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6장 인간의 타락과 죄의 형벌

 

고든 H.클라크

 

[1항] 우리의 시조들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한 이 죄를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3;13 고후11:3 롬11:32

 

[2항]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3:6~8 전12:29 롬3:23 창2:17 롬5:12 엡2:1 창6:5 렘17:9 롬3:10~18 딛1:15

 

6장[1]~[2]의 요점

 

1. 인류의 시조는 금단의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불순종)하였다. 이 최초는 죄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조들은 ①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고 ②그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되었으며 ③전적 부패하게 되었다. 

3. 창세기 3장의 기록은 그 성격에 있어서 상징적이거나 신화적이 아니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 종교적인 간행물들을 보면 정치적인 기사들은 가득 차 있으나 성경 해석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너무나도 엄청나게 무식하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모든 교리들을 힘차게 선포할 필요가 있다.

 

6장에서 죄의 교리를 읽어 볼 때 다른 교리들에 비해서 더욱 힘차게 이 교리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이러한 생각은 좀 가장된 것일지 모르겠으나 본 장이 오늘의 무감각한 세대에 대한 적절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1항]에 보면 우리의 시조는 금지된 과실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브를 살해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대신 어떤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금하심으로써 그를 시험하셨는가? 어떤 경건한 사람들은 그러한 질문은 천박하고 경건치 못한 것이라고 혹평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주 중대한 질문이다. 또한 실제적으로 교육적인 것이라 믿는다. 아담은 본능적인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브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여 된 것이라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담이 금지된 실과를 먹기를 거절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그 유일한 동기 이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문제들로 복잡하게 하지 않고서 단순한 순종을 시험하셨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정상을 참작해 줄 만한 것도 없는 불순종인 것이다.

 

‘죄’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중요하다. 개별적인 죄들을 알기 위해서는 이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죄들을 피하려는 노력을 전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제시된 치유책(治癒策)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가 죄의 결과들을 소멸시킬 수가 있는가? 아니면 불교가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러한 종교들은 그들이 싸우려고 하는 그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은 성공할 것 같지가 않다. 거듭 말하거니와, 죄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얼마나 위해(危害)한 것인가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 하다. 여러 종교들과 심지어 기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은 죄의 위해성에 대해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떤 종교나 단체의 경우는 죄를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보고 다른 종교나 단체는 죄를 약간 나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죄를 치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칼비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성경이 죄를 하나님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소교리(요리)문답』에 보면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율법이 없이는 아무 죄도 있을 수 없다.

요한1서에 보면 죄란 불법이라고 말씀되어 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죄를 모세의 율법에만 관련시켜 가지고는 이해될 수가 없다. 성경에는 율법 시대 이전에는 양심 시대가 있고 율법시대 이후에는 은혜시대가 있다는 말이 전혀 없다. 롬5:13~14에 보면 죄에 대한 형벌인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 왕 노릇 하였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이 모세의 율법에 앞서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몇 가지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대는 1500년간의 율법 시대에 뒤이은 은혜의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은혜 시대이면서 또한 율법 시대이다. 만일 율법시대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몇몇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죄수들까지도 무죄 상태의 완전에 이르렀을 것이다.

 

1세기 말엽과 종교 개혁시대에 십계명이 폐기되었으므로 이제는 “율법에서 자유 하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원하는 모든 악을 자유롭게 탐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 유독한 형태의 반 율법주의는 오늘날 유형 교회에 크게 득세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에 탈선된 일부 교리가 남아 있어서 복음을 가리우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롬7:6) 라는 문구는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로 번역했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 문구의 의미는, 구속 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형벌을 면하게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명령들을 무시하고서 죄악 된 생활을 살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요점은 반 율법주의 자들이 암암리에 죄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죄 상태의 안전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죄란 전혀 있지 않기 때문에 죄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율법을 아무도 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이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반 율법주의로 인하여 지금 교회가 혼란을 당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역시 필요하다. 이 같은 필요성은 복음 전도 활동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기꺼이 영접하기 전에 그는 자기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금세기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대소 전쟁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도덕, 십대청소년의 비행, 대학생들의 성범죄, 강력범과 유혈범 그리고 폭도들에도 불구하고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극소수 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하늘나라에 가기에는 충분히 선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충성스런 전도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 좌가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말해줘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이 세대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 전도의 골자를 빼버리는 것이 된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다. 본 장(本 章)의 첫 조항에 대해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된 대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시조 아담과 이브가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허용하신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용이라는 단어가 작정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표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허용은 하나님께서 죄를 반(半)만 주관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6장이 제3장, 4장과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무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점에서는 약간의 모순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나 신적 작정교리를 부인했다고는 거의 볼 수가 없다. 허용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편리한 언어상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참으로 인간의 일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대로의 허용 개념은 하나님이 전능과 주권에는 부적합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범하도록 허용 하셨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미리 작정 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되어질 일은 무엇이 나를 미리 다 작정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요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기서 그들(신적 작정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의지와 허용을 다시 구분하여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불 경건한 자들의 멸망을 허용하시나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신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 그것이 그의 뜻이라고 하는 이유 외에 무슨 다른 이유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 강요, 3권 23장8 - “하나님의 뜻과 허용의 구별이 없음 참조 2권 4장3 – “사람의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이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제4장에는 인간이 의롭게 창도되었다고 말씀되어 있었으나 본 장에는 우리의 첫 조상들이 범죄 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또한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義)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이제 더럽혀지고 말았다고 말씀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적극적 의의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립상태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의(義)의 특별한 은사를 주셨는데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는 그 특별한 은사를 잃고서 그가 창조된 때의 중립상태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에 따르면 인간의 현재 상태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 고백서에는 인간은 그가 창조된 때의 상태 이하로 전락 되었고 지금은 그의 모든 기능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져 있다고 말씀되어 있다.

 

현재 주의자들은 로마교회들 보다는 더욱 나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타락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상향(上向)의 진화론적 타락(upward’ evolutionary fall)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후 줄곧 급격한 진보를 해 왔었다는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는 지성에 남아 있는 적은 악은 얼마 안 가서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여 현재주의 적인 설교의 표준을 정해 놓았다. 많은 책들이 저술되었으나 그것들은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라는 약을 필요로 하는 부도덕한 사회에 사는 도덕적인 인간을 주제로 한 것들이었다. 목회자들은 인간의 완전성에 관하여 상세히 부연했다. 그리고 1914년 여름에는 어떤 대학 총장이 장로교회 장로인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라는 증명하는 책을 거의 마무리 지어 출판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고 있었다.

 

이제 40여 년이 지난 오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국가들의 잔학상을 인하여 이런 형태의 어리석은 신념은 뿌리째 뒤 흔들리고 말았다. 이제 신정통주의 신학이 인간에게 그릇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떤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그들의 견해는 성경과 일치하는가? 그들이 애매모호하게 뒤섞어 사용하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성경 구절들과 많은 난해한 술어는 인간이 죄로 죽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즉 “인간이 전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고, 선한 것이 그 속에 없으며 전적으로 악을 행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정통주의 신학은 아담의 죄의 죄책이 그의 후손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담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재판 받을 때 우리의 대표자가 아니었고 다만 아담은 비역사적인 신화적 인물(unhistorical myth)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신정통주의 자들은 뻔뻔스럽게도 주장하기를 우리보다는 자기네들이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어 보아야 할 줄로 안다.

 

우리 또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힘차게 전해야 한다. 로마 교회와 현대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이 성경의 교훈들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신봉한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진리에서 크게 탈선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기독교 대학에서 인간은 죄인이요 악한 길에 있으며 죄로 병들어 있다고 가르친 성경 교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구원은 약국에 있는 약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병든 자는 친히 병든 몸을 이끌고 약국으로 가서 약을 복용하면 낫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기독교 대학의 교수단 중에는 확실한 장로교인도 있었다. 그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준하여 가르쳤다. 결국 학생들은 이 두 신학이 뚜렷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학교 총장은 그 장로교인 교수를 해직시켰다.

성경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인간이 죄로 다만 병들어 있다고 하지 않고 죄로 죽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구원은 약으로 비교되기 보다는 부활과 비교된다는 것도 가르치고 있다.

 

[3항] 그들은 온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에 그들이 범한 이 같은 죄책이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고, 또한 그 죄로 인하여 같은 죽음과 부패한 성품이 전달되었는데 보통의 출생법에 의하여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

1:27,28 창2:16,17 창3:16,17 행17:26 롬5:12 롬5:15~19 고전15:21,22,45,49 시5:15 창5:3 욥14:4 욥15:14

 

[4항] 이 원부패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고 선한 것이 그 속에 없으며 전적으로 악을 행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이 원부패로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나온다.

5:6, 7장 롬8:7 골1:21 창6:5 창8:21 롬3:10~12 약1:14,15 엡2:2,3 마15:19

 

6장 [3]~[4]의 요점

 

1. 인간은 죄와 부패성의 원인은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 그 시조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와 부패성이 전가 되었기 때문이다.  

2. 그 죄와 부패 상태의 결과로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3항]에는 두 가지의 중심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처음 지은 죄의 책임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시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만은 예외이다. 둘째는 아담의 부패한 성품이 바로 그 개인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먼저 아담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 했을 때 한 개인의 신분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후손들의 대표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롬12:12~21을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유의할 것은 한 사람의 한 가지 행동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점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죄들을 범한 것 때문에 죄인들인 것이 아니다. 적어도 처음 죄를 범한 경우에는 더욱 죄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대표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책이 있는 것이다. 특별히 유의할 것은 로마서 5장에 한 사람의 한 가지 행동이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책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신다. 이 전가(傳家)는 롬5:13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고 그 부분(롬5:12~21) 전체를 통해 함축되어 있으며 특별히 19절에는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라고 말씀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로마서 5장에만 일일 하게 죄의 전가 사상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4장에도 전가사상이 가득차 있다. 6,8,11,23,24절 등은 영어로 ‘전가(imputation)’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고, 3,4,5,10절 등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성구사전을 보면 그와 같은 단어와 그와 같은 사상이 딤후4:16, 고후5:19, 몬18과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성구들 중에는 어떤 것은 죄의 전가를 어떤 것은 의의 전가를 말하고 있고 어떤 것은 인간적인 의무와 관련하여 그 사상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전가의 사상을 예시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불평하기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이 17세기의 지적(知的) 분위기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한 과장된 개념들을 미리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모든 것이 정확한 법률 용어로 표현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 작성자들은 그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입장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으며 그래서 이같이 난삽한 어휘를 사용하여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가 많은 혹은 모든 다른 세기들보다 더욱 법 정신이 강했던 것으로 볼 수도 없을뿐더러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앙 고백서의 작성자들이 율법과 전가 사상 전체를 통해서 발견해냈다는 점이다. 정직한 주석가라면 그것을 아마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 그들은 전가를 참 종교에는 아무 필요가 없는 일종의 부기(簿記 = book- keeping)로 본다. 또 다른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 죄책이 전가 된다고 하는 대표 원리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도덕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핸드리 박사는 주장하기를 “’을’이라는 사람이 먼 곳에서 오래 전에 지은 범죄 행위를 인하여 ‘갑’이라는 개인이 그 ‘을’의 죄책을 뒤집어 쓴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불합리하다.” (George S. Hendry, The Westminster Confession for Today, p.81)고 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부기가 종교에 아무 필요 없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정직하지 못한 부기를 옹호하는가?

