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저 (김성웅 역)

현대 교회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
문: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답: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사탄이 만들려고 하는 교회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는 교회'인가? 호튼은 이 물음에 대해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을 한 마디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자유주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미국 교회 전반에 대한 진단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우리는 미국 교회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미국 교회에서 만든 제품을 가장 빠른 시간에 직수입해서 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쌍둥이라 해도 좋을 터인데, 호튼이 말하는 미국 교회의 현실이 한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복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호튼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호튼은 현재 미국 교회의 메시지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더 열심히 하세요. 더 노력하세요" 일색이며, 보수 진영에서 자유주의 진영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에서 재세례파에 이르기까지, 뉴에이지에서 남침례교에 이르기까지, 미국 교회의 '영성 탐구'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증상을 발견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 없는 중세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듯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미국 기독교'를 '미국 문화의 포로 된 교회'로 생각한다.

1.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
호튼은 미국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을 질병명을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가 말한 '도덕적이 심리적인 이신론'이라고 규정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핵심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세째,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다섯째,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다. 호튼은 미국 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로 심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2차 대각성 이후 즉 찰스 피니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찰스 피니는 미국 교회에 펠라기우스를 유행시킨 전도사였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심각성은 찰스 피니의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이 미국 교회에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명목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까지도 일부 침투했다는 점이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천 스미스와 제임스 헌터와 같은 종교사회학자들은, 루터파 교회와 개혁 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와 똑같은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기억시킨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 필이 미국 개혁 교회에서 안수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좀 더 보수적인 장로교와 개혁교회들에서도 스미스가 지적한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에 딱 맞아떨어지는 설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교단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게리쉬는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술한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2. 조엘 오스틴 비판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조엘 어스틴이다. 조엘 어스틴은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라는 책과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과 전 세계에 이러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호튼은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되었고' 어스틴은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어라"라는 형통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라 말하면서 어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 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라고 진단한다. 조엘 어스틴의 책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도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 교회에도 조엘 어스틴의 긍정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한 사람도 별로 없고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책을 제시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심각한 병은 점점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염되고 있다. 물론 왜 조엘 어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에서 가르치는 자기 계발식 메시지가 문제가 되는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고 항변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살면 된다는 조엘 어스틴의 메시지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호튼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어스틴과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 토니 로빈스처럼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나님이 필요할 데가 어디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

3. 맥클라렌의 이머징 교회 운동 비판
최근 미국 복음주의에서는 맥클라렌 같은 인물이 주도하는 다소 자유주의신학적 성향과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 떠오르고 있다. 호튼은 '조엘 어스틴의 형통복음에 나타나는 자기도취와 개인주의와는 동떨어져 있기는 하나 맥클라렌의 메시지는 중요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스틴이 말하는 죄와 구원은 하나님에서 도덕적 개선을 통한 자아의 행복과 향상으로 옮겨갔다면, 맥클라렌에게서는 지구 온난화, 가난, 에이즈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탐심으로 옮겨간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이 두 경우 모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형동 복음을 주장하는 조엘 어스틴 류의 <믿음의 말씀 운동>이나 맥클라렌 류의 <이머징 교회 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호튼은 이들은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금의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을 따르라"고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초대 (맥클라렌)라고 규정하든, 혹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어스틴)라고 하든, 우리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음, 정죄 그리고 죄의 폭정을 종식시켰고, 장차 영광과 권세 가운데 다시 오셔서 먼저 심판하신 후 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늘의 선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4. 영지주의와 닮은 꼴인 미국 기독교 영성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최근 미국 기독교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영지주의적 영성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뉴에이지' 혹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종교 시장의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되고 있다. '영성에 대한 탐구'가 미국의 시사 잡지 커버스토리에 자주 등장하고, 역사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등이 '영성'이라 부르는 영지주의적 탐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튼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주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실은 복음주의자들의 예배, 전도, 영성은 역사적인 기독교라기 보다 여러 면에서 몰몬교나 뉴에이지 그리고 자유주의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미국 영지주의 전문가 브룸에 따르면 고대 영지주의는 즉 브룸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피오레의 요아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재세례파, 천년왕국 열광주의자, 내면의 빛 분파주의자, 미국의 모든 초월주의 (위트만, 소로 그리고 에머슨), 몰몬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통해 계속적으로 다양한 변종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 최근 미국의 영성이 고대 영지주의자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요소란 무엇일까?

호튼은 고대 영지주의와 최근 미국의 영성을 이렇게 비교한다. 루프가 고대 이단에 관해 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대 미국 영성에 관한 기술은 영지주의의 주요 특성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 특성들로는, "교리보다 경험을 우위에 둔다, 공적 제도가 아니라 사적이다, 인식의 문제를 피하고 신화적이고 몽환적이다, 공공의 종교가 아니라 대중의 종교를 지향한다, 부드럽고 마음 써 주는 신관을 가지고 있다" 등이다.

고대 영지주의처럼 우리 시대 미국인들이 영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형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의 축으로서 내면의 영을 강조한다.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변형판들마다 표면적으로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호튼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기독교를 관찰했을 때, 오늘날 개신교 자유주의와 개신교 복음주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 기본적인 종교 형태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5. 미국제 기독교의 특징: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
호튼은 현재 미국제 종교의 특징을 도덕주의와 신비주의의 결합으로 본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이다. 현대 미국 기독교는 바로 이 두 가지 이단이 결합한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라는 것이 호튼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구세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이르는 영지주의의 길은 선한 창조주, 죄를 부른 타락,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처참한 죽음 그리고 육체의 부활 이야기를, 한 악신, 물질을 악하게 한 타락, 내면적인 계몽으로 인한 구속이라는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우리 밖을 보도록 하는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이 둘은 합쳐서 미국제 종교라는 완벽한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6. 교회가 그리스도를 다시 회복하는 길
펠라기우스주의건 영지주의건 이 모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결국 각기 독특한 복음 없는 율법을 주장한다.

호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기독교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의 자력구원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호튼은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복음과 율법이란 무엇인가? 호튼은 복음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한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지쳐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호튼의 진단에 따르면 복음이 강조되지 않고 복음없는 율법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복음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해야 할 요구사항만 자꾸만 늘어놓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벗어나 다시금 그리스도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될 수 있을까?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바른 치료를 할 수 있다.

호튼에 따르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이며, 결국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선포하지 못하고 복음 없는 율법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튼의 해결책은 명확하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바로 알고, 복음과 율법을 바르게 선포하며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하는 길이다.

호튼의 책을 읽고 나면 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이 차이를 자각하고 나면, 복음은 복음, 율법은 율법으로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율법, 복음은 복음이 되게 하자. 이제부터 호튼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둘째,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셋째,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무엇이며,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일원으로 살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복음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 곧 성경이 말하는 '다른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호튼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였다. 그동안 호튼의 <세상의 포로된 교회>, <언약의 하나님: 언약신학 입문서>등을 통해서 복음과 율법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는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서 교회사의 모든 이단들이 사실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혼동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뿌리요 원인이 '복음과 율법의 혼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호튼의 기존의 책들을 통해 복음과 율법의 원리를 배웠다면, 이번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 복음과 율법의 실전을 배운 느낌이다. 복음과 율법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요,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를 형성하는 데 기초다. 앞으로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우리 한국 교회가 다시금 복음과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달고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로 충만한 기독교가 되는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가주 주님의 교회에서 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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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 마이클 호튼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우리 자신의 활동을 포함한다(요15:2, 8, 16; 롬8:12~13, 12:9, 16~17; 고전6:9~10; 고후7:1; 갈5:16~23, 6:7~8; 골3:5~14; 벧전1:22). 매일 죽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의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자들이다.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들이었던 우리는 거듭남과 칭의를 위해 은혜에 협력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능동적이지 않았고 다만 복음을 통해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이들로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받았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매일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구원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점점 더 많이 실현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실 때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성부께 영광과 기쁨이 되도록 이끄신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5~26).

