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란 무엇인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선택을 이해함에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 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그 분의 뜻'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이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미 기록해온 대로(전술한 대로) 복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한 자를 이 복음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택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주권적인 '무조건 선택-Uncoditional election'을 뜻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용어인데요,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선택과 유기(이중 예정)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왜냐 하면 창세 전 선택이나 예정(혹은 작정)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란 큰 틀(framework)이나 구조(structure) 안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운명론적인 선택이나 예정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운명과 관련된 선택이나 예정이 아닌 인류 구원의 큰 경륜 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나의 복음'의 첫 근거는 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의미를 바울은 깨닫게 되었었지요. 

바울은 창세기 서두에 드러나는 창조 전 계획을 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기에 구약 전체를 복음으로 조명하고 신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반듯한 '바울 복음'이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이는 물론 성령의 조명과 성령이 친히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따라 정립한 복음입니다.

둘째로는,
선택이란 용어를 이해함에 있어서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바울의 문맥, 나아가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들', 그 이하의 기록들은 모두 복수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본디 히브리적인 사고체계로 보자면 단수집합명사입니다. 성, 수, 격이 분명한 문자체계인 헬라어로 기록되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 29절 30절과 그 아래 기록들은 한 문장입니다. 한 덩어리로서 개념을 추출해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구마 - 잎 꽃 줄기 뿌리 잔뿌리, 그리고 그 것을 가능케 하는 흙 공기 물 해빛 바람 등 - 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내포와 외연을 바탕으로 각 구절들을 해석해야 큰 틀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28절에서 말하는 '선'이란 본문의 머릿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나 결과를 말합니다.(창세기 1장 참조)

로마서에서 말하는 영화의 상태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최종적인 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모든 것에는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하심, 영화롭게 하심'이 다 포함됩니다. 또한 ' 그 모든 것'에는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나 피조물도 포함됩니다.

자,그렇다면 이제 선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해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창세 전에 온 인류의 구원과 멸망이 이미 정해졌을까요?

네, 맞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구원하기로 택하시고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는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이 것을 바울은 로마서 9장 10장 11장에서 이스라엘의 궁극적 운명(?)을 논함에 있어 그들이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선민사상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한 그 헛된 생각을 박살내는데 있어서 에서와 야곱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연이어 모세와 바로를 예를 들지요. 그 다음에 토기장이의 비유-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가 등장합니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선택과 유기를 설명할 적에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증거구절들이지요. 과연 그래도 괜찮을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조명하셨을까요?

먼저 에서와 야곱을 예로 든 이유는, 창세 전 무조건적 선택을 뒷받침하기 위함이 아니라 야곱의 믿음과 에서의 믿음없음을 논증키 위함입니다. 로마서 9장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말씀이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이어서 12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13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언뜻 보기에는 칼빈주의의 선택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모세와 바로의 예도 그렇게 보이고요.

그리고 토기장이의 비유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호세아의 글과 이사야의 글의 인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논증하고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바 결론은 '믿음과 행위'입니다.(30절-33절 참조)

이 믿음과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위 세 가지 예를 든 것이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살펴봅니다. 미리 아신 자들이란 체험적 앎이 아닌 선험적 앎입니다. 달리 말해서 경험을 통해 어느 누구를 알았다가 아니라 특정 부류를 미리 알았다는 말인데요, 아들을 닮은 자들를 미리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그 씨앗을 닮은(똑같은) 열매를 미리 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추수하기로 미리 작정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맏아들이란 유일무이한 씨(여인의 후손로서의 씨)를 말합니다. 계시의 발전과정에서 보자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아들 혹은 씨)입니다. 이 것을 성경은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라 하지요.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미리 정하셨다(예정하셨다)!' 이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택과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 전 무조건적 선택이란 교리가 주는 신앙적 혼란, 예컨대 '내가 혹 택함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영적 혼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구원얻는 믿음이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는 것이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창세 전 무조건 선택이 우리를 세우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시기를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11327#comment16760204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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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낙엽이야 지는 거지만
인생은 스러질뿐이란다

영원의 변곡점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인생이여

그 청청하던 나뭇잎 가을빛으로
낙하하면 추풍낙엽이어라

겨울은 그대를 반기지도
고마워하지도 않지

쓸어담아 불태울지라도
혼은 연기따라 승천하는 법

나목의 계절이 오기 전에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그대 영원을 준비하라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가을-호수-4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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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목사다-

1.목사는 목사(牧師)여야 한다.

목사란 말 그대로 맡긴 양을 치는(牧-칠 목, 혹은 돌볼 목) '양돌보미'이다. 양치기라 하면 격이 낮은 듯 해서 잘 안 쓰는데, 그러면 목자 혹은 목동이라 부르면 격이 맞을까.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단순히 약자이기 이전에 비천한 직업이 목자였다. 예루살렘에 분뇨 처리하는 직업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었던 직업군이었다. 오히려 주인의 양새끼를 도둑질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와 사회적 편견 속에서 목자들은 밤에 잠도 못 자고 양떼를 지켰다. 혹, 양을 잃거나 이리에 찢기기라도 한다면 물어주어야 했기에 가난한 목자들은 온 힘을 다해 양들을 돌봐야 했던, 실로 고달픈 직업이었다.(세리가 소문난 도둑놈이었 듯이 일설에는 목자도 도둑놈 취급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사(師)자 붙어서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 '놈(者)' 이상이 아니다. 놈이란 단어가 '사람'을 비하해서 부르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는 '들판에 목자처럼' 밤낮 수고해야 하는 직업 아닌 직업이 목사다. 바울이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 명예를 얻고 돈과 인기와 명성을 얻고 싶다면 목사직을 내려놓는 것이 어떨까. 목사란 그런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죽어야 할 이름이 목사'란 사실을 한국교회가 진즉에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진 않았으리라.

주인이 맡긴 양들을 목숨바쳐(죽도록 충성하며) 잘 섬긴 목자들은 비록 이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아픔을 당하고 애통의 눈물을 삼킬지라도 훗날, 주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시며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목사라 불리워도 좋다고 본다.

1.목사는 목사(目四)라야 한다.

다시 말해 눈이 '네 가지'라야 한다는 말이다.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눈이 멀면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 한다.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한다. 눈이 침침해서 김집사인지 이집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면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 목사는 사역하는 동안에 건강해야 한다.

상식의 눈이 있어야 한다.
이성적 판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상식이 풍부해야 바른 이성적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상식이 부족한 목사들이 많은 것같아 안타깝다. 세상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목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상식의 잣대로 판단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목사를 사회가 인정하겠는가.

사례비도 사는 모습도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억대 연봉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근로자 평균임금 정도로 사례비를 정하고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한다.(70-80% 목회자들은 그 것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성경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서야 어찌 말씀의 꼴을 먹일 수 있겠는가. 말씀을 말씀답게 볼 줄 아는 목사가 바르게 목양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지력(知力)을 키워야 한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혜안(智慧의 눈)이 있어야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의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말씀의 눈을 부단히 길러야 한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된다.

주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밝고 상식의 눈이 있고 말씀의 눈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목사로서는 말짱 도루묵이다. 주님의 눈으로 양들을 보게 될 때 양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더하여, 목사는 온 양떼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도양(先導羊)으로서 양무리를 주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자각해야 한다. 또한 마음이 깨끗하여 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 주님의 눈으로 양떼를 돌보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주님의 눈빛만 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목자일 것이다.

1.목사는 목사(木死)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十字架)는 형상화 된 글이다.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의미를 잘 알기에 그대로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에는 나무기둥(스타우로스)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의 사형법을 로마인들이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형장에 세워놓은 나무기둥을 우리는 십자가로 번역해서 쓰고 있다. 가로목을 지고가게 해서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나무기둥에 매단다. 윗 부분에는 죄목을 적은 판대기를 붙인다. 형상이 '열 십자'를 닮았다.

우리 주님이 이 나무기둥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신약을 눈여겨 보면 나무기둥(스타우로스)이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무(크실론)라 하고 있다. '사도행전', '베드로서'.. 등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을 강조코자 함이다.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단순한 나무기둥이 아니라 실로 생명나무이다. 자신의 피와 살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과일이 과육과 과즙으로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무에 달려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나무 과일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주식으로서-밥 혹은 빵)이요, 생명의 음료(생명을 위한 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나무 이전에 선악의 지식나무였다. 모든 사람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그 나무(크실론)에 달리셨다. 자기와 및 자기를 믿는 모든 자가 선악의 지식나무(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요,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 곧 나무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해(향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선악의 지식나무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죽었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는 없다.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죄악된 세상의 중앙, 에굽 혹은 소돔이였다. 세상 중앙에 우뚝 선 그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무를 지신(달리신) 이유요, 의미인 것이다. 그 나무가 생명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역설적 신비다.(바울의 복음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죽은 자 살리는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일반 신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목사는 특별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그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 날마다 죽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이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죽었다는 의미로 목사(木死)라 이름해 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목회하는 자가 누군가. 목사도 안 죽는데 누가 누구보고 죽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죽자! 주님 죽으신 그 나무에 함께 달려죽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러데 어찌하여 산 냄새 풀풀 풍기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날마다 죽자. 그래야 부활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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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빛과 지옥, 그리고...


29년 전, 제가 20대 때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간혹 개인에게나 몇이 있는 자리에서는 간증을 했었지만 공개적으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랑거리도 아니요, 내세울 것도 없는 자의 개인적 체험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말하기가 조심스럽더군요. 제 신앙이력을 간략하게 적어봅니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십 오리 안에는 교회가 없었고 게다가 가족도 아무도 믿지 않아 교회 출석을 못하고 있다가 중학교를 도회지에서 다니면서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었지요.

 

믿음도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군대 가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조차도 잘 몰랐습니다. 군대란 곳이 세례 실적 쌓기라도 하듯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더군요. 그 틈에 저도 세례를 받은 셈이지요. 그러니 교회 출석을 제대로 했겠습니까?

 

제대하고 서울 올라와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하숙을 마침 믿는 가정에서 하게 됨에 따라 그동안 잘 나가지 않던 교회도 다니게 되었습니다만 간증서적들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보구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저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79년 10월20일 경,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쓰러지기 며칠 전이었지요. 새벽기도라고는 고등학교 때 두어 번 나가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안 나가던 제가 새벽기도를 다 나갔습니다.

 

교회 정문이 모서리에 있었는데 양쪽 모서리 기둥보다 키가 더 큰 시커먼 두 놈이 서 있더군요. 2미터도 넘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다가가니까 양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을 가는데 정말 바람처럼 사라지더라고요. 발자국 소리도 안 나고...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분별력이 전혀 없는 저로서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작은 전구 하나만 켜놓고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다들 열심히 개인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도를 했지요.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 남들이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무작정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남들이 들을 새라 목소리도 작게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라고 딱 한 번 기도했는데 그만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빛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비춰오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온통 빛 천지였습니다. 저도 없고 다른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빛만 보였습니다. 빛이 어찌나 밝은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햇빛보다 만 배나 밝다고 해야 하나....거기다가 그지없이 투명했습니다.

 

빛을 보는 순간 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엄위 롭고 강렬하고 두려운지 지금도 필설로는 형언키 어렵습니다. 두려우면서도 경외감이 넘쳐흘렀습니다.(정확히 2초를 넘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장이 멎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이상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더군요. 그 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집 세고 더디 믿는 제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의 심정을 세월이 지나서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저 같은 놈한테는 그런 강렬한 체험이 있어야 했기에 그러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햇수가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중에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몇 마디 나오고는 그쳤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집에서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터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방언받기 위해 별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방언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던 교회였습니다.

 

하숙집 집사님이 방언 받은 걸 축하해 주더군요. 그래서 열심히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개인기도 시간에만....첨에는 유창한 방언이 아니고 마치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하듯이 말을 익혀가는 듯이 서툴게 나오더군요. 한마디가 두마디가 되고 세마디가 되고...그러면서 점차 방언이 익숙하게 나오더라구요.(제법 문장을 이루어 말하듯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또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목구멍에서 향기가 올라왔습니다. 달콤하기 그지없고 무척 향기로웠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목에서 입으로 코로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한 열흘간 간헐적으로 향기가 나더니 그치더군요.

 

그러다 80년 1월 5일경, 밤 12시 30분까지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다가 잠이 쏟아져서 잠시 기도하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꼭 자다가 오늘 밤 죽을 것만 같더군요. '이상하네 아직 30도 안 된 나이이고 아주 건강한 내가 자다가 죽는다는 마음이 왜 자꾸 들까?'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전혀 두렵지가 않더군요. 이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였고 나름대로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회개도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전혀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자다가 죽을 것만 같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잠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말입니다.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자다가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죽으면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그러자 죽는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편이 잠이 들더군요. 아~~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옥이 보이더군요. 첨엔 그것이 지옥인지 몰랐습니다. 맨 앞쪽에 있는 것들이 머리가 있고 몸통과 팔 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은 실로 무시무시했습니다. 온통 시커멓고 붉은 불꽃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내 쪽을 바라보면서 풀쩍풀쩍 뛰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뜨거워 견딜 수 없어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면서 온 사지를 흔들며 풀쩍 풀쩍 뛰고 있더군요. 마치 고고 장에서 많은 사람이 빽빽이 들어차서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서 광란의 춤을 추듯이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 하는 자들의 숫자였습니다. 멀리 뒤쪽을 보니까 마치 사람들의 머리가 바닷가 모래알처럼 보였습니다. 끝이 안 보였습니다. 지평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좌우가 안 보였습니다. 너무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새까맣게 탄 모습으로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며 (소리는 안 들렸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뛰고 있었습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의 수가 수억 수십억도 더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성경을 통해 지옥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지옥이 그런 곳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지옥은, 어둠과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탄 영혼들의 절규하는 모습, 그 세 가지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래알 같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 머리 위로 시뻘건 불꽃이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좀 특이한 것은 지옥에 있는 자들과 저 사이에 빈 공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그 공간을 전혀 침범치 못하고 마치 일렬횡대로 선 것같이 끝없이 좌우로 펼쳐져 보이더군요. 뒤로도 끝이 없이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었고....수많은 영혼들이 한결같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생생히 목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 마침 어떤 젊은 여자(30대 초중반)가 지옥으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저로서는 그 여자가 거기 빠지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팔을 붙들고 얼른 내 뒤로 제쳤습니다.

 

그 뒤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아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 지옥에 갈 것이 아닌가!'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각이 대략 12시 35분 경 이었는데....그 5분 사이에 엄청난 일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깨어나서도 그것이 생시 같았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 충격이 장장 6개월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시도 때도 없이 그 광경이 선명히 눈앞에 펼쳐지곤 했습니다. (표현의 한계로 이 정도로 글로 적지만 저는 체험 당시 쇼크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 후 심장병이 생겨 십 수 년을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건강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기까지 주님은 불같은 시련의 용광로에서 저를 연단하시더군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불 못에 간다'는 사실을...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불쌍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면 좀 과장된 표현이고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뒤 한 보름 지났을 때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예사로 생각하고 있는데 또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 마음이 쓸데없는 생각이라 여겨 무시했습니다.


세 번째 그 마음이 들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열흘 남짓이면 구정(당시는 설을 구정이라 했다)에 고향에 갈 터인데 지금 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까...길이 천리인데...차비도 꽤 들고...그러나 마음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3일 휴가계를 내었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고향에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을 전도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기에 큰 아버지를 전도했습니다. 워낙 완고하신 분이라 목침에 맞을 각오로 마음을 굳게 먹고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도 선물하고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어드렸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한 열흘 뒤 구정(설)에 다시 고향집을 찾았습니다. 아! 놀랍게도 가족이 다 교회 나갔다고 하더군요. 생긴 지 몇 해 안 되는 아랫마을 장로교에 출석한다고 하더군요. 더 놀라운 것은 큰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적어드린 예수님 영접기도문을 읽는데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가 보니까 '아 이것이 내가 살 길이구나'하면서 믿어지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턱에는 가 본 일도 없는 그 분(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좀 부정적인 면으로 유명한 분이었음)이 돌아오는 주일, 의관정제 하고 즉시로 교회에 나갔으니 온 동네와 아랫마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두어 번 나가시다가 주변 시선이 좀 뭐해서 그랬던지 수 십리 밖에 있는 교회에 버스타고 다니셨다고 하더군요,

 

설 쇠고 삼월달이 되었을 적에 그만 큰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전보를 받고 울고 있는 제게 성령님은 감동을 주시더라구요. '너희 큰아버지는 구원 받았느니라 그러니 슬퍼하지 말아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더군요..

