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자유게시판에서 펌) 

http://www.kncc.or.kr/sub04/sub02.php?ptype=view&idx=10234&page=4&code=board04_1

 

 

 

 

제목
세계교회협의회 WCC의 정체성
이름 free 이메일
작성일 2012-04-12 조회수 547
파일첨부 WCC 총장과 교황.jpg 교황과 달라이라마.jpg 교황과 힌두교 여사제.jpg WCC의 참석한 여성성직자 대표들의 공동 선언문.jpg 코란에 키스하는 교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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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
WCC의 정체성
 
 
20131020일에 부산에서 세계 대회가 개최되는데 WCC총회 유치위원회 집행위원장인 박종화 목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 권오성 총무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김삼환 준비 위원장에게 감사 드린다라고 했다. 그는 이제 세계교회가 더불어 세계평화와 정의, 인권문제 등 사회적 선교에 관심을 갖고 기여하는 우리 교회가 돼야한다며 소감을 말했다. 또한 NCCK의 회장이자 WCC 10차 총회 한국 유치 준비위원장 김삼환 목사 또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나 놀라운 기적이다. 피를 말리는 접전이었다. 대한민국이 시리아와 접전을 벌여 7059의 표차로 우리가 총회를 유치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한국교회 모든 성도의 기도 덕분이라고 한다.
WCC의 정체를 모르면 잘된일이라고 말할 수 잇는데 실상은 사단의 회이다.
 
 
WCC의 배후에는 카톨릭이 있으며 현제 카톨릭은 배후 조종만 하지 WCC회원가입은 하지 않은 상태이다. 현제 카톨릭은 다른 채널로는 무슬림, 유대교, 힌두교, 뉴에이지, 정령숭배자, 영국 성공회, 구세군, 그리스 정교회, 팃벳불교, 알파코스등 세계각 종교와 연합을 위한 물밑 작업은 끝냈고 맨 마지막은 기독교와 연합을 위한 시나리오도 이미 준비가 다 되어있다.
 
 
이런 WCC 한국 유치를 기뻐하는 NCCK 관련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배교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 알게 한다.
 
 
WCC는 전세계의 교회들을 종파와 관계없이 연합하는 것이며, 그리스정교회, 루터교, 장로교, 침례교, 영국국교회, 퀘이커, 메노나이트, 심지어 그리스도의 교회와 안식교까지 가입되어 있는 에큐메니칼 교회 통합 기구다. 로마 카톨릭은 WCC의 회원은 아니지만 WCC는 로마 카톨릭과 밀접한 연대 속에서 움직이는 친카톨릭적 기구다. 한국내에도 한국의 KNCC 가입교단은 예장통합측,기독교한국장로회,기독교대한감리회,구세군,기독교대한복음교회,성공회, 하나나님의성회, 정교회(대교구)이 이미 가입 되어 있으며 WCC1등 공신이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한경직목사 옥한음목사를 주축으로 국내 이름만 대면 불신자들도 다 아는 아주 훌륭하신 목사님들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경을 저버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헤롯당원들과 한패가 되셔서 하나의 교회를 만드신 적이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하나 됨은 구원받지 않은 소위 기독교인들평화사랑의 이름으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연합은 구원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며며(17:3), 진리로 인한 거룩하게 됨을 자격으로 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이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옵니다.(17:22)
 
 
1. WCC 연합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진리도 사랑도 없다.
 
 
WCC에 가입한 그 어떤 교단도 WCC 총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모든 성사와 의식과 침례와 세례 등은 무의미하다고 선포할 수 없다. WCC 총회에서 그 누구도 일어나서 로마 카톨릭과 이단들과 자유주의 학자들로 말미암아 훼손된 연합성서공회 원문들을 버리고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칠 수 없다. 그 어떤 설교자도 WCC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박애주의적 제스쳐로 세상의 호감을 사려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짓이라고 선포할 수 없다.
 
 
WCC에 가입하는 순간, 복음의 진리와 진리의 성경, 진리의 하나님, 진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져버려야 한다. 그들은 활같이 그들의 혀를 구부려 거짓말하나 땅 위에서 진리를 위해서는 용감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이 악에서 악으로 나아가며 또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주가 말하노라.(9:3)
 
 
2. WCC 한국 유치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무감각한지 보여준다.
 
 
박종화 목사와 NCCK 총무 권오성 목사와 NCCK 회장 김삼환 목사 등은 WCC 한국 유치가 무슨 대단히 황송한 영광인 것처럼 감격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마치 개발도상국인 우리나라가 88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여 그것으로 대단한 경제적 효과를 기대했던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WCC 총회는 아시안게임도 올림픽도 월드컵축구경기도 아니다. WCC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배교의 급행열차다. 김삼환 목사 등은 자신과 NCCK 가입 교단이 이 기차에 탄 것을 경아해 마지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시대의 마지막이 배교로 끝날 것임을 예언하셨고, 이는 절대 다수의 교회와 기독교단체가 배교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딤후 3:1)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3. WCC 한국 유치에 앞장선 NCCK(교회협)의 진면모를 보라!
 
 
이와 때를 같이 하여 NCCK의 타락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현재 NCCK의 회장은 김삼환 목사이며, 그는 예장 통합의 총회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장 통합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황명호, 전장련)가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신앙 및 신학방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란 제목으로 신앙선언을 했다. 이들은 NCCK의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었던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구미정), ‘한국목회자 1000인 시국 선언에서 문구들을 발췌하여 NCCK의 신앙적 건전성을 문제시한 것이다. 예장통합은 NCCK 가입교단이지만, 그들 중 일부가 NCCK가 추구하는 것은 신앙적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기도문들이 이슈화된 지금 NCCK의 홈페이지에는 이러한 기도문이 삭제된 상태다.
특히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에는 경악스러운 내용으로 도배되어 있다.
 
 
다음은 그 기도문에서 직접 발췌한 것이다.
, 하느님, 부처님!
종교는 달라도 진리의 뿌리는 하나, 만물이 한 배()에서 나와 한 사랑을 먹고 사는 식구(食口)요 생구(生口)인 것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종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一心)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죽음의 굿판 대신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명박 정부와 함께 기독교는() 참으로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어가는 작금의 현실은 너무 부끄럽고 통탄스럽습니다.
부엉이 바위에 묻어 있는 핏자국(=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의미함)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라는 하늘의 명령 앞에서 한 없이 게으르고 무능했던 우리의 죄악이 너무 큽니다
이제 4대 종단의 종교여성들이 가부장적 개발의 망령에서 벗어나 사랑과 자비, 정의와 평화가 한 데 어우러지는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기로 결단하오니, 모쪼록 이 믿음의 싹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지키고 돌보아 주십시오.
 
 
김삼환 목사가 회장으로 있는 NCCK는 지난 20082월부터 생명의 강 살리기에 동참해 왔다. NCCK는 그들의 생명윤리위원회를 통해 대운하를 반대하며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NCCK기독교의 이름으로 하는 운동은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만 것이다.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의 결구가 어떻게 장식되는지 보라.
 
 
받들어 비옵나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이것이 한국교회가 NCCK에 가입하여 배교한 에큐메니칼주의자 김삼환 목사와 행동을 같이 했을 때의 결말이다. 이것이 NCCKWCC가 추구하는 바다. 결국 NCCKWCC는 진리를 저버린 모든 기독교 분파들을 결집하여 로마 카톨릭 곧 큰 창녀의 집으로 데려가는 바람잡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마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하였더라(17:5).
나무아미타불, 아멘하고 싶지 않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작금의 현실을 숙고하라.
 
 
지금이야말로 모든 배교행위를 회개할 때다. 곧 온갖 우상숭배와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민중신학, 해방신학, 여성운동, 교단신학과 거짓교리들, 교세확장, 세상과의 타협, 목사들의 사리사욕과 수많은 비도덕적인 비리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카톨릭으로 부터 온 모든 교리를 깨끗이 청산하고 사도들이 가졌던 행했던 그리고 믿었던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으로 참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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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공동주관한 ‘21세기의 교회와 선교 -설교자를 위한 WCC 제10차 총회 주요 문서의 내용’ 주제 제3차 심포지엄이 15일 오후 서울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은 우진성 목사(과천영광교회)의 사회로 신익상(감신대)·최순양(이화여대)·박지은(이화여대)·이은경(감신대)·김희헌(성공회대) 박사가 발제자로, 김기석(청파교회)·김경호(들꽃향린교회) 목사가 논평자로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발제자들은 지난 WCC 제10차 총회의 주요 문서들을 살피며, 그 안에 나타난 생명과 양성평등, 생태정의, 에큐메니칼 신학교육, 평화통일 등의 문제들을 고찰했다.

특히 최순양 박사는 ‘WCC 문서와 양성평등의 문제’를 다루며 “WCC 문서를 통틀어 볼 때 양성평등의 관점이 ‘세상을 향한’ 혹은 ‘주변부를 향한’ 부분에서는 적용돼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문제 또는 ‘신학교육 안에서의 여성’의 문제에는 적용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기독교 선교의 핵심으로서의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 및 한국 교회교육에 대한 반성과 제언’을 제목으로 발표한 이은경 박사는 “나와 남을 가르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하나요 이웃이며, 친구이자 가족이라는 생각을 먼저 할 줄 아는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 신앙교육의 목적이며 교회의 책임”이라고 역설했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서 ‘한국교회 선교과제로서의 통일선교’를 제목으로 발표한 김희헌 박사는 “한국교회가 통일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먼저 겸허히 서야 할 것”이라며 “과거에 형성된 반북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이나 더욱 큰 경제적 욕망을 확장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한국현대사의 굴곡과 복음의 요청에 대한 신앙의 통찰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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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당산(성황당) 나무를 기도나무로 소개하다.  

2013/11/06 13:04

복사http://blog.naver.com/esedae/90184187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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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WCC의 주관언론인 국민일보에 소개된 '기도나무' 대한 기사를 캡쳐한 것이다.  밑의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나무 가지에 소원을 쓴 색색의 천을 메단 이 나무가 바로 그 옛날 우리네 마을마다 있던 '당산나무'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소원을 적은 천들을 당산나무에 걸어놓는 한국의 무속신앙을 그대로 흉내 낸 기도나무(?)가 WCC 부산 총회에 등장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사이다.  

 

 

다음 국어사전에서는  당산(성황당) 나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민속]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나무.

정월 대보름날 당산나무 아래에서 풍년 농사를 비는 굿을 했다.

 

 

일반적으로 성황당 옆에 위치한 당산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이 깃든 나무라 여겨져, 매년 중요한 절기마다 이곳에서 무당이 마을의 복을 비는 굿을 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성황당 옆에 위치한 당산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이 깃든 나무라 여겨져, 매년 중요한 절기마다 이곳에서 무당이 마을의 복을 비는 굿을 하곤 한다.

 

 

WCC 부산 총회가 이런 ‘당산나무’를 ‘기도나무’라는 이름으로 속여 귀신을 섬기는 무속신앙과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을 혼합해 버리고 있다.

 

기도나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당산나무가 바로 WCC가 종교혼합(종교짬뽕)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단의 회'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WCC는 더 이상 한국교회를 속이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굿판을 멈추어야 한다. 

 

 

 

 

- 예레미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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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회원 Gaetul 님이 제보로 위 기도나무는 일본의 기도나무에서 따온 것인 것 같다고 하여 참고 사진을 올립니다.


사진을 보니 똑 같네요.


해당 블로그


http://blog.naver.com/jjyseon/10179446726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자아 최면 행각

 

림헌원 (한돌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 대화가 아니고

자아를 향한 깊은 자아 최면 상태에서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확신으로서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신비주의이며 인본주의적 기도이다 



개신교계를 미혹하는 관상기도 열풍

 

한국 개신교계에 2007년 봄 뜬금없이 관상기도(마음기도,향심(向心)기도, 침묵기도, 묵상기도, 숨(호흡)기도 등)라는 폭풍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교계의 일부 젊디젊은 목회자들과 소위 엘리트층의 성도라 하는 사람들은 관상기도(높은 경지의 성숙한 기도)를 그동안 찾지 못한 보배로 생각한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부터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전통(기원 3, 4세기경 안토니우스가 광야에서 수도원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속에서 찾아냈다며 감격에 찬 환희를 부르고 있다.


한국의 G 대형교회는 관상기도 세미나를 주최하며 선전 문구에 ‘여러분을 성경적 관상의 영성으로 초대 합니다’라고 광고하면서 안토니우스가 ‘침묵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말로 관상기도를 표현하기도 했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정당성을 부여 받았는가? 또한 관상기도를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라고 하면서 언어적 유희(말장난)를 늘어놓고 한국의 기독교계를 미혹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기타 이교도 내의 도인들이 도를 닦으며 시도하는 관상기도와 차별화된다고 억지 주장하며 G교회에서 하는 관상기도를 마치 성경적인 것인 양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통을 복음주의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관상기도는 이 세대 영성의 새로운 모태가 될 것’이라고 선전하며 ‘성경적 관상(觀想)기도 세미나’에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초청하고 있다. G교회의 담임목사 L 이 국내외(중국·일본·미국 등)에 관상기도를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선전선동을 하고 있기에 신도들이 더욱 신뢰하며 추종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다.



평신도가 쉽게 도달하기 힘든 관상기도(?)

 

필자가 관상기도 세미나를 선전하는 G교회를 방문(2007.4.28)하여 그 교회의 일부 직원과 교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일부 다른 사람들은 관상기도를 시작했으나 자신들은 아직 그 높은 경지의 관상기도를 할 단계가 아니라서 보류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렇게 평신도들이 쉽게 도달하기가 힘든 것이라 하면 이교도들이 하는 높은 단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도사 수준의 기도와 무엇이 다를까?


관상기도 운동가들은 일반적으로 개신 교회가 그동안 부르짖어온 기도는 ‘무엇을 구하기 위한 기도로서 아주 낮은 단계의 저급한 수준’으로 취급하며 관상기도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 즉 드디어 높은 경지에 오른 깊은 기도처럼 소개하려 한다.


한국 개신 교회에 관상기도를 도입하기 위해 G교회 목사 부부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부터 미국의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적 수도원에 다니며 관상기도수련을 받았던 점과 그들의 영성을 멘토 하였던 영성가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발견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www.chptp.org 등에서 관상기도에 관련된 글 참고 바람).


그러한 관상기도는 세계 종교를 하나가 되도록 할 수 있으며, 마침내 개신교를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에 동참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게 할 수 있기에 위험천만하다는 것이다.


관상기도가 ‘왜 복음과 상관없는 관상기도인지’ 그 관상기도가 ‘왜 선불교요소가 첨가된 관상기도인지'에 관하여 혹시 더 알고자 한다면 여러 인터넷사이트 등에 자세히 문제 제기를 하여 놓은 글들이 있으니 찾아보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http://www.chptp.org, http://www.craah.org,

www.usaamen.net  www.newsnjoy.co.kr 등에 관상기도에 관련된 글 있음)



관상기도는 자아최면상태의 자기 확신

 

그 누군가가 관상에 관하여 탁월한 웅변술로 주장하고 설교한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관상기도는 자아(Ego)적 기도요, 자기 확신일 뿐이다. 그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대화가 아니고 자아를 향한 깊은 자아 최면 상태에서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확신으로서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신비주의이며 인본주의적 기도이다.


내 속에 계신 하나님과 나라고 하는 자아(Ego)는 분명히 다르고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관상기도를 자아가 의식하는 사고 즉 자기 마음과의 대화를 하나님의 음성(관상기도 추종자들은 그저 떼쓰며 달라는 욕심 많은 기도차원에서 마음속을 ‘비움’, ‘버림’의 상태로 무아(無我)지경을 이루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기도차원인데, 성경 66권에 하나님의 음성이 녹아들어 있는 말씀이 불충분하여서인지 성경을 기록했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들었던 것처럼 이제 다시 그 때 그 주님이 지금 자신에게 주시는 주님의 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것이다.)으로 생각하며 그 사고 자체를 하나님 안에서 얻는 안식이며 높은 경지에 이른 기도라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최면 상태에서 자기 마음과의 대화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비성경적인 기도관이다. 자아의식을 향한 자아 최면은 소위 도인들(천주교 수도사, 힌두교, 불교, 등)이 실행하는 인본주의적 행태이다.



묵상은 기도가 아니고 지켜 행하기 위한 마음의 전 동작(수1:8)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묵상을 관상기도의 4단계 중 2단계라고 주장하면서 관상기도의 범주에 묵상의 행위를 넣으려고 하는데 그 시도는 옳지 못하다.


