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모님, 목사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오랜만에 한국 반찬 가게를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이웃교회 사모님을 만나게 된 필자는 그분의 남편 목사님께서 간암 말기란 소문을 얼마 전에 들었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어 보았던 것이 화근이다. “우리 목사님 다 나았어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염려 할 것 있나요?”무슨 그런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듯, 질책하는 눈빛으로 짧게 바라보시더니 휭하니 돌아서서 어느새 저만치 가버리신다.

‘아차,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것인가? 남편 목사님께서 병든 것, 그리고 그 병이 낫지 않는 것과 하나님 살아계신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만약, 저러시다가 남편 목사님의 병이 영영히 낫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되는 걸까?’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그후로 그분을 같은 가게에서 두어 번 더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분께 남편 목사님의 건강을 물어볼 수가 없어서 진열장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기듯 피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달 후, 안타깝게도 그 목사님은 오 십대 중반의 한참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하셨다.

어디 그 사모님 뿐이랴. “믿습니다! 믿습니다!” 휘황찬란한 조명등이 현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꽃장식으로 화려한 (저런 돈 아껴서 선교사들이나 밀어주면 좀 좋을까, 믿음이 없는(?) 나는 궁시렁거리며 둘러보느라 은혜도 안 된다.) 무대처럼 꾸민 강대상 위에서 쇳소리가 섞인 듯한 음성으로 강사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질러대는 괴성, 거기에 맞추어 “믿습니다! 믿습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성도들, 은사 집회란 곳이나 혹은 무슨무슨 부흥집회란 곳을 한 번 참석해 보면 믿음(faith, belief)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자못 희한하기 그지없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주문(?)외우듯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자기 암시 내지 자기 신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믿음(faith)의 정의부터 한 번 생각해 보자.

위키백과 사전에서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철학,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념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신앙, 신심, 신앙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믿음과 신념의 차이를 명확히 분류해 두지 않았다.

성경은 믿음(faith)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절 말씀)” 즉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자기가 소원(바라는) 하는 것들이 어느 시간에 실제적인 형태(실상)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리고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자기 신념과 별반 다를 것 없어보인다. 그러나 믿음과 자기 신념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여러 부분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믿음(faith, belief)은 자기신념이 결코 아니다.

믿음(faith)의 대상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철과 지식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세와 부를 믿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믿고 의지하다가 배신을 당해 가슴 아파한다. 우리 아멘넷 토론방에서 한참 치열하게 논의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담임 목사의 말을 믿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더란 것이고,이런 것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너무 상처가 되어서 자칫 교회를 등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한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언어)이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말씀 하신 것일까?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인생을 살아갈 수록 그말이 더욱 절감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권력과 명예를 믿고, 돈을 믿고, 자기의 인기를 믿었지만 그 믿음이 자기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이끌어 넣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인생인 것을…, 안타깝다못해 가슴이 저민다.

우리가 진정 믿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5)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했을 때,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어야 한다. ( 히 13:8절 참조)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믿음 (faith)의 근간(根幹)

믿음의 근간(根幹)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감정의 변화나 오래 교회에 다닌 역사나 또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도중 유라굴로라고 하는 태풍을 만나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고 모두 크게 두려워서 떨고있을 때,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25절)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른 믿음의 근간(根幹)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아니요, 성경지식이 많은 신학자도 아니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란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는다, 하는 것이고, 따라서 행동에 옮기기 전,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로고스(Logos) 혹은 레마(Rhema))을 먼저 받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이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창 12:1절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인간으로서는 최초, 최말로 물 위를 걸은 위대한 사람, 베드로 역시 물 속에 혼자서 마음대로 뛰어든 것이 아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주께 먼저 간구했고,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되." ( 마 14: 28-29절 말씀)  모든 믿음의 근간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과 선택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란 것을 인지하고 그 말씀에 동의해야 한다. 믿음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10:17)

결론적으로 믿음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임이 틀림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그분이 허락하시는 때에, 내 앞에 실상(현상)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자기 신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하여 내 몸에 병이 들지 말라는 법 없다. 그리고 내가 병들었을 때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해주시는 은혜를 입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병에서 놓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불러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런고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치유 은사 사역자도 아니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소리질러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들뜨게 하는 유명 부흥강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Logos, Rhema) 약속한 바 없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병을 낫게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강렬한 입술의 선포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 암시적이며 자기 신념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일 뿐 참 믿음이 아니다.

믿음(faith, belief)이란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주권과 섭리하심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내가 살던지 죽던지 그분께 영광 돌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evidence)인 것이다! 고로, 신념은 인간 스스로의 정의이며, 믿음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이고 소유이며 은혜라 정의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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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동시에 청지기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군들입니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습니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군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청지기 의식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청지기에 대해서 같이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청지기(steward)의 뜻:
청지기 직분이란 주인의 재산이나 가옥을 일시적으로 위임받아 주인의 뜻을 따라 보관하고 관리하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의 것을(이익, 불이익) 돌려 드리는 것이다.

2.구약에 나타난 청지기 직분
많이 있지만, 시간 관계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의 아내 될 신부를 구하고자 먼 나라로 보낸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신뢰받는 청지기이다. (창24:2-3)

3.청지기의 의식주
그 소유주가 전적 책임이며 주인의 집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

4. 청지기의 사역
때를 따라 양식(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먼저, 청지기들은 삶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해야 합니다.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인쳐 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사역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음, 청지기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팔아먹어서도 안 될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힘을 합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합쳐야 하며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그분만이 우리들의 주인 되심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주님만이 자기 종들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청지기 된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어 그 사람을 통하여서 성령이 전이(impartation)되고, 어떤 특정 집회장소에서 성령의 사역이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특정인의 전유물인양 생각하면 안 됩니다.요한 사도처럼 조용한 사람은 그 성품대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하심, 베드로 사도처럼 성격이 불같은 사람은 불같은 성령의 체험을, 이렇게 저렇게, 이모저모로 사람을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서로서로 질시하는 일이나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도, 인간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받아 지느냐? 아니면 성령님의 은혜로 깨달아 지느냐? 두 갈래로 나누이게 됩니다. 사실, 영적인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깨닫을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시는 영역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성령님의 몫(하나님의 고유 권한)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중 누군가가 잘못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주인께서 심판하실 날이 멀지않았으니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로서 아룀이 좋으며 내 영혼에 거울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책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아카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똑바로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될 때, 비본질 적인 것을 본질인양 가르치기도 하고, 자신의 뜻을 섞어서 가르치기도 하고 약한 자들을 질책하기도 하므로, 오히려 본질을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22:11-12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각 사람(everyone)에 주의를 기우려 주십시오. (Individuality)입니다.!! 상급도 개인적이요, 벌도 개인적입니다! 다른이들의 비행 때문에 내 영혼에 상처가 되거나 내 영혼이 병들거나 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 최송연

 


개혁교의 대표적인 분들(죤 칼빈, 마틴 루터, 벤저민 휫필드. 죤 매카터, 리처드 개핀, 대니얼 월리스) 등, 그분들은, 초대 교회 이후, 은사중단론을 지지한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중단설(cessationism)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교회 이후 방언, 신유, 은사, 계시 등이 끊겼고 사라졌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유로는 성경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모든 은사들이 필요하였고 그에 따른 임무(성경이 완성)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됩니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다는 군요.)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합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룁니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저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저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입니다. 저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하지요.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까?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이 말은 표현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개혁교회(다는 아님)중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중 방언과 예언은 중지되었다고 가르치지요. (아래 참조를 올려두었음)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직통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체험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글: 별똥별/ 최송연




교제님께서 수고하여 주신 덕분에, 주소에 들어가서 읽어본 결과,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 선생의 입장을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보다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즉, 칼빈 선생님의 뜻이 해설자들의 말에 의해서 호도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잘 정립해주고 있는 분은 역시 칼빈 선생님이시란 생각입니다!

1. 기독교 강요
1) Inst 1536.

((그들은(여기서 그들이란, 거짓 기적을 조장해 내는 현대판 신사도 파와 같은 천주교회를 지칭)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 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 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시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칼빈

여기에서, 현대는 사도 시대와 같은 기적(동일한 능력,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던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 살렸다는 말은 모두 거짓 사도들이 꾸며낸 말일 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 것, 주께서 오라고 하시면 오늘이라도 가야합니다. 잠시 잠간의 기적으로 인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신사도 파, 아이홉 파처럼 날라리 사이비(토마스님의 표현을 빌렸슴다.^^)가 그때 당시도 횡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거짓 기적, 사단의 장난질을 경계하자는 단호한 의지가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구분되고 우리(개혁교도들)에게도 성령님에 의한 참된 기적이 있고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 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붉은색이나 밑줄을 그을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 칼빈 , 아멘!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거짓과 참을 구분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칼빈  이런 용어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칼빈 선생의 위의 문단이 저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내용과 어쩌면 이토록 합일한지, 성령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참된 성령의 역사로서의 기적은 옛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처럼 그렇게 큰 능력으로 임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주께서 그들을 사용하신만큼의 기름을 부어주시지는 않지만, 주님의 뜻에 따라서 여전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은,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거짓 영, 거짓 기적을 성령의 능력으로 분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장난에 휩쓸려 넘어갈 뿐아니라 거짓 삯꾼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어간다!!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목사님들도 칼빈 선생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을 약간씩 뒤틀어서 이해하지 마시고 아, 와 어, 가 다름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아래 Thomas님처럼 바른 이해를 가짐으로써, 맡겨주신 주님의 양떼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http://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25&command=body&no=158&


글: 별똥별/ 최송연


 

요즘 소위 ‘부흥의 물결’ 이라는 명제 하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치유사역’, ‘입신’, ‘금가루현상’, ‘ 죽은 사람 수십 명을 살렸다’ ‘하늘에서 금발의 미녀 천사가 (싸구려)보석을 떨어트렸다’ ‘초자연적 능력’, 등등…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이야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경을 신앙 생활의(Cannon)잣대로 알고 믿는 성도 중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단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함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인터넷에 올려진 이런 말들과 자료들을 접했을 때, 혹시, 19세기에 일어났던 그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런가?…사실, 기대하는 마음과 긍정적 시각으로 그 사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또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아주사 거리의 부흥이 우리 세대에도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현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부흥의 불길이란 것에 무언가 예감이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대로 뭉쳐서 예언이란 이름으로 서로서로 올려주기도 하고 세워주는가? 하면 성경에도 없는 ‘입신’이란 이름 아래 천국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드나들고, 각종 보석(싸구려)들을 천사가 떨어트렸다고도 하고… 심히 수상쩍은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봅니다. 글쎄요, 그런 조잡한 일들이 과연 성서적이며 창조주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은사(선물)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글, 입신상태의 말,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다 똑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1.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그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 급)

2.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더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 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 및 직분 자들

3.‘샤머니즘’적 신앙, (무당 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것 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사단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 차,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드기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더욱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본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로 신비주의 자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듯,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듯 보이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의 대처 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한다는 성경 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말 것 (계22:18_19절, 벧후1:20절 참조)

2.이적과 기사가 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그 말씀에 따라서 반드시 영을 다 믿지 말고 말씀을 토대로 검증할 것 (요1서4:1절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그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말 것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할 것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인 쳐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풀이할 때,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눅24장32절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볼 때,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상태가 꼭 ‘입신’이다 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 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구태여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들의 꿈에나 혹은 비몽사몽 간에라도 나타나셔서 통곡하셨다면, 그 이유가 오직 사람들의 잃어진 영혼을 위해서요, 사람의 영혼을 전도하지 않는 게으름과 주의 종들의 시기질투로 말미암아 전도문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어야만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고, 그 이외에 어느 것도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의 눈에 눈물을 흘리시게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설사 통곡하시는 주님을 환상에서나 비몽사몽 간(저 역시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에 뵈었다고 하여도 그 이유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는 선전도구로 활용하거나 다른 성도들보다 더 신령하다고 착각을 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떨어진 자요 그런 영혼은 이미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전락된 상태일 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팔아먹어서도 안 될 것이며, 무조건 모든 기적과 이사는 폐지되었다 주장을 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이적과 기사가 다 검증없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합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모두어야 하며 이 땅 위에 세워진 교회,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교회가 다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주인이 되심을 믿고, 주님의 청지기로서 서로 섬기며 봉사해야 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또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어떤 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허락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섬기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고, 어떤 특정교회에 국한된다고 하는 생각으로 신령한 사람을 따라 다니는 습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이런 사기극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 1)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 15)


   글: 별똥별/최송연


    

   


 



긴 세월을 두고, 교회와 교회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방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본다.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님들도 있고, 반대로 방언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방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은사주의', 심지어 '신비주의'로 몰아가며 방언은 초대 교회로서 중단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서로서로를 경계하며 손가락질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무엇보다도 말세적 징조의 하나겠지만, 성령을 가장한 사단의 장난 또한 극심하다. 하여, 필자는 오늘 "방언의 유익과 주의점" 에 대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같이 생각하며 나누어 보려고 한다.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과 혼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장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실제 성령님의 역사로 주께 올리는 영의 기도는 결코 무아지경이 되거나 정신을 잃거나 혼절한 상태에서 중얼거림이 아니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28절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했고,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 (이성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그 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 全能) 하나님 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나 분명한 영적 언어임이 확실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든 은사의 주체이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셨으니, 영언 "ability"를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다사다난했던 이 한해도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듯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2011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한해의 시작이 씨앗이었다면 한해의 마지막을 결실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겠지만 인생이란 대개 그 반대이다. 한해의 시작은 쌍무지개 뜨는 희망의 언덕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마냥 부푼 마음으로 오색찬란한 꿈과 소망으로 멋진 미래를 설계해 보지만 정작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대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의 벽에 부딪혀 낙담하게 되는 때가 다반사이다.
 
