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신 예수님

본문 읽기:마태복음 8:5 -13

참조 구절:누가복음 7장 상반부

대체 어떤 믿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셨을까요?

인간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 와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알고 싶은 것에만 관심합니다. 세계관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공무원들 특히 직업군인이나 교사들이 퇴직하고 나서 사업을 하게 되면 실패하기가 싶다고 하더군요. 상명하복의 툴에 익숙해져 있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해서 달리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요. 사업에 관한한 사고의 폭이 제한적인 것이 실패의 요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폐일언하고,

먼저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봅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7장을 보면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방인, 그것도 지배국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피지배국인 식민지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대개 식민지 백성은 수탈을 당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이 경험한 바 있어서 잘 압니다. 백부장이 한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많은 식민지 백성들 중 하나인 유대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았다! 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물론, 말씀을 들었을 테지요. 들었으되 그냥 흘려들은 게 아니라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긴 말씀을 통해서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 분의 백성도 사랑할 수 있었지요.

이는 일개 하인이 중풍병으로 몸져누워서 몹씨 괴로워하는(아주 심하게 괴로워함) 것을 보고 안쓰럽고 불쌍히 여겨 예수님께 나아 와서 고쳐주십사고 간구한데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중풍병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병에 속합니다. 병이 심해서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있는 경우가 예전엔 흔했습니다.

하인의 입장에서는 주인을 수발들고 집안 일을 해야할 터인데 드러누워 똥오줌을 받아내고 있으니 오죽 괴롭겠습니까.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심적 고통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괴로워한다"가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몹씨 괴로워함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평소에 백부장이 하인을 어떻게 대했는 지를 행간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인격적으로 대할뿐만 아니라 내 몸같이 사랑했습니다. 인정머리 없는 주인이라면 내쫓았을 지도 모릅니다. 다른 하인이 똥오줌 받아내며 밥도 떠먹이고 간병을 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금전적으로 따져도 손해입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하인을 사랑하기에 돌봐주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애썼던 것이지요.

사람대갈님(?) 아니, 머릿 수를 돈으로 계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비인간적이고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경우일테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더러 있습니다. 마치 사람을 표로 보는 정치인도 간혹 있듯이 말입니다

"몹씨 괴로워한다"를 미완료형태가 아닌 완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백부장의 심중에 하인이 몹씨 괴로워하는 그 심정을 지금까지(예수님께 나아와 구할 때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인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었던 게지요.

한편, 이런 주인을 모시게 된 하인은 열심히 섬김으로서 보답코자 했지만 덜컹 중병으로 몸져눕는 신세가 되어 주인을 뵐 면목조차 없습니다. 하인 주제에 아픈 것도 제 마음대로 아플 수 없는 노릇인데 병수발까지 받다니!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괴로워했던 것이지요.

이런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로 나아 온 백부장입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 않는 지를 아는 길이 있습니다.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것만 보고서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첫 째로는 돈보다 일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가를 보면 됩니다. 다음으로는 이웃을 진심으로 내 몸같이 사랑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사랑치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설쳐대는 군상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런 백부장이라 얘수님깨서는 친히 왕림하셔서 고쳐주시고자 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런데 이어지는 백부장의 고백이 장관입니다.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중대장 급 지휘관의 입에서 그것도 로마황제에게 충성하는 백부장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아까 말했었지요. 군인들은 다양한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다고요.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르고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군대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씀을 배운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실 정도로 말씀에 입각한 바른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과 신앙을 바탕으로 바른 세계관을 확립한 자였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메시야를 대망(기다릴 대, 바랄 망)하고 있을뿐만 아나라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인둘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 하고는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을- 천대받고 멸시받는 죄인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도-구원하러 오신 분이심을 바르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인들은 대개가 다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만국 위에 군림하는 메시야 왕국을 바랐던 것이지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또 들어갈 수 있는, 이 땅에서 이뤄질 그 나라를 꿈꿨던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그 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나아와 간구하며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세 분 한 하나님-에 대해서 기회닿으면 강론코자 합니다)

바른 말씀이 바른 신앙을 낳고 바른 신앙이 바른 삶을 산출합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자'가 오늘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런 백부장을 알아보시는 우리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냥 힘주어 믿습니다~고 외치면 믿음이 생길까요? 많은 분들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기 전에는 죽어도 생기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이는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 도우시지만 믿음이 있고 없고, 믿음을 가지고 안 가지고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자유의지 말입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다 회개하여 구원에 아르기를 원하시지만,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러지 않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서 '네 믿음이 크도다!' 고 하시면 하나님 스스로 자화자찬 하시는 격 이상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하십시오. 마음을 열고 어린 아이같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릴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날 때부터 믿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애를 쓰면서 부지런히 말씀에 착념하고 기도하십시오. 언젠가는 믿음의 반석위에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이 이어집니다)

구자준 목사2016/08/1609:40:28

문둥병자의 정결의식(규례)

본문 읽기:마태복음 8:3-4

참조 구절:레위기 14:1-32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이르시되-'말씀하시되' 입니다. '가라사대' 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느라" 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구원과 심판의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길이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계약적 약속-covenant promise)의 특징 또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육의 심비에 언약의 내용을 새기십니다.

