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첫번째로 역경 중에도 주님 앞에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감사의 유형은 대략 3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감사할 일이 있어서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감사가 있고요. 감사할 조건이 아닐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삶, 감사할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조건들을 헤아리고 찾지 않고 너무나 무관심 하게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지요.

하박국 3장 17절 말씀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싶이 보이는 물질,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그런 물질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귀하고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하박국 선지자는 경제적으로 그렇게 풍족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결단하지요. 나는 비록 그리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나는 기뻐하리라. 이렇게 고백하지요.

시편 4편 7절 말씀에 "주님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주님께서 우리 심령 가운데 주신 기쁨은 우리의 곡식이나 새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주님이 내 심령에 주신 그 기쁨이 더 크고 더 놀랍습니다

다니엘서 3장 18절 말씀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렇게 고백하지요. "왕이여, 우리가 왕들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 앞에 절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풀무불에 들어가서 그냥 흔적도 없이 재로 태워져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고, 배반하지 아니하고 당신의 금신상에게 절대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일상 가운데 믿음의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기뻐할 일이 있고 감사할 일이 있을 때 감사하고 또 힘들고 어려울 때 감사를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러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감사할 조건이 넘칠 때 하는 감사, 그런 감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감사할 수 없는 우리의 감정이나 우리의 생각이나 이치적으로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허세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큰소리로 그냥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 여러분,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아, 정말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손가락질 하고 마치 세상에서 버림바 된 것같고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나고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그랬을 때 여러분, 어떻게 감사를 합니까?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객기로 감사합니까? 허풍으로 그냥 큰소리로 감사합니까? No! 아닙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가서 드리는 감사이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우리가 범사에, 모든 일에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감사,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거짓없는 감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 삶 속에, 내가 지금은 비록 아둔한 내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수 없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이 되어진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올려드릴 수가 있는 그 원인, 그 원동력의 힘은 우리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일에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감사의 완성으로 가는 열쇠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이예요. 이해가 되시지요? 범사에 감사하라. 어떻게 감사합니까, 테힐라 님. 예,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글/테힐라 : 역 :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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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념이 곧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념은 정치도 아닙니다. 사이비 종파, 이단 종파와 같이 북한의 정권은 극심한, 극단적인 종교의 이단화, 변질되어 있는 이단국가, 이단 종파처럼 국가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엄밀하게 따지면 공산정권도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적인 집단처럼 되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을 하나님 보다 더 위에 놓고 하나님처럼 우상을 섬기고 있는 저 북녘땅 북한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교회를 재건하여 주시옵소서. 

북녘땅 곳곳,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소리가, 주님의 말씀이 메아리치고 흥황되게 하시며 놀라운 기도가 끊이지 않는 이 한반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한의 정치와 현 정부를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자유민주의 국가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그러한 이 대한민국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교회를 배척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무리들, 좌파사상에 물들어서 하나님을 없다 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념에 물들어 있는 저 좌파주의 자들이 두 번 다시 이 땅의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자유민주의 국가를 신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높이고 격려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정부, 그러한 집권자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도자들을 세워주시옵소서.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이 민족을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며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두번 다시 이 땅에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를 바로 세워주시옵소서. 무지하고 미련한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산주의를 찬양할 수 있습니까?

공산주의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같이 조율할 수가 없습니다. 물과 기름같은 존재들입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판단하고 지역과 이념을 떠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이 민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념의 종노릇하고 이념의 졸개노릇을 하면서 마귀의 종노릇 했던 교역자들, 목사들, 그런 성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저들이 다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서 애국운동을 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목사님들과 성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너무나 무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 불쌍한 영혼들이 바로 깨달아 알아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이승만의 토대 위에서 한국을 세운 이 자유민주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애국운동하는 목사들, 성도들을 비판하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저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영적 분별력을 주시옵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는 그런 엉터리 같은 말들에 속아서 나라가 원수에게 넘어가는 데도 방관하고 무관심 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될대로 되라 정치하는 인간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지 우리는 기도만 하면 되지, 우리는 예배만 드리면 된다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바르게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부족한 테힐라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이런 기도를 드리면 이 기도를 듣고 이념이 다르고 정치성향이 다르면 이 기도의 자리를 떠나서, 테힐라 기도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처음에 기도군사로 불러주셨을 때 2백 명이 넘는 군사들이 왔지만 정치 이야기를 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서, 이념을 위해 싸우는 잘못된 사람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기도를 했을 때 저들이 이념이 다르고 성향이 달라서 이 테힐라 기도회를 떠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저는 압니다. 저들이 하나님 보다도 이념에 더 애착하고 있다는 것을, 지역에 더욱더 편중되어 있는 것을, 주님,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합당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제가 기도 할 때 이 기도의 멘트를 듣고 이념이 다르고 테힐라는 자유민주의 국가를 신봉하고 좌파를 완전히 배척하고 척결한다는 그런, 이 기도를 듣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온전히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아닙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공산주의를 함께 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공산주의를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택하던지, 공산주의를 택하던지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 편에 설 것인지 이념으로 얼룩진 우상의 제단에 설 것인지 분별하고 판단하라! 천지도 모르고 ㅇ인지 된장인지 분별도 못하는 어리석은 영적 무지에서 해방되고 깨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국을 바로 알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한국 교회 안에 좌파 성향으로 얼룩진 엉터리 목사들이 너무나 많고 오늘날 한국 신학교에도 좌파사상에 물들어 있는 신학교수들이 그 어린 젊은 신학도들을 잘못되게 가르치는 이러한, 대한만국이 사법부나 종교 신학교까지, 교회까지, 전교조를 통하여서 어린 심령들을, 어린 학교에서도 이념교육을 시키고 있는 이런, 이 민족이 지금 얼마나 공산화 되어 있고 얼마나 이 땅이 좌파로 물들어 있는지 통탄할 일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깨달아서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 영적 지도자들이 바로, 얼마나 좌파에 물들어 있고 얼마나 병들어 있는 지를 깨달아 알아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 정의에 바로 서서 온전히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복음적으로 통일되게 하여 주옵소서. 

설교: 테힐라/ 정리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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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우리 아멘넷의 기사로 올려진 "시드선교회 직원70만불 횡령"이란 제목하에, 거액의 선교부 재산을 횡령당하여 세상법정에 고소를 해둔 상태라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고 그 아래 남긴 저의 댓글입니다.

주님의 피로 값주시고 산 교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재정부 상태는 어떠한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 또한 아직도 잘못된 시스텀으로 교회재정을 운영하고 계시는 교회가 있으면, 이런 것을 계기삼아 주님 앞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각성하기 바라는 마음, 젊은 사역자님들, 개척교회를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행여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하여, 이곳에 퍼다 놓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큰 돈을, 재무 혼자서 관리하게 했는지요, 담임(책임자)목사님외 다른 진실한 두 사람을 더 넣어 세 사람이 authorized signers가 되어야 하고, 그 중 두 사람이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각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교회 재무 집사(혹은 장로)가 단체의 돈을 혼자서 횡령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미국 내의 business checking account system입니다. (아, 물론 목사님이시건 다른 성도님이건 교회 일을 위해서 급하게 작은 돈을 사용해야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돈을 먼저 쓰고 후에 영수증을 첨부하여 되돌려 받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reimbursement system이라고 하여, 미국 선교부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교회는 물론, nonprofit organization이지만, 법적으로는 상업적 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교회들이 이 방법을 택하면 이런 불상사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의 관계도 부부를 넣거나, 너무 친한 사람을 넣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교회는 개척교회라고 목사 부부가 'co-signers'가 되는 데, 이것도 권장할 일이 못됩니다. 아니, 목사 부부가 재정부에 함께 'co-signers'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는 목사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목사님을 비롯한 각 직분을 맡은 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맡아서 섬기는 종들일 뿐(청지기 의식)이란 것을 알게되면, 사모는 재직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수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 재정을 개척 당시부터 이런 시스템으로 구축을 해 두면, 설사 그중 한명이 시험이 들어 그 교회를 떠난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을 대치해 두면 되고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 담임 목사님과 그 남은 사람이 함께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하도록 되니까,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혹여 삯꾼 목자가 있어, 주님께 드려진 헌물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재정부 시스텀을 성도들이 알게되면, 신뢰감이 생겨 더욱 좋은 교회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교회의 일일수록, 반드시 성도들 중에서,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재를 찾아서 기용하여 일을 맡기되 담임 목사님의 통제하에 행정이 잘 관리되도록 해야합니다.

하물며, 이런 큰 단체에서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일으켜 세상법정에 고소까지 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책임 목사님이 누구신지, 능력부족이란 지탄의 소리를 면치못할 것입니다.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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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해야할 일을 만나게 됩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직업, 결혼대상을 선택해야 하는 것 어찌보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 하루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감옥안에서 후회하며 지내야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순간 잘 된 선택으로 일생이 별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선택이란 단어 자체는 간단하고 쉬운 말같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그리 쉽게 생각해 버릴 사안은 또 아닌 것같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시절, 보리스 콘펠드라고 하는 한 젊은 유대인 의사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함을 얻고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겠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다시 의사로서 일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불법인지 알면서도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전날,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해 준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이 늦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의사는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 이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자기 목숨을 던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약속을 보여주는 최상의 선택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때 이 의사로 인해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순간의 모든 선택이 하나 하나 다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내 주위에서 내가 만난 한 영혼을 구원시킬 것이냐, 아니면 방치해 둘 것이냐, 하는 선택은 가장 중요하며,그것은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넘겨 버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 "이라고… 당신의 일생에 허락된 그 많은 선택의 시간들 중 과연 “최상의 선택”에 사용되어진 시간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12:3절 말씀)” 

 

 

 

글/별똥별/최송연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6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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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포함, 성도라 이름 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있든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인격성향, 지식수준의 유무, 환경, 혹은 타고난 성품 등등이 신앙생활에도 작용하는 듯, 정통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분들의 신앙 색깔이 비슷해야 하고 또 비슷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신앙생활 상태를 간단히 두 부류로 분류해보면 1. 건전한 신앙인 2. 불(비)건전한 신앙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파별,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각자가 쌓아온 신앙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편의상, 건전한 신앙인,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라 나누어 부르도록 하겠는데, 건전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나 홍수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건전하지 못한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내기보다는 사람(인기도 높거나 자기 취향에 맞은, 말을 잘하는 목사님이나 교사를 더 따름)의 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거나 혹은 신비적 현상,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 이적과 기사 같은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겨 거기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아닐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경직되지 마시기를…

이런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건전하고 바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바울 사도를 포함한 사도(가롯 유다 제외)들,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믿으며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 성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불건전한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우리들)이 건전한 신앙인과 불건전한 신앙인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명암의 갈림길,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건전한 신앙인으로서 성경 말씀이 원하는 대로 바른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간단히 요약하면: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건전한 신앙인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예수님을 천사장 정도로 믿으면 불(비)건전, 내지 이단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성령님을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성령을 부리는 영, 혹은 영향력 정도로 규정하는 자(교리)는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단)으로 규정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잣대로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님의 생뚱맞은 말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실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자기 신앙상태를 한 번 점검해보시고 내가 과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을 하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신앙생활을 해 나오고 있는지,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내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말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들은풍월"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보다 훨~ 더 많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 놀라야 정상이다. 

현역 목사님들조차도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그 말씀이 주는 뜻을 강론하며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좋은 예화들, 인기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듣고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몇 구절은 성경 말씀을 양념처럼 집어넣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고 아연실색 할 것이다.

댓글 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면이라도 하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무섭게 되받아침을 보고 씁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하루는 24시간 중 밥 먹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성경을 읽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함을 알 것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것이 문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거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읽은 말씀을 마음에 화합시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모순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형적 신앙생활, 자기 의를 들어내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3.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건전한가 불건전한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세 번째 방법은 그 사람의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지난 번 칼럼 글 아래 남긴 한 독자님의 질문, 1.말씀의 잣대(canon)하셨는데 로마서 2장 14,15절에 나오는 양심의 송사와의 관계와 히브리서 13장 18절에 나오는 "우리에게 있는 선한양심"과 연관지어 설명하여 주실수 있는지요?)의 답으로도 가할 듯,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 사람 속의 양심의 소리가 진정한 소리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양심은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인데, 마음속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창 1: 27절 참조) 이렇게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인지(knowledge)능력과 양심(conscience) 이란 것이 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을 심어두셨고 그 선한 양심을 따라, 재판석을 차리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망과 질책, 변명 그리고 위로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을 신원하여 주고 달래어 주며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야 하나?) 이런 현상을 “서로 송사하며 변명하기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 2: 15절 참조) 문제는 그 양심이 병들고 화인 맞아 더는 그 양심이란 것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4 : 2)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물(말씀)과 피로 거듭난 성도는, 그동안 병들어 제 기능을 상실했던 양심이 먼저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난 성도(벧전 3 : 21절 참조)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Born Again Christian)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외형적 성도가 아닌 내면적 참 그리스도인으로 바뀐 상태가 거듭난 성도란 것이다. 죄 문제를 다룰 때, 인간(성도)에게 나타나는 표현(행동)에 주된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인간 속에 있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다시 살아난 양심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 내적 신앙인격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깨끗함에만 치우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문제아(兒)로 대두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율법주의자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 7)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을 부지런히 살피시는 주님께서 실망치 않도록 주께 마음을 내어드리는 자가 성도요, 이런 사람은 비록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잠시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고의적인 죄나 계속되는 자범죄를 지을 수가 없다. (요한 1서 5: 18절 참조)


4. 성령 충만함을 입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과 성령 소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해석이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만 이해하고 있어도(원어나 영어를 알지 못하여도)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충분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기록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구원과는 상관없이 성경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려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면 자국어로 된 번역문만 보는 것보다는 원어를 배울 수 있다면 이해력을 돕는데 편리하고, 더욱 명쾌한 해석을 답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성경 교사님들은 원문을 읽거나 배울 필요까지 없다고 하나 적어도 원문에서 가장 근사치로 번역되었다는 권위 있는 영어 성경에서 그 뜻을 찾아보는 정도라도 자신을 계발시킨다면 주님의 말씀을 억지해석하지 않고 자신에게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도저도 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되고 성경 공부를 가르치거나 난해한 단어를 좀 더 이해하기원하는 분이라면, 우리나라 정통교단에서 인정하는 신학자들의 저서를 구하여 참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전제로, 별이가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구하는 마음을 지녔기에, 모국어 번역문만으로는 애매모호한 단어나 댓글은 영어 성경, 혹은 원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하는 것이다.

1) 성령 충만함의 의미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테일러의 헬라어 사전을 인용하면서“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기운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성령에 의해서 지.정.의. 전인격이 성령의 힘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충만함에 관하여 충만한이란 ‘가득차다’. 혹은‘성령으로 흠뻑 젖은 것’, 단순히 그들 속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넘쳐흐르는 성령으로 충만된, ’성령으로 흠뻑 젖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을 두 가지로 구분을 한다.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으로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브사렐과 오홀리압 엘리사벳의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생활상에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이다. 엡5장 18절의 말씀을 관련하여서는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여기서 성령 충만을 지시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한 상태나 조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적인 현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자의 임무수행을 위한 충만과 구별을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롬5장2절의 말씀에 관련한 존 오웬의 ‘성령과의 교제’를 진술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망가운데 기뻐하는 것 ... 그것은 어떠한 고난이나 영광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가운데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 성령은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게 하시면서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심령의 환희로 우리 영혼에 충만케 채워주기도 하신다" .”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중에서,

뿐만 아니라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죄에 대하여 애통하게 하시며 의로 교육하시고 선한길 의의길로 인도하시기를 그 나라에 가기까지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이것을 신학상 용어로 "견인(
堅忍(perseverance))
"이라고 한다. 
 