필자는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조금씩 주어진 숙제를 차곡차곡히 잘 해나가겠다는 결심을 곧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의 결심과는 달리, 방학이 시작되는 그 시간부터 부모님께는 곤충채집이란 핑계로 둘러대고는 온 여름 내내 산으로 들로 개울가로 꽃과 나비, 풀벌레들, 때로는 올챙이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헤매며 놀다가 개학이 시작되는 며칠 전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하여 하루 온종일 책상에 붙어앉아서 밀렸던 일기를 한꺼번에 써내려 가보지만 이미 날짜는 너무 많은 갭이 생겨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는지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양치질을 하고 밥을 먹고 …” 그말이 그말인 내용을 적어나가다가 어린 마음에도 이건 아닌데 정말 난감했던 기억을 시작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연말이 되면 언제나 마음은 급하고 초조해지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마무리, 성취감에 뿌듯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인지 대책이 서지 않고 시간시간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ㅠㅠ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도 몸도 추워지면서 때로는 자신이 무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해를 시작할 때 먹었던 결심들, 이번만은 알차게 가꾸어 나가리라 설계하며 계획했던 모든 꿈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낭패감, 그리고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한 발짝 죽음의 문턱에 더 가까워졌고, 평생을 사모하며 그리던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뵈어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그분에게 이렇다 하게 내어 드릴 일도,이루어놓은 일 하나 제대로 없이 이대로 늙고 병들어 갈 것이란 두려움이 가끔은 밀려오기도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속수무책이란 생각에 마음도 몸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또 한 편,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내가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 회한의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맹렬한 속도로 달리다가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것은 인생의 끝자락을 생각하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법 철든 생각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요 며칠 전, 권세의 상징, 강한 힘의 상징이랄 수 있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게 되면서 더욱 더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세계의 관심은, 그의 뒤를 이을 후사 문제에 대한 중차대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를 애도하는 물결의 통곡이 과연 진짜냐 가짜냐 언론이 시끌벅적 재밌는 현상도 일고 있음을 본다.

그만큼 그의 삶이 진실하지 못했던 때문일까? 그가 죽은 후, 그를 추종하던 각료, 그의 뒤를 이어갈 집권 세력들은 “백두산 천지에 있는 얼음이 동시에 깨어졌다. (누가 그 시간에 그곳, 백두산 천지 연못에 가서 의도적인 관찰을 했다는 것인지,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비둘기 두 마리가 그의 장례 장을 들어오려고 애를 쓰다 안되니까 맞은 편 나무에서 구슬피 울었다. 날씨가 연례 없이 맑고 좋았다. Etc. ” 여러 가지 자연 현상마저 동원, 조작하여 죽은 그를 신격화하는 운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지금 심경은 어떨까? 인간의 육신은 흙으로 빚었기에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가 누구던지 그가 살아 생전 선악간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해 주고 있다. 불멸의 세계, 생각지도 못한 사후 세계,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하나님의 얼굴과 영벌의 세계 앞에서 그의 절망스런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반대로,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67)

* 선한 싸움을 싸웠다 (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 달려갈 길을 마쳤다 ( I have finished the race)
* 믿음을 지켰다 ( I have kept the faith )

바울, 그는 한해의 끝자락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후회함보다 영광으로 그 광채를 더하여 간다. 날마다 그분 앞에서 살았기에 너무도 당당할 수 있는 백전노장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부럽다. 이런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배워둔다면 한해의 끝자락 뿐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한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비욘드 라이프(Beyond Life), 죽음과 사후세계를 준비하라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드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인가? 이런 것은 단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통상적인 사후관념일 것뿐이다.
 
그러기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死亡)이란 단어를 쓴다. 사망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사망, 죽을 사(死)자, 망할 망(亡)자, 즉 ‘죽음’이란, ‘죽고 망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깔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문제에서 도피하는 길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인간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육신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 영혼은 그 주신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전도서12: 7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 ‘죽고 망한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쉬는 것이요,‘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절)”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 28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친히, 영은 불멸하며 사후에는 선악 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하셨다.

죽음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히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Christ) 그분의 은총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흔히들 말하는 그 DNA가 엄연히 다르다.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백보좌 심판대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으로 이 한해의 끝자락을 마무리 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로운 마무리가 잘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6-27절 말씀)”

필자가 좋아하며 아끼는 외국 詩 한 편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Kent M. Keith)
역설절 계명 - Kent M. Keith

People are illogical, unreasonable, and self-centered.
Love them anyway.
사람들은 종종 논리적이지 않고 불합리하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사랑하라.


If you do the good, people will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Do the good anyway.
네가 선(善)을 행하면 이기적이거나 무슨 저의가 있을 거라고 탓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선행을 베풀어라.


If you are successful, you will win false friends and true enemies.
Succeed anyway.
네가 성공하면 거짓된 친구나 진짜 적을 얻게 된다.
그렇더라도 성공하라.


The good you do today will be forgotten tomorrow.
Do the good anyway.
네가 오늘 한 선행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선을 행하라.

Honesty and frankness make you vulnerable.
Be honest and frank anyway.
정직하고 솔직함이 널 속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정직하고 솔직해라.


The biggest men and women with the biggest ideas can be shot down by the smallest men and women with the smallest minds.
Think big anyway.
큰 생각을 가진 큰 사람들은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크게 생각하라.

People favor underdogs but follow only top dogs.
Fight for a few underdogs anyway.
사람들은 약자의 편을 들지만, 결국 강자만을 쫓는다.
그렇더라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may be destroyed overnight.
Build anyway.
네가 수년간 쌓아 올린 것을 누군가 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쌓아라.

People really need help but may attack you if you do help them.
Help people anyway.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네가 돕더라도 그들이 너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도와주어라
.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you'll get kicked in the teeth.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yway.
네가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줘도 네겐 하찮은 결과로 돌아 올 수 있다.
그렇더라도 네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 칼럼




지난 며칠 동안 쏟아져 내린 눈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산과 들은 온통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인데, 회색빛 저녁 하늘이 착 가라앉은 것으로 보아서 오늘 밤에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어린 소녀의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고향 교회에서는 연세가 높으신 장로님의 인솔하에 청년들이(지금 생각하면 청년이래야 모두 중고등부 조무래기 학생들이지만...^^) 새벽송을 돌았다. 해마다 울 언니와 오빠는 새벽송 팀을 따라서 돌다가 밤이 늦어서야 상큼한 바람 향기를 몰고 들어와 잠자리에 들곤 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이 정말 많이도 부러웠었다. 따라가고 싶다고 졸라 보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한 번도 데려가 주질 않아 섭섭했더랬는데, 오늘 저녁은 함께 가도 좋다고 한다. “언니, 나 정말 따라가도 되는 거지?” 아침에 이미 가족의 동의를 얻었건만,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너무 좋아서 무엇이건 말을 자꾸만 건네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래, 먼 길을 다녀야 하는데, 다리 아프다고 징징거리지 마!” 귀찮다는 듯, 짜증스럽다는 듯, 언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저 생글생글 즐겁기만 했다. 두 살 터울로 위인 언니는 무엇이건, 나보다 먼저 경험했기에, 내게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노래도 곧잘 부르는 우리 언니, 시쳇말로 나의 아이돌이었고 신기한 바깥세상을 미주알고주알 전해주는 꿈길의 통로였으니까. ㅋㅋㅋ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처음 새벽송을 따라갈 수 있었던 나의 성탄절 이브, 가슴이 설레어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언니와 오빠를 놓칠세라 허둥거리며 대문을 나서는 내게 어머니는 예쁜 오색실로 손수 짠 목도리를 다시 한 번 매만져주시며 “아가, 덤벙대지 마라, 그러다 눈길에 미끄러져 다칠라. 언니 손 꼭 붙잡고 잘 따라다녀야 한다 알겠지?” “네, 알고 있어요.” 따스한 털신이며, 두툼한 스웨터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을 한 채, 밖으로 나온 나는 세상이 온통 축복으로 가득 찬 듯, 두 발은 구름을 밟고 하늘을 둥둥 날아다니는 듯, 너무 행복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까만 밤하늘이 열리면서 새하얀 날개옷을 걸친 눈의 요정들이 하늘하늘 춤추며 어깨와 머리 위로 사르르 사르르 보드랍게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발이 폭폭 빠질 정도의 심한 눈보라가 되어 앞이 보이지 않도록 휘몰아친다.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따라 교회 성도님들 집집이 찾아다니느라 밤이 깊도록 하얀 눈을 맞았고, 무섭게 쌩쌩거리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다 눈길에 미끄러져 무릎을 다치기도 했지만 아프다는 느낌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 대문 밖에서 목이 터져라 찬양을 부르고 나면, 후덕하신 권사님들이나 장로님 댁에서는 우리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추운데 잠시 들어와 몸을 녹이고 가라시며 모두를 따스한 방으로 안내하신 후, 맛난 식혜를 끓여서 내어놓기도 하시고, 어떤 집에서는 팥죽도 끓여 주시고, 그것도 여의치 못한 집에서는 과자 봉지를 사두었다가 안겨 주기도 했다. 중고등부 남학생 오빠들이 큰 자루를 메고 다니며, 건네주는 과자를 모두 넙죽넙죽 받아서 자루 속에 집어넣는다. 한 자루 수북하게 과자가 모이면 그것을 성탄절 당일, 주일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상이란 명분으로 푸짐하게 나누어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에 두 뺨과 두 귀는 새빨개져 오고, 시리다 못해 얼얼해지는 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른들과 청년들로 구성된 새벽송 팀을 따라다니느라 어린 몸이 지치고 피곤하였을 것이나, 마음만은 그 옛날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새록새록 감동의 밤이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뿌리가 깊어지며 자라서 별이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 성탄절 이브의 아름다운 추억에 잠겨보게 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성탄절의 기원:

X-mas는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첫 글자 Χ(키)에 mas를 붙여서 쓴 것이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기원후 336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동방교회에서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참배하러 왔다는 마태복음서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현일(公現日,1월 6일)과 동시에 행해졌다. -위키백과사전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의 고대 영어 (Cristes maesse에서 유래) 그리스도교의 축일(12. 25).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동시에 대중적인 공휴일이기도 하다. 로마 역서(曆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336년경 로마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1월 6일에 하나님이 예수의 탄생과 세례 때 나타난 일을 기념했고, 예루살렘에서는 탄생만 기념했다. 4세기에는 동방교회 대부분이 점차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오랫동안 크리스마스를 반대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12월 25일 대신 1월 6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했다. 동방교회는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지키게 된 후 1월 6일은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의공현대축일로 지켰다. 그러나 서방의 주의공현대축일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날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異敎)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백과사전

위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유감스럽게도, 성탄의 목적과 장소는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주께서 오신 그 중요한 날짜는 기록해 두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이방 신을 섬기던 그날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날을 성탄일로 정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는 이토록 어설픈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어설픈 기원을 악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단 사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기독교를 정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며,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주위 문제를 더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다 사단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참으로 무섭고도 공교한 말로 기독교 믿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이단 단체에서 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약간은 어설픈 부분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그 내용을 더욱 무섭게 각색하여 아주 더러운 날을 기독교가 크리스마스로 숭배한다며 이곳저곳에서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하라

주후 300년경에, 콘스탄틴 대제가 성탄일을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하여서, 다른 날자를 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무조건 그날은(12/25)은 이교도의 태양신 숭배의 날이어서 우리가 지키면 안 된다.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어찌 생각해보면, 정말 사단의 교묘한 방해전술일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성탄절이 되면, 그 누구의 날도 아닌, 우리 주님의 탄생일로 생각하면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죽어주시려고 이 땅 위에, 그것도 마구간에서 낮아지신 그의 끝도없는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감사 감격하였던가.

