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령님의 인 치시는 사역

성령님의 인치심에 대하여 간단하게 정의를 내렸으니 이제 성령님께서 인 치시는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갑작스러운 인치심과 점진적인 역사

때때로 성령님께서는 이 사역을 갑작스럽게 진행하시기도 한다. 또 이 인치심의 깊이가 깊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신령한 은혜가 참으로 생성하며 성령님의 임재가 충만하여 이후로 결코 이 모든 것을 잃지 않을 수도 있다.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는 것이다(엡 4:30 참고).

이 인치심 역시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동안 신자의 영혼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 사실을 온전한 확신 가운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고, 그것이 마음에 새겨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많은 불쌍한 죄인들의 부드러운 마음에 결코 지워지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인을 치겠다고 선포하시는 소중한 약속의 말씀이 있다.

"내게 오는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리라"(요 6:37).

이 얼마나 놀라운 인치심인가! 불쌍하고 불안해하며 고민하는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그 영혼을 맞이할 것이며 값없이 용서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시며 확신을 심어 주시는 것이다. 비록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악하고 비참하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영혼의 슬픔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다 하더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결코 쫓겨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위대한 분의 손을 통해 구속의 날을 위해 받게 되는 인치심이 아닌가!

가끔 이 인치심의 역사는 성령님께서 고민하고 있는 영혼에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구주가 되신다'는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실 때에 일어나기도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그분께 드릴 선물이나 지불해야 할 값을 준비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쁘게 맞아주실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 악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가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되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의 눈을 열어 위대한 진리를 보게 하신다.

곧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6 참고)는 것을 보게 하신다. 또한 그분이 죄인들의 구원자로서 그들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기쁘게 감당하신다는 것을 보게 하신다. 선물을 가져올 필요도 없고, 어떤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거나 스스로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더 악하고 무가치할수록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더욱 적합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더 환영하신다.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새기신 인의 자국은 얼마나 놀라운가! 불쌍한 죄인에게 아무런 값없이 완전한 용서가 주어졌고, 예수님의 피가 그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 이 영광스러운 진리가 신자의 영혼에 선언될 때, 아무리 시간과 환경이 바뀐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국과 그 순간이 우리의 마음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지 않겠는가? 이것을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만드신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용서의 도장이며, 이 인치심의 역사는 바로 영원한 영광의 전주곡, 아니 그 영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치심은 대부분 좀 더 점진적인 역사이다.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은 깊은 경험의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그곳에서 한 걸음씩 단계적으로 그런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증가한다. 그리고 내재하는 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며, 자신의 마음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계략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은혜와 섭리 가운데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한 비밀을 좀더 분명히 알고 이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 곧 언약의 깊고도 고통스러운 훈련의 과정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자녀가 성령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인치심을 받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복되신 분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생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의 죄를 없애 주시되 철저하게 제거하셨으며, 우리는 전적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그래서 비록 중생하자마자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도는 영원토록 안전하다. 십자가의 강도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님의 구원 역사' 중에서..(227-229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옥타비우스 윈슬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중생 사역의 특징  (0) 2023.05.03
3) 주권적 선택  (0) 2023.05.03
4) 효과적인 부르심  (0) 2023.05.03
옮긴이의 머리말  (0) 2023.05.01
2) 기도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  (0) 2023.05.01

 

2. 중생 사역의 특징

2) 신령한 생명의 점진적인 성장

우리는 신령한 생명이 영혼에 처음으로 심어지는 현상이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렇게 심어진 신령한 생명이 대개 점진적으로 성장해 간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이로써 자신의 영적 생명이 잘 성장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모든 사람이 큰 격려를 얻기 바란다.

영혼에 있는 신령한 지식은 종종 느리게 성장한다. 다시 말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을 보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친히 말씀해 주셨는데도 그들은 그 뜻을 잘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또 얼마나 느리게 성장하는 학생들이었는가! 과연 누가 그들과 같이 교훈을 배울 수 있겠는가? 제자들은 지식의 원천에서 나오는 지식을 마셨다. 그들은 태양에서 직접 발산되는 빛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사역과 교훈과 이적과 모범을 보고 배우는 탁월한 유익을 누렸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께서 그토록 열심히 꾸준히 가르친 그 명백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믿는데 얼마나 더뎠는가!

