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니 인터콥의 최바울씨처럼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설교는 이미 성경을 뛰어넘는 자기설교일 뿐이라고 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웬만한 사람들이 들을 땐 신선하기도 하고

아. 그거였구나 무릎을 탁! 치는 성경풀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설교들이다 ㆍㆍㆍ

마치 신천지를 처음 만났을 때 가르치는 비유풀이들이

사람들의 귀를 ㆍㆍㆍ놀랄만하게 만드는 것처럼ㆍㆍ^^ . .


평소 우리는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고만 읽어 왔는데

김목사는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셔서 쉬기도 하고

숨기도 하고 계속 기도도 하신다고

속시원하게 읽어주니 이 얼마나 신선한가!! ㆍㆍ^^ . ....ㆍ

참 어이없는 설교다ㆍㆍㆍ


김목사가 죽기 전엔 500명이던 교인 수가

고인예배가 있고부터는 700명으로 더 늘었다고 한다 ㆍㆍㆍㆍ참 어이없다.

앞으로 김목사는 서머나교의 교주로 승격될 가능성이 많다 ......^^


김목사는 서울대를 나왔다고 한다 머리가 좋을 것이다

그 머리좋다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것은

예수를 전혀 못믿거나 성경을 뛰어넘는 해석들을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는 게 병이다


내 경우 그의 설교는 마치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고

짜증이나서 도저히 들을 수가 없던데

그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열광하고

인터넷을 통해 듣는 사람들이 그리 많다고 하니

어쩌면 기존의 교회들을 때리고 까부수는 것에 대한 희열 때문은 아닌지ㆍㆍ

참 암담하다 ㆍㆍㆍ^^
개혁한다고 앞으로 목사님들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설교를 할 날도 머잖았다ㆍㆍ^^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 채 님

인터넷을 통해서 배우 차인표 씨가 간증하는 것을 보았다

크로싱 얘기가 나오는 것을보니 꽤 오래 전 쯤인것 같았다
그는 조금은 흥분 된 어조로 그동안 북한 인권에 침묵한 한국 교회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했다
목소리가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몇만명의 탈북자들을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통일후 쏟아져오는

몇천 만명을 어찌 사랑할거냐고 따지듯
다그치며 회개하라고 한국교회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은 맞는 듯 하면서도 틀린 말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그는 잘못 알고 있다
6.25 이후 몇 십년 동안 북한의 자유와 민족의 자유통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한 곳이 있다면

한국 교회 밖엔 없다
새벽이고 밤이고 낮이고 모여서 기도할 때 오직 빠뜨리지 않고 기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동포를 위한 남북자유통일이었다


기도원에서 교회에서 성도들이 외친 것은 오직 남북자유통일이었다
교회는 왜 그랬는가?
공산주의가 왜 생겼는가 그것은 기독교 말살을 위한 사상이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이다
도저히 합할 수도 나란히 앉아있을 수 없는 것일 뿐이다


한기총이 생긴 이유도 교회는 공산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내세운 반공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릴 땐 나도 군사독재네 뮈네 떠들면서 박대통령을 유난을 떨며 싫어했다
지금에서 그를 낱낱히 추적해보니 그는 5천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가였고 애국자였다
난 세종대왕보다 오히려 박정희대통령을 더 지지하고 존경한다 누가 손가락질을 하던말던 ㆍㆍㆍ

지금은 그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들을 나는 조롱한다
ㆍㆍㆍ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박대통령의 새마을사업은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이용해서 성공한 사업이다
그는 또한 당시에 기독교계의 가나안 농군학교를 통해서 국민들을 단련하고 교육했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그곳을 거쳐가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기독교를 통해서 박대통령의 정치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가 예수를 믿었다고는 말 할 수 없겠지만ㆍㆍㆍ
그만큼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나 국민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봐야한다
우리교회만 해도 목사님의 축도속에서

