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이 이글거리던 해가 서쪽 산 아래로 막 떨어져 내린 어스럼 하늘가에는 뾰족한 초승달이 내걸리고, 앞마당에는 모기향 대신 피워놓은 모닥불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은은한 풀 냄새를 뿜어내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녁식사를 끝낸 어른들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방금 쪄낸 손가락처럼 가녀린 햇고구마에 구수한 숭늉을 곁들여 마시며 밀렸던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눈다.

서울서 내려온 사촌들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짓 한 번에 우르르 사립문을 밀어젖히고 캄캄한 들판으로 내달린다. 풀숲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 귀뚜라미, 쓰르라미들의 합창이 시작되고, 가까운 개울에서는 개구리들이 뒤질세라 청승을 떨며 굵은 목소리로 베이스를 넣는다. “찌르르 찌르르, 개굴개굴” 생명을 가진 놈들은 모조리 참여를 하는 듯, 합창 소리가 한창 흥겹게 흐르는 캄캄한 들판, 짝을 찾는 개똥벌레(반딧불이)들이 노랗고 따뜻한 불을 꽁무니에 매달고 현란한 춤을 추며 들판을 온통 노란색 불꽃으로 수놓는다.

내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면, 나와 사촌들은 저녁밥 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반딧불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 같다. 엎어지며 자빠지며 노란 불빛을 보고 내달리지만 날아다니는 놈들이라 쉽게 잘 잡혀주지를 않는다, 어찌어찌 하다가 한 마리를 붙잡기라도 하면, 마치 귀한 보석을 손에 넣은 듯, 우리는 조심조심 양쪽 손으로 그 빛을 움켜쥐고 들여다본다. 꼭 움켜진 손가락 사이사이로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꼬물꼬물 새어나오는 것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스한 불빛, 나는 그 빛을 막아 보려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양쪽 손을 꼬옥 움켜쥐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불빛, 내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노란빛을 뿜어내는 작은 요정 같은 개똥벌레, 나는 그 빛이 너무 신기해 마치 꿈을 꾸는듯했고, 그런 때면, 가슴 깊이 숨겨져 있던 행복감이 오색찬란한 무지개로 피어올라 등줄기를 타고 살금살금 흘러내림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고 해도 어둠이 삼킬 수 없고,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 이것이 빛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빛 되신 주님을 영혼에 품은 삶, 어두운 그림자로 덮을 수도 감출 수도 없고, 빛을 품지 않은 채, 빛 된 삶을 살아내기 역시 쉽지가 않을 것이다.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사는 삶, 그리 만만하지도 녹록지도 않다.

나는 오래 전, 사랑하는 지인으로부터,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면 편한데....나뭇잎 하나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참으로 힘든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야곱과 같이 험악한 세월을… 나그네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멜을 받고 공감하며 가슴이 울컥, 눈물이 솟구침을 느낀 적이 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성도가 거대한 세상 속을 살아가노라면 때때로 자신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억지가 버젓이 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주님 안에서 바르게 살아보려는 몸부림이 어리석게도 보이고 그런 자신이 한없이 작게 보여지기도 한다. 때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창피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일들을 종교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행하고도 당당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 버텨오던 신앙의 힘이 맥없이 무너져내리며 기운이 스르르 빠져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빛의 자녀가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 진리의 길을 걷자고 외쳐보아야 무슨 유익이 있을까…정의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을 믿음으로 맞서 싸우려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이고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좁은 길을 걸으라 하신다. 캄캄한 밤에 빛을 밝히라 하시고 썩은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명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 영혼에 빛을 먼저 품어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 46절 말씀).” 주님께서 빛으로 오신 이유가 그 빛을 믿는 자에게도 같은 빛으로 비추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참 빛 되신 주님의 영(성령 하나님께서)이 내 속에 빛으로 들어오신 그 순간에 나는 주님의 빛을 품게 된 사람이다. 내 안에 빛을 품고 있으면 그 빛이 나를 통하여 발산되게 되어 있다. 작은 반딧불이 내 손 안에서 빛을 발하는 동안에는 내가 아무리 그 빛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항상 주위 환경을 탓한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 썩었고 종교계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다고 탄식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빛이 필요한 시각은 주위가 캄캄했을 때가 아닌가? 방부제 역활의 소금이 필요한 때는 그냥 두면 음식을 썩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한 체, 의로운 체, 잘 믿는 체, 사랑하는 체, 충성하는 체,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려고 몸부림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부닥치게 되면 낙심하기도 하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하고 더 심하면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형적 열심파( 골 4:14절 참조)데마도 결국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딤후 4:10절 참조)바울을 떠났음을 볼 수 있다.

성도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참 빛 되신 그분을 마음속에 모시는 그 길 뿐이다. 그런 다음, 내 속에 계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절 참조) 말씀 하셨다.

종교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을 모셨는가? 아니면 모신 척 가장 하는가? 이런 차이는 순금과 도금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정말 예수님을 모신 성도라면 그 속에 있는 빛이 희미하게나마 밖으로 발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원리가 적용된다. 작은 반딧불이의 불빛마저 감출 수 없거든 하물며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물론, 성도라고 해도, 이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늘 승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코 세상이, 흑암이, 성도를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은 성도의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짜는 다르다. 아무리 껍데기로 잘 믿는 것 같고, 열심을 내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참 빛 되신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에 빛을 나타낼 수 없다. 이런 상태는 과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믿음, 도금한 금과 같은, 외형만 번쩍이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삶, 종교인의 삶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은 이런 도금한 금과 같은 가짜 성도들을 바라보고 갈팡질팡한다. 이런 잘못된 사람들을 기준 잣대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시켜 손가락질 한다. 이런 현상은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타남을 보게 된다. 믿음 좋은 사람이 가정에 소홀히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믿음 좋은 사람이 사기 치고, 도적질 하고, 간음하고, 살인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도금한 금과 순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자칫 외향적인 믿음, 나타내 보이는 열심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로지 참 빛을 그 영혼에 품은 사람을 가리킴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비록 조금씩이나마 삶의 변화와 성장이 따름을 보게 된다. 산 생명을 소유한 모든 사물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자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다. 생명이 없는 것은 변화도 없다.

고로 성도는 오늘 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점점 더 성숙해 지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성화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성도의 마음속에 빛으로 내주해 계신 그분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지키시되 그리스도의 그날까지 우리를 견인해 주실 것이다.

“너 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 14-16절 말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 칼럼글/최송연



부제: Knowing Christ

“전체란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것이다.”(A whole is that which has beginning, middle and end.) 라고 이야기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신앙생활을 전체(whole)로 본다면, 이 또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일괄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시작과 중간 그리고 그 끝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신앙생활에 실패할 이유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부어주신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그 끝은 무엇이어야 할까?

필자는 오래전 이단에 빠진 한 청년이 그 이단 신학교(신학원)를 수료하면서 소감문을 발표한 것을 어느 글에서 관심 있게 읽어본 기억이 있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세 교회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그리고 군대에 갔을 때는 군종병들이 교회 다니는 상관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병들을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가려 했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 다니던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님이 여자 문제로 사모님을 버리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단 단체에 속하게 된 동기라고 했고, 이단 신학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이단에 빠진 자)는 본질보다 비본질에 눈길을 돌렸고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사냥꾼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신앙생활 출발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중간이 잘못된 것이다.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중에서, 지금 우리가 믿는 주님이 잘못되었거나, 우리의 신학이나 교리가 잘못되어서 기독교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이 청년은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관한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듯 하다. 즉, 본질보다는, 비본질, 그러니까 죄인 된 인간들 삶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는 비본질(거듭나지 못한 장로님들의 부족함, 열심만 있는 군종 상관, 타락한 삯군 목자) 이런 인간의 부족한 부분에 자신의 신앙생활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실수할 때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결국, 그는 하나님을 떠났고 이단이 쳐둔 덫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그는 또 이단 신학교 졸업식사 서두에 "천지의 대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들을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주신 예수님, 그리고 오늘날 약속의 실체가 되셔서 영적 새 이스라엘 12 지파를 창설하신 우리의 이기신 者, 총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라면서 하나님께가 아닌, 그 단체의 교주에게 영광을, 그리고 찬양을 올렸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경험들이 어느 정도로 진실에 근거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실망하고 좌절하였다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지(無知)”때문이란 것이다! 이단으로 넘어가 이단의 교리를 배우고, 성삼위 하나님이 아닌 '인간 이긴 者(그들의 교리에서 '이긴 자'는 복수 형태로 사용될 때에는 그 신도들을 가리키며, 단수로 사용될 때는 인간 교주를 그리고 인간 교주를 가리킬 때 '이긴 자'라는 존재는 보혜사, 사도 요한격 목자, 약속의 목자 등으로 일컬어진다고 한다)에게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는 것은 분명히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말로, 그가(이단으로 빠진 청년)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배우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고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 정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신관(神觀):

그리스도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우리 ‘ 주 예수 그리스도’한 분 뿐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한다. 무슨 뜻인가?

하나: 예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한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이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이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 참조)

: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이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요즘 각광하고 있는 사이비 자칭 이긴 자(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신관(神觀)이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그리스도(Christ)란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살펴보면,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선명한 뜻이 함축돼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이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 것이다.

넷: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심판 主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 1) 첫 번째 오신 주님은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희생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오실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심을 믿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하늘 어딘가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가 잘하면 복을 주시고 잘못할 때는 벌을 내리시는 분,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우리네처럼 변덕스럽거나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성령의 조명 하심을 힘입어,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정립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 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 한다!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바로 믿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관(神觀)을 제대로 정립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요즘처럼 교계의 형편이 바닥을 치는듯하고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반기련이나 이단 사설에 미혹되는 이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적, 지성적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이요,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가?” 정확한 개념을 배우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 설교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정도의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소리일까?

현대는 신학교도 많고, 교회도 많고, 종교 지도자라 칭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지도자 자리에 들기 좋아하여 싸우며 다투기를 즐기지만, 막상, 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이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머리로만 아는 예수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고 받아들인 신앙인이 매우 드문 현실이다. 육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영의 일이다. ( 요 6: 63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無知)는 자신 뿐아니라, 수많은 영혼을 지옥 백성이 되도록 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무서운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무한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으며(롬 11:36),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롬 3:23-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이란 것(롬 5:8; 벧전 3:18), 이 사실 하나만 분명히 알고 있다면, 결코 이단으로 미혹되거나 빠질 이유가 없을텐데....

우리 신앙생활은 출발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야 하고, 가는 길, 중간도 주 예수 그리스만 바라보아야 하며, 신앙생활의 끝(Final)도,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되는, 올바른 신관(神觀)을 세워야 한다. 고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돼, 힘써 알고, 분명히 알도록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 22-26)"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아직은 이른 아침, 촉촉한 숲으로 간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에서 얻은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는 힘이 있기에 피곤하고 지칠 때면 나무가 울창한 뒷산을 곧잘 찾게 된다. 숲은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작은 풀잎 하나에까지 저마다 독특한 향이 있어 한데 어우러지지만, 그 향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감과 행복감을 안겨주기에 좋다. 살아 있는 산 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흔히들 말한다. 사람에게서도 저마다의 향이 있다고…정말 그런 것 같다. 사람도 산 생명일진데 어찌 고유의 향이 없겠는가? 어떤 사람은 가까이 있기만 해도 편안함을 선사해 준다. 어떤 이는 멀리 있어도 진실함과 든든한 느낌을 향기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

반대로 가까이하기에 너무도 먼 당신, 안타깝게도 유행가 가사처럼 실제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무서운 사람이 비단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성도라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멀리서만 바라보아야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서 사귀다 보면 실망을 넘어 허탈감을 갖게 된다. 대개는 여의롭지 못한 삶에서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 채앙금으로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조금만 불이익을 당한다 생각될 때 거품처럼 독을 뿜어내는 것이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상상을 불허하는 거칠고 독한 언사가 거침없이 솟아남을 보고 아연실색할 때도 있다. 이런 이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도 향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다 같은 사람에게서 나는 향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다른 것일까
?

1. 새로운 피조물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향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한 상태이다. 아는(knowledge)것이 아닌, 믿는(Faith)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 9) 그리스도가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는 그 순간이 바로 거듭나는 순간이요, 새 사람을 입게 되는 중생(αναγέννηση)의 순간이다, 흔히들 말하는 종교인, 표면적 유대인과 참 그리스도인, 진실로 거듭난 성도의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여도 넘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거듭난다는 말을 도덕적, 윤리적 변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거듭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한 진단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은 이성의 고백이 아닌 성령의 감동 하심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을 의미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

하나님과 단절된 심령은 뿌리가 뽑힌 나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가 생명의 본체인 땅에서 뽑힌 상태라면 형태는 나무이지만 그 나무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땅에서 뽑힌 후 얼마 동안은 입이 푸르고 청청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시들시들하다가 곧 말라서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로마서 3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다. 존재론적인 인간의 죗값은 죽음이다( 6:23).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낼 수 없다. 어느 한순간, 극한 상황을 만나면 속에 감추어두었던 죄 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가 있다
.

이렇게 속 사람이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 산 생명이신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사람은 겉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나 그 속에 생명이 없다.(1 5: 12 참조) 그리스도의 영, 산 생명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죽은 영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 겉 사람, 외면을 아무리 잘 치장하고 지성으로 포장한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국 사망의 냄새가 난다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

죽은 생명에서는 결코 산 생명의 향기를 발산해 낼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고후 2: 15- 16 참조)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 그러니까, 겉은 하얗게 회칠을 했으나, 그 속은 죽은 상태이기에 썩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노라고 착각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우리 주님의 무서운 질책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2. 속 사람을 강건히 하라

거듭난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속 사람, 영으로 거듭난 새 생명을 강건하게 해야 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3: 16) 사람들이 대개는 거듭남의 축복만 자랑하고 그 거듭난 상태가 어떠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라, 성도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야말로 시궁창에서보다 더한 악취를 뿜어내고 이로말미암아 현 기독교계가 이방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속 사람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가 강건해야 나무가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 나무의 생명은 뿌리의 건강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

필자는 난(
)을 무척 사랑한다. 무엇보다 그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지니고 있는 고상한 품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듯하여, 많이 흠모하는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의 고상한 품격을 흠모하는 만큼, ()을 가꾸면서 자신도 가꾸어야겠다고 하는, 어떤 고상한 도전의식 같은 것을 고취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여, 손바닥만 한 필자의 아파트 작은 창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언제나 난()이 자라고 있다. ()은 그 아름다운 모습만큼, 가꾸는 것 또한 여간 정성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물을 너무 자주 주어도 안 되고 물을 너무 주지 않아도 탈이다. 늘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햇볕, 그리고 적당한 필수영양을 공급해 주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야 한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세상 살다가 사라져 가야 하는 뿌리 뽑힌 나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 건강을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이적과 기사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사람도 많다. 다른 이, 자칭 신령하다는 어떤 인사들의 감언이설, 주워들은 풍월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그대로 그 자리에서 머문다면 어찌 건강한 인간으로 성숙해 질 수가 있겠는가…난(
)을 가꾸는 마음으로 자신의 속 사람을 가꾼다면 그 속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튼튼하게 잘 자랄 수 있을 것인가?

2.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비례만큼, 죄의 습성은 약하게 된다.

칼빈은 의지(意志-the will)의 노예 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지배받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를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한 설명을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어 서술하는데, 인간의 의지(意志-the will)를 말(horse)에 비교하여 기수가 하나님일 경우 바른 길을 가게 되고 내 의지(意志-the will)를 사단이 기수가 되어 조종할 경우 결국 절벽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선행을 위한 자유 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곧 의지(意志-the will)의 노예 성이며, 인간 의지(意志-the will)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을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필연성(necessitas)과 강제성(coactio)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펠라기우스의 "만약 죄를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라는 말에, 칼빈은 인간이 죄를 진 것은 의지를 반대해서 된 것도, 강제로 한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인간은 마음의 가장 커다란 열정을 갖고서 죄를 범했으며, 또 인간의 본질은 너무나 부패한 나머지 악을 향하여서만 움직인다고 반박하고, 인간의 의지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 의지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이 구절들은 이단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한데, 이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런 뜻이다
.

이것이 거듭난 성도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거듭나기만 하면 그 이후에는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해서 타락한 본성이 갑자기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거듭난 후에도 그 안에 찌끼처럼 남아 있는 육신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기울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옛사람의 행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무엇보다 죄의 실체와 해악을 깨닫게 되며, 죄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와 삶을 망가뜨리고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선한 복들을 가로막는지 알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혐오하시는 지를 깨닫게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증오하시는가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아직 죄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하드라도, 죄에 대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새롭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을 통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전과는 달리 얼마든지 죄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고 또 그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신학상 술어로 성화(sanctification), 그 나라에 가기까지 견인(perseverence)해 나가시는 성령님의 은혜(grace)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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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서부터 변화된 상태가 거듭난 상태라면, 그는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며, 날마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마음속에 품지 않으면, 표면만 부드럽고 고요하여 마치 가슴에 가스와 마그마 같은 불필요한 것을 품고 있는 화산 같다. 화산은 터지기 전까지는, 표면적으로 더없이 고요한 것 같으나 그 속에 엄청난
가스, 마그마 따위가 있어서 그것들이 지각의 터진 틈을 통하여 지표로 분출하면 그렇게 무서운 화력을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산속이나 바다 속에서 불필요한 가스, 마그마 같은 이물질이 부글거리고 있는 한, 어느 시점에 가서 틈새가 보이면 그만 뢀화산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런 날에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 모두, 그 불길 반경에 있는 사람을 태워서 죽일 수도 있다.

