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자유의 문제 (1) / 안토니 A. 후크마

 

 

크리스챤 인간론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 중 이제 생각해야 될 것은 자유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때때로 이 논의는 이 문제 논의에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들이 갖는 모호성 때문에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켜 왔다. 자유로운(free), 자유(freedom), 자율(liberty), 의지(volition), 뜻(will)과 같은 단어들이 때때로 너무도 다앙한 의미로 쓰여지기에 인간의 자유를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도 심지어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타락한 인간이 오늘날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자유의지라는 이 두 단어 모두가 문제가 된다.

 

우선 의지란 단어가 아주 명백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기에 오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 속에는 "의지"라 불리는 구분된 형태의 "기능"이 있으며 이 기능의 역할은 선택하며 걸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자아낸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강한 의지" 즉, 예컨대 강한 의지의 기능을 갖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약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의지"가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할 때, 그는 이미 의지는 행동에 있어서 자유롭거나 그렇지 못한 어떤 사람 속에 있는 구별된 동인(動因)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기능 심리학"이라 불리는 것과 병존할 수 없는 것이다. 기능 심리학에 있어서 인간의 다양한 능력과 재질과 재능은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어떤 행동을 실행하는 사람 가운데 있는 구별된 동인 혹은 "인성들"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의지"라 부르는 것은 전인에 의해서 실행된 어떤 행위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즉 결정을 하는 과정 중에 있는 전인을 말하는 것이다.1 그러므로 의지가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2

 

또한 자유란 용어 역시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바 있는 질문자가 그의 질문을 통해 의미하는 바는 이와 같은 것들인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오늘날도 여전히 "선택의 피조물"(creature of option) 즉 이러한 종류의 결정을 할 수 있거나 동시에 그러한 결정들을 하고 있는 자일까? 혹은 타락한 인간이 오늘날,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떠나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적으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만약 그가 대단히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죄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들일 것이다. 자유란 단어의 이러한 두 의미는, 비록 서로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피차 아주 다른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용어들을 조심스럽게 정의내린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 용어들을 사용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혼동을 피하고자 "의지의 자유"와 같은 표현 대신에(비록 이 표현이 인용구문에서 간혹 나타나긴 하지만) "선택""참자유"란 단어들을 사용할 것이다.

 

"선택" 혹은 '선택하는 능력"이 의미하는 바는 양자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 즉 이러한 선택들에 대한 책임을 내포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선택 혹은 결정들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것들일 수도 있다. 참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시된 뜻에 맞는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3 우리가 우리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우리의 "의지"와 "자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 왔는가라고 질문할 때마다 자유의 개념에 대한 이러한 두 개의 구별된 이해를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선택하는 능력

 

이제 우리의 관심을 두 표현 중 첫번째인 즉 선택할 수 있는 능력(혹은 선택에 대한 능력)에 두기로 하자. 이 능력은 정상적인 인간 본성의 하나의 지울 수 없는 측면이다. 앞에서 이미 이 점을 지적한바 있다. 2장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은 "피조된 인격체"라는 사실 속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본 일이 있다.4 또한 선택의 능력은 광의의 혹은 구조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라는 것도 지적된 바 있다.5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선택에 대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 능력을 심지어 인간타락 이후에도 보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기독교적 인간론에 있어서 본질적인 역점사항이다. 성경은 항상 인간을 결정할 수 있으며 그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마치 "지팡이"나 "돌"처럼 취급하지 않으시며 인간을 그에게 필연적으로 반응하며 그의 반응이 갖는 특성에 대해 책임성을 지니는 자로 취급하신다.6

 

벌두인(Leonard Verduin)이 표현하듯이, 크리스챤의 시각으로 볼 때 "사람은 본질상 선택의 피조물이요, 또한 그렇게 존재하며 계속적으로 양자택일에 직면하여 어느 하나에는 예라고 다른 하나에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자"이다.7 이 선택의 능력이 인간을 지상의 모든 다른 피조물들ㅡ산, 식물, 동물ㅡ로부터 구분짓는다.