2) “성령을 소멸치 말며(to; pneu'ma mh; sbevnnute)”(살전 5: 19) 여기에서 “소멸”이란 단어는 원어가 주고자 하는 뜻이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소멸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스벤누테( sbevnnute)”, 번역하면, “태우다.” “불사르다” “ 등불을 끄다.(put out, quench)”그런 뜻이 포함되었다. 그러니까, 한자어 번역문 “태워서 없어지다, 사라지다”의 뜻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영어만 보더라도 (KJV) “Quench not the Spirit” (살전 5: 19)이다. Quench의 사전적 의미는 “소멸시키다” 이 한 가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끄다. 가열된 것을 물로 식히다.) 그런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러니까, 적용하자면, “성령 충만을 불같은 성령, 불의 혀” 이런 강렬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성령의 활동하심을 제지하거나 거역(불순종)하게 되면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잠잠히, 탄식하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서는 성령의 불같이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이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순우리말로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로 번역을 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 성령 소멸'은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버리신다라고 하는 뜻보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성령의 불을 끈다. " 혹은 "성령의 역사를 억누르게 된다."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고 본다.
성령님에 대한 인격적인 의미로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인류에게 있어 불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 했기에 그만큼 관리 보호가 필요 했을것이라고 보며, 불(능력을 의미)이 꺼지지 않도록 늘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재론하자면, 성령의 소멸이라고 하여서, 한자어가 주는 개념의 완전히 떠나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더욱 정확히 이해가 된 것이다. 만약, “소멸”이란 한자의 뜻대로라면, 성경 전체의 맥락이 이해되지 않고 거기서 멈추어야 하고 끊겨져 버리는 것이다. 성령은 한번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하여 임하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친다 라고 하는 것이다.(엡 1: 13- 14 ) 한 독자님이 제기하신 "성령 소멸"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지난 칼럼의 댓글에 관한 답변,

그리고 또 다른 독자님과 지난 칼럼 글 아래 댓글로 남기신 질문을, 칼럼 글로 다루겠다는 약속을 드렸기에, 오늘은 그 두 분의 질문을 근거로 생각해본 내용이긴 하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리해본 것이다. 짧은 지면에 원하시는 만큼의 만족한 답변이 소개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기도하면서 성경에 근거하여 최선의 답변을 드리려고 노력한 것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 정성 하나만으로 은혜점수를 후하게 주셨으면 좋겠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마음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아침햇살처럼 우리 심령에 두루 비치시기를 기도해 본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6-2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 20절 말씀)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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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필자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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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필자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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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에 와서 예언자나 선견자는 성서적으로 볼 때 성도에게 붙일 수 있는 합당한 호칭이 아니다. 선견자(先見者, Seer, 로에라, 하지), 선지자( 나비)는 모두 비슷한 역할로써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해주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신약시대에 와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필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구약시대의 선견자(先見者, Seer) ... 선지자들과 같은 개념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선견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어졌다. 그런 점에서 선견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선견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우리 손에 들려져 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딤전3:15절 참조)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들의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말씀이 주는 깊은 뜻을 깨닫게도 해 주시고 개인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에 와서 성도가 특별한 사명 자로서, 굳이 따로이 이름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바이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바이더(Provider), 사전적 의미로는 ‘공급자, 준비자’ 그런 뜻이다. 가족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는 사람, 가족의 모든 생계, 미래를 책임지고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세상보다 한걸음 앞서 가는 사람이요, 주님의 말씀으로 미래에 닥칠 재앙을 대비해 착실히 준비하는 '프로바이더', 다른 말로 하면 "청지기"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서 예측할 수도 없어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 어린 아이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대재앙, 지구 종말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바로 선견자적 사명을 가진 프로바이더들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먼저 듣고 먼저 아는 우리가 종말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만 하는가 하는 그 방법론도 확실히 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備無患(유비무환) 사전에 준비를 잘 하면 뒤에 근심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열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를 기록한 글이다. 그가 고종에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處善人 動惟厥時).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矜其能 喪厥功). 오직 모든 일에는 다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惟事事乃其有備 有備無患).”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을 위강에게 보냈다. 위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했다고 한다. “편안히 지낼 때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이다(居安思危思則有備 有備則無患).”

현대 과학자들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주범으로 ‘지구 온난화’를 든다. 지구 온난화(地球溫暖化, global warming) 또는 온난화(溫暖化)는 지표 부근의 대기와 바다의 평균 온도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기후변화위원회가 참조한 기후모델에서는 1990년에서 2100년 사이에 1.1 ~ 6.4 ℃의 온도 상승이 예측되었다고 한다.

지구 표면의 온도상승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강수량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켜,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을 일으킨다고 한다. 빙하의 후퇴와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등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앞으로 얼마만큼의 온난화가 진행되며 지역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온실 가스에 대처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였다고 한다. (위키백과사전 참조)

이 모든 것은 2,0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신 것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 일이 되었으나 일본 열도를 뒤흔든 무서운 해일, 중국의 지진피해, 요즘은 아프리카의 ‘에볼라’까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신종바이러스의 공격도 있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고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곤경을 당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된다. 종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살다가도 이런 재앙을 만날 때만이라도 종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는 이미 제대로 된 ‘ 프로바이더’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종말에 대한 바른 인식

종말에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한부 종말론, 즉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언제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바이더들의 맹활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난번 일본 열도를 강타한 해일과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사람들이 다 대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임한다. 이것이 문제다.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는 숨기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가짜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하지만 지옥과 종말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들이 잘 못하는 것이다. 자기 인기를 위해서 시시한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에게서 받는 박수갈채는 한때뿐이고 그분의 진노는 영원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로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날자와 시간은 알 수 없다.” 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그 틈을 노리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로부터 영적테러를 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무장되어야만 한다.

종말이 꼭 세상 종말만 종말이 아니다, 개인적인 종말, 죽음도 분명히 찾아온다. 그러나 그 역시 그날과 그때는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종말이나, 지구 종말의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징조들을 보거든 대비하라고 하신다. 지구의 종말도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 준비 잘 하는 것이며, 그 사람이 바로 '굿 프로바이더', 즉 좋은 준비자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

이런 사실을 먼저 아는 우리들이 좋은 준비자(Good Provider)가 되어야만 하고, 다른 이에게도 좋은 준비자(Good Provider)가 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긴박한 때, 말도 되지 않는 억지성 주장, 예민한 이슈가 될 신학적 논쟁으로 자긍하며 형제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마음을 갈라놓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 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6-8)”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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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저런 거짓 예언에 미혹되어 사람들이 저토록 흔들리고 있나, 그래...?” 저녁 식사 후, 녹차 한 잔을 들고 거실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남편이 보고 있던 신문은 내팽개치고 TV에 눈길을 준 채, 참으로 어이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소리에 궁금증이 발동한 필자도 설거지하던 손을 대충 닦고 얼른 들어가 저녁 뉴스를 보는 내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황당한 이야기인데, 그것이 fiction이 아닌, 저녁 뉴스, 그것도 우리나라 두메산골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서구문명이 발달할 대로 발달했다는 프랑스 한 작은 소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어이가 없었던 것 같다. 뉴스 진행자 역시 재밌다는듯 연신 방글방글 그의 눈에는 장난기마저 섞여 있었다.
 
내용인즉, 지금 프랑스의 한 작은 도시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고 있다는 것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었던지, 행여, 대형참사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 조심해 달라고 당부하는 관할 시장님의 당혹스러운 모습이 크게 클로즈업되기도 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군중들 속에 자신은 신(神)과 깊은 내통(?)이라도 하고 있기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눈을 감은 채 깊은 경지로 몰입(?)하는 듯, 묵상을 하고 있었다.(에휴~ 혼자만 하나님 바로 밑, 몬 특별보좌간 당상이나 따논 듯... 저런 얌체족은 어디에나 있다니까, ㅎ 흰옷을 입고 명상을 한다고 해서 과연 그동안 지은 죄악이 해결될 수 있을까? 글쎄다. ㅠ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우왕좌왕 어디를 가야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호기심이 엇갈린 표정으로 두리번두리번 놀란 눈을 하고 헤매며 술렁인다. 그렇다면 조용하던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소도시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저토록 술렁거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고대 '마야' 달력에 따른 예언 때문이란다. 고대 '마야' 달력은 2012년을 끝으로 더는 기록이 없고, 그것이 세상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일부 학자들의 호도로 '마야' 달력의 종말론은 세계 속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던 것이다.

‘마야’의 종말론에 겁을 먹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재난을 피해서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해서 ‘프랑스’의 한 작은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왜 구태여 프랑스의 그 작은 도시인가? 그곳은 오래된 ‘피라미드’ 한 개가 있고 그 ‘피라미드’가 신성하단다. 신성한 ‘피라미드’ 아래 있으면 종말의 무서운 대재난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없다. (가여운 인생들..오래 살고는 싶어서…ㅠㅠ)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기존에 알려진 바로는 마야인들은 2012년 12월 21일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그 시간에 달력이 멈추어져(끊겨)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 워싱턴포스트지에 의하면 최근에, 한 젊은 고고학자가 고대 마야인의 “엑절턴”이란 도시의 작은 건물에서 2012년 이후에도 계속되는 달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새로 발견한 마야 달력엔 무려 7000년이 추가로 더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그럼 지금까지 만들다가 만 미완성의 달력을 가지고 종말론 운운하면서 촌극을 벌렸더란 말인가? 경종을 울려주는 종소리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종소리
예언이란 종치기가 종을 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어릴 적, 교회 종소리를 들어보면, 첫 번 종을 치고 난 후, 약 30여 분의 간격을 둔 다음 두 번째 종소리가 울린다. 첫 번째 종소리가 그날이 주일임을 알리는 정도의 것이라면 두 번째 종소리는 곧 예배가 시작될 것을 알리는 소리다. 두 번의 종소리를 끝으로 종은 더 울리지 않는다. 그 두 번째 종소리로 교회의 문은 닫히고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종소리의 뜻을 아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방인들도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고한 첫 번째 성탄절, 선지자들의 첫 번 종소리는 일 점일 획도 틀리지 않았고 때를 맞추어 정확히 울려 퍼졌으며 그 힘찬 종소리를 따라서 메시아는 성육신 하셨다. 이처럼 주님이 재림하실 두 번째 종소리도 명백(Crystal Clrear)한 소리로 울려야 한다. 그때는 세상 종말이 될 것이다. 제대로 경고한 예언서, 진리의 종소리는 성경말씀 뿐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재림하심을 알려주어야 할 두 번째 종소리, 분명한 소리를 내어야 할 종소리가 무엇 때문에 현대는 이토록 혼탁하며 혼란스럽게만 느껴지고 있는가?

문제는 사람들이 진리의 종소리, 바른 종소리를 듣고도 그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유사 종소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온갖 사이비, 극단적 종말론 자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그 강도를 높여간다. 너도나도 종말을 예고한다면서 진리의 종소리가 아닌, 유사 종, 꽹과리를 마구 두들겨대어 사람의 혼을 쏙 빼간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아니하면 휩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종말론을 잘 정립하여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헤프닝(촌극)에 휘말려서 프랑스건, 산속이건, 어디든지 달려가 우습게 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요즘은 대한민국에 가야만 십사만 사천명 속에 들 수가 있다고도 하고…사단은 유사 종소리를 요란하게 흔들어 사람들을 농락한다. “그렇게 해야, 정작 하늘 종소리가 들릴 때. 사람들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라면서 조롱하며 믿지 못하도록 사단이 술수를 쓰는 것 아닐까요?” 우리 집사님의 총명한 따님 한 분이 그 예쁜 눈을 초롱거리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이토록 혼란스러운 때인데…

종말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라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예언되었으며, 종말의 징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께서 그 제자들에게 친히 일러주신 종말론 적 ‘두 번 째 종소리’는 이미 울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각종 재난, 이스라엘의 회복, 무화과나무에 꽃이 핀 사건, 이 모든 징조가 주께서 다시 오심을 알리는 두 번째 종소리, 경고의 나팔 소리인 것이다! 첫 번 성탄절을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는 사랑의 종소리였다면, 두 번째 울리는 종소리는 심판의 종소리가 될 것이다! 그때는 지옥과 천국을 갈라놓는 엄청난 백보좌 심판대가 우리 눈앞에 하늘을 가로질러 쫙 펼쳐질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이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종말이 오고 있는 것이다.(살전 5: 2, 마 24: 44, 히 10: 36-37 벧후 3: 1-14) 이런 사실을 전제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에 관하여 신약에서 사용된 헬라어를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뜻을 지닌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1) Parousia(파루시아): 이뜻은 (Physical presence, arrival – The main use is the physical presence of a person)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인 인격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뜻이다.

2) Epiphaneia (에피파네이아): 나타나심(커튼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서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얼굴을 뵙는다. 그런 뜻이 있다. (딤전6:14; 딤후1:10; 4:1; 8; 딛2:13; 살후2:8)
 
3)Apokalupsis(아포칼립시스)” “계시” “수건을 벗김” “가렸던 것을 벗김” 그런 뜻이다.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apokalupsis), 이 말에서 '묵시(apocalypse)'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계 1:3, 22:7, 10, 18, 19).

이 세 단어를 종합, 유추해 볼 때, 재림의 현상은 (수건으로 벗긴 듯, 커튼을 거두고 밝히 보여주듯 그리스도의 실체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실 것) 반드시 사실적이어야만 한다! 분명한 것은 재림하실 그리스도께서도 심판 주로서, 영광의 주로서 그 모습을 만인 앞에 그 실체를 들어내실 것이란 점이다! 첫 번 크리스마스 때 아기 예수님이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오셨듯 재림 때에도 예수님은 모든 눈이 그를 볼 수 있게 오실 것이다! 영적으로나, 환상적으로나, 피상적이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하늘 구름(여기서, 구름이란 큰 영광의 광채를 의미할 수도 있음)을 타고 하늘을 쫓아서 강림하신다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시한부 종말론, 즉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란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 언제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있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먼저 믿는 성도들의 맹활약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번 필리핀의 해일, 일본의 대지진 때문에 해일과 무시무시한 원전 사고, 그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여 살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온다.살전 이것이 문제다.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는 숨기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가짜라는 것이다!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하지만 지옥과 종말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들이 잘못하는 것이다. 인기를 위해서 시시한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받는 박수갈채는 한때 뿐이고 그분의 진노는 영원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심히 안타깝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로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날짜와 시간은 알 수없다.”고 하는 것,. 이 사실을 모르면, 그 틈을 노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로부터 영적 테러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철저하게 무장되어야만 한다.

종말이란 꼭 세상 종말만 종말이 아니질 않은가? 개인적인 종말, 죽음도 분명히 찾아온다. 그러나 그 또한 그날과 그때는 언제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종말이나, 지구 종말의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징조들을 보거든 대비하라고 하셨다. 지구의 종말도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는 것이 준비 잘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바로 '준비를 잘하는'성도일 것이다.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

이것이 유사 종소리와 진리의 종소리가 다른 점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그 어떤 방법으로든 종말을 계산할 수도 없고 또 계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주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패역무도한 짓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備無患(유비무환) 사전에 준비를 잘 하면 뒤에 근심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설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를 기록한 글이다. 그가 고종에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에는 다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을 위강에게 보냈다. 위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했다고 한다. “편안히 지낼 때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하며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주범으로 ‘지구 온난화’를 든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또는 온난화는 지표 부근의 대기와 바다의 평균 온도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기후변화위원회가 참조한 기후모델에서는 1990년에서 2100년 사이에 1.1 ~ 6.4 ℃의 온도 상승이 예측되었다고 한다.

”지구 표면의 온도상승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강수량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켜,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을 일으킨다. 빙하의 후퇴와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등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앞으로 얼마 만큼의 온난화가 진행되며 지역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온실 가스에 대처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였다고 한다.” (위키백과 사전 참조)

이 모든 것은 2,0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신 것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얼마전에 일어났던 일본의 지진 , 원전 사고로 인한 대참사, 동남아 일대를 강타한 무서운 해일, 중국의 지진피해, 요즘은 멕시코의 스와인풀루엔자까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신종바이러스의 공격도 있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고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곤경을 당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된다. 종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살다가도 이런 재앙을 만날 때만이라도 종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2,000여 년 전, 첫 번째 들려온 종소리만 기뻐하고 아기 예수가 이 땅 위에 오셨음을 축하하노라 말하면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그 기이한 기사를 이미 뒤안길에 사라져버린 역사로 치부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성도는 이미 오신 주님도 축하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일어나 허리를 동여야 한다. 혹독한 겨울, 시련의 겨울은 이미 시작되었다. 저 우렁차고 명백(Crystal Clear)한 두 번째 종소리, 심판의 종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고개를 들고 주를 바라보자. 우리 구속의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마라나 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 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6-8)”

출처: 목양연가 /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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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 이야기

세상은 점점 암흑기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각종 예언, 은사, 방언등...

온갖 형태로 이루어진 어두움의 그림자들이 복음의 빛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쓸모없는 가라지 신세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라지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겉모양, 곧 형태는 있으나 알갱이가 없습니다.
2. 참 생명은 알갱이 속에만 있고, 그 참 생명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요,

 말씀은 진리요, 진리는 성부하 나님이시며, 곧 성령님이십니다.

가라지의 출처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이단 및 다른 모든 잡종교)인 자들도 있고,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의(이성, 돈, 명예, 등등..)

미혹을 받아 말씀이 자신의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마13:18-23절 참조) 그 씨앗을 뿌리는 자, 곧 가라지의 가라지의 근본

출처는 사탄입니다.

