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상기(上記)한 말씀은 하나님의 논리 중 한 가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전제에 대한 결론이다. 그 전제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논리를 보여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 6:3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므로 여기 이러한 성경 말씀 속에 있는 이와 같은 논리는 너무나도 확실하여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압도해 온다.

성경 말씀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말할 때,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우리의 머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이다. 큰 것을 주셨으면 작은 것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 그분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은사를 주시겠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때 그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ㅡ아더 핑크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서ㅡ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아더 핑크, Arthur Pink)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연합과 관련된 것으로 해제되거나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결코 권면을 받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새로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 있게 됩니다 (참조 고후 5:10; 엡 2:10).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그분 안에 거하라고 권면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특권과 체험은 방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계속 있고’, ‘살고’, ‘머물다’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체험적 인식이 중단되지 않도록 늘 경계하라고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의 의식적인 교제를 계속적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마음이 늘 그분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가지가 포도나무를 계속 의지하듯이, 가지 안에서 포도나무의 생명과 풍성함이 순환하듯이, 매일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활발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님이 요한복음 6:56에서 사용한 비유적 표현과 병행을 이룹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이 말씀은 그분으로부터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얻으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도 살아계신 구주를 믿는 믿음을 계속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분에게 “오는 것”이 그분을 믿는 믿음의 최초 행위를 묘사하듯이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믿음의 계속적인 활동을 묘사합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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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상기(上記)한 말씀은 하나님의 논리 중 한 가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전제에 대한 결론이다. 그 전제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논리를 보여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 6:3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므로 여기 이러한 성경 말씀 속에 있는 이와 같은 논리는 너무나도 확실하여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압도해 온다.

성경 말씀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말할 때,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우리의 머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이다. 큰 것을 주셨으면 작은 것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 그분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은사를 주시겠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때 그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ㅡ아더 핑크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서ㅡ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아더 핑크

일반적으로 말해 소위 “그리스도”이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다.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특수한 직임은 맡지 않았을지라도), 책임 연령에 이르면 전도자에게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강요받는 형태와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에서 대중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당당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도록‘ 권유받는다. 이러한 신자들은 버섯과 같아서 밤사이에 돋아 올라 잠시 동안 지탱하나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위 ’인격적인 사역‘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는다. 이는 마치 떠돌이 외판원들이 세일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수작과 유사하다.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방금 앞서 말했던 사실들로 경고 받은 자들이며, 종교적인 협잡꾼들에게 농락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협잡꾼들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영교함으로 ‘만사형통’하다고 농간부리는 데 속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들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 로마서 10: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라는 말씀을 단지 지적으로 승인하거나 받아들인다. 요한복은 2:23-24의 말씀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으나 저희가 바리새인을 인하여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칭찬듣기를 더 좋아함이라”.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문제가 된다. 자연인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사형통하게 나아갈 수가 있으며, 기뻐할 수가 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에게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자체가 영적인 활동이지 자연적인 활동은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자는 죄와 허물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주님을 절감하는 영혼의 사역이며, 잃어 버린 바 된 죄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된 결과이며,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정의 발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자연인이 성자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는다(엡 2:10).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새로운 지각과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성품으로써 신령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써 교통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요 3:6)라고 말한 분과 동일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전가시킨 은혜의 원리이며, 그를 기쁘시도록 열매 맺게 하는 성향이다.
중생은 어떤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고 제해버릴 수도 없다(전 3:14).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소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중생은 성직자의 마술적인 사역의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중생받는 자는 순전히 피동적이며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는다.
성육신 하신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에 대해서 - 유전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그 후손들을 중생시켰기 때문이다.
육정에 대해서 -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 이전에 인간의 자의지는 철저히 하나님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뜻에 대해서 - 설교자는 자신을 중생시키지 못할뿐더러 남도 중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권적인 역사로써만 가능하다.

또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그 결과는 명백함)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이것의 원인과 작용은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임)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마치 빛이 어둠과 구별되듯이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은혜란 자격없는 자에게, 더 분명히 말하면 지옥에 가야 마땅한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공의(정의)와 정반대이다. 공의는 공정한 법집행을 요구한다. 공의는 각 사람이 더도 덜도 아닌 법이 정한 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공의는 호의를 베풀지 않으며,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는다. 공의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자비를 모른다. 그러나 공의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된 후에는 은혜가 온다. 은혜를 베풀기 위해 공의를 희생해야 하는게 아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다. 은혜가 '왕 노릇 한다'면 은혜는 주권적이다.
 
은혜란 하나님에게 공로 없이 받는 과분한 호의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은혜를 마치 자기 권리인양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은혜란 노력없이 받는 것이며, 자격 없이 받는 과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받는 사람은 없다. 은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은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은혜로 받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따라서 가장 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자비가 미치는 범위 내에 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따라서 그 누구도 구원을 자랑하지 못하며,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취하신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이 사실은 성경의 거의 모든 갈피마다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 반대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을 삼으셨다. 장자 이스마엘은 거의 모든 축복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낫다. 반대로 부모가 늙어서 낳은 이삭은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 마음이 넓고 용서를 아는 에서는 눈물로 축복을 구했으나 받지 못했다. 반대로 버러지 같은 야곱은 유산을 받았고 귀히 쓸 그릇으로 빚어졋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지혜롭게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으나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으나 세리들과 창기들은 주님의 사랑에 끌리게 하셨다.
 
구주께서 태어나실 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놀랍게 베푸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우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모든 인간에게 다 알리지는 않으셨다. 대신에, 베들레헴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에게만 하늘의 별로 알리셨다. 그것은 그 시대의 전체 분위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언적 신호이자 표시였다. 지금도 그리스도가 모두에게 계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나라에 천사를 보내 아들의 탄생을 알리는 쪽이 훨씬 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셧다. 하나님에게는 온 인류가 그 '별'을 주목하게 하는 일도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 하지 않으셨다. 왜 그리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주권자요 자기 뜻대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구주의 탄생을 특별히 알린 두 부류의 사람들을 주목하라. 한쪽은 무식한 목자들이었

 

고, 다른 쪽은 먼 나라의 이방인들이었다. 양쪽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더없이 의아한 선택이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야 탄생했음을 알리려고 공회에 나타난 천사는 없었다. 교만과 독선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에게는 아무 '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메시아가 나타날 곳을 알아내려고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 탄생의 신비를 이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다. 무지한 목자들이 이처럼 특별하고 영광된 일에 선택되었다. 그러나 학자들과 뛰어난 자들은 제외되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그분이 태어난 동네 사람들이 아니라 타국의 박사들에게 알리셨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시대에 인류를 어떻게 다루실지 보여주는 놀라운 예언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며,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가능성이 가장 낮고 자격이 가장 없어 보이는 자에게 번번이 은혜를 베푸신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참 구원 신앙과 거짓 구원 신앙 / 아더 핑크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다 해서 그것이 다 구원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의지하는 것 같아 보이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것 같이 보여도 구원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을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행복과 불행 또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최대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이 구절은 구원을 얻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믿음이고, 구원을 얻지 못하고 정죄 받지 못하고 가장 크고 저주스러운 죄가 불신앙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죽음의 형벌이 죄의 결과로서 반드시 뒤따른다고 경고하며 죄를 범한 모든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믿는 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적용될 만큼 절대적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생명을 얻는 조건에 관해 말씀합니다. 이 조건은 믿음이라는 1차 조건과 세례라는 2차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례가 2차 조건인 이유는 이것이 생명을 얻는데 믿음만큼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후반부가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가 아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로 되어 있는 것, 즉 세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지만, 세례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죄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를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칼을 뽑아 드시고 내리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구원 신앙 외에는 그 칼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해서 불신앙을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생명을 얻는 필수 조건이고 불신앙이 무서운 죽음의 형벌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믿음미 무엇인지 또한 구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다고 다 구원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스스로 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그분이 이루신 속죄 사역을 의지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모래성을 쌓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완전한 구원을 보장 받았다고 믿지만, 안락한 꿈에서 깨어난 순간 차디찬 죽음의 손아귀에 붙들려 경악하게 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 신앙이 무엇인진 알고 그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거짓 구원 신앙의 모습

 

참 구원 신앙과 거짓 구원 신앙은 매우 흡사해서 당사자는 물론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마술사 시몬이 대표적이 경우입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3).

 

빌립은 시몬이 나름대로 믿음을 보였기에 그를 참 신자로 여기고 신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도록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1-23절)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하여 다른 사람이 도달하지 못한 믿음의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탁원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폭넓은 믿음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14)라고 말한 사도 바울 처럼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구원 신앙을 지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로 그런 사람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신앙을 이른바 역사적 신앙 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은 교육이나 자력으로 얻지못 할 두 요소, 즉 생각을 움직여 믿음에 이르게 하는 신령한 빛과 성려의 능력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심지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구원 신앙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조명과 마음의 감동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중생의 체험을 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여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 6:4-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라는 것은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 바 된‘ 덕분에 진리를 인식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와 성경에 근거한 신령한 믿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삼고 굳센 확신으로 의지합니다. 성경이 거짓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이 합리적이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신령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애굽과 홍해에서 구원을 경험한 뒤에 그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 하나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였습니다(히 3:17-18).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렘 13: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속하게 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렘 13:10)고 말하였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사 10:20)라는 말씀이나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라는 말씀에 나오는 ‘의지하다’와 ‘신뢰하다’역시 확고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사야 48장 2절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구원 신앙이 아니라고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 48: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기대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아 8:5)라는 말씀의 ‘기대다’역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그런 표현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미 3:9)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삵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오늘날에도 추잡하고 속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재앙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큰 절망이나 위기가 닥치면 예상 밖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산헤립이 큰 군대를 이끌고 유다 성읍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대하 32:7-8)고 말했습니다. 이에 백성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8절) 안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히스기야의 말에 안심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채 못 되어 그들은 하나님이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게’ 악을 행했습니다(대하 33:9).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 자체가 진정한 중생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다의 아비야 왕입니다. 역대하 13장에서 여로보암 왕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아비야 왕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소금 언약”으로 나라를 다윗그의 자손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대하 13:5). 둘째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여로보암의 왕의 죄를 엄중히 꾸짖었습니다(6-9절). 셋째, 그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기에 자신과 유다 백성의 편에 서신다고 확신했습니다(10-12절).

 

그러나 성경은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이는 그들이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17-18절)와 같은 행동을 보였던 아비야 왕을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왕상 15:3)라고 평가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어느 한 순간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약속과 언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 3장 5절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도 알지 못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보였다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었을까요? 더욱이 그분의 메시지가 축복의 약속이 아니라 심판의 경고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 아래에 사는 오늘날에는 복음의 약속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겠습니까?

 

청교도 목사요 신학자였던 존 오웬과 함께 사역했던 데이비드 클락슨은 1680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판의 경고가 주어지면 안팎에서 큰 반발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심판의 경고는 마치 쓴 약처럼 죽음의 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삼키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안에서부터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밖에서도 반발이 일어난다. 사탄이 쌍수를 들고 그것을 막으려고 소란을 피우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심판의 경고를 통해 자심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피할 길을 찾을 까봐 노심초사한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어 그들이 심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이와 같이 약속의 말씀은 대개 아무런 반발도 일으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복음의 정수인 용서와 생명에 대한 약속을 안에서부터 그저 달콤하게 받아 삼킨다. 사탄도 반발하기는 커녕 약속의 말씀을 그릇 적용하도록 옆에서 힘껏 돕는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사람들을 자연 상태 그대로 머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약속의 말씀을 그릇 적용하는 것은 무덤을 봉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죄의 무덤 속에서 영혼이 죽은 채로 널부러져 썩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렇듯 심판의 경고는 약속의 말씀보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어렵다. 따라서 니느웨 백성의 경우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심판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복음의 약속은 아무 반발 없이 수훨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는가?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구원 신앙이 아닌 경우가 또 하나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잠깐 믿다가”(눅 8:13)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마 13:20) 받는 부류에 속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사한 빛이 감돌고 온몸 가득 의욕과 열정이 넘칩니다.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들, 즉 참된 신자들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표면 아래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둘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땅을 파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진정한 구원의 뿌리가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훨씬 더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기꺼이 받아드리면서도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그분의 명령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만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처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복종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 심지어동으로 믿음을 보인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거짓 구원 신앙의 특징

 

그렇다며 거짓 구원 신앙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고 무엇이 구원받는 신앙인지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신앙이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도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삼으며, 구원신앙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신앙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 신앙이나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나 모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며 둘 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이 모두 "다 일어나 등을 준비“(마 25:7)했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구원신앙에도 기쁨이 뒤따르고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에도 기쁨이 뒤따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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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근본적이고  가장 필요하며, 가장 유익을 주나,  매우 무시되는 진리 
아더 핑크 

 

그러나 지난 19세기 기간에 하향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던 기독교는 
죄의 악함을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가능성들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를 선언하는 대신에 죄의 불편성만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진보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로 아첨하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함으로,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된 조건에 대한 비참한 묘사가  
아주 말살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혼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여러 교회들 가운데서 인기 있는 신앙을 시험하여 본다면- 
소위 ‘복음적인 기독교’의 명칭으로 불려지는 교회들 중 10분의 9를 
평가하여 본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  
성경에 묘사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술과 정면으로 맞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조건이 파멸과 영적인 죽음 상태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죄를 위하여 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의 지극한 죄 됨이 
그러한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복음의 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타락의 깊이가 정말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장엄한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눈에 인간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그려주는데 있다. 