 

사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함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닮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가장 중요한 재능 중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기본적인 것이다. 이것을 떠나선 어떠한 책임도 어떠한 신뢰도 그리고 어떠한 계획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없이는 교육도, 종교도, 예배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이 없이는 예술도, 학문도, 문화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인간 삶의 본질 그 자체이다.

 

 

2. 참 자유의 기원

 

이제 자유에 대한 좀 더 높은 차원의 이해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인 참된 자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선택에 대한 능력과 참 자유를 소유했었다. 어거스틴의 잘 알려진 말을 빌자면 그 당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도덕적 완전성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으며 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비록 심지어 유혹에 대한 이러한 저항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로 했었지만).8

 

그러므로 태초에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존재가 아니였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였다. 인간은 "온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때의 인간은 참된 자유를 갖고 있었다ㅡ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었으며 사실상 죄를 지었다. 우리의 첫 조상은, 예컨대 그들의 순결성이 깨어질 수 없는 그러한 더 높은 단계까지 진보해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낮은 단계로, 즉 죄와 타락의 단계로 떨어졌던 것이다.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발췌(375-382p)

각주 1

1) 기능 심리학에 관한 훌륭한 비판서로는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Bk. II. Chap. 21, Secs. 6, 14-17.

각주 2

2) '의지'라는 단어는 선택의 과정 혹은 무엇을 하려는 과정을 의미한다-이 과정은 전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의지는 합리적 고려와 감정적 충동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적 행동은 항상 전인적 기능이다.

각주 3

3) 그러나 종종 '자유' '자유스러운'이라는 용어를 일반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의 자유'니 '자유스러운 세계'니 하는 용례들과 같다.

각주 4

4) 본서의 pp. 14~22을 보라.

각주 5

5) 본서의 p. 125을 보라.

각주 6

6) 이러한 사상은 특별히 에밀 부른너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본서의 pp. 95~103을 보라).

각주 7

7) Somewhat Less than God, p. 84.

각주 8

14) 이 점에 관해 Bavinck, Dogmatiek 2:600을 보라.

