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은 잘 알려진 구절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선물’이란 무엇인가? 웨스트코트(Westcott)는 이것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는 구절에서 그 ‘것’(that)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다.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대명사는 중성이지만 , ‘믿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여성명사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이 마음에 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혜, 믿음, 그리고 구원은 전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지 상관없이, 이 구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이다.(빌1:29참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그러나 예수님은 같은 문맥에서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하나님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이끄시며 또한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주를 이해하거나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베드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일시적이지도 무능력하지도 않다. 그것은 최후까지의 견인을 보장하는 항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친숙한 말씀인 하박국 2:4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갈3:11; 히10:38)고 한 것은 믿겠다는 순간적인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일평생의 신뢰를 뜻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3:14의 말씀은 참된 믿음의 지속성 곧 그것의 견고성이 믿음이 있다는 주된 증거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물과 함께 시작하신 구원사역은 훼방을 받아서 중단될 수 없다. 빌립보서 1:6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전 1:8; 골1:22-23)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속에는 그분의 뜻에 순응하려는 자발적인 의지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빌2:13).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순종을 수반하는 것이다. 벌코프(Berkhof)는 참된 믿음의 요소로서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이 요소((notitia). 진리를 확신하고 인정하는 정적인 요소(assensus). 그리고 진리에 복종하기 위해 뜻을 정하는 의지적인 요소(fiducia). 현대의 대중적인 신학은 notitial와 때로 assensus까지는 인정하지만 fiducia는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믿음에서 순종이 빠진다면, 그것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바인(W.E.Vine)도 똑같은 생각을 가졌는데, 그는 믿음의 중요한 요소들로 “견고한 확신 ... 개인적인 복종 ... 그리고 이런 복종에 바탕을 둔 행동”과 같은 것을 꼽았다. 그는 동사 ‘순종하다(peitho)'를 풀이하면서 “peitho와 pisteuo(신뢰하다)는 어원상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둘의 의미상 차이를 말한다면, 전자는 후자로 말미암아 생기는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3:18-19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이 불신의 증거라고 말한다 ...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를 보인 것이다. ... 신약 성경에서 peitho는 내적인 납득과 그 결과인 믿음의 실재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제시한다.”

 

참된 신자는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만은 육체의 잔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다(고후 7:1; 살전 3:10).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바람은 참된 신자들 속에서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롬 7:18). 믿음은 언제나 순종하는 열망을 낳는다.

 

순종을 빠뜨린 믿음의 개념은 구원의 메시지를 부패시킨다. 바울은 복음을 순종해야할 것을 표현했다(롬 10:16; 살후 1:8). 로마서 6:17에서 그는 심지어 회심까지도 순종으로 특징지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마음으로 순종하여” 그가 자신이 복음 전도 사역에서 추구했던 결과는 “말과 일로 순종하는 것”(롬 15:18)이었고, 거듭 거듭 “믿음의 순종”을 강조했다(롬1:5; 16:26).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개념이 순종과 불리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요한복음 3:36에서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과 같은 말로 쓰였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사도행전 6:7은 초대 교회에서 구원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허다한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니라” 순종이 그처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5:9에서는 이들을 같은 말로 다루고 있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장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믿음에 관한 위대한 논변인 히브리서 11장은 순종과 믿음을 뗄 수 없는 것으로 가르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순종하여”(8절).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우들은 모두 자신들의 믿음을 순종으로 나타냈다. 이 장을 주석할 때, 뛰어난 신학사전은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순종은 참된 믿음의 불가피한 증거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할 때, 이 점을 인식했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1:15-16).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의 불순종은 믿지 않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그들의 행동은 말로써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보다 더 큰 소리로 그분을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닌 불신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항상 의로운 행실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즐겨 말한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결코 믿음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스펄전(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 행위에 근거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지라도 또한 그것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똑같이 확신한다.“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을 통해 증명된다.

