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회심-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4)
마틴 루터 2017. 1. 24. 02:49루터의 회심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4)
젊은 수도사 루터의 고민 - “영혼의 구원 문제”
젊은 수도사 루터가 고민하는 문제는 구원의 문제였다. 내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는가? 나같이 추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바로 루터의 마음과 생각을 억압했던 문제였다. 루터는 하나님께 열심히 고해를 했지만 자신이 지은 죄를 다 고백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였으며, 중세적인 공로 신학 체계 아래서 아직도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가운데 늘 영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성례와 행위에 의한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수준까지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 루터가 이해한 하나님의 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공로를 쌓아서 얻는 능동적인 의였고, 내가 의롭게 되는 의로움이었다. 루터는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즉 죄인인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는 알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 못했다.
중세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교회가 규정한 어떤 일들을 행하라고 한다. 그래서 루터는 성실한 수도사로서 자신의 힘으로 선행을 쌓고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고행을 거듭하였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보려고 몸부림쳤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도 열심을 다했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교부들의 전통들과 교황청의 법령들에 집착했으며, 성인들의 공로에 의존했다.
또한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성자들의 공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또한 성자들의 유물이나 유골 역시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이러한 유물들이 수없이 많고 거룩한 순교자들의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로마를 앙모했으며 다른 성자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구원을 이루고 싶었다.
▲ 루터하우스(원래 어거스틴 수도원 건물이었음) © 뉴스파워
루터의 로마 여행
로마 교황청이 수도원을 중앙 집권화 하려 하자 수도원장 요한 폰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어거스틴파 수도원을 대표하여 로마로 파송하였다. 그리하여 1510년 가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파의 중요한 사명을 띠고 로마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는 큰 기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로마순례의 길을 향하여 떠났다. 그의 업무상의 여행은 동시에 로마 기독교 성지 순례가 되었다.
로마는 성물을 포함하여 수많은 보화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나 교도들에게 로마 순례는 하나님의 큰 소망이자 특권이었다. 왜냐하면 성자들의 유해를 숭배함으로 큰 은총을 입기 때문이다. 로마의 칼릭스투스(Calixtus) 성당의 지하실에는 40명의 교황의 유해와 7만 6천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었다. 이러한 성물이 많은 로마를 순례하는 것은 루터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루터는 그러한 곳에서 수도단의 업무를 하면서 순교자들의 무덤 방문과 여러 성당에서의 미사 집행 및 참회, 지하 동굴과 유물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배운 대로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따라 1511년 로마 라테란성당의 ‘스칼라 산크타(Scala Sancta)’라는 거룩한 계단을 오르며 고행했다. 이곳은 28개의 대리석 계단으로서 ‘빌라도 계단’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오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는 라틴어로 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씩 오르면서 맨 위에 까지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나중에는 피멍이 들었다. 루터는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해 보았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나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기쁨이나 평강도 없었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다. 루터는 자기의 괴로운 영혼을 만족시킬 영적인 평안도 얻지 못했다.
그때부터 루터는 순례나 고행이
더 나아가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고위성직자들의 사치와 타락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으며, 또한 사제들이 사창가를 드나드는 모습과 로마에 만연한 부패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로마교회 사제가 매우 형식적이고 성급하고 경건함 없이 미사를 끝내 버리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였다. 로마 방문을 통해 받았던 루터의 인상은 로마는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타락하고 부도덕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죄책감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 1502년에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교 © 뉴스파워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루터
1512년 29세가 된 해에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루터는 1502년에 세워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에서 신학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1513-1515년 까지 시편을 가르쳤고, 1515-1516년에는 로마서를 강의했다. 로마서 강의 이후에 루터는 1516-1517년 까지 갈라디아서를 가르쳤고, 1517-1518년에는 히브리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이 성경들은 장래 종교개혁자의 사상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
수도사로서 시편 찬송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루터에게 첫 번째 선택으로서 시편 강해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영혼의 보물들로 가득하고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시편을 루터는 ‘작은 성경’이라고 불렀다. 그 시편에서 신앙의 영적인 교리를 많이 배우게 되었던 루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원수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의 삶과 태도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갈망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루터는 시편을 강해하면서 의한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별히시편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시 22:1-2, 시 31:1, 시 71:2)에 대해 많은 묵상과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죄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해석을 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어떤 죄인도 예외 없이 가혹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이해를 했으며 동시에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루터의 탑 체험 (tower experience)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음
교수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살았다. 그 수도원의 탑 속에 난로가 딸린 그의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연구실의 이름을 따라 ‘탑 체험’이라 불리운다. 이곳에서 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적 해방’이라고도 한다. 사실 이 근본적이며 개혁적인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았던 탑 체험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사 학자들은 1513년에서 1515년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사실상 1517년 이후에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이해를 하면서 그 매듭을 푼 장소는 강의 준비를 위해 제공된 수도원 내 탑 안에 있는 자신의 따뜻한 공부방이었다는 것이다. 후에 이 탑은 비텐베르크 성의 부대시설을 확장하면서 없어졌다.
시편을 마치고 루터는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다. 1515-1516년 까지 강의했던 로마서 강해는 루터의 생애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다. 그가 로마서를 읽은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는 중에 핵심 단어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 문제로 오랫동안 영적으로 고투하여왔으며, 그동안 엄청날 정도로 루터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주제였다. 루터는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이 동시에 자비로우실 수 있는지를 고심하였다.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나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빛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밤낮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는 데 가장 핵심적인 성경구절은 로마서 1장 17절이다. 그는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연구하게 된 것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즉 칭의(Justification) 문제와 씨름하게 되었다.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이 루터로 연구하도록 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복음의 내용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제 서야 하나님의 의가 형벌 개념이 아니라 긍휼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의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요, 이 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선의요 호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복음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로마가톨릭의 오류는 선행을 열매가 아닌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인간은 선행을 통해서 더 나은 사람으로 되거나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선행을 해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인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산다는 것, 즉 인간은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붙잡게 되었다. 그는 복음을 참으로 이해하였다.
성경에 계시된 내용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빛 아래서 보게 되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붙잡았다. 즉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셨음을 깨달았다. 이처럼 루터는 복음만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복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신칭의를 받는 것이 곧 구원임을 확신하였다. 드디어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의신칭의 교리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 비텐베르크 거리 © 뉴스파워
루터의 회심 -복음의 진리를 재발견함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의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고 그 의를 소유하는 수단인 믿음마저도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의를 깨달은 루터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았고, 십자가에서 사탄과 악한 영들의 머리를 깨트리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 얻어진 의라는 사실을 깨닫고 중세의 하나님의 의와 결정적인 결별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성취해야 할 요구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받아들이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성경의 새로운 계시의 빛이 비추자 모든 두려움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이신칭의의 신학이 루터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평안을 느끼고 영적인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의 고통의 매듭이 풀렸다. 그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기쁨이 넘쳐서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의를 통해 영혼의 평안과 삶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선포하셨으니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은 루터에게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늘의 보화가 되었고, 낙원의 문이 활짝 열려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은 종교 의식을 아무리 많이 행해도 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즉 수 백년 동안 잠자고 있던 복음의 진리를 다시 찾은 루터에게는 그때부터 성경 전체가 완전히 달리 보였다. 이것이 루터의 회심이다. 어떤 학자들은 슈토테른하임에서 루터가 벼락 사건으로 인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을 회심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은 탑 체험 사건을 ‘루터의 회심’이라고 부르고 싶다. 루터의 회심 체험은 중세적 경건을 뒤집었다. 곧 바로 종교개혁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김현배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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