  1. 1) 기능 심리학에 관한 훌륭한 비판서로는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Bk. II. Chap. 21, Secs. 6, 14-17. [본문으로]
  2. 2) '의지'라는 단어는 선택의 과정 혹은 무엇을 하려는 과정을 의미한다-이 과정은 전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의지는 합리적 고려와 감정적 충동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적 행동은 항상 전인적 기능이다. [본문으로]
  3. 3) 그러나 종종 '자유' '자유스러운'이라는 용어를 일반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의 자유'니 '자유스러운 세계'니 하는 용례들과 같다. [본문으로]
  4. 4) 본서의 pp. 14~22을 보라. [본문으로]
  5. 5) 본서의 p. 125을 보라. [본문으로]
  6. 6) 이러한 사상은 특별히 에밀 부른너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본서의 pp. 95~103을 보라). [본문으로]
  7. 7) Somewhat Less than God, p. 84. [본문으로]
  8. 14) 이 점에 관해 Bavinck, Dogmatiek 2:600을 보라. [본문으로]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칼빈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혼에서 발견된다. 67
(2) “지성의 빛 속에서, 마음의 정직함 속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의 건전함 속에서” 보였다. 68
(3) 골 3:10, 엡 4:24: 하나님의 형상은 원래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을 포함했다. ...
(4)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멸절된 것이 아니라 몹시 일그러졌다. 69
(5)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는 일은 믿음을 통해 성취된다. 73.
(6) 이 형상은 갑자기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점진적으로 회복된다.
(7) 하나님의 형상의 갱신은 거듭남의 목표다. 74
(8)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다.
(9) 하나님의 형상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 하나는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의 행위, 다른 하나는 그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10)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인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76.
(11)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점진적이고 역동적이며 내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앤서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양우광목사 정리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신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1. 야고보서 3:9: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36. 야고보는 여기서 똑같은 혀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자에 대해 일인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37.
2. 지음을 받은: 이간은 과거의 어느 때에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으며 지금도 그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같은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저주하는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며,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저주할 때 진노하신다. 37.
3. 야고보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에게 방해가 될 만한 사람을 저주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든 우리가 그를 저주할 때 하나님은 불쾌해하신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38.
4. 타락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어떤 해를 끼쳤든 그 형상을 완전히 없애 버리지는 못했다.
5.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이 점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에 분명히 나타난다.
6. 고린도후서 4:4 그리스도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후 4:4). 그리고 우리가 그를 닮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탁월한 모범이라 하신다. 38.
7.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서 드러난다. 39
7.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되며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8. 요 14:8~9: 네가 나를 유심히 본다면 너는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9. 히 1:3: 성부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특징, 모든 특성, 모든 성품이 성부의 정확한 재현인 성자에게서도 발견된다. 40.
10. 요 1:14: 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기에 가능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닮은 점이 전혀 없는 본성을 취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40.
11.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죄가 없으셨으므로(히 4:1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고 듣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신 것이다.
12.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사랑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라이다. 그리스도처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13. 인간의 도덕적, 영적 갱신을 인간이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41
14. 롬 8:29: 그 형상은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써 명백히 크게 부패했거나 망가졌으므로 인간은 다시 한 번 그 형상을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15. 그 아들의 형상-즉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이 땅에서의 택하신 백성을 미리 정하신 목적내지 목표이다. 이 땅에서 시작하지만 내세에서 완성된다. 42.
16. 고후 3:18: 오늘날 우리는 가리지 않은 얼굴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사할 수 있다.
17.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의 영광을 반사하면서 지속적으로 그 영광이 반사되고 있는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 변화는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43.
18. 롬 8:29, 고후 3:18: 타락의 희생자인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거나 그 형상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분명히 단언한다. 43
19. 골 3:9~10: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일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옛 본성과 새 본성, 옛 자아와 새 자아. 44
옛 사람: 육신과 죄의 지배를 받는 통일된 인격체
새 사람: 새 자아: 성령이 다스리시는 통일된 인격체
20.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아직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을 간주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인 것이다. 45.
21. 신자는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고 있는데 이는 완전한 지식, 정신뿐만 아니라 마음도 포함하는 지식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자라 갈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신뢰하고 더 잘 섬기데 될 것이다. 구속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삶의 다른 측면뿐만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도 총체적으로 흠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45
22. 엡 4:22~24: 그리스도인이란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옛 자아를 벗어 버리고 새 자아를 입었으며 그 마음의 정신이나 태도에 있어서 지속적이며 점진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23. 롬 8:29; 고후 3:18; 골 3:9~10: 엡 4:22~2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속의 목표는 하나님을 점점 더 닮아 가는 것, 또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 가는 것이다. 47.
24. 우리가 점점 더 하나님을 닮도록 새롭게 되어 가는 일은 성령이 구속의 과정 가운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성경에서 우리 자신의 노력을 포함하는 일로도 묘사된다. 48.
25. 새로워짐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점점 더 닮도록 새로워지는 일이 인간의 책임이기도 하다. 48.
26. 엡 5:1 본받는 자가 된다는 것은 계속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처럼 완벽하지는 않더라고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
27. 고전 11:1 바울을 점점 더 닮아 갈수록 하나님도 점점 더 닮게 될 것이다. 49.
28. 빌 2:5~11: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으려 해야 한다.
29. 요 13:14~15: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신의 본을 따를 것을 지시했다.
30. 엡 5:1; 고전 11:1; 빌 2:5~11; 요 13:14~15: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31.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기술된다. 우리의 성화의 최종 목표는 우리가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닮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32. 고전 15:49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땅의 사람, 흙에 속한 자인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올 세상에서는 우리가 하늘의 사람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지니게 될 것이다.
33. 요일 3:2: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모습 그대로 볼 것이다. 51.
34.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닮는 것은 우리의 성화의 궁극적 목표다. 52
35. 하나님이 형상은 인간의 상실될 수 없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일부이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중단하지 않고는 상실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36.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죄에 빠졌을 때 뒤틀려 버렸고 성화의 과정에서 회복되고 새롭게 되어 가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앤서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양우광목사정리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창 1:26~28, 5:1~3; 9:6; 시편 8편