 

저도 신앙이 어리고 잘 모르던 초 신자라 장례식에 가서 동생들한테 임종 때의 상황을 물어보니까 임종하시기 두 시간 전까지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다가 임종 두 시간 전에 '내가 두 시간 뒤에는 잘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평온을 되찾고 편안히 숨을 쉬다가 두 시간 후에 잠을 자듯이 고요히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 어떤 죄인도 구원하는 능력이 있구나'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 갚을 길 없고 멸망으로 치닫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지를 12만장 정도 자비로 찍었습니다. A4 양면에 빼곡히 아주 구체적으로 복음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었습니다. 인쇄된 전도지를 붙들고 눈물로 적셨습니다. 땀으로 전도지를 범벅을 했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전도지로 복음을 전하오니 부디 이 전도지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소서'

 

'저 영혼들을 제게 붙이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소서' 울부짖으며 정말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에 많게는 1500장, 적게는 300장 정도 돌렸습니다. 첨엔 좀 부끄러운 마음도 없잖아 있었으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했습니다.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주로 지하철 안에서, 주로 2호선 1호선에서....그리고 영등포역에서 많이 전했습니다. 서울역 청량리역 강남터미널에서도 전했습니다. 경부선 호남선 경춘선 등등을 통해 전도지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주머니에 넣거나 가방에 넣는 모습을 수없이 봤거든요. 제가 직접 돌린 전도지가 아마도 10만장 가까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같은 직장 믿는 직원) 조금 거들어 준 것까지 합하면....'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란 말은 얼추 20만 번 정도 했습니다.

 

1500장정도 전도지를 돌릴 때는 입이 굳어져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예수..."하고는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전도지 준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세 명에 한 명꼴로 받으니 20만 번 정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라는 말을 한 셈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 전도지가 땅바닥에 버려지는 것이 백장에 한두 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버리지 말고 집에 가지고 가서 가족들도 읽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주님이 그것까지 세밀히 응답하시더군요.

 

그리고 전도지를 읽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은 애를 업고서 음료수를 사다가 주시면서 고생하신다고 격려할 때 참 힘이 났습니다.(그런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욕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빗자루로 맞기도 했습니다. 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 죄인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면 지금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구원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 전함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고 치부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이 구령의 열정과 복음전함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도하는 제게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 같은 응답을 여러 번 주셨습니다. 다음 기회에 간증하겠습니다.

 


글: 열린문 교회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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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찌 방언을 아시나요?


처음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이나 일본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일어방언인 줄 아실 겁니다.

때는 1979년 11월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입에서 "주이찌 주이찌..." 하고 계속 터져나왔습니다. 아! 저절로 해석이 되더군요. 짧은 일본어 실력(이찌 니 산 시 고 로꾸... 일 이 삼 사 오... )으로 대충 해석을 해보니까, 아! 십일조로구나! 하고서 나름대로 단정을 해버렸지요.

잘못된 성경해석이 끼치는 영향이 평생을 가듯이, 엉터리 예언이나 방언통역의 폐해도 오래갑니다. 제가 '주이찌'를 붙들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었던지...

세월이 한참 지나고서야 자의적 방언통역이(성령의 은사로서 통변은사 없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을 낳는가를 알았습니다.

'주이찌'가 십일조 많이 하라는 뜻인 줄 알고 무리하게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더랬습니다. 신학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사업해서 물질로 봉사하는 게 더 좋겠다 싶어서요.

한 마디 방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그 결과가 이렇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멋대로 해석한다면 당사자만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은사(방언)에 관한 성경구절을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하지 않고, 교리적 신학적인 이해의 빛 아래서 해석하여 그 것이 마치 성령의 인침을 받은 진리인양 객관화시켜 믿는 이들을 호도하는 행위는 크게 책망받을 일입니다.

'주이찌'란,
'제일'이란 뜻입니다. 첫 째란 말이지요.
열 번이나 넘게 반복하더군요.
하나님 제일!
예수님 제일!
성령님 제일!
말씀 제일!
기도 제일!
믿음 제일!
소망 제일!
사랑 제일!
순종 제일!
충성 제일!
......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제일 먼저 구하라는 귀한 방언을 일본어로 주셨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해주시더군요. (더디 깨닫는 이 놈이 문제로고!)


설교준비가 부족할 때 잠시 방언으로 기도하고 설교하면 설교하는 제가 은혜를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방언의 유익은 이루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 수없이 많은 날들을 방언기도로 저축(?)해놓은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하더군요.

위에 열거한 대로 은사를 사용하신다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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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시는 하나님-

본문: 창세기 1장1절-2장3절

창세기 처음 부분은 창조기사입니다.

1장 1절의 말씀은 서술적 도입부로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1장 2절은 창조 이전 상태를 말합니다.

1장 3절로 31절까지는 창조기사입니다.

2장 1절은 결론적인 요약입니다.

그리고 2장 2-3절은 맺는 말로서 안식일의 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씀은 틀도 없고 틀 안에 담을 내용물도 없다는 표현입니다. 거기다가 어두움이 온통 뒤덮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빛이 없는 연고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 자연스레 빛을 먼저 창조하신 것이지요.

다만 하나님의 신(성령 혹은 성신님)은 수면 위에서 본격적인 창조를 위해 계실 뿐입니다.

첫 사흘은 혼돈(틀이 없음)에서 질서(틀을 만듬)를 만드시고, 뒷 사흘은 공허(속이 빈 상태)를 없애고 내용물을 채워넣는 창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날 빛의 창조-네째 날 해 달 별 창조

둘째 날 아랫 물과 위의 물 분리함으로 궁창(하늘) 창조- 다섯째 날 하늘의 궁창에 새 창조, 아랫 물에 물고기 창조

세째 날 바다와 땅을 창조-땅에 풀 채소와 과목 창조-여섯째 날 풀을 먹을 육축 짐승 기는 것들
그리고 씨맺는 채소와 과목을 먹을 사람(남여)을 창조 이렇게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를 끝내시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사 복 주시며 쉬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만물의 주인이신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또한 열심히 일하신(창조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얼마나 온 힘을 기울여 일하셨으면 쉬셨다는 표현을 쓰셨겠습니까.

심혈을 기울여서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시되, 창조하신 바가 창조 목적에 부합했기에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충이란 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맡기신 모든 일들을 심혈을 기울여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의 참 된 의미를 온 마음과 몸으로 알게 되고 누릴 것입니다.

게으름과 나태, 무사안일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우리의 소임은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지금도 성 삼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첫 창조가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저주와 사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은 처음 창조를 바탕으로 재창조에 들어가게 되셨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이것을 단순히 우리의 이해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의 완성을 내다보고 일하시는 창조역사(役事)입니다.

창조의 완성 때까지 열심히 일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재창조의 결국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재창조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도성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할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첫 창조의 산물인 하늘과 땅과 만물을 붙드시고 섭리하시고 운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토대일 뿐입니다. 그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끝나고 나면 베드로후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지만 붙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과 함께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경영하시는 그 큰 경륜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은 '복음 전파를 통한 죄인 구원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일하시는 것을 알았다면 그분의 자녀 된 우리도 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외로이 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동일한 보조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녀들과 함께 일하시되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천군과 천사를 부리십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엎드리면서 그 분의 뜻대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동참함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나태와 게으름, 안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기뻐하는 자마다 열심을 품고 날마다 주의 일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창조기사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일하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일하심에 동참하는 복된 여러분이 다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 자신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그 직임을 이루어 가심을 뜻한다.

인간의 예로는,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을 청지기의 자세로 잘 감당할 때 각자의 경륜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글: 구자준 목사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하나님-

창세기 3장 22절~ 24절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22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과연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을까요?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비꼬는 말씀이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지도 않았음과 될 수도 없었음을 반어법으로 강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그 결과는 죄를 범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담의 죄를 더욱 드러내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이 말씀도 역시 비꼬는 말씀입니다.
죄인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는다고 영생할 수 없음을 강조키 위함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담과 그 아내가 죄의 결과인 죽음에 대한 인식은 분명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영생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컸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추방하지 않으셨다면 아담은 죽지 않고 영생하려고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자 했을 것입니다.

죄지은 채로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해서 죽게 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눈을 들게 하심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추방하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신 것은,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인 구원자-여인의 후손을 바라보고 믿는 길 외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자 함에 있습니다.

생명나무에로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헤아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인생들은 지금도 영생을 얻고자 길을 찾아 나섭니다. 구도자들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구하였습니까. 그렇지만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아시고 영생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자 철저히 차단하셨건만 죄인들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눈을 들지 않고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에게 약속하신 그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창 3:15)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받지 않은 것은 죄들인의 탓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믿지 못하고 그 말씀을 저버린 자들은 모두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오직 여인의 후손 안에서만 회복되어 집니다. 아담은 여인의 후손인 메시야(구원자)가 오셔서 대신 피흘려주심으로써 죽음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았습니다.

그것을 아담이 믿었기에 그 아들 아벨이 어린 양의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아담이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벨의 제사를 통해 이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요즘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괴악한 누룩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고 부패시키고자 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자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받은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않은 시대나 지역에서 혹 구원받은 자가 있다면 그 또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자들일 것입니다.

모든 종교행위 선행 의로운 행실....
그 어떤 행위나 공로도 생명나무에의 길로 가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율법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성화를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마치 우리의 성화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구원을 받지 못 했습니까. 그들의 의가 우리보다 못해가 아닙니다. 힘써 자기 의로 구원을 받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창세기 서두만 바르게 알았더라도 생명주시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구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복음 아닌 다른 복음이 택한 자까지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 외는 달리 생명얻를 길이 없음을 성경은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생명수(생명의 물-의역하자면 생명을 위한 물 곧, 생명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 생명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는 하나님과 및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성령께서 수면 위에 운행하셨듯이 성령은 생명수 강물과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떠나서는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생명의 물도 단수요, 생명의 나무도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원문에는). 이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적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셨기에 피를 흘릴 수 있는, 피를 흘리신 어린 양으로서 제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생명수 강이 하나님(구약)과 '어린 양'(신약)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는 이유는, 어린 양인 그 분자신이,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생명수 강과 그리고 길과 생명나무에 어린 양 자신을 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을 선명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평면적인 글이나 그림을 통해서 3차원적인 입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가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생명수를(생명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계22:17)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신 이유를,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에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처음과 나중이시요, 시작과 끝이시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역사의 주인이심을 나타내고자 함에 있습니다. 세속역사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역사의 주인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란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신 그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계시록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시는 이유는, 오고 오는 세대가 기록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길을 차단하신 것은 죄있는 채로 영생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 아닙니다. 죄를 가지고 영생한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영생은 오직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강조코자 함에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미 주어진 그 약속만을 붙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담과 그 후손인 우리들이 헤아리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할지라~ 아멘!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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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빌라-

마태복음 10장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고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참조구절;사도행전 20:17-38 중,

17 -32절은 생략...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여러분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먼저 사도행전 20장 위 참조구절을 살펴봅니다.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밀레도 항구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합니다.

이들은 에베소에 있는 각 지역의 여러 가정교회를 맡아서 양떼를 돌보는 감독자로서 장로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각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이지요.

위 사도행전 20장 본문(17-38절)은 바울의 실천신학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식냄새 풍기는 현학적인 설교가 아닌, 삶이 녹아 있는 체화된 말씀입니다.

이 것은 장로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로서, 단순히 지적 동의를 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 자신의 모본(모범적 본보기)을 따라 바르게 목회할 것을 권면하는 고별 설교입니다.

요즘 목회자들도 자주 읽고 묵상하면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32절에는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그 누구의 금품을 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아는 바와 같이 손수 일해서 자신과 동행들의 경비를 충당했다고 말합니다.

35절에서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준대로 (여러분도) 수고하여-손수 일해서 물질을 얻어-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하심을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은 주로 고린도, 에베소 등지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 지역교회의 장로들한테 그들도 바울 자신처럼 직접 일하면서 목회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약한 자들을 도우면서 목회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자비량 목회에 대한 논쟁을 보니까, 바울은 특별한 케이스(경우)로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는다면 이는 또 다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례비를 받을 수도 있고 자비량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비량 목회를 비성경적이라고 폄훼하는 분들이 있기로 필자 나름의 성경적인 근거를 대보는 것입니다.


위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 전대에 돈을 가지지 말라, 전도여행을 위해서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돈이 있어야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한다면 목회나 전도나 선교가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투자의 개념이 개입할 소지가 있습니다. 급부에 대한 반대급부의 여지는 첨부터 싹을 잘라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생계의 수단)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말씀)전하러 갈 때는 빈 지갑으로 갔다가 올 때는 지갑을 채워서 오는 것은 삯꾼(?)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올 때도 빈 지갑으로 와야 합니다.

'전송'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전'이란 글자는, 먹을 '식' 변에 돈 '전'자가 두 개 붙어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올 차비 갈 차비 주어서 보내면(전송하면)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타(?) 강사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부흥회를 무슨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일 부흥회 인도하고 2-3백만원 받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칩니다.(이것도 20년 전 기준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나 선교사는 자나깨나 돈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배낭, 두 벌 옷, 신,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배낭에 무엇을 담습니까? 여행에 필요한 비상 물품들이지요. 그리고 여벌의 옷과 여벌의 신(당시는 샌들), 그리고 여벌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객들이 일반적으로 구비하는 것들을,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군사로 부름받은 자는 지가 벌어서 먹고 살면서 군대생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나 사도후 교부시대(속사도시대)에는 자비량 사역자가 많았습니다. 혹 사례비를 받아도 최소한으로만 받았습니다. 사역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코자 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기독교회(특히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온갖 악하고 추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들, 특히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특권을 삼아야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산다고해서, 그것이 부러워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부족할지라도 예수님의 참 제자 된 모습을 드러낼 때, 세인들도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 것은 초기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실체적 진실입니다.

다음으로는,
11절로 14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합당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평안이란 단어도 세 번 나오고요. 그런데 본문 12절에 나오는 평안(한글성경)은 그냥, '인사하라'는 단어입니다. 원문에는 평안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의 인사는, 상대를 만나면 '샬롬!' 합니다.
평안, 평강을 비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평안을 빌기 전에 머물기에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머물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장 6절

사도들은 복음을 담지한 그룻이요 사신입니다. 질그릇에 거룩한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 곳에나 머물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머물기에 합당하다는 말은 '제자들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인품)이 되는가, 물질적으로도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그 집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무턱대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손님 대접을 지상의 미덕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그런 일반적인 관습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은 싸구려 상품이 아닙니다.
잡상인이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그런 유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의 집에 머물게 되면 나중에 분란이 일어나고 화를 당하게 됩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는 일은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분별을 요하는 일입니다.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과 의지적인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성을 일컫는말입니다. 물론, 말씀(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이지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러야 합니다. 밥이 어떠니 반찬이 어떠니 잠자리가 어떠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집의 형편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대접받기 위해서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13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평안'이란 얼마나 귀하고 중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몇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과(가정에) 함께 하기를!'.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했느냐? 그렇지 않다면 화해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인사말 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빈 평안이 그 집에 합당하면 거기 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절대로 땅에 떨어져서 밟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평안(평화 혹은 화평, 평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어지기에 갈 곳을 찾지 못하면 평안을 빈 자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서, 만민을 위해서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평안이 함께 할 것입니다.

14-15절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결국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나태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끝내 거절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행했던 대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 대로) 그들도 이방인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자기 확신(선민사상)은 물거품처럼 될 것입니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서 밣힐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죄악 가운데 살다가 멸망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복음)에 거하여 참된 평안(샬롬-에이레네)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혀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재자들을 둘씩 짝을지어서 보냅니다. 여섯 팀이 구성된 셈이지요. 10장의 첫 단락이 이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13장) 성령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셔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하여 둘을 보내게 하십니다.

율법에서 두 사람의 증거는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그리고 둘은 협력을 극대화 할 수 있습니다. 셋은 의견일치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몇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비사(비유적 언설)를 드신 이유는 '지혜와 순결'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권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혜롭게 잘 처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전도현장은 평소와 같은
세상이나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뱀과 비둘기는 지혜와 순결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들입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뱀이 사람처럼 지혜롭다는 뜻이 아니라 뱀의 용의주도한 공격의 자세나 은신, 그리고 발도 없이 배로 밀고다니는 것 등을 보면서, 전도자도 자신만의 대처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턱대고 나대지말고 신중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능력만 믿고 겁도 없이 설치다가는 사역을 망치게 됩니다.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비둘기는 순결하면서도 정결한 새로서 가난한 자들이 드렸던 제물이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번 겨울에도 산행을 댓 번 했습니다. 산비둘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참 순결해보이더군요. 비둘기소리를 들어보면
조용합니다. 구,구,구... 나직한 소리로 주변에 자신을 알립니다. 밭에서 모이활동을 하다가 가끔 맹금류에게 잡혀먹히기도 하지요.

전도자의 순결이란 오늘 본문 앞 단락에서 말씀하신바 대로 돈 조심하고 대접받으려들지 말고 평안을 비는 것으로 기본을 삼고 복음외적인 일로 빌미를 제공하여 공격을 받지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7절, 그런 가운데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회란 유대인들의 지방의회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가 아닙니다. 공회에서 정죄를 받고 회당에서 채찍질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로부터 박해가 있을 것을 알고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여러 당파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말로 시험하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지요.

스데반이나 야고보 사도는 알찍 순교했습니다만, 전도자는 이리떼가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순교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경우로서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최선의 수단은 아닙니다. 기독교 순교는 무슬림들처럼 거짓에 세뇌되어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간계와 포악함을 간파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생활도 단정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18절로 20절 입니다.
앞서 말한 종교적 박해뿐만 아니라 정치적 박해도 받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세상 통치자들을 피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인 줄 알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란 믿음과 각오로 담대히 서야 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할 말을 주십니다.
아버지의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든든한지요.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만큼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자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었겠습니까.