 

우리가 우리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지금 무에서부터(ex nihilo) 새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에 기쁘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또한 지속적인 재창조 사역을 하시면서 성령을 통해 성자 안에서 하신 말씀의 효과를 불러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 있으라"라는 명령적 선언이 "땅은 ~을 내라"라는 명령법을 통해 보완된 것처럼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판결은 이제 타락한 피조물이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한 상황을 창조한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씀을 향해 돌아섰으므로 우리의 회심(믿음과 회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표시하는 결정적이고 단회적인 인간적 돌아섬이며, 이 회심은 '거듭해서' 평생에 걸쳐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린다. 그러나 돌아섬이라는 이 매일 행하는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죄에서 돌아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이나 경건이 아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벌코프는, 고대 교회에서 분명히 나타난 도덕주의가 칭의와 성화를 혼동했을 뿐만 아니라 성화를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고 바르게 논평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다시 낙원으로 가는 길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필요했지만 세례 이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는 언제나 은혜에 대한 협력과 선행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최소한 중세뿐만 아니라 고대의 기독교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성화가 마치 명백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칭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얻기를 소망하는 도덕적 노력의 과정인 것처럼 성화를 다루려는 경향이 있었다.

 

감각 세계로부터의 영혼의 상승이라는 신비적인(플라톤주의의) 이론과 더불어 이런 도덕주의적인 성화관은 분명 고대 교회에서 금욕주의와 수도원주의가 일어나게 된 주된 이유다. 벌코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은혜로움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취하여 성화를 하나님이 인간 안에 넣어 두신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속하시는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끊임없이 몰두해야 할 필요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성화란 오직 인간의 고등한 자아의 지배를 통한 하등한 자아의 점진적 구속에 있다. 성품에 의한 구속은 오늘날의 표어 가운데 하나이며 '성화'라는 용어는 단순히 도덕적 개선을 의미하게 되었다.(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29.)

 

그러나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심지어 윤리적 의미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함의가 암시하는 것처럼 "거룩함은 단순히 도덕적 올바름이 아니며 성화는 결코 단순히 도덕적 개선이 아니다. 성경은 "성화를 하나님의 일로(살전5:23; 히13:20, 21),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의 열매로(요15:4; 갈2:20, 4:19),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일이 될 수 없는 일로(엡3:16; 골1:11) 묘사하며 또 성화가 성령의 사역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나타남에 대해 말한다"(갈5:22).(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33.) 

 

성화와 관련해서 피해야 할 가장 분명한 두 가지 위험은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이다. 둘 다 특별히 신자들과 도덕법과의 관계에 관한 오류다.

 

 

A. 율법주의 (생략) (665~674p)

 

B. 도덕률 폐기론 (생략) (674~679p)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에서 발췌, 663~6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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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새 언약적 순종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 / 마이클 호튼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 자체가 우리에게 두 가지 구별된 형태의 언약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즉 두 가지 언약이란 율법과 약속인데 약속은 은혜 언약의 기초가 된다. 분명 우리는 죄 안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맹세에 기초해서만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율법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우리에게 임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상속받지만, 구원은 먼저 가장 철저한 순종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아주 실제적인 의미로, 우리는 행위 즉 그리스도의 행위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받을 행동을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이러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율법은 세워진다. 그리고 율법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명령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우리 역시 가장 큰 우주적 심판대에서 변호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값없는 칭의의 복음 안에서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최후심판에서의 무죄 선언은 심지어 지금 우리에게 속해 있으며, 우리의 세례에 의해 확증되고, 주의 만찬 안에서 경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성취된 것 말고 율법이 세워진다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가? 만일 시내 산 언약이 더 이상 강제력이 없고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면 - 즉 율법이 아니라 약속의 언약 아래 있다면 -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배척해야 할 어떤 율법의 원리가 있는가? 우리는 구약의 모든 윤리적 교훈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신약에서 발견하는 명령만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어쨌든 성도의 삶 속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좋은 소식으로써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죄인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여러 장에 걸쳐 설명한 후, 로마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만일 우리가 들은 복음 설교가 우리가 완전히 율법과는 관계없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들은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아니오' 다. 바울의 반응은 율법 언약의 반응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만일 너희가 계속 죄안에 거한다면, 너희는(상급상실 또는 심지어 구원상실) 고통스러운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오히려,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세례받은 사람은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성령에 의해 새 생명을 받았다. 그 좋은 소식은 점점 더 좋아져서 죄책만이 아니라 죄의 왕 노릇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순종은 단지 어떤 기록된 법을 따를 필요가 없이 일어나는 것인가? 율법을 규범으로서 보는 관점은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 주셨을 때, 율법이 죽이는 문자를 대체한다는 의미인가?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

 

새 언약 안에서의 율법의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가 중요한 구분짓는 것을 실패함으로써 잘못된 출발을 한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집단들이 성도를 위한 율법의 규범적 용도를 단순하게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르게 인식하는 데 필요한 율법의 구분은 무엇인가?

 

첫째, 율법 자체와 율법 언약 사이의 차이점을 마음에 간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주석가들은 '율법'과 '복음'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했다(내 생각에는정당하다). (1) 율법의 원리(율법의 언약조항을 개인적으로 성취하는 것)는 약속/복음의 원리와 구별된다. (2) 옛 언약(약속)은 새 언약(성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이 모세오경으로서의 '율법' 안에 계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명령)과 약속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칭의를 받는 문제에 있어 심지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며 구분된다.

 

원리로서의 '율법'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형(하라와 하지 말라)의 형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어떤 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십계명, 상세한 성전 청결 규정, 이혼과 재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갈라디아서 5장 16~24절에 나오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위한 지침 등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명령에 대해 조금도 차이가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구약을 율법, 신약을 약속으로 나눌 수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명령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명령은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표현이다. 성경이 애써 보여 주려는 것은 성도를 위한 규범적 율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율법 언약에 따라 하나님과 관련될 가능성을 배제하면,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신명기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심지어 시내 산 언약도 약속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언약의 범주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 성경 안에 복음(약속으로서의 복음)이 있다는 의미라면, 율법 안에도 복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만일 신약 성경(성취로서의 복음)안에 명령들(율법의 원리)이 있다는 의미라면 복음 안에도 율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은혜 언약의 기초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적, 구속적 은혜(율법과 복음이 혼합되지 않은)이면, 분명히 은혜 언약의 제도 안에는 명령과 약속이 있다. 우리가 언약의 기초를 말할 때, 율법과 복음은 엄격하게 반대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율법과 복음을 율법 언약과 약속 언약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할 때마다 율법과 복음은 구분되며 심지어 반대된다.....

 

 

둘째, 새 언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는 율법의 종류인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을 구분해야 한다.

 

만일 시내 산 언약이 지금도 절대적이라면, 시내 산 언약에 포함된 구체적인 명령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사실 시내 산에서 주어진 십계명은 엄격하게 말해 이스라엘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다. 나머지 우리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명령들은 고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사회적이며 문화적 삶을 규정하는 신정 수립의 율법과 함께 주어졌다.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는 것, 땅과 이방인과 죄수들을 취급하는 것 등과 관련된 시민법은 분명 신정자체가 존재하는 동안만 유효하다. 예배를 관장하며, 구체적인 정결의식, 사람뿐만 아니라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사이의 구별, 성전, 제사장, 제물 등을 포함하는 의식법도 비슷하게 신정이 존재하는 동안만 '규범적'인 것이다. 정결한 짐승과 비정결한 짐승에 대한 환상을 본 베드로는 이방 선교를 완전히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옛 언약이 이제 폐지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전적인 사례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를 상징하는 더 엄격한 정결법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행10:9~43). 그러므로 칼빈(루터파 개혁자 필립 멜란히톤처럼)이 옛 언약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 많은 교부들을 따랐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존재로 인해 우리 양심에 새겨져 있다(롬1~3). 십계명은 신정을 지배하는 다른 법들의 핵심으로 기능하는데, 십계명 가운데 많은 내용들이 심지어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문명(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은 고전적인 사례)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도덕법의 개념은 신약 성경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신약 성경은 도덕법의 요구를 축소시키는 대신, 내적인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도덕법의 요구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것은 단지 외적으로만 지키고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임을 보여 주며, 새 언약의 복 가운데 하나는 성령이 율법을 사람의 마음속에 기록하고서 그것을 지키도록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계명의 두 돌판의 의미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한 것은 하나님의 요구라는 관점에서 언약 사이의 연속성을 증명해 준다(마22:37과 병행 구절) 도덕법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대는 구약에서 신약에 걸쳐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도덕적 성향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의 삶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바울의 놀라운 묘사는 단지 도덕법의 내적인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도덕법의 의미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이라기보다 태도와 성향과 동기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새 언약의 신자들은 더 큰 의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신약 성도들의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고, 그래서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로서 이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보다 더욱 '합리적인 예배'로 간주된다(롬12:1). 그러므로 시민법과 의식법이 배타적으로 신정에 해당되며, 더 이상의 구속력이 없는 대신,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도덕법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양심에 각인되어 있다.

