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범죄와 육체의 언약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했다 할지라도 죄의 지배와 그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제 2 장 


인간이 불완전함으로 범하는 날마다의 죄와 결점은 성도로서의 최선의 일을 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죄와 결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낮추게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의지하도록 만드는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경건을 연습함으로써 더욱더 육체를 제어하고 완전한 목적을 향하여 나감으로 마지막에 이 육체의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과 함께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제 3 장 


이 죄에 거하는 성도들, 또한 이 세상의 사단의 유혹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이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 끝까지 자비로 지켜주시고 능력으로 보존해 주신다. 



제 4 장


믿는 자들을 은혜 속에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연약한 인간이 거스릴 수는 없으나 회심한 이후에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 항상 거하지는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죄에 빠져 육체의 정욕에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할 때 성도라도 육신적인 이 세상의 사단의 크고 무서운 죄에 빠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실제로 이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베드로와 그 외의 다른 성도들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타락에 빠진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 5 장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히 거스리는 죄를 범함으로써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믿음의 사역을 방해하며 그들의 양심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고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에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그 길에서 돌아서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빛이 그들에게 다시 임하게 된다.



제 6 장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초한 그의 풍성하신 은혜는 비록 성도들이 심각한 죄에 빠져 있을 때라도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잃음으로 의인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고통 가운데 방치해 두거나,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며 전적으로 타락되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하시지도 않으신다. 


 

제 7 장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결코 썩지 않는 마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고,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속에 탄식하도록 함으로 중보자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운 마음과 수고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신다. 


 

제 8 장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에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며 범죄로 인한 멸망에서 우리가 구원된 것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비록 인간은 실수하여 범죄함으로 마음속에 결심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거나 실패하지 않으며 그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도고의 기도 그리고 성도를 보호해 주시는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되는 일이므로 결코 좌절하거나 무효화되는 일이 없다. 



제 9 장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지닌 믿음의 정도에 따라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심과 믿음으로 성도를 보존해 주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이 확신을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의 참 지체가 되며 앞으로도 계속 지체가 된다는 사실과 죄사함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다. 


 

제 10 장


그러나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 주는 것과 어긋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 계시된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이뤄지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기업이 된다고 말하는 성령의 증거로서 되는 것이다(롬 8:16). 또한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 선한 일을 이루도록 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못할 때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제 11 장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육신적인 의심으로 마음의 갈등을 갖게 되며 심한 유혹으로 믿음과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토록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고 다만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전 10:13).



제 12 장


그러나 성도를 인내하도록 하신다는 이 확신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안일함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과 충성심, 참된 경건함과 모든 시험 중에서의 참음,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인내심 그리고 진리를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인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 성도들이 체험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내하게 하신다는 이 확신은,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함을 무시하고 세상적으로 나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정하신 길 안에서 조심스런 마음을 계속 가져서 그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사랑을 남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양심이 고통을 받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제 14 장


복음을 외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같이 우리 속에서 이 은혜가 역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해 주시되 그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며 또한 이 말씀에 의하여 권면하고 책망하며, 그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성례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의 성도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견인의 방식). 


 

제 15 장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에 관한 이 교리와 계시된 말씀 속에서 충분히 나타난 확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자신의 이름의 영광과 성도를 향하신 위로를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를 미워하고 이 세상도 이를 조롱하며,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를 남용하고 이단들도 이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날마다 이 사랑을 갖고 마치 놀라운 보배를 가졌듯이 이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도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만 영원토록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성화란 무엇인가? /제임스 보이스 거룩한나그네길

 

 

 

 

거룩함(성결)은 중요하고 또한 실제적이다.


거룩함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맨 밑바닥에 있다.
평균적인 사람들은 중간쯤에 있다.
선한 사람들은 꼭대기 근처의 상위권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100퍼센트 거룩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성이 ‘성결’에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성결의 본질은 아니다.
성결의 본질은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그분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 무한히 구별된다.
거룩한 하나님 같은 존재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거룩함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다.


빛은 하나이지만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동시에 많은 빛들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거룩함의 네 요소

첫 번째 요소는 ‘위엄’이다.
왕좌에 앉아 있는 왕처럼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시다.
‘영광’이라는 말은 거룩함의 바로 ‘위엄’의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분은 위대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분은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죄인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사용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 

두 번째 요소는 그분의 ‘의지’이다.
그분은 추상적 개념이나 수학적 공식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의지를 갖고 계신데, 그 의지에 따라 일들을 성취하신다.

무엇보다 그분은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고, 하나님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신다

세 번째 요소는 ‘진노’이다.
그분의 진노는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보이시는 정당한 반응이다.
 

