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AlwaysHopes???09.04.30?? http://cafe.daum.net/jaxhopes/L77f/2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 1장 8절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 말에서 볼 때 거짓 사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반대하는 일에 매우 대담하고 뻔뻔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정열과 열성을 가지고 그의 소명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중에 그들에게 저항한다. 그는 자신의 성직을 그들에 대항하여 놀랍도록 높인다. 그리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갈라디아서 1장8절)


여기서 바울은 불을 내 뿜는다. 그의 열정이 심히 뜨거워서 그는 거의 천사 자신들을 저주하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만일 우리 자신들, 나의 형제 디모데와 디도, 그리고 나, 나와 함께 한 모든 자들, 그밖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로부터 온 천사 등이 너희에게 설교한다 해도 나의 복음이 전복되기 보다는 나와 내 형제, 그렇다,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 대단한 열정이다. 자신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하늘에서 온 천사들까지도 저주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희랍어의(아나세마), 히브리어의(헤겜)은 저주받은 것, 밉살스러운 것, 경멸스런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참여, 의사소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여호수아는 말하기를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레위기 마지막 장에는 “아주 바친 [또는 아나세마]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반드시 죽일찌니라” (레위기 27:28-29) 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고는, 저주받은 아말렉과 다른 도시들은 완전히 멸절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이런 뜻이다. 우리나 다른 사람이 설교한 것과는 다른 복음을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설교하기보다는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받기를 나는 소원할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을 먼저 저주한다. 지혜로운 토론자는 보통 자신을 비판하는 일로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을 더 자유롭게 그리고 더 혹심하게 비난하기 위하여 그리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자신이 설교하던 것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자신이나 다른 어느 누구도,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번 복음의 음성이 울린 다음에는 복음은 마지막 종말의 날까지 철회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갈라디아서강해"중에서/루터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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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회들의 영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부터 교회의 영적 상태는 개탄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교황의 독재가 폐지되고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행하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인해 교회는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1525년 농민전쟁이후 교회는 죄를 자백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다. 헌금도 하지 않았고 성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와 권징이 사라져버렸다. 교회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수입도 없고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했으며, 일부 성직자들은 술집을 운영하면서 수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목회자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루터의 복음주의 개혁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루터는 무지한 성직자들로 인해 교인들이 겪을 고통을 알게 되었다. 
 
일반 평신도들의 신앙 역시 형편없었다. 그들은 과거에는 교황을 업신여겼으나 지금은 성직자들을 업신여기며 존경하지 않았다. 이처럼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의 영적인 비참함과 무지로 인해 루터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 이러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목회자들에게 가르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교회의 주된 임무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목회자들의 교육과 그들의 무지와 불신앙으로 인한 폐습들을 치유하고 또한 평신도들이 체계적으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집필에 착수하였다. 
 
루터가 집필한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
 
▲ 루터의 소교리문답 ©뉴스파워 김현배


결국 루터는 1529년 4월과 5월에 독일어로 된 두 권의 교리 문답을 완성하여 출판했다. 교육의 주춧돌이 될 교리문답서는 ‘대교리문답(Greater Catechism)’과 ‘소교리문답(Lesser Catechism)’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든 교리 중의 교리인 십계명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기도 중의 기도인 주기도문과 지극히 숭고한 의식들인 복된 성례 등 4가지의 주요 내용이 들어있다. 
 
루터의 교리문답은 기독교 신앙의 도리를 가장 정확하고 직설적이고 간추려서 진술하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알아야 하는 모든 교리가 집약되어 있다. 목회자와 교사들은 그 뜻을 상세히 풀어 설명할 수 있도록 돼 있으며, 성도들이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외우게 돼 있다. 자세하게 분석한 모든 내용들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교리 문답’은 성인들을 위한 책으로서 그들을 가르칠 교사나 목회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교리 문답 설교를 하는데 안내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소교리문답’은 보다 단순하고 어린이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언어로 쓰여 졌으며 전반적인 단순한 표현 기법으로 널리 사용되고 이해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또한 어린이들이 설교를 잘 알아듣지 못하여 배우는 것이 많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들을 어린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말로 쉽게 잘 풀어내 놓은 책이다. 암기하기에도 쉬운 교리문답서이다. 
 
루터는 교리 교육의 책임을 교회가 아닌 부모에게 지게 했다. 소교리 문답은 아침, 저녁, 그리고 식탁의 기도와 가정예배를 인도하기 위한 책으로서 온 가족이 날마다 그 내용을 배우도록 했다. 또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이 구체적인 삶을 생활 속에 적용하도록 했으며, 나중에 암기할 수 있도록 꼭 요구되는 성경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루터는 자신이 어렸을 때 교황의 교회에 다니면서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에 관해서 배워본 적이 없었으며, 또한 교황주의자들은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그러한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이 무지한 상태로 방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소교리문답은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고 예배에 쓰기 위한 매우 소중한 책으로서 교회에서도 사용하도록 의도했다. 
 
루터교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교회들 마다 교리문답반을 만들었으며, 주일학교 어린들에게 주일 아침 마다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또한 문답식 구성은 기계적인 암기 교육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여 어린이들이 날마다 암송하도록 했다. 작지만 위대한 교리문답은 장년에게는 단단한 음식이요 아기들에게는 젖이다. 이 책의 내용 하나 하나를 하나님 앞에 아뢰면 곧 기도가 된다. 
 
대. 소요리문답의 중요성 
 
1529년에 작성한 두 교리문답은 매우 중요하며, 루터가 남긴 걸작 중 하나이다. 특히 루터는 자신의 모든 책이 다 불타 없어진다 해도 ‘의지의 속박’(1525년)이란 책과 ‘소교리문답’(1529년) 책만 남아 있다면 괜찮다고 할 정도로 어린이를 위한 소교리문답을 중요시 여겼다. 
 