전가가 지나치게 법적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불법적인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가? 그리고 만일 저가 교리가 부도덕한 것이라고 비난할 것 같으면, 대표원리에 관해서 무엇이 부도덕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을 두고 부도덕하다는 것인지 물어보자. 금단의 과실을 따먹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했다고 하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부도덕하고 죄악 된 것이었다. 살인이나 간음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에 대한 다른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란 옳고 그른 것을 구분 지어 놓은 하나님의 계명들 때문이 아닌가? 인간의 마음속에는 순종과 불순종의 경우 양자 모두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동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해 주는 데는 하나님의 명령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시고 그가 대표의 원리를 인정하셨다고 하면 대표 원리와 전가 개념에는 아무 부도덕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전가 개념에 대하여 [3항]에 보면 자신의 죄의 결과로 아담에게 임한 부패(腐敗)와 악화(惡化)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 여기서 아담과 우리 자신 사이의 차이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담은 먼저 자의(恣意)로 죄를 범하였고 그것의 결과와 형벌로 그의 성품이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부패가 자의적인 범죄보다 앞선다. 우리는 의롭게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태어날 때 부패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그 성품으로부터 우리의 자의적인 범죄들이 자연히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서의 전가의 개념에 대한 더한층 빛을 던져준다. 부패한 성품은 일종의 형벌이다.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벌하여 그이 성품을 부패케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태어날 때 이미 부패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형벌은 무엇에 대한 형벌인가? 그것은 우리의 자의적인 범죄에 대한 형벌일 리가 없다. 태어날 때에는 우리 자신의 악한 행위를 우리가 범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껏 선악 간에 아무것도 전혀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을 받게 되는 그 죄는 아담의 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담의 죄의 책임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핸들 박사와 같은 신학자들은 “전가 개념 없이는 우리가 태어날 때 왜 이미 부패해 있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다. 왜 우리가 죄악 된 상태로 출생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은 전가 개념이다”라고 했다.

 

어떤 신학자들과 어떤 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우리가 중립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 도덕적 성품을 가진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 철학자 로크(Locke)도 주장하기를 우리의 도덕률을 포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온다고 했다. 철학과 쟁론하는 것은 복잡하고 여기에서는 적합하지도 않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형성된 성품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 결코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님은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원래부터 갖고 있는 반감을 인하여 서로 싸운다는 사실로 곧 알 수가 있다. 그것들은 그러한 반감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아무튼 생리학과 철학에서 그 문제가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인들이라고 한다.

 

[4항]에는 이 부패가 우리의 전 성품에 퍼져 있다고 진술되어 있다. 죄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지 않는 기능이나 기관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의 지성은 죄악 되나 그의 감정은 순전하다고 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말을 바꾸어서 말해도 역시 틀린 말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져 있는 것이다. 한두 가지 실례를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주제가 죄와 부패에 관한 것이니만큼 거기에 부합되는 실례가 좋을 것이다. 몇 명의 소년들이 주사위 던지기 노름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한 녀석이 주사위를 굴리니 7이 나왔다.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다시 주워 가지고 두 번째로 굴렸다. 7이 나왔다. 놀랄만한 것이다. 그는 다시 주워 가지고 세 번째로 구렸다. 또 7이 나왔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철학자들의 형안(炯眼)을 가진 소년들이 어떤 원인으로 해서 그 같은 일치된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를 설명코자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그들은 결론짓기를 그 원인이 주사위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성품도 그와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가 빈민굴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부잣집 자식들이 야만적인 행동을 탐닉하는가? 그리고 어찌하여 부유층 사람들이 공금을 횡령하는가? 또는 만일 죄가 열대 지방의 질병이라고 하면 어찌하여 캐나다 사람들과 시베리아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는가? 죄에는 지리적, 사회적, 또는 지식적인 경계가 전혀 없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릇 행한다면 우리에게 주사위 놀이를 하는 꼬마 녀석들의 철학적 통찰력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 원인이 사람들 내부에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죄악 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번했다고 할지라도 몇 차례 범한 것을 가지고 인간을 본래부터 죄악 되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할지 모른다. 

 

심지어 흉악범들일지라도 매일 살인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토요일 밤에만 그랬다. 그리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경우는 악한 행실보다는 선한 행실을 더 많이 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몇 안 되는 악한 행실이 악한 성품의 증거가 된다고 하면, 많은 선한 행실은 훨씬 더 선한 성품에 대한 더 좋은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인간의 선행과 악행의 비율이 문제가 되는 것 아니다. 잠깐 그 비율에 대해서 말해 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문제되는 것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간단히 말해서 이렇다. 즉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저절로 무죄성의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는가? 문제는 더욱 분명하게 해서 말하자면 사람은 저절로 무죄성의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무죄성은 단 몇 가지의 선행을 필요로 하거나, 심지어 많은 선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죄성에는 악한 행실들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율은 문제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무죄성은 완전을 요구한다. 그래도 인간의 성품이 악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악의 원인은 내부에 있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자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유럽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자. 제트 여객기로 여섯 시간 만에 갈 수도 있었으나 물 구경을 하고 싶은 나머지 느린 화물선을 탔다고 하자. 매일 매일 태양이 빛난 까닭에 갑판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겼다. 그런데 열 하루 째 날에 폭풍이 일어났다. 광풍이었다. 배가 깨어져 가라앉아 내렸다. 우리는 구명선을 타고 파도를 따라 요동하면서 우리가 탔던 그 배가 마지막으로 침몰되는 순간을 보았다고 하자. 그때 바닷물을 한입 마신 채 슬프게 말하길 얼마나 좋은 배였던가 할 것이다. 그 배는 유쾌하게 열흘 동안은 잘 항해했었는데 어쩌다가 단 한 번 가라앉고 말았다. 그것의 좋은 점은 그것의 나쁜 점에 비해 열 배나 더했다.

 

이렇듯 비율에 관한 실례를 볼 때 인간의 본성을 비율로 평가하려는 것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인즉 사람들이 누리는 좋은 날들은 악한 날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 배가 되지 않는다. 그 비율은 훨씬 낮다. 불신자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신자는 우상 섬기는 죄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불신자일지라도 그가 완고하지만 않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자문자답해 보자 우리가 그 계명을 얼마나 많이 순종하였는가? 열흘 가운데 하루라도 순종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한 날도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리는 고백해야만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잡념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비율은 우리에게 불리하다. 죄는 항상 전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처럼 큰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5항] 이러한 본성의 부패는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부패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되며 억제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을 참으로 그리고 완전히 죄이다.

요일1:8,10 롬7:14,17,18,23 약3:2 잠20:9 전7:20 롬7:5,7,8,25 갈5:17

 

[6항] 원죄와 본죄 등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대한 위반이요, 그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의 성질 때문에 죄인에게 죄책을 가져다 준다. 그 죄책으로 말미암은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며 그리하여 사망을 당하되 동시에 영적 육체적 그리고 영원한 모든 불행들을 아울러 당하게 되었다.

요일3:4 롬2:15 롬3:9,19 엡2:3 갈3:10 롬6:23 엡4:18 롬8:22 애3:39 마25:41 살후1:9

 

6장 [5]~[6]의 요점

 

1. 죄와 부패성의 중생한 신자들 안에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 죄와 부패성의 산물은 신자의 경우일지라도 죄이다.  

2. 원죄와 본죄(자범죄) 등 모든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 장인 제7장에서 구원의 대계획을 서술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죄의 교리를 막음하기 전에 [5항]에는 중생한 사람의 죄악성에 관한 진술이 있다. [5항]의 요점은 중생하더라도 곧 죄가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경건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을 이룰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죄 없는 완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심지어 거기에 이르렀다고까지 주장한다. 당신은 지금까지 성결교회 단체들과 접촉해 본 일이 있는가? 승리 생활 운동(victorious life movement)에 대해서 들어 본 일이 있는가? “완성되고 즉각적인 완전” 이라는 어구가 생각나는가? 4판(版)에 걸쳐서 널리 읽혀진 한 권의 책(Chester Wilkivs , A Handbook for Personal Soul-Winning : Light and Hope Publication, 1950)이 있는데 거기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쳐져 있다.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은 씻는 것도 아니요 깨끗하게 하는 과정도 아니다.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은 자연적인 과정도 아니다. 성화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사역이다. 완전한 성화는 체험하여 얻어지는 어떤 것이다. 죄에서 떠나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정도의 차이라든지 점진적인 단계란 전혀 없다. 오직 성령의 사역은 시작할 때 완성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즉각적인 것이다. (p212~214)

 

그런데 완전 무죄하다고 주장한 사람이면 누구이든 극단적인 위선적인 버림받은 자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처음에는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기독교 대학 교수는 그가 26년 동안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사람은 흉악한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경건한 노신사이었고, 다른 교회 회원들과 비교해 보면 그는 참으로 아주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을 성경의 표준과 비교해 보게 되면, 이와는 다르게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성결교회 단체들(holiness groups)을 크게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불충분한 견해 때문이다. 그들은 죄의 본질과 정의에 대해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하지 않고 대신 일반적으로 지방 풍속에 의하여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거나 아니면 경건한 육감(肉感)(pious hunches)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 딸이 프랑스에 있는 어떤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여학생들이 머리를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가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성결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회 또는 교회의 관례들과 대치할 뿐만 아니라, 자범죄와 전혀 죄가 아닌 어떤 것을 비 성경적으로 구분하기까지 한다. 윌킨스(Wilkins)씨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대한 고의성 있는 죄와 죄과(罪過)와 사람이 어쩌다가 범할 수 있는 실수 간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실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마음의 동기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를 범할 때 우리를 결코 죄 있다고 하지 않으신다.”(p.214)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 성경에는 어느 곳에도 마음과 머리가 대조되어 있지 않다. 또한 성경에는 죄와 실수가 대조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끝으로 윌킨스씨의 말에는 완전히 순결한 동기들을 사람이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의 내면적 순결보다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듯싶다.

 

즉각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여 자범죄가 죄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주장해야 한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의 타고난 부패 그 자체가 죄라는 뜻이다. 죄란 행위일 뿐만 아니라 상태 또는 성품인 것이다. 성결교회 교인들은 자범죄의 이 근원을 간과해 버린 듯하다. 성결교회 단체들의 오류는 죄의 극악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교회와 현재주의자들의 오류와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죄가 오히려 표면적인 것 같다. 그래서 죄가 이 세상에서 근절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때로 죄를 “알려진 죄(known sin)에 국한시킨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가 단지 알려진 죄를 피하는 데에만 있다면 우리가 율법을 모르면 모를수록 우리는 더욱더 의로워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죄 없는 완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상실하며 그 다음에는 중생치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처럼 불완전한 완전이 도대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 보건대 신앙 고백서에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는 성경의 죄관이 얼마나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 하는 점은 구원의 본질, 성도의 견인, 각종 자유 의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고 실은 교리전체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일부분만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신앙 고백서가 필요하다. 즉 신앙 고백서를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성결교회 단체들이 사용하는 많은 구절들은 성경에서 인용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요일3:6,9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6절도 표현은 다르나 같은 뜻 – 역자 주) 은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이 가능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가 방금 앞서 요일1:8과 2:1에서 언급한 것을 이 구절들에 와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면 무슨 뜻이 거기에 내포되어 있을 것인가? 그 구절들에는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아무 죄도 범치 않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완전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 없게 되지 않겠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성결교회 단체들마저도 이러한 의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에 이를 수가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알고자 하면 워필드(B.B Warfield)의『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읽기를 바란다. 본 자의 마지막 조항에는 죄에 대한 형벌은 육체적, 영원적 사망이다.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후계자들은 오늘날 거의 없다. “성난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흔히 있는 설교 제목이 아니다. 보편 구원론이 환영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은 욕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에서 지옥에 대하여 가장 많이 말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베드로였는가? 바울이었는가? 요한이었는가? 아니다 이들 중에 아무도 아니다. 성구사전을 조사해 보라. 지옥을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죄의 유독성을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구원을 제공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고든 H. 클라크 / 나용화 역

 

출처: ReturnBible/개혁신앙/returnbibl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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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역사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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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교회당(런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역사의 선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7년 무렵에 창의적으로 만들어진 고백문서이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여러 가지 신조문과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 탁월성을 인정받고 있다. 여러 장로교회들이 이를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21세기에도 유익한 신앙고백문서이다.


신앙고백[서]는 개인, 단체, 교회, 종교회의 등이 교리와 신념을 공적으로 선언할 의도로 작성한 것이다. 신조(Creed, Symbol)와 신앙고백(Confession)은 비슷한 말이지만 후자가 전자보다 더 포괄적이다. ‘언약’(Covenant)이라는 고백문서도 있다. 이것은 특정 신앙공동체가 맹약(盟約) 형태로 수납한 고백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분량은 방대하다. 이 고백문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과 더불어 장로교 권에서 널리 수납되어왔다. 스코틀랜드교회와 미국장로교회는 이것을 3백년 이상 유일한 교리표준으로 사용해 왔다. 전자는 1647년에, 후자는 1729년에 이를 채택했다. 미국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회중교회들은 1748년에 이 신앙고백서의 교회 정치에 관한 조항만을 바꾸어 채택하여 사용해 했다. 이것은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에 영향을 주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0년대의 영국이라고 하는 시대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기본 교리들을 그 어떤 신앙고백서보다 더 잘 설명하고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영적 갈급함을 가진 청교도―장로회 목회자들이 성경적 기독교를 정착시킬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에 여러 해 동안 기도하면서 애써 만든 것이다.