1. 각 동물은 그 “종류대로”(창 1:21, 24, 25)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26~27). 26
2. 헤르만 바빙크: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가장 높고 풍성한 계시이며 따라서 온 창조 세계의 머리이자 면류관이다. 26...
3.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우리는' 하나님이 “복수적 존재이시다”는 것과 “다른 존재”와 교제하시는 존재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27
4. 하나님의 논의와 숙고가 인간의 창조에 선행했다.
5. 아담은 남자와 여자 모두로서의 인간(창 5:1)이라는 의미와 인류(창 6:5)의 의미이다.
6. 형상(첼렘) 모양(테무트)인데 이 둘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다(창 1:26(형상과 모양), 27(형상), 5:1(모양), 3(모양과 형상); 9:6(형상)). 28
7. 형상(첼렘): 자르다, 조각하다, 자르다. 어떤 동물이나 사람의 조각된 모양을 표현할 때 사용.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즉 하나님의 표상임을 뜻한다.
모양(테무트): ‘~와 같다’. 형상이 또한 하나의 모양, “우리와 닮은 형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8. 인간이 특정한 측면에서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표상이다. 29
9. 짐승들과 땅 전체에 대한 지배권: 창 1:26절에서 하나님이 온 땅에 대한 최고의 지배권을 갖고 계시는 것처럼 인간인 짐승들과 땅 전체에 대한 지배권은 하나님의 형상이 지닌 한 측면이다.
10. 교제하는 존재: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교제하는 모습을 반영한다. 인간은 남자가 여자를 보완해주고, 여자는 남자를 보완해 준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교제하는 존재이다.
11. 책임있는 인격체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명령(창 1:28)하시는 것을 근거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존재이며 자신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인격체이자 책임있는 존재란 면에서 하나님을 닮았다.
12.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다스릴 수 있는 인격체: 하나님은 결정을 내리실 수 있고 다스리실 수 있는 한 인격으로 계시되는 것처럼 인간도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다스릴 수 있는 한 인격이다.
13. 하나님은 인간의 통치권에 대한 말씀에 선행하여 26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이는 결혼 제도를 함축하며 결혼 제도의 성립은 창 2:18~24절에서 서술된다. 30
14. 문화명령: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
15. 인간은 창조주의 손에서 출현했을 때 타락하거나 부패하거나 죄에 물들지 않았다(창 1:31).
16.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 인해서 더럽혀졌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31
17. 아담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면 우리는 아담의 아들인 셋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진 존재라고 추론할 수 있다.
18. 창 9:6 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살인이 금지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33. 우리가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인하려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34.
19. 구약의 본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35
20. 시편 8편에 보면 천사들이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36
21.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주시고 만물을 인간의 발 아래 두셨다고 단언한다.
22.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높은 피조물이자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고 모든 천지만물을 그 발 아래 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죄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다. 이처럼 구약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앤서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양우광목사정리

 

개혁주의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육체의 부활 中 - 부활의 '본질'에 관해..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발췌) / 안토니 후크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도 영화로운 육체들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중간기 상태 동안 잠정적 행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

이제 우리는 부활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려 한다.

우리가 예측하는 바이지만, 육체 부활에 대해 신약은 구약보다 더 구체적이며 상세하다. 이 책의 9장에서 우리는 이미 구약으로부터 사후에 경건한 자들의 운명과 악인들의 운명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배웠다. 앞에서 인용되었던 성경구절에서도 우리는 육체의 부활에 대한 암시를 던져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보게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참조. ASV). 오순절 설교에서(행2:27, 31) 베드로가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선지서들 중 두 곳에서 육체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곳이 있다. 첫 번째 구절은 이사야 26장:19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두 개의 무리의 운명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하나는 믿고 죽은 자들의 미래의 운명(주의 죽은 자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14절에서,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고 사망이 되었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대상인 유다의 원수들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26:19은 신자들의 미래의 육체 부활, 특별히 이스라엘 중 신자들의 미래적 육체 부활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 12:2은 불신자와 신자 모두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 영생(olam)이란 표현이 구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곳이 여기뿐이다. 다니엘은 분명히 미래에 육체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수치에 대해서도 함께 말하고 있다. 히브리어 영원(olam)이란 단어가 경건한 자들의 축복상태나 불경건한 자들의 불행한 상태를 동일하게 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부활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약 부활교리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매우 분명히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미래적 부활에 대한 증표와 보증이라고 한다.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 전의 모든 부활들은 다시 죽음이 찾아왔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만은 죽음이 뒤따르지 않았다. 이 부활의 모형을 신자들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셨으므로 신자들 역시 일어날 것이다.