루터는 그의 저서 “탁상담화”에서 요리문답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교리문답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 안에는 기독교 교회의 유서 깊고 순결하고 신적인 교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교리문답에 위배되는 것은 겉으로 아무리 위대하게 보일지라도 거짓 교훈이므로 항상 주의하고 배척해야 한다. 이 책은 가장 온전하고 훌륭한 교리이므로 설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모든 공적 설교는 교리문답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이것을 날마다 설교하고 날마다 낭독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교회에서 목회할 때 매일 설교했다. 특히 그는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교리문답의 설교를 했는데, 그의 대.소교리문답이 설교의 기초가 되었다. 루터는 요리문답 공부를 통해서 개혁의 추종자들이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는 어른과 아이들 모두 교리 문답서의 내용을 암기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식사를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교리문답서는 기독교 신앙 입문의 기초과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복음주의 교리의 주춧돌이 되었다. 또한 종교개혁 사상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고, 교회의 표준으로 남아 교회를 다스리는 준칙이 되고 있다. 가정과 교회들과 그 지역의 공립학교들에서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루터파 기관들에게서 널리 채택되어 사용되었다.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교부들의 저서들을 다 모아 놓고 정리한다 해도 오늘날 우리가 이 얇은 교리문답을 통해 배우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두 교리문답은 오늘날까지 모든 루터파 교회의 기본교리가 되고 있으며, 독일어 번역 성경 다음으로 유익하고 큰 영향을 미쳤다. 
 
1529년 루터가 대.소교리문답을 출판한 이후에 그 이후에 수 백 개의 교리문답이 쏟아져 나왔다. 칼빈의 어린이용 제네바 교리문답(1542),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1647) 등 개혁파의 교리문답과 여러 신앙고백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의 교리문답이 오늘날 교회에 주는 교훈
 
종교개혁 시대는 교리문답의 황금기이다. 성경적 교리는 종교개혁의 심장이 되었다. 교회로 하여금 다시 교리들을 만들어 완벽하게 명확한 방식으로 진술하게 했다. 종교개혁자들의 특징은 교리문답 교육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 들 역시 교리 교육을 그토록 강조했다.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교리문답 교육을 통해 회심케 하고 신앙이 더욱 더 성숙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특히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회중들이 교리문답 교육을 통해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면 위험하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니다. 교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과거에 알았던 것 보다 더 온전하게 알게 해 준다”고 말한다. 또한 청교도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은 “교리문답이 교육이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고 로마가톨릭교회를 심각하게 도전하고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교리는 참 교회와 이단을 구별해 준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실천, 사랑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며, 그 신앙고백의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삶으로 들어오게 하는 도구이다. 기독교는 배워야 하며 따라서 체계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 특별히 교회는 성도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목회자들은 교리문답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도들 역시 시시하게 여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설교자나 성도들 모두 좀 더 깊고 수준 높은 어떤 새로운 것을 찾는다. 이것은 오해요 착각이다. 정말 깊고 수준 높은 것은 교리문답 뿐이다. 어둠의 악한 영들은 교리문답의 빛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속으면 안 된다. 오늘날 어린이들과 젊은 청년들과 장년들에게 체계적인 문답식 교리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럽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을 연구해 보면 부흥 시기 마다 항상 성경적인 교리가 있었다. 설교자들은 성경의 핵심적인 주요 교리들을 설교하고 가르쳤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원죄, 회개, 칭의, 중생,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피, 하나님의 진노, 구원의 은혜, 대속의 교리 등을 선포함으로서 부흥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예를 들면 18세기 영국의 조지휫필드가 중생을 설교할 때 부흥이 일어났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뺨에는 회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처럼 성경적인 바른 교리 설교위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부어졌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적인 교리를 붙잡을 때 다시 부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배 목사는 현재 베를린 비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런던신학교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교에서 청교도와 부흥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독일 선교사이며,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CLC)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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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6)

 

외로운 투쟁에 선 루터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성교회에 붙여진 95개 논제는 약 몇 주일만에 독일 전체 퍼졌다. 이 논제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루터의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어두운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보게 되었던 사람들 속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공격도 거세게 일어났다. 로마 교황청에 완전 비상이 걸렸다. 

 

우선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공개적으로 루터를 이단시 하면서 추적하기 시작했다. 또한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ann Eck)의 공격과 선동으로 인해 결국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루터는 독일의 추기경 카예탄(Thomas Cajetan, 1496-1534년)의 심문을 받았다. 추기경은 오직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교황이 성경보다 높은 곳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터와 추기경이 서로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싸웠다. 이때 추기경은 로마로부터 루터를 체포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게 되며, 이 정보를 입수한 루터는 친구들의 충고에 따라 한 밤중에 아우크스부르크 도시를 빠져 나온다. 

 

당시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던 비텐베르크의 선제후 프레더릭(Frederick)은 루터가 로마에 있는 이단 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아야 하는 명령서를 철회하고 독일 땅에서 심문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여 루터를 도왔다. 그 선제후는 잠정적이지만 루터를 계속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막강한 영주들이 로마의 위협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 루터는 홀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는데 험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가까이 있는 수도회 형제들이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이 루터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희미하지만 마지막에는 화형을 위해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자신이 서 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스쳐 갔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쟁 -“십자가 신학”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로마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루터 자신은 면죄부와 신학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루터의 면죄부 비판과 관련하여 벌어진 첫 번째 논쟁이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건물에서 열렸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논쟁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신학을 ‘40개 조항’으로 만들어 정리했다. 루터 당시 신학의 주류는 ‘영광의 신학’이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고 십자가의 신학을 지지하였다. 그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대해 입장을 밝히게 된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루터가 승리함으로 인해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었다. 마르틴 부처(Martin Butzer)를 비롯하여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던 비텐베르크에 있는 동료들, 그리고 많은 친구들 등 여러 사람의 동조자를 얻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 “교회 최고의 권위는 오직 성경” 

 

논쟁으로 유명해진 루터는 자연이 계속적인 논쟁에 연루되었다. 개혁을 위한 치열한 한판 싸움인 중요한 논쟁이 1519년 6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발생하였다.