모든 신앙고백서들이 그러하듯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만든 신앙고백문헌이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는 점에서 그 가치는 다른 신앙고백서들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신앙고백의 기능에 대한 검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역사와 정치적 배경과 그 내용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 특히 에큐메니칼 시대의 교회에 시사(示唆)하는 바와 가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신조·신앙고백서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심령의 넘침으로 말미암아 나의 입은 말을 한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고백한다”(credo, ergo confiteor)는 고전적인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들일 때 신앙을 고백해야 할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신조·신앙고백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신앙고백이 있다.


‘사도신경’은 영지주의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니케아신조에서 칼케돈신조까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이 만들어낸 신조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 간단하던 신조가 점차 확대되어 전체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고백문헌들은 이단들의 도전이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교회가 신앙하는 바를 조리 있게 체계화 한 것이다. 교리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도 있고, 고백문서가 만들어지는 당시의 특별한 문제에 제한하여 작성한 것도 있다. 독일교회의 ‘바르멘신학선언’(1934), 한국교회의 ‘장로교인 언약’(1940) 등은 당시의 교회가 직면하고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다. 논쟁이나 갈등이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다. 신학적인 형식을 잘 갖춘 신조문·신앙고백서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교회의 일반적인 처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전체 회의가 만든 것도 있다. 특정 교회의 공의회가 만든 고백문도 있고, 신학자들이 교회의 위탁을 받아 만든 것도 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이정표 또는 지계석(地界石) 기능을 갖고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적인 일치를 도모하려고, 거짓 교훈을 막아내는 ‘신앙의 규범’으로, 공적인 표준문서로 만들어졌다. 단일 고백을 표방하여 교회의 일치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신앙규제 기능은 가끔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고, 신자들을 연합시키며 강건하게 하기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은 ‘신앙의 규범’이며 기독교 교육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공적인 교육에 적용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이단과 그릇된 사상과 오류를 막아냈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최종 규범이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에 종속된다. 성경과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가진다. 신조·신앙고백에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신조나 신앙고백서는 무슨 유래를 갖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생겨난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신조나 신앙고백서가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거나 절대화하면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와 교조주의(Dogmatism)에 빠진다.


소시니언과 퀘이커와 유니테리언 그리고 신학적 합리주의자들은 신조·신앙고백문의 권위와 용도를 부정한다. 신조·신앙고백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신앙을 구속하고 개인의 판단을 방해하며 독선, 위선, 고집을 조장하며, 분란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본다. 종교적인 증오심을 조장하고 역작용을 일으켜 서로 험담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척운동의 근거가 되고, 신자들을 그것에 종속시킨다고 본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어떤 지침(clue)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이는 신자 개인과 교회에 의미 있는 안내를 제공하기에는 방대하다. 신앙고백이나 공식화 된 신조·신앙고백이 없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다. 근본주의 성격을 지닌 독립파 교인들, 오순절파 신자들, 일부 침례교인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 가운데도 신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조·신앙고백문을 배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형식화된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름대로 어떤 전통이나 신념체계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추앙하고 있다. 신조 공식과 신앙고백을 담은 서술문을 소유하고 있다.


스위스종교개혁에서 출발한 개혁교회는 여러 개의 신조·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다. 제네바신앙고백서(1536).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 벨기에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제1스위스신앙고백서(헬베틱신앙고백서), 제2스위스신앙고백서(1566), 도르트신경(16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1648) 등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다.


그밖에도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이 채택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이 있다. 미국, 인도네시아, 일본, 대만,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들이 채택한 것들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가 채택한 ‘새신앙고백서’(1967)와 미국장로교회의 ‘신앙선언’(1976) 그리고 미국개혁교회(RCA)의 ‘우리의 희망의 노래’(Our Song of Hope, 1978)라는 신앙고백서도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독자적인 ‘우리의 신앙고백’(1976)을 가지고 있고, 예장 통합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라는 독자적인 고백문서를 가지고 있다. 이 독자적인 신앙고백서와 더불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납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납, 고백하지 않는다. 예장 고신교단과 합동교단과 한국의 여러 군소 장로교단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서로 사용하고 있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


런던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웨스트민스터교회당은 중세기에 처음 건축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1045-1050년에 건축했다. 1065년 12월 28일에 봉헌되었다. 교황은 에드워드에게 참회의 표로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국왕이 건축한 본래의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현재의 고딕 교회당 건물은 1245-1517년에 재건되었다. 헨리 8세가 에드와드를 추모하는 동시에 그곳에 자신의 묘소로 만들고자 재건했다. 이 교회당에 붙은 두 개의 서편 종탑은 1722-1745년에 건축되었다. 이 교회당에서 킹 제임스 판 구약성경 4분의 3이 번역되었고, 신약성경의 뒷부분 절반이 번역되었다.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 고백문은 본래 영국국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1642년부터 3년여 동안의 수고를 거쳐 작성되었고, 1646년 12월에 영국 국회로 넘겼다. 영국 상원은 1647년 2월에 이를 통과시켰고, 하원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원은 이 고백문의 문장을 따지고 성경 참고본문을 추가하면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이 첨가한 성경 근거 구절들의 정확도를 문제 삼았다.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은 완성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교회 총회는 1647년 8월 27일에 이를 자신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기존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를 대체한 것이다.


하원이 이 고백문서를 즉각 통과시키지 않고 시간을 끄는 동안에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는 국회가 그 거친 숨결을 느낄 정도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 영향력은 국회로 하여금 장로교인들을 숙청하고 독립파 회중교도들을 대체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하원의원의 숫자는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조차 크롬웰의 영향을 받는 독립파 신자들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장로회 특징을 가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영국교회와 무관하게 되었고, 영국국교회는 감독주의 교회 정치체제로 정착되었다.


헨리 8세의 사생활은 영국국교회라고 하는 정치 기형아를 낳았다. 그가 죽은 뒤에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메리가 왕좌에 등극하여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몇 년 뒤에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가 등극하여 영국국교회를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1558-1603)는 군주의 권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정하심에 따라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는 형식으로 주어진다고 믿었다. 군주는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왕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반항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대죄라고 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를 절대 군주로 여기지 않았다. 왕권이 하나님의 뜻과 자연법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회의 권한을 확대했다. 그러나 국회는 왕권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국왕이 국회를 소집했다. 국회는 세금부과, 법률제정 등의 업무만을 다루었다. 외교, 종교, 국가기밀은 군주의 영역이었다. 영국은 이러한 제도로 정치적인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엘리자베스 l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이면서도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그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스코틀랜드 슈트워드 왕가의 메리 여왕의 독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는 1603년에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올랐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제임스를 외국인으로 여겼다. 스코틀랜드인이 국왕으로 등극하자 영국 국회 안의 장로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교도들 다수가 왕에게 기대를 걸고 영국국교회가 감독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장로교 정치를 도입하고 또 개혁주의 신학을 대폭 수용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왕권을 돈독히 하는 데는 장로회 정치보다는 감독주의 교회정치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유일한 법 제정자이며, 따라서 국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칼빈주의에 바탕을 둔 장로회 제도가 왕권 신장에 거침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청교도들의 청원을 거절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양육을 받았다.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 아래서 자랐다. 그는 칼빈주의 교회관이 왕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확립된 교회 안의 왕권을 확고히 붙잡고자 했다. 문예부흥, 종교개혁, 새 시대의 흐름은 옛날의 권력 구조의 문제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 무렵 영국인들은 배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으로 탐험하면서 상업을 발달시켰다. 상권(商權)을 쥔 중간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헨리 8세는 수장권(The Act of Supremacy)을 선언하고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선포했다. 이 때 영국교회는 국가교회가 되었다. 그 무렵에 등장한 청교도들은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교황의 잔재들’을 제거하고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고자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가 국왕이 되자 의기양양 청교도적인 개혁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영국이 장로회 정치와 개혁신학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칼빈주의와 장로회가 왕성한 스코틀랜드 출신인 국왕 제임스가 자기들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교회의 개혁이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장로회 정치와 왕정제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고 조만간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국교회가 감독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감독 없이는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생각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국회의 기능을 과소평가했고,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만 그것을 소집했다.


1625년에 국왕으로 등극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감독주의 교회정치 제도에 연연했다. 청교도―장로교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국회의 권한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펼쳤다. 정치동맹 관계를 구실로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프랑스의 마르 드 메디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찰스는 귀족들에게 과도한 대출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는 귀족 70명을 수감했다. 국회는 이에 항의했다. 이런 일로 왕권과 국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왕의 의사는 국회에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격노한 국왕은 국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했다. 국회는 상원에 속한 영국국교회 소속 감독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맞섰다. 찰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10년 이상 혼자서 영국을 통치했다. 독재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신적(神的) 권리를 행사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덕했던 반면에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러나 국회가 없는 이 나라에는 점차 정치 불균형이 나타나고, 청교도들과 의회주의자들의 분노가 커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의 자유의 상징이 된 국회가 유명무실하게 된 것에 분노했다.


국왕 찰스의 독주는 결국 재정 결핍을 초래했다. 국민은 극도의 내핍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왕실의 활동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군대는 축소되어 일부만 남았다. 1633년에 대주교가 된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는 영국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영국국교회에 출석하라고 강요했다. 제도를 강화하여 불만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시장 앞에 붙들어 놓고 교회 공예배에 한 번 불참한 데 1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즉각 라우드의 조치를 공개적인 신앙박해로 간주했다. 의회주의자들은 군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대주교 라우드는 스코틀랜드교회가 예배의식서인 영국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채택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같은 예전을 사용하여 왕국의 통일성을 추구한다는 이름 아래서 그는 스코틀랜드에 장로회주의가 일방적으로 정착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기도서를 반대했다. 그것이 처음 낭독된 교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신앙 탄압에 반대하는 내란도 발생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참된 개혁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 차원의 ‘언약’(Covenant)에 서명했다.


이렇게 되자 찰스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해산을 명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효력이 없었다. 명령이 거부당하자 왕은 군대를 보냈다. 그 동안 왕에게 충성을 바쳐오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때 ‘그리스도의 면류관과 언약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영국군과 맞붙어 싸웠고, 영국군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국왕은 항복하고 국회를 다시 소집한다는 조문을 담은 항복서에 서명했다. 전쟁 관례에 따라 국왕은 영국 땅에 남아있는 스코틀랜드 군대에게 막대한 전비(戰費)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자면 국회를 열어야 했다. 국왕은 그 동안 소집을 거부해 오던 국회를 소집했다. 전비를 보상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40년에 ‘장기국회’(Long Parliament)로 알려진 국회가 소집되었다. 의원들은 11년 동안이나 회집하지 않은 국회가 다시 열리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임했다. 감독주의 국교회파, 의회주의 장로회파, 회중주의 독립파로 나뉘어졌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파 회중주의 지지자였다. 다수를 차지한 청교도 장로회주의자들은 감독주의 지지자들과 제휴를 하고 왕을 움직여 영국국교회가 장로회 정치를 도입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하도록 일을 추진했다. 국회가 왕의 신하를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도록 했다. 찰스에게 영국국교회를 개혁하는 총회 소집을 청원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 대표는 영국 국회를 설득하여 모든 의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신앙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과 교리문답에 바탕을 둔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하게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장로회 제도가 양심에 따른 개인 예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반대했다. 독립파 회중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신앙과 그것에 대한 관용이 국가의 통일을 위해 희생될 위기에 처하자, 크롬웰은 왕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만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자유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왕정파는 감독주의 제도를 수용하는 영국국교회를 지지했다. 군주의 신적인 통치권과 감독주의 교회 형태가 왕정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당에 대항하여 신앙을 위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장로회주의를 따르는 청교도들은 중립을 유지했다. 국회의원 다수를 차지하던 그들은 그 동안 수난을 당해온 찰스를 동정하면서 왕과 국회와 교회가 나라의 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국회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총회를 소집했다. 영국국교회를 보다 더 장로회다운 치리 형태로 바꾸고 신학을 개혁하고 교회를 정화하기 위한 교회 개혁 법안을 제정하자는 안을 결의했다. 국회는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성직자 총회를 소집하려고 다섯 번이나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찰스는 번번이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은 여섯 번째 그 법안을 통과시키고 발표했다. 상원도 1643년 6월 12일에 그것을 통과시켜 하원에 동조했다. 종교회의인 총회는 왕의 동의 없이 상원과 하원에 의해 1642년 7월 1일에 소집되었다.