현대의 환난전 휴거론자들을 보면 대개 환난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신적인 죽음은 그리 무서운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로 '나'도 가기에 담담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 것이 진정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늘 말씀과 기도로 성령안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적 종말과 함께 개인적 종말의 때를 항상 준비하는 신자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21절, 장차 국가와 사회 구성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되면 볼짱 다 본 셈이지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란 말입니다. 언제? 말세지말에!
가족해체를 넘어서 골육상쟁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피하려면 가정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북한이 그렇지요. 그 정도는 맛뵈기 수준입니다. 큰 환난과 함께 무서운 때가 올 것입니다.

22절,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끝까지 견딜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남은 자 사상은 신약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남은 자란 '이기는 자'로 나타납니다.

보이는 교회에 속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믿음이 아닌 종교적 신념으로도 얼마든지 교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말세에 배교의 대열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결과적 선택입니다. 그리스도(구원자-하나님이 보내신 자) 안에 있는 자를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예정(계획)하셨습니다. 마지막 추수 때에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나 가라지는 버려집니다.

농사를 지어본 분들은 다 압니다.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시고 심을 땅도 주시고 씨도 주셨습니다. 농부가 땀흘려 일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니요 하나님이 결실케 하십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은 믿음과 순종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입술의 고백이란 행위를 담보(보증)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신행일치, 언행일치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끝으로 박해를 받으면 피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순교가 좋사오니!,
한다면 누가 말리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복음의 그릇이 쉽사리 빨리 순교당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전파는 화급한 일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만민에게 속히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여전히 아직도 많습니다.

재림 후에는 전도의 기회도 구원의 기회도 없습니다. 오직 두려운 심판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읽기만 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연속강해를 이어가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을 상고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주의 뜻을 받들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예화나 긴 적용을 되도록이면 삼가고 있습니다.

아무튼 전도자의 직임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2)-

마태복음 10장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고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참조구절;사도행전 20:17-38 중,

17 -32절은 생략...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여러분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먼저 사도행전 20장 위 참조구절을 살펴봅니다.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밀레도 항구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합니다.

이들은 에베소에 있는 각 지역의 여러 가정교회를 맡아서 양떼를 돌보는 감독자로서 장로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각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이지요.

위 사도행전 20장 본문은 바울의 실천신학의 단면이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식냄새 풍기는 현학적인 설교가 아닌, 삶이 녹아 있는 체화된 말씀입니다.

이 것은 장로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로서, 단순히 지적 동의를 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 자신의 모본을 따라 바르게 목회할 것을 권면하는 고별 설교입니다.

요즘 목회자들도 자주 읽고 묵상하면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32절에는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그 누구의 금품을 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아는 바와 같이 손수 일해서 자신과 동행들의 경비를 충당했다고 말합니다.

35절에서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준대로 (여러분도) 수고하여-손수 일해서 물질을 얻어-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하심을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은 주로 고린도, 에베소 등지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 지역교회의 장로들한테 그들도 바울 자신처럼 직접 일하면서 목회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약한 자들을 도우면서 목회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자비량 목회에 대한 논쟁을 보니까, 바울은 특별한 경우로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는다면 이는 또 다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례비를 받을 수도 있고 자비량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량 목회를 비성경적이라고 폄훼하는 분들이 있기로 필자 나름의 성경적인 근거를 대보는 것입니다.


위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전대에 돈을 가지지 말라, 전도여행을 위해서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돈이 있어야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한다면 목회나 전도나 선교가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투자의 개념이 개입할 소지가 있습니다. 급부에 대한 반대급부의 여지는 첨부터 싹을 잘라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생계의 수단)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말씀)전하러 갈 때는 빈 지갑으로 갔다가 올 때는 지갑을 채워서 오는 것은 삯꾼(?)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올 때도 빈 지갑으로 와야 합니다.

'전송'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전'이란 글자는, 먹을 '식' 변에 돈 '전'자가 두 개 붙어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올 차비 갈 차비 주어서 보내면(전송하면)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타(?) 강사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부흥회를 무슨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일 부흥회 인도하고 2-3백만원 받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칩니다.

목사나 선교사는 자나깨나 돈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배낭, 두 벌 옷, 신,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배낭에 무엇을 담습니까? 여행에 필요한 비상 물품들이지요. 그리고 여벌의 옷과 여벌의 신(당시는 샌들), 그리고 여벌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객들이 일반적으로 구비하는 것들을,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군사로 부름받은 자는 지가 벌어서 먹고 살면서 군대생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나 사도후 교부시대에는 자비량 사역자가 많았습니다. 혹 사례비를 받아도 최소한으로만 받았습니다. 사역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코자 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기독교회(특히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온갖 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들, 특히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특권을 삼아야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산다고해서, 그것이 부러워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부족할지라도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낼 때, 세인들도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역사가 증명하는 실체적 진실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11절로 14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합당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평안이란 단어도 세 번 나오고요. 그런데 본문 12절에 나오는 평안(한글성경)은, 그냥 '인사하라'는 말입니다. 원문에는 평안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의 인사란, 상대를 만나면 '샬롬!' 합니다.
평안, 평강을 비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평안을 빌기 전에, 먼저 머물기에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머물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장 6절

사도들은 복음을 담지한 그룻입니다. 질그릇에 거룩한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 곳에나 머물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머물기에 합당하다는 말은 '복음의 가치를 알고 이를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되느냐'는 뜻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손님 대접을 잘 하는 민족이라 할라도 일반적인 관습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은 싸구려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잡상인이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그런 유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의 집에 머물게 되면 나중에 분란이 일어나고 화를 당하게 됩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는 일은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분별을 요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과 의지적인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성을 말합니다. 물론 말씀(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이지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러야 합니다. 밥이 어떠니 반찬이 어떠니 잠자리가 어떠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집이 가난하든 넉넉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면서 먼저 인사해야 합니다.

13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평안'이란 얼마나 귀하고 중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과(가정에) 함께 하기를!'.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했느냐? 그렇지 않다면 화해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인사말 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빈 평안이 그 집에 합당하면 거기 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절대로 땅에 떨어져서 밟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평안(평화 혹은 화평, 평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어지기에 갈 곳을 찾지 못하면 기도한 자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서, 만민을 위해서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평안이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필자의 오랜 경험입니다)

14-15절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결국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나태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끝내 거절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행했던 대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 대로) 그들도 이방인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자기 확신(선민사상)은 물거품처럼될 것입니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 밣힐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죄악 가운데 살다가 멸망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교리에 안주하지 마시고 주의 말씀(복음)에 거하여 참된 평안(샬롬-에이레네)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 지옥으로 가는 죄인들아,
주 예수께로 돌아오라! -

38년 전, 제가 20대 후반에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간혹 개인에게나 몇이 있는 자리에서는 간증을 했었지만 공개적으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랑거리도 아니요, 내세울 것도 없는 자의 개인적 체험이라서 나이가 들수록 말하기가 조심스럽더군요. 

제 신앙이력을 간략하게 적어봅니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십오리 안에는 교회가 없었고 게다가 가족도 아무도 믿지 않아서 교회 출석을 못하고 있다가 중학교를 도회지에서 다니면서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었지요. 

믿음도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군대 가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조차도 잘 몰랐습니다. 군대란 곳이 세례 실적 쌓기라도 하듯이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더군요. 그 틈에 저도 세례를 받은 셈이지요. 그러니 교회 출석인들 제대로 했겠습니까. 

제대하고 서울 올라와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마침 믿는 가정에서 하숙을 하게 됨에 따라, 
그동안 잘 나가지 않던 교회도 다니게 되었습니다만 간증서적들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보구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저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79년 10월20일 경,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쓰러지기 며칠 전이었지요. 새벽기도라고는 고등학교 때 두어 번 나가고(아, 군대서 한 번) 그 뒤로는 한 번도 안 나가던 제가 새벽기도를 다 나갔습니다. 

교회 정문이 모서리에 있었는데 양쪽 모서리 기둥보다 키가 더 큰 시커먼 두 놈이 서 있더군요. 
2미터도 넘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다가가니까 양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을 가는데 정말 바람처럼 사라지더군요. 발자욱 소리도 안 나고...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분별력이 없는 저로서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작은 전구 하나만 켜놓고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다들 열심히 개인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도를 했지요.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
남들이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무작정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남들이 들을 새라 목소리도 작게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 라고 딱 한 번 기도했는데 그만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빛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비춰오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온통 빛 천지였습니다. 저도 없고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빛만 보였습니다. 빛이 어찌나 밝은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햇빛보다 만 배나 밝다고 해야 하나....
거기다가 그지없이 투명했습니다. 

빛을 보는 순간 저는 심장이 멎을 것같았습니다.
얼마나 엄위롭고 강렬하고 두려운지 지금도 필설로는 형언키 어렵습니다. 두려우면서도 경외감이 넘쳐흘렀습니다.(정확히 2초를 넘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장이 멎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이상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더군요. 그 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집 세고 더디 믿는 제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의 심정을 세월이 지나서야 헤아릴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저 같은 놈한테는 그런 강렬한 체험이 있어야 했기에 그러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햇수가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 후로,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중에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몇 마디 나오고는 그쳤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집에서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터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방언받기 위해서 (지금의 기억으로는) 별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방언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던 교회였습니다. 

하숙집 집사님이 방언 받은 걸 축하해 주더군요. 
그래서 열심히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개인기도 시간에만... 첨에는 유창한 방언이 아니고 마치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하듯이 방언이 서툴게 나오더군요. 한마디가 두마디가 되고 세마디가 되고...그러면서 점차 방언이 익숙하게 나오더라구요.(제법 문장을 이루 듯이요) 

지금은 아주 유창한 방언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필자는 개인기도 시간에 (은밀히) 방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또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목구멍에서 향기가 올라왔습니다. 달콤하기가 그지없고 무척 향기로웠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습니다. 목에서 입으로 코로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한 보름 간 간헐적으로 향기가 나더니 그치더군요.(하루에 몇 번씩)

지금 생각해 보면, 죄인 살리는 생명의 향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예조(예언적 징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어수선한 정국과 전두환 등이 그해 12월,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80년 정초에 있었던 일입니다. 80년 1월 5일경, 밤 12시 30분까지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다가 잠이 쏟아져서 잠시 기도하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다가 오늘 밤 꼭 죽을 것만 같더군요.

 '이상하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고 아주 건강한 내가 자다가 죽는다는 마음이 왜 자꾸 들까?'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전혀 두렵지가 않더군요. 
이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였고, 나름대로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함께 회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자다가 죽을 것만 같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잠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말입니다.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 제가 자다가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죽으면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자 죽는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편히 잠이 들더군요.
 
아~~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옥이 보이더군요. 첨엔 그것이 지옥인지 몰랐습니다. 맨 앞쪽에 있는 것들이 머리가 있고 몸통과 팔 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은 실로 무시무시했습니다. 온통 시커멓고 붉은 불꽃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내 쪽을 바라보면서 풀쩍풀쩍 뛰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면서 온 사지를 흔들며 풀쩍 풀쩍 뛰고 있더군요. 마치 나이트 클럽에 많은 사람이 빽빽히 들어차서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서 광란의 춤을 추듯이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숫자였습니다. 멀리 뒷 쪽을 보니까 사람들의 머리가 마치 바닷가 모래알처럼 보였습니다. 끝이 안 보였습니다. 지평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좌우가 안 보였습니다. 너무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새까맣게 탄 모습으로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며 (소리는 안 들렸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의 수가 수억, 수십억도 더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성경을 통해서 지옥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지옥이 그런 곳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지옥은, 어둠과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탄 영혼들의 절규하는 모습, 그 세 가지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래알 같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 머리 위로 시뻘건 불꽃이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좀 특이한 것은 지옥에 있는 자들과 저 사이에 빈 공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그 공간을 전혀 침범치 못하고 마치 일렬횡대로 선 것같이 끝없이 좌우로 펼쳐져 보이더군요. 뒤로도 끝이 없이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었고....수많은 영혼들이 한결같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생생히 목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아! 마침 어떤 젊은 여자(30대 초중반)가 지옥으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저로서는 그 여자가 거기 빠지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팔을 붙들고 얼른 내 뒤로 제쳤습니다.

그 뒤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아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 지옥에 갈 것이 아닌가!'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각이 대략 12시 35분 경 이었는데, 그 5분 사이에 엄청난 일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깨어나서도 그것이 생시 같았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 충격이 장장 6개월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그 광경이 선명히 눈앞에 펼쳐지곤 했습니다. 

(표현의 한계로 이 정도로 적지만 저는 그 당시 쇼크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후 심장병이 생겨 십 수 년을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건강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기까지 주님은 불같은 시련의 용광로에서 저를 연단하시더군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불 못에 간다'는 사실을...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불쌍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면 좀 과장된 표현이고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 한 보름 지났을 때,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예사로 생각하고 있는데 또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 마음이 쓸데없는 생각이라 여겨 무시했습니다. 세 번째 그 마음이 들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열흘 남짓이면 구정(당시는 설을 구정이라 했다)에 고향에 갈 터인데 지금 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까... 길이 천리인데...차비도 꽤 들고...그러나 마음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3일 휴가계를 내었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을 전도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기에 큰 아버지를 전도했습니다. 

워낙 완고하신 분이사라 목침에 맞을 각오로 마음을 굳게 먹고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도 선물하고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어드렸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한 열흘 뒤 구정(설)에 다시 고향집을 찾았습니다. 아! 놀랍게도 가족이 다 교회에 나갔다고 하더군요. 생긴 지 몇 해 안 되는 아랫마을 장로교에 출석한다고 하더군요. 

더 놀라운 사실은 큰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적어드린 예수님 영접기도문을 읽는데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가 보니까, '아 이것이 내가 살 길이구나' 하면서 믿어지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턱에는 가 본 일도 없는 분(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좀 부정적인 면에서 유명한 분이었음)이 돌아오는 주일, 의관정제 하고 즉시로 교회에 나갔으니 온 동네와 아랫마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두어 번 나가시다가 주변 시선이 좀 뭐해서 그랬던지 수 십리 밖에 있는 교회에 버스타고 다니셨다고 하더군요, 

설 쇠고 삼월달이 되었을 적에 그만 큰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전보를 받고 울고 있는 제게 성령님은 감동을 주시더라구요. '너희 큰아버지는 구원 받았느니라 그러니 슬퍼하지 말아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더군요.

저도 신앙이 어리고 잘 모르던 초신자 시절이라 장례식에 가서 동생들한테 임종 때의 상황을 물어보니까 임종하시기 두 시간 전까지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다가 임종 두 시간 전에 '내가 두 시간 뒤에는 잘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평온을 되찾고 편안히 숨을 쉬다가 두 시간 후에 잠을 자듯이 고요히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 어떤 죄인도 구원하는 능력이 있구나'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 갚을 길이 없고 멸망으로 치닫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지를 12만장 정도를 자비로 찍었습니다. 
A4 양면에 빼곡히 아주 구체적으로 복음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었습니다. 
인쇄된 전도지를 붙들고 눈물로 적셨습니다. 땀으로 전도지를 범벅을 했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전도지로 복음을 전하오니, 부디 이 전도지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소서' 

'저 영혼들을 제게 붙이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소서' 

울부짖으며 정말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에 많게는 1500장, 적게는 300장 정도 돌렸습니다.
 
첨엔 좀 부끄러운 마음도 없잖아 있었으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했습니다.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주로 지하철 안에서, 2호선 1호선에서....
그리고 영등포역에서 많이 전했습니다. 
서울역 청량리역 강남터미널에서도 전했습니다.
경부선 호남선 경춘선 등등을 통해서 전도지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주머니에 넣거나 가방에 넣는 모습을 수없이 봤거든요. 

제가 직접 돌린 전도지가 아마도 10만장 가까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 조금 거들어 준 것까지 합하면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란 말은 얼추 20만 번 정도 했울 겁니다. 

1500장 정도 전도지를 돌릴 때는 입이 굳어져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예수..."하고는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전도지 준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세 명에 한 명꼴로 받으니 20만 번 정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라는 말을 한 셈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 전도지가 땅바닥에 버려지는 것이 백장에 한두 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버리지 말고 집에 가지고 가서 가족들도 읽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주님이 그것까지 세밀히 응답하시더군요. 

그리고 전도지를 읽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은 애를 업고서 음료수를 사다가 주시면서 고생하신다고 격려할 때는 참 힘이 났습니다.(그런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욕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한테서 빗자루로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죄인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면 지금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구원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 전함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고 치부하지 마십시오. 전도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이 구령의 열정과 복음전함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도하는 제게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 같은 응답을 여러 번 주셨습니다. 다음 기회에 간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자는 신비주의나 표적신앙을 쫓는 자가 아닙니다. 다만 위와 같은 채험을 제 의지와 상관 없이 했을뿐입니다. 그러니 다소 생각이 틀리더라도,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고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복음을 전한다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마귀야 물러갈지어다-

36년 전, 그러니까 1981년 어느 늦가을 밤,
기도하려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밤 10시 조금 넘어서 집에서 출발해서 골짜기로 한참 들어가다가 산에 올라 중턱을 지나 산꼭대기로 가던 중 꽤 넓고 비스듬한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근교에 살던 집 근처 산이었음)

전혀 인적이 없는 곳이라서 첨엔 으스스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1시 쯤 기도를 시작했지요.