서기 79 8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쳤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 산 기슭에서 ‘사루누스’ 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 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 멋지게 꾸며주고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가 오듯 쏟아져 내렸다. 새들은 날다가 나뭇잎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 새 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그 무서운 불길은 끝내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 네이버 백과 사전 참조


오늘 아침, 주께서 내게 주신 깨달음은, 성도는 과거 폼페이시의 멸망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수비오’ 산은, 영적으로 각종 죄악의 불, 시기, 질투, 음란, 사기, 협박, 공갈, 이런 온갖 악독으로 가득채운 마음재앙을 가슴 속에 품은 표면적 유대인의 멸망을 예고해 주는 본보기란 것이다. 폼페이시의 멸망, 그것은, 언제가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너무 많은 가스와 마그마 같은 것을 ‘베수비오’산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베수비오’ 산이 대폭발을 일으키기 전까지, 표면적으로는 더없는 고요를 누리는 것 같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노래했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 혹은 거듭났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을 강건하게 성장시키지 못하여 죄의 속성, 멸망할 지옥 불을 가슴 속에 품고서야 어찌 안전하겠는가…

그런고로, 우리는 거듭난 것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속 사람(inner person) 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갈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이 내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말씀에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
)에 물을 주듯, 날마다 기도로 내 영혼의 메마름을 적셔주어야 하고, 햇빛 같은 그리스도 사랑의 빛이 내 영혼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오래 전 저를 아껴주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댓글 중, "
人香百里, 茶香千里, 蘭香萬里"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눈에 띈다사람의 향기는 백리, 차의 향기는 천리, 난의 향기는 만리...라는 뜻이겠는데...생각해보면, "人香"이란 하나님 나라에까지 올라갈 것이니, "人香"의 퍼지는 길이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3: 17-19) 오늘 이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5-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최근, 나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

내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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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일괄적인 톤으로 한 하나님이 삼위(세 위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는 분명히 특별계시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고, 인간 이성으로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기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라고 말들 하지만, 필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 받는 그때부터 그 사실이 분명한 사실로 믿어졌다. 이것이야말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성령 하나님의 조명 하심이라 믿으며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혼동에 처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삼위일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던 유능한 신학자, 목회자가 이단으로 지목받아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극심한 논쟁으로 이어져서 사랑 안에서 하나로 굳게 뭉쳐져야 할 형제 자매가 서로 손가락질 하며 한 치의 양보함 없이 다투기도 하여, 안티와 이단들이 손뼉치며 즐거워하도록 하는, 정말 가슴 아픈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쉽게 설명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영혼들을 바로 세워줄 수가 있을 텐데…늘 기도하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오늘 아침, 주께서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이다.” 깨우쳐 주신다. (요 10: 30절 참조)

그림자와 실체는 엄연히 그 생김새나 모양이 다르고 활동영역도 다르다. 그림자는 빛의 경로 상에 불투명한 물체(object)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 때문에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란 것이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필자는 아주 오래전(약 6년 전쯤인 것 같다),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과 삼위일체 론에 부딪혀 한 판 설전을 크게 벌렸던 적이 있고, 그때, 아멘넷 운영자 님과 편집위는 필자의 손을 들어준 고마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전도사님이란 분의 주장인즉슨,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主)시요, 메시아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강하게 우겼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전도사님의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 목회자님들의 질문이며, 이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기에 많은 이단들이 정통교단에서 파생되기도 하고 여호와증인 같은 이단 종파들이 즐겨 인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만 제대로 정립된다면 삼위일체가 그리 어려운 교리적 산물만은 아닌, 성경의 핵심 사상인 것을 믿을 수 있고, 예수가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단코 이단으로 넘어가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여,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되심, 그리고 정통 교단이 인정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시는가?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대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2.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성부, 말씀(성자),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심을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 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서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 (빌2:5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4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 2;13)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시록 1: 8절)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 8절) 성경의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 13) 천명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고 계신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 증거하신다.
대부분의 말씀이 그러하듯, 요1서 5:7절 말씀은 한글 번역판보다 영어성경이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현대 우리나라의 많은 목사님들께서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림자, 실체, 그리고 빛의 관계성:
예수님, 그림자, 빛, 이 셋을 따로 떼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예수님 한 분을 신약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실체, 요1:1 ), 빛(요 1: 4), 구약에서 율법(오실 이의 그림자, 골 2: 16- 17)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율법)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오실분의 그림자인 율법)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6-17)
 
그림자 =율법(율법=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 실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빛(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는 물로서, 바위로서 표현되기도 하나 관계성을 설명하려니까 그림자와 실체 그리고 빛을 연관짓되 성경의 정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 1-9) =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그분은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성경은 증거하신다. 그러나 온전히 다른 위격을 소유 하신 분, 한 분 하나님이시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 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번역문
 
결론적으로, 인간인 우리의 그림자(shadow)가 실체(substance))와 따로 떨어져서 일 할 수도 없고 그림자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빛을 통하여 생성되는 그림자와 실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 10: 30절 참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려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그분의 신비함(mysterious)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숨겨진 비밀이며 주의 영으로 계시(revelation)해 주시고 성령의 조명 하심을 입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의 비밀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것일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도록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림자에 생명을 입힐 수도 있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실 수도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히 알게 된다면, 삼위일체 론(論)이 이해되지 않을 이유 없고, 성경에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그 정신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이시니,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 물 그리고 피니 이 셋이 하나로 일치하니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요 5: 7-8)
 
위 성구는 KJV 의 같은 구절을 필자가 그대로 직역해 본 것입니다. 삼위 일체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주의:
어떤 사람이 모함하여 말하기를,
필자가 빛은 하나님, 말씀(예수 그리스도 곧 실체), 성령님은 그림자(예수님의 그림자)라고 설파한다고 몰아가며 비방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설명할 때, 그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갖추신 분이란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 5)예수님이 빛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시요, 율법으로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란 것이다
 
 
아래는:
본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밝히신 독자님의 글을 이곳에 옮겨다 놓습니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별이 사모님의 칼럼에 발제자의 영성을 신뢰하기에 +10 추천으로 우선 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언뜻 이해하기에 벅찼습니다. 처음 대하는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 라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설명 하는 새로운 명제에 걸려 더 이상 읽어 내려 갈수가 없었습니다.

발제자가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전제를 달아 놓았듯이 의아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명제 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와 실체”로 설명하는 예가 성경에서 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 갑니다.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골2:17),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계속 드리는 똑같은 제사로는 예배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히10:1)”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위와 같이 율법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예로 성경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으로, “그림자와 실체”로 “삼위일체” 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 전혀 무리가 있다 할 수 없다.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확인 합니다.

"삼위일체" 를 설명하는 새로운 대 발견이다.
“휴” 과연 별이 사모님 이시다. 안심 입니다.) - 잠긴동산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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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일이다. 본국에서 유명한 어느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자신을 ‘서울의 어느 신학대학원의 교수라’고 밝힌 한 교수님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가?’ 라는 거창한 명제 아래 밝힌 글의 요지는 결국, 현대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끝을 맺고 있음을 보았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신학대학교 교수라고 자신을 밝힌 그 교수님은 이런 엄청난 명제를 다루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단 한 구절의 성경 말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청교도들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과 또 여러 신학자의 견해가 그러함으로 그러하다.라고 하는 경솔함에 놀랍다 못해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다시 말해서 그 교수님은 성경 말씀을 가감(減)하는 죄를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범하고 있으며 들은풍월이나 자신의 지식만으로 성경을 다시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 교수님 한 분뿐이랴, 안타깝게도 현대는, 성경을 자신의 잣대로, 입맛대로 가감하기도 하며 다시 쓰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성도)는 오늘날도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요 10장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요 10장 26절)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라고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직통 계시적 형태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성도)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요, 사용되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어야만 한다. (행 27: 22-25 참조)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1. 특별계시, 혹은 기록(문서)계시, 2. 일반(자연)계시로 나눈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말씀을 가르키며,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성도(양)는 반드시 목자의 음성, 곧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우리들의 속에 계시면서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몫이며, 반드시 성경 말씀을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밝히 들려지고 필요한 말씀이 생각나게 도우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양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목자로서 양들을 바른길,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다. 언제 어느 때 장사가 잘되고 또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고 없고, 등등…이런 유의 점치는 형식이나 족집게 점쟁이 식의 음성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14: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다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음성듣기 분별 법 성서에 따른 근거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 21절) 했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 할 때나 무시로 기도 할 때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그 음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여 수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 내는 훈련을 시키셨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된 대언은, 그 정확성에서 단 한 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 되어야만 한다.

1.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23절 하반 절)".

2.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성구가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 14: 26절)

3.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 32절)”.

4.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1:41-45절)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치며 성령님의 하실 일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 의식이나, 직통계시 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자주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풍월, 혹은 배운 신학 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과 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바른길(道)을 걷자

나는 지금 섬기는 교회로부터 3주간이란 긴 휴가를 허락받은 남편과 함께 넓디넓은 "시카고"를 여행 중이다. 아름다운 미시건 호수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호텔에 머무는 특권을 얻고 아침저녁으로 바람결 따라 은빛으로, 잿빛으로 물의 무늬가 달라지는 화려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쉬는 시간도 행복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는 그 규모부터 판이한 "시카고", 이곳처럼 길이 여러 곳으로 갈라진 곳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쭉쭉 곧게 뻗은 길이 여러갈래로 난 낯선 곳을 렌터카로 운전하며 이곳저곳 누비는 즐거움 또한 쏠쏠하다.

이곳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도우미가 없다면 발이 호텔에 묶여 있어야 하겠지만, 다행하게도 네비게이션(GPS)이 자동차마다 부착돼 있어서 그 네비게이션(GPS)이 가르쳐주는 데로만 가면 초행길의 운전이라고 하여도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음을 배우고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바른길(정도)을 안다는 것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금 바른길과 잘못된 길에 대한 귀한 교훈을 배우는 계기를 얻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또한 즐겁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달아나는 듯 작은 행복감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했던가? "전체란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것이다.”(A whole is that which has beginning, middle and end.) 라고. 모든 길도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겠지만, 신앙생활 역시,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앙생활을 전체(whole)로 본다면, 이 또한 시작과 중간(과정)과 끝이 일괄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시작과 중간(과정) 그리고 그 끝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신앙생활에 실패할 이유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부어주신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그 끝은 무엇이어야 할까?

필자는 오래전 이단에 빠진 한 청년이 그 이단 신학교(신학원)를 수료하면서 소감문을 발표한 것을 어느 글에서 관심 있게 읽어본 기억이 있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세 교회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그리고 군대에 갔을 때는 군종병들이 교회 다니는 상관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병들을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가려 했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 다니던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님이 여자 문제로 사모님을 버리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단 단체에 속하게 된 동기라고 했고, 이단 신학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이단에 빠진 자)는 본질보다 비본질에 눈길을 돌렸고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사냥꾼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신앙생활 출발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중간이 잘못된 것이다.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중에서, 지금 우리가 믿는 주님이 잘못되었다거나, 우리의 신학이나 교리가 잘못되어서 기독교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이 청년은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관한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듯 하다. 즉, 본질보다는, 비본질, 그러니까 죄인 된 인간들 삶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는 비본질(거듭나지 못한 장로님들의 부족함, 열심만 있는 군종 상관, 타락한 삯군 목자) 이런 인간의 부족한 부분에 자신의 신앙생활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실수할 때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결국, 그는 하나님을 떠났고 이단이 쳐둔 덫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그는 또 이단 신학교 졸업식사 서두에 "천지의 대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들을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주신 예수님, 그리고 오늘날 약속의 실체가 되셔서 영적 새 이스라엘 12 지파를 창설하신 우리의 이기신 者, 총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라면서 하나님께가 아닌, 그 단체의 교주에게 영광을, 그리고 찬양을 올렸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경험들이 어느 정도로 진실에 근거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실망하고 좌절하였다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지(無知)”때문이란 것이다! 이단으로 넘어가 이단의 교리를 배우고, 성삼위 하나님이 아닌 '인간 이긴 者(그들의 교리에서 '이긴 자'는 복수 형태로 사용될 때에는 그 신도들을 가리키며, 단수로 사용될 때는 인간 교주를 그리고 인간 교주를 가리킬 때 '이긴 자'라는 존재는 보혜사, 사도 요한격 목자, 약속의 목자 등으로 일컬어진다고 한다)에게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는 것은 분명히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말로, 그가(이단으로 빠진 청년)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배우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고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 정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신관(神觀):

그리스도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우리 ‘ 주 예수 그리스도’한 분 뿐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한다. 무슨 뜻인가?

하나: 예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한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이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이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 참조)

둘: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이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요즘 각광하고 있는 사이비 자칭 이긴 자(이만희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신관(神觀)이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그리스도(Christ)란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살펴보면,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선명한 뜻이 함축돼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이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 것이다.

넷: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심판 主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 1) 첫 번째 오신 주님은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희생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오실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심을 믿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하늘 어딘가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가 잘하면 복을 주시고 잘못할 때는 벌을 내리시는 분,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우리네처럼 변덕스럽거나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성령의 조명 하심을 힘입어,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정립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 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 한다!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바로 믿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관(神觀)을 제대로 정립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요즘처럼 교계의 형편이 바닥을 치는듯하고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반기련이나 이단 사설에 미혹되는 이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적, 지성적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이요,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가?” 정확한 개념을 배우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 설교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정도의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소리일까?

현대는 신학교도 많고, 교회도 많고, 종교 지도자라 칭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지도자 자리에 들기 좋아하여 싸우며 다투기를 즐기지만, 막상, 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이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머리로만 아는 예수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고 받아들인 신앙인이 매우 드문 현실이다. 육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영의 일이다. ( 요 6: 63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無知)는 자신 뿐아니라, 수많은 영혼을 지옥 백성이 되도록 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무서운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무한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으며(롬 11:36),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롬 3:23-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이란 것(롬 5:8; 벧전 3:18), 이 사실 하나만 분명히 알고 있다면, 결코 이단으로 미혹되거나 빠질 이유가 없을텐데....

우리 신앙생활은 출발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야 하고, 가는 길, 중간(과정)도 주 예수 그리스만 바라보아야 하며, 신앙생활의 끝(Final)도,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되는, 올바른 신관(神觀)을 세워야 한다. 고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힘써 알고, 분명히 알도록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사순절이다. 절기에 연연하기 이전에 사순절의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배운다면 좋겠다. 신앙생활의 정도(道)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Knowing Christ)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Christ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 22-26)"





출처: USA아멘넷 /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행복한 당신


철학 용어에 존재(存在, being)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이라고 나온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자)’도 어떤 뜻에서는 존재자의 일종이라고 한다. 그 말뜻과는 별개(別個)의 문제지만, 필자의 생각에 지금 있는 것은 무엇이든 미래에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더 나은 모습일 수도 있고 더 못한 모습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죽은 후에도 미지의 어떤 양상으로든 존재는 존속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지금 있다(존재)는 것이 어느 한순간 영과 육의 분리(죽음)로 인해,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고 하여도 그 자체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인간의 영(spirit)은 불멸한다고(전 12:7하 참조) 말씀하고 있고, 다른 사물도 천국 혹은 지옥에서 존재할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해 주셨음을 보아 확증할 수 있다. ( 마 26:29절 참조)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도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 전 1:9-10절 말씀).”

우리가 늘 새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새해라기보다는 또 다른 한해의 시작일 뿐이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하루고 내일도 같은 하루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 숫자를 부여하여 셈을 하고 무언가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건 만물 중, 오직 인간뿐이다. 끝이면 다시 시작하고 시작은 또 다른 끝을 기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916년 이후 상대성이론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확장시킨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이론에서 공간과 시간을 합쳐 단일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인슈타인’ 이전의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시공(時空)은 단일개념임을 우리에게 이미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역시, 우리 주님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이랴.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8절 말씀).”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만 영존(永存)하시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은 바 된 우리 인간도 영존(永存)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으로 영존(永存)하시지만, 우리 인간은 시작한 날이 있고 그 시작한 날부터, 영존(永存)한다는 차이가 분명히 있음을 밝혀둔다.)

잠시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고,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것도 결국, 주님의 눈앞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잠시 분리된 상태일 뿐, 모두 살아 있는 자들이란 것이다. 주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살아 있다….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러니까, 우리의 눈높이를 좀 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해란 새것이 아니라,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어느 한 간점선(間點線),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생각을 가져야 더 멀리, 더 높이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차원의 세계, 하나님의 계획 하심마저 바라볼 수 있는 시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헛된 행복을 잡으려는 인간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8절 말씀).” 이 고백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가? 세계에서 가장 부귀영화를 누린 대왕 솔로몬이다! 그는 글자 그대로 부. 귀. 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다.“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했다고 했다. 현대판 학위로 치면, 그는 문학 박사, 정치학 박사, 철학 박사, 종교학 박사, 식물학 박사, 생물학 박사, 광물학 박사…등등… 재물 또한 엄청났고, 모든 남성의 꿈인 (나의 의견이 아닌, 통속적인 관념) 아름다운 여인들, 왕후가 육십, 후비가 칠백, 비빈이 팔십, 빈장이 삼백인, 그 외에도 무수한 시녀들( 왕상 11:3절, 아 6:8절 참조) 이런 그였으니, 인간으로서 무엇을 더 소원하며 무엇을 더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런 그가 내린 결론은,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될 뿐이다.” 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 이생에서 바라고 소원하는 그 모든 것들은 헛되기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고, 사막의 신기루요, 무지개를 좇는 것과 같다고 하는 데는 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사막의 신기루란 어떤 것인가? 신기루란, 광학(光學)에서, 빛의 밀도가 서로 다른 공기층에서 굴절함으로써 멀리 있는 물체가 거짓으로 보이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우리 인간에게 이런 거짓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창세기로 되돌아가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창 3장 참조). 저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그 대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요 3:36절 참조)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인생, 저주받은 인생이 저주받은 땅 위에서 행복을 잡으려고 달음박질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헛된 것으로서, 우리의 병든 안목, 굴절된 안목으로 보이는 무지개 같고, 사막에서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을 뿐이다. 행복을 좇아가지만, 안타깝게도 행복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나고 목마르고 지친 인생, 결국은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지은 인간이 가야 할 the last destination이요, 숙명이다.