그렇다. 신령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영혼이 성장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죄와 숨겨진 악에 대한 지식,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반항심과 우리 마음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부정함과 사탄의 치밀함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고귀함에 대한 지식과 위대한 구원에 대한 관심은 하루나 일 년에 다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날과 수년에 걸친 노력, 오랜 시간의 고통스러운 연단, '폭풍과 광풍'(시 55:8)의 세월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혼에 심어진 생명이 더디게 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덜 실제적이거나 덜 신령한 것은 아니다. 이 생명은 그 정도에 있어서는 미약하고 연약할지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 생명이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혼 가운데 이루시는 사역을 표현하는 비유들을 보면, 자주 연약한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 40장 11절을 보라.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이 연약하고 힘겨워하는 모습을 그 어떤 말로 이보다 더 놀랍고도 감동적으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

또 이사야 42장 3절을 보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여기서 성도들을 단지 '갈대'라고만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성도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한 갈대'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들을 연약한 상태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단지 '등불'로만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작은 등불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죽게 된 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두 비유에는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결과가 나타난다. 이 '상한 갈대'가 결코 완전히 부러지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도 결코 완전히 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상한 갈대를 부드러운 손길로 묶어 강하게 하실 것이며, 꺼져가는 등불을 조심스럽게 돌보아 되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 곧 경건한 부모에게서 양육된 자녀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영적인 순례 지도를 보면서 자신의 영적 삶이 시작된 지점을 더듬어 보려고 하다가 당황해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멸망의 도시를 이미 떠났으며 강하고도 능한 손에 의해 애굽에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이 경험한 인도하심이 얼마나 천천히, 그리고 얼마나 살며시 부드럽고도 서서히 이루어졌는지, 그들은 자신의 영적 삶의 동이 튼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 막 태어나서 혼돈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자연의 빛이 들어왔던 순간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사람이 그 마음에 악한 원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상상이 아니다. 그리고 은혜가 이 악한 원리를 정복한 것도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가 한때 어둠의 자식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이제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도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비록 자신의 영혼이 거의 발전하지 않고 성장이 지지부진하며, 여전히 믿음이 연약하고 경험한 은혜가 적으며, 자신의 부패함이 너무 크고 허물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작이 '속이는 활'(시 78:57)처럼 빗나갔을지라도,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록 나는 주인의 괴수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하지만, 또 내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고 외적으로 애통해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보지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바로 '전에는 내가 볼 수 없었으나 이제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제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있다. 나는 죄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거룩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악함과 허무함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고귀하심과 충만하심을 보게 되었다."

비록 미약한 은혜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참된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영혼이 은혜에 굶주려 있고 목말라 한다면, 그리고 그 은혜가 영혼의 가장자리에라도 닿기만 한다면, 그 영혼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중생 사역의 특징' 중에서(101-104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ReplyForward

'옥타비우스 윈슬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성령님의 인 치시는 사역  (0) 2023.05.15
3) 주권적 선택  (0) 2023.05.03
4) 효과적인 부르심  (0) 2023.05.03
옮긴이의 머리말  (0) 2023.05.01
2) 기도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  (0) 2023.05.01

3) 주권적 선택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중생의 역사 가운데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사역과 활동에서 주권적으로 역사 하신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정의하실 것인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의 말씀을 보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롬 9:15)

바로 여기에 주권자가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하나님 자신과 부합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유기, 그리고 자신을 드러낼 것인가 감출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에서 비롯되는 은혜로운 목적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하시는 이'(엡 1:11)이시며, 천사에게 든 사람에게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든 일을 설명하시지 않는'(욥 33:13 참고) 분이시다.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하나님의 주권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여기서 사용된 표현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라. 인간은 바람을 다스릴 수 없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느 누구도 바람의 영향력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바람에게 명령하거나 바람을 통제할 수 없다.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듯이, 바람을 잠잠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성령께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도 저항을 받으신다. 그것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저항을 받으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 저항에 굴복하지 않으신다.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적대감과 육신적인 소욕이 성령님을 대적해서 일어나지만, 이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들은 성령님이 품고 계신 사랑의 사명에 의해 굴복되고 만다. 자신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성령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실 때, 이 모든 권세들은 성령님께 제대로 대항할 수 없다. 그분은 강력한 군대처럼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신다. 그리고 죄인은 '주의 권능의 날에'(시 110:3)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막 5:15) 예수님의 발 앞으로 이끌려 나와 온유하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앉게 되는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그분의 능력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께서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사랑의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말씀하시든지, 깊고도 압도적인 죄의 각성이라는 '급하고 강한 바람'(행 2:2)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든지, 그분의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분의 능력은 거부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성령님은 신자들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다(살전 2:13 참고).

