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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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은 무엇일까? 우리는 참된 믿음의 증거와, 성령의 성화 사역의 증거를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을까?

요한의 첫 번째 서신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제시해준다. 이 짧고 강력한 편지만큼 성경에서 비주재권 신학이 주는 약속들에 맞서는 편지는 없다.

요한일서의 목적은 간결하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대목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의도를 상세히 설명한다. 요한은 믿는 자들을 의심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는 자들이 온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원할 뿐이다. 참된 믿는 자라면 요한의 말에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구원의 확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분명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될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은 7가지의 중요한 요소들을 설명한다. 이 요소들은 각 사람이 진정한 신자인지 아니면 거짓 신자인지를 드러내어 준다. 이것은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떤 시험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가 자신의 그 고백이 진실된 것인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방법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요”(요일 1:6-7).

‘어둠에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 어둠에서 행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속 받아 빛으로 옮겨졌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진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참된 신자는 빛 가운데서 행한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우리는 빛 가운데 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일1:7). 여기서 동사는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죄를 지을 때도 우리는 이미 깨끗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어둠도 우리가 거하는 빛을 가리지 못한다(벧전2:9).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위치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을 모두 묘사하는 표현이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은 빛에 따라 사는 것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죄를 고백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일2:1).

구원에 대한 참된 확신은 언제나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실 구원에 대해 확신할수록 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더 깊어진다. 이 말이 모순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죄를 발견할 때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죄를 미워한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깨끗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이용해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죄를 더 극복하고 억제하려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2:1).

참된 믿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킨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2:3-4;5:3).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다.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다. 이것은 외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굴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소중한 것으로 알고 ‘지키는’ 자의 열렬한 순종이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참된 믿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한다

이 내용(형제 사랑)과 앞선 내용(순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참조3:10,14-15; 5:2)

이 두 가지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이유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선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도덕적 율법을 성취한다(마22:37-40).

다른 믿는 자들에 대한 사랑은 참된 믿음의 중요한 증거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타고난 것이거나 우리의 선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참된 믿음의 증거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4:12)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희미하게나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건전한 교리를 지지한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이것으로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아느니라”(요일 2:21-23; 4:6)

요한은 영지주의라는 초기 이단에 대항해 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요한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오류나 이단에 빠질 수 없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20,27)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기술이나 어떤 성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거룩함을 추구한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 2:29; 3:3-4, 6–9)

이 말씀들은 많은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했다.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는 3장 4절에 나오는 죄의 정의이다. “죄는 불법이라.” “불법”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아노미아’다. 그 단어는 문자적으로 ‘법이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계속된 습관의 문제로 부도덕하고 불경하며 불의한 삶을 사는 자들을 묘사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고,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다스리고 있다는 듯이 살아간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도 요한은 죄 없는 완벽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서신서를 시작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또한, 요한은 사람이 죄를 얼마나 자주, 지속적으로 혹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느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다. 그리고 참신자라도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될 수 있다. 요한이 여기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죄와 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 죄를 지을 때 우리 마음의 반응,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것이다.

영생의 약속을 붙잡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고백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철저히 가짜이고 속임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단지 속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진실로 자신의 소망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요일 3:3).

참된 믿는 자들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신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4:13)

이 말씀에는 바울이 가진 신학이 동일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성경은 말한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19:15; 참조 마 18:16; 고후13:1).

이것은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마치 행위에 믿음을 두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로마서 8장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며 그것으로 우리가 믿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기 점검을 통해 기대하는 증거들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성령의 열매야말로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증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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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에서 발췌한 것이며 이 책은 한국어로는 “ 구원이란 무엇인가?” (부흥과 개혁사)로 번안되어 판매 중입니다.