국회는 총회를 국회를 돕는 자문기구로 여겼다. 그래서 국회가 총회의 회원을 선임하고, 책임자를 임명하고 토론의 주제를 제시하고 활동범위를 제약했다. 이른바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21명의 영국국교회의 청교도 목사들과 약간 명의 회중 교회 목사 그리고 두세 명의 감독제 선호자들로 구성되었다. 총대 대다수는 장로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총회에는 30명의 평신도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3명의 에라스티안(Erastian: 교회가 국가권력에 종속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과 스코틀랜드교회가 파송한 여섯 명의 대표(Commissioners)가 자문으로 참석했다.


국회는 총회를 소집하면서 영국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 식의 예배가 아닌 단순한 예배모범을, 감독제도가 아닌 장로회 정치를, 로마교 신조가 아닌 개혁주의 신조를 채택하여 모든 국민을 포용하는 국가교회로 개편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퀘이커와 재세례파 신자 등 과격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무정부주의를 야기하려는 자들이나 영국국교회를 갈라놓으려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배격하기를 바랐다.


총회는 국회의 요청에 따라 먼저 영국국교회의 헌장인 ‘39개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신조가 개혁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잘못된 해석을 일부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니케아신조와 아타나시우스신조를 참고하여 그 교리가 철저히 성경에 바탕을 두게 했다. 난해하고 이론적인 것은 배제했다.


그런데 16번째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할 즈음에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국회와 찰스 l세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민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군은 퇴각해야 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이 필요했다. 스코틀랜드는 지원군 파병의 대가로 엄숙한 동맹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리하여 국회에서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이며 영국국회에서 스코틀랜드 자문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토론의 권한은 있지만 투표권이 없는 상태로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의 장로교 목사들은 신앙고백 초안 작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이때부터 신앙고백서 작성의 방향이 달라졌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종교(기독교) 통일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전향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은 영국 측의 4명의 의원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 기초 위원으로 활약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강력한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 전통 아래서 만들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차례의 회의와 수많은 소위원회로 모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작성하는 데는 별 논란이 없었으나, 장로회 정치가 과연 신적인 권위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장장 한 달 동안 논의했다. 총회는 기도, 예배, 금식으로 이어졌다. 중단 없이 여덟 시간이나 예배를 계속 드린 일도 있었다. 한 시간의 설교, 두 시간의 기도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1647년 11월, 회의를 마칠 무렵에 신앙고백서는 교리 지침서로, 나중에 완성한 소교리문답은 젊은이들의 교육교재로, 대교리문답은 설교자들의 지침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예배모범, 장로회 정치, 시편찬송도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인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1647년 11월에 총회를 떠났다. 그들의 주도로 스코틀랜드교회는 기존의 신앙고백서를 버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채택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영국에서는 오히려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국 하원은 고백서를 즉각 승인을 하지 않고 서술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첨가하라고 요구했다. 성경 참고본문을 찾아 기입하는 일로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렵 크롬웰 군대는 국회의 하수인이 아닌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는 국왕 찰스를 체포했고, ‘양심의 자유, 신앙의 관용’을 외쳤다. 크롬웰도 장로회 제도와 그러한 방향으로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추종했다. 그러나 독립파 사람들이 그를 옹립하고 점차 국회를 차지했다. 군주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묶였고, 교회는 혼돈상태에 빠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 작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연되고 있었다.


하원은 상원이 이미 승인한 신앙고백서를 1648년 6월 2일에 이르러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가버린 탓으로 장로회주의자들의 꿈은 무산되었다. 장로회주의자들은 독립교회주의자들을 따돌리고 감독주의자들과 제휴하여 왕을 인정하면서 영국국교회에 장로회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했으나 장로회 제도의 꿈은 무산되고, 총회가 수고하여 만든 신앙고백서는 영국국교회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것들이 자리를 잡도록 만들기에는 그들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크롬웰은 국회를 해산했다. 1653년에서 1658년까지 호민관으로 통치했다. 자신이 펼치는 공화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장로회주의자들은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크롬웰은 장로회 정치가 아니라 회중교회 치리체제를 원했다.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국회가 복구되었다. 국회는 1660년 3월 14일에 장로회 제도를 영국국교회 정치제도로 공인한다고 하는 법을 선포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다시 채택하고, 그것을 인쇄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로회 제도와 감독제도가 갈등을 겪는 가운데서 찰스의 아들 찰스 2세가 감독주의 체제를 재정비하자, 장로회주자들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국회는 왕정 복귀를 공포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득세한 감독주의 감독들은 복수심에 가득 찬 상태로 통일법(The Act of Uniformity)을 통과시켰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구 밖으로 추방했다. 청교도들이 지금까지 추구하던 장로회와 개혁신학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교구에서 축출된 비국교도 다수는 독립 침례교도로 자리를 잡았다.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일부 장로회주의 회원들은 영국국교회와 손을 잡았다.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사상


16세기의 종교개혁 직후 유럽 대륙에는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한 편에서는 정통주의가 등장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경건주의가 나타났다. 기독교 신앙이 이성의 역할에 강조를 둘 것인가, 경험에 강조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 새로운 주제로 대두되었다. 신학자들은 성경 진리를 새롭고 단순하게 이해하던 종교개혁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객관적’인 교리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정통주의 시대의 특징은 신학 이론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경향을 지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정통주의 시대를 주도한 개혁주의 정통신학, 개혁파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창조, 작정, 섭리에 대한 합리적 서술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성령과 선교는 다루지 않는다. 성령은 영국국교회의 ‘39개 신조’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그것을 다루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경건주의가 왕성하던 시기부터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은 특기할 만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운동 사건 이후 125년 동안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했다. 17세기의 신학과 신앙 명제들을 포함시켰다. 조리 있고 엄숙하며 명확한 언어로 서술했다. 완결성과 포괄성을 지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진리를 변호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총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진리의 원천인 성경을 다룬다. 제2장에서 제5장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전체 개요를 논리적으로 배열한다. 하나님의 작정, 섭리를 다룬다. 제6장에서 제20장까지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한다. 제21장에서 제26장까지는 기독교 삶의 윤리 차원을 다룬다. 하나님의 율법, 양심의 자유, 교회와 국가, 결혼과 이혼 등을 서술한다. 마지막 부분인 제27장에서 제33장까지는 교회, 성례, 마지막 일들을 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The Westminster Divines)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역사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과 돌보심 아래에 있다고 확신했다.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에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이나 도르트총회(1619)가 확정한 교회법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탁월성과 중요성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예정론, 하나님의 미리 아심 등에 대한 서술은 당시에 유행하던 연역 사고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성경에서 진리를 도출하는 귀납 방법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어떻게 정경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교회에 의해 그것이 권위를 갖게 된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부정한다. 성경의 진실성과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내적 증거야말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인 설득력을 갖는 토대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관한 교리 다음으로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무게를 둔다.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언약신학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본다. 제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논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나눈다. 이러한 구분을 두는 언약사상을 연방신학(Federal Theology)이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 가지 언약만 존재한다고 본다. 행위언약이 은혜언약 안에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은 신학이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의 3분의 2 가량을 개인과 사회 차원의 기독교 삶과 관계된 실천적 주제에 할애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기독교인의 삶과 건덕(Edification)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학문이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순종의 삶이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인간의 자랑이나 권세나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기독교 신앙의 구현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보다 분량이 더 많은 대교리문답을 작성했다. 묻고 답하는 형식의 이 고백문서는 설교자들을 위한 길라잡이이다. 신앙고백서를 만든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소교리문답이다. 제1문에서 제38문까지는 기독교인이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제39문부터 제107문까지는 기독인의 삶의 의무를 다룬다. 성경이 가장 요긴하게 가르치는 두 가지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본분(duties)이 무엇인가로 나눈다.


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한국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열린 총회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목표로 삼아 교회정치 제도와 정화(淨化)에 초점을 맞추었다. 청교도 정신을 반영하여 교회나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구속할 권리가 없다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개혁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를 배격한다. 바울, 어거스틴, 위클리프로 이어지고 칼빈이 강화한 칼빈주의 신학을 담고 있다.


잎서 언급했듯이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산물이며,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 사회, 정치, 정신, 신앙을 반영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다른 고백서들과 마찬가지로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 도시화, 산업화, 직장, 민주화, 남녀평등, 매스 커뮤니케이션, 복잡한 인간관계, 환경, 핵무기, 자본주의의 횡포 등은 당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사회 문제, 경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오늘날처럼 자각하지 못했다. 영국교회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법률조문 또는 헌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도 엿보인다. 하나님의 ‘구속’을 강조한 반면에 ‘이웃’에 대한 그다지 큰 관심은 표명하지 않는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조직된 한국장로교회 첫 노회는 인도장로교회의 신조문을 본 떠 만든 신앙고백문을 채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는 흔히 ‘12신조’라고 불린다.


이 신조문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한다. “대한예수교회에서 이 아래에 기록한 몇 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 및 인허 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청종하게 하는 것은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혀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을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교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배위량 선교사가 1925년에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이 고백문서가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예장 통합교단 제52회 총회(1967)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기존의 신조에 첨가하기로 결의했고, 제56회 총회(1971)가 이를 공포했다. 제58회 총회가 결의한 교회 정치와 권징조례 수정안은 통과시켜 1974년 6월에 출간한 헌법 수정판에 그것을 수록했다. 수록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903년 미국장로교회가 수정하고 보충한 제35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를 포함시켰다.


예장 고신교단 제22회 총회(1972)는 노회 수의(隨意) 결과를 보고 받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공식 신조문으로 채택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원본을 채택하여 사용하다가 ‘성령에 관하여’(제34장)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제35장)를 보완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출범한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의 초기 지도자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수납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아빙돈단권주석 문제(1935),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 안의 여권 문제(1934), 신사참배 문제(1938-1945), 조선신학교 문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 문제 등으로 장로교는 갈등을 겪었고,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고신교단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출범하면서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가설(假說) 총회가 본[래의]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예수교장로회로 계승한다”는 취지를 표방했다. 장로교 정신, 원리, 예배, 신앙고백에 충실한 ‘정통신학운동’을 천명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역사적인 신앙고백서로 여길뿐 자신의 신앙고백서로 수납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교회들은 인간적인 문제들을 뒤로 하고 조속히 기구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앙고백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반응을 담은 고백서라는 사실은 신앙공동체가 다양한 고백서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과거에 만들어진 것보다 더 탁월한 고백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뒤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을 보라. 그 어느 것도 이를 능가할만한 신앙고백서가 못된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며 영적으로 깨어 있던 그 시대의 교회의 경건과 견줄만한 풍토가 쉽게 조성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교회는 옛날보다 훨씬 더 세상의 지혜와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신학사조는 기독교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다른 종교에도 성령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선언한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1983년에 미국북장로교회(UPCUSA)와 미국남장로교회(PCUS)가 통합된 교단이다. 바르트주의(신신학)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새신앙고백서’(1967)를 수용하고 있다. 바르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주관적 차원으로 격하시킨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크다.


미합중국장로교회는 이러한 고백서를 가진 이 교회의 성경관은 목사·장로·집사 임직 때 임직자가 피임직자에게 묻는 질문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여러분은 신구약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받아들이십니까?”


위 질문은 유서 깊은 기독교를 지향하는 장로교단들, 예컨대 한국의 예장 고신, 개혁, 합동 교단과 미국장로교회(PCA), 미국정통장로교회(OPC) 등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최종적 규범이라고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대조적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신학의 마지막 보루이다. 예장 통합의 자매교단인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성경이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고 묻는다. 성경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말씀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바르트주의 성경관을 반영하고 있다.


