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교만

 

조나단 에드워즈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탄의 손에서 멀어지게 하는것은 없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잠언28:23)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교만"이다

교만이 무서운 것은 어떤 다른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질병이 먼저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어떠한 영적인 질병도 치료될 수가 없다

교만보다 더 자가 당착에 빠지게 하고 찾아내기 힘든것은 없기 때문이다

 

영적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그러한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것은 다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리는 것이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드린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데 매우 주의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님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은 걷고있다고 생각되면 그는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중구할 것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은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 자 들뿐 아니라 자신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비꼬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은 항상 자신의 죄악됨과 비천함에 압도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그러므로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또한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타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다른 방식으로 말하게 하고

표정과 행동속에 나타난다,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의 세상적인 의무를 충실히 다하지만

그는 홀로 천국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것의 나중이 되려하며,양보하고,따르고,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때,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 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있으며 만일 자신에게 마땅히 할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악한 감정을 갖는다

 

<죠나단 에드워즈 영적교만중에서

 

출처: 개혁주의마을/Jennifer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청교도 1세 목사인 아버지와 역시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11명의 자녀중 귀한(?) 외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신학자이며 저술가이며 영적 부흥을 주도한 목회자로서 더욱 나타난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목회했던 노스 햄프턴은 대각성 운동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250년이 지난 오늘날 노스 햄프턴은 타임지에서 '레즈비언의 수도'로 손꼽혔으며, 매사추세츠는 미국 최초로 동성애자의 결혼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인 목회자들이 가서 기도할 제목이다.

1. 조나단 에드워드 기념교회

조나단 에드워드는 미국의 1차 영적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으며, 1차운동은 2차 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을 가게되고 평양대부흥운동과도 연결이 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기념교회에서 한인목사들이 모여 그에 대한 소개를 듣는 것도 의미가 적지 않다.

2. 노스햄프턴 제일교회

걸어서 기념교회 옆에 있는 노스햄프턴 제일교회(The First church, North Hampton)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지난해에 이어 문석호 목사(뉴욕효신장로교회)가 세미나를 인도한다.

이 교회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23년동안 사역했던 교회이다. 그는 예일대학 설립자중 한 사람이었던 목사의 딸인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하였으며, 장인이 소천하고 이어 30세에 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적색 오래된 벽돌건물인 노스햄프턴 제일교회의 앞에는 "1727-1750, 조나단 에드워드가 설교했던 제 3 예배처"라는 표식이 있다. 예배당 안의 에드워드를 소개하는 작은 액자들이 있다. 현재의 예배당은 2번의 화재로 새로 지었으며, 400여석 정도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23년간 몸담았던 제일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에드워즈는 교인들이 익숙해진 기준보다 훨씬 높고 엄격한 확실한 회심과 그 회심의 열매가 있는 사람으로 제한하는 기준을 고집했다.

3. 조나단 에드워드의 기념비

버스로 10분정도의 거리에는 인근의 묘지에는 에드워즈 기념비가 있다. 비바람에 씻긴 초라한 기념비는 비문조차 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에는 그의 11명 자녀들과 후손들의 무덤이 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묘지는 이곳에 없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1758년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됐으며, 총장으로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55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에드워드 부부의 묘지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묘역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70조 결심문

1. 나의 전생애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지금 당장이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수많 은 세월이 지나가든지 간에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말자.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인류 전체의 행복과 유익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내가 부딪히게 될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그 어려움이 아무리 많고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자.

2. 전에서 언급한 사항을 잘 지키기 위해 도움을 주는 어떤 새로운 수단이나 방 법을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노력하자.

3. 혹시라도 내가 넘어져 점점 무감각해져서 이 결심문 중의 어떤 내용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회개하자.

4.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영혼에 관계된 것이든지 육체에 관계된 것이든지 또는 적든지 많든지 간에 어떤 것이라도 절대로 하지 말자. 만일 내가 그런 일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자.

5.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6.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살자.

7. 만일 내 생애의 최후 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면 절대로 하지 말자.

8. 모든 면에서,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도 나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는 것처 럼,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범한 것 처럼 행동하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계기로 삼고, 나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기회로만 삼자.

9. 매사에 나의 죽음과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자.

10. 고통스러울 때는 순교의 고통과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자.

11. 해결해야 할 어떤 신학원리가 있을 때, 만일 상황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 문 제 해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즉시로 하자.

12. 만일 내가 교만이나 허영이나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좋아하 고 있다면 즉시로 그런 것들을 버리자.

13. 도움과 사랑을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자.

14. 절대로 복수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지 말자.

15. 비이성적인 인간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화라도 내지 말자.

16. 절대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자. 그렇게 하는 것은 다수간 다른 사람을

불 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며, 실제로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17. 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일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자.

18. .내가 최고로 헌신한 상태일 때, 그리고 내가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가장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때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게 살자<

19.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기 전, 최후의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라고 가정하고 그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말자.

21. 먹고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절제하며 살자.

22.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나의 힘, 능력, 활력, 열심, 적극성을 다하여 가능한 한 천국에서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이 생각되는 일을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행하자. 그리고 그 일의 원래 의도와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을 파악하자. 만일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을 '결심문4'를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자.

24. 내가 어떤 현저한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추적 하자. 그런 다음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나쁜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과 내 힘껏 싸우도록 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 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25.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 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26. 내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들을 발견하면 버리자.

27. 절대로 고의로 어떤 일을 태만하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태만은 예 외지만, 자주 내 태만을 점검하자.

28. 성경을 아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자주 연구하자. 그렇게 해서 깨닫고, 쉽게 이 해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라가자.

29. 절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도라 고 생각하거나 기도로 인정하거나 기도의 간구라고 하지 말자. 또한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죄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30. 지난주보다 신앙과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매주 노력하자.

31. 결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어떤 말을 하지 말자. 그러나 성도의 명예를 아주 실 추시키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아주 저해하는 것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

32. 잠언 20장 1절에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기록된 것이 나에게 해 당하는 말이 되지 않도록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내 신념에 충실하자.

33. 다른 면에서 지나친 손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언제나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유지 하고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자.

34.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참되고 단순한 진실만을 말 하자.

35. 내가 지킨 의무에 대해서 의심이 많이 생길 때마다 그 일로 내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함이 깨어지면 의문 사항들을 기록하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강구 하자.

36.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말자. 단 그렇게 하는 것이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경우는 예외다.

37.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 가 자신을 부인했는지 등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또한 매주 말, 매월 말, 매연 말 에도 그렇게 하자.

38. 일에는 절대로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를 하지 말자

39. 절대로 합법성에 의문이 많이 제기되는 일을 하지 말자. 동시에 그런 일을 하고 난 후에는 그 일이 합법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조사하자, 또한 만일 내 가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합법적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일도 마찬가 지다.

40.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보자.

41. 매일, 매주, 매달, 매해의 마지막에 어떤 면에서 더 낫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 렇지 못했던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42. 세례 받을 때 하였고, 성찬식 할 때 진지하게 하였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종종 새롭게 하자. 그리고 오늘 1월 12일 나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였다.

43.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양 행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인양 행동하자. 토요일에 깨달은 것과 일치하게 행동하자.

44. 다른 어떤 목적도 아닌 신앙만이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자. 신앙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동하지 말자.

45. 신앙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쾌락이나 고통, 기쁨이나 슬픔 등을 느끼지 말자. 어떤 감정도, 조금의 감정도 품지 말자. 그리고 그런 것과 관련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자.

46. 부모님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심려도 끼쳐 드리지 말자. 가능한 한 말이나 눈동자 에 전혀 내색을 하지 않도록 해서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특히 가족중의 누구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조심하자.

47.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선하고, 보편적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고, 조용하고, 평화롭 고, 만족하고, 편안하고, 자비롭고, 관용적이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적이고, 의무를 다하고, 부지런하고 근면하며, 자애롭고, 침착하고, 인내하고, 절제하고, 용서하고, 진지한 성품에 도움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지 말자. 그리고 항상 이러한 성품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매 주말마다 내가 그렇게 실천했는지 여부를 엄격하게 점검하자.

48.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알기 위 해서 그리고 내가 임종의 순간에 이 문제에 대해서 회개할 무관심의 죄를 조금 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아주 세밀하고도 부지런하게 그리고 가 장 엄격하게 내 영혼의 상태를 조사하도록 하자.

49. 만일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절대로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자.

50. 내가 내세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한 것이 최선이었고, 가장 지혜로운 것이었다 고 판단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자.

51. 죽을 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것 처럼 모든 면에서 그렇게 하자.

52. 나는 종종 노인들일 자기가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겠다라고 말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노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때 가서 '내가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일들을 하자.

53. 내가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일 때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내 영혼을 주 예수 그 리스도께 던지고 맡기자.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자. 완전히 주님께 헌신하자. 이 로써 내가 나의 구속주를 알므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54.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내용을 들을 때마다 나도 그런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그 일을 본받도록 노력하자. 1723년 6월8일

55. 이미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을 맛본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56. 아무리 내가 실패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부패와의 싸움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말 고 조금도 긴장을 풀지도 말자.

57. 불행과 불운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 내 의무를 다했는가를 돌아보고 의무를 다 하도록 결심하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 자. 할 수 있는 한 나는 내 의무와 내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자.

58. 대화를 나눌 때 불쾌하거나 초조하거나 화를 낸 표정을 짓지 말고 사랑스럽고 즐거우며 친절한 모습을 보이도록 하자.

59. 나쁜 성질과 분노가 가장 많이 치밀어 오르려고 할 때, 가장 많이 노력해서 좋은 성경이 드러나도록 행동하자. 그렇다. 그럴 때 비록 다른 측면에서 불이익이 있 을 수도 있고, 다른 때는 경솔하게 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성격을 드러 내도록 하자.

60.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기 시작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 아주 불편한 마음이 생기거나 감정이 밖으로 일관성 없이 표출될 때는 내 자신을 엄격하게 검사해 보자.

61. 핑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사실 게으름은 핑계 거리를 만들도록 하는 경향이 있 지만- 신앙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내 생각을 흐트러 뜨리고 풀어지게 하는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62. 결코 어떤 일을 의무감으로만 하지 말고, 에베소서6:6-8에 따라서 기쁘고 자원 하는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 어떤 선 한 일을 하든지 간에 그는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자.

63. 어떤 순간에도 모든 측면에서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환경 하에서도 언제나 성도다운 참 빛을 비추며, 탁월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참으로 완벽한 성도가 세상에 단 한 명 있다고 가정할 때,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자.

64. 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시편 기자가 시편119:20에서 말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 을 다하여 이것들을 향상시키도록 하자. 또한 나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이 약 해지지 않도록 하자.

65. 전 생애 동안 이것을 있는 힘을 다해 연습하자. 즉 맨톤 박사의 시편 119편 설 교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나의 모든 죄와 유혹과 어려움과 슬픔과 두려움과 희망과 소원 그리고 모든 것과 모든 상황 속에서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열어 놓자.

66. 어느 곳에서나, 어느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항상 친절한 태도와 분위 기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자. 의무상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는 예외다.

67. 고난 후에는 고난으로 인해 내가 더 나아진 점이 무엇인자. 어떤 유익을 얻었는 지,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도록 하자.

68. 약점이든지 죄이든지 간에 내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에게 솔직히 고백하자. 만일 그것이 신앙에 관련된 것이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필요 한 도움을 간구하자.

69.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볼 때, 나도 저렇게 했으면 하는 것들을 항상 행하도록 하자.

70.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자.

ⓒ 아멘넷 뉴스 7주년(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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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일 4:6이 말하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영의 이름을 토대로 영들을 판단하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6절은 한 영을 "진리의 영"이라 칭하고 있고 다른 영을 "미혹의 영"이라 일컫고 있다.

 

이 용어들은 성령의 사역을 흉내내는 다른 영들과 성령 그분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떤 영이 역사하여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고, 사람들에게 진리에 속한 것들을 일깨워 준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로 성령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의식하게 되었다면, 인간의 삶이란 것이 극히 짧고 일순간에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내세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자신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바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해명해야 할 날이 온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요, 그 행위 또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인간은 그 본성이 무기력하여 자신을 구원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건전하고 올바른 교리가 그들을 인도하고 있다면, 바로 그 때, 우리는 성령께서 그들 심령 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은 흑암의 영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신다. 사단의 왕국을 일컬어 흑암의 왕국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단의 왕국은 흑암과 거짓으로 지탱되고 있다. 성경은 사단이 자기 나라를 흑암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 백성들을 흑암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눅22:53, 골1:13). 성경은 귀신들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흑암의 권세 잡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고 우리의 어둠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로지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 [부흥을 원하면 고정관념을 버리라],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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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만

 

조나단 에드워즈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단의 손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Edwards)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편만하면서도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교만이다. 이 문을 통해 사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심히 바라는 신자의 마음에 들어 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는 이 통로를 통해 마음을 검게 하며,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 손잡이를 이용해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게끔 만든다. 이 질병이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질병 역시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

 

교만은 어떤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만함은 자신을 너무나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 잣대가 이미 생각의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높은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교만보다 더 자가당착에 빠지고 찾아내기 힘든 것은 없다. 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린다는 것이다.

 

교만함은 많은 모양과 형태로 나타나 양파껍질처럼 여러층을 마음 속에 이룬다 - 한겹을 벗기면 바로 다른 껍질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을 가장 최선의 노력을 통해 살펴보아야 하며 모든 힘을 다해 마음의 탐사자(성령)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영적교만은 그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직관적인 판단으로는 구별해 내기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열매와 결과를 보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열매와 좋은 대조를 이루기에 함께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매우 주의 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민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궁구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위선자의 불행한 망상과 죽은 경건함의 비꼬는 태도이며, 수많은 신자들의 거룩함에 반대한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이와 달라서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잠잠하거나, 그들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얘기한다. 교만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 은혜안에서 진보가 적다고 헐뜯으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 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자들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겸손한 자들은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비상한 발견을 하였을 때에라도 자신의 죄악됨과 천함에 대해 압도되어 있다.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 타인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게하고 표정과 행동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비록 자신의 세상에서의 의무에 충실할 것이지만 홀로 천국을 향해 걸어 간다. 온 세상이 그를 저버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 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의 나중이 되려하며, 양보하고,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 때,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자신에게 표해야 할 마땅한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갖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위험성을 경고한 후에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1.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한다.

 

2.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결점에 대해 가혹하게 비난한다.

 

3.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독특하게 과시하고자 한다.

 

4.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분리시키려 한다.

 

5.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반대와 공격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6.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비난당할 때, 비난당하는 일을 더욱 열성적으로 한다.

 

7.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너무 자만하다.