COPYRIGHT (C) 2016 Grace to You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회에 나타난 자칭 선지자들


이 시대를 조명하는 골로새서 (존 맥아더)

 

 

이 시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1. 현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살고 있는 과학자들 중에 95%는 그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은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과학은 날로 발달하고 있고 옛날의 과학자들은 더 이상 오늘날 과학자들의 틈에 끼지 못합니다. 이러한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창조와 과학과 발견들에 관련 되었는가? 이것들에 그리스도가 내적으로 연관되었는가? 외적으로 연관되었는가? 라는 것과 같은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골로새서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16절 상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세계 교회주의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이 시대의 사람들은 "초대형 교회", 온 세상에 교회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가끔 이에 대해 머리없는 몸이 있을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진실한 교리없이 진정한 연합이 있을 수 있을까요? 사회적인 기준의 철학과 문화 그리고 일반적인 계획으로 모든 종교들을 하나로 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 결합의 노력은 유사한 사람들끼리의(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같은) 교회적인 연합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합하려는데 투자되고 있습니다. 라마, 비시뉴우, 조로아스터, 석가, 공자, 모세 그리고 모하멧이 모두 예수님과 함께 참여하여 그들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이겠습니다. 이 같은 교회에 그 머리는 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의 연합의 기초는 무엇이겠습니까?


2. 골로새서� 대답.


골로새서는 1:18절 상절에서 진정한 교회의 머리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이 시대는 권위가 없는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이 시대는 사람들이 질적인 것들을 부인하고 서로 관계를 갖는 것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권위는 혐의를 받습니다.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가능한 것이라면 모든 것들이 다 전복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도 그 권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의 종교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종교는 절대적인 것이나 규칙들이 없는 인간 마음에 관한 종교로써 그저 하나의 경험이나 황홀경 가운데 오락 가락하는 것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도 하나의 평범한 교주로 봅니다. 그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며 그의 진리는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그는 진실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절대적인 것이 없는 이 세대의 누군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 정의하는 것이 필요한데 골로새서가 바로 그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15절에서 예수님을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뛰어나신 분)자니"라고 정의하고 더 나아가 2:9절에서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는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것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입니다.

 

 

이 시대는 실용주의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이 시대는 사람들이 무엇이 실용적인 것인가? 어떤 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가? 알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호한 묵상이나 요가 도는 반(反)영적인 것에 빠져 있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삶을 다르게 해주며 그들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더 능력있게 또는 효과있게 해준다고 듣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느냐?"라고 묻는 특별한 시대입니다. 오늘날엔 그것이 진리이냐 아니냐 하는게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그것이 효과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입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나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은 정말 그것이 효과가 있느냐 하는 것을 알기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정말 그리스도가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그가 정말 내게 평강을 줄 수 있느냐? 그가 내게 기쁨을 주느냐? 그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 그가 정말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 그가 내게 능력, 희망, 목적을 줄 수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골로새서가 이에 대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22절은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고 거룩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때 그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삶의 변화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이 골로새서3:12∼4:6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골3:12하).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이 시대는 서로 관계를 갖는데 좌절감을 갖는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의미있고 성취적인 관계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적으로 의미있는 관계를 성취하지 못하며 외로워하고 어떤 사람들과도 의미있는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결혼 생활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은 서로 의미있는 관계를 갖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서로의 관계에 대하여 골로새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바울은 3:18∼4:1절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들에게 아내들에 대하여(3:18) 남편들에 대하여(3:19), 자녀들에 대하여(3:20), 아버지들에 대하여(3:21), 종들에 대하여(또는 고용된 자들)(3:22∼25) 그리고 주인들에 대하여(또는 고용주들)(4:1)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관계들이 어떻게 작용되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갖는데 좌절감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골로새서가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마지막 시대입니다(말세).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인구 폭발"과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이 나온 뒤로 사람들은 더욱더 세상이 종말에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최종적으로 어떤 파멸에 직면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골로새서는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12절에서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3:4절에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래왔지만 이 골로새서는 현대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책입니다.

 

이 골로새서는 시간과 시대에 상관없이 궁지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 해결책으로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과학의 시대로 그를 건축가, 창조자, 그리고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세계 교회주의 시대로 그가 그의 몸인 진정한 교회의 한 머리됨과 부족함이 없는 구세주이며 필수적인 교회 연합의 근원됨을 알게 하십시오. 권위가 없는 이 시대로는 그가 오직 진정한 권위이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온 우주에 뛰어나신 분이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며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원되심을 알게 하십시오.