묵상은 기도가 아니다. 묵상은 말씀의 내용을 갖고 집중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적용하려는 마음의 몸부림이다. 그런데 관상기도에서는 인도 명상가들의 만트라(주문)식과 동일하게 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하기 위해서 성경 몇 구절(또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등도 활용)만 주문 외우듯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기 위해 묵상(소위 명상이란 단어가 그들에게는 더 낫겠다)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안식(혹시 무아(無我)지경!)에 들어간다고 한다.

 

성경 자체에는 이미 하나님의 음성이 녹아들어 있는 말씀인데 그 외에 더 어떤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사탄이 가져다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도 된다.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이 이미 깃들어 있는 성경말씀을 갖고 우리가 지켜 행하려는 삶, 즉 실천적이며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사전에 고뇌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말씀의 내용을 갖고 깊이 고뇌(마치 되새김질의 소화 작용을 하듯이)하면 전인적으로 역동하는 통찰(insight)이 다. 그러한 묵상을 성경(수 1:8~9; 시1:1-3)은 신앙인의 필수코스로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을 “복 있는 자”라고 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QT(Quiet Time) 등이 등장했지만 이러한 묵상 훈련이 너무 약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일부 개신교에서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목회하시는 목사와 교회들은 그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이미 깃들어 있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지켜 행하고(수 1:8), 입술과 마음으로 크고 깊게 부르짖는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 왔으며 늘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삶(Coram Deo)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관상기도의 비성경적 자아최면 행각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그렇다고 개신교 전체가 성경적인 바른 삶을 살아왔다고 평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수많은 신비주의, 자유주의 이단과 사이비가 난립하고 있기에 다 옳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에는 관상기도마저 신비주의에  포함되고 있다는 점에서 말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목사와 신학교수들이 개신교내에 크고 작은 문제가 너무 많지만 기회가 있는 대로 문제제기를 하여 성경중심으로 개혁하여가려는 노력을 보게 되는데 그 점에 늘 감사하는 것이다.


이제 개신교가 관상기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왜 위험한 도박이고 한국교회를 망치는 지름길인지 확연히 드러난 이상, 관상기도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효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


필자는 관상기도에 관하여 토론을 하다가 그 문제의 본질을 잊고 단어 몇 개와 문장 몇 구절을 갖고 밤새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토론은 때로 학문의 현장에서 유익할 때도 있지만 끝이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서 글을 잘 쓰고, 못 쓰고 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비록 투박하고 거칠지만 교만하고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목회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성경적인 나팔을 불어서 경종을 울리자는 것 외에는 아무 이유가 없음을 밝힌다. 바라는 바는 이교도의 명상을 도입한 관상기도의 틀에 기독교형의 탈을 씌우는 비성경적인 자아최면행각을 비판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를 추종하려는 개신교 일부 목회자들이 구태여 동양종교의 단학, 선(禪) 같은 초월적 명상, 이교도 용어와 방법을 동원하려는 깊은 저의에 심히 의심이 간다. 그것이 수준 높은 중산층 이상이 몰린 귀족교회, 귀족교인들에게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이는 분석심리기법인 초월적 명상 심리이설(psycho heresy)의 하나인 관상기도를 제공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뉴에이지 종교다원주의에로의 물꼬를 트며 세계종교 통합의 전초기지를 만들고자하는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한국 교회는 기도에 관한 성경적인 개혁과 변화를 시도해야

 

기도라 하면 흔히 입술로 부르짖는 기도도 있어야 하지만 입술의 침묵 가운데 마음 깊이 부르짖는 기도가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교도가 하는 형식과 방법과는 다른 성경적 묵상훈련의 깊이를 연구 개발하여 그야말로 고상하고도 중량감이 넘치는 신앙인의 삶을 성경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한국 교회들은 이제 자성해야 한다. 그동안 입술로만 부르짖는 기도는 열심 내어 왔지만 마음으로 부르짖는 깊은 기도와 묵상(묵상은 기도가 아님, ‘말씀의 내용을 갖고 집중적으로 깊이 생각하여 지켜 행하려는 마음의 몸부림’수1:8)의 훈련은 너무나 전무하여 무게감(중량감과 고상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전통적인 좋은 기도의 모습은 이어가되 기도에 관하여 성경적인 개혁과 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비성경적인 관상기도가 출몰하게 된 배경에는 그저 입술로만 부르짖는 기도에 머물러 있는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모습에서 조금은 천박하고 가벼워 보인다는 느낌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혹시 ‘웰빙시대의 귀족스러운 교인들에게 품위 있게 어필할 수 있는 기도방법은 없을까’ 하여 그저 우아하고 무게감 있는 기도는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이러한 비성경적인 이교도적 관상기도에 매력을 느끼던 차에 미혹이 되었을 가능성도 엿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관상기도는 이교도의 신비주의 명상을 도입한 기독교형의 탈을 쓴 비성경적인 자아최면의 행각이다!





* 출처 : 크리스천인사이드 http://www.cion.kr/ 제14호, 2009년 5월 20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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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의 경악할 실체를 벗기다

 

임헌원 목사(한돌교회 담임. 예장합동)


하나님을 인격화 신(神)으로 생각지 않고 기(氣) 수준으로 보는 것은

인격적인 성령하나님을 에너지(기,氣)로 약화시킬 수 있다.

자기 암시를 주어 집단 최면을 거는 관상기도행태 속에서 생각나는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합당한 것인가?

그러므로 사실상 관상기도는 허구적이며 비성경적인 자기고백 수준이라 하겠다.



경악할 관상의 실체 앞에 이래도 머뭇거리며 망설일 것인가?


필자는 2007.5.1.오후6시30분경 한국의 G 대형교회 별관 8층 목회자 리더쉽연구센터 입구에서 영어담당 목사(남, 관상을 안 함)와 모 전도사(남, 현재 관상을 하고 있음)를 동시에 만나 관상에 관하여 물었다. 다행히 모 전도사는 G 대형교회의 담임 L 목사의 관상기도 가르침을 받아 담임 L 목사와 함께 현재 관상을 실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G 대형교회의 담임 L 목사의 관상기도 가르침(관상기도 세미나는 일정기간하며 유료 약 30만원)의 일부를 그 교회 모 전도사(남)가 고백하는 것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2007.5.3.오후3시경 G 대형교회 관상기도세미나 실제 운영 담당 J 전도사와의 핸드폰 통화에서도 2007년5월1일 모 전도사가 고백한 사실에 동의하며 필자에게 확실하다며 재확인 하여 준 내용으로 틀림이 없다)



들숨에서 하나님과 성령을 마시고 날숨에서 죄악을 몰아낸다?


“우선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숨(호흡)기도의 방법은 이런 것”이다 하며 알려 주었다. “들숨(흡吸, 숨을 들이마심)에서는 하나님과 성령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성령을 인지하고, 날숨(호呼, 숨을 내쉼)에서는 내 속의 죄악을 몰아낸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상기와 같이 생각하며 ‘관상기도 놀이’를 하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죄를 몰아내겠다며 애쓰는 모습으로 차분히 성령하나님과 교제하는가보다' 라고 그저 이해를 하고 싶으나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넘길 사안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심각한 신학적문제가 다음과 같이 발생할 수 있게 되어 위험한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양종교 기(氣)운동의 기(氣)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만 대입


이미 한국 개신교회들 중 여기저기에서 실행하는 관상기도에는 동양종교 기(氣)운동의 기(氣)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만 대입을 시키는 것이 다를 뿐 나머지는 동양종교의 기(氣)운동 단학 선(禪)과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을 인격화 신(神)으로 생각지 않고 기(氣) 수준으로 보는 것은 인격적인 성령하나님을 에너지(기,氣)로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관상기도는 허구적이며 비성경적인 자기고백 수준이라 하겠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 성자하나님께서 성령하나님을 파송하시기 때문에‘성령을 받으라!’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며 카리스마를 좌지우지 하겠다는 것이야말로 비성경적이다.


또한 죄는 내 기분으로 생각하면서 내 마음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인위적으로 내보내어지는 것도 아니다. 호흡(숨)으로 내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죄악을 내보낸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은 죄의 속성을 물량적인 것으로 속이는 것이다. 죄는 무형체이며 영적인 것인데 육적이며 물량(에너지)적인 것으로 표현하려는 비성경적인 의도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이 없애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 주시며 불가항력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죄까지도 제 자신이 마음대로 내보내 없앤다는 것은 교만한 것을 뛰어 넘어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일시하려는 것으로 비성경적인 해괴한 일이다.




신비주의 자아최면 행각의 실체 드러나!


그리고 “복음서의 변화산 말씀을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2000년 전의 변화산의 현장에 자신이 가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때 그 주님을 마음에서 느끼며 그 당시의 제자가 된 내 마음에 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며, 또 “혈루병을 앓는 여인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때 그 주님을 자신의 마음에 생각하고 있으면 역시 그 순간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일체의 행위가 경험 되는데 그것을 관상이라”고 한다.


“그룹으로 모여 할 때는 관상을 인도하는 리더가 반듯한 자세로 눈을 감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자! 지금 산을 올라갑니다’라고 하면 마음으로 함께 산을 오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하면 모두가 그 아름다움을 본 것처럼 마음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여행과 등산과 산보를 함께 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리더가 말과 분위기를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고 고백을 하였다.



자기암시를 준 최면상태에서 인식되는 생각이 주님의 음성으로 합당한가?


여기에서 우리는 마치 최면을 거는 모습하고 너무 흡사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암시를 주어 집단 최면을 거는 관상기도행태 속에서 생각나는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합당한 것인가?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슐라이마허의 감정의 신학이요, 무신론이요, 영매를 쓰는 뉴에이지의 흐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교도인들의 명상과 다름없는 행태에서 때로는 자기 생각 속에서 자기 없음(무無)현상이 나타나는 캄캄한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태고의 고요함을 느끼는 자아(Ego)와의 대화가 마치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교제와 안식을 얻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드는 비성경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자기 생각 속에서 자기 없음(무無)현상이 나타나는 캄캄한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태고의 고요함을 느낀다며 평안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심지어 영혼이 무(無)가 되는 것, 자아(Ego)가 없어짐 즉 영혼의 멸절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비약이 얼마든지 가능한 비성경적인 행각이 나올 수가 있다.



관상기도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효함이 옳다


관상을 이끄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배가 고프지 않다. 그저 성경적인 설교만하고 있어도 비행기타고 해외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는 탄탄한 재력도 있다. 그들은 실제생활에서도 전혀 아쉬운 것이 없는 부요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이 관상기도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로, 이 세대 영성의 새로운 모태가 될 수준 높은 영성기도로 치켜 올리며 수많은 성도들을 관상의 허구 속으로 몰아가려는지 그 숨은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관상에 참여하면 시대가 요청하는 진보개혁 엘리트 교인이고 관상에 반대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보수 세력으로 비아냥을 해서는 안된다. 시대정신을 따라하지 말고 무엇이 성경적으로 옳고 그른지 건전한 비판을 통하여 교통정리를 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개신교가 관상기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왜 위험한 도박이고 한국교회를 망치는 지름길인지 확연히 드러난 이상, 관상기도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효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


유행하는 시대정신(최근의 시대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이 느낌(Feeling), 즉 감성을 강조하여 원시 고대 문명의 부활(회귀)을 강조하여 힌두교, 불교식의 명상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에 동양종교 단학 선 같은 기(氣) 운동이 합세하여 서울한국에 우후죽순처럼 들어 선 것이 벌써 10년 이상 되어 한국의 문화적 강산을 변하게 하였다.


그래서 관상은 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정신의 사도들(동참한 목회자들 포함-그 사도들은 누구의 종들로서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인지 모르지만)이 역사적인 사명감에 도취되어 열려진 감성적 느낌문화(Feeling Culture)의 물결로 개신교의 근간을 바꾸려하는 비성경적인 큰 흐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 진리는 시대정신(시대사조,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이 제아무리 요동을 쳐도 달라질 이유가 없다. 아직 늦질 않았으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정신을 진리로 알고 분별없이 따르려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앞에서 죄악의 씻음을 받고 성경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림헌원 목사>


총신대원 졸

명지대학교 학부와 사회교육원 및

협성대학교 학부 강의

성남시 건강가정지원센터 가족상담팀 면접상담원


제13호 •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 출처 : 크리스천인사이드  http://www.cion.kr/

   
▲ WCC한준위 대표대회장 김삼환 목사가 폐막 전, WCC가 채택한 '한반도 성명서'와 정면으로 배치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 개막식에서 축하 연설을 하고 있는 김삼환 목사 . (WCC 제공 하이라이트 영상 갈무리)

김삼환 목사(WCC한국준비위원회 대표대회장·명성교회)가 유엔의 북한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한반도 평화를 촉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성명서에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11월 8일 부산 벡스코 비즈니스 홀에서 열린 WCC 총회 마지막 전체 회의에서 김 목사는 유엔의 북한 경제제재를 찬성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WCC한국준비위원회 대표대회장 자격으로 강단에 선 김 목사는 발언 대부분을 WCC 부산 총회가 성공적으로 잘 치러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데 할애했다. 약 7분간 감사 인사를 한 그는 WCC 총회대의원(총대)들에게 몇 가지 첨언을 하겠다고 했다.

김삼환 목사는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훌륭한 통치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엔의 북한 경제제재 결의는 적절하고 훌륭한 결정이다. 한국교회는 유엔 결의를 존중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하루 속히 개방되고 억압에서 벗어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회의에 참석한 WCC 총대들은 당황했다. 바로 전날인 7일, 같은 자리에서 총대들은 유엔의 북한 경제제재 해제를 촉구하자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WCC한준위를 대표하는 사람이 WCC가 채택한 공식 성명서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셈이다.

WCC 부산 총회가 공식 채택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에는 유엔의 대북결의안을 비판하며 한반도 평화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우리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새로운 노력을 시작하고, 북한에 대한 기존의 경제제재와 금융 제재를 해제하도록 각국 정부와 함께 협력한다", "경제제재는 일차적으로 한 국가의 국민,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수단이 되며,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의 전략적 효과뿐만 아니라 윤리적 원칙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현장에 있던 한 총대는 김삼환 목사의 발언에 대부분의 WCC 총대가 황당해했다고 전했다. 특별히 한반도 평화 협정과 성명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인 한국 대표들이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그는 한준위 대표대회장이 대회를 마무리하는 인사말에서 총회 결의를 뒤엎은 것은 예의와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 지지 발언은 맥락상 뜬금없는 거라며, 누구라도 정치적인 발언으로 들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 배태진 목사는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김삼환 목사가 대북 경제제재 조치로 고통당하는 북한 형제를 위한 WCC의 인도주의적 결단을, 한마디 말로 오염시켰다"고 비판했다. 배 목사는 김삼환 목사의 발언이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WCC 부산 총회의 주제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WCC 총대의 뜻을 배반하는 참으로 한심한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한준위 측은 김삼환 목사의 발언이 보수 교회 입장도 대변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종화 목사(WCC한준위 준비대회장)는 지난 11월 7일 WCC가 승인한 '한반도 성명서'가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일부 정부 관계자와 보수 교회의 비판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에 김삼환 목사가 WCC는 용공 좌파라는 괜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성명서와 균형을 맞추는 발언을 개인적으로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박 목사는 WCC '한반도 성명서'에도 대북 경제제재 해제를 위해 북한이 걸맞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했다. 그는 김 목사의 발언이 WCC 성명서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WCC는 대북 경제제재 해제에, 김삼환 목사는 북한의 선행 조치에 강조점을 달리 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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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가입은 에이즈 환자와 동침한 꼴"
찬성 패널 불참한 WCC 토론회...반대 측의 맹비난만 난무

데스크 승인 2012.10.09 00:51:13 이용필 (feel2)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기독교사상연구원 주최로 'WCC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토론회가 10월 8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WCC 찬성 패널 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가 불참하면서, 반쪽짜리 토론회가 진행됐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2013년 부산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앞두고 WCC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뜨겁다. WCC를 지지하는 교단은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힘을 모으자고 외치지만, 반대 교단은 개최 금지에 힘을 쏟는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10월 8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기독교사상연구원(최덕성 원장) 주최로 WCC 토론회가 열렸다. 찬성과 반대 측 학자가 토론자로 나서 논쟁을 벌일 것을 기대해 청중 70여 명이 모였다. 하지만 찬성 측 토론자로 나설 예정이었던 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가 불참하면서 토론회는 반대 측의 일방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는 성토장으로 전락했다.