지금까지 나라와 민족과 통일을 위한 기도를 빠뜨리는 것을 듣지 못했다
ㆍㆍㆍ
그리고ㆍㆍ뜻하지 않게도 민주투사라는 이가 대통령이 되고

햇볕정책이라는 귀신 씨나락까먹는 것이 등장하면서

남북의 통일이 가까워 온 것처럼 온 국민에게 약을 먹이더니

북한을 욕해도 안 되고 비난해도 안되고ㆍㆍ안되고 안되고ㆍㆍㆍ

교회들은 다투어 북한에 도움이 되고자 물질적인 것들을 퍼나르고

뭐든지 얘기만 하라는 식의 물자와 돈을 주고ㆍㆍ주고ㆍㆍ주고
ㆍㆍㆍ지금보면 교회가 그들에게 이용만 당한 셈이다
지금도 북한인권이나 탈북자를 위한 배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곳은 정부와 교회밖엔 없다
그 어느 개인들이나 단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있냐는 것이다
없다ㆍㆍ없다ㆍㆍ
차인표 씨는 온교회가 다같이 일어나서 북한인권을 위해 외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나간 말이다 나로선 그럴 필요는 굳이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ㆍㆍㆍ
차인표 씨야말로 몇 십년동안 북한주민과 남북자유통일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나 묻고싶을 뿐이다
혼자 궁시렁ㆍㆍ궁시렁ㆍㆍ*****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독자의 소리" 글/ 채 님

 

영화 제 3 성전의 한 장면 중에서

 

 

 

 

유대인들이 쓴 시온의정서를 보면 이 시대의 마지막 적그리스도는 아마도 유대교에서 나올 확률이 높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입장이며 그들이 메시아가 왔다고 떠들 때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덕수궁 뒤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몇년 째 공산국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자주 전시한다
이유는 박원순시장이 친북성향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조총련들의 그림이 주류를 이룰 때도 많다)
몇 년 전엔 이스라엘인들이 독일을 저주하며 앞으로 독일로 진출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겠다는 각오가 담긴 그림과 동영상을 보여 주는 전시회가 있었다
보기에도 너무너무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내용들이어서 별관심없이 보긴 했는데 마치 이스라엘이 공산국가라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각오와 결의가 가이 대단했다

그들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제3성전을 지으려고 한다
신사도운동권들은 여기저기 아직도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는데 물심양면으로 돕는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과거 한국의 운동권들이 현재 햇볕정책을 지지하며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도와서 북한이 핵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신사도운동권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적그리스도를 빨리빨리 불러들이는데 협조하는 상황이 아니고 무엇인가
앞으로 제3성전에 앉아 경배를 받을 적그리스도에게 그들은 절을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자다 세계적인 부자다
그들이 예수를 믿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앞으로 제3성전을 세우는데도 신사도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줄 게 뻔하다

앞으로 신세계정부가 나온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세우는 정부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만든 것이다
미국이 아닌 것이다
돈많고 머리좋은 유대인들은 못할게 없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됐던 이스라엘인들의 유럽을 향한 저주와

위협은 이미 시온의정서에 나와 있던 계획이고 작정이었다
그들의 인간에 대한 분노와 분개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지 오래였다
그들에겐 오로지 세계인들에 대한 복수의 신념 뿐이다
아울러 앞으로 모든 종교는 유대교 밑에서 울어야 할 것이다
특히
흔히 말하는 7년 대환난이 있다면 그것은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양상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없애려고 하는 상대가 바로 크리스찬들이기 때문 ㆍㆍㆍ
666표가 있다면
그것은 세계금융권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금융권들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횡포가 될 것이다
ㆍㆍ이러고보니 내가 대예언을 해버렸네 ㆍㆍㆍ^^
휴우웃ㆍㆍㆍ^^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 채

물처럼 사는 것이 현명한 삶


노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상의 방법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르는 물
그 물의 진리를 배우라는 것이다

첫째: 물은 유연하다
물은 네모진 곳에 담으면 네모진 모양이 되고
세모진 그릇에 담으면 세모진 모양이 된다

이처럼 물은 어느 상황에서나
본질을 변치 않으면서 순응한다

둘째: 물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물은 평상시에는 골이진 곳을 따라 흐르며
벼 이삭을 키우고
목마른 사슴의 갈증을 풀어준다

그러나 한번 용트림하면
바위를 부수고 또한 산을 무너뜨린다

셋째: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물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드넓은 바다이다

사람도 이 물과 같이 모나지 않고
유연하게 다양한 사람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정의 앞에
주저하지 말고 용기 있게 대처하며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겸손하게 자기자신을 낮추는
현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좋은글 中에서 -

 


교회에 가라지가 있는가?