행복한 당신: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행복해 질 수 없는가? 새해에 우리가 지녀야 할 최대의 목표, 진정한 행복을 소유하는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행복을 잃어버렸고 대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였던 사람들이다. 그 속박된 굴레를 벗어던지고 병든 영혼과 육신을 회복시키기 전에는 결코 진정한 행복이란 없다. 먼저 인간 본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본 필자의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셨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죄인 대신 죽어주셨기에 그 피는 효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굴절되고 어그러진 신분, 죄인 되었던 신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다.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다. 수학도 아무리 간단한 공식이라 해도 그 공식을 무시하면 안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엔 자신의 환경과 삶의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불행하게 사는 부자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몸이 건강하지 않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 중에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불행의 원인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행복의 조건이다.

죄가 빼앗아가 버린, 하나님이 주셨던 좋은 선물을 되찾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안에서만 인간 본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 그분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죄가 가져다주었던 모든 불행으로부터도 구원해 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영원까지 행복한 사람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가 가져다준 본성과 죄가 만들어 놓은 환경과 죄가 준 삶의 무게 때문에 불행하게 살았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는 다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불행의 조건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환경에 지배되어 불행하게 살던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 더는 환경에 눌려 살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불행을 이기면서 환경을 지배하며 살게 된다.

결론적으로,
존재(being)는 그 자체가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spirit)으로서 존재하며 그 영(spirit)이 갈 곳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결정지어진다. 천국 백성도 영원하고, 지옥 백성 또한 그 영과 육이 부활한 후에는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불 못에 던지우되 영원히 후회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계 19:20 절 참조).

해마다 새해가 되면, 계획이라는 명분 아래 이것저것 높이 쌓아 올리던 공중누각, 제대로 한 번 성취한 적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짓에 시간과 마음 빼앗기지 말자. 새해라고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 차라리, 인간이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제대로 된 고민을 한 번 해볼 필요가 있고, 구원의 기초부터 확실하게 다져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간 본질이 변화되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엇무엇을 가지지 못해 불행하다는 낮은 생각에서,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으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한 점 후회 없는 멋진 인생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 절망뿐인 인생,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인생에게 이 영원한 행복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보석보다 값진 인생이 될 것이다. 내가 먼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전하는 일, 그 일만이 헛되지 않은 일, 영존(永存)하는 당신의 존재(存在)가 영원토록 빛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최상급의 멋진 일이 될 것이다.

고로, 행복한 당신, 그대는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사람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3-14절 말씀).”


글: 별똥별/최송연



전쟁으로 폐허가 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오기 위해 인천공항 로비에서 대한민국 교회를 향해 예언한다는 홍혜선 전도사.

이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세 가지 다른 반응을 보게 된다.
                      1. 극한 두드러기 현상을 보이면서 무조건 반대만 하는 분
                      2.. 쌍수로 환영하는 분(미국으로 도피하기 바쁨)
                      3.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진가민가 한 분(관전, 관망자)

이렇게 분류하여 볼 때, 2번 3번은 분별력이 없는 부류이며
1번은 분별을 할 수 있기에
강한 반대의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으나
실상은 세 부류 모두 다 분별의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본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예언자가 비성경적인가? 성경을 토대로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녀(홍혜선)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한 영에 사로잡힌 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은

1) 성경의 권위를 떨어트린다.
그녀는 지금 성경에 없는 직통계시를 하고 있다
(성경은 말씀을 가감하는 직통계시를 금하고 있다. (계 22:18 참조))

2) 대언의 영이란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말함.
1. 성경말씀을 한 구절, 혹은 몇 구절 대언할 때
2. 성경말씀을 풀어 강론할 때(설교나 성경공부)

3) 대언의 영이란 = 1. 보혜사 성령이 셩경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고
                          2. 앞길을 인도하시되 성경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훈계하여 주심

"예언이란 무엇인가? "
최송연의 영성훈련에 올려둔 글을 읽어보시고 바른 분별력을 얻기 바란다.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성경적-예언이란-무엇인가

참으로 영분별이 필요한 시대이다.
너무도 무서운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여인이란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여인은 거짓을 말하거나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혹하는 영,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는 영에 접신된 자이다.

이 동영상을 보시는 목양연가 독자님들은
홍혜선 씨가 말하는 대언의 영이란
주님의 영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한 거짓 영이며
그녀의 뒤에서 조종하는 소름 끼치는 사단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반론: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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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바다를 자주 찾게 된다. 내게 그만큼 스트레스풀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바다를 즐겨 찾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다는 살아있고 바다가 내게 가르치는 교훈들이 쏠쏠하게 제법 많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바다는 나의 감성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스승이라고나 할까...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인생살이의 희노애락(喜怒哀樂), 보다 깊은 삶의 여정을 배울 수 있어 좋고, 검푸른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는 행운이라도 얻는 날이면, 나는 시인이 아니어도 시상(時想) 비스무리한 아름다운 언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제법 형이상학적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에 나는 바다가 좋다.

바다는 날이면 날마다, 때로는 거칠고 높게, 때로는 얕고 부드럽게, 파고의 높낮이는 달라도 파도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사르륵사르륵  모래를 감싸 안듯, 다독다독 다독이듯 부드럽기 그지 없는 천사의 치마 자락 같은 파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치마 자락에 폴싹 뛰어들어 어린애처럼 투정이라도 부리며 실컷 울고 싶을 만큼 정겨운 때도 있다. 이렇듯, 파도가 잔잔한 때면 물과 하나가 되어 물장구를 치면서 키득거리는 천진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비키니 수영복의 눈부신 아가씨들이 한껏 뽐내며 백사장을 활보하기도 하고 수영도 하며 물놀이를 즐기지만, 막상 집채보다 크고 태산만큼 높은 파도가 휩쓰는 때면 유약한 아이들과 여인들, 뿐만 아니라 장정들이라고 하여도 보통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힘을 가진 것이 또한 바다의 위력이다.

바다는 이렇듯 무딘 감성을 일깨우고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바닷가에 매일처럼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이 파도 앞에서 모두 꼭 같은 감정이 아니란 것을 배우게 된다.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극명하게 다른 반응으로 대응하는 두 부류의 인생을 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으르렁거리며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를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더 멀리 달아나려고 도망을 치는 나처럼 유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고의 높이가 더해 갈수록 파도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파도타기를 즐기는 근육질의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 즉, 꼭 같은 환경에서 두 가지 다른 반응의 인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찌 파도 앞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생이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모든 분야에서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천한 자와 존귀한 자, 약한 자와 강한 자,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교수와 학생은 그들대로, 모두 꼭 같은 능력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자와 능력 없는 자로 나뉘게 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뉜다. 알곡과 쭉정이, 가라지와 곡식,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 감사의 사람과 불평의 사람 등등...

믿음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가 믿음, 믿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감사하는 수준과 믿음은 정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감사하는 수준을 봐서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잴 수 있다. 신약에서 병 고침을 받은 열 문둥이 중에서 감사를 알고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만 참 믿음의 소유자로 주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볼 때, 감사하는 수준은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재는 시금석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 된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내가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가 쉬운 대로 부모 자식 간의 예를 한번 살펴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일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치 않는 것은 받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다. 부부지간도 형제. 자매도 이웃 간에도 꼭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설령 내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그저 나와 함께 있어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같이 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떨며 울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이것은 육신 적인 면도 그러하지만 영적인 면도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와중에서 오늘까지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재앙 속에서 여지껏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놀랍고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구원받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십자가의 사랑…인간 편에서 보면, 값없이 그저 받는 은혜요,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의 고귀한 목숨과 맞바꾸어야만 할 만큼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 하나만 제대로 깨닫게 되어도 너무나 크고 놀라워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감사 또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의 감사를 업그레이드 시키자

업그레이드된 감사란 어떤 것일까?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 다니엘의 감사가 바로 이런 감사다. 다니엘은 주어진 환경이 좋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가정이 안전하고 일신이 평안하거나 받은바 은혜가 커서 그 은혜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감사는 죽음 앞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단 6: 10 절 참조) 하박국 선지자 역시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였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좋아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이방인들도 그렇게 한다. 감사에도 두 종류의 감사가 있다. 주어진 환경이 좋을 때 감사하는 것, 주어진 환경이 열악하지만 하나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이 그것이다.

은총도 “일반은총”이 있고 “특별은총”이 있다. 일반은총이란 세상사람 모두가 누리는 은총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햇빛과 비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나 불신자에게 동일하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지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로 선택된 택자들, 창세전부터 구원 얻기로 예정된 자들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이 마음속에서 받아지고 확실하게 믿어진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입술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특별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분류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당신 자신이 믿어진다면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성도의 입에서,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와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실상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서 어려울 때 더욱 감사하라고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려움이 당하게 되면 정금 같은 믿음으로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만 하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네 속물이 위대한 신적 기적을 체험한다고 하여서 감사의 마음이 영원히 식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눈앞에서 홍해가 쫙 갈라지는 크나큰 기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신적 기적이 두 눈 앞에서 실현되는 어마어마한 체험을 하였고,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임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감사는 순간적이었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과 입에서 불평이 떠나질 않았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나는 예외라고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감사와 불평이 번갈아가면서 내 마음을 주장한다면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개인의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도움이 될가 하여 잠시 나눈다. 우리가 개척하였고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사랑하던 교회가 이번에 큰 환란을 통과하였다. 길고 캄캄한 터널 속에서 한 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절망적인 환경에 내던져졌다.(그렇다 순전히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예전의 숫자 2/3 정도가 대풍에 흔들리는 선 과실처럼,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1/3정도가 가차 없이 돌아섰고, 1/3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무대응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작정하였으나 만들어진 말들, 온갖 유언비어가 우리 지역을 강타했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 겪는 일들이었기에 심히 당황이 되었고 낙심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함이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분은 선하시고 모든 일에 섭리하신다.”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을 깨달았다. 이런 때일수록 고개를 들어야 한다. 내가 악을 행하지 않은 한, 반드시 주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다. 큰 환난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은 지금 이 자리에까지 나를 인도해 주시고 세워주신 그분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은 항상 내편이시다! 주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만이 내가 할 나의 본분이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정하니까 마음의 동요가 끝나고 하늘의 평강이 몰려왔다. 물론, 아직은 복잡하고 어렵던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은 확실하게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환난 중에서 성도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목하 배우고 있는 중이다. 교회란 주님의 피로 값 주시고 산 양무리가 모인 곳이다, 그 양무리가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다. 양들의 선택이 내 눈에 올바르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선택을 이끄시는 분은 목자 되신 그분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나니까 형언할 수 없는 평강이 몰려왔고 찬송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교인 쟁탈전도 아닌데 성도가 어디로 가건 얼마가 모이건,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믿으며 교회와 교회 사이에 심판하실 분도 그분이신데 우리가 서로 다툴 일이 뭐가 있는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라 명하신 그분을 감사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자. 내 교회, 내 이웃, 내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함을 깨닫고 따뜻하게 치하해주는 말, 감사함을 나타내는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특별운동이라도 벌려보는 한 주간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듯, 헤아려보면 감사할 조건이 많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없어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 감사치 못하는 것이다. 감사란….오직 깨닫는 자만 느낄 수가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깨닫는 곳에 감사 있고, 감사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환란 중에서 감사하는 성도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성도이다. 이런 차원이 높은 감사, 업그레이드된 감사를 드리는 성도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나는 믿는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50:23)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산호의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되 뿜어내는 바다는 푸르다 못해 녹색을 띠고 작열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해변의 얕은 물 속에는 물과 하나가 된 꼬마들이 키득거리며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고, 세계 각 곳에서 휴가차 모여든 중.노년들이 햇볕을 즐기려고 파둔 커다란 모래찜질 통(?)속에는, 하마처럼 불룩한 배들 때문인지 이곳저곳에 작은 모래 산을 이루는 풍경이 사뭇 나른하고 한가롭기 그지없다. 젊은 청년들은 검붉게 탄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듯, 손바닥만 한 작은 판자 위에서 각종 묘기의 서핑놀이로 파도를 타는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듯 싱그럽다..

사면이 바다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공기와 물이 깨끗하고 맑아 어른들은 물론, 갓태어난 신생아에게마저도 수돗물 그대로를 받아 분유를 타서 마시게 해도 좋다고 의사들이 권한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다투어서 피고 지는 곳, 제각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각종 이름도 모를 꽃들이 풍겨내는 향기는 비행기 트랩을 밟고 내리는 순간부터 그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아름다운 꽃 중의 꽃, 단연 으뜸인 꽃이 있는데, 그 이름은 ‘푸루메리아’이다. 이 꽃은 생김새는 소박하고 색갈은 천사의 날개처럼 하얗고(가끔씩 붉은 색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흰 색이 많다.) 속은 노란 것이 보기에 무척 우아하고 단아하지만, 그 향기만은 단연 양귀비의 미소처럼 고혹적이며, 그 달콤한 향기는 가까이 코를 대면 아찔할 정도로 강열하다. 고운 여인의 눈망울처럼 매혹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암튼, 필자의 짧은 수사학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다.ㅎ

밤낮으로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해풍은 고기의 비릿함이 섞인 짭짤한 바다 내음을 실어 나르고, 제아무리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여름날이어도 집이나 그늘에만 들어서면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것이 마치 청량음료수를 마신 것 같다. 혹독하고 모진 겨울 추위가 없기에, 각종 예쁜 새들이 집 앞에도, 상점이나 식당 앞에도 사람을 친구하자며 날아들어 재재거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음식을 먹을 때면, 한 입 달라는 듯, 더욱 가까이 와서 까만 눈망울을 도르르 굴리면서 애교를 부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기에, 굳이 흠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겨울이 없기에 매일 그날이 그날 같고, 또 하얀 눈꽃 송이를 구경할 수 없다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러시아’ 선교사를 자원한 남편과 함께 ‘러시아’로 발길을 옮기기 전이나 지금이나) 세계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한국에서 온 어느 짓궂은 여행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이야말로 천당 바로 아래 999단쯤 된다.” 고 말하였을 정도라니까, 가히 그 아름다움은 짐작이 갈 것이다. (별님이 사는 곳이 어디메냐고요? 안드로메다? 꼭 집어서 말을해 달라고요? 그것은 독자님의 상상에 맡기려고 해요. ^^ 너무 열어버리면 재미가 없거든요. ㅠㅠ)

정작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사는 지역의 예찬론이 아니라,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을 때, 내가 그 아름다움을 얼마나 즐감하면서 살았던가? 그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었던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일어나는 작은 어려움에 불평이 더 많았던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싶은 마음 진심으로 간절하다. 그때는 내가 처한 환경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열악하고 가장 힘든 것만 같았다. 개척교회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어쩌다가 부정적인 말이 들리기라도 하면, 그 한마디에 여린 성품인 나는 상처를 받고 가슴앓이를 하느라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수없이 많다. 그런 상태였으니까, 주위의 아름다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라고는 전혀 가져보지 못하였다고 해야겠지…

그러다가 막상, 러시아, 그것도 시베리아에서 가깝다는 ‘우수리스크’(연회 주)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삭막함이란 이루 말로 다 형언키 어려웠다. 글자 그대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 척박한 땅이요, 각박한 인심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시사철 겨울이 없는 열대 지방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백팔십도로 회전, 이제는 여름이 없는(있다고 하여도 아주 짧은 순간뿐) 곳에서 겨우내, 밤도 낮도 없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 흰 눈이 무릎까지 폭폭 빠지는 곳, 내게는 낭만적이기만 하던 그 하얀 눈꽃 속에 파묻혀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폭설에 갇혀서 몇 날 며칠 밖에 나갈 수도 없이 집안에만 갇혀서 지내야 했던, 말만 듣던 동장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기를 지녔는지 체험하고 전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좋은 곳에서, 행복 조건을 두루 갖춘 곳에서, 천혜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던가? 뒤늦게야 깨달았고, 주님께 눈물로 회개 자복했던 기억이 감사절을 맞아 새롭게 떠오른다. 감사를 회복하니까, 생활도 회복시켜 주신 주님,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많았던 나를 가르쳐주시고 길러주시기 위함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감사를 제사로 여겨 기쁘게 흠향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시 116: )

우리 인간도 그러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것 같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주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 이런 인간의 심리가 하나님의 성품 중 한 부분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ㅠㅠ 요즘처럼 어려운 세태 속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해한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중에서, 종의 자리에 던져졌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하는 중에서라도 요셉은 어떠했는가?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따로국밥이 아니라면 말이다.

요셉, 그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던져졌더라도 절대 원망하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다.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런 요셉을 주님께서는 애급 제국의 대 국무총리 자리까지 번쩍 들어 올려놓으신 결과를 보면서 우리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각인 시켜야 한다. 요셉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욥도 마찬가지다. 욥도 최악의 상황에서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저주성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아내의 원망 소리에도 굴하지 않더니 결국 그도,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승리자로 주께서 일으켜 세워주셨던 것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늘 듣게 되는 소리가 ‘감사하자’라고 하는 소리이기에, 우리 마음이 무디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형식적인 감사, 표면적인 감사 생활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나의 감사에 대해 전반적인 ‘퍼스펙티브(Perspective)’ 가 이루어져야 한다. 감사의 본질은 무엇이던가?

기왕에 감사할 거면,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 감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니까, 나의 감사 생활을 살펴서 제대로 된 감사 생활로 업그레이드(upgraded) 시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감사에도 세 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다고 한다.(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함께 나눈다.) 영어로 1. If (~ 만일의 감사), 2. because of (~때문에 감사), 3. in spite of (~ 그럼에도 감사)로 나눌 수 있다.
 