이 교수는 이틀 전 주최 측에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 "교단 내 관계자들이 여러 정보에 근거하여 포럼에 나서지 말라 했다"며 불참 이유를 통보했다. 이에 따라 이날 토론회에서는 신원균 목사(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가 이 교수의 'WCC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오해'라는 발제문을 대독했다. 반대 측 토론자로 최덕성 원장이 나서 'WCC 따라가면 교회가 죽는다'라는 발제문을 발표했다. 이 교수가 불참한 탓에, 2시간 30분가량 진행된 토론회는 최 원장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WCC에 대한 최 원장의 반대 입장은 확고했다. 그는 "WCC에 속한 영국·독일·미국·캐나다·네덜란드·호주 등에 있는 교회들이 사실상 죽었다"면서 한국교회도 다른 나라 교회처럼 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토론회는 종교다원주의·교회론·성령론·선교론 등 네 가지 주제로 진행됐다. 이 가운데 종교다원주의가 토론회의 중심 주제였다. 이 교수는 발제문에서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교수는 "WCC는 타 종교와 대화에서 복음과 성경, 삼위일체론, 교회의 본질, 하나님의 선교 등 기독교의 본질과 교회의 정체성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의 다원성은 인정한다"고 했다. 이어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확고하게 붙잡고 특히 도덕과 사회 윤리 차원에서 타 종교들과 대화하고 연대하려 한다"고 했다.

최 원장은, WCC 홈페이지에 있는 문헌을 살펴본바 WCC는 복음 전도를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 통행으로 규정한다고 했다. 최 원장은 "타 종교도 진리일 수 있기에 쌍방 통행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예수만이 구원(한다는 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선 구원이 다른 종교에도 있다면 굳이 기독교를 믿을 필요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최 원장은 "WCC는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문화·종교·인종·지역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독교 신앙관을 흔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WCC가 종교다원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 구원만이 전부가 아니며, 타 종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의 신앙무차별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토론회가 끝날 즈음, 최 원장은 과격한 비유를 들며 WCC를 찬성하는 교단들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였다. 그는 한국교회 내 5%도 안 되는 목회자들이 WCC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면서 "이들이 신앙무차별주의를 조장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한다"고 했다. 최 원장은 "(에이즈 환자와) 동침 자체는 쾌락을 주지만 곧 죽음을 맞이하는데, WCC에 가담한 목회자와 교단은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최 원장은 "WCC에 속한 영국·독일·미국·캐나다·네덜란드·호주에 있는 교회들이 사실상 죽었다"면서 한국교회도 다른 나라 교회처럼 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날 토론회는 10여 명의 취재진을 비롯해 70여 명의 청중들이 참석했다. WCC에 대한 뜨거운 토론을 기대했던 참석자들은 이형기 명예교수의 불참 소식에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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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yeahjigi| 원글보기

전 세계교회가 성경에 바탕을 두고 하나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W.C.C.의 현실은 이방사상에 지나치게 오염되어 함께 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일부 복음주의 교단들이 참여하고 있다 해서 옳지 않음이 옳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10.30~11.8까지 행사는 끝나더라도 한국교회에 미칠 악영향이 걱정이 됩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스> <iframe title='WCC의 실상' width='640px' height='360px' src='http://videofarm.daum.net/controller/video/viewer/Video.html?vid=v39447nGa2R1nZZdnLZULaU&play_loc=undefined' frameborder='0' scrolling='no' ></iframe>

 

자료 더 보기 ==> http://cafe.daum.net/agaser/5o1R/589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5)교리적 관점에서 본 WCC 부산총회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2013년 10월 19일 (토) 20:26:02 문병호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섣부른 잔치’ 아닌 ‘역사적 회개’가 필요하다

문제 핵심은 WCC 신학…성경 진리보다 가시적 일치 집착하는 태도 반드시 수정돼야
바른 교리에 서 있지 않은 에큐메니칼운동은 장애물…분열 행보 즉각 중지·사죄하라


   
  ▲ 문병호 교수  

1.WCC의 이중적 횡보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명목으로 성경의 진리조차도 하나의 타협거리 정도로 여긴다. 그들은 정통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등을 멀리하고 자유주의 세속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여러모로 표방하고 구현해 왔다.

 

WCC 문제는 일차적으로 진리의 문제이다. 곧 교회가 바로 서느냐 넘어지느냐의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은 WCC의 신학에 있다. WCC는 소위 근대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수행한다는 미명하에 진리를 묻지 않고 무차별적인 기구적, 조직적 교회 연합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무분별한 성경비평을 일삼고, 세속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원천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우리가 WCC에 대한 경각심을 드높이고 이를 적극 반대하는 이유는 이 행사가 성경무오(聖經無誤)를 믿고 참 교리에 서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을 미혹하여 이성주의, 세속주의, 다원주의에 물들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왜냐하면 거짓 교훈은 누룩과 같이 속히 번져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마 16:6).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는 보수적인 교단들과 성도들은 부산총회를 반대하는 입장을 누누이 천명해 왔다. 우리는 WCC의 총회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WCC 자체를 성경적인 단체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WCC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횡보를 즉각 중지하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미명하에 오히려 교회의 분열과 성도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을 이제 그만 그쳐야 할 것이다. 그들이 먼저 할 일은 한국교회 분열에 대한 역사적 회개이지, 섣부른 잔칫집 초대가 아니다.
 

2. “다른 복음”도 “복음적”이라고 끌어안는 WCC

WCC는 성경을 전통(傳統) 혹은 전통화(傳統化)의 산물로 본다. 성경은 교회와 개인의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서 상대적인 권위만 가질 뿐이므로 그것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 66권만을 정경(正經)으로 보는 데에도 부정적이다.

 

WCC는 “에큐메니칼 성경해석학”을 주창하면서, 성경기록을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그리고 성경을 그 해석학적 작업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치는 해석자의 수준과 체험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해석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성경의 상황적 의미를 그들은 “전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오직 전통의 형태로만 작용한다.

 

WCC에 있어서, 성경은 여전히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는 미완성·미해결의 책이다. 그들에게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도, 그것으로부터 나온 보편적 교리도 없다. 그들은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또한 성경에는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완전한 구원교리가 담겨있다는 사실(딤후 3:16; 계 22:18~19)을 인정하지 않는다.

 

WCC의 입장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성부는 사랑의 하나님, 성자는 은혜의 하나님, 성령은 능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각각의 위격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그리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된다. WCC에 의하면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은 부인되고 서로 간의 관계만 남게 된다.

 

WCC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회들의 협의회”라고 본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단지 가시적 형태의 교회 즉 조직적이며 기구적인 교회에만 제한된다.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토대를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성도 서로간의 가시적 친교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의 비밀을 아예 제거해 버렸다(엡 5:3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성취를 외면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신념과 공동체적 소망만을 교회에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몸”이라고 정의하는데 더 익숙하다(엡 4:12).

 

WCC 신학의 모호성은 성례에서 극에 달한다. 그들은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표징-물 혹은 씻음-이 제시하는 의미를 “성(性)이나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의 장벽이 극복되는 새로운 인간성에로의 해방”에서 찾는다. 그들이 세례를 “문화화”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또한 WCC는 성찬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양극단의 오류에 빠져있다. 이러한 오류 역시 성찬을 통하여 가시적인 교제를 강조하는데 기인한다.  WCC가 말하는 “성찬적 사건”은 “에큐메니칼 사건”을 뜻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찬의 핵심적 가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총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그 표징이 떡과 잔일 필요가 없으며, 굳이 그 의미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WCC의 입장을 ‘성례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종교다원주의의 길: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교회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요 17:21). WCC는 교회의 본질을 사람의 교제에서 찾는다. 서로 모여서 하나가 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의 여하함은 묻지 않는다.

 

WCC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성도의 교제보다 WCC를 축으로 삼는 교회의 가시적·조직적·기구적 연합과 일치를 추구한다. 그들은 이를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궁극적 목적은 “협의회적 공동체(conciliar community)”를 형성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 WCC가 머리가 되는 기구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적은 WCC에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는데 있다.

 

WCC의 이러한 목적으로 인해 종교다원주의가 필히 따르게 된다. 1990년에 작성된 <바르 선언문>에서 WCC는 창조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일반은총이 보편적이듯이 구원의 은총도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시여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승화될 때 그 가치가 구현된다고 말한다. 즉 십자가는 구원의 유일한 한 길이 아니라 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WCC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도 그들이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이 개념은 그저 명칭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듯해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어도 하나님이 하시기만 하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활동을 통하여서 선교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선교의 인간화(humanization)”를 추구한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국내 민중신학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4. 비성경적, 반교리적 경향의 심화: WCC 부산총회 전망

WCC는 그 태동에 있어서부터 동방의 정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이에 영국의 성공회가 더하여지고 성경비평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종하던 유럽의 루터란들과 개혁교단들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편승하던 미국의 일부 교단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되었다. WCC의 외연이 획기적으로 확장된 것은 옛 소련과 동구 공산권 교회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속한 군소교단들 그리고 다수의 오순절 교회들이 참여하면서 부터였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WCC는 특정 교단의 권익을 성경적 진리보다 앞세우고, 공산권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제3세계의 사회운동에 있어서 폭력이라도 불사하는 등 세속적인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WCC는 기본적인 조항에 대한 형식적인 고백만 있으면 실제적인 교리의 차이가 있더라도 어떤 교단이라도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각 교회가 교리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극단적인 세속주의, 다원주의, 심지어 신은 죽었다는 사신신학(死神神學)을 좇더라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 어떻게 믿는지는 거론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진리가 기준이 되지 못하고 정치적인 논리나 세속적인 가치가 전면에 부각된다.

 

진리가 다르고 성경의 가르침에 바로 서있지 않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무분별하게 모이기만 힘쓰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수단이 될 뿐이다. WCC야말로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지으시고 운행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자격을 갖추지도 않은, 진리에 서 있지 않은 연합과 일치를 기뻐하시겠는가?

 

WCC를 준비하고 있는 유치측의 최근 횡보를 보면 가히 의아스러움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들은 실상은 감춘 채, 전혀 비본질적인 행사들을 과대 홍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총회에서 다루어질 민감한 의제들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고, 그저 역대 개최지를 순회하며 땅이나 밟고, 통일열차를 운행한답시고 분주하며, 마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잔칫집 흉내만 내고 있다. 이러한 행사들은 식전행사 정도에 불과한 것이지, WCC 총회가 다룰 의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다만 이러한 점에 비추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동안 있었던 역대 총회들의 흐름과 최근의 몇몇 준비 문건을 고려할 때 부산총회는 이전의 어느 총회에서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정통 교리에서 더욱 멀리 일탈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WCC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지만 교회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고 세속적이고 기구적인 활동을 주로 삼는다. 그러므로 WCC에 참여하거나 WCC를 돕는 것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된다고 할 것이다. 빛과 어두움, 의와 불법,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시거든(요 14:17), 이방의 습속을 행하며 초혼제를 벌이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믿고 아는 자라고 할 것인가(요 17:3)? 어찌 그곳에 모인 자들을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인가(롬 8:9; 행 11:26)?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진리 가운데로만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거늘(요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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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4)역사적 관점에서 본 WCC부산총회 전망
박영실 교수(총신대·교회사)
2013년 10월 08일 (화) 16:41:07 박영실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바른 신학·진정한 선교’ 되묻게 할 역설적 총회

‘마닐라 문서’ 근거한 새로운 선교 지침 예고했지만 이전의 낡은 선교 이해 답습
‘기독교 토착화’ 미명 하에 이방문화 무분별 허용, 종교다원주의 확산 우려 커져


   
  ▲ 박영실 교수  

WCC의 정체성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WCC 10차 총회 한국준비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자료집에서 정병준은 이 WCC의 발달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 교회 협의회(이하 WCC)를 탄생시켰고 WCC는 개신교 선교 운동으로 출발해서 개신교회와 동방정교회를 포함하는 세계적인 기독교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간략한 진술에 통해 기독교 역사에 표출된 WCC의 기본 성격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WCC는 개신교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하지만 WCC는 특히 개신교 내에서의 종교 개혁이후의 교회 분열 현상을 회복하는 데 그 목표를 둔 교회 운동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WCC라는 역사적인 세계 교회 기구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던 지도자들은 “에큐메니칼 운동 전반에 보다 더 효과적인 자기 표현의 기구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WCC는 교회연합 운동이다. 그것은 2012년 1월 현재 전 세계 140개국에 349개의 교회들과 5억 8000만의 신자를 가진 교회연합 기구이다. 동방정교회는 그 시작부터 회원이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WCC 내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회원교회로만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12억의 인구를 가진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절반 밖에 안 되는 신자를 가진 WCC에 회원 교회로 가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부산 총회의 개막식에서 교황의 영상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보듯이 로마 가톨릭 교회는 WCC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셋째, WCC는 우선적으로 선교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WCC는 다음의 세 흐름의 조합의 형태로 구성된 것이다. 1937년에 영국 땅인 옥스퍼드에서 생활과 봉사 국제 대회와 동년에 에딘버러에서 신앙과 직제 세계 회의가 통합을 결정하였다. 그 이듬해인 1938년에 우트레히트에서 세계교회협의회 헌법 초안을 마련하여 WCC를 출범시킬 계획이었으나 2차 세계 대전으로 10년이 지난 1948년에 이르러서야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WCC 제 1차 총회가 개최됨으로 WCC가 출현한 것이다. 이 WCC에 국제선교위원회(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연합한 것은 1961년 인도의 뉴델리 총회에서였다. IMC의 합류는 늦었다지만 그래도 WCC는 선교운동이었던 1910년 에딘버러 대회에서 그 역사적 연원을 찾는다. 따라서 WCC의 선교 이해는 그것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현재의 WCC은 그 본래 의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1, 2차 총회 기간 사이에 WCC 내에 이미 “하나님의 선교”와 같은 변질된 선교 이론이 유포되었다. WCC의 이런 경향은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간의 신학적인 충돌을 야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전쟁으로 WCC의 근본 성격을 더 조사해 볼 겨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한국 장로교회는 김현정과 명신홍 목사를 제 2차 총회인 에반스톤 총회에 파견하면서 WCC의 신학사상에 관한 자세히 보고할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해서 신학사상에 관하여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한국교회 내에 일찍부터 WCC의 정체성에 관한 신학적 견해차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서의 WCC 이슈는 교권적 사안이기 전에 이미 신학적인 이슈로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교회 내에서 WCC의 정식 멤버십을 갖게 된 것도 초기가 아닌 제 3차 뉴델리 총회(1961)에 가서야 기독교 장로회 교단이 가입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로부터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한국 교회에는 여전히 WCC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WCC가 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을 준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안위가 풍전등화와 같을 때 WCC의 중앙 위원회는 북한의 도발을 성토하면서 UN의 참여를 독려했을 뿐만 아니라 UN을 통해서 들어온 구호품 보다 더 많은 양의 물품들을 회원국들의 협조를 받아서 한국에 전달해 주었다 한다. 또한 이번 총회 개막전 행사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고려하여 독일에서 출발하여 러시아를 거쳐서 그리고 북한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평화 열차나 평화 협정과 같은 행사들도 기획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국민으로서는 WCC의 이런 면들이 매우 고마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 교회적인 입장에서의 그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WCC는 일차적으로 교회 운동을 표방하는 기구이기에, 그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고려가 우선적이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WCC의 선교관에서는 어느덧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선교의 의미가 퇴색하고 사회구조적인 불의한 구조 개선을 시도하는 등의 사회 운동적 혹은 사회 윤리적 해석을 강조하게 되었다. 로마의 속박 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했지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구원자로서의 본질에 충실하셨던 점을 기억할 때인 것이다.

 

WCC 10차 총회의 진행과 관련해서는 기본 프로그램 외에 개최 나라와 또 그 나라가 속한 대륙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에 따라서 특색 있는 장외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이러한 장외프로그램으로는 8차 총회 개최국 짐바브웨 하라레에서는 ‘파다레’(Padare)가, 그런가 하면 9차 총회가 열린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는 ‘무치롱’(Muchirao)이 운영되었다. 금년 부산 총회에서는 한국적 의미를 살려서 ‘마당’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마당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계 교회가 갖고 있는 다양한 경험을 전시하며 나누고 토론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전시와 토론의 장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경건에서의 이탈의 현장이 되곤 하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파다레’와 ‘무치롱’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의 ‘토착화’란 미명하에 이방 문화적인 요소들의 무분별한 허용의 결과 종교다원주의적 분위기의 확산으로 이어지곤 우려되는 것이다.

