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설립한 교회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은 국가와 종교의 자유에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국가가 설립한 교회의 경우 영적인 문제를 국가의 권한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인정한다면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거나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강력한 통치 수단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교회를 설립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자연히 시민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가 상실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자유의 상실이야말로 독재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편협하고 독단적인 원리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에 종종 직면한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은 자유주의의 방종한 태도와 불관용의 태도를 똑같이 경계한다. 20장 “기독교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런 비판이 가당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어떤 인간 정신도 “하나님만이 홀로 양심의 주인이 되신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에 위배되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은 물론 예배나 믿음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2항)라는 명제보다 더 진실하고 고귀한 명제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양심의 자유와 관용에 관해 그릇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똑같이 존중하는 것을 관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생각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이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양심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신념이나 권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 간주하는 듯 보인다. 그런 생각은 자유를 방탕한 것으로 만들어 태연하게 방종을 일삼게 하기 쉽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리와 거짓,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한다. 양심은 억압할 수는 없지만, 옳게 깨우칠 수는 있다. 인간은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에 방탕한 행위에 치우치기 쉽다. 따라서 사회의 도덕적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풍속을 해치는 극단적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합법적인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람의 법이나 하나님의 법이 규제하는 것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이를 불관용이라며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명시된 원리들을 곡해하기로 결심하거나 그 참된 의미를 도외시한 채 스스로 무지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것이 불관용과 억압적인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야심 있는 한 젊은이가 고대의 궤변론자에게 “유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궤변론자는 “이미 유명해진 사람을 죽이게. 그러면 자네의 이름이 그의 이름과 항상 함께 언급될 걸세”라고 대답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관용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그런 원리대로 단지 유명해지기 위해 비난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궤변론자의 조언은 유명한 것과 불명예스러운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읽고 깊이 연구하며, 그 모든 내용을 세심하게 살펴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보라. 철저한 시험을 통과했다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신앙고백 안에 진술된 거룩한 교리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공경해야 한다.

 

- 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pp 23-33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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