 

이 실용주의 시대로 주님은 그들의 삶을 기적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바꾸실 수 있으며 오직 그분만이 사랑과 기쁨, 평강, 용서 그리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서로 관계를 갖는데 좌절감을 가지는 실패한 시대로는 그가 진정한 사랑과 이해의 근원이며 그분만이 오직 가정이나 결혼 생활 그리고 친구들간의 관계를 세워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말세의 세상으로는 그가 끝이 되시며 또한 희망과 절정, 오실 왕, 모든 역사에 해결의 열쇠가 되실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이 알게 될 때 그들은 또한 골로새서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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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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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믿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은 잘 알려진 구절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선물’이란 무엇인가? 웨스트코트(Westcott)는 이것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는 구절에서 그 ‘것’(that)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다.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대명사는 중성이지만 , ‘믿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여성명사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이 마음에 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혜, 믿음, 그리고 구원은 전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지 상관없이, 이 구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이다.(빌1:29참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그러나 예수님은 같은 문맥에서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하나님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이끄시며 또한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주를 이해하거나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베드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일시적이지도 무능력하지도 않다. 그것은 최후까지의 견인을 보장하는 항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친숙한 말씀인 하박국 2:4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갈3:11; 히10:38)고 한 것은 믿겠다는 순간적인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일평생의 신뢰를 뜻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3:14의 말씀은 참된 믿음의 지속성 곧 그것의 견고성이 믿음이 있다는 주된 증거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물과 함께 시작하신 구원사역은 훼방을 받아서 중단될 수 없다. 빌립보서 1:6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전 1:8; 골1:22-23)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속에는 그분의 뜻에 순응하려는 자발적인 의지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빌2:13).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순종을 수반하는 것이다. 벌코프(Berkhof)는 참된 믿음의 요소로서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이 요소((notitia). 진리를 확신하고 인정하는 정적인 요소(assensus). 그리고 진리에 복종하기 위해 뜻을 정하는 의지적인 요소(fiducia). 현대의 대중적인 신학은 notitial와 때로 assensus까지는 인정하지만 fiducia는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믿음에서 순종이 빠진다면, 그것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바인(W.E.Vine)도 똑같은 생각을 가졌는데, 그는 믿음의 중요한 요소들로 “견고한 확신 ... 개인적인 복종 ... 그리고 이런 복종에 바탕을 둔 행동”과 같은 것을 꼽았다. 그는 동사 ‘순종하다(peitho)'를 풀이하면서 “peitho와 pisteuo(신뢰하다)는 어원상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둘의 의미상 차이를 말한다면, 전자는 후자로 말미암아 생기는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3:18-19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이 불신의 증거라고 말한다 ...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를 보인 것이다. ... 신약 성경에서 peitho는 내적인 납득과 그 결과인 믿음의 실재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제시한다.”

 

참된 신자는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만은 육체의 잔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다(고후 7:1; 살전 3:10).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바람은 참된 신자들 속에서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롬 7:18). 믿음은 언제나 순종하는 열망을 낳는다.

 

순종을 빠뜨린 믿음의 개념은 구원의 메시지를 부패시킨다. 바울은 복음을 순종해야할 것을 표현했다(롬 10:16; 살후 1:8). 로마서 6:17에서 그는 심지어 회심까지도 순종으로 특징지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마음으로 순종하여” 그가 자신이 복음 전도 사역에서 추구했던 결과는 “말과 일로 순종하는 것”(롬 15:18)이었고, 거듭 거듭 “믿음의 순종”을 강조했다(롬1:5; 16:26).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개념이 순종과 불리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요한복음 3:36에서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과 같은 말로 쓰였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사도행전 6:7은 초대 교회에서 구원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허다한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니라” 순종이 그처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5:9에서는 이들을 같은 말로 다루고 있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장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믿음에 관한 위대한 논변인 히브리서 11장은 순종과 믿음을 뗄 수 없는 것으로 가르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순종하여”(8절).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우들은 모두 자신들의 믿음을 순종으로 나타냈다. 이 장을 주석할 때, 뛰어난 신학사전은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순종은 참된 믿음의 불가피한 증거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할 때, 이 점을 인식했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1:15-16).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의 불순종은 믿지 않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그들의 행동은 말로써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보다 더 큰 소리로 그분을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닌 불신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항상 의로운 행실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즐겨 말한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결코 믿음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스펄전(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 행위에 근거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지라도 또한 그것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똑같이 확신한다.“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을 통해 증명된다.