가라지로서 나타나는 현상
1.그 나라에서 모든 (거짓 예언, 거짓 환상, 이단 사설등으로) 넘어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마13:41상)
2.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법과 하나님의 구원의 법 등등..)

(마13:하)
가라지의 종점(final destination)
풀무불, 곧 영원한 지옥불입니다. (마13:4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말씀은 히브리어로 '카브'라고도 하며 라틴어로는 '카논'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곧 잣대란 뜻입니다. 말씀의 잣대로만 검증 되어진 예언,

말씀의 잣대로 검증 되어진 생활, 말씀의 잣대로 검증 되어진 은사만이

참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출처: 목양연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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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의 계절이다.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며 오곡백과 무르익어 풍성한 계절, 추수감사절이 눈 앞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모처럼 한국 가게를 나가보니, 여름에는 볼 수도 없던 각종 과일들, 고국에서 갓 들여온 듯한, 새빨간 연시(홍시)며, 토실토실한 알밤과 탐스럽게 익은 노란 배가 진열장마다 수북수북 보기만 하여도 흐뭇해지며 군침도는 요즈음이다. 이렇듯, 풍성한 가을의 열매들은 바라보는 이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면 풍성이란 것도 상대적이어서 우리가 풍성함을 누리고 기뻐하는 동안, 행여,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가을의 풍요를 노래하기가 조금 죄송스러운 것은, 우리의 이웃, 필리핀이 역사상 최악의 태풍 "하이옌"의 강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 때문이다.

 풍속으로만 따지면, 380km/h로 슈퍼를 넘어서 하이퍼 단계까지 불렸던 태풍으로, 상륙당시 허리케인 카트리나, 태풍 매미의 2~3.5배 로 강력했던 태풍이라고 하며, 모든폭풍(허리케인, 사이클론, 태풍)다 합쳐서 최강이라고 하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태풍 하이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었고, 하루 아침에 집을 잃은 그들은 지금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시신이 뒹구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먹을 것마저 없어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필리핀의 중부 도시 타클로반은 무정부 상태로 혼란을 겪고 있는 등 신속한 구호 활동이 요청되고 있고 정부는 국가 재난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더 많은 고무보트를 확보해 마닐라의 저지대 지역의 시체를 수습하기에 급급한데 가족과 삶의 터전을 한꺼번에 잃게되어 낙심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슬플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린다.

그러나 이런 천재지변도 알고 보면 모두 인간들이 잘못 뿌린 씨앗의 쓰디쓴 열매를 엉뚱한 곳에서 거두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견해를 토대로한 견해다. "필리핀 하이옌 피해, 천재보단 인재"…전문가들, 필리핀에서 태풍 '하이옌'으로 만여명 숨지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한 건 부실 건물과 과한 인구밀집, 지구온난화 등으로 피해규모 커졌다는 점에서 '인재'라고 설명했다. –CBS 뉴스

이런 참담한 지구촌의 소식들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노래하고 싶은 여유로운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하지만,이런 아픔을 뒤로하고, 어찌되었거나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하늘이 더 높아서 좋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추수감사절도 며칠 남지 않은 이때, 풍성한 열매를 주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도 필요하겠으나 이런 때는 내 인생의 열매를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한 번쯤 헤아려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란 생각이들기에 기도 중에 정리를 해보았다.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고 깨달음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1) 열매가 있기 전 농부의 수고가 먼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풍요로운 가을을 결과로 기대하기에 농부는 한여름 땡볕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들의 고달픈 수고는 가을에 아름답게 열린 과일을 보는 기쁨으로 모든 것이 다 만회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농부에게 있어서 열매란 자식과 같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를 때 그 자식이 잘되기만 바라고 소망하면서 온갖 수고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수고가 수고로 느껴지지 않듯, 농부는 오직 가을에 거둘 열매를 바라는 소망 하나로 이른 봄부터 늦은 여름까지 뜨거운 햇살과 씨름하고 땀 흘리는 수고를 하면서도 힘든 줄도 모른다고 한다.

농부들은 이른 아침 새벽 동이 터기도 전에 일어나서 밭에 나가 기심을 매고 물도 대어주고 비료도 준다. 이뿐 아니다. 병충해를 막기 위해 농약도 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손에는 언제나 가위를 들고 다닌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쓸데없는 불량 가지, 영양분만 빨아먹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가지를 잘라버리기 위함이다.

우리가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자. 농부가 들고 다니는 가위로 가지를 자르는 것이 심판인가? 아니면 은혜인가? 얼핏 들으면 심판 같이 들린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은혜”다. 주인이 나무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열매다. 그렇다면, 가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그런 가지가 병들어 있거나 아니면, 너무 무성하게 쓸데없이 옆으로 퍼져 있다면 열매가 맺히는가? 열매로 가야될 자양분이 쓸데없는 곳으로 가기에 그런 가지를 그대로 두면 열매가 아주 빈약해진다.

주인이 창고에 넣어야 할 것은 가지가 아니고 열매인데, 열매가 열매답지 못하고 아무 쓸데없는 “들포도”를 조금 맺었다고 하자 그 주인이 쓸데 없는 들포도를 창고에 들이겠는가? 세 살 먹은 어린애라고 하여도 그 대답은 “NO!, 아니요.” 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인간은 대개 결과만 보고 불평불만을 쏟아놓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결과가 있기 전 먼저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풍성한 열매가 결과라고 한다면, 농부의 사랑과 수고는 원인이다. 농부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야만 가지도, 나무도 제구실을 하고 아름답고 실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에 작은 열매라도 맺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농부의 수고와 사랑이 원인이란 사실을 잊지말아야 한다.

가지가 열매를 맺었다고 하여서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 때문이다. 가지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하여서 가지가 스스로 잘한 것이 아니라 농부의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이것을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의 원리인 것이다.

다른 한편, 가을이 되어도 가져올 열매가 하나도 없는 농부라고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참으로 낙심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성도)는 그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다.(요 15: 1-2절 참조) 그 뜻은 우리 인생의 일생 속에서도 열매가 있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말씀일 것이다.


2)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좋은 씨를 심어야 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우리나라 속담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 7).” 이 말씀은 진리다. 인생 전반에 걸쳐서 적용되는 질서와 창조의 원리다. 가을 추수를 바라는 농부는 반드시 봄에 그가 원하는 품종을 밭에다 심어야 한다. 콩을 거두려고 하면 콩을 심어야지 팥을 심어놓고 콩 수확을 기대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 8).” 라는 말씀이 있다. 또 “ 저희가 바람을 심과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 8: 7 上).” 말씀하신다. 지금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가라지와 알곡이 있다는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는 뭔가?

a.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순수한 믿음의 영혼을 소유한 영혼들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성경은 이런 사람들만 "구원의 후사" 즉, “알곡”이라고 하신다.

b. 가라지가 있다. 사단에게 그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적 초등 학문이나 이치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훼방하는 자들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사단의 회"라고 하신다. (계 2: 7)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 씨앗이다. 이렇게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어디에 속하던지 자유겠으나,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기억하고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들의 훼방이나 미혹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단에 속했었다가 지금은 돌이켰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시금 이단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고 게중에는 이단들의 횡포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인양 오해하고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고 이전보다 더 악한 길에 빠진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같은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 19-20)"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생명의 열매를 맺으라

B 플러스 D인생을 뛰어넘어 C인생을 남기도록 해야 한다. 무슨 소리인가? 오래전 한 번 나눈 적이 있는 말이기도 한데, 우리가 긍국적으로 다루어야 할 생명의 열매는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다시 재고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드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뿐인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존경받는 어느 학자가 말하기를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우리 인생은 B (Birth)로 시작해서 D(Death)으로 끝나는 인생이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神은 우리에게 B와 D사이에 C를 주셨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C란:
1. 선택(Choice)
2. 변화 (Change)
3. 기회 (Chance)
4. 도전 (Challenge)다
요약하면, 1. 우리가 선택을 잘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2.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자기가 세상에 변화를 당한다. 좋은 말이다. 3. 기회를 선용하란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역경을 기회로 삼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너무나 멋진 말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인생은 B에서 D로 끝난다고 하지만, 그 D도 (Death)이냐 하는 것과 꿈(Dream)이냐 하는 것은 도전 정신에 달렸으니, 나이 핑계하지 말고 환경 이유 대지 말고 더 크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용기있는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네 가지 C만 가지고서는, 삶의 질을 약간 향상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 문제 B(Birth) + D(Death)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물론, 사람이 젊고 건강할 때는 그것만 있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람에게는 선택도, 변화도, 기회도, 도전도 통하지 않는 말이다. 당장 눈 앞에 다가온 죽음과 죽음 저편, 곧 사후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궁극적 목적을 해결해 줄 수 있는 C는 단 하나뿐이다” 라고 감히 역설한다.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C (Christ)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 C (Christ)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1 5: 12).”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산 생명을 소유한 알곡’이기에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가라지’로서 영원한 백보좌 심판, 형벌의 지옥으로 나갈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넣는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것이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성경적 교훈임을 명심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함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 15-20)"



출처: 목양연가/최송연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8:11절 말씀)

주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말씀해 주신 그날이 바로 오늘일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웹
상에 글을 기고하는 대부분의 필진이 모두 목사님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 이야기나 도깨비 이야기, 혹은 기복사상,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인양 크게 확대시켜 궤변을 늘어 놓을지라도 이 말세지 말을 살아가는 성도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성도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입니다. 주님의 종들이라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가르쳐야 마땅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편견을 버리고 말씀에 굳게 서서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항상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래 전, 어느 블로그에 들어 가보니 (, 주님)이라는 필명으로 다음과 같은 댓글이 올라와 있어서 가슴을 앓고 기도하던 중, 주께서 밝히 보여 주시는 것을 나누려고 여기 퍼다 놨습니다.

 

(_플로리다 부흥은 밥 존스 목사님 릭 조이너 목사님 체안 목사님 존 아놋트 목사님 등 많은 목사님들이 주님의 임재 하심과 역사 하심을 증언하고 실제 집회 현장에서는 타드 밴틀리가 선배 목사님들에게 예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 받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하늘에 구름 십자가가 나타나고 검은 독수리 3마리가 출현하고..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

 

여기를 보십시오. 타드 벤틀리가 선배 목사들에게 예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 받는 때에, 하늘에 구름이 십자가 형태로 나타나고 검은 독수리 3마리가 출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독수리입니다. 그 사람은 독수리가 주는 성서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그들의 안수 시간에 그 위를 맴돌고 있었다면 이것은 정말 벤틀리와 그의 선배?들이 말세에 일어날 거짓 선지자들이란 표식임을 성서 적으로 확실히 검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자 보십시다. 마태복음 24장은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신 주님의 경고입니다. 그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지요? 거기에 무엇이라고 말씀을 했나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24:27-28절 말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라고 하신 말씀이 상징적 의미인 줄만 알았는데…, 문자적으로도 사실이 그러한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자들의 영과 교제하는 자들이기에, 독수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틀리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 진리입니다!

 

2. 구름이 십자가의 표식으로 변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역시 주검의 표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 달리신 우리의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십자가, 그 자체는 우리에게 주검의 표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 나타난 그 십자가가 꼭 예수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극악한 모든 죄인들에게 내리는 형벌이 바로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십자가 중에서 우리가 신성시해야 할 십자가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고로 십자가 형태의 구름마저 나타났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는 “이 악한 거짓 선지자들을 보아라, 이들이 있는 곳에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검으로 이끌고 가는 주검의 영령들의 잔치 자리이니 조심하라! 내가 너희들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주님의 경고임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는 표식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3.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명 오, 주님께서는 벤틀리의 집회 장소의 특성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말씀이 결여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 ~카더라" 에 의존하는 분임을 알 수있습니다. 이 역시 말세지 말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의 표식일 뿐, 구원의 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24절 말씀)" 하고 경고해 주고 있으며 정확히 그런 사건들이 증표로 나타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 ~표적과 기사 + 말씀결여 = , 주검을 가져다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표식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

 

작금의 사태를 보니,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프다 못해 메어집니다. 이 모두가 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먹이지 않고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고 부흥(인간적 욕심)에만 신경을 곤두세워 어느 교회가 부흥이 되고 있다고 하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고, 어느 프로그램이 좋다고 하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다니더니 오늘에 와서 이런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결론 적으로 같은 장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24:45-46)”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종들에게 충성과 불충성을 재는 척도는 "얼마나 큰 기적을 이르켰느냐? 교회를 얼마나 크게 부흥시켰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충성되고 지혜있게 생명의 양식을 얼마나 잘 나누어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사상과 명예심을 부추기며 사람의 교훈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다 두어 당신과 당신의 사역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사탄의 간악한 흉계를 간과하지 마십시오!!!

 

지금 사람이 많이 몰려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박태선이나 문선명, 전주 율리아에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지요. 전주 율리아는 자신의 소변을 "율피"라고 은가루 금가루를 뿌린 후, 이것을 마시면 병이 났는다고 주님이 말씀했다고 속이니까, 신부님께서도 그 기적의 치유수 '율피'를 받아 마시드군요.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이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면 일어 날수록 더욱 피해야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쥐약 주위를 뱅뱅 맴도는 쥐가 제일 먼저 쥐약을 줏어먹지요. 안 그렇습니까?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배운다고 하십니까? 각종 프로그램에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없습니다. 교회가 나가야할 방향은, 첫째도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 둘째도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는 것, 셋째도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 뿐입니다!

 

현대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입니다. 말씀 속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믿고, 전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갈하지 아니하는 생수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 나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글/최송연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명료했다. 그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 특권, 가정의 안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가 있었을 때만 고백할 수 있는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각오와 진심어린 고백이 없다면 감히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때가 바로 초기 기독교 시대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그렇게 간단 명료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 때부터 교회에 출석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입니다.”, ”병 낫기 위해서 갑니다.”, "축복받고 잘되기 위해서 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의 의식 세계, 지식 수준, 환경이나 인격에 따라 모두 다른 대답을 할 것이지만, 대체로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다행이 천국이 있다면 죽어 천국에 가는 것, 생명보험을 사두는 것 정도, 사행심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충성스러운 노예였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안디옥’에서 처음 불렸던 것 같다. 시리아 안디옥에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동기는, 당시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위에서 처형된 죄수, 예수란 청년을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다가 목숨까지 빼앗기는 무모(?)한 자들이 많음을 비웃는 불신자들의 표현이었으며 조롱의 대상이었다. 원형극장의 사자 앞에서나 길거리에 세워둔 십자가 형틀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거침없이 대답하는 그들을 향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노예’란 의미로서 상용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가이사 황제를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던 로마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가이사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에 대한 깊은 충성을 들어내기를 기뻐했다.(행 11: 26) 이와 마찬가지, 그리스도인들은 주께 대한 자신의 궁극적인 충성을 들어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었고, 순교자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외치는 그 외침은 나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노예다.”하는 것과 동일 語였던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성도들은 하나님의 노예, 그리스도의 노예로 언급된다. 사실, 바깥세상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불렀지만, 신약 성경에서 초기의 성도들은 스스로도 반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불리기를 기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이 강조한 “하나님의 노예”라는 개념은 현대 영어 번역본들 사이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이 노예 개념은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성도들에게는 핵심적인 진리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변하지 않는 충성스러움, 진실한 주의 종(노예)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의 종”이라고 하면, 목에 힘을 주는 권위적 대명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축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변질한 것이다. 성도라 이름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행성 심리가 있음을 알고 있는 일부 약삭빠른 자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까 궁리하며, 사람의 영혼을 살리며 우리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잘 풀이하여 가르치기보다 성공했다는 목사들의 꽁무니를 좇아다니기도 하고, 그들이 사용한다는 갖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접목하기도 한다.
 
또 가짜 학위를 받고서라도 큰 교회를 맡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그것 때문에 자신과 가족이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인 형제 교회들마저 돌팔매질 당하게 하기도 한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인지.... 여전히 가짜 박사 목사님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다. 어느 날, 신문을 보고 있던 남편이 "어, 이 사람도 박사라고 하네, 학위 공부를 언제 했다는 것인지? 거 참, 이런 때는, 내가 박사 아닌 것이 정말 감사하다." 하면서 혀를 찼다. 그만큼 가짜 박사님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한탄하는 말일 게다. ㅋ

이런 현상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가짜가 판을 치는 시대다. 가짜 성령 운동은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분별하자고 하는 목사님들이나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인 것 같아 그 또한 마음이 착잡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같은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무섭고 글쓰는 것도, 댓글 토론하는 것도 무섭다는 생각마저 든다. 긍정적인 토론 자세가 결여되고 자신의 뜻에 반하면 죽여보자고 모함도 마다치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이 정말 무섭다. 성경은 반드시 분별하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분별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필자가 칼럼니스트로 섬기고 있는 아멘넷에도 김oo교수님이 정oo 목사님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면서 "모든 성령운동은 신사도 운동인가?" 정oo 목사님은 모든 성령운동을 다 사단의 장난(신사도 극단적 신비주의)라고 한다."라는 뜻이 담긴 제목부터가 타당하지 않은 글, 정oo 목사님의 글이 비성경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평하는 글이 헤드라인 칼럼에 올라와 있다. 필자가 정oo 목사님의 글을 모두 정독을 해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목사님의 뜻은 영들을 다 믿지말고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같은 목회자끼리도 바르게 분별하자고 하는 목소리를 싫어하는 세대이니 성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싶다. 그러면, 가짜 성령의 장난질이란 전혀 없다는 말씀인지...