 

그때 루터는 로마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네스 에크(Johann Eck, 1486-1543)와 논쟁했다. 핵심은 권위에 대한 논쟁이었다. 에크는 교황과 주교들, 공의회, 종교회의들, 교회 전통의 권위만을 내세웠다. 베드로 후계자인 로마 감독들이 곧 교회의 머리라고 하면서, 로마 교황의 신적 권위를 주장했다. 

 

반면에 루터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의 통치권이 성경에는 전혀 없는 개념이며, 공의회 결정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교황과 공의회는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교황의 최고(지상)권을 믿는 것은 불필요한 일임을 강력히 반박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곳에서 루터는 변할 수 없는 진리는 교황이나 공회가 아니라 성경만이며,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 권위가 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루터는 신구약성경 66권 이외의 외경과 가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가톨릭교회는 외경까지를 성경에 포함시킨다. 결국 에크는 루터에게 존 후스(Hohn Huss)와 같은 이단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 - “거룩한 불”

 

추기경 카예탄(Cajetan)과 엑크가 루터 파면에 앞장섰다. 교황은 루터의 반박문 중에서 41개 항목들이 이단적이라고 정죄하면서 1520년 6월 15일, 교황의 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발표하였다. 

 

이 칙서가 발표된 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만약에 취소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단으로 선포하겠고 곧 파문에 처해질 것이라고 위협받았다. 

 

이 교황의 교서는 10월 10일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루터는 교황의 기소장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교황청의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명령받은 60일이 지났지만 물러서지 않은 루터는 이 교서를 “저주받은, 뻔뻔스럽고 악마적인 교서”라고 불렀다. 

 

12월 10일, 오히려 루터는 교황이 내린 교서와 모든 교회법전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루터는 거짓 사상을 불살라버렸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는 강의하기 위해 다시 비텐베르크로 왔다. 

 

수 많은 학생들 앞에 선 루터는 지옥과 순교의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하여 개혁의 선봉에 선 루터에게는 순교조차도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점점 더 담대해지고 거세지며 확고해져갔다. 루터는 천 년이 넘도록 든든히 버텨오던 가톨릭교회의 절대교리들을 향하여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서슬 퍼런 황제의 권력 앞에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가 보여준 영적 파워의 힘은 엄청났다. 루터는 진리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분명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했기 때문에 흑과 백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러한 루터의 영적 파워는 결국 성경의 힘이었다. 루터는 영적전쟁터에서 움츠러들거나 물러서기를 거부했다. 오늘날 약해진 우리들의 신앙에 필요한 것은 루터와 같은 영적파워이다. 

 

보름스 의회 -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결국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당했다. 로마 교황청은 독일 의회에 압력을 넣어 루터를 정죄하여 처형하도록 독촉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보호자였던 프리데릭 현제는 루터의 공개적인 심문이 독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 의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하였다. 

 

1521년 4월 17일-18, 독일 보름스 대성당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심문을 받게 된다. 루터의 친구들은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걸했다. 이때 루터는 두려워하는 친구들에게 “후스는 화형 되었지만 진실은 타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루터는 친구 슈팔라틴에게 “지붕위에 기왓장들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여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다”라고 전했다. 

 

4월 16일 아침 10시, 루터와 비텐베르크 동료들은 덮개 없는 마차를 타고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루터는 수도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루터는 그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을 불렀고,“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고 말했다. 

 

그때 회의장 주변은 루터를 격려하기 위해 모여든 5천여 명의 독일 시민들로 붐볐다. 시민들은 외쳤다. “남자답게 싸워라. 죽음을 무서워 말라. 저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몸뿐이다. 영생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했다. 

 

루터가 하루 밤을 머문 보름스는 흥분과 기대로 열광의 분위기였다. 첫째날 4월 17일 수요일 오후 4시, 루터는 젊은 황제와 선제후들, 교황의 특사들, 대주교, 주교, 백작, 영주들, 여러 자문들, 제국 각 도시의 대리인, 외국 법정의 대사, 각 계층의 고관 등, 즉 교회와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잘 대표하는 사람들 앞에 섰다. 

 

트리어 대주교의 법률고문인 요한 폰 에크(Johann von Eck)는 황제를 대신해 라틴어와 독일어로 질문을 하였다. 제국의회 앞에 불려 나온 루터는 긴 책상 위에 자신의 책 25권 정도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에크는 두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책들은 당신이 쓴 책인가?”, 또 “그 책에서 쓴 내용의 사상을 그대로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철회할 것인가?.” 즉 그 저술들을 다 취소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때 루터는 그 책들의 저자가 자신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취소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것은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대충 처리할 수 없어서 답변할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제는 루터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더 주었다. 

 

다음날 4월 18일 목요일, 루터는 전날보다 더 자신 있어 보였다.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을 강하게 세웠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횃불이 켜지고 루터는 보름스 의회 법정에 들어섰다. 에크는 전날 던졌던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그 책들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었다. 

 

마침내 루터는 입을 열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는 위대한 선언을 하였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단순히 전달하는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교황권의 부패와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폭정과 사악함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분명한 이유로 논박하지 않는다면 철회할 수 없습니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여러 번 오류를 범했고, 자체로 모순되는 말을 한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당해 있어서 저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하고 싶지 않고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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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새겨진 기념 표지석

 

 1521년 마르틴 루터의 재판이 열렸던 건물의 터, 바로 그 현장에 세워진 하일스호프공원(Heylshofgarten)이 있다. 이 공원 내에는 루터가 소환되어 출두한 지점의 바닥에 기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HIER STAND 

VOR KAISER UND REICH

 MARTIN LUTHER 

1521 

(1521년, 마르틴 루터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서 있다)

 

보름스 칙령 

 

로마 교황청은 할 수만 있었다면 존 후스처럼 루터도 화형에 처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제는 열렬한 교황주의자인 제롬 알렉안더(Jerome Aleander, 1480-1542)에게 이단자 루터를 정죄하는 포고령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5월 8일에 완성된 포고령에 황제는 5월 26일에 서명했다. 이어 독일 제국의회는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령을 공포하였다. 