 

8.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주목받고 존경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9.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소홀히 한다.

 

10.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과는 어떤 대화나 토론도 거부한다.

 

 

- 조나단 에드워즈의 [균형잡힌 부흥론] 중에서...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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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만

 

조나단 에드워즈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탄의 손에서 멀어지게 하는것은 없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잠언28:23)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교만"이다

교만이 무서운 것은 어떤 다른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질병이 먼저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어떠한 영적인 질병도 치료될 수가 없다

교만보다 더 자가 당착에 빠지게 하고 찾아내기 힘든것은 없기 때문이다

 

영적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그러한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것은 다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리는 것이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드린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데 매우 주의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님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은 걷고있다고 생각되면 그는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중구할 것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은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 자 들뿐 아니라 자신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비꼬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은 항상 자신의 죄악됨과 비천함에 압도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그러므로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또한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타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다른 방식으로 말하게 하고

표정과 행동속에 나타난다,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의 세상적인 의무를 충실히 다하지만

그는 홀로 천국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것의 나중이 되려하며,양보하고,따르고,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때,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 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있으며 만일 자신에게 마땅히 할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악한 감정을 잦는다

 

                                                     <죠나단 에드워즈 영적교만중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

노병기 박사


페리 밀러는 ‘청교도주의는 곧 에드워즈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밀러의 말은 옳다. 청교도주의의 정신을 가장 심오하게 구체화시킨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청교도 신학은 거듭남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지향성으로 인해 ‘거듭남의 신학’이라고 칭해져 왔다.1) 특히 에드워즈는 철저한 중생 체험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입장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많은 점에서 존 오웬의 중생론을 닮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성령(새로운 원리)의 주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오웬의 중생론과 같다. 에드워즈는 죄에 대한 각성의 상태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과 은혜의 주입(즉, 새로운 원리의 주입)에 ...
의하여 지각과 의지와 성향, 행동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오웬과 똑같다.

1. 거듭남의 정의 :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

에드워즈에 있어서 거듭남이란 성령의 부으심이요, 놀라운 변화를 초래하는 신적인 역사다.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면, “거듭남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great) 변화”를 의미하며, “사악한 자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2)

사람이 거듭날 때 먼저 성령이 주입되는데, 이때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며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3) 이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을 주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4) 이러한 신적인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주입으로 일어나는 위대한 마음의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하였으며, 그것은 회개, 회심과 같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회개와 회심을 같은 말로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행 3:19)이 그것들을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백히 많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metanonia(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회심(conversion)이란 단어도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변화 혹은 전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거듭남이란 용어는 특별히 마음의 수동적인 측면에서 본 변화입니다).”5)

에드워즈는 거듭남과 회심과 부르심과 성화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부르심과 회심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구절에서 부르심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역사입니다.”6) 또 그는 초기 성령이 주입되면서 ‘거듭남’과 ‘성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 혹은 하나님의 사랑은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면서 생명의 원리로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성화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그들에게 부으십니다.”7)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화를 거듭남 이후에 오는 일평생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하기도 하였다.8)

2.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주어지는 거듭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생각이 에드워즈 신학의 전반에 흐르는 중심축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의지하는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God Glorified in Man’s Dependance, 1731)이라는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구속의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하신 것입니다.”9)

에드워즈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그가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3. 성령의 내주 : 생명의 원리

에드워즈는 성령님께서 주입되자마자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신다고 했다.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성향과 모든 은혜가 주어지고 지속된다.”10)

성령님께서는 내주하시는 분이 되셔서 영혼 안에 ‘생명의 원리’가 되신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은 거듭날 때에 “초자연적인 원리가 주입된다(infused).”11)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적인 원리가 되신다.12) 사람이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될 때 “지각과 행동에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13) 거듭날 때에 은혜의 주입으로 이러한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웬의 가르침과 똑같다.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내주하는 생명의 원리로 행동”하신다는 것은 에드워즈 중생론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14)



4. 주입된 경향성

에드워즈의 경향성의 문제가 그동안 에드워즈 학자들 사이에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과 획득되는 경향성의 구별을 어떻게 했는가?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의 필요성을 말하고, ‘획득되는’ 경향성을 부인한다. “주입된 경향성(Infused Habits): 차츰 선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악한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이 선해진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정죄의 상태에 있는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구원의 상태에 있는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경계선에 있는 그 한순간 전에 죽으면 지옥에 가고, 한순간 후에 죽으면 천국에 가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그전보다 엄청나게 나은 사람이 되는 한순간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획득되는 경향성의 개념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15)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은 성령의 주입으로 인해 즉시에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이지, 어떤 인간적인 설득에 의해 점차적으로 새로운 경향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5. 주입의 첫 역사인 성령의 조명

에드워즈가 성령의 주입과 성령의 조명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의 말을 보자.

“회심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기초이다―마음의 기질과 성향(disposition)과 영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수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영혼 속에 내주하시면서 생명과 행동의 원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본성이요 신적인 본성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됨으로 신적인 빛을 받아들입니다. 신적인 것들이 이제는 탁월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되지 못한 상태였을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첫 번째 활동, 혹은 신적인 기질이 발휘하는 첫 번째 활동은 영적인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 즉 영적인 것들에 대한 영광과 탁월함을 지각함에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의 어떠한 타당한 행동보다 앞섭니다.”16)

이로 보건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주입이 먼저이고 조명은 주입의 결과이다.17) 에드워즈의 주입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고 이해와 행동의 새로운 원리로 작용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명은 주입의 결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새로운 이해의 원리로 역사하신 결과이다. 물론 주입과 조명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그림 3〉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 주입과 조명의 관계

성령의 주입



( 성령의 내주) ┌─ 이해의 원리 → 조명(sense of heart=믿음) → 칭의

새로운 원리─┤ ↓

(새로운 본성) └─ 의지와 성향, 행동의 원리 → 새로운 의지, 성향 , 행동



6. 거듭남과 믿음과 칭의의 관계 ― 거듭남의 선행성(先行性)

에드워즈는 거듭나야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성령의 주입으로 오는 믿음을 말한다. 에드워즈가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도 믿음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믿음은 주로 거듭남 후에 오는 신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다.

⑴ 믿음의 정의 : 그리스도를 보는 것

성령이 마음에 부어지면 “신적인 일들의 거룩함 혹은 도덕적 완전함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이 생긴다. 에드워즈는 이 ‘마음의 감각’이 곧 믿음이라고 하였다.18)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로운 감각이라는 사상을 『신앙 감정론』을 대표하는 독특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드워즈의 전체 작품 가운데서 어떤 사상도 이보다 더 창조적인 것은 없으며, 청교도적 신앙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 교리보다 더 광범위한 것은 없다.”19)

에드워즈는 '믿음'을 새로운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특권을 수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아들을 보고 믿는’(요 6:40)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고후 3:18 ; 4:6).”20)

⑵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

에드워즈는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와야 된다고 했으나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를 동시에 가르쳤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 모두가 전가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개인적 순종과 고난이 우리의 순종과 고난으로 판단됩니다.”21)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서 놓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한다.”22)

⑶ 칭의 얻는 믿음

에드워즈는 칭의 이전의 인간의 선행의 공로를 분명히 거절한다. 가령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이나 작은 선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23)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이 칭의에 근거가 되지 못하고 전가에 의한 칭의를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칭의를 얻는 믿음의 본질에 사랑과 회개가 포함된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사랑은 참된 살아 있는 믿음의 요소이며, 참된 믿음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실제적인 믿음에 있어서 생명이요 영혼”이다.24) 그는 사랑뿐 아니라 ‘회개’도 칭의 얻는 믿음의 본질이라고 했다.25)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모든 죄의 길에서 돌아설 것을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원치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죄에서 구원하는 구주로, 죄의 길에서 구하시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분리되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죄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6)

(4)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행동으로서의 믿음

믿음이 칭의의 조건인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결코 믿음 안에 존재하는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도덕적 적합성, moral fitness)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이 맺고 있는 관계(자연적 적합성, natural fitness)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27) 에드워즈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믿음은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어떤 행동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어떤 행동”이다.28)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적극적으로 연합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 행동” 자체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함으로써 법적인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에 있는 실제적 연합이 법적인 것의 기초입니다.”29) 에드워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했다. “믿음은 지고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소유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값 주고 사신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하는 것입니다.”30)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⑸ 믿음에 앞서는 성화(중생)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데 믿음과 칭의가 성화보다 앞서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성화가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동이 있기 전에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뒤이은 행동이 있기 이전에 먼저 죄인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결이 발휘되어지기 전에 먼저 성결의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믿음의 행동이 있기 전에 본질적으로도(in nature) 어떤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성공적인 행동이 되려면, 시간적으로도(in time) 먼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정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 즉 그에 대한 적합하고도 진실로 사랑하는 개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혼이 성화되어지기 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31)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명은 성화를 칭의보다 앞세우는 약점이 있다.



7. 중생 체험의 성질 : 초자연적으로, 총체적으로, 즉시에 주어지는 중생

에드워즈는 중생을 ‘새 창조’로 말하였는데, 새 창조의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그리고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32)

⑴ 에드워즈는 첫째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중생’을 말했다. 그가 새 창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즉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33) 즉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명백해지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성도들이 받는 그 은혜로운 감화와 그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효력들은 전적으로 본성 그 위에서 나는 것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 속에서 발견하는 어떤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는 본성적 원리들을 행사하여 얻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34)

에드워즈는 죄인에서 성도로 바뀌는 이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물리적인(physical) 변화”35)라고 말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의 어떤 직접적인 영향이나 활동이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창조된 존재에게 조금이라도 임한다면, 사도 시대 이후로 그것은 물리적인 임함입니다. 만일 그것이 어떤 동기들을 일으키는 생각 중에 역사하든지, 어떤 점에서건 어떠한 효과를 낳거나 촉진하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여전히 물리적입니다. 어느 점으로나 그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기질이나 본질이 즉시 변한다고 가정한다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36)

⑵ 에드워즈는 둘째로 ‘총체적 중생’을 말했다. 그는 중생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 때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격 전반에 걸친 변화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새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속만 새 것이 아니라, 바깥도 새롭게 된 자입니다. 그들은 영과 혼과 몸 전체가 통틀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와 새로운 혀와 새로운 손과 새로운 발을 가졌습니다. ― 즉 새로운 대화 내용과 새로운 생활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합니다.”37)

⑶ 에드워즈는 셋째로 ‘즉시적 중생’을 말했다. 그에 의하면, 회심은 “즉시에” 이루어지는 역사이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다.38) “회심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의 준비 단계인 지식, 개혁, 그리고 죄의 깨달음은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회심 이후에 따르는 은혜의 역사도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전적인 부패와 타락의 상태로부터 건짐을 받아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소유하게 되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수단인 ‘회심’이라는 이 은혜의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39)

8. 중생의 표지 :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 나오는 진정한 거듭남의 표지

에드워즈는 누가 참된 중생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연구를 많이 했다. 그 결실로 나온 책이 『신앙 감정론』이다. 새뮤얼 홉킨스(Samuel Hopkins)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는 일에 있어서 에드워즈만큼 힘을 쏟은 사람이 없고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신앙 감정론』은 본래 베드로전서 1장 8절을 본문으로 해서 1743년에서 1746년 초까지 노샘프턴에서 전했던 연속 설교인데, 후에 수정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1746년에 발행되었다. 에드워즈는 처음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들’의 본질과 표지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고백했다.40)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론』을 3부로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는데, 1부는 정서가 종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루었고, 2부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라고 볼 수 없는 것 12가지를 다루었고, 3부에서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 12가지를 다루었다. 그는 정서(affections)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1)

제1부에서 에드워즈는 종교는 머리보다 마음에 그 좌소가 있다고 말했다. “종교의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좌소가 바로 마음입니다.”42) 이는 메마른 이성주의와 형식주의를 겨냥한 말이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느껴야 하고 체험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못 들을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높은 정서들을 정죄하는 사람은 높은 정서를 갖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신앙적인 정서가 없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신앙적 정서가 없으면서도 신앙적인 정서를 보이는 사람들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전혀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43)

에드워즈는 이와 같이 ‘마음의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한편 제2부에서는 크게 고조된 감정이나 이상한 신비 체험을 은혜의 징조로 보는 열광주의의 오류를 크게 경계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신앙을 통해서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합니다. 기독교회의 시작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사탄은 이런 거짓 신앙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신앙의 소망스럽고도 행복한 부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44) 제1차 대각성 운동 당시 열광주의는 진정한 부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에드워즈는 분명 종교적인 정서이지만 꼭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들로 다음과 같이 12가지를 말하였다.