네 번째 요소는 ‘의’(義)이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이 실현될 때 그분의 의가 이루어진다.
그분은 이 세상이 그분의 도덕적 성품에 따라서 살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도덕적 의(義)의 훌륭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네 요소들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말씀은 “내가 도덕적으로 의로운 만큼
너희도 도덕적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거룩하게 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그분이 거룩하시듯이 우리도 거룩해야 하고, 그분이 ‘구별되시듯이’ 우리도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聖化)이다. 

‘성인’(saint)이나 ‘거룩하게 하다’(sanctify)라는 영어 단어들은 로망스어(라틴어에서 유래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거룩한’을 뜻하는 ‘홀리’(holy)라는 영어 단어는 고대 게르만어(독일어, 영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 등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어원적 배경이 어떻든 간에 이 단어들에 담긴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성화’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가지고 다녔던 성막을 모세가 하나님께 바칠 때 그는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했다”(민 7:1).
다시 말해 그는 그것들을 거룩하게 했다.

그가 단(壇)의 돌이나 금속의 성질을 신비롭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것들이 거룩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구별했을 뿐이다

 

 

구별되는 세 단계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구별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처럼 구별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구별되는 데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의식하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남’이 없이는 누구도 구별될 수 없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 단계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마 3:8),
‘죄에서 돌이켜서 믿음을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을 떠서 그분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처음으로 죄를 회개할 수 있다.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고, 결국 믿음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향하게 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우리를 구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그분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결(거룩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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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대적기도가 성경적일까?
< 대적기도, 선포기도는 성경적인가 ? >


많은 크리스천들이 “대적 기도” "선포기도" 라는 용어를 자주쓴다.

적, 그러니까 어떤한 세력이나 힘 따위가 서로 마주 대하여 싸운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 사탄, 마귀나 귀신, 악한 영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모두 개인의 구원에 관련된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내 마음가운데 들어오는 불신앙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지키는 상태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즉 나의 마음을 하나님 외에것에 사로잡히게하는 모든 것들에서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지켜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하여 마치 나를 미혹하거나 공격하는 사탄의 나의 몸 외부에서 가만히 있는 나를 찾아와 ...괴롭히는 것처럼 여겨서 외적으로 물리치고 쫒아내야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이것은 큰 오해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외부적인 요소라고하면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죄" 나 "악" 이 존재하지 않는 순결한 상태라는 말이되기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본질상 죄인이다.
죄를 주관하는 것은 사탄이다. 그렇다면 .. 내 안에 있는 죄를 주관하는 사탄은 무엇이며 외부에 거하는 사탄은 또다른 사탄인가?.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성경이 말하는 영적싸움은 육신에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는 것으로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에 있다. 즉 영적전쟁은 개인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싸움을하는 것을 외적인 요소로 보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즉 "악" 인데 이것에대해 오해를하는 부분이있다.
그것은 세상이 악하기때문에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며 실제로의 삶에서 세상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스스로를 계속적으로 세상사람들과 격리시키는 노력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을 그렇게 증거하지 않는다.
성경은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태가 세상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거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사는 삶이라고 증거하고있다. 그리고 우리 믿는자들이 오히려 세상으로 나가 그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 뜻은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세상에 거하는 것이고, 믿으면 세상에 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세상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나의 마음의 상태가 바로 죄악된 세상이란 뜻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대적해야하는 것은 외부에서 새?처럼 날라오듯이, 혹은 공중에 떠다니는 사탄이 내게로 날라오거나 교회 빌딩으로 다가와서 외적인 공격을 하기때문에 그것을 외적으로 대적을 하며 전쟁을 치루듯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사탄이 외부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것을 대적하는 기도를 승리로 이끌고나면 그 순간은 나의 죄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니 엄청난 오해인것이다.

“기도” 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요청”을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은 대적기도와 선포기도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는것을 알수있다.

영적싸움이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을 지켜내는 영적싸움 그들이 말하는 대적이란 의미다. 그러니까 나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안에 거하게해달라는 기도가 바로 마귀와 대적하는 기도인것이다.

즉 혈과 육의 육체적인 싸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뜻을 오해하기때문에 질병에 걸리거나 가난하게되면 사탄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여기게 되어 그러한 사람을 영적으로 이상하게 여기는 시각을 갖게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귀신을 쫓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에서의 영적싸움 특히 대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성화의 과정을 뜻한다는 것이다.

만약 귀신을 쫓음으로서 우리가 가난으로부터 부를 찾게 되고,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며, 육체적인 불행과 사고로부터 축복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부자가 되어야하며 모두 병에 걸리지 않는 그야말로 수퍼맨? 이 되어야하는 결론에 도달하게되는 것이다.