 

마침내 루터는 국가와 교회로부터 위법자로 정죄되면서 파문을 당했다. 그에 대한 모든 법적인 보호를 박탈하였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불로 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그의 책을 인쇄하거나 판매하거나 읽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 되었다. 

 

또한 루터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을 불법자로 규정했다. 루터를 돕거나 소식을 주고받는 일도 금지되었고 루터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은 구속되거나 소유를 몰수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과 황제, 대학들로부터 사회의 이단자로 찍혀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루터는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천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오던 황제의 권위와 교리 그리고 교권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개혁에 헌신하였으며, 사람을 믿지 않았고 사람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기독교의 근본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며, 사도적 신앙과 예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다. 즉 성경으로 되돌아가며,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며, 신약 성경에 나타난 표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이 구호는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는 중요한 영적 모토들이었다.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5)

 

비텐베르크 시교회 설교 

 

루터는 몇 년 동안 라틴어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중에 하나님의 진리를 많이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수도사이자, 설교가로, 그리고 신학교 교수로 3가지 직책을 수행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성경 교수로 활동하면서 1517년 까지 비텐베르크 시교회(Wittenberg Stadt Kirche)에서 사제로서 목회사역도 하였다. 

 

당시 대학과 수도원의 전통적인 언어는 라틴어였고, 도시민의 언어는 독일어였다. 그 때문에 루터는 독일어로 설교했는데 이 교회는 독일어로 설교한 최초의 개신교회가 되었다.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 Church)라고도 불리는 비텐베르크 시교회에서 루터는 매주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목회자로서의 루터는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깊이 숙고하면서 자신의 설교를 통해 신자들이 성경 진리를 잘 이해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양떼 즉 신자들의 구원에 관심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심방도 열심히 했다. 이러한 루터의 신학적 및 목회적 관심은 교회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 1517년 10월 31일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던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진리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와 성경의 새로운 계시의 빛이 루터에게 비취어지자 그는 곧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보게 되었다.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짓과 속임수와 그리고 온갖 위선을 깨달은 루터는 결코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어두움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하고자 결심하면서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1517년 10월 31일, 이른 아침에 긴 사제복을 입은 루터가 어디론가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 성교회(Wittenberg Schloss Kirche)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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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 성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대략 낮 12시가 되기 전, 루터는 가지고 온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펼쳐 들고서 라틴어로 된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못으로 박았다. 지금은 청동문으로 되어 있어 못으로 박을 수 없지만, 그 당시는 나무문으로 되어 있어서 못으로 박을 수 있었다. 이 95개조 반박문 문서는 공개 토론을 위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95개조 논제에 대해 아무도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무런 토론도 없었다. 비텐베르크의 교수와 학생들은 그 문제에 대해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이 공개 된지 2주 만에 복사되고 번역되어, 전 독일에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혜성같이 등장한 금속 활자 인쇄술로 인해 4주 만에 전 유럽전역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마치 갑자기 핵폭탄이 터져 버린 것처럼 로마 교황청을 향해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유럽과 세계사를 진동시킨 역사적인 대사건으로서 그 중심인물은 1483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젊은 마르틴 루터이다. 

 

루터는 중세말의 타락한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여 갱신하고자 했다.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영적 전쟁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95개조 논제의 핵심 내용루터는 말씀의 진리를 위한 증거에 매우 충실했기에 교회에서 철저하게 개선되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95개조 논제를 내걸고서 공개 토론하자는 반박문 내용의 핵심은면죄부(indulgentia) 판매이다. 면죄부 사건은 루터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죄 용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죄책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면죄부에 대해 루터는 당시에 교회의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라고 반대했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필요로 할 때, 그는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강요했다. 판매 책임자인 도미니크 교단의 탁발수도사 요하네스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은 가는 곳마다 ‘면죄부를 사면, 살아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는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 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완전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인 된 우리가 십지가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비성경적이고, 구원에 아무 효과가 없는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함 받는다고 가르쳐 왔는데, 가톨릭교회는 죄를 범한 인간이 신부에게 죄를 고함으로 인해 죄 용서를 받는다는 고해성사를 주장한다. 

 

또한 교황은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최고의 통치자이기에 절대 오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교황무오설이다. 또 성체숭배 사상이 있다. 성찬식 할 때 성도들이 받는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화체설숭배는 잘못된 것이다. 개신교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종교개혁자 칼빈이 주장한대로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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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죄부     ©뉴스파워 김현배

 

또한 가톨릭교회는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성인 숭배 사상이 있다. 1984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는 한국 방문 중에 103위의 성인 시성식을 행하였고, 2014년 1월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 때는 124명의 시복미사를 거행했다. 

 

하지만 루터는 과도한 성인숭배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성상숭배 사상도 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성인들, 교황들의 형상 등을 만들어 놓고서 그 형상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이 성상 숭배인데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성상들을 다 부셔버렸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는 아무 형상이 없고 깨끗하다. 

 

또한 십자가 숭배 사상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양을 조각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정이나 성단, 교인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이나 병원에 달아 놓고 거기에 절하거나 기도하는 행위이다. 