 

셋째, 새 언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도덕법의 세 가지 용도를 구별해야 한다.

 

때로 성경에서 율법은 범죄에 대한 억제로서 간주된다..... 

 

도덕법은 적어도 불신자에게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도덕법으로 인해 악을 행하는 자들은 국가의 형벌이라는 빛 아래서 두 번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종종 율법의 정치적(civil) 용도라 불린다.

 

도덕법의 두 번째 용도는 죄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종 교육적(pedagogical) 용도라 불린다. 비록 율법이 우리 죄 때문에 나쁜 소식과 죽음을 초래한다 할찌라도 바울이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 임이니라.....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7~13)라고 말한 것은 도덕법의 교육적 용도를 의미한다.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는 종종 규범적(normative) 용도라 불리는데 이는 도덕법이 신자의 삶을 위한 규범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도덕법의 규범적 용도는 오직 신자만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율법의 저주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저주할 수 없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다 지킨자로 보며, 또한 율법은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 말, 행동 속에서 율법을 어기기는 하지만 율법은 우리에게 빛이 된다(롬7:21~24).

 

율법과 사랑은 적대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처럼 율법과 사랑은 고대 근동 조약문서와 성경 모두에서 함께 간다. 우리 주님은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고,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 말했다. 재미있게도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구절 바로 앞에서 다시 반복한다(갈5:14). 그러므로 우리는 새 언약이 율법의 의무를 사랑의 의무로 대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언제나 사랑의 의무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생 얻는 조건으로서 율법을 완성해야 할 개인적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길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로부터 우리는 율법의 이러한 구분이 조직신학에서 연역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본래적으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만이 아니라 루터와 루터파도 신자의 삶을 위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중요한 의미를 포함해서 율법의 3가지 용도를 모두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새 언약에서의 조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복음 안에(좁은 의미 즉 신약성경) 율법(넓은 의미 즉 계명들)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는 분명한 조건들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이며 불변하며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맹세인 약속의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적 순종-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에서 발췌, 241~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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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새 언약적 순종 (언약과 조건) / 마이클 호튼

  

언약과 조건

 구속 언약 - 삼위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조약 - 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다윗, 새 언약의 약속은 본질에 있어 불변하며, 깨어질 수 없으며,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관계없는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영원한 언약에 있어 우리는 수혜자지 파트너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하여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며 자신의 방법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언약은 시행상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은혜 언약은 신자와 신자의 후손들과 맺은 언약이다. 은혜 언약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선택받은 것은 아니다. 즉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은 천상에 있는 이스라엘 보다 범위가 더 넓다. 광야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사용해서 동일한 은혜 언약 아래 있는 신약 시대의 상속자들에게 경고했다(히4:1~11).

 

신약 성경은 우리 앞에 최종 구원을 위한 많은 조건을 열거한다. 처음의 회개와 믿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는 견인은 '이것 없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거룩함의 부분들이다(히12:14). 이러한 거룩함은 전달되는 의라기보다는 전가되는 의인 우리의 칭의 만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되는 우리의 성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신앙고백의 표지에 의해 양과 염소가 분리될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24장). 그러나 양들은 자신들이 배고픈 자를 먹이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고, 가난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주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염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했노라고 주장했다. 거룩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되는데, 보통 우리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은 우리 영화와 분리될 수 없는 조건이다. 즉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순종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있다(히6:4~5).

 

이것은 우리가 행위 언약과 구분하고자 했던 무조건적인 약속의 좋은 소식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특히 성경이 있는 이런 중요한 경고를 받아들이는 데 대해 우리 시대에 아주 많은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조심스럽게 차이점을 다시 살피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칭의를 성화와 영화와 구별해야 한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칭의와 구원을 아무런 구별 없이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외에 다른 조건 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구원은 성경에서 넓게 이해되며 타락한 피조물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을 포함한다.

 

우리가 본 것처럼 칭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선행되는 다른 조건들이 있다. 회심한 어떤 사람의 경험을 상기해 보자. 어떤 사람은 그에게 성경을 주었고, 다른 사람은 그를 교회에 데려갔으며,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그를 회심시키셨다. 물론 세부적인 것은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조건들이며, 그러한 것 없이(인간적으로 말해서) 구세주를 아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율법을 들어야 하고, 율법에 의해 죄를 깨달아야 하며, 회개하여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 마음은 변화되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한때 거부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의 하나도 칭의의 근거나 수단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신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그들에 의해서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 칭의의 수단이라는 것이 아니다. 조건은 수단이 아니다.

 

의롭게 된 자들은 거룩하게 되며, 어느 날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엡2)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자가 아닌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된다(롬6:4~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적인 눈멂과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화되고 있는 사람만이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런 내적 거룩을 칭의와 구별해야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의롭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새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것며,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율법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과 약속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을 구별해야 한다. 율법은 명령할 수 있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다(갈3:21). 율법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 자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율법 언약에서 조건을 말하는 것은 '이것을 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라는 공식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은 언약조항의 성취에 근거해서 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 언약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분명 율법의 요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근거는 변한다.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은 우리 돌같은 마음을 살같은 마음으로 바꾸시며 그 마음에 자신의 율법을 기록하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워 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해 준 결과다. 약속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것을 또한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 죄 용서를 약속하시고 난 다음 우리 자신의 돌같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 반역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제공하시는 구원은 총체적인 것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칭의 만이 아니라 중생, 성화 그리고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이 이 무조건적인 약속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은혜 언약은 기초와 관련해서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구속 언약에 의존한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고집 센 후손들 그리고 다윗과 그의 악명 높은 아들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 계획을 그들을 통해 성취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계획은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각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양 무리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끝까지 보호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와 같은 조건이 우리에게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고 -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면 어쨋든 우리가 만족시켜야 할 조건 -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언약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 끝까지 보호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밀 가운데 섞여 있는 가라지나, 돌짝 밭에 떨어지거나 가시덤불에 의해 질식한 씨다. 어떤 가지들은 열매 맺지 못하고 잘릴 것이다. 이것은 사실 떨어져 나간 사람들, 자신의 장자권을 다른 하찮은 것에 팔아넘긴 에서같은 사람들에게만 위협이 된다. 외적으로는 언약 공동체 안에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종말에 최후의 추방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매주 함께 모여 언약 갱신 의식에 참여하는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6장에서 무서운 경고 다음에 이런 위로의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6:9).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은 언약 공동체의 회원이며, 언약 공동체 내에 있었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심지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놀라운 유익을 얻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적 연대감이 그 자체로 "구원에 속한 것"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복음 설교로 우리 마음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며 성례로 믿음을 굳게해 주신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성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말씀과 성례를 통해 자신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경고들이 그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결코 꺼져 가는 촛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과 순종- 언약과 조건)에서 발췌, 251~2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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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률 폐기론 / 마이클 호튼

 

 

율법주의 내지 완전주의 반대편 극단에는 도덕률 폐기론이 있다.

문자적으로 '반(反) 율법주의'를 뜻하는 이 관점에서는 율법이 - 율법의 형벌과 준엄함뿐만 아니라 율법의 규범적 지위도 - 신자에게는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율법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앞에서 제시된 많은 논증들이 여기서도 타당하다. 우리는 신명기부터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에 이르기까지 삶의 규범으로서의 도덕법에 대한 호소의 완벽한 일관성을 살펴보았다. 차이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 사이에 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율법으로 인해 정죄를 받는다. 사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킬 의무를 더 명시적으로 지운다(갈5:3).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의미에서의 (삶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법 없는(아노모스) 상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다(13절). 바울은 바로 14절에서 율법의 요약이 사랑임을 상기시키며 계속해서 사랑의 표출을 성령의 열매로 추론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도덕법을 루터파 및 개혁파 신학자들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라고 부르는 것 -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지도하는 용도 - 에 따라 적용한다.