첫째, If의 감사. 이것은 조건부 감사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주신다면(물질을 주시면, 건강을 주시면, 내 병을 고쳐주시면 등등.)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조건 단서를 붙인 감사다. 이것은 가장 차원이 낮은 감사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

다음, because of =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내게 물질 축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나와 내 가정의 건강을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내 자녀가, 내 사업이 잘되어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Because of)감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상대적 감사이다. 물론, 이 때문에 감사(상대적 감사)마저도 범인인 우리네에게 있어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음, 실질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영국이 낳은 유명한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0.18~1714)가 도둑을 맞고 낙심 중,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훈련을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옮겨 보면,

1. 이전에 도둑을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2. 자신의 생명이 도둑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3. 아직도 자신에게 무엇(가족, 건강, 이웃 등)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고
4. 자기 자신이 도적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어떤가? 우리는 매튜 헨리의 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3. in spite of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다”. 이 감사는 절대적 감사로서 인간 이성을 넘어선 감사,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욥이나 하박국 선지자가 드린 감사로 극한 환난이나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만 감사하는 것이다. 이런 감사는 인간의 지. 정, 의로 느껴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전적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다. 사실, “감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우’(Ευχαριστώ)인데, 이 말은 ‘’은혜’ (Χάρης, 카리스)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아주 오래전, 한 번 들려드린 기억이 있으나, 너무도 감명 깊은 실화이기에 다시 금 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한다. 절대적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 환경에서나 느낌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오는 것, 실제 인물의 이야기이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고 하는 유명한 장애시인이 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심한 열병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 결과로 그는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며 말도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식물인간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고통스러운 몸과 마음이 되어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런 그에게 이웃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찾아와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척추가 마비되어 앉을 수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엎드린 채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작은 나무받침대를 하나 만들어 그 위에 성경을 펼쳐놓아 주었다. 어머니가 나무 받침대 위에 성경책을 펴놓아 주긴 했으나, 겐조는 손가락을 쓰지 못하니까 책장을 넘길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겐조가 성경 한 장을 다 읽고 나서 눈으로 껌벅껌벅 신호를 보내면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어머니가 책장을 한 장씩 손으로 넘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도 교회도 다닐 수가 없었던 겐조는 남아 있던 눈으로만 성경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러든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읽다가 그 속에서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 외아들을 보내신 것, 성부 하나님과 동등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신 것, 육신을 입고 고난을 받으시다가 종내 십자가를 지신 그 귀한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글로서 표현하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말을 안 들으니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고,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녹음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두 눈만 끔뻑거렸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철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그 앞에 놓아두고 막대기로 한자씩 짚어 나가면서 아들의 눈동자를 살폈다.

어머니가 들고 있는 막대기 끝이 자기의 원하는 글자에 가서 닿으면 그것이 맞는다고 겐조는 눈으로 신호를 보내었고… 그러면 그의 어머니가 그 글자를 뽑아서 다른 종이에다 옮겨 적었고, 이렇게 고통 중에서 겐조가 눈으로 한 자 한 자 모아서 적은 글이 시집으로 출간되었는데 그곳에는 아름답고 영감 있는 시가 170여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 한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제목은 ‘괴롭지 않았더라면…'

괴롭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정말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고 깨달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시, 깊은 영감이 흐르는 아름다운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즈노는 그에게 닥친 환난 때문에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만났다면 장애가 더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은 그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광야는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축복의 통로임을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며 절대적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감사는 차원 높은 최상의 감사로 엎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성구를 소개하고 싶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외우고 또 외우는 말씀이다. 주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이끄심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환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 28) 이 말씀이 환난 가운데서 나를 지켜주시고 모든 환난으로 인해서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됨을 믿을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는 점점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주님이심을 알 수 있다.

 

이 복된 추수감사 절기에, 풍성한 감사를 마음속에 품되, 만약(If)에, 때문에(Because of)가 낮은 차원의 감사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 감사의 개념(concept)을 한층 더 up grade 시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 12-14)

**별똥별의 방을 찾아주시고, 졸글이나마 늘 격려의 박수로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지만 여의치 못해, 지면을 통해서나마 인사를 드려요. 지난 한 해동안도 감사했어요. ^^ 앞으로 더욱 많이 기도하면서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가내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Happy ThanksGiving Dear Friends!!"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 신앙칼럼 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 속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신을 찾는 인간의 모습이다. 어느 민족이건 그들의 문화 속에, 물론, 그 정도나 형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을 섬긴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고 그 출발점은 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좇겨난 때부터가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쫓겨난 그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다.
 
그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유전으로 물려받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가는 곳마다 신을 찾으려하고 신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위로 받으려하는 모습을 연출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이 귀소본능(歸巢本能) 부분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영적 무지(無知) 상태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은 오히려 여러 가지 형태의 신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신을 섬기기도 한다는 것이 필자가 본 견해이다.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1.이방인들의 하나님: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장 22절 하)”라고 지적한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많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그 어느 국민보다 더 종교성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다고(행 17: 23절)바울 사도가 지적하듯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모든 만물이 다 신이다. 산에는 산신령, 돌, 나무, 폭포수, 물에는 용왕님, 하늘에는 일월성신님, 부엌에는 삼신님, 심지어 우리가 먹는 된장 간장독마저 모두 신이 관장한다고 믿을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국민의 종교성이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2.기독교인들의 하나님: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나 막상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라고 물어보면 정작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 신앙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 안에서 잠시 분류해
보면:
 
a.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개념은 막연하다. 하나님이란 하늘 공중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나 만나볼 수 있는 염라대왕쯤으로 착각하고 있다. 죽은 후에 천당이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그뿐이니 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 '천국보험'을 들어 두는 심경이라고나 할까?
 
b.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늙은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복신앙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라 보면 틀림 없다. 이들의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기분이 좋아진 하나님이 복을 한 아름 안겨다 준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좀 시원치 않으면 화가 난 하나님은 당장에 매를 때리기도 하고 병을 주기도 하며 또 물질에 큰 손해를 끼치게도 한다고 착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정죄하기를 잘한다. 다른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에 큰 질병이라도 들면, 그것을 저주받은 것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성도가 물질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하나님을 믿는 것에 길든 성도들은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란 불안과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했음을 아는 상태에서 병이라도 들면 불안하고 두렵다. 이런 틈을 타 자칫 신령하다는 자들의 안수기도를 받으면 뭔가 해결될 것같다는 심리를 이용하는 사이비 치유사역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니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전지전능 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이시다. 도덕적 속성으로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시며, 신실과 공의가 완전하신 분,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짧은 지면에 다 말씀을 드릴 수 없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고 하나님을 믿어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성경이 계시해 주고 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고 있는가? 그것은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 주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 하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한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심을 믿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청지기 자세'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지난 번에도 잠시 말씀드린 대로, 청지기란 자기의 것이 없다. 내가 누리는 것 중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내게 있는 것은 모두 주인의 것이다. 내 건강, 내 생명, 내 자녀, 내 물질, 모두 주인의 것이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 받아 누린다는 개념이다.(시 24: 1절) 따라서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내는 것은 복 받으려고 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그동안 받아 누렸으니 그 은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 분의 일을 드린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의 것인데 십일조뿐 아니라 내 재산 모두 드려야 마땅하지만 십 분의 일이라도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이런 자세가 선한 청지기의 올바른 물질관이다.
 
둘: 하나님을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입니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구원관이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뜻이 함축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우리가 죽어서나 만나 보는 염라대왕도 아니다. 변덕 많고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재 정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이 신앙이 올바른 신관이다.
 
고로, “당신의 하나님은?” 하고 묻는다면,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답하고 그대로 믿는다면, 그 속에 성도가 지녀야할 올바른 물질관, 구원관, 신관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가장 올바른 정답이 된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화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 11- 12절 말씀)”



출처: USA아멘넷/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아멘넷/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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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된 욕심

얼마 전,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폭격을 맞고 무너진 가자지구의 한 민간인 아파트 건물 더미 아래서 신음하던 젊은 여인을 봉사자들이 힘을 합하여 무사히 구출해낸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세계인이 모두 기뻐한 적이 있다. 이 여인은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이었고 병원으로 후송하던 중 안타깝게도 차 안에서 숨졌다. 죽은 어머니로부터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기가 인큐베이터에서 살아 숨 쉬는 앙증스러운 모습이 전 세계로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악한 세상에서 기적을 본다면서 누리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 기적의 아기는 끝내 작은 인큐베이트 안에서 눈 한 번 제대로 떠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이렇게 푸르른 어머니와 아기가 어이없게도 어른들 욕심의 희생제물이 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슬픈 소식은 전 세계 누리꾼들의 분통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희생자는 항상 힘없는 아이와 여자. 노인이란 것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야할 지도자 ‘하마스’가 오히려 자기 백성을 방패로 삼아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수적으로 열세한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타켓으로 자살 테러를 부추기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보복을 목적으로 가자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민간인의 거주지도, 어린 새싻들의 배움터인 학교 건물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 지금껏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격으로 죽은 가자지구의 희생자 3분의 2는 민간인이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인권센터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약 13만 명은 집을 떠나 국경 쪽으로 피신했고, 6만 명 이상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가 학교시설에 마련한 대피소로 몸을 피하고 있다. 이들은 전기 공급 중단과 식수, 의료품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무서운 일의 시작(뿌리)은 어디서부터인가? 그것은 사명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육적으로는 양국 간의 권력욕, 물질 욕이고 영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숙명관계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근거한 약속된 땅을 되찾고자하는 시도, 즉 사명으로 포장된 욕심이지만, 세상법과는 조화될 수없는 시도라 하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질문을 받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아름다운 말로 자신의 마음속 욕심을 포장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많은 전문인들이 그렇다. 억울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변호사님들, 그러나 막상 억울한 일을 당해 찾아가면 터무니 없이 비싼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의사선생님들, 때때로 진료비가 없으면 진료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사명으로 포장된 욕망의 끝은 어딜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치인들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겠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의 발람이 그랬고, 신약의 가롯 유다가 그랬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랍비여, 평안하십니까?” 입맞춤으로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였다. 구약성경의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직분을 가지고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하는 삯꾼 목자,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유다서 1장 1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발람의 길’이란 삯꾼 목자의 길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자에겐 멸망과 심판이 기다릴 것뿐이다(딤전 6: 20-21). 그렇다면, 현대 교계는 예외인가? 목사님들은 과연 제대로 된 사명 자들만 계실까? 현란한 말솜씨가 사명자의 길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특히, 부름을 받은 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명 자는 행동하기 전, 먼저 본인의 삶 속에 사랑의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내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가?” 확실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에만 집착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남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 마음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와, 충만함, 그리고 참사람, 그리스도의 피로 회복된 전인적 인격을 갖춘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복음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역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는 것인지, 그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이토록 맹목적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나의 생명, 누구를 위해 바칠 것인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하며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맡은 사역자들이라면 더욱더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동역 자들, 부교역자나 곁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나는 거룩하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내가 가장 많이 알고…등등의 자고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도력 혹은 깨달음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는가? 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역이란 말인가? 욕심이 사역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사례라고 보겠다.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 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보고 우리들의 사역자세도 재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감당하신 사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 함이 아니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혈기를 죽여야 한다, 교만을 죽여야 한다, 정욕을 죽여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정신없이 뛰고 있는가? 일의 동기 가치를 부여하라(value entitlement), 목적에 가치를 부여하라, 발걸음(행보)에 가치를 부여하라, 삶의 가치를, 죽음의 가치를 부여하라.

우리는 심지 않은 것, 거두어들이는 일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심은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 생명을 거두어들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종일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지 않은 생명을 주와 함께 거두어들이는 기쁨을 누리는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육신대로, 정욕대로 살겠다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열심 내고 있는 그 일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이 빠졌다면 문제다. 그런 사람이나,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역, 역시, 자살폭탄 테러범만큼이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며,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그야말로 일말의 가치조차도 없는 하찮은 일에 목숨 거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병기로 사용되게 원수에게 내어주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일, 그리스도의 일꾼,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도록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진실함이 없는 현란한 언어의 유희,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표면적 유대인이 되어서 외식하는 지도자들, 이렇게 허황된 신기루 같은 거짓 믿음을 사명자란 그럴듯한 포장지로 미화시키는 마음이 자기 자신과의 분열, 대인 관계에서 분열과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되고, 더 나아가 감정을 와해(瓦解)시키고, 결국 모든 것을 공중분해(空中分解)시켜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그리스도의 선물인 은혜를 주셨다. 서로 다른 극단적인 견해차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데 도구로 사용하길 원하신다. 욕심을 버리면 내가 보이고 내가 보이면 우리가 보일 것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 다르다. 다양성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나와 다르다고 하여 형제. 자매를 원수로 삼지 않을 것이고 사명이란 이름 하에 상대를 무차별 사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르면 비록 성경에 있는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나와 다른 견해는 이단으로 몰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디로부터이겠는가? 내 마음속에 과연 올라가려하는 욕심이 없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상대를 정죄하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은 수용하고 공존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주께서 원하고 계심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한다면, 결코 사명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려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느냐.”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듯 울려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나는 통곡한다. 나 자신만이라도 형제의 영혼을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딤전 6: 20-21)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요즘 이곳저곳에 선지(예언자)학교라는 특수 학교가 세워지고 자칭 사도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현재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선지(예언자)학교와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좀 더 좁혀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어떤 것이며 예언자의 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란 사각지대()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벨리알의 사람이냐, 둘 중 하나, 영생의 길이냐, 영벌의 길이냐로 갈라지기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검증이란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예언의 정의:
예언이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예언(豫言)과 동음어인 예언(預言) 이 두 단어의 뜻이 모두: ①앞에 올 일을 미리 말함 ②또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신의 말을 듣고 신의 의지(意志)를 사람들에게 전(傳)하는 일 ③또는, 그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한자로 보면 예언(豫言)이 아니라 동일한 동음인 ‘預言’ (예언)을 뜻한다. 또 영어 'predict’ (prediction)이라는 단어와 'prophesy'(prophecy)라는 단어는 같은 뜻 같으나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predict’란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의미의 단순 예언(預言)을 뜻하며, 'prophesy’란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로서의 예언 (預言), 신탁(神託)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말씀 언(言)자에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 말이다. 인간의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맡겼다는 뜻이다.

(預言)자의 개념:
하나님의 선견자(先見者) ‘로에’ 와 대변자 (代辯者), ‘나비’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대변자’, 선견자란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말은 그 자신들의 영(spirit)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Holy Spirit)에 의해 말하게 한 대언이었기 때문이다(삼상 9: 9, 렘 23: 16, 겔 13: 2절 참조).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 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 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선견자(대선지자, 소선지자 포함)들은 선지 학교 출신들이 아닌, 평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선견자나 선지자, 예언자의 특성상, 인위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탁에 의해 주어진 말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주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대언 자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교훈도 하시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인 제사장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만인 대언자가 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대언이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인위적인 방법의 선지 학교나 그곳에서 배출된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진정한  예언= 우리에게는 오직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서인 신구약 66권 외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다.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 말씀이다 (벧후 1:19-20).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대언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보혜사 성령님께로부터 성도가 신앙생활을 더 잘 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써,  때로는 예언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말씀을 레마로 주시기도 한다. 곧 모든 양이 그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직통계시적 형태를 취하는 태도를 삼가야 한다. 우리(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활이시요, 사용되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있어야만 한다. (27:22-25)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몇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예수 그리스도), 혹은 기록(문서)계시(성경),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문서 계시인 성경 말씀 역시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1:19-20절 참조)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 계시, 혹은 문서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22:18-19절 참조),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 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기록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해석돼야 한다. 성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손에 이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따로 선지(예언자)학교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대언의 영으로 주시는 말씀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a)  은사로서의 예언: 권면 하며 안위하며 덕을 세우기 위해서 대언의 영으로 증거(예언)할 수 있으나, 반드시 교회와 사람(개인)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고전14:3, 계시록19:10절 참조.) 사업이 잘될는지, 자녀가 학교에 입학 가능한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혼은 어떤지...등등, 이런 류의 점치는 형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b)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신명기18:18-22 ).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말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 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c)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4:32절 말씀 )”.

d) (다 불과) 두 세사람이 증인, 검증이 되어야 한다.

(고전14:27)

 

d)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3절하반절)".

e)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26
)

f)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1:41-45
)

 g)
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결론적으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악한 영에 미혹 받지 말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잘 인도되고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는 것 없고 내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고 온전하신 말씀 안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겸손하게 주와 동행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1-2)

 

아멘넷 별똥별 칼럼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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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의 은사를 활용하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 것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고 묻는 분이 계신다.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 10) 니고데모를 향한 우리 주님의 안타까움 섞인 책망의 음성이 생각난다.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3: 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 26) 모든 말씀이 살아 역사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건만, 성경 속에 가두어만 두니 내 실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인위적으로 듣자며 충동질하는 "은사 주의"는 분명히 문제다. 성령님의 은사(gift)는 선하고 거룩한 것이나 "은사 주의"를 추구하거나 치닫는 것은 위험하다. 개혁주의가 안전하고 건전해서 좋으나 "하이퍼 칼비니스트", 역시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하나님의 능력마저 제한하기에 위험하다. 성경으로 돌아갈 순 없을까?

억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인위적인 장소를 마련하고 광고하고 떠벌리는 이단적 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 세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들려오는 모든 소리는 다 사단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성경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거짓 영을 분별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목사님들 자신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여 넘어지고 자빠지는 마지막 때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스스로 성경을 읽도록 하여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 주께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나 무시로 기도할 때, 혹은 성경을 읽을 때, 주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어느 한 구절이나 몇 구절이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 말씀이 뚜렷이 각인되기도 한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 용어로는 "성령의 조명 하심"이라고 표현된다. 성령의 조명하심은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거나 말씀과 충돌되거나 상충하는 일이 결코 없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안에서 성도를 견인하시고 인도하심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음성을 분별/판별하지 못해서 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내는 훈련을 시키셨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된 대언은, 그 정확성에 있어 단 한 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돼야만 한다. 객관적 증명이 말씀에 있음을 알자.

1.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3절 하반절)".