혼자서 산기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산기도 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분주한 일상을 떠나 밤이 맞도록 산에 가서 혼자 기도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산기도 가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힘 좋은 20대 후반의 청년 시절이라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 중에서, 그것도 밤 중에 혼자 기도하면 마음놓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새벽 2시 경,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산짐승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사람이 무서운 것도 아닌 저였습니다.

갑자기 시커먼 놈이 등 뒤에서 나탔습니다. 집채만 해 보였습니다. 형체만 보였지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하기가 어렵군요. 그 놈이 저를 한 입에 삼키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베드로 전서 5장 9절의 그 말씀과 어찌 그리 똑 같던지요.

아! 이제 죽었구나! 꼼짝없이 죽었구나!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머리털이 서고 온 몸에 솜털이 일제히 솟았습니다. 무서움을 동반한 엄청난 공포가 마음과 전신을 휘감았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마음 한켠에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 그러면서 죽기를 각오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이 들면서 너 한테는 안 죽겠다는 오기와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 시커먼 엄청난 놈을 정면으로 대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갈지어다!' 그런데 입이 얼어붙어서 모기소리보다 조금 더 큰 소리밖에는 안 나오더라고요.ㅎ

그러자 그 엄청난 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무니를 빼면서 슬그머니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승리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쁨과 평안이 강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평온한 가운데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새벽 다섯시가 지나서 찬송하면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뒤에도 몇 번 산기도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다른 산으로) 8-9시간 밤새 기도해도 전혀(별로)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산 능선 묘 옆에서 엎드렸는데(20시-05시까지) 산짐승이 다가와서 숲에서 부시럭거릴 때는 겁이 좀 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한겨울에 바위에 8시간 동안 엎드려 기도할 적엔 정말 고통스럽더군요.

예전에는 산기도 가서 기도하다가 마귀에 사로잡혀서 정신이 이상하게 된 분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산기도 가지 마시라고 올리는 글이 아닙니다.

담력을 키우고자 한다면 산기도도 때로는 필요하겠지요. 무슨 능력받기 위해서 산기도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산기도는 담력이 약한 분들은 분명히 삼가야 합니다. 산기도 한다고 능력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왜 이런 간증을 하냐 하면 신앙생활 하면서 말씀을 통해 점점 알게 된 사실은 마귀란 놈은 너무나 간교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숨기고 사람이나 일을 통해서 시험을 해 오는데 정말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속아넘어가기 쉽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 어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은 모양이 없다는 말씀대로 가족이나 이웃을 통해서 미소지으며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제 경우, 그 체험 이후에도 마귀가 시커먼 형상으로 계속 공격해 왔다면 무서울 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또 대적하면 되었겠지요.

하지만 마귀의 공격은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귀를 대적해서 이겼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이제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엉뚱한 모양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주로 사람을 통해서 시험을 해 왔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이 마귀의 시험인 줄 알아차리지 못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마귀를 물리친 그 일이 있은지 몇 해 후, 모함과 비방을 받아 몹씨 괴롭고 힘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 교회 집사인데 그렇게 하더군요.

저는 아무 변명도 않고 저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달라고....사랑을 품고 기도하니 미움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변명이나 하고 같이 대적하여 싸웠다면 일이 더 어렵게 되었을 것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으니까 다 해결되더군요

그 분들이 어느날 제게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더군요.

주님은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한 피받아 한 몸 이룬 지체들끼리 서로 싸운다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마귀는 이간질하고 남의 허물을 들춰내게 하고 험담하고 비방하게 만듭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마귀가 시험하는 것인 줄 알고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제가 신학을 시작한 것이 83년도였습니다. 신학을 마친 게 97년도였습니다. 안수는 2000년도에 받았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한지 17년 만에 목사가 된 셈이지요. 공부를 많이 해서 기간이 길어진 것이 아닙니다. 80년대 중 후반에 한 몇년 공백이 있었습니다. 돈 벌어서 어려운 목회자나 선교사를 돕는 것이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서 돈버는 데 나서서 그렇습니다. 돈을 벌기는커녕 쫄딱 망해서 고생만 잔뜩했습니다.

처음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했을 때 제게는 이미 목회의 야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신학을 갖 시작한 놈이 벌써 큰 교회를 이룰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게지요.

주님이 그런 자를 쓰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제게 돌아온 건 시련과 실패 고난과 연단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음 등등....

그런 가운데서 신학을 마치고 간절히(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기도하니까
응답을 하시더군요. 일평생 그 때 딱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를 쓰리라!"
"양떼를 맡기리라!"
(1-2초 간의 시차를 두고 말씀하시더군요)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가슴에 떨어져 들리더군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위로부터) 왔는데 가슴에서 들리더라고요. 중후하고 묵직하고 위엄있고 온유하고....
글로서는 표현이 제대로 안 되는군요. 귀로나 머리로 들리는 음성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하나님의 음성듣기는 제 경험과 말씀에 비춰볼 적에 신빙성이 별로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말씀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시지 맨날 음성을 들려주셔서 신앙이 자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인 베드로나 바울도 못한(안 한) 일을 현대교회의 어떤 분들은 추구하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음성을 듣겠다고 설치면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도 없거니와 자칫 잘못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고난과 실패, 연단의 과정을 지내오면서모든 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회의 야망과 성공, 그리고 명성은 확실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사라지니까 관심조차고 없어지더군요. 겨우 8-9년 전부터 입니다. 참 더디 변하는 제 모습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성화란 단번에 되는 일이 결코 아니더군요. 주님이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를 다듬어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실제였습니다. 이제는 그저 이름도 없이 빛고 없이 작은 것에 충성하는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맡기신 사역이 얼마나 귀하고
또한 성도들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예전에는 왜 안 했겠습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욕심의 배후에는 우리로 범죄케 해서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욕심이 생기도록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을 빙자하여 성공과 번영 축복을 받으라고 욕심을 부추기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말씀으로 말미암는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여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첨언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복음)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임을 살아오면서 더욱 절감합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은 우리에게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모기소리같은 목소리에도 도망가던 마귀였습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지만 작은 목소리로 외치는 복음이 오히려 세상을 이깁니다.

성화(주님을 닮아가는)의 과정도 오직 복음으로만 됩니다. 성화를 위한 우리의 의지나 노력 또한 주님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종(노예)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인이 사례하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주인은 없습니다.

할 일을 다 한 후에 엎드려서
'할 일을 했을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종이 참된 종입니다. 여기서 무익하다는 본 뜻은 비참하다는 말입니다.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 신분입니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그러면서 인격적으로 대하는 주인 앞에서 할 수 있는 고백이라고는 '그 고백'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더하여 우리 모두는 그 분을 섬기며 뜻(명령)을 받드는 종입니다.

중심을 잡고 자신의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샬롬!

글/구자준 목사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태복음 10장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고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예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부터 보내다'가 그 어원입니다. 그런데 그냥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습니다. 천국 복음과 함께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병'을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셔서 보내십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것을 전부로 삼지 않고 그에 따르는 권능을 주셔서 보내신 것이지요.

위에 열거한 네 가지 능력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나타내는 회복, 곧 재창조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창조- 타락- 회복,
그런데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새 창조역사로서의 회복입니다. 이를 바르게 알려면 원 창조의 목적과 타락이 가져온 결과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의 기록을 보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만물이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회복이란 단순히 아담과 그 후손을 구원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구원이 가져올 회복은 전 피조계에 효력을 미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신약(특히 계시록)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위 네 가지의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장차 새로운 인류 즉 마지막 아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그 분의 백성이 복음으로 생육번성하여 온 땅을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목표로 하는) 다스릴 것이란 사실을 나타내는 표호-사인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구원이란 단순히 영혼의 구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죽어서만 천국'은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며- 복음은 죽음도 정복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망이 왕노릇했지만 이제 생명이 사망을 삼키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며-
정결케 되어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탄(마귀)을 쫓아낸다는 것은 천국이 임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왕 사탄을 이기셨기에 그 졸개들이 쫓겨나는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그 당시 사회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외쳤지만, 지금은 천국이 도래해서 힘차게 땅끝까지 전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애쓰면(침노하는 자들은)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존재했던 그 어떤 왕국도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우리가 속한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시작은 비록 미약했을지라도 (표면적으로는) 지금은 거대한 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완성되면 필설로는 형언키 어려운 엄청난 영광의 나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과 함께 살아서 믿고 있는 자들이 들림받음으로써 그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댓가를 바라고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능력을 베풀고 돈을 받는 행위는 엄격히 금해야 합니다.

필자는 30년 전에 자비량 목회를 서원하고 기도한 이래로 개인적으로 사례비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같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본받겠다고 겁(?)도 없이 나섰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후회도 여러 번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주님! 취소합니다'라는 기도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응답치 않으시더군요.

주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를 여러 번 보여주시더군요.

어떻게 보면 창피하고 부끄러운 면도 있지만 이왕 커밍 아웃하는 마당에 그동안 필자가 해왔던 일들을 적어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30년도 더 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자면 밤을 세워도 부족할 것입니다. 고난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고통은 무엇인지 가난은 또 무엇인지...

할 말 다하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변화하는 목회 환경에 후진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데 작은 참고라도 되었으면 해서 용기를 내어 적어봅니다.

초대교회 당시 순회전도자들은 말씀을 전한 지역교회에서 숙식과 함께 다음 행선지로 가는데 필요한 여행경비를 제공받았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경우가 더물지요.

대개가 한 지역에 세워진 교회를 담당해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임사역을 하는 목회자에게 적절한 사례비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와 같이 돌출행동(?)을 하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현대에, 목회를 하면서 돈을 버는 일을 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소위 말하는 사이드
잡이지요. 안정된 생활을 하는 목회자만 봐서 그렇지 사실 미자립교회 목회자나 사모들의 경제활동은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앞으로 다불과 십년 안에 목회 환경은 크게 변할 것입니다. 특히 개척교회를 섬기는 분들, 젊은 목회자들은 미리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안 주시면 굶겠다고 하면 누가 말리겠습니까마는 그런 분들은 대개 중도에 목회를 포기하고 무임목회자의 대열에 들어서더군요.

본문 연속강해의 진도가 늦어진 이유도 이 글을 쓰게 하시려는 성령님의 뜻이 있으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각설하고,

제가 받은 대표적인 기도응답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평생 고난이 제게서 떠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도 30여년 전에 올린 기도였지요. 응답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확실하게 응답해주시니 참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례비 받지않겠다는 서원기도를 올린대로 지금까지 그렇게 살도록 해주시더군요.

그런 기도를 하고 난 뒤, 사역을 하면서 너무나 철저하게 응답을 하셔서 저도 놀랬습니다.
(기도 함부로 하지마십시오. 제 경험상 그렇습니다)

3박4일 부흥회를 인도했던 적이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개척교회였었지요. 저도 형편이 어려웠지만 매시간 헌금을 하면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집에서 버스타고 오가면서... 밥 여섯끼, 선물(케익)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 뒤로도 일일집회나 초청을 받아서 주일 오후 예배 설교(몇 달 했음) 등... 밥 한끼가 전부였습니다. 교통비도 없었구요. 혹 사례비를 주면 그 자리에서 감사기도와 축복기도를 하고 도로 헌금하고 온 경우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외에도 전도사, 부교역자 시절에 사례비 한 푼 못 받았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데만 골라서 보내시더군요.

때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기도응답이란 걸 알았기에 괘념치 않고 사역을 이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막노동을 하고 왔는데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참 편하더군요. 노가다(?) 경력 20년이라 해봤자 실제로 일한 날수는 600일 정도밖에는 안될 겁니다. 처음 나갔을 적엔 게으름도 피우고 요령도 좀 부렸지만 요즘은 일머리도 알고, 책임자가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하니까 계속 나오라는 현장도 많습니다. 체력이 딸리고 하기가 싫어서 안 나갈뿐이지요.

식당 보조 및 설거지 1년, 야간 택배상하차, 온갖 잡역부, 자잘한 사업, 정치판 기웃거리기 등등.. 먹고살기 위해서 목회를 이어가기 위해서 참으로 안 해본 게 없었던 지난 세월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지하실에서 목회와 살림을 겸해서 지낸 6년의 세월은 좀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네 번째 개척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중증장애인 재활병원에서 장소를 제공해주어서 2년 동안 자비량 목회를 했던 것이 그나마 보람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외는 반듯한 목회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맨날 개척교회 수준이었지요

지금도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작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아쉬울 따름입니다.

삼십 몇 년 전, 서울 강남의 아파트며 좋은 직장도 버리고 이 길을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많이 어려울 적에 남에게 손벌리는 것을 주님은 아주 싫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버는 것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서요. ㅎ

지금까지 한 번도 굶거나 할벗지 않았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심장병을 십여년 앓으면서 힘든 육체노동을 할 적엔 정말 울고싶더군요. 그런데 주님이 보너스로 심장병도 낫게 해주시더라고요.

어릴적부터 여러 가지 병을 앓아왔었는데 심장병이 제일 힘들더군요. 계단을 올라가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또 다른 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주변에서는 왜 보험 안 드냐고 성화지만 필자는 이미 하나님께 보험을 들었기에 그럴 마음이 현재로서는 전혀 없습니다.

쓸데없는 말이 길어져서 송구합니다만 이런 목회자도 있구나 하고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독자 제현의 건승을 기원하오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샬롬!

*위 본문으로 강해가 이어집니다.

글: 구자준 목사

-성경해석과 설교-

성경해석의 힘을 기른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금광을 발견하면 채굴할 도구가 있어야 하듯이, 성경의 진리를 알려면 해석의 틀(interpretation frame-work)이 필요합니다.

성경속의 진리를 밝히 드러낼 수 있는 해석의 도구(tools)가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성경해석의 일반적인 원리를 간략하게 정리해 봅니다.

1. 먼저 문맥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정독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고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문법에 맞게 자연스런 의미를 구해야 합니다.

본문이 속한 책(예: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기록 목적)를 추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성경 전체의 맥락에 비춰봐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통전적인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1. 다음으로는 역사적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어떤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주어졌는지,
처음 그 글을 대하는 자들의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 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인 하나님의 종들을 영감하셔서 성경을 기록케 하실 때, 허공에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말씀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1. 신학적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말씀이 점진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의 발전과정을 따라가는 신경신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성경신학적 안목 없이 조직신학적인 접근만으로는 풍성한 진리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글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것이지요.

다른 차원의 말씀(하늘의 언어)이 인간의 글로서 옷입고 나타나셨기에 영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학적 맥락이라 함은 곧, 영적인 맥락인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맥락을 파악해서 통전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일차 독자에게 주어진 당시의 의미가 이차 독자인 지금 나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이 성경해석입니다.

그 의미를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성경해석의 최종 목표인 것이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과 함께 좋은 책(신학 서적)을 부단히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원저자이신 성령만큼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분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

바른 해석, 다시 말해서 성령의 조명과 하나님의 인치심(결재)를 받은 해석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날을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과 세상의 헛된 사상과 죄에 찌든 심령을 고치기 위해서는
인간의 아름다운 말과 듣기 좋은 소리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해석된 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작성하여
주께서 친히 역사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성령을 의지하여 선포할 때 듣는 자의 심령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야 바른 열심, 자신을 위한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복음 아닌 잡음같은 소리가 알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기복적이고 신비적인 목소리에 교인들이 솔깃해 합니다.

성경적인 바른 설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참된 말씀에 갈급해 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풍성한 진리가 선포되기를 바라는 심령들이 정말 많습니다.

바른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기도하면 주님은 그런 자를 들어쓰실 것입니다.

시대를 변혁시키는 그런 설교자가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잠든 자들이 깨어나서 회개하고 각성할 것입니다.

회개하고 각성한 자들이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은 구원받는 자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글: 구자준 목사

-열두 제자를 부르심-

마태복음 10장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메,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여담입니다만 필자는 40년 전, 군대에 있을 때 삼국지(박종화 역)를 접했습니다. 작업하다가 다쳐서 야전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그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읽었지요.

도원의 결의를 통해서 유비와 관우(관운장), 장비는 삼국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들이,
위 나라 오 나라 그리고 변방으로 밀려난 촉 나라의 삼분지계를 다룬 삼국지에서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는,

역사의 주인공이란 중원을 차지한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자들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비록 중원을 차지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의명분에 충실한 자를 역사가 인정해 줄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된다면, 역사로부터 바르게 배우게 될 것이란 말이지요.

역사란 미화한다고 해서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된 역사기록은 자손대대로 해악을 끼칠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적에 후대가 역사로부터 바른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바른 역사서술이란 역사를 단순히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사기를 진작시키고 또한 역사의식을 고취시켜서 각자가 역사의 일원임을 자각케 하는 것이 좋은 역사기록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잘난 자, 있는 자, 많이 배운 자들을 제자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지 않으셨습니다.

