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구원 신앙과 거짓 구원 신앙 / 아더 핑크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다 해서 그것이 다 구원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의지하는 것 같아 보이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것 같이 보여도 구원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을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행복과 불행 또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최대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이 구절은 구원을 얻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믿음이고, 구원을 얻지 못하고 정죄 받지 못하고 가장 크고 저주스러운 죄가 불신앙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죽음의 형벌이 죄의 결과로서 반드시 뒤따른다고 경고하며 죄를 범한 모든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믿는 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적용될 만큼 절대적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생명을 얻는 조건에 관해 말씀합니다. 이 조건은 믿음이라는 1차 조건과 세례라는 2차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례가 2차 조건인 이유는 이것이 생명을 얻는데 믿음만큼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후반부가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가 아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로 되어 있는 것, 즉 세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지만, 세례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죄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를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칼을 뽑아 드시고 내리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구원 신앙 외에는 그 칼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해서 불신앙을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생명을 얻는 필수 조건이고 불신앙이 무서운 죽음의 형벌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믿음미 무엇인지 또한 구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다고 다 구원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스스로 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그분이 이루신 속죄 사역을 의지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모래성을 쌓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완전한 구원을 보장 받았다고 믿지만, 안락한 꿈에서 깨어난 순간 차디찬 죽음의 손아귀에 붙들려 경악하게 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 신앙이 무엇인진 알고 그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거짓 구원 신앙의 모습

 

참 구원 신앙과 거짓 구원 신앙은 매우 흡사해서 당사자는 물론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마술사 시몬이 대표적이 경우입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3).

 

빌립은 시몬이 나름대로 믿음을 보였기에 그를 참 신자로 여기고 신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도록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1-23절)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하여 다른 사람이 도달하지 못한 믿음의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탁원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폭넓은 믿음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14)라고 말한 사도 바울 처럼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구원 신앙을 지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로 그런 사람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신앙을 이른바 역사적 신앙 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은 교육이나 자력으로 얻지못 할 두 요소, 즉 생각을 움직여 믿음에 이르게 하는 신령한 빛과 성려의 능력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심지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구원 신앙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조명과 마음의 감동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중생의 체험을 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여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 6:4-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라는 것은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 바 된‘ 덕분에 진리를 인식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와 성경에 근거한 신령한 믿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삼고 굳센 확신으로 의지합니다. 성경이 거짓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이 합리적이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신령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애굽과 홍해에서 구원을 경험한 뒤에 그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 하나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였습니다(히 3:17-18).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렘 13: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속하게 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렘 13:10)고 말하였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사 10:20)라는 말씀이나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라는 말씀에 나오는 ‘의지하다’와 ‘신뢰하다’역시 확고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사야 48장 2절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구원 신앙이 아니라고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 48: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기대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아 8:5)라는 말씀의 ‘기대다’역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그런 표현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미 3:9)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삵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오늘날에도 추잡하고 속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재앙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큰 절망이나 위기가 닥치면 예상 밖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산헤립이 큰 군대를 이끌고 유다 성읍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대하 32:7-8)고 말했습니다. 이에 백성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8절) 안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히스기야의 말에 안심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채 못 되어 그들은 하나님이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게’ 악을 행했습니다(대하 33:9).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 자체가 진정한 중생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다의 아비야 왕입니다. 역대하 13장에서 여로보암 왕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아비야 왕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소금 언약”으로 나라를 다윗그의 자손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대하 13:5). 둘째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여로보암의 왕의 죄를 엄중히 꾸짖었습니다(6-9절). 셋째, 그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기에 자신과 유다 백성의 편에 서신다고 확신했습니다(10-12절).

 

그러나 성경은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이는 그들이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17-18절)와 같은 행동을 보였던 아비야 왕을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왕상 15:3)라고 평가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어느 한 순간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약속과 언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 3장 5절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도 알지 못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보였다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었을까요? 더욱이 그분의 메시지가 축복의 약속이 아니라 심판의 경고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 아래에 사는 오늘날에는 복음의 약속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겠습니까?

 

청교도 목사요 신학자였던 존 오웬과 함께 사역했던 데이비드 클락슨은 1680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판의 경고가 주어지면 안팎에서 큰 반발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심판의 경고는 마치 쓴 약처럼 죽음의 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삼키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안에서부터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밖에서도 반발이 일어난다. 사탄이 쌍수를 들고 그것을 막으려고 소란을 피우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심판의 경고를 통해 자심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피할 길을 찾을 까봐 노심초사한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어 그들이 심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이와 같이 약속의 말씀은 대개 아무런 반발도 일으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복음의 정수인 용서와 생명에 대한 약속을 안에서부터 그저 달콤하게 받아 삼킨다. 사탄도 반발하기는 커녕 약속의 말씀을 그릇 적용하도록 옆에서 힘껏 돕는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사람들을 자연 상태 그대로 머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약속의 말씀을 그릇 적용하는 것은 무덤을 봉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죄의 무덤 속에서 영혼이 죽은 채로 널부러져 썩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렇듯 심판의 경고는 약속의 말씀보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어렵다. 따라서 니느웨 백성의 경우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심판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복음의 약속은 아무 반발 없이 수훨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는가?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구원 신앙이 아닌 경우가 또 하나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잠깐 믿다가”(눅 8:13)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마 13:20) 받는 부류에 속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사한 빛이 감돌고 온몸 가득 의욕과 열정이 넘칩니다.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들, 즉 참된 신자들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표면 아래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둘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땅을 파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진정한 구원의 뿌리가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훨씬 더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기꺼이 받아드리면서도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그분의 명령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만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처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복종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 심지어동으로 믿음을 보인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거짓 구원 신앙의 특징

 

그렇다며 거짓 구원 신앙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고 무엇이 구원받는 신앙인지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신앙이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도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삼으며, 구원신앙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신앙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 신앙이나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나 모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며 둘 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이 모두 "다 일어나 등을 준비“(마 25:7)했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구원신앙에도 기쁨이 뒤따르고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에도 기쁨이 뒤따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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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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