 

이런 진리는 신약의 여러 곳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고린도전서 15:20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선포하고 있다. 첫 열매(aparche)란 단어는 추수의 첫 부분을 의미하는데 이 첫 부분은 추수의 미래적 완성을 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의 증거요 보증인 것이다. 골로새서 1:18에서도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prototocos, the first-born)”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먼저 나신 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도 장차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로마서 8:29에서처럼, 그리스도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사실상 요한복음 14:19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살았기 때문에 너희도 살겠음이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로마서 8:11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배울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도 배우게 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빌립보서 3:20~21에서 바울은 신자들의 부활한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육체와 비슷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참조 ASV). 현재 우리 육체를 “우리의 낮은 몸” 혹은 “우리의 비천한 육체”라고 부르고 있다. 낮고 비천한 것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도 고통, 고난, 병마, 질병 그리고 죽음 등을 연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신자들의 육체는 모든 죄의 결과들, 즉 사망까지도 제거된 그리스도의 영광의 육체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완전히 그와 같이 될 것인데, 우리의 영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그렇게 될 것이다.

 

육체의 부활에 관해 수많은 질문이 제기되어 왔고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활의 육체는 물질적인 육체일까? 현재의 육체와 미래의 부활육체와는 어떠한 동질성이 있는 것일까? 부활육체가 현재의 육체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동질성이란 전혀 없는 것인가? 만일 다르다면 무슨 방식으로 부활육체가 현재의 육체와 다르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려 할 때, 우리는 먼저 성경 중에서 육체의 부활에 관해 가장 충분하게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대항하여 논쟁하려던 고린도 교회의 잘못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1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라고 바울이 반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을 살펴 볼 때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이 고린도에서 부인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린도인 중 얼마가 신자들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아마 그들이 그랬던 것은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하면서도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던 헬라 사상의 영향이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오류에 대해,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는 신자들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항하면서, 먼저 부활이라는 사실(fact)에 대해 말하고(12~34절), 그 다음에는 부활의 양태(manner)에 관해 말한다(35~49절). 그리고 끝으로 부활과 살아 있는 신자들의 변화 등의 필연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12~14절). 신자들의 부활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들어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12~14절).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신자들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사실은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의 신앙은 헛될 것이며 그는 아직도 그의 죄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미 말하고 있던 요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는 것이다. 20절에서 이미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고 있다. 21절에서는 말하기를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말미암는다고 한다. 22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했다. 이 구절 중에서 첫 번째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 즉 모든 인류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모든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가리키고 있으니 곧 신자들을 말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불신자들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관심은 여기서는 신자들의 부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들의 부활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의 필수적인 국면인 것이다. 왜냐하면 “맨 나중 멸망받을 원수는 죽음”이기 때문인 것이다(26절).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 ‘몸의 부활’에서 발췌 (338~350p)

 

 

참조: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신체적 육체부활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서도 이것은 입증되는데 그리스도는 분명히 육체적인 부활을 하셨기 때문이다(그의 육체는 만져질 수도 먹을 수도 있는 육체였다. 눅24:38~43). 또한 비육체적 의미의 “부활” 사상은 헬라인들의 “영혼불멸” 사상과 일맥 상통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육체부활로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고린도의 오류자들은 육체부활을 대치하기 위한 개념으로 비육체적 부활 사상 내지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