새로운 신앙고백의 필요성은 항상 존재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단들과 이데올로기들은 고풍스럽고 부적절한 논쟁적 외침을 내뱉는 것으로는 결코 효과적으로 극복될 수 없다. 그러나 새 신앙고백서를 만든다고 하여 새 것이 옛 것보다 더 탁월하고 창의적인 것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현대 신앙고백서들은 대체로 핵심 교리들를 지나치게 일방적이거나 빈약하게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들은 개혁주의 공동체들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최덕성,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에서 옮김


웨스트민스신앙고백 전문 http://reformanda.co.kr/xe/index.php?mid=Archive&document_srl=46520

출처: 리포르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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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1. 웨스트민스터 총회

 

(1) 회의의 중요성

 

이 회의는 16세기의 영국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회의가 만들어 내 놓은 결정들의 범위나 능력에서 보든지 또는 후대에 끼친 영향면에서 보든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회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최대 약점은 국교개념을 가지고 교리, 예배, 권징을 통일화시켜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준수하도록 한 점이다.

 

그러나 이는 그 시대가 지닌 약점이었다.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사상이 뿌리를 내린 것은 많은 실패와 박해를 거친 이후부터이었다.

 

 

(2) 총회소집

 

1642 10 15일에 신학자 회의를 소집시키려 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1643 71일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신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소집된 총회에는 151명이 참석했다. 30명은 평신도 사정관이었다. 나머지 121명은 각 지역서 선출된 성직자들이었고 대부분 장로교 소속이었다.

 

(3) 대표들의 구성

 

대표들은 회의의 주동역할을 하면서 장로교 사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회정치와 권징 면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장로 정치가 채택되었다. 가장 빈번하게 열띤 토론이 벌어진것은 교리나 예배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교회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대표들은 네 분파로 나누어 정리해 볼수 있다.

 

감독교회파

 

의회는 4명의 고위 성직자, 즉 제임스, 웃서, 브라유리그, 프라디욱스와 5명의 신학박사, 즉, 파트리 박사, 함몬드, 홀스워즈, 세더슨, 몰리를 대표로 선출했다. 그들은, 절대다수가 청교들이라는 점, 대표들이 목사들에 의하여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평신도들이 섞이지 않았다는 점을 공격했다.

 

장로교회파

 

절대 다수의 수자로 총회를 주도해나간 것은 장로교회파였다. 장로교회 정치의 2대원리는 목회자들의 지위를 모두 동등하게 여기는 것과 목사와 평신도로 혼성된 당회에 의한 교회의 자립행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독립교회파

 

장로교회파에서는 이들을 '불만에 가득한 다섯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주동 인물은 토마스 궁원 박사와 필립 나이 목사였다. 이들은 숫자에서 적었지만 영향력이 크고 학문이 깊었으며 성격이 준엄했다.

 

에라스티안파

 

에라스티안파는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 국가가 최종 통치권을 행사할 것과 교회를 국가의 한 부속 기관으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4) 주요인물

 

월리암 트위스 박사. - 학식과 사색이 깊은 타락전 예정론 학파의 고위 칼빈주의자로 인정을 받았다.

 

토마스 풀러 - 그의 평이한 설교는 매우 훌륭했고 그의 강한 논변은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으며 매우 경건한 삶을 영위했다.

 

찰스 헐 - 그는 온건주의 칼빈주의자였는데 토마스 플러는 그를 평하길, 그는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학자요, 신사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요한 화이트 - 의견이 분분하여 다툼이 생기려 할 때 농담으로 분위기를 화해시키는데 크게 공헌한사람이다.

 

알로우스미스 - 소요리문답의 주요 작성자여서 빼놓을수 없다.

 

에드문드 카라이 - 대중적인 설교자였고 장로교회파의 지도자였다.

 

요셈 카알리일, 토마스 콩만, 토마스 궁원 박사, 요수아 호일 박사, 죤라이프푸트,스테반 마샬, 필립나이, 허버트 필머,에드워드 레이놀드스, 프렌시스 루스경, 라자루스사만, 요한셀든, 리챠드 신스, 토마스 영

 

 

(5) 총회의 개회

 

1643 7 1일 토요일 웨스트민스터 대교회에서 상하 양 의원들과 많은 회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되었다. 모든 대표들은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서약하고 맹세하노니 나는 내가 대표로 참석한 이 총회에서 교리적인 문제에 관한 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일치되는 교리만을 주장하겠으나, 권징에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의 평화와 유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지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6) 예루살렘 회관에서의 총회

 

9월말 혹독한 추위가 밀려오자 총회는 웨스트민스터의 부감독 관할 지역에 있는"예루살렘 회관"으로 그 장소를 옮겼다.

 

 

(7) 헌신을 위한 집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학적인 논의를 할 때마다 준비 집회를 먼저 가졌고 정기적으로 또는 필요시마다 의회와 공통으로 당시의 청교도적 경건의 특색을 지닌 집회를 가졌다.

 

우리는 청교도 성직자들이 헌신을 위한 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열심과 인내를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3세기까지의 초대교회 역시 카타콤의 어둠속을 지날 때 이방의 마술과 이방의 아름다움을 혐오했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비하하셨을 때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이점에서는 청교도보다 터툴리안이 더 심했다.

 

 

(8) 회의 기간과 폐회

 

1643 7 1일부터 1649 222일까지 약 5 6개월에 걸쳐 1163회 이상의 정규 모임을 가졌다. 1652 325일 마지막으로 해산될 때까지 매주 목요일에 모임을 가졌고, 마지막 모임때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여 장기 의회의 해산과 함께 끝을 맺었다.

 

 

 

2.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

 

 

(1) 39개 신조의 개정

 

10주간 동안을 39개조 신조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39개 신조 중에서 15개 조항이 개정되거나 성경적 증거들이 보충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받아가며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 제정되어 solemn, league,covenont파의 공인을 받았다.

 

(2) 신조의 제정

 

최초로 위원회가 소집된 것은 16448 20일이었다. 164612 4일의 제 752차 회의에서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었다. 최초로 인쇄된 것은 1646 12월 또는 1647 1월이었다. 2판은 1647 5월 교회의 권위를 부여받은 내용이 첨가되어 출판되었다.

 

(3) 의회의 역할

 

하원은 '겸손한 충고'의 권고의 글을 1647 5 19일에 시작하여 1648 3 22일에 끝을 맺었다.

 

 

(4) 스코트랜드 총회의 역할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어울리며 우리 교회의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정치와 전혀 위배됨이 없다'고 선포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649 2 7일에 이를 승인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분석

 

 

(1) 시상적 배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화란에서 알마니안주의와 날카로운 대립을 거친 이후의 칼빈주의체계를 성숙한 학문적 형식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그 제정 시기도 고 교회의 감독제도가 시행되던 때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신조와 매우 흡사하다.

 

 

(2) 의견의 일치

 

그들의 의견일치의 배후에는 세 나라 (영국,스코트랜드, 아일랜드)의 교리적 일치를 추구하려는 기대감도 작용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창조에서 최후심판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내용을 33개 장으로 나누어 자연스럽게 취급하고 있다.

 

 

 

(3) 성경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똑같은 신앙의 규범으로 높이는 로마교회사상이나 자연인이 이성의 충족성을 가르치는 합리주의와 맞서서 맨 먼저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바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신론과 기독론

 

모든 정통교회들은 제2장의 '삼위일체에 대하여'와 제 18장의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를 니케아 회의의 삼위일체론과 칼케톤 회의의 기독론에 대한 최고의 해설이라고 본다.

 

 

 

(5) 예정론

 

칼빈주의 예정론은 제한 속죄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 문제는 주로 논리적인 통일성에 있다. 제한 속죄는 속죄의 효과 즉 그 실제 적용범위를 말한것이다. 속죄의 절대적 충족성과 무한한 가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6) 인간론

 

6장부터 제 9장까지는 보편화된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인간론을 새로운 언약론의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언약론에서는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다.

 

 

 

(7) 구원론

 

10장부터 제 18장까지 복음적인 신앙고백서들 중에서 칭의, 양자됨, 성화 구원적 신앙, 선행, 구원의 확신에 관한 내용을 가장 세련되게 설명하고있다.

 

 

 

(8) 교회론

 

25장과 제 26장의 교회론 부분에서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구분방식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선언되었다.

 

 

 

(9) 성례관

 

성례의 일반론특히 제27-29장은 세례와 성찬을 다루는데 있어서 칼빈주의적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상은 대륙이나 영국 또는 스코트랜드에 있는 모든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 가르치는 것과 똑같다.

 

 

 

(10) 주일관

 

21장의 "예배와 안식일"에 관한 내용은 청교도의 주일관이 최초로 신조에 삽입된 것이었다. 1595년 니콜라스 보운드에 의해 체계화시켰다.

 

 

 

4.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1) 준비 작업과 채택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와 함께 두 개의 요리문답서도 제정했다. 1647년 가을에 심사와 승인을 받기위해 의회로 보내졌다. 에딘버러 총회는 1648 7 20일 대요리문답을, 7 28일에는 소요리 문답을 각각 승인하면서 두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교회정치에 위배된 것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2) 일반적 특징

 

두 요리문답은 모두 종래 요리문답의 전통을 탈피했다. 소요리문답에는 '사도들이 제정한 것도 아니요 정경처럼 여길 것도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란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고 초대교회 때부터 수집되어 왔다는 점에서'라는 말이 첨부되어 있다.

 

 

 

(3) 대요리 문답

 

1647년 한해 동안 내내 총회의 큰 관심거리로 등장하여 문답형식으로 토론되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석과 보충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과 금하신 것의 종류에만 과도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설명을 간과해버린 약점을 지니고 있다.

 

(4) 소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작성 위원회는 소집책임도 역시 터크니 박사가 맡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가장 최근까지 전해 내려오는 프로테스탄트의 전형적인 세 요리문답서들 중 하나이다. 소요리문답은 사도신경의 역사적인 순서를 논리적인 구조로 바꾸었다

 

이 소요리문답은 장로교회, 회중교회,침례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20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Of Christian Liberty and Liberty of Conscience)

 

1.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조 1)

먼저, 20장에서의 자유의 의미와 신앙고백서 제9장에서 이미 다룬 자유의 의미는 다른 것임을 밝혀 둔다.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 즉 인간이 선이나 악을 행하도록 외부로부터 강요 당하거나 또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본래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자유는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의 죽음으로 값주고 사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께서 부여해 주시는 진리 안에서 성도들이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 즉 요8:32에서 말씀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부여해 주시는 자유함인 것이다. 자유함을 제19장의 율법 바로 다음인 20장에서 다루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전에는 율법에 순종할 능력과 의지가 없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인 우리는 그 율법에 얽매임 없이 자유함 가운데에서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와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누릴 수 있는 본래의 자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후 죄의 노예상태에 있게 됨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죄 값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다. (1)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을 대신 지켜 주신 그 순종과 댓가 때문에 성도는 은혜로 인하여 생명의 구원을 받은 것이므로 생명을 얻는 수단으로써의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2) 성도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다. 성도는 더 이상 사탄이 지배하는 죄의 종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3) 성도는 죄의 마지막 요구인 사망으로부터 자유하다. 비록 성도도 죽지만, 죽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자는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율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더욱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었다.

 

2.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기준과 자유 (신조 2, 3)

성도에게 주어진 신앙 양심의 기준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될 수가 없으며 그의 말씀만이 양심의 규칙이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교회와 양심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거나 과장된 사람의 교훈들과 계명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속박 당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과거 중세시대의 로마 카돌릭 교회의 부패 요소 중 하나로서,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성령의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대신에 교황과 사제들의 말을 맹종함으로 신앙의 양심이 침해 당 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도 개신교의 어떤 교파들의 교회가 어떤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게 금하는 등 성경에 어긋나고 더하여진 사람들의 주장과 규칙들로 성도들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속박하고 무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 값으로 사신 자유를 성도들에게 주셨기에 성도들은 이 신앙 양심의 자유를 감사함으로 바르게 누려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그 자유를 남용하여 무책임하게 죄를 범하거나 정욕에 끌려 남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은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육체의 정욕을 죽이게 하기 위함이며 (5:22-24) 그리고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12:11).