 

또는 인간의 그의 조물주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여할 임무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완전성을 선언할 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래의 조건과 인간이 저지를 배도를 윤곽적으로 그려주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파멸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처방도 그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여야 할 일이다. 
우리들이 나면서부터 빠져있는 그 무서운 함정의 구렁을 
진정으로 바라보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위대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타락의 상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속으로만 치유가 되는 무서운 질병에 걸려있다. 
우리들이 앓고 있는 처참한 질병의 정도가 얼마나 되나를 아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치평가도 좌우될 것이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은
시편 51편 강해에서 이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복음 사역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오려면 
먼저 그리스도 없이는 자기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 비참의 지점을 지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다다를 수 없다. 
이 비참의 주요 요소는  
우리들의 본래적인 죄악성과 실제적인 죄악성,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죄인 됨을 확연히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우리들은 그 죄와 진노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힘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이 위대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온 힘을 기울여서 이러한 비참한 느낌을 가지게 하고
그 죄와 진노에서 건지실 오직 유일하신 분께 죄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처한 비참의 원인은 
우리들의 본성이 부패하여 있다는 것이다. 

 

또는 원죄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목적을 위하여 아주 합당한 다음 말씀에 시선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략)....... 

이 교리는 성경의 진리이다. 
조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을 그저 진리의 대원천인 성경의 교리로만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근본적인 교리이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 어떤 사람도  
그 교리 때문에 시험에 빠져 고통을 당하게 않게 하시기를 원한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하여 매우 큰 강조점을 주고 있다. 

성경의 부분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처한 비참한 처지와 노예상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부패, 눈멂,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영적 본질에 대하여 가진 반감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철저한 부패가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능함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선언과 증거는, 
모든 인간들이 사단에게 매여 종노릇 하고 있음과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능력이 전혀 없음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저 간접적으로 희미하게 말하지 아니하고 
강조적으로 아주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점은, 성경이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여러 수백가지의 증거들 중 하나이다. 


는 ‘슬프게도 무시되는’ 주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 교리는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교훈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강단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파멸과 비참함을 별로 설교하지도 않으며,
강단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 교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곳에서도, 
이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못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의 교육이나 사상의 주류는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다.
다윈의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마저,  
그 가설의 악한 영향이 자주 나타나 보인다. 

 

현대 강단을 맡은 사람들이 침묵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출석하는 세대들이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를 통탄할 정도로 모르고 있다.
그러니, 자기들이 처하여 있는 어두움의 무서운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매고 있는 고집스러움과 불신앙의 사슬을 
지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천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할 정도이다. 

수천수만의 설교자들은 자기들의 회중들에게
그네들이 본질상 무서운 처지에 있음을 신실하게 말해 주는 대신,
크레믈린에서 일어난 최근의 소식이나, 핵무기의 발전에 대한 소식을
해설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설교자들의 신앙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적인 교리’ 이다.
이 주제에 대하여 정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다른 극히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관점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신앙이 바로 이 점에서 성경적이라면, 
그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을 개선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만이 오직 유일한 소망임을 분명하게 지각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죄인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타락한 존재가 선을 이룩하려고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그는 많은 오류에 빠지지 아니할 것이다.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나는 알미니안(arminian), 아리안(arian), 소시니안(socinian), 무율법주의자(antinomian) 
의 체계로 기울여지는 사람 치고  
먼저 인간 부패, 또는 인간의 진노받아 마땅함을 과소평가하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신학적인 소양을 훌륭하게 갖추었던 스타이플러(j. m. stifler)는 이렇게 말하였다. 

“거짓된 신학은 그 원천을 인간 부패에 관한 바르지 못한 관점에 두고 있다.
이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영적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모든 참된 경건의 근원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비열함에 대한 바른 관점에 있다. 
또한 참된 경건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른 관점에서 샘 근원을 찾는다. 
그것 없이 진정한 자기 혐오감이나 회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긍휼에 대한 진정한 이해,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존재할 수 없다. 

 

허망한 사람의 미몽을 깨워 
자기의 무가치함과 자기 의(義)의 무가치함을 확신케 하는 데에 
이 교리를 알게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부패하였음을 아는 설교자도, 
자기 스스로는 자기 설교를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진정으로 인식하고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진리를 전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듣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사랑하는 데서 떠나 
자기들에게 거는 모든 소망을 영원히 기각하여 버리게끔 
이 진리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진리를 전하는 자기의 신실함을 의뢰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그 진리를 적용시켜 달라고 떼를 써야 할 것이고, 
자기의 가련한 노력을 그렇게 축복하여 달라고 간청해야 할 것이다. 

.....(중략)....

이 교리는 ‘가장 필요한 교리’ 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들 대다수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흔히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빠진 인간의 무서운 상태를 너무 강하고 음울하게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어두움과 더러움을 말로는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하여도 
잘 나타낼 수 없다. 
다음의 진리의 말씀이 묘사하는 바와 같은 인간의 상태의 비참함과 전적인 무능을 
묘사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2:39,40) 

은혜의 이적을 경험한 영혼들의 상태를 대조하여 볼 때, 
그 점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 교리는 ‘가장 유익을 주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흔히 이 교리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지각을 깨우친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한, 
자기들을 의뢰하는 마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한다. 
성령의 강력한 작용만이 자기 신뢰를 포기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  
신실한 말씀전파를 사용하시기 원하신다.  ]


아더 핑크의 ‘인간의 전적타락’(청교도 신앙사, 역간) 중에서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성경과 하나님 / 아더 핑크

 

성경은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정신을 높여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고에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개념들을 제공해 주셨을 뿐 아니라, 사용한 그 말을 받아쓰게 하셨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내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구두 영감설을 부정하는 그 어떤 인간적인 이론도 사탄의 간계이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공격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성경의 모든 장에 각인되어 있다. 그처럼 거룩하고, 천상적이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인간에 의해 고안되었을 리 만무하다.

 

성경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해 알려 준다. 이것은 아주 진부한 말이 될 수도 있으나, 특별히 오늘날에는 그런 말이 필요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고 믿는 ‘하나님’(God)이 점차 이교도들이 고백하는 ‘신’(god)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스포츠가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인 위치, 쾌락에 대한 지나친 탐닉, 가정생활의 파괴 등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타락과 멸망으로 이끌었던 것과 동일한 여러 질병들의 증상이다.

 

명목상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오늘날의 ‘하나님 개념’은 급속하게 고대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모습과는 아주 다르게, 인간의 어떤 지적인 능력으로도 고안해낼 수 없는 속성들을 갖고 계시고 완전함을 옷 입고 계신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게시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 실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을 떠나서는 그분에 대한 그 어떤 이론적 인식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 1:21)라는 말씀은 여전히 진리다. 성경이 무시되는 곳에서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이 된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지적으로 알기 위해 성경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분을 실제적이고, 인격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방식으로 아는 것이다. 불행히도 오늘날 이것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공부를 통해서 - 과학 교서를 떼면 과학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 지식만 따진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만, 즉 자연 현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방식으로만 알려질 수 있다. 다시 말해, 각 심령에 대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오직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지각 능력을 통해만 알려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으로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불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식을 갖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물은 스스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인은 자연을 초월하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참 하나님’을 알기 전에 반드시 영생이 주어야져 한다. 이것은 요한일서 5장 20절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어떤 이해, 즉 새로운 피조물에 의한 영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초저연적인 지식은 초자연인 체험을 낳는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은 대부분 ‘옛 아담’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런 신앙생활은 부패한 것들로 가득 찬 무덤을 뒤덮은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신앙생활은 외적 ‘형식’에 불과하다. 건전한 신조가 있는 곳에서조차 그런 신앙생활은 너무나 자주 생명력 없는 정통에 불과하다.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정통주의자들이었다. 당시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 성전이 예루살렘에 건재해 있었고, 율법이 해석되고 있었고, 여호와께 대한 예배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요 7:28).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아버지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요 8:54-55).

 

이 말씀이 성경을 소유하고, 열심히 탐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경하던 사람들에게 퍼부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들은 하나님이 이론적으로는 잘 알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식은 갖지 못했다.

 

기독교계의 상황도 유대인 세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 혹은 영적 지식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어떻게 우리는 그런 확신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가능하다.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다.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면 그 샘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지식은 초자연적 체험을 낳고, 초자연적 체험은 초자연적 열매를 맺는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변혁과 혁명을 가져오신다. 그래서 자연적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즉 자연과 정반대되는 일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일은 현재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자들 중 약 95%정도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상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외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참으로 그는 은혜로 인한 기적의 존재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운 피조물”(고후 5:17)이다. 그의 체험과 삶은 초자연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인 체험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된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또한, 그와 반대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한다.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체험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이 말씀과 분리되어 역사하는 일은 결코 없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활기를 띠신다. 말씀으로 인해 성령은 죄에 대한 가책을 일으키신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확신을 주신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성도를 자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읽기와 공부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효과를 통해서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유익을 얻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과 가치 (아더 핑크)



“하나님의 말씀을 보든, 교회 역사를 보든 간에,

교리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장기간 결핍될 때 발생하는 비극적인 결과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성도의 이해를 밝게 해주며, 지성을 훈련하며, 판단력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함이다.

교리는 감사의 동기를 마련하여 주며, 선행에의 동기를 마련하여 준다.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를 전혀 배우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믿음이

건전할 수가 없다.

근본적인 교리를 “하나님 말씀의 초보”(히 5:12), 혹은 ‘성경의 기본진리’라고 하는데,

이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성령의 감동과 성경의 권위’, ‘영원토록 복되신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내재하는 두 가지 본성들’,

‘그분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희생’, ‘우리의 타락’,

‘중생’, ‘무조건적인 칭의’

이런 것들은 진리의 성전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들인데,

이것들이 없으면 성전은 유지될 수 없다.


옛적에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베임을 당하는도다)” (호 4:6)

그리고는 선언하셨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목마를 것이며..(사 5:13)

하나님께서는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5)고 하신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시의 교리를 통하여 제일 먼저 전달되어 졌다.

교리적인 기독교가 되어야만 실제적인 기독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생활의 원동력이 감정이나 충동적인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원리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을 깨닫고 바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진리에 의해서 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우리는 진리의 지식(요 17:3, 딤전 2:4)과 진리에 대한 믿음(살후 2:13)에 의해

구원받는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또한 우리는 진리에 의하여 자유(요 8:32)케 되고 성화(요17:17)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우리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의 은혜도 증가한다.(벧후 1:2, 3:1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우리를 보존하는 것은 은혜와 진리이다.(시 61:7, 잠 21:28)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시 61:7),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잠 21:28)〕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 11:3) 

이 질문은 매우 적절한 질문이다.

‘터’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데 이사야 19:10에 나온다.

“애굽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히브리 원어는 ‘터’)에 근심하리라”(사 19:10)

우리의 계획과 행동이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2차적인 진리들이 도출되는 곳이 바로 ‘1차적인 원리(*터)들’ 이다.

모든 교훈의 기초가 바로 이 진리들인 것이다.

‘의인의 믿음과 소망은 신앙의 원리들 위에 설립된다.’(메튜 헨리)

이 기초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동치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것을 시험해보신다.

‘신앙의 기초들이 무너질 때 의인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들은 거룩한 성전 안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뒤흔드는 자들의 모든 계획들과 시도들을 중지시켜 달라고 간구해야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이 거룩한 믿음 위에 서기 위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존 길)



지난 세기 동안 교리교육은 눈에 띄게 쇠퇴하여 갔다.

주의와 신조들이 무가치한 것들로 인식되었다.

신학공부보다는 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 대한 공부에 열심 내었다.

‘우리에게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달라!’ 는 요청이 있었다.

이 요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는 

그 요구가 영적이며 적절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중요한 의미도 내포하지 못한 가상의 구분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양성적 인격, 중보자적 특징, 

택함 받은 자와의 공적인 특징과 그들에 대한 구속사역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그분의 신성, 독특한 인성, 약속의 머리되심, 

그리고 그분의 삼중직을 인정할 때만 형성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그리스도 교훈’(요이9)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분리(‘기독교’와 ‘그리스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교훈은 

주님의 신비한 인격과 그 큰 구원에 관한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신비)’(골 4:3)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진리의 말씀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영광뿐 아니라  기독교의 거룩한 기원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교리에 나타나고 있는데,

교리는 인간의 고안물이 될 수 없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왕자의 죽으심, 

그분이 순종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님,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은

가장 최고로 고상한 거룩하고도 신비한 진리들로서 

유일한 이성의 최고봉을 훨씬 능가하는 진리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들은 전체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우리들을 향하신 요구들과 그것을 실천하게 해주는 원동력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리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진리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 그것들의 상호관계, 그 주제의 일치성, 영광의 주님의 대한 찬미 등을 

이해하게 될 때 분명하여 진다.

어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교리가 일관성이 없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교리의 부수적인 것들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전체적인 이해와 안목이다.

그런데, 그것은 부지런하고 끈질긴 적용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설교는 많지만, 슬프게도 교육은 거의 없다.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선포하고,

그 각각의 관계를 설명하며, 진리의 전 영역을 보여주여야 하는 것이며,

균형에 따른 안정감을 얻게 하며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화가 나타나게 해야 될 것이다.

그들은 공언할 뿐만 아니라, 증명도 해야 하며

확신시키려는 것 뿐 만 아니라,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입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했다”

(행17:2,3)는 말씀을 읽는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이성적인 능력을 상당히 많이 이용했다.

그는 자기가 전하는 것을 증명도 하지  않고 믿으라고 강권하지는 않았으며

자기가 강권하는 것에 대해서는 증거를 내세웠다.

그는 복음의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교리들을 전파했는데,

그때마다 쉽고도 결정적인 논리로써  그것을 증명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4)

강론이 악용될 수 있다고 해서 강단에서 그 강론을 그쳐서는 안 된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면,

올바를 원리들로부터 정확한 결론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며,

명쾌하고도, 확실한 주장들을 추론해 낼 수도 있다.

