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란 무엇인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선택을 이해함에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 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그 분의 뜻'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이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미 기록해온 대로(전술한 대로) 복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한 자를 이 복음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택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주권적인 '무조건 선택-Uncoditional election'을 뜻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용어인데요,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선택과 유기(이중 예정)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왜냐 하면 창세 전 선택이나 예정(혹은 작정)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란 큰 틀(framework)이나 구조(structure) 안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운명론적인 선택이나 예정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운명과 관련된 선택이나 예정이 아닌 인류 구원의 큰 경륜 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나의 복음'의 첫 근거는 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의미를 바울은 깨닫게 되었었지요. 

바울은 창세기 서두에 드러나는 창조 전 계획을 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기에 구약 전체를 복음으로 조명하고 신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반듯한 '바울 복음'이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이는 물론 성령의 조명과 성령이 친히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따라 정립한 복음입니다.

둘째로는,
선택이란 용어를 이해함에 있어서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바울의 문맥, 나아가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들', 그 이하의 기록들은 모두 복수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본디 히브리적인 사고체계로 보자면 단수집합명사입니다. 성, 수, 격이 분명한 문자체계인 헬라어로 기록되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 29절 30절과 그 아래 기록들은 한 문장입니다. 한 덩어리로서 개념을 추출해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구마 - 잎 꽃 줄기 뿌리 잔뿌리, 그리고 그 것을 가능케 하는 흙 공기 물 해빛 바람 등 - 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내포와 외연을 바탕으로 각 구절들을 해석해야 큰 틀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28절에서 말하는 '선'이란 본문의 머릿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나 결과를 말합니다.(창세기 1장 참조)

로마서에서 말하는 영화의 상태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최종적인 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모든 것에는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하심, 영화롭게 하심'이 다 포함됩니다. 또한 ' 그 모든 것'에는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나 피조물도 포함됩니다.

자,그렇다면 이제 선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해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창세 전에 온 인류의 구원과 멸망이 이미 정해졌을까요?

네, 맞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구원하기로 택하시고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는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이 것을 바울은 로마서 9장 10장 11장에서 이스라엘의 궁극적 운명(?)을 논함에 있어 그들이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선민사상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한 그 헛된 생각을 박살내는데 있어서 에서와 야곱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연이어 모세와 바로를 예를 들지요. 그 다음에 토기장이의 비유-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가 등장합니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선택과 유기를 설명할 적에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증거구절들이지요. 과연 그래도 괜찮을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조명하셨을까요?

먼저 에서와 야곱을 예로 든 이유는, 창세 전 무조건적 선택을 뒷받침하기 위함이 아니라 야곱의 믿음과 에서의 믿음없음을 논증키 위함입니다. 로마서 9장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말씀이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이어서 12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13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언뜻 보기에는 칼빈주의의 선택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모세와 바로의 예도 그렇게 보이고요.

그리고 토기장이의 비유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호세아의 글과 이사야의 글의 인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논증하고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바 결론은 '믿음과 행위'입니다.(30절-33절 참조)

이 믿음과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위 세 가지 예를 든 것이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살펴봅니다. 미리 아신 자들이란 체험적 앎이 아닌 선험적 앎입니다. 달리 말해서 경험을 통해 어느 누구를 알았다가 아니라 특정 부류를 미리 알았다는 말인데요, 아들을 닮은 자들를 미리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그 씨앗을 닮은(똑같은) 열매를 미리 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추수하기로 미리 작정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맏아들이란 유일무이한 씨(여인의 후손로서의 씨)를 말합니다. 계시의 발전과정에서 보자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아들 혹은 씨)입니다. 이 것을 성경은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라 하지요.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미리 정하셨다(예정하셨다)!' 이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택과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 전 무조건적 선택이란 교리가 주는 신앙적 혼란, 예컨대 '내가 혹 택함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영적 혼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구원얻는 믿음이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는 것이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창세 전 무조건 선택이 우리를 세우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시기를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11327#comment16760204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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