그날이 사단의 날이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있던 신앙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어놓고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사단의 고등 전술법이란 생각에 씁쓰럼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른 날, 그러니까,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어느 한 날을 택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그 어느 날보다 이교도의 축제일로 섬기던 그날이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날짜라고 하는 것은 1년이면 365일, 모든 날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것 아닌 날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교도들이 감히 어느 한 날을 내 날이라고 부르며 빼앗아 가려 하고, 우리는 그날은 사단 경배의 날이라고 두려워하면서 그 한 날을 사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못될 것 같다. 그야말로 컨셉이 문제가 아닌가 이런 말이다.

쉬운 예로, 별이가 태어난 날이 4월 8일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날은 부처가 탄생하신 날이라고 세상이 떠들썩하게 지키기에, 너는 너의 생일이라고 축하하면 안 된다 라고 누가 나무란다면....Does it make sense? No way!

이거야말로 황당한 소리다. “그대들은 부처님의 생신으로 지키십시오, 난 내가 태어난 날, 나의 생일로 지킬 것입니다! 이렇게 고집한다면, 내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 되나요?” 물어보고 싶어진다.

여호와 증인들은, 파수꾼이란 말, 또 시한부 종말론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 이런 성경에서 좋은 말은 다 빼앗아 가고 우리는 두려워서 그 단어를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 이제는 주님의 탄생일이라고 역사적으로 한 날을 택해서 경배하며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이런 사랑스러운 축하의 날마저 빼앗으려고 하는 사단의 음흉한 간계(?)로 보인다. 다른 어떤 좋은 대안도 없으면서.... 사랑으로 선택하면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아멘넷 게시판에 올려진 동영상, 유대 뿌리교의 지도자인 ‘짐 스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만큼 그는 비록 왜곡된 정보일지라도 정확한 정보인 것처럼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왜곡시키고 더하는 것이 현 기독교인 것처럼 말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분(짐 스텐리)의 인용하는 성구는 전부 구약적인 말씀으로서, 신약시대는 적용시키면 안되는 제사법 제도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이단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헐뜯기 위해서 모든 역사적인 배경이나 성경 말씀을 자신의 어떤 틀에 꿰어 맞추기 하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그런 부패하고 깨끗지 못한 마음일지라도 주님께로 돌아가면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하물며 날짜겠는가? 그 어떤 것이건 창조주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하다. 인간이 더럽게 만들었고, 더러워진 부분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만 하면 깨끗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더럽다면 인간의 마음만큼 더러운 것이 세상에 다시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더러운 인간의 깨끗지 못한 심령이지만, 성령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좌정하셨기에,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인정해주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비록 짐승들이 거하는 마구간이었지만,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그 순간 그 자리는 깨끗하다 못해서 순백하다. 깨끗한 천군 천사가 동원되어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리로 바뀌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더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 드려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

짐 스텐리와 그 종파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서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다른 것을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세히 들어보니까,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 깨끗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몰라서 지은 죄가 얼마이겠는가? 우리는 태양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소년소녀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행복해 했다. 주님께서 그런 그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가시겠는가? 짐 스텐리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사단의 종이란 뜻이 된다. 진리를 혼합한 사단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런 억지성, 모함성 발언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더 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마음이라면, 이미 태양신을 섬기는 마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소중한 날을 더러운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빼내어서 사단에게 내어 준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욕되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잘못일까?.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신다.

우리는 날짜나 절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그들,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삿날이었다하여, 이제 와서 그날을 터부시하거나 너무 더럽게 생각할 필요 또한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온갖 추악한 죄로 더러워진 인간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변하여 새사람 되는 것이 성도라 인치심을 받는다. 날짜도 죄인들이 더럽게 제사를 지냈던 날짜라면 이제는 주님께 드려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날로 제정하여 지키면 그것으로 깨끗하여 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가하나 모든 것이 절제 되어야 한다. 그들(이방 신들을 섬기는 자들)처럼 무절제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그저 1년 12달 중 어느 한달, 한 날을 뽑아내어 이 땅 위에 죄인의 몸을 입고 구속 주로 오셔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잊지않고 기념하는 마음, 그런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택은 자유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분의 지혜를 우리 모두에게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것 뿐이다. 모든 것이, 더욱 밝게 보여지고,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성도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명하셨지만, 탄생을 기념하라고 명하신 적은 없다. 그러니까, 너무 얽매일 필요 또한 없겠지만, 주님이 오심을 기념하는 마음을 드린다고 하여서 죄인으로 몰아가실 분은 더욱 아니시란 것을 굳게 믿고 사랑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생활이었으면 좋겠다.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 17),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갈 5: 1)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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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목사에 관한 글(중요함)


(주의 직분으로 부르심과 은사에 남녀 구별이 없는 시대가 성령 안에서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중국 같은 선교지에 가 보세요. 주의 여종들이 얼마나 많이 크게 일어나 쓰임 받고 있는지 놀랄 것입니다.) -성령시대님의 반론

예, 동의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크게 쓰임받으나 들어내지 않은 여성 사역자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크게라는 개념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크게 라는 이 의미만 바르게 깨닫는다고 하여도 좋을텐데요.) 그런데, 그 섬김의 은사를 꼭 모든 남여 성도님들을 총괄 지휘, 총 리더하는 목사직이어야 한다는데는 성경이 지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목사의 직은 말그대로, 양을 먹이고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그리고 님께서 성경을 곡해하고 계신 부분이 있습니다.
((행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여기서 님께서 곡해한 부분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영적인 기름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그러니까, 이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성구입니다. 구약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특정인에게만 기름부음으로 강림하셨습니다만, 신약 시대는 요엘서에 예언한 대로, 모든 믿는자 남녀 차별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에게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있으십니다. 즉 지금은 님의 필명대로, 성령시대란 것입니다.

목사님들만(남녀 구분없이), 성령이 임하시고 기름부으심이 임한다라고 이해하시는 거기에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 안수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없다는 뜻인지요? 그러면, 고전 12장, 14장은 찢어버려야만 하네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은사는 여러가지 성령은 같고.." (고전 12: 3-4)

그리고, 신약시대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남녀노소 구별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 첫 성령 강림절 그 역사 현장을 주목해 보십시오. 행 2: 4절에 보면, "저희가 다(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했습니다. all= 모두 다 입니다. (요1서 2: 20, 27 참조)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신다면,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 구약시대는  기름 부음을 받는, 받을 수 있는 자격자는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만 기름을 부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 = 신약시대는 아무도 여기에 해당되어서 기름붓는 예식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지요. 왕, 선지자, 제사장은, 우리 예수님을 상징하는 예표로서 신약시대는 완성된 기름부음의 역사입니다.

그럼,
신약 시대의 목사님들에게는 어찌해서 기름부음을 행하는가? 그것은 모든 교회의 리더자로서, 목양하며 가르치는 자로서, 주님의 특별한 기름부음을 상징하고 사명의식을 고취시키는 행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내가 피로 값주시고 산 나의 교회(양떼)를 치고 먹이라"고 하는 것, 이것을 이어가게 하시는 사명을 주시는 예식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일을 대행, 대언하는 사역이 바로 목사직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듯,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이십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남자를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신 것은 창조질서이기도 합니다.

억지로 해석을 하려 하면 그런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 (엡 5: 22)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입니다.

여자가 가정의 머리(지도력)가 되려고 하는 것, 여자가 교회의 머리가(지도력) 되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성경을 곡해하는 어리석고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일 뿐, 성경 말씀 그 어느 곳(신 구약 통털어)에서도 여자가 교회의 머리(영적으로든 문자적으로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 여인을 창조하신 목적은, 여자는 남자를 돕는 베필, 돕는 자로서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여자의 역할을 남자를 돕는 선에서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남자가 더 우월하고 여자가 더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쩌면 여인이 남자보다 더 똑똑(섬세함)할 수도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부족한 면을 도와주는 것이니까요.

돕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열등하고서야 어찌 남을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남자가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고 횡포를 부릴 수도 있고, 여자가 더 열등하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남자들 아래서만 있어야 하느냐 항의하기도 하고...모두 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에서 발생하는 웃지못할 희극입니다.

남자가 더 우월해서도 아니고, 여자가 더 열등해서가 아니라, 질서, 질서가 필요하기에 주님께서는 그렇게 질서를 재정하신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나 가정의 머리가 아니라 남자를 도와서 가정도 교회도 잘 세워나가도록 해야 한다."이것이 창조질서입니다.

"주의 직분으로 부르심과 은사에 남녀 구별이 없는 시대가 성령 안에서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중국 같은 선교지에 가 보세요. 주의 여종들이 얼마나 많이 크게 일어나 쓰임 받고 있는지 놀랄 것입니다. "- 성령의시대
(위의 반론에 대한 말씀을 아까는 제가 보지 못했기에 이곳에 다시 기록합니다.)

예, 맞습니다. 지금 우리가 은사론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목사 안수 받지않은 사람은 은사도 활용할 수 없다(?) 그런 theory는 정말 비성서적이군요.

그리고 중국 지하교회라고 하면 제가 아주 잘 압니다. 저도 그곳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했으니까요. 그곳의 지하 교회들은 대개가 다 여자분들이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때문에 그곳 중국에 계신 여성 사역자들마저도 다 버리는 것은 아닐가 그것이 오히려 크게 고민해야할 과제입니다. 성경은 여성 사역자를 얼마든지 환영합니다만,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신 것은 '최고 지도자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목사 안수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부분적으로 변경, 자기 입맛에 맞게 변경을 해서도 안되고 억지로 풀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만약, 지도력을 갖지 않고서는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만한 생각이요, 교만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잘 이해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목사에 대한 첫번 변론:

( 김 박사에 따르면,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디모데전서 자체를 바울이 쓴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본문이 여성 안수를 금할지라도 그 금지는 사도의 권위가 아니라고 하며, 심하게는 사도의 이름을 빙자한 자들이 사도의 뜻을 거슬러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
성경 말씀 일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군요.

여성 목사를 세우고 세우지 않는 것을 떠나서 이런 것은 아니다 싶군요.

그리고, 여성 사역자들로서 얼마든지, 주신바 탈란트 대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까지,
여성이 목사 안수를 받겠다고 고집하는지... 그 저의가 심히 궁금합니다.