12사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태복음 10장을 시작합니다.

(이제사 겨우 8장부터 시작해서 10장에 왔군요. 세월은 흐르는데 필자의 붓끝은 느리기만 합니다. 힘을 낼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가진 신학(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걸 '신학'이라 합니다)적 의미가 신약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함에 있습니다. 구원역사의 연속선 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대로 열둘(제자)은 만수(꽉 찬 수)입니다. 만민에게,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성을 지니는 숫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영적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띤 숫자이지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12와 12의 배수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4:4절 이하, 7:4, 14:1, 21:12-17, 21, 22:2)

7장 4절에 각 지파에서 인맞은 144,000을 풀어보면, 12×12=144 ×1,000(10×10×10) =144,000이 되지요. 10의 세 제곱인 1,000은 충만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이는 환란에서 나오는 큰 무리를 말합니다.

인맞은 자(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믿음으로 화합한 자)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계7장 9절)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매우 적다고 말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안위를 놓치고 있는 자들이 대개 그렇게 주장합니다만, 그렇다면 그들 자신도 구원에서 제외될 확률이 높습니다


말씀을 한꺼번에 다 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 차근 풀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글을 계속 읽는 분들에게 복음의 안위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성경을 읽음과 함께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성령, 곧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을 받아 복음의 증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품기까지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고 지치고 욕먹고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도들은 어떤 자들이었을까요?

살펴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지간으로서 어부지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어부 출신입니다. 품꾼을 부리는 것으로 봐서는 꽤 규모가 있는 어업을 영위한 것같습니다.(마가복음 1장 19-20절)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고...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의 경우도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을 받았지요.

빌립과 바돌로메- 역시 갈릴리 인근 출신입니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더라.

신약의 기록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제자들의 면면을(일부만) 살펴보자면,

안드레와 빌립은 헬라식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헬라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안드레는 어린 아이같은 순수한 면을 보입니다. 반면에 빌립은 상당히 치밀하고 계산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요한복음의 그들에 대한 기록이 그렇더군요, 필자가 보기에는.)

가나나인 시몬은-열심당원입니다. '가나나'는 아람어식 표현이고요, 히브리어로는 제롯(당)입니다. 유대 독립을 위해 활동한
과격한(무력도 불사한) 당파에 속한
자였습니다.

가룟이란 지명을 따라서 불리운 유다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자로서 직분을 감당치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해서 바벨탑을 쌓았던 창세기 11장의 기록은 복음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구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많이 모여서 높고 큰 건물을 건축하여 이름(목사를 중심한)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면 살 수(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혹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소리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한 사도들이 이름을 남기고자 했습니까. 아니면 어디 큰 교회를 이루고자 했습니까.

온 세상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 순교했었지요. 온 지면에 흩어져서 복음으로 생육번성하여 새로운 인류가 많아지게 했던 인물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교회는 다양성 가운데서 일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인 wcc를 인정하자는 말이 아니라, 성도들 간에 다름을 인정하면서 믿는 자로서 상대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낮아져서 서로 섬길 때 '우리는 하나'임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면면이나 성품, 그리고 삶의 정황은 각기 달랐을지라도 부름받은 자로서 주님 안에서 하나였습니다.(요한복음 17:21-22)

하나님 나라는 가루 서말 속에 퍼지는 누룩과도 같습니다.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이나 일터에서 보냅니다.)

듣는(읽는) 말씀이 삶 속에서 체화되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1세기의 세속역사로 보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지만, 지난 이 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첫 물줄기를 형성한 자들이었습니다. 생명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원(시작의 원천)으로 해서 말입니다.

글/구자준 목사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며 기진한 인생들을 보며

마태복음 9장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세 번째 문단의 시작입니다. 장 절로서는 9장 끝에 나오지만 새로운 문단의 시작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은 4장 말미에 동일한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산상수훈인 5-7장의 도입부는 4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독자의 관심을 절정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태의 문학적 기교가 엿보입니다.

이야기를 밋밋하게 전개해나다가다 맹물처럼 끝을 맺는다면 좋은 독서감이 될 수가 없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글로 옷입고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글에 대한 이해, 즉 문맥을 통한 본문의 의미를 구하는 일은 독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문자를 소리나는대로 읽는다고 해서 문맹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문맹입니다.

어느 민족이든 국어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글을 읽을(독해) 즈음에는 역사를 가르치지요. 역사란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 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가 없지만 영적으로는 보이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속한 자마다 내 나라가 어떤 나라인 지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국어책이자 역사서가 바로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도시와 마을'이란 빠짐없이란 뜻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자는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방이나 다름없는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때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복음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4장 23절, 온(모든)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9장 35절,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24장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28장 19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차분히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치고...

예수님의 사역의 패턴이 그러했습니다.

천국이란 친구따라 강남가듯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배워서 알아 지적으로 동의한 자들에게 그 나라(천국)를 선포하는 방식이지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당시 가르침의 텍스트(말씀)는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천국 복음의 선포, 그리고 고치심이 성경(구약)에 근거한 것임을 잘 압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바라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만민의 구원을 위해서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

그 나라는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바랐던 예수님, 바로 그 분입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아들)으로서 왕(the messianic king)이시란 말이지요.

가르침과 복음 선포와 고치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천국(메시야 왕국-하나님 나라)이란 말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가시적) 모임입니다. 그럼과 함께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나라의 백성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선생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상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그리스도)로서 삼중직임(왕 제사장 선지자)을 담당하신 구원자로서 가르치신 것이시지요.

히브리어로는 마시아(흐), 예수님 당시의 아람으로서의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를 번역한 헬라어가 바로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글자는 다르지만 뜻(의미)은 같습니다.

잘 못된 지도자 아래서 배운 자들은 목자 없는 양과도 같습니다.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기진한 양들 말입니다. 그런 양들이 예수님 당시에 많았습니다. 저들을 가르치고 인도할 선생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추수할 일꾼들이지요.

이 시대에도 바른 지도자를 보내주십사고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만민의 구주이신 그 분은 자신의 종들을 부르셔서 이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목사만이 종이 아닙니다.

먼저 부름을 받은 자는 이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배워야겠지요.

양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바르게 세워서 주님의 명령을 잘 감당케 하는 직분을 받은 자가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목사는 주님을 따라가는 양떼의 선도양입니다. 군대로 치자면 선임병이나 지휘관입니다. 그리스도 군사의 대장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뿐이십니다.

잘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며 약하고 병든 양들을 고치는 그런 제자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며 기진한 인생들을 보면서...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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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앞 단락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이제 두 맹인의 눈을 열어주십니다.(두 사람의 증거는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변치 않고 흔들림 없는 증거를 말합니다)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눈들이 열린지라' 입니다.

닫힌 문을 열듯이 소경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닫힌 문과 열린 문, 문을 여닫는 것은 들어가고 나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창이란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또 보이는 광경을 받아들이는 열린 공간을 말합니다.

육신의 눈이 밝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떤 '당달봉사'가 있듯이 눈을 뜨고도 보지 못 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일반적인 영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일하심의 영역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양 알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위 본문의 맹인은 보지 못할뿐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성한 사람처럼
활동할 수 없을뿐입니다.

현대에는 이들을 시각장애인이라 부릅니다. 필자는 장애인을 돌보는(케어) 일을 십년 가까이 해오고 있어서 시각장애인들도 꽤 접해봤습니다.

전임사역은 아니고 건강한 자로서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늘 아쉽고 부족할 따름입니다.

따라오며 소리질러-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귀에 들립니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눈도 뜨게 할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앞이 안 보이기에 예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어디 쯤 계시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따라가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를 일컫는 유대인들의 표현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격(Person)과 하시는 일(Work)에 대해서 바르게 알았기에 그렇게 부르며 간구한 것입니다.

요즘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어떤 여인의 헌금봉투에 쓴 기도제목을 보니까, 자신의 가정과 딸을 위해 복을 비는 게 전부더군요. 하나님은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나 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으로서 지극히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식으로 드리는 헌물은 뇌물 내지는 복채 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나 봉사, 헌금 이전에 하나님 자신을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강남의 모 대형교회에 다녔다고 하는데 어떤 설교를 들으면서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른 신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긴 셈이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바른 말씀(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은 곪아서 터질 지경인데, 아까징끼(머큐롬) 발라주는 듣기 좋은 설교나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번영복음은 교회 안에서 추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나 눈을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이 참으로 눈먼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나아와 불쌍히 여겨주십사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바른 복음(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노중에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지만 아무 반응도 없이 집에 들어가십니다.

맹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는냐?"

"예, 주님!" - (원문 상)

능히 - 뒤나미스입니다.

능력이지요. 예님의 능력을 알기에
간단명료하게 답변합니다.

미사려구를 사용해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나 다름없습니다. 긴 시간의 기도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주님되심'을 바르게 알아서 분명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9절,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전능하신 분이 말씀만 하셔도 나을텐데 굳이 눈을 만지신 것은 긍휼하심의 표현입니다.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들의 삶을 터치하십시오. 돈 몇 푼 적선하듯이 하지말고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접촉하십시오.

내가 드린 구제와 선교헌금이 영혼을 살리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드려 눈물로 씨를 뿌릴 때, 죽은 자 살리시는 예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너희의 그 믿음대로 너희에게 되어라"

그 믿음- 한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말씀(성경)으로 말미암는 그 믿음입니다.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시,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는 권능을 많이 베풀지 못하셨습니다. 이는 고향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 예수'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피조세계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밝히 계시하시고 두 팔을 벌려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탕자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요 믿음의 시작입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표적을 쫓는 신앙을 경계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의 그릇된 메시야왕국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이상으로 바라보며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좌지우지, 우왕좌왕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계의 말씀은, 이 시대에 자기를 선전하고 알리지 못해서 안달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31절은 문자적으로 '예수의 소문'이 아니라, "그를 온 땅에 퍼뜨리니라"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믿었던 그 분 자신과 그 분이 하신 일을 일컫는 '그를' 말합니다.

카더라 통신과 생방은 엄연히 다릅니다. '풍문으로 들었소'가 아니라 말씀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 분'을 온 땅에 퍼뜨린 것이지요.

지식은 좋은 것이로되 지식에만 머물면 지적 교만과 함께 자칫 '비없는 구름'처럼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선생들은요.

다음은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듣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농아인들을 만나보면 중간에 수화통역자가 있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데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듣지 못하면 말도 못하는 법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의 장난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사람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서 하는 말인지...

영분별이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언어(말과 글)를 통해서 알수가 있습니다. 말이란 속에 있는 것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성경말씀으로 말미암는 말이 나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적이 없다고 말하건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성령훼방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생명주시는 그 분을 거부하고서야 어찌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자가 식음을 전폐하고서 죽기를 바란다면 하나님도 살리지 못합니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성령훼방죄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생명주시는 주 예수님을 죽고살기로 거부하는 죄가 바로 성령훼방죄인 것이지요.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멀쩡한 넘(?)을 자기 기준의 작대기로 내리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바리새인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삼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럼과 함께 교리나 지식의 잣대로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맹인과 말 못하는 자!

이 시대에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자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영적 우맹, 신앙적 우맹, 인간사회의 우맹...

본다고 하는 소경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 눈뜨고 삽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글: 구자준 목사

죽은 자 살리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9장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기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오늘 본문은, 하나의 네러티브( 사실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 안에 작은 에피소드(묻혀질뻔 한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죽음을 이기신(정복하신) 생명주시는 주 예수님'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본문의 병형구절인 마가나 누가의 기록을 되도록이면 인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본문연속강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의도에 충실하고자 함에 그렇습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의 구원과 관리(갈릴리지역의 유대사회 지도자)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과 12살 된 관리의 딸이 그것입니다.

3×4=12, 하늘(삼층천, 삼위일체 하나님 등)의 수와 땅(동서남북, 사방 등)의 수를 곱한 수이면서 동시에 만수(꽉찬)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 등도 만수로서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관리가 와서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한 시각은,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제자들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바로 그 때입니다.

율법주의 형식주의 금욕주의에 대해 바르게 교훈하시다가

관리의 딸을 살려달라는 간구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들 밥만 먹고 각기 제 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유는, 과연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을 것인지!

인생에 있어서 죽음보다 중차대한 명제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큰 관심을 가지고 관리의 집까지 따라온 무리를 떠올리기 전에,

먼저 노중에서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신 에피소드를 살펴봅니다.

이 여자의 혈루병은 레위기(15장)를 통해서 보자면 부정한 유출병입니다. 아랫도리로 피를 쏟는 병을 말합니다.(일반적인 생리가 아닙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도때도 없이 피를 쏟으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지요.

여인이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몰래 예수님의 겉옷 끝자락을 만진 것은 자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출병을 앓고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을 만지면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집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겠다고 스스로 믿었기에요.

참으로 율법을 뛰어넘는 여인의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이 '죽음 앞에서 벌벌떠는 인생들 모두'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에서 저자 마태는 율법을 지킴이 인생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기록한 줄로 믿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았다면 인생이 끝난 것입니다.(열두 해는 여인의 평생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물질도 육체도 시간도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스러져간 세월이었지요. 아무 소망도 없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요.


이제 관리의 열두 살된 딸을 살리신 사건을 살펴봅니다.

먼저 피리부는 자들과 떠드는 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구슬픈 피리소리와 곡소리로 슬픔을 표했습니다.

'료'를 받는 피리부는 자와 곡꾼을 고용했던 것이지요.

구성지게 피리를 불어 가족과 고용된 곡꾼(곡소리내는 자)들과 초상집에 몰려든 자들의 심금(?)을 울려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지요.

정말 슬퍼해서 '떠드는 자들'이 아닙니다. 초상집에 와서 얻어먹으려면 우는 체라도 해야 합니다. 지체높은 집에 초상이 났으니 문상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모양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떠드는 소리(소음 이상이 아님)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시니까 비웃습니다. 그런 자들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비웃는 자들은 지금은 비웃지만 때가 되면 우는 체가 아니라 정말로 울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돈 몇 푼에, 밥 한그릇에 팔려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픈 체 하는 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현장을 보여줄 수 없으셨던 것이지요.

자고 있는 자를 깨우는데 요란을 떠는 자는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깨우면 되는 것입니다.

"물러가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런 의미도 녹아 있습니다.

'생명의 살림-살아남'은 조용히 일어납니다. 요란을 떤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미디어(TV.. 등)를 통해 설교하는 분들 중에 과연 생명을 살리는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 아니면 혹, 자신과 교회를 선전하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에서 하는 말입니다.

돈 몇 푼에 팔려서 부흥회에 다니는 분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닌지...

진정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조용히 복음을 전해도 될 것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오해는 마시고요.

이 시대에 유명한 주의 종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분들은 자신을 한 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소녀가 믿음이 있었기에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아비의 믿음을 보시고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누군가가 기도했을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믿지않는 자들을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주님이 친히 손을 잡아주십시사'고 울면서 매달리십시오. 내가 내 자식을 살릴 수 없습니다. 시대가 악합니다.

소문이 온 땅에 퍼지니라-
생명의 향기는 아무도 붙잡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전파를 제어할 수는 것은 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죄와 사망과 마귀를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혹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성도를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오십시오.

마귀가 더 이상 여러분을 붙들지 못합니다. 거짓으로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번에 올린 글에서 말한, '이빨빠진 개오지(늙은 호랑이)일뿐입니다.

지금도 거짓의 아비 마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영광을 보여주며 속이고 겁을 주지만 이빨도 발톱도 다 빠진 늙어빠진 사자와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참 생명을 얻고자 하여 주 예수께로 나오는 자들을 결코 붙들지 못합니다. 다만 으르릉거릴 뿐입니다. 그러니 속지마시고 속히 돌아오십시오.

앞서 말씀드린대로, 믿지 않는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생명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육신의 목숨이 다하면 회개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온 땅에 퍼져나가고 있을 동안에 돌아오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고 권력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장춘몽입니다. 잠깐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죽음이란 명제를 중첩해서(두 번에 걸쳐서) 기록함으로써, 죽음의 굴레를 쓰고 사는 인생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를 밝히 드러내고 있는 본문입니다)

주의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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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굶식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9장 14-17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이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이란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이란 마시는 것을 말하는데, 물이라기보다는 주로 포도주를 뜻합니다.

금식하면서 맹물을 마신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식사시간에 포도주를 곁들였습니다.

손님을 초대하거나 잔치할 때에는 질 좋은 포도주로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지난 해에 짠 포도즙은 숙성이 덜 되어서 시큼떱떨할뿐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몇 년된 좋은 포도주로 손님을 대접했던 것이지요. 좋은 포도주란 발효가 잘 되어 술맛이 좋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잘 먹고 잘 마셨습니다. 만일 체면을 차리고 젊잖게 먹고 마셨더라면 주인도 제자들도 함께한 자들도 불편해서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평소에 잘 먹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그런 자리에서라도 마음껏 먹고 마셔야지요. 예수님의 마음씀이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그 날따라 경건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지키는 금식하는 날이였다는 점입니다.