2.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고스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3.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하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4.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 1 : 41-45절) 여기서 예언의 은사란 것도 족집게 식의 예언을 말함이 아니다. 이미 기록된 말씀이 완전 무오한, 흠 없는 예언서다. 그 말씀 중 어느 한 구절이 생각나고 떠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침으로써 성령님의 역할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의식이나, 직통 계시 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자주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풍월, 혹은 배운 신학 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말고,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신앙은 결단이요, 순종이며 헌신이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이렇게 정확히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굳게 서 있게 되면, 데이빗 오워가 거짓 영에 사로잡힌 것을 분별할 수 있다. How?(어떻게?) 그가 하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알고 대처한다면, 무엇 때문에 옹알이하는 이단자들의 랄랄거리는 소리에 현혹될 것인가?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인 세대가 바로 지금 이 세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 11-13)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 24: 1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 24),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21)

출처: 목양연가 별똥별/최송연의 영성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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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사람(born again Christian)은 ‘성령의 사람’이며, 생물학(生物學)적 용어를 빌리면,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이다. ‘바이오제네시스’, 생물은 생물에서만 난다는 설,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 생명을 받는 것, 生에서 生이 난다는 것, 죽음에서는 결코 生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생물학(生物學)적 원리다. 이런 원리로, 산 생명이신 성령 하나님이 마음속에 내주한 사람은 생명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생명이 없으며 이름과 형체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이다.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거듭남의 고백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정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롬 10: 9-10)함 없이 직분을 받은 자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비일비재 일어나는 탓에, 주님의 교회는 지금 큰 수난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저지르는 온갖 추악한 죄악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모두 전 세계의 성도들과 주님의 교회가 함께 뒤집어쓰게 된 오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인가…. (말씀에 의지하여 바로 살아보려고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마저 무더기로 “개독교인”이란 소릴 듣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이다. ㅠㅠ)

죽은 송장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고, 산 생명에서는 생명의 향기가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2:14-16절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산 생명이 아니다. (1요 5: 12)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주님의 영광을 실추시키는 자리에서 떠나고 나중에 주님의 얼굴을 마나 뵙기 원하면 먼저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 자기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재점검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고후 13: 5) 성령과 성령의 사람을 알지 못하는 무지(ignorant)가 빚어내는 촌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현상으로 미혹하는 영이 활개를 치는 세상, 정신을 차리고 분별하지 않으면 내가 잠식당하게 된다. 짧은 지면에 모두 다 논하기는 어렵지만, 간단히나마 성령과 성령의 사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 새해에는 우리 다 함께,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보자는 슬로건이라도 내어걸고 싶은 심경으로 정리를 해 본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神이심을 믿는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한다

“성령”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성신” (루-아흐 코드쇼) 2회 사용되었다. (사 63: 10, 11) 신약에는 “성령”이란 말이 93회가 인용되었다. 구약에는 “루-아흐”가 단독으로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선한 신”(Spirit, 대문자로 표현)으로 번역되었다. (느 9:20, 30, 시 139:7, 슥 7:12) 신약에도 (프뉴마)가 단독으로 “성령, Spirit”으로 표현되지만, (마 4:1, 22: 43, 등 13회가 사용되며, 또는 ‘하나님의 성령’ (το Πνεύμα του Θεού)가 사용되고(마 12: 28, 고전 6: 11, 7: 40), ‘주의 성령’ (the Spirit of the Lord, το Πνεύμα του Κυρίου) (눅 4: 18 ), 또는 ‘예수의 성령’ (the Spirit of Jesus, το Πνεύμα του Ιησού)( 행 16: 7 )으로도 인용된다. 또 (바람)이라든가 ‘호흡’이라든가 공기의 진동을 뜻하는 것이 본래의 의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해당 되어지는 (생명), (영혼)의 뜻이 된다. (창 2:7, 출 35: 31, 욥 7: 11)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 주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삼위일체의 신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 원어 대사전 참조

성령의 사역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의 하시는 사역을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을 어떤 마술의 영으로 착각할 수 있고, 신성을 버리고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을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이비 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성령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해주신다.(요 16: 8절), 성령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Lord)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고전 12: 3절), 성령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성령의 세례(침례)를 주신다. (고전 12:13절) 성령은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요 6: 63절), 성령은 신자들 안에 거하신다. (고전 6: 19절), 성령은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 롬 8: 16절) 성도의 일상 삶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성령은 지 정 의(知情意)를 온전히 갖추신 인격적인 신(神)이시다. 불신자들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고전 2: 12-14절) 섬기는 일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고전 12: 7-11절),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도 성령께서 친히 결정하신다.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벧전 4: 10, 고전 12: 7절)

성령의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

1.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곧 ‘외식(hypocrisy)’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조심하라” (눅 12: 1下)고 경고하신 것이다. ‘외식’, 그렇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외식’인 것이다. 외식이란 글자 그대로 안과 겉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외적인 현상은 오직 그 열매뿐이다. 그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 타인은 누구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과 자기 자신은 알 것이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든지, 바리새인의 누룩(외식)으로 포장하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누룩이란, 확산되어 본질을 부패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기독교계 안에서 불거져 나오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목사들의 간음, 성폭행 문제나 재정비리 의혹, 세습 문제 등, 전 세계의 기독교계를 절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즐기다 그 덫에 치어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고로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바리새인의 누룩을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 믿음의 상태를 비추어 살펴보아 바르게 분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깨달아졌으면 회개하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 돌이켜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다.

2.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거짓 은사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주 간단(simple)할 것 같은 issue건만 각처에서 뜨거운 감자로 달아오르고 있는 은사론, 신사도 운동, 은사중지론 등은 세기를 두고 신학자들 간의 논쟁이 치열했으나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결말이 나지 않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 천착지학(穿鑿之學),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기의 사상이나 지식의 틀에 끼어 맞추려고 말씀을 끌어다 붙이기 때문이며, 성도들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은 목사님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은사중단론 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극단적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은 모두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축자영감설’을 그대로 믿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방언도 다른 은사들처럼 교회와 개인의 건덕을 위해서 주시는 성령님의 선물로 믿어야 하고,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해야하되 영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모든 방언이 다 성령의 주시는 선물로서 온 것이 아닌, 사단의 장난질 방언도 있다는 것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을진대, 외국어로 들려지고 알아지는 방언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인간의 소리가 아닌, 영으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알아듣지 못할 방언도 있다는 것도 인정하자. 모든 방언이 각 지방 언어들로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면 영들을 다 믿지말고 분별하라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두었겠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면 관계로 간증을 넣을 수는 없지만, 나는 외국어로 방언하는 것과 같은 현상, 어릴 적 고아로 자라,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여 일자무식한 사람이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 영어 성경을 줄줄 읽을 수 있고 영어로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부인을 만난 적 있다. 또 방언을 한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원망하며 밤새도록 저주하는 것도 들어본 적 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7 ), 놀라운 것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는 자를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참 선지자도 아니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며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미혹의 길로 끌고 가려는 사단의 졸개들이다. 계속해서 다시 보자. “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고후 11: 14-15)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떤 독자님이 댓글로 남긴 말이 가슴에 와닿기에 여기 옮겨본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성경말씀을 인간적인 사고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함께 눈에 보이는 이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참.. 성경 말씀은 상당히 함축적, 암시적인 표현이 많은데...그것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추론한다는 것이 참 어불성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런데 기존의 정통 교회들도 그 방향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구...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 안스럽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 중에서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고 고쳐나가며 눈에 보이는 이적을 구하기보다 말씀에 드러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들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옳은 말씀이 아닌가, 성령의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깨달음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죄에게 굴복하지 아니한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 성이 남아 있어 죄의 유혹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받는다고 하여도, 죄가 그 사람을 주장할 수 없도록 주님의 영이 지키신다. 때문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가슴과 머리, 말과 행위가 모두 함께 나간다. 거듭난 사람은 작은 죄를 지어도 성령의 탄식하시는 세미한 음성이 들려져 그 양심이 심히 괴롭다. 그러면 기도하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과 회개의 영으로 죄사함을 받고 돌이켜 구원함에 이르는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른, 외식으로 포장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Holy Spirit)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요 5: 18절 말씀) 죄의 소원은 성령의 사람에게도 있으나 죄가 그를 주장하거나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 이것이 성령의 법, 곧 생명의 법이다!

성령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

a)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시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새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새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새해에 우리는 극단적 신비주의나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물든데서 돌이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정욕, 이런 육신에 속한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 봐야 성령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요즘처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위상이 바닥을 친 시대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교회 등록하고 매주 교회 출석하는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으로서. 반드시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Holy Spirit, 삼위 일체의 영)으로 중생한(born again)사람, 성령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옳다. (요 3: 3-9절 참조)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이런 사람은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 생명의 신이 그 속에 내주해 계신, 거듭난 사람( born again Christian)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성령의 사람은 생명의 열매가 그 생활 속에서 맺히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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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면, 잔치가 대연(大宴) 이건 소연(小宴)이건 한 가지 통일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청하는 데는 그만큼 기쁜 일이 그 집에 생겼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이 결혼한다든지,  사랑하는 가족 중에서 생일을 맞아도 기뻐서 잔치를 베푼다. 회갑연이나 돌잔치가 그런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거나 잔치를 배설하는 집에서 볼 때, 잔치란 기쁨의 극치를 표하는 것이며, 즐거운 날이다.

옛날 우리나라 부인네들은 그 하루를 위해서 몇 날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면서 온갖 정성을 들여서 각종 맛있는 음식도 만들고 예쁘게 집 안팎을 치장도 한다. 그리고 그동안에 정든 이웃과 지인들을 초청한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개인의 바쁜 일, 슬픈 일, 언짢은 일들을 모두 잠시 뒤로 접어두고 힘들지만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이 잔치에 참석하여 그집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양 웃어주기도 하고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마시며 함께 즐거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은 잔치를 베푼 사람을 즐겁게 해 주려고 가는 것이다. 잔치에 참석해서 그 집사람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듯, 즐거워도 해주고 축하도 해주고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도 저절로 같이 즐겁고 함께 기쁜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면에 꼭 좀 와 주십시오 하고 초청장을 드렸건만 시간이 되어도 무슨 일인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얼굴도 내밀지를 않는다면 어떤가? 모르긴 몰라도 참 많이 섭섭할 것이다. 초청과 그 집의 명예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초청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불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우주의 주인이시다. 그런데 이 고통의 역사를 끝내고 황금의 시대를 여시고 큰 잔치를 배설하실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날은 그동안 수고하고 눈물 흘린 당신의 종들에게 상을 주시고 영원한 기쁨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대연의 자리,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 되심을 천하 만국 백성이 그 입술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날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비웃고 조롱하던 간악한 무리가 우리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통쾌한 날이 될 것이다.이렇게 통쾌하고 기분 좋은 날, 이 기쁜 날을 위해서 주님은 모든 준비를 다 완료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피로 준비된 목욕물, 예복, 화려한 궁궐, 수종을 들 천군 천사,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초청장도 배부하셨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하나 같이 모두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면서 차갑게 거절하고 있다.

1.“내가 밭을 샀는데 가 보아야 겠으니 참석하지 못하겠다.”
2.“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야 하니
참석지 못하겠다.”
3.“내가 내 아내를 맞이 했으니 가지 못하겠다.”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얼핏 들으면 모두 제각기 다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가지이다. “내 기쁨이 충만한데 당신의 기쁨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너의 잔치가 내게 무슨 소용인가?”하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중심적이며, 초청한 자를 무시할 때만 가능한 태도이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분의 십자가 고통도 그분의 사랑도 너무 가볍게 받아 드리는 것 같다. 우리는 잔치에 모실 손님들을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 음식을 장만해 놓았는데, 막상 잔칫날, 그 음식을 먹고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섭섭할 것인가? 조금 잠을 자지 못한 수고를 했을 뿐임에도 그것이 애석하고 분해서 두 번 다시 상종하지 못할 인간(?)이라며 이를 갈기도 하고 분해서 방방 뛰기도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에 비해서, 우리 주님의 수고는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채찍질 당하고 얼굴에 침 뱉음 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갈기갈기 찢기셨다. 가시로 만든 치욕의 면류관이 짓누르며 살 속 깊이 파고들었지만, 한 마디 말도 없이 주님은 그 고통을 묵묵히 참아 내셔야만 했다. 무엇 때문인가?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대연(大宴), 혼인 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가 사업을 해야 하고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야만 한다. 그러나 주님이 베푸실 잔치자리에 나아갈 권리를 던져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면서까지 그곳에 깊이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주여, 내가 무엇이라 말씀하오리까? 기도하며 몸부림치는 내게, 성령님께서는 큰 감동으로 조명하여 주셨다. “잔치 준비는 모두 끝났다!" 성도라고 하면, 마25장의 열 처녀 비유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자격임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 같아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준비하지 않은 그 다섯 처녀의 가는 길과 준비를 잘한 다섯 처녀의 가는 길은 엄연히 다르다고 하는 것, 영원한 형벌이냐, 영원한 기쁨의 혼인 잔치 자리냐, 선택과 결단만 남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간곡하게 권하고 싶다.

주님의 혼인 잔치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 완료되었음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라고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이, 경고의 나팔 소리 되어 크게 들려지는 복된 귀, 열려진 영의 귀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알렸고, 우리는 모두 들었다. 듣지 못해 준비하지 못했다,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오심을 망각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넓은 길로 달려간다.  배신하고, 사고팔며, 음해하고, 주님의 이름이라며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고 있다. 죄의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대연(大宴)은 이미 준비 완료되었다. 나팔소리는 울려퍼지고, 성도는 잠자고....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중략,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 15-, 23-24절 말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마 22:10-12절 말씀 )."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다 고백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의 사람이라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많으나 실제 삶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이 글을 정리하는 나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인가? 그러하기에,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사람인 듯, 다른 목회자들을 형편없는 사기꾼 정도로 몰아가면서 뛰어난 화술로 말씀을 강론하던 한 유능한 목사가 자살이라고 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우리들 때문에 흑암의 세계 속에 강력한 빛으로 나타나야 할 교회는 오히려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고, 서로 잘믿는다고 내세우는 말의 홍수 속에서 정신세계는 대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는 한 번쯤,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성경을 되새김질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다닌다고 모두 성도가 아닌 것이다. 요란하게 떠들고 소리 지른다고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삶 속에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다. 사람의 영(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많은 성도들의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하는 것부터 정립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내가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며,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는다. 성령으로 가장한 사단, 광명의 천사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줄 것뿐이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성령의 사람은 곧 말씀의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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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세월을 두고, 교회와 교회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방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본다.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님들도 있고, 반대로 방언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방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은사주의', 심지어 '신비주의'로 몰아가며 방언은 초대 교회로서 중단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더 심하게는 현대 방언은 모두 사단에게로서일 뿐이다. 라고까지... 서로서로 경계하며 손가락질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무엇보다도 말세적 징조의 하나겠지만, 성령을 가장한 사단의 장난 또한 극심한 것이 사실이다. 하여, 필자는 오늘 "방언의 유익과 주의점" 에 대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같이 생각하며 나누어 보려고 한다.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혼과 이성(理性)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장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 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실제 성령님의 역사로 주께 올리는 영의 기도는 결코 무아지경이 되거나 정신을 잃거나 혼절한 상태에서 중얼거림이 아니다. (현대 입신이란 것은 혼절 상태로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 28절 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 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 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 (이성(理性)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He's the Planner)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 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 全能) 하나님 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나 분명한 영적 언어임이 확실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든 은사의 주체이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셨으니, 영언 "ability"를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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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그 시금석...  (6) 2014.05.18



개혁교의 대표적 신학자들이라 할만한 분들(죤 칼빈, 마틴 루터, 벤저민 휫필드. 죤 매카터, 리처드 개핀, 대니얼 월리스) 등, 그분들은, 초대 교회 이후, 은사중단론을 지지한 것을 저도 알고 있다. 중단설(cessationism)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교회 이후 방언, 신유, 은사, 계시 등이 끊겼고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로는 성경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모든 은사들이 필요하였고 그에 따른 임무(성경이 완성)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재정립된 나의 견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된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한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한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다. 과거가 여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단다.)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함을 나는 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선교지에서 경함한 일이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다.

나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뢴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왔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나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그때 나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심을 믿는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한다.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이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는가?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이 말은 표현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개혁교회(다는 아님)중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중 방언과 예언은 중지되었다고 가르친다. (아래 참조를 올려두었음)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직통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체험했다.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는가?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는가? 어찌 생각해보면, 말씀 안에서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고로, 극단적 신비주의자도 경계해야 하나, 극단적 칼비니즘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글: 별똥별/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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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직은 메마른 들녘, 낮으막한 산등성이를 따라 진달래꽃 철죽꽃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고, 노란 개나리꽃이 덮인 울타리 너머로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이른 봄이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눈물 짓곤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몸이 유난히도 약했다. 태어나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라면서 어찌된 셈인지 입이 까탈스러워졌고 입이 까다로우니 제대로 먹지를 않아 약한게라고 어머님께서는 늘 핀잔을 주셨던 것이다.
 
그랬습다. 육미는 육미의 그 특유한 냄새가 싫었고, 생선은 생선대로 비려서 싫고, 계란은 그 속에 병아리가 있다기에 징그러워서 먹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까, 몸은 바싹 여윈게 눈만 커다랗게 보인다고 언니와 오빠는 놀려대었다. 요즘이야 다이어트 미인들이 인기라, 날씬해지려고 젊은 여성들이 심한 다이어트식을 하다 영양실조 현상으로 노인들에게나 있을 법한 골다공증도 걸리고 다이어트 증후군으로 고생들을 한다지만, 필자가 어릴 적만 해도 통통하게 살이 찐 것이 부티(귀티)가 난다 하여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때였으니, 약하디약한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무척 근심거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나의 입맛을 돋워 주기 위해, 봄이면 우리 집 식탁에 자주 올라오는 메뉴는 비빔밥과 아기 쑥국이었다. 하얀 무와 빨간 홍당무는 송송 채 썰고, 도라지와 고사리는 미리 삶아 물에 불려두었다 건져 내어 따로따로 참기름에 살짝 볶고, 소금물에 새파랗게 데쳐 낸 시금치와 콩나물은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뿍 넣고 조물조물 버무린다. 계란은 노랗게 지단을 부쳐 썰어놓고, 잘게 다져 양념하여 달달 볶은 소고기를 예쁘게 순서대로 하얀 밥 위에 올려놓은 다음, 거기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한 숟갈 듬뿍 집어넣고 썩썩 비벼주면 아주 개운한 맛이 일품인 비빔밥, 무엇보다도 짙은 밤색 빛 고사리를 선두로, 빨강, 파랑 하양 노랑 이렇게 가지각색의 고운 색상이 한데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어린 나의 입맛을 돋우고 거기다 고추장과 참기름은 고기의 특유한 냄새를 제거해 주니 좋았다.
 