교회서 잠잠하라고 하신 뜻은, 교회내에서 직분자로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성 성도님들과 여성 성도님들 모두를 총괄 주관하는 책임자로서 리더의 자리에서 지도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가장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 아내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가정에 남편을, head로, 가장(가정의 머리)으로 인정해야 하듯, 교회의 책임자는 남성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총 책임자, 리더로서의 자리인 목사의 직위까지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뜻으로 이해하려고 하여도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시대가 간다고 변천하는 것이 아닌데, 입맛에 맞게 변질시키는 것도 이상하고요, 꼭 그렇게까지 여성이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확실히는 모르지만, 여성의 입지를 너무 억압하는 남성들의 권위주의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시대에 맞추어서 성경 말씀을 변개시키는 것은 성도가 할 일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딤전 2: 11-15)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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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처럼 후끈거리고 무덥기만 하던 여름도 어느새 다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진 것을 보니까, 가을이 완연하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지나고 나면 곧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진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가을은 계절로서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는 것이다.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꼭짓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 때문에 급기야는 분열하고 갈라서야만 하는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터닝 포인터(Turning point)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시각, 긍정적인 시각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넘어, 초대교회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주신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큼 밀접한 관계로 함께 이방인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던 멋진 동역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주던 과격한 성품의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그 이름이 주는 뉘앙스대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 있었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 바로 이 바나바였던 것이다(행 9: 27). 그 후로, 이 둘은 서로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사이로 급진했으며,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나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그들에게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김을 볼 수 있다.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라고 하는 요한을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둘은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만,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강하게 반대한다(행 15: 37-38).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불화가 시작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마가였다. 왜일까?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던 1차 선교 여행지 중의 한 곳인 '밤빌리아'에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을 등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되돌아와서 두 사도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런 마가의 행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데도 매개변수였다. (행 15:37∼39)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큰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행 4:36), 바나바에게서 좀더 배울 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 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로 비쳐질 뿐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화목할 수 없을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의 주장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피치 못할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불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포인트가 되겠다. 사상이나 견해가 서로 너무 맞지 않을 때는 심하게 다투고 죽기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무익하다. 그럴 경우에는 서로 축복해주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대 교회 이방인의 선교사역은,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은 두 사람의 지도자가 각기 등돌리고 돌아서게끔 악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막 태동한 이방인 선교사역에 큰 위험을 주는 요소였고, 큰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을 바라보게 된 마가 역시 마음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도의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애통하는 때가 그에게 있었지 않을까? 그런 그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마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여기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록할 때,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희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비겁한 마가가 아니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훗날, 이런 마가를 가리켜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며 아꼈고, (벧전 5:13) 로마에 있던 바울은 마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 골로새로 보내면서 골로새교회에게 그를 잘 대접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골 4:10). 순교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마가를 데려오라고 간절히 부탁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딤후 4:11)

이렇듯, 훌륭한 두 사도의 격렬한 다툼의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듯, 마가의 남은 여정은 신실한 일꾼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국에 가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던 바울 사도에게마저 중요한 사람, 인정받는 동역자로 거듭난 것이다. 마가는 한 때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조성한 원인 제공자였던 부족한 사람이지만, 회개한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뉴욕 교계의 분쟁과 불화의 몸살은 우리가 모두 함께 앓고 있는 심한 몸살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바 된 귀한 형제 자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생명이다. 이런 귀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이다. 그럼에도 앞선 몇몇 지도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한, 아름다운 화음을 울려야 할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인하여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작금의 뉴욕 교계 역시 모두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 아집이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다툼으로 분열될 지경까지 가게 되었으나, 그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고 그 일 때문에 더욱더 훌륭한 선교의 장이 열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분쟁도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고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찢고 겸손한 무릎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자신의 주장, 자기 의(Self- Righteousess)에 갇혀서 살았다면, 자기 살을 찢어내는 아픔, 고육지책 (苦肉之策)을 감행하고서라도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 되기 힘써 지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세포분열을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오늘이야말로 뉴욕교계가 바른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순간들을, 결코 가볍게나 헛되이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멋진 날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세계에 흩어진 성도들)는 뉴교협 교역자님, 평신도 지도자님들, 그리고 뉴욕 교협에 소속한 모든 성도님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 이 아픔을 딛고 잘 해내실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멋지게 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믿어보고 싶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사도행전 15:36~41)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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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닌데, 정말 이건 아니야!” 딱딱하고 냄새나는 차가운 돌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해보지만, 억울하고 분한 생각에 도통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뒤치락 거리며, 시커먼 감옥 벽, 천장 가까이 공기통처럼 뚫어논 작은 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청색 빛 하늘 저너머, 별빛은 처량한 그의 신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명멸한다. “내게 꿈을 심어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다 헛것이었나?” 한 번만 살려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자신을 상인들 손에 팔아넘긴 무정한 형들의 굳은 얼굴이 하나씩 하나씩 주마등처럼 차례로 떠오르면서 그를 괴롭힌다..

비록 중년의 나이라곤 하나, 그녀의 완숙한 관능미는 여전히 화려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젊디젊은 그에게 다가왔지만, 그런 그녀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라고 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마음이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에 그토록 집요한 유혹을 뿌리쳤건만, 현실은 상급은커녕, 어찌 이토록 모진 감옥에 던져졌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이러고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조차도 배신당한 느낌이다. 아니, 차라리 하나님의 실존마저도 의심스럽다고 해야만 하나.

어디 그뿐이랴, 종으로 팔려온 자신에게 집안의 대소사를 맡겨준 주인의 고마운 마음을 헤아려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충성한 댓가가 이토록 허망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를 부득 부득 갈고 시퍼런 칼을 가슴에 품고 그 칼날을 매일 같이 갈고 또 갈아도 시원치가 않을 현실이 아니든가? "으악!” 비명이라도 지르며 머리를 바닥에 찍고 죽어서라도 이 모진 현실에서 도피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가 밤이 하얗게 지새도록 그렇게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린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셉도 신이 아닌 우리네 범인들과 꼭 같은 감정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란 점을 고려할 때,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런 환경에서 의례 겪게 되는 갈등을 이렇게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 요셉, 그는 분명히 우리네와는 현저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신실함.’ 그리고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고 있다.”라고 하는 철저한 신앙고백이 입으로가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요셉, 그는 드라마틱한 일생을 역전시키는 통쾌한 믿음의 소유자였고,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는 담력, 원수라고 할 수 있는 형들을 품어 안는 넓고 관대한 마음, 그의 이런 거짓 없는 신앙 인품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닮은 성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요셉의 이런 참된 신앙은 어려움 중에 시달리는 성도들에게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신앙의 용기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의미와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하루아침에 자고 눈을 떠보니, 유명한 스타가 되어 있더라, 빼어난 미모 하나로 스타덤에 오른 유명 여배우들이 흔히 잘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목사님들마저 아무 노력도 없이 현란한 말솜씨 하나로 하루아침에 슈퍼스타 목사님이 되기를 꿈꾸는 세대가 되었다. 순전은 커녕, 진실과 정직은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서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루아침에 눈을 떠보니 종으로 팔려버린 신세, 또 어쩌면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갈 수도 있는 흉악범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결코 그의 순전을 잃지 않았다. 이토록 드라마틱한 인생이 다시 또 있을까?

사실, 우리는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누군가 무엇을 이룬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이 온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반전할 힘을 잃고 낙담하기 쉽다. 체코의 영화 감독이며 시나리오 작가였던 ‘프랭크 다니엘’은 드라마틱한 상황(Dramatic situation)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이루려고 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을 이루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정말 그렇지 않은가?  
 
시끌거리는 한국의 대형 교회 C목사님과 그 가족의 비리, 시끌거리는 교계 소식,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답답한 가슴이 더 답답해 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어쩌구…” 하시는 말씀들이다. 답답한 가슴을 달래어도 볼겸, 가까운 바닷가를 찾았다. 연신 하얀 파도를 일으키면서 쉴 새 없이 출렁이는 작은 파도가 사르르 사르르 사르륵 거리며 일렁일 때는 더없이 평온해 보이기만 한 바다, 그러나 그 평온도 잠시뿐, 장엄하던 해가 수평선 아래로 폴싹 떨어짐과 동시에, 부드럽던 물결이 무엇에 화가 난 것일까, 갑자기 사나운 기세로 으르렁 거리며 뭍으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시커멓게 어두워진 바다 저편 어디로 서부터인가 세상을 온통 집어삼켜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산더미 같은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다가 떡 버티고 서 있는 바위를 넘지 못하고 바위를 들이받으며 산산이 깨어져 버리고 만다. 작은 파도가 깨어질 때보다 큰 파도가 깨어지는 소리는 더욱 무섭고 요란한 것 같다. 그러나, 그토록 기세 등등하던 파도가 결국 바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그 순간, 파도는 힘을 빼앗기고 어느새 하얀 물거품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험의 물결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 작은 물결이 일어날 때는 그런데로, 무료한 생에,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집채만 한 큰 시험의 물결 앞에서는 당황하게 되고, 더 심하면 그 앞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고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또 이름도 없는 소자 하나가 실족하여 넘어지는 소리보다 큰 어른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소리는 그 넘어짐의 소리가 더 요란하고, 이름 없는 성도 한 사람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소리보다 유명세를 타는 목사님들의 넘어지는 소리는 더 요란하기도 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그래, 그런 것이지, 바다가 있는 한, 작은 파도, 큰 파도, 파도는 계속 일어나겠지,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고해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 요셉의 참된 신앙을 본받고 배우라고 권면해 주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드라마틱한 인생역전과 반전을 기대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 삶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고, 오히려 믿음에서 이탈하거나 혹은 대인 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큰일(Dramatic)을 해낸 사람이라는 칭찬과 환호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결코 들을 수 없다. 안일한 믿음,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누리는 상급이라고 잘못 가르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산다. 이런 Theory가 위험한 것은, 세상에 자신을 묶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믿음,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진실함이 없는 현란한 언어의 유희,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표면적 유대인이 되어서 외식하는 지도자들, 이렇게 허황된 신기루 같은 거짓 믿음을 따르는 마음이 자기 자신과의 분열, 대인 관계에서 분열과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되고, 더 나아가 감정을 와해(瓦解)시키고, 결국 모든 것을 공중분해(空中分解)시켜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공중분해(空中分解)란 사전적 의미로는 다음 두 가지 뜻이 있다. 1.비행 중인 비행기 따위가 어떤 원인에 의하여 공중에서 폭파되어 분해되는 일. 2.계획 따위가 진행 도중 무산되는 일.

여기에서, 2번을 보면 참 재밌다. 계획 따위가 진행 도중에 무산되는 일이라고 한다. 계획 했던 일이 무산 되는 것, 이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되기에 비행 중인 비행기 따위가 어떤 원인에 의하여 공중에서 폭파되어 분해되는 일과 버금가는 위치에 두는가 하는 것이다. 그만큼 안타깝다는 뜻일게다. 천국을 목표로 주님을 믿노라 고백하며 일평생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왔다갔다 하던 발걸음이, 천국 문 앞에서 무산 되는 것, ‘공중분해’(空中分解)가 되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이 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 개인의 일생도, 소속된 단체나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만날 수 있다. 그 어려움을 믿음으로 헤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세상과 짝하고 살다가, 개인의 삶도, 소속된 단체나 공동체 마저도 ‘공중분해’(空中分解)될 수밖에 없다. 주위를 잠시만 살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지 않은가? 별로 그리 크지도 않은 파도와도 같은 작은 시험을 만나, 그 문제 하나를 선으로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공중 분해” (空中分解) 시켜버리는 개인, 가정, 공동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니고 은혜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짓고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고 싸구려 구원론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요, 요셉처럼 신실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진실한 믿음으로 단장하여, 내 삶이 그분 앞에 서기 전에 ‘공중분해’(空中分解) 될까 삼가 조심하여 매일, 매 순간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 17-18)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고후 1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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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한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고 말라기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 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 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십일조를 내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양, 성도들을 기복사상으로 유도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 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 되고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물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 내게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영 죽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다는 고백, 내가 누리는 이 구원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확산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 십 분의 일을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되 자원하는 심령으로 모든 헌물(십일조 포함)은 드려져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어떤 이들은 십 분의 일이 아니라 십 분의 이나 삼, 더 나아가서 십 분의 구까지도 기꺼이 드리는 성도가 있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을 수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 주님은 즐겨 내는 자를 기뻐 받으시지, 의무나 인색함으로 하는 예물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흠향하지 않으신다. 주님이 받지도 않으시는 예물을 바쳐야 할 필요가 어디있는가?(고후 9:7절 참조)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서 뜨겁게 올라온다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아까울 것인가? 고로 두 견해 모두 비성서적이다!

1. 구약의 모든 율법은 폐하였고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진 것이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마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to fulfill)케 하심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십자가 위에서 온전케 하셨다. 요한복음19:3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그것은,
첫째: 구속사역을 다 이루심(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둘째:율법을 온전케 하심(사랑 안에서 온전케 됨)
구속사역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율법을 온전케 하심이란:
마태복음 22:37-39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약하여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됐다.
1. 위로는 하나님 사랑2. 아래로는 이웃(사람)을 사랑.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자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함이 곧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성도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반드시 십 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마태복음23:23-24절을 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십일조를 말씀하심이고, 저것이란 의와 인과 신을 말씀하심이다. 곧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성립이며, 두가지(both) 모두 다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이기에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막12: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믿음이 먼저 들어간 후에 의무는 이행가능한 것이다. 쉬운 예로, 한 국가를 보면, 아이가 어릴 때에는 보호를 받고, 18살 인가, 20살인가?, 성인식이 끝난 후에 국민의 의무를 준행 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 아이에게 국민의 의무 운운 하면... 그 아이가 그 나라의 국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아직 어린 관계로 그 의무가 무거운 짐이 되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영적인 세계에도 젖을 먹어야 할 만큼 어린 아이가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있다?바울사도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 (히5:12-14)

3. 축복받기 위해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사람들: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조건적이다. 믿음은 결코 조건적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말씀)” 고 말씀하신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요, 율법준행 자들의 케케묵은 소리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일 뿐,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성도)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신앙고백 행위가 되어야한다.

결코 의무나 억지로 해서도 안 되고 또 복을 받기(기복사상)위해서 행해서도 안 된다.