주님께서는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면, “내 음성(성경)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듣는다(listening)는 것은 경청하는 것, 곧 순종을 의미한다. 환청이나 헤롱거리는 음성이나 쪽집게식 예언이 아니란 것이다. 성도들은 사단의 장난질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반드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애정과 충성 그분의 말씀(성경)에 전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 14),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 31) 자신을 가리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거나 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 받으려고 하면 먼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성경)에 복종하고 그분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 21)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2.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절 말씀).” 이 말씀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이미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하며,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간과해 버리기 쉬운 말씀이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말씀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론 다음으로 기억해야할 중요한 말씀이다. 구원론이 미래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현재 천국이 미래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니고 은혜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는가?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 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할 때는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만 그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끄집어 내어 죽여보자고 들이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잠시 조용하던 옹달샘 수면에 악동이 막대기를 넣고 한 번 휘젓기만 하면 그 속에 가라앉아 있던 더러운 흙탕물이 온갖 잡탕과 섞여 있다가 시커멓게 물 위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도의 가슴 속에 어찌 그토록 포악한 언사가 감추어져 있었단 말인가? 그저 아연실색 할 때가 간혹 있다. 어떤 사람은, 음욕 앞에, 또 어떤 사람은 탐욕이나 명예 앞에서 여지없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도 진짜 '그리스도인'이랄 수가 있을 것인가? 글쎄다.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곧이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죽음의 강을 건널 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늘의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채워주시고 그런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훨씬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에 꼭 그런 단어는 없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말씀도 있다.

또 순교자도 주께서 힘을 주셔야 순교할 수 있는 것이지,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입증된다. 스데반 집사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갈 때를 보라. 죽음 직전에, 그의 영안이 열리고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절 말씀).” 그렇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섬기던 그 주님, 평소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자기의 사랑받는 종, 스데반이 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그리고 스데반을 응원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이쯤 되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내가 평생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흘린 눈물을 기억해 주시고 내가 오는 것을 환영해 주시려고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님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나 십자가 강도의 죽음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사단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갈기갈기 찢으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고통 중에서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려면 글자 그대로 필사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구원받았다 하여, 나 또한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백성 되기로 마음에 작정한 그날부터 성도는 그분의 통치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계속돼야 하고, 이런 훈련이 계속된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1 5:18절 말씀)

현대 기독교 안에서 많은 사역자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이 죄를 물 마시듯 마시며, 기복신앙,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신앙으로 복음을 변질시켜 가르치고 행한 결과로, 작금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책임을 잘못 가고 있는 소수의 몇몇 대형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전가하려 하고 자신은 이에서 제외되고 의로운 자라 착각하는 태도를 일관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는 숨겨지기를 기뻐하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은 끝까지 들추어내는 것이 義라고 한다.

과연 주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한 형제. 자매, 신령한 의미로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각 지체가 힘을 합쳐 하나님의 지상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연대적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리새파 닮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떠난 생활,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개개인이 그분 앞에서 사는 것만이 문제 해결(solution)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행위나 내 의지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주님을 입술만으로가 아닌 가슴과 행동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자가 됨을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 그분을 십자가에 현저히 두 번 못박는 일을 계속하겠다 고집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인 우리도 싫어한다. 하물며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서 내 사랑을 어찌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그런고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그분의 뜻을 받들며 진심되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자신의 하나 뿐인 목숨까지 내어놓을 만한 마음자세로 준비된 사람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 35-38)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우리들에게 주어진 날들(Days)은 평범하게는 1년이 삼백육십오일로 동일합니다.

그런가하면 내게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소중한 날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예컨데 생일날, 입학식날, 졸업식날, 약혼식날, 결혼식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등

모두다 잊어버리고 싶지않고 항상 기억하고픈 소중한 날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보니  환난 날에…”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에게는 언제나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환난의 날도 있다고 하는 것

정도야 진작에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 날따라 이 말씀이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인생길을 가는 동안에 만나야 할 갖가지의 환난들을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환난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도

자상하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는 그 사실이

 

그 크신 사랑이 나의 가슴을 두 방망이질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생, 곧 자신의 힘으로 숨을 쉴 수 있고, 살아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한 번쯤은 환난의 날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그 당한 환난 날이 문제가 아니라 환난 날에 도와줄 이가 없는 거기에

생의 고통이 따르고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자살하는 사람들의 데이타를 분석해 볼 때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어서

죽는 사람보다 많이 가진자들,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의 자살 수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오랫동안 교회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론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요. 실생활 속에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환난날에 부를 수 있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어놓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있지 아니한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볼 수 있는 염라대왕쯤으로 알고있는 불신자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를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환난 속에 있는 나를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렇게도 분명한데

그렇다면, 내가 환난 속에 들어간 것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아주 멋진 호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이 사실을 망각한 나는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하기 보다는 낙심부터 먼저

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음을 성령님께서 오늘 내게 특별히 밝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그 환난속에서 건져 주시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멋진 호기가 되도록 도와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50:15절 말씀)

 

글: 최 송연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고, 궤도를 벗어나 끝없이 추락하는 행성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2000여 년 전, 아기 예수가 오시기 전의 그때 그 시대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지금 현 세상이나 캄캄한 암흑기에 진입한 것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목소리 드높아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퇴색되어 그 빛을 잃어 캄캄하여진 지 이미 오래다.
 
사람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BC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 (필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주님께서 두 번 오시기 전에 일어날 한 징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으라면, 무엇보다도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현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맘몬 신에게 절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십일조가 무슨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듯, 앞에서 풍월치는 그들의 욕심은 바벨탑만큼이나 높아가더니 결국 ‘십일조 폐지 운동이 곧 개혁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오늘 이 지경까지 몰고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절제되지 못한 명예욕, 성욕, 인간의 본능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사정없이 넘어진 목회자들이 홍수처럼 쓸려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뒤흔들어 댄다. 또한 근세에 일어난 ‘자유주의 사상’ (자유주의 사상: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사상이다.)

다음은, 생의 바퀴를 돌리며 고달픈 삶을 영위하느라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헛점을 노려서 깊이 파고 드는 이단사설이 고달프고 굳세지 못한 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하고 사냥질 해간다.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또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교계가 재앙을 만나게 된 원흉을 “십일조”에 두고 “개혁’이란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혹은 난도질하며 폄훼하기도 한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기독교 이대로 가다가는 안된다. 기독교계는 개혁되어야 한다”, 의식 있는 성도들의 거센 목소리가 질풍처럼, 성난 물결, 우는 파도소리처럼 이곳저곳에서 거세게 불어친다. 다 옳은 말이다, 동의한다. 아무렴, 우리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안되고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자질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다음은 내가 개혁하자. 너와 나 우리 모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자.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방법론이 문제다. 

개혁(改革, reformation)을 먼저 알아야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이것이 개혁의 사전적 의미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 잘못된 종교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개혁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은 무엇이며 우리 기독교 안에서 잘못된 제도나 기구는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주먹 구구식의 개혁, 말만의 개혁은 분란만 일으킬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어오던 성경,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는 옷을 재단하기 전, 먼저 ‘패턴’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빌딩을 짓기 전 ‘조감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상 물질 세계에서도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그에 합당한 ‘패턴’이나 ‘조감도 (architecture)’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자고 호소하는데 그만한 ‘조감도’ 나 ‘잣대(Cannon)’가 없이 개혁하자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되겠는가? 이런 말이다. 

게다가 완전무결하다고 할만한 ‘척도’요 ‘잣대’(Cannon)이며, 인생이 나가야 할 여정의 지도(map)며, ‘조감도(architecture)를 훼손시키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일까? 변질과 개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현 교계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성도의 삶이 변화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종교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몇 구절을 변개시키고 잘라낸다고 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변화다.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개혁이다!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누가(who)?= 내가. 무엇이(what)? = 나의 삶, 나의 인성이, 어떻게(how)? =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기에, 성도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불리우지 않았던가? 프론티어(the frontier), 앞서가는 개척자선구자라고 불리우지 않던가? 우리는 앞서가는 개척자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탓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 개혁, 그 시금석(試金石)
“1517년 어느 쌀쌀한 가을날 오후, 성경을 연구하던 어떤 작달막한 수도사가 교회의 문 앞(지역 게시판)에 학문적인 토론을 위한 일련의 논제를 못으로 박아 내걸었습니다. 그는 장차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알려질 이 사건을 널리 퍼트릴 사람들이 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수도사(신부)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요한 문제는 면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판매했던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기독교권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던 로마 베드로 성당의 준공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황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성당 완공을 위한 건축 분담금과 맞바꿔 버렸습니다. 교황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도미니칸 설교자였던 테첼(John Tezel, 1455-1519)이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가장 교활했습니다. 심지어 테첼이 여행 중에 불렀던 사중주곡조차도, '동전이 금고 안에서 원을 그리며 땡그랑 소리낼 때, 한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는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의 취향대로 '동전이 금고 안에서 소리를 낼 때, 교황은 더욱 부유해진다' 등과 같은 유사한 곡들을 남겼습니다.- JuNick님의 댓글 중

루터가 종교를 개혁했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안다. 루터의 개혁은 완벽하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일게다. 그렇다면 그 루터가 외친 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그는 개혁이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루터의 종교 개혁 5대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다음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이다. 그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개혁주의마을

개혁주의의 (튤립)이라고도 하는 5대 교리 역시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리를 지지하자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란 무엇인가? 개혁을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기에,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튤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우리가 개혁을 부르짖기 전, 개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고 어떤 부분을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언젠가도 한 번 말한 기억이 있지만, 재론하건데,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기도 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우리(성도)가 개혁을 하되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해야 한다. 인간 자신이, 내가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거나 가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생의 잣대가 되고, 천국가는 길의 약도가 되며, 안내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시키고서야 어떤 개혁을 하고자 한들 그 개혁이 올바를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불변의 진리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을 가감하려고 시도하지 마라. 십일조 낼 형편이나 믿음이 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 구원과 십일조 상관관계 없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변질시키거나 빼거나 더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정한 개혁은 내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찌들리고 파묻혀서 진리를 외면하고 있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개혁의 시금석을 저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의 시금석이 되는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있음에도 그 성경을 입맛대로 풀이하거나 가감하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말씀을 호도하는 것이 개혁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개혁가들을 위한 사랑의 권면:
1. 십일조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2. 십일조가 축복의 바로미터라고 떠벌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3. 내게 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바꾸자고 하여 말씀을 가감(加減)하거나 재단하여 잘라내는 자유주의 신학은 더욱 위험하다.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그대를 이끄리니....
 
지구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고, 양복 재단사가 '패턴'없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없고, 성도에게 훼손된 말씀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쓸모 없는 휴지로 만들고서야 어찌 그분의 낯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 그 흘린 피의 발자취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근간이요,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리는 더욱 위헙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성도가 진정한 개혁을 논할 수 있는 자격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힘들지라도 성경 말씀에 내가 순종하며,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개혁이요, 성경이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진리는 사수되어야 한다!!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 10-11) 

 


 

 

글: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나는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 알렌이라는 무신론자가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독한 무신론자였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든지
무신론에 관하여 아주 달변으로 논쟁을 하는,

자신의 신념에 관해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랑하는 외동딸이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을 하더니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딸의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신이 대신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하는 절박한 마음이 되어 어린 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딸이
진지한 음성으로 아버지께 질문을 했다.

아빠, 마지막으로 아빠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엄마는 예수님이 계시고 천국도 있고,

하나님의 나라도 있다고 하시는데,

아빠는 그것은 다 기독교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고

신은 없고 천국도 없다고 하시기 때문에 난 혼란스러워요.

정말 천국이 없고 예수님이 없고 하나님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에 제게 확실하고 정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아빠의 말을 믿고, 그대로 결정하고 죽음을 맞겠어요.

 

딸이 던진 이 질문에 알렌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얘야, 미안하다내가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다. 천국은 있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도 계신다. 네 엄마 말씀이 맞다.

이 다음에 천국에서 아빠랑 만나자.” )


필자는 직책상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 보아왔습니다.

세상의 지위의 높고 낮음, 지식유무, 귀천에 관계없이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람들은 반드시 두가지 형태로 나타남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원 받은 영혼,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구원 받지 못한 영혼,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 받은 영혼,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죽음은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한 영혼,  돌아갈 곳이 없는 영혼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 중에 어떤이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방바닥을 긁으며 "나는 죽기 싫다!"  하고 울부짖기도 하더군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31절)


또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죽음의 침상 앞에서 까지라도 평안을 누리시기를 권고해 드립니다.

진리는 내가 부정한다고 부정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 최송연

 

삼위일체 하나님은 과연 성서적인가?

나는 최근에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시요, 메시야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주장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성경 속에서 먼저 살펴보고 그 말씀을 근거로 삼위일체의 하나님

되심을 몇차레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하나님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태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

2. 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
(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자신 속에 계신 성부, 말씀,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써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빌2:5절)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라.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시다.
      
유다서 4절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디도서 2;13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 처음과 나중이시다.
계시록 1: 8절을 읽어보라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

계2: 8절에서도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 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 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2: 13절에서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천명하셨고, 여기에서 는 누구인가
?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셨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라고 말씀한다.
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작금의 많은 목사님들도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글/최송연

 



주인님의 사랑받는 아들 이삭을 위해, 가나안 땅에서, 주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가야만 하는 그 광야 길은 멀고도 험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메마른 광야, 불 붙듯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사막의 햇볕은 모래를 핥으며 그 열기를 더해 마치 찜통처럼 후끈거린다.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가려 줄 것 하나 없는데, 낙타 등에 뎅그러니 올라앉은 늙은 종의 얼굴은 쏟아지는 불볕에 벌겋게 타들어가고 덴 자국은 화끈거리다 못해 쓰리고 따겁다. (그 옛날 무슨 썬스크린이나 챙 달린모자가  있었으랴.)

집을 나설 때 가지고 온 몇 통의 물마저도 그 많은 날을 광야에서 지나는 동안 약대 열 필과 함께 모두 마셔버리고 바닥이 난지 이미 오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햇볕에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건만, 물을 구할 수 있는 동네를 언제쯤이면 만나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늙은 종은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터벅거리는 낙타 등에 올라앉아 꾸벅거리는데, 어느 듯, 광야의 붉은 바위산이 더욱 붉어진다 싶더니, 휘몰아치는 모랫바람이 해를 서산으로 폴작 밀어붙인 듯, 갑자기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털석 잠겨버린다.

광야의 밤기온은 낮과는 달리 무섭도록 춥다. 들판에 돌을 베개 삼고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멀건히 바라보고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주머니에는 주인의 집 재산 중, 제일 좋은 것들, 금 은보화가 그득하다. 이것만 가지면 어디에 가서도 한평생 잘 먹고 잘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 보석을 가지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면 하는 유혹도 들었지만, 주인의 그 신임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천신만고 끝에 주인님의 고향인 나홀 성에 닿았다. 나홀 성에 도착하긴 했는데, 이제 어딜 가야 주인님의 친척을 만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막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를 꿇어 앉혀놓고 맥없이 앉았자니 주인님이 다급할 때면 언제나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그리고 여차여차히 해주십사 빌었다.

기도가 끝나자 그 기도대로 한 소녀가 물을 길으려 동이를 들고 나오는데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따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소녀가 그의 기도 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주인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란 것이다. 그 소녀에게 건넨, 금고리와 금손목고리를 증표로 보게 된 소녀의 가족은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그 늙은 종을 믿고 맡긴다. 늙은 종은, 엄청나게 많은 보석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낙타 열 필과 함께 광야 길을 지나 주인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 길, 천하절색(天下絶色)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모든 금은보화를 훔쳐서 달아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충성했고, 수많은 날들과 밤을 광야에서 그토록 아릿따운 소녀와 함께 지내야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눈동자처럼 잘 지키고 보호하여 끝내 주인 집 아들 이삭에게 정결한 신부로서 무사히 넘겨주었다. 이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창 24장,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의 이야기이다.