 

믿음(faith)과 충성(faithfulness)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는 사실상 다른 개념이 아니었다. 실제로 영어성경에서는 같은 단어가 이 두 가지로 번역되기도 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쓰면서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헬라어 pistis ... 영어 faith는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믿음을 뜻하는 신뢰함(trustfulness)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의지할 수 있을 만한 마음을 뜻하는 신뢰받을 만한(trustworthiness)이다. 이 두 단어는 문법적으로 같은 말의 능동태와 수동태라는 점에서 또는 논리적으로 같은 행위의 주격과 목적격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될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에는 긴밀한 도적적 유사성이 있다. 충성, 지조, 견고함, 확신, 의뢰, 신뢰, 믿음 이 용어들은 ‘믿음’의 수동적 의미와 능동적 의미라는 양극을 이어주는 고리들이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 두 단어들은 많은 경우에 서로 혼용되기 때문에 다소 자의적으로 구분할 때만 간신히 나뉠 수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 단어나 구절의 자유로운 폭과 심지어는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엄격히 구분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일이다. ... 그렇게 하면 과연 문법적인 정확성에 있어서의 손실이 종종 신학적인 깊이에 있어서의 이득으로 보상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경우에는 마음의 그 한 가지 특성이 다른 특성들을 수반하고 그 결과 충성스러운 사람은 또 믿을 만한 사람이 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도 확고부동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뢰하는(믿는) 사람은 또한 충성스러운(순종하는)사람이다. “충성, 지조, 견고함, 확신, 의뢰, 신뢰, 그리고 믿음”은 나눌 수 없이 모두 믿는다는 개념 속에 들어 있다. 의로운 사람은 참된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롬10:10)

 

물론 이것이 믿음이 죄 없는 완전함으로 귀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부르짖었던 간구를 이해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 비록 때때로 불완전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순종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이러한 열망이 없는 이른바 ‘믿음’이란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다. 순종을 거부하는 마음 상태는 완전히 불신앙일 뿐이다.

 

마태복음 5:3-12에 기록된 팔복은 생각건대 성경의 어떤 다른 구절보다도 참된 믿음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산상설교의 서두에서 우리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인 경건보다 월등히 뛰어난 위를 가르쳐 주셨다(마5:20). 그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 모두에게 이 더 나은 의가 요구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강조하신 자질들은 모든 참된 신자를 구별해 준다.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모든 참된 믿음의 특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팔복의 첫째 복은 주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는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이들은 구속받은 백성이고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자.

 

그것의 기본적인 특성은 겸손 .. 심령의 가난함 곧 영적인 파산 상태를 인식하는 상한 마음이다. 참된 신자들은 자신이 죄인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한다(마5:4). 애통하는 자는 온유하게 된다(5절).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6절). 마음이 청결케 되며(7절),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9절). 궁극적으로 신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을 듣는 자가 된다(10절).

 

이것이 참된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 그것은 겸손에서 출발하여 순종으로 결심을 맺는다. 참된 믿음이 드러내는 순종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위대하게 만드는 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의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10:6) .. 의 성격을 율법의 문자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까지 순종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마 5:21-48)이런 의는 단지 간음하는 행위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정한 생각을 품지 않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노하는 것을 살인하는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금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참된 의의 진수를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18).