고로, 십일조는 내어야(성숙한 성도라면) 되고, 내지 않아(신앙이 어릴 때)도 되지만,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전 재산은 드리지 못해도 내 수입의 십 분의 일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적은 재물이 사용되어지는 곳에서 잃어진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널리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는 것이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십일조를 대하는 올바른 마음자세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반드시 넘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농사의 원리처럼 모든 헌금에도 ‘증수의 원칙’이 성립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는 말로써 고후9:6절에서 밝히고 있는 말씀의 요지이다. 단 억지로 하지 않을 때, 이 말씀이 적용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맛대로 변개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십일조가 아까워서 그 부분을 폐지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까운 마음이 들면 하지않으면 되는 것이다. 괜스레 어줍잖은 성경지식을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마저 변개시키려 들지마라.

“각각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니라. (고후9:7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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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밤이면 밤마다 쏟아져 내리던 폭우가 공기 속의 더러운 먼지를 모두 씻어낸 때문일까?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하늘이 눈부신 아침이다.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도 털어낼 겸, 신선한 산소도 들이킬 겸, 가까운 산, 작은 바위를 찾아 잠시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새각시의 치맛자락처름 보드라운 솜털 구름이 두둥실 고운 그림을 그리며 흘러가는 파아란 저 하늘은 평화로워서 좋고, 자연의 소리는 언제나 맑고 깨끗하고 그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 좋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렘 17: 9) 탄식하신 주님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 신묘막측한 것이다. 누가 그 마음을 헤아려 알 수 있으리. 그리스 철학자요, 플라톤의 위대한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사고(思考)의 활동 속에는 항상 심상(心象)이 따른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심상(心象)이란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 이전에 경험한 것이 마음속에서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상(象)을 의미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백두산을 머리에 그리는 경우, 지각만큼 생생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형태라든가 산꼭대기에 쌓인 눈 따위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백두산의 심상(心象)이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느닷없이 별님이 어인 심리학 강의냐고 놀리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오늘 전공 분야도 아닌 심리학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과 내 마음의 소리(내면의 소리), 그리고 사단의 소리, 그 경계선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 하는데, 그전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시 설명해 본 것뿐이다.

사실, 성경은, 인간이 물리적(물질적(物質的)) 세계를 벗어나, 영적인 세계를 너무 탐하거나 영계의 영물들과 교류하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논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에 금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빌미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영혼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이런 때인 만큼, 성도가 영적 세계를 너무 깊이 알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되겠으나,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가 되는 성경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배워두어야 할 필요성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 없는 소리, 영음(靈音)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1. 마음의 소리
2. 사단의 음성
3. 천사의 말
4. 하나님의 음성, 이렇게 분류해 볼 수 있겠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인지(knowledge)능력과 양심(conscience) 이란 것이 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은 본래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있어서 주께서 심어두신 그 양심을 따라, 재판석을 차리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망과 질책, 변명 그리고 위로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을 신원하여 주고 달래어 주며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야 하나? ㅋㅋㅋ) 이런 현상을 “서로 송사하며 변명하기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 2: 15절 참조)

본래 인간은 이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인데, 마음속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창 1: 27절 참조) 문제는 그 양심이 병들고 화인 맞아 더는 그 양심이란 것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4 : 2)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물(말씀)과 피로 거듭난 성도는, 그동안 병들어 제 기능을 상실했던 양심이 먼저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난 성도(벧전 3 : 21절 참조)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Born Again Christian)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 성도가 하나님의 양이라면,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도, 기이한 일도 아니다. 성경은 우리(성도)는 오늘날도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장 27절)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요 10장26절)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라고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성도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들을 수 없는 것이 비정상이다. 문제는 바른 분별력이다. 주님의 영(Holy Spirit, Hoy Ghost)으로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단의 음성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 밭을 잘 알고 있는 사단은 하나님의 음성을 흉내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마 4: 3-10 참조)도 하고 예언적 형태를 갖추기도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거짓 심상(心象)도 불러일으키고, 거짓 음성을 말씀의 씨앗인양 뿌려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원수가 ‘가라지’ 를 뿌리고 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마 13: 25-26 참조)

항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Hoy Spirit, Holy Ghost)을 소유한 거듭난 상태가 아니란 것이다. 병든 양심, 하나님의 원수 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 아직도 옛사람 그대로인 상태에서, 마음속에 어떤 음성이 들려온다고 하여 그 음성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란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물(말씀)과 피와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난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마음속에서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사단의 음성임을 주지(周知)해야 한다.
 
영험하다는 무속인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들리는 마음의 소리, 혹은 사단의 졸개들의 음성을 실제로 듣는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또 거듭난 성도들에게도 흉내쟁이 사단이 하나님의 음성인 양 가장하여 들려지게도 한다. (마 4: 3-11, 고후 2: 11 참조) 이런 영적 원리를 항상 기억하고 내 마음속에서 들리는 모든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지 말고, 반드시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검증도 하고 분별도 해야 한다! ( 마 4: 3-11, 고후 2: 11 절 참조)

아이홉 지도자인 ‘마이크 비클’ 씨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이 쏟아내는 예언이 80%가 틀리고 20%도 정확성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런 예언은 무엇이라고 지적하는가? 성경은 그런 자들의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사단이 시험하는 미혹의 음성이란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100% 모두 정확해야 한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말지니라” (신명기18:21)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들은 음성의 예언에 100% 정확성이 나타나지 않는데,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더욱이 사단의 음성을 들었다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 때문이다!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자만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얼마전, 이단에 미혹된 한 청년이, 부모님의 권유로 상담 교육을 받고 치유, 이단에서 빠져나온 뒤 “사실은 상담 하루 만에 깨져버렸는데 내 자존심 때문에 시인하질 못했다.”라며, 진솔하게 고백한 것을 우리 아멘넷 기사에서 읽어 본적 있다.

지난 날, 우리 아멘넷의 한 논객 님께서 ‘요나’ 선지자와 ‘니느웨’ 성을 그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로부터온 예언일지라도 틀린 적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요나’ 선지자의 예언은 틀린(wrong)것이 아니라, 변경(change)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예언이 변경(change)된 사실을 당사자인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 변경(change)된 사실을 전하여 주셨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그 주신 예언의 말씀을 변경(change)하고 그 계획하신 바, 뜻을 바꾸실 때는 반드시 그 종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이 빗나가고 틀린 것은 당사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란 것이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성령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기에, 같은 방법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성도가, 이 외에도 한 가지 더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직통 계시적 형태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성도)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시요, 사용되어지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그 내용이 있어야만 한다. (행27:22-25)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다
1. 특별계시, 2. 일반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일반 계시도 세 가지 계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a) 기록(문서)계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b) 자연계시, c) 양심계시로 구분한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기록(문서)계시의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자연계시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문서(기록) 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문서(기록)계시, 양심계시, 혹은 자연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성도(양)는 반드시 목자의 음성, 곧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우리 속에 계시면서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몫이며, 반드시 성경 말씀을 레마로 들려져야 하고 그 말씀이 생각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양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목자로서 양들을 바른길, 구원의 길,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다. 언제 어느 때 장사가 잘되고 또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고 없고, 등등…이런 유의 점치는 형식이나 족집게 점장이 식의 음성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 : 26)

다음은 오래전 필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검증법을 성경을 토대로 경험한 것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부분을 옮겨 적는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복사하여, 성경과 대조하여 잘 배우면 신앙생활에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나 무시로 기도할 때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그 음성을 판별하지 못해서 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내는 훈련을 시키셨고,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된 대언은, 그 정확성에 있어서 단 한 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 돼야만 한다.

1.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3절 하반절)".

2.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 14 : 26절)

3.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4.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 1 : 41-45절)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치므로서 성령님의 역할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의식이나, 직통계시 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많이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풍월, 혹은 배운 신학 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과 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 24: 1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 24),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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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생명'이다. 이토록 귀한 나의 생명이 영생을 소유한 알곡으로서 하나님의 친 백성이라 칭함을 받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니면 지옥 자식으로서 사단과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고 이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론(救援論)'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다름아닌 구원론(救援論)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모두 구원론(救援論) 다루기를 회피하는 것은 구원론(救援論)이란 사실 신학상 술어로서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가져오기 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다수의 성도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without knowledge) 가운데, 자신이 몸담고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지도자들의 견해만을 있는 그대로 받고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 기독교계의 실정이다.
 
때문에, 어떤 성도가 구원론(救援論)을 접하게 되면 그것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내가 아는 이것만이 정답이다. 다른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칫 흑백 주의로 빠져들 수 있고 또 행위를 너무 강하게 주장하고 구원과 결부시켜서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게 될 수도 있고,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헷갈려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성도)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구원론(救援論)은 과연 어떤 것인가? 광범위하게 신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구원론의 진리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구원((救援)의 뜻: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구원’은 각각 ‘예수-아’와 ‘소-테-리아’인데, 보편적으로는 임박한 악과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낸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그 의미를 좁혀 ‘죄로 말미암아 오는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 된 생활에서 구해 내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구원, ‘소테리아’는 신약성경에만 약 150회 정도 나온다. (막3:4, 행27:20참조)

2. ‘쏘테리아’의 원형 동사는 영원한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육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다시 말해 구원이란: 영과 육이 질병과 진노로부터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함 (롬5:9절 참조).

3. 마지막으로 ‘소테리아’는 종말적인 점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비로소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롬13:11,고전5:5, 히9:28절). -성서 원어 대사전 참조

기본 구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 구원론이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 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게 되는가? 아니면 죄와는 상관없이 영원 구원인가? 하는 것이 주요 쟁점으로 남게 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그가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 교회의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부터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성도)가 교회의 어떤 직위나 직분에 상관없이 반드시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기에 성도라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중생: (重生, born again) 중생이란 ‘파링게네시아’인데 그 뜻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거듭난 성도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가지 욕심과 미혹에 이끌려 (이때도 반드시 고의성이 없고, 실수라야만 하며 짐짓 죄나 고의적인 죄는 거듭난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 발을 씻는 것,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기도를 올리고 그 죄에서 돌이켜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요13:6-9절 참조 )

그러나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 곧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
요1서5: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세상의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 경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과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교회에는 수없이 다녔으나 교회 마당만 밟을 뿐,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속에 모신 삶이 아닌 종교인의 행위에만 그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도 언제든지 그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영생은 주어진다. 죽기 직전에 가서라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그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고 어떤 중직을 맡아서 일을 했다고 하여도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선다면, 그런 자에겐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많은 이들의 죽음 앞에서 두 가지 길로 갈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born again)기 전에는 구원이 없고, 형태는 있으나 알갱이가 없는 가라지들이며,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에 구원을 잃을만한 대죄를 지을 수 없도록 주께서 지켜주신다. 요1서5:18절 말씀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가 거듭난 자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있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간단하다. 그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 삶이 엉망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는 능력이나 병자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인다고 하여도 그것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적과 이사는 사단의 힘을 빌려서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령의 선한 열매가 생활 속에 맺혀져야 한다. 즉 다시 말해, 진실로 거듭난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성령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듭나고 구원을 맛본 자가 하나님보다 그 죄의 유혹이 더 크므로 인하여 죄의 유혹에 걸려 넘어졌다면( 이때도, 반드시 고의성이나 짐짓(계속) 짓는 죄가 아니어야만 함)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가 있다. 그 죄가 만일 ‘음란이나 간음’ 죄라면, 눈물로 자백하고 예수님께 고하면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그 죄를 지은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 주어 멸하고(고전3:17, 고전 5:1-5절 참조)그 영은 구원을 받게 되니, 영원한 구원이 성립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12:31-32참조)와 배도, 즉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에서 만은 돌이켜야 한다. 이런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불만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무리 강같이 넘쳐 흘러도 그 강물 속에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기는 것, 곧 믿음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혈의 공로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조상의 죄, 신학상 술어로는 원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 12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롬5장 14절,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의 형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자기가 그 모든 죄, 원죄와 자신이 지은 자범 죄,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요3: 36절 첨조)


행위로서는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

이 성경본문을 단지 예수를 주로 입으로만 고백하면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라고 하던 자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거짓 표적과 권능을 행하던 거짓선지자를 가르키는 것이다.