성령님의 사역은 그분의 능력만큼이나 주권적이다. 성령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찾아오시며, 그 방식도 스스로 정하신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를 떠나시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임의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우리는 성령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사역의 결과를 볼 뿐이다. 성령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며 왜 역사하시는지, 그리고 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일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알려 주시지 않는다.

복되고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이는 당신이 보기에 선한 것이니이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는 이 진리에 대해 수많은 예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들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이 측면을 더 확장해서 설명하지는 않겠다. 만약 성경에 기록된 예들이 지금 떠오르지 않는다면 여가를 이용하여 성경을 찾아봐도 좋다. 특히 야곱과 에서, 세리와 바리세인, 다소 사람 사울과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명의 강도의 경우를 살펴보라고 권유하는 바이다. 거기에는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성령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에 속한 주권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증거에만 머무르지 않겠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여러분을 복된 성령님의 사역에 나타나는 주권성에 대한 증인으로 초청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사 43:10 참고)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누가, 또 무엇이 여러분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뿐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서 선별된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오직 여러분만이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은혜 자녀 곧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여전히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하여 살고 있다.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며 자신과 계약을 사랑하고 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섭리 가운데 양심과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대적하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자신을 막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타락한 영혼들이 맞이하는 최후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비 영역을 지나쳐 영원으로 들어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눅 16:23)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 선택받고 부르심 받고 용서받고 의롭게 된 죄인이다. 여러분은 씻음을 받고 의의 옷을 입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거룩하게 된 죄인이다. 여러분은 십자가 아래로 이끌려 왔으며,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십자가를 질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 죄인이다. 오, 택하심 속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이여! 오, 예수님의 구별하시는 은혜여! 오, 영원하신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여!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 9:20)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굴복하고 그저 조용히 경탄하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라.

지금까지이 글을 읽었는데도 이 교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운가? 이 교리에 대해 반대하거나 못 본 척 지나치고 싶은가? 모든 온유함과 사랑을 담아 여러분에게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권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이 교리를 살펴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 교리에 반대하지 말라.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또 자신의 영혼이 받은 측량할 수 없는 복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 교리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

오, 이 얼마나 귀중한 진리인가! 이 진리는 인간의 공로라는 교만에 흠집을 낸다. 이 진리는 자아라는 뿌리에 도끼를 갖다 댄다. 이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자신을 낮추게 한다. 이 진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스스로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영혼 속에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모든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능력과 위엄과 다스림을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돌리게 된다.

성령님의 사역이 값없는 은혜라는 사실도 성령님의 주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피조물 중 그 어떤 것도 성령님을 주인의 품으로 인도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없다. 죄인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형벌이 확정된 범죄자, 법을 어긴 반역자, 불쌍한 파산자, 마음에 반역하려는 생각이 가득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리심과 그분의 아들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 일만 달러트의 빚을 졌으면서도 갚을 돈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과연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를 각성하게 하시고, 그들의 적대감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진압시키시며,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그 영혼에 용서와 평안의 인을 치시는 것이다. 오, 이 얼마나 값없는 은혜요 분에 넘치는 자비이며, 주권적인 사랑인가! 성령님께서 과연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행하신다고 할 수 있을까?

회심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회심시킬 대상을 정하실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서 더 보잘것없는 모습을 본 것을 기준으로 삼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성령님께서는 종종 가장 미천하거나 사악하고 타락한 사람을 선택하신다. 인간의 공로에 대한 모든 사상을 전복시켜 버리고 성령님의 값없는 은혜를 가장 찬란하게 나타내시려는 것처럼 말이다.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역사하는 은혜를 보라. 그분은 다가오셔서 문을 두드리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이때 성령님은 피조물의 그 어떤 공로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설령 우리에게 공로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것없을 뿐이다.