어떤 명제의 진리들을 효과적으로 추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며,

반대되는 진술에 대해 대답한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볼 때 명백하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초보적인 문제인 하나님 존재를 설명할 때,

바울은 간단하면서도 인상 깊게 강론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행 17:2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를 말할 때,

먼저 이방세계 특성과 행위를 길게 증명한 후, 구약을 인용하여 결론짓기를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우리의 마음은 이해력과 양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앞에 섰을 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여” 

그 로마의 관리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행 26:25)


그러나, 슬프다!

이처럼 성경을 강론하고 설명하며,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이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경험만 외쳤으며 교리의 지식은 무시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가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보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심지어 진리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조차 결핍하고 있다.

소위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설교들이 신학적인 강론을 대신하게 되었고

복음의 커다란 근본들은 모욕을 받고 있다.

한번 개신교 국가가 되었던 지역에 다시 가톨릭이 들어가곤 했었다.

바로 그 때, 경험으로는 그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건전한 교리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거룩은 그 행위의 원천이 되는 뿌리가 마르고 시들게 될 때에 

쇠미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믿음의 교리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순종은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행위 없는 교리 또는 단순히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지식들은 실천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교리와 실천은 병행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행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처음 불을 밝힌 자는 또 다른 불에 이를 것이다.’(존 길)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먼저) 교훈과 (그 후에)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는 말씀의 순서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마찬가지로 디도에게도 분부하고 있다.

“이 말(3-7의 교훈)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기쁘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슬프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치되,

그 줄기와 가지, 그 대의(大意)와 효력을 다 가르치는 자는 너무도 너무도 적다.

영적인 진리를 바르고 명쾌하게 이해하는 것 보다

더 멋지게 영적인 마음을 꾸미는 교양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멀리하는 것도 거기서 시작된다.

영적인 결실도 거기서 시작된다.

교리는 하나의 틀(모형)이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던져 우리 마음의 모양을 얻는 것이다.(‘교훈의 본’, 롬 6:17)

뿌려진 씨가 어떤 씨냐에 따라 추수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늘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문하생의 삶이 결정된다.

16,17세기의 기독교를 상징했던 그 순결성, 그 독실함, 그 열심,

인간 앞에서의 의로움,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설교는 주로 교리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결과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명과 교훈을 포기하느니

그들의 생명을 내어 놓았고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행동이 선하기만 하며, 그가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께 옳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하나님이 가장 높이 들어서 사용하시던 사람들은

이 청교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찰스 스펄젼, 시이저 맬런, 로버트 머리 멕체인,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지도자들은

설교할 때마다 교리 전파에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아더 핑크의 ‘실천적인 기독교’ 중에서 



 


 

첨부파일 교리교육의 영적인 가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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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 아더 핑크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과 그 한 강도는 주님을 영접하고

다른 강도는 주님을 거절한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것입니다.

그 두 행악자들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들은 꼭 같이 그리스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이 죽음의 6시간 동안에 일어난 모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둘 다 악명 높은 죄인들이었습니다.

둘 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사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하나는 강퍅하고 완악해서

그가 이 때까지 살아오던 대로 죄 가운데서 죽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사악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에게 자비를 구하여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얼마나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와 꼭 같은 일들을 봅니다.
아주 동일한 환경과 조건 하에서도 한 사람은 녹아지나 다른 사람은 마음이 굳어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서도 한 사람은 무관심하나 다른 사람은 눈이 떠져서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밝히 드러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복음이 감취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선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사실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결코 인간의 책임을 파괴하지 아니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성경에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든지 없든지, 또 서로 모순되지 않게 조화시킬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할 때 우리의 청중들에게 대해서 우리 자신이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지금 고인이 된 스펄전은 디모데전서 2:3,4에 관한 설교에서 성경 본문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또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그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한다면 그 중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거듭 거듭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하나님께서 온 마음을 다하여 자기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외에는 결코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알기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 있어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만세 전에 택정하사 그의 무한하신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 두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일들 가운데

하나의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설교가 중의 대 설교가는 또 말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항상 설교해오던 것을 앞으로도

계속하여 설교할 것이며 내가 하나님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일치시킬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전파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무너뜨리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뭇 영혼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지정하신 모든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며 그의 구원에의 부르심은 “믿는 자 마다”

모두에게 넉넉히 해당될 만큼 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아무도 거저 돌려보내지 아니하시며 다 영접하여 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고, 심고, 물을 준 후에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그의 절대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는 가장 큰 기쁨을 삼으십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신앙고백의 주체 선언 - 아더 핑크

 

사도신경 강해

  

 서론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이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성자.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신앙고백의 주체선언 - 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 진술된 진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도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그들의 것이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 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십대들은 주일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된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한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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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세상 / 아더 핑크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

신약 성경은 세상과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도 분명히 규정하고 있고, 신자들에게 세상에 대하여 근엄하게 경고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이 “어두운 곳”(벧후 1:19)을 비추는 하늘로부터 온 빛이다. 말씀의 거룩한 광선은 만물의 진정한 색채를 드러내며, 수많은 물체를 가리고 있는 거짓된 외관과 신비한 매력을 꿰뚫고 그 실상을 드러낸다. 성경에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고, 많은 돈이 소비되며, 눈이 먼 얼뜨기들에 의해 지나치게 높은 찬양과 경탄을 받는 세상이 ‘하나님의 적’으로 선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따르거나 사랑하는 일은 금지된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지금까지 다뤄 온 주제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진지한 독자라면 그것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헤아려 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권면들 중 하나는 이렇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각자가 자신이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늘어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의 실제적 성장,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실제로 닮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점은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이 나를 보다 덜 세상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1. 세상의 참된 본질을 알게 된다

어느 시인은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옳다”고 노래한 바 있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옳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잘못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요일 5:19)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초자연적인 가르침을 주실 때에만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눅 16:15)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상은 언젠가는 안개처럼 없어질 것이 분명한 거대한 속임수, 속 빈 강정, 더러운 물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것은 크게 감사할 일이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서는 안 되는 '세상‘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보자. 성경에서 이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런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사물의 체계나 질서다. 어떤 외부적인 요인도 그 속을 침투하지 못하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신속하게 세상에 순응하거나 동화된다. 세상은 동료 인간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또한 자신의 성향에 따라 인간사회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이라는 견고한 왕국을 건설한다(롬 8:7). 육신의 생각이 있는 곳에 세상이 있다. 그러므로 세속성이란 곧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2. 세상이 우리가 맞서야 할 대적임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딤전 6:12)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적하고 정복해야 할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거룩한 삼위일체’가 있듯이, 육신, 세상, 마귀의 ‘악한 삼위일체’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과 치명적으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치명적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 싸움에서 마귀가 우리를 파멸시키든가. 아니며 우리가 마귀를 물리치든지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치명적인 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또한 마음으로부터 세상을 쳐부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5:4).

우리가 세상을 이겨야만 하는 이유들 중 몇 가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세상적인 유혹들은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소원하게 만든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박에 없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세상의 영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철저히 반대한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고전 2:12).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요 1:10). 그러므로 이세상의 관원들과 지배자들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 2:8).

셋째, 세상적인 관심과 염려는 경건하고 천성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든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1주일에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탐욕스런 관심사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가득 차 있을 때, 그것은 세상적인 것들의 부패한 영향력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믿음의 눈은 만물의 진정한 색깔을 분별할 수 있으며, 그것들의 공허하고 헛될 뿐 아니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것들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임재에 대한 체험은 세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성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중보하시며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거룩한 구주를 바라볼 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주님 외엔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당신은 앞에서 논의된 내용들에 진심으로 동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한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높에 평가하는 것들이 마음을 사로잡고 매혹하지는 않는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또한 그 안에서 불행해지는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떠나라. 당신도 그런 것들로 인해 울고 웃는가? 아니면, 당신의 기쁨과 만족은 아무도 당신으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것들 안에 있는가?

바라건대 이런 질문들을 가볍게 취급하지 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이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이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당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될 것이고, 또한 당신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여기면서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의 여부를 알려 줄 것이다.

 

3.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기 위해서(마 5:17).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요일 3:8),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지 위해서(살전 1:10),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마 1:21)뿐 아니라, 이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세상의 미혹케 하는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오래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실 때 이미 예고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였고, 이집트는 세상의 모형이었다. 그들은 바로를 위하여 벽돌을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면서 모진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살이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길로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쇠로 만든 화덕으로부터 끌어내셨다.

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백성들에게 같은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세상의 권세를 깨부수신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안달하지도 세상의 협박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독립시키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의 정죄하는 힘과 지배하는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왕죄를 차지하고 있는 사탄으로부터,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허탄한 욕망으로부터,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공허한 대화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도 이 복된 사역에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애정을 세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천상의 것들로 향하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 권능의 역사를 통해 그들을 주변의 비도덕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의 기준을 따르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성숙해지면, 그는 기준을 깨닫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는 이 험악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바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한때 그를 매혹시켰던 것들에 대해 험오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복되신 주님이 너무나 비참하게 수모를 당하신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고대한다.

 

4.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걸림돌이 행인에게, 몸무게가 육상선수에게, 올가미가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문제가 되듯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삶의 여정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된다. 그 사랑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든, 그 속으로 깊이 꼬여 들이든, 혹은 억지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던 간에 말이다”(나다나엘 하디, 1660)

우리는 마음이 이러한 부패로부터 깨끗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우리가 시간과 감각에 속한 것들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 이르지 못한다. 마치 둥근 물체 위에서 물이 미끄러지듯이, 하늘의 진리 역시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미끄러져 내린다.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렸다. 비록 많은 곳에서 그분의 이름이 불리기는 하나, 세상은 사실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상적인 것들이 의도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목표와 추구는 댜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기를 만족케 하는 것이 종속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동안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고, 세속적인 일들에 참여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지라도, 그들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보화와 몫은 다를 곳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타락한 사람들의 모든 본능에 호소한다. 세상에는 그들을 유혹하는 온갖 것들로 넘쳐난다. 그것들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눈길은 그것들을 향한 욕망과 사랑을 부추기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k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 놓는다. 세상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아무리 매력적이고 호소력이 있는 유혹거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기쁨과 추구 오직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증진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막 8:36, 눅 9:25).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나타나면 아주 쉽게 이전 것을 집어던지듯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심령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자 함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5. 세상과 구별된 길을 걷게 된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이런 구절은 우리 모두룰 철저히 파고들어 우리를 전율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께서 정죄하신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실수하지 말기를 바란다. 성경은 권고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구역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민 23:9). 거듭난 사람은 그 성품과 행실과 소원과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고, 다른 영의 인도를 받고, 다른 지배자의 통치를 받고, 다른 행선지로 여행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멸시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특징을 잘 드러내도록 하자.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때문에(롬 12:2)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기이히 여기게 되기를...(슥 3:8).

 

6.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세상에 겉모습을 보존하고 그 모습을 그럴듯하고 훌륭한 상태로 유지하기는 얼마나 힘이 드는가! 세상의 관습과 예의, 호의와 관용 등은 세상에 점잖은 분위기를 주기 위해 고안된 장치들이다. 세상의 이면에서 들끓고 있는 타락상을 그럴듯하게 얼버무리기 위해서는 교회와 성당,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도 필요하다. 세상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추가되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한 번도 메어본 적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읊조려진다. 그들에 대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그렇다면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성경의 대답은 분명하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좋할 때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당연히,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구제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비로 앞 구절이 해답을 제공해 준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어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분을 죽음에까지 내몰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l하여 가장 열심을 내는체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적인 세상’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해보자,. 그러면 그들의 가장 격렬하고 가장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원수는 스스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들어날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리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종교적인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라 때 그것은 당신이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자 건강한 표시다. 그러나 당신이 교회나 회중들 사아에서 좋은 지위를 갖고 있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찬양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7. 세상을 초월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세상의 관행이나 유행을 초월해야 한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그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관행이나 유행의 노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엡 4:13).

둘째, 세상의 염려와 슬픔을 초월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앓이라”(히 10:34).

셋째, 세상의 유혹을 초월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화려한 빛과 현란함은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매력적이지 않다.

넷째, 세상의 견해와 인정은 초월해야 한다. 당신은 세상을 초월하고 그것에 맞서는 것을 배워 본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의 온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맞추어져 있다면, 당신은 불경건한 이들의 비난에 전혀 마을 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장에서 다룬 내용으로 자신을 헤아려 보기를 참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라.

첫째, 여가 시간에 당신의 마을을 사로잡는 대상은 무엇인가? 당신의 생각이 가장 많이 머무는 대상은 무엇인가?

둘째, 당신이 선택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평일 저녁이나 주일 저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경절할 때,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셋째, 당신은 어떤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가? 세상적인 것을 상실했을 때인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지 못할 때인가? 당신은 어떤 일에 더욱 크게 애통(혹은 분통)하는가? 당신의 계획이 망쳐졌을 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냉랭해졌을 때인가?

넷째, 당신이 즐겨하는 대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날의 뉴스에 매달리는가, 아니면 모두가 깊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가?

다섯째, 당신은 선한 의도를 실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것들이 단지 공허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적어지고 있는가? 말씀이 꿀보다도 더 달콤한가, 아니면 말씀의 맛을 잃어버렸는가?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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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2장8절 주일성수와 십일조



"안식일은 사람을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주일- 제일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구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켰던
일곱번째의 날인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켰느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주일을 지키는 것이
교회의 결정이냐 아니면 신적인 결정이냐"하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할 수 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마 12:8) 예수님이
일곱번째 날을 첫번째날로 변경하셔서
우리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를 그리스도인의 안식일(Christian Sabbath)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한복음 20:19을 보자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 계속해서 같은 장 26절을 살펴보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절에 나온 여드레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준으로 말하는것으로서
이 두 구절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날을 정하여 제자들에게 오셨고,
오셔서 그들 가운데 하신 일에
어떤 모범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활과 승천 사이에 주중의 첫번째 날이
중요한 날로 지켜진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2:1을 보면,
"오순절(추수감사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오순절 날은 주중의 첫번째 날이었는데,
사도와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 또한 이미 사도들과 제자들이
주중의 첫번째 날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 함께 모여
지키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주일로 변경한 사실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0:7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식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마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이 구절은
드로아 교회가 공적 모임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 모임은 은밀한 모임이 아니라
일반적이며 누구에게나 개방된 교회 모임이었다.