어린 딸이 잘 먹는다고 그 바쁘신 와중에도 비빔밥을 자주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하신 그 사랑의 손길이 그리워, 이 나이가 되어도 진달래 피기 시작하는 봄이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한다.
 
내 기억에 소중한 비빔밥, 이 비빔밥은 우리나라 민속 음식으로서 다섯 가지 이상의 야채가 들어가고, 인체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함유하고 있다는 계란이며, 곡물에서 추출하는 생명 원이랄 수 있는 탄수화물, 거기다 단백질 원이 되는 소고기마저 곁들이면, 밥맛이 없는 노약자에게 더없이 훌륭한 영양식이며 건강한 사람에게도 별미로서 아주 좋은 음식이다. 이 비빔밥을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1800년대 말엽의 '시의전서'로, 비빔밥을 "부븸밥"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하니 과연 그 비빔밥을 일컬어 가히 민족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비빔밥의 특징은 각종 음식의 혼합물이란 데 그 의미가 있고, 입맛을 돋우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각종 사이비에 노출되어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입맛이 까탈스럽고 병든 성도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고, 어떻게 하든, 그 병들고 까탈스런 성도들의 입맛을 맞추어 주려는 시도로 부흥강사들이 이런저런 혼합된 이야기들을 말씀 속에 섞어서 양떼들에게 먹이기 시작 한 데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희극배우인지 목사님인지 알 수 없는 어릿광대 같은 부흥강사들의 섞어 복음을 맛있다고 넙죽넙죽 받아먹는 철없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자들이 너도나도 그들, 부흥강사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 같다. 복음을 변질시켜 먹이는 것임에도 그것이 부흥의 지름길이라면 마다치 않고 받아들인다!

오늘 아침 기도 중에 현대 기독교는 ‘비빔밥’같은 설교를 즐겨 듣고 전하는 것, 그 혼합된 비빔밥 같은 설교와 사상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신 22: 9 절),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 11절),”, 또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레 19:19절 말씀).”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이 가시적인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말씀하심이 아닐 것이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실제로 우리가 두 가지 재료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해석을 기초로 풀어야만 그 뜻이 정확해진다. 우리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그 염려는 불가시적이며 영원한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고전 9: 9절 참조)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밭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마 13: 13, 막 4:3, 막 4; 26-27, 눅 8: 5-11절 참조) 한 밭에 두 가지 씨앗을 뿌리지 말라고 하신다. 진리는 여러 가지가 아니다. 진리는 단 하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다른 사상을 예수님의 말씀과 혼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옷도 두 가지 직조를 섞어 짠 것을 입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희어진 세마포 이외는 입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육이 먹어야 할 음식은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하기에, 여러 가지 음식을 많이 혼합하여 섞으면 섞을수록 좋다. 다시 말해, 육신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영양소가 혼합된 비빔밥이 건강에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만은 비빔밥 같은 사상이나, 교리를 섞어 혼합하지 말아야 한다. 영혼이 살 수 있는 음식은 단일 식품, 오직 성경말씀 신구약 66권 뿐이다!!
 
우리의 영혼이 살 찌고 성장하려고 하면 단일식품이랄 수 있는 성경만을 그대로 풀어 먹여야 하고 먹어야만 산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생명이며 구세주가 되심을 믿어야 하고, 바로 전해야 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다.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시며 영원하신 영적존재시다.(마3:13-17;28:19;고후13:14) 그 성품으로서는 사랑이 풍부하시며 각 개인의 사사로운 일까지도 매우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는 자상하신 분이시다.(마11:28;시50:15)
 
WCC의 종교혼합정책, 현대신학의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신학적인 경향, 뉴에이지운동, 에큐메니칼운동 등등…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비빔밥 같은 종교다원주의가 곳곳에서 기세를 떨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실상 WCC와 종교다원주의, 이 사상가들의 시초는 힌두교 신학자들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의 神과 손잡을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니? 결코 그럴 수 없다! 비빔밥은 나의 육신은 살릴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합된 영성은 나의 영혼을 죽이는 독극물이다! 주께서는 밭에 두 가지 씨앗을 뿌리는 것을 금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절 말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잘 말씀)."
 
출처: USA아멘넷/별똥별 최송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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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그 시금석, 있는 자리서 책임을 다하는 것

 


“잎사귀보다 푸른 너희들이 왜 여기에…. 창밖에 우거진 신록을 보는 것조차 사치 같구나. 어른들이 미안하다.”(60대 조문객 정인자 씨•여) 애절한 조문 글이 말해주듯,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은 ‘세월호 사건’, 이 사건이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그들(희생자들)이 한 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게으르고, 나태하고, 자기중심적인 어른들의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 그것이 아니겠는가?

아직 젖살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을 영정 사진이라며 붙들고 오열하는 부모의 모습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고, 우리들의 눈앞에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배를 “저런, 저런!” 발만 동동구를 뿐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이 당혹감이란…나도 자녀를 둔 부모이기에 더욱 그들의 아픔을 통감하게 된다.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던가?

그들 희생자가 내 자식 같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그들 부모의 마음이 내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듯…아, 하늘이여, 땅이여…통곡하라! 이런 일을 보면서 어찌 한 시라도 잠잠할 수 있겠는가? 오월, 가정의 달을 눈앞에 두고 그토록 귀한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한 못난 어른으로서 대신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보고 싶은데...

문제는 우리의 둔화한 책임의식이다. 이런 대형 참사가 일어난 후면 의례,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사건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추었다.” 등등…각 언론이 술렁이며 들끓고 국민이 일어나 왁자지껄 여기저기서 분개한 목소리, 비난의 목소리의 수위를 잠시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술렁임도 잠시일 뿐, 곧 다시 잠잠해질 것이고 철저히 준비되지 않은 각 단체장의 무책임함, 그들의 무딘 양심 때문에 생때같은 우리 자식들은 또 다른 대형 참사 앞에서 수장되고 매장되지 않는다는 보장 없다. 과거 오대양 사건이 그랬고, 삼풍백화점 사건이 그랬고, 성수대교 사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위대한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범인들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할 수 없는 일만 바란다”-로맹 롤랑(프랑스 소설가) 그렇다. 세월호 선장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성도라 이름하는 사람들) 역시 침몰한 세월호의 선장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지나 않은지…생각해 보아야 한다. 충성의 시금석, “있는 자리서 책임을 다 하는 것” 오직 그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 하지 않은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수많은 어린 새싻을 무참히 짓밟고 저 춥고 캄캄한 바다 밑에 수장시켜버린 것이다!

운항의 최저 상식조차 무시당한 세월호

큰 배건 작은 배건 바다를 항해하는데 따르는 운항상식이란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
바다라고 하면, 어디든지, 크고 작은 파도가 일게 마련이다. 큰 배나 작은 배나 바다에 띄우면 그 즉시 파도를 타게 되어 있다. 뱃사람들만 알고 사용하는 파도에 대한 두 가지 고유명사 “롤링[rolling]”과 “피치(pitch)란 단어가 그것이다. 지속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운항 중의 배가 파도를 향해서 앞질러 넘어가는 것을 “피치(pitch)’라 하고 파도를 옆으로 타는 것을 ‘롤링 [rolling]”’이라 한다. 선장의 기술 여하에 따라 그 파도를 잘 넘고 잘 넘지 못하고 결정되는 것이다.

둘:
배의 컨테이너에 짐을 싣는 데도 원칙이 있다고 한다. 배 벽면에 쇠갈고리를 박아 그 쇠갈고리에 모든 짐을 단단히 묶어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짐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해두어야만 한다.
쇠갈고리에 짐들을 잘 묶어두면 “롤링[rolling]”이든, “피치(pitch )‘이든, 파도가 아무리 드높아도 짐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이 없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짐들을 제대로 묶어두지 않으면 파도를 타고 넘을 때 배가 기울어지는 각도 대로 짐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고, 배가 쏠리면 그 짐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배가 발란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쪽으로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 쏠리는 힘 때문에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
 
셋:
모든 배는 비상종이 선장실 바로 옆에 부착되어 있다. 그 배가 ‘롤링’의 의해서 45%로 기울게 되면 종이 그 기우는 힘 때문에 자동으로 ‘땡!”하고 울리게 되어 있고, 선장은 그 종소리를 듣는 즉시 파도 타는 것을 더욱 조심스럽게 하여 배를 몰아 안전 선으로 되돌리도록 조정해야 한다. 위의 정보는 해양학에 밝은 측근 지인에게서 직접 들은 상식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원인 규명
 
1. 안전 수칙을 무시했다
배에 실은 짐을 쇠갈고리에 묶지 않았던 탓에 배가 한쪽으로 기울 때 그쪽으로 짐들이 와르르 쏟아지게 되었고 그 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배는 한쪽으로 기울여짐이 심하여 결국은 침몰하게 된 것이다. 선장이 전문(해양대)지식이 없었거나 아니면 안전수칙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그런 책임성 없는 사람을 선장으로 기용하고 수많은 생명을 맡긴 선박회사에 철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2. 타인의 생명을 경시했다

타이타닉호 침몰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선장과 항해사들, 그리고 음악사까지 모두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겨 침몰하는 배에 끝까지 남아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숭고한 인간정신을 나타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학생들에게는 ‘가만히 있어라’ 명하고 끝까지 남아서 구출작전을 시도했어야 할 그들이 제일 먼저 밖으로 도망쳐 구조선에 올라타는 모습이란…! 참으로 분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짐작건대, 배가 한쪽으로 침몰해 가는데, 학생들이 당황해서 우르르 몰리면 배가 더 심하게 요동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됨을 미리 알고 있던 그들이 고의적으로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지시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의 덧없는, 말도 안 되는 기우였으면 좋겠다.

3. 기술적 경험을 무시했다

이번 세월호를 운행한 사람은 “경력 1년 25세 삼등 항해사”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찔, 현기증이 일어났다. 뱃사람이 아니어도 상식선에서 아는 것은 진도에서 제주도로 항해를 하는 주위에는크고 작은 섬들이 즐비하다. 바다의 생태란 육지에서 200m까지를 ‘대륙붕’이라 하고 ‘대륙붕’에는 파도가 거세다. 그리고 섬 사이사이에서 일어나는 파도를 ‘삼각파도’라고 부를 만큼 급하고 강하다는 것 쯤은 모두 알고 있다. 선장이 그런 정도의 해양상식이 없었다는 것인가? 아직은 좀 더 바다를 배워야 할 젊은 항해사에게 그토록 위험지구를 맡겼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선장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정도면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오래전에 ‘나의 꿈이 너를 울게 하는가? 새만금 프로젝트로 수많은 조류가 그 생명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팠던 경험을 글로 기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그보다 한층 더 가슴이 아리고, 아니, 그 도를 넘어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은 이 사건이야말로 인간정신을 송두리채 땅에 내동댕이쳐버린 파렴치한 행동이고, 선장과 선원, 그리고 해양경찰대원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때문에 일어난 대참사였기에 그렇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것 같은 현대 교회

이번 참사를 바라보는 많은 지성인, 성도들이 ‘자정 능력을 잃고 무참히 쓰러진 배를 두고 그 배를 당당히 벗어나 탈출한 선장의 비행을 보면서 이를 자정 능력을 상실한 현대 교회 지도자와 비유하기도 하고 침몰하는 세월호를 침몰하는 교회로 묘사하면서 ‘ 탄식의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현상도 쉽게 볼 수 있다. 이해한다. 지금 이대로 나가다가는 교회마저 몰아치는 저 흙탕물 같은 세상 풍조에 침몰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히 따져 주님의 교회는 아주 망하거나 영원히 침몰할 수 없다. 왜? 우리 주 예수님이 친히 교회의 주인이시요 , 교회가 배라면, 그 배의 선장은 책임성 없는 지도자, 목사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한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전도의 문이 막히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먼저 믿는 우리들, 교회 지도자들이 선장이신 주님께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할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야 한다. 그 빛을 밝혀야 한다! 너와 나 우리가 하나 되어 죽어가는 영혼을 그리스도 호(The ship of Christ)에 건져 올리도록 힘써 일해야 하며 있는그 자리에서 자신을 바쳐 충성을 다 해야 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과거 하늘을 향해 높이, 더 높이를 외쳐대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고대 사람들처럼 무엇이든지 크고 높고 강한 것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들, 그들을 큰 종이라 따르며 숭배하는 어리석은 성도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가들이 주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들의 무리한 욕심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포장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수히 작은 교회를 쓰러트리고 성도들의 헌금을 갈취한다.

교회당 건물은 주님께 예배 드리기 위한 목적보다는 부와 권력과 능력의 상징이라도 되듯 하늘 높은지 모르고 더 크게 더 높게 올라만 간다. 어디 건물뿐이랴,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교회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영혼을, 사업,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것 같다. 성도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단다. 사업가적 마인드가 뛰어난 몇몇 삯군 목자들은 목회보다는 성도관리 차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시켜 사고팔기도 한다. 이런저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 상품들로 성도들의 영혼을 유치(그렇다 유치가 아니고 무엇이랴)하기 급급하다.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신자들을 각종 프로그램과 상품으로 미혹해서 더 많이 수용하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작은 교회도 엄연히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건만, 약한 교회를 집어삼키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 교회 내에서도 심각한 빈익빈 부익부 기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문어발처럼 자신의 교세 넓히기 작전으로, 자신의 명성을 세계로 뻗어 나기 위해 많은 돈과 인재들을 투자해서 지부 교회를 세운다. 이런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크게 부각시키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반기련도, 극단적 신비주의 자들도,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각종 이단 사설을 양산(produce)해 내는 그 어떤 단체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성공하겠다고 생각하거나, 나만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침몰해가는 배에서 뛰어내리는 비겁한 행위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그런 행위는 이제 세상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랴? 우리는 이제 서로 연합해야 산다. 연합하여 일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일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서로 도우는 교회가, 서로 도우는 성도가 되어야 그날에 주님께로부터 잘했다 칭찬과 함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0여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슴에 각인시키고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죽음을 택하셨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사흘 만에 너도 살고 나도 살려내는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신 것이다.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구속을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뉘어 사역하시는 아픔을 참으셨으며, 협력하여 일하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충성된 종이셨고 그 이름은 세세 무궁토록 길이 빛날 것이다! 모든 무릎이 그분의 발 앞에 꿇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십자가도 개의치 않는 위대한 일을 하셨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그분은 그 위대한 일 이전에, 요셉의 집에서 목수인 요셉을 도와서 작은 일에 묵묵히, 있는 그 자리에서 충성하는 본을 보이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충성의 시금석은 어떤 큰 것이 아니다. 내가 맡은 본분을 지키는 것, 있는 자리에서 해야할일에 책임을 다 하는 것, 그것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 만사가 모두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이웃과 이웃, 목회자와 성도, 교회와 교회, 국가와 국가, 모두 하나 같이 크게, 더 크게만 외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서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책임을 다할 때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사회가, 더 나아가서 국가가 번창하게 되고, 그 길만이, 이번 참사처럼 황당한 일을 되풀이하여 겪게 되지 않는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 너무 많다. 글 잘 쓰는 사람도 너무 많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서 충성하지 못하면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충성의 시금석, “있는 자리서 책임을 다하는것”그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 10)"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 10)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삼위일체 하나님은 과연 성서적인가
?

필자는 최근에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시요, 메시야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주장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성경 속에서 먼저 살펴보고 그 말씀을 근거로 삼위일체의 하나님되심을 몇차레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하나님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태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

2. 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
(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자신 속에 계신 성부, 말씀,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써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빌2:5절)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라.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시다.
      
유다서 4절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디도서 2;13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 처음과 나중이시다.
계시록 1: 8절을 읽어보라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

계2: 8절에서도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 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 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2: 13절에서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천명하셨고, 여기에서 는 누구인가
?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셨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라고 말씀한다.
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작금의 많은 목사님들도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삼위일체도 역시 아리우스라고 하는 이단이 나타나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이며,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다가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아타나시우스와 토론 끝에 이단으로 정죄를 당함에 따라 삼위일체의 초석이 정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니케야회의는 아리우스가 장로로서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동조세력이 많았으며, 아타나스우스는 집사로서 알렉산더감독의 서기였으나, 알렉산더감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토론을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성경적으로 토론을 승리함으로서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이인규


글/최송연







“사랑” 바다의 진주인 듯 해맑고 청아하며 붉은 산호초처럼 빛나고 새까만 청색 하늘의 별처럼 영롱하다. 생명의 젖줄을 입에 물고 힘차게 빨아대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젊은 어머니의 그윽한 눈빛, 흐드러진 들꽃 한 송이 꺾어 함께한 소녀의 머리에 꽂아주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고 소나무 뒤로 달아나 숨는 까까머리 소년의 순수한 마음도 사랑이다.

“ 사랑” 모든 시인들의 가슴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고운 시어( 詩語)이며, 영원히 노래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언어이다. 언젠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람에게도 ‘사랑’은 필요한 것이라고…이토록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소유하기는 쉽지 않다는데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사랑, 그 사랑이란 것이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고 어쩌다 쟁취한 사랑이라고 하여도 사랑이란 상대적이기에 종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됨을 알 수 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처 주기 쉬운 것이 우리네 인간사이기도 하다. 가까운 예로 가장 사랑해야할 부부의 사랑이 그러하다. 너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랑이기에 우리는 늘 사랑을 갈망하나 얻는 것은 사랑으로 오는 행복이 아니라 미움과 원망이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그렇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란 실제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오로라’일 수도 있다. 참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 아가페”적 사랑, 전적 주는 사랑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며, 참된 사랑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기에 풀무불 속에 자신을 내어던진다면 그 사랑은 믿을 수 있는 사랑이란 것이다. 입술의 유희가 아닌, 사랑을 증거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의 댓가를 지불 할 수 있을 때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갈 때 그 다가오는 어둠을 원하지 않기에 매사에 이타보다는 이기적이 되기 쉽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한 때문에, 고통도 자기 자신을 위한 고통보다 타인을 위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 고통의 수위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고난이 더욱 가중되는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온 인류, 처음부터 선(good)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고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는 흉악한 무리의 죄악을 대신 지고 가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스스로 당하셨기에 예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며 사랑 중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사랑 때문에 당하신 고난을 잠시 생각해 보면,

1) 예수님은 삼중 적 고통을 겪으셨다

1. 육신 적으로 당하는 고난
어떤 신비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육신의 고통은 별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참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또 얼핏 들으면 그럴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다. 그는 완전한 신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가지셨다. 따라서 육체가 찔리면 아프고 고통을 느껴야만 하도록 신경세포가 살아 있는 예수님이셨다. 만약,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장애인이요, 중풍에 걸린 환자의 병든 육체란 말이 되기에 말이 안 된다.