짐보 

교회에 가라지가 있는가?
일단 가라지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태복음13:38-39]
의 성경을 인용하여 제 주장을 하면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를 가시적인 교회(지상교회)에서
성도와 거짓성도(가라지)와 함께 있지만 심판 때에는 구별되어
참 성도는 천국에 거짓 성도는 지옥에 던 질것이라 가르치신다.“
반대 의견은
밭=세상 이라 밭=교회가 아니라는 의견이다.
그럴까 그럼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들(거짓 성도) 은 인정하시는가?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세상과 교회 그리고 가라지를 의미하며 읽어보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1. The Son of man shall send forth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out of his kingdom all things that offend, and them which do iniquity;
마태복음 13:37-43]
가라지는 마태복음13:24-40에 단 한번 언급만 있고
여기서 ‘아버지 나라=his Kingdom'을 주목하고.

겨자씨 비유를 보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가 나무 같이 자라나서 공중의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를 하는데
여기서 ‘자기 밭’이 나옵니다.
[Another parable put he forth unto them, saying,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KJV에서는 'in his field' 로 묘사합니다.
밭 = 교회다? 무리?
비유를 바라보는 표현을 주목하고
*마태-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 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32
*누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13:19
*마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일  만큼 되느니라
But when it is sown, it groweth up, and becometh greater than all herbs,            
and shooteth out great branches; so that the fowls of the air may lodge under the shadow of it. 4:30-32, KJV 32
겨자씨를
누가-(나무)가 되어
마가-(풀보다 큰 가지)를 내며
마태-(나무)가 되매

여기서 마태를 소개하면
마태(Matthew)는 직업은 천한 자로 살인자 같이 취급받는 세리였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이 그를 세관에 까지 찾아가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와 예수님의 만남도 바닷가도 회당도 아닌 가버나움의 세관에서다.
그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를 예수님의 족보를 (마1:1-16,2:5-6,26:3)
그는 구약의 수많은 책들을 인용할 만큼 학식이 있었고
종족인 유대인에게 복음과 예배를 가르쳤다.
복음서중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와 해석(13:24-30,36-43)는 마태복음만 있다.
이외도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13:44), 진주의 비유(13:45-46)
물고기 그물의 비유(13:23-35), 포도원 농부의 비유(20:1-6)
두 아들의 비유(1:28-32), 열 처녀의 비유(25:1-13)
최후 심판의 비유(25:31-46)
은 마태복음만 나타나는 아홉까지 비유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천국(Kingdom of Heaven)의 사용하여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을 -
그 비유의 핵심은 천국이라 할 수 있다.
네 복음서중 유일한 아홉까지 비유는 마태복음의
‘그리스도(메시아)-유대인의 왕-다윗의 자손 등으로 쓰여 있음은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으로 의해 성취된 것 을 강조하고
유대인의 전통의식을 생략한
마태복음은 특징은 유대인을 위하여 써진 복음서라
“하나님 나라” 가 아닌“천국”으로
“종말”을 특별히 마태복음에만 “교회”라는 명칭이 있다.(16:18,18:17-18)
정리하면 불완전한 교회의 모형이 천국이고 종말에는 진정한 천국이 임한다는.
세리로서 숫자에 민감한 시각으로 그 임함의 진행(성장)을 보았기에.
열 처녀의 비유처럼 돌연히 임하는 천국을.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는 비유와 알곡과 가라지 비유 등
서서히 성장하는 천국을.
가라지가 밀과 비슷하나 이삭이 나면 구별이 뚜렷해지듯이
교회(지상교회)에서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종말(심판)을
그리고 천국(완전한 교회)을 강조했다.

이제 시각을 넓혀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들(거짓 성도)이고
좋은 씨를 부리는 이는 인자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이 마귀는 처음 에덴동산에 가라지를 뿌렸고
아담의 하와의 가정에 가인에서 뿌려졌고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스마엘이
이삭의 가정에 에서가....등
마귀는 열두제자 중 가롯 유다를 가라지로 뿌려 사도들과 함께 자라게 하였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열두제자 중에서
마귀는 공통되게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자라게 가라지를 뿌려놓는다.

