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권적 선택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중생의 역사 가운데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사역과 활동에서 주권적으로 역사 하신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정의하실 것인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의 말씀을 보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롬 9:15)

바로 여기에 주권자가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하나님 자신과 부합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유기, 그리고 자신을 드러낼 것인가 감출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에서 비롯되는 은혜로운 목적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하시는 이'(엡 1:11)이시며, 천사에게 든 사람에게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든 일을 설명하시지 않는'(욥 33:13 참고) 분이시다.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하나님의 주권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여기서 사용된 표현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라. 인간은 바람을 다스릴 수 없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느 누구도 바람의 영향력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바람에게 명령하거나 바람을 통제할 수 없다.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듯이, 바람을 잠잠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성령께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도 저항을 받으신다. 그것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저항을 받으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 저항에 굴복하지 않으신다.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적대감과 육신적인 소욕이 성령님을 대적해서 일어나지만, 이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들은 성령님이 품고 계신 사랑의 사명에 의해 굴복되고 만다. 자신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성령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실 때, 이 모든 권세들은 성령님께 제대로 대항할 수 없다. 그분은 강력한 군대처럼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신다. 그리고 죄인은 '주의 권능의 날에'(시 110:3)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막 5:15) 예수님의 발 앞으로 이끌려 나와 온유하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앉게 되는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그분의 능력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께서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사랑의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말씀하시든지, 깊고도 압도적인 죄의 각성이라는 '급하고 강한 바람'(행 2:2)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든지, 그분의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분의 능력은 거부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성령님은 신자들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다(살전 2:13 참고).

성령님의 사역은 그분의 능력만큼이나 주권적이다. 성령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찾아오시며, 그 방식도 스스로 정하신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를 떠나시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임의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우리는 성령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사역의 결과를 볼 뿐이다. 성령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며 왜 역사하시는지, 그리고 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일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알려 주시지 않는다.

복되고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이는 당신이 보기에 선한 것이니이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는 이 진리에 대해 수많은 예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들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이 측면을 더 확장해서 설명하지는 않겠다. 만약 성경에 기록된 예들이 지금 떠오르지 않는다면 여가를 이용하여 성경을 찾아봐도 좋다. 특히 야곱과 에서, 세리와 바리세인, 다소 사람 사울과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명의 강도의 경우를 살펴보라고 권유하는 바이다. 거기에는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성령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에 속한 주권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증거에만 머무르지 않겠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여러분을 복된 성령님의 사역에 나타나는 주권성에 대한 증인으로 초청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사 43:10 참고)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누가, 또 무엇이 여러분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뿐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서 선별된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오직 여러분만이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은혜 자녀 곧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여전히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하여 살고 있다.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며 자신과 계약을 사랑하고 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섭리 가운데 양심과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대적하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자신을 막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타락한 영혼들이 맞이하는 최후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비 영역을 지나쳐 영원으로 들어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눅 16:23)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 선택받고 부르심 받고 용서받고 의롭게 된 죄인이다. 여러분은 씻음을 받고 의의 옷을 입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거룩하게 된 죄인이다. 여러분은 십자가 아래로 이끌려 왔으며,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십자가를 질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 죄인이다. 오, 택하심 속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이여! 오, 예수님의 구별하시는 은혜여! 오, 영원하신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여!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 9:20)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굴복하고 그저 조용히 경탄하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라.

지금까지이 글을 읽었는데도 이 교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운가? 이 교리에 대해 반대하거나 못 본 척 지나치고 싶은가? 모든 온유함과 사랑을 담아 여러분에게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권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이 교리를 살펴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 교리에 반대하지 말라.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또 자신의 영혼이 받은 측량할 수 없는 복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 교리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

오, 이 얼마나 귀중한 진리인가! 이 진리는 인간의 공로라는 교만에 흠집을 낸다. 이 진리는 자아라는 뿌리에 도끼를 갖다 댄다. 이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자신을 낮추게 한다. 이 진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스스로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영혼 속에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모든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능력과 위엄과 다스림을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돌리게 된다.

성령님의 사역이 값없는 은혜라는 사실도 성령님의 주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피조물 중 그 어떤 것도 성령님을 주인의 품으로 인도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없다. 죄인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형벌이 확정된 범죄자, 법을 어긴 반역자, 불쌍한 파산자, 마음에 반역하려는 생각이 가득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리심과 그분의 아들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 일만 달러트의 빚을 졌으면서도 갚을 돈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과연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를 각성하게 하시고, 그들의 적대감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진압시키시며,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그 영혼에 용서와 평안의 인을 치시는 것이다. 오, 이 얼마나 값없는 은혜요 분에 넘치는 자비이며, 주권적인 사랑인가! 성령님께서 과연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행하신다고 할 수 있을까?

회심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회심시킬 대상을 정하실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서 더 보잘것없는 모습을 본 것을 기준으로 삼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성령님께서는 종종 가장 미천하거나 사악하고 타락한 사람을 선택하신다. 인간의 공로에 대한 모든 사상을 전복시켜 버리고 성령님의 값없는 은혜를 가장 찬란하게 나타내시려는 것처럼 말이다.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역사하는 은혜를 보라. 그분은 다가오셔서 문을 두드리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이때 성령님은 피조물의 그 어떤 공로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설령 우리에게 공로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것없을 뿐이다.

오, 성령님의 은혜는 얼마나 풍성한가! 불쌍한 죄인을 부르실 때 이 은혜가 얼마나 크고도 밝히 드러나며 빛나는지 모른다. 확신에 찬 영혼은 이렇게 외친다. "주님, 과연 제 안에서 무엇을 보셨기에 주님께서 저를 향하여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셨고, 주님께서 저에게로 다가오실 수 밖에 없었으며, 저를 주님의 성전으로 만들게 되었습니까? 저에게는 그럴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궁핍함과 처량함과 비참함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권, 그리고 저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는 저를 향한 주님의 자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복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영광스러운 사역에서 눈을 떼지 말라. 이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폐허가 된 피조물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바로 여러분이 복된 사람이다. 여러분은 가난함 속에서도 부요함을 누린다. 여러분은 낮아질 때 높아지게 된다. 하나님 안에 모든 사랑이 있고, 예수님 안에 모든 은혜가 있다. 그리고 성령님 안에 모든 자비하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고개를 들라. 그리고 진심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르라. 비록 가난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멸시 받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리고 거만한 바리세인의 눈에 하찮게 보일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은혜의 보물을 쏟아 부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여러분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복되신 성령님도 보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여러분이 받을 복이 얼마나 광대한가!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3 참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얼마나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 아는가? 복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자신의 거할 처소로 만드실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는가? 그렇다면 여러분는 여러분이 낮아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살리시는 성령님'에서(104-11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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