 

여러가지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에 대한 똑같은 오해를 공유한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처럼  삶을 위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규정들이다. 하나님의 법은 언약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기능한다. 율법 언약에서의 원리는 "이것을 하면 살 것이고 그것을 어기면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복과 저주의 기초는 언약의 조건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다. 그러나 은혜 언약에서 기초는 우리의 대표자이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언약의 저주를 짊어지심으로써 개인적으로 율법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는 이 교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의 가장 충만한 문자와 영에 따라 의롭다고 선언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율법은 믿음으로 가득한 감사의 길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한다.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 심지어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정죄하는 기능이라고 가정하는 듯하다. 둘 다 신자가 하나님의 법과 맺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도덕률 폐기론은 율법주의처럼 전형적으로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 '사랑의 법' 또는 성경에 결코 언급되지 않은 다양한 규칙들 같은) 율법에 대한 몇몇 개념을 재도입하며 - 마치 이런 명령들이 어떤 식으로든 십계명보다는 덜 까다로운 듯이 - 그 개념을 복음과 쉽사리 혼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을 '외적인 준수'와 대비되는 내적인 영에 대한 거의 영지주의적인 집착으로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율법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구약에서 주어지고 예수님이 가장 심오하게 추론하신 율법에 대한 해석이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와 태도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성화를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고', '하나님 안에 거하며' 자아의 모든 의식을 폐하라는 권면으로 표현하면서도 종종 성화란 결국 인간의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의 규범조차 도닥법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권면은 일종의 법이다.

 

율법은 칭의에 대해서나 성화에 대해서나 여전히 측정 기준이다. 율법을 통해 죄인은 정죄받고 심지어 신자의 가장 훌륭한 행위조차 부족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다. 율법의 첫 번째 용도는 우리를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로 몰고 가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반면, 세 번? 용도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생략하는 이들이 종종 부과한 성화를 위한 부담스러운 규칙들, 기술들, 공식들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단순히 우리의 양심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신자들은 소중히 여긴다. 신자들은 생명을 얻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받은 생명을 삶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 율법을 지키기를 갈망한다. 율법은 칭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율법은 단지 우리의 성화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을 계시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당황하지 않는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한 사랑, 오래 참음, 자비 절제 온유 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그와 같은 요약에 잘 들어맞는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의 표현으로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의 심각한 요구 조건과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죄와의 싸움에 대한 비현실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복음은 설령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라"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으로 변형되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일을 수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실제 관행에 있어서 이 권면은 가장 가혹한 율법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자신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쳤다는 것을 실제로 알겠는가? 완전주의의 율법주의적인 흐름과 도덕률 폐기론적인 흐름은 그와 같은 신비적인 정적주의에서 수렴된다. 도덕률 폐기론은 결코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고 다른 경로를 통해 율법주의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성화를 다루면서 의기양양한 직설법,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베푸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되살리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이것은 자신을 완전히 넘겨주었거나 하나님이 자기 방식대로 하시도록 내버려 둔 특별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두 번째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복이다. 우리가 세례로 말미암아 연합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위기의 경험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린다(롬6:13). 우리가 이 기준에 따른 행동에 얼마나 많이 못 미치느냐와 관계없이 우리가 처한 직설법적인 상황에 관한 사실은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죄가 그 지배권을 상실한 것은 바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죄와의 지속적인 싸움은 이 사실을 취소시키지 못한다. 도리어 그런 싸움은 우리의 거듭남과 성화의 실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된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지을 길이 없다. 그 둘은 사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과 은혜와의 갈등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과의 협력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 사랑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판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베르카우어는 종교개혁의 관점이 성화나 거룩한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의 관점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되돌려놓기 때문에 성화와 관련이 아주 많다. 믿음은 아무런 주관적인 영향이 없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과 더불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시킨다.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언제나 순수한 선물로서 그 기초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언약은 듣고 응답하며 수동적으로 받고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 드리며 이웃을 섬기는 진정으로 쌍방적인 관계를 낳는다. 칭의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반면, 성화에 있어서 그 둘은 씨앗과 꽃처럼 서로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칭의는 신앙생활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성화와 선행의 끊임없는 원천이다. 루터는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믿으며 너의 믿음은 내가 너에게 너를 의롭게 하는 자요 구주로 값없이 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는 의롭게 되어라.'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 때문에 당신을 받아 주시거나 당신을 의인으로 간주하신다." 우리가 유익한 권면은 말할 것도 없고 (거듭남, 죄의 폭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과 우리의 일평생 동안 우리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 우리 몸의 부활과 죄의 현존으로부터의 자유 등과 관련한) 어떤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하더라도 루터가 여기서 요약하는 소식만이 의롭다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이는 믿음 안에 있는 어떤 미덕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각 행위의 혼합된 동기로 인한 번민 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유롭게 선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 때문에 우리의 선행조차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몫이나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닌 우리 이웃의 몫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율법의 이런 가혹한 요구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의 완전한 엄격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부드럽게 그들을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은 기분 좋게 매우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요약하자면, 율법의 멍에에 메인 이들은 매일 자기 주인에게 특정한 임무를 할당받은 종들과 같다. 이 종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임무의 정확한 분량을 성취하지 못하면 주인 앞에 감히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더 관대하고 공평하게 대접받으므로 자신이 한 일이 불완전하고 반밖에 못했고 심지어 흠이 있더라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주저 없이 내어놓고 비록 자신이 아버지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루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순종과 자발적인 마음이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런 자녀가 되어 우리의 섬김이 제아무리 작고 무례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우리의 가장 자비로운 아버지께 인정받을 것임을 굳게 신뢰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상당한 정도로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에임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칭의 때문에 선행의 불결함은 그 선행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보상받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와 같은 관점은 올바르게 행위의 근거를 믿음에 둘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동기나 그 호의를 상실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떠나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한다. 그런 관점은 우리의 사랑과 섬김은 하나님과 우리 인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는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않지만, 아무리 무기력하게 열성 없이 불완전하게 행해졌더라도,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돌보시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세상을 포용하는 행동주의를 위해 우리를 해방시킨다.

 

복음주의적인 신앙고백서(1560년)는 성화와 윤리가 없는 전가로서의 구원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기는커녕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성화의 영이 없는 이들의 마음속에 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가 참된 믿음으로 받는 주 예수의 영은 누군가의 마음을 차지하자마자 곧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기 시작하고 이전에 미워했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육체와 성령 사이에 있는 끊임없는 싸움이 찾아온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의롭다 하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종교개혁의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렇게 되풀이한다.

 

같은 사도가 믿음을 효력 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부른다(갈5:6). 믿음은 또한 양심을 고요하게 하고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섬김을 베풀게 하고 역경 중에 우리의 인내를 강하게 하며 참된 고백을 만들어 내고 한마디로 온갖 종류의 좋은 열매와 선행을 낳는다.

 

그런 선행은 개인적인 이득이나 공로에 대한 어떤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라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보완하는 인간의 프로젝트도 아니고 자유의지와 주입된 은혜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다루는 과정도 아니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말씀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거듭나 자기 안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창조된 사람들은 그들 안에 거하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을 통해 실제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더욱 거룩해진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이중적 원천(신인협력설) 대신 칭의와 내적 갱신이라는 이중적 효과와 관련이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기 자신의 의라는 개념은 죄의 정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즉 단순히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지 않는 거룩함이나 의의 모든 흔적에 대해 우리는 바울 못지않게 강경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과 똑같이 우리도 만일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 창조, 허구가 아닌 실제 초자연적인 거듭남, 영혼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中에서 B. 도덕률 폐기론)에서 발췌, 674~6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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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 마이클 호튼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복음을 죄 용서로 축소시킬 때, 우리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들의 '높이와 깊이'를 잃어 버린다. 우리는 한편으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요구와 다른 한편 성화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자유를 주는 좋은 소식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칭의와 죄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행동과 관계있다고 가정한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독교인의 삶은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복을 받기도 하고, 받지 못하기도 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가 율법의 제3용도(기독교인의 행동을 위한 가이드로서의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점에, 이 문제는 쉽게 반율법주의(우리는 율법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는 신념)와 율법주의(율법을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신념)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의 삶이 전적으로 어떤 규범도 없이 살아야만 한다고 실제로 믿지는 않는다. 사실 내가 십계명은 신약 시대 신자에게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가르치는 그룹에서 양육받았지만, 일련의 비성경적인 문화적 금기사항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말았다. 우리는 식사시간에 포도주를 마시는 기독교인은 아마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범들이 사실 십계명이 도덕법을 받아들이는 교회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율법적으로' 기능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모두 기독교인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이 질문은 이런 규범이 우리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 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된다. 나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아내가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선물을 아내를 위해 사는 버릇을 충분히 고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종종 아내가 가져야 한다고 또는 아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내에게 사 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받지 못했을 때, 내 반응은 종종 이렇게 될 것이다. "어때, 만일 당신이 크리스마스나 당신 생일 때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게 분명히 말했다면, 나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결코 자발적이면서 창조적이지는 못했을 거야." 물론 어떤 정해진 날에 자발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표현할 때, 아내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시다.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하고자하는 욕구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고집스럽게 자기마음대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우리의 자부심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아내는 나처럼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나타내시는 율법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하는 본성에 뿌리박은 뜻에서 나온다.

