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적 지도자들(Our Spiritual Leaders)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는 설교하고 치유하며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우리들을 주의 식탁으로 초대하며,
사랑의 서약으로 우리를 함께 묶으며,
사역을 위하여 우리를 파견하며,
우리가 병 들거나 죽을 때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며,
우리가 가치를 찾고 매일의 생계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찾을 때 우리와 동행합니다

이 모든 모습들은,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로서
존경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들에게 오신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면, 우리는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장소와 모습에서 교회의 사역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름아닌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긍휼의 권능(The Authority of Compassion)
 
교회는 종종 우리들에게 깊은 상처를 줍니다
종교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말로써,
그리고 명령으로써 우리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바로 우리의 종교가 우리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적인 감수성은 쉽게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목사와 성직자들은 그들의 비판적인 말,
거부하는 행동, 또는 참을성 없는 행동이 이러한 말과
행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한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생명의 의미에 대한 갈망, 평안함과 위안에 대한 갈망,
용서와 화해에 대한 갈망, 그리고 회복과 치유에 대한
갈망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종교적인 귄위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긍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권능은 긍휼에 나타나 있습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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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용서하기(Forgiving the Church)

우리가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교회를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우리가 교회를 버릴 때에는
살아 계신 예수님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
그러나 교회를 미워해요" 라고 말할 때,
우리는 교회뿐만 아니라 예수님마저도
잃어 버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교회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전입니다
이 도전은 엄청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좀처럼 우리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서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우리들을 용서해 줍니다

흔히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조직으서의 교회는
우리들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만 말입니다

교회를 '저 곳에 떨어져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몸부림치는, 약한 사람들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몸부림치는
약한 사람들의 한 부분이며
그리고 이 약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주 하나님과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옮긴 글
출처: 목양연가 중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Meeting Christ in the Church) 

교회를 사랑하는 데 낭만적인 감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찾아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 핍박받는 사람, 잊혀진 사람과 같은
'작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큰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동의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우리들로부터 숨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항하든 또는 받아들이든, 비판하든
또는 칭찬하든, 우리의 말과 행동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에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교회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기
(Being in the Church not of It)

흔히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서
교회 안에 있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교회 일들과
사무 처리에 몰두하여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에게 더 이상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우리가 보려고 온 것에 대하여
눈을 가리고, 우리가 들으려고 온 것에 대하여
우리의 귀를 멀게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사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식탁으로 초청하며,
그리고 우리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말을
들려주는 곳은 교회 안입니다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서 교회 안에
있는 것은 커다란 영적인 도전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교회, 하나님의 사람
(The Church, God's People)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인간이었던 것과 같이,
교회도 많은 조직 중의 하나의 조직입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님보다 매력적인 풍체를 가진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교회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조직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우리가 오늘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함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오래 전에 만났더라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서
그를 인지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믿음의 도약을 하라는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대담하게 믿음의 도약을 한다면
우리의 눈이 열릴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는 비판적인 사람이라면
교회를 떠날 새각을 갖게 하는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폭력적인 십자군, 학살, 권력 투쟁, 탄압, 파문, 처형,
사람들과 생각들의 조작,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분열이 교회의 역사였음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며,
또한 우리 모두를 섬뜩하게 만드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얼룩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사랑의 성례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우리가 믿을 수 있을 까요?

인간들의 모든 깨어짐 속에서도 교회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서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요?

죄가 가득한 곳에 은혜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그리고 많은 약속들이 반복하여 깨어지고 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을까요?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한 믿음의 두 측면( The Two Sides of One Faith)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신,
그리고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교회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진실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있음직하지 않은 이러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치 약 2천년 전에 하나님이 중동에 있는,
별로 주의를 끌지 못했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처녀에게서
인간이 되기로 선택한 것이 있음직한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논쟁과 선입견, 권력 투쟁, 그리고 파워 게임을
끊임없이 분열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기로 선택하신 것도
있음직하지 않은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믿는 것은 한 믿음의 두 측면입니다
그것은 있음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섭리)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두 측면을 모두 인정하고 믿음직한 교회의 공동체임을
늘 자각하면서 더 연약한 지체를 돌보아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교회에 대한 믿음(Bellieving in the Church)

 주님이 세운 교회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신경은 교회가 우리들이 성부, 성자, 성령을 믿도록
도와 주는 기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는 교회를 믿어햐 할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교회를 믿는 것이
더 어렵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분리하면 비신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장소로써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서로서로 신뢰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부르심을 받음

(Called Out of Slavery)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라틴어로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ecclesia)"는 희랍어인 에크(ek)와

칼레오(kaleo)에서 온 말입니다. 에크는 '밖으로(out)'를, 칼레오는 '부르다(to call)'를 뜻합니다 교회는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로,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으로, 절망에서 해방되어 희망으로, 암흑에서 해방되어