 

마리아 숭배 사상도 있다.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신격화 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마리아 무죄 잉태설,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는 “구원의 어머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천주교회에 들어가 보면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다. 그들은 그러한 종교적 그림에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성화숭배사상이 있다. 루터는 이 모든 것들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모든 것들의 잘못된 행동들은 그 근본이 잘못된 성경관에 기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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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못박고 있는 루터     ©뉴스파워 김현배

 

가톨릭교회는 말씀도 좋지만 행위로 의롭게 되고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구원관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로마 천주교회의 부패와 종교적 타락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루터는 이러한 부패와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이 면죄부 비판에서 출발하여 중세 제도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루터는 작은 촛불을 켰는데, 그것은 그의 원래 의도를 훨씬 넘어서 칠흑같이 어두운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이라는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면서 멀리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1517년 10월 31일을 개신교 설립일로 기념한다. 금년 10월 31일은 루터 종교개혁 498년을 맞이하게 되며, 2017년에는 역사적인 500주년이 된다.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 아멘넷

루터의 회심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4)

 

젊은 수도사 루터의 고민 - “영혼의 구원 문제” 

 

젊은 수도사 루터가 고민하는 문제는 구원의 문제였다. 내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는가? 나같이 추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바로 루터의 마음과 생각을 억압했던 문제였다. 루터는 하나님께 열심히 고해를 했지만 자신이 지은 죄를 다 고백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였으며, 중세적인 공로 신학 체계 아래서 아직도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가운데 늘 영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성례와 행위에 의한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수준까지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 루터가 이해한 하나님의 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공로를 쌓아서 얻는 능동적인 의였고, 내가 의롭게 되는 의로움이었다. 루터는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즉 죄인인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는 알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 못했다. 

 

중세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교회가 규정한 어떤 일들을 행하라고 한다. 그래서 루터는 성실한 수도사로서 자신의 힘으로 선행을 쌓고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고행을 거듭하였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보려고 몸부림쳤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도 열심을 다했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교부들의 전통들과 교황청의 법령들에 집착했으며, 성인들의 공로에 의존했다. 

 

또한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성자들의 공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또한 성자들의 유물이나 유골 역시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이러한 유물들이 수없이 많고 거룩한 순교자들의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로마를 앙모했으며 다른 성자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구원을 이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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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하우스(원래 어거스틴 수도원 건물이었음)     © 뉴스파워 

 

루터의 로마 여행 

 

로마 교황청이 수도원을 중앙 집권화 하려 하자 수도원장 요한 폰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어거스틴파 수도원을 대표하여 로마로 파송하였다. 그리하여 1510년 가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파의 중요한 사명을 띠고 로마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는 큰 기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로마순례의 길을 향하여 떠났다. 그의 업무상의 여행은 동시에 로마 기독교 성지 순례가 되었다. 

 

로마는 성물을 포함하여 수많은 보화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나 교도들에게 로마 순례는 하나님의 큰 소망이자 특권이었다. 왜냐하면 성자들의 유해를 숭배함으로 큰 은총을 입기 때문이다. 로마의 칼릭스투스(Calixtus) 성당의 지하실에는 40명의 교황의 유해와 7만 6천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었다. 이러한 성물이 많은 로마를 순례하는 것은 루터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루터는 그러한 곳에서 수도단의 업무를 하면서 순교자들의 무덤 방문과 여러 성당에서의 미사 집행 및 참회, 지하 동굴과 유물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배운 대로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따라 1511년 로마 라테란성당의 ‘스칼라 산크타(Scala Sancta)’라는 거룩한 계단을 오르며 고행했다. 이곳은 28개의 대리석 계단으로서 ‘빌라도 계단’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오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는 라틴어로 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씩 오르면서 맨 위에 까지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나중에는 피멍이 들었다. 루터는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해 보았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나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기쁨이나 평강도 없었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다. 루터는 자기의 괴로운 영혼을 만족시킬 영적인 평안도 얻지 못했다. 

 

그때부터 루터는 순례나 고행이 

 

더 나아가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고위성직자들의 사치와 타락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으며, 또한 사제들이 사창가를 드나드는 모습과 로마에 만연한 부패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로마교회 사제가 매우 형식적이고 성급하고 경건함 없이 미사를 끝내 버리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였다. 로마 방문을 통해 받았던 루터의 인상은 로마는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타락하고 부도덕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죄책감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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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2년에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교     © 뉴스파워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루터 

 

1512년 29세가 된 해에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루터는 1502년에 세워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에서 신학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1513-1515년 까지 시편을 가르쳤고, 1515-1516년에는 로마서를 강의했다. 로마서 강의 이후에 루터는 1516-1517년 까지 갈라디아서를 가르쳤고, 1517-1518년에는 히브리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이 성경들은 장래 종교개혁자의 사상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 

 

수도사로서 시편 찬송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루터에게 첫 번째 선택으로서 시편 강해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영혼의 보물들로 가득하고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시편을 루터는 ‘작은 성경’이라고 불렀다. 그 시편에서 신앙의 영적인 교리를 많이 배우게 되었던 루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원수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의 삶과 태도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갈망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루터는 시편을 강해하면서 의한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별히시편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시 22:1-2, 시 31:1, 시 71:2)에 대해 많은 묵상과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죄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해석을 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어떤 죄인도 예외 없이 가혹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이해를 했으며 동시에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루터의 탑 체험 (tower experience)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음 

 

교수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살았다. 그 수도원의 탑 속에 난로가 딸린 그의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연구실의 이름을 따라 ‘탑 체험’이라 불리운다. 이곳에서 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적 해방’이라고도 한다. 사실 이 근본적이며 개혁적인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았던 탑 체험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사 학자들은 1513년에서 1515년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사실상 1517년 이후에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이해를 하면서 그 매듭을 푼 장소는 강의 준비를 위해 제공된 수도원 내 탑 안에 있는 자신의 따뜻한 공부방이었다는 것이다. 후에 이 탑은 비텐베르크 성의 부대시설을 확장하면서 없어졌다.

 

시편을 마치고 루터는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다. 1515-1516년 까지 강의했던 로마서 강해는 루터의 생애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다. 그가 로마서를 읽은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는 중에 핵심 단어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 문제로 오랫동안 영적으로 고투하여왔으며, 그동안 엄청날 정도로 루터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주제였다. 루터는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이 동시에 자비로우실 수 있는지를 고심하였다.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나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빛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밤낮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는 데 가장 핵심적인 성경구절은 로마서 1장 17절이다. 그는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연구하게 된 것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즉 칭의(Justification) 문제와 씨름하게 되었다.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이 루터로 연구하도록 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복음의 내용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제 서야 하나님의 의가 형벌 개념이 아니라 긍휼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의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요, 이 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선의요 호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복음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로마가톨릭의 오류는 선행을 열매가 아닌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인간은 선행을 통해서 더 나은 사람으로 되거나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선행을 해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인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산다는 것, 즉 인간은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붙잡게 되었다. 그는 복음을 참으로 이해하였다. 