 

물론 이것은 성취 불가능한 기준이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 관원을 대하신 후 그 청년이 믿지 않고 떠나가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19:23)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깜짝 놀안 그들은 이렇게 여쭈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절).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구원은 본래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동원할지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허락이 없이는 믿을 수도 없다(요6:44-45). 인간의 의지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스럽게도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그분께 순종하고 의롭게 사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다(벧후 1:3).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다. 이런 사실을 이해할 때 사람은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그 길은 심령의 철저한 가난을 깨닫는 것 즉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나오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틀림없이 의로운 순종으로 귀결될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특성을 가르쳐 주시고자 할 때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 아이는 순종적인 겸손의 완벽한 그림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살아 있는 교훈이 되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성인의 특권을 계속 주장한다면, 즉 우리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려하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며 자기 삶을 스스로 주장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와서 어린 아이의 겸손과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꺼이 순복하는 자세로 구원을 받는다면 이것이 올바른 태도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요10:27-28).

누가 진짜 양인가? 따르는 사람들이다. 누가 따르는 사람들인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다. 믿음은 순종한다. 불신은 거역한다. 삶의 열매는 그 사람이 신자인지 불신자인지를 드러낸다. 중간 지내는 없다. 진리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단지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 때 믿는 것이 아니다.

한때 ‘믿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기억에 매달려 있을 뿐 삶 속에서 믿음이 계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은 성경의 분명하고 엄중한 경고에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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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한 기독교?
(grunge christianity?) 존 맥아더목사

반(反)문화가 지닌 죽음의 소용돌이와 복음의 저속화

최근 복음주의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최고의 주제는 어떻게 교회가 "문화를 따라잡는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쇠퇴해 가고 있는 문명의 야만적인 면모를 닮아갈 필요가 있는가? 단지 사회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복음주의 전략가들과 약삭빠른 교회 지도층들이 조언하기를 교회는 현시대의 문화와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 당신도 분명히 이러한 토론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병 속에 담긴 메세지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현세대의 반문화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이상 목회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만일 우리가 복음을 현시대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며, 기독교를 새로운 세대에 맞게 재구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젊은 청년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시대와 발을 맞추어 가야한다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무(無)스타일이야 말로 복음의 전파에 가장 큰 위협이고 교회가 그 효력을 잃게되는 실제적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로 자신이 세속화된다는 문제를 크게 문제삼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쿨~하게 보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주류에 속한 복음주의 운동은 이미 반세기 전에 세속주의에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수십년 전에 이미 실용주의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1985년 이후 눈에 띄게 성장한 모든 유명 초대형교회들은 이 실용주의 철학위에 세워졌으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중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 주어 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 남은 중요한 문제는 정말 효과적인게 무엇이냐 이다.

대다수의 교회들은 고의적으로 문화적이고 싶어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현재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트렌드를 쫒는 신세대 교회 설교자들을 보고 있다. 그들은 모든 대중적 스타들과 내용들을 언급하고, 모든 잡다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모든 무미건조한 풍류를 쫒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속적 풍속의 변덕스러운 환상과 허망한 트렌드를 쫒는 것이다.