⑴ 참된 중생을 입증하지 못하는 12가지 표지

첫째,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가 매우 크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인 것을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적이지 못하고 구원과는 아무 상관 없는 종교적인 정서이면서 매우 높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큰 무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며 큰 소란을 떨었습니다. …… 사도 요한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소동을 벌인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에 큰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습니다(요 12:18). 이 때에 큰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치자,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따르는구나.’라고 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한다. “신앙적 정서가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45)

둘째, 에드워즈는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영적인 것이라는 확실한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님은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 대한 커다란 정서로 인해서도 몸이 큰 영향을 받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46)

셋째, 신앙에 대해서 뜨겁게,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해서 꼭 참된 은혜로운 정서를 가졌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지나치게 많이 말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부류의 사람 가운데서 이런 사람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징조이기보다는 나쁜 징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잎이 지나치게 무성한 나무는 좀처럼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사도 유다는 초대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대단한 신앙이 있는 척 가장함으로 잠시 동안 의심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을 ‘저희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유 1:12)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들을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벧후 2:17)라고 말씀합니다.”47)

넷째, 에드워즈는 신앙적 정서와 흥분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자신들이 고안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들이 체험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떤 영적 존재에게서 온 것”일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일 수도 있다. 혹은 “뇌가 병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이상한 생각과 상상”일 수 있다.48)

다섯째, 놀랍도록 성경 말씀으로 마음에 다가왔다고 해서 참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정서라고 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그런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마음 속에 아주 달콤한 약속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약속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내게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성경 본문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그 본문과 연관된 어떤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떠올라서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이런 착각에 빠지는지 설명했다. “이 문제에서 무지하고 또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안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고, 순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체험들은 반드시 옳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성경 이것저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기만하려고 시도했다.”라고 그는 경고했다.49)

여섯째, 에드워즈는 겉으로 사랑의 표시가 난다고 해서 꼭 구원하는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이 있더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갖지 못한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하반절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50)

일곱째,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그는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 가짜가 끼어드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나 사울이나 아합이나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 삼상 24:16~17 ; 26:21 ; 왕상 21:27 ;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우상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에게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기타 “하나님께 대한 감사”, “순간적인 영적 기쁨”, “종교적인 일에 대한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예후(왕하 10:16)와 회심하기 전의 바울(갈 1:14 ; 빌 3:6)과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서처럼(행 22:3 ;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간절한 종교적 갈망”에도 가짜가 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강하게 소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는 아닌 것이다.51) 가짜를 보고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기쁨이 왔다고 해서 (즉, 죄에 대한 각성이 있고 난 후에 평화와 기쁨이 왔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를 입증해 주지는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사람들은 마귀를 통해서도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입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두려움의 정서를 가질 수도 있지만, 마귀에게 그 일이 허락된다면 “마귀도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52)

아홉째, 에드워즈는 종교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외적인 예배의 의무에 많은 열심을 보인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의 성질을 가진 것인지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향은 전혀 은혜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53)

열 번째, 하나님께 찬양을 열심히 많이 한다고 해서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은혜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해서 고조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54) 그러나 나중에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찬양을 열렬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정서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열한 번째, 에드워즈는 자기가 경험한 것이 신적인 역사이고, 또 자신들은 좋은 상태에 있다고 강하게 확신한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잘못된 확신일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위선자가 거짓된 소망으로 확고하게 서게 되면,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소망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참된 성도들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겸비해지지만 위선자들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된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시각이 없습니다. …… 위선자들에게 있는 확신은 죄가 그 확신을 흔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적어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가장 부패한 삶으로 가장 사악하게 살면서도, 자신들의 소망을 담대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55)

열두 번째, 외면적 모습이 아주 감동적이고 참된 신앙인들이 보기에 기쁨을 주는 그런 모습을 지녔다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화려하게 신앙 고백을 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흔한 일입니다.”56) 그는 말한다. “모든 외적인 표현들과 모습에서, 위선자와 참된 성도가 얼마나 비슷합니까!” 외면적인 훌륭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신앙의 진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익은 열매로 판단해야 합니다.”57)

⑵ 참된 중생을 입증하는 12가지 표지

제3부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거듭남의 역사가 주어질 때 나타나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로 다음 12가지를 말했다.

첫째,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감화와 작용’에서 온다고 말했다. 참된 정서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이 영구적으로 거하시기 위해 참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서 또는 생활과 행동의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천으로서 성도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58)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면 전혀 새로운 감각이 생긴다.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은혜로운 역사와 정서 가운데는,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내적인 지각과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 성질과 종류에 있어서 그들이 거룩함을 입기 전에 그들의 마음에 가졌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59)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참된 성도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게,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행사하여 그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마치 꿀을 쳐다보고, 마음으로 그 맛을 상상하는 것과 그 꿀의 단 맛을 직접 맛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과 같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로,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초월적이며,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에 대한 감동’에서 온다고 말했다. 이기심이나 탐욕스런 자기 사랑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하시는 일, 하나님의 방식 등은 참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된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랑스러우신 분이시요,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최고로 사랑스러운 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합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갖게 하는 제일의 요건임에 틀림없습니다.”60)

하나님을 가장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탁월성이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탁월하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아름답고, 빛나며, 영광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감동에서가 아니라 자기 정욕으로,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혜택이 자기 사랑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가 있음을 에드워드는 경고했다.

셋째, 에드워즈는 참된 거룩한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함 중에 특히 “도덕적 탁월함”의 사랑스러움에 그 토대를 둔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적인 완전과 도덕적인 완전 사이를 구분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라 할 때는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행위자로서 발휘하시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 한마디로 그의 거룩하심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나 완전성들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도덕적 선하심이 아니라, 그의 위대하심을 이루고 있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의지하는 주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조나단 에드워드)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9-31)

사도로부터 이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지혜가 크게 논란되는 지역에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도가 이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고린도는 아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여러 세대 동안 세상에서 철학과 학문의 가장 유명한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혜를 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 방식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학식 있는 헬라인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은 소위 자기들의 모든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노력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셨습니다. 사도는 다음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1. 구속의 일에 수반된 여러 가지의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이 자신을 결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2.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이 목적이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람들이 자기들의 선을 위해 구속의 역사 속에서 오직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러합니다.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

첫째로,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타락하고 난 뒤 다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은 바로 그 네 가지 항목에 들어있습니다. 달리 더 작 나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네 가지 모두가 되십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으니’ 그 안에 모든 합당한 총명의 참된 탁월함이 있습니다. 지혜는 헬라인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 참 지혜가 우리의 지성에 분여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우리가 ‘의’를 가지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도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져’(성화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총명뿐 아니라 탁월한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되십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든 비참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모든 복락과 영광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좋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좋은 것이 하나님을 의지함에 달려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이런 은혜를 입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되셨으니.’

셋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 안에 있는 분깃을 얻고, 그를 통해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통하게 하는 믿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성삼위의 각 위를 의지해야 할 필연성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달린 존재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의존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갖는 방편인 믿음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교 리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받으시되, 구속받은 자들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저는 첫째,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둘째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신다는 점을 보여 주겠습니다.

Ⅰ. 구속받은 자들의 절대적이고도 보편적인 교회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방식의 본질과 방도는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일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나 즉각적으로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게끔 하는 데 있습니다. 구속받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그들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어떤 존재가 자기의 선을 위해 다른 존재를 의뢰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좋은 것을 위해 하나님을 의뢰하는 방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에게서 그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그 모든 좋은 것을 받아 가집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을 가지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주어진 ‘선 자체’이기에 모든 선한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은 이런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직접적이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게 됩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총체적 은혜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좋은 것의 ‘원조’이십니다. 우리는 구속주를 하나님께서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구세주를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니 그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께 속하실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직무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실 일을 맡기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구세주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구세주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하실 이를 주시기도 하시고, 구속하신 이가 사신 것을 제공해 주시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우리가 그에게 인도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친밀하게 교제할 믿음을 받아 그 에 분깃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 놓으신 모든 은택을 우리가 받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지옥 불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받으사 구속받은 이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구속받은 이들이 자기들이 모든 탁월한 지혜와 거룩함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 성령께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도 친히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작용과 내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성향과 모든 은혜가 주어지고 지속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은혜를 나누어주실 때에 방편들이 사용되지만, 우리가 이런 은혜의 방편들을 갖게 도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편들을 유효하게 만드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릇이 훌륭해 보배가 담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경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 가지의 규례들을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규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에 달려있습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자들의 모든 충족성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음 사역자들의 성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즉각적인 축복과 감화에 달려있습니다.

① 구속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도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은혜는 주어진 것의 탁월함에 비례하여 볼 때 대단한 것입니다. 은사는 정말 무한하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 은사는 무한하게 가치 있으신 분, 즉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받아 가지고 있는 은택에 비추어 볼 때 은혜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은택은 이중적으로 무한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한한 자로부터 구원을, 바로 그분 안에서 받았다는 데서 그러하고, 영원한 비참에서 구원받았다는 데서 그러하며, 그리고 우리가 또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 은사를 주신 은혜의 처사는 그것을 받은 우리들의 무가치함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은택을 받기는커녕 그 정반대로 나쁜 것만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방식을 감안하여 볼 때도 그 은혜는 위대하며,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 가지는 그 통로가 되는 방편과 방식의 쉬움과 용이함을 생각해도 그 은혜는 역시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를 내어 주시되 육신, 또는 우리 인성을 취하게 하사,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는 없지만 죄 있는 연약의 모습으로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낮고 환란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한 제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은혜를 주셔야 하는 의무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타락한 천사들에게 하신 것같이 타락한 인생들을 물리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회개하기 훨씬 전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만한 매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여러 은택들이 이러저러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 은혜를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하심의 결과로 돌립니다. 그런 면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사람은 이제 타락하기 이전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타락 이전에는 온전한 순종의 보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더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꼭 필요로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 은혜만이 우리에게 영광을 베풀어주고 지옥과 영원한 진노에서 건짐 받게 합니다. 첫 번째 언약 아래서는 의의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주관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고, 우리를 죄책과 무한한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첫 언약 아래서보다 훨씬 더한 것을 위해 하나님이 선하심에 의지하듯이, 우리는 훨씬 크고 더욱 대가없이 놀랍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의지적인 기뻐하심에 더욱 의지합니다. 우리 첫 조상들은 거룩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의존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첫 삶으로부터 원의(原義)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지금과 같은 주권적인 기뻐하심과 선하심의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본시 사람은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거룩하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다운 일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을 거룩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타락한 삶들이 거룩하게 될 때, 그것은 순전히 의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타락한 피조물에게 거룩함을 주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비참해지기 전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의존은 훨씬 더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불충분성과 무능성이 타락하고 모자란 상태에서 훨씬 더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예 나면서부터 죄악적이고 전적으로 오염되고 거룩하게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에 산출되는 효력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사람이 거룩하였고 언제나 그런 거룩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다면, 필연적으로 거룩을 고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간 본성에 절대적인 것으로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현을 받은 다음에야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영접을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비참하고, 후에 행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더욱 분명하게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유의 공력을 인정받을 만한 탁월함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피조물의 탁월성 안에 공로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펴본다 하여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참다운 탁월함 없이 무한하게 괴이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어떤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가, 후에 모든 선한 것으로 부요함을 입었으니 말입니다.

②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받습니다. 사람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일을 은혜에 속한 일뿐 아니라 놀라운 능력에 속한 것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낮고 비참한 깊은 구렁에서 끌어 내사 거룩하고 복된, 높아진 상태로 올려놓는 데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속의 매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한 일의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유지도 하나님의 능력 때문

타락한 사람이 새로 지음을 받지 않고는 참된 거룩에 이를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를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골 2:12, 13)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창조하거나 죽은 몸을 살리는 것 이상으로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통해 도달한 효력이 더욱 크고 탁월합니다. 거룩하고 복된 존재와 회심의 일을 통해 산출되는 영적 생명은 단순하게 존재하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영광스러운 효력입니다. 본래의 상태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상태는 죄 가운데 죽은 상태요,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깊은 비참의 상태입니다. 그 상태는 새로 지으심을 받아 도달한 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되, 그저 죽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태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상태에서 보호받는 것도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라고 베드로는 주장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같이 그 은혜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하나님에 의해 은혜가 유지됩니다. 마치 창공의 빛이 하루종일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새벽에도 낮에도 저녁 석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은혜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 은혜의 역사를 실행에 옮길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죄를 다스리고 자기의 마음의 부패한 성향을 제어하고 거룩한 원리를 증가시켜 선한 역사로 열매 맺게 하는 데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영혼이 온전히 본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또한 영혼을 기쁨과 복락으로 채우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습니다. 그리고 몸이 다시 살고 완전한 상태에 이르러 하나님의 나라의 거민으로서 온전하고 복되고 완전해진 영혼의기구가 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일련의 이러한 행동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일련의 이러한 행동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가장 영광스러운 효력들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범죄하기 이전의 처음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오죽 더 하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의 많은 일들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의 더욱 놀라운 행사에 의지해야 합니다. 처음 범죄하기 전에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효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더 주목할 만하게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믿음의 길에는 크고 어려운 일과 대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부패하여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효력입니다. 호감을 갖고 있거나 대적하는 세력이 전혀 없는 곳에서 거룩을 주는 것보다 사단의 손에서 영혼을 구출해 내고 흑암의 세력에서 그를 건져내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역사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재물을 나누느니라”(눅11:21, 22).

그 사람의 마음에 아직도 저항하는 죄가 남아있고 사단이 모든 힘을 동원하여 훼방하는 가운데서 그 영혼을 은혜와 거룩의 상태 속에 붙잡는 것은, 사단이 사람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에 사람을 범죄하지 않게 지키는 경우보다 더욱 영광스런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모든 선한 것을 위해 하나님께 어떻게 의존하는지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말입니다.

2. 모든 것을 주신 분에게 모든 것을 의뢰함.

자기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의 원조요, 원천일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중보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지혜, 죄, 용서,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 참된 위로와 행복, 영원한 생명과 영광은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중보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 중보자를 통해 얻게 된 것이었기에 우리는 그 중보자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모든 좋은 것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중보자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보자가 구속하여 놓으신 것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중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대상인 물과 본질인 샘은 같다.

우리의 복락들은 구속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들입니다. 그 구속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 복락들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르는 분을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값을 받고 사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을 주고 사시는 분도 되고, 그 값 자체도 되십니다.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라는 말씀과, 그리고 9장 26절의 “이제 저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라는 성경 말씀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드려진 것은 인성(人性)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성은 신성(神性)을 가진 인격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성은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좋은 것을 가질 때, 우리는 첫 사람의 최초의 상태와 다른 국면에서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 때에는 사람이 자기의 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한 것을 받기 위하여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을 받는 원천으로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당시 첫 사람이 무죄한 상태에서 의존하였던 저가의 의는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자기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 의는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곧 바로 하나님’만 의지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의지하는 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義)’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23장 6절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명칭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속함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통하여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3.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복락의 생명수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선이십니다. 구속받은 자들의 선은 대상도 되고 본질 그 자체도 됩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대상으로서의 선이라고 할 때는, 구속받은 자들이 행복하게 소유하고 누리는 외적인 좋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유한 본질적인 선이란 그 영혼 자체 내에 있는 탁월함이나 즐거움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두 방면 모두에서 자기들의 좋은 것을 다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님 자신이 그들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좋은 것입니다.

①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들의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집니다. 그들 구속받은 자들은 구속을 통해 소유하고 누리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선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시고 사신 모든 선한 것의 총체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업이십니다. 또한 성도들의 영혼의 분깃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요, 보화요, 그들의 식물이며,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시요, 그들의 장식이며, 면류관이요, 영원한 명예와 영광이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죽을 때까지 받는 위대한 선이시며, 세상 끝에 부활하게 되어 만나는 위대한 선인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하늘의 예루살렘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의 가운데로 흐르는 생명수 강이시며’ 그 동산 가운데서 자라는 생명나무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은 성도들이 마음을 언제나 새롭게 하고 위로해 주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영원한 잔치상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다른 것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 천사들과 서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것들 속에서 즐거워하거나, 또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②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의 모든 ‘본질적인’ 선을 가지게 됩니다. 본질적인 선은 두겹입니다. 그것은 탁월한 것이기도 하고 즐거운 것이기도 합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여 받기도 하고 하나님 안에서 소유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께 참여함을 통하여 영적인 탁월함과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탁월함을 전달받아서 탁월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아름다우심, 곧 당신의 아름다운 형상을 그들의 영혼에 투영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벧후1:4).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존재들입니다(히12:10).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기쁨을 전달받음으로써 아름답고 복된 존재들이 됩니다. 마치 달이나 항성들이 태양 빛으로 말미암아 밝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영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분출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에 있어서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고 하나님께 참여합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와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탁월함과 복락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들은 성령을 힘입어 존재하고 그들의 원리이신 성령 안에 존재합니다. 성령께서는 거주하시는 분이 되셔서 영혼 안에 생명의 원소가 되십니다. 영혼 안에, 영혼에 대하여, 영혼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물이 샘에서 비롯되듯이 당신 자신을 전달하시고 역사 하심으로써 참된 거룩과 기쁨의 샘이 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속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7장38, 39절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는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우리를 사신 모든 것의 총체는, 4장에서 말한 샘물이고 7장에서 말한 생명수 강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받게 될 모든 복락의 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입니다(계22:1).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요한복음 7장 38, 39절에서 생명수의 강으로 설명되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복락의 강수’라고 불리워집니다.