 

만일 이런 논의가 사실이라면 -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불변하는 성품의 표현이며, 신약은 도덕적인 율법을 철회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는 것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법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해야 하는 의무보다 우리의 의무가 더 작지 않다. 이 도덕법은 모세 신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의식법과 시민법과 쉽게 구별될 수 있으며, 여전히 신구약 성도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심지어 인류가 창조될 때 양심에 도덕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도덕법은 모든 인류에게도 구속력이 있다.

 

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변호해 왔는데, 이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율법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요컨대, 때로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과 복음을 조심스럽게 구별하지만 기독교인의 삶을 다룰 때는 이 둘을 혼동한다. 마치 이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 가는 여행길에 율법으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칭의에 있어서처럼 성화에 있어서도 불가능하다. 율법의 여러 가지 용도에 있어 기본적인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즉 율법은 명령한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율법(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되는)은 결코 이 이상을 하지 않는다. 십계명이거나 바울의 성령의 열매에 대한 가르침이거나 간에 이러한 도덕적 지침은 인도하고,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려 줄 수 있지만 결코 우리 마음을 움직이거나 우리 행동에 동기부여를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왜 순종이 열매인지를 보여 준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죄 용서만이 아니라 중생과 새로운 순종으로 시작된 완전한 회복임을 상기해 보라.

 

이러한 마음을 다한 신뢰와 순종이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찰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나머지 피조물을 신실하게 다스리도록 하셨다. 우리는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게,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악한 것이 아니라 의롭게,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창조되었다. 타락은 파괴와 분리와 분열을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본성이나 자신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변경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다시 온전한 파트너로서 인간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빛 아래서 우리는 시편 40편에 나오는 시인의 입 속에 담겨진 새 노래를 읽을 수 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6~8).

 

용서는 좋은 것이며, 순종은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반복된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10장에 오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10).

 

논증은 아주 평이하다. 요점은 옛 언약 예배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는 새 언약에 약속된 유일한 언약적 복이 아니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저자는 죄 용서뿐만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대한 예레미야 31장을 인용하면서 다시 되풀이 한다(히10:15~17).

 

핵심에는 우리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단번에 용서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이 최종적으로 우리의 언약적 대표에 의해 단번에 드려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아들 안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향기나는 제물이 되도록 하셨다는 선언이 있다. 말하자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언약 범한 자를 위한 동물 속죄 제물이 아니라 언약에 순종하는 인간 자신이 감사 제물이다. 율법은 어긴 들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모든 죄에 대한 참된 용서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기뻐하시는 감사의 순종적인 을 주지는 못한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죄일에 예루살렘 여행을 위해 가족들의 짐을 꾸릴 때마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데리고 가는 울고 있는 양은 계속적으로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 그리고 자신의 뒤에 던져 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묻어 버리고, 우리를 살려 새 생명을 주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한 가족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용서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히7:19). 복음은 궁극적인 용서와 완전함 두 가지 모두를 준다. 즉 지금 용서와 영광 중에 우리의 것이 될 완전함의 시작을 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언에는 용서를 넘는 두 종류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죽음만이 아니라 삶, 십자가에서 기꺼이 처형당하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적 뜻에 날마다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율법이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그 순종을 우리 안에서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이 "첫째 것을 폐하심(옛 언약)"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새 언약)"이다. 더 이상 우는 양과 염소가 없으며, 한 몸 곧 우리 주님의 몸이 새 언약 제사 즉 순종과 죽음의 제사가 준비된다.

 

확실히, 우리 순종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내적인 쇄신과 갱신은 언제나 진행 중이며,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을 때의 마음의 거룩과 삶에는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이러한 새 언약의 복은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든 것 안에 있는 모순은 순종에 근거해 생명을 약속한 바로 그 율법이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롬7:10). 이것은 완전히 직관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그리고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종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더 착한 사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에 기록된 율법인 행위 언약을 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은 우리 밖에서 오는 소식이며, 메신저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연스럽지 않고 완전히 낯설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종교는 속박이다. 그러나 복음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 행한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하나님 자신은 율법 자체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하셨다. 율법은 명령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새로 회심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숙한 신자를 위한 좋은 소식이다. 존 머리가 말한 것처럼, "율법은 칭의에서 한 것보다 성화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 처음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세우는 것보다 우리에게 성화를 위한 힘을 주는 것이 율법의 직무는 아니다(심지어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생명과 능력의 유일한 원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와 동일하다. 즉 율법(그리고 우리의 순종)이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았고, 구원받아가고 있으며, 구원받게 될 자로서 율법(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대해 반응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은 심판에서 "무죄 선언"을 해 주는 복음과 함께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면서, 그 동일한 율법은 우리 길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을 계시해 준다.

 

용서는 위대하다. 그러나 순종은 더 위대하다. 속죄제물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감사제물은 하나님이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직설법)(롬12:1~2).

 

그러므로 복음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직설법(즉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좋은 소식-하나님의 자비)이 명령법(즉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로서의 율법)에 동기를 부여한다. 율법 언약에 의해 결정되는 성화를 위해 오직 은혜로 용서와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다. 모순은 그대로 남는다. 즉 율법 언약은 정죄로 인도하는 반면 약속 언약은 율법이 요구는 하지만 결코 줄 수 없는 바로 그 순종으로 인도한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내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비록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언약 공동체에 가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구원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크며,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을 위한 심판은 엄중하다.

 

한 예화가 이 실마리들을 하나로 묶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각종 최신 장비를 가진 신형 돛배를 상상해 보라. 위성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돛배는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맞는 계획을 짤 수 있다. 심지어 여러분이 좌표에서 벗어날 때 경보 신호를 울릴 수도 있다. 이제 여러분이 인상적인 장비를 의지한 채, 바다로 나가 돛을 활짝 펴고 전력 항해를 하다 점점 바람이 줄어들게 되어 완전히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고 해 보자. 그때 돌풍이 갑자기 동쪽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라디오가 경보를 해 준다. 일단의 동료 선원들이 라디오에서 조언을 준다. 그러나 안내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각종 정보들과 동료들의 유익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어떤 바람 없이는 안전한 곳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여러분은 온갖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항구로 움직일 수 없다.

 

기독교인의 삶도 종종 이와 같다.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항구에서 나와 우리 죄가 용서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아는 기쁨으로 흥분된 채 전력으로 항해한다. 우리 구주에 대한 새로운 사랑으로 감사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구주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지정해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가려 한다. 그러나 넓은 바다로 나갔을 때, 영적인 침체를 만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능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영적인 기술의 장식품은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거나, 저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또는 영적 승리를 위한 이 계획을 따르거나 죄를 극복하기 위한 이런 단계들을 따름으로써 배를 다시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안내자들은 흔히 율법(즉 하나님의 지시)도 아니고 복음(즉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동)도 아니다. 단지 동료 선원들의 유익한 조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조언은 복음보다는 더욱 율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사항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언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여러분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느낌을 더 깊게 받게 된다. 완전히 지쳐 여러분은 포기하고 다시는 항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신선한 강력한 바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바람은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다. 여러분이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신실하지 않은 항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세계에 대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듣는 일이다. 이것만이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해서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여러분을 안전하게 항구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전 생애는 항해하는 과정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넓은 바다에 나갔다가, 점점 지치기도 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소중한 약속으로 다시 우리의 항해를 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지점에서도 전력 항해를 하고 있거나 물 속에서 죽은 경우는 없으며, 단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 6~8장에서 발견하는 움직임이다. 승리의 직설법으로 시작해서(6:1~11), 도덕적 명령법을 통해(6:12~14), 다시 직설법으로 갔다가(6:15~7:6), 죄와 싸우면서 완전히 지쳤다가(7:7~24), 다시 승리의 직설법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 돌아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희망으로 가는데, 이런 희망을 위해 지금 우리는 성령을 계약금으로 가지고 있다(8:1~39).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명령보다 인도하는), 율법은 율법이 하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율법이 처음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다가(도덕법의 두 번째 용도),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를 율법으로 인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화된다(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길을 안내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직설법인 선포 없이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절망 아니면 자기 의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많이 우리는 감사함으로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하는 능력을 복음의 덕분으로 돌려야 하고, 그러한 감사가 이루어지는 바른 길을 율법의 덕분으로 돌려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에서 발췌, 257~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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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과 의미' (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 / 마이클 호튼