이 모임이 열렸던 것 또한 주중의 첫째날이었다.

그리고 같은 본문 11절을 보면,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 하고 떠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임의 마지막에 주의 성찬이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행2:42과 비교)

더불어 이 모임에서는
설교와 기도가 함께 지켜졌다.

계속해서 "주중의 첫째 날",
그리고 "주의 날"이란 표현을 쓰게 되는 이유는
사도들이 거룩한 날로
이 날 외에는 어떤 다른 날도
주중에 지키지 않았으며,
안식일에 행하던 예배와 봉사들을
주중의 첫째 날 외에는
다른 어느 날에 행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6:1, 2에서
주중의 첫째 날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키는
중요한 증거들을 확인할 수 있다.

"성도들을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주일'에
연보하였다는 것이다.

주일에 연보하는 것을
고린도 교회에만 언급했던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와(고전 16:1)
그 밖의 교회에도 지시하였다.(고후 8:13,14)

이러한구제의 의무들이
안식일에 행해지는 것이 합당한 일임을
예수님이 이미 지적하신 바 있다
(마 12:7 눅: 13:15, 16, 14:5).

그리고 이 의무들은,
"너희가 모일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란
고린도전서14:26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거룩한 회중이 모여서
기도와 설교를 듣고
성례를 행한 후에 행해졌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중의 첫째 날을
거룩한 날로 지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적용을
어느 특정 교회가 아니라
전체 교회에 적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즉, 이 지시는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로부터 받아 한 것이다.(고전11:13).

따라서 주일의 제정은 신적인 것이요
인간이나 교회의 편리함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1:10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기록한다.

"주의날"(Lors`s Day)이라고 분명히 언급된 이날은
주중의 첫째날을 말하는 것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우리 주께서
거룩한 날로 따로 구별하신 것을 의미한다.

주의 성찬과 같이
분명히 주의 타이틀을 그 날에 붙였다.

따라서 이 날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구별된 것으로
거룩한 것이다.(히 2:5)

주목할 것은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이
이날을 언급할 때
이미 그가 알고 있는 날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제정하신 이래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계속 이 날을 지켜온 것을 의미한다.

분명히 이날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그 부활을 통하여 유효해진 구원에 대해 감사했다.

이처럼 주중의 첫번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공적 사역을 행하였다.

이 날 회중 가운데 말씀을 설교하고 (행2:1,4)
성례를 행하며(행2:38,41,42)
통회하는 죄인들의 죄를 풀어주면서
(행2:38, 비교 요 20:22,23)

 

출처:  http://cafe983.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pdLC&fldid=HoYr&datanum=211&contentval=&docid=pdLC|HoYr|211|20090827071740&q=%C7%CE%C5%A9%20%BD%CA%C0%CF%C1%B6&search=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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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강해 1 (첫째 -용서의 말씀) 아더핑크


십자가 위에서 하신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 
 
첫째  용서의 말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인간은 그 최악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사람 가운데 거하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죄로 어두워진 눈들은 주님에게서 그가 원하신바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셨을 때 사관에는 주님을 모실 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서 받으실 대접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시하여 주었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시자 곧 헤롯 임금은 어린 주님을 찾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백성이 야기 시킨 적대감을 말해 주며 또한 주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십자가를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거듭 거듭 주님의 원수들은 주님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드디어 그들은 그들의 사악한 욕망을 채우게 되는가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워 주셨습니다. 몇 차례 거짓된 심문이 있었고, 심문자들은 주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여 낼 수가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심문자 빌라도는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끈질기게 고함치며 위협하는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졌습니다. 보통의 죽음으로는 앙심을 품은 주님의 원수들 마음에 만족을 채워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극도의 고통과 수치스런 죽음이 결정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준비되고 그 위에 구주께서 못 박히셨습니다. 이윽고 주님의 십자가는 공중으로 곧게 세워졌습니다. 주님은 말없이 거기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그런데 순간 주님의 창백해진 입술이 움직이려는 듯이 보입니다. - 그가 동정을 구하시려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기도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십자가 위에서 하신 우리 주님의 일곱 말씀 중 첫 번째의 말씀은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교훈적인 일입니까!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로 막이 올랐습니다(눅 3:21).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공생애가 다시금 기도로 막이 내리는 것을 봅니다. 확실히 주님은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두 손은 더 이상 병자들을 위하여 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의 두 발은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도록 주님을 모시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두 발이 저 잔인한 나무에 단단히 못 박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이 사도들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기도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교훈이 되고 있습니까!
어쩌면 이 글이 나이 많고 병들어서 더 이상 주님의 포도원에서 활발히 일할 수 없게 된 어떤 이들에게 읽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난 날 선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나 전도지를 나누어 주던 전도인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늙어서 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당신은 여기 땅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기도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며칠 더 당신을 이 땅 위에 남겨 두시는지 누가 압니까? 어쩌면 당신이 지난 날 봉사했던 모든 일 보다도 더 많은 일을 기도를 통하여 이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귀한 기도의 사역을 비웃도록 시험을 당하면 당신의 구주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최후 순간에서 까지도 기도하셨습니다.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완전한 모범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기도가 미치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진대 우리는 이제 분명히 죄인 괴수를 위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앙 동지여, 결코 희망을 잃지 맙시다. 곁길로 나아가는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시간 낭비로 생각됩니까? 날이 갈수록 그 자녀의 장래가 어두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 아이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마도 당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기도해 오던 사람이 그 시대의 사탄숭배 의식 가운데 하나에 빠져들었거나 아니면 공공연하고 뻔뻔스러운 불신앙자, 곧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공공연한 원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당신의 기도에 미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 기도에 관하여 또 하나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기도의 효력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하여 하신 이 십자가 위에서의 중보기도는 분명하고 확실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오순절날 3천의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실에서 확실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줄 아노라”고 말한 사도행전 3:17에 근거하여 저자는 이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라는 말이 우리 주님의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는 말씀과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베드로가 행한 한 차례의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건에 대한 하나님편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뛰어난 웅변술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구주의 기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신앙 동지여,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오래 전에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요한복음 17:20을 찾아보십시오. 다시 한 번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완전하신 모범을 본받아 행하여 유익을 얻도록 합시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합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도 역시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도의 효력을 목격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본문으로 직접 들어가 봅시다. 곧,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1. 여기서 우리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중의 날에 일어나야 될 일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 주님의 수난 받으실 일을 그 수반될 모든 형편과 함께 얼마나 자세하고 완벽하게 미리 보여주셨습니까! 여러 일들 가운데 구주께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리라”(사 53:12)는 사실이 예언되어 왔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현재 하나님의 우편에서 행하고 계시는 사역에 관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가 자기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지금 하고 계시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이사야 53:12은 그가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행하실 자비하신 행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범죄자들을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가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는 말씀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리라는 것은 이사야 53장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예언의 항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에게 구주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보여주는, 적어도 열 가지의 항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항목들은 주께서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될 것이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가 될 것이고, 맞으며 찔리고 상할 것이며, 잠잠히 저항하지 않고 도수장으로 끌려가실 것이고, 털 깎는 자 앞에서 벙어리가 되실 것이며, 사람의 손에서 곤욕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맞으실 것이고,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실 것이며, 그의 무덤이 부자와 함께 될 것이고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실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하는 예언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신 주님의 기도에서 그 성취를 본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2. 여기서 우리는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전 어느 경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이와 같은 요청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아버지께 빈적이 없으셨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이 친히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그는 말씀하시기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마 9:2).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눈물로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은 죄인인 한 여인에게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 자신이 친히 직접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대신에 아버지께 그들의 죄사하여 주시기를 구하셔야만 한단 말입니까?
죄 사하여 주는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특권입니다. 어떤 유대 서기관들이 의론하기를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한 것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죄를 위하여 드리는 바 희생제물로 삼으시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사람의 아들 곧 인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외치실 때 그는 십자가 위에 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그가 죄 사하여 주는 특권을 행사하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놀라운 정확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On earth: 땅 위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마 9:6)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 위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땅에서 들려 계신 것(요 12:32)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대속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계셨습니다. 의로우신 자가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의 대표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더 이상 그의 신적인 특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권위의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 앞에서 비는 자의 입장을 취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찬송을 받으실 주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시는 기도를 대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백성과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더 이상 그는 죄 사하는 “권세” 혹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땅위”의 위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시는 중보자의 위치에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를 대신하여 드리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 여기서 우리는 죄와 그 죄의 결과로 비롯된 죄책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봅니다.
레위기 5:15,16에서 하나님은 부지중에 그릇 범과한 죄에 대해서도 반드시 속(贖)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곧, “누구든지 여호와의 생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우리는 또 민수기 15:22-25에서 “너희가 그릇 범과하여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한 이 모든 명령을 지키지 못하되 곧 여호와가 모세로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여호와가 명한 날부터 이후 너희의 대대에 지키지 못하여 회중이 부지중에 그릇 범화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하나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면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니 이는 그릇 범죄함이며 또 그 그릇 범죄함을 인하여 예물 곧 화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렸음이라”하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우리가 시편 19:12에서 발견하는 다윗의 기도, 곧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성경구절들에 연상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죄는 어디까지나 죄로 남아 있습니다. 부지중에 그릇 범한 죄라 할지라도 알고 지은 죄와 꼭 마찬가지로 속할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는 결코 그의 의의 표준을 우리의 무지의 수준으로 낮추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무지는 무죄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 무지에서 비롯된 죄는 모세의 때보다도 오늘날 우리의 때에는 더욱 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죄로 인하여 범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핑계를 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고 완전하게 그의 뜻을 나타내어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손에는 그의 온전하신 뜻이 담긴 성경이 들려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성경의 내용을 모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직 많은 것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로 있으니 그 잘못과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죄도 역시 여기 주님의 기도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표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것인지를 밝히 아십시오. 그것을 깨달았다면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 충족한 속죄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4.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진 것을 봅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소리 질렀던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독한 요구가 빌라도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저주 받은 나무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저희가 친히 저희 눈으로 그 잔혹한 범죄행위를 본 목격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주님께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그가 하신 말씀의 뜻은 저희가 자기들의 범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큰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 분이 영광의 주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강조점이 “알지 못함이니이다”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하는 것을”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그가 누구이신 것을 알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를 본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명백히 입증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치심은 유일무이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에게서 흠을 잡으려 하던 자들마저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 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하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생애는 얼마나 완전한 것이었습니까! 그는 사람 앞에서 이전에 이 땅위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러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선한 일만을 행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뜻을 따라 행하셨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셨고 그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희생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는 생애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늘의 증거를 받는 생애였습니다. 이는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무지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핑계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일은 오로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는 사실을 여지없이 입증하여 주었습니다.
이 끔찍한 비극이 아직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죄인들이여, 당신들이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일이 얼마나 큰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당신들을 당신들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수 있으니 그 유일하신 분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당신들의 행동에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죄책이 따르는지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람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죄악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가를 모른단 말입니까! 당신들은 당신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의 생사에 관한 문제를 냉담한 태도로 무관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하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를 멸시하고 배척하든지 아니면 당신의 영혼의 구주요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든지 간에 당신은 예수와 상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금 당신이 취하고 있는 행동이 당신에게는 하찮은 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해 동안 당신은 주의 영이 당신을 위해서 행하시는 역사를 저항해 온 것이 아닙니까? 수년 동안 당신은 극히 중요한 생각들을 묵살해 온 것이 아닙니까? 오랫동안 당신은 마음 문을 닫아 성령이 못 들어오시게 하고 귀를 막아 그의 호소하시는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눈을 감아 그의 뛰어나신 아름다움을 보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까? 아!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이 해온, 그리고 지금도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지금 끔찍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 이제라도 구주께 나아와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주여,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5.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봅니다.
산상설교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전파하신 바를 몸소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신 진리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 14: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자신이 가르쳐 전하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친히 실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모범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개인적으로 용서하여 주지 아니하신 사실에 주의 하십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5:44에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원수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를 오늘날 성경을 올바로, 그리고 철저히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서든지 우리가 항상 용서해야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에 강조하여 대답하거니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 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해야 할 것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범한 자가 먼저 “회개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또 그것을 뉘우치며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우리가 그를 용서하여 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죄를 범한 자가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런 경우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바에 대하여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가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그에게 악감을 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나 악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가 나에게 마치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것처럼 그를 대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범죄한 형제를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 될지는 몰라도 성경이 요구하는 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우리는 그를 경계해야 하고 그가 돌아와 회개할 때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까? 그렇지 아니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하였습니다. 주의해야 할 일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아니하여 내가 그를 용서하여 줄 수가 없고, 또 그를 마치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아니한 것처럼 대할 수도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나는 그에 대하여 마음속에 악감을 품지 않아야 할 것이며 또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범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범한 형제를 용서하여 줄 수 없을 경우라도 그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우리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6.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죄인들이며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한 이념들을 선택하고 아무리 좋은 결심을 갖고 또 아무리 훌륭한 법률을 채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모두가 헛된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성품을 가지려 노력하고 또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일을 행하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는 동안에는 헛수고에 그칠 뿐입니다. 만일 우리의 두 발이 모두 마비되어 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신발을 신는다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두 눈이 멀어 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안경을 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먼저 나의 죄를 용서받는 문제가 기본적이며 근본적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급선무인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나의 죄 가운데 있다면 아무리 친구들 사이에서 널리, 그리고 높이 존경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 있다면 아무리 사업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나의 지은 바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눈보다 희게 씻기워 졌는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 중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근거 혹은 기초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지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용서는 아량의 문제에 속하고 때로는 종종 그것이 애매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용서는 공평과 의를 희생하고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 판사는 양자택일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곧, 피고가 유죄로 판명이 되었을 때 판사는 그에게 법에 따라 형을 선고하든지, 아니면 법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를 사면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공의요 후자의 경우는 자비입니다. 판사가 법의 요구 곧 공의와 그 요구를 무시하는 사면 곧 자비로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제 3자로 하여금 그 피고를 대신하여 그 형을 치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희생하고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로서 그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결코 하나라도 희생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시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제 3자 곧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깨뜨린 그의 율법에 대한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킴으로써 이 일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신자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몸에 그들의 죄를 지고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피고인 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에 저촉되지 않고 사면을 받아 의롭게 될 수 있는 의의 기초를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의의 기초는 모든 믿는 자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3,39) 하였습니다. 구주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은 그 자신이 지금 흘리고 계신 대속의 피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드리시는 바 대속의 제들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근원을 바로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또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도 역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까? 당신의 죄과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져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골 1:14)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7. 여기서 우리는 구속적인 사랑의 승리를 봅니다.
우리의 본문 서두의 “이에”라는 말에 자세히 주의하여 보십시오. 바로 앞선 구절을 보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곧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에” - 그 때는 인간이 그의 죄악의 일을 저지르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 그 때는 인간의 사악함이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 이때는 저들이 그 사악한 손으로 감히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저들을 향하여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실 만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의로우신 진노의 번개를 명하여 저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실 만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땅으로 그 입을 벌리게 하여 저들을 산채로 삼키도록 하실 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고 계셨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계셨으며 멸시와 배척과 미움을 받으셨으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이 사랑이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힘의 용사 삼손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그 몸의 마지막 힘을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의 죽음을 선사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완전하신 구주께서는 그 사랑의 위대한 힘을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보여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비할 데 없는 은혜였습니다! “비할 데 없다!”는 표현은 옳은 표현입니다. 이는 스데반 집사마저도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완전히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7장에 돌아가 보면 스데반 집사가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그의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59:60).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는 이와 반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의 원수들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주님은 뛰어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적용과 권면의 말로 결론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이 장을 읽어 온 독자여, 당신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당신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반드시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깊이 생각하기를 진지한 심정으로 권유합니다.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저희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독자여, 지금 이 시간 당신의 경우는 저들의 경우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지금 마땅히 당신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하고 당신의 생명의 주님이신 그에게 금 면류관을 드려 왕으로 모셔야 하며 이후로 그만을 기쁘게 하여 드리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정신을 차리십시오. 당신의 위험은 더 큰 것입니다. 당신이 그에게서 고의적으로 돌아서면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에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서 돌아서고 마는 결과가 됩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하였습니다.
이제는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의 사죄의 완전성에 관하여 한마디 덧붙일 것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점에 확고한 지식을 갖지 못하여 혼동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 지었던 모든 죄들이 어떻게 사하여졌는가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중생한 이후로 지은 죄들에 관하여는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용서가 취소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피는 과거의 죄에만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현재와 미래의 죄에 관해서는 저들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여 주시고 또 천국에 가는 일이 내 힘과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일, 혹은 나의 순종과 나의 신실성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과연 나에게 동요가 없이 안정된 평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덮고도 남음이 있는 용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료 신자여,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을 그 몸에 지고 저 저주받은 나무 위에 달리지 아니하셨던가요? 그가 죽으신 것은 당신의 모든 미래의 죄까지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과거에 지은 죄들만 아니라 당신의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를 받은 백성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 하셨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다시 죄가 전가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고로 나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 위에서 100년을 더 산다 해도 다시는 죄가 나의 구원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을 지우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처지에서 영원히 벗어났습니다. 성령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 여기서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들”이 사하여 졌는데 어찌 정죄함이 있을 것입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것이며 누가 능히 정죄할 것입니까(롬 8:33,34)? 주 안에 있는 독자여, 우리의 모든 죄 사함받은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저자와 하나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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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워킹톤 핑크의 생애 (1886~1952)