이쯤해서, 우리에게 그 어떤 느낌이 오지 않는가? 이 정도에서 우리는 그 어떤 느낌이 와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주인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설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것이 그가 종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는 분명히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주인의 진실한 종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거나, 자기 눈에 보기 좋다 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취하려고 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주인 아들의 신부감을 데리고 와야하는 사명이 종에게 주어졌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영적으로 현대 우리들, 성도들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 행하여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모두 자기가 설 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자기가 설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명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겨진 양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 내기도 하고, 그 양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동시에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 아멘넷에도 한 젊은 목사님이 자신이 당한 불이익과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는 많은 독자들의 의견이 설왕설래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리다. 누가 저토록 순수한 한 젊은 목사님을 저렇게까지 몰아갔다는 말인가? 그 원인제공자가 미워지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된데는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 제공자들끼리 믿음으로, 기도로, 사랑으로, 대화로, 서로 아름다운 해결을 보아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 “너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절 말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절 말씀).”말씀하고 계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실천실행해야 할 때이다. 선(善)은 무엇을 상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빛이 어두움을 상대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빛은 빛의 선 자리를 굳게 지키기만 하면, 어둠은 그 빛 앞에서 맥없이 물러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상대해서 싸우지 않는다. 사랑은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힘이 없어서 잠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기 원하셔서 오래도록 참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벧후 3:10절 하 참조)

그대가 선 자리는 만왕의 왕을 대신하는 자리다.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예절과 품위로 그 이름을 명예롭게 빛내야 하리라.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왕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실추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왕께 부끄러움을 끼칠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 비록, 조금 어렵고 힘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신임하여 내게 직분을 맡기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것인지…되돌아 보아야 한다.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 그대 선 자리는 왕을 대신한 거룩한 자리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아무 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7-21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속 사람을 강건히 하라


아직은 이른 아침, 촉촉한 숲으로 간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에서 얻은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는 힘이 있기에 피곤하고 지칠 때면 나무가 울창한 뒷산을 곧잘 찾게 된다. 숲은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작은 풀잎 하나에까지 저마다 독특한 향이 있어 한데 어우러지지만, 그 향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감과 행복감을 안겨주기에 좋다. 살아 있는 산 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흔히들 말한다. 사람에게서도 저마다의 향이 있다고…정말 그런 것 같다. 사람도 산 생명일진데 어찌 고유의 향이 없겠는가? 어떤 사람은 가까이 있기만 해도 편안함을 선사해 준다. 어떤 이는 멀리 있어도 진실함과 든든한 느낌을 향기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반대로 가까이하기에 너무도 먼 당신, 안타깝게도 유행가 가사처럼 실제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무서운 사람이 비단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성도라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멀리서만 바라보아야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서 사귀다 보면 실망을 넘어 허탈감을 갖게 된다. 대개는 여의롭지 못한 삶에서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 채, 앙금으로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조금만 불이익을 당한다 생각될 때 거품처럼 독을 뿜어내는 것이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상상을 불허하는 거칠고 독한 언사가 거침없이 솟아남을 보고 아연실색할 때도 있다. 이런 이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도 향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다 같은 사람에게서 나는 향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다른 것일까?

1. 새로운 피조물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향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한 상태이다. 아는(knowledge)것이 아닌, 믿는(Faith)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 9) 그리스도가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는 그 순간이 바로 거듭나는 순간이요, 새 사람을 입게 되는 중생(αναγέννηση)의 순간이다, 흔히들 말하는 종교인, 표면적 유대인과 참 그리스도인, 진실로 거듭난 성도의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여도 넘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거듭난다는 말을 도덕적, 윤리적 변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거듭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한 진단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은 이성의 고백이 아닌 성령의 감동 하심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을 의미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하나님과 단절된 심령은 뿌리가 뽑힌 나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가 생명의 본체인 땅에서 뽑힌 상태라면 형태는 나무이지만 그 나무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땅에서 뽑힌 후 얼마 동안은 입이 푸르고 청청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시들시들하다가 곧 말라서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다. 존재론적인 인간의 죗값은 죽음이다(롬 6:23).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낼 수 없다. 어느 한순간, 극한 상황을 만나면 속에 감추어두었던 죄 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속 사람이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 산 생명이신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사람은 겉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나 그 속에 생명이 없다.(요1서 5: 12 참조) 그리스도의 영, 산 생명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죽은 영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 겉 사람, 외면을 아무리 잘 치장하고 지성으로 포장한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국 사망의 냄새가 난다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죽은 생명에서는 결코 산 생명의 향기를 발산해 낼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고후 2: 15- 16 참조)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 그러니까, 겉은 하얗게 회칠을 했으나, 그 속은 죽은 상태이기에 썩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노라고 착각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우리 주님의 무서운 질책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속 사람을 강건히 하라

거듭난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속 사람, 영으로 거듭난 새 생명을 강건하게 해야 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3: 16절) 사람들이 대개는 거듭남의 축복만 자랑하고 그 거듭난 상태가 어떠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라, 성도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야말로 시궁창에서보다 더한 악취를 뿜어내고 이로말미암아 현 기독교계가 이방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속 사람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가 강건해야 나무가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 나무의 생명은 뿌리의 건강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필자는 난(蘭)을 무척 사랑한다. 무엇보다 그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난(蘭)이 지니고 있는 고상한 품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듯하여, 많이 흠모하는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의 고상한 품격을 흠모하는 만큼, 난(蘭)을 가꾸면서 자신도 가꾸어야겠다고 하는, 어떤 고상한 도전의식 같은 것을 고취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여, 손바닥만 한 필자의 아파트 작은 창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언제나 난(蘭)이 자라고 있다. 난(蘭)은 그 아름다운 모습만큼, 가꾸는 것 또한 여간 정성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물을 너무 자주 주어도 안 되고 물을 너무 주지 않아도 탈이다. 늘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햇볕, 그리고 적당한 필수영양을 공급해 주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야 한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세상 살다가 사라져 가야 하는 뿌리 뽑힌 나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 건강을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이적과 기사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사람도 많다. 다른 이, 자칭 신령하다는 어떤 인사들의 감언이설, 주워들은 풍월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그대로 그 자리에서 머문다면 어찌 건강한 인간으로 성숙해 질 수가 있겠는가…난(蘭)을 가꾸는 마음으로 자신의 속 사람을 가꾼다면 그 속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튼튼하게 잘 자랄 수 있을 것인가?

2.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비례만큼, 죄의 습성은 약하게 된다.

칼빈은 의지의 노예 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지배받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를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한 설명을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어 서술하는데, 인간의 의지를 말(horse)에 비교하여 기수가 하나님일 경우 바른 길을 가게 되고 내 의지를 사단이 기수가 되어 조종할 경우 결국 절벽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선행을 위한 자유 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곧 의지의 노예 성이며, 인간 의지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을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필연성(necessitas)과 강제성(coactio)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펠라기우스의 "만약 죄를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라는 말에, 칼빈은 인간이 죄를 진 것은 의지를 반대해서 된 것도, 강제로 한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인간은 마음의 가장 커다란 열정을 갖고서 죄를 범했으며, 또 인간의 본질은 너무나 부패한 나머지 악을 향하여서만 움직인다고 반박하고, 인간의 의지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 의지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이 구절들은 이단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한데, 이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런 뜻이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거듭나기만 하면 그 이후에는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해서 타락한 본성이 갑자기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거듭난 후에도 그 안에 찌끼처럼 남아 있는 육신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기울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옛사람의 행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무엇보다 죄의 실체와 해악을 깨닫게 되며, 죄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와 삶을 망가뜨리고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선한 복들을 가로막는지 알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혐오하시는 지를 깨닫게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증오하시는가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아직 죄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하드라도, 죄에 대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새롭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을 통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전과는 달리 얼마든지 죄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고 또 그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신학상 술어로 성화(sanctification)요, 그 나라에 가기까지 견인(perseverence)해 나가시는 성령님의 은혜(grace)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부터 변화된 상태가 거듭난 상태라면, 그는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며, 날마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마음속에 품지 않으면, 표면만 부드럽고 고요하여 마치 가슴에 가스와 마그마 같은 불필요한 것을 품고 있는 화산 같다. 화산은 터지기 전까지는, 표면적으로 더없이 고요한 것 같으나 그 속에 엄청난 가스, 마그마 따위가 있어서 그것들이 지각의 터진 틈을 통하여 지표로 분출하면 그렇게 무서운 화력을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산속이나 바다 속에서 불필요한 가스, 마그마 같은 이물질이 부글거리고 있는 한, 어느 시점에 가서 틈새가 보이면 그만 뢀화산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런 날에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 모두, 그 불길 반경에 있는 사람을 태워서 죽일 수도 있다.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쳤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 산 기슭에서 ‘사루누스’ 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 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 멋지게 꾸며주고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가 오듯 쏟아져 내렸다. 새들은 날다가 나뭇잎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 새 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그 무서운 불길은 끝내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 네이버 백과 사전 참조

오늘 아침, 주께서 내게 주신 깨달음은, 성도는 과거 폼페이시의 멸망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수비오’ 산은, 영적으로 각종 죄악의 불, 시기, 질투, 음란, 사기, 협박, 공갈, 이런 온갖 악독으로 가득채운 마음, 재앙을 가슴 속에 품은 표면적 유대인의 멸망을 예고해 주는 본보기란 것이다. 폼페이시의 멸망, 그것은, 언제가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너무 많은 가스와 마그마 같은 것을 ‘베수비오’산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베수비오’ 산이 대폭발을 일으키기 전까지, 표면적으로는 더없는 고요를 누리는 것 같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노래했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 혹은 거듭났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을 강건하게 성장시키지 못하여 죄의 속성, 멸망할 지옥 불을 가슴 속에 품고서야 어찌 안전하겠는가…

그런고로, 우리는 거듭난 것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속 사람(inner person) 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갈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이 내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말씀에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난(蘭)에 물을 주듯, 날마다 기도로 내 영혼의 메마름을 적셔주어야 하고, 햇빛 같은 그리스도 사랑의 빛이 내 영혼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본 칼럼글에 어느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댓글 중, "人香百里, 茶香千里, 蘭香萬里"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눈에 띈다.  사람의 향기는 백리, 차의 향기는 천리, 난의 향기는 만리...라는 뜻이겠는데...생각해보면, "人香"이란 하나님 나라에까지 올라갈 것이니, "人香"의 퍼지는 길이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울 것도 같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 17-19) 오늘 이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5-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그야말로 쟁반같이 둥그런 보름달이 샛노란 빛을 발하여 더욱 청승스런 기운을 뿜어내는 늦가을 밤, 갈바람 소리 스산해서인가 밤이 깊어가건만 어인 일인지 통 잠을 이룰 수 없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느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뒤척이고 있으려니까, 새까만 밤하늘의 별들처럼 두 눈은 점점 더 초롱거리고 머리는 더욱 맑아진다. 이런 때는 차라리 귀뚜라미의 합창소리나 들으며, 성삼문의 詩라도 한 편 읊어보리라, 창문을 드르륵 열고 쏟아져 내리는 달빛 속에 베토벤의 교향곡만큼이나 가슴 설레일 귀뚜라미들의 합창 소리를 기대하며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귀뚜라미 소리는커녕, 개구리 한 마리 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뿔싸,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시골 고향 집에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심의 밤, 하늘은 고향 하늘이고 달빛도 그 달빛이건만 그토록 청아하던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는 간곳없고, 여태껏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객들이 무섭게 밟아대는 자동차 엔진의 시끄러운 소리만 정적을 깨트리고 들려오는 삭막한 현실, 갑자기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이기적 발로, 육신의 편리만을 위해, 온갖 욕심을 따라,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린 인간이 순수 자연의 소리를 그리워한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은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삶의 질을 올려줄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변질시켜 버린 인간에게 자연은 또 어떤 재앙으로 보복을 가할는지, 파괴, 변질, 폭동, 이런 무서운 단어들이 이 밤에 홀로 깨어 있는 나를 더욱 울적하게 만든다.

변질한 생태계, 엘니뇨 현상, 태풍과 지진, 이 모든 것이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것이 어찌 자연계에만 국한된 것일까? 어느 분야이건 변질된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편리와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켜나가야 할 질서도 무너뜨리고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도 한 순간에 짓밟아 버리는 험한 세상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진리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세대에 살고 있다.’라고… 매 순간마다 그 말을 절감케 하는 현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최근, 암담한 교계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우리 게시판에는, 주의를 요망하기에 충분한 호소문이 하나 올라와 있다. 내용인즉, 어느 교회 담임 목사가, 성경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 잘못된 성도들을 치리 하기 위해 개 교회 종교재판을 열었다는 충격적인 호소문이다. 뿐만아니라, 법정 효과(?)를 높이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동원, 교회 문을 닫아걸고, 그들을 가두었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가슴이 아프다. 읽는 내내 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 무슨 회괴한 일이란 말인가?

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system)가 문제인가, 신앙인격이 문제인가

과연 그들, 자칭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기존 교회의 시스템(system)이 갈아엎어 버려야 할 만큼 썩고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렇게 보지를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현 개신교계에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 문제가, 교리적으로나 시스템(system)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 안에 몸담고 있는 개인 신앙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선교사로 헌신된 남편과 함께, 아주 젊은 날부터, 이곳저곳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만나본 사람들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 과학자, 교수들, 정치인들, 사업가, 농사꾼, 학생들, 혹은 평민들 등등…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중 예수님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던지, 믿지 않는 사람이던지,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싫고, 그래서 교회 나가기조차 싫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변질한 성도들의 삶이 역겹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이타적인데, 예수를 따른다는 ‘예수 따르미’들의 삶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란 것이다. 입은 아주 믿음이 좋은 신앙인인데, 말과 행동은 다르다는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따로 국밥의 신앙,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변질한 신앙인의 형태, 가라지 신앙인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배척받아 마땅할 종교적 행위자라고 규정짓고 탄핵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포기했는가? 어쩌자는 것인가? 가장 많이 예수님을 닮아야 할 오늘날 교계 지도자들은 밥그릇 싸움이나 한다는 지적을 받고, 성추행, 간음, 횡령, 폭행, 사기 등등…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도 당당하다. 정말 기막히다. 그 옛날 주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 책망받던 과거 바리새인이 밟고 가던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머리로만 알았을 뿐, 행동과 실천 신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인 우월감이었다. 그들은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변질’해 버린 것이다 고로, 현대 기독교가 배척을 받는 것은 분명, 제도적, 시스템적 문제가 결코 아니란 것이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도는 변화를 받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 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데서 오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워지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도자가 되었건, 평신도가 되었건,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산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옛사람 그대로인 채, 다른 곳, 신사도 운동, 평신도 교회, 치유사역, 예언자 학교, 이런 곁길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면, 앞으로는 기독교인 수가 점점 더 줄어들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무서운 대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었고 그가 나치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언제나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강조,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와 역사의 중심이고, 神과 자연의 중보자란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for me)라기 보다 ‘우리를 위하여 (for us), 결국에는 ‘타인을 위하여 (for others) 살아가셨던 분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예수 따르미’의 숭고한 사상으로는 ‘남을 위한 존재 (dasein for andere, being for others)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고 그런 삶을 살다 끝내 희생되었다. 후대는 그런 그를 가리켜 ‘행동하는 신학자’, '실천하는 신학자' 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아니지만, 행동하는 삶의 좋은 예가 더 있다. 우리나라 육군 사관 학교에 가면, 교정에 높은 기념비가 하나 우뚝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기념비의 주인공은 계급이 남달리 높았거나 부유층이었거나, 참모총장이어서가 아니라, 기념비적 삶을 살다간 강재구 소령의 덕을 기리기 위함이다. 보통 남자라면, 특히, 군인이라면, 우리나라 60만 대군이 한결같이 그 어깨에 별(star)을 달아 보기를 소원할 것이다. 또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그 소원하던 별(star)이 되었다고 하여, 훗날에 그 별(star)을 기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유없이, 별(star)이라고 무조건 기념을 해 준 예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홀로 우뚝 선 기념비, 그는 과연 누구한 말인가?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 37분, 힘과 신념으로 옹찬 스물아홉의 한 젊은 장교가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시키던 중, 부하 한 명의 실수로 수류탄 1개를 오발, 병력 대부분이 유효반경 내에 있었기에, 큰 살상이 예상되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그는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쳤고, 수류탄과 함께 일순간에 산화했던 것이다.