장차 받은 은혜가 더 크다

여기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충만한 선이 그 내용이 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전달받는 것은 성령의 참여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그의 충만하심을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기업의 총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소유하는 적은 성령의 은혜(앞으로 받을 것과 비교할 때 적다는 것임-역자주)를 가리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의 보증이라고 부릅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라고 기록하였으며, 5장 5절에서는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13절, 14절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성령과 선한 것들을 성경에서는 같은 것으로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성령께서 영혼을 향하여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함하여 주시는 것같이 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말씀하시며,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사 확보하여 우리에게 주신 복락의 총체요, 복음적 약속들의 주인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우리로 하여금 …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갈3:13,14)라고 하였으며,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는 ‘약속의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의 일을 마치시자마자, 당신이 구속하신 모든 이들에게 즉시 건네 주신 바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2:33)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따라서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거룩과 행복이 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 거룩과 행복은 다 하나님의 성령의 교통하심과 내주하심과, 역사하심 속에 있습니다. 거룩과 행복은 이 세상과 내세에서 다 성령의 열매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속주(救贖主)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구속주로 말미암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구속자이시며, 구속의 값이 되십니다. 그리고 또한 구속의 값을 주고 사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의 성경 구절에서 ‘그에게’라고 번역된 헬러어는 ‘그 안에서’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고전8:6).

Ⅱ. 구속의 역사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편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곧, 구속받은 자들이 그렇게 크고 보편적으로 당신을 의뢰하는 것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입니다.

1. 은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충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모든 충만하심을 주목하고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기에 그 완전하심과 충만하심을 주목하고 인식할 당위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더 크게 의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기울이는 관심은 커지게 되며,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주목하여 인식하는 기회는 많아집니다. 그런 논리로 더 나아가서, 성삼위의 격위(格位)들에 속한 신적인 완전하심들을 더욱 크게, 더욱 절대적으로 의뢰하면 할수록, 그 각 격위가 가지신 신적 영광을 관찰하고 인정할 기회를 더욱 많이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더 세심히 관찰하고 한번이라도 더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특별하게 주목되고 관찰되도록 우리 마음이 기웁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의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우리가 크게 의지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을 쓰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 그 완전하심들에 크게 의존되어 있고, 그렇게 많은 방면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의존하고 있으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선에 가장 잘 들어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돌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충분한 모든 것이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일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주목할 기회를 더욱 크게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그만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므로, 피조물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더욱 크게 드러나는 셈입니다. 피조물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그 만큼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눔은 배은망덕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충만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진다는 사실은 아름다움과 복됨에 있어서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충만하심을 묵상하고 알게 될 기회도 그만큼 더욱 커지고, 마땅히 그래야 할 당위성도 크게 더해집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절대적이고 즉각적이며 보편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이의 충만하심과 영광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고 얼마나 배은망덕한 처사인가요!

2. 아무것도 아닌 사람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상대적으로, 아니면 피조물의 영광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얼만 위대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피조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있음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신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무한하신 분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와 거룩하심은 우리들의 것보다 더욱 무한히 더 위대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마무리 크게 의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차이를 깨닫되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의 영광에 비하여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는 정도가 아니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영예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자기를 하나님과 평준한 수준에 놓고서, 아니면 하나님과 다투는 자리에까지 자신을 높인다면, 자기가 마땅하게 처할 위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것 만큼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덜 높이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에 각각의 존재의 처할 위치를 정해 놓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성경이 하나님의 의중을 계시한 것이라고 우리가 인정할진대). 다시 말하며, 하나님께서 전체를 장악하시어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비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게 정해 놓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존재들이 ‘당신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 비하여 당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함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은 더욱 적어지는 것입니다.

3. 전부이자 중심이신 하나님

피조물이 범사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드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체 영혼을 사로잡아 우리 영혼의 온전한 존중심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이 존중심은 그가 의뢰하는 여라 가지 대상에게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선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의지하고 나머지는 우리 자신을 의지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의지한다고 합시다.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선을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 얻고, 나머지 부분의 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서, 또 그 나머지는 하나님도 그 다른 존재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에서 얻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선(善) 자체와, 우리에게 선을 주는 존재를 한꺼번에 생각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선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존경심을 자아내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전부 중심이신 하나님 안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적용

1. 처음부터 끝가지 의뢰하라.

우리는 여기서 구속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지혜를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빠져들어 간 허망하고, 비참하고, 낮고, 상실되고, 파멸된 상태를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습니다. 다른 방면들에서와 같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서는 특별하게 사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사람이 타락하여서 빠져들어 간 죄의 음침한 심연과 비참에서 사람을 건져내시어 높이 드시기를 기뻐하사, 탁월함과 존귀함으로 지극히 높이시고 영광의 복락과 영광의 높은 고지로 영예롭게 하셨지만, 피조물 된 사람이 어느 방면에서도 자랑하고 뽐낼 것을 전혀 갖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은 분명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이고 순전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속한 것입니다. 성삼위의 각 위는 이 일에 있어서 동등하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성삼위의 각 위를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으며, 성령으로 인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役事)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으로 나타나십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모든 것 중에 오직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게 아주 합당한 진리입니다.

2. 왜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의지하지 않는가

어떤 방면에서고 하나님을 그렇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는 신학이나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구속의 의도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학 체계는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가져다 놓는 것이고, 언급된 어떤 방면에서든지, 구속의 일에 속한 어떤 일에서든지 사람을 성부나 성자, 아니면 성령의 자리에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체계들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아무리 인정한다 할지라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어떤 일들’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속주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은사를 주시는 면에서는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속주 안에 있는 ‘기업’을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신 일이 온전히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라고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면에서는 아들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위해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주시는 은택을 힘입기 위해서는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방편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방편이 유익을 주고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얻고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분적으로 의지합니다. 또 거룩함을 얻고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주권적인 은혜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단순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호의로 받아 주시는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인정합니다. 어떤 합당한 공력이 없이도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어떤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끌림을 받거나 감동하는 일이 없더라고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단순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부지하고, 그로 말미암아 삶의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되었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얻게 하는 의기 우리 자신 속에 본래부터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옛 언약 아래 있을 때부터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이 올라간다. 우리가 모든 일을 위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다는 우리의 체계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복음의 의도와 복음의 율조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음에 입혀주신 그 영광과 광채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언어를 발하라.

이리하여 우리는 어째서 믿음이 이 구속의 은총을 받는 방편인지 그 이유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성질에는 이 구속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속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은 아주 지당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 구속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은총을 받는 이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야말로 합당합니다. 믿음은 구속의 일에 있어서 진실한 것이 무엇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영혼은 자신의 의식과 행동 속에서, 구원 문제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믿음은 모든 구속의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드립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게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자기가 ‘곤고하고, 가련하며, 비참하고, 눈멀었으며, 벌거벗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은 참된 마음의 위대한 요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라는 성경 말씀처럼 진정으로 구속받은 이는 어린 아이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믿는 영혼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115:1)라는 말씀이야말로 믿음을 가진 영혼의 언어입니다.

4. 하나님만을 자랑하라.

우리는 하나님만 높이며 모든 구원의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만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것을 죽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성향을 죽여야 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힘이나 선함을 의존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행복을 기대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 행복을 얻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 한 분만을 높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고 신뢰함으로써 말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역자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누가 자기는 회개하였고 거룩함을 입었고 자기 마음에 참된 탁월함과 신령한 아름다움을 부여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예와 복락을 얻었으며, 영생의 후사가 되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하나님만이 자기를 이 세상의 가장 악한 자들과 다르게 하시고 지옥에서 저주받은 비참한 자와 다르게 하신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많은 위안과 영생의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는 자기의 소망을 이유로 거만해 하지말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임을 생각하고 하나님만 높여야 합니다. 어느 사람이 거룩함에 있어서 뛰어나며 선한 일에 있어서 넘치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것의 영광 중 어느 것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 이 설교는 1731년 7월 8일 보스톤에서 열린 공개 사경회에서 행한 것이며, 설교를 들은 여러 목회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의 요청에 의하여 출간된 것이다. 이 설교는 책으로 출간된 에드워즈의 첫 번째 글이다. )

 

 

포도나무선교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

1.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kabod는 ‘무겁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kabad, ‘무거운’을 의미하는 kaved에서 왔다. 이 단어들의 일차적인 의미는 무겁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명사 kabod는 무거움, 위대함, 풍부함을 의미한다(잠27:3,삼하14:26,와상12:11,시38:4,사30:27). 물체의 무게는 밀도나 크기에서 발생하는데 밀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출19:6에서 볼 수 있고, 크다는 의미로 아주 자주 사용되는데, 사32:2,창5:9,왕상10:2등에서 볼 수 있다.

kabod는 보통 영광으로 번역되며,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때로 이 단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내적이며, 고유한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러한 내적 영광의 발산, 전시 또는 전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전시된 것을 보거나 전달받은 사람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느낌을 말한다. 또는 이러한 지식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의 kabod는 신약의 doxa로 번역되었다.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이 말들이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례들을 고찰하는 데로 나아간다.

정의 1 영광은 내적인 탁월함을 의미한다.

영광이라는 말은 때로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영광이 내적인 것 혹은 주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될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탁월함, 존귀함 혹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영광이라는 말은 크기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혹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것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탁월함을 지칭하기 위해 아주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때로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이며, 크고 탁월한 선은 선천적인 것보다 후천적인 것에 사용되기도 한다. 부유함이 때로 영광으로 불리우며(창31:1,에5:11,시49:16-17,나2:9), 크게 번성하고 일반적으로 충만한 선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창45:13,욥19:9,사10:3,16,17:3-4,21:16,마4:8,눅24;26,요17:22등).

정의 2 영광은 전시 혹은 발산을 의미한다.

(1) 영광은 내적인 위대함이나 탁월함의 외적 발현이다.

영광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종종 내적 영광의 전시, 발산 혹은 전달해 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로부터 영공은 종종 빛의 발산에 의한 광휘 혹은 빛남을 의미한다. 고전 15:41에 해와 달과 별들의 빛남이 이들의 영광이라 불린다. 특히 영광은 빈번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어진다(겔1:18,10:4,사6:1-3,요12:41,겔43:2,사24:23,60:1-2, 눅2:9,행22:11,고후3:7-8,3:18,4:4,6,히1:3,벧후1:17,계21:11,23).

(2) 영광은 때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선과 은혜를 말한다.

영광이란 단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 때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충만의 전달을 의미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과 은혜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엡3:16,1:7,2:7; 빌4:19,롬9:23,출33:18019). 에드워즈는 특히 요12:12-32를 주목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앞에 높여있는 기쁨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을 이겨내셨다(히12:1-2). 하나님의 영광은 특히 그리스도의 영혼이 추구한 목적이며, 그리스도께서 얻기 원한 기쁨의 목적이었다(사53:10-11). 또한 동시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수난의 목적으로서 언급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발산과 열매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하나님의 영광이 아주 빈번히 발광체 혹은 빛의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발광, 발산, 전달로 표현되는 것은 지금 살펴 본 것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내적 영광의 발산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또는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히 충만한 선하심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고, 풍성하게 전달되는 것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빛은 성경에서 아주 종종 일반적으로 위로, 기쁨, 행복, 선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정의 3 영광은 탁월한 관점이나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영광의 전시는 보는 사람의 관점을 포함한다. 영광의 나타남, 발산 혹은 발광은 눈과 관계가 있다. 빛 혹은 밝음은 시각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빛에 의해서 발광체를 본다. 또한 지식은 성경에서 가끔씩 빛으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영광이란 말은 아주 빈번하게 존귀를 의미하거나 함축한다. 그러나 존귀는 존귀함을 가진 사람의 존엄성과 탁월함에 대한 지식을 함축한다.

정의 4 영광은 찬양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영광과 찬양은 빈번하게 동의어로 사용된다. 찬양이란 말과 행동으로 존경 혹은 존귀를 표현하는 것이다(시50:23,22:23사42:8,42:12,48:9-11,렘13:11,엡1:6,12,14,빌1:11,고후4: 15). 영광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탁월함과 완전하심을 기뻐하는 마음의 존중과 사랑을 함축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즐거워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찬양은 보통 기쁨의 표현이다. 찬양은 기쁜 소리로 불린다(시66:1-2,96:4-5). 그리고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심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

(1)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에서 아주 흔히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삼위일체의 제2위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출33:18-19).

(2)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하나님 찬양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사48:9,렘13:11,신26:19,렘33:9,습3:20).

(3)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하나님의 선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출33:19,34:5-6).

(4) 광야에 나타났던 구름기둥에 보여졌으며, 성막과 성전 안에 있는 속죄소에 있었던 밝음과 광채가 종종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렘14:21에 의하면 성전 안에 있는 속죄소는 하나님의 이름 또는 영광의 보좌로 불린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은 동일한 것으로 말해진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에 대한 성경적 고찰(조나단 에드워드)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구원(조나단 에드워드)
(God's Sovereignty in the Salvation of Men)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시느니라”(롬 9 :18).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한 유대 민족을 생각하고 자기 마음이 심히 걱정되고 슬프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택한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의 차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경의 다른 어떤 장에서보다 택함 받아 영생에 이르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 곧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선택의 교리를 확실히 제시하기 위해 구약에서도 여러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스마엘보다 이삭을 하나님이 택했음을 알려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 했던가.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맘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롬 9 : 9). 그리고 에서에 앞서 야곱을 하나님이 택했다고 리브가에게 어떻게 말했는가 보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13절에는 말라기에서 인용한 말씀을 적고 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15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말이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그리고 17절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인용한 구절 중에서 특별히 모세에게 하신 말씀인 15절과 바로에게 하신 말씀인 17절 말씀에 관심을 둔 듯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도 언급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는 구절은 이밖에도 자주 언급된다. 바로와 관련한 말씀에서 특히 뒷부분인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에 초점이 맞춰 있다고 보인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다룬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만든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식들 중 일부를 강팍케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이 어떤 적극적인 효율적 수단을 사용해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그 심령을 강팍케 하는데 일정한 힘을 가할지는 몰라도 적극적으로 역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고 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죄를 짓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강팍하게 만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 영의 강력한 영향력을 철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그 마음이 강팍하게 되고 점차 더 완악해진다. 하나님의 영이 떠남으로써 그 사람을 강팍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사람이 패역한 짓을 하면 강팍해진다. 하나님은 자기 말씀과 성찬식을 인간에게 주었는데 인간이 이를 남용하여 스스로 강팍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찬에 잘못 참여한 자 중에 죽음을 맛보는 자도 있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또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말씀하셨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 6 : 10).
이사야의 말은 그 백성을 보다 나은 상태로 돌이키려고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지나치면 그 백성의 마음이 강팍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강팍하게 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짓 선지자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열왕기하 18 : 22). 즉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거짓 선지자들에게 들어가게 한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하게 하였다 한다(사무엘하 16 : 10,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갔을 때 사울 가계의 한 사람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저주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 역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이 온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와는 반대이다. 하나님은 통치자를 분명히 저주하지 말라고 했다(출애굽기 22 : 28 -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이때는 너무나 패역한 때라 시므이로 하여금 다윗을 저주하게 하였고,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이 일을 촉발시킨 것이다.
 