 

 

 

아더 핑크는 1886년 영국 노팅험시의 침례교 가정에서 출생했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청소년 사업가’가 되어서 나름대로 성공했다. 하지만, 부친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으면서도 회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한때는 영매에 되기도 했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으니,  22세때, 자신의 침실에서 회심을 경험한 것이었다.

 

찰스 스펄젼이 그랬던 것처럼, 회심과 함께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확신한 그는 설교자가 되었고 1910년에 도미하여,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미국 동부의 여러 주들과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설교와 성경연구를 병행하는 ‘순회설교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1922년에 자신의 사설 월간지 ‘성경연구’를 창간하여 자신의 성경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초기 15년 동안은 존 다비나 C.H. 메킨토시 등의 ‘세대주의자들'의 책들을 주로 탐독하였는데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찰스 스펄젼 등 청교도들의 글들을 깊이 탐독하면서 청교도 정통신학위에 확고히 섰고 나중에는 ‘세대주의 신학’은 오류로 가득차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925년부터 3년간의 호주 시드니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영국에서 설교자로 일하기를 바랬으나 자리를 얻지 못하자 미국의 자신의 옛 회중에게로 가서 사역하려했는데 이제 청교도적 신학위에 확고히 서 선포되는 그의 설교는 배척당하게 되었다.


1929년부터 사실상 그의 ‘강단설교사역’은 끝났는데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빈번한 그의 주거지 변경은 그가 성경연구와 아울러 설교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34년에 그는 영국으로 귀국하여 남부의 호우브에 정착하여 궁핍한 삶 가운데서도 ‘성경연구’와 ‘성경연구지’발행에 몰두하였다.


1930년대 중반 경 그는 이미 청교도서적을 1백만 페이지 이상 읽은 상태였고, ‘성경연구지’에 실렸던 글들을 포함해 여러 권의 단행본들이 출판되었다. 월간 ‘성경연구’에서 그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성경연구지’는 신청하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배포되었고,독자들은 대체로 1,000명 정도였다. 그의 독자들이 그에게 서신으로 ‘신앙상담’을 신청하면, 그는 친절하게 답변해주었는데 이런 이유로 그와 그의 독자들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목자와 양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독자들과 주고 받은 서신이 2만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것들 중 일부만이 ‘핑크서간문’이라는 책으로 오늘날 남아있다.



1939년 9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아더 핑크는 안전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사역을 진행하기 위해서 영국 북서부의 ‘헤브리디즈 열도’ 중 가장 큰 섬인 루이스 섬의 스톤웨이로 이주한다. 루이스 섬은 제주도 정도의 면적을 가진 큰 섬인데, 일찍 산업혁명을 맞아 도시화가 많이 이뤄진 20세기의 영국의 상황에서는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황량한 곳으로 오늘날도 섬 전체의 인구는 2-3만명 불과하다. 그런 오지였지만, 아더 핑크는 그곳에서 집세를 내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 세상에서의 부와 명성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말씀연구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한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삶이었다.


루이스 섬에서 12년간,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묵묵히 감당한 아더 핑크는1952년 7월 15일, 존 칼빈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하고 임종하여  스톤웨이 공동묘지에 묘비없이 묻혔다. 오늘날 핑크의 묘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묘비는 물론 아무것도 없는 맨 잔디밭위에 카메라를 대고 사진을 찍어간다고 묘지관리인은 말한다.


핑크는 자신의 글이라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또한, 자신의 영광을 전혀 추구하지 않은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의 성경연구지에 자신의 사진 한 장 싫지 않아서, 사진을 보내달라는 독자에게 여권에 붙이기 위해 찍었던 사진을 보낼 정도였다.


1916년에는 베라와 혼인하여 단란한 가정도 이루었다.






<저서>


강해서 : 출애굽기강해 상.하, 여호수아의 생애, 다윗의 생애 상.중.하, 엘리야의 생애, 엘리사의 생애, 산상수훈 강해 상.하, 요한복음 강해1-4,가상칠언 강해, 히브리서 강해 1-3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영적인 연합과 친교, 영적인 실천, 영적인 성장, 영적인 기도)

성령론, 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언약, 바울의 기도연구, 팔복과 주님의 기도, 성경과 영감, 인간의 좌절과 하나님의 위로, 구원의 교리, 십계명의 올바른 이해, 서간문 등




 

 

 

아더 핑크가 마지막 12년(1940-52)을 세를 주고 살았던 집(루이스 섬, 스톤웨이)







* 출처 :

http://thevine21.hompee.com/hompee/sub_board_read.asp?User=&SiteID=63875&SiteName=&TopMenuID=4&MenuID=111744&SkinID=AGR&Field=&Keyword=&Page=1&No=1110273

생명나무쉼터/한아름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기 위해 주목할 부분(성경과 죄)

 

아더 핑크

 

1. 말씀이 우리를 죄 있는 자라고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2.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슬퍼하게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3.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으로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4. 성경 말씀이 읽는 이로 하여금 죄를 심히 미워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5.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죄를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6.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7. 말씀이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고 공부했지만 사람들이 영적인 유익을 별로 얻지 못했다는 데에는 어떤 중대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보다 더한 경우를 볼 수도 있다. 즉 성경 공부가 축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는 예를 종종 접하게 될 때 우리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같은 말이 심한 경우를 보여주는 말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같은 사례의 심각성 그 자체보다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사는 남용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또한 오용될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이 말씀 공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 열매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도 과학을 연구하듯이 큰 열정과 기쁨을 갖고 성경 연구에 착수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만큼 그의 자만심도 커지게 마련이다.

흥미 있는 실험에 열중하는 화학자처럼 성경을 지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자만하게 된다. 그렇지만 후자의 기쁨이란 전자의 기쁨만큼이나 영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화학자가 성공하면 자만심이 커져서 자기보다 무지한 사람들을 멸시하기 쉽듯이, 성경 속의 숫자나 예표나 예언이나 그 밖의 다른 주제들을 연구한 사람들도 이 같은 경우에 속할 때가 많다.

 

성경을 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문학적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성경을 모르면 교육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의 일반적 내용을 습득한다는 것이 존경할 만한 일이며 인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유명한 글을 읽어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듯이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들만의 특정한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읽으며, 또 자기 교단의 특성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외우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자기네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들만을 열심히 찾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들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공박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일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영적으로 세움을 받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혼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참된 유익이란 무엇인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명확한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라"

이 내용 중에서 혹시라도 빠진 것이 있는지 살펴보라! 성경은 우리의 지적 만족이나 세속적 사색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 잡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다. 이제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명확히 찾아보기 위해 다른 구절들도 인용하도록 하겠다.

 

1. 말씀이 우리를 죄 있는 자라고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첫 번째 기능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우리의 타락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더러움을 밝히 드러내며 우리의 사악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의 도덕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으며 인간관계가 나무랄 데 없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양심 속에 말씀을 적용하사 죄로 가려진 눈을 뜨게 하시고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및 태도를 바라보게 하실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은 대언자 이사야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울부짖게 된다. 참으로 구원받은 영혼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도우심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필요하나니"(눅 5:31).

참으로 성령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말씀을 적용하실 때에야 비로소 모든 사람은 자신이 병들었으며, 병들어 죽게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본질 속에 죄가 이루어 놓은 황폐한 자취들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확신하는 일은 회심한 이후에 즉시 일어나는 초기 경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내 마음속에 축복을 내리실 때마다 나는 그분께서 내 앞에 세우신 기준 즉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 1:15) 라는 기준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경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비참하게 실패한 것을 읽을 때에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나도 저들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가?

또 그리스도의 복되고 완전한 삶에 대해 읽을 때에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나는 그분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는가?

 

2.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슬퍼하게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돌밭과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나니."(마 13:20,21) 한편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 자들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행 2:37)고 기록한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그대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자의 수사학적 능력이나 지적 기교를 보여주는 화려한 설교나 '세대주의적 진리' 등을 담은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대개 이런 것들은 양심을 꿰뚫는 침투력이 없다. 사람들은 이 같은 설교에 수긍은 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든지 혹은 가깝게 접근하려 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지적 탁월함"에 대한 명성을 얻으려고 힘쓰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훌륭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비참하게 실패했었음을 보여주며 신자들의 성격과 행동의 지침을 삼게 해야 한다.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설교자를 멸시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슬피 울며 부르짖게 해주는 그 말씀에 고마움을 표할 것이다. 성경을 홀로 읽을 때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씀을 적용시켜 주실 때에 우리는 자신의 부패함을 바라보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19절에는 "내가 교훈을 받은 뒤에 내 볼기를 쳤나이다. 내가 부끄럽고 참으로 당황하기까지 하였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 같은 체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성경 공부를 통해 상한 마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어 본 적이 있는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스스로의 죄를 깨달아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 본 적이 있는가? 유월절 어린양은"쓴 나물"(출 12:8)과 함께 먹어야만 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도 성령님께서는 그것이 우리 입에 달게 되기 전에 쓰게 만드신다. 계시록 10장 9절의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말하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말하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를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 것이라, 하거늘" 말씀에서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라. 이것이 바로 영원토록 적용되는 실증적 순서이다. 위로 받기 전에 먼저 애통함이 있어야 하며(마 5:4) 높임을 받기 전에 먼저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벧전 5:5).

 

3.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으로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성경은 "책망"(딤후 3:16)하기에 유익하므로 정직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함이요"(요 3:20) 라고 말하고 있다.

거듭난 마음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부르짖게 된다. 말씀으로(시편 119편) 새롭게 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게 된다.