바라새인들은 목요일, 월요일 주 2회 금식을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날이 목요일입니다. 40일 금식하고 나서 율법을 받아서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고요.

한 마디로, '울생율사-율법에 살고 율법에 죽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금식이었지요.

그들은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잘 지키기 위해) 율법 바깥에다가 울타리를 쳤던 자들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에 앞서 사람이 만든 조항들을 먼저 지켜야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율법의 정신-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문자 그대로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율법을 해석해서 지키는 속좁은 형식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율법준수란 모름지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저주시는 바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기만족, 공명심, 나아가 자기의(self-rightousness)를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러했으니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셈이지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자기들의 선생이 한 금식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시야 40:3, 요1:23)로서 백성들의 죄를 슬퍼하며 '회개의 금식'을 한 선생의 심정을 모른, 종교적 행위로서의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양태의 -기독교 모양을 내는- 일반화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생명없는 박제화된 진열품으로서의 일반종교 중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항상 말씀과 기도로 성령안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지금 하나님이 오시건만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왕의 대로'는 있는데 말입니다.(요단계곡을 따라 나 있는 king's highway를 말합니다)

울퉁불퉁한, 길 아닌 길로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오시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백성의 마음에 대로를 수축해야 합니다.그래서 요한은 금식하며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지요.

15절 답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빗대어 설명을 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는 '신랑집 아들들'을 말합니다. 신랑의 결혼잔치를 돕는 신랑의 친구들이지요.

몇 날 며칠동안 흥겨운 잔치가 계속 되도록 신랑을 돕다가 잔치끝날에는 신부집에까지 신랑과 동행하여,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마 25:6)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이들이 바로 혼인집 손님들(신랑집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은 잘 감당하였건만 그의 제자들은 아직은 잘 모르고 있었기에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스승 세례요한의 금식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예수님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대해 오해하여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지요.

15절의 은유적 답변에서,
'슬픔' '빼앗김' '금식'이란 단어를 들어서 신랑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즐거움(기쁨)의 반의어는 슬픔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놀라울 정도의 극적인 표현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랑을 빼앗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빼앗긴다는 것은 별세(원문- 누가복음 9:28- 엑소도스-탈출, 의미상으로는 구출)의 다른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실상은 엑소더스입니다. 모세시대의 출(엑소더스)애굽이 그 모형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죄인들이 회개하여 예수님과 함께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는(엑소더스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로 누릴 영원한 기쁨의 '맛보기'로서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면, 제자들(신랑집 손님들-아들들)은 슬퍼하며 금식(금식이란 죽는다는 말입니다. 곡기를 끊으면 죽습니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겠습니까. 제자들 또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금식을 아니한다 할지라도 금식하는 것이나 바를 바 없었던 셈이지요.


마지막 두 구절의 은유-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금욕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도래했는데,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천국-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는데도 여전히 옛 관습과 사고의 틀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생베를 잘라서 헌옷에다 붙이는 길쌈하는 여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몇 번 빨게 되면 생베가 헌옷을 당겨서 옷이 너덜너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베도 헌옷도 다 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새 포도즙을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습니다. 헌 가죽부대란 이미 써먹은(부풀대로 부푼) 염소나 양가죽 부대를 말합니다. 이미 늘어난 부대에 또 다시 포도즙을 넣어면 나중에 발효돼서 터져버리고 맙니다.

복음의 페러다임이 변한 게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시작되는-하나님의 약속인 원복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구원역사 내지는 구속사로서의 구약성경-전반에 걸쳐서 면면히 이어져온 복된 약속의 말씀입니다.

다만, 바라새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성경에 대한 오해가 원인제공을 했기에 이렇게 교훈하시게 된 것이지요.

이 시대를 한 번 돌아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화석화 된 전통이나 교리를 붙드는 것이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신교(개신교)의 후예들은
'일신우일신' 해야 합니다.

변함없는 말씀(텍스트)으로 변화하는 상황(컨텍스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두 지평의 만남을 통해 시대의 등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럼과 함께 시대를 바르게 읽어야겠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진열장에 종교상품 중 하나로서 복음을 걸어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헛된 세상, 일장춘몽같은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시고 진정한 엑소도스(엑소더스)를 통해서 영원한 기쁨의 새 포도주를 맛보시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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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아, 돌아오라!

본문읽기:마마태복음 9장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아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많았습니다. 아무 소망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은 물론이고요.

예수님 당시에 '죄인'이란 아주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자들인지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소문난 자들이라서 모든 이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자를 가리켜서 '죄인'이라 불렀습니다.

멸시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1.주사위 노름꾼.

1.고리 대금업자.

1.여관(사관)에서 사창을 업으로 포주 및 창녀(당시 여관은 사창굴이었다고 합니다).

1.세리(tax collectors) -로마 관리 아래서 세금을 징수하는 공무원(마태의 경우)과 및 세금 청부업자들을 말합니다.

1.소작료 징수인(publicans)- 부유한 지주에게서 경작지를 임차해서 여러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주고 소작료를 징수했습니다. 이들을 당시에는 사기꾼 내지는 날강도로 여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주와 약정한 소작료에다가 자기 몫을 지나치게 보태서 징수했기 때문입니다.

한 철 수입으로 1년을 놀고 먹어야 했기에 무리하게 징수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농부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다음 해 농사를 계속 지으려면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에 소작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1.목자-다른 사람의 땅으로 양을 몰고가서 풀을 뜯게 했다는 오해, 그리고 주인의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당시의 냉대와 경멸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위에 열거한 자들을 통칭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특히 종교자도자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은 스스로 생각해도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조금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공로(merite)사상으로 보자면, 죄인들이 아무리 선한 행위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지은 죄가 너무 크기에, 구원받기에는 (저울에 달아봤을 때) 함량미달이라 여긴 것이지요.

그래서 영원히 구원받지 못 할 죄인으로 낙인찍힌 겁니다.

율법조항을 지키는 자신들의 공명심을 만족시키코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자기의(self-rightoussness)'의 기준에 따라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판단기준과 하나님의 심판기준은 다릅니다.

이 세상에는 죄인아닌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국가의 법치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사회의 질서를 위해 하나님이 세운 제도가 바로 국가입니다.

만일 현대에도 앞에서 열거한 종류의 직업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멸시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개발도상 과정에서의 근현대)의 세태를 돌아보면 그 보다 심한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한 번 나열해볼까요?

1.부둥산투기꾼 - 이들이 취하는 소득은 단순한 불로소득이 아닙니다. 합법을 가장해서 불법적으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자들입니다. 부동산 투기는 하나님이 보실 적에는 날강도나 다름없습니다.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지 않고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을 꾀한 과도한 개발정책이 이런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교회직분자들 중에도 이에 편승해 부를 축적한 자들이 있습니다.

1.제2, 제3 금융권의 고리대금업자나 다를 바 없는 대부업자들.

1.일부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부정부패-국민의 공복(머슴)이 아니라 상전노릇하면서 자기 배를 채우는 탐관오리들.

1.세금을 포탈한 - 재벌, 대기업 및 중소기업주, 부동산투기꾼, 고소득전문직 및 자영업자 등...

(전부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외도 나열하자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그래도 생계형 범죄였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부를 축적한 자들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죄인취급을 받지도 않으면서 돈과 권력에 기대어 '호가호위' 합니다.

그런 자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세태가 안쓰러울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마태는 레위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무너진 당시 유대사회에서 레위인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 하고 민족의 반역자 소리를 듣는 로마의 세리가 되었던 것이지요.(레위인에 대해서는 따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태를 찾아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보던 사무를 당장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를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잔치석에는 많은 세리와 앞에서 열거한 죄인들이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 하나가 딴지를 건 것입니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죄인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에, 한 번 외쳐봅니다.

죄인들아~ 속히 주 예수께로 돌아오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제외하고)

죄인 부르시는 음성이 모든 이에게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아이야, 안심하라-

본문읽기:마태복음 9장 1-8절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작은 자야 안심하라-

'작은 자'란, 아이를 말합니다.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누가복음 3장에서 12살되신 예수님을 향해, '아이야'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중풍병자가 아이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형같은 심정으로 친근히 부르는 호칭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중풍병자가 아이처럼 심령이 낮아져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걷지도 못하고 침상에 실려 온 중풍병자는 심신이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혼자서는 대소변도 보지못하는 몸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되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심하라"고 하신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그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데리고 온 자들(2-4명으로 추정)과 중풍병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합니다. "그들"의 중심인물은 중풍병자입니다.

원문에는 '사람들'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데리고오다'라는 동사가 복수형태로 되어 있을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안심하라고 하실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러고보면 중풍병자는 믿음으로 나아오되,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이같이 자신을 낮춘 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애통하며 몸부림쳤습니다. 죄의 무서움과 죄책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같이 심령이 낮아졌던 것이지요.

천국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며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자, 혼자서는 올 수가 없었기에 침상을 든 친구(아니면 지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나아온 것이지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중풍병자의 중심을 보시고 그렇게 사죄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능을 나타내고자 무조건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창세전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을 주창하는 교리체계를 따르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주께 나아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중심으로 돌이켜 자복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양털보다 더 희게, 흰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시는 것이지요.

더럽고 냄새나는 누더기를 걸치고 왔을지라도 의의 세마포 흰옷-빨래하는 자가 도무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는-으로 갈아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자는 위험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큰 중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신마취가 된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죄에 민감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는 소망이 있습니다. 가책을 느끼면서도 계속 죄가운데 머문다면 양심이 서서히 무디어져서 나중엔 가책도 안 느끼게 됩니다.

어린 아이와 노인을 놓고 보면 알 수가 있지요. 노인들은 마음도 몸처럼 굳어져서 회개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로마서-

죄에 대해서 민감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지중에라도 죄를 지었다면 즉시 회개(죄의 자백)하고 돌이켜 죄에서 멀리 떠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입에 발린 습관적 회개인 지 중심으로 돌이켜 통회자복하는 지를 다 아십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께서 받으시는 자마다 성령께서는 "안심하라"는 말씀을 우리 심령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지난 번 글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백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죄를 짓고서도 안심한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복록입니다.

죄인된 자리에 계속 머물면서,

어떻게 의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필자는 예전에(20여년 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24시간 내내 누려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6개월이나요.

그 당시 어떤 목사님이 그런 경우가 참 더물다고 하더군요.

배에서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더군요.

가슴에는 기쁨의 샘이 터져 한없이 솟아나고요.

하나님의 의가 온 심령과 육체와 삶에 부어져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 절감 통감케 되더군요.

그러고 보면 주님이 괜히 안심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내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다고 생각되면,
마음을 물같이 쏟으면서 통회자복하십시오.

주님은 중심으로 돌이키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의 바다는 한없이 큽니다.

사죄의 은총을 받고 그릇이 준비된 자에게는 영육간에 구하는 것을 부어주십니다. 믿음의 분량만큼요.

진심으로 회개하셨다면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전히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신앙의 기초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십시오.

반석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찢어질 정도는 아니고 비교적 가난했다는 뜻입니다. 굶어 본 적도 없고 헐벗지도 않았습니다.

농사라 해봤자 전과 답을 합쳐서 열 마지기 정도 지었을 겁니다.

제가 만일 도회지로 유학을 안 가고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지게를 졌다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 지도 모르지요.

시골중학교, 일명 논두릉중학교 가라고 원서를 사오셨길래, '아부지 그 갈라모 차라리 지게질랍니더'. 좀 당돌하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 걸어서 십오리나 가야 하는 그 학교에는 가기가 싫더라구요. 집안 형편도 생각지 않고 우기는 놈한테 져주시더군요.

그건 그렇고,

여나무 살 시월 중순, 그러니까 이맘 때 였던 것같습니다.

"야야~ 아랫 동네가서 느그 아부지 모시고 오너라"

"또 가라꼬예?"

시계도 없던 시절이라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밤이 꽤 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학교갔다와서 소몰고 산에 가서 소 먹이고 소꾼들하고 온 산을 쏘다니며 놀다가 저녁먹고 일찍 단잠을 자는 놈을 깨우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지요.

투덜거리며 신작로를 걷습니다. 검정고무신으로 자갈을 걷어차봤자 발가락만 아픕니다.

그날따라 그믐 쯤인지라 온 사방이 캄캄하더군요. 후미진 곳을 지날 땐 머리가 쭈삣거립니다.

우리 아버지 말씀에, '늦은 밤에 이곳을 지날라치면, '이빨빠진 개오지(늙은 호랑이)'가 저 위 언덕밭에서 소쿠리로 퍼붓듯이 흙을 퍼붓는다'는 말을 들은지라 오금이 저립니다.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공굴(일제 때 건설한 콘크리트 다리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길이가 50-60m 정도)을 지나고서야 좀 안심이 되더군요.

제가 보기보다는 간이 큰 놈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야밤 중에 아무도 안 다니는 큰 재를 두 개나 넘어 집에 왔다는 거 아닙니까.

수 십리 떨어진 외진 산골 외갓집에 갔다가 저녁 해거름에 집을 나서다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동네 어른들이 혀를 내두르더군요. 그것도 눈이 둥그래가지고. 다, 초등학교 시절에 익힌 실력(?)덕분이었지요. ㅎ

아랫 동네 이 점방(가게) 저 점방을 기웃거립니다. 한 곳에 갔더니 구수한 우리 아부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부지! 집에 가입시더"

"국장! 아들래미 왔다. 고만 마시고 집에 가소!"(우리 아버지 별명이 그랬음)

부자는 신작로를 걷습니다. 우리 아부지 걸음이 어찌나 느리신지... 뒤돌아보면 저 뒤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걸어오십니다. 그것도 시조를 읊으시면서요.(청산리 백계수야~를 가끔 읊으셨지요)

드디어 공굴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후미진 곳을 지나도 무섭지 않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까 아부지가 안 보이는 게 아닙니까. 다시 돌아가보니까 다리걸 밑으로 내려가고 계시더군요.

"강상, 있는가!"

"아이구~ 어르신, 어서 오이소"

자다가 '아닌 밤 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맨발로 잠자리에서 내려오더라구요. 옆에서 자던 강상 부인도 부시시 일어나더군요. 얼굴이 기찮다는 표정이더군요. 딸래미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고.

소주 됫병(1.8리터)에 절반 안 되게 남은 술을 꺼내오고 동냥해서 얻어온 김치도 내오고...

'아무리 술을 마시고 싶어도 그렇지, 거지가 동냥해서 얻어온 술을 얻어 마시다니!'

알말의 존경심마저 사라지려는 그 당시 필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아부지! 고만 마시고 가입시더"

아무 때꾸도 없습니다.

대신 강상이, "도련님, 여기 걸터앉으이소!"

기어코, 강상이 애지중지(?)하는 그 독한 쐬주를 남김없이 주거니 받거니 거의 다 비우고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더군요.

'아~ 우리 아부지가 이런 분이었나?
예전엔 미쳐몰랐네!"

그리고나서 세월이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니고 있었는데(꽤 알아주는 명문임), 고2 여름방학 때 우리 아부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참 안타깝고 슬퍼더군요.

삼우제를 마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아무개야~ 거지 강상이 니 찾는다" 동무들의 말에 나가보니 강상이 울먹이며 다가오더군요.

그 못생긴 얼굴(키도 작고 코도 반쯤 내려앉고)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러더군요. 누런봉투를 제 손에 쥐어주며 손을 잡고서,

"부음을 늦게 들어 인자사 왔심미더. 죄송합니더. 도련님, 부디 성공하이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여나무 살 때의 '아부지와 강상'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아부지는 강상한테 언제까지 동냥하며 살려고 그러느냐면서, "배미(뱀) 잡아라, 내가 도회지에 팔 곳을 알아봐 줄게". 그 뒤로 집게들고 망태메고 배미사냥꾼으로 나선 강상입니다.

어린 딸래미가 좀 자라자 도시의 아부지 육촌 형님집(당시에 부자였음)에 가정부로 들여보내고요.

돈이 모이니까 공굴밑에서 살 이유가 없었지요. 동냥하던 그 지역을 벗어나서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강상이 거지로 살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동냥하던 여자'를 만나 공굴밑에서 가정을 꾸렸던 것이지요.

아~ 세월은 그 공굴밑에 흐르던 물과도 같습니다. 벌써 반 세기도 더 된 아련한 옛날이야기 이니까요.

덧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 잠시 추억의 주머니를 뒤적여 몇 자 올려봅니다.

(강상의 간절한 당부와는 달리, 필자는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목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독자제현의 건승을 빌어봅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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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도 알아본 그 분, 예수 그리스도
본문읽기:마태복음 8장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잇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전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앞 단락에서는 물질계(현상계)에 속한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아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지 못했음을 마지막 문장에서 부각시킴으로써, (이 이가 누구시길래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이어지는 본 단락에서 반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겠지만 마태의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조직적이고 치밀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관에 근무하면서 '계수'에 밝아 차변 대변(자산이나 자본과 부채의 항목을 기록하는 회계장부의 좌우편 란)이 한 푼도 틀림이 없어야 했던 마태의 그런 인간적인 면을(경험까지도) 사용하셔서, 성령께서는 마태복음을 기록케 하셨던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영계의 귀신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신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의 증거를 받으실 하등의 이유나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계심'에 대해서 나름대로 증명코자 애를 씁니다. '신존재증명'이란, 사람이 증명한다고 해서 증명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God's self-revelation)인 성경에 그 분의 계심, 그것도 영원히 계심이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위해 철학적 사변으로 세월을 낭비합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인생은 남이 인정해 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안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남의 이목이나 판단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판단은 말씀의 판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성경만이 삶의 유일한 표준이요 판단 기준입니다.