2. 이렇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시느니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전혀 긍휼을 보이시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긍휼을 베풀기를 거부하거나 긍휼을 베풀기 싫을 땐 항상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능동적인 자세를 지닌 종이 그 주인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인의 의지에 전혀 반하지 않으며 단지 즐겁고 기쁘게 순종할 뿐이다. 그러나 종은 본문 말씀처럼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긍휼을 베풀고 말고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이나 의무조항도 없는 거룩한 의지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교리를 세울 수 있겠다.
 
* 교리 :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구원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은 독자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주권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뜻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주권적으로 행할 수 있고, 아무도 하나님이 자신의 권한을 넘어섰다고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권리를 합당하게 실제적으로 행사하신다. 이와 관련해 이제부터 다음 네 가지 내용을 언급하겠다.
 
I. 하나님의 주권이란.
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의 주권.
I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신다
IV. 하나님께서 이런 주권을 행사하는 이유
 
I.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그 운명을 정해줄 수 있는 절대적이고 독립된 권리이다. 이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아보자. 하나님의 의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내켜하는 기분이다.
 
1.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어도 거기엔 어느 정도 제약이 따른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한 가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그 일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 일을 할 때 두려움이 있을 수 있고, 그 일 자체가 짜증나고 그의 의지에 거슬리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일을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그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2. 다른 것(존재)의 의지 아래 있지 않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고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주인의 뜻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기분(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게 행한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먹을 고기이고 마실 음료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들 기분 내키는 대로 임의적 의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의지는 보다 우월한 의지의 지시 아래 있기 때문이다.
 
3. 어떤 의무에 매여 있지 않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의 의지와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기쁨으로 행하는 자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자다. 하지만 어떤 의무 아래 놓여있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묶여있는 셈이다.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앞에서 설명한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기의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 권리는 절대적이고 독립된 권리이다. 사람에게도 어떤 것들을 자기 기분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리가 아니다. 사람에게도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대적이지 않다. 분명한 한계와 제한이 있다.
자신이 속한 국가의 법에 어긋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 자기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이 권리는 독자적이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독자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이 권리는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속하고 전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권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자기 피조물을 자기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독자적인 권리를 하나님이 갖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II. 인간의 구원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속성)의 영광에 조금의 손상도 없이 사람의 자식들에게 구원을 부여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기꺼이 원할 때 구원을 부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의 명예에 조금의 손상도 없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풀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절대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부여한다고 선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묶여(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절대로 구원을 베풀지 않으리라고 주저없이 선언한다. 즉 성령에 거슬러 범죄한 자에 대해선 구원이 전혀 없다. 성령에 거역한 경우 하나님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령을 거스르면 어떤 경우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영예로운 진리를 손상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고, 성령을 거스르는 자에겐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할 의무는 없었다. 성령을 거슬려 죄를 지은 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할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이를 선포하셨다(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성령을 거슬리면 구원이 없다는 선언). 이런 구속을 하나님 스스로 기꺼이 만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약속하고 선포한 이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 자기 마음대로 구원을 주기도 하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성품 중 어떤 것이라도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성품이 손상을 입는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고 말고하는 문제에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손상을 입게 되면 구원을 결정하는 주권적 사역이 (아무런 권위도 얻지 못한) 자의적인 일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구원을 결정하는 문제는 절대적 자유로 할 일인가, 필연적인 일인가 아니면 의무적인 일인가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조금의 손상이 있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성품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Ⅱ-1.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람의 자식들 중 합당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 수 있다.
물론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자들은 제외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할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계시하였다. 천사들이 보기에 사람의 자식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타락한 사람의 자식 단 한 명이라도 그 인간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지닌 영예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자식들은 그 자체로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 위대함, 공의로움, 진리와 같은 의로운 성품과 일치하는 구원의 방식을 고안해내지 않았다면 인간 구원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기 힘든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권능과 지혜와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도 없음을 계시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원의 사역에 쓰시어 순종으로 율법을 완성케 했으므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구원될 수 있게 되었다.
단,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좌들은 제외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원을 베풀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거스르지 않는 자는 구원될 수 있다. 하나님이 굳이 누구를 구원하고 말고를 주권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와 법과 일치되도록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또 하나님이 지닌 긍휼이라는 성품이 구원을 베풀 만큼 크지 않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이들을 죄에서 깨끗케 하는데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 죄는 절대 용서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어떤 현명한 이유들이 있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반한다. 죄를 선포함으로써 엄청난 죄인의 모습을 밝히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성품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고 그런 죄인을 구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살인자, 간통자, 위증자나 우상숭배자나 불경스러운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고자 하면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비록 사람들은 오랫동안 죄악에 빠져 있었고, 완악했으며, 가증한 죄를 수천 번이나 지었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죄악에 있으며 점점 더 중한 죄 아래 있어 갈수록 그 도가 심각한 지경에 이를지라도, 심지어 이들이 위대한 빛 아래 범죄했더라도, 뒤돌아본 자(타락한 자)일지라도, 또 성령이 빈번히 엄중한 경고를 하고 죄를 막으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했을지라도, 일반적 섭리의 차원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긍휼을 받으면서 저지른 죄악의 위험성이 다른 죄인들보다 훨씬 더 심각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조금의 손상도 가하지 않고 구원을 베풀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긍휼을 주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자기 성품의 영광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고 최악의 죄인에게도 긍휼을 베풀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충족된 의이다. 하나님이 지니신 어떤 거룩한 성품도 이 구원의 길을 막지 않으신다. 동시에 그리스도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구원해내도 하나님이 지니신 영광된 성품은 전혀 고통 받지 않는다.
 
1.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신 존재다. 천국조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순결하신 눈으로 악을 보시기 때문에 불의를 그냥 묵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죄를 묵인한다면 그래서 그 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혐오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묵인하지 않고도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구원하실 수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복음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무서운 죄짐 아래 있었던 자를 하나님이 구원한다면, 또 빛을 거부하고 해적질하는 자요 불경한 자로 있던 자를 하나님이 구원한다면 이럴 경우에도 이 죄인들의 악함을 조금도 묵인하지 않고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와 불쾌함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에 충분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었다. 이 십자가의 고난 이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감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없다. 만약 악인 자신이 지옥에 밀려들어가 거기서 최악의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당한 고통보다 더 확실하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를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의 자식들을 자신의 위엄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고 구원하실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조롱했어도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고도 자신의 위엄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아무런 변제도 없이 자신을 모욕한 자를 구원해 준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무한한 하나님의 위엄에 경멸을 받으면 이로 인한 상처가 고쳐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이 경멸은 거룩한 위엄의 명예에 어둠을 덮은 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 상처를 충분히 고치셨다. 경멸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한 중재자로 일을 하고 대신 고난을 담당하기 때문에 인간을 정말 죄 없게 해 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최악의 죄인이 천국의 위엄에 가한 상처를 충분히 고친다.
 
3.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 보면 죄는 반드시 벌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 최고 심판관이고 이 세상을 하나님 공의의 규칙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심판받을 자에게 은총을 주는 것은 재판관이 할 몫이 아니다. 재판관은 오로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공의의 규칙대로 결정해야 한다.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은 긍휼을 보이시 않지만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긍휼을 보이신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긍휼로 구원할 때 문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푸는 것과 심판주로서 엄격한 공의를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서로 합치하느냐이다.
이 문제를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해결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죄에 대한 징벌이 온전히 이루어졌고, 이로써 하나님 공의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큰 죄인의 죄악에 해당하는 징벌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할 때 엄격한 공의의 규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죄인의 죄를 사해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 더 이상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로마서 3:25 - 26을 보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4.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도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은 반드시 사망의 벌을 받는다고 말씀했다. 여기서 사망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모두를 뜻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위협하는 말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최대의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 죄값을 이미 치렀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도 증인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죄를 면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보증이 되는한, 우리의 죄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의 고난으로 우리가 받을 징벌을 담당하였다.
이런 이의가 있을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먹으면 죽으리라 했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와 동일한 진리를 지금 적용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아담에게 주신 말씀은 죄를 지은 아담 자신에게 국한한 말씀이 아니다. 아담은 자기 후손도 그들이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그를 보증인으로 죄를 지었다면 ‘너희가 먹으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자체적으로 또는 너희 보증인 안에서 먹으면’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죽으리라’는 말씀 역시 ‘자체적으로 또 너희 보증인 안에서 죽으리라’는 의미가 된다. 이사야 42 : 21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하려 하셨으나”
 
II-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의 존귀를 조금도 손상치 않고 어떤 죄인에게라도 그 구원을 거절할 수 있다.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치고 이들에 대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치 아니하고 구원을 베풀기를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예를 들어 현명하든 그렇지 않든, 또 성품이 선량하든 악질이든, 비열한 부모를 두었든 존귀한 부모를 두었든, 즉 악한 부모나 거룩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든,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또 그 자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고 경건하고 수많은 기도를 하여 구원될 만한 자이든, 아니면 저주받을까봐 걱정하고 고통을 받았든, 아니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함을 이루는 요소 중 어떤 것도 조금의 훼파됨 없이 이 자의 구원을 부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누군가를 구원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여하한 상황에서도 전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의의 영예로움을 손상하지 않고 자연인에 대한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이 구원을 거부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 어떤 불공평함이나 부당함이란 없다. 자연인은 그가 어떤 상황에 있게 되더라도 살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부인하고 그를 지옥에 던질 것이며 이것은 조금도 의롭지 않다거나 불공평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그 자체로 지옥에 합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정당한 심판관이라면 그 자에 합당한 벌을 가하는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니다. 자연인은 저주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 짐을 전혀 벗어버릴 수 없다. 속죄될 수가 없다. 이 자는 자신에게 합당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 뭐라도 작당하여 하나님이 처벌을 내리는데 조금의 부담이라도 느끼게 하지 못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된 선하신 성품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자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죄인들은 자신들을 질책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긍휼에는 합치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전혀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지옥에 던지는 것이 하나님 긍휼에 불명예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죄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을 지옥에 보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고 가혹한 일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부드러운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긍휼과 선하심을 전혀 상하지 않고도 자연인 중 누구라에게라도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도 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저주를 내린다면 긍휼 역시 그 합당한 대상자를 택하여 베풀어지는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 긍휼의 본질을 잘못 판단하고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속성이 경우에 따라 공의에 상반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공의로 드러난다. 로마서 9장 23절 말씀을 보라.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3.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을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혀 손상치 못한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인에게 구원을 베풀겠다고 말씀으로 맹세하지 않았다. 자연적 상태에 처한 인간은 약속의 자녀들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에 놓여있는 자다. 만약 이들이 어떤 약속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이런 처지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I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시는 특별한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1. 어떤 사람이나 민족을 불려 은혜의 수단들을 주고, 또 어떤 사람이나 민족에게는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에 따르면 온갖 은혜의 수단 가운데 구원이 베풀어진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가끔 그다지 실효성이 없어 보이는 방법을 이용해도 그런 불리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의 수단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이 은총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의 수단들을 부여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모든 인류는 본성적으로는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부여된 은혜의 수단이나 환경에서 각자가 처지는 확연히 서로 구별된다. 미국 오지에서 이교도의 암흑 아래 살고 있는 인디인 야만인들이나 아프리카 대륙 거주자들은 본성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 비슷한 상황에 있다. 본성으로 보면 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특별히 짐을 지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들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득한 옛날에 주권을 행사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백성만을 약속의 백성으로 택해 은혜의 수단들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족속들은 이교도의 암흑과 마귀의 압제 하에 넘겨주었다. 이때 이 땅은 수많은 강성한 민족들도 북적거렸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지혜롭기로 유명했다. 앗시리아인과 칼데아인은 덩치가 크고 지혜로우며 힘있는 민족들이었다. 페르시아인들도 힘이 강하고 정치적 전략이 뛰어나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 민족 역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한 족속이었는데 이들 족속은 시민 정부의 발전 측면에서 뛰어났고, 전쟁과 평화를 다루는 지혜와 기술이 뛰어났다. 그리스와 로마 족속은 군사력을 이용해 차례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이들 민족들은 모두 버림받았다. 하나님은 이들 민족들을 택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이교도의 암흑에 이들 민족들을 남겨 비전이 없어 망하게 했다. 그리고 오직 한 족속만을 선택했으니 야곱의 후손들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온갖 은혜의 수단들을 주었다. 시편 147 : 19, 20을 보라.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이 민족은 당시의 다른 많은 족속들과 비교하여 규모가 작고 돋보이지 않는 족속이었다. 신명기 7:7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또 이 민족을 택함은 이들이 특별히 의롭기 때문도 아니다. 이들 민족도 다른 민족과 다를 게 없었다. 신명기 9:6을 보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택하시는 사랑으로 이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신명기 7:8보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 즉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또한 동일한 조상을 두었지만 그 중에서 누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고 어떤 민족들을 버릴지 선택할 때 자신의 주권을 보이셨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비롯한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들은 버림을 받을 때 이삭의 자식들은 선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서의 자식들은 버림을 받았고 야곱의 자식들은 택함을 받았다. 로마서 9:7을 보라.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또 10절에서 13절까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과 에서보다 이삭과 야곱을 택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각 민족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 민족은 에서와 야곱의 후손들이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부를 때 자신의 주권을 발휘했다.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자녀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었으며 유일한 참 하나님을 저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민족인 유대민족을 버렸고 유대 민족 앞에서 음탕한 이교도들을 택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셨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했고 구세주가 저들의 혈통에서 태어났으나 메시아는 유대민족을 버렸다. 요한1서 1:11을 보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광된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지나치시고 그간 이방인이었던 자들을 불러 복음의 특권을 향유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끊어졌고, 이방인들이 접붙여졌다고 하겠다.(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율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제 전혀 사랑받지 못했던 이방인이 사랑스러운 자라 불리게 되었다.
“또 남편있는 자의 자식들보다 홀로된 여인의 자녀가 더 사랑받게 된 것이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劬勞)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 54:1).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은 버림을 받았고, 돌들인 자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기르신다. 하나님이 존귀히 여겼던 유대민족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버려진 채로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거룩한 징벌이 아닌가. 이제 하나님은 이방 민족 중 몇몇 민족을 확연히 분별해내었으니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따른 것이다.
 