오, 성령님의 은혜는 얼마나 풍성한가! 불쌍한 죄인을 부르실 때 이 은혜가 얼마나 크고도 밝히 드러나며 빛나는지 모른다. 확신에 찬 영혼은 이렇게 외친다. "주님, 과연 제 안에서 무엇을 보셨기에 주님께서 저를 향하여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셨고, 주님께서 저에게로 다가오실 수 밖에 없었으며, 저를 주님의 성전으로 만들게 되었습니까? 저에게는 그럴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궁핍함과 처량함과 비참함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권, 그리고 저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는 저를 향한 주님의 자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복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영광스러운 사역에서 눈을 떼지 말라. 이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폐허가 된 피조물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바로 여러분이 복된 사람이다. 여러분은 가난함 속에서도 부요함을 누린다. 여러분은 낮아질 때 높아지게 된다. 하나님 안에 모든 사랑이 있고, 예수님 안에 모든 은혜가 있다. 그리고 성령님 안에 모든 자비하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고개를 들라. 그리고 진심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르라. 비록 가난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멸시 받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리고 거만한 바리세인의 눈에 하찮게 보일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은혜의 보물을 쏟아 부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여러분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복되신 성령님도 보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여러분이 받을 복이 얼마나 광대한가!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3 참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얼마나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 아는가? 복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자신의 거할 처소로 만드실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는가? 그렇다면 여러분는 여러분이 낮아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살리시는 성령님'에서(104-11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옥타비우스 윈슬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성령님의 인 치시는 사역  (0) 2023.05.15
2. 중생 사역의 특징  (0) 2023.05.03
4) 효과적인 부르심  (0) 2023.05.03
옮긴이의 머리말  (0) 2023.05.01
2) 기도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  (0) 2023.05.01

4) 효과적인 부르심

성령님의 사역은 효과적인 사역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 그렇게 깊이 살펴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주제는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일면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과 관련된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 더욱 확실한,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높고도 신령한 시각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을 볼 수 없다.

성령님께서는 신자가 거듭날 때 그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종종 '부르심'이라고 일컬으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애써 연구하지 않더라도 성경의 몇몇 구절만 보면 증명된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내가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다(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일컬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다음의 구절들을 보라.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벧전 2:9)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 8:30)
"부르심을 받은 자 곧.....예수 그리스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유 1:1)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딤후 1:9)
"하늘을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히 3:1)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이와 같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고 어두운 데서 건짐을 받은 거듭난 사람이 곧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람을 부르신 이가 영원한 성령님이다. 곧 살리시고 부르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인 것이다(요 66:63 참고). 그러므로 여기서는 특별히 성령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님의 부르심에는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이 있다. 먼저 외적 부르심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잠 1:2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성령님의 외적 부르심에는 다양한 방편이 사용된다. 말씀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복음에 대한 영광스러운 선포를 사용하시기도 하며, 자비를 베풀거나 심판하시는 등 하나님의 섭리를 이용하시기도 한다. 또 사역자들을 통해 경고하시거나 친구들을 통해 책망하시기도 한다. 또 때로는 자연적인 양심의 각성을 일으키시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다른 것들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한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시키신다(눅 5:32).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복음을 들을 뿐만 아니라 항상 은혜의 수단을 접하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쓴소리를 해줄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성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은 죄인들에게 두려운 책임감을 갖게 한다. 이 부르심을 거절한다는 것은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노를 부으시기 전에 항상 먼저 그들에게 평화의 손길을 내미신다.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가 심판보다 먼저이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잠 1:24).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롬 10:2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의논하시고 논쟁하시고 그들을 권면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초청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들어 보자"라고 말씀하시며, 가르치시고 주의를 주시며 초청하신다. 또 의무감 때문이든지 스스로 관심이 일어나서든지 간에 회심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진지한 이유를 사람의 마음에 심어 주시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이 가진 관심사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역설하신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바 반역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가!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자신의 팔을 뻗으시는 분이다. 진노가 아니라 자비를, 저주가 아니라 복을 베푸시며, 즉각적인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초청하시고 격려하시며, 죄인과 더불어 '쟁론'하시는 인내와 용서가 하나님께 있다. 오, 우리 하나님과 같은 신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잠 1:24).