마 26장 37절을 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셨고, 39절에는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무섭고 큰 것인지를 미리 다 아셨기에 주님께서 이 고통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신 것이다. 그의 고통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2. 심적으로 당하는 고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배고플 때 광야에서 먹여주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셨고 가르치시며 3년간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 생활하셨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하는 절박한 때가 되니까 하나같이 모두 배신하고 버리고도망을 갔다.

a. 가롯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다.
b.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이나 부인했고
c. 다른 모든 제자가 다 도망쳤다.
사람들이 생활 중에서 아픈 사연들이 많다. 그 많은 아픔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거나 배신당했을 때라고 한다. 한 솥에서 함께 밥을 먹던 제자들,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 신임하고 돈궤를 맡겼던 가룟인 유다뿐만 아니라 모두 달아날지라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겠나이다 하고 큰 소리로 맹세하던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이 사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그렇다 육신을 입은 우리 주 예수님은 배신감 때문에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3) 영적으로 당하는 고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의 고통도 힘이 들고 마음의 고통, 심적인 고통도 고통이다. 그런데 가장 큰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라고 본다. 하나님과 하나로 늘 함께하시던 예수님, 갑자기 하나님과 단절되는 캄캄함을 느낄 때, 그 선을 넘어 캄캄한 흑암으로 덮인 터널 속을 지나야 하는 것과 같은 시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영의 세계마저 막혀버렸던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의 죄가 무겁고 중했던 것이다.

마 27: 45-46을 함께 읽어보자. “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라”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짊어지신 “흉악한 죄인”으로 처형당하셔야만 했다. 따라서 성부와 영의 교통까지 끊어졌고 캄캄함을 느끼시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이렇게 삼중 적 고난을 겪으셨던 것이다.

2) 사랑 중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겪고 계시는 처절한 능욕은 어둔 구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먹구름 아래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못 박히실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볼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고문 형틀과 사형 형틀을 짊어지고 갈보리로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요 표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휘장이요 문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여호와께서 영원 전부터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 안에서 행하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공급해 준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볼 때만 제대로 이해된다고 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자기가 지은 죄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그들이 죄악 중에서 고통당하며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긍휼의 마음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마음이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난주간은 경건한 모양으로 새까만 옷을 입고 금식하고 그런 외적인 나타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죽은 위성인 별들이 찬란한 햇빛을 받았으면 그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세상을 비추게 마련이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밝은 빛보다 어두운 그늘이 더 짙게 드러난다면? 이는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노숙인이 된 이야기가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인터넷을 크게 강타하고 있던 실화를 읽어본 적이 있다. 예레미아 스티펙이라는 목사 의 이야기다. 목사는 어느 주일 오전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될 교회 근처에서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교인 중에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세 명에 불과하더란다.

스티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프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더라고 했다. 예배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예배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된다. 이윽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 시간, 맨 뒷자리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 했다.

그는 곧장 마25:31-40까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을 읽고 난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에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나는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인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하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의 제자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훌륭한 제스쳐다.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간이다. 연례 행사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표면적 겉치레와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나 않은지…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이란 곧 그분의 사랑을 받은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수난의 주님이시여, 내 마음속에 좌정하소서, 그리하여 그 빛을 나타내소서, 영원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 22-24)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글

 

 

사랑받는 사모 수칙 10훈(訓)

부제: 내가 눈물로 터득한 노하우/최송연

        

1. 기도를 게을리 마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모가 섬기는 교회는 언제나 부흥한다.
그것은 어떤 역경이 와도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담대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기 때문이다.

2. 말씀을 많이 읽어라.
성도들은 목사님뿐만 아니라 사모도 성경박사이기를 원한다.
평소에 꾸준히 읽어두면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줄 수가 있다.

3. 좋은 어머니가 되라.
문제부모가 문제아를 낳는다는 말은 목회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알라.
비뚤어진 자녀가 있는 목회자 가정은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그 부모의 신앙인격이 이중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부모, 특히, 집에서 어머니가 올바른 신앙관점으로
자녀를 훈계로 양육하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설사 잠시 빗나간다 해도 다시 되돌아온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4. 목사님을 잘 내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명심하라.
 목사직은 영적인 일로서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책이다.
 따라서 사모가 그의 건강관리도 잘 해주어야 하지만 때로는 그의 애인도 되어주고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때로는 친구도 되어 주어야 하며 때로는 야당이 되어
 비뚤어진 길을 가지 못하게 따끔한 충고도 서슴지 않고 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5.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마라.
헌신이란 이유로, 개척교회란 이유로 사모가 교회 안에서 동분서주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길러내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재능이 많은가? (피아노 혹은 꽃꽂이) 내가 직접 하려 하지 말고
조금 부족해도 성도들 중에서 그 일을 하게 하라. 그것도 안되면
가능성이 있는 성도를 택해서 무료 개인지도를 시켜서라도 그들이 하게 하라.
일꾼이 없는가? 그래도 사모는 앉아 있으라 그러면 주께서
적재적소에 적당한 일꾼을 보내심을 깨닫고 놀랄 것이다.

6. 돈을 사랑하지 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 어떤 명분으로도 투기성 투자는 사모가 할 일이 아니다.

7. 매력적인 사람이되라.
굳이 사모가 아니더라도 너무나 화장이 짙거나 사치스러우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물며 사모이랴. 또 너무나 남루하게 하고 다녀도 궁상맞아 역시 보기에 좋지가 않다.
외모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단정히 하고 무엇보다 속 사람( Inner person)을 강건히 하라.
지식과 교양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 잘 다듬어지면
반드시 ‘고운 우리 사모님’이란 칭호와 함께 여자 성도들의 사랑과 신망을 받게 된다.

8. 지식과 정보에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많은 교양서적들을 읽고 가능하다면 적어도 한 가지 외국어 정도는 능통하도록 노력하라.
특히 이민목회자의 가족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성도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존경보다는 멸시가 뒤따르게 된다.

9. 구제에 힘쓰라.
구제를 많이 하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후히 갚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10.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라.
여자 성도들의 매서운 입씨름에 말려들지 않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원수까지라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사모가 가장 참기 어려운 때가 바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말을 (대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사모에게 상처를 주려고 만들어 내는 말들로서
 신빙성이 없는 소리들이다.)들었을 때 자기의 결백함을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사탄에게 칼을 넘겨 주게 되는 때임을 깨닫고 결코 분노하거나
또는 말질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란 명분으로라도 말을 쏟아 놓아서는 안 된다.
잠잠히 주님만 바라고 참고 있노라면 반드시 주께서 일어나 도와주신다.
그렇게 되면 시험의 물결은 곧 잠재워지게 되고 오히려 그런 사모가 신뢰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면 억울하고 분한 소리를 액면 그대로 받게 되고
그때 자신이나 목사님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가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장10절 하반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고린도후서 2:12-13
12  When I came to Troas to preach the gospel of Christ, even though a door was opened for me in the Lord, 13  my spirit was not at rest because I did not find my brother Titus there. So I took leave of them and went on to Macedonia.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가장 수고한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사도바울이 떠오른다바울은 그야말로 인생 전부를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을 기쁘게 여긴 사람이다복음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바울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할례파의 평가가 두려워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공석에서 베드로의 위선적인 모습을 폭로했던 바울이었다. ( 2) 그리고 바나바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이유도 제2차 전도여행을 위해서 마가를 데리고 가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심한 다툼이었는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나고, 바울은 전도여행을 실라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 15)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행여나 천사가 다른 복음을 제시한다면 그 천사의 머리 위에 저주를 과감히 퍼부을 정도로 복음에 대한 헌신(dedication)이 남다른 정도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었다

 

다른 사도들이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하더라도 바울만큼은 복음전파라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사람이었다복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바울 그렇게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는 여기 고후 2:12-13 엄청나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다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드로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문이 열렸다.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열린 것이다황금의 기회를 눈앞에 둔 바울은 복음전파에 전적으로 임했어야 한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바울의 행동은 예상을 뒤엎는다.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디도는 바울의 전도팀의 일행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아주 아끼는 동역자요, 또한 믿음 안에서 아들과 같은 사람이었다. (디도서 1:4).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에 전념했어야 정상적이다. 최소한 그것이 우리의 예상하는 바이다. 그러나, 바울은심령이 편치 못하여결국 드로아를 떠났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쓰던 바울이다. (고전 9:16)  그런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디도가 드로아에 없어서 심령이 편치 못하여서 사역을 거두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이다복음과 인간관계에서 바울만큼은 복음을 택하는 것이 나의 예상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바울은 아끼는 형제가 보이지 않아서 염려하는 그런 가운데 그 사역을 고집하지 않았다특히 사역하다 보면 사역에 대한 열정이 더 요구될 때가 있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더 하기 원하시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 바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뭐랄까… “우선순위라고 하기는 좀 위험하지만, 조심스럽게순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비행기에 탑승해서 승무원이 비상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시범을 보여주고 간단한 비디오로 산소마스크 등을 어떻게 사용하라든지 가르쳐준다거기에서 항상 이렇게 말한다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때에는 본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고, 그다음에 아이를 도우라고다시 말해서,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역자는 먼저 본인의 삶 안에 은혜와 평안이 넘쳐야 한다그렇지 않고 일만 고집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남에게도 결국 도움을 못 준다바울의 경우, 꼭 그런 원리인지 아닌지 100% 알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것 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 마음이 편하지 못한 가운데서 복음전파 사역을 고집하지 않고 사역을 잠시나마 접었다바울정말 배울 것이 많은 것 같다나도 가르치는 (사역자의) 입장에서 자주 서 있게 되는데, 내 마음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와, 충만함,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봐야겠다결국, 복음은이 아니라사람을 살리는것이기 때문이다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동역자들, 부교역자나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나는 거룩하고 나는 신령하고 내가 가장 많이 알고등등의 자고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리더쉽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는가? 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버리고 있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역이란 말인가? 사역이 우상화된 사례다.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바울사도의 사역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보고 우리들의 사역자세도 재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감당하신 사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 함이 아니였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은 제 아들 QT일기장에 쓴 것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별똥별/최송연




 
근세에 들어 하나님의 교회 존속[存續], 존재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고 위협하는 기현상이 각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이런 기현상들은 기업화된 대형교회들이나 사명감을 저버린 일부 황당한 목사들에게 그 책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한 방법으로 왜곡시켜 전하고 통전 적이고도 유기적인 말씀을 앞 뒤 문맥을 살펴 총체적인 뜻을 밝혀 전하려하지 않고 한 구절만 똑 떼내어 그 구절에만 매달려 전체적인 뜻을 흐리게 하여 가르치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성교회를 벗어나야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기성교회는 아예 구원이 없는 것 같은 속임수이건만,표면적으로는 사역자들의 비리에 항거하는 거센 목소리, 진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목소리인 것처럼 미화시켜 내어 놓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말에 현혹된 성도가 교회를 멀리하고 집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이단이나 다른 사이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간다.

구원 받는 백성이 줄어 들고 교회를 찾는 발걸음이 점점 사라지게 하려면, 하나님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리고 교회와 말씀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 중 하나임을 성도들이 인식해야 한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 요즘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는 통계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어근(語根)부터 살펴보자:
 
교회(敎會)란 그리스어로는 큐리아코스(kuriakos = 주에게 속하는),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 라틴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이며, ‘불러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청받은 무리, 성령의 부르심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대관식에 참예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의 모임이란 뜻이 있다. ‘카할’은 구약에서 회중,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하며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에서 구약교회를 ‘광야 교회(congregation)', 그곳에 모세가 있었다고 했다(행7: 38절).

교회(敎會)의 구분:

1. 민족적으로, 첫째, 예루살렘 교회인 초대교회, 둘째, 이방인 교회다. 이방 세계의 각 나라, 각 족속, 각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를 총칭할 수 있다 .

2. 영적으로, 첫째, 개인 교회(고전 3:16절), 둘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말할 수 있는데,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다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보이는(가시적인, 유형 교회)교회: 보이는 교회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말하며, 성경은 이 교회를 가르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골1: 18절),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 28절, 벧전 1: 17-19잘), 또는 거룩한 무리(히 13: 12절, 벧전 1:2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비가시적인 교회(무형 교회): 이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로써,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계 21:장 전장 참조). 지역과 인종과 역사를 초월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모여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성도를 총칭한다.

3. 교회를 영적으로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둘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무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땅 위에 교회(敎會)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후 특별히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 지상에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를 세우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1.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눅19: 10절).
2.하나님께 경배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엡1: 4-6절).
3.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창 되게 하기 위함( 마 28: 19-20).
4.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 요 6: 49절).
5.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함(엡 3: 9-11, 3: 20-21, 5: 9).

교회를 저주해서 안 되는 이유:
a.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 18절, 엡5: 23절 참조).”

b.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지역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성도는 마땅히 주신바 탈란트 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15절 말씀).

c. 성경은 혼자 예배드려도 은혜받을 수 있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하신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면 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 24-25절).”

d.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깨어지면 안된다. “두세 사람이(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20절 말씀).”

e. 성도는 믿음 안에서 친교(코이노니아)해야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친교란 영어로 fellowship,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koinonia)다. 여기에는 물건을 함께 쓴다의 뜻이 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초대 교회는 물건을 함께 나누었다. (행2: 44, 4: 32절 참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요소라면 다음은 회원 간의 친교이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롬 12: 5, 고전 12: 27절 참조)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 되어진 성도들임을 깨닫는다면, 결코 '혼자만 정결하다’라고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이다.

f. 보이는 성전,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거룩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 내 집(가시적 교회)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막 11: 7절)."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시적 교회 성전 건물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개인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 장소 또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파는 곳을 술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모신 개인 교회가 모여서 거룩한 분께 예배드리는 그 장소를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주님을 모신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관계없이 천국이요 거룩한 곳, 성전이다.

이런 것을 볼 때, 가시적인 교회(보이는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에클레시아, 즉 하나님의 대관식에 초청받은 무리는 보이는 교회를 거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회(천국)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는 것은 그분의 뜻이다
 
1.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마 3: 12)”

본문에서 (his threshing floor)이라고 소유격을 사용하셨음을 주목하자. 그 뜻은 이미 불러냄을 받은 무리(개인교회)가 그분의 소유이다.(광의적으로는 모든 세상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개인교회가 모여 공동체 교회(가시적 교회)를 이룬 곳을 주님께서는 (나의 타작마당)이라고 소유격을 특별히 붙여서 사용하시기 기뻐하셨다.(나의 백성, 내 백성 등등)

2.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Let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harvest. At that time I will tell the harvesters: First collect the weeds and tie them in bundles to be burned; then gather the wheat and bring it into my barn.(마 13: 30)

마태복음 13장의  "세상"은 육신 세계를 의미하고 추수 때 교회와 분리시키실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라함은, 믿는 자, 믿지 않는 불신자 모두 섞여 살아가는 육신 세계를 총칭하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모든 세상 사람이 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롬 3: 10절 참조) 과 의인(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개인 교회)을 양이라 하고 주께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고 갈라내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러하다.

마태복음 13장 한 구절만 풀이하여 “세상”에는 가라지가 있으나, 교회 안에는 모두 알곡만 있다라고 주장 한다면 모순이다. 교회(개인교회나 공동체교회), 예수님을 마음에 구세주로 믿는 자가 되면, 그 즉시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벗어나서 하늘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을 가리킴이라면 그 성전된 육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욱신)는 세상에 속하였으나 그 권위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주님의 피로 깨끗게 된 알곡이지만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기 까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주님의 때가 되기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서로 부대끼며 자라고 있는 들판이 세상 속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명이 알곡된 자들에게 주어졌고, 그 사명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단이 날이면 날마다 가라지를 뿌려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인 교회가 모여모여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임인 (공동체 교회) 안에도 사단의 회가 있다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계 2장 참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가롯 유다가 나왔다. 가라지는 분명히 있다.

세상(코스모스)에서 교회는 제외된다고 그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주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 거듭난 영혼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귀한 무리이기에 하늘에 속하였으나,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땅, 곧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갈 2장 4절 그리고 고후 11장 26절에서 바울은 거짓 형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거짓 형제에게서 해를 많이 당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가라지들이 있었음을 가리킴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듦으로써 훨씬 더 많은 가라지들이 들어왔음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교회 안의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낼 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주님께만 있다.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자격이 우리(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가라지와 알곡을 가르고 골라내시는 분은, 농부 되신 우리 주님의 고유권한이며 그분의 주권하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라지 같다고 하여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다. 가라지를 찾아내고 갈라내고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른 분별을 하도록 말씀의 떡을 떼는 것,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을 밝히고 논하는 그 선(line)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이다. "너는 가라지" 혹은 "너는 사단의 자식"이라고 쉽게 정죄하거나 손가락질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내가 갈라내려 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그 정신을 논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내가 알곡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여 나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내가 참 열매인가? 그렇다면 가지 되신 주님께 더욱 바싹 붙어 있어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죽이는 말을 하기 전, 세워주고 밀어주고 살려주는 말을 하자. 다시는 우리 주님의 몸인 교회(개인교회)를 찢지 말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신 것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하심이다. 주께서 당하신 그때 그 모진 고통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찢을까 삼가 조심하자. 말세가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28절 하 참조).”