2. 하나님은 특별한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며 자연 상태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구원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 중 일부에게는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을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건하고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고,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교훈과 여타 교육을 잘 받게 되며, 그 부모들이 경건하여 자식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이끌고 자식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강력한 목회를 하는 교회에 속하게 되어 거기서 보다 많은 하나님의 영의 부음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령의 수고와 각성시키는 영향을 받는다. 이는 다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따른 것이다.
 
3. 하나님은 가끔 현명하고 위대한 자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고 저급하고 미천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면서 자기 주권을 행사한다.
그리스도는 주권적으로 왕족과 귀족들의 집을 지나쳐 오두막에 들어가 거기서 거하면서 그곳의 미천한 거주자들과 교제한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호화롭게 산 부자의 구원을 거부하고 부자의 대문에 앉아 구걸한 거지 나사로에게 구원을 베푼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세상 왕들과 그들의 모든 빛나는 위엄을 경멸한다. 또 하나님은 때때로 지혜있는 자, 이해력이 뛰어난 자, 많이 배운 대학자들을 지나치고 성경의 쉬운 구절과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간신히 이해하는 그런 사람에게 구원을 베푼다. 그렇다.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인간치고 부름을 받는 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26, 27, 28을 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4. 별다른 장점이 없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훌륭한 수단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할 때 연약한 방법을 활용하여 놀라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하나님은 또 가끔은 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에게서 구원을 거둬들기도 하고, 사악한 가정에서 양육된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여로보암 가계의 선한 아비야(Abijah)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며, 또 사악한 아하즈의 아들이지만 거룩하기만 한 히스기야와 악한 아몬의 아들이면서도 거룩한 성품을 지닌 요시아의 사례가 성경에 나온다. 이와는 반대로 거룩한 다윗의 아들들인 암몬과 압살롬은 악한 자였으며, 선량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도 악한 자였다. 탁월한 은혜의 수단을 지닌 자 중에서도 버려져 멸망에 처하기도 하고, 은혜의 수단과는 거리가 먼 자들 중에서 구원될 자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너무나 많은 빛과 성경적 지식을 지니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두 버림받았으며, 가난하고 무지한 세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매일같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리스도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본 자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났고, 사마리아의 여인은 택함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가 사마리아를 지나가면서 전한 말씀만 들었던 다른 많은 사마리아인들도 구원을 받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여인은 택함을 받았다. 이 여인은 유대 족속이 아니요 단지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도가 행하는 기적들을 보았고 또 사도들이 애써 말씀을 전했던 자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하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지나치듯이 들었던 이방인들은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구원의 소식을 붙잡고 회심했다.
 
5.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아주 가증스러울 정도로 사악한 자 중에서도 일부를 구원하기도 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아주 엄격한 종파였다. 이들의 종교성은 유별났다. 누가복음 18:11을 보자. 이들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들에겐 도덕성이 있었다.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자기 모든 소유의 10일조를 냈다. 이들은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버림받았고 세리나 창기나 그밖에 공개적으로 악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갔다(마 21:31).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자신의 의가 어떠했는지 빌립보서 3:6에서 설명하고 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한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께 와서 무릎 꿇고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이 청년은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이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사람은 환경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것이 분명하고 품행이 방정한 젊은이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여 말한다고 했다. 이 젊은이는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도둑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선택되어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가끔 죄인의 괴수와 살인자, 이교도, 불경스러운 자 등에게 긍휼을 보이사 자신의 주권을 보인다. 어떤 경우는 사람이 늙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부름을 받는 자도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사탄에게 봉사하며 보냈고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 별로 남지 않은 이런 자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는 긍휼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6. 구원을 찾는 자들 중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찾으면 성경에 나타난 경우나 현실적 경험으로 보는 것처럼 곧 회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구원을 추구하지만 끝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는 동안 겪어야 할 온갖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이런 사람은 사단을 누르고 미혹에서 구원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미혹에 그냥 멸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온갖 분명한 확신들을 기꺼이 주면서 어떤 자에게는 아예 각성조차 못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중간에 미끄러지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어 끝까지 간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여 끊어진다. 어떤 자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삶에 등장하는 장애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다. 엄청난 수고를 하지 않고도 회심하고 구원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엄청난 수고를 하고도 멸망하는 자가 있다.
 
IV. 이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자식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풀 때 자신의 주권을 이렇게 행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1.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모든 성품을 발휘하여 그 성품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려고 계획했다.

창조 시 하나님의 계획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지닌 핵심적인 영광스러운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무한한 영광이 빛나야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이해하도록 계획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성품이 반영되도록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 중 어떤 것은 영광스럽게 하고 다른 성품은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결점이 있는 상태이고 그러면 하나님 영광의 구현은 완성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구현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 지혜의 영광은 그 자체로 구현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지닌 지혜라는 속성이 영광스러운 부분이라면 그 지혜는 거룩한 지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구현되는데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지닌 거룩함의 영광은 그 모습 그대로 구현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영광에 속한 것은 지혜로운 거룩함이다.
긍휼과 공의의 덕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의로운 긍휼이 아니라면, 즉 하나님 공의와 합치하는 긍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영광스러움이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모든 다른 성품의 영광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일환이다. 주권적 긍휼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서로서로 영광을 반영해 준다.
하나님의 어떤 성품의 영광도 다른 성품의 구현 없이는 그 자체로 구현될 수 없다. 다른 성품의 영광 없이는 어떤 성품도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성품의 구현도 결함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성품)을 구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선언적 영광은 종종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하나님의 본질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의미하지 못한다면, 즉 하나님의 어떤 성품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속성 중 하나요 자기 영광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주권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함과 거룩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자기의 주권을 구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자신의 다른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 주권을 행사하는 데서 구현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권능을 행사하면서 자기 권능을 영화롭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주권을 행사할 때 자기 주권을 영화롭게 한다.
 
2.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피조물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또 그가 하는 일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하나님의 주권은 더욱 영광스럽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보다 열등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영광스럽다.
그리고 천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아직까지는 인간에 대한 주권보다 더 영광스럽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피조물이 더 존귀할수록 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더욱 위대하고 고귀하게 나타난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짐승을 통제하는 것보다 인간에게도 더 큰 영예가 된다. 더 나아가 왕족이나 귀족을 지배하는 것이 평민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욱 위대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주권은 아주 고귀하고 뛰어난 피조물의 심령에 미칠 때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은 이런 고귀하고 뛰어난 자들에게 미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권세가 또 다른 고귀한 피조물에게로 확대되면 그 존귀는 더욱 위대해질 것이다. 사람이 누구를 지배할 때 단지 그 사람의 일부만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명과 재산과 그가 지닌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만큼 빛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그 사람의 모든 면에까지 미칠 때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따라 사람들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여 그 운명을 정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또 가장 중요한 일에 미칠 때(예컨대 인간 심령의 영원한 상태나 조건을 결정하는 문제)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주권은 물론 어떤 제한이나 경계가 없이 무한히 중요한 일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듯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해서는 물론 영원한 구원과 같은 가장 중요한 문제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된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는 것이다.
 
* 적용
1. 우리 심령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문제가 단지 하나님의 의지나 기분에 좌우되기도 한다고 인식해야 한다.
발끝에서 머리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이라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우리의 구세주로 삼았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감찰하사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구세주를 보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기분)에 따른 것이다. 어떠한 방법을 쓰든 그건 하나님의 주권적 기분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준 것이나 성찬을 준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 주고 또 하나님 영으로 우리를 각성케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자에게 빛이 있으라” 라고 할 때 이것은 무한한 권능과 주권적 은총의 말씀이다.
 
2. 내가 최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외롭고 절대적인 주권을 찬양하겠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뛰어난 인간의 심령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의 영원한 구원을 비롯한 그 인간의 전부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 중 유독 돋보이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성과 하나님이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주권이 하나님을 크게 영광스럽게 한다고 성경에서는 말한다. 신명기 32:39을 보라.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시편 115:3을 보라.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다니엘 4 :34-35을 보라.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구원함에 행사하는 주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11:2 -26을 보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영광을 돌리자.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과 비교하여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은 크니 그 종으로서 마땅히 겸허히 존경과 존귀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제한이 없으니 최대로 겸손하게 최대로 존경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뜻하는 대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이런 분에 대한 겸양과 존경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3. 구원의 상태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 덕분으로 돌리고 자신을 다른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구별하신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드리게 된다.
거룩함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거룩하다는 이유만으로 영광스러워지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29-31을 보라.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을 받은 자들이 지닌 거룩함이나 안전하고 행복한 현 상태와 조건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데 이것이 타고난 차이 때문이라거나 자기들의 힘이나 의로움 때문이라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높일 만한 이유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택하여 사랑을 주고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 이전부터 이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높여야 한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이들을 사랑하여 택한 이유를 묻는다면, 아니 그 이유를 하나님으로부터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은 성자 예수님을 찬양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택할 백성의 이름을 가슴에 지니고 계셨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의로움과 권능을 받는다. 택함 받은 자는 성령님을 찬양해야 한다.
성령님은 이들을 암흑 속에서 주권적으로 불려 경이로운 빛으로 인도했다. 또 성령님 스스로 즉각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으로 이들이 악을 이해하고 죄악의 위험을 알게 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못하도록 하며 이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향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부요함을 알게 했다.
성령님은 이들을 성화시키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이야기를 듣거나 악한 사람을 보게 될 때 자기 자신들도 한때 얼마나 악했는지 또 하나님을 얼마나 화나게 만들었는지, 그래서 죄악 속에 영원히 멸망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이 저들과 다르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임을 안다.
고린도전서 6:10에 많은 종류의 죄인들이 열거되어 있다. fornicator(간음자), idolater(우상숭배자), adulterer(간부), effeminate(나약한, 여자같은), 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세상사람과 어울려 자신을 방탕히 하는 자 - 남색하는 자).<고린도전서 6 : 10 원문 -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오히려 9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전략 -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로 됨.
그리고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도 더 크고,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도 더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단지 자신의 주권적 기분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은총을 찬미해야 하는지를 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겸비하셔서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어주셨는데, 하나님은 본래 우리를 지배하시는 우리의 절대소유주로서 하고자 하신다면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는 없으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포기하고, 신자들에 대한 섭리에 있어 주권을 행사하시지 않는다면, 신자가 더 풍성한 위로를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신자에게 종속당하게 된다.
하나님이 흙 속에 뒹구는 벌레같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에게 (스스로) 묶여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자신을 낮추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말로, 약속으로 자신을 구속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시 않았다. 히브리서 6:13 이하 구절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맹세하여 자신을 구속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욱 강력한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3-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힘써 순종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특히 우리에게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우리 자신의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거기에 걸려 넘어져 멸망했다. 우리가 하나님 주권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다툰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파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절대적 주권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듯이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심령에 임한다.
 
5. 마지막으로 억측(presumption)과 낙담(discouragement)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자들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교리를 적용해 보겠다.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값싸게 얻을 수 있다고 억측하여 죄악에 있는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기 때문에 당장 구원을 찾는 일을 늦추고 나중에 찾아도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또 그런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주권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따라 그를 구원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당신이 구원을 나중으로 연기한다 하더라도 구원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당신 힘으로 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당신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구원을 찾을 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날에도 들린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당신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또 낙담을 조심하라.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을 조심하라. 당신은 엄청난 죄인이기 때문에, 또 너무나 오래도록 죄악 속에 있었고 뒤돌아보았으며 성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절망적이기 쉽다. 명심할 것은 당신이 처한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신이 너무나 중한 죄인임을 인정하되, 당신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지만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도 당신이 더럽힌 하나님의 영예로운 거룩함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당신이 모욕한 하나님의 영예로운 위엄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으며, 또 당신이 대적으로 삼았던 하나님의 영예로운 공의와 하나님의 진리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속성들의 영예가 손상을 입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죄인인지 인정하라.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면 당신을 구원하여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Ⅰ. 서 론

1.1. 연구 동기와 목적

롤란드 베인턴(Roland H. Bainton)은 "18세기 말에 기독교를 건진 것은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 일어난 신생(新生)의 기적이었다"고 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과 각성운동은 종교개혁 후에 쇠락해 가는 개신교에 새로운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부흥운동의 중심에는 '중생(重生)'의 복음이 있었다. 이 논문은 미국 대각성운동의 중심에서 사역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신학 중 특히 중생의 복음의 성격이 어떠하였기에 그와 같은 놀라운 각성의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지금 미국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일어난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또한, 에드워즈는 19세기 선교확장 시기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은 미국의 우리나라 선교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2차에 걸친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미국에서 해외 선교운동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여파로 우리나라에까지 미국의 선교사들이 오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주로 미국의 청교도적인 배경을 가진 복음주의자들이었다. 19세기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 가방 안에는 청교도 신학자들인 존 오웬(John Owen),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 존 번연(John Bunyan),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 조나단 에드워즈, 존 플레블(John Flavel)의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 장로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존 네비우스(John Nevius)는 말하기를 "나는 성경 다음으로 실천적인 종교에 초점을 두고 있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성도의 안식》(Saint Rest), 필립 도드리지(Phillip Doddridge)의《영혼의 일어남과 회심 과정》그리고 존 플레블의 작품들을 중요시한다"라고 했다. 이런 면을 놓고 볼 때 에드워즈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다. 페리 밀러(Perry Miller)가《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949)란 책에서 에드워즈를 계몽주의의 천재로 묘사한 이후에 에드워즈가 계몽주의의 천재인가 아니면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칼빈주의자인가 하는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에드워즈의 구원론이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유사한지, 종교개혁 신학에 속하는지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 왔다. 하지만, 그의 영적 내면의 기본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중생론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상당히 미미한 실정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왜 그러한 각성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려면 무엇보다 그의 중생론의 특징을 분명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1차 대각성운동이라는 교회사적으로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특별히 그의 중생론의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고자 함이 본 논문의 연구 동기이자 목적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면, 에드워즈를 개략적으로 종교개혁 신학의 입장에 서 있는 신학자라는 정도로만 말하고, 적극적으로 에드워즈가 종교개혁 신학 내에서 신학적으로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에 대한 연구, 특히 칼빈, 웨슬리의 신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한 것은 별로 없었다. 에드워즈의 사상을 나머지 두 사람의 신학사상과의 관계성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에드워즈 중생론의 특징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 또 하나의 본 논문의 목적이다.