"자기의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다 긍휼히 여김을 얻으리라"(잠 28:13).

우리가 마음 한가운데에 죄를 숨기고 있으면 결코 어떤 영적 성장이나 열매(시 1:3)를 기대할 수 없으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맛볼 수가 있다. 우리의 양심이 고백하지 않은 죄로 눌려 있으면 평안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 마음 한가운데 진정한 휴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 온전히 모든 죄를 털어놓을 때에 비로소 안식이 찾아온다.

다윗이 체험한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들이 쇠하였나이다.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오니,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시 32:3,4).

당신은 상징적이면서도 강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가? 혹은 당신 자신의 신앙의 역사를 통해 이 말씀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체험 없이는 도저히 만족스런 해석을 할 수 없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말씀은 참으로 매우 복된 말씀이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범법한 것들을 주께 고백하리이다, 하고 주께 내 죄를 시인하고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4. 성경 말씀이 읽는 이로 하여금 죄를 심히 미워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시 97:10).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악을 피하고 그 속에 계속 머물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악을 대항하고 마음속으로 그것에 분개해야 한다."(C. H. 스펄젼).

회심했다고 고백한 후에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험은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이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이 마음에 세워지면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을 미워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미워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죄악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하게 된다.

다윗의 경험을 보라. "주의 교훈들을 통해 내가 깨달음을 얻으므로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시 119:104).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거짓된 길을 "단지 삼가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하며", "일부 혹은 몇 가지"가 아니라 "모든 거짓된 길"이며 단순히 "모든 악"이 아니라 "모든 거짓된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것에 관한 주의 교훈들을 바르게 여기며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시 119:128).

그러나 사악한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 말씀을 하신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시 50:17).

잠언 8장 13절을 보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명기 17장 18-19절을 보라. "그가 자신의 왕국의 왕좌에 앉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있는 것에서 이 율법을 책으로 한 권 필사하여,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읽어서 주 자기의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법규를 지켜 행할 것이니라."

다음의 말은 이에 대해 아주 바르게 설명해 주고 있다.

"죄를 미워하기 전까지는 결코 죄를 죽일 수 없다. 마치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지르며 그분을 증오했던 것처럼 참으로 그렇게 죄를 미워하지 않고는 결코 울부짖으며 죄를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E. 레이너 1635).

 

5.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죄를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더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바른 관계에 있다면 우리의 생활 방식도 그 말씀에 더욱 부합될 것이다. 이를테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요삼 4절)이 있게 된다. 고린도후서 6장 끝 부분을 보면 자신들을 불신자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주신 귀한 약속 몇 가지가 있다. 성령님께서 이것들을 어떻게 적용하시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분께서는 "이 약속을 가진 자들이여, 그러므로 위로를 받고 안심하라" 고 하시지 않고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 7:1) 고 말씀하신다.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요 15:3).

이 말씀에는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만 하는 중요한 규칙이 들어 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여 우리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고 있는가?

구약의 시편 기자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의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하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신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 옳은 말씀이다. 말씀을 단순히 읽고 믿고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우리의 "행실"에 적용시킴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 "이것들을 피하라-즉 돈을 사랑하지 말라“(딤전 6:11),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 2:22).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버리고 떠나기 위해서는 위의 사항들을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죄는 단지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서 "버려야"(잠 28:13)하는 것이다.

 

6.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성경은 우리의 본성에 따른 죄를 나타내주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롬 3:23) 여러 가지 면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을 노엽게 만드는 길에서 떠나는 방법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숨겼나이다"(시119:11).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실천 사항이다.

"청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을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에 쌓아 두라"(욥 22:2).

이 말씀은 우리가 특별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귀중히 여길 필요가 있는 명령이며 권고며 훈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기도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땅에서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으려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더욱 "풍성히"(골 3:16) 거하면 거할수록 죄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활동할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성경이 진리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을 가지고 애착심을 가지고 받아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배교하는 이유가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기"(살후 2:10)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입술이나 마음속에만 두고 이야기 거리나 사색 거리로 삼는다면 곧 그 말씀이 사라지고 만다. 땅 표면에 놓인 씨앗은 공중의 새들이 물어가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땅속 깊이 묻어야 한다. 말씀을 귀로 듣고 생각 속으로 넣고 그 뒤 마음속에 깊숙이 새기고 다시 새겨 마음 깊숙이 잠기게 해야 한다. 말씀을 사랑으로 받는다는 것은 말씀이 마음속에서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우리의 정욕보다 더 소중히 여길 때 말씀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T. 맨튼)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 37:31).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세상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사탄의 유혹에서 건져 주며 죄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양심을 움직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들 때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리이까?"(창 39:9) 라고 말하였다.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있어 그의 정욕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다가오는 때를 위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겠느냐?"(사 42:23).

그렇다. 앞으로 다가올 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저장해 둠으로써 미래를 예견하고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7. 말씀이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율법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요일 3:4).

하나님께서는 "너는.....을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죄는 "나는......을 하지 않겠다" 말하며, 하나님께서 "너는.....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죄는 "나는 .....을 하겠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죄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며 자기 갈 길로 가고자 하는 결심하는 것이다(사 53:6).

또한 죄는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이며 하나님 앞에서 붉은 기를 드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면 법에 굴복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이처럼 죄와 반대되는 길로 걷기 위해서는 순종의 길로 걸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주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깨닫게 된다. 또한 성경은 책망과 바르게 함을 위해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의로 교육하기에도 유익한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사항이 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사고를 형성하고 있으며 내 마음을 지배하며 내 길과 행실을 통제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 방법을 보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요 14:15).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나로 하여금 주의 명령들의 길로 들어가 걷게 하소서. 내가 그것을 기뻐함이니이다"(시 119:35). 이것이 바로 다윗의 기도였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는 길을 보여 줄 빛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두운 고로 지침이 필요하고 우리의 마음은 연약한 고로 은혜의 역사가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맨튼).

진리를 받아들여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주의 명령의 길"임을 유의하라. 이 길은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명백히 제시된 길이며, 누구나 다 아는 "큰 길"이 아니라 개인만이 아는 "좁은 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위에서 열거한 7 가지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을 내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성경 공부가 우리 자신을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혹시라도 지식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지는 않았는가?

성경공부가 우리 자신을 친구보다 더 높은 존재로 만들어 사람의 존경을 받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좀더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성경 공부가 자신의 죄성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유발시켰는가? 아니면 자신에 대한 깊은 만족감을 주었는가?

우리가 교제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나도 저 정도의 성경 지식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탄식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나의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주셨던 믿음과 은혜와 거룩함을 주소서!’ 하고 주님께 기도하도록 만들었는가?

"이것들을 묵상하고 네 자신을 이것들에 온전히 드려 너의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아더 핑크의 "성경은 언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가 - Profiting from the Word" 중에서

  개혁주의마을


 

아더 핑크의 회심과 회심 후의 초기의 영적인 삶 (이얀 머레이) 

 

 

아더 핑크가 강신술에 발을 깊이 들여놓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입문 과정에서 중도 하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불과 20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주의 가장 두드러진 연설자 중의 하나였다. 
사실 그는 자신을 강신술계의 주도적 역할을 맡은 떠오르는 별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부모님이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 아들이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이층방으로 올라갈 때마다 성경 구절 하나씩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대개 그런 모습은 핑크가 급히 자기 침실로 들어가려고 아버지를 지나칠 때 핑크의 귀에 그냥 성경말씀이 들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평소 때와 다름없이 핑크는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쳐 자신의 침실로 올라가려던 중 늘 그렇듯이 그의 부친이 일러주는 성경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 말씀은 잠언 14:12 말씀인,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었다. 
그는 바로 그 주간의 모임에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이 말씀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급기야 연설 준비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머리를 식히고자 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그러나 그래도 이 성경 말씀은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일을,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길은..."의 말씀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급기야 무릎을 꿇어 거의 3일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하나님께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아래층에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그의 부모도 함께 기도하였다. 3일 후 핑크는 자신의 침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으며, 참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들이 나오자마자 아버지는 외쳤다.
"하나님께 찬양을! 내 아들이 구원받았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직접적인 역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핑크가 그 주간에 해야 할 연설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신술 사교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유일성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고, 사람들은 핑크가 미치기 시작했다고 요동하였다. 급기야 갑작스런 휴식시간을 갖게 되었고, 핑크는 그 후로 강신술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강신술 모임의 사람들도 그를 멀리 하였다.

 

핑크는 훗날 이렇게 고백하였다. 
"영들과 교류한 메시지는 상당수가 진짜이다. 그러나 그 영들은 실제로 죽은 자들의 영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가장한 악한 영들이다. 또 나는 강신술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왔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핑크는 언제나 자신의 회심 체험을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삼아서 "회심의 체험은 반드시 이런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심과 동시에 목회로의 소명을 받았다. 이런 강신술로 인한 위기 후, 2년 동안 핑크는 직장을 계속 다녔다. 그러나 이제 그의 침대에는 늘 성경이 펼쳐져 있게 되었다.

 

매일 성경을 열장씩 읽었고, 열장씩 읽는 성경에 한 주간을 지내면서 ‘10분이나 10분 이상’ 그가 특별히 연구하려는 한 개의 특정 본문을 추가하였다. 
이에 덧붙여 그는 매일의 묵상을 위하여 책갈피 같은 종이에 특정 구절을 지니고 다니면서 휴식시간에는 하나님께 ‘이 말씀의 영적인 뜻을 알게 해주시고 이 말씀이 나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간구하면서 보려고 힘썼다.

 

이런 훈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면서 그는 훗날, ‘필자는 시내 전차에서 에베소서의 전체 내용을 한 번에 한 구절로 요약하였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직장을 쉬는 날이면, 새로운 기쁨으로 성경을 보는데 10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경 연구의 의도는 그의 일생이 복음 전하는 것에 있다는 확신과 맞물려 있었다.

 

그의 초기 생애 가운데 1934년 기록된 것을 짧게 요약하여 소개해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나는 1886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직장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주목할 만한 성공을 허락하셨다. 1908년은,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침실에서 구원하신 해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그분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셨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그는 그 해(1908년)를 1948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필자가 첫 번째 설교를 한지도 40년이 되었다. 그 때 처음 전한 본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였다.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700명이 넘었다. 우리가 공석에서 처음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 때는 아주 진땀을 흘렸었다. 특별하게는 노팅엄의 우리집에서 그러하였다.’ 

 

이언 머레이의 "아더 핑크의 생애", 회심과 회심 후 초기의 영적생활 중에서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 아더 핑크

 

 

일반적으로 말해 소위 “그리스도”이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다.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특수한 직임은 맡지 않았을지라도), 책임 연령에 이르면 전도자에게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강요받는 형태와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에서 대중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당당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도록‘ 권유받는다. 이러한 신자들은 버섯과 같아서 밤사이에 돋아 올라 잠시 동안 지탱하나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위 ’인격적인 사역‘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는다. 이는 마치 떠돌이 외판원들이 세일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수작과 유사하다.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방금 앞서 말했던 사실들로 경고 받은 자들이며, 종교적인 협잡꾼들에게 농락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협잡꾼들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영교함으로 ‘만사형통’하다고 농간부리는 데 속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들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 로마서 10: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라는 말씀을 단지 지적으로 승인하거나 받아들인다. 요한복은 2:23-24의 말씀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으나 저희가 바리새인을 인하여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칭찬듣기를 더 좋아함이라”.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문제가 된다. 자연인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사형통하게 나아갈 수가 있으며, 기뻐할 수가 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에게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자체가 영적인 활동이지 자연적인 활동은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죄와 허물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적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주님을 절감하는 영혼의 사역이며, 잃어 버린 바 된 죄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된 결과이며,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정의 발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자연인이 성자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는다(엡 2:10).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새로운 지각과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성품으로써 신령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써 교통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요 3:6)라고 말한 분과 동일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전가시킨 은혜의 원리이며, 그를 기쁘시도록 열매 맺게 하는 성향이다. 
중생은 어떤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고 제해버릴 수도 없다(전 3:14).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소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중생은 성직자의 마술적인 사역의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중생받는 자는 순전히 피동적이며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는다. 
성육신 하신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에 대해서 - 유전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그 후손들을 중생시켰기 때문이다. 
육정에 대해서 -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 이전에 인간의 자의지는 철저히 하나님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뜻에 대해서 - 설교자는 자신을 중생시키지 못할뿐더러 남도 중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권적인 역사로써만 가능하다.

또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그 결과는 명백함)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이것의 원인과 작용은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임)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마치 빛이 어둠과 구별되듯이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신자는 죽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
에 있게 된다 - 아더 핑크

신자는 죽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된다

강도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 23:42)
예수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
원에 있으리라(눅 23:43)

두 문장을 이처럼 대응시켜 놓고 볼 때, 우리는 정확한 강
조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강조된 말입니다. 강
도의 요청에 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응
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기대보다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예를 대하게 됩니다.


강도는 주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하여
주실 것을 구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바로 그 날
당장 구주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되리라는 보증을 하여 주셨
던 것입니다. 강도는 세상의 나라에서 생각하여 주실 것을
구하였으나 구주께서는 그에게 낙원에 함께 있게 하여 주
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강도는 단순히 “생각하여” 주실
것을 구하였으나 구주께서는 “그와 함께 있을 것”을 선언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고 기대
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응답은 육신이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존속한다
는 사실을 말하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우리에
게 죽음과 부활 사이에 끼어 있는 중간기 동안에 신자의 영
혼이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
의 약속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엄숙하나 확신을 주는 말씀,
곧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어서 그리스도 곁으로 간다는 기대에 스데반은 그의 순
교의 자리에서도 그처럼 기뻐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부
르짖어 구하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
였습니다(행 7:59). 이 기쁨에 찬 기대는 사도 바울의 마음
을 움직이게 하여 그로 하여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
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빌 1:23)고 말할 수 있
게 하였습니다.