이름없는 무명의 용사, 강재구 소령, 그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그의 삶이 기념비로 남게 된 것은, 그가 남보다 높은 학벌의 소유자였기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을 소유했거나 인물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그는 바로 행동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로, 행동하는 신앙이란, 남을 위해 사는 삶, 열매를 맺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예수 따르미”들이 반드시 본받고 실천해야 할 거룩한 성도의 참모습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끝으로, 오래 전, 아멘넷 게시판에 평신도 교회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독자, 한 독자님께서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는 간곡한 부탁의 댓글을 남기셨기에, 우리 모두 함께 귀기울여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 옮겨본다.

(자기 자신에게 꼭 물어보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목회가 교회중심인가? 예수중심인가?"
우리는 늘, 넓은 문과 좁은 문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성령님의 인도를 간구하며
믿음의 분별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분별"이라 생각합니다.
분별을 잃어버린 세대...
우리 모두 그분의 긍휼로, 은혜로, 세상과 가치관이 분별된 믿음을 위해 회개해야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 1-26)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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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르릉 쾅쾅!” 무서운 천둥소리와 함께 새파란 하늘에서 날벼락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들이닥친 스바인들의 무지막지한 칼이 두려워서 한 판 승부를 겨루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목자들은 속수무책 그 많던 주인의 가축을 몽땅 빼앗긴 채 나머지 짐승들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도 없이, “걸음아 날 살려라!” 광야의 험한 길을 달려 도망치던 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수십만 볼트가 넘는 벼락이, 눈이라도 달린 것일까, 달아나는 목자들과 허둥거리는 나머지 가축을 무섭게 그리고 정확히 따라 덮쳐 순식간에 새까만 재로 태워 그 자리에서 화장시켜버린다
.

고향에는, 중무장한 “갈대아” 인들이 떼로 몰려들어 평화로운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휩쓸었고, !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볼 사이도 없이 집 안팎 구석구석에 감추어둔 각종 보화와 남녀 종들을 강탈하여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때마침, 그날은 10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딸 중, 가장 맏아들의 생일이다. 동네에서도 형제들의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그들, 초청을 받은 형제.자매가 한 명도 빠짐없이 큰형님 댁에 모두 모여, 화기애애잔치를 배설하고 즐거운 음악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음꽃이 온 동네로 퍼져 나가던 지극히 흐뭇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

바로 그때,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갑자기 거친 들에서 대풍(tornado?)이 불어오더니, 집 모퉁이를 !” 하고 내려쳤다. 그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초광속이었던지, 고래 등 같은 큰 집이 썩은 나무 등걸이 쓰러지듯 와르르~폴싹!”무너져 내렸다. 앗 뿔 사! 그 집 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질 않은가? 안타깝게도 그들 중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하고 무너진 집채 아래 모조리, 한꺼번에 산채로 매장되고 말았다는 슬픈 비보가 날아든다. 정말 어이없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

이토록 끔찍한 이야기가 픽션(Fiction)이냐? 아니다. 그럼, 저주받은 죄인의 집이었나?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Nonfiction). 하루아침에, 이토록 끔찍한 참사를 당한 사람은 누구냐?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 동방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불리던 의인, 욥이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이라 불리는 이 의로운 사람의 엄청난 무게의 고난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

이스라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고난의 역사. (물론, 우리나라 역사도 그렇지만…)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민족이 요셉이 살아 있는 날 동안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냈다. 그러나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요셉이 세운 공훈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 왕이 즉위한 후, 노예 생활로 전락해버렸고, 그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스라엘은 또 바벨론에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로서 핍박을 받은 것을 우리는 잘 안다
.

우리나라 또한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다.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라를 잃고 일제 치하에서 당한 설움과 고난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인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역사를 배울 때나, 또는 고난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위안부할머님들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을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나라를 잃었기에 당했던 그분들의 어려움이 어떠했던가, 가히 짐작하고 남을 만하다. 뿐만이 아니다, 6.25동란 역시 고난의 역사를 대명하고 엊그제가 바로 그 고난의 시기, 6.25동란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6.25는 동족상잔의 뼈아픈 날이요, 결코 그 고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새롭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하리라
.

이렇게, 고난이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고, 개인에게도 찾아오지만, 국가적으로도 찾아오며 또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물론, 고난도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고난 없이 한평생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받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옛 성인들이 말했던 것일까
?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난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되고, 고난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반응(reaction)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고난 앞에서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무릎을 꿇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고난과 역경을 딛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그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하여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난이라면, 나도 예외일 수 없고, 그렇다면 내게 닥쳐온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겠다


고난이라고 하여도 모두 같은 고난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의 출처가 어디로부터인가 분명한 이유를 분석해야 그에 대한 대비책도 다르게 세울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까지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어디로부터인가? 사람이 어려움에 빠지고 고난을 당하는데는 대개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

자신의 죄(실수건 고의건)의 결과로, 혹은 실수를 통해서 오는 고난이 있다
.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겪게 된 그 엄청난 고난은 순전히 다윗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온 것이다.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다. 그 죄 때문에, (죄를 지으면 죄(사단)가 그 문 앞에 엎드린다( 4: 7절 참조))그 죄의 값으로 그 가정과 국가에 큰 환난을 겪게 된 것이다.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섭다.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거나 왠만큼 그냥 슬쩍 넘길 수 있다고 생각지 마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12: 59 절 말씀)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

그러나 또 어떤 고난은 죄가 아닌, 자신의 무지나 실수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사업가가 사업을 위해서 자본을 빌렸으나 그 사업 경영을 잘못하여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빚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크게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빚 때문에 자신도, 가족도 극심한 고난 속에 빠진 분들을 나는 여럿 보았다. 이런 것은 악한 뜻이 아니기에 죄라기보다는 능력 부족혹은 실수라고 봐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도 팔자 탓, 혹은 재수가 없는 탓이라고 돌려버리지만ㅠㅠ
)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고난 속에 빠졌다면.ㅡ 먼저 자신의 고난이 어디로부터인가? 먼저 고난의 원인(출처?)부터 규명하는 것이 지혜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통해서 겪게 되는 고난이라면 속히 자수하여 광명을 찾자? ㅋㅋ. 그런 때는 속히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실수로 오는 고난이라면 그 실수한 부분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 다시 일어서기 바란다. ^^ 문제는 불가항력의 고난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

오늘 “욥”이 당한 고난이 바로 이런 고난이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나는 자기 죄로 오는 것, 혹은 실수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항력의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런 고난을 당했을 때 우리가 처해야 할 바른 자세를 좀 배워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태어나 보니까,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장애인’이더라.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면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1)
불가항력의 고난이 닥쳤을 때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란 본래 형통할 때는 기뻐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는 대개 불평과 원망을 품기 쉽다
. 어떤 사람은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괜스레 죄 없는 하늘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닥친 고난이나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기 어렵게 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떼죽음을 죽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광야에서 모두 엎드려져 죽은 이유가, 적군의 칼과 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한 이 어이없는 사실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반면,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극심한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큰 고난의 수렁에 빠진 사람, 욥의 고백을 들어보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 21-22) 정말 대단한 믿음의 고백이다! 이런 고백이야말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세세 무궁토록 빛날 고백이며, 한낮 일개 촌부였던 그를 믿음의 거장이란 타이틀을 획득하게 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


2)
불가항력의 고난을 겪을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자칫,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절망이란 묘한 감정이어서 절망과 친하면 친할수록 주위가 점점 더 새까맣게 둘러쳐진 압박감을 받게 된다. 그 감정이 점점 더 강해지면, 어떻게 하든지 현실에서 도피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런 마음을 사단이 붙들고 충동질한다. 자살미수에 그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같은 상황인데, 실제로, 마음속에서 어떤 강렬한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죽어라! 죽는 것만이 너의 최선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다.” 이런 음성이 선명하게, 강하게, 극렬하게 들려오기도 하고, 또 더 심하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까지 환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단다. 이런 페닉(Panic) 상태가 길어지거나, 심각해지면, 자살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애석한 일인가?

3)
() 속에서 피는 꽃을 배워라


모든 만물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라고 하여도 복수화(福壽花, Adonis amurensis Regel et Radde 일명 빙량화(氷凉花), 아직 추운 2월 말 3월 초에 눈을 뚫고 새순이 나고 꽃이 피어나므로 설연(雪蓮)이라고도 함)는 핀다는 것을 아는가? 복수화는 우리나라, 중국 등지에서 노란색, 서구에서는 빨간색으로 아름답게 피는 겨울꽃이다. 기나긴 겨울의 끝자락에, 새하얗게 눈 덮인 대관령을 오르노라면 놀랍게도 그곳에서 눈을 뚫고 피어난 진기한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나는 한 번도 그 진기한 꽃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ㅠㅠ). 빙량화(氷凉花) 듣기만 하여도 멋진 꽃일 것 같지 않은가? 눈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욱 애잔하고 더욱 찬란하게 보일 것 같다
.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이란 안전하고 평안한 가운데선 그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믿음은 눈() 속에 피는 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환난이 없으면 그의 믿음이 큰지, 작은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믿음에도 경중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믿음이란 입술의 유희가 아니다. 말로만 내가 잘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의 진가가 들어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믿음은, 눈 속에서 피는 꽃과 같고, 환난과 역경 속에서 달구어지는 정금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각 사람의 믿음을 시험(temptation이 아닌 test)하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고 강한 훈련을 시키듯, 주께서는 그 자녀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한 강훈련을 시키심을 알아야 한다
.

성경 66권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구약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 믿음의 진가를 인정받았고 빛을 발한 사람들이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다. 다윗 왕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랬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스데반 집사가 그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모두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그 자신도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신 후에, 구속주로서 그 빛이 세세 무궁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신구약 66권을 통털어 고난 없이 그 믿음의 빛을 발한 사람이 누가 있더란 말인가
?

성경을 떠나 인간 역사를 잠시만 그슬러 올라가 보아도 알 수 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 (The north wind made the Vikings)” 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속담이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 무슨 뜻인가? 그 뜻은 그들에게 험한 북풍이 있었기에 강력한 군대, 강력한 인간을 만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북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들은 세계 최강의 배를 만들 수 있었고 거친 기후와 거친 땅 이라는 악조건이 있었기에 일찍이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있어던 악조건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

바이킹은 9-11세기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연안을 휩쓸고 북미와 그린랜드까지 진출할 정도로 강력했었다. 그들은 세계 최강의 배를 건조했고 바이킹이란 말은 전진과 모험의 상징이 되었다. 바이킹, 그 위대한 이름이 환난과 고난 속에서 꽃피운 이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개인이라면, 고난을 겪게될 때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생각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은 밤이 있으면 낯이 있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이 있어야 자연의 조화가 깨어지지 않듯, 삶도 그러하다는 것만 깨닫고 명심한다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영원토록 지옥 형벌을 자취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실존철학자 키엘케골이 말한다. “절망은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다.”라고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서 예리한 조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존재이지 모서리를 깎아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라고, 그런고로, 고난을 당할 때, 절망은 금물이다. 주님께서는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권고하신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 71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 21-22)
 
: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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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USA아멘넷 기사 중

 

 

새해에 새 소망

 

벽에 뎅그러니 매달린 한 장의 달력, 그것도 마지막 날짜를 의미하는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마음이 착잡하다. 엊그제가 희망찬 1월이었고, 마음마저 한껏 부풀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무엇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도 없건만, 벌써 이 한해도 이렇게 떠나겠다며 속절없이 고별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아쉬움 반, 후회 반, 알 수 없는 초조함 같은 것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싫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마지막 남은 그 한 장을 북~ 뜯어내고 새로운 숫자가 반짝이는 새 달력으로 바꾸어 걸고 나니까 기분이 한결 산뜻해진다. 낡고 찌든 해(), 가라! 이제는 대망의 새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지난해를 돌이켜 보니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개인적으로 지난해처럼 폭풍의 눈 속을 통과하듯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던 시기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는 오지 않고, 희망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쌍무지개와 같은 것일까? 열심히 사느라 살았건만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다는 뜻일 게다.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세기를 두고 가고 오고, 오고 가는 해(), 숫자적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새해(New Year), 그 속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걸어간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우리 조상님네들은 문제와 함께 허우적대다가 모두 각기 자기 갈 곳으로 떠나갔다. 우리라고 하여서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새해에도 우리가 지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수두룩 널려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마치 거대한 바위 같고 태산 같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난과 역경도 상대적인 것, 우리의 삶이 비록 고달프고 어렵다고 하여도 큰 재난을 당한 필리핀 국민만큼이야 어렵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여도 전쟁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동 지역의 백성만큼이야 어렵겠는가?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하여도 가족을 호스피스에 보낸 분들만큼이야 고통스럽겠는가?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나만 당하는 고난이 아니란 것이다.

 

새해라고 하여 다를 것 없이, 어차피 걸어야 할 길,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오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바라다가 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어둡고 캄캄한 때일수록 밝은 등불이 필요하듯, 다가올 캄캄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의 길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면 새해는 새 소망으로 가슴 한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잠시 있다 사라질 이생의 안목으로서 희망이 아니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참된 소망, 새 소망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런 암흑기에 새 소망이라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새 소망이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새해 새 소망으로 삼으라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전 1: 1)

 

여기에서,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라고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다. 성도에게 소망이 가장 절실한 때는 안일한 때가 아니라 극한 환난을 통과해야 할 때이다.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11장을 보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온갖 고난과 고통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과 현대 신앙인들의 삶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길, 곁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는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11: 12: 12-13절 참조 )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 그 자체가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살 소망마저 끊어졌으나 그럴수록 더욱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했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싫어하였다. 세상은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려고 온갖 악형의 고문으로 핍박하고 저주했다.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고 목 베이는 참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형을 견딜지언정 비굴하게 세상이 내어 거는 조건을 수락하거나 석방운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찬양하면서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실제 어려움의 무게일 수 있고 어쩌면 신앙의 성숙도까지 갈 것도 없이 정서적, 인격적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 별것 아닌데 작은 이권에 아웅다웅 잡아 죽일 듯 목숨 걸고, 진리 수호란 명제 아래 신의를 저버리기를 무 자르듯 쉽게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허다한 것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신앙인의 길이란 말인가씁쓸해진다.

 

또 생각해보니 우리가 젊어서는 작은 여드름 하나에 웃고 울고 한 것이다. 그때는 그만큼 순수했었거나, 아니면 젊은 시절은 그만큼 평화스러운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여드름 같은 작은 문제 따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극히 작은 문제(miner things)란 것을 알게 된다. 날마다 눈앞에 닥쳐오는 문제들이 그만큼 더 무겁고 큰 것들이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크게 당황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고난의 실제 무게일 수도 있고 어찌 생각해보면 너무도 안일하게 사는 탓에 느껴지는 성숙하지 못한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대 신앙가들의 실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대인은 초대교회 성도님들과 같은 불같은 시련은커녕, 기복신앙으로 길들어져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고, 십자가의 길이란 믿음의 선조님들의 전설같은 이야기일뿐, 십자가는 그저 하나의 장식 목걸이 정도로 착각하는 우리네들, 내가 잘하면 복 주고 내가 잘못하면 당장에 저주하는 하나님,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을 짬뽕시켜서 헌금을 강요하는 목사란 직책을 남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죽어서나 만나보는 염라대왕쯤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 믿음의 길은 어떤가? 얼마나 나약하고 얼마나 안이한 삶을 추구하는지, 넓디넓은 길, 그것을 믿음의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의 끝(last destination)은 어디가 될 것인지, 내가 가는 이 길의 끝이 어디로 연결돼 있는지, 한 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러분과 내가,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 한 분만을 절대 소망으로 삼고 환난 중에서도 담대하고 어려움을 당하여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면, 바른길, 옳은 길, 의의 길을 잘 달려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글쎄다.

 

새 소망을 바라는 이는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1)

 

본문에서 우리(성도)가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위엣 것을 ‘찾으라, 찾는다.’라는 말의 원어는 제테오이며 그 뜻은 ‘탐구한다, 얻기 위해 애쓴다, 열망한다.’ 이고, ‘생각 한다.’라는 것은 원어로 프로네오, 즉 ‘마음에 둔다, 마음을 기울인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에다 마음을 기울이는지 비례하여 그 사람의 길이 정해질 것임이 틀림없다.

 

예를 들자면,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향락이면 향락의 길을 택할 것이다.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를 생각하다가 금지된 성()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마음에 두고 날마다 생각하다가 두 눈 모두 빼이게 되었고 결국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생각하는 것이 위엣 것,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얼굴빛을 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형이상학적인 삶, 믿음의 삶, 역동적인 삶, 창조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위에는 우리의 산 소망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며 응원해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 119: 105)"

 

세상이 캄캄하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캄캄함을 밝혀줄 빛(등대)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 불평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 없다. 불평보다는 차라리 해법(solution)을 찾아라.