 

 

구약 성경에 대한 모호성

 

~~'율법'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명령을 가리킨다. '복음'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본문을 가리킨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친히 우리 대신 형벌을 받아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신 사실과 하나님이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성취하신 일들을 가르쳐 준다.(23p)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때부터 모든 신자는 성령에 충만하고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수놓인 마음을 받는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성령의 열매'로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덕성이나 인품의 성과가 아니라 율법을 우리 마음 판에 새기고 우리 속에서 새로운 순종을 일으키도록 일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 - 심지어 가장 변태적이고 문란한 사람까지도 - 은 자기 양심에 기록된 법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지만 신자만이 자기 마음에 기록된 율법을 가진다. 다시 말해, 사람은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할 수 있다. 거듭나기 전에 율법은 정죄하고 저주할 뿐이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삶으로 이끌 뿐이다. 더 이상 율법은 "당신이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맡으신 본분을 다하시지 않을 것이다."는 말로 위협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완전한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맡겨진 본분'까지 친히 이행하셨다. 이제부터 이 무조건적인 약속은 자신의 순종이나 노력으로 약속의 어느 한 부분도 얻을 수 없는 생명을 줄뿐 아니라,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되는 새 심령을 우리에게 준다. 바울 사도가 신자의 삶에서 율법을 없애기는커녕,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고후3:3~4)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고 선포한 사실에 주목하라. 

 

이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법과 대립되는 위치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생명을 주는 성령을 배제한다면 하나님의 명령(하나님의 복음 약속도)은 죽은 것임을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가 오히려 죽은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고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힘쓸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혹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든지 '더 큰 성령 충만'을 받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생명은 온전히 모든 신자에게 속한다. 성령만이 "허물과 죄"(엡2:1)로 죽은 사람을 끄집어 내어 소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되살아난 사람은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긍정적이고 다정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는 아브라함이 그렇듯이 약속의 후사이며,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의무를 갖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19:6)으로 삼으신 일은 이제 신약 성경의 교회에 적용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벧전2:9)로 구성된다.(27~29p) 

 

바리새인은 성경(오늘날 구약 성경)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도덕규범이나 생활지침으로 받아들였다. 구약 성경이(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도덕법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도덕법은 이미 죽음 반대편에 있는 천국이라는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 조건 없이 구속받고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오늘날 구약 성경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접근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을 따분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통해 펼쳐지는 구속의 관점에서 구약 성경의 주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자손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새롭게 환기시킬 것이다. 이삭과 야곱과 다윗과 라합과 여러 선지자와 더불어 우리도 율법과 약속이라는 가보를 이어받는다.(32p)

 

율법에 대한 강조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미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교훈을 즐거워하면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이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 백성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마치 계명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새 생명에 들어가거나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첫 계명을 시작할 필요가 없으며,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모든 일 - 율법을 순종해야 하는 조건의 성취까지 포함시켜 - 에 기초해 자기 백성에게 친히 주장하시는 전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우리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신다.(34p)

 

도덕적 용도

 

율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이 율법에 완전히 순응할 수 없으며, 자신은 그 도덕적 탁월함에 근접할 수 있다는 식으로 율법을 다루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표현에 따라 요구하신 완전한 기준으로 율법을 다루어야 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므로) 단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목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람은 하나님 그분의 의에 도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마음먹지만,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에 자비로운 천국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는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에게 율법은 정죄와 심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다윗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율법은 의의 길로 이끄는 안내자로 다가온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시119:32). 양자 됨의 특권을 아는 자만이 시편 기자와 같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말할 수 있다.(36~37p) 

 

 

마이클 호튼의 '삶의 목적과 의미'(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에서 발췌, 23~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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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 / 마이클 호튼

 율법주의(또는 신율법주의)는 (1) 성경의 명령에 대해 완전하고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거나 (2) 불완전한 순종이나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더 다가가기 쉬운 규칙으로 대체하여 요구 수준을 낮춤으로써 오류를 범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전자에 찬성하면서 특히 대중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함축한다."라고 알려진 칸트 윤리학의 특징이 된 원리를 도입했다. 이 원리는 19세기의 부흥주의자 찰스 피니도 호소했다. 피니는 하나님은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실 수 없기 때문에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보편적이고 완벽하며 연속적인 율법에 대한 순종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법적 내지 법정적인 의미에서의 칭의란 있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살편본 것처럼 이 원리는 자연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본성 전체는 도덕적으로 죄에 속박되어 있다. 바울과 더불어 우리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이단을 배격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반펠라기우스주의와 관련된] 더 흔한 오류는 율법의 요구를 느슨하게 하고 그 결과 은혜에 대한 개념의 수준도 낮추는 것이다. 중세 후기 유명론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부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엄밀한 공의(적정 공로)에 따르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선한 노력을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재량 공로)에 따라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의의 요구 기준을 낮추는 한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행하면 하나님의 재량으로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아우구스부르크 산앙고백서의 변증 부분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오류였다. "그러나 양심이 그 죄와 비참을 올바로 인식할 때 모든 농담과 모든 명랑한 생각은 사라지고 상황은 극도로 무거워진다.....그러나 그와 같은 놀란 양심은 적정 공로로나 재량 공로로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느끼고 그래서 금세 두려움과 절망 속으로 가라 앉는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진영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역사에서도 복음을 새로운 법으로 다루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오류를 지칭하기 위해서 영국 청교도주의에 의해 '신율법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실제로 가톨릭교회 교리문답(1994년)에서는 복음을 '새로운 법'이라고 부른다. "복음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위해 산상 설교를 사용하고 우리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기 위해 성례를 이용한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을 성취한다. 이와 유사하게 재세례파, 소키누스주의자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구약은 수많은 율법들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반면, 신약은 율법을 사랑으로 대체한다는 가정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 온 율법의 요약이다.(마22:36~40) 사실 모세는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레19:18만 언급하면서. 참조, 롬13:9) 그랬던 것처럼 이미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이런 정확한 요약을 제시했다. 사실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을 성령의 열매 대 육체의 열매라는 관점에서 추론하면서 이를 갈라디아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한다(갈5:15~6:10). 계명들은 단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규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의 명령들(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거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라는 것과 같은 권면들)을 구약의 도덕법과 대조할 수 없다. 성경의 모든 명령은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는 일종의 법이다. 반면 복음은 새로운 법, 도덕적 엄격성의 이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와 칭의에 대한 자유로운 선언이다. 더 나아가 율법을(예수님이 판단하신 종교 자도자들의 율법 준수와 같이) 단순한 외적 준수로 전락시키는 일은 실제로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내적인 사랑보다 더 쉽다. 내적인 부패를 위장하는 외적인 거룩함은 얻을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새 마음을 줄 수는 없다.(마23:25~28).....

 

 

율법주의의 한 형태는 완전주의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는 신자들은 죄를 초월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은 요한일서 3장 3~4절, 9절에 호소한다. "주[그리스도]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펠라기우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완전한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다(실은, 도달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반면, 존 웨슬리가 가르친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형태의 완전주의에서는 신자들이 알려진 모든 죄를 초월하여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신자들은 여전히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만 사랑 안에서 완전해졌다. 웨슬리의 견해는 웨슬리가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의 교리를 고수했으면서도 성화는 뒤이은 믿음의 행위, 보통은 위기의 경험을 통해 주어지며 그런 경험 속에서 '완전 성화'를 얻는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로 인해 구별된다. 찰스 피니는 웨슬리주의의 견해를 넘어서서 원죄와 대속적 속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거듭남을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로 보는 이해를 거부했다.