 

죽음 저편에서 모든 신자들을 기다리고 이
Ts s 것은 무덤 속에서의 수면이나 무의식 상태가 아니라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바 축복의 생활인 것
입니다. 나는 분명히 모든 “신자”의 경우가 그러하다고 말
하였습니다. 불신자들의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는 대신에
누가복음 16장의 주의 가르침에서 분명하여 지는 바와 같
이 고통의 처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자여, 당신이 지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다면 당신의 영혼을 어느 곳으로 들
어가게 하시겠습니까?

사단은 하나님의 성도들의 시야를 어둡게 하여 이 마지막
순간의 소망을 바라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발악
을 해 왔던가요! 한편으로 사단은 신자들이 그들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끼어 있는 중간기 동안에 무의식 상태로 지낸
다고 가르치는 바 소위 영혼 수면설이라고 하는 어두운 교
리를 날조해 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천구과 지옥 사이
에 연옥이라고 하는 끔찍한 처소를 고안해서 신자들이 죽
으면 불을 통과해서 하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깨
끗케 해야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고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에게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이러한 교리들이 얼마나 터
무니 없는 망상인가를 철저히 드러내어 주고 있습니다.

 

저 회개한 강도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곧장 낙원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
는 그 순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
당한”(골 1:12)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2-14절에 말씀하시기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
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
셨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자
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은 오직 그의 흘리신 피에 근거한 것입니다.

가상칠언강해( 아더 W. 핑크 )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박사(doctor)”입니까? “형제”(brother)입니까?

 

 

 

“박사(doctor)”입니까? “형제”(brother)입니까?

: 아더 핑크/ 번역: 이승훈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필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때로 사용하시는 방법이 얼마나 기이한지요. 최근 필자의 경험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모 ‘대학’에서 와서 제게 D.D(Doctor of Divinity의 약자로 신학박사 학위수여자를 말함) 학위, 즉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자 하니 이를 수락해달라는 청을 하였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 필자는 그들로부터 약간의 말미를 얻어 기록된 말씀을 살펴보고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대했던 것 이상의 충분한 빛을 얻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단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한데 나같은 자가 그런 (육에 속한) 명예(honour) 타이틀을 수락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몹시 의구심이 들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필자가 분명히 깨닫게 된 사실은 그것이 인사치레라 할지라도 박사 칭호를 받는 것이 제게 온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친구분들이 그동안 저를 “핑크 박사(Dr. PINK)”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이 존경의 표시란 걸 잘 압니다만, 이제 그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더 이상 저를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를 허용하시는 분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결단코 아닙니다. 그분들이 서고 넘어지는 것은 오직 그들의 주인되신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런 결심을 하는데, 제게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성경 말씀을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부디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여러분에게도 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 구절은 엘리후(하나님의 대변자)가 욥의 거짓 위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청하건대, 내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게 하며 사람에게 아첨하는 칭호(flattering titles)를 붙이지 말게 할지니”(욥기 32 21 22절 상반절)

두 번째 구절은 마태복음 23 8절입니다.


“너희는 랍비(Rabbi)라 불리지 말라”(마태복음 23:8 상반절)

여기서 랍비는 정확히 ‘박사'(Doctor)를 뜻하는 말입니다.

세 번째 구절은 요한복음 5 4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서로 존귀(honour)를 받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존귀(honour)”를 구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주님의 종들 중 누구도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Paul, an apostle) (고후 1:1; 1:1; 1:1; 1:1; 딤전 1:1; 딤후 1:1)이란 표현을 썼지, “바울 사도” 혹은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이란 식의 호칭(title)을 사용한 적이 결코 단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친히 무명한 자가 되셨다”(made Himself of no reputation)고 빌립보서 2 7절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분의 종들이 이에 역행한다면 이것이 온당한 일이겠습니까?

여섯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1 29절에서 친히 우리에게 “온유하고 비천한”(meek and lowly) 자신을 본받으라 명하셨습니다.

일곱 번째는 유다서 16절이 배교(변절)의 특징 중 하나를 “이득을 위해 사람의 외모(겉모습)에 감탄하는”(having men's persons in admiration because of advantage) 것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우리가 받은 명령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히브리서 13:13 bearing His reproach) 진영밖에 계신 그리스도께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해 “멸시받고 거절당하신”*(despised and rejected) 그리스도를 대변하고 증거하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존귀(honour-영예)와 아첨(flatter)을 받는다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앞으로는 저를 "핑크 박사(Doctor pink)"가 아닌 "핑크 형제(brother pink)"로 불러주십시오
!!


출처 : 알이랑코리아 http://cafe.daum.net/ALILANG/ETND/102

원문출처 : http://www.pbcofdecaturalabama.org/AWPink/doc-bro.htm


아더 핑크

출생 : 1886 04 11

별세 : 1952 07 15

출생지 : 영국 노팅햄

성별 : 남자

1886년 영국 노팅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무디 성경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성경연구에 일생을 바치도록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던 말씀의 사람, 성경의 사람이었다. 순회 성경연구교사로 일했는데 특히 미국의 전역과 호주에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사후에 그의 문서 - 성경연구서 - 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로이드 존스, 캠벨 몰간과 함께 영국에 주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의 대사역자로 꼽히게 되었다. 그는 영국, 미국, 호주 등에서 그의 소명을 감당했고, 말년에 가까울 때쯤 해서는 영국으로 돌아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eriptures)란 월간지를 창간, 성경연구 열매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1952년 스톤웨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 / 아더 핑크

 

 

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 : 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자기를 드러내는 멋진 찬양, 유머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하게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 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행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절).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절).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뛰어 들어가 떨면서..."(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절).
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30절).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절).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되기" 때문입니다(롬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마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마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눅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마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사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히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눅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와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사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시대의 표적 - A.W. 핑크 -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 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멋진 찬양, 유모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 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 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히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행 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절).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절).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뛰어 들어가 떨면서..."(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절).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30절).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절).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밥티스트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롬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회생물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마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 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 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 자도 구원받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마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 - 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눅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마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사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 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사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히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눅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와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사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금(昨今)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에베소서 5:11이 하나님의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책망하라". 말씀의 빛을 대적하는 것은 모두 "어두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의무는 오늘날의 "복음주의" 괴물과 아무 관계도 갖지 않으며, 이들에 대한 모든 도덕적 재정적 지원을 보류하고,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며, 그들의 소책자를 배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우상을 버리지 않고도, 회개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는 자들은,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으며 하늘(천국)은 반드시 자기 공로에 의해서만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자들 만큼이나 진리에서 벗어났으며 위험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 아더 핑크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글쓴이 : 뿌리깊은 나무 날짜 : 2013-01-25

 

 

하나님은 종종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모든 죄악을 미워하신다.
그는 자신의 계명에 따르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나, 그에게 반역하시는 모든 것을 미워하신다.
그의 말씀은 이를 명백히 하고 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잠 3:32) 또 다시 이르기를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잠 15:26)그런고로, 하나님은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죄는 그의 미워하심을 받으며 따라서 그의 징벌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종종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또한 죄인은 하나님의 징벌을 대신한 구속자의 공로에 의해서만, 용서받는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은즉 사(赦)함이 없느니라”(히9:2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나1:2) 라고 하였다.
한 가지 죄로 신은 인류의 조상을 에덴에서 쫓아내셨고 한 가지 죄로 함의 아들 가나안은 오늘날까지 이르는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다.(창9:21)
한 가지 죄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한 가지 죄로 엘리사의 종은 문둥병에 걸렸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세상에서 끊어짐을 당했다.
 
중생치 못한 자는 신성을 믿지 못한다.
신의 속성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반쪽이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신의 자비가 모든 것의 우위에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고 책망하신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악한 생각을 따라 ‘신의 모양’을 그려낸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어리석음에 잠겨있다.
성경에 묘사된 신성(神性)과 속성은 그것이 명백하게 초인적인 근원임을 보여준다.
고대(古代)와 현대(現代)의 이교도들이 상상해낸 신성은 참 신에게 속하는 흠 없는 순결과 역행한다.
모든 죄악을 극도로 혐오하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은 결코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에게는 발견되어질 수 없다.
무한히 변치 않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타락한 마음과 적대감을 더 명백히 드러내는 것은 없다.!!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한 관념은 그들이 소위 일컫는 ‘범죄’에 국한되어 있다.
그보다 덜한 상태를 ‘결점’ 혹은 ‘실수’, ‘약점’등으로 완화시킨다.
심지어 죄가 완연한데도 변명과 죄의 경감이 행해진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대다수가 사랑하는 신은 어리석지는 않지만, 인정 많게 젊은이의 ‘경솔한 짓’을 눈감아 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말씀에 이르기를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시 5:5)하였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는 하나님이시로다!!”(시7:11) 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죄를 향한 신의 진노가 그들을 짓누를때, 그들은 이를 간다.
죄인은 자신이 영원히 고통받을 불못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신은 거룩하기 때문에 피조물의 행위의 기준에서 그를 받아들임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타락한 피조물이 거룩한 무한히 순결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일치하는 세상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한 세상을 창조해내는것이 더 빠를 것이다. 어두움이 어찌 빛과 함께 거할 수 있는가?
순결한 자가 어찌 ‘더러운 옷’(사64:6)을 기뻐할 수 있는가?
죄인이 만들어내는 최상의 것도 부정하다. 썩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 있지도 않은 것을 의롭다거나 거룩하다고 한다면, 신은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완전성을 모욕하는 셈이 된다.
신의 본성에 반대되는 조그마한 흠이라도 있다면,그것은 거룩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성호(聖號)를 찬양하라!
신의 거룩함이 요구하는 것을 신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에게 피하는 모든 죄인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엡 1:6)가 된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최고의 경배를 드려야 그에게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시89:7)
그러므로 “너희는 야훼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99:5).
그렇다.
그의 발등상’ 앞에서 가장 낮아진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로 다가갔을 때,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경외함으로 섬겨야 한다.(시2:11) 그가 이스라엘에게 요구하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영광을 얻으리라“”(레10:3)
 
우리의 마음이 형용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함을 인하여 경외함이 넘칠수록 우리는 보다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그와 같도록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능하거나 전지하라고 이르심이 아니라, “모든 행실”(벧전 1:15)에 거룩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신성” 중에서/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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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아더 핑크

 

일반적으로 말해 소위 “그리스도”이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다.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특수한 직임은 맡지 않았을지라도), 책임 연령에 이르면 전도자에게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강요받는 형태와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에서 대중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당당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도록‘ 권유받는다. 이러한 신자들은 버섯과 같아서 밤사이에 돋아 올라 잠시 동안 지탱하나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위 ’인격적인 사역‘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는다. 이는 마치 떠돌이 외판원들이 세일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수작과 유사하다.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방금 앞서 말했던 사실들로 경고 받은 자들이며, 종교적인 협잡꾼들에게 농락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협잡꾼들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영교함으로 ‘만사형통’하다고 농간부리는 데 속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들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 로마서 10: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라는 말씀을 단지 지적으로 승인하거나 받아들인다. 요한복은 2:23-24의 말씀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으나 저희가 바리새인을 인하여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칭찬듣기를 더 좋아함이라”.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문제가 된다. 자연인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사형통하게 나아갈 수가 있으며, 기뻐할 수가 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에게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자체가 영적인 활동이지 자연적인 활동은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자는 죄와 허물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주님을 절감하는 영혼의 사역이며, 잃어 버린 바 된 죄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된 결과이며,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정의 발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자연인이 성자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는다(엡 2:10).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새로운 지각과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성품으로써 신령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써 교통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요 3:6)라고 말한 분과 동일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전가시킨 은혜의 원리이며, 그를 기쁘시도록 열매 맺게 하는 성향이다.

중생은 어떤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고 제해버릴 수도 없다(전 3:14).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소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중생은 성직자의 마술적인 사역의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중생받는 자는 순전히 피동적이며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는다.

성육신 하신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에 대해서 - 유전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그 후손들을 중생시켰기 때문이다.

육정에 대해서 -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 이전에 인간의 자의지는 철저히 하나님과 ㅂ나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뜻에 대해서 - 설교자는 자신을 중생시키지 못할뿐더러 남도 중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권적인 역사로써만 가능하다.

 

또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그 결과는 명백함)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이것의 원인과 작용은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임)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마치 빛이 어둠과 구별되듯이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포도나무 선교회/개혁주의마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아더 핑크)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과
그 한 강도는 주님을 영접하고 다른 강도는 주님을 거절한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하
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것입니다. 그 두 행악자들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들은 꼭 같이 그리스도 곁에 있
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이 죽음의 6시간 동안에 일어난 모
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둘 다 악명 높은 죄인들이었습니
다.

둘 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죽
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사죄
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하나는 강퍅하고 완악해서 그가
이 때까지 살아오던 대로 죄 가운데서 죽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사악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에게
자비를 구하여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얼마나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와 꼭 같은 일들을 봅니다.
아주 동일한 환경과 조건 하에서도 한 사람은 녹아지나
다른 사람은 마음이 굳어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서도 한 사람은 무관심하나
다른 사람은 눈이 떠져서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밝히 드러나 있으나 다른 사람에
게는 복음이 감취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하는 것이 하나
님의 보시기에 선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사실 뿐입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결코 인간의 책임을 파괴하지
아니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성경에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든지 없든지,
또 서로 모순되지 않게 조화시킬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할 때 우리의 청중들에게 대해서 우리 자신이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지금 고인이 된 스펄전은
디모데전서 2:3,4에 관한 설교에서 성경 본문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또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그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한다면
그 중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거듭 거듭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하나님께서 온 마음을 다하여
자기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외에는
결코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알기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 있어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만세 전에
택정하사 그의 무한하신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 두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일들 가운데 또 하나의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설교가 중의 대 설교가는 또 말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항상 설
교해오던 것을 앞으로도 계속하여 설교할 것이며 내가 하
나님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일치시킬 수 있든
지 없든지 간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전파할 것입니
다”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인
간의 책임을 무너뜨리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뭇 영혼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지정하신 모든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며
그의 구원에의 부르심은 “믿는 자 마다” 모두에게
넉넉히 해당될 만큼 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아무도 거저 돌려보내지 아니하시며
다 영접하여 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고, 심고, 물을 준 후에 “자라나게 하시
는 이는” 오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그의
절대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는 가장 큰 기쁨을 삼으십니다.