 

이번 WCC 총회의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와 치유를 주소서!’이다. 매 총회의 주제는 개최국과 그 개최국이 속한 대륙의 특수한 상황들의 고려 하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원래 한국준비위원회 측의 주제 제안은 ‘삼위 일체 하나님, 생명, 평화, 치유’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 교회들에서 ‘정의’를 제안해서 결국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와 치유를 주소서!’가 이번 총회의 주제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그 형식이 사회적 구조적인 악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선교의 기본 개념의 도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번 부산 총회에서는 또한 WCC의 갱신된 선교 선언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1961년에 WCC와 IMC가 통합된 이래로 WCC의 선교와 전도 위원회(이하 CWME)에서 나온 WCC의 공식적인 선교와 전도 지침서로는 1982년의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적 확언’이라는 문서가 있었다. 그 이후 30년 동안의 지구상의 환경과 인간과 교회의 변화를 감안하여 갱신된 WCC의 선교 이론에 기초한 새로운 선교와 전도의 지침서가 이번에 부산 총회에 상정되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 지침서는 제 9차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 후 CWME 멤버들이 새로운 선교와 전도의 확언을 세우기 위해서 작업을 하였고 이 작업의 결과물이 2012년 3월에 마닐라에서 개최된 CWME 위원회에 제출되어 검토하였다.(이후에는 ‘마닐라 문서’). 이 마닐라 문서는 ‘에큐메니칼적 확언’(1982)에 비해서 훨씬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적 보편주의로 선교의 관점이 이동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선교를 개인 간, 공동체 간, 국가 간, 그리고 우주적 차원의 생명신학 틀 안에서 고려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의 전통적인 선교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의 이동이라는 양상을 가졌다면, 마닐라 문서는 지구상의 환경파괴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현상 하에서는 환경과 인간과 교회가 ‘주변부’에서의 ‘중심’으로의 이동이라는 선교의 패턴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마닐라 문서에서는 ‘불의 숨결’로써의 ‘변혁적 영성’을 의미하는 성령의 선교를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기독교의 보편적 개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원화와 다변화 가운데서 종교간 대화와 교차 문화적 의사소통을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두 지침서들(1982년& 2012년) 모두 1960년대 이후로 WCC의 선교이론으로 자리매김을 한 ‘하나님의 선교’ 신학적 강조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 이론이 그리 평가되듯이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으며 교회야말로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가장 분명한 지상의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에서의 교회의 역할이 너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강조와 예수의 유일성에 관한 주장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선포로서의 선교 이해는 이미 낡은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것이다.

 

1961년에 WCC의 선교가 너무 약화되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WCC와 IMC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였던 그 당시의 IMC 총무였던 레슬리 뉴비긴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WCC의 종교 다원주의적 경향과 타문화 선교의 쇠퇴를 확인하면서 이전의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였다한다. 30여년이 지난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뉴비긴은 WCC가 너무 종교 다원주의 경향이 심화된 나머지 그리스도 중심적 연합체라는 주장에 크게 반하여 사실상 연합정신의 구심점을 상실했노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뉴비긴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기가 아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죄와 용서, 고통과 평안 그리고 죽음과 삶을 확인하는 유일한 장소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부산 총회 개최와 관련하여 한국에서의 WCC 이슈는 참된 복음이 무엇이며 또 진정한 선교가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다시 성찰하게 한다. WCC가 ‘가시적 교회 연합’에만 집착한 나머지 바른 신학, 바른 교리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거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의 ‘Sola’(오직)로 대변되는 바른 진리 표방은 물론이고 박형룡 박사도 지적하듯이“명백히 정의된 신학”마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 WCC의 경향성은 바른 ‘진리 회복’을 목표로 출발한 개신교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지난 500년의 역사를 허사로 돌리는 격이 된다. 차제에 WCC라는 신학적인 이슈와 관련하여 형성된 최근의 한국 교회의 신학적 지형도를 바라보면서 바른 신학의 보수를 위한 보수주의자들의 단합과 협력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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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3)WCC 사회참여 정책 비판과 전망
황봉환 교수(대신대 신대원장)
2013년 10월 04일 (금) 13:25:23 황봉환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투쟁적 사회책임 강조, 교회 본질사명 놓쳤다

사회정의·인류평화 증진 위한 노력 강조했으나 지나치게 ‘싸우는 교회’ 부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굳건한 신학적 교리에 근거 둬야 ‘사회참여’ 의미 커져

 

   
  ▲ 황봉환 교수  
1. 서론

WCC 총회의 중심 의제는 사회참여 문제에 두고 있다. 이번 글에는 WCC가 공식적인 대회들을 통해 밝힌 사회참여에 대한 평가와 WCC의 주장이 세계교회에 미친 공헌점과 문제점에 대하여 논의하고, 개혁주의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2. 사회참여에 대한 WCC 총회의 공식적 논의들

1)제1차 총회는 ‘교회와 사회관계’, ‘사회의 무질서’ 그리고 ‘국제적 무질서’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에 대하여 논의했다. 총회는 첫째, 기술 발달에 기인한 권력의 광대한 집중의 원인을 분석하고, 둘째, 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자들의 사적 소유권은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정의에 근거하여 억제되고 분배되어야 하고, 셋째, 사회에는 자유와 공공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며, 정치 경제 권력자들의 힘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제2차 총회에서는 3개 분과의 주제가 사회참여와 관련된 주제였다. 총회는 책임적 사회구현을 요구하면서 첫째,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대량살상무기 생산과 전쟁 반대, 둘째, 총회는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을 반대했다. 따라서 총회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치우쳤다.

 

3)제3차 총회는 교회의 사명이 사회참여에 있음을 강조했다. 첫째, 교회는 독재정권에 복종해서는 안 되며, 둘째, 국제문제교회위원회는 국제적인 경제협력, 유엔의 개발원조, 공정한 무역정책, 주요 공산품의 가격안정, 개발에 대한 훈련과 연구 그리고 인구 억제 등에 대해 언급했다.

 

4)웁살라 총회는 질서와 평화에 기초한 책임사회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이전 방식 보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Rapid Social Change)를 바라며 혁명신학에로 전향했다. 사회참여에 대한 급진적 변화는 첫째, 경제정의와 식량문제로 제3세계에서 발생하는 기아와 비인간화의 해결을 위해 실제적 대안과 함께 교회가 ‘혁명적인 것’을 시도할 것, 둘째, 모든 전쟁에 대해 양심적으로 반대할 것과 셋째, 미국의 월남 전쟁 개입을 반대했고, 나이지리아 내전의 배후세력을 강하게 정죄했다. 따라서 WCC는 영혼 구원과 사회참여를 총체적으로 다루어 오는 과정에서 신학과 실천을 균형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급진적 사회참여 사상을 강조했다.

 

5)제5차 총회에서 사회참여에 대해 토의한 5분과의 주제는 ‘구조악 해방을 위한 투쟁’이였다. 총회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위한 교회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며, ‘구조악 해방을 위한 투쟁’을 다룬 토의에서는 그리스도를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자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 악으로부터의 해방자로 정의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의 사회참여에 대한 대리적 직분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기울어졌다.

 

6)밴쿠버 총회의 8가지 주제들 가운데 4개가 사회참여와 관련된 주제였다. 그 주제들은 ‘참여를 위한 움직임’, ‘공동체 속에서의 나눔과 삶’, ‘평화와 생존 위협에 대한 대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 이었다. 평화와 생존의 위협 문제를 다룬 논의에서는 교회들이 대량 파괴 또는 무차별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무기와 관련된 어떤 분쟁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을 요청했다.

 

7)캔버라 총회는 사회 참여와 관련된 주제들을 논의하면서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 위기에 처한 피조세계의 질서, 난민들과 이민자들의 문제, 인종차별 그리고 여성인권 등의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1분과에서는 ‘정의, 평화, 생태보존’(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JPIC)이란 주제로 서울 대회에서 채택한 경제정의 실현과 생태보존 등에 관한 10가지 강령을 교회마다 실천해야 할 WCC 운동으로 선언했다.

 

8)제8차 총회는 21세기 인류 공동체에 부각된 세계화 문제와 함께 주된 관심을 사회참여에 두었다. 총회는 복음적인 회심보다 세계의 변화에 대한 능동적 참여와 사회적 변화를 통한 인간적 삶을 추구했다. 캔버라 총회와 JPIC(1990) 총회 이후에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Justice, Peace and Creation) 분과를 두어 이산화탄소 배출을 축소시키고, 성차별을 폐지하고, 신학교육을 받은 여성 지도자 임명,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책임성을 요구했다.

 

9)제9차 총회는 2개 분과에서 사회정의와 경제윤리에 대하여 토의했다. ‘가난 없는 세상’이란 주제 하에 인간이 만든 체계적인 구조들이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탐욕으로 억압과 착취와 불의의 구조가 생겨났고, 지구 자체의 생존이 위협받는 시점에 와있다고 성토했다. 총회는 군사독재로 신음하는 나라들을 향한 폭력 극복에 대한 논의와, 빈부 격차와 폭력과 핵무기로 인하여 생명이 위협받고 고통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교회는 비폭력을 지지해야 하며, 전쟁에 참가를 거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3.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  WCC의 공헌점과 문제점

1)사회참여와 관련된 WCC의 공헌점에 대한 평가:WCC가 역사적 과정에서 세계 교회 앞에 드러낸 공헌점은 없는가? 첫째, WCC가 타종교와 연대하여 사회정의와 인류평화 증진에 공동행동을 취하자는 노력이 공헌점이다. 둘째, WCC가 타종교에 대한 윤리적 덕목과 가치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타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셋째, WCC는 총회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 인종과 성(性)차별 폐지 그리고 문맹자들에 대한 교육지원을 강조했다.

 

2)사회참여와 관련된 WCC의 문제점에 대한 평가:첫째, WCC의 근본적 문제점은 복음으로 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하는 최우선 사명을 간과하고 사회참여만을 추구하며, 교회의 사회책임만을 강조하여 성경 계시의 근본적인 목적에서 벗어났다. 둘째, WCC는 사회참여를 요구하면서 인종차별 폐지에 대항하여 투쟁을 강조한다. 5차 총회는 사회의 구조악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해 폭력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성차별과 인종차별 폐지와 인권을 위한 투쟁적 사회참여를 외쳤다. 셋째, WCC는 빈곤자들에 대한 경제적 구제를 총회 때마다 강조하며, 그들을 위한 투쟁을 외쳤다. WCC가 잘못된 사회구조의 해방을 말했지만 개인적인 삶의 변화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넷째, WCC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종교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적 사회참여를 유도했다. 다섯째, WCC는 경제적 참여에 일치를 주장한다. WCC는 국가의 경제활동이 탈중앙집권화 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는 긍정성도 보였지만 교회가 국가의 경제활동과 노조운동과 경제적 약자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하면서 착취에 항거하여 노동자를 위한 인간다운 환경조성을 위하여 싸우는 노조운동을 교회는 환영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투쟁을 통해 구조악을 제거하려는 일치운동은 바르지 못하며, 구조적 해방을 위한 폭력의 정당성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4. 사회참여에 대한 개혁주의의 관점에서의 평가와 전망

1)개혁주의 관점에서 사회참여의 의의(意義)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은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인정한다. 2)개혁주의의 사회 참여에 대한 교리적 토대는 첫째, 하나님만이 인간과 세상의 절대 주권자라는 신학과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교리와 셋째, 사회참여는 인간의 구원 교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교리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의로운 법도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한다. 3)개혁주의의 사회 참여에 대한 방법은 첫째, 개혁주의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직업에로의 소명(vocation)을 가지고 그 분야에서 사회참여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전(全) 교회 공동체의 사회참여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 각자에게 주신 은사(spiritual gift)를 통해 교회에 주신 사명을 수행하게 하신다. 4)사회·정치적 참여에 대한 요구와 전망에 대한 개혁주의 관점은 첫째, 개혁주의 교회는 WCC가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인권운동,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운동, 경제적 가난으로부터의 구제운동 등에 참여할 때 국가가 할 일과 교회가 참여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둘째,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여 세금납부와 같은 의무들을 이행하며(롬 13:1~7), 국가의 평안을 위해 기도할 것(렘 29:7)을 권면한다. 셋째, 국가는 종교 활동이 자유롭게 행해지도록 환경과 조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넷째, 국가의 관리들은 선량한 자에게 보상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벌을 가하도록 허락하셨다(롬 13:3). 이러한 것들이 국가와 국민 사이에서 이행되어야 할 상호 책임이요 의무이다.


5. 결론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용어가 의미하듯이 전 세계, 전 교회들 간의 관계와 일치 그리고 선교와 사회참여에 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는 WCC의 교회 일치운동을 수용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치운동에 대한 신학적이고 신앙적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한 ‘교회들의 대화, 협력 그리고 공동의 증거’라는 전제에서가 아니라 신학적 일치, 신앙고백적 일치 그리고 믿음의 일치가 선행되어야 함을 개혁주의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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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2)WCC의 사회윤리 문제(동성애) 비판
한수환 교수(광신대·조직신학)
2013년 09월 30일 (월) 11:13:28 한수환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기독론 빠진 동성애 포용은 정치행위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로 인식, ‘회원으로 수용’ 주장은 종교적 행위 아닌 정치적 통합시스템
교리나 신조 없는 선교는 일종의 ‘선교중독’… ‘창조질서 회복’ 명령 잊지말아야


   
  ▲ 한수환 교수  
 
1
제10차 총회를 2013년 부산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현재 세계 110개국 349개 개신교단과 로마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 등을 회원으로 가지고 있다. 한국에는 통합측과 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WCC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교리나 신조들은 도외시하면서 모든 종교들과 교회, 단체, 집단들을 다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있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종교다원주의와 사회윤리 문제들, 무엇보다 동성애에 대한 포용적 태도들은 앞날의 한국 개신교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들의 사회윤리 입장은 무엇이고 거기에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2
WCC는 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는 종교들과 인종, 성별, 혹은 교파들을 초월해서 소위 ‘하나’되기 위한 교회를 위해 1948년도 8월 23일부터 9월 24일까지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공식적으로 발족된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연합회였다. 물론 이전에도 ‘연합’을 강조하면서 모인 많은 종교회의들이 있었지만 암스텔담 회의부터 WCC는 기독교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구원에 관하여는 종교다원주의의 노선을 택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한 사회윤리적인 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흥미로운 점은 1938년 네덜란드 우트레이트(Utrecht)에서 14명의 위원들에 의해 논의, 수정, 작성된 WCC 헌법의 기본원칙 제1조이다. 거기에서 “WCC는 한 하나님과 아들, 성령의 영광을 위해 공동의 소명을 함께 실현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고 정하면서, 이런 “기본원칙에 동의를 표명하는 교회들을 WCC 회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규정했다. 이 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신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어떤 모임이든, 단체이든 상관없이 전부 회원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는 점이다. 이 의도는 WCC가 기독론보다는 신론을 가지고 기독교의 ‘통합’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겠다는 의도이다. 말하자면 기독론 없는 신론을 배경으로 하는 교회운동이 WCC의 밑바닥인 셈이다.


3 WCC의 시회윤리 입장에 대한 두 번째 문제는 개인 구원을 전제로 한 사회구원이나 사회복음 혹은 사회정의 실현이 아니라 단순히 교회들간 일치, 연합 그리고 세계선교 혹은 세계교회라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포용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WCC는 개별성과 개인성의 가치보다 보편성 내지 집단성이 강조되는 운동의 형태를 가시화시킨다. 그 예로 오로지 믿음으로 주어지는 개인 영혼의 변화나 회심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 질병과 빈곤문제, 인간해방이나 사회정의 등과 같은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특히 1968년 웁살라 총회에서는 “보편성(Catholicity)이 교회의 예배, 참된 인간성 회복을 위한 증거, 봉사, 삶 등 여러 측면에서 표현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으며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 가서는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교회들까지 수용해야 한다고 ‘보편성’의 원리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나아가서 1978년 인도의 뱅갈로에서 있었던 신앙과 직제위원회 보고서는 ‘하나의 희망을 나눔’이라는 제목으로 신앙고백들이 일치하지 않는 로마 가톨릭교회나 비성경적 세속적 연합운동과도 적극적으로 협력사업을 벌였다. 무엇보다 제 3세계의 저개발과 가난 인권 성차별주의 인종주의를 포함한 사회 정치 경제 문제 더불어, 핵무기 자연파괴와 지배계급횡포, 인권운동 신분제도 등 소위 사회 구조악 제거에 큰 관심을 보였다.


4 이런 토대 위에서 WCC는 동성애 조차 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최근 동성애자들이 소수의 사회적 약자로서 간주되면서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적인 근거도 많이 마련되고 있다. 동성애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자신들과 이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WCC는 동성애에 대단히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다. 동성애자들끼리 만든 교파는 ‘만국친교공동체교회(Universal Fellowship Metropolitan Community Church, 일명 UFMCC)’인데 1968년 미국 LA에서 페리(Troy Perry)목사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2005년부터 페리의 자문인인 낸시 윌슨(Nancy Wilson)이 이끌어가고 있다. 지금은 23개국에 250개 교회가 있으며 회원들은 늘어나는 추세이다. 동성애자들로만 구성된 교파는 미국에만도 291개와 3만 명의 신도들, 그리고 296명의 목회자들을 가지고 있다(1995년도 통계). 그들은 ‘글로벌 교회’ 표방하면서 레스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를 실현하려 한다.