 

바로 이런 전통에서 '고차원적인 삶' 운동이 특별히 케직 사경회를 통해 출현했다. 이 운동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신비주의적 경건을 도입했다. 그 주요 옹호자들에 따르면 신자들은 첫 회심에 뒤이은 두 번째 신앙 행위(보통은 위기의 경험)를 통해 (때때로 '완전한 항복'으로 묘사되는) 더 높은 차원의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 '두 번째 복'에 대한 이 독특한 가르침은 비록 이 경험의 필연적인 증거들에 대해서는 종종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지만 웨슬리주의자(감리교인), 케직 운동 추종자, 오순절파를 하나로 묶는다.

 

칭의와 성화의 분리(그리고 그 결과 의롭다 함 받은 자와 완전히 성화된 자의 분리) 외에도 이런 유형의 완전주의는 일부 신자들(즉, 육신적이라 묘사된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과소 실현 종말론으로, 다른 일부 신자들(즉,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는 과다 실현 종말론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전통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보다 신자의 내적인 삶과 경험과 도덕성에 더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성경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벧전1:16; 마5:48; 약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또다시 "'해야 한다'가 '~할 수 있다'를 내포"하는가 하는 점이다. 거듭난 사람들은 거룩함에 전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몸을 의에 내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일을 완벽하고 일관성 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경은 죄의 지배가 깨어졌다고 가르치며 이를 바탕으로 죄가 우리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롬6:12). 그러나 성경은 또한 신자의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히12:4)에 대해 말하며 우리에게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할 것을 명한다(약5:16).

 

요한일서 3장의 완전주의적인 해석에 대한 가장 분명한 도전은 바로 그 서신에서 나온다. 요한은 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1:8~2:2).

 

더 나아가 요한일서 3장 9절은 두 번째 복을 받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모든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앞선 구절들에서 요한이 특별히 그리스도에 관한 원시적 영지주의의 가르침(즉, 그리스도는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며 실제로 우리의 육신을 취하시지는 않았다는 가현설적인 관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몸 안에서 저질러진 죄들 또한 단지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그 다음 세기의 더 명시적인 영지주의에서 볼 수 있는 도덕률 폐기론적인 관점이 이런 가르침에 수반되었을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 안에서 행하신 일이 단지 겉모습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육체 안에서 저지르는 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요한이 겨냥한 표적이라면, 가장 적절한 해석은 육신적인 방종에 빠진 삶을 사는 이들은 내적으로 거듭나지 않았다 해석이다. 어떤 경우든 1장의 가르침은 "우리가 죄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한 나머지 "우리 죄를 자백"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반박한다.

 

칭의가 성화 속에 합쳐지든 성화에서 분리되든 간에 그 결과는 똑같다. 다시 말해 그 결과는 약속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어떤 진정한 변화 - 즉, 두 시대 사이의 갈등 - 도 일으킬 수 없는 도덕주의다. 베르카우어가 "삶의 갱신의 문제가 도덕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라고 썼을 때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바울은 성화, 윤리의 문제, 교회의 조화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및 부활과 관련 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에서 성화에 대한 논의로 넘어갈 때 "믿음의 영역에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론에서 실제로의 이행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칭의 속에서의 믿음에서 성화의 실제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칭의의 실제와 성화 속에서의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를 성화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그 둘을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화가 "칭의에서 끊어지거나 추출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칭의와 성화의 구별로 인해 각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인지 인간인지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 그와 같은 분명한 분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의롭다 하도록 요청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도록 요청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 될 것이다. 성경이 이런 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고 가르친다(고전1:2, 30, 6:11; 살전5:23. 참조, 행20:32, 26:18). 바빙크가 표현하듯이 "많은 이들이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기 자신이 얻은 거룩함으로 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 최소한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런 오류와 가까운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갈3:1~9).

 

구원의 서정 어느 시점에서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에 있어서도 자연을 초자연적 능력으로 고양시키는, 영혼에 주입된 원리라는 개념을 도입할 여지는 없다. 은혜는 우리가 하등한 자아에 의해 끌어내려지는 연약함에서 회복되어 거룩한 길로 되돌아가도록 우리 안에 주입된 약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은혜는 자연을 해방시켜 진정으로 다시 자연으로 되게 하는 -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모습대로 되게 하는 - 하나님의 은총이며 선물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을 해방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죄에 물든 세상에서 하나의 새로운 차원으로서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추가적 선물'에 대해 언제나 맹렬히 반대해 왔다." 개혁신학은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에 있어서도 '영광의 신학'보다 '십자가의 신학'을 변호하려는 루터파의 관심에 공감한다.

 

갱신은 단순히 칭의 속에서 구원에 대한 첨가물, 부속물이 아니다. 성화의 핵심은 이 칭의를 양식으로 삼는 삶이다.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칭의와 인간의 행위로서의 성화 사이에는 아무런 현저한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화라는 사실은 삶 전체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붙드는 믿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한다. 믿음은 모든 것이 그 주위로 회전하는 중심축이다. 믿음은 그 차제로서는 창조적이지 않지만 우리를 자율적인 자기 성화와 도덕주의에서 보존해 준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따라서 우리는 성화의 지점에서조차 주입된 성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 (개혁파 신앙고백서의 진술들이 특별히 마3:1~9; 요6:63; 롬10:8~17; 약1:18; 벧전1:23을 따라 주장하는 바대로) 믿음을 창조하는 것은 복음이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생겨난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성화 및 다른 모든 복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복음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은 믿음, 생산적인 회개, 사랑, 성령의 열매 등 그 모든 것을 주신다. 내적인 거듭남과 점진적인 갱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성령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새로운 삶의 원천은 결코 주입된 원리가 아니라 한 살아 계신 인격이다.

 

"오직 믿음(sola-fide)은 칭의의 핵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화의 핵심이기도 하다."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웨슬리의 교리에 있어서 "오직 믿음은 출발점이 될 뿐 믿음과 성화의 관계는 단절된다. 웨슬리가 오직 믿음을 고수하면서도 신인협력설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두 번째 복을 위해 일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복인 죄 용서를 양식으로 삼도록" 부르심 받았다.

 

완전주의는 장차 있을 영광을 너무 서둘러 취하는 것이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율법주의로 귀결되는 기대다. '두 번째 복'은 그 연결고리를 구성한다.....베드로는 놀라운 어획량에 경악하여 자기 스승의 선하심에 직면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스승의 광채에 휩싸인 베드로는 단지 머리만 조아릴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말들이 밤공기를 가를 참이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이 말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충성심과 사랑으로 감싸려 했다. 여기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영광에 잠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이 말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잡힌 물고기를 두고 한 말이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속하는 말이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실질적인 질문은 "칭의가 신비적 연합으로 전달되는 모든 복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한가?라는 질문이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우리 자신의 것이라면 부분적인 의조차도 부정하는 바로 그 교리문답[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24주일]에서 신자들은 진지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는 점을 언급한다."

 

오직 이신칭의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작이다..... 성화는 단지 칭의의 뒤를 이을 뿐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천국의 열쇠를 논하는 31주일 문답에서는 천국은 "신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들의 모든 죄가 실제로 용서받는다는 것을 신자 각 사람에게 모두" 선포함으로써 열리고 닫힌다고 가르친다. 이 "때마다"라는 말은 믿음과 칭의의 상호 관계가 지닌 계속적인 적절성을 설명해 준다.....십계명을 설교하는 목적도 신자들이 "죄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더 진지하게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15문].....따라서 구원의 길에서 칭의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진로는 결코 없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진정한 성화는 반복해서 말하지만 칭의와 죄사함을 향한 이 지속적인 방향 설정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성화를 하나님의 칭의의 사역에 뒤이은 인간의 사역으로 보는 "이런 관점의 희생자는 하나의 인과적 과정인 성화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며 그는 결국 가톨릭처럼 주입된 은혜와 양적인 성화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칭의에서 비롯되는 성화에 대한 - 따라서 우리의 모든 복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다는 인식에 대한 - 대안은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 가는 과정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동일시하는 도덕주의적인 행동주의다.

 

그러나 신약에서 '제자'는 본받음을 포함하지만 본받음으로 환원되기는 어렵다. 신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본받음조차 그리스도와 고난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은 우리의 고난은 속죄의 고난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복음의 진보에 기여한다(벧전2:21, 24). 베르카우어가 인식하듯이 "따라서 따르는 이들은 어느 것이든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고침 받았다." 이런 도식에서 본받음이란 "속죄에 상응하게, 속죄를 기초로 삼아 사는 것이다.....그리고 그들[양 떼]은 결국 그들을 그리스도와 교제로 이끌 길이 아니라 그들이 끊임없이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때문에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제자도가 본받음을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단 그리스도가 무엇보다도 우리 대신 들으시고 순종하신 분임을 인식한 다음에는 우리도 그리스도와의 법적 연합뿐만 아니라 유기적이고 신비적인 연합 속에서 더 이상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4:4). 영웅을 닮아 가는 숭배자와 형을 닮아 가는 아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결속은 우리의 맏형을 우리 자신의 성화의 선구자로 삼으시는 성령께서 창조하시고 붙드시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더 친밀하다.