 

믿음(faith)과 충성(faithfulness)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는 사실상 다른 개념이 아니었다. 실제로 영어성경에서는 같은 단어가 이 두 가지로 번역되기도 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쓰면서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헬라어 pistis ... 영어 faith는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믿음을 뜻하는 신뢰함(trustfulness)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의지할 수 있을 만한 마음을 뜻하는 신뢰받을 만한(trustworthiness)이다. 이 두 단어는 문법적으로 같은 말의 능동태와 수동태라는 점에서 또는 논리적으로 같은 행위의 주격과 목적격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될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에는 긴밀한 도적적 유사성이 있다. 충성, 지조, 견고함, 확신, 의뢰, 신뢰, 믿음 이 용어들은 ‘믿음’의 수동적 의미와 능동적 의미라는 양극을 이어주는 고리들이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 두 단어들은 많은 경우에 서로 혼용되기 때문에 다소 자의적으로 구분할 때만 간신히 나뉠 수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 단어나 구절의 자유로운 폭과 심지어는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엄격히 구분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일이다. ... 그렇게 하면 과연 문법적인 정확성에 있어서의 손실이 종종 신학적인 깊이에 있어서의 이득으로 보상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경우에는 마음의 그 한 가지 특성이 다른 특성들을 수반하고 그 결과 충성스러운 사람은 또 믿을 만한 사람이 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도 확고부동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뢰하는(믿는) 사람은 또한 충성스러운(순종하는)사람이다. “충성, 지조, 견고함, 확신, 의뢰, 신뢰, 그리고 믿음”은 나눌 수 없이 모두 믿는다는 개념 속에 들어 있다. 의로운 사람은 참된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롬10:10)

 

물론 이것이 믿음이 죄 없는 완전함으로 귀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부르짖었던 간구를 이해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 비록 때때로 불완전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순종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이러한 열망이 없는 이른바 ‘믿음’이란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다. 순종을 거부하는 마음 상태는 완전히 불신앙일 뿐이다.

 

마태복음 5:3-12에 기록된 팔복은 생각건대 성경의 어떤 다른 구절보다도 참된 믿음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산상설교의 서두에서 우리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인 경건보다 월등히 뛰어난 위를 가르쳐 주셨다(마5:20). 그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 모두에게 이 더 나은 의가 요구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강조하신 자질들은 모든 참된 신자를 구별해 준다.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모든 참된 믿음의 특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팔복의 첫째 복은 주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는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이들은 구속받은 백성이고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자.

 

그것의 기본적인 특성은 겸손 .. 심령의 가난함 곧 영적인 파산 상태를 인식하는 상한 마음이다. 참된 신자들은 자신이 죄인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한다(마5:4). 애통하는 자는 온유하게 된다(5절).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6절). 마음이 청결케 되며(7절),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9절). 궁극적으로 신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을 듣는 자가 된다(10절).

 

이것이 참된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 그것은 겸손에서 출발하여 순종으로 결심을 맺는다. 참된 믿음이 드러내는 순종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위대하게 만드는 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의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10:6) .. 의 성격을 율법의 문자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까지 순종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마 5:21-48)이런 의는 단지 간음하는 행위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정한 생각을 품지 않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노하는 것을 살인하는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금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참된 의의 진수를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18).

 

물론 이것은 성취 불가능한 기준이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 관원을 대하신 후 그 청년이 믿지 않고 떠나가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19:23)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깜짝 놀안 그들은 이렇게 여쭈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절).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구원은 본래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동원할지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허락이 없이는 믿을 수도 없다(요6:44-45). 인간의 의지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스럽게도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그분께 순종하고 의롭게 사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다(벧후 1:3).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다. 이런 사실을 이해할 때 사람은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그 길은 심령의 철저한 가난을 깨닫는 것 즉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나오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틀림없이 의로운 순종으로 귀결될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특성을 가르쳐 주시고자 할 때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 아이는 순종적인 겸손의 완벽한 그림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살아 있는 교훈이 되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성인의 특권을 계속 주장한다면, 즉 우리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려하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며 자기 삶을 스스로 주장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와서 어린 아이의 겸손과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꺼이 순복하는 자세로 구원을 받는다면 이것이 올바른 태도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요10:27-28).

누가 진짜 양인가? 따르는 사람들이다. 누가 따르는 사람들인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다. 믿음은 순종한다. 불신은 거역한다. 삶의 열매는 그 사람이 신자인지 불신자인지를 드러낸다. 중간 지내는 없다. 진리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단지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 때 믿는 것이 아니다.

한때 ‘믿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기억에 매달려 있을 뿐 삶 속에서 믿음이 계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은 성경의 분명하고 엄중한 경고에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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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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