더더욱 중요한것은 성경에서 귀신을 쫓는 것을 영적싸움이라고 말하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탄과 마귀, 귀신의 미혹에 대적하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기도로 요청할 수 있으며, 우리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을 대적하는 기도나 무엇을 선포하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어떠한 신비적 효력이 나타난다는 성경적 근거도 없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기도라고 정의하지도 않는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삶에서 기다리는 과정이고 그러한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요 신앙생활의 여정인것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3-6)

위에 말씀처럼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 뜻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공격하는 사탄을 대적하여 싸움으로 병이 낫고 그 싸움에서 실패하면 병이 낫지 않고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오직 우리가 병이 낫는 것도, 병이들어 사는 것,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도를 오인하여. 자신이 열심으로 혹은 영적으로 민감하여 사탄을 물리치는 기도를할때 주변의 환경이 달라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어떤 사람의 노력이 하늘에 닿았다고 하여 그분의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땅에 그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적기도를하여 현재 일어난 상황을 바꾸려고하는 노력은 마치 벽에 그림이 걸려있는데 내자신이 그 그림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그 그림을 다른자리에 다시 걸어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위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탄, 마귀나 악한 영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어떤한 능력도 우리 스스로 갖을 수 없으며 그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함”으로서 대적할 수 있다고 말한다.(엡 6:10-13)

즉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그 말씀의 공로를 힙입어 우리를 불신앙으로 이끄는 마음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성경에서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이원론적인 대결구도의 전쟁을 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전신갑주를 입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고후10:5-6),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성결한 마음을 갖는 것(약4:7-8), 혹은 믿음을 지키는 것(벧전5:9)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힘입어,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화적인 과정이 곧 영적인 싸움이며 그것을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있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성령안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죄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라 하여 우리가 그것을 죄로여겨 멀리하여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영혼들임을 알고 우리가 더더욱 찾아가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며, 세상이 악하다하여 밖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지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본분인 것이다.

나 외에 세상, 그러니까 내가 살고있는 지금 이 동네, 나라, 지역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세상이 있는 것이고 그 세상은 믿음안에 거할때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만 믿음안에 거하지 않을때에는 그 마음이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내안에 끊임없이 자라나는 불신앙을 대적하여 오직 그 불신앙을 싸워이길 수 있는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며 말씀의 공로에 힘입어 믿음가운데 거해야하는 것이다

 

 

Jean Cummings 님의 글/출처: 개혁주의마을
 


성도의 견인은 우리의 순종과 위로와 관련되어 있다/ 존 오웬


성경이 성도의 견인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은 우리의 순종과 위로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위로보다는 순종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는 순종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계시된 모든 진리를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은총의 계시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디도서 1:1에서 바울은 우리를 경건함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지식에 대하여 말한다. 경건에 따른 말씀 곧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한다(살전4:3-5). 예수님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모든 복음 진리는 고후 3:18이 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런 변화가 삶 속에 없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없다. 바울은 인간이 뭐라고 주장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딛2:11-12) 살게 한다고 밝혔다.

 

어떤 진리는 다른 진리들보다 우리를 더 깊은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다. 고후 5:14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했다. 다른 진리들도 우리를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강권한다.

 

성경은 마음의 거룩함을 가져다주는 믿음, 사랑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이르게 하는 교리에 큰 중점을 둔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기보다는 경건에 이르게 하는 성경의 진리들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인간의 견해는 쉽게 달라지므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40:8)라고 선포하며 복음에 대한 순종을 인지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연습하기를 권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1-2).

 

- 존 오웬, 『성도의 견인』, pp 12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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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견인(堅忍)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은 예수 믿고 구원얻은 사람이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도의 견인의 진리는 다른 말로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이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란 없고 구원은 신자가 끝까지 지킬 때만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보장에 대해 가르친다.

성도의 견인(堅忍, 끝까지 견딤)을 명백히 가르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고린도전서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구원의 일을 포함함]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런 명백한 구절들뿐 아니라,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이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에독사세)은 부정과거시제로서 미래의 확실한 사건을 나타낸다. 예정된 자들은 남김없이 다 영화롭게 된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둘째,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의 완전성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요한복음 6:39, “. .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 .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셋째, 성령의 인치심이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14,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를 바라며 그를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救贖)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재번역). 에베소서 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인치심’은 보증이다. 이렇게 보증된 자들은 중도에 실패할 수 없다.