빛으로, 죽음 중심의 존재에서 해방되어 새 생명에

초점을 맞춘 존재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일단의 무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이와 종족과 사회를 초월하여 여자 남자, 그리고 아이들이, 그들의 최후의 집을 향하여 머나먼, 때로는 고된 여행을 하면서 서로서로를 떠받쳐 주는 모습을 우리는 또한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교회의 두 기둥(The Pillars of the Church)

 
세례와 성만찬은 두 가지 중요한 성례전으로서
교회의 영적인 기둥입니다

이 두 성례전은 단순히 교회의 사명을
수행케 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또한 세례와 성만찬은 단순히 우리가 그 절차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고, 계속하여 그 일원으로
남아 있게 되는 수단이 아닙니다

두 의식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이 두 성례전이 없이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례와 성만찬에 의하여 빚어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사람들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은 교회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경계를 무너뜨리기
(Breaking Through the Boundaries)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뜻하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에는
나이, 피부색, 인종, 성, 정서, 경제적 신분,
또는 사회적 배경에 관계 없이 우리들을 하나의 몸으로
묶는 독특한 힘이 있습니다

성만찬은 이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연합과 공동체의
활기찬 상징으로서 세상에 살아 계신 한 몸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요한복음 17:21)

성만찬은 모든 인간들 가운데 살아 있어야 할
주님과 신성한 연합의 성례전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그리스도의 몸, 우리의 몸(Christ's Body, Our Body)

우리가 성만찬을 위하여 모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떼실 때 그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가 다 함께 기억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성만찬 때에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마태복음 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심과 빵과 포도주의 선물 속에 
 함께 계심은 동일한 임재라고는 할 수 없으나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빵을 뗄 때,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믿음을 가지듯  
 우리는 또한 우리의 형제 자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빵을 떼어 주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을 서로에게 주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빵을 주고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같은 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이면서 같은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리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우리 영혼의 동반자(The Comapnion of Our Souls)

 

예수님이 엠마오에 있는 두 제자의 집에서
그들을 위하여 빵을 떼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으셨습니다"(누가복음 24:31)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또 예수님이 사라지신 것은 동일한 사건입니다

왜일까요?
두 제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그들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는 더 이상
식탁 건너편의 낯선 사람으로,
손님으로, 또는 함께 얘기를 나누고
좋은 의견들을 들을 수 있는 친구로서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의 영혼을 주셨습니다
두 제자가 여행에 동반함으로써
그들은 영혼의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들이 아니고 그들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입니다(갈라디아서 2:20)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예수님, 우리의 양식과 음료

(Jesus, Our Food and Drink)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사건은 특별히 정해진 시기에
그리고 특별히 정해진 장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가질 때,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빵과 포도주를 드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고 음료가 됩니다

 

실제로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육신은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에서라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도 예수님과 함께
그 곳에 있었더라면 오래 전에
그의 제자가 되었을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보다
지금 우리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일용할 영혼의 양식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신성한 행동
(The Most Human and Most Divine Gesture)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시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는
예수님이 빵을 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빵을 떼는 것보다 더 일반적이고 평범한 행동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빵을 뗀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중 가장 인간적인 행동일 것입니다

그것은 환대, 우정, 관심, 그리고 함께 있고자 하는 바람을 나타냅니다
빵을 들어서 축복하고 떼어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주는 행위는
단합과 공동체, 그리고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특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가장 인간적이며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빵을 나누는 이 가장 영적인 행동을 통하여 신비스럽게도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가까이에 계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연약함과 신뢰의 장소
(A Place of Vulnerability and Trust)

 

우리가 한 식탁에 들러앉아 같은 빵을 떼고
같은 잔에서 마실 때,
우리는 서로에 대한 모든 경계를 풉니다

총을 어깨에 둘러멘 채, 또는 권총을 허리에 찬 채로
평화롭게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빵을 나눌 때는 우리가 가진 무기ㅡ
실제 무기이든 또는 마음의 무기이든ㅡ를
현관에 두고 서로의 연약함을 보이며,
그리고 신뢰하는 장소로 들어옵니다

성만찬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장소가 연약한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평화로운 식사에 함께 오도록
초대하는 장소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빵을 떼어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
(Jesus Gives Himself to Us)

 친구를 식사에 초대할 때 우리는
육신을 위한 음식 대접 이상의 것을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우정과 동료 의식으로 대하고
즐거운 대화를 하며, 또한 친밀함과
가까움을 표시합니다