한편, 하나님의 선택에는 특별하고도 직접적이며 효과적인 성령님의 부르심이 있다.
이 부르심이 없다면 다른 모든 부르심은 헛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겔 37:14)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더불어 성경은 성령님의 효과적인 역사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성령님께서는 진리를 도구로 삼아 사람의 영혼에 효과적으로 역사하신다. 이전의 성령님의 부르심에는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그 어떤 내적이고도 초자연적이며 비밀스러운 부르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효과적인 부르심에는 양심을 깨우고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며, 심판이 있음을 확신하게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귀로 새롭게 울려 퍼지는 경고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 복된 효과를 주목하라.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우리 지성에 드리워져 있던 장막이 찢어지며, 마음속에 있는 깊은 악의 근원이 무너진다. 그리고 죄인은 자신이 버림받았고 멸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이 용서가 없고 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지도 않고, 아니 하나님이 아예 계시지도 않고 구세주도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상태인가! 죄인은 그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라고 외칠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멸망 가운데 있는 비참한 사람입니다.내 속을 들여다보면 어둡고 더러울 뿐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내 마음의 고뇌를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면 오직 나를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만 보입니다. 어디를 보든지 지옥만 보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그 지옥에 보내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정의롭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복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 고백하는 불쌍한 영혼을 절대 절망 가운데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죄인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신실한 성령님께서는 이 일을 효과적으로 진행하시고 완성하신다(빌 1:6 참고).성령님께서는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고, 그의 희미한 믿음의 눈을 열어 구세주를 보게 하신다. 고난 가운데 찢끼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시면서도 양팔을 그에게 내미시는 구세주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을 너를 위해 행하노라. 이 십자가도 너를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고난도, 내가 흘리는 피도 모두 너를 위한 것이다.
또한 내 팔도 너를 향해 내미노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사 45:22). 오직 믿기만 하라. 멸망 가운데 있느냐? 내가 너를 구원할 수 있노라. 죄를 지었느냐? 내가 깨끗하게 할 수 있노라. 가난하냐? 내가 너를 부요하게 할 수 있노라. 깊은 구덩이에 빠졌느냐? 내가 너를 건져 낼 수 있노라. 벌거벗었느냐? 내가 입힐 수 있노라. 너에게 아무런 재물도, 돈도, 선한 것도, 공로도 없어서 나에게로 가져올 것이 없느냐? 나는 그저 너의 모습 그대로를 받을 수 있으며, 또 받을 것이다. 가난하고 헐벗었으며 무가치한 사람아!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러 내가 왔으며, 이런 사람을 부르러 왔고, 그들을 위해서 죽으러 왔노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불쌍한 영혼은 이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이렇게 외친다. "제가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주님이야말로 제가 원하는 구세주이십니다.
저는이 비열하고도 누추하며 모든 것이 부족한 저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실 분을 원했습니다. 저는 저를 온전히 값없이, 저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어도 은혜로 구원을 주실 분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야 제 영혼이 사랑하는 분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은 물론 영혼토록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신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하고도 직접적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시되, 효과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신다(벧전 2:9 참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중생 사역의 특징' 중에서(110-11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옥타비우스 윈슬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중생 사역의 특징  (0) 2023.05.03
3) 주권적 선택  (0) 2023.05.03
옮긴이의 머리말  (0) 2023.05.01
2) 기도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  (0) 2023.05.01
옥타비우스 윈슬로우-구원의 단순성  (0) 2014.04.18
옮긴이의 머리말

어두운 영혼을 밝히 비추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위대한 빛

그동안 저는 십자가에 대한 설교가 그리울 때마다 버릇처럼 로이드 존스가 쓴 십자가 설교를 꺼내어 읽곤 하였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만큼 탁월한 설교자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타비우스 윈슬로우가 전한 십자가 설교를 읽으면서 ‘어쩌면 이 책이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십자가 설교 중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서만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우리가 처음 죄를 회개하는 순간에서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싸움을 다 마치는 순간까지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것이며 모든 중심임을 철저하게 파헤쳐 보여 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방대할 수 있는 내용을 얼마나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얼마나 호소력 있게 전해 주는지, 한 편 한 편이 완전한 복음으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는 이 책의 한 편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렇지, 정말 십자가가 내 모든 것이지. 그런데 왜 나는 십자가 주변을 멀리 맴돌았던 것일까?”라는 탄식을 토해 내었고, 동시에 “오, 주님, 이 십자가 아래 평생 머물 수 있도록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간구하게 되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여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고, 내가 어디에 서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확실히 정하게 되었다.