폴워셔 목사님의 주장처럼 현대의 많은 미국교회가 타락한 것이란 말이 맞은 것 같다. 한국교회도 타락한 교회가 많이 있다. 아니 세계의 많은 교회가, 많은 목사님들, 성도라 이름하는 자들이 타락했으며, 불신자와 타종교인도 모두 타락하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담 이후 인간들의 역사는 언제나 타락해 왔으며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타락하고 범죄할 것이다. 인간은 항상 죄를 지으며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데,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어 넣는 소경같은 지도자일 뿐이다. 아담 이래 인류 역사상 행함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 위에 오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 31절)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서 있나 확증하고 (고후13:5절 참조) 또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여(롬10:9-11)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부끄러움과 회한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공로 의지하여 구원 얻는 것, 이것을 믿는 믿음, 이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것, 그것이 내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에게 이김과 구원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 16절 말씀)"

게시판에서 단어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풀이한 것을 행여 도움이 될까하여 이곳에도 첨부한다.

영어에도 그런 단어가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 모국어는, 단어 하나에 여러 가지 다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쉬운 예로, 초등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국어 정도에 보면, 말 = 1. Horse, 2. language, 밤 = 1. night  2. chestnut 정확히 같은 단어이나 뜻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는 데는, 전후 문맥으로 결정을 짓는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 보자.

행위 구원론 자= Act Soteriology (the Greek sōtērion (salvation)).

행위 구원론 자 = 직역하면: Act Soteriology 이지만, 한국어로서 이해되기는영어로 번역한 "행위"는, Act 란 뜻도 있지만, "구원론"에 결부를 시키면 그 뜻이 다르게 된다는 것이고, 그런 때는 good or bad Action 라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the righteousness로 바뀌어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 구원론 자 = 우리나라 말로서의 이해로는 "We(sinners) can be saved by one's(his or her) own righteousness" 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문장을 직역하여 사용하면 오해를 불러오게 마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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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治癒)사역자


사이비들이 기독교인을 유혹하기에 가장 적합한 용어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치유사역’과 ‘치유사역자’란 말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잠시만 둘러보면, 성도들 간에 가장 인기(?)를 누리는 부흥강사들에게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용어가 바로 이 ‘치유사역'과 '치유사역자'란 용어인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과거 박태선 장로가 그랬고, 현재 전주 율리아를 비롯하여 들어 내놓고 미혹하는 자 외 다른 복음을 전하는 많은 자가 그렇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겠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 1:5-6)” 여기에서 보는 대로, 죄지은 인간은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크게 혹은 작게 아픈 곳이 있다는 것이고, 설사 육체는 아무런 탈이 없고 건강하다고 하여도 병든 영혼으로 말미암아 힘들고 지쳐 있기에, 병든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허덕이는 나약한 자신을 강하게 치유해준다는데 솔깃해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치유사역’과 ‘치유사역자’란 말은 정말이지 모두에게 필요한 요구에 부응하는 아름다운 언어이며,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경으로 답답한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용어이다. 이런 것을 아는 사이비들이 연약한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병들고 지친 영혼을 미혹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이비 교주들, 그들이 이끄는 집회는 한결같이 치유가 넘쳐난다고 대대적인 광고와 홍보활동을 벌이고, 그런 사람들은 언변 술이 아주 뛰어나 잠시만 듣고 앉아 있노라면 쉽게 세뇌되게 마련이다. 그는 무언가 남다른 데가 있을 것처름 보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그들(사이비)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술수가 뛰어나며 체면술 적인 어떤 힘을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자기 과대 표현 중 한 가지가 바로 “자신이 하나님처럼 신령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이게 하는 수사력이다. 영적으로 신령하다고 말하려고 하면 무엇인가 남다른 것을 내어 놓아야 하고 그 남다른 것이란 바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치유사역’과 ‘치유사역자’란 특수용어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현대는 유명하다는 ‘치유사역자’는 많은데, 실제로 병나은 사람, 의료적으로 증명(medically proven)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병이 나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선포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기에, (실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신념일 뿐.) 큰 소리로 강사를 따라서 “믿~씁~니다!”를 연발하기도 하고 “주~여~”삼창도 부르고 사람들 앞에서 믿음의 선포를 그토록 강하게 했건만, 막상 집에 돌아와서 보니 병은 그대로 있다. 그래도 항의하지 못한다. 자칫 항의했다가는 ‘믿음이 없는 자’로 몰려 되레 더 큰 상처만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동료들에게 따가운 눈총받을 일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치유사역’과 ‘치유사역자’란 용어는 성경적인가?

그 대답은 “No! 아니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성경에도 보면 분명히 치유 사역이 있고 치유 사역자가 있었는데 무슨 말인가? 의문을 가지는 분들도 없지않아 있을 것이다. 그랬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동안 많은 시간을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는데 할애하셨다. 또 초대 교회 성도들과 사도들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병든 자가 일어났고, 바울 사도는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렸다. ‘유두고’란 청년을 위해 기도했을 때 죽었던 그 청년이 살아나는 기적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럼 현대 교회 '치유사역'과 '치유사역자'의 문제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성경을 곡해한대서 기인한 것이랄 수 있는데, 현대는 ‘치유사역’과 ‘치유사역자’란 용법을 비성경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조금만 살펴보면 ‘치유사역’이나 ‘치유사역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치유사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이다.

생각해 보자, 병을 고치는 것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다(고전 12: 4-11). 그러니까, 누가 기도하여 어느 한 사람이 병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하자. 그것은 비록 어느 한 사역자 혹은 평신도가 기도하여 병이 나은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병이 나은 것은 성령 하나님의 뜻이요, 은혜다. 성령님께서 당신의 원하시는 뜻에 따라, 그 원하시는 사람을 통하여 그 순간에 역사하신 것이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신 것이지, ‘치유의 은사’가 어느 특정인의 전유물로 주어진 것은 아니란 것이다. (필자는 젊은 날, 중풍 병자를 위해 기도해 드린 적이 있고, 그분은 그 악한 중풍병에서 놓임을 받은 체험이 실제로 있다. 단 한 번의 기적으로 끝이었던 것이 유감이지만…..ㅠㅠ)

이것을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성도는 모두 마음속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dwelling in)하고 계신다.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신 성도가 병든 자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기도하는 것까지는 인간의 영역이지만, 치료는 신(神)의 영역인 것이다. 때문에 병자를 위해서 기도한 사람은 그 순간에 주님께로부터 사용 받은 은사 자였다 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그 은사 자가 계속해서 ‘나는 치유사역자’란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란 것이다.

세상의 의사는 면허증을 한 번 취득하면 된다.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면허증을 취득하는 그날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의사다. 그러나 영의 세계는 다르다. 병든 자를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한계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다. 그럼에도 현대 사이비들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치유 면허증 취득, 면허증 소지자인 양 행세한다. 병을 나을 수 있게 하신 분은 주님이시고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그(은사 者)를 사용하셨으니, 그는 그 순간에 사용된 주님의 도구였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 환자를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는데, 그 사람의 병이 나았다. 그러면 나는 계속적인 '치유사역자'로 불리우는 것이 타당한가? 아니다. 나는 그 순간에 주님께로부터 사용당한 도구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과대 선전하는 것은 교만의 소치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병을 낫게 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치유사역자’라 말 할 자격이 없다. 결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께서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그 위를 지나가시도록 종려나무 가지와 옷가지 등을 던지며 환호했다. 이때 예수님을 태우고 가던 당나귀가 “와! 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환대해 주는구나 !" 하고 좋아서 껑충껑충 뛰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나귀 등에 타고 가시던 우리 주님은 땅으로 떨어지시거나 아니면 떨어지시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착각으로 날뛰는 어리석은 당나귀 위에서 어지러운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면서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다. 그런 황당한 착각에 빠져 교만을 떠는 당나귀에게는 자칫 몽둥이 찜질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초대 교회 시대, 가장 병든자를 많이 일으켜 세운 주님의 제자들, 사도들, 바울마저도 자신을 가리켜, “나는 치유 사역자다.”라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하물며 우리이겠는가? 주어진 직분이 무엇이건 그 직분으로 불리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겸손하게 자기 자리에서 목숨 다해 충성 봉사해야 한다.

진정한 치유사역자’는 오직 한 분, 우리의 치료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우리 영혼의 질병도 육신의 질병도 주님께서 치료해 주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 5) 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말씀하셨다. (사 61:1-3)

우리(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병낫기를 서로 고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이것뿐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약 5: 16). 여기를 잘 보자.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슈퍼(super power) 권능의 소유자도 없고 슈퍼(super) 치유사역자란 더더욱 없다. 속지 말자.

치유와 관련된 성구들

((세라퓨오 )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육체적인 병을 치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마 4:23; 8:7, 16 등).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이아오마이 )
육신적인 병은 물론(마 15:28), 마음이나 영적인 병은 물론 축사로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마 13:15; 눅 4:18; 요 12:40; 행 10:38; 히 12:3; 벧전 2:24; 약 5:16 등). “(수르보니게 여인의 딸)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소조 )
구원하다(마 1:21; 18:11), 위험에서 건져내다(마 8:25; 14:30), 치유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막 5:23; 6:56), 귀신 들린 자가 깨끗함을 받다(눅 8:36).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마 1:21).
“(회당장 야이로의 딸)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3).

(구약의 라파 )
원 상태로 회복하다(창 20:17; 시 6:2; 렘 17:14). 사람의 병(출 15:26; 왕하 2:22), 나라의 죄악이 치유 받다(대하 7:14; 호 6:1; 렘 3:17).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성서 원어 대사전 참조

현대 치유 사역자란 사람들의 치유 사역 부분은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사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 하는 것과 어, 하는 것은 얼핏 들으면 비슷한 것 같지만, 天地, 하늘과 땅의 차이다. 현대 기독교계에 이단 사이비가 활개를 치는 것은 첫째는 삶에 찌들린 성도들이 성경을 많이 읽지 못한다는 것, 다음은 영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말만 잘 하면 속일 수도 있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성도들의 의식이 깨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말씀을 바로 믿자고 외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자, 혹은 치유 사역자들이나 은사자들을 시기하여 그렇다.’라고 몰아간다. 어리석은 영혼들을 속이고 자신도 속고 있다. 이런 것을 의학용어로는 ‘착각(illusion)’ 이라고 한다. 착각이란 단순한 지각상의 실수이기보다는 부정확한 지각을 유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어떤 착각은 시각단서의 모호함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그들을 시기하여 이런 말한다고 착각하지 말아 주십사 제발 부탁드린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중, 누구던지 자신을 가리켜 ‘치유 사역자’라 말을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성경이 이토록 밝게 말씀하고 있는데, 아직도 “나는 치유사역자.”라며 자신을 과대 선전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이거나 아니면 삯군 목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필시 주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함이란 의심을 받아 마땅한 자다. 목회자님들과 성도님들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특별히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주님의 피로 값주시고 산 소중한 양떼들을 이단 사설이나 삯군 목자들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고로, 우리의 영혼과 육을 함께 치유하시고 살리시는 주께로 돌아가자. 성령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신 우리가 만인제사장이면 만인이 기도할 수 있는 특권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부여받았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강하다. 병든 형제 자매를 위하여 간절히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도 진정한 ‘치유사역자’이신 주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켜 세워주시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 6-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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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