조지 린드벡은 우리에게 제자도와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올바른 범주는 속죄나 칭의가 아니라 율법의 세 번째 용도임을 일깨워 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실재를 근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에 부합되게 살아 가려는 도덕주의적인 시도로 전락한다. 그런 신학에서는 "계시가 구원론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아마도 그렇게 말하겠지만 율법이 복음을 흡수한다."고 린드벡은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무엇보다 먼저 본보기가 되시고 그 다음에 구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 반대다." 말하자면 본받음이라는 주제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우리는 다시 율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이들로 판결한 후에 (율법의 제3용도 속에서) 이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고후 9:21) 있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교회 역사 내내 수많은 방식으로" 칭의는 물론 성화에 있어서도 "복음과 율법의 참된 관계가 희미해졌다."는 점을 베르카우어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두 반대되는 경향이 분명히 나타난다. 복음을 새로운 율법으로 만드는 경향과 복음을 율법에서 단절시키는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둘 다 하나님의 은혜와는 반대된다. "어떤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바르트는 율법을 그 내용이 은혜인 복음의 형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율법을 이런 지위로 환원시키는데 반대한다. 그로 인해 율법은 실제로 복음 속에서 용해된다."

 

참된 믿음 속에서 삶의 내적인 측면과 외적인 측면은 조화롭게 계발된다. 율법은 신자를 세상 속으로 - 그의 이웃, 그의 가난한 형제자매(약2:15), 그의 원수, 감옥에 갇힌 그의 형제,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로 - 인도하며 좋든 나쁘든 이 땅의 신들, 결혼, 행정 당국과 접촉하게 한다.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 바울은 반복적인 열정으로 거룩함을 설파하지만 다음과 같은 자신의 명백한 선언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中에서 A. 율법주의)에서 발췌, 665~6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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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 / 마이클 호튼

옛 언약의 율법과 새 언약의 율법의 차이는 주로 종말론적이다. 옛 언약의 신정체제를 지배하는 의식들과 시민법은 단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는 십계명에 일시적으로 부가된 것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시민법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와 그에 뒤이은 쇠퇴는 결코 이 두 돌판의 영원한 타당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는데 이는 율법의 두 번째 돌판의 요약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그리스도]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2:7~8). 이 명령은 그 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도덕적인 뜻이다. 그러나 흔들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 속으로 끌려갔다가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생명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존되지 않는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위협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옛 창조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있는 새 창조에서는 가능하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며 그러므로 "당신 안에서" 참이다. 밤은 지나가고 있고 낮은 이미 밝아 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밝은 대낮이 아니라 새벽녘이다.

칼빈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즉, 신자들을 인도하는 용도)를 "주된 용도"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신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의를 떠난 모든 의에 대한 율법의 정죄를 들을 필요가 있지만 칼빈은 설교자들이 율법을 신자들의 양심을 위협하는 데 이용할 때 이를 설교자들의 직분에 관한 중대한 과오로 간주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것처럼 신자들을 다시 사망의 직분으로서의 율법 아래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관용"을 논하면서 칼빈은 로마서 8장15절에 나오는 "종의 영" 대 "양자의 영"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자를 바울은 종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를 율법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후자를 양자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복음에서부터 나온다. 전자는 이전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주어졌으며 후자는 지금 확신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바울은 진술한다. 바울이 확증하고자 하는 우리 구원의 확실성은 보다시피 상반되는 것들의 그와 같은 대조로부터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그 부사로부터 또다시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바울은 율법에 그 자체의 성질을 할당하며 그로 인해 율법은 복음과 다르다.(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269.)]

그러므로 율법 자체에는 은혜로움이 없다. 율법은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 칼빈은 여러 곳에서 율법의 첫 번째 용도(즉, 죄인들을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절망하도록 몰아가는 기능)를 일차적인 용도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율법은 언제나 고발한다."는 루터의 격언을 되풀이한다.

[율법은 사망만을 낳는다. 율법은 우리의 정죄를 늘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타게 한다.....하나님의 법은 우리 마음에 말하지만 우리 마음을 개혁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욕구, 우리의 기질과 생각이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과 반대된다면 우리는 정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말한 대로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더 비난받을 만하게 만든다....왜냐하면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너는 이 일이나 저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독생자가 너의 구속자임을 믿으라. 그의 죽음과 수난을 너의 불행에 대한 치유책으로 받아들이라. 그의 피 아래 네 자신을 내던지면 그 피가 너의 씻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I. John Hesselink, Calvin's Concept of the Law, p.212.)]

율법은 마치 거울처럼 단지 우리의 더러운 얼굴을 폭로할 수는 있지만 깨끗이 닦을 수는 없다. "바울은 종종 '율법'이라는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자신의 소유인 것을 요구하시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의 소망도 주지 않으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장 작은 명령에 있어서라도 벗어나면 저주를 더하시는 그런 의로운 삶의 규범을 말하고자 한다. 요컨대 "율법의 생명은 인간의 사망이다." "복음의 약속들은 값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반면, 율법의 약속들은 오직 행위의 조건에만 의존한다.

그러므로 신자도 불신자 못지않게 북음이 "교회에서 매일 반복되게" 해야 한다. 성화에 있어서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율법과 복음의 대조를 이해해야 하며 이 구별로부터 우리는 율법이 행위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믿음을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고 추론한다."고 칼빈은 쓰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은 어떻게 율법의 세 번째 용도가 신자들을 위한 율법의 주요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또다시 칼빈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의 새로운 종말론적 상황을 인식한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우선 율법은 정죄의 핵심에 있어서 신자에 대해 사법권이 전혀 없다. "율법은 이제 우리에게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집행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목표'를 가리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율법이 고발하기만 했지만 이제 율법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이제 율법에는 신자들을 권면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신자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섬김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능력이다. 신자는 율법의 위협이 아니라 율법의 지시에 귀를 기울인다. 실제로 워필드는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루터의 믿음과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두려움" 보다 "아버지다운 자비심"을 루터보다 훨씬 더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한 루터파 신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따라서 워필드 자신은 이렇게 결론짖는다. "한마디로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훨씬 강한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심지어 열심조차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를 지킨다는 의식으로 인해 고취되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칼빈이 때때로 루터보다 더 신자의 믿음의 연약함을 강조했고 그 결과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명제도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또한 한 인간을 새롭게 하고 그에게 거듭남을 주는 한편 그가 끊임없이 선을 행하지 않기가 불가능하도록 그를 새로운 삶의 태도와 방식으로 인도하는 매우 강하고 능동적이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바쁜 것이다. 선행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믿음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과 행위의 필연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루터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겠지만 새 피조물의 자발적인 순종에 대해서는 다소 덜 확신했다. 칼빈은 신자의 지속적인 의심과 게으름을 종종 강조하며 이런 상태는 심지어 거듭난 상태에 있는 참된 신자에게도 사실이다. 순종은 믿음에서 흘러나오지만 주님의 명령에 생각과 마음과 몸이 언제나 자동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선행에 필요한 감사를 낳아야 하지만 율법은 신자에게 그의 의무를 상기시킴으로써 신자의 게으름을 방해한다. 우리가 의를 구할 때 의무는 법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율법의 우렛소리가 잦아들면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시고 그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가던 길을 생각나게 하시는 데 율법을 사용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일 이상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오직 복음의 약속만이 우리를 감사의 순종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는 교훈뿐만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은혜의 약속도 붙잡으며 이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들어 준다. 만일 율법이 조르고 위협하는 것만 가지고 두려움을 통해 영혼을 괴롭게 하고 공포를 통해 영혼을 낙심시킨다면 율법보다 덜 사랑스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다윗은 특히 자신이 율법에서 중보자를 깨달았고 그 중보자가 없으면 기쁨이나 감미로움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Calvin, Institutes, 2.7.12.)]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V.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췌, 679~682p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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