이란 삼위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스스로 자증(自證)하도록, 사도 요한이 말한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 요 1:23)’의 역할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자증으로 된 복음을 듣고 세운 신앙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진 신앙이 됩니다(고전 2:5).
복음 설교자들이여! 여러분은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우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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