흔히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합니다. 아니 종교 이상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는 살아 있는 체계와 모임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게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5-17)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온전케 되기를 원하노라. 선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노라'-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충만과 함께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병행하는 자의 신앙은 건강합니다. 거머리같이 맨날, '다고 다고' 하는 신앙은 연약하거나 어리거나 병든 신앙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손을 대시며-친근함의 표시입니다. 말씀만 툭 던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씀만 하셔도 나을 터입니다. 그런데도 허리를 구푸려 병자에게 손을 대십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십시오.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친근히 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애쓴 자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다 들으십니다. 다만 응답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즉각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고 더디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응답하십니다.

이제 문둥병이 나았으니 제일 먼저 가족에게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떨어져 살았으니 더욱 그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율법의 기록입니다. 아무에게도 가서는 안 됩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된 몸을 보이고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대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위 참조구절인 레위기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필자와 독자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형성됩니다.

살아 있는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가져와야 합니다. 모두 정결의식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잡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예전에 유명한 정치인이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못 돌린다"고 했었지요.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살다가 가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지 모릅니다.

질그릇의 특징은 깨어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연약한 인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 위에서 산 새를 잡습니다. 목을 따고 피를 흘려 질그릇 위에 받습니다. 그 피를 문둥병자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일곱은 완전 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완전합니다.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문둥병자는 흐르는 물과 질그릇과 새에다 자신을 투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질병과 죄악과 진영 밖 격리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피흘려 죽어가는 새의 피를 자신에게 뿌려 정결케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산(living) 새 한 마리는 들판에 놓아줍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갔다가 죽음을 면하고 창공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보면서 죄의 무서움과 사죄의 은총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지요.

백향목은 아주 오래 사는 키가 큰 나무입니다. 성전이나 왕궁의 건축 재목으로 쓰입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삼아 계십니다.

홍색실의 특징은 붉어서 눈에 잘 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자의 삶은 무리 중에서 홍일점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슬초는 물을 잘 머금기에 물이나 피를 적셔 뿌림으로써 죄인을 정결케 하는 데 쓰이는 하찮은 잡초입니다.

백향목과 우슬초! 솔로몬이 논했었지요.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백향목도 귀하게 쓰시지만 우슬초도 귀하게 쓰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여러분은 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크게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생긴대로 살고 있는대로 사십시오. 너무 잘난 체 하지도 말고요. 오히려 못난 자를 더 귀하게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속건제물인 숫양의 피를 신체의 대표적인 부위인 오른쪽 귓부리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위에 기름을 바릅니다. 이제 여러분의 소유권이 나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사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넘어갔음을 나타내는 표호(사인)입니다.

이제부터 무엇을 듣느냐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벙어리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을 외치십시오.

또한 손으로, 발로 행하는 모든 삶의 영역이 십자가의 피의 복음으로 물들게 하십시오. 이는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사장에게 입증하라고 하십니다.

입증이란 증인의 증거를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입니다. 실체이신 메시야(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여전히 율법의 의식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 시대에도 율법주의가 횡행합니다. 초대교회 때 갈라디아교회처럼요. 삼가 복음으로 무장하시길 바랍나다.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말씀을 맺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이었습니다. 영혼과 몸을 이분법적 사고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이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인으로서의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따로 떼어내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전인구원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날에 죽은(죽을) 몸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살아 있을 동안에야 오죽하겠습니까. 육체도 잘 보존하십시오. 건강하기를 구하십시오. 혹 병들었다 할 지라도 고쳐주실 것입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잘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필요한 물질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에 찌들어 사는 것을 원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진 자외는 가난이 미화될 수 없습니다. 미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을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구자준 목사2016/08/1011:39:25

모바일 이타임즈

http://www.etimes.net/service/etimes_mobile/shellview_m.asp?ArticleID=2016081011372601478&LinkID=6344

문둥병자의 믿음

본문 읽기:마태복음 8장 1-4절

마태복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1장 1절부터가 아니고 건너뛰어 곧장 8장으로 왔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구요? 필자의 마음이지요. 사실은, 딱딱한 족보이야기부터 다루려면 구약 전체를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글쓰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또 어떻고요. 그럴지라도 때가 되면 다 풀어서 전할 생각입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을 찾아서 정독을 하시기 바랍니다.여기 올리면 저도 편하고 읽는 분들도 좋겠지만 활당된 지면이 부족합니다.