 

성경에 계시된 내용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빛 아래서 보게 되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붙잡았다. 즉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셨음을 깨달았다. 이처럼 루터는 복음만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복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신칭의를 받는 것이 곧 구원임을 확신하였다. 드디어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의신칭의 교리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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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 거리     © 뉴스파워 

 

루터의 회심 -복음의 진리를 재발견함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의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고 그 의를 소유하는 수단인 믿음마저도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의를 깨달은 루터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았고, 십자가에서 사탄과 악한 영들의 머리를 깨트리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 얻어진 의라는 사실을 깨닫고 중세의 하나님의 의와 결정적인 결별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성취해야 할 요구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받아들이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성경의 새로운 계시의 빛이 비추자 모든 두려움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이신칭의의 신학이 루터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평안을 느끼고 영적인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의 고통의 매듭이 풀렸다. 그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기쁨이 넘쳐서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의를 통해 영혼의 평안과 삶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선포하셨으니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은 루터에게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늘의 보화가 되었고, 낙원의 문이 활짝 열려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은 종교 의식을 아무리 많이 행해도 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즉 수 백년 동안 잠자고 있던 복음의 진리를 다시 찾은 루터에게는 그때부터 성경 전체가 완전히 달리 보였다. 이것이 루터의 회심이다. 어떤 학자들은 슈토테른하임에서 루터가 벼락 사건으로 인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을 회심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은 탑 체험 사건을 ‘루터의 회심’이라고 부르고 싶다. 루터의 회심 체험은 중세적 경건을 뒤집었다. 곧 바로 종교개혁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USA 아멘넷

칭의 없이 성화 이루려한 루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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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루터     ©뉴스파워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문한 루터 

 

1505년 7월 2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우뢰로 인해 슈토테른하임에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루터는 2주 지난 7월 17일에 성 어거스틴 수도원 (Augustinerkloster)으로 들어갔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라고도 불리우는 성 어거스틴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수도원이다. 

  

에르푸르트에는 당시 약 2000 여개의 많은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루터가 입문한 어거스틴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적이며 개혁의식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었다. 또한 어느 수도원보다도 더 엄격한 계율과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이러한 수도원에서 루터는 허름한 의복과 소식, 기도와 명상, 낮 시간의 노동, 예배, 찬양, 미사, 고해성사, 매일의 의무, 음식을 조달하는 방법 등에 관 규칙들을 모두 감수할 것을 서약했다. 기독교 경건의 가장 고상한 형태인 수도원 생활에서 루터는 구원을 얻기 위해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의 수도원 서약은 제2의 세례이자 새로운 출발이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을 상세히 규정해 놓은 원칙을 정확히 가슴에 새겼으며, 수도원장이 그의 뺨 위에 입 맞추는 의식을 끝으로 1년간의 수습 수도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수도원 입교를 축하하는 행사에서 머리 중앙부를 삭발했고, 검은색의 수도원 복장을 착용했다. 수많은 수도원 규칙들을 기억하면서 루터는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기도와 시편 묵상, 성가, 독서, 미사, 하루 7번의 기도회 등을 마치고 밤늦게 취침에 들어갔다. 

  

특별히 루터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키는 수도원에서 루터는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고, 교육을 잘 받아 나갔고, 성경을 읽었다. 또한 그는 기도문도 열심히 암송했고, 자기 몸에서 귀신들을 축출하려는 소망으로 금식도 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했으며, 불을 지피지 않은 방의 추위도 견뎌 냈다. 그는 매일 정절, 청빈, 순종, 금식, 철야, 그리고 금욕적 극기까지도 하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갖은 노력과 애를 썼다. 그의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이 쌓여가는 증거인 것처럼 생각했다. 만약에 수도사 훈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루터는 틀림없이 천국에 갈 정도로 엄격한 수련을 쌓았다. 당시 루터는 얼마나 수행에 열심이었는지 만성 위장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여러 수도사들 중 가장 열심 있는 수도사였다.  

  

이처럼 루터는 자신이 구원 받는 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행이라도 실천했다. 루터가 그처럼 몸부림치며 자신의 죄를 보상해 보려고 했지만 이 모든 수고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리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인간의 구원문제에 대해 심한 갈등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의 엄격한 계율 속에서 기도와 찬송, 말씀묵상,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루터의 영혼에 대한 고뇌는 수도원에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부림은 더욱 심했다. 그는 불의했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셨다. 그동안의 충분한 공로와 충분히 쌓은 의로운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루터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였다. 그는 훗날에 깨닫게 되지만 당시에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성경에 없는 가르침과 관행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복음이라는 교회의 참된 보화를 은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그는 수도사의 과정을 마쳤다. 루터는 1505년부터 1511년까지 이곳에서 수도사로 머무른 것으로 유명하지만 젊은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었다.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루터의 만남    

 

1506년 4월 3일, 수도원에 들어온 지 9개월이 지난 후 루터는 요한 폰 슈타우피츠 (Johann Von Staupitz, 약 1468-1524) 원장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슈타우피츠는 중세 수도회의 최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루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슈타우피츠에게 자신의 크고 작은 죄를 모조리 고했다. 슈타우피츠는 일일이 열거하고 고백하고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관심을 개인적인 죄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놓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죄에 대한 고민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서 찾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 후 슈타우비츠는 루터에게 성경 연구에 매진하도록 인도하였고 특히 성경의 원전으로 씨름하게 하였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했다. 루터에게 정식으로 높은 수준의 신학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터는 이 수도원 생활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접하게 되었는데, 후일 루터 신학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론과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서 영적 스승이었고 사랑으로 길을 인도해 준 멘토 이기도 했다.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는 갈렙이 있었고, 위대한 전도자 바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고, 위대한 루터에게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있었다.  