가상칠언강해 - 아더 W. 핑크/개혁주의마을



예지와 작정의 관계 / 아더 핑크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앞서 인용한 처음 두 말씀이 하나님의 예지는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사도행전 2장23절을 다시 보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둘째, ‘미리 아신대로’ 내어주신 바 되었다. 예지의 토대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로마서 8장29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바로 앞 구절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러면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지는 그분의 작정, 또는 목적에 근거한다(시2:7).

하나님이 미래의 일을 아시는 이유는 스스로 그 일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미리 아신 것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자 성경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미리 아신다고 말해야 정확하다. 선택의 근거나 이유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비롯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그들 안에 선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기쁘신 뜻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왜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라고 고백할 따름이다.

로마서 8장29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일부 죄인을 골라내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고 가르친다(살후2:13 참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문구를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신 이들을 “미리 아셨다(즉, 사랑하고 선택하셨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은 것은 예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하나님은 죄인이 믿을 것을 아시고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그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시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9). 믿는 것은 그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이 믿을 것을 아시고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믿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 공로가 되며, 그런 경우에 구원받은 죄인은 ‘자랑할’ 빌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을 자신의 공로로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엡2:9).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공로가 아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행18:27)이라고 정의한다.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믿음은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 믿음이 공로가 아니라면 선택의 이유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다. 로마서 11장 5절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이처럼 선택은 은혜이고, 은혜는 공로와 무관한 선물, 곧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주장할 수 없는 순수한 선물이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예지를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흔히 통용되고 있는 예지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결말을 꿰뚫고 계실 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시고, 예정하셨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하나님의 작정이 예지에 선행한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엡1:4).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가 믿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신앙의 본성을 타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찬양과 영광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행18:27) 믿음을 갖게 되었고, “은혜로”(롬11:5) 선택을 받았다.


아더 핑크의 [네 하나님을 알라] 책의 4장.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에서 일부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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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둘째, ‘미리 아신대로’ 내어주신 바 되었다. 예지의 토대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로마서 8장29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바로 앞 구절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러면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지는 그분의 작정, 또는 목적에 근거한다(시2:7).

하나님이 미래의 일을 아시는 이유는 스스로 그 일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미리 아신 것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자 성경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미리 아신다고 말해야 정확하다. 선택의 근거나 이유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비롯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그들 안에 선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기쁘신 뜻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왜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라고 고백할 따름이다.

로마서 8장29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일부 죄인을 골라내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고 가르친다(살후2:13 참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문구를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신 이들을 “미리 아셨다(즉, 사랑하고 선택하셨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은 것은 예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하나님은 죄인이 믿을 것을 아시고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그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시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9). 믿는 것은 그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이 믿을 것을 아시고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믿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 공로가 되며, 그런 경우에 구원받은 죄인은 ‘자랑할’ 빌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을 자신의 공로로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엡2:9).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공로가 아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행18:27)이라고 정의한다.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믿음은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 믿음이 공로가 아니라면 선택의 이유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다. 로마서 11장 5절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이처럼 선택은 은혜이고, 은혜는 공로와 무관한 선물, 곧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주장할 수 없는 순수한 선물이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예지를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흔히 통용되고 있는 예지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결말을 꿰뚫고 계실 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시고, 예정하셨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하나님의 작정이 예지에 선행한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엡1:4).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가 믿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신앙의 본성을 타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찬양과 영광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행18:27) 믿음을 갖게 되었고, “은혜로”(롬11:5) 선택을 받았다.


아더 핑크의 [네 하나님을 알라] 책의 4장.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에서 일부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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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 아더 핑크

믿음은 ㆍ 2013-05-15 (수) 00:03 IP: 119.xxx.126 ㆍ조회: 21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 아더 핑크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그분이 어떤 분이시건, 그저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더 건강해지고 젊어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오늘은 또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는가?
당신은 스스로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위해
당신의 시간과 정성과 체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가?
정말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하며 경외하며 경배하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제대로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다.
당신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겠지만,
어떻게 자녀가 자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모를 수 있겠는가?
설령 안다고 해도, 당신이 믿고 싶은 하나님의 한가지 성품만을 붙잡고
왜곡된 신의 형상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말씀과 교제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알려는 노력을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얻어야 할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만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 22:21)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렘 9:23,24).

구원에 이르는 영적 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은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완전한 속성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믿을 수도,
섬길 수도, 경배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이론으로 아는 것 이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범사에 그분의 거룩한 규례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영혼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즉, 복종을 통해) 여호와를 알자” (호 6:3).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 알리라” (요 7:17).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아더 핑크의 "네 하나님을 알라"라는 책의 뒷표지에서

출처: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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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서론 / 아더 핑크

 

서론적 고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의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식에 부응하는 양심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빛나는 소망은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순종에 대한 확실한 방법도 모를 것이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는 있어도 지식이 없는 행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원래 우리 마음속에 기록된 본성의 율법을 우리가 더럽힘으로써 그 계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십계명에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십계명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십계명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던 모습은 엄숙했고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으로 가득 찼다.
먼저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 전에 외부적인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갖기 위해 이틀 동안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출 19:10,11).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기다리게 되거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기 전에 몸과 마음의 신중한 준비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자신들을 성결하게 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하늘에 계신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강림하셨던 산은 지경이 정해져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거룩한 산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금령이 있었다. (출 19:12,13)
이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최상의 존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그의 율법의 엄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여호와께서 그의 율법을 전수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던 두려운 현현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출 19:18,19).
여호와의 현현의 그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의 전수에서도 그렇게 무서운데 율법을 어김으로 우리에게 심판하러 오신다면 그 무서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의미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전달하셨을 때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와 통역자로 일해 달라고 간청했다. (출 20:18,19)
이는 율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직접 전달된다면 그것은 정죄와 죽음의 역할을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이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달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고 지키게 된 것이다. (고전 3:19, 갈 9:21, 갈 6:2)
따라서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서 두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율법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래가 악하여 하나님의 손가락 외에는 누구도 그의 율법의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돌판들은 모세의 거룩한 분노로 말미암아 깨뜨려져서(출 32:19) 하나님이 다시 기록하신 것이다.(출 34:1)
이것은 자연의 율법 창조시 우리 마음에 기록 되었으나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을 때 깨뜨려졌고 중생 시 우리 마음에 다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10:16).
그러나 혹자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아무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속박의 멍에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십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주셨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는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십계명의 권위를 인간의 양심에 부과하려는 시도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질문에 우리는 흔히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마 5:17,18).
진실로 그리스도인은 행위언약이나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활의 법도와 거룩케 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십계명의 독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는 이 독특성이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 두렵고도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내산 하나님의 계시는 오는 모든 시대에 섬겨야 할 인간 의무를 집대성하였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에 특별하신 중요성을 부과하셨는데 그 공포 모습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십계명은 구름과 어두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의 무시무시한 부대현상과 함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 왔으며 그렇게 들려진 신적 계시는 유일무이한 부분들이었다. 어떠한 의식법이나 시민법도 이렇게 독특할 수 없었다.
그 열 가지 말씀들, 그것만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판 위에 쓰여 졌으며 그것만이 보호되기 위해 언약궤에 넣어졌다. 이와 같이 십계명에 부여된 유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우리는 극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십계명의 원천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십계명의 서두에 아주 보잘것없는 관심을 가져 왔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아무리 웅장한 권위가 율법의 공포 때에 수반되었다 해도 율법의 원천은 사랑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율법은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운 구속자이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즉, 그의 성품)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분명히 이해함으로 얻어지는 결론이자, 원리는 다음과 같다. 즉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일치하는 생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심은 사랑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기초로 자기 백성에게서 사랑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함을 받는 백성들 사이에 일치와 동일함이 있게 된다.
제 2 계명 후반부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순종이란 오직 사랑하는 데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필요조건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요약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

넷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십계명이 모든 세대를 거쳐 각 사람들을 얽매고 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밝혀진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해 확고부동한 표현이 있지만 모든 도덕적 행위(moral agent)위에 십계명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율법(다스리시는 법도)이 폐지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특성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하며 그로부터 인간은 계속적으로 율법에서 떠남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피조물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도덕적 율법이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방인들에게 바울 사도가 특별히 “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는 의문을 제기하고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는 율법을 세우느니라.”라고 자문자답했다(롬 3:31).

마지막으로 율법의 영속성은 그의 백성들이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심으로 유지된다. (렘 31:33, 겔 36:26,27)

다섯째, 도덕률이 십계명의 숫자에 있어서 열 가지가 완전할 수가 있겠는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성경상에서 “십계(十戒)”(출 34:28)라고 언급되었는데 열이란 숫자는 전체가 필요한 것들로서 완전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이 그렇게도 여러 번 계속되었다는 점은(10번 재앙이 내림) 하나님 심판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숫자의 상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의 범죄가 열 번에 이르도록 허용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열 번이나 죄를 범했기 때문에(민 14:21) 죄악의 모든 분량을 채웠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십일조, 혹은 십분의 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며 모든 소산은 십이라는 숫자로 표현되고, 이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있다는 표시로 주께 바쳐진다.

여섯째, 십계명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 행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신 것에는 특별한 뜻이 계셨다. 이러한 의도는 표면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를 한 데 묶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후자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대해, 후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주관자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한다면 우리 이웃에게 아무리 예의바르다 해도 그러한 의는 철저히 무가치하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처럼 된다 해도 이는 역시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 내가 음행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위안 받으면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거부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의무가 첫 돌판에 기록된 것은 칼빈이 일컫는 바와 같이 그 계명들이 ‘종교의 제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활기’를 이루는, 즉 ‘종교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경배함이 없이는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평등도, 사랑도 무익한 것이다. 경건치 않은 인간들이 제 아무리 자기들끼리 실시하는 정의가, 자비가, 인내가 있다 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우리가 옳고 그름의 주관자로 그를 공경한다면 우리는 이웃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5계명이 첫 돌판에서 끝났는지 둘째 돌판에서 시작되었는지 하는 십계명 구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대는 부모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고 성경상에서도 부모를 이웃과 동등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첫 돌판의 다섯 계명이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으나 나머지 계명들에게서는 그 어디에도 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율법이 신령하다”(롬 7:14)는 것은 율법이 신령한 입법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단순히 외부적인 복종보다 더한 것 즉, 인간 마음의 순종을 가장 철저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가 십계명을 얼마나 지키지 않는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에서”(시 51:6) 진실을 요구하신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조그만 탈선해위도 금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가장 은밀한 성향과 의도를 감찰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성과 사랑과 의지를 거룩한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율법의 기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까지 인간의 영을 주장한다고 장담한 법은 없었으나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의 깊은 마음속을 감찰한다. 이러한 율법의 영적인 면은 예수께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분노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관계로 명백해졌다.

“여덟째, 우리는 십계명의 임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오직 의(義)이지만 우리에게는 불의(不義)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죄는 우리의 판단을 어둡게 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고, 잘못된 자신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율법의 높고 거룩한 요구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더러움과 허물과 오만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능력의 부족을 의식하게 된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2권, 7장 7절) “이와 같이 율법은 일종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얼굴에 묻어 있는 오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속에서 우리는 첫째 우리의 무능을, 둘째 우리의 허물을, 셋째 이상 두 결과로 인하여 저주를 알게 된다.”라고 잘 표현했다.
율법의 두 번째 임무는 악인들을 경고한다. 악인들이 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지라도 형벌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악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사회에 유익이 된다. 세 번째,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되는 것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지켜주는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십계명의 상벌에 대해 생각하자. 여호와는 우리를 죄의 예속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의무를 감당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엄숙한 광경을 보여줌으로 그들 마음속에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셨다.
그 다음에 그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약속과 경고의 말씀을 후반부에 추가시키셨다. 이는 우리가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기쁘게 순복하며 그가 금하신 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헛되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반역자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 번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계명의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 119:96)라고 했다. 도덕적 율법은 대단히 넓어서 그 권위가 우리 생활의 모든 도덕적 행위에까지 미친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십계명에 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우리를 경고함으로 자극하고, 약속함으로 우리를 달래며, 경고함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실례들을 취하여 전자는 고무시키고 후자는 금지시킨다.
신약의 명령들은 단지 십계명에 대한 설명, 확충 그리고 적용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자. 특별히 명령되거나 혹은 금지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이는 형식적으로 말하는 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나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각각의 계명들에 있어서 주요한 의무나 죄악은 그보다 사소한 것들의 전형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타난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관련된 원인까지도 포함된다. 어떤 죄가 거론된다 해도 그러한 죄의 원인과 결과와 동일한 종류의 모든 죄는 금지된다. 그리스도께서도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분노도 육 계명에 저촉된다고 설명하셨다.
둘째 어떠한 악이 금지되면 그 반대로 선이 요청되며, 어떠한 선이 명령되면 악은 정죄 받는다. 이를테면 제 3계명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망녕되이 일컫게 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 결과로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시는 것이다.
제 8계명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금했던 것은 그 반대의 의무, 즉 우리가 일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는 대가를 주신다는 것이다(엡 4:28).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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