 

동성애 문제는 340개 회원 교단 960명과 5000여명의 옵서버가 모인 짐바브웨의 하라레(Harare)에서 개최한 제8차 WCC 총회(1998년)에서 구체적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UFMCC 교파가 1983년 캐나다 밴쿠버 총회와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캔버라 총회에 옵저버(Observer)를 파견하였고 1998년 제 8차 하라레 WCC 총회에까지 회원들을 파송하였다. WCC는 이미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1993년 11월에 2000명의 여성들이 참석했던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를 적극 후원도 했다. 그 대회에 참석한 연사들 중 대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는데, 대략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 무리는 자신들의 동성애를 자축했을 때 주위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5 위의 사실들을 종합하면서 WCC가 가지고 있는 사회윤리의식의 정체를 보게 된다. WCC 신학의 밑바닥은 사도신경이며 여타의 많은 다른 신조들은 ‘일치’에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배제한다. 다르게 말하면 신론에 대해서만 토론하지, 기독론은 서로 불일치와 논쟁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배제시킨다.

 

과연 기독교가 기독론 없는 신론으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루어 왔던가? 역사적으로 2000년간의 수많은 신학적 논쟁도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라는 기독론에 기인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을 무시하고 신론에 만족하는 선교의 길은 종교다원주의의 길뿐이다.

 

WCC의 두 번째 문제는 개인성을 간과한 사회구원인데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인가? 한 인격을 천하의 가치에 비유하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비하면, WCC는 정치지도지나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려는 오지랖 넓은 행동들로 비친다. 교회의 본 사명은 외적인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의 내면의 변화에 있다는 이 간단한 진리를 WCC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사회 구조변화나 빈곤퇴치로 대신한다면 열심당원이었던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와 다를 바가 있는가?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공생애를 사신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그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

 

세번째 문제인 동성애자들을 사회적 약자로 보고 회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WCC의 주장은 기독교를 사회구원의 종교로 이끌려는 일종의 정치적 통합시스템이지, 결코 종교적인 행위로 비치지 않는다. 외형은 기독교라는 얼굴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성경에 그렇게 저주하고 금지하는 동성애까지 용납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얼굴을 가진 정치시스템이 분명하다.

 

동성애도 최근의 의학 자료에 따르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때로는 동성애가 유전과 선천적인 병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인식이 되어, 자칫하면 인간 본능의 ‘자연적 성향’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이 병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곡해에서 기인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와 치료가 충분히 가능하며 현대 의학적 도움을 통해 꾸준한 노력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의학은 이런 점에서 창조질서를 세우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교회는 이런 일반은총의 도움과 아울러 인간 자신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바르게 세움으로 이 질병에서 자유하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는 이런 자들을 내치기 보다 사랑과 배려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다고 동성애 자체를 ‘자연’으로 보거나 태어날 때부터 생긴 질병으로 이해하는 행위는 죄이다. 성의 왜곡은 왜곡일 뿐이지, 결코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을 옹호하여 회원으로 삼는다면 다른 문제들도 함께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매춘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일반 교회에서 적응 못하고 자신들끼리 모여서 교파를 만들어서 WCC에 가입하겠다고 하면 그들 역시 소수의 억압된 자로서 간주하고 WCC가 받아줄 것이 아닌가? 과연 선교가 성경의 핵심인가? 기독론과 교리나 신조들을 간과한 선교를 성경과 전통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예수 시대에도 동성애자나 매춘이나 가난한 자나 억압받는 자나 인권을 유린당한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외형적으로 대항하라고 선교의 사명을 주시지 않았다.

 

교리나 신조 없는 선교는 일종의 선교중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개인 내면의 변화를 무시한 집단적 외적인 힘의 선교는 오히려 기독교를 정치화시켜 나중에는 종교가 신이 되는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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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1)WCC의 비기독교적 기독론과 구원론 비판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2013년 09월 20일 (금) 17:53:54 문병호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그리스도가 없는 변종 에큐메니즘만 남았다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 사실상 방치하거나 거부…교회 본질 ‘가시적 친교’서 찾아
그리스도를 떠난 인류 연합과 일치 강조, 오히려 교회 분열 영구 고착하고 있다

 

   
  ▲ 문병호 교수  
1. 정통 기독론을 부인:종교다원주의의 길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참 교회는 한 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심을 고백한다. 각각의 위격은 서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인격이시며,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니시고 고유한 사역을 감당하시나, 항상 함께 일하신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에 관해서 WCC는 단지 외양(外樣)적인 고백만 일삼고 있을 뿐, 이를 사실상 방치하거나 거부하고 있다.

 

WCC는 자신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325년, 381년)의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따르고 있다고 공표하고 있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는 자유분방하며, 그나마 정통 기독론을 선포한 칼케돈 신경(451년)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WCC는 성자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유일하신 중보자로 여기지 않고, 단지 성부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한 사자(使者) 정도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서 누구든지 그와 유사한 영적 사업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보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암암리에 표출해왔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진리, 다른 길, 다른 복음은 없다(요 14:6; 갈 1:7).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만이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요 8:32), 거룩하게 한다(요 17:17). WCC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대적이며 불가항력적으로 시여(施輿)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 땅에 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상대적이며 일반적인 것으로 치부될 뿐이다.   

 

WCC는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머리로 여기는 무형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지상의 기구적, 조직적 교회 즉 가시적인 유형교회에만 집착한다. 이러한 WCC에 의하면 결국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Christless Church),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만 남게 된다. 진리를 묻지 않고 그저 모이기만 힘쓰는 WCC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고전 1:23), 곧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벧전 2:8)가 될 뿐이다. 
 

2. 정통 구원론을 부인:다른 복음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자신을 향기로운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엡 5:2)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요 19:30), 그것을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셨다(롬 3:22). 그러므로 주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이다(엡 4:5).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행 4:12).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으므로(엡 5:25), 그 은혜의 선물을 분량대로 받은 우리가 그의 몸 된 교회가 되었다(엡 4:7, 12).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오직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만 그곳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마 18:20). 이렇듯 그리스도가 없다면, 은혜도, 은사도, 구원도, 교회도 없거늘, WCC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떠난, 그리스도가 없는 인류의 연합과 일치를 외치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21). 그러나 WCC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WCC라는 기구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추구하고 있다.  

 

WCC는 우리가 받은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사실에는(롬 8:9) 관심을 갖지 않는다. WCC에는,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 친히 사신다는 사실에는(요 14:16-17, 갈 2:20) 별로 주목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 정도로 성령의 역사와 작용을 취급하는 경향이 현저히 드러난다. 그들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뿐만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出來)는 사실을 부인한다(요 14:26; 15:26; 행 2:33).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와 다름없이 성령의 강림을 받았으되(눅 3:22), 그 “충만함”이 있었다는 점에서만 구별될 뿐이다(눅 4:1).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는 한 특출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모범이 될 뿐,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세주는 될 수 없으시다.

 

보혜사 성령은(요 14:26) 아무 일한 것이 없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해주심으로써(롬 4:6)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와 상속자로 삼아 주시는 양자의 영이시다(롬 8:15, 17). 그러므로 이를 받음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롬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그들의 총회 석상에서 온갖 영을 불러들이는 일종의 굿판을 벌인 정현경의 초혼제조차도 용납하였다. 이는 그들이 성령을 단지 범신론자들이 말하는 영적 생기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방증(傍證)이 된다.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외치지만, 몸이 하나라는 사실도,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엡 4:4). 한 성령의 도움이 없이 어찌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가 한 교회로 평안히 서 갈 수 있었겠는가(행 9:31)?
 

3. 한 그리스도, 한 성령, 한 교회를 부인

WCC는 성경의 진리 가운데 에큐메니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묻지 않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이 신학적이며 교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교리가 바로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교리가 바로서지 못하면 교회는 넘어진다.    

 

교회의 ‘하나 됨’은 교리의 ‘하나임’에 기초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상 추구된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교회가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그러했다.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으로’ 라는 원리를 제일로 삼은 것은 성경의 진리 가운데서 교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회복시키고자 함에 있었다. 

 

주님을 나눌 수 없듯이 교회도 나눌 수 없다(고전 1:13). 교회가 하나인 것은 오직 교리 안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자격을 갖춘 일치(a qualified unity),’ ‘진리 가운데의 일치(a unity-in-the-truth)’여야 한다. WCC는 교리에 관한 고백은 하지만 교리 그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은 성경 비평주의,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에 젖어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非)성경적이며 반(反)교리적이다.

 

WCC는 연합이 아니라 타협을, 일치가 아니라 공존을 추구할 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이 말하는 “협의회적 교제”를 통하여 “협의회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상의 모든 교회를 WCC의 조직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WCC는 교회의 일치를 넘어서 인류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교회의 확장이라기보다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화를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참되다(갈 1:6~9). 오직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 배운 것만을 자랑한다(고전 4:7; 딤후 3:14). 교회는 성경적 진리를 온전하게 붙들고자 했을 때 오히려 편협하지 않았으며 교회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다. 그들은 그것이 양보할 수 없는 진리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은 다원주의나 혼합주의로 자신의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신 적이 결코 없으셨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일치는 그것이 진리 가운데 이루질 때만 평강이 된다. 그 진리는 참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 자신이다(요 14:6). 교회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엡 4:15). 교회가 받은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롬 8:9; 빌 1:19). 그러므로 교회도, 진리도, 성령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교회의 본질을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두고 그 가운데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에큐메니즘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다.

 

교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무분별하게 모이기만 힘쓰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오늘날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 그것은 WCC 자체이다. 한국교회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WCC는 선교를 가로막고, 교회를 해치는 일을 주도하고 있다. 제10차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목하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이를 분명히 방증하고 있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WCC 총회에서는 “세상의 소망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모여서 무려 두 주일을 논쟁한 후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부인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보고도 WCC에 가입하기를 원하여 이탈을 감행한 일군(一群)의 교회가 이번 WCC 부산총회를 기화로 마치 한국교회의 대표라도 되는 양 버젓이 행색하고 있으니 어찌 개탄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과연 비진리(非眞理)에 이끌려 당을 지어 나간 유파(流波)가 추호의 가책도 없이 한국교회를 들먹이며 연합과 일치를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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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누구를 폄하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고
이곳 회원들의 분별력에 다소 참고가 되었으면 해서 조심스럽게 올리는 글이니 참조해주시고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WCC 부산총회 觀戰評(통합측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위 제목의 건을 야외 전광판을 통해서만 본 아마추어로서의 觀戰 評을 하고 싶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주관적인 평가다. 다른 시각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그래서 부산총회 이후 우리교단의 나갈 길에 대한 공론화가 되었으면 한다.

필자의 평가는 어제 10월 30일 개회예배와 개막식과 그 후에 있는 약간의 주제토의까지의 것에 대한 평가다.

1. 개회예배.
필자는 개회예배에 대해서는 국제협의회 예배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 나름대로의 퍼포먼스도 예배에 지장이 되지 않았다고 본다.  필자는 1차에서 9차까지 실황을 보지 못하고 10차 부산총회 개회예배를 시청하면서 필자가 WCC에 대해서 너무 우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는 것이 정직한 소감이었다.
 
2. 개막식과 환영이벤트
개회예배를 보면서 우려했던 것이 기우였지 않는가? 란 생각을 하였다가 개막식을 보면서 ‘역시’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것은 7대 종단의 최고 지도자들을 초청한 일이며(이슬람 지도자도 초청했음), 교황을 대신한 로마추기경의 메시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준비위원회(한준위)가 늘 말했던 부산총회는 7년간에 모이는 기독교교회들의 모임이라고 한 말과는 다른 것이며, 코흐추기경이 교황의 메시지를 대독할 때 마치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세계교회 지도자들과 우리교단 지도자들을 볼 때  이건 아니다. 란 생각이 들었다. (영상을 통하여 교황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대통령의 친서를 대독하듯 교황의 메시지를 대독하고 있는 것이 연상되어서 하는 말이다)

물론 거기에 얼마든지 반론을 펼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은 필자도 안다. 그런데 추기경이 대독한 메시지는 WCC 교회를 품안에 품으며 한 형제교회로 인정하며 함께 나가자는 메시지가 문제였다.

그것이 왜 문제인가? 는 아래와 같다.
이번 부산총회를 보는 관전 포인트는 WCC가 로마교황청과 얼마나 유착관계가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자의 핵심 관전 포인트다.  

왜 그런가? 필자가 앞서서 밝힌 봐와 같이 카토릭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이후 다원주의로 가기 시작하여 작금에서는 노골적인 종교통합을 이루려는 진행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배도의 길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고 경계의 글을 썼다.
http://pck.or.kr/PckCommunity/FreeView.asp?page=1&Code=&ArticleId=59&TC_Board=31150
http://pck.or.kr/PckCommunity/FreeView.asp?page=1&Code=&ArticleId=59&TC_Board=31217


그것에 대해 WCC가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WCC의 핵심그룹은 카토릭과 동조하고 있다고 필자는 계속해서 글을 올렸다. 그래서 필자는 카토릭에 대해서 WCC에 가입된 우리교단 은 잘못 되어가고 있는 카토릭과 맞서 계속 종교개혁을 해나가야 되느냐? 아니면 머리 숙이고 형님이라면서 들어가야 될 것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http://pck.or.kr/PckCommunity/FreeView.asp?page=2&Code=&ArticleId=59&TC_Board=31003


물론 우리교단 목사들이 종교통합의 길로 가고 있는 ‘카토릭과 하나 되자.’ 그러면 더 이상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없다.  


3. 통합 측의 활동 상황에 대한 평가

필자는 이번 부산총회를 처음부터 우려했지만 기왕지사 개최될 것이라면 우리교단의 신학(신앙)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자랑스런 신학을 세계교회 앞에 천명함으로 다원주의, 종교통합으로 나가는 일만은 적극적으로 막아주었으면 하고 있고, 그 사실을 세계교회에게 알렸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런데 初盤戰까지 평을 하자면 실망이다. 그것은 시작처음부터 헛발질 했다는 말을 하였는데 <필자의 글 결전을 앞두고>
http://pck.or.kr/PckCommunity/FreeView.asp?page=1&Code=&ArticleId=59&TC_Board=31282
主將이랄 수 있는 김삼환목사에 대한 것이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개막식 환영사를 하는 것을 보면 이분이 과연 “오직 예수”라고 외친 분이 맞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와 나라를 축복하셨다. 라고 하는 것과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진 한국교회를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이다.  하나님, 그렇게 말하면 모든 종교와도 통하지만 오직 예수님, 그러면 그것이 기독교신앙의 핵이요 개혁신학을 고백하는 것이 되는 것인데도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총회가 열리기 전에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고 총회가 열리고 있는 지금도 WCC반대 목소리가 맹렬한대도 거기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반대 측에 대해 기분 좋을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라면 차라리 세계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한국교회는 다원주의를 극력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렸으면 하였고 자기도 다원주의, 공산주의, 동성애는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김삼환목사는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랬더라면 WCC의 흐름을 성경 진리 쪽으로 반전시킬 수 있었는데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평하고 싶다. 주장이 페널티 골을 실축한 것과도 같다.

4. 한국측 중앙위원들에 대한 평가
앞으로 있을 각종 토의시간에 영어가 되지 않아 중심에 서지 못하고  손님들이 안방에 와서 칙사 대접을 받으며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한국측 중앙위원들의 모습이 떠올라 안타깝다.

5. 총결론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런 잔치를 한국에서 개최하려고 그렇게 애쓰며 자랑스럽게 말했던 모습 때문에 씁씁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觀戰 評이다.  마지막 날 나올 선언문 어떤 선언문이 나올지 기다려보자.  필자는 스타디움에서 뛰는 선수가 아닌 순전이 아마추어로 분석을 했다.  