II. 에드워즈 중생론의 역사적 배경

2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교회 교부들은 '세례에 의한 중생'을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토대로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외적인 세례의 행위와 내적인 중생의 행위 모두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초대 교부들은 세례와 중생을 너무나 긴밀히 연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중생'을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초대 교부들은 세례가 중생의 일상적이고 공식적인 통로라고 생각하였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6)은《고린도전서에 대한 세 번째 설교》(Third Homily On First Corinthians)에서는 "세례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갈라디아서 주석》(Commentary on Galatians)에서 그는 세례가 우리를 중생케 하고, 씻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물세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진실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아마도 고대 교회에서 세례 중생론(baptismal regeneration)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였을 것이다. 그는 세례가 구원에 필수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세례와 중생을 밀접하게 결부시켰다.

다음의 사실이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 즉, 중생의 씻음(Washing of Regeneration)과 성화의 말씀에 의하여 중생한 자의 모든 병들이 깨끗하게 되고 고침을 받는다 ; 이것은 다음과 같다. 즉, 지금 있는 모든 죄들이 세례 때에 사해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을 인하여 후에 범하게 되는 모든 죄까지도 사해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세례 때에 하나님께서 내주하는 성령의 선물을 주시고 죄의 빚, 즉 모든 죄를 도말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세례의 효능을 강조했지만 신앙에서 진실하지 못한 위선자들은 세례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74)는 사효론(ex opere operato)을 주장하였다. 즉, 세례 받는 자는 중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람은 세례를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받는다. 그것은 영적인 중생(spiritual regeneration)이다; 그러나 견신례를 통하여 사람은 영적인 삶의 완전한 성숙을 받는다." 아퀴나스에게서 성례들은 은혜의 도구적 원인들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신다. 세례, 견신례, 성찬, 고해, 종부성사는 죄인들이 교회에 가입하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는 수단들이다. 토마스의 체계는 중세 말 전체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종교개혁가들은 말씀과 신앙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물세례와 중생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말하면서도 세례의 필수성을 가르쳤다. 루터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 자체가 이 약속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일단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어떠한 의심도 없이 아는 가운데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깨어서 지켜야 한다." 그러나 루터는 세례 받을 때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례를 받을 때 신앙이 존재하지 않거나 생기지 않는다면 그 세례 의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루터를 계승한 루터교에서는 세례에 의한 은혜의 주입을 강조하였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64)은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로 우리가 받는 두 가지 은혜 중에 둘째 은혜를 중생이라 부른다. 칼빈은 세례의 효력과 본질 중 하나로 중생을 말한다. 칼빈은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되며,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루터주의자, 칼빈주의자, 영국 국교도의 세례의 의식에서 인상적인 것은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는 있으나 그들 모두 세례와 중생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에 비하여 재세례파운동은 마가복음 16장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에 따라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신자의 세례, 즉 재세례를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단순히 유아세례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한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성례전보다 더 중요하다고 간주했다.

트렌트 공의회(1545-63)의 선언에 나타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생론은 "세례 중생론"(baptismal regeneration)이다. 즉 세례 받는 자는 중생한다는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 7차 회기 성례에 관한 부분에서 우리는 사효론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을 보게 된다. "만일 누가 새로운 율법[세례, 성찬]인 성례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은혜가 행해지는 행동을 통해서(ex opere operato) 수여되지 아니하고, 신적 약속에 대한 믿음만으로 은혜를 얻기에 족하다고 말하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세례는 원죄를 제거하는 데 필수적이다.

물세례와 중생을 연관시키는 전통이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와서 가톨릭은 물론이고, 재세례교도들을 제외한 종교개혁가들에게서도 그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칼빈 이후에 발전한 개혁신학에 와서는 중생의 개념이 물세례와 관련된다기보다는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과 관련된 용어로 주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청교도들은 '회심' 혹은 '중생', '신생'이라는 단어를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는 기술적 용어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이것은 에드워즈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Ⅲ. 중생과 성령의 주입

3.1. 중생의 정의 : 성령의 부으심으로서의 중생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면, "중생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은혜[성령]가 "하나님에 의해서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작용에 의하여 주입되고(infused),"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산출하셔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은혜롭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중생이다. 에드워즈에게서 중생은 칭의 앞에 온다. 성령의 주입은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에서 가장 먼저 오며 그 결과 성령은 내주하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생명의 원리, 그리고 지각과 행동의 원리가 되신다. 이 때 인간은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을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에드워즈에게서 효과적 부르심, 회심(conversion), 회개(repentance), 중생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원죄》에 나오는 중요한 진술을 보면 회개, 회심, 중생이 같은 말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나는 회개와 회심을 같은 말로 본다. 왜냐하면 성경(행 3:19)이 그것들을 함께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백히 많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metanonia(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회심(conversion)이란 단어도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변화 혹은 전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변화이다(중생이란 용어는 특별히 마음의 수동적인 측면에서 본 변화이다).

에드워즈는 마음이 회심에서는 능동적이고, 중생에서는 수동적이라고 말했다.

3.2. 에드워즈에게서 중생과 성화의 동일성과 구별성

에드워즈는 때때로 초기 성령의 주입될 때 일어나는 사건을 '중생'이라고 하기도 하고, '성화'라고 하기도 하였다. 즉, 혼용하여 사용하였다.《삼위일체론》(Discourse on the Trinity)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 혹은 하나님의 사랑은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거주하시면서 생명을 주는 원리로 활동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살아있는 성전이 된다; 그리고 사람이 중생되고 성화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그들에게 부으신다. 그래서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를 가지게 되고, 같은 말이지만, 성부와 성자의 좋은 것, 그들의 사랑, 기쁨, 아름다움의 참여자가 된다.……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제자들 속에 거주하신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화를 말할 때에 일반적으로는 중생 이후에 오는 일평생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회심 가운데 인간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생명을 다시 찾게 하신다. 회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성화 가운데 회복을 계속 진행시키시고 영광 중에 회복을 완전케 하시는 것이다." 회심은 그리스도인의 일의 시작이다. 그리고 성화가 있다.

3.3. 성령의 내주: 생명의 원리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도들의 마음은 중생 때에 "초자연적인 원리가 주입된다(infused)."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적인 원리가 되신다. 그리고 사람이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될 때 "지각(perception)과 행동(action)에 새로운 원리(principle)"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내주하는 생명의 원리(an indwelling vital principle)로 행동"하신다는 것은 에드워즈 중생론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령은 그 자신을 성도들의 마음과 연합하시고, 성도를 그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삶과 행동의 새롭고 초자연적인 원리로서 성도를 움직이시고 영향을 주신다. 성령은 성도의 영혼 속에서 활동하며, 거기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 속에서 활동하며 자신을 전달하신다. 성령은 자신을 신자들과 연합하고, 그들 안에 살며, 그들의 기능들을 사용하는 가운데 그 자신의 본성을 작용하심으로써, 신자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성령은 거룩한 영향력과 영적인 작용들 속에서 역사하실 때, 그 자신을 독특하게 전달하시는 방법으로 일하신다. 그래서 그것을 받는 사람은 "영적이다"라고 말해진다.

3.4. 성령의 주입과 조명

에드워즈가 주입과 조명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 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기초이다 ― 마음의 기질과 성향(disposition)과 영의 변화이다; 왜냐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수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영혼의 본질이 변화됨으로 신적인 빛을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죄인들에게 화해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는 길을 깨닫게 하는 것은 회심 때에 성령께서 마음속에 비추어 주시는 "천상의 신적인 빛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영혼 속에 처음 들어오시고, 거기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실 때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작용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의에 대한 깨달음의 즉각적 효과들은 무엇인가? 영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영접의 길의 실재와 적합함과 그 영광을 깨닫게 되면, '마음(heart)'과 '성향(inclination)'이 전적으로 그것을 포옹하게 된다. 전 영혼이 그것에 동의하고 따르게 된다. 모든 지배적이던 반대는 중지된다. 전에 대적하던 마음은 이제는 굴복한다. 마음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성향(inclination)'과 '애정(affection)'을 갖고 전적으로 그것에 다가가며, 그것에 붙어 있게 된다. 마음은 그것에 순순히 따르게 된다. 영혼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것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 구원하는,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이 존재한다.

이로 보건대 에드워즈에게는 주입이 먼저이고 조명은 주입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에드워즈의 주입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고 이해와 행동의 새로운 원리로 작용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명은 주입의 결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새로운 이해의 원리로 역사하신 결과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 주입과 조명의 관계

성령의 주입

성령의 내주 ┌─ 이해의 원리 → 조명:sense of heart=믿음 → 칭의
새로운 원리─┤ ↓
새로운 본성 └─ 의지와 성향, → 새로운 의지, 성향
(신적인 기질) 행동의 원리 새로운 행동

Ⅳ. 중생 체험의 성질과 중생의 표지

4.1. 중생 체험의 성질 : 초자연적으로, 총체적으로, 즉시에 주어지는 중생

중생 체험의 성질만을 놓고 볼 때 에드워즈는 칼빈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웨슬리와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에드워즈 연구가들이 잘 주목하지 않은 부분이다. 에드워즈 구원론의 정점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중생 체험의 성질을 살펴보면,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중생과 회심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며", "에드워즈와 웨슬리 사이에 견인에서뿐만 아니라 중생의 본질에 있어 분명히(clearly) 심각한 차이(serious difference)가 있다"고 한 머레이(Iain Murray)의 주장은 상당히 잘못된 것으로 확인된다. 에드워즈는 중생을 새 창조로 말하는데, 새 창조의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그리고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순간 경험적' 중생을 강조했다. 에드워즈와 영적으로 교통했던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도 그의 사역 기간 내내 경험적 회심의 개념을 주장하는 데 결코 그 긴박성을 잃지 않았다. "중생"이라는 그의 설교에서 윗필드는 성령으로부터 "신생"(new-birth)을 "경험적으로"(experimentally) 받는 것에 대해서 회중 가운데서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중생 혹은 신생의 교리는 신앙고백자들의 대다수 가운데 그토록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그토록 작은 수만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에드워즈도 경험적 중생 체험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를 위시한 친부흥주의자들에게 하나의 결정적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회심의 경험이었다. 그 회심의 경험은 "한번 영혼을 흔드는 체험이었는데, 확신이 오면 해방감을 주고 감정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체험이 없는 목사가 구원에 관해 영혼들을 지도하는 것을 아주 불행한 일로 보았다. 그는 체험이 없고 "불경건한 목사들만큼 지옥에서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될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중생 체험의 성질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중생 :

에드워즈가 새 창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즉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죄인에서 성도로 바뀌는 이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물리적인(physical) 변화이다"라고 말한다.
② 총체적 중생 :

에드워즈는 중생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 때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격 전반에 걸친 변화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새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이다; 속만 새 것이 아니라, 바깥도 새롭게 된 자이다; 그들은 영과 혼과 몸 전체가 통틀어 거룩하게 되었다; 옛 것은 지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와 새로운 혀와 새로운 손과 새로운 발을 가졌다; ― 즉 새로운 대화 내용과 새로운 생활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들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한다.
③ 즉시적 중생 :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은 "즉시에" 이루어지는 역사이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부르실 때 죄인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성경이 회심을 '창조 사역'에 비유한다는 사실도 회심이 즉각적인 역사임을 확증해 준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마찬가지로, 중생에서도 어떤 일이 무에서부터 즉시 생겨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중생 때에, 어떤 것이 즉시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온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며,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즉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들며, 이전의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4.2. 중생 체험의 성질에서 칼빈, 웨슬리, 에드워즈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한 사람과 회심치 못한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중생 체험에서 에드워즈와 칼빈을 비교해 보면 중생의 신적 기원을 말함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중생의 총체성과 즉시성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칼빈은 중생에서 우리의 '전부'가 변화된다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고 그 대신에 중생의 불완전성을 많이 언급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중생은 '전부가 즉시에' 변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칼빈에게서 중생은 우리의 이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칼빈은 요한일서 3장 5절 주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하루 동안이나, 혹은 순식간에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계속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지상(地上) 감옥인 육체를 쓰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거룩한 삶을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나 충분한 열의가 없다. 신자의 대부분은 "심히 약하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절름거리며 심지어 기어갈 뿐,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에드워즈와 비교해 보면, 칼빈은 중생의 '총체성'과 '즉시성'을 말하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와 에드워즈는 중생 체험의 성질에 대한 견해에서 동일함을 볼 수 있다. 즉, 두 사람 모두 다 신생(新生)의 위대함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중생의 정의와 신생의 경험에 대한 묘사에서는 일치한다. 웨슬리는 신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실 때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생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악마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바꿔지는 변화이다. 이것이 바로 신생의 본질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4.3. 중생의 표지에서 칼빈, 웨슬리, 에드워즈

에드워즈는 중생한 사람의 표지로 범죄치 않는 삶을 산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3장 9절의 말씀을 현재 중생한 자의 표징으로 강하게 주장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회심은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으로 거룩하고 은혜로운 원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 실제로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죄인이나 악인으로 살 수 없다.

성경은 참으로 거룩하고 은혜로운 원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 실제로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죄인이나 악인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요한 일서 3장 9절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씨는 사악함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즉,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죄인이나 악인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생의 표지에서 에드워즈와 칼빈은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성도는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싸여 있다. 요한일서 3장 8절 주석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간적으로 중생시키는가, 아니면 중생이 우리 안에 시작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옛 사람의 잔재가 우리 안에 남아 있게 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만일 중생(重生)이 아직도 충분하게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직 그 자체의 한계 안에서 죄의 멍에로부터 우리가 자유함을 얻은 것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많은 허물과 죄 아래서 고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옛 본성의 잔재들을 그들 속에 계속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죄의 욕망을 바로 잡아 주시고 있기 때문에, 중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들이 죄를 이기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 강조의 세기에서는 에드워즈나 웨슬리에 미치지 못한다.