이 칼럼이 대장정이 될 지 아니면 중도에 하차를 하게 될 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다만 일방통행식의 글쓰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 수많은 무리 중 한 사람,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절하며-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이 '절하며'가 미완료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8장 19절에 성경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야웨'란 단어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붙여서 읽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야웨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눈으로는 여호와라 읽고 입으로 말할 때는 아도나이(주-하나님에 대한 호칭)라 불렀습니다.

원하시면-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합니다. 내 원대로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면 입니다.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깨끗게 해 주십사'고 구합니다. 문둥병이 얼마나 더러운 지 아십니까? 살이 문들어져 온 몸에서 진물이 나고 코가 내려앉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다 빠지고...

하실 수 있나이다-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드리는 간구입니다.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격리수용하는나환자촌(일명 문디촌)에서 들었습니다. 그 집단 거주지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에 있었습니다.평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용소에 와 보니 지나(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 모습이 내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서, 수용소를 나와 갈릴리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으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자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여기 문둥이 있습니다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뭇 사람의 눈쌀과 외면과 배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겉은 멀쩡하고 고상해보일 지라도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가는 문둥이와 같이 더럽기가 한량없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운 겉모습을 통해서 추하고 악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겉사람 만이 아닌, 속사람도 깨끗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죄의 용서와 함께 문둥병도 깨끗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물어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중심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대십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멀리하는 진물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실려면 어떻게 해야 하셨을까요? 예, 몸을 낮추셔야 합니다. 문둥병자의 자리까지 낮추셔야지요. 왜냐하면 그 나병환자는 계속 엎드려 절하고 있었기에요.

문둥병자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어찌 감히 서서 빤히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행동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주님이 원하셨습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을 깨끗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문둥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요.

죄가 해결되지 않고 문둥병만 나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육간에 깨끗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믿음을 가지고 주께로 나와 경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범사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래야 주께 바르게 경배(예배)하고 주님의 뜻대로 간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주 예수께로 오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죄인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십니다. 천하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말세에 종교다원주의의 탁류에 떠내려가지 마시고 참된 진리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의 강설이 이어집니다)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헛된 철학적 사변-

구자준 목사 2016/08/08 10:11:53

출처: eTimes

http://www.etimes.net/Service/etimes_2011/ShellView.asp?ArticleID=2016080810104401091&LinkID=6507

마태복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1장 1절부터가 아니고 건너뛰어 곧장 8장으로 왔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구요? 필자의 마음이지요. 사실은, 딱딱한 족보이야기부터 다루려면 구약 전체를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글쓰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또 어떻고요. 그럴지라도 때가 되면 다 풀어서 전할 생각입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을 찾아서 정독을 하시기 바랍니다.여기 올리면 저도 편하고 읽는 분들도 좋겠지만 활당된 지면이 부족합니다.

이 칼럼이 대장정이 될 지 아니면 중도에 하차를 하게 될 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다만 일방통행식의 글쓰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 수많은 무리 중 한 사람,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절하며-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이 '절하며'가 미완료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8장 19절에 성경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야웨'란 단어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붙여서 읽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야웨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눈으로는 여호와라 읽고 입으로 말할 때는 아도나이(주-하나님에 대한 호칭)라 불렀습니다.

원하시면-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합니다. 내 원대로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면 입니다.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깨끗게 해 주십사'고 구합니다. 문둥병이 얼마나 더러운 지 아십니까? 살이 문들어져 온 몸에서 진물이 나고 코가 내려앉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다 빠지고...

하실 수 있나이다-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드리는 간구입니다.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격리수용하는나환자촌(일명 문디촌)에서 들었습니다. 그 집단 거주지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에 있었습니다.평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용소에 와 보니 지나(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 모습이 내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서, 수용소를 나와 갈릴리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으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자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여기 문둥이 있습니다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뭇 사람의 눈쌀과 외면과 배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겉은 멀쩡하고 고상해보일 지라도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가는 문둥이와 같이 더럽기가 한량없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운 겉모습을 통해서 추하고 악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겉사람 만이 아닌, 속사람도 깨끗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죄의 용서와 함께 문둥병도 깨끗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물어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중심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대십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멀리하는 진물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실려면 어떻게 해야 하셨을까요? 예, 몸을 낮추셔야 합니다. 문둥병자의 자리까지 낮추셔야지요. 왜냐하면 그 나병환자는 계속 엎드려 절하고 있었기에요.

문둥병자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어찌 감히 서서 빤히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행동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주님이 원하셨습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을 깨끗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문둥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요.

죄가 해결되지 않고 문둥병만 나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육간에 깨끗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믿음을 가지고 주께로 나와 경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범사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래야 주께 바르게 경배(예배)하고 주님의 뜻대로 간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주 예수께로 오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죄인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십니다. 천하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말세에 종교다원주의의 탁류에 떠내려가지 마시고 참된 진리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의 강설이 이어집니다)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헛된 철학적 사변-

구자준 목사

2016/08/081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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