다시 13장10-11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냐 물어본다.
예수님의 대답은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but not to them]
여기서 ‘천국의 비밀’은 복음을 이야기 하고
‘씨’는 마태가 이야기 하는 예수님의 천국(Kingdom of Heaven)의 비유고
씨 “알곡”이다.
‘그들 에게는 아니되었나니 -but not to them' 그들은 ‘가라지’이고
‘알곡과 가라지’는 밭에=교회에 뿌려졌고 이 세상에 속한다.

문자 그대로는 밭=세상이기도 하지만
밭이 세상이라 하신 이유는 세상에 속하여 존재하는 교회를 이른 거로
초대교회와 교부들이 해석하였고 그것이 전승이며 유래로 알고 있다.
초대교회가 태동하고 삼백년이 넘어서야 교회의 건물이 지어졌고
그 전까지는 가정교회로 가시적으로 교회와 세상이 구별됨이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밭을 교회로 여겼다.
“어거스틴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들을 헌용하면서
교회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했다.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분은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때인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적,
가시적 교회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이긴 하지만
이는 "섞인 몸(corpus permixtum)"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인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verum)"과
"위선적인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simulatum)"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서, 교회가 "섞인 몸"이기 때문에
"신비적인 몸(corpus mysticum)"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들에서 등장하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및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비유(마 13:47-50)들을 전형적인 예로 삼았다.
나쁜 부류들과 좋은 부류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가서 주님에 의해 분리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최종적인 판단자들(final judges)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교회가 성결하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며,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지 모든 구성원들이 성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communio peccatorum)였으나,
믿음으로 성도들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가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주름과 흠이 없는 교회(엡 5:27)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다.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Augustine)의 성서해석 김 영 도 목사“

마귀는 가정에서
사회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존경받는 자로
교회에서 의와 열정이 넘치는 광명의 천사 같은 일꾼으로 지도자로
카멜리온과 같이 위장하는데 최고 선수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지상교회는
성령으로 중생한 참성도와 거짓성도가 공존하는 교회이다.
가라지같은 거짓된 성도는 평상시에는 알곡 같이 위장을 하였기에 구별하기 어려우나
결정적인 시가가 오면 거짓일꾼으로 거짓목사로 거짓 그리스도인 인 본색을 드러내기에
구별된 교회 밖의 세력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색으로 위장하여 해독을 암암리에 퍼트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교회의 복음을 변절시키거나 퇴색시켜
분열과 분쟁을 파탄(破綻)을 일으키어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을
그들의 이권으로 장악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함은
성경의 말씀이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익히 경고하였다.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숫한 변절자들과
지난 교회의 교회사가 이를 뒷받침 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제,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보면
서머나 교회-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연약하지만 충성된 교회는 칭찬을 받았고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받았다.
이 일곱 교회의 모습이 가시적인 현대교회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시고도
나중에 사도바울을 부르신 까닭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대답이 다 같을 순 없더라도 그가 틀림없는 위대한 사도였다.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하였지만 우리가  정확히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헤아린다는 건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정의하는 교회” 를 주장하신 분들
님들의 믿음과 신학과 교회는 완벽합니까?
하나님의 관점....?
= 하나님의 시각....?
세상에는 완벽함이 없습니다.
완벽한 지상교회도
완벽한 성도도.

위대한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
그도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안다는 고백을 하며
그의 태도는 겸손합니다만
이곳에 누가 잘못된 성경의 해석을 하거나 인용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은혜를 입은 자라면, 긍휼로 살아가는 자라면
좀 더 친절히 설명해 서로의 믿음을 확증하고 확정하는 진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면 좋으련만.
사랑이 없다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 유익이 없습니다.

제 주장은 이글로 마칩니다.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넉넉한 믿음의 장이 되어 토론하고
이제는 새로운 분들의 글을 보는 신선한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화해를 선포하기(Claiming Our Reconciliation)

어떻게 우리는 화해를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셨다는 진리를
우리 자신이 선포함으로써 화해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의 머리로 믿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화해의 진리가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새 심장과 새 영혼, 볼 수 있는 새 눈과
들을 수 있는 새 귀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믿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치유의 권능을
그들(사람들)에게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것을 믿고 또 우리의 마음,
심장 그리고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완전히 믿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또한 화해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금방 자기 의심과 자기 거부로 빠져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진실로 화해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의 상상(God's Imagination)