천국의 기업을 약속하심도 이와 관련된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베드로전서 1:3-4, “. . .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를 것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의무적이지 않고 원할 만한 것도 아니며 또 가능하지도 않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되며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죄사함에 필수적이라는 사상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능한 것으로 본다. 구원의 확신을 증거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35, 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구원의 확신이 믿음에 본질적 요소인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견해가 나뉘인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 요소라고 본다.137)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믿음의 열매라고 보았다.13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1-4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 . .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를 진실히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행하기를 힘쓰는 자들은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 . . 이 무오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참 신자라도 그것에 참여하기 전에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운 일들과 싸울 수 있지만 . . . . 참 신자들이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소되고 중단될 수 있는데 . . . .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과 순종 가운데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또 자신의 구원에 대한 보장도 확신하는 것은 확실히 복된 일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반론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화에 대한 권면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성화에 대한 권면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권면받는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사람의 자발적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도를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편의 근면과 성실한 노력 없이 우리을 보호하신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성도의 견인의 확신은 도리어 성화를 위해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어떤 이의 표현과 같이 “위험한 시간에 불기둥“과 같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경고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나온다. 마태복음 24:4, 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1:20-22, “. . .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신자들 중에 어떤 이가 배교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구원의 완성을 위해 경고가 수단으로 사용됨을 증명할 뿐이다. 배교에 대한 경고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배교의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실례들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성경에는 배교의 실례들이 없지 않다. 디모데전서 1:19, 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디모데후서 2:17, 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베드로후서 2:1-2,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그러나 배교자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중생하고 구원얻은 자들이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속하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 도적이요 깨끗지 않은 자이었다(요 6:64; 12:6; 13:10, 11). 히브리서 6:4-6과 10:26-29의 말씀들도 배교의 경고 혹은 실례들에 관련된다고 본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이다. 우리가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영화(榮化)

영화(榮化, glorification)란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부활 때에 몸까지도 완전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영화된 몸은 죄성이 없고 범죄하지 않고 범죄할 수도 없는 몸이다.

물론, 신자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한 상태로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은 완전히 거룩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소요리문답 37문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히브리서 12:23, “. .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 단계는 몸의 구속(救贖), 곧 우리의 몸이 영광스런 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23,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도의 부활의 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범죄할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고, 다시 범죄할 수 없고 다시 죽을 수도 없는 몸이다.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고전 15:42-44, 49). 그 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닮은 몸이다.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빌립보서 3:21, “그가 . .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로마서 8:18-23에 증거한 대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탄식하고 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 그 곳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아픈 것도 없다. 그 세계는 현재의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이다(계 21:1-5).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로 말미암아 이미 법적으로 거룩해졌고(고전 1:2; 히 10:10) 도덕적으로 완전해졌다(히 10:14). 그것이 칭의(稱義)이다. 성화란 구원받은 성도에게 법적으로 이루어진 그 거룩과 의를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성도의 성화가 이 땅 위에서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심히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완전한 의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으로 간주된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그의 불완전한 성화의 정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의에 근거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에 내포된 바이다. 로마서 8: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은 성도들의 영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몸에도 관계된다. 장차 성도들이 가질 영광스런 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의 결과이다.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거룩한 삶의 결과를 단순히 ‘영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부르심의 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로마서 6:22-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브라베이온)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주실 상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비교될 수 없다.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은 부족투성이며 불완전하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화롭고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그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이 주신 영화롭고 완전한 구원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세의 상급과 영광의 차등을 암시한다. 성도들이 지상에서 행한 선행과 봉사에 대해 천국에서 차등하게 보상을 받을 것이므로 성도가 내세에 누릴 영광도 차등이 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상급의 차등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으나, 몇 구절을 다시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누가복음 19:16-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39)

헤프는 그의 개혁파 교의학에서 역사상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피스카토(Piscator), 부칸(Bucan), 코체유스(Cocceius) 등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들은 성도들이 내세에 누릴 영광의 차등에 대해 말했다.140) 코체유스는 말하기를, “영광에 있어서 개인들에게 차이가 있을 것이나 질투함이 없을 것이며, 가장 큰 영광 곧 머리의 영광이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이다”라고 했고, 그는 또 “영광에 있어서 또한 등급들이 있을 것인데, 행위들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이 세상에서 맺은 의의 열매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일 것이다”라고 했다.141)

헤르만 훽스마와 박형룡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카이퍼, 바빙크, 훽스마 및 박형룡 자신의 견해들도 위에 헤프가 인용한 사람들의 것과 비슷하다.142) 바빙크는 우리의 합리적 믿음이라는 책에서도 서술하기를,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는 성실성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예와 통치권을 받을 것이다(마 24:14 이하). . . . 따라서, 물론 모두가 동일한 복, 동일한 영생, 하나님과의 동일한 교제를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과 광휘에 있어서 그들 가운데 차이가 있다. 교회들은 그들의 충성과 열심에 비례하여 그들의 주님과 왕으로부터 다른 면류관과 상을 받는다(계 2-3장)”라고 하였다.143)

http://cafe.daum.net/cuigen1964/CuZg/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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