이 책의 첫 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저는 “바로 이 책이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책의 한 줄 한 줄이 정말 생생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 전체를 일깨우는 능력으로 십자가를 전하고 있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의 깊은 심정으로 우리 영혼의 어두운 골목 구석구석까지 헤치고 들어와 죄의 잔재를 청소해 주고 복음의 은혜로 아름답게 해 주는 역사를 마음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상징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교리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속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그 속죄로 말미암아, 전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와 진리에 굴복하지 않았던 반역자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에 있게 되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표현은 성도가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덕적인 능력을 친밀하게 체험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깊이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혜의 복들이 총집결해 있고, 또 장차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첫 열매가 피어난 바로 그 장소에 성도가 믿는 마음과 겸손한 심정으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가까이하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규범이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유지하고 있는 예외적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외 없이 누리는 특권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그러한 특권을 누린다. 일종의 예외적인 특권이 되어 버린 셈이다.

세상은 다양한 면에서 다양한 형태와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십자가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지간해서는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동떨어진 궤도를 따라 돌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처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한없이 즐거워하던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하고도 온화한 영향력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냉랭하고 황량한 삶을 살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성도의 영혼이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거기에는 기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안전보장도 없다. 우리의 심령과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령의 능력이 존재하지도 않고 감지되지 않는 곳을 걷는다는 것은, 마치 지옥을 걷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의 즐거움을 좇고 육신의 쾌락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면,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그의 십자가를 깨달을 수도 없으며 그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다.

세상에 푹 빠져 살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영적으로 가까이 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여러분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고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못 박히는 곳이며, 죄가 사망한 곳이기 때문이다.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서게 되면, 거룩한 십자가 아래 서게 되면, 세상의 영광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죄의 능력은 마비된다. 또한 교활하기 짝이 없던 사탄도 십자가의 밝은 영광 때문에 움찔하게 되고, 십자가의 죽음과 상처 아래서 괴로워하며 자신의 먹이를 포기하고, 패배감과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은밀한 처소로 조용히 물러가게 된다.

- pp 7-21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ReplyForward출

2) 기도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

우리가 자유롭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드리는 간구의 내용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다(고후 12:7,8 참고). 그러나 결국 이 간구에서 바울이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과연 누가 이방인의 사도에게 이런 약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랑하는 종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또 하나님의 영광으로 초대되는 특별한 계시를 경험한 그를 계속 먼지와 같이 낮추기 위해서는 그에게 언약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연단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할 때에도 잠시 침묵하셨다. 바울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이 연단의 고통이라는 특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사도도 하나님이 거절하실 만한 것들을 간구할 수 있다는 점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밀감을 경험한 다음에든지 아니면 우리 영혼을 향한 그분의 자비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다음에 든지,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시험이 오리라고 예상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린 다음에는 자기 만족에 빠지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이 우리가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셔야만 한다. 바울도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바를 주시지 않을지라도 그분은 결국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확신한다.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고는 대신 그에게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신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다. 바로 모든 것을 지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에게 주신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혼자만 경험하는 무겁고도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혹 지금도 계속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 간구가 별로 지혜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그 십자가를 제거한다면, 그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의 통로도 닫힐 것이고, 여러분은 그에 대해 평생토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의 영혼에 주어질 보기 얼마나 비밀스럽고도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여러분이 건강을 달라고 자주 간구하였는데도 그 요청이 거절되었는가? 바로 지혜가 그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또 사랑이 그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부드럽고도 변치 않는 그 사랑이 여러분의 간구를 거절하신 것이다. 지혜롭고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건강을 얻는 것이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선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 여러분을 더욱 경건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주시고도 천 배나 더 주시고 싶어할 것이다. 그토록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향하여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만약 무한한 지혜로 여러분의 영혼을 다루시고 그 모든 것을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과연 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간구와 열망과 한숨과 눈물과 애타게 간청하는 모습을 외면하시겠는가? 오! 결코 그럴 수 없다.