 

3.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의무 (신조 4)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구애를 받지 않을 자유를 주셨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성도의 의무도 함께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국가에게 성도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권세를 주셨고 또 그 권세를 가진 자들은 그 자체의 영역 안에서 그 권세를 시행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자기의 영적 자유를 구실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행사를 거부하거나 반항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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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국가가 설립한 교회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은 국가와 종교의 자유에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국가가 설립한 교회의 경우 영적인 문제를 국가의 권한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인정한다면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거나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강력한 통치 수단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교회를 설립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자연히 시민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가 상실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자유의 상실이야말로 독재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편협하고 독단적인 원리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에 종종 직면한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은 자유주의의 방종한 태도와 불관용의 태도를 똑같이 경계한다. 20장 “기독교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런 비판이 가당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어떤 인간 정신도 “하나님만이 홀로 양심의 주인이 되신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에 위배되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은 물론 예배나 믿음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2항)라는 명제보다 더 진실하고 고귀한 명제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양심의 자유와 관용에 관해 그릇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똑같이 존중하는 것을 관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생각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이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양심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신념이나 권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 간주하는 듯 보인다. 그런 생각은 자유를 방탕한 것으로 만들어 태연하게 방종을 일삼게 하기 쉽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리와 거짓,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한다. 양심은 억압할 수는 없지만, 옳게 깨우칠 수는 있다. 인간은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에 방탕한 행위에 치우치기 쉽다. 따라서 사회의 도덕적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풍속을 해치는 극단적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합법적인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람의 법이나 하나님의 법이 규제하는 것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이를 불관용이라며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명시된 원리들을 곡해하기로 결심하거나 그 참된 의미를 도외시한 채 스스로 무지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것이 불관용과 억압적인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야심 있는 한 젊은이가 고대의 궤변론자에게 “유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궤변론자는 “이미 유명해진 사람을 죽이게. 그러면 자네의 이름이 그의 이름과 항상 함께 언급될 걸세”라고 대답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관용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그런 원리대로 단지 유명해지기 위해 비난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궤변론자의 조언은 유명한 것과 불명예스러운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읽고 깊이 연구하며, 그 모든 내용을 세심하게 살펴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보라. 철저한 시험을 통과했다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신앙고백 안에 진술된 거룩한 교리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공경해야 한다.

 

- 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pp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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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이야기(7)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5장 1-7절. 섭리에 관하여”입니다. WLC 18-19문까지, WSC 11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WCF의 많은 분량에 비해서, WLC와 WSC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입니다. WLC와 WSC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만 문답합니다. WLC에서는 천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19문)이 있습니다.

 

1) 창조와 섭리의 불가분의 관계?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의 계속입니다. 만물의 창조주께서 만물에 대한 불변하신 계획의 수행이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만물의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모두 포함됩니다(WCF 5장 1절). 성경에서는 참새 한 마리도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섭리에 대해서 거부하는 이론은 이신론(理神論, Deism)입니다. 이신론은 창조주는 인정하지만, 섭리주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자유주의 신학). 현대신학에서는 창조주는 인정하지 않지만, 섭리주를 인정합니다(진화론 인정 혹은 타협). 개혁신학은 창조주 하나님과 섭리주 하나님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2)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행동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것입니다(WLC 18문, WSC 11문).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것을 무(無)로 만드시지 않고 완성시켜 창조하신 곳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하늘이 없어지지 않고, 새하늘과 새땅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보존과 통치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질서를 제정하셨습니다. 택함받은 백성은 구속의 영광과 창조의 영광을 함께 찬양하며 즐길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깨서 창조하신 천사에 대한 섭리는 WLC 19문에서 문답합니다. WSC에서는 천사에 대해서 언급함이 없습니다. 천사는 기독교 창설 이래로 성도에게 큰 혼선을 주는 요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WLC에서 천사는 회복할 수 없는 죄와 멸망에 빠질 수 있는 저희의 죄를 허용하셨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지배와 능력과 공의의 관리를 위해서 기쁘신 뜻대로 사용됩니다. 천사는 오직 하나님의 사역자 위치를 갖습니다. 천사에게 특별한 위치를 주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Sola gratia 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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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가  완성되기까지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WCF)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독교 교파마다 각기 그들이 인정하고 따르는 신앙고백서가 있다. 오늘 전 세계를 통해서 장로교파는  예외 없이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따라서 헌법을 정한다. 헌법이란 교회의 정치, 교리, 권징, 예배, 행정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서 의 가르침을 잘 알아 두는 일이 중요한데 실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목회 일선의 목자들까지도 WCF 내용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교리상의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오류를 도입하기도 하는 것이 예사다.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타락시키고 성도들의 구원의 길을 막아 버린다.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갈라디아 1:8-9)”  오늘의 기독교계의 문제는 <불순종>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주권을 내세운다(human autonomy). 


        역사를 보면, 1300-1400년대는 문예부흥으로, 1500년대는 종교개혁으로 특징 지을 수 있고, 1600년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1700년대는 독일의 이성주의, 1800년대는 합리주의 (Rationalism) 와 사이비 종파들의 출현, 1900년대는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2000년대는 신 이교도주의 (新 異敎徒主義, Neo-Paganism) 로 특징 지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서부터는 완전히 사탄이 활보하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New Age 사상을 잉태한 Postmodernism, 그리고 이교도주의 (異敎徒主義) 로 이어 지고 이는 다시 <신사상 (New Thought) 철학> 으로 이어 진다. 


        신사상 (New Thought)의 대표는 바로 Christian Science, Scientology, 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 Eckankar. Jesus Seminar 등이다.   이런 철학의 필연적인 귀결은 상대주의(Relativ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주관주의(Subjectivism), 감정주의(Emotionalism), 사유주의(Privatism) 등인데 성경은 이런 사상을 배격한다.  물론 이런 사상의 뒤에는 무서운 사탄이 도사리고 있고 사단은 “의의 일꾼으로, 혹은  광명의 천사” 로 위장한 인간을 동원하여 그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펴 나가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를 넘어트린다. C.S.Lewis 의 Screwtape Letters 를 보라, 그러나 중생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무형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한다 (마태복음 16장). 여기서 C.S.Lewis 의 저서를 인용했다하여 필자가 그의 신학을 모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신학은 경계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영국의 사회, 정치, 종교를 알아야 한다.  영국의 Elizabeth 여왕이 1603년에 죽게 되자 왕실은 스콧틀란드의 James 6세를 James I 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영국을 통치하는 왕위에 등극하게 하였다. 그는 현명하여 1611년에 학자들 50명으로 하여금 성경을 번역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King James Version (영국에서는 Authorized Version 이라고 함)을 만든 분이다.  그는 천주교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전에 Henry VIII 는 본부인이던 Catherine (형수)을 버리고 새로운 묘령의 연인 Ann Boleyn 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천주교 교황이 반대했다. 그는 천주교와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국교인 Anglican Church을 이끌어갔다. 그는 Cambridge 대학 교수였던 Thomas Cranmer 를 Canterbury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 로 임명하고 그 대주교인 Thomas Cranmer 에게 이혼과 결혼을 허락받았다. 천주교와 결별하고 예배형식을 개편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다분히 천주교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영국 국교의 감독들은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의식 중심으로 (ritual-oriented) 예배를 인도하였고, 말씀 중심보다는 모든 것이 <의식 중심, Ritual-oriented) 이었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영국 국교의 가르침이나 예배형식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Nonconformist 혹은 Separatist, 혹은 Puritan 들이라고 불렀다. Puritan 이라는 말은 성경대로 깨끗한 예배를 드리자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물론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  그들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빈정대는 말로, “교만한 사람, 잘난척하는 사람" 이라는 별명으로 변하기도 했지만, 당초의 Puritan은 그렇게 영국의 국교에 반항하여 예배를 신약성경대로 간소하게 바로 드리자는 무리가 생겨났고 세월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만 갔다. 
       
        영국 의회에 이런 청교도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했고, 영국의 상하 양원 모두 영국 국교의 예배형식을 수정하기를 원하여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을 물색하여 저명한 인사들로 하여금 영국의 예배 제도를 수정하는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것이 나중에는 전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이들은 영국국교의 The Thirty Nine Article (39개조 신조)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Scotland의 대표 6명이 참석하므로 인하여 그 수정작업보다 성경에서 교훈하는바 믿는 도리와 교회 정치, 예배 형식등을 포함하는 신앙고백서를 새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James I세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Charles I 가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드는 일을 적극 반대, 만류하였으나 의회가 왕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하자, Charles I는 기병대를 동원하여 의사당을 포위하였고, 의회는 Oliver Cromwell 을 수령으로 하는 <의회군대>를 만들어서 영국 왕의 군사 (Royal Army)와 의회군사 (Parliamentary Army)와의 싸움이 일어났다. 지금도 영국 London 에 가보면, Westminster Abbey 앞에 세워진  말을 타고 있는 Oliver Cromwell 의 늠늠한 동상을 볼 수 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1643년부터 1649년까지 London의 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와 St. Magdalene Church에서 주야로 150명이 넘는 대표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설전을 벌리며, 기도하며 성경을 펄쳐놓고 하나씩 하나씩 일을 처리해 나가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문 33장) 와 대요리문답 및 소요리문답 등 세 가지 문서를 완성하였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중심으로 만든 것은 대요리문답 (Larger Catechism, (전 196문)이었지만 무식한 자들을 위해서 쉽게 별도로 특별히  만든 것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소요리문답 (Shorter Catechism 전 107문) 이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만든 분과위원회의 일은 이로서 1647년에 끝났으므로 스콧틀란드 대표들은 모두 본국으로 귀환하고 남은 사람들은  그 후부터 1649년까지는 주로 목사후보생들에게 목사 고시를 치루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1993년 9월 23일은 이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만들기 위해서 대표들이 처음으로 소집된지 꼭 350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NAPARC (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북미주 보수 장로교단민 개혁교단 협의회) 주관으로 이 역사적인 행사를 기념하는 축제로 영국 London에 있는 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 과 이웃 Westminster Chapel (D. Martyn Lloyed-Jones 목사가 목회하던 유서 깊은 교회당)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개혁주의 신학자들, 신학교 교수들, 목회자들, 신학생등 300여명이 모여서 대대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바 있었고 이 사실은 영국 London에 있는 뉴스 미디아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일주간 날마다 메디아의 뉴스의 초점은 바로 우리 학술대회 소식이었다.
당시 NAPARC 의 부회장이던 필자는  이 국제 학술대회의 사회를 보게 되어 유명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강연을 도왔다.  일주간에 결친 학술대회는 대부분 Westminster Chapel에서 열려서 그 유명한 로이드 존스목사님이 설교하던 그 강대상에서 사회를 보던 그때 감격이 지금도 어제 일인듯 새롭다. 그때 강의한 여러 세계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강의내용은 우리 NAPARC 의 중진 위원이던 John Carson (Erskine Theological Seminary 교회사 교수) 와 David Hall (필자보다 신학교 3년 선배, 현재 미국 Virginia 주 Vienna 에서 목회중 PCA 소속 목사) 두 사람의 공저로 간행한 To Glorify and Enjoy God 이란 책에 모두 수록되어있다. 이 책의 초두에는 그 당시 <학술대회> 를 위해서 활동했던 임원들의 명단도 들어있다. 이 책은 개혁주의 서적만 출판하는 영국 Scotland, Edinburgh의 Banner of Truth Trust  출판사에서 1994년에 나왔는데 값은 $33 이며 amazon에서 구입 가능하다.
우리 일행은 그 행사를 마치고 장로교의 뿌리인 Scotland 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으며 장로교의 아버지인 John Knox 가 목회하던 Edinburgh 에 소재한 St. Giles Church에서 성찬식에 참석하고, Scotland 의 언약파 (Covenanters) 회원 목사 120명이 교수형으로 순교한 Grass Market 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 영국 론돈에서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 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과정에서 그 연대표를 여기에 적어본다:
1603 Elizabeth여왕이 죽고 James I 가 등극.
1611 KJV 성경 출현
1620 청교도들이 Speedwell 호 배를 타고  영국 Wales 서남단에 있는 Plymouth항을 떠나 신대륙(미국) 으로 떠났다가 도중에 배가 고장이 생겨 화란의  Amsterdam 에 기항하여 배를 Mayflower 호로 바꾸어 타고 다시 미국으로 행해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Massachusetts 주 Cape Cod 에 있는 Provincetown에 도착하였으나 얼마 후에 미국 본토인 Boston근처 Plymouth Rock에 정박하다. Pilgrim Fathers 들이 처음 도착한 지점을 후에 Provincetown (섭리의 고을) 이라고 명명하고 후에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화강암으로 된 Pilgrims Monument 를 만들었다. Cape Cod 맨끝 북단에 위치한 Provincetown 의 이 Monument 에 올라가면 멀리 Boston 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승강기가 없어서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1625 James I 가 죽고 Charles I 가 등극
1629 3월에 Charles I 가 영국 의회를 해산
1633 William Laud가 영국 Canterbury 사원의 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가 됨.
      Laud 추기경은 소위 Wicked Bible 이라는 불리는 KJV 에 인쇄공이 실수하여
      출애급기 20:14 절에 “not" 이라는 말을 누락하여 그 벌금으로 1600년대 당시
      돈으로 300 파운드를 지불케 한 분으로 유명하다 (F.F.Bruce, The Books and
      the Parchment [Fleming H. Revell, 1962], p.177.)
1637 영국 Charles I 왕이 스콧틀랜드 교회에 기도서 (Book of Prayer)를 사용하도록 강요하다
1638 2월28일 National Covenant  서명
     11월과 12월에 Glasgow에서 스?틀란드 교회 총회 소집
1639 감독들과 대항하는  제1차 민란
1640 의회가 잠시 모임. 이에 반항하는 감독들의 제2차 민란. 