우리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입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많은 자원이 서로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우리 힘을 유지하거나 확장하기 위하여,
그들이 갖고 있는 특권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쓰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빈곤이 존재할까요?
범죄와 전쟁이 존재할까요?
이제 사람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경쟁심이나
적대감이 없으며, 비통함이나 복수도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손을 마주잡고
하나의 커다란 사랑의 원을 만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어" 라고 우리는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내가 상상하고 있는 바야
태초에 그렇게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나의 상상 속에 살고 있는
바로 이 커다란 하나의 세계!!" 라고 말씀하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묵은 상처 내버리기(Letting Go Old Hurts)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묵은 상처를 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당신이 나에게 한 것, 즉 나의 가족에게 한 것,
나의 조상에게 한 것, 또는 나의 친구에게 한 것을
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은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말을하지 않더라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기억은 수십 년, 심지어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복수를 다짐합니다
사람들의 실수에 대하여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뚫을 수 없는 장벽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5:17~18)

참으로 우리는 옛 감정을 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고린도후서 5:19)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신 하나님이 "화해의 말씀"
(고린도후서 5:19)을 우리에게 맡기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 화해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묵은 상처를 내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가장 경청해야 할 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다른 사람에게 안전한 장소가 되기
(Being Safe Places for Others)

우리가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들을 드러내 놓고
만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으며
또 사람들을 갈라놓는 벽을 허물어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사랑하도록 초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논해야 할 일을 숨기지 않고,
또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지 않으며, 자신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얻고자 하는 의사가 없으면,
그리고 우리가 오직 바라는 것은 평화와 화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면, 그들은 자신의 무기를 현관 문에
내려두고 적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내면의 자유와 용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의 화해 사역은 우리 자신이 그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을 때 더 빈번히 일어납니다. 우리의 단순하면서도
남을 판단하지 않는 태도가 화해를 기져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끝이 없는 사역(A Ministry That Never Ends)

화해는 싸움이 해결되고 평화가 온 것과 같은
일회적인 시간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해의 사역은 문제의 해결, 중재 그리고 평화 협정을
초월하여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에 화해가 필요 없는 순간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과 마음속에 무수한 적대적인 생각과
느낌을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부모일 수도, 자녀들일 수도,
'친근한' 이웃일 수도, 생활 양식이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또는 행동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또는 행동하지도 않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들' 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화해가 필요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판단하지 않는 태도(A Nonjudgemental Presence)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화해의 심부름꾼이 될 수 있습니다

화해를 도모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판단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판단하고 정죄하고 평가하고 분류하고
또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그 사람들의 잘못된 점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를
지적해 주기 위하여 돌아다닌다면, 우리는 분열을 더 조장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남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말아라...남을 용서하여라..."
(누가복음 6:36~37)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는 세상에서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판단하지 않는 태도는 심오한 영적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이며
화해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쉽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어둠 속의 빛(Light in the Darkness)

우리가 "죽음과 같이 어두운 골짜기" 를 걸어가도(시편 23:4)
두렵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십니다(시편 23:4 참조)

이것은 단순히 위안을 주기 위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의 경험입니다

우리 생애는 고통, 아픔, 환멸, 상실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애에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까지 번쩍이듯" (마태복음24:27)
 다시 오신다는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 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고, 크게 들으며, 그리고 깊이 느끼는
그 순간순간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어둠을 뚫고 빛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4~16)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화해의 과제(The Task of Reconciliation)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화해입니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사람들 간에 분열을 목격합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도시에서, 국가내에서,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에... 이 모든 분열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품안에서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뭉쳐져 있다는 진리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 일상 생활의 현실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했기 때문에 화해하는 사역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사람들 간에 화해를 이끌어 낼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기(Holding On to the Christ)

      우리의 생활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루는 행복하고 다음날은 슬프고. 하루는 건강하고
      다음날은 아프며, 하루는 부자이고 다음날은 가난하며,
      그리고 하루는 살았는가 하면 다음날은 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의 바위이시며, 우리의 성체이시며,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형제이시며,
      우리의 안내자이시며, 그리고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의 문을 여시려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 나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환영하기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바울과 함 께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지옥의 권세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로마서 8:38~39)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예수님의 마음(The Heart of Jesus)