“엄마, 새로 산 내 운동화 어딨어요? 엥~! 학교 늦겠는데!” “그건 네가 네 방에 가져다 두던 것 같던데 왜 밖에서 찾느라고 그러냐, 아가, 너무 허둥대지 말고 네 방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찾아보렴.”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내던지고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면서 평소와는 달리 소리부터 질러대는 어린 딸을 타이르시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몸이 유난히 허약했던 어린 시절, 나는 책벌레란 소린 들었지만,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전날 저녁서부터 가슴이 설레었고 새벽부터 일어나 방방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봄, 가을 운동회란 것이 있었고, 이 운동회는 학교의 행사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 지역의 큰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운동회 날이면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인근 마을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 들고 와글와글 학교 마당으로 모여들었고, 경기 종목도 다양해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어른도 아이도 함께 어우러져 신나는 축제의 한마당을 연출했던 즐거운 날이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펼쳐졌지만, 그중에서 모두에게 인기 있었던 종목은 단연 ‘줄다리기’였다. 유약하고 운동신경도 둔하기만 했던 나에게도 유난히 기대되었던 종목은 역시 줄다리기였다. 나는 어떤 종목에서건, 개인기만으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미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ㅠㅠ 그러나, 단체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줄다리기 같은 종목은 축구처럼 고도의 테크닉과 뛰어난 개인기를 요하는 종목도 아니다. 그저 줄을 잘 서, 그날 힘센 아이들이 많은 팀에 잘 배치되기만 하면 함께 승자가 될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줄다리기를 할 때, 선생님은, 힘이 세고 건장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나처럼 유약한 소녀들은 맨 꼴지에 세운다. 맨 뒤에 서 있는 사람도, 물론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겨야 하겠지만, 이기고 지는 일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조역일 뿐이다. 아닌 말로 줄을 잡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여도, 앞에서 힘센 아이들이 잘 해내기만 하면 모두 함께 승자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청군 홍군, 혹은 청군 백군으로 나뉘었고, 모두 자신이 소속된 팀의 칼러를 상징하는 청색 홍색 또는 백색의 예쁜 띠를 하나씩 건네받아 머리에 둘러 표식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팀은 색깔로 정해지고, 내가 좀 약해도 내가 속한 팀이 강해서 그들이 이겨주기만 하면 나도 덩달아 이기는 것이 되니, 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가!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흘리신 피를 믿고 구원(Salvation)받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의 공로가 전혀 가산되지 않는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 31)”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은 영적으로 보면, 내가 어느 팀에 속할 것인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 어둠의 권세자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에게 속할 것인가, 소속팀(?)이 결정지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상 술어로는 기본 구원론이라고 하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 외에 우리(성도)가 해야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기본 구원론, 여기에 우리(성도)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니 성도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 회개만 하면 된다,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대는 잘못된 구원관이 오늘날 기독교를 싸구려 구원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성도)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한순간에 공로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확실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 자녀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 구원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로서 삶에서 승리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ry, prosperity gospel)은 성경을 왜곡시킨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변질 시킨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logy, prosperity gospel) 은 같이 설 수 없다. 하여, 수많은 개혁교 신학자들, 목사님들, 성도님들이 오늘날 이 번영신학이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우리 중에는 번영신학을 논하기만 하면, 오순절 교회를 비방한다, 라고 생각하며 섭섭해 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 모든 것은 뒤로하고 우리는 서로 말씀의 떡을 떼며, 내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가 어느 교단이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한가 다투기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좀 더 바로 깨닫고 바로 믿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단은 제외)

진정한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최근 우리나라에는 '고지론(高地論)' 이 왕성하다고 한다. 이 "고지론(高地論)”이란, 기독교인이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위치에 오르는 것이 더욱 그 파이를 크게 한다고 하는 지론으로서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의 또 다른 모습이며,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도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함으로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더욱 확대하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의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종 질병, 가난, 고통, 그리고 불운 등에 아니 심지어 사회적 현상인 전쟁과 정치에도 영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서, 회개하지 않아 당하는 고난이라 주장한다는데 있고, 고지론(高地論), 번영신학의 취약점은, 십자가의 도, 좁은 길을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거스린다는데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고백과 결단,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감수하는 신앙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런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 좁은 길,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앙이다. 이렇게 될 때, 순교도 가능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본래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prosperity)란, ‘번영’외에도, ‘잘 해내는(doing well), 성공하는(successful), 그런 뜻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나 목사님들이 승리하는 믿음을 이야기 할 때, 대체적으로 이 prosperous란 단어를 ‘번영’에만 국한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victor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Victory는 완전한 승리란 뜻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단 한 번의 그 십자가 사건이 완전한 승리(victory)인 것이다! 그러니까, victory가 결과라면, prosperous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기본 구원론( 그리스도가 이루신 (victory)와 삶에서 지속하는 성화론(sanctification), 승리하는 믿음(prosperous faith)은 반드시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고로, 필자는, 번영(prosperity, prosperous)란 단어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뒤바뀐, 잘못 사용되는 (prosperity gospel)이 문제라고 본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일하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육신만을 위해 일을 해 주시느냐?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번영 신학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우선순위가 뒤바뀐 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나쁠게 없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후 5:7)”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은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도라면,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대개 ‘소년 다윗과 골리앗 장군’ 아니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후, 사건 은폐를 위해 충신 '우리야'를 죽인 다윗 왕의 이야기 정도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극히 사소한 일부로서 다윗의 신앙과 삶을 부요케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게 된 결정적 동기는 아니란 것이다. 다윗, 그가 ‘프라스프러스'(prosperous) 신앙의 소유자일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 그 숨은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이다!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 속에 승리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로 돌리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삼하 16: 7-8)

‘시므이’의 저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그 저주성 폭언마저 자신의 죄에 대한 채찍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함으로 받았다. 바로 이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수의 저주성 폭언에 대처하는 방법,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doing well)신앙, 성화된 신앙으로 정진할 수 있느냐,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인 실패자로 남느냐 갈림길의 시금석을 가르는 놀라운 비밀이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잘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다!

반면,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울컥울컥 순간순간 보복 심리로 기울고 있는 초라한 내 자신, 감정을 다 풀었노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틈만 있으면 미해결의 감정이 속을 헤집고 올라와 낑낑대는 몸부림, 위장된 겸손, 자기 실력을 가꾸고 다듬어 빛을 보려는 생각보다 쓸데없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를 공격할 틈만 노리는 비루한 사울의 편협함, 내 가슴 시리고 아픈 것만 생각하고 형제의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을 다독일 줄 모르는 유아적 사고, 다윗처럼 듬직한 감정으로 대범함을 보이는 대신, 감정처리가 잘 되지 않아 들쑥날쑥, 팔팔끓는 냄비처럼 찼다 더웠다 바글대는 사울의 얄팍함, 성령의 사람답지 못한 이런 한심한 자화상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원수가 저주하는 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단으로부터 오는 사악한 음성이라며 혈기 내고, 비아냥거리고, 한 개 받으면 열 개로 되돌려주지 못해 안달이다. ‘당신이 사단이다, 아니다, 네가 사단이다.’ 들어본 적 있는 소리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들이기에…

물론, 다윗은 우리네 범인과 다른 점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된 처량한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맹렬한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 왕의 부하 장수 중 하나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허락만 하시면 당장에 칼로 쳐죽이겠다고 왕께 간언했다. 그때 다윗 왕의 반응,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너무 허허롭고 너무 멋지다. 그 호기, 그 믿음을 배우고 싶다.

내가 만약, 이웃의 저주성 발언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혹시 실수로라도 잘못된 길에 들어갈 것을 염려하셔서 속히 그 자리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프라스퍼러스(doing well, successful)신앙을 소유한 성도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줄다리기 시합 같은 영적 경기장에서, 나도 승리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연약하고 힘이 없어, 언제나 꼴찌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나마 굳게 잡고 있어야 할 말씀의 줄을 맥없이 놓아버리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으리만큼 피곤한 때가 너무 잦은 것도 탈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잡고 있는 구원의 밧줄만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데, 손바닥이 아프고 쓰리다 하여, 시합 도중에 잡고 있던 줄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면, 나는 ‘탈락자’가 될 것 뿐이다. 내가 강하든지 약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줄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나는 이미 그 팀의 소속 요원이 아닌 것이다. 어찌하던지, 주님의 은혜 속에서 승리(doing well)해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벗어난 자는 주께서 이루어두신 찬란한 승리(victory)와는 무관한 불쌍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말세가 가까워져 옴을 볼수록, 더욱더 주께 바싹 붙어 있어야 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 주님께 붙어 있는 신앙,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주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의 힘, 주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 12)”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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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넘어서지 마라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학생의 자살 소식을 지난 한 해 동안 네 번씩이나 접해야만 했고, 이번에는 또 ‘카이스트’ 영재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주어야 할 교수님, 학교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던 한 교수님이 아직은 한창 일할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충격스러운 소식이 들려온다. 
 
‘카이스트’만의 베르테르효과(모방자살)일 것이라고 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과학기술 영재의 요람인 카이스트가 영재의 무덤이 되는 것은 아니냐며 걱정하는 소리도 들린다. ‘카이스트’에서 지난 5년간 8명의 학생이 자살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스쳐 지나가거나 너무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자살 이유야 모두 다르겠지만, 공통분모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 공통분모를 찾는 데서 문제 해결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타인이 감히 어찌 그들의 아픔을 가름조차 할 수 있으랴만, 사회가 그들 앞에 쳐놓은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 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높았던 것은 아닐까? 턱없이 높게, 더 높이, 더 높이를 부르짖는 우리나라의 병든 사회구조를 원망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것도 아니면 그들 스스로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목적,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너무 높게 잡은 탓일 수도 있겠다.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이토록 허망하고 안타까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입장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어떤 것도 아깝디아까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할 만큼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자살은 비겁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고 막아낼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알아내야 하고 막아내야만 한다. 이런 끔찍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대책반이라도 구성해 보았으면 좋으련만, 장래가 촉망되는 우리들의 영재를 지켜내지 못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저미며 파고든다.

그렇다.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따라서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너무 높아서도 안 되고, 너무 낮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식(knowledge)은 벽(wall)과 같은 것, 적당히 높으면 자기 방어에도 도움되고, 바깥세상도 내다볼 수 있어 좋지만, 그 벽이 너무 높으면 역으로 자신이 그 벽 속에 갇혀 버리는 수가 있다. 이처럼 인간이 넘어야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도 마찬가지다. 너무 높은 것도 문제지만,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너무 낮게 잡아 마음대로 넘으려 하는 욕심 또한 문제다. 도덕적 기준선(base line)이 그런 것이다.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에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세상을 시끌시끌 거리게 하는 범죄행위, 파렴치한들의 행태를 잠시 눈여겨보면, 그들은 도덕적 기준선 (基準線(base line))을 자신의 눈높이로 낮게 정하는 것, 때로는 인간 이하의 기준으로 하향조정을 한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유기(遺棄)하는 것, 부모가 어린 자녀를 유기(遺棄)하는 것, 이외에도 얼마나 낯뜨거운 일들이, 밝은 해 아래서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인가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형편없이 낮춘대서 기인한다고 하여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미시간주 마스힐바이블처치 담임인 롭 벨 목사 목사가 있다. 그는 미국 주류 메가 처치(대형교회) 담임목사다. 그런 그가 최근 '지옥은 없다'고 주장해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천국 지옥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운명에 관한 책(Love wins: A Book About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에서 '지옥은 없고 인간은 죽어서 모두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의 창조주'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수 만든 피조물인 인간들을 지옥으로 보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기독교의 존재 이유이자 신학의 시작점인 내세론을 전면으로 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신학계에서 연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남침례신학교 총장인 보수 신학자 앨버트 몰러 목사는"인간적 교만"이라면서"지옥의 개념을 사람들이 좋아할 방향으로 순화해 결국'다른 복음'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벨 목사의 주장이 '가능한 해석'이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관점을 가진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는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틀리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말했다. 논란은 벨 목사의 책을 단숨에 대박 작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벨 목사는 지난 3일 열린 저자사인회에서 자신이 보편구원론자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논쟁을 부르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왜 수억의 인간을 저주하겠느냐는 단순한 의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지옥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지옥)이 하나님의 불타는 마음일 뿐, 실제성은 없다 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과거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의 주장이 현대 기독교계에서 열풍으로 불어오고 유행병처럼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이긴다.” 라는 아름다운 詩 적 언어로 포장하여 내어 놓은 ‘지옥 부인론’을 책으로 출간해 돈방석에 올라앉은 ‘Rob Bell’ 목사님, 진리를 부인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그 욕심의 근원지는 무엇일까?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록한 말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신학자들의 논란이 많지만, (‘핫지’(Hodge), ‘바레트’(Barrett), ‘메이어’(Meyer))등 ‘기록한 말씀’을 가리키는 원어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점에 착안, 여기서도 기록된 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킴이라고 했다. 반면, ‘칼빈’ (Calvin)이나 ‘루터’ (Luther)등의 개혁자와 또는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기록한 말씀’이 4장 이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내용 아니면 1-3장에서 인용된 구약 성경을 뜻하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학자의 주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66권)을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것을 후대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계 22: 18-19절 참조) 어쨌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의 진보에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이었고, 이것은 순전히 영적 교만이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책망, 지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고전 4: 8) 여기에서 “왕노릇..” 이란 영적 교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자들의 패역한 교훈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며 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 20-21),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usaamen.net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엄동설한 모진 바람도 이제는 한풀 꺾인 듯, 남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제법 싱그럽게 느껴진다. 겨우내 누렇게 메말랐던 잔디가 파릇파릇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언덕을 따라 아지랑이가 사르르 휘감아 도는 이른 아침, 혼탁한 교계도 겨울처럼 낡고 더러워진 옷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새로운 봄, 주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했으면 좋으련만…이 생각 저 생각 가슴 아픈 교계의 현실을 개탄하며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고향 집 뒷산에 있던 작은 옹달샘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도토리나무, 소나무, 대나무며 잣나무가 울창하고, 진달래꽃 철쭉꽃 각종 들꽃이 철 따라 다투어 피고 지는 곳,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목이 빽빽이 들어찬 나지막한 야산이 병풍처름 둘러쳐진 뒷산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조금만 따라 올라가면, 거기 울퉁불퉁 큰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그 중 제일 큰 바위 밑에는 밤낮으로 퐁퐁 쉬지 않고 솟아나는 조그만 옹달샘이 하나 있다. 산속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기에 그곳의 물은 언제나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며 차디찬 것이 정말 시원하고 상큼한 청량음료수 맛이었다.

