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이고 가장 필요하며, 가장 유익을 주나, 매우 무시되는 진리
아더 핑크 2015. 4. 14. 00:50근본적이고 가장 필요하며, 가장 유익을 주나, 매우 무시되는 진리
아더 핑크
그러나 지난 19세기 기간에 하향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던 기독교는
죄의 악함을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가능성들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를 선언하는 대신에 죄의 불편성만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진보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로 아첨하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함으로,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된 조건에 대한 비참한 묘사가
아주 말살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혼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여러 교회들 가운데서 인기 있는 신앙을 시험하여 본다면-
소위 ‘복음적인 기독교’의 명칭으로 불려지는 교회들 중 10분의 9를
평가하여 본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
성경에 묘사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술과 정면으로 맞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조건이 파멸과 영적인 죽음 상태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죄를 위하여 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의 지극한 죄 됨이
그러한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복음의 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타락의 깊이가 정말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장엄한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눈에 인간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그려주는데 있다.
또는 인간의 그의 조물주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여할 임무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완전성을 선언할 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래의 조건과 인간이 저지를 배도를 윤곽적으로 그려주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파멸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처방도 그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여야 할 일이다.
우리들이 나면서부터 빠져있는 그 무서운 함정의 구렁을
진정으로 바라보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위대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타락의 상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속으로만 치유가 되는 무서운 질병에 걸려있다.
우리들이 앓고 있는 처참한 질병의 정도가 얼마나 되나를 아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치평가도 좌우될 것이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은
시편 51편 강해에서 이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복음 사역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오려면
먼저 그리스도 없이는 자기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 비참의 지점을 지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다다를 수 없다.
이 비참의 주요 요소는
우리들의 본래적인 죄악성과 실제적인 죄악성,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죄인 됨을 확연히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우리들은 그 죄와 진노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힘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이 위대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온 힘을 기울여서 이러한 비참한 느낌을 가지게 하고
그 죄와 진노에서 건지실 오직 유일하신 분께 죄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처한 비참의 원인은
우리들의 본성이 부패하여 있다는 것이다.
또는 원죄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목적을 위하여 아주 합당한 다음 말씀에 시선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략).......
이 교리는 성경의 진리이다.
조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을 그저 진리의 대원천인 성경의 교리로만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근본적인 교리이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 어떤 사람도
그 교리 때문에 시험에 빠져 고통을 당하게 않게 하시기를 원한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하여 매우 큰 강조점을 주고 있다.
성경의 부분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처한 비참한 처지와 노예상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부패, 눈멂,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영적 본질에 대하여 가진 반감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철저한 부패가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능함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선언과 증거는,
모든 인간들이 사단에게 매여 종노릇 하고 있음과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능력이 전혀 없음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저 간접적으로 희미하게 말하지 아니하고
강조적으로 아주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점은, 성경이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여러 수백가지의 증거들 중 하나이다.
는 ‘슬프게도 무시되는’ 주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 교리는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교훈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강단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파멸과 비참함을 별로 설교하지도 않으며,
강단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 교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곳에서도,
이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못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의 교육이나 사상의 주류는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다.
다윈의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마저,
그 가설의 악한 영향이 자주 나타나 보인다.
현대 강단을 맡은 사람들이 침묵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출석하는 세대들이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를 통탄할 정도로 모르고 있다.
그러니, 자기들이 처하여 있는 어두움의 무서운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매고 있는 고집스러움과 불신앙의 사슬을
지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천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할 정도이다.
수천수만의 설교자들은 자기들의 회중들에게
그네들이 본질상 무서운 처지에 있음을 신실하게 말해 주는 대신,
크레믈린에서 일어난 최근의 소식이나, 핵무기의 발전에 대한 소식을
해설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설교자들의 신앙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적인 교리’ 이다.
이 주제에 대하여 정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다른 극히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관점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신앙이 바로 이 점에서 성경적이라면,
그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을 개선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만이 오직 유일한 소망임을 분명하게 지각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죄인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타락한 존재가 선을 이룩하려고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그는 많은 오류에 빠지지 아니할 것이다.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나는 알미니안(arminian), 아리안(arian), 소시니안(socinian), 무율법주의자(antinomian)
의 체계로 기울여지는 사람 치고
먼저 인간 부패, 또는 인간의 진노받아 마땅함을 과소평가하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신학적인 소양을 훌륭하게 갖추었던 스타이플러(j. m. stifler)는 이렇게 말하였다.
“거짓된 신학은 그 원천을 인간 부패에 관한 바르지 못한 관점에 두고 있다.
이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영적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모든 참된 경건의 근원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비열함에 대한 바른 관점에 있다.
또한 참된 경건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른 관점에서 샘 근원을 찾는다.
그것 없이 진정한 자기 혐오감이나 회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긍휼에 대한 진정한 이해,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존재할 수 없다.
허망한 사람의 미몽을 깨워
자기의 무가치함과 자기 의(義)의 무가치함을 확신케 하는 데에
이 교리를 알게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부패하였음을 아는 설교자도,
자기 스스로는 자기 설교를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진정으로 인식하고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진리를 전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듣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사랑하는 데서 떠나
자기들에게 거는 모든 소망을 영원히 기각하여 버리게끔
이 진리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진리를 전하는 자기의 신실함을 의뢰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그 진리를 적용시켜 달라고 떼를 써야 할 것이고,
자기의 가련한 노력을 그렇게 축복하여 달라고 간청해야 할 것이다.
.....(중략)....
이 교리는 ‘가장 필요한 교리’ 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들 대다수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흔히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빠진 인간의 무서운 상태를 너무 강하고 음울하게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어두움과 더러움을 말로는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하여도
잘 나타낼 수 없다.
다음의 진리의 말씀이 묘사하는 바와 같은 인간의 상태의 비참함과 전적인 무능을
묘사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2:39,40)
은혜의 이적을 경험한 영혼들의 상태를 대조하여 볼 때,
그 점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 교리는 ‘가장 유익을 주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흔히 이 교리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지각을 깨우친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한,
자기들을 의뢰하는 마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한다.
성령의 강력한 작용만이 자기 신뢰를 포기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
신실한 말씀전파를 사용하시기 원하신다. ]
아더 핑크의 ‘인간의 전적타락’(청교도 신앙사, 역간) 중에서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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