저의 분석이 잘못되었고 한국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평들이 나오길 바란다.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김정한 목사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0)WCC의 교회론 비판
안인섭 교수(총신대·교회사)
2013년 09월 10일 (화) 04:19:13 안인섭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교회의 ‘가시적 일치’에 집착, 본질 뒤바꾸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이고 신비적 연합’ 간과, 진리와 교회 공동체 순결성 수호못해
복음이 내포하는 사회적책임 배타적으로 강조, 교회를 정치적 압력 단체로 전락시켜

 

   
  ▲ 안인섭 교수  
역사적으로 교회는 진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양자 사이의 긴장 속에서 존재해 왔다. 그런데 근래 한국에서는 교회 연합 운동인 WCC에 의해서 진리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본 기고는 1948년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 이후 발전해 온 WCC의 교회론의 신학적 특징들을 분석하면서 개혁주의 입장으로 비판적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선후가 전도된 교회의 본질: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아닌 가시적인 일치를 목표함

WCC는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교회들의 협의회(a council of churches)요 그리스도안에서의 일치를 표현하는 교제를 강조했다. 그러나 WCC는 하나의 사도적인 신앙과 세례와 성만찬을 공유하고 있는 “협의회적 교제” 안에서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the visible unity of the church)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에 근거하며, 그 결과로 성도들의 연합이 뒤따른다. 교회 연합의 본질적인 속성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몸 되는 그의 성도들과의 신비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교회론의 가장 근원적인 내용을 결여한 채, WCC는 교회의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일치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선후가 전도된” 교회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선교에 기초한 성만찬론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완성된 BEM문서(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의 약자를 따서 BEM으로 불리움)는 WCC의 성만찬론을 가시적인 교회의 일치와 관계시키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라고 밝히고 있다. WCC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후컨데이크(J.C. Hoekendijk)에 의해서 주창되었던 성만찬의 종말론적인 관점을 도입했다. WCC는 성만찬을 ‘세상’ 안에서 왕국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성찬을 순수하게 교회론적인 사건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WCC의 BEM문서는 성찬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라고 확대 해석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WCC의 신학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WCC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실체와 상징의 구별 없이 강조함으로 인해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극렬하게 반대했던 그리스도의 계속적 희생을 연상하게 한다. 결국 WCC의 성만찬론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벗어났으며, 사회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는데, 그 근저에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사회 구원적인 선교관

1961년 WCC 뉴델리 총회에서 IMC(국제선교협의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WCC와 통합되면서 WCC 산하 세계 선교 및 전도국(The Divi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이 되었고 이것이 WCC의 선교관을 규정하게 되었다. 1968년 WCC 제5차 웁살라 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그 절정에 달하여 선교는 불의와 가난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무렵에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의 등장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1972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선교의 방향은 불의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이 놓여졌다. WCC의 이런 선교관과 사회관은 1980년 멜버른 선교대회로 이어져 선교는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참여로 진술되었다. 뿐만 아니라 변혁된 WCC의 선교관을 대변한다고 하는 중요한 문서인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1982년) 이후에도 WCC 선교관은 여전히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선교관과 사회관과는 거리가 멀며, 사회 구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1960~70년대 이후 WCC의 선교관은 해방신학적인 맥락으로 이해되었으며,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인 선교관과는 다른 관점이다.


4. 정치학적인 행위로 전락한 교회의 복음 선포

WCC에 의하면 예수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쟁하면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들이며,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WCC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린당하고 무시당한 모든 사람들과 연대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에 불과하다. WCC에 의하면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물질적인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이다.

 

과거 보수적인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신학적 이해를 깊게 하지 못했던 면은 물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가난한 계급만을 위한 그리스도로 만들었다.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책임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다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복음 선포를 이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과 범위를 제한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WCC는 교회를 그 본질에서 이탈하여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전락시켰다는 화란 캄펜신학대학교의 신학자 클라스 루니아 교수의 평가는 매우 적절하다. WCC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복음 선포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고 있다. 사회 정의를 위한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을 사회 불의를 일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간화로 대치시켜 버림으로 복음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말았다.

 
5. 타 종교에 대한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

인간에게는 종교의 씨앗이 있어서 절대자를 향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향하는 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어떤 대상, 즉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WCC는 교회가 타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종교간의 대화와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WCC는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구원이 다양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으로 가는 것이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WCC 교회의 선교는 결국 종교간의 대화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 나오는 글: 새로운 패러다임의 개혁주의 연대의 긴요성

WCC의 교회 일치는 성경적인 진리와 역사적인 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 지지 못했다. WCC는 교회의 본질을 가시적인 일치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그보다 전제되어야 할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이 되는 교회와의 영적이고 신비적인 연합이 간과되고 말았다. 이것은 선후가 전도된 일치일 뿐이다. 교회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리를 담지하고 또 그것을 보호해야 하는데, WCC는 교회의 일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진리와 교회 공동체의 순결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지 못했다. 또한 WCC에서 말하는 복음 선포는 지나치게 사회적-정치적 차원에 경도되어 있어서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교회의 선교 개념과 달랐다. 결국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함으로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으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의 진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명제는 역사적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머리 되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과, 교회가 세상에서 복음 선포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명제이다.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개혁신학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회 연합 운동의 필연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WCC 교회론을 비판하는 글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며 역사적 개혁주의의 신학적 유산을 공유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뿐 아니라, 기독인 학자 및 기독 전문인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연대 운동이 현 시점에서 절실히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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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9)WCC의 성경관 비판
황성일 교수(광신대학교 구약학)
2013년 08월 28일 (수) 09:27:12 기독신문 ekd@kidok.com
출처: 기독신문

 
“성경은 인간의 작품” 주장, 절대 기준 포기했다

‘수많은 교회 전통 중 하나에 불과’ 인식, 하나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권위 부정
신학적 다원주의 지키기 위해 ‘오류없는 하나님 말씀’이란 중요한 고백 버렸다

 

   
  ▲ 황성일 교수  
들어가는 말

2009년 8월 31일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로 표기) 중앙위원회는 2013년 WCC의 제10차 총회 장소를 한국 부산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있은 지 이미 4년이 지났고, 총회 개최를 두 달 남짓 남겨 놓고 있다. 한편 WCC 준비위원회 측에서는 총회를 정확히 100일 남겨둔 때인 지난 7월 22일 서울 도륜동의 종교교회에서 기도회를 열고 총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확신한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예장 합동측 교단을 위시한 보수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지금까지 WCC 총회의 부산 개최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신문 지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WCC의 신학, 여기서는 특히 그들의 성경관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간략히 지적하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1. WCC는 성경을 여러 전통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1963년 몬트리올에서는 WCC의 산하 기구인 ‘신앙과 직제’ 제4차 대회가 ‘성경, 전통, 전통들’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여기서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복음이란 대문자로 시작하는 전통(Tradition)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이 보고서는 성경은 복음에 대한 전승의 초기 단계에서 기록된 소문자로 시작하는 전통(a tradition)이며 교회의 많은 전통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보고서는 복음(Tradition)과 성경(a tradition)을 구분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창고라고 표현함으로써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WCC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의 전통에 권위를 돌리지 않는다. 성경은 명료하고 충족하기 때문에 다른 전통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성경의 권위는 인간의 전통에 의존을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추가하거나 성경을 악용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고, 모세와 요한도 성경 기록에 가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하고 오류가 없는 법칙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2. WCC는 성경이 인간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1) WCC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인 것을 믿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71년 루뱅에서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는 영감이 성경적 권위가 출발하거나 기초할 수 있는 논거가 아니라, 신앙의 결과물로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루뱅 보고서는 성경의 메시지가 그 스스로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체험이 있을 때 “성경이 영감 되었다”라고 고백해야 하며, 성경의 영감을 미리 전제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율법주의적 견해로 나아갈 뿐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이 영감 되었다면, 왜 바질, 어거스틴, 루터 또는 몇몇 현대 저자들 역시 영감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한다.


성경의 영감성이 인간의 경험에 따라 좌우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심각한 잘못이다. 성경의 영감성은 신앙생활의 결과가 아니라, 출발이며, 전제가 된다. 또한 성경이 영감 되었다면 다른 경건한 성도의 저작들도 영감 되어야 한다는 말은 WCC가 성경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오류 없이 기록된 책이며, 신앙과 삶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 책”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의 사본들을 만든 서기관들이 아니라, 성경 각 책의 저자들이 영감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 성경의 각 책들의 원본은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감동과 인도에 의해 기록되었다. 또한 영감의 범위에 관하여 성경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참되며, 그것의 계명에 있어서 완전히 권위적이라고 믿는다.

 

2) WCC는 성경이 감동을 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성경 자체의 영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의 어떤 구절이 사람에게 “부딪혀 올 때”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한다. 루뱅 보고서는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이며 그리하여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는 통로라고 말한다. 또한 그 보고서는 성경 자체에 권위가 있지 않다고 말한다. 즉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점에서만 성경이 권위를 갖는데, 그 권위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WCC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수단으로 하여 증언되고 들려지지만,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사실상 WCC는 실존적 체험에 의해서 성경이 계시와 진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을 자신의 판단과 감정 아래에 두는 바르트적이며 신정통주의적인 성경관에 해당한다. WCC는 인간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에만, 성경의 영감과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 권위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의 체험이나 어떤 교회의 증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이시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감정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벧후 1:19~21, 딤후 3:16, 요일 5:9, 살전 2:13)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있건 없건 간에 성경은 권위를 갖는다. 심지어 사람이 성경을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성경에는 권위가 있다.

 

3) WCC는 성경을 다른 인간의 문학 작품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1967년 브리스톨에서 진행된 신앙과 직제 위원회 회의에서 그들은 성경을 다른 문학작품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오랜 기간 동안 기록과 재기록과 해석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므로, 역사비평이 필수적이다. 또한 성경은 일련의 문학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여타 문학적 자료들의 연구에 사용되는 방법들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학비평이 필수적이다. 성경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서로 다른 내용들은 상호보완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모순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다른 문학 작품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은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오류가 없이 기록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연구되어야 한다. 성경은 오랜 시간 동안 수집 혹은 편집되고 수정되어 온 인간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를 통하여 오류 없이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없다. 비록 성경이 긴 시간 동안 다수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사상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다.

   

3. WCC는 신구약 66권을 유일한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루뱅 보고서는 “정경적인 것과 비정경적인 저작들 간의 이러한 구분선은 엄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유동적인 경계선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WCC가 정경과 비정경 사이의 구분을 유동적인 것, 즉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이유는 교회들이 서로 다른 정경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헬라어 구약 성경(칠십인경)과 로마 가톨릭이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외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외경은 정경이 될 수 없다. 유대인들과 초대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외경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외경을 성경의 일부로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우리가 외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실제적으로 외경은 역사적 진실성에서나 성경의 다른 책들과의 일관성에 있어서, 그리고 도덕적 표준에 있어서 영감된 성경으로서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한편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0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개최한 에큐메니칼 신학강좌에서 성경을 정경이라는 권위 속에 가두는 것이 잘못이며, 성경의 본문은 가감될 수 있어야 하고, 성경 무오설을 폐기하여 성경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을 가감할 수 없다는 개혁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무시하고 있으며, 성경 무오설을 신봉하는 것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맺는 말

WCC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양한 교회 혹은 교파들이 신학과 교리에 있어서 분명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인권과 복지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단과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종교인들이 서로 협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일치는 다양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일치이며, 이것은 신학적 다원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가장 중요한 고백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들은 성경을 인간의 문학 작품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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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8)WCC의 종교다원주의 비판
정준모 목사(총회장·성명교회·대신대 교수)
2013년 08월 23일 (금) 09:31:01 기독신문 ekd@kidok.com
출처: 기독신문

 
‘평화’ 주창하며 다원주의 꽃밭 배회하고 있다

1961년 3차 WCC총회서 제기…일관되게 급진적·혼합적 종교다원주의 견지
타종교 존중이란 휴머니즘 표방하며 그리스도의 유일 구원관 파괴해 버렸다

 

   
  ▲ 정준모 목사  
1 서론-불꽃 튀는 WCC 신학 논쟁: 2013년도 제 10차 WCC 총회가 대한민국 부산 개최로 선정된 이후 한국 교계의 신학적 뜨거운 감자에서 불꽃 튀는 신학적 논쟁을 벌이고 있다. 2013년 WCC 한국 총회 개최를 앞두고 한국 교회 전체가 양분되는 진통을 겪고 있다. 문제가 되는 WCC 신학 논쟁 중 가장 심각한 이슈는 바로 WCC 종교다원주의 문제이다. 다원화 사회에 다원주의를 따르고, 타종교를 존중한다는 명제하에 절대 유일한 진리를 파괴하고 훼손시키는 통탄할 일이 자행되고 있다. WCC의 신학적 패러다임과 정체성을 바로 파악하고 그들이 발표하고 주장하는 문서들을 살펴보면 분명코 종교다원주의 길을 활짝 넣어 놓았고 종교다원주의 꽃밭을 배회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2 WCC 진영 한국 신학자의 일반적 주장들: 자유주의 한 신학자는 ‘최근 한국교회 내부의 WCC 비판의 근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식 논지를 던져 그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1)WCC는 단일교회를 추구하는가? (2)WCC는 용공적인가? (3)WCC는 사회구원만을 주장하는가? (4)WCC는 정치 단체인가? (5)WCC는 선교에 무관심한가? (6)WCC는 다원주의를 표방하는가? (7)WCC는 교회를 분열시켰는가?

 

그의 입장은 “한국에서 WCC비판은 WCC공식문서나 학문적 주장에 기초된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50년대, 60년대에 시작된 이야기들이 확인과정 없이 반복되거나 확대 생산되었다고 주장하고 또한 WCC에 대한 비난은 신학적인 것도 있지만 정치적인 것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WCC에 반대하는 신학적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WCC 총회가 단순한 ‘이웃집 잔치’가 아니라 불쾌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는 “WCC에 대한 한국교회 일각의 비난의 출처는 학문적 연구나 실제적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미국 근본주의 단체의 반WCC 선전에 크게 작용했고 WCC활동에 대한 진지하게 살펴보는 기회가 없이 부정적 선입견관을 교육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그는 한국교회의 WCC 반대 정서를 학문적 연구 결여, 한국장로교 분열, 미국 근본주의 영향, 정치적 영향, 유치장소 불만, 부정직한 선입관, 흑색선전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WCC에서 보고된 문서를 중심으로 종교다원주의에 혼미된 주장들을 소개하고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3 WCC와 종교다원주의: WCC에 가입된 모든 회원 교회들이 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거나 따르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학자는 WCC는 “어디에서도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거나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WCC는 세계 교회 연합과 일치의 목적을 위해 종교다원주의를 따를 수밖에 없다. WCC 헌장이나 집행자들이 공식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창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총회 및 각종 분과 위원회에서 매우 급진적인 종교다원주의 신학사조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종교다원주의에 눈을 뜬 WCC-제3차 1961년 뉴델리 총회
종교다원주의 운동은 1961년 뉴델리의 제3차 WCC 총회에서 인도 신학자 더바난단(P. Devanandan)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 총회는 타종교를 ‘다른 신앙’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이 “다른 신앙을 통해서 말씀하시며,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긍정”하였다. 이 총회에서 더바난단은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을 “성령의 창조자 사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해석하고 복음을 비기독교적인 철학적 신앙의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71년 힌두 배경을 가진 인도의 자유주의 신학자 사마르타(Stanley Samartha)에 의하여 주도되고 종교 혼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종교다원주의에 미소짓는 WCC-제4차 1968년 웁살라 총회
WCC가 타종교와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부터이다. 왜냐하면 WCC는 이때 처음으로 아잘톤(Ajaltoun) 회의에 참석한 기독교(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와 무관한 타종교인들(무슬림, 힌두교도, 불교도들)과 대화를 시도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 간의 대화”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타종교를 “다른 신앙들”(other faiths)라고 불렀으나 이 때 이후로 다른 신앙들은 “살아 있는 다른 신앙들”(other living faiths)로 불리게 되었다.

 

3. 종교다원주의에 박수를 보내는 WCC-제5차 1975년 나이로비 총회
1975년 WCC 총회의 일각에서 타종교에 대한 급진적 견해가 등장하였다. 제3분과는 타 종교 및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논하면서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다 확대된 에큐메니즘”이라 묘사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당분간”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화로 국한하고 그보다 더 확대된 대화는 종교간 (inter-religious) 대화로 부르자고 결정했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모인 WCC 총회에서 총회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는 주제 아래 강연한 토마스(M. M.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를 제안한다. 토마스(M. M.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에 대해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서 수행되며, 문화와 종교가 서로 침투하는 “거짓된 혼합주의가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서 교리적인 차이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4. 종교다원주의에 열광하는 WCC- 제6차 1983년 벤쿠버 총회
1983년 7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된 WCC 제6차 총회에는 나이로비보다 3배나 많은 15명의 타종교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란 주제하에 모인 전체회의에는 캐나다 원주민,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유대주의자 등이 각자의 입장을 발표함으로 종교다원주의적 신론을 추구하였다. 또한 WCC 출범 이후 처음으로 리마 성만찬 예식서를 따라 공동성찬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범교회적 차원과 교회 일치의 차원을 넘어 범종교적, 종교다원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캐나다 인디언의 토템 제막식, 한국의 무당의 강신굿도 행하는 범신론적 성만찬식이 거행되었다.

 

5. 종교다원주의에 포옹하는 WCC- 1990년 바르 선언문
WCC의 문서들 중 가장 현저하게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이 드러난 것은 1990년 CWME에 의해 작성된 바르 선언(Baar Statement: Theological Perspective on Plurality)이다. 이 선언을 시점으로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본격적으로 포용, 열애하면서 신학화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바르 선언문은 그 이전까지 견지해왔던 기독교 우월적 상대주의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기독교 평등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내용들로 가득찼다.