  

루터가 사제 서품 받은 에르푸르트 대성당

 

수도사 과정을 마친 루터는 드디어 사제가 되었다. 에르푸르트 돔이라 불리어지는 성 마리엔 돔(Marien Dom)은 1278년부터 1400년까지 120여년에 걸쳐 지어졌으며, 위엄있게 에르푸르트의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뾰쪽한 첨탑을 자랑하는 독일 고딕 양식의 걸작품으로 에르푸르트의 랜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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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은 에르푸르트 대성당     ©김현배

 

건물 전면에 있는 70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대성당 내부는 숨이 막히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제단이 보인다. 이곳 대성당에서 루터는 1507년 2월 27일 부제로, 그해 4월 4일 가톨릭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신부가 된 사람은 이제 성만찬을 집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미사의 신비가 신부 루터를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사제 서품을 받은 후 5월 2일에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교회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교회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한 신부의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죄인이 감히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루터는 괴로웠고 공포에 휩싸였다.   

 

장래 종교개혁자로서 여러 고뇌의 과정을 거치는 루터

  

젊은 루터가 가장 혹독한 훈련을 받은 도시는 수도원으로 가득한 에르푸르트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장래 종교개혁자로서 다듬어지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어거스틴 수도원에서의 엄격한 생활은 22세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었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영적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만남을 통해서 신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지 2년 뒤, 그의 나이 24세 되었을 때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게 된 일은 파격적이었다. 또한 신부로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박사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 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장래 종교개혁자 루터는 준비되어 갔다. 루터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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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수도사로 들어간 어거스틴 수도원     ©김현배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신부 루터

  

루터는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수도사로서 엄격한 규율 속에서 혹독하게 자신을 훈련시켰다.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로서 미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루터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토록 갈망했던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루터는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과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음을 몰랐다. 

  

또한 인간이 행한 최상의 선행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냄새나는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6세기 루터의 치명적인 영적 문제는 계속 칭의와 성화를 혼돈하면서 칭의 없이 성화를 이루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18세기 존 웨슬리 역시 그가 회심 전에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신앙의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어떤 공로로 이루어지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했다. 

 

베를린=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마르틴 루터, 튀링겐에서 빛을 발하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2)

 

아이제나흐에서 젊은 루터의 고된 훈련  

  

독일의 중부 튜링엔의 아담한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는 루터 당시 4,500명의 아이제나흐 인구 중 400명 정도가 수도사내지는 수녀들이어서 성직자들의 서식처(Pfaffennest)로 블리워졌다. 이곳에는 루터의 외갓집이 있었고, 루터가 청소년 학창시절을 보냈다. 14살 청소년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뛰어났다. 그는 명문 귀족 집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류트(lute)를 연주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어느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부유하고 상류 귀족인 우르술라 코타 (Ursula Cotta) 부인은 루터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루터는 코타 부인의 사랑스런 섬김 속에 하숙생으로서 코타 하우스(Cotta Haus)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광산촌 서민 출신이었던 루터는 부유하고 교양있는 귀족들의 상류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으로서 루터는 이곳에서 1498년부터 1501년 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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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청소년 시절 보냈던 게오르겐교회     © 뉴스파워

 

루터가 학창시절에 행복하게 살았던 이 루터하우스 (Luther haus)는 후에 아이제나흐의 목사관으로 쓰여지다가 지금은 루터의 학창시절과 그 생애, 지역교회의 역사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루터하우스는 이 도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독일 전통가옥 (Fachwerkhaus)중 하나다. 또한 루터가 살던 집 옆의 거리 구석에는 작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고 그 밑에 다음의 글이 쓰여져 있다. "Und wenn ich wu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wurde ich doch heute ein Apfelbaumchen pflanzen".- Martin Luther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적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구절과 루터의 이름과 문장이 적혀있다. 우리가 대부분 이 말이 스피노자 (Spinoza, 1632-1677)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루터의 말이었다. 스피노자는 루터보다 뒤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스피노자가 인용했으리라 본다. 루터의 표현이 원조인 셈이다. 

  

또한 이 도시에는 1498년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게오르겐 교회(Georgenkirche)가 있는데 루터는 이 교회에서 약 3년 동안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당시 폰 카이저베르크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에 눈을 뜬 루터는 그 이후 광명의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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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청소년 시절 살았던 코타하우스     © 뉴스파워 

 

슈토테른하임 - “루터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신다. 심한 폭풍 가운데서 나타나서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축을 흔드는 천둥과 번개로 루터에 나타나셨다.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한 루터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먼 길을 걸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친구와 함께 들판을 걷고 있던 루터는 폭우를 만났고, 그때 옆에 있던 친구 (후에 알렉시우스라고 불려짐)가 천둥 번개 속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천둥 번개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하지만, 루터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벼락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벼락에 맞아서 죽은 한 친구의 죽음은 루터의 일생 중에서 가장 두려웠던 경험이었을 것이다. 번개가 번쩍하는 사이에 루터는 허겁지겁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평소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루터는 그만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만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온 몸이 떨리도록 느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다급한 심정으로 그는 성 안나를 향해 앞으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한다.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한 것은 그가 아직 주님과의 만남이 분명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1505년 7월 2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 루터의 서원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환경에 의해 일어났다.   