고구마는 딱딱해서 칼이 잘 안 들어갑니다. 두부는 물렁하기에 손가락으로 찔러도 잘 들어갑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부드러운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십시오. 판단하지 마시고요. 판단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다만 현대의 혼탁한 영계를 분별은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누가 알아주면 어떻고 몰라주면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 존전에 살아가는 인생으로서, 주님이 보시기에 옳은 길로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가난한 양반이 잔치집에 가서 체면차리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 들으면서 집에 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사람들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자칫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왜 필자가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드리느냐 하면 현대교회가 세상 사람들한테 안 지려고 너무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으로 복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있는 대로 사십시오.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봤다고 해서 주님이 흐뭇해 하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복음선포와 고치심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심을 알아먹지 못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심을 귀신들도 알아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계도 장악하고 있으신,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 귀신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이심를 밝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땅은 인간이 지들 마음대로 살아가는 지들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에서 벗어날 그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그 하늘들의 그 나라)은 힘차게 나아가는(전진하는) 종말론적 천국입니다.

귀신들도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영계와 현상계를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인간들은 심판이 있는 줄 조차 모르고 지 맘대로 살아갑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종말론적 긴장을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자신이 천국(하나님 나라)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천국에 속한 것입니다. 성경은 피안의 세계로서의 천국에 대해 그리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대권이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그 분이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 자체가 천국이 이미 도래했음(왔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너무 '천국 지옥' 간증 그런 것에 관심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여러분은 이미 천국-하나님 나라에 거하면서 그 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내가 그런 신분인 지 잘 모르겠다고요?

하나님 나라(천국) 백성의 특징 중 하나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린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점검하고 누리십시오. 신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분깃입니다.

죽어서 천국가려고만 하지마시고요.

구자준 목사2016/10/1213: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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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작은 자들아-

본문: 마태복음 8장 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가버나움 지경에서 건너 편 가다라 지방으로가려면 배타고 꽤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에워싸는 무리를 벗어나서 잠시 몸을 피하셨습니다.(지난 번 칼럼, '너는 나를 따르라' 참조)

그동안 쉴 겨를도 없이 사역을 하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던지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것도 바람이 불어 큰 파도가 일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자고 계십니다.

그 배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가 네 명이나 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호수 정도의 크기에서는 큰 파도가 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중해면보다 현저히 낮은 요단계곡의 특성상, 그리고 눈덮인 헬몬산의 영향으로 찬 기류가 생성되면 요르단 계곡으로 하강하면서, 바람이 갈릴리 호수로 강하게 내리달아 큰 풍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지요. 현대에 이르러 호수 밑바닥을 조사해 보니 침몰한 배의 잔해가 많다더군요.

"우리가 죽겠나이다"-엄살이 아닙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자면 영락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죽게 된 자들이 느긋하게 그리고 젊잖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제자들 나름대로 바람과 파도를 이겨보고자 애를 썼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님을 깨우는 길밖에는 달리 어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사실 배가 침몰하면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도 배와 함께 수장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들의 생각일뿐이었고! (마태복음 14장 오병이어 기적에 이어지는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지요)

무릇(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사는 인생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그러니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자들아?"

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아이구 무서워라~'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벌벌떠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그려보면 되겠습니다.

인간은 강한 것같으나 약한 존재입니다. 다만 강한 체 할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리면 강하고 능하신 그 분이 우리의 약함을 대신 담당해 주시는 것이지요.

인생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항해를 하면서 다들 자기가 바라는 소원의 항구로 배를 저어가지만 죽음이란 풍랑에 언제 침몰할 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신자들의 경우에는, 불신자들과 겉으로 보기에는 다를 바 없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마지막 날에 영생의 부활을 하기에 죽음도 소망 가운데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잠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잠을 자고 깨어나듯이 때가 되면 다 부활하게 됩니다. 믿는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들은 영벌의 부활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육신이 잠시 잠(죽음)을 자는 동안에, 거듭난 속사람(영혼)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복의 통로로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의 몸을 덧입혀 주심으로 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온전한 모습으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면서 오실 그리스도를 기쁨 가운데서 바라봤던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의 구속사의 문맥에서도 이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얼마나 작은 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올리고피스토이" 입니다. 작다는 말(올리고스)과 믿음(피스토스)이란 단어가 결합된 형용사인데 복수명사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올리고당 아시죠? 아주 작은 단당으로 이루어진 물엿 비슷한 감미료 말입니다. 작은 것은 아무리 많이 모아도 작을뿐입니다. 결코 크지 않습니다. 제자들 모두의 믿음의 합이 겨자씨보다 더 작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안타까워하고 책망하시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데리고 다니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포기하고 아주 멀리 떠나지 않는 이상 주님은 우리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믿음이 작을지라도요. '올리고피스토스' 같을 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를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를 만나면 우왕좌왕 하면서 두려워 한다는 점입니다.

호수가 잔잔할 때에야 믿음이 있으나 없으나 별 문제가(적어도 표면적으로는요) 없지만, 죽게 될 정도의 큰 풍랑을 만나게 되면 비로소 믿음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을지라도 즉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고 때로는 징계도 하시지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눈에는 위기같아 보이고 죽을 지경이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즉시 응답하십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에 바다를 한 번 보십시오. 바람은 그쳐도 너울은 한동안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꾸짖자마자 바람도 바다도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타이밍상 우연히 바람이 그친 게 아닙니다. 바람과 동시에 바다도 아주 잔잔하게 된 기적의 현장입니다. 사실 우리에겐 놀라운 기적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것은 그 분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하나님께 복종하건만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여 타락한 인간은 언제 쯤 주께로 돌아올런지...

종일 손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주님 품으로 속히 돌아오십시오.

"어서 돌아오오"-통합찬송가 527장-
다같이 찾아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글: 구자준 목사

- 태풍아, 물러갈지어다~ -

본문읽기:마태복음 8장 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본문 강해에 앞서, 제 자랑(?) 좀 해야겠습니다. 
사실 간증이란 게, 자칫 자랑처럼 들릴 수 있기에 에둘러 드리는 말씀입니다. 새겨서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태풍아! 물러갈지어다~"

두 손을 높이 들고 먼저 하나님께 묵도하고 나서, 옆에 사람이 있기에 작은 소리로 그러나 강하게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에 몰두했습니다. 왜 태풍을 향해서 그런 명령을 했냐 하면, 지방에서 목회하는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형님 큰일났습니다."
"왜 그러는데?"
"태풍이 지금 남해상에서 곧장 북상하고 있는데 몇 시간(다불과 두 시간) 뒤에 고향집을 강타할 것같습니다. 어머니 혼자 계시는데 지붕이 날아가면 집도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노인네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같습니다. 아들 둘 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었기에 우리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저보다 늦게 지방의 모 신학대학에 입학한 동생은 공부를 마치고 이미 개척교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수도권의 어느 신대에 다니다가 중단하고 몇 년 쉬다가 다시 서울에 있는 다른 신학교에 편입해서 야간에는 학교에 다니고 낮에는 사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그 학교는 오래 전에 대학원대학교로 바뀌었더군요)

'형제는 용감했다(?)'는 한 때 유행했던 말처럼, 둘 다 신학을 했으니 홀 어머니를 제대로 모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불청객인 대형 태풍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식으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몇 해 전 대형 태풍이 남부지역을 강타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동생이나 저나 마찬가지로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그런 형편이었던 것이지요.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고 했던가. 저도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뭐 그리 걱정하노. 기도하면 되지" 하고선, 전화를 끊고서, 어머니가 걱정이 돠어서 기도를 하고 태풍을 향해서 명령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태풍이 소멸이 되었는 지, 않은 지를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티비가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고 있었지만요) 기도를 한 지 30여 분 지났을 때,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그 땐 핸드폰이 없던 시절입니다)

"행님! 대단하십니다. 행님이 기도하신 그 순간에,
태풍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대한해협(부산과 대마도 사이)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티비에서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그 날 오후에 제가 기도하고 태풍을 향해서 명령한 그 시각에 정확히 태풍이 직각은 아닐지라도 거의 70도로 방향을 틀었더군요. 기상 관계자들도 이외라고 하더라고요.

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느냐가 오늘 간증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그런 일이 있기 한 달 열흘 남짓 전에, 늦장마가 와서 비도 억수로 쏟아진 일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집사로서 주일학교 부장을 맡아서 설교도 하고 교사들도 지도하고 있을 때였죠. 

"하나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어린 애들이 어떻게 교회에 올 수가 있겠습니까. 비야 안 올 수 없고 와야 하겠지만, 애들이 하루 네 번, 그것도 새벽 오전 오후 저녁 모임에 교회 오고 갈 적에는 비가 그치게 해주세요. 제가 기도의 손을 들면 비가 그치게 해 주세요"

3박4일 동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철  한가운데서 비 한방울 안 맞고 어린 생명들이 여름성경학교에 한 번도 안 빠지고 다 출석했다는 거 아닙니까.

부족한 종이 손을 들면 비가 그치고 손을 내라면 비가 오는 놀라운 응답을 하시더군요.

주일학교 애들(6세-13세)이 집에서 교회 올 시간, 마치고 집에 갈 시간이 되면 비가 억수같이 오다가도 보란듯이 뚝 그치더군요. 그것도 무려 수십 번이나요.

교사들이 나중에 여름성경학교가 끝나고 나서 놀라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요. 제가 그렇게 해 주십사고 기도했다는 말을 했지만, 표정을 보니까, '에이 설마! 부장집사님이 기도해서 그랬겠어?' 하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더군요.

놀라운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태풍을 물리친(?) 그 일이 있었던 직후에, 필자에겐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려야 할 중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신학을 계속해야 됩니까. 아니면 그만 두어야 합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 기도를 하기 한두 해 전에, 심장이 뛰다가 안 뛰다가 해서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죽는다는 것이 몹시 불안하고 겁이 나더군요. '죽으면 주님 앞에 제대로 설 수나 있을 지...' 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의 체험도 있었던 터라,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기도제목을 정했습니다.

"주님, 지난 8월 마지막 주에 보니까 애들이 60명 정도 나왔더군요. 주님의 뜻이라면 이 번 주에 70명을 넘기게 해 주세요." (제가 주일학교를 맡았을 연초에는 35- 40명 정도 출석했습니다)

필자는 그냥 덤덤하게 기도했을뿐입니다.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필자는 예전에 부르짖는 기도를 수 없이 한 사람입니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기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음에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체험을 토대로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아, 그런데 71명이 출석을 했더군요. 여름성경학교 때도 70-80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라서 이것이 응답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님 솔직히 응답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응답해주세요. 다음 주에는 80명을 넘기게 해주세요"

아, 그런데 정확히 81명이 출석을 했더라구요.

이 미련하고 더디 믿는 놈이 또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응답이 맞기는 맞는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응답해주십시오. 그러면 사명이 있니 없니 그런 말 안 하고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가면서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그 다음 주에는 정확히 92명이 출석했다는 거 아닙니까. 온 동네 애들을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다 불러 모으신 것같더군요. 연속적으로 3주에 걸쳐서 응답을 하신 게지요. 이 부족한 종이 확신을 갖고 목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그렇게 응답하신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납니다 (그 때는 성경 본문을 읽어주고 기도만 해도, 회개의 눈물이 -주일학생뿐 아나라 교사들까지도: 바다를 이루었던 그런 시절이였습니다)

* 다음 번에는 위 마태복음 본문을 가지고 이어서 강해를 하겠습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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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방언 이해


아래 글은 꽤 오래 전에 인터넷에 올렷던 글입니다.
저는 제가 쓴 글을 보존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가 퍼가는 것을 말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수 샘물이 제게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경과 함께 성 삼위 하나님이 늘 저와 함게 하시기에요.^^
옮겨와 봅니다.

"저는 은사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은사를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각자에게 나눠주신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저는 초신자 시절에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30년 가까이 방언으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계에서 방언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제가 하는 방언이 혹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방언기도를 계속 했습니다

일부 개혁주의에서는 은사는 성경시대로 끝났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방언을 의미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심한 분들은 개구리 소리라 합니다
이단이나 타종교 무당도 한다면서 방언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저도 중간에 회의도 느끼고 하지말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확신 가운데 더욱 열심히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헛소리이거나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은사에 대한 이해가 은사를 받은 자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자신과 의견이 다를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방언에 대한 저의 생각은 한마디로 매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은사 중에서 제일 흔히 볼 수 있는 게 방언의 은사라고 합니다(표면적으로는)

흔하다고 해서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가 얼마나 흔합니까. 그런데 공기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귀한 줄 모르는 자들은 은사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각 지체에게 나눠주십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도 있고 자신의 영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은사도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영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대표적인 은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영의 비밀을 하나님께 아뢰기에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기에는 참 좋은 은사입니다
공중 예배나 여럿이 기도하는 자리에서는 삼가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도 내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방언으로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쉬지않고 매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맑아집니다
평안한 심령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집중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면
제가 알지 못 하는 부분들이 마음에 떠올라
그것을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냥 마음으로 기도할 때는 생각지 못 했던 것들이
깨달아지고 그것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으로(방언으로)만 기도하면 그 기도의 내용을 모르기에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 합니다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말씀만으로 충분한 자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기도가 정말 유익한 은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성령세례의 표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으로 세례받아 거듭난 자들입니다
방언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신 은사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은 요엘서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구속사의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표적입니다
유일한 사건이기에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을 위로부터 믿는 자들에게 계속 부어주십니다

능력을 받아 복음의 증인되라고 성령을 주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성화를 위해서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열매맺는 삶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도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힘쓰면서 성령충만 하기를 구하면 응답하십니다
생활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열매를 맺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적으로 성령세례는 개인에게 있어서
단회적이지만(거듭남의 사건) 성령충만은 믿는 자들이 계속해서 구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그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무슨 표적이나 은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거듭났음에도 확신이 없거나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심으로 확신을 갖게 되고 은사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령세례라 함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임하신 역사적으로 유일한 성령 임함의 사건을
모방하여 지금도 간절히 기도하면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미 믿고 거듭나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들이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은사를 잘 활용하면 교회를 더욱 잘 섬길 수 있고
복음도 힘있게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자들은 우월의식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니 잘 믿어라고 주신 것인 줄 알고 겸손히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받지 못 한 자들도 은사를 받은 자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인간적으로 판단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초신자 시절에 방언을 개구리 소리라고
(속으로는 귀신소리라 생각했는지도)
폄훼하던 어떤 목사님을 그동안 눈여겨 보아왔는데
하나님이 제대로 쓰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역에 열매도 없고 그냥 남들에게 민폐나 끼치는 수준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은사를 받은 자들을 인정할 수 없다면 입이라도 다물어야 합니다
함부로 입을 벌려 은사받은 자들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섭섭하게 슬프게 노하게 하는 일을 예수 믿는다 하면서
자행하는 일부 교계의 잘 못 된 분들이 있기로 이 글을 올립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하는 일이 없으시길 당부드립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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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장 18 - 2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산자여 따르라-

마치 '임을 향한 행진곡'에 나오는 가사같습니다만, 저와 여러분은 산자이기에 생명주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제목을  그렇게 븥여봤을 뿐입니다. 

필자는 세상적 이데올로기나 그 어떤  '이즘'에도 물든 사람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성경주의자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보수 진보를 초월하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신학적 도그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영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삶으로나 가난한 목사일 뿐입니다.

한 때, 현대철학의 사조에 관심이 있어서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 질 딀레즈나 미쉘 푸코의 철학적 사변에 잠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지만 이내 식상해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직 성경말씀에 천착하는 세월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을 시녀로 거느린다고들 말을 하지만(일부 신학자들의 말일 뿐입니다) 필자는 모든 학문적 영역의 고유한 입장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우월주의에 물든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입장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수하는 사람입니다.

여담입니다. 밥만 먹고도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하등의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맨날 밥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가끔 짬뽕이나 짜장면도 먹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중간 중간에 자전적 에세이를 칼럼형식을 빌어 올리고자 합니다. 식상함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번 글 다음에 올릴 생각입니다.

각설하고,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입니다. 죽어가는 자도 없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하는 말인 지를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숨쉰다고 다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속에 참된 생명, 하나님이 부여한 새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산자와 죽은자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주님의 사역에 대해 자신들 나름대로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서기관과 제자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겉으로는 달라보이지만 실상은 똑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와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먼저 서기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보셨습니다.(단순히 예수님 주변에 있는 무리가 아닙니다. about him-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분 주위에 둘러 서 있는 무리를 보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역성경의 역동적 대응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왜 에워쌌을까요. 쉽게 말해서 어디로 가시지 못 하도록 둘러 진쳤다는 말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스크럼을 짜고) 우리들 만을 위한 분으로 모시고자 했던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만민의 구주이신 줄 몰랐기에 그랬겠지만요.