세속적인 설교자들은 길을 벗어나 육욕적인 의견을 표면적으로 들어내고 있다. - 심지어는 설교 가운데서 말이다. "문화"를 빙자하여 그들은 자신들도 사람들이 최근에 MTV(음악프로그램)에서 본 프로그램들을 보았노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최근 텔레비젼 드라마의 주요 주제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최신 가요와 헤비메탈을 들었으며 소위 말하는 성인영화들을 수도없이 보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유행의 최신과 과거, 앞과 뒤, 처음과 나중을 모두 알고 있는 듯이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언어들과 스타일을 도입한다. 심지어는 정숙한 사회모임에서 쓰기 어려운 저질의 언어도 서슴지 않고 쓰고 있으며 이를 강단에서 유감없이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으며 사람들이 이를 통해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한다.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은 이와 같은 사상의 대표적인 주자이다. 그는 매우 효과적인 대화창구이다. 밝고 재치가 넘치며, 영리하고, 웃기고, 통찰력이 가득하고, 세속적이며, 저속하며, 일부러 사람들을 놀래키고,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그의 구원관은 정확히 옳다, 하지만 이는 그의 세속적 취향과 더불어 더욱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애틀에 있는 드리스콜의 교회는 "저속한" 교회 음악의 탄생지이자 이러한 류의 문화들이 숨가쁘게 배출되는 근원지이다. 드리스콜의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적인 언어들은 "저속함을 지난"듯 하다. 그의 언어들과 설교들은 일부러 정제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최신 재즈음악의 가사에 나오는 저속한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날드 밀러(대중적인 작가이자 "떠오르는 교회"운동의 아이콘격인 사람으로 드리스콜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는 드리스콜에게 " 입이 걸한(cussing pastor) 목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드리스콜이 개인적인 담화에서 어떤 말을 하는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설교 몇 편을 들었으며 공정하게 평가한 결과 그는 소위 말하는 외설적인 말들-방송에서 금지된 말들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즐겨쓰는 단어와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쓰기에는 부적절한 품위가 없고 예의바르지 못하며, 원색적인 것이었다. 내가 들은 모든 메세지들 속에는 적어도 설교 단상에서 쓰기에 벗어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드리스콜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들 중에는 내가 대중적으로 언급하기에 꺼려지는 것들이 있다. 그렇기에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내 몇 블로그에서 논하여 진 바있다. 올해 초 팀 챌리는 드리스콜의 저속한 경박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그의 빈티지 지저스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드리스콜의 언어적 문제가 아니다.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에 관한 것이며 이는 사회를 쫒아 로마서 1장의 길을 따라 "문화를 따라잡자"를 목표로 삼는 것이다. 우린 우리 문화의 어두운 면에 과잉적으로 노출될 수 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오늘날 오락적 문화에 깊이 빠진 채로 영적으로 건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을 한번 다루어 보자. 세상의 가장 호감있는 유행들 중 많은 부분은 독성이 있으며 우리 사회가 죽음의 소용돌이에 더욱 휘말릴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 속에 잠겨 있을 때에는 그 효력을 즉시 알아챌 수 없으며, 그 영혼을 죽이고 파괴하는 피할 수 없는 오염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죄악적 세속의 풍류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로마서 1장 끝부분에는 이러한 자들을 정죄하고 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비록 누군가 이러한 세속주의와 함께 훌륭한 조직 신학과 대속적 구원을 결합시키고자 할지라도, 건전한 신학적 교리는 결코 이러한 실용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사악함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따라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건전한 성경적 교리는 무시되고 모욕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예에서 배울 수 있다. 그는 아레오바고(아레오바고의 뜻은 마스의 언덕, Mars Hill- 드리스콜이 목회하는 교회이름, 역자주)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했다. 사도행전 17:16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바울이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희랍의 학문을 통해 자신의 말할 바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단순한 언어를 통해 선포하였다. 또한 그의 말을 들은 청중들 중 몇은 이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18절) 이것이 바로 얘견되는 바이다. 예수님을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요한복음15:18-19)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는 우리의 세상에 대한 자세와 정당한 관계성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14-16)

주님께서는 언제나 신자들이 세상에 있을 때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들이 신실하게 살려 한다면, 세상은 핍박과 증오의 장소가 될 것이다. 결코 편안한 곳이 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우리의 성화를 위해 간구하셨다. (요한복음 17:17-19)

경건에 대한 "저속한 " 접근방식의 문제는 그것이 성화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들은 몇 편의 설교중에서 드리스콜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성화가 자신의 어깨 높이 밖에 진전되고 있지 않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대속적인 구속은 그의 제자들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표방하는 라이프스타일은 - 특히 그의 더러운 세상 문화에 대한 친근감 - 실제적으로 온전한 성화에 결코 이룰 수 없음을 보장해 준다.

나는 솔직히 어떻게 성경을 마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감히 "문화적으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사회의 저속함에 참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저속함과 문화는 우리의 삶과 정 반대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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