  

루터는 단 한 번의 벼락 사건 때문에 훌륭한 법률가가 되겠다던 인생의 목표를 일순간에 수도사로 바꿔버렸다. 루터는 결코 소명감에서 비롯된 결단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도사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의 체험은 루터 생애에 있어서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 루터처럼 우리들도 생의 전화점이 되는 슈토테른하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슴 설레이고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현장인 슈토테른하임의 주위는 넓고 푸른 들판이었다. 이곳에 이 위대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1917년 높이 2m의 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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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5년 7월 2일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은 것을 보면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루터의 기념비     © 뉴스파워 

 

루터의 서원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룩한 땅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에서 이곳에 떨어진 번개가 젊은 루터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2. Juli. 1505 

  

1505년 7월 2일

“도우소서, 성 안나여,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튀링겐에서 빛이 발하다

  

빛이 밝아오는 중세 암흑기 -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하다”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많은 전도자들의 복음 전파로 인해 타올랐던 복음의 등불은 중세기 유럽에서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중세 암흑기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진리가 완전히 가리어져 있었고, 교회들이 참된 영적 생명과 활력이 없었다. 교회가 부패한 상태로 타락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개신교 설교자가 없던 시기이며 그 누구도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오랜 동안 종교적인 불만 및 소란함이 쌓이고 쌓였다. 중세교회의 억압은 깨트려지고 닫힌 문이 열려져야 한다. 이제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행을 정화하여 철저하게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부패한 중세시대를 마무리 하시기 위해 젊은 루터를 고된 시련을 겪게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터는 신앙 교육과 삶의 시련으로 훈련되어져 가고 있었다. 경건한 평민에 속한 젊은 루터는 수준 높은 교육의 결핍과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의 얼굴은 더욱 더 강인해 졌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전투적인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는 무엇인가 살아있는 신앙을 원하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개혁이었다. 에르푸르트대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있던 루터는 벼락 사건으로 인해 법관으로서의 희망을 포기했다. 그의 부친은 루터가 수도사보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루터는 장차 법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키면서 결국 어거스틴 수도원을 향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사실상 루터의 종교개혁의 불은 슈톤테른하임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아멘넷

마르틴 루터, "나는 농부의 아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1)

 

시대적인 상황

 

중세시대 1,000년을 타락하고 부패한 암흑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러 가지 신학적, 교회적, 윤리적 악습들이 난무하고 진리가 어두워지고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온 유럽을 다스리고 있던 중세시대는 교황의 권세가 대단했다. 당시 교황권의 지배를 받던 모든 사람들이 교황 제도와 교황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불평했다. 독일 교회도 교황의 통치 아래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교황제도로부터 자유와 독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원했다. 이처럼 중세는 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권위로 가득했지만 어두움을 물리칠만한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제 어두운 중세시대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부르셨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개혁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큰 빛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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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레벤의 루터 생가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 생가 - 아이슬레벤

 

구워 먹을 수 없는 백조가 탄생한 곳, 루터 생가이다. 16세기의 중심 인물이 된 루터는 (Martin Luther, 1483-1546) 1483년 11월 10일, 과거 동독의 작센 지역인 아이슬레벤(Eisleben)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첫째 아들(혹은 둘째)로 태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날인 11월 11일 성 베드로- 바울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 받은 날이 교회력으로 ‘마르틴’ 성자를 기르는 날이어서 세례명으로 마르틴(Martin)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 베드로-바울교회는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세례대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루터가 태어난 지 6개월 쯤 되어 루터의 부모는 약간의 돈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큰 광산지역인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루터의 어린 시절은 혹독한 가난과 싸우던 시기였다. 그의 부모는 교육받지 못한 하급 신분으로 경제적 여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루터는 촌스러운 자신의 배경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평소 “나는 농부의 아들이며 (ich bin eins Bauern),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선조들은 모두 정직한 농민들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농민들의 사상과 감정과는 대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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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부모     ⓒ뉴스파워 김현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젊은 루터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훈련은 엄격한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교육 기술의 주요 수단은 체벌이었으며 루터의 부모도 매우 엄격한 훈육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루터가 약간만 잘못했어도 혹독한 체벌을 했기 때문에 루터는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 또한 학교에서도 교사들은 어린이들을 구타하면서 라틴어 초급 문법을 가르쳤다. 루터도 학교에서 매를 맞으며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아무리 루터의 어린 시절이 혹독했다 할지라도 그는 부모의 훈육이 오직 사랑 안에서 행해졌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경건한 기독교인 어머니 마가레테(Margarete)는 그를 어릴 적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가르쳤는데,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 루터는 요리문답,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그리고 라틴 문법과 독일어 찬송을 배웠다.

 

한편 아버지 한스(Hans Luther)는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여 만스펠트 백작의 법률고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육에 집념이 강한 아버지는 어린 루터를 라틴어 학교에 입학 시켰다. 그리고 루터가 14살이 되었을 때 부친은 그를 아이젠나흐에 있는 라틴어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 학교에서 루터는 종교, 도덕, 정확한 문법, 라틴어, 논리학, 웅변술, 시, 음악 등을 배웠다. 이런 과목들은 장래 루터가 신학자로서 활동과 종교개혁을 수행하는데 효과적인 기본 도구들이 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을 만스펠트, 막데부르크(Magdeburg),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등지에서 받았다.

 

1501년, 학문에 대한 열정이 점점 뜨거워진 18살의 루터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에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곳 대학에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인문주의 학문의 권위자들로 존경받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라틴어 실력이 탁월한 루터는 고전 라틴 작품들, 중세 철학, 스콜라 철학, 논리학, 변증법, 수사학, 물리학, 형이상학, 라틴어 성경, 고대의 고전에 대한 연구,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문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루터는 언어를 성령의 검을 보관하는 칼집으로 여겼으며, 대학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 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열의를 다하여 공부를 했고 좋은 성과를 얻었는데 4년 후인 1502년에는 인문학 학사학위를 받고, 1505년에는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루터는 그의 아버지의 큰 기대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법률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루터가 세속 법률 교육을 받도록 학비를 계속 지원했고, 심지어는 턱 없이 비싼 책인 법전까지 사 주었다. 루터는 1505년 부활절부터 법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터는 갑자기 법률 공부를 그만 두었다. 신기하게도 루터에게 돌연한 방향 전환이 생겼다. 루터는 같은 해 7월 17일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Augustinerkloster) 의 문을 두드렸다. 루터는 신학으로 기울어졌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새로운 그의 인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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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생가(박물관)     ⓒ뉴스파워 김현배

 

*김현배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국 부흥운동사를 공부했다. 현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을 맡아 유럽 재복음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이 있다.

 

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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