웨슬리는 에드워즈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으며 육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강력히 말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으며"(요일 3:6), "육을 따라 살지 않는다."(롬 8:4) 그들은 밤낮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만을 하려고 애를 쓴다. 성 요한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요일 3:9) 때문이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그는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씨, 곧 충실하고 신성한 신앙이 그의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죄를 범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치 않는다는 요일 3:9절의 말씀을 중생한 성도의 현재의 모습으로 즐겨 인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에게는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웨슬리는 최저의 의미에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죄를 계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 최저의 의미에서 거듭난 자들일지라도 죄를 계속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저들은 죄 가운데서 더 살 수는 없다(롬 6:12)." 웨슬리는 "사도 요한의 교리나 신약성서의 전체적 취지(tenor)와 일치하게 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하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범죄치 않는다고 말한 점에서는 에드워즈와 웨슬리가 같다. 칼빈은 이 점에서는 웨슬리나 에드워즈만큼 강조하지 않았다.

로마서 7장의 해석에서도, 칼빈과 에드워즈, 웨슬리와는 차이가 난다.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로마서 7장의 상태가 중생치 못한 상태라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경건치 않은 사람, 또는 은혜를 입지 못하는 사람을 자연인(거듭나지 못하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사도 유다는 성도들 가운데 가만히 기어 들어온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유 1:4) 언급하고, 이어서 이렇게 지적한다.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 1:19).……사도는 여기서 '육신에 속한'이라는 말을 부패하고 거룩함을 입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로마서 7장 25절에서 8장 13절,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26절, 골로새서 2장 18절이 그 점을 풍성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 아래서 번민하는 사람을 중생한 성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느끼는 영육간의 투쟁이다. 그러한 영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온다." 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변명은 영혼의 주요한 부분이 선으로 기울어진 중생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칼빈은 말한다. "성령에 의해 중생했으면서도 아직 육의 잔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마음속에서 이런 투쟁을 할 것인가?"

웨슬리는 "노비의 영과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이라는 설교에서 인간을 세 종류 즉, 자연적 인간,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 은혜 아래 있는 인간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웨슬리는 로마서 7장에 있는 사람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으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은혜 아래 있게 되는, 곧 중생한 인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때[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때]는 가엾은 노예의 속박이 끝나고 그가 그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롬 6:14) 되는 때이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은혜 혹은 호의를 발견하고 그 마음속에 성령의 은혜, 혹은 능력이 지배하는 사람의 상태이다.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은 것이다. "그 영에 의하여", 그는 이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롬 8:15).

웨슬리에 의하면, 은혜 아래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죄의 책임과 죄의 힘이 다 끝난다. 그는 이미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롬 6:6). 이상과 같이 웨슬리의 중생한 자의 묘사는 에드워즈와 일치한다. 중생 체험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변화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두 사람은 지치지 않았다.


Ⅴ. 결 론

에드워즈는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아 칼빈주의의 특질을 강하게 물려받았으나 그의 신학의 핵심이 되는 중생의 개념에서는 칼빈을 닮았다기보다는 독일 경건주의, 혹은 영국 웨슬리와 윗필드의 복음주의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에드워즈의 중생의 정의는 칼빈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특히 중생 체험의 즉각성과 전체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중생의 내용적 깊이에서 칼빈과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개념에서 에드워즈의 견해와 칼빈의 견해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중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데서는 칼빈과 같고, 신비적 체험과 표현에서는 어거스틴과 비슷하고, 중생 체험의 깊이에 대한 강조는 웨슬리와 같다. 이 연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크게 보면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중생 체험의 성질 면에 있어서는 칼빈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웨슬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설교를 보면, 청교도주의와 에드워즈의 중생론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이었던 길선주 장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는 설교를 하였고, 그 후에 활동한 김익두 목사는 "성령을 받으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체험적 성령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교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성령 받기 전에는 살았다고도 믿었다고도 하지 말라"고 설교하였다. 1921년에 경남 창원군 웅천읍 교회에서 이 설교를 듣고 주기철이 회개하였다. 기타 여러 자료들을 검토해 볼 때,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회심 설교가 에드워즈의 중생론과 유사했던 점이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왔다는 것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된 영적 각성이 요청되는 이 시대에 에드워즈의 중생론과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중생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출처 :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61호 / 노병기(연세대)/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제 7 설교. 사랑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A Christian Spirit is a Humble Spirit(고전13:4-5) 조나단 에드워드-이상웅


  사도는 이제 우리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소유에 대하여 사랑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않는다.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시기하지 못하게 하는 반면에, 우리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사랑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조건에 합당한 마음을 가지게 하여 지위가 무엇이든지 간에 바르게 행동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을 아래에 있으면 위에 있는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 위에 있으면 부요한 것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게 한다.

  사랑의 정신은 거만한 행동과 거만한 정신을 반대한다. 사랑의 정신, 곧 기독교의 정신은 겸손한 마음이다.


1. 겸손의 본질1)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무가치하며 비열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또는 우리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미미한 존재라는 의식과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1) 겸손은 우리들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의식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은 겸손이 지극히 넘치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흠없고 점없고 영광스러운 존재들이며,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비교해서는 매우 작은 존재들임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중에 가장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인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신다. 겸손이 그리스도의 모든 탁월함 중의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사람이시며, 사람으로서 겸손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의하면 겸손은 하나님의 속성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불완전하다는 논리를 주장할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탁월하시고 영광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비교된다 할지라도 작은 분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작다는 의식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겸손은 모든 지성적인 존재들에 합당한 탁월함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무한히 하나님 앞에서 작고 미미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들은 자신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롬12:3)는 사도의 법칙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겸손은 사람들 속에 있는 한 덕으로서 자신들이 비교적으로 작다는 의식을 내포하는 것이다.

  1) 겸손은 가장 먼저 그것이 하나님과 비하여 볼 때에 우리가 작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미미한 존재이며 심지어 벌레와 먼지 같은 존재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창18:27).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과 비하여 볼 때에 작다는 것을 모른다면 참된 겸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수는 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요소는 참다운 겸손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우리들이 동료에 비하여 볼 때에 작다는 의식이 겸손한 정신에는 요청된다. 하나님과 비교하여 자신이 어떠하다는 것을 바르게 평가한 사람은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신을 바르게 보는 눈을 가지기가 쉽다. 자기가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높으신 분에 대하여 어떻게 서 있는가 하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은 그로 하여금 그가 피조물들 중에서 어떤 자리에 서야 옳은가를 바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주에는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피조물들이 매우 많은데, 그러한 존재들과 비교하여 매우 작은 존재이다는 것을 안다.

  3) 타락한 사람들 안에 있는 겸손은 이중적인 의미의 작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작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면서부터 작다는 것은 본질상 완전하신 하나님 아래에 무한히 떨어져서 존재하는 자라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능력과 위대함과 지혜와 엄위에 있어서 사람을 능가하시되 무한하게 능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ㄱ)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 매우 작다는 것을 의식한다. 자신이 모른 것이 많음을 의식한다. 하나님과 비교하여 볼 때에 자기의 이해 범위가 작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약을 아는 사람이다.

ㄴ) 타락한 이후에 진정으로 겸손한 인간은 자기의 도덕적인 왜소함과 비열함을 역시 알고 있다. 이것은 그의 죄악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작음은 그가 피조물로서 작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가 도덕적으로 작다는 것은 그의 비열함과 한 죄인으로서의 쓸모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지극히 오염된 존재이며 멀리 떨어진 존재인가를 안다(사6:5).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작다는 겸손한 의식은 자기 혐오감을 느끼게 하며(욥42:5-6),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가지게 하며(시51:17,사57:15), 심령이 가난하게 한다(마5:3).  

ㄷ)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에 관한 의식이 없이는 진정한 겸손이 있을 수 없다.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 비하여 위대하심과 인애하심에 있어서 얼마나 크신 분인가 하는 것을 느끼기 전에는 참된 겸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마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는 알지만 인애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겸손할 수가 없다.

 

(2) 겸손은 그에 상응하는 행실과 행동을 하고픈 마음가짐을 가지게 한다.

그것 없이 참된 겸손이란 없다.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우리들이 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ㄱ)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작고 미미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아무 부담없이, 마음깊이, 그리고 기쁨을 가지고 인정하게 한다.

ㄴ) 자신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오직 하나님만 믿을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고 그에게 맡겨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의로 삼고 힘으로 삼게한다.

ㄷ) 자신에게 선한 일이 있으며 선한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자 하자 자신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는다.

ㄹ)겸손한 자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법과 뜻에 철저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드리고 싶어한다.

ㅁ)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한 모든 뜻을 기쁜 마음을 가지고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고난스런 일을 명하신다 할지라도, 낮고 천한 환경에 처할 것을 명한다 할지라도, 불평을 말하지 아니한다.2) 

  

2) 겸손은 우리들이 작다는 것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되, 사람을 향하여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한다.

ㄱ)먼저 사람들 중에서 무례하고 야심이 넘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분배하신 위치를 만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명예를 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이웃에 비하여 가장 으뜸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싫어하게 한다. 렘45:5,롬12:16. 겸손한 사람은 천성적인 재질이 크든지 아니면 영적인 체험을 가졌던지 간에 이것 보라는 듯이 과시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ㄴ) 겸손은 역시 건방지고 무례한 행동을 삼가게 하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자는 일상적인 삶의 태도에 있어서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빌2:3), 오히려 자기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엡3:8)로 여긴다. 겸손은 역시 조소적인 행실을 삼가게 하는 경향이 있다.

ㄷ) 겸손은 조소적인 행실을 삼가게 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 경멸하거나 비웃는 투로 이야기하며 대하는 것은 가장 나쁜 행동 중 하나이며 불손한 처사이다. 겸손한 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가장 정중하게 대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약하다는 것을 의식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인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한다.

ㄹ) 겸손은 의도적인 완고한 행실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고집을 부리거나, 모든 것들이 자기들이 계획한대로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나가지 않는다. 겸손은 벧후2:10과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정신을 가지게 한다. 평화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높이려는 준비를 하게 한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어느 것도 고집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는 주님은 진리와 덕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게 되면 분을 내어서 그들의 행하는 일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아니한다(롬12:19,고전6:7,마5:40-41).

ㅁ) 겸손은 더 나아가서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을 삼가고 싶은 마음을 준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있고 어떠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되고 합당한 영광을 얻도록 하신 하나님의 신적인 질서에 만족하고 동조한다(롬13:7,딛3:1).

ㅂ) 겸손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행실은 삼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실수를 하였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게 한다. 겸손이 제대로 편만한 상태에 있게 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잘못에 대한 고백을 하게 하되 민첩하게 하며, 심지어는 기쁨을 가지고 하게 한다. 겸손한 자는 남이 잘못을 지적해 줄 때에 용납할 뿐만 아니라 친절과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인다(시141:5).


2. 사랑의 심령은 겸손한 심령이다.


(1) 사랑의 심령, 또는 하나님의 심령을 따른 신적인 사랑은 겸손을 함축하며 겸손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1) 사랑의 정신은 겸손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겸손은 사랑의 진수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연유한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식은 특히 겸손을 산출하는 하나님에의 발견이다. 겸손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발견이다. 영혼으로 하여금 진정한 겸손을 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겸손을 일으키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사랑에 있어서 우리들보다 무한히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그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해 볼 때에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랑은 겸손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신적인 사랑은 겸손을 열매맺게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귀추와 열매로 겸손이 열매를 맺고 그것을 산출하는 것이다.

ㄱ)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비하여 자기가 미미한 존재라는 정신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끔 하는 마음의 성향이다.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한 행동을 하고픈 마음이 들게하며, 그 사랑에서 사람들을 향한 겸손한 행동도 나타나게 된다. 우리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합당한 존경과 영예를 주어 그들의 인격을 높여주고 싶은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죄를 미워하는 혐오감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2) 복음이 사랑의 행동을 유발시킴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복음의 정신은 같다. 기독교 계시가 인도하여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다. 기독교의 계시는 복음과 동일하다. 복음이 유도하여 일으키는 사랑을 행하는 그러한 류의 행사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겸손을 함축하는데로 기울어는 것이다.

  1) 복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 분을 무한히 높여 드리는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계시가 우리를 인도하는 사랑은 하나님을 겸손한 분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한히 겸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합당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필연적으로 그러한 사랑의 행위들은 겸손한 행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겸손만큼 조물주의 겸손에 적합한 성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겸손하심으로써 자신의 본성은 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래서 낮아지심이 때로 겸손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에 대하여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반응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2)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겸손한 분으로 알고 사랑하도록 인도한다. 신적인 와전함과 창조주의 탁월성을 가지신 분이 자신을 낮추심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게 겸손을 표현하셨다(빌2:6-8). 그러한 주님에 대한 사랑은 겸손한 사랑을 행사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겸손하시다면, 우리들이 그러한 분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은 그의 제자며 종인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한 일이다(요13:13-16,마20:25-28).

  3)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사랑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가 영광의 주이시지만 지상의 모든 영광을 경멸하시고 가장 큰 고통을 당하시고 잔인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볼 때 겸손의 모본이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할 것이며,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만난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겸손히 행할 것이다.

  4)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한 사랑의 실천으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사랑하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알고 사랑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들이 겸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제공한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감안할 때에 그러하다. ㄱ) 우리들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비열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십자가가 가장 크게 나타냈으며, ㄴ) 복음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바 겸손한 사랑의 정신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이유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3. 적용


(1) 그리스도인의 정신의 탁월성

참된 그리스도인의 탁월함 중 많은 것이 온유하고 낮아지는 정신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 정신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구주를 닮게 한다. 사도는 이 정신을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보배로운 것이라고 말한다(벧전3:4).


(2) 겸손에 대한 자기 검증

하나님은 교만한 심령을 미워하신다(약4:6). 진정한 겸손이 아닌 겸손의 모양들이 있기 때문에 겸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일종의 피상적인 것이 아닌가 또는 마음에 있는 성령의 역사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복음이 말하는 겸손한 사람들의 행실과 정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안전하다고 만족하지 말 것이다.


(3) 외인에 대한 권면

그리스도인의 심령은 은혜의 심령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면 겸손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길을 배척하고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심령을 미워하시고, 낮아지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기를 바란다.


(4) 열심을 다해 겸손할 것을 권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권한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과 그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에 나타내신 겸손한 심령을 더욱 더 가지려고 노력하라. 겸손은 모든 참된 경건에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고 뛰어난 요소이다. 그것은 심령의 아름다운 장식이다. 그리스도인이 체험함으로 얻는 가장 영광스러운 열매의 원천이다. 겸손은 하나님께 우리들이 드릴 수 있는 가장 흠향할 만한 아름다운 제물이다. 하나님의 약속 중에서 가장 부요한 것을 약속하는 조항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심령을 부지런히 추구하고 구하라.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여러분이 사는 날 동안에도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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