       스?틀란드 군대가 론돈에 진입하여 진압작전에 참여.
     11월에 의회가 정상으로 열림
1643 6월12일  영국 국교의 잘못을 의논하기 위하여 유능한 목사들을 소집하기로 결정하다.
     6월22일  왕의 의회 활동 금지 명령
     7월1일   왕의 명을 어기고 의회가 회의를 소집하다
     7월12일부터 10월12일, 영국 국교의 신조인 39개 신조의 첫 15개항목을 수정작업
        시작
     8월17일  스콧틀란드의 스콧틀란드 언약파의 헌장을 승인함
     9월15일  스콧틀란드 대의원들이  회의 참가차 의회에 도착
     9월25일  스콧틀란드 언약파들의 헌장을 승인하기로 영국 하원이 가결
    10월12일  의회가 교회정치를 연구하라고 대의원들에게 지시. 39개 신조 수정작업 완료
    10월15일  스콧틀란드 언약파들의 헌장을 영국 상원이 승인가결 채택
    10월17일  교회 정치를 토론 시작
1644 4월22일  안수문제를 다룬 예배모범을 영국 의회에 제출
     5월24일  예배모법에 관하여 폭넓은 토론 시작
     8월20일  신앙고백서 제정 위원회를 정식으로 임명하다
    11월 8일  교회 정치를 의회에 제출하다
    12월27일  예배모범을 의회에 제출
1645 1월 3일  영국 하원이 예배모범 (Regulative Principles of Worship) 을 승인하다
               여러 안이 있었으나 Mr. Rough 의 안을 반대 없이 승인하다.
     1월23일  장로교 정치체제 찬성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하다
     2월 7일  요리문답 위원회가 발족하다
     5월12일  신앙고백서 제정위원회 위원들의 보고
     7월 7일  대의원들이 교회 정치를 최종 열람하다
1646  4월27일  Charles I 가 Scotland의 Newark로 피신함
      7월19일  대의원들의 의장이던 William Twisse가 죽고, 후임에 Charles Herle 피선
     12월 4일  신앙고백서 (증거 구절 없는) 하원에 제출
1647  4월15일  대요리문 답서 에 관한 토론 시작
      4월26일  신앙고백서 (증거구절 포함)을 영국 하원에 제출
      5월11일  여러 분과위원들이 신앙고백서를 열람한 후 신앙고백서를 인쇄소에 보내다
      8월 5일  소요리문답서 에 관한 토론을 시작하다
      8월27일  스콧틀란드 교회 교단 (Church of Scotland) 에서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10월15일  대요리문답서 가 완성되어 영국 의회에 제출되다
     11월11일  Charles I가 Isle of Wright 이란 섬, Carisbrooke 성으로 피신.
     11월25일  소요리문답서 를 영국 하원에 제출하다
1648  3월22일  영국 하원이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4월14일  대소요리문답서 (성경증거구절포함)을 최종 완성하여 영국 의회에 제출하다
      6월20일  영국 상원이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7월24일  영국 하원이 대요리문답서 를 승인하다 (상원에서는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9월25일  영국 의회가 소요리문답서 를 승인하다.
1649  1월20일  Charles I 을 재판
      1월30일  Charles I 론돈시내 (지금의 수상관저 Downing 10번지 건너편) 에서 참형(斬刑) 당함
      2월22일  번호를 붙여서 모인 마지막 전체 모임.  폐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를 만들기 위하여 대의원들이 모인 마지막 날)

              이날 이후, 거기에 모인 대의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와 대,소요리문답서 작성의 임무를 모두 마쳤으므로,  목사후보생들의 목사 고시를 위해서 얼마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때 벌써 Scotland에서 왔던 대표단이나 론돈 근처의 대의원 대부분은 귀가한 후였다.
1652  3월25일  목사 고시를 위해서 대의원들이 모인 마지막 모임.


              이와 같이 당초에 영국국교의 예배형식을 수정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가 자문을 구할 목적으로 유식하고 신령한 목사님들을 모시고 의견을 듣고 자문을  구하자던 목적이 급기야는 기독교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특히 장로교 교리의 금자탑 격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와 그 신앙고백서에 입각한 대요리문답서 및 소리문답서 를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모두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한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WCF 는 세계 어디를 가도 장로교의  신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조를 사용하는 교회나 성도는 결코 WCF 를 성경과 대등 시 하거나 성경의 권위위에 놓는 일이 없으며, 성경이 항상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Sola Scriptura).  사람이 만든 것은 무엇이든,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만든 것이라도 반드시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성경만이 오류가 없이 원본(autograph)에 있어서 무오하고 (無誤,infallible) 하고 정확(正確, inerrant) 하다.   이와 반하여 이단들의 특징은 교주(敎主) 의 경전을 성경과 대등시하거나 성경보다 위에 놓는다.  이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이단들은 항상 교주 중심이다.


        원래 임명된 목사들만은 121명으로 (이들을 Westminster Divines 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영국 청교도들이었다.  그밖에도 스콧틀란드에서 Alexander Henderson과 George Gillespie 등을 비롯한 6명이 참석했고 (이들은 투표권은 없고 참관자들임), 평신도 30명이 있었는데 이 30명중 10명은 상원 의원이고 20명은 하원 의원이었다. 그러나 성공회소속 목사들은 대부분 불참이어서 실제로 매일 회무에 참석한 인원수는 70명에서 80명 사이 였다.  이들은 1643년 7월1일에 처음 모인이후 1649년 2월22일 까지 성실하게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임무를 잘 수행했다.  


       이들 대의원들은 대부분 Cambridge 와 Oxford 교수 출신들이어서 당대에 누구보다도 유식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인격이 고매한 분들이었다. 여기에 모인 참석자들은 모두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며 참으로 <성경대로 사는 사람들> 로서 신앙을 위하여 목숨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오늘의 각종 총회, 노회, 대회나 교회협의회 등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오늘의 회의에서는  불법이 위험수위에 달했고, 욕설과 폭력이 회의 장소에서 난무해도 그것이  회의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묵인한다. 안건을 처리할 때도 본인에게 유리하면 “하나님의 뜻” 이라고 하고, 본인에게 불리하면 “사탄의 역사” 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회원들은 이와는 아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신앙과 교리에 투철한 분들이었다. 이 신앙고백서가 탄생한 영국에서 조차 오늘날 이런 신실한 학자/목사 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므모 책을 구입할 때도 17세기 18세기의 영국 Scotland 나 Holland 학자들이 쓴 책들을 구입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계몽주의는 프랑스에서 Rousseau, Montesquieu, Voltaire 같은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고 자유주의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기독교의 교리를 무너트렸다.

     이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에 동참한 학자들은 대부분 신학교 교수들이었는데 그중 특히 몇 사람을 간추려 본다면, Cambridge 대학교의 Queen's College 교수 Herbert Palmer; Oxford 대학교 신학교수부장이었던 Joshua Hoyle;  Oxford 대학교 Magdalene 대학의 신학교수 Thomas Goodwin; Cambridge 대학교의 신학교수 John Arrowsmith 및 그의 후계자인 Anthony Tuckney; Cambridge 대학교의 신학교수 Richard Vines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회의에 참석한 참석자 중에서 Cambridge대학 졸업생이 68명, Oxford 대학 졸업생이 48명이었다. 정식으로 임명된 대의원의 목사수가 121명이라면 Oxford대학과 Cambridge 대학 출신들 116명을 빼면 목사들중 겨우 5명만이 다른 곳에서 공부한 분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대의원들은 회의 전체 기간을 통해서 모일 때 마다 다음과 같은 선서를 되풀이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번 선서하고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 문서야말로 참으로 <장차 하나님의 교회에 책임을 져야 할 중대사> 임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였다.  아무도 이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분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회의를 하기에 앞서 기도하고 설교하고 Sola Scriptura 개념을 새롭게 인식시킨 후 회무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는 이들의 모임의 성격이 성경말씀에 입각한 믿음의 도리와, 교회정치, 그리고 예배모범을 만들자는데 모두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대표자들 중에는 Erastians  (에라스도 주의자들) 도 있었고 Episcopalian (성공회) 사람들, 청교도(Puritans)들도 있었는데 Erastians 들은 <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고 하여 충돌하였으나 성경구절에는 순복하였고, Episcopalians 는 대부분 임명은 받았으나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드믈었다. 그래서 매일 회무에 참석하는 인원은 많아야 80명을 넘지 못했고 보통 60-7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필자가 1993년 9월 말에 영국 London Wesminster Abbey 바로 옆에 있는 Magdalene Chapel 에 들어가 보아도 80명도 들어갈 수 없으리만큼 방이 협소했다. 여기서 의장 William Twisse 목사의 사회로 장장 4년간 역사적 신앙고백서 제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토론하고 문구를 쓰고 또 기도하고 선서하고 또 성경과 대조해 보고 최종 결론을 지었다. 


    그럼 이제 이들이 서약한 그 서약의 전문을 보자.  원문으로 다음과 같다. 괄호안의 번역문을 참고할 것.
   I do seriously and solemnly declare, in the presence of Almighty God, that in this Assembly, whereof I am a member, I will not maintain anything in matter of doctrine, but what I think in my conscience to be truth; or, in point of discipline, but what I shall conceive to conduce most to the glory of God, and the good and peace of his church"  -A.W. Mitchell. A Histo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41, p. 29.-
  (본 회원은 본 회의의 한 성원으로서, 본 회의에서,  교리 면 에서는 본인이 양심으로 판단하여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과, 또 행위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과 화명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고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밋철 저, 웨스트민스터 성회 역사, 필라델피아: 장로교 출판부 간행, 1841년, 제29면.-
        오늘의 교계에서는 신앙고백이 없어졌고, 신조도 사라졌다. 일정한 신앙노선이 없이 무엇이든 expediency (便宜) 중심으로 교회가 편 한대로, 성도들이 편 한대로 믿으며 또한 하나님중심과 말씀중심과 성경중심의 WCF 사상과는 달리 무엇이든 본인에게 기분 좋은 대로 믿고 행한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도 <오락중심> 으로 흘러간다. 소위 “열린예배”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도 총회나 노회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 (OPC) 같으면 그렇게 목회하는 목사를 당장 파면한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인간 중심일뿐,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 “개혁주의”를 믿는다고 주보에 큼직하게 적혀 있어서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해 보면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으며 당회의 장로들은 더 할 나위 없이 성경에 무식하다.  