USA 아멘넷: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후다닥! 인기척에 놀란 다람쥐가 새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나무 뒤로 달아났으나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못내 궁금한 듯, 나무 사이로 빠끔히 내어다 보는 한가로운 가을, 건강을 위한 등산을 목적으로 우거진 가을 숲을 찾는 사람들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허기진 배를 안고 식용 버섯이라도 채취해서 먹어볼까 하고 산을 찾던 일가족이 그날 저녁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남편과 나)가 러시아에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종종 들을 수 있던 허망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더랬는데,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우리나라 영덕에서도 유사버섯(독버섯)을 식용버섯인 줄 알고 채취해다가 끓여 먹고 일가족 3명이 그날 밤 한꺼번에 절명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어느 신문에선가 읽고 슬펐던 기억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유사하다고 하여서 함부로 먹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은 버섯의 인공재배가 많아 시장에서 다양한 버섯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버섯이 가지고 있는 순기능 때문에 건강기능식품으로의 역할도 점점 커지고 있기에 인기가 많지만, 버섯은 그 종류가 다양하여, 우리나라만 하여도 1,680여 종이 있다는데, 이중 약 10% 정도가 독버섯에 해당한다고 하니 버섯을 단순히 보고 관찰하는 것이나 재미로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듯하게 생긴 버섯들이 상대적으로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는 버섯도 많으니 자연산 버섯을 주의하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우리가 어릴 때 독버섯은 화려하고 예쁜 것이라고만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잘못 배웠던 탓도 있다.그러나 알고보니 색깔과 모양만으로는 절대 구별하기 어려운 유사버섯이 심각한 독버섯 중에도 많이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독버섯이 위험한 가장 큰 이유는 먹을 수 있는 식용버섯과의 구별이 어렵다는 점 때문이라고 한다. 아예 종류가 다른 버섯이면 상관이 없겠지만, 유사버섯(독버섯)과 식용버섯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눈으로는 비슷비슷해 보이고 그 모양새나 색깔은 전문가들조차도 구분이 어려운 것이 많다고 하니 먹어보겠다고 버섯을 채취하려는 분들이라면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그러나 한 편, 인간사에서는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Different doesn’t Mean Wrong)라는 말이 있다. 그 말도 맞다. 인간의 외모 혹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는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나와 다르게 생겼다고 하여서 틀린 사람이라고 몰아가거나 틀린 생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장애인들은 우리와 다른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그분들이 우리와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우리와 약간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서 그분들을 우리와 틀린 사람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만물의 영장이며, 그분들도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사람이라면 모두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실력으로 따진다면 장애인들이 정상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춘 분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음도 우리는 안다. 출생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거나 살다가 어떤 사고를 만나 장애인이 되어 비록 외형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우리와는 약간 다르다고는 하나 그분들도 타고난 재능에 따라 노력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얼마든지 뛰어날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헬렌 켈러 여사가 그랬고, 음악의 거장 ‘베토벤’이 그랬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장애우님들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중 한 분을 소개하자면 이희아 씨가 그렇다. 손가락이 다섯 개인 우리와는 달리, 손가락 4개만으로 태어난 이희아 씨, 그런 그녀가 웬만한 피아니스트들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밀려드는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앞이 뽀얗게 흐려졌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길에서는 어떠한가? 과연, 구원의 길마저 “그렇다.” 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NO!, 결코, 그럴 수 없다!”이다. 무엇 때문인가?

영적 세계에서는 다른(유사(similarity))것은 틀린(wrong) 것이다!

영적 세계는 사각지대가 있을 수 없고,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왜 그런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경고해 주고 있기에 그렇다. 영적 세계에서 ‘다르다'(異)고 하는 것은 곧 '틀리다'(誤(오))류란 뜻이다. 영적 세계, 구원의 길에서는 다른 길은 죽음과 직결됨을 알아야 한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씀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 1-2) 하는 말씀이 있다.

내용인즉슨,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며 제사장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소의 불을 켤 때, 성소의 불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없신 여기고,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드렸다. 불은 불이나 다 같은 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불은 거룩한 불이며 인간이 마음대로 변개시키거나 뚯대로 바꾸면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불이라면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의 불과 유사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 인간이 만든 우상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명하신 것 외에 다른 불로 제사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성소에 밝히는 불이라면 더욱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불로 드려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인간이 마음대로 밝힌 불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교만한 그들의 생명마저 취해가셨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불(레 9:24)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 것, 땅에서 온 불이기에 그 불은 속죄의 근거를 갖지 못한 불이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지시하신 신령한 불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태워 인간에게 허락하신 속죄의 불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성령의 불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행 4: 12절 참조)

W.C.C.는 다른 신(神)을 용납하기에 틀린 것이다

W.C.C.가 종교다원주의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7차 총회 때 있었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 이화여대 교수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소복차림으로 사물놀이패를 앞세우고 무대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춤을 추고는 초혼 문을 읽으며, 초혼제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정 교수는 이 특강에서

“한이 많은 영혼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고는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고 하면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은 정교수의 특강 일부분이다.

『오소서! 애굽인 하갈의 영이여!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버림받은 흑인 여성입니다. 오소서! 우리아의 영이여! 당신은 다윗 왕에 의하여 전쟁터로 파병되어 살해된 충성스러운 군인입니다. 다윗의 음욕이 당신을 죽게한 것입니다. 오소서! 예수 탄생시 헤롯 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어린 아기들의 영이여! 오소서! 잔 다르크의 영혼과 중세기에 화형으로 살해된 무당들의 영이여! 오소서! 십자군 때 죽은 사람들의 영이여! 오소서! 토착민의 영이여! 식민지 시대와 기독교 선교시대에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틀러 유대인 학살 당시 가스실에서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탄에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오소서! 인간들의 금전욕에 의해서 고문당하고 착취당한 흙, 공기, 물의 영들이여! 오소서! 걸프전에서 죽어가는 군인들, 민간인들, 해양생물들의 영혼들이여! 오소서! 십자가상에서 고문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 형제이신 해방자 예수의 영이시여! 』

정 교수는 기독교에서 금하는 초혼제를 드렸으며, 민중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해방자 예수’를 주장하고 있으며, 한(恨)의 신학을 주장하고, 더욱이 성령과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동일시하였다. 또한 한국기독교교육협의회의 홈페이지 기도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인 구미정 교수의 “생명의 강 살릴 종교 여성 공동기도문”에도 이와 유사한 혼합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오 하나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 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마리아님과 소태산 재조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아멘』 - 김길성, “WCC 한국총회를 앞둔 한국교회의 방향과 전망”,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 WCC대책위원회편,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2011), p. 39

그런고로 우리는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하며 살아갈지라도 신앙만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다른(異)것, 유사한 것이라고 하여 용납하거나 따라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자는 오직 우리 주 예수님 한 분 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온 인류가 망하고 죽게 된 그 첫 번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음성과 ‘유사 음성을 분별하려 하지 않고 유사 음성을 그대로 용납하고 수용하였던 때문이다! 기차노선이 두 갈래로 나 있다고 하여서 그 길의 끝이 모두 한 곳에 닿지는 않는다. 철로길이 유사하다고 하여서 서울 가야 할 사람이 부산 가는 열차를 타면 안 된다.

우리가 성도라면 매사에 조심하며 오실 그분을 사모하여야 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유사음성을 주의하여야 한다! 성령의 흉내를 내는 사단의 음성도 있다. 가짜가 있으면 진짜가 있는 것이다! 도금한 것이 화려하고 번쩍거린다고 하여서 순금은 아니다. 종교는 모두 다 같다고 하는 미혹의 음성, 각종 유사(類似) 음성이 만연한 세대다. 이런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삶의 잣대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자. 거짓의 아비, 미혹의 영이 활개치는 이런 것이 모두 말세적 한 징조임을 깨닫고 혼미한 세계를 벗어나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들의 주께서 권면하신다. "너희는 유사(類似)음성을 주의하라"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 14- 16)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Maranatha (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 is a two-word Aramaic formula occurring only once in the New Testament (see Aramaic of Jesus) and also in the Didache, which is part of the Apostolic Fathers' collection. It is transliterated into Greek letters rather than translated and, given the nature of early manuscripts, the lexical difficulty lies in determining just which two Aramaic words comprise the single Greek expression, found at the end of Paul's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 Cor 16:22).

마라나타(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마라나 타 혹은 마란 아타)는 두 단어의 아람어식 어구로는 ( 예수님의 아람어를 참조하라) 신약 성경에서 그리고 디다케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것을 ‘사도의 아버지’ 수집(collection)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초기 원고의 성격, 두 단어의 아람어가 단 하나의 그리스어 표현을 포함하는 결정에 어휘의 어려움이 있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지기보다 그리스 문자로 바뀌어(음역되어) 졌고 , 고린도전서 16: 22절 바울 서신의 끝머리에 표현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고전 16: 22)

imperative verb, then it can be translated as a command to the Lord to come. On the other hand, if one decides that the two words מרן אתא (maran 'athâ), a possessive "Our Lord" and a perfect/preterite verb "has come," are actually more warranted, then it would be seen as a credal expression. This interpretation, "Our Lord has come,"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n equivalent of this in the early credal acclamation found in the biblical books of Romans 10:9 and 1 Corinthians 12:3, "Jesus is Lord."

만약, 누군가 두 단어로 (마라나 타) 띄어 쓰도록 선택한다면, 필수 명령형 동사 호격 개념으로는주여 오시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누군가 소유격으로 번역하고저 할 때는우리의 주님이 가능하며 완료형/과거 동사의 표현은Has come, 오셨다가 사실상 더 보장되는데 오래전 신조(교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번역은 성경 로마서 10:9과 고전 12:3에 나타나는 "예수는 주시라"는 교회사에서 일찍이 신조(교의승인(허락)을 토대로 이 해석 방법의 타당성을 지원받기도 한다.  

In general, the recent interpretation has been to select the command option ("Come, Lord!"), changing older decisions to follow the preterite option ("Our Lord has come") as found in the ancient Aramaic Peshitta, in the Latin Clementine Vulgate, in the Greek Byzantine texts, Textus Receptus, critical Greek texts like Westcott and Hort, Tischendorf, Cambridge, etc., and in the English translations like the King James Version, the Finnish Raamattu, etc. One reason the change from the previous scholarly view has occurred is that the P46 papyrus (ca. A.D. 200) divides it as μαρανα θα ("marana tha").

일반적으로, 최근의 해석은 고대 아람어 페쉬타에서, 라틴 크레멘타인 벌기트 성경에서, 그리스 비잔틴 텍스트들에서 발견되어진 것처럼 “우리 주님이 오셨다”의 이전 결정을 변경, “오소서, 주님!” 명령형으로 선택했다. 그리스 비잔틴 교재들, 까다로운 웨스트코트와 같은 그리스 텍스트들과 호르트, 라틴 클레멘타인 벌기트 성경, 호르트비스첸도르프, 캐임브리지 등등, 그리고 킹 제임스 버젼과 같은 영어 번역들, 핀란드 라아마투 등등에서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바꾼 단 하나의 이유는 중요한 그리스어 교재 학술 보기 P46 파피루스 (ca. A.D. 200) 같은 곳에 “마라나 타”로 띄어 분리하는 일이 나타났던 것이다.

The NRSV of 1 Cor 16:22 translates the expression as: "Our Lord, come!" but notes that it could also be translated as: "Our Lord has come"; the NIV translates: "Come, O Lord"; the NAB notes:


고전 16: 22을 “NRSV"에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메모는 역시 "우리 주께서 임하셨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NIV 에는 "오시옵소서, 오 주여로 번역되었다; NAB 메모:

"As understood here ("O Lord, come!"), it is a prayer for the early return of Christ. If the Aramaic words are divided differently (Maran atha, "Our Lord has come"), it becomes a credal declaration. The former interpretation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 Greek equivalent of this acclamation in Book of Revelation 22:20 "Amen. Come, Lord Jesus!""

여기서 (“O Lord, come”)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있으시기를 구하는 하나의 기도문이다. 만약 아람어식 단어를 다른 형태로 나누면 "우리 주님이 오셨다(임재하셨다)”이며, 이것은 신조(교의)로 선포되었다. 이전의 번역은 그리스 어의 계시록 22: 20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동등한 타당성을 지원받는다.    

The 1985 New Jerusalem Bible translates 1 Cor 16:22, "If there is any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a curse on such a one. Maran atha." In the context of First Corinthians, understanding the Greek "maranatha" as Aramaic "Maran atha" in the preterits sense would provide substantiation for the preceding anathema. That is, 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is accursed because our Lord has ascended and come unto his throne (e.g., Dan 7:13) and wields power to implement such a curse. It would also substantiate the following prayer for grace from the ascended Lord Jesus, who has come to his throne and then sends the Holy Spirit.

 

1985년 새 예루살렘 성경은 고전16:22을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Maran atha"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으로 보아서, 과거의 판단력 안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maranatha"를 아람어 "Maran atha"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앞에 말한 저주에 대한 입증을 제공할 것이다. 즉 주님의 승천과 그의 보좌 (단 7: 13)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무서운 저주를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왕위와 승천하신 주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임하실 그분의 보좌, 그리고 거룩한 성령을 보내어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번역: 별똥별/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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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웹상으로 무섭고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는 이상한 교리가 있어 성도들의 주의가 요망된다. 그 일로 인해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도 한참 열띤 논쟁이 벌어졌었고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인즉, 기독교가 유대교 교리보다 떨어지고 천주교 교리보다도 떨어진다고 하며 그 주된 이유로는 구약에서 메시야가 대제사장이란 것을 뒷받침해 줄 성구가 없고, 구약에서 예표된 성구가 한 구절도 없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도 대제사장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신약, 그것도 히브리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란 성구가 있고, 또 예수님이 레위 지파에서 태어나지 않고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셨기에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으로도 메시야로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은 물론, 구속 주로 받아드리거나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논지였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근거로 함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말씀을 정리해 보았다. 이 말세지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흐리게 하는 무서운 이단사설, 가만히 들어와 우리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 넣는 미혹의 영들을 경계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밝히 조명해 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나눔의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 본다.

1. 대제사장의 사역과 선지자의 사역 구분

먼저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역부터 구분해 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사역과 선지자의 사역은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아주 대조적이다. 대제사장이나 선지자는 모두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시고 기름부으신 자란 뜻에서는 동일하다. 그럼에도 사역에 있어서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게시자가 지난번 칼럼 글에서도 잠시 언급한 대로 제사장은 인간 편에서 인간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이라면,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해 주는 파수꾼 역활이다. “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세웠노니 너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라( 겔 3: 17절).” 하셨다. 고로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반드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 대제사장을 세우신 목적:

대제사장의 사역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구약의 제사장 사역을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제사장직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택하여 기름 부음을 받아야 제사장으로 인정되었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외국인이 그들의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뜻은 단순히 민족적으로 같은 종족이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민이기에 자신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지만 대제사장은 선민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고 선택된 레위지파, 아론과 그 자손들만 대제사장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민족적으로서보다 하나님과 백성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만큼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기름부어 세워야한다는 의미로서가 더 강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제사장은 여러가지 형태로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받았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제사는 1. 속죄(건)제, 2 번제, 3. 화목제(위임제)이다. 위에 열거한 제사 중, 1번과 2번은 '인간의 죄를 속하는 제사임'으로 그 제물은 반드시 짐승의 피와 기름이 사용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화목제는 구운 떡이나 처음 열매로도 가능했다. 화목제란 속죄받은 후, 그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다음은 4. 소제= 고운 가루로 드리는 것(레2: 1-3), 5. 구운 떡으로 소제를 드리는 것 (레 23: 17), 6. 처음 익은 곡식으로 소제를 드림( 레 23: 17), 소제란 히브리어 (민카)이며, ‘선물’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성에게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장 자신도 같은 예식으로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다른 이를 위해 제사를 드려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롬 3: 10절)말씀이 성립된다.

3
. 구약에서 메시야로 예언된 대제사장.

a.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한 마리의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물 삼으시고 아담과 하와의 육신이 당장 죽는 것을 면하도록 하는 예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거행하심으로, 이때,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고 그 몸으로 단번에 제사를 지내실 대제사장 메시야는 이미 예표되셨다(창 3: 21절).

b.샬렘왕이시요, 평강의 왕 ‘멜기세댁’은 오실 대제사장 메시야의 예표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 4절 말씀).” 구약의 멜기세댁(창14: 18-20)은 신약에 나오는 멜기세댁과 동일함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 19-20절 말씀, 7: 1- 28절 참조).”

4. 메시야로서의 대제사장은 반드시 유다 지파에서 탄생해야만 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 10절 말씀).”, “유다는 나의 홀이며(시108: 8).” 여기에서 홀이란 영어로 lawgiver이며 다스리는 자이시다. 그 예언대로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셨다.(마 1: 1, 히 7: 11-14)

**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율법으로 인한 구약 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되어 졌다. 따라서 구약법 제사장 제도 역시 변혁되었기에, 레위지파는 오실 이의 표상일 뿐, 실제적인 대제사장이 오신 후 제사 직분이 변혁되어야 율법도 변혁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

“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For the priesthood being changed)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우리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히 7: 12-13절).”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메시야이시며 대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탄생하시면 오히려 나실인이 아니란 것이다.

5
. 신약에서 예수님은 친히 그 몸으로 제사를 드리시므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본문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하였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반드시 죄에 상응하는 그 무엇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리지 아니하시고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다. 침례(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던 것이다(요 1:29). 인간 대제사장들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그때마다 죄없는 짐승을 잡아야 했고 자기 자신도 먼저 그 피로 정결케 하고서야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 그 피로 단번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 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 10-14절 말씀).”

그런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야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단 한 분, 우리들의 죄를 위해 그 몸으로 영원한 속죄를 드려주시고 죽고 멸망할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자격을 온전히 갖추신 유일무이(唯一無二)하신 대제사장이 되심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하며, 그 피를 힘입을 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 12-14절 말씀).”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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