 

6. 종교다원주의 영에 혼미된 WCC-제7차 1991년 캔버라 총회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개최된 제7차 WCC 총회에서 한국의 여성신학자 정현경은 ‘오소서 성령이여, 온 우주를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 강연에서 초혼(招魂)굿의 향연을 벌였다. 그녀는 (1) 호주 원주민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면서 영성을 표현하려 했다. (2) 여러 종류의 혼 또는 영을 부르면서 무속적 정령을 성령과 동일시했다. (3) 성령을 동양의 기(氣)로 표현하면서 성령의 형상을 관음보살의 형상과 연계시켰다. 여기서 정현경은 기독교의 성령을 한국의 무당의 영과 일치시키는 혼합주의 성령관을 피력하고 있다.

 

7. 종교다원주의를 위한 새 옷을 갈아입는 WCC-2011년 6월 제네바 선언문
2011년 6월 28일 제네바 선언문은 선교적 차원에서 타종교와의 대화 원리에 대한 지침서를 발간하였다. WCC가 함께 이 선언문 작성을 위해 지난 5년간 동참한 교단과 교파을 보면 결국 신학적 일치가 없는 채, 비가시적 교회론을 배제한 채. 가시적 교회론 입장에서 단지 전도를 위해 전도전략의 원리와 전도 있으나 이 문서에서 다분히 포괄적 종교다원주의 색체를 띠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4 결론: 현재의 WCC의 논란은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신학적 문제이다. WCC 신학의 문제 중 제일 혼란스러운 문제가 종교다원주의 문제이다. WCC가 노골적으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라고 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WCC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 볼 때,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적 매력에 흠뻑 젖어있다. 인본주의 신학원리 속에 종교적 평화주의를 주창하면서 종교다원주의 꽃밭을 배회하고 있다. 타종교 존중이란 휴머니즘을 표방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 구원관을 파괴해 버렸다. 종교다원주의는 교회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신학적 적수이며 신앙적 배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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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7)WCC의 선교관 비판
박윤만 교수(대신대 신약학)
2013년 08월 16일 (금) 09:35:47 박윤만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하나님의 선교’ 이름 아래 사회운동으로 변화

1952년 호켄다이크에 의해 시작… ‘샬롬’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선교관 강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증거’ 우선…복음과 사회개혁 동일시하는 입장 바꿔야

 

   
  ▲ 박윤만 교수  
1.WCC 선교관:‘하나님의 선교’

WCC의 선교관은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로 대변된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1952년 독일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회의 주제 강연을 맡은 화란의 선교학자 호켄다이크(J.C. Hoekendijk)는 선교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보냄 받은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으로 이해한 전통적인 선교관에 문제를 제기한 후,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을 선교의 주체로 보고 교회는 그 선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핵심이라 주장했다. 호켄다이크에 따르면 하나님은 교회 안팎에서 ‘구원’를 이루어 나가신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을 ‘샬롬’으로 간주한 후, ‘샬롬’을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샬롬’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라 주장한다. 하나님의 이런 ‘샬롬’ 사역은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선교사역의 주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다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여 세상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는 여러 도구들 중 하나로 쓰임 받을 뿐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빌링겐 선교대회에서 일어난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는 형식상으로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교를 그리스도의 교회와 상관없이 사회적 활동과 동일시 하게 되는 인본주의적 선교관의 길을 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여러 발전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빌링겐 선교대회 이후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 발전된다. 1963년 12월 8일~19일 열린 멕시코 대회는 WCC의 선교관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름 하에서 사회운동의 성격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열린 제4차 WCC의 웁살라 대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대회에서 선교는 인간화(humanization)로 이해되었고, 하나님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예를 들면, 건강과 사회봉사, 청소년을 위한 활동,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이 하는 일, 도시갱생 프로그램, 인권옹호 등)이 선교라고 이해한 것이다.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에 어떤 구별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이 대회에서 거론될 수 없었다. 다만 교회는 선교의 목표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성을 지적하고 그 인간성을 다른 인류에게 심는 것을 그것의 임무로 이해해야했다. 보쉬(David Bosch)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 당시 에큐메니칼 진영이 인간과 역사에 대해 얼마나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회였다. 즉 역사와 인간 안에 내재한 악과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어떤 언급이 없이 단지 사회 정치적 활동을 계획하면 어떠한 계획이든지 성공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 만들어낸 선교이해가 그곳에서 펼쳐졌다.

 

이후 1983년 캐나다 벤쿠버 대회가 열리기 직전 1982년 7월 WCC 중앙위원회에서 ‘선교와 전도: 에큐네니칼 선언’ 이름으로 공포된 문서의 두 번째 주제, ‘삶의 모든 영역을 향한 복음’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회개를 뛰어 넘어 사회구조적 변혁으로 가야 함을 밝히고 있다. 만일 한 개인의 회심이 바른 것이라면 그 회심은 사회구조악의 변화에 헌신함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 문서는 그러한 사회운동은 회심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회심자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구조적 변화를 구원으로 보는 ‘하나님의 선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WCC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으로 온 교단들이 함께 한 연합회라는 태생적 성격으로 인해 선교관에서 혼합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흐르고 있는 주된 선교관은 호켄다이크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 즉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악들에서 사람을 해방시켜 봉사의 삶을 실천하게 하는 것을 그 뼈대로 삼고 있다. 이러한 WCC의 선교관은 성경 보다는 현대 사회문화와 인본주의적 철학을 그 토대로 삼으면서 발전된 관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삶의 모든 규범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여기고 있는 이라면 성경에 뿌리를 둔 선교관 정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3.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선교’의 두 가지 문제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도록 하는가? 두 가지가 밝혀져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하지만 한 인간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책임 있는 회심에 대해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 웁살라 대회로부터 나온 문서는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은 누구나 각각 새 인류의 한 식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하신 일방적인 화해 선언을 세상이 맛보게 하고 그 샬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을 선교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러한 선교관에 따르면 교회의 주된 임무는 이미 세계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가 따르고 있는 성경적 선교관은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복음전파로서 선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사회개혁과 정치적 불의 그리고 모순적인 경제 제도를 고쳐나가는 일 그 자체를 복음전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는 앞뒤가 바뀐 사역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신 중보자 예수에게 개인적으로 회심을 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이끌기 보다는 여전히 사탄과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모양새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선교현장에서 복음전파와 사회복지 실현 중 어느 것이 우선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성경이 복음전파와 선교에 대해 가르치는바 자체가 바뀔 수는 없다.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도록 하는 사역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선교’가 주장하는 사회개혁과 정치적 프로젝트는 복음전파의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관의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기 위해 하신 싸움이 온 세상을 부패로 이끄는 죄 즉 사탄과의 싸움이었다는 사실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는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회개혁가의 모델로 이해되며, 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죄는 압박과 착취 불평등 가난 기아와 그것을 일으키는 사회 구조적 모순과 동일시되어 버린다.

 

성경적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고 선포하신 예수께서 싸우신 대상이 불평등과 가난 그리고 기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져온 더 근본적인 원인 즉 죄였다는 것(막 3:20-30; 히 2:14)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주되심의 고백이 모든 사회적 프로그램과 복지(사회선교)를 가능케 하는 근본이라는 믿음은 선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기초위에 올려놓으려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핵심임이 분명하다.


4.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교’의 공헌은 있다. 선교의 주체를 삼위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성부 하나님, 그 피조물을 재창조/구속하시고자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승천하시어 성부 하나님 우편에서 성자를 통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오늘도 선교는 진행된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사실 교회는 선교명령을 받은 교회 자신이 영혼을 구원하고 있다는 오만한 태도를 가진  것이 사실이며, 또 선교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삼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관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이는 바로 삼위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교회가 눈을 돌리도록 하여 선교를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하고 정반대의 길로 갔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인간과 사회 프로젝트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사회, 정치적 자유로 흡수시켜 버린 것이다. 앞뒤가 바뀐 그와 같은 구원관은 삼위 하나님 중심에서 출발한 WCC의 선교를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끝을 맺도록 해버렸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바 복음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성경은 복음을 십자가에 죽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주로 등극하셨다는 사실로, 복음전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증거사역이라 말한다. 따라서 복음전파로서 선교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 가져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회심 시키는 사역이어야 하며 사회적 책임은 그리스도께 회심한 자들이 맺는 필연적인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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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6)WCC의 비성경적 반교리적 교회일치론 비판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2013년 08월 08일 (목) 09:29:23 문병호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교회의 하나됨’ 아닌 ‘인류의 하나됨’에 집착

‘협의회적 교제’ 절대 추구, 교회를 가시적이며 기구적인 것으로만 이해
‘비가시적 교회’ 본질에 대한 이해 결여, 진리보다 현상적 교류 우선한다

 

   
  ▲ 문병호 교수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실제적인 문제점은 대부분 그들의 잘못된 교회론에 기인하고 있다. WCC는 헌법에서 ‘다함께 공동의 소명을 완수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의 교제’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의 본질을 호도(糊塗)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정통 교리를 무시하고 무분별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WCC가 중심이 되어 한 몸을 이루고자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를 마치 절대적인 가치라도 되는 듯이 추구하고 있다.

 

WCC는 ‘비가시적 교회(무형교회)’와 ‘가시적 교회(유형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오직 교회를 가시적이며 기구적인 것으로만 이해한다.

 

WCC에 의하면 교회는 단지 지상의 한 조직체에 불과하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 25장에서는 ‘보편의 교회’가 유·무형 교회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비가시적 교회(무형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한다(엡 1:13; 딤후 2:19). 그리고 ‘가시적 교회(유형교회)’는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와 성례를 드리며 경건한 성도의 삶 가운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모임을 말한다(엡 2:19; 4:11~13).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형태의 교회는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2~23; 5:30). 즉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WCC는 이러한 이해를 전혀 결여하고 있다.

 

WCC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회들의 협의회’라고 본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단지 가시적 형태의 교회에만 제한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교회, 오직 영적인 교회, 비록 신앙상의 문제에서는 분열될지라도 보이지 않는 끈을 통해서 하나가 될 교회를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두 개의 교회, 즉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서 가시적인 표현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에 일치한다.”

 

WCC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 대하여 고백은 하고 있지만 이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기초시키지 않고 단지 지상의 가시적이고 기구적인 교회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 정도로만 여긴다.

 

WCC는 교회의 본질이 성도와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연합에 있지 않고 성도 서로간의 가시적 친교에 있다고 봄으로써 비가시적 교회의 비밀을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성취를 외면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신념과 공동체적 가치만을 교회에 남겨 두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합된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언약의 공동체이다. 교회를 ‘몸’이라고 부르는 한 그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교회를 ‘몸’이라 부를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비가시적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인식 없이 교회를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성경은 교회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를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엡 1: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교회가 ‘주의 몸’이라는 사실은 도외시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몸’이라는 점에만 집착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WCC의 입장은 그들의 최근 문건들 가운데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그동안 명목적으로나마 주장해 왔던 교회의 주가 그리스도라는 언급을 거의 폐기해 버렸거나 사실상 무화(無化)시켰다.

 

그들은 교회가 오직 믿음으로써 거저 값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의로 전가(轉嫁) 받게 된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점은 망각하고, 사람들이 각자의 종교적 신념이나 정서를 가지고 서로 모여 교제하는 곳에는 교회가 있다고 보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례의 실체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교제에서 찾는다. 

 

교회의 본질을 논함에 있어서 성도의 교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성도 각자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지체들의 교제는 자생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한 머리에 붙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뒤따르는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이심을 부인하면서 성도의 교제나 교회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렇듯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점은 그들이 사람들 상호 간의 교제를 성도의 그리스도와 연합보다 우선시할 뿐만 아니라 아예 그것만 내세우는데 있다.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WCC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차치하고 동양적 합일 사상이니 전통적 해원상생(解寃相生)이니 하면서 비성경적이며 반교리적인 이교적 이념만 내세우면서 건전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들의 속내는 ‘교회의 하나 됨’이 아니라 ‘인류의 하나 됨’에 있다.

 

교회가 세속을 복음의 진리로 감화시키고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모임이 있는 곳에 곧 교회의 출발이 있다고 그들은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교회론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교회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경과 이를 교회적 고백으로 체계화한 정통 교리는 교회의 본질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들인 성도들로 구성된 몸 곧 연합체로서 설명하고 그 속성으로서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논의한다.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복음의 진리에 터를 잡고 있을 때에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 교회는 교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교리는 교회가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기 때문이다.

 

WCC는 교회의 본질을 가시적 교회의 교제로만 파악하고 있다. 비가시적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리보다 현상적 교류를 우선한다. 주님께서 나누어지지 않으시듯이 교회도 나누어질 수 없다(고전 1:13). 교회가 하나인 것은 오직 진리 안에서 그러하다. 교회의 하나 됨은 ‘자격을 갖춘 일치(a qualified unity)’ ‘진리 가운데의 일치(a unity-in-the-truth)’여야 한다.

 

어찌 진주를 돼지에게 줄 것인가? 어찌 극상품 포도나무를 주셨는데 들포도를 구하고자 하겠는가? 초대교회 이후 전개된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성경의 참 진리를 수립하고자 추구되었다. 성경과 정통 교리의 가르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모이기만을 추구하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지 헛되고 속될 뿐이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거짓된 것으로 여긴다. 과연 ‘거짓의 아비’는 누구인가?(요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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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5)WCC와 한국교회-죽산 박형룡과 해원 정규오 중심으로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2013년 07월 24일 (수) 13:39:45 문병호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WCC는 진리의 문제” 흔들림 없는 원칙 강조

죽산 박형룡-신학적 엄밀성 없이 추상적 종교 관념 공표…진정한 교회연합 아닌 무늬만 그려
해원 정규오-WCC 특징은 신신학, 단일교회, 용공사상…칼빈주의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1WCC의 신학에 대한 견해차로 말미암아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통합측이 이탈하였으며, 교단이 분열되었다. 이는 12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에 따른 개혁신학과 신앙에 그 자리를 둔 교단·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신앙과 삶을 추구했던 보수적인 교단이 겪었던 신학적 분열이어서 더욱 아픔이 컸다. 통합측의 이탈은 연합과 일치를 외치는 WCC가 단절을 초래하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 문병호 교수  
WCC의 신앙고백은 단지 명목적이며 그들의 활동은 교회의 부흥과 전도 그리고 선교에 역행한다. 한국교회가 WCC를 처음 접하고 겪은 혼동은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WCC의 문제는 곧 진리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한 두 분이 곧 죽산 박형룡 박사와 해원 정규오 목사였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후자는 교역(敎役)과 교정(敎政)에 주로 관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2 죽산은 칼빈의 신학과 그를 계승하고 심화시킨 개혁주의자들의 신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영미의 보수신학과 대륙의 정통신학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또한 장로교의 신학과 정체(政體)를 견지한 교단신학자였다.

죽산의 신학적 노정은 단지 조직신학 전권의 저술과 강의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사변적이지 않았으며 당대의 신학적 논쟁들과 교회정치 그리고 성도의 삶에 관한 교리들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죽산의 초기 작품 <기독교 현대 신학난제선평>은 가히 시대를 지로(指路)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복음주의에 대한 비판도 다수 다루었다.

죽산은 WCC에는 “명백히 정의된 신학”이 없다고 단정 짓는다. WCC의 신학이 애매하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자유주의에 젖어서 성경의 계시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WCC의 정강에 따르면 성부와 성령을 믿지 않아도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나, 예수의 신성을 종교적 감정이나 신적 의식 정도로 여기는 자유주의자들도 모두 포용하게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리는 교회의 판단기준이 될 수 없으며 각각의 교회가 그것을 따를 것인지의 여부는 자유에 맡겨지기 때문에, 그 신학은 산만(散慢)하며, “모순의 표적(表跡)”을 남길 뿐이며, “변증법적 긴장”을 고양시킬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죽산은 WCC가 “교의(敎義)는 분열하나 봉사는 연합한다.” 라는 말을 일종의 모토와 같이 여기고, 교리의 일치를 오히려 폄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죽산이 WCC를 “자유주의 광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큐메니칼운동의 사상, WCC는 칼빈주의 정통 보수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장로교회에서 지지하고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에큐메니칼운동의 사상은 신신학과 단일교회 운동과 용공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산은 WCC가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교리적인 고백들은 신학적인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단지 추상적인 종교적 관념을 공표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죽산은 이러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정한 교회의 연합이 아니라 단지 무늬만 그려내는 “일양(一樣, uniformity)”을 추구하는데 불과하다고 단정하였다.

