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견인(堅忍)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은 예수 믿고 구원얻은 사람이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도의 견인의 진리는 다른 말로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이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란 없고 구원은 신자가 끝까지 지킬 때만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보장에 대해 가르친다.

성도의 견인(堅忍, 끝까지 견딤)을 명백히 가르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고린도전서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구원의 일을 포함함]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런 명백한 구절들뿐 아니라,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이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에독사세)은 부정과거시제로서 미래의 확실한 사건을 나타낸다. 예정된 자들은 남김없이 다 영화롭게 된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둘째,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의 완전성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요한복음 6:39, “. .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 .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셋째, 성령의 인치심이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14,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를 바라며 그를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救贖)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재번역). 에베소서 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인치심’은 보증이다. 이렇게 보증된 자들은 중도에 실패할 수 없다.

천국의 기업을 약속하심도 이와 관련된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베드로전서 1:3-4, “. . .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를 것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의무적이지 않고 원할 만한 것도 아니며 또 가능하지도 않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되며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죄사함에 필수적이라는 사상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능한 것으로 본다. 구원의 확신을 증거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35, 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구원의 확신이 믿음에 본질적 요소인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견해가 나뉘인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 요소라고 본다.137)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믿음의 열매라고 보았다.13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1-4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 . .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를 진실히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행하기를 힘쓰는 자들은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 . . 이 무오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참 신자라도 그것에 참여하기 전에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운 일들과 싸울 수 있지만 . . . . 참 신자들이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소되고 중단될 수 있는데 . . . .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과 순종 가운데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또 자신의 구원에 대한 보장도 확신하는 것은 확실히 복된 일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반론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화에 대한 권면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성화에 대한 권면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권면받는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사람의 자발적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도를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편의 근면과 성실한 노력 없이 우리을 보호하신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성도의 견인의 확신은 도리어 성화를 위해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어떤 이의 표현과 같이 “위험한 시간에 불기둥“과 같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경고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나온다. 마태복음 24:4, 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1:20-22, “. . .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신자들 중에 어떤 이가 배교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구원의 완성을 위해 경고가 수단으로 사용됨을 증명할 뿐이다. 배교에 대한 경고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배교의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실례들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성경에는 배교의 실례들이 없지 않다. 디모데전서 1:19, 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디모데후서 2:17, 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베드로후서 2:1-2,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그러나 배교자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중생하고 구원얻은 자들이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속하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 도적이요 깨끗지 않은 자이었다(요 6:64; 12:6; 13:10, 11). 히브리서 6:4-6과 10:26-29의 말씀들도 배교의 경고 혹은 실례들에 관련된다고 본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이다. 우리가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영화(榮化)

영화(榮化, glorification)란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부활 때에 몸까지도 완전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영화된 몸은 죄성이 없고 범죄하지 않고 범죄할 수도 없는 몸이다.

물론, 신자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한 상태로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은 완전히 거룩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소요리문답 37문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히브리서 12:23, “. .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 단계는 몸의 구속(救贖), 곧 우리의 몸이 영광스런 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23,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도의 부활의 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범죄할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고, 다시 범죄할 수 없고 다시 죽을 수도 없는 몸이다.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고전 15:42-44, 49). 그 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닮은 몸이다.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빌립보서 3:21, “그가 . .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로마서 8:18-23에 증거한 대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탄식하고 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 그 곳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아픈 것도 없다. 그 세계는 현재의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이다(계 21:1-5).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로 말미암아 이미 법적으로 거룩해졌고(고전 1:2; 히 10:10) 도덕적으로 완전해졌다(히 10:14). 그것이 칭의(稱義)이다. 성화란 구원받은 성도에게 법적으로 이루어진 그 거룩과 의를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성도의 성화가 이 땅 위에서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심히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완전한 의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으로 간주된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그의 불완전한 성화의 정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의에 근거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에 내포된 바이다. 로마서 8: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은 성도들의 영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몸에도 관계된다. 장차 성도들이 가질 영광스런 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의 결과이다.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거룩한 삶의 결과를 단순히 ‘영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부르심의 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로마서 6:22-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브라베이온)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주실 상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비교될 수 없다.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은 부족투성이며 불완전하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화롭고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그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이 주신 영화롭고 완전한 구원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세의 상급과 영광의 차등을 암시한다. 성도들이 지상에서 행한 선행과 봉사에 대해 천국에서 차등하게 보상을 받을 것이므로 성도가 내세에 누릴 영광도 차등이 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상급의 차등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으나, 몇 구절을 다시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누가복음 19:16-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39)

헤프는 그의 개혁파 교의학에서 역사상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피스카토(Piscator), 부칸(Bucan), 코체유스(Cocceius) 등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들은 성도들이 내세에 누릴 영광의 차등에 대해 말했다.140) 코체유스는 말하기를, “영광에 있어서 개인들에게 차이가 있을 것이나 질투함이 없을 것이며, 가장 큰 영광 곧 머리의 영광이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이다”라고 했고, 그는 또 “영광에 있어서 또한 등급들이 있을 것인데, 행위들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이 세상에서 맺은 의의 열매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일 것이다”라고 했다.141)

헤르만 훽스마와 박형룡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카이퍼, 바빙크, 훽스마 및 박형룡 자신의 견해들도 위에 헤프가 인용한 사람들의 것과 비슷하다.142) 바빙크는 우리의 합리적 믿음이라는 책에서도 서술하기를,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는 성실성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예와 통치권을 받을 것이다(마 24:14 이하). . . . 따라서, 물론 모두가 동일한 복, 동일한 영생, 하나님과의 동일한 교제를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과 광휘에 있어서 그들 가운데 차이가 있다. 교회들은 그들의 충성과 열심에 비례하여 그들의 주님과 왕으로부터 다른 면류관과 상을 받는다(계 2-3장)”라고 하였다.143)

http://cafe.daum.net/cuigen1964/CuZg/103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