      예수님은 연약한 어린아이이시고, 겸손한 설교자이시며,
      업신여김을 받은 사람이시고, 거절당한 사람이시며,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전에 계신 분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5,17)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조롱당하신 왕이시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권자에서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주님이시고,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처음이고 끝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저주를 받았으나 하나님으로부터는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쳐다 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처형받은,
      그리고 영광스럽게 된 가슴 안에서
      그분의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 자신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경험 (An Expierece Offered to All)

        어떤 사람들은 "나는 때가 찼다는 경험을 해본 일이 없어... 나는 그저 보통 사람이야 신비주의자가 아니야" 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하여 독특한 경험을 했으며 따라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해야 할 독특한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배운 사람이든
        또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또는 가난한 사람이든, 돋보이는 사람이든 또는 돋보이지 않는 사람이든, 우리 모두는 때가 되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 신비한 경험이 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만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선물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내면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정된 때의 경험이 극적인 방법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빛 속에서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사도행전 9:3~4 참조)>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속삭임처럼 미세한 음성 또는 등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미풍과 같이 오기도 합니다(열왕기상 19:13 참조)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알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정상의 경험(The Mountaintop Experience)

        어떤 순간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주위에서
        완전한 연합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산 정상에 올라가
        주위의 경치에 매혹될 때, 이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출생의 증인이 될 때,
        또는 친구의 죽음의 증인이 될 때도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또한 친밀한 대화를 나누거나 가족과 함께
        식사할 때도 이런 경험합니다 교회 예배중에 또는 조용한 방에서
        기도드리다가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을 경험할 때마다, 또 어떤 식으로 경험하든,
         "바로 이거야..모든 것이 잘 맞아....내가 바라던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어" 라고 우리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다볼산 정상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입니다
        이들은 산 정상에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분의 옷이 희어져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했습니다(누가복음 9:28~36 참조)
        이것이 바로 때가 찬 것을 맛보는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순간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지고,
        또 모든 일이 공허하고 쓸모 없는 것같이 보일 때도
        이런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참으로 은혜스런 순간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때가 차매(The Fulness of Time)

        예수님은 때가 차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때가 차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때가 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시간이 비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내일, 내주, 내달 또는 내년에 참으로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우리는 때가 된 것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그 밖에 함께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한 연합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갈라디아서 4:4)

        그리고 하나님은 "때가 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에베소서1:10)
        때가 차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두 번째 죽음(A Second Death)

        지옥은 두 번째 죽음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1:8 참조)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옥을 두 번째 죽음으로 이해하면 중세의 예술품과 문학 작품에
        잘 묘사되어 있는 영원한 고통과 고문과 같은
        이미지는 사라져 버립니다 중세의 작품은 지옥을
        잘못된 행동에 대한 벌이라기보다는 생명의 선택을
        거부한 것이라는 점에 더 치중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요한계시록이 열거하고 있는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온갖 죄는 살인자와, 우상 숭배자와,
        음란한 사람과, 모든 거짓말쟁이와 같이 죽음을 선택하는 죄입니다
        (요한계시록21:8)

        우리가 죽음을 심으면 죽음을 거둡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심으면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심는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랑을 거절하는 자유
        (The Freedom to Refuse Love)

        흔히 지옥은 벌을 받는 장소로 그리고
        천국은 상을 받는 장소로 묘사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를 체포하거나 또는 잘못이 클 때는
        형무소로 보내는 경찰관이라고 생각하도록,
        아니면 우리의 모든 선행을 헤아려서
        크리스마스 때 우리의 양말에 선물을 넣어 주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쯤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찰관도 아니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또는 순종하지 않는 가에 따라서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도 하고,
        지옥으로 보내시기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오직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미움도, 복수심도,
        또는 우리가 벌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기를, 치유해 주시기를,
        회복해 주시기를, 끝없는 자비를 보여 주시기를,
        그리고 우리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 것처럼
        하나님도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것인가,
        개인의 선택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지옥의 복음(The Good News of Hell) 지옥이 있는 것입니까?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은 선악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데 자유로우면 우리는 또한 악을 행하는 데도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아니오" 라고 대답할 가능성도 또한 존재합니다
          따라서 천국이 있으면 지옥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 의사에 따라 택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이 신비함을 지키기 위하여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옥에 관한 생각은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로봇이나 자동 인형이 아닙니다
          로봇과 자동 인형은 선택권이 없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결국은 그 끝이 동일하게 됩니다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우리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의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은 최후까지 하나님에게 "아니오" 라고 부정한 것에 대한 쓴 열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비젼을 예견하기(Anticipating the Vision)