 

D.L 무디의 성경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D.L 무디", 그의 성경에는 구구절절 색연필로 그어져 있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곳곳에 [T.P]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Tried and Proved(시도해 보았고, 입증되었다)"라는 뜻이다. 무디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느 말씀, 어느 구절 하나라도 생활 속에 적용될 수 없는 말씀이 없으며, 그 말씀은 곧 그대로 그에게 생명과 능력과 광명이 된 것을 체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 약속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을 자리가 전무함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여기, 유리알처럼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내 앞에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다고 하자. 나는 목이 마르다. 시냇물이 제아무리 시원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내가 그 물을 떠서 내 입으로 마시지 않는다면, 그 시냇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 약속하신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성경 말씀이 그저 먼 이야기, 하나의 고서(古書)로 느껴질 뿐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그 약속 중 어떤 것 하나라도 이루어 주셔야 할 아무런 의무 또한 없으시다. 그렇지 않은가?

 

가시덤불 같은 재리의 염려, 돌짝 밭 같이 딱딱한 마음, 이런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모두 막혀버렸으니 말씀의 능력도 죽은 것이다. 그 약속이 효력발생 무()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어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 안타깝기 그지 없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먼저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말씀에 착념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내가 먼저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는 결단 없이는 환난날이 와도 그 환난을 이길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고

 

“네가 나의 인내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 10절 말씀)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모진 겨울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초저녁 어스름 달빛은 그래도 운치가 있다. 그러나 새벽 동이 트기 전의 짙은 어둠은 무섭기까지 하다. 어찌보면 인생은 늘 고해 속에서 고통 받는 중, 내일이면 오늘보다 나은 날이 오겠지, 기대하다가 오지 않는 유토피아로 점점 더 짙은 절망감에 시달리다 끝내 영원히 사그라져 버리는 별똥별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현명한 독자님들은 지금쯤 결론을 이미 내리고 계실 것도 같다. 한 마디로, 죄지은 인간, 그 자체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르면 시커먼 흑암 같은 병마가 생을 덮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 형벌로 이어지는 참담한 것이 죄지은 인생의 결국이란 것이다!!

 

뭔가 새로운 소망(희망)을 가지기 전, 인생은 어렵다. 그런데 새로운 것이 뭐가 있을까?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모든 사람이 간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인간)에게는 정말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 그 답은 미안하게도 인생에 희망이란 없다.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나는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인생의 깊이를 논하는 철학자도 아니다. 다만, 인생이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을 체계화시켜 본 것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면 모르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문제 투성이인 인간이 보일 것이다. 지식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고민은 더 많아지고, 그리고인생의 결국은 슬픔과 고뇌뿐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니까!

 

성도라고 하여서 다를 바가 없다. 인생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그리스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

 

성경에서 1518번이나 재림을 약속하고 있으니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 소망이시며 우리가 품어야 할 새 소망이 되신다. 온 천지가 둘러 꺼지고 멸망한다고 하여도,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소망이 있다. 주 안에서의 소망은 잠시 있다 사라져버릴 세상적 희망과는 다르며, 이 땅 위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든든하고 성령 안에서 영원히 보장된 소망이기에 확실한 근거가 된다.

 

날마다 주님의 뜻을 바라면서 그 얼굴빛을 항상 구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길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푯대로 삼고 달려가는 사람은 새해는 새 소망으로 채워지는 넉넉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망되신 주님을 바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진 2014, 이 한해를 승리하는 해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전 1: 1)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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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이 한해도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듯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2017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한해의 시작이 씨앗이었다면 한해의 마지막을 결실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겠지만 인생이란 대개 그 반대이다. 한해의 시작은 쌍무지개 뜨는 희망의 언덕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마냥 부푼 마음으로 오색찬란한 꿈과 소망으로 멋진 미래를 설계해 보지만 정작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대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의 벽에 부딪혀 낙담하게 되는 때가 다반사이다.
 
나는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조금씩 주어진 숙제를 차곡차곡히 잘 해나가겠다는 결심을 곧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의 결심과는 달리, 방학이 시작되는 그 시간부터 부모님께는 곤충채집이란 핑계로 둘러대고 온 여름 내내 산으로 들로 개울가로 꽃과 나비, 풀벌레들, 때로는 올챙이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헤매며 놀다가 개학이 시작되는 며칠 전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하여 하루 온종일 책상에 붙어앉아서 밀렸던 일기를 한꺼번에 써내려 가보지만 이미 날짜는 너무 많은 갭이 생겨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는지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맑음: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양치질을 하고 밥을 먹고 …) 그말이 그말인 내용을 적어나가다가 어린 마음에도 이건 아닌데 정말 난감했던 기억을 시작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연말이 되면 언제나 마음은 급하고 초조해지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마무리, 성취감에 뿌듯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인지 대책이 서지 않고 시간시간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ㅠㅠ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도 몸도 추워지면서 때로는 자신이 무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해를 시작할 때 먹었던 결심들, 이번만은 알차게 가꾸어 나가리라 설계하며 계획했던 모든 꿈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낭패감, 그리고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한 발짝 죽음의 문턱에 더 가까워졌고, 평생을 사모하며 그리던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뵈어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그분에게 이렇다 하게 내어 드릴 일도
,이루어놓은 일 하나 제대로 없이 이대로 늙고 병들어 갈 것이란 두려움이 가끔은 밀려오기도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속수무책이란 생각에 마음도 몸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또 한 편,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내가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 회한의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맹렬한 속도로 달리다가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것은 인생의 끝자락을 생각하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법 철든 생각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권세의 상징, 강한 힘의 상징이랄 수 있던 북한의 김 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게 되면서 더욱 더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세계의 관심은, 그의 뒤를 이을 후사 문제에 대한 중차대한 부분에 집중되고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를 애도하는 물결의 통곡이 과연 진짜냐 가짜냐 언론이 시끌벅적 재밌는 현상도 일고 있음을 본다.

그만큼 그의 삶이 진실하지 못했던 때문일까? 그가 죽은 후, 그를 추종하던 각료, 그의 뒤를 이어갈 집권 세력들은 “백두산 천지에 있는 얼음이 동시에 깨어졌다. (누가 그 시간에 그곳, 백두산 천지 연못에 가서 의도적인 관찰을 했다는 것인지,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비둘기 두 마리가 그의 장례 장을 들어오려고 애를 쓰다 안되니까 맞은 편 나무에서 구슬피 울었다. 날씨가 연례 없이 맑고 좋았다. 등등... ” 여러 가지 자연 현상마저 동원, 조작하여 죽은 그를 신격화하는 운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지금 심경은 어떨까? 인간의 육신은 흙으로 빚었기에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가 누구던지 그가 살아 생전 선악간에 행한 그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해 주고 있다. 불멸의 세계, 생각지도 못했던 사후 세계,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하나님의 얼굴과 영벌의 세계를 맞딱트렸고 그 앞에서 당황하며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반대로,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67)

* 선한 싸움을 싸웠다 (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 달려갈 길을 마쳤다 ( I have finished the race)
* 믿음을 지켰다 ( I have kept the faith )

바울, 그는 한해의 끝자락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후회함보다 영광으로 그 광채를 더하여 간다. 날마다 그분 앞에서 살았기에 너무도 당당할 수 있는 백전노장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부럽다. 이런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배워둔다면 한해의 끝자락 뿐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한점 후회함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비욘드 라이프(Beyond Life), 죽음과 사후세계를 준비하라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인가? 이런 것은 단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통상적인 사후관념일 것뿐이다.
 
그러기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死亡)이란 단어를 쓴다. 사망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사망, 죽을 사(死)자, 망할 망(亡)자, 즉 ‘죽음’이란, ‘죽고 망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깔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문제에서 도피하는 길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인간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육신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 영혼은 그 주신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전도서12: 7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 ‘죽고 망한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쉬는 것이요,‘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절)”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 28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친히, 영은 불멸하며 사후에는 선악 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하셨다.

죽음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히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Christ) 그분의 은총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흔히들 말하는 그 DNA가 엄연히 다르다.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백보좌 심판대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으로 이 한해의 끝자락을 마무리 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로운 마무리가 잘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6-27절 말씀)”

필자가 좋아하며 아끼는 외국 詩 한 편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Kent M. Keith)
역설적 계명 - Kent M. Keith

People are illogical, unreasonable, and self-centered.
Love them anyway.
사람들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사랑하라.


If you do the good, people will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Do the good anyway.
네가 선(善)을 행하면 이기적이거나 무슨 저의가 있을 거라고 탓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선을 베풀어라.


If you are successful, you will win false friends and true enemies.
Succeed anyway.
네가 성공하면 거짓된 친구나 진짜 적을 얻게 된다.
그렇더라도 성공하라.


The good you do today will be forgotten tomorrow.
Do the good anyway.
네가 오늘 한 선행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선을 행하라.

Honesty and frankness make you vulnerable.
Be honest and frank anyway.
정직하고 솔직함이 그대를 속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정직하고 솔직해라.


The biggest men and women with the biggest ideas can be shot down by the smallest men and women with the smallest minds.
Think big anyway.
큰 생각을 가진 큰 사람들은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크게 생각하라.

People favor underdogs but follow only top dogs.
Fight for a few underdogs anyway.
사람들은 약자의 편을 들지만, 결국 강자만을 쫓는다.
그렇더라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may be destroyed overnight.
Build anyway.
네가 수년간 쌓아 올린 것을 누군가 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쌓아라.

People really need help but may attack you if you do help them.
Help people anyway.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네가 돕더라도 그들이 너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도와주어라
.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you'll get kicked in the teeth.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yway.
네가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줘도 하찮은 결과로 네게 돌아 올 수 있다.
그렇더라도 네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출처: 목양연가/ 글: 최 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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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따를 길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요18:36절)"
빌라도 앞에서 천명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번영신학이 무서운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축복이요,
가장 큰 믿음의 소유자라 부추기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헛된 사상은 성도의 마음을 이 세상에 묶어두려고 하는

이 세상주관자의 계궤에 동조하는 망령되고
괴악한 학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5-8)


역주행...
우리 주님께서 가셨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 모두 따라갔던 길입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절 말씀)


현대라고해서 우리의 가는 길이 달라야 한다면...?
글쎄요,

주님을 진정 따르는 성도라면, 사나죽으나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됩니다!

때로는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배고프고 굶주리며
병들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시밭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의 끝은 먼저가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우리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이 어렵고 힘든 길,
눈물없인 갈 수 없는 이 길,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멀고도 험한 십자가의 좁은 이 길을...
감사하며, 찬송하며, 따라 가려합니다!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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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포함, 성도라 이름 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있든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인격성향, 지식수준의 유무, 환경, 혹은 타고난 성품 등등이 신앙생활에도 작용하는 듯, 정통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분들의 신앙 색깔이 비슷해야 하고 또 비슷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신앙생활 상태를 간단히 두 부류로 분류해보면 1. 건전한 신앙인 2. 불(비)건전한 신앙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파별,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각자가 쌓아온 신앙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편의상, 건전한 신앙인,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라 나누어 부르도록 하겠는데, 건전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나 홍수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건전하지 못한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내기보다는 사람(인기도 높거나 자기 취향에 맞은, 말을 잘하는 목사님이나 교사를 더 따름)의 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거나 혹은 신비적 현상,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 이적과 기사 같은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겨 거기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아닐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경직되지 마시기를…

이런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건전하고 바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바울 사도를 포함한 사도(가롯 유다 제외)들,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믿으며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 성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불건전한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우리들)이 건전한 신앙인과 불건전한 신앙인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명암의 갈림길,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건전한 신앙인으로서 성경 말씀이 원하는 대로 바른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간단히 요약하면: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건전한 신앙인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예수님을 천사장 정도로 믿으면 불(비)건전, 내지 이단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성령님을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성령을 부리는 영, 혹은 영향력 정도로 규정하는 자(교리)는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단)으로 규정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잣대로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님의 생뚱맞은 말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실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자기 신앙상태를 한 번 점검해보시고 내가 과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을 하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신앙생활을 해 나오고 있는지,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내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말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들은풍월"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보다 훨~ 더 많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 놀라야 정상이다. 

현역 목사님들조차도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그 말씀이 주는 뜻을 강론하며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좋은 예화들, 인기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듣고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몇 구절은 성경 말씀을 양념처럼 집어넣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고 아연실색 할 것이다.

댓글 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면이라도 하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무섭게 되받아침을 보고 씁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하루는 24시간 중 밥 먹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성경을 읽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함을 알 것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것이 문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읽은 말씀을 마음에 화합시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모순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형적 신앙생활, 자기 의를 들어내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록한 말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신학자들의 논란이 많지만, (‘핫지’(Hodge), ‘바레트’(Barrett), ‘메이어’(Meyer))등 ‘기록한 말씀’을 가리키는 원어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점에 착안, 여기서도 기록된 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킴이라고 했다. 반면, ‘칼빈’ (Calvin)이나 ‘루터’ (Luther)등의 개혁자와 또는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기록한 말씀’이 4장 이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내용 아니면 1-3장에서 인용된 구약 성경을 뜻하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학자의 주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66권)을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것을 후대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계 22: 18-19절 참조) 어쨌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의 진보에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이었고, 이것은 순전히 영적 교만이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책망, 지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고전 4: 8) 여기에서 “왕노릇..” 이란 영적 교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자들의 패역한 교훈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며 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다는 말이 맞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힘과 능으로 더하여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이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오늘도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하며 신앙생활의 승리를 쟁취하게된다.

믿는 자는, 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다.(고전 12: 3참조)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절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죄 또한 이길 힘을 공급받고, 죄를 지으면 개인 교회의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시기에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다. (롬8: 26-27절 참조) 이것을 신학상 용어로 "견인(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데 목숨을 걸어라! 기록된 계시 속에 모든 답이 있다. 성경이 text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 신학자들의 깨달음도 역시 성경 속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신학서적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 그러나 그 모든 훌륭한 신학자님들의 말씀일지라도 성경 위에 둘 순 없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날마다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친히 우리들의 마음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음을 주셔야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글을 읽는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아침햇살처럼 각 심령에 두루 비치시사 옳은 길, 의의 길로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 20-21),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학습으로 되어지는 방언?

 

뉴욕의 아멘넷 기사에 올라온 우리나라 어느 대학의 신학부 교수님은 방언은사는 우리나라가 유럽보다 많다고 하며, 그 이유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아래는 필자가 그 글아래 남긴 댓글인데, 행여 방언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이곳에 올려둡니다.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왜 한국교회에 많이 나타나나

 사람들은 현재 교회에서 체험하는 방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왜 유독 우리나라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 교회에서는 방언 은사 체험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에서도 어떤 교회에는 대다수의 성도가 방언을 체험하는데 반해 다른 교회에서는 극소수가 방언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한국 교회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앙적인 측면보다 한국의 샤머니즘적 신앙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성서적 해답을 얻었다. 우선, 바울에 따르면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고전 12:11)과 신자의 사모함(고전 12:31)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겠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 때문에 사람이 은사체험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그 은사에 대한 신자의 태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신자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려면 열심히 사모하라고 바울은 권한다(고전 14:1). 이렇게 은사 체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이것은 말씀이 실제화되는 주요 원리 중의 하나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은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순종할 때다. 종교개혁 때 마틴 루터가 바울이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깨닫고 외쳤을 때 그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요한 웨슬레가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원리를 깨닫고 선포했을 때 역시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많이 연구되지도 않았고, 활성화되지도 않았던 방언에 대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고 선포할 때 역시 방언을 체험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 교회에 방언 현상이 적게 나타난 것은 유럽 교회는 전통적으로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십 번 인도한 방언 세미나 혹은 집회를 통해서도 이 진리를 누누이 경험했다. 이 집회에서 필자는 대략 1시간 정도 방언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들어 그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전에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 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교정 받는다.

그러고 나서 방언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같이 기도하면 많은 경우에 그 자리에서 방언을 체험한다. 조사를 해 보면 자리에서 그냥 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방언을 체험한다.