대신 주님은 여러분에게 거절하신 것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 그분께서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과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그분의 은혜가 여러분을 격려한다. 그분의 팔이 여러분을 지지하고,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을 달래며,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신다. 비록 여러분의 '고독의 방(chamber of solitude)'이 건강하고 활기차며 기쁨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비밀스러운 곳에서 여러분은 언약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영혼 위에 부어 주시는 은혜를 맛볼 것이며, 또 여러분을 향하여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여러분에게 선하다면, 왜 주님이 여러분의 질병을 단번에 치료하시지 않겠는가? 주님께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럴 의지가 없으시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을 구하라. 여러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는 의지를 달라고 기도하라. 남들이 알지 못하는 순종, 곧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건강을 구하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구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치유의 능력을 사용하시며,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잊지 말라. 주님은 무엇이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여러분은 몸이 건강해야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독의 방과 고통의 침대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복되신 성령님께서는 인내와 단념, 겸손한 순종과 아이와 같은 묵종 등의 수단을 통하여, 지금까지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에 베푸신 다른 어떤 활동적인 은혜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다.

때때로 신자는 잘못된 간구를 하기도 한다. 새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마 20:20,21. 참고). 이 간구 속에 자아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비록 이렇게 행한 어머니의 사랑 자체는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겠지만, 이 일은 자녀에 대한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부모가 매우 잘못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 부모는 세상의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과 부가 자신의 자녀에게 있기를 구하겠지만, 경건한 부모들은 결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잘못된 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 가운데 이런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요청하는 이런 간구야말로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으로 여기셨다. 이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적인 영광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들이 이 영광을 나누는 것이 그녀가 가진 최고의 야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이 간구를 그 자리에서 부드럽게 거절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영적인 복을 구하라. 그러면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구하되, 회심하고 성화되며 절제하는 은혜를 끊임없이 간구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너무 자주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졸라대는 식으로 간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못된 간구의 또 다른 예가 있다. 욥이 하나님께 자신이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한 것은 잘못된 간구이다.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욥 6:8,9)

이것은 어리석고 죄악된 간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라운 자비와 지혜로 그의 간구를 거절하셨다.

이처럼 참으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롬 8:26 참고).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기도의 주재자이신 성령님' 중에서(297-301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구원의 단순성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하나님의 구원은 얼마나 단순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요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믿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또 빈손을 내밀어 주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기만 하면떨리는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보혈이 한 방울만 우리에게 떨어지기만 하면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죄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며 죄인이 살게 되고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는 것처럼여러분 자신을 학대할 필요도 없고먼 성지로 순례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고,단식으로 몸을 상하게 할 필요도 없고값비싼 희생을 치를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피로 여러분의 죄를 씻으십시오높이 들린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잃어버렸던 생명보다 더 고결한 생명이 여러분의 영혼으로 흘러 들어올 것입니다그리고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Octavius Winslow (1808-1878) 영국의 비국교도 목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p. 24-25 (지평서원 역간, 2009)

                   (At the Foot of the Cross)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도의 씨름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 기도란 얼마나 큰 특권인지! 염려로 상했던 마음 평안을 얻고

세상을 벗어나 천국을 맛보고 비참한 죄인이 만복 누리네.

 

강력한 기도에 권능있으니 영원한 보좌 한 걸음에 이르고

거기서 전능자의 도움 당당히 구하며 그 모든 도움 우리 것으로 누리네.

 

나 아무리 약하고 원수들 강해도 기도의 힘이 모든 원수이기니

나 기도하면 내 하나님 내주변에 불담을 쌓아 주시네.

 

나 기도하면 네 모든 원수들 연기사라지듯 혼비백산 도망하고

나 기도하면 여호와의 능력 지친 내 영혼 강건하게 하네.