     이러한 경향은 이단들이 교회에 침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오늘의 이런 신앙풍토와 WCF 기초위원들의 신앙을 비교하면 부끄러울 정도이다.  <주님 재림 직전에 있을 가장 큰 징조는 사람들이 성경적인 믿음을 떠나고 사단의 가르침을 진실인줄 알고 추종하는 속임수 (Delusion)> 이다. 다시 말하면, <배도 apostasy> 이다 (딤전 4:1, 마태 24:24, 살후 2:1-12, 딤후 4:1-6, 계 13:13, 계 11:1-10).  주님 재림할 때 이 세상에서 <성경적인 믿음> 을 가지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될 것을 주님은 예언하셨다 (눅 18:8).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 즉 ‘성경적 믿음“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 눅 18:8의 말씀이다.


      누가복음 18:8에서는  “믿음” (he pistis)를 말하고 있다.  “믿음” 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Greek feminine  definite article 인  “he" 가 붙어 있음을 눈여겨보라.  오늘의 교회는 하나씩 둘씩 WCF에서 말하는 신조에서 떠나고 있다. 이제 교회마다 모든 참다운 성도는 W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바로 공부하여 무너져가는 기독교계를 바로 잡자.  개혁주의 신앙으로 돌아오자.  본 <튤립 교육 선교회> 는 오늘 무너져 가는 기독교 교계를 역사적인 신앙고백에 입각하여 개혁주의 신앙으로 바로 잡고저 문자 그대로 교육 하는 선교기관이다.  -끝-


글쓴이: 김명도 교수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나성 칼빈 신하교 대학원 원장, 
           NAPARC  제20대 회장 역임). www.tulipministri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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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예정 교리 ('교회와 신앙고백'에서 발췌) / 김영재 교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것은 제2장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앙고백에 이어 제3장에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하여 신앙을 서술하고 있는 사실이다. 창조와 섭리, 인간의 타락과 죄와 형벌, 그리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으신 계약 등에 관하여 진술하는 장들보다도 먼저 논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종교개혁 이후 16세기에 나온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에 관하여 간략하게 말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doxology)으로 고백하고 있는 데 비하여, 본 신앙고백서에서는 이중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구원으로, 어떤 이들은 멸망으로 예정하셨음을 8개항에 걸쳐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말부터 만연되기 시작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의식한 데서 온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이 즈음부터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일기 시작했는데,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예정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누구나 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만인 구원설과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협력해야 한다는 신인협동론을 가르쳤다.

 

  

1610년에 5개장으로 된 아르미니우스파 신조가 나왔다. 이에 개혁교회와 신학자들은 아르미니우스를 반대하고 예정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도르트에 종교회의(노회, synod)를 열어 도르트 신조를 내어놓았다. 이 회의에는 유럽 각처에서 이름있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참석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영국적인 것이라고는 하나 이런 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전통을 그대로 보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르트 종교회의(1618)는 예정,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간의 구원, 인간의 타락과 회심 및 그 방법과, 성도의 견인, 즉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끝까지 견디시며 인도하시는 일에 관하여 5개조 93항에 달하는 신조를 작성함으로써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내어놓았다. 그런데 도르트 신조는 예정이라는 특정한 교리를 변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만큼, 제 1장에서 예정론을 18개항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제 3장에서 예정론부터 다루고 있는 것 역시 그 시대의 신학적인 관심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의 균형을 위하여 잘 배열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이전에 먼저 예정을 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그속의 은혜와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선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설교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설교부터 한다면 잘못인 것과 같다.  

 

예정에 관한 논의는 멀리는 어거스틴에게서, 그리고 가깝게는 칼빈에게서 온 것이지만,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는 예정론을 제 3권 제 21장에, 즉 구원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언급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성경 가운데서 기독교의 교리를 가장 체계 있게 가르치는 로마서의 구성과도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성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 알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만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이중 예정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이 있으므로 그 교리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성경에 없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9장~1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선포하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음을 본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고백서들이 예정 문제를 미숙한 듯이 다루고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성경이 그 진리에 관하여 말씀하는 것 이상으로 추론하여 체계화하며 강조하는 사변적인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자들의 이해보다 더 온건하고 더 성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신앙고백 제 1장 제 6항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성경이 우리 생활의 세세한 일이나 예배의 형식이나 교회의 제도 등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부분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사색하고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창세 이전에 품고 게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관하여 추론하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말씀에 의존하여 사색한다고 할 때, 우리는 사색의 대상을 분별해야 하고 그 한계점을 알아야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과 그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정 교리가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께 오는 데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예정의 교리는 언제나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본 신앙고백서는 제 3장의 마지막 제 8항에서 예정 교리의 난해함과 그 의의 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8. 극히 신비한 이 예정의 교리는 특별한 분별력과 신중성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그 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여 실제로 부름을 받은 사실을 확신하며, 영원히 택함을 받은 사실을 확고히 믿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 교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일 수 있도록 해 주고 진실하게 복음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근면하게 해 주며, 그들에게 풍성한 위로를 줄 것이다.  

 

 

김영재 교수의 "교회와 신앙고백" V.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74~177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제 16 장 「선행」


제1절 선행이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명령대로 된 것이다.1) 따라서 성경 말씀의 보장 없이 단
지 인간의 맹목적인 열심에 의하여 고안된 것은 선이 아니며, 또 혹은 단지 선의(善意)의 위장(僞裝)으로 선이 성
립되는 것도 아니다.2)

제2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 선행들은 생명 있는 신앙의 열매요, 또한 증표이다.3) 신자들
이 이런 선행으로 말미암아 감사를 나타내며,4) 확신을 견고케 하며,5) 형제에게 덕을 세우고,6) 신앙 고백을 명예
롭게 하며,7) 반대자들의 입을 막고,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9)
신자들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10) 결국은 그들이
성결의 열매를 맺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11)

제3절 신자들이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은,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전적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다.12) 그러므로 그들은 그저 값없이 받은 은혜 외에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감화를 필요로 한다. 그 감화에
의하여 그들이 그의 기쁘신 뜻을 원하게도 되고 행하게도 된다.13) 그렇다고 하여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 없는 때
에는 어떠한 책임이든지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듯이 태만해져서는 안된다. 도리어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
의 은혜를 불일 듯이 일으키려고 부지런히 선행을 힘써야 된다.14)

제4절 하나님을 순종함에 있어서 현세에서 가능한 최고 수준에 도달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책임 이상
으로 또는 하나님의 요구보다 더 많이 행하였다고 할 수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해야 할 책임에서 대단히 부족한 것
이다.15)

제5절 우리의 가장 선한 행실들도 하나님에게서 사죄나 영생을 받게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선한 행실들과 내세의 영광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으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리
의 선으로는 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익하게 해드릴 처지가 못 되며, 또한 그것으로써 우리의 죄악의 빚을 속상
(贖償)할 수도 없다.16)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책임을 이행한 것뿐이고, 그
저 우리는 무익한 종이다.17)

제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인격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납(嘉納)이 된 이상 그들의 선행
들도 가납이 된다.20) 그것은 금생(今生)에서 그들의 선행이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책망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
니다.21) 그들의 선에 온전치 못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 안에서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게 행한
것이면 받으시고 갚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22)

제7절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어떤 행실이 그 자체로서 형식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하고 자타(自他)
에게 유익할 경우가 있다.23) 그러나 그것은 신앙으로 정결해진 마음에서 난 것이 아니며,24) 그 행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옳게 된 것이 아니며,25) 그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다.26) 그러므로 그것은 죄악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그 행위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도록 도와주지 못한다.27)
그렇지만, 사람이 그런 정도의 선도 행치 않을 경우에는 더욱 죄가 많고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28)

-------------------------
1)미 6:8; 롬 12:2; 히 13:21 2)요 16:2; 삼상 15:21-23; 사 29:13; 마 15:9; 롬 10:2; 벧전 1:18 3)약 2:18,22 4)시
116:12-13; 벧전 2:9 5)벧후 1:5-10; 요일 2:3,5 6)마 5:16; 고후 9:2 7)딤전 6:1; 딛 2:5, 9-12 8)벧전 2:15 9)요
15:8; 빌 1:11; 벧전 2:12 10)엡 2:10 11)롬 6:22 12)겔 36:26-27; 요 15:4-6 13)고후 3:5; 빌 2:12, 4:13 14)딤후
1:6; 사 64:7; 행 26:6-7; 빌 2:12; 히 6:11-12; 벧후 1:3,5,10-11; 유 1:20-21 15)눅 17:10; 느 13:22; 욥 9:2-3; 갈
5:17 16)욥 22:2-3, 35:7-8; 시 16:2; 롬 3:20, 4:2,6, 8:18; 엡 2:8-9; 딛 3:5-7 17)눅 17:10 18)갈 5:22-23 19)사
64:6; 시 130:3, 143:2; 롬 7:15,18; 갈 5:17 20)창 4:4; 출 28:38; 엡 1:6; 히 11:4; 벧전 2:5 21)욥 9:20; 시 143:2
22)마 25:21,23, 고후 8:12; 히 6:10, 13:20-21 23)왕상 21:27,29; 왕하 10:30-31; 빌 1:15-16,18 24)히 11:4,6;
창 4:5 25)사 1:12; 고전 13:3 26)마 6:2,5,16 27)호 1:4; 암 5:21-22; 학 2:14; 롬 9:16; 딛 1:15, 3:5 28)욥
21:14-15; 시 14:4, 36:3; 마 23:3, 25:41-43,45



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Reading its Theology in Historical Context, R&P Publishing: 2009, p. 248. 

In both the Confession and the Larger Catechism, calling is said to come about by God's enlightening the minds of the elect spiritually and savingly, so that they understand the things of God.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에서는 부르심이 택자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조명해주심으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Reflecting the words of Ezekiel, God takes away their heart of stone and replaces it with a heart of flesh. He renews their wills and by his almighty power makes them ready and willing to answer his call, to do so freely, and to accept and embrace his grace. 에스겔선지자의 말을 반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당신의 부르심에 대해서 준비하여 응답할 수 있게 만드셔서, 자유롭게 응답하게 하시고, 또한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Both Confession and Catechism here preserve the delicate balance between the almighty, sovereign power of God - seen in his gracious and loving invitation in the gospel - and the free agency of the ones called, for God's call results in the elect responding freely of their own will, God having granted them the capacity to understand, believe, and respond.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는 모두 여기서 복음을 통해서  당신의 은혜롭고 사랑이 넘치는 초청에서 드러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부르심을 받은 자의 자유로운 힘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택자의 자유로운 반응을 낳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해하고, 믿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기 때문입니다. This call is the point where union with Christ is effected. 이러한 부르심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어나는 그 지점입니다. The Father calls, and the Holy Spirit grants faith and brings into union with the Son. 성부께서 부르시고, 성령께서 믿음을 허락하셔서 성자와의 연합에 이르게 합니다. The Son united himself to us in the incarnation, in one indivisible person, permanently, everlastingly. 성자는 성육신 속에서 당신을 우리들과 연합시키는데, 분리불가한 한 인격 속에서, 영구히, 영원토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Now we are united to him, as the Father calls countless human persons.이제는 우리들이 그에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성부께서 부르시는 대로 말입니다.

 

This effectual call is by God's grace alone and hinges on nothing in man. 이러한 효과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지 인간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습니다. Nor is it based on God's foreknowledge of future events(WCF 10.2).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에지하심에 근거하는 것조차도 아닙니다(웨신10.2). This rebuts the Arminian idea that God's decisions in salvation are based upon his foreknowledge of who will respond in faith to the gospel.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결정이 복음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게 될 사람이 누군지 미리 아시는 것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적 주장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This theology denies that faith and repentance depend on God' determination in election, insisting that God simply ratifies the choices humans make themselves. 이 알미니안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을 단순히 인허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믿음과 회개가 선택 안에서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부인합니다.

 

The divines posit two stages in the call. In the first, the called are passive, for God changes the heart. 웨스트민스터를 작성한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있어서 두 단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단계에서는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 수동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However, in the second phase, they become active. Having been quickened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they answer the call, embracing the grace offered in the gospel. 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는 그들이 능동적이 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깨어나고 새롭게 되고 난 후에야 그들은 부르심에 응답하여서 복음 속에 제공된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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