        모든 폭력을 극복하고, 그리고 모든 남녀노소가
        자연과의 사랑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평화로운 나라의 비전은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현실 도피적 꿈을 꾸기보다는, 비전이 약속하는 것을
        예상해 보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우리가 어린아이를 웃게 할 때,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페풀 때,
        우리가 꽃다발을 만들고, 가축과 야생 동물을 돌보며,
        환경 오염을 방지하며, 우리의 집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그리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는 비전을
        현실로 이루어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비전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비전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비전이 이루어지게 하는 에너지를 발견합니다

        이 아름다운 비전은 우리를 현실 도피자로 만들지 않고
        현실에 진정한 참여자로 정진하게 만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비젼에 활력을 불어넣기 (Energizing Visions)

        온 인류의 궁극적인 평화,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조화에 대한 커다란 비젼은 단지 유토피아적인 동화에 지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전은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갈망과 일치하며, 그리고 온갖 거짓과 기만을 뛰어넘어 드러내 보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진리와도 합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을 튼튼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비전이 있으면, 절망이 우리 눈앞에 다가왔을 때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삶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을 때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으며, 의구심이 더 논리적인 태도로 생각될 때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비전이 없으면, 커다란 장애물과 고통스러운 실패를 극복게 하는 힘을 주는 우리의 성취 의욕이 무디어지고, 우리의 생활이 재미없어지며, 지루해지고 그 리고 결국에 가서는 파괴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비전은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결코 받지 못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새 하늘과 새 땅(A New Heaven and a New Earth)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통합적 사역의 비전을
        예견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도 이사야와
        비슷한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변화되었으며 또 이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부가 되기 위하여
        불멸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보좌에 앉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보아라,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전에 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3~4)

        이사야와 요한은 둘 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모든 피조물의 회복(The Renewal of the Creation)

        우리의 마지막 귀향은 우리 자신들과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완전한 자유는
        이 땅 전체의 자유가 되며, 또 부활 속의 완전한 회복은
        전 우주의 회복을 포함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전체 창조 질서를 새 생명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출산을 위해 신음하고 있는 여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한 것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도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8:20~21)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올려질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평화의 나라(The Peacable Kingdom)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품안에 함께 있습니다
            궁극적인 비전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연합 가운데 살도록 부름받은 형제 자매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완전한 조화 가운데 연합을 이루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비전을 실천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 새끼가 함께 먹으며

            어린아이들이 그것들을 돌볼 것이다

             

            그리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곁에서 놀며

            어린아이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에는 해로운 것이나

            악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이 세상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11:6~9)

            우리는 이 비전, 주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마음이

            늘 살아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God's Timeless Time) 죽은 뒤에는 '뒤' 가 없습니다
          뒤나 앞과 같은 말은 우리의 유한한 생애,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사는 우리의 생애에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무한한 시간을 뜻하는 하나님의 '시간' 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므로 내세에 관한 추측은 단순히 추측일 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면, '처음' 도 없고 '뒤' 도 없으며,
          '여기' 도 없고 '저기' 도 없으며, '현재', '과거' 또는
          '미래' 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더 이상 시간 속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종말,
          육신의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제는 시간에 의하여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뢰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복귀하기(Restored to Eternal Life)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선함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있기를 원하십니다

        영원에서 영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완전히 "네" 라고 대답할 생각이
        우리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중단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있도록 하시고,
        또 우리의 이름으로 완전히 "네" 라고 대답하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복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곳에는 지독한 상사도 없고, 복수심에 불타는 적도 없으며,
        우리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잔혹한 폭군도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집으로 오기를 간절히 열망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항상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실 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는
        그들이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죽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본향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하나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평안하게 가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매달려 있기를 원하지 않아요....
        당신이 본향으로 돌아가도록 놓아 드립니다 조용히 가세요
        나의 사랑를 안고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이 말은 진정한 선물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어 가고 있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이 말을 해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친구들이 이 말을 자기 입술로 또는
        자기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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