 

 

무슨 잘못 있고 무슨 필요 있든지 기도로 그 모든 것 토해낼 수 있으며

사랑하는 내 아버지의 귀가 그 모든 것 세심하게 들으시네.

 

죄에서 벗어나려 힘써 싸우나 오히려 죄가 더 무겁게 짓누를 때

무력감에 휩싸여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 주시네.

 

거룩함에 도달하려 애쓰는 이들도 기도 가운데 그것에 이를 수 있으니

믿음과 기도로 씨름하면 불가능한 일 전혀 없음이라.

 

성령께서 기도 가르쳐 주시고 어린 양의 공로 의지하여 나아가니

아무리 연약한 기도도 들으심을 얻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의 향기가 됨이라.

 

존귀하신 예수님을 통해 드리는 기도 단숨에 하늘 보좌에 이르고

빛나는 천사들 사랑의 날개에 응답 싣고 내려오네.

 

 

 

지친 심령에 소망도 기도요 염려하는 마음에 확실한 위로도 기도라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거기에서 구원을 발견하네.

 

기도는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분께 모든 소망 아뢰는 것!

거지가 왕께 나아가 원하는 모든 것 아뢰는 것!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서 뒹굴면서 허공을 치는 유창한 말 늘어 놓고

멋진 말과 표현 내 품는 것은 기도 아니라.

기도는 마음의 깊은 중심이거늘.

 

♥ 옥타비아누스 윈슬로우(1808-1878)♥

   미국 청교도의 후예로서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영국으로 이주한 비국교도 목회자

   1861년 찰스스펄전이 개척한 교회(메트포 폴리탄테버내클. 런던) 완공시 입당예배의 설교자

 

 

출처: 새노래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제게 속하였나이다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아버지여, 이 죄 많은 자녀를 아버지께 데려왔나이다.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나이다.

한번 더 이 자녀를 제 손에서 받아 주시옵소서

이 자녀는 제게 속하였나이다.

이 자녀는 죄가 크나 자신의 죄를 지백하나이다.

이 자녀를 보지 마소서, 아버지의 시선 감당할 수 없으니.

 

저를 보소서, 제가 이 자녀의 약함을 가리겠나이다.

이 자녀는 감히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변론할 수 없으나

제가 이 자녀의 대언자이며 이 자녀의 문제를 맡았나이다.

이 자녀 위해 제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

이 자녀 위해 심령에 새긴 모든 슬픔

이 자녀 위해 제가 입은 모든 상처 기억하시고 용서하소서

 

성부 하나님! 저는 이 자녀를 절대 잃을 수 없나이다.

비록 죄가 크나 이 자녀도 제게 속한 자녀이오며

죄가 이 자녀를 파괴시켜으나 제가 죄를 멸하였고

사망이 이 자녀를 따르나 제가 사망을 정복하였으며

사탄이 이 자녀를 옮아매나 사탄은 제 발 밑에 있나이다.

 

내 아버지여! 이 자녀의 기도를 들으소서.

아니 제 기도를 들으소서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결코 이 자녀와 바꿀 수 없으니

당신의 영광 위해 당신이 택하시고 만드신 이 자녀,

죄 때문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서 있는 자녀,

제게 모든 소망을 걸고 있는 이 자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제 자녀를 알고 제게 속한 이들을 아옵나이다.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그들이 흘리는 모든 눈물

제 심장 고동소리와 어울려 뛰는 그들의 심장 고동소리

죄로 인한 탄식과 간절한 기도

제게 매달려 의지하는 저들의 깊은 사랑과 신뢰

이로써 제게 속한 이들을 아옵나이다.

 

저는 그들이 쫓겨나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나이다.

비록 약해도 그들은 제 양무리 중에 약한 양이며

저를 가장 아프게 하는 양도, 저를 가장 적게 사랑하는 양도

길잃고 방황하는 양도 저는 한결같이 사랑하나이다.

 

이 자녀를 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더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채찍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 자녀는 제 것이며 세상에서 불러낸 제 양이옵니다.

제 사랑이 아니면 이 자녀에게는 권리도 없고 집도 없고

땅과 지옥이 공모하여 이 자녀를 해치려 하나

제가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구원하오니 우리는 하나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중에서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출처: 사람이 되신 하나님 "임마누엘"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