 '우리가 당신을 따를 터이니 당신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주소서. 우리가 당신을 추종하면서 세력을 모으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의도를 아시기에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명하신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별로 살지 않는 호수 건너편 데가볼리(데카 폴리스-열 도시로 구성된 도시국가) 지역으로 배타고 가시면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의 맹점과 병폐는 사람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을 불려서 선교와 구제를 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우면서요.

하나님 나라는 수와 부와 물리적 힘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왕국관과 별 다를 바 없는 교회관을 가진 일부 교회들이 있습니다. 특히 대형교회가 그러합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괜히 큰 교회 기웃거리다가 배곯는 수가 있으니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들의 심리를 잘 압니다. 로마의 수탈로 인해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무리 모두가 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을 바르게 안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메시야 운동을 했습니다. 로마를 깨부술 정치적 메시야를 군중들 스스로 만들어 옹립하고 메시야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서기관이 나선 겁니다.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지금이야말로 선생님을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 것이지요.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선생으로 모시고 한 수 배우다가  때가 되어 세력이 커지면 한 자리 할 모양새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좋은 자리만 찾다가 이제 나를 보고 더 좋은 것을 기대한다마는 나는 네가 바라는 그런 선생이 아니니라'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습니다. 청빈한 삶을 사심을 강조코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동가식 서가숙' 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한 곳에 정착하는 삶을 살 수 없으십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나서는 나그네같은 목자의 삶입니다. 

모든 자가 복음을 들어야 하기에 쉴 겨를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안식처를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길을 잃은 목자 없는 양떼가 온 사방에 있는데, 어디다 거처를 마련하고 정주한단 말입니까.

사람은 안주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정처없는 나그네 삶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다 하늘 본향을 향해서 가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정처없는 삶이기에 고난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면서 천국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지요.

비록 집이 있고 좋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훌훌털고 떠나야 하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제자들도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서기관처럼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나이다"고 하는 자는 제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제자 훈련이 지식적 교육을 받는 것으로 가능하다면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제자라고 하는 자가 예수님께 요구하는 질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는 것을 잠시 뒤로 하고 집에 가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그 제자의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연로하기에 집에서 기다리다가 죽으면 장사지내고 다시.오겠다는 말입니다.

효자소리 듣고 싶다는 말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아버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다, 산 사람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자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체면차리고 인정사정 다 봐주고 언제 주의 일을 합니까. 그러다가는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못합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도록
버려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제자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입니다. 무릇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마다 자기 삶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복음전파는 화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요. 

세상사는 이치나 사람사는 도리에만 매이는 자들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스리기에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다들 나름대로 잘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아우성을 치며 난리입니까.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그러나 자세히 보십시오. 산자로서 그렇게 하는 지 아니면 죽은 자로서 그렇게 하는 지를...

주님 없는 삶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어디 육신적으로 죽은(죽을) 자들를 위해서 그 귀중한 세월을 허비한단 말입니까. 효도는 살아 있을 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만큼 주의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세상의 이목에 매여 집에 가겠다는 그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제자교육은 바로 이런 겁니다. 주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명목상의 제자만 잔뜩 양산하지 마시고!

결론은 이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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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섬김-

지난 번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귀신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오거늘-

귀신들린 현상이 뚜렷한 경우에만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모든 병이, 심지어 감기조차 귀신들려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도 귀신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당신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거짓 사설을 펴는 사역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가계의 저주 운운하면서 '그것을 끊어야 당신의 인생이 풀린다'고 겁(?)을 줍니다.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사역자가 참된 종입니다. 자신을 추종케 하거나 자신에게 와야만 진리를 알게 되고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 엉터리라고 보면 틀림없습나다.

모든 질병의 원인은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는 정신적 육체적 연약에 있습니다. 근원적으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진, 환언해서 생명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오는 특징이 가시와 엉겅퀴의 삶이요, 육신의 질고입니다. 귀신들리는 것도 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여 멸망으로 이끌고자하는 마귀의 악한 궤계입니다. 그렇지만 마귀는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마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종국이 어떠한 지를 요한계시록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 자체가 이미 대적자 마귀(사탄)체계의 붕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라(왕국)'란 표현을 마귀체계에 같다붙이는 것 조차도 아깝습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는 맥을 못춥니다. 예수님이 이미 귀신의 대장 마귀(사탄)를 결박하셨기 때문입니다. 혹 귀신 노이로제에 걸린 분이 있다면 이제 안심하십시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물매-
해질무렵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이 온 사방에 퍼졌습니다. 못 고치는 병도 없다고 합니다. 이미 날이 저물어 갑니다. 그런데도 몰려옵니다. 이는 먼 지역에서 소문을 듣고 고침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아침일찍 나섰지만 걸어오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집이 있는 지역에만 유독 귀신들리고 병든 자들이 많았을 리 만무합니다.

생명의 향기는 퍼져나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바람을 그물(net)로 잡을 수 있습니까. 물고기나 잡으면 잘하는 것이지요. 마귀가 제 아무리 주와 복음을 훼방한다 할지라도 생명의 향기는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현대에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아니 빛의 속도로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이는 것처럼요. 극동의 한반도 오지에서 인터넷(net)에 글을 써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sns(터위터, 페이스북 등)뿐만 아니라 모든 인터넷 매체가 실시간으로 소식을 실어 나릅니다. 부족한 필자의 글도 온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는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옵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올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일일이 다 고치십니다. 한 사람도 내치거나 외면치 않으십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일 대 일, 인격적으로 대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십니다. 실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는 말씀이 실감이 갑니다.

장풍 비슷한 폼으로 집단적으로 쓰러뜨리는 현대의 엉터리 사역자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혀 다른 우리 주님의 사역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저자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마무리 짓습니다.

이사야서 52장 13-15부터 ~53장까지 입니다.

다 아는 말씀이라고 치부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본 인용구 한 절이 이것의 전체를 대표합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질고를 짊어지심은 메시야의 본분입니다. 표면적으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것은 이면적으로는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속죄양이 되어주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 of Jehovah)의 사상을 가장 선명하게 많이 예언한 이사야를 외면하고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고 쓸데 없는 선민사상에 젖어서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을 부연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 마태는 바로 앞 단락, 백부장에 대한 기록에 이어지는 짧은 본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어가는 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주님이 우리를 먼저 섬겨주셨습니다. 죄인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음으로서, 다시 말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서,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섬김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샌들을 신으므로 해서 발에 땀이 나고 먼지로 인해 때가 끼어 아주 더러웠습니다. 그 발로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의 발을 씻기고 손님들에게도 발 씻을 물을 대령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종들이 하는 일상의 섬김을 제자들에게 친히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먼저 섬기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어린양의 자리에서 말입니다. 하늘 보좌에 승귀하신 모습으로 계심과 함께, 여전히 어린양으로서 속죄사역을 감당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은 최후의 일인이 구원받을 그 날까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이루신 대속이지만, 적용으로서의 속죄의 효력은 항상 '현재'로서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황공한 마음과 종의 자세로 끝까지 주님을 잘 섬겨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복음과 함께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찾아가서 섬겨야겠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런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소원하며 간구합니다.아멘!

글: 구 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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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목사다-

1.목사는 목사(牧師)여야 한다.

목사란 말 그대로 맡긴 양을 치는(牧-칠 목, 혹은 돌볼 목) '양돌보미'이다. 양치기라 하면 격이 낮은 듯 해서 잘 안 쓰는데, 그러면 목자 혹은 목동이라 부르면 격이 맞을까.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단순히 약자이기 이전에 비천한 직업이 목자였다. 예루살렘에 분뇨 처리하는 직업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었던 직업군이었다. 오히려 주인의 양새끼를 도둑질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와 사회적 편견 속에서 목자들은 밤에 잠도 못 자고 양떼를 지켰다. 혹, 양을 잃거나 이리에 찢기기라도 한다면 물어주어야 했기에 가난한 목자들은 온 힘을 다해 양들을 돌봐야 했던, 실로 고달픈 직업이었다.(세리가 소문난 도둑놈이었 듯이 일설에는 목자도 도둑놈 취급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사(師)자 붙어서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 '놈(者)' 이상이 아니다. 놈이란 단어가 '사람'을 비하해서 부르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는 '들판에 목자처럼' 밤낮 수고해야 하는 직업 아닌 직업이 목사다. 바울이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 명예를 얻고 돈과 인기와 명성을 얻고 싶다면 목사직을 내려놓는 것이 어떨까. 목사란 그런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죽어야 할 이름이 목사'란 사실을 한국교회가 진즉에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진 않았으리라.

주인이 맡긴 양들을 목숨바쳐(죽도록 충성하며) 잘 섬긴 목자들은 비록 이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아픔을 당하고 애통의 눈물을 삼킬지라도 훗날, 주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시며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목사라 불리워도 좋다고 본다.

1.목사는 목사(目四)라야 한다.

다시 말해 눈이 '네 가지'라야 한다는 말이다.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눈이 멀면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 한다.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한다. 눈이 침침해서 김집사인지 이집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면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 목사는 사역하는 동안에 건강해야 한다.

상식의 눈이 있어야 한다.
이성적 판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상식이 풍부해야 바른 이성적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상식이 부족한 목사들이 많은 것같아 안타깝다. 세상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목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상식의 잣대로 판단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목사를 사회가 인정하겠는가.

사례비도 사는 모습도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억대 연봉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근로자 평균임금 정도로 사례비를 정하고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한다.(70-80% 목회자들은 그 것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성경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서야 어찌 말씀의 꼴을 먹일 수 있겠는가. 말씀을 말씀답게 볼 줄 아는 목사가 바르게 목양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지력(知力)을 키워야 한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혜안(智慧의 눈)이 있어야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의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말씀의 눈을 부단히 길러야 한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된다.

주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밝고 상식의 눈이 있고 말씀의 눈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목사로서는 말짱 도루묵이다. 주님의 눈으로 양들을 보게 될 때 양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더하여, 목사는 온 양떼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도양(先導羊)으로서 양무리를 주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자각해야 한다. 또한 마음이 깨끗하여 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 주님의 눈으로 양떼를 돌보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주님의 눈빛만 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목자일 것이다.

1.목사는 목사(木死)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十字架)는 형상화 된 글이다.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의미를 잘 알기에 그대로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에는 나무기둥(스타우로스)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의 사형법을 로마인들이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형장에 세워놓은 나무기둥을 우리는 십자가로 번역해서 쓰고 있다. 가로목을 지고가게 해서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나무기둥에 매단다. 윗 부분에는 죄목을 적은 판대기를 붙인다. 형상이 '열 십자'를 닮았다.

우리 주님이 이 나무기둥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신약을 눈여겨 보면 나무기둥(스타우로스)이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무(크실론)라 하고 있다. '사도행전', '베드로서'.. 등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을 강조코자 함이다.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단순한 나무기둥이 아니라 실로 생명나무이다. 자신의 피와 살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과일이 과육과 과즙으로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무에 달려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나무 과일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주식으로서-밥 혹은 빵)이요, 생명의 음료(생명을 위한 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나무 이전에 선악의 지식나무였다. 모든 사람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그 나무(크실론)에 달리셨다. 자기와 및 자기를 믿는 모든 자가 선악의 지식나무(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요,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 곧 나무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해(향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선악의 지식나무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죽었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는 없다.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죄악된 세상의 중앙, 에굽 혹은 소돔이였다. 세상 중앙에 우뚝 선 그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무를 지신(달리신) 이유요, 의미인 것이다. 그 나무가 생명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역설적 신비다.(바울의 복음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죽은 자 살리는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일반 신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목사는 특별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그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 날마다 죽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이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죽었다는 의미로 목사(木死)라 이름해 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목회하는 자가 누군가. 목사도 안 죽는데 누가 누구보고 죽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죽자! 주님 죽으신 그 나무에 함께 달려죽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러데 어찌하여 산 냄새 풀풀 풍기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날마다 죽자. 그래야 부활 할 것이 아닌가.


*6년 전에 쓴 칼럼인데 오타수정해서 다시 올려봅니다.

이 칼럼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별사모님의 덕분입니다. 왠고하니 필자가 즉흥적으로 아멘넷 독자게시판에 올린 글을 별사모님이 추천해서 초대칼럼란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글:구 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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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장모님 우리 장모님>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 예수님의 섬김-

마태복음 8장 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베드로의 고향은 가버나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벳새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필자가 추정키로는 가버나움이나 그 인근 마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벳새다는 헤롯 빌립의 영지이고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에 속한 지역입니다. 둘 다, 대 헤롯(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대왕)의 배 다른 소생들입니다. 다음 기회에 헤롯 가문을 한 번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뱃새다에서 고기를 잡아 큰 시장인 가버나움으로 가져와서 팔게 되면 통관세를 물어야 했기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거처를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 장모가 병들었다'고 말씀드리거나, '우리 집에 한 번 오십사'고 요청했다는 그 어떤 시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운 것을 '보신' 것도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시시콜콜 자잘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그렇지만 읽는 자들로 하여금 전후사정과 본문의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도록 여유공간을 제공합니다. 소위 말하는 행간읽기이지요.

마태복음 19장 27절에서는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 하시니,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안드레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처자도 생업도 뒤로 한 채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헌신을 외면하실 주님이 아니십니다. 베드로의 집안 형편을 아시는 주님은 몸소 베드로의 집에 심방하셔서 장모님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시름과 걱정을 덜어주셨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모른 채 하시는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워주십니다. 근심 걱정 주께 맡겨도 괜찮을 정도가아니라 넉넉히 돌봐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입장에서는 딸자식과 손주들을 외면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위집으로 와서 살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오갈데 없는 장모를 모셨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오늘 제목을 '장모님 장모님 우리 장모님'으로 정해 본 것이지요.

성경은 베드로가 배를 처분했다든지 가솔의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다든지 등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만 주님은 그 사정과 형편을 다 알고 계실뿐 아니라 금세와 내세에 복된 약속의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

집을 나온 지도 어언 반 년이 넘어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자주 집에 가 볼 형편이 아닙니다. 인편으로 소식을 가끔 들을뿐입니다.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건만 약 한 첩 사들고 찾아가서 병문안하고 처자식과 오랫만에 회포를 풀 수 있는 입장도 못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병으로 누워있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으십니다. '일어나라!'고 말씀으로 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베드로의 장모의 눈을 보셨습니다. '여자여~ 네 심정을 내가 아노라! 나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위를 대신해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처자를 돌보는 너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를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주여~ 이 미천한 여종을 몸소 찾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야말로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을뿐 무익한(비천한) 종입니다'

무언의 대화가 오갑니다. 눈으로 말하고 손으로 서로간에 교감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베드로의 장모는 이미 심령으로는 일어났습니다. 병은 마음으로 이기지 못하면 육신으로는 못 이깁니다.

열병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열병에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열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열병의 배후에 있는 귀신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와 복음을 훼방하는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보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갈수록, 마귀의 악한 궤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두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봉사하는데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이런 날 좀 봐주세요~'라고 안 해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시장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생선을 팔든 채소를 팔든, 그 것이 나 자신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거룩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가 공사판에 나가서 열심히 땀흘려 막노동하는 것도 주님이 보실 때는 거룩한 일입니다.

저희 교회는 가난한 성도가 믿음으로 드리는 십일조를 축복기도 한 다음에 돌려줍니다. 거기다 십만원 정도 보태서요. 주님이 돈이 없으서, 돈을 좋아해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돈을 받으시겠습니까. 믿음과 정성, 그리고 헌신만을 받으시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베드로의 장모도 시장바닥에서 생선장사를 했었는 지도 모르지요.

누가 큰 자입니까. 돈 많은 자? 권세와 부귀공명을 누리는 자? 그 누구도 아닙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해당하는 자가 진정 큰 자입니다.

제가 예전에 복음을 전할 때, 장바닥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이 '교회도 돈이 있어야 나가겠습디다. 돈없는 우리들은 사람취급도 안 하데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목사들이 돈을 밝히는 세태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런 목사가 안 보입니다. 일부 그런 분들이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정말 성실히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밝힐 돈이 없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인 것은 확실합니다. 죽을 적에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면서 왜 다들 돈에 눈이 어두운지... 주님의 사랑에 눈먼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이 말했었지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 자나 깨나 돈조심해야겠습니다. 이 말세지말에!

여인이 일어나 수종듭니다. 이 수종듦이 미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수종은 기분 좋을 때나 남이 알아 줄 때나 넉넉할 때에만 수종드는, 그런게 아닙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고달프거나 돈이 있으나 없으나 변함없이 주님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수종은 섬김을 말합니다. 달리 말해서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내 형편 아시는 주님이 날 찾아오셔서 일으켜 세우셨으니 이제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감사해서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그것도 종의 자세로 말입니다.

여러분, 조건부 신앙을 아십니까. '내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했으니 주님, 복주세요~' 애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심부름했으니 용돈주세요~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해서 기쁜 맘으로 자원해서 끝까지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은 바로 그런 섬김, 미완료의 섬김이었습니다.

칼럼: 구 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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