죽산은 WCC가 “속죄구령(贖罪救靈)의 옛 복음이 아니라 사회개량의 새 복음”을 전하고, “이교들과 대화의 광장”을 무분별하게 열고, 스스로 전락하여 “자유세계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죽산은 선교가 복음전도 외에 다른 것을 본질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WCC가 추구하는 새로운 선교방법은 현세적 생명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사명을 개인의 삶과 인류사회의 평화에 두고, 타 종교와 화해를 모색하고, 복음의 전파를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고, 급기야는 구원이 타종교에도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에 이르게 됨을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신복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복음주의 연맹(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도 WCC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정곡을 찌른다.   
   
3 한권의 책은 사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기도, 시대를 움직이기도 한다. 죽산의 <기독교 현대 신학난제선평>을 거의 암송하다시피 한 해원 정규오는 여기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읽었다. 해원은 죽산을 “최고의 스승이요, 신학과 신앙의 지도자요, 공사간 나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따랐다.

해원 정규오 목사는 뛰어난 목회자요 설교자였으며, 교정(敎政)의 지혜가 남달랐던 진정한 교회 정치가였다. 해원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변증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원은 신학과 삶이 어우러진 진정한 칼빈주의자였다. 제 33회 총회에 접수한 51인 신앙동지회의 진정서에 나타나듯이 해원은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당대 자유주의의 주장을 일축했다.

해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복음의 역사는 구원의 의를 다 이루신 중보자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주님의 이러한 신인양성의 중보를 믿지 않고 예수를 단지 모범이며 지도자로만 여겨서 우리가 WCC의 경우에서 보듯이 세속주의, 종교다원주의에 이른다고 보았다.

해원은 성도와 교회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 칼빈주의라고 보았다. 이러한 연합은 “자율주의”로 되지 않고 오직 “타율주의”로 말미암는다. 곧 비성경적인 자유주의가 아니라 성경중심주의에 따를 때 가능하다. 

해원의 WCC 비판은 그가 견지했던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주의의 필연적인 결실이었다. 해원은 WCC가 하나의 권력기구가 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였고, 그들이 단지 협의회 중심의 가시적, 세속적 일치를 꿈꾸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WCC에 대한 해원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당시 교단이 WCC 총회를 탈퇴해야 할 명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피력하고 있다.    
이렇듯 해원은 WCC의 특징이 “신신학, 단일교회, 용공사상”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 세 가지는 칼빈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했다.

    
4 한국교회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이 올바로 성경의 진리에 서 있지 않으면 첨예한 갈등을 조장하고 급기야 교회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약 반세기 전에 통렬히 경험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운동이 정치의 도구로 악용될 때의 폐해는 말할 수 없이 쓰라린 것이다.

WCC에 대한 죽산의 입장은 언제나 확고하였다. 그는 WCC가 교회의 본질을 왜곡하고 진리를 해치는 가운데 단지 기구적 일치만을 외향적으로 추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죽산의 이러한 반 WCC 사상은 해원에 의해서 충실히 교정(敎政)에 반영되었다.

해원은 WCC의 에큐메니즘이 당대 사조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비성경적인 기구라는 사실을 분명히 직시하였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시점에 양인을 나란히 세우셔서, 교리를 떠나서 무분별하게 수행되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경계를 허물고 결국 교회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음을 직시하게 하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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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4)WCC에 대한 역사적 비판 - 총회의 형성과 활동 중심
박창식 목사(달서교회·대신대 교수)
2013년 07월 18일 (목) 13:46:53 기독신문 ekd@kidok.com
출처: 기독신문

역사는 WCC 위험성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1959년 통합측 이탈의 핵심적 단초 … 한국 장로교단 지형 왜곡에 직접적 영향 미쳐
WCC총회 감성적 접근은 위험 … ‘선한 싸움하라’ 박형룡·박윤선 박사 경고 잊지 말아야

   
  ▲ 박창식 목사(달서교회·대신대 교수)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전방위적 홍보가 진행되는 가운데 성도들의 혼돈은 심화되고 있다. 과거 역사적 진실을 체험한 세대들은 그나마 감이라도 잡고 있지만 교회 안의 신세대들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최근 WCC 준비위원회의 일간지 홍보 내용에 따르면 WCC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교회들의 교제요, 성경적 권위 위에 굳게 서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분명하게 고백하고, 심지어 공산주의 이념, 동성애, 일부다처제까지 지지하거나 결의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피상적인 내용만을 접한 성도들은 ‘이러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WCC의 신학적 정체성과 총회와의 역사적 관계성을 살펴보면 섣부르게 용인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박윤선 박사의 WCC에 대한 경고(1951년)

한국장로교회가 아직 WCC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비교적 일찍이 WCC 신학적 위험성에 경종을 울린 분은 박윤선 박사였다. 당시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박윤선은 WCC가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이렇게 비판하였다. “WCC운동은 신신학적이고 타협주의적이며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해석을 각자의 자유에 맡기어 올바르게 믿지 않아도 교회라고 하며, 그 어떤 교회라도 모두 다 서로 뭉치어 하나가 되기를 도모한다. 이것은 항의자(프로테스탄트)의 걸어온 길을 후회하며 일소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보다 연합을 즐기는 운동이며, 따라서 개혁파의 올바른 신앙노선을 오착으로 여기는 그릇된 주의이다”(파수군, 1951년). 박윤선은 이러한 때에 부전론자(不戰論者)와 주전론자(主戰論者) 중에 누가 참 예언자인가를 질문하면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박윤선의 이러한 경고대로 WCC는 암스텔담에서 에반스톤 총회 사이(1948~1954)에 이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론이 등장하는 등 상당한 신학의 변질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고신과 기장의 연이은 분열에 골몰하였기에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총회는 1954년에 와서야 김현정과 명신홍 목사를 WCC 제2차 에반스톤 총회의 대표로 파송하여 이를 확인 보고토록 하였다. 이 두 참석자의 견해차가 컸는데, 명신홍은 김현정과 달리 WCC 운동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것은 당시 한국장로교회 안에 WCC 문제를 두고 신학적으로 상반된 두 견해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경고(1958년)

WCC 문제를 놓고 총회 안에 찬반 기류가 점증되자 1956년 41회 총회는 8인의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위원회는 WCC 지지파의 대표격인 한경직, 반대파의 대표격인 박형룡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한경직은 총회 석상에서 에큐메니칼 찬성발언을 하면서 이와 같은 비유를 들었다. “예를 든다면, 에큐메니칼이란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에게 쫓겨서 산중 동굴 속에 피신한 기독교 목사, 천주교 신부, 불교 승려 세 사람이 이념과 사상은 다르지만 친밀했던 것과 같다.” 비유의 적절성을 떠나 현대 WCC가 추구하는 종교다원론의 모습을 예견이나 한 듯해서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박형룡은 이러한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에 박형룡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신학지남, 1958)이란 논문을 통하여 WCC 운동의 위험성을 전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 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고로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존중하며 보수하려는 교회의 신도로서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신학을 칼빈주의 개혁파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으로 규정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과 교회합동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이 드러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코 탈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한국장로교회 안에 박형룡과 한경직 간의 신학적인 갈등은 해묵은 것이었다. 박형룡은 일찍이 193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비등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창세기의 모세 저작설, 여성의 교권문제 등으로 제기된 역사비평주의를 막고 정통적 성경관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는 고등비평을 수용한 아빙돈 단권 주석 작업과 조선신학교 이사진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총회가 김재준 목사를 처리할 때 옹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입장을 달리하였다. 한경직의 신학적 이념이나 성향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지만 표출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WCC 문제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WCC 문제로 인한 총회의 분열(1959년)

한국장로교회는 WCC 문제를 놓고 양 진영으로 재편되어 분열로 치닫고 있었다. 총회에서 구성한 연구위원회마저 표류하였고, 1958년 43회 총회에서는 보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1952년부터 결성된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와 WCC간에 기구적인 대립까지 겹쳐서 한치 앞을 예견치 못할 지경이었다. 분열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총회장 노진현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단 지도자들이 중재에 나서 ‘교회 평화의 방안’이란 4개항의 해명서를 발표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1959년 9월 28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최된 44회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양측의 치열한 갈등으로 인해 결국 총회는 11월 23일에 속개하기로 결의하고 정회하였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지지파는 서울 연동교회로 자리를 옮겨 단독으로 불법 속회를 열었다. 이를 두고 교회사가 김영재 교수는 이렇게 일갈하였다. “통합측에서 볼 때는 그럴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었겠으나, 그것은 분명한 쿠데타와 같은 것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고려파와 기장파의 경우는 다수결의 법적 절차에 따라 총회에서 축출하는 절차를 통하여 분립하게 되었으나, 주류와 비주류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백중지세의 두 분파가 분열할 때는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없었기에 탈법적인 분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1959년 한국장로교회 대분열의 핵심적 단초는 WCC 문제였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통합측과 일부 고신측 사가들은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을 WCC 문제보다는 총신의 삼천만 환 사건이나 경기노회 총대사건으로 기술하였다. 이에 당시 총회장으로 분열을 온 몸으로 체험했던 노진현 목사는 그의 회고록 <진실과 증언>에서 “역사는 창작될 수 없으며, 왜곡된 교회사의 전수와 재생산은 분열의 아픔 못지 않은 고통을 안겨준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분명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대분열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부터 상존하던 신학적인 차이가 WCC를 통로로 분명하게 확인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WCC 문제는 혹자들의 주장처럼 단지 분열을 위한 명분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신학적인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담아낸 새로운 그릇이었다. 차제에 분열의 원인을 두고 저들이 가진 정치적인 관점은 시급하게 신학적인 관점으로 재해석 내지는 재진술 되어야 할 것이라 사료된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WCC 문제는 우리 교단의 구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적 사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계 일각에서의 주장처럼 ‘WCC 부산 총회가 기독교 올림픽이며, 한국교회의 자랑인데 남의 잔치에 재는 뿌리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는 대단히 감상적인 접근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분명히 할 것은 WCC 문제는 교단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이지 결코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다. 차제에 보수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WCC 신학을 방심하며 따라갈 수 없고, 진리를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한다는 박형룡, 박윤선 박사의 경고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이 WCC를 영구 탈퇴한 이후 지금까지 반대하는 것은 우리 신학의 배타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수호에 대한 확고한 태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재 교회 안의 성도들은 막연함 가운데 상당한 혼돈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교단의 각 교회들은 WCC 신학의 정체성을 성도들에게 분명히 인식시키고, 자유주의 신학의 계속적인 도전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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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3)WCC와 서구 자유주의-신정통주의와 로마 가톨릭 중심
서철원 교수(조직신학)
2013년 07월 10일 (수) 11:37:13 서철원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타종교와 대화하자고 창조주 하나님 버렸다

바티칸 공의회, 전통적 신앙내용 전부 바꾼 종교다원주의 교리로 공식화
WCC도 3차 총회부터 주요의제로…자기해체된 기독교로 무슨 대화하나

 

   
  ▲ 서철원 교수  

WCC는 3차 총회부터 종교다원주의를 주요 의제로 토론해왔다. 금년에 부산에서 열리는 10차 총회는 종교다원주의를 중심토론 주제로 삼아 진행될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본래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교리로 제정하였다. 1959년 79세의 나이로 교황이 된 요한 23세는 1961년에 칙령을 내려 바티칸에서 공의회를 연다고 선언하였다.

 

처음 공의회를 열 때 교황 요한 23세는 종교개혁교회들을 맞아들여 한 교회를 만들려는 뜻으로 회의를 소집하였다. 교회를 갱신하여 개신교회를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려고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1963년 83세의 나이로 죽자 바울 6세가 뒤를 이어 공의회를 진행하였다.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회의의 방향이 바뀌었다. 교황을 전 기독교 세계의 교황에서 세계 모든 종교들 위의 교황으로 삼으려는 뜻이 강하여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 하였다.

 

종교다원주의 교리는 3조항으로 성립되었다. 종교다원주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신을 찾거나 믿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하여 교리를 작성하였다. 교회에 관한 교리적 구성 2장 16조에서 종교다원주의 교리를 펼쳤다.

 

첫 조항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하였다. 첫째로 언약과 약속이 주어지고 그로부터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가 나온 백성은 조상들 때문에 가장 사랑스런 백성이다. 회개 없이 하나님의 선물들과 소명이 주어졌다.

 

둘째 조항은 무슬림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하였다. 구원계획은 창조주를 아는 자들도 포함한다. 그들 가운데는 특별히 무슬림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고백하여 지킨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하시고 자비로우시며 마지막 날 사람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경배한다.


셋째 조항은 일반 종교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배정하여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림자와 형상들 안에서 알려지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 자신은 멀리 계셔도 그들 모두에게 생명과 영감과 모든 것을 주신다. 또 구주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모르는 것이 자기 허물이 아니지만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양심의 지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 주입된 은혜 아래 행실들을 행하려고 시도하는 자들도 영원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상이 바티칸 공의회가 정한 종교다원주의 교리이다. 본문만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교리조항 본문 배경에 있는 신학에 의하면 전통적인 하나님 견해가 전혀 아니다. 또 구원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회가 주장하는 구원이 전혀 아니다. 로마교회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이방종교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신앙내용들을 전부 바꾸었다. 이 신학적 작업은 20세기 로마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카알 라아너가 이루어냈다.

 

라아너는 전통적인 교회의 믿음에 관한 가르침이 현대인들에게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신학을 구성하였다. 로마교도인 말틴 하이덱거의 철학에 맞추어 신학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그 자리에 존재 자체를 하나님으로 세웠다. 삼위일체도 완전히 제거하고서는 존재 통보 과정을 삼위일체라고 정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일 수 없다. 한낱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출생한 한 사람일 뿐이다. 원죄도 첫 인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 섬김을 거부한 반역이 아니라 존재 통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면 구원도 내세에 영생하고 영광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현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런 신학에 바탕하여 바티칸 공의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 하였다. 로마교회가 그들의 신학과 신앙내용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림으로 로마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공식화하였다.

 

유럽에서 종교다원주의 교리와 그 배경신학이 이해되고 알려지므로 로마교회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것을 알게 되어 유럽의 교회들이 다 문을 닫았다. 교회의 전통적 신학이 이렇게 완전히 파괴되므로 주일에 미사하기 위해서 모이는 교회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를 개신교회가 받아들여 종교다원주의를 바르고 정당한 신앙생활로 삼게 되었다. 

 

WCC는 3차 총회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종교다원주의를 주요의제로 다루어왔다. 그러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적극 권장하고 시행해왔다.

 

로마교회가 무슬림들과의 대화를 깊이 진행하므로 WCC도 무슬림들과의 대화를 깊숙이 진행하고 있다. 또 불교와 대화도 깊이 진행하면서 불교의 종교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의 바른 전범으로 삼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정착시켜 종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므로 종교 간의 갈등을 없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나아가서 세계를 하나의 정부 아래 두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사상에 깊이 박혀있다.

 

비록 로마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확정했어도 그 시작과 완전한 준비는 개신교회의 근세신학에서 비롯되었다. 근세신학의 아버지 슐라이어막허는 전통적인 하나님 관을 완전히 바꾸었다. 신은 사람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되어있다는 느낌을 발언하는 것이라고 정하였다. 근세신학은 피상적으로 이해하듯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유일신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림으로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었다.

 

20세기 최대 신학자인 칼 바르트도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바르트는 규정하기를 하나님의 존재는 행동과 사건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행동과 사건을 떠나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동과 사건 뒤로 돌아가서 자존하신 하나님을 다시 붙들 수 있는 계기가 없다고 하였다.

 

20세기 3대 신학자로 인정받은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도 자존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도 존재자이므로 유한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존재자일 수 없다. 하나님은 내 존재를 있게 해준 존재 자체이고 또 그런 존재로 있게 해주는 존재의 힘이라고 하였다. 존재의 힘은 용기 소망 등으로 바꿀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리므로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소망의 신학을 내어 새로운 신학전개의 지평을 열은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도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인간 예수가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버림받아 죽었다. 만일 아버지가 있어서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른 아들의 고통을 내려다본다면 그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고통이 그에게서 나와서 아버지에게로 간다. 이 십자가상에서 있었던 고통의 교류가 바로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개신교회의 근세신학과 로마교회의 근세신학 혹은 현대신학이 다 동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그러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내용과 신학내용이 다 없어진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인간 예수로 신학작업을 하는 것만 남는다.

 

기독교가 이러하면 다른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꼭 같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이런 종교신학을 가지고 다른 종교들과 대화를 하여서 무슨 소득이 있는가? 기독교의 자기해체를 완벽하게 마감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없다. 귀신들의 종교인 이방종교들만 번창하고 기독교는 완전히 땅에 묻히는 일만 남는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한 대로 옛날 옛적에 기독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잔해가 지금 대영박물관에 가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실상을 알면 종교다원주의의 진행을 결사하고 막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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