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도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

우리가 자유롭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드리는 간구의 내용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다(고후 12:7,8 참고). 그러나 결국 이 간구에서 바울이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과연 누가 이방인의 사도에게 이런 약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랑하는 종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또 하나님의 영광으로 초대되는 특별한 계시를 경험한 그를 계속 먼지와 같이 낮추기 위해서는 그에게 언약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연단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할 때에도 잠시 침묵하셨다. 바울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이 연단의 고통이라는 특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사도도 하나님이 거절하실 만한 것들을 간구할 수 있다는 점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밀감을 경험한 다음에든지 아니면 우리 영혼을 향한 그분의 자비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다음에 든지,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시험이 오리라고 예상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린 다음에는 자기 만족에 빠지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이 우리가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셔야만 한다. 바울도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바를 주시지 않을지라도 그분은 결국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확신한다.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고는 대신 그에게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신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다. 바로 모든 것을 지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에게 주신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혼자만 경험하는 무겁고도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혹 지금도 계속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 간구가 별로 지혜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그 십자가를 제거한다면, 그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의 통로도 닫힐 것이고, 여러분은 그에 대해 평생토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의 영혼에 주어질 보기 얼마나 비밀스럽고도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여러분이 건강을 달라고 자주 간구하였는데도 그 요청이 거절되었는가? 바로 지혜가 그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또 사랑이 그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부드럽고도 변치 않는 그 사랑이 여러분의 간구를 거절하신 것이다. 지혜롭고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건강을 얻는 것이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선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 여러분을 더욱 경건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주시고도 천 배나 더 주시고 싶어할 것이다. 그토록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향하여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만약 무한한 지혜로 여러분의 영혼을 다루시고 그 모든 것을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과연 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간구와 열망과 한숨과 눈물과 애타게 간청하는 모습을 외면하시겠는가? 오! 결코 그럴 수 없다.

대신 주님은 여러분에게 거절하신 것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 그분께서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과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그분의 은혜가 여러분을 격려한다. 그분의 팔이 여러분을 지지하고,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을 달래며,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신다. 비록 여러분의 '고독의 방(chamber of solitude)'이 건강하고 활기차며 기쁨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비밀스러운 곳에서 여러분은 언약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영혼 위에 부어 주시는 은혜를 맛볼 것이며, 또 여러분을 향하여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여러분에게 선하다면, 왜 주님이 여러분의 질병을 단번에 치료하시지 않겠는가? 주님께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럴 의지가 없으시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을 구하라. 여러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는 의지를 달라고 기도하라. 남들이 알지 못하는 순종, 곧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건강을 구하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구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치유의 능력을 사용하시며,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잊지 말라. 주님은 무엇이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여러분은 몸이 건강해야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독의 방과 고통의 침대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복되신 성령님께서는 인내와 단념, 겸손한 순종과 아이와 같은 묵종 등의 수단을 통하여, 지금까지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에 베푸신 다른 어떤 활동적인 은혜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다.

때때로 신자는 잘못된 간구를 하기도 한다. 새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마 20:20,21. 참고). 이 간구 속에 자아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비록 이렇게 행한 어머니의 사랑 자체는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겠지만, 이 일은 자녀에 대한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부모가 매우 잘못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 부모는 세상의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과 부가 자신의 자녀에게 있기를 구하겠지만, 경건한 부모들은 결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잘못된 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 가운데 이런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요청하는 이런 간구야말로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으로 여기셨다. 이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적인 영광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들이 이 영광을 나누는 것이 그녀가 가진 최고의 야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이 간구를 그 자리에서 부드럽게 거절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영적인 복을 구하라. 그러면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구하되, 회심하고 성화되며 절제하는 은혜를 끊임없이 간구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너무 자주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졸라대는 식으로 간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못된 간구의 또 다른 예가 있다. 욥이 하나님께 자신이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한 것은 잘못된 간구이다.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욥 6:8,9)

이것은 어리석고 죄악된 간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라운 자비와 지혜로 그의 간구를 거절하셨다.

이처럼 참으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롬 8:26 참고).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기도의 주재자이신 성령님' 중에서(297-301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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