 우리가 "드세요,, 좀더 드세요..사양하지 마세요..
한 잔 더 드세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손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할 뿐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결속이 자라서 우리는 서로를 위한 양식과 음료가 됩니다
예수님이 성만찬에서 그 자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셨을 때,
영적인 결합은 가장 완전하고 온전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몸과 피를 우리들에게 내어 줌으로써,
예수님은 그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친교를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친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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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친교의 성례전(Encharist, the Sacrament)

 

세례는 성만찬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이 우리들과 친밀하고
영원한 친교 속으로 들어오시는 성례전입니다

 

그것은 양식과 음료의 성례전입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양육을 위한 성례전입니다

 

세례가 일생에 한번 있는 일이라면,
성만찬은 한 달에 한 번, 한 주일에 한 번,
또는 매일 매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명과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성만찬을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게 하는 기억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빵을 떼어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잔을 들고 "이것은 내 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세례(침례), 헌신의 길

    (Baptism, the Way to Commitment)

     

    세례(침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로 가는 길이며,
    또 공동체 생활로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성례전에는 마력적이거나 또는

    반사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침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머리 위에 물을 부을 때,
    우리의 몸을 물 속에 담글 때,


    오직 우리가 세례(침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존재에 대한 영적인 진리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구하고 또 구할 때에만,
    세례(침례)는 영속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침례)는 세례(침례)를 받은
    아이의 부모는 물론, 세례(침례)를 받은

     당사자들에게 끊임없이 이 암흑의 세상에서

    빛을 선택하고 또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서 생명을 선택할 것을 요구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세레(침례), 공동체로서의 길
(The Way to Community)

세례는 영적인 자유로 가는 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로 가는 길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그 사람을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위로부터 거듭 태어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도록 소명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인 영적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모두 함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하고,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닮은 삶으로
온전히 성숙되도록 그들을 지도하고,
지지하고, 다듬어 줍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세례(침례), 자유로 가는 길(The Way to Freedom)

 

부모들이 자녀들로 하여금
세례(침례)를 받게 할 때,
그들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서 성장하며
삶을 살아가고,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인도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생을 통하여 아이는 부모에게 맡겨집니다
세례(침례)를 통하여 아이는 하나님께 맡겨집니다

세례(침례) 때에 부모들은 그들의 부모 됨은
하나님의 부모 됨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과
아버지 됨과 어머니 됨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침례)는 부모들을 아이들이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기 위하여
부모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아이들을 귀빈으로서 집으로 환영하고
그들에게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자유를 주어서,
그들 자신도 집을 떠나 부모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침례)는 부모들에게
부모가 할 일을 일깨워 주며,
또한 세례는 아이들을 자유의 길로 해방시켜 줍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세례(침례)는 하나의 통과 의식입니다
유대인은 대탈출을 감행하여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고통과 죽음을 지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으로 탈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세례(침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
(마가복음 10:38)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례(침례)를 가리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침례)(로마서6:4)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노예에서 해방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가는 여정을
통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생명에 대한 헌신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세례(침례), 통과 의식
    (Baptism, a Rite of Passage)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어라" (마태복음 28:19)
    우리가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과 친교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의 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세례(침례)를 주신 것입니다
    세례(침례)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향해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암흑의 자녀로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며, 빛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원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등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세례(침례)를 통하여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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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창조 질서(The Created order of Sacramesnt)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신의 옷을 입혔을 때,
비창조물과 창조물,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그리고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죽음을 면치 못한 것들이
모두 영원한 것이 되고, 유한한 것이
모두 무한한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창조물은 찬란한 면사포처럼 되었습니다

이 면사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이것을 창조 질서의 신성함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바다, 산과 나무, 해, 달, 별, 그리고 온갖 종류의 동물과
사람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신성한 창문이 되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 손으로 지으신 만물의 신성함 (The Sacredness of God's Handiwork)
우리는 천지 만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천지 만물이란 '물건들' 이 가득 찬 장소로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또 우리가 원하는 모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또는 천지 만물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성한 실제로서, 
즉 하나님이 신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신성한 장소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천지 만물을 이용만 하는 경우, 
우리는 마치 천지 만물의 소유자인 것처럼 
접근하기 때문에 그 신성함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만물이
우리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나타 나셔서 우리들에게 예배와 경배드리기를 요구하는 장소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만물의 신성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묵상(Meditation)


예수님이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21:33) 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곧장
통하는 길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변화시키고 우리들을 하나님
왕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생명"(요한복음 6:6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에서 마음으로
내려가게 하여 마음속에 성령이 거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또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말씀에 가까이
있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십자가 아래 서서 
    (Standing under the Cross)


    세상의 온갖 재난에 직면해도 위로 머리를 쳐들고
    자세를 곧게 하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을

    생각하고 느끼게 하고도 남을 만한 일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혹을 저항할 수 있으며
    또한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누가복음 21:33)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우리의 영적인 바탕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던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굳건히 서십시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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