어떤 이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어떻게 자리가 그 은사 체험과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공부도 잘 하고 은혜도 더 많이 체험한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에 동의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앞으로 나와 같이 기도하면 대부분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방언에 관련해서 말하면 앞자리에 앉았다가,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우리 한국의 어떤 샤머니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방언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방언체험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다. 성경 어떤 말씀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결단할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고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계속)

김동수 논설위원 / 평택대 신학과 교수
ⓒ뉴스미션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1. 방언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 2. 방언 은사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으로 분류하신 것 같네요. 교수님께서 분류하신 대로 하자면,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철야기도 시간에,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방언 은사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도,

주께서 원하시는 시간,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시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은사 중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열정적인 사회나 더 열정적인 개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은 바른 성경관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고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방방언도 여러 가지 방언이 있듯, 영언도 여러 가지임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열심있는 자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1. 개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2.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원하시는 때에 주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고전 14장 참조)

 

인간 지성의 잣대로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사를 재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나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경험은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복종해야지,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와, " 꼭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래 '질문'님이 우리 독자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도 그가 설파하고자 하는 말이 모두 다 틀렸다기 보다는 질문님의 논리 역시, 자신의 경험의 반경,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주장하는 개론에 "성경적 뒷받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권적 은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논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살펴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요, 우리가 취해야할 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전제로, 모든 주권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은사의 주체와 은사를 선물로 받는 객체를 먼저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약 강사의 초청에 의해서 강대상 앞으로 나간 사람이 더 많은 은사를 체험한다고 주장하시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간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습니다만...그것이 전부인양 말씀해서는 안 되겠지요.

 

요즘 부흥회나, 인터넷에 떠도는 'so called' 신령한 부흥강사님들, 신유집회 동영상을 보게 되면, 강사님들이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 ! !, 불로, 불로!, !!" 등등...강한 명령어를 사용함을 봅니다....주체와 객체가 뒤바껴 버린, 기형적 모습이 바로 그런 사상, 강대상 앞이 더 신령하고, 어떤 개인,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강사들이 더 신령하다고 보게 되도록 유도하는, 영적 특권의식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사상이 만연할 때, 과거 박태선 장로나 전주 율리아 같은 이단을 양산해 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곳에서 과연 지.. 의를 온전히 갖추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래 전, 철야기도 중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방언을 한다고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합니다. 저는 아무런 생각없이 한 쪽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님께서 저의 영의 귀를 열어주심일까요? 그 여집사님의 방언이 통역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는 뜻없는 말이란 것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욕하고....너무도 놀라서 저는 제가 잘못 듣고 있는가? 못들은척 하려고 하였으나, 듣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어나 그 여집사님께로 가서 어깨를 건드려,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고, 방언이 터져서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고...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께서 하시는 방언은 사단이 장난을 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주님을 욕하고 원망하고 ...듣기가 거북할 정도이니 본 마음이 그게 아니시라면 절제하시지요." 그 여자 집사님은 그 말을 듣더니 너무도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이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저의 말을 듣고 절제를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바울 사도가 통역이 없으면 방언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신,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제가 모든 방언을 다 통역되어진다고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제가 다른 분의 방언을 듣는대로 모두 통역되어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꼭 필요한 때, 주님께서 귀를 열어주셔야 되는 것임을 깨닫고 저는 그때부터 더욱 조심합니다. 그리고 영언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단이그 사람의 혼을 사로잡아 장난질 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더기 무숴워 장못담그랴? 사단의 장난이 무서워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부정하느냐? 라고 몰아가는 사람이 있기에 말을 아끼려합니다만...제가 경험한 바로는 무조건 마음이 열려져 있는 무방비 상태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은사자라 부르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는 것이 모두 성령의 선물로서 방언은사가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교제님이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이여, 가장 신령한 것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지자신의 영적 상태를 재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방언은사를 이유없이 뜻없이 받아누려야 할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그 시간에, 골방에 들어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이웃을 위해, 국가를 위해, 하다못해 우리 아멘넷을 위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진정한 기도를 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더욱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 신령한 은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은 숨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런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윗이 양치는 목자로 있을 때, 주님은 그를 아시고 기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던지, 개의치 마시고 주님 앞에 겸손해지도록 마음을 낮추는 자가 주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만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교제님께서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면서, 영적 사깃꾼들의 작태가 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가 좀 더 분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오래 전에 있었던 실제적 체험담도 생각이 나고...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간증을 올려드렸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별똥별/최송연

 

  
http://www.youtube.com/watch?v=3oMlZmJIZ6c
저 목사 누군지 아시는 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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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밤이면 밤마다 쏟아져 내리던 폭우가 공기 속의 더러운 먼지를 모두 씻어낸 때문일까?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하늘이 눈부신 아침이다.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도 털어낼 겸, 신선한 산소도 들이킬 겸, 가까운 산, 작은 바위를 찾아 잠시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새각시의 치맛자락처름 보드라운 솜털 구름이 두둥실 고운 그림을 그리며 흘러가는 파아란 저 하늘은 평화로워서 좋고, 자연의 소리는 언제나 맑고 깨끗하고 그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 좋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렘 17: 9) 탄식하신 주님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 신묘막측한 것이다. 누가 그 마음을 헤아려 알 수 있으리. 그리스 철학자요, 플라톤의 위대한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사고(思考)의 활동 속에는 항상 심상(心象)이 따른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심상(心象)이란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 이전에 경험한 것이 마음속에서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상(象)을 의미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백두산을 머리에 그리는 경우, 지각만큼 생생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형태라든가 산꼭대기에 쌓인 눈 따위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백두산의 심상(心象)이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느닷없이 별님이 어인 심리학 강의냐고 놀리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오늘 전공 분야도 아닌 심리학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과 내 마음의 소리(내면의 소리), 그리고 사단의 소리, 그 경계선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 하는데, 그전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시 설명해 본 것뿐이다.

사실, 성경은, 인간이 물리적(물질적(物質的)) 세계를 벗어나, 영적인 세계를 너무 탐하거나 영계의 영물들과 교류하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논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에 금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빌미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영혼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이런 때인 만큼, 성도가 영적 세계를 너무 깊이 알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되겠으나,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가 되는 성경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배워두어야 할 필요성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 없는 소리, 영음(靈音)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1. 마음의 소리
2. 사단의 음성
3. 천사의 말
4. 하나님의 음성, 이렇게 분류해 볼 수 있겠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인지(knowledge)능력과 양심(conscience) 이란 것이 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은 본래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있어서 주께서 심어두신 그 양심을 따라, 재판석을 차리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망과 질책, 변명 그리고 위로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을 신원하여 주고 달래어 주며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야 하나? ㅋㅋㅋ) 이런 현상을 “서로 송사하며 변명하기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 2: 15절 참조)

본래 인간은 이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인데, 마음속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창 1: 27절 참조) 문제는 그 양심이 병들고 화인 맞아 더는 그 양심이란 것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4 : 2)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물(말씀)과 피로 거듭난 성도는, 그동안 병들어 제 기능을 상실했던 양심이 먼저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난 성도(벧전 3 : 21절 참조)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Born Again Christian)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 성도가 하나님의 양이라면,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도, 기이한 일도 아니다. 성경은 우리(성도)는 오늘날도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장 27절)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요 10장26절)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라고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성도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들을 수 없는 것이 비정상이다. 문제는 바른 분별력이다. 주님의 영(Holy Spirit, Hoy Ghost)으로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단의 음성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 밭을 잘 알고 있는 사단은 하나님의 음성을 흉내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마 4: 3-10 참조)도 하고 예언적 형태를 갖추기도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거짓 심상(心象)도 불러일으키고, 거짓 음성을 말씀의 씨앗인양 뿌려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원수가 ‘가라지’ 를 뿌리고 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마 13: 25-26 참조)

항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Hoy Spirit, Holy Ghost)을 소유한 거듭난 상태가 아니란 것이다. 병든 양심, 하나님의 원수 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 아직도 옛사람 그대로인 상태에서, 마음속에 어떤 음성이 들려온다고 하여 그 음성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란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물(말씀)과 피와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난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마음속에서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사단의 음성임을 주지(周知)해야 한다.
 
영험하다는 무속인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들리는 마음의 소리, 혹은 사단의 졸개들의 음성을 실제로 듣는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또 거듭난 성도들에게도 흉내쟁이 사단이 하나님의 음성인 양 가장하여 들려지게도 한다. (마 4: 3-11, 고후 2: 11 참조) 이런 영적 원리를 항상 기억하고 내 마음속에서 들리는 모든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지 말고, 반드시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검증도 하고 분별도 해야 한다! ( 마 4: 3-11, 고후 2: 11 절 참조)

아이홉 지도자인 ‘마이크 비클’ 씨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이 쏟아내는 예언이 80%가 틀리고 20%도 정확성이 있더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런 자들의 예언은 무엇이라고 지적하는가? 성경은 그런 자들의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사단이 시험하는 미혹의 음성이란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100% 모두 정확해야 한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말지니라” (신명기18:21)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들은 음성의 예언에 100% 정확성이 나타나지 않는데,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더욱이 사단의 음성을 들었다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 때문이다!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자만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얼마전, 이단에 미혹된 한 청년이, 부모님의 권유로 상담 교육을 받고 치유, 이단에서 빠져나온 뒤 “사실은 상담 하루 만에 깨져버렸는데 내 자존심 때문에 시인하질 못했다.”라며, 진솔하게 고백한 것을 우리 아멘넷 기사에서 읽어 본적 있다.

지난 날, 우리 아멘넷의 한 논객 님께서 ‘요나’ 선지자와 ‘니느웨’ 성을 그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로부터온 예언일지라도 틀린 적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요나’ 선지자의 예언은 틀린(wrong)것이 아니라, 변경(change)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예언이 변경(change)된 사실을 당사자인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 변경(change)된 사실을 전하여 주셨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그 주신 예언의 말씀을 변경(change)하고 그 계획하신 바, 뜻을 바꾸실 때는 반드시 그 종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이 빗나가고 틀린 것은 당사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란 것이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성령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기에, 같은 방법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성도가, 이 외에도 한 가지 더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직통 계시적 형태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성도)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시요, 사용되어지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그 내용이 있어야만 한다. (행27:22-25)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다
1. 특별계시, 2. 일반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a)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b) 기록(문서)계시(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일반 계시도 다음 두 가지 계시로 세분해 볼 수 있는데, a)자연계시, b) 양심계시이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기록(문서)계시의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자연계시 역시, 그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계시)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문서(기록) 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문서(기록)계시, 양심계시, 혹은 자연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성도(양)는 반드시 목자의 음성, 곧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우리 속에 계시면서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몫이며, 반드시 성경 말씀을 레마(로고스)로 들려져야 하고 그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양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목자로서 양들을 바른길, 구원의 길,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다. 언제 어느 때 장사가 잘되고 또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고 없고, 등등…이런 유의 점치는 형식이나 족집게 점장이 식의 음성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 : 26)

다음은 오래전 필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검증법을 성경을 토대로 경험한 것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부분을 옮겨 적는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복사하여, 성경과 대조하여 잘 배우면 신앙생활에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나 무시로 기도할 때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그 음성을 판별하지 못해서 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내는 훈련을 시키셨고,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된 대언은, 그 정확성에 있어서 단 한 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 돼야만 한다.

1.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3절 하반절)".

2.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고스, 기록된 계시 말씀)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 14 : 26절)

3.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4.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 1 : 41-45절)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치므로서 성령님의 역할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의식이나, 직통계시 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많이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풍월, 혹은 배운 신학 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과 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 24: 1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 24),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21)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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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모님, 목사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오랜만에 한국 반찬 가게를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이웃교회 사모님을 만나게 된 필자는 그분의 남편 목사님께서 간암 말기란 소문을 얼마 전에 들었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어 보았던 것이 화근이다. “우리 목사님 다 나았어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염려 할 것 있나요?”무슨 그런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듯, 질책하는 눈빛으로 짧게 바라보시더니 휭하니 돌아서서 어느새 저만치 가버리신다.

‘아차,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것인가? 남편 목사님께서 병든 것, 그리고 그 병이 낫지 않는 것과 하나님 살아계신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만약, 저러시다가 남편 목사님의 병이 영영히 낫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되는 걸까?’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그후로 그분을 같은 가게에서 두어 번 더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분께 남편 목사님의 건강을 물어볼 수가 없어서 진열장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기듯 피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달 후, 안타깝게도 그 목사님은 오 십대 중반의 한참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소(서재생 목사님의 말씀) 하셨다.

어디 그 사모님 뿐이랴. “믿습니다! 믿습니다!” 휘황찬란한 조명등이 현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꽃장식으로 화려한 (저런 돈 아껴서 선교사들이나 밀어주면 좀 좋을까, 믿음이 없는(?) 나는 궁시렁거리며 둘러보느라 은혜도 안 된다.) 무대처럼 꾸민 강대상 위에서 쇳소리가 섞인 듯한 음성으로 강사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질러대는 괴성, 거기에 맞추어 “믿습니다! 믿습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성도들, 은사 집회란 곳이나 혹은 무슨무슨 부흥집회란 곳을 한 번 참석해 보면 믿음(faith, belief)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자못 희한하기 그지없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주문(?)외우듯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자기 암시 내지 자기 신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믿음(faith)의 정의부터 한 번 생각해 보자.

위키백과 사전에서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철학,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념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신앙, 신심, 신앙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믿음과 신념의 차이를 명확히 분류해 두지 않았다.

성경은 믿음(faith)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절 말씀)” 즉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자기가 소원(바라는) 하는 것들이 어느 시간에 실제적인 형태(실상)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리고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자기 신념과 별반 다를 것 없어보인다. 그러나 믿음과 자기 신념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여러 부분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믿음(faith, belief)은 자기신념이 결코 아니다.

믿음(faith)의 대상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철과 지식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세와 부를 믿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믿고 의지하다가 배신을 당해 가슴 아파한다. 우리 아멘넷 토론방에서 한참 치열하게 논의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담임 목사의 말을 믿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더란 것이고,이런 것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너무 상처가 되어서 자칫 교회를 등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한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언어)이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말씀 하신 것일까?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인생을 살아갈 수록 그말이 더욱 절감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권력과 명예를 믿고, 돈을 믿고, 자기의 인기를 믿었지만 그 믿음이 자기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이끌어 넣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인생인 것을…, 안타깝다못해 가슴이 저민다.

우리가 진정 믿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5)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했을 때,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어야 한다. ( 히 13:8절 참조)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믿음 (faith)의 근간(根幹)

믿음의 근간(根幹)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감정의 변화나 오래 교회에 다닌 역사나 또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도중 유라굴로라고 하는 태풍을 만나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고 모두 크게 두려워서 떨고있을 때,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25절)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른 믿음의 근간(根幹)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아니요, 성경지식이 많은 신학자도 아니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란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는다, 하는 것이고, 따라서 행동에 옮기기 전,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로고스(Logos) 혹은 레마(Rhema))을 먼저 받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이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창 12:1절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인간으로서는 최초, 최말로 물 위를 걸은 위대한 사람, 베드로 역시 물 속에 혼자서 마음대로 뛰어든 것이 아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주께 먼저 간구했고,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되." ( 마 14: 28-29절 말씀)  모든 믿음의 근간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과 선택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란 것을 인지하고 그 말씀에 동의해야 한다. 믿음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10:17) 

결론적으로 믿음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임이 틀림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그분이 허락하시는 때에, 내 앞에 실상(현상)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자기 신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하여 내 몸에 병이 들지 말라는 법 없다. 그리고 내가 병들었을 때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해주시는 은혜를 입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병에서 놓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불러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런고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치유 은사 사역자도 아니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소리질러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들뜨게 하는 유명 부흥강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Logos, Rhema) 약속한 바 없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병을 낫게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강렬한 입술의 선포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 암시적이며 자기 신념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일 뿐 참 믿음이 아니다.

믿음(faith, belief)이란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주권과 섭리하심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내가 살던지 죽던지 그분께 영광 돌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evidence)인 것이다! 고로, 신념은 인간 스스로의 정의이며, 믿음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이고 소유이며 은혜라 정의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6절 말씀).”  

글/별똥별, 최송연의 목양연가 '영성 훈련'중에서
 

최상의 선택

 

우리는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해야할 일들을 만나게됩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직업, 결혼대상을 선택해야

하는 것, 어찌보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 하루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감옥 안에서 후회하며

지내야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순간 잘 된 선택으로 일생이

별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선택이란 단어 자체는 간단하고 쉬운 말같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그리 쉽게 생각해 버릴 사안은 또 아닌 것같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시절, 보리스 콘펠드라고 하는 한

젊은 유대인 의사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

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함을

얻고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겠다것과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겠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의사로 다시 일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불법인지 알면서도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전날,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해 준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늦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의사는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 이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자기 목숨을 던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보여주는

최상의 선택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의사로 인해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순간의 모든 선택이 하나 하나 다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내 주위에서 내가 만난 한 영혼을 구원시킬 것이냐,

아니면 방치해 둘 것이냐, 하는 선택은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넘겨 버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당신의 일생에 허락된 그 많은 선택의 시간들 중,

과연 “최상의 선택”에 사용되어진 시간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12:3절 말씀)”

 

글/최송연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최상의-선택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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