혹독한 된서리 몰아치는 겨울, 삼라만상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어도 그 옹달샘만은 얼어붙는 법 없이 수면 위로 약간의 살얼음이 사르르 한 정도일 뿐, 그 살얼음을 살짝 고사리 손으로 걷어보면 속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보드라운 물결무늬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솟아오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여름, 간혹 논밭이 타들어가는 가뭄이 와도 그 작은 옹달샘은 결코 마르는 법 없이 늘 한결같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좋은 물이란, 물줄기가 땅속 깊은 곳 원천(源泉)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원천에 연결된 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철이라고 하여도 물이 더 많이 불어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가뭄에 물이 말라버리거나 장마철에 물이 넘치는 샘은 가까운 개울이나 빗물이 얕은 땅으로 스며들어 샘을 이루는 물이고, 그런 샘의 물은 좋은 물이 아니란다.” 방금 언니가 길어온 차가운 옹달샘 물에 고소한 미숫가루를 듬뿍넣은 그릇을 간식으로 챙겨주시며 어린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지혜로우신 울 어머니의 ‘좋은 물 나쁜 물’의 수질 검증법(?)이시다.

이렇게 물 하나에도 좋은 수질을 분별하는 검증법이 필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 물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최근에 와서야 어머님의 그 깊으신 마음이 조금씩 깨달아 알아진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살고 죽는 것, 그것은 무엇이 되었건 바르게 분별을 해야만 한다. 분별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먹거나 마시면 자칫 귀한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이라고 분별없이 마구잡이로 입에 넣다가 귀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서는,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들이 산에 놀러갔다가 식용버섯이라며 채취해 온 독버섯을 끓여 먹고 일가족 모두가 즉사했다는 끔찍한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을 얼마 전에 읽어 보았다. 또 복어의 맹독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끓여 먹은 노부부가 이튿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일본에서는 지금 음식이나 물에 인간이 섭취해서는 안 될 방사능이 들어 있어 초비상이다. 인간이 먹어도 해가 되지 않을만큼의 방사능 기준치는 얼마만큼이어야 하는가? 물과 음식에 포함된 방사능 성분의 기준치를 분별해 내는 검사를 쉴 새 없이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 일본 열도가 울고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날마다 집중 보도되고 있다.

이렇듯, 세상에는 육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필수조건을 충족시켜줄, 좋은 물, 좋은 음식도 많이 있지만, 반대로 그 속에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극물도 함께 섞여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분별하고 먹고 마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의 세계로 직결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음료와 영의 양식이랴? 모든 교리를 분별함 없이 무조건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theory만큼 위험천만의 말은 다시 없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을 잃은 현대 교계를 잠시만 둘러보면, 어지럽기 그지없다. 모두 제각각이다. 극단적 신비주의, 극단적 세대주의 극단적 자유주의, 극단적 폐쇄주의(?)등등.. 천차만별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때에 정작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분별법의 척도가 되고 인생의 잣대(Canon)가 되는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오히려, 말씀으로 분별하고 바르게 믿자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성령체험이 없는 자, 페쇄적 근본주의자, 불량한 짓을 저지르는 악당 패거리라도 되는 듯 호도하고 비방하는 거센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지금 최바울 목사님이 지탄받는 것도 바로 “영적 도해”란 책의 내용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목사님들이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개인의 상상력을 동원, 과장하여 왜곡시켜 전하는 데서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사 43: 7, 21)라고 성경이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 그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믿을 수 없으면, 그것은 내가 이해되지 않아 그런 것이지 그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란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 되었지만, 저자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란 데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난해구절이란 것이 있고, 난해구절은 난해구절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상상력으로 풀이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범죄행위다. 그러기에, "경의 모든 말씀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 (벧후 1:20-21)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할 목사님들마저 말씀을 읽지 않고 경시한 탓에, 말씀의 분별력 상실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부흥이 되는 듯하고 구변이 좋기만 하면, 아무것이나 모두 수용하는 데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너무도 큰 현실이다. 그의 위험천만한 사상을 분별함 없이 무조건 지지하며 따르는 수많은 목사님들이 계시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1) 영(靈)의 세계를 너무 생각하지 마라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靈)적인 존재로서 두 세계에서 共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의 본질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고전3: 1-3) 또는 "혼(Psyche, natural) 자연적인 사람" (고전2: 14), 영(Pneuma) 영적인 사람"(고전3:1)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많은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임을 우리는 잘 안다. ) 어쨌거나 이런 인간의 특수성은 사람을 때때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띌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 (고전3: 1-3)이라 부르고 영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수성을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외에, 인간이 지나친 영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영의 세계에 도전하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만큼 영의 세계가 인간의 영역 밖의 세계,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이기에, 인간의 도전 정신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형이상학적() 세계로 도약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의 한 표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인간이 영의 세계, 神의 세계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집착의 보다 근원적 출발은 인간이 神과 같이 되고 싶은 탐욕 때문일 것이다.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그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탐욕은 道를 넘는 행위로서 물리적이건 영(靈)적이건 모두 우상숭배만큼이나 가증한 것, 인간에게 금지된 계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반대로 이런 인간 본성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는 간교한 사단이 성령의 역사를 흉내 내어 거짓 예언, 환청, 환상, 이런 영의 세계를 미끼로 사람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이끌어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성도가 영의 세계를 너무 깊이 파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릴 때, 그 욕심이 그를 주장하여, 영적인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악한 영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기 쉽고 어둠의 권세자들의 조정을 받게될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따라서 인간에게 허락된 한계, 성경에 기록된 영(靈)의 세계, 그 이상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 건전한 신앙인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2) 영(靈)의 세계에 속한 힘, 권능들을 부릴 수 있는 권세가 성도에게 주어졌는가?

그 대답은 ‘No, 그럴 수 없다.’ 하는 것이다. 성도가 이 영적 존재들,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theory는 분명히 비성서적이다.

물론, 영의 세계는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두 종류 즉 좋은 존재와 악한 존재로 나누어지는데, '세라핌', '케루빔', '천사들'(좋은 천사와 나쁜 천사), '정사들', '권능들', '어두움의 주관자들', '악한 영들'(엡6:12), '왕좌들', '지배들'(골1:16), '타락한 천사들'(벧후2:4), '옥에 있는 영들'(벧전3:18-20), '마귀들', '미혹하는 영들'(딤전4:1) 등으로 구분된다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보기보다는 그들(천사들)을 부릴 수 있는 권이 천사들 뿐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히 1: 14절) 천사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수종자이고 신약시대(지금)는 천사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는 '성령 시대, 은혜 시대'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 중에 천군 천사가 동원하여 지켜주십사 주님께 부탁하는 것과 성도가 천사들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약시대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성서적인 표현과 신앙은 성령님(하나님의 영(Holy Spirit, Holy Ghost)으로써)께서 친히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또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보호하신다. 이런 사랑의 주님께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마다, 우리를 건져주시고 지켜달라고 기도하면,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천사를 보내기도 하시고 친히 그 권능의 손을 펴시사 풀무불 속 같은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어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고로, 성도는 천사를 명령하는 등, 영적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갈구하는 기도를 매순간 주님께 올려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영적 원리이다.

개혁 교회의 신앙과 삶의 원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다. 이 원리에 가장 충실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청교도들”(Precisians or Puritans)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모든 활동의 가장 중심에는 성경이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福音)이란 고대 그리스어의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유앙겔리온’(Ευαγγέλιον: euangelion, 라틴어 Evangelium),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은 우리를 위해 이땅 위에 오신 주님,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신 분,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이 예수님을 힘써 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생명의 샘, 생수의 근원이요, 원천인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우리 모두 힘써 그분께로 돌아가자. 끝으로 우리 아멘넷의 한 논객이신 cy님의 경고의 말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DK대사(악령)로부터 받아적은 뉴에이지 바이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세계질서에서는 영성이 신학을 대신할 것이다. 살아있는 체험이 신학적 수용을 대신할 것이다. 영적 실재가 갈수록 뚜렷하게 나타나고 형태적 측면은 뒤로 사라질 것이다. 동적이고 표현적인 진리가 신세계종교의 기조가 될 것이다." –cy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현대는 뉴에이지 사상이 종교, 문학, 예술, 과학, 정치 각 분야로 급속도로 확산, 침투하고 있는 무서운 말세지말이다. 우리에게 허락되지 이런 무서운 말세를 살아가는 선도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 神의 영역을 탐하는 탐욕을 제어하고, 영의 세계를 너무 알려 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할 것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수 없느냐"(마 16: 2-3)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http://www.usaamen.net 별똥별/ 최송연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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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 흰 눈이라도 한차례 쏟아져 내릴 듯 음산하기만 하던 잿빛 하늘이 갑자기 열리고 장대 같은 겨울비가 주르륵거리며 옷깃을 적셔 흐른다. 으스스 몸도 마음도 춥다. 아, 벌써 12월인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마음은 급한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 속이 하얗게 정리가 잘 안 된다. “저는 부딪히고, 깨어지고, 떨어져 뒹굴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 독자님 중 한 분이신 G2u님께서 댓글로 남기신 말씀이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섞여 내 가슴을 헤집으며 파고든다. 그렇다. 얼마나 많은 시련과 격동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었고, 지난 한 해였던가?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뒤돌아보니 잘한 것보다 후회스러운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이제 남은 며칠 간이나마 제대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아야 하겠다.

하루가 한 달 되고 한 달이 한 해 되고 이렇게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의 last destination 은 어디인가? 마지막 종착역에서마저 오늘처럼 후회되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인생이 싸움이라고 누가 말했던 것도 같다. 동의가 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싸우며 나아간다는 찬송 詩처럼 신앙의 길이란 역시 쉬운 것만은 아니지, 싸우며 나아간다는 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워야 제대로 된 싸움, 그날에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듣는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오래 전, 워싱턴 주의 '콜롬비아’강에서 산란기가 된 연어(Salmon)떼들의 귀향(歸鄕)길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던 때가 생각난다. 그곳에서 놀라운 사실을 배우게 된 것을 이 한해의 끝자락인 12월에 우리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볼까 한다.

우리가 배운 대로 연어의 특성은 산란기가 되면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반드시 자기가 산란 된 곳, 다시 말해 연어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귀향하고 그곳에서 알을 낳은 후 죽는 것이 아닌가, 해마다 이런 연어(Salmon)떼의 귀향길을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을 위해서 워싱턴 주 정부에서는 콜롬비아 강 상류에 건물을 지어놓고 강물 밑을 환하게 드려다 볼 수 있도록 특수 유리벽을 만들어 놓았기에 우리는 그 유리벽을 통해서 먼 태평양 바다에서부터 콜롬비아 강을 따라서 귀향을 하고 있는 연어(Salmon)떼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거센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곳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며 올라가려고 필사의 힘을 다하는 연어들을 무심코 바라보며 서 있던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고된 귀향길을 감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들의 외모가 잘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쇠작살에 등이 찍혔었던지 등이 길게 찢어져 있는 놈, 아직도 상처 주위에는 검붉은 피가 엉겨붙어 있는 놈, 한쪽 눈이 터져 나간 놈, 한쪽 날개(지느러미)가 떨어져 나간 놈, 비늘이 다 벗겨져 핑크빛 살갗이 벌겋게 드러난 놈, 옆구리에 깊이 상처가 나고 살이 터져 너덜거리는 놈, 그야말로 두 눈 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는 참상이었다. 글자 그대로 피맺힌 사투의 귀향길이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넓은 바다에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 죽는 놈이 무사히 귀환하는 놈보다 더 많은 실정이라고 옆에 계신 분이 귀띔해 주신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즈음은 연어고기의 기름이 불포화 지방산으로서 (이 불포화 지방산이 동맥경화를 비롯 각종 심장병을 유발하는 나쁜 콜레스트롤 (L.D.L)수치를 떨어트려 준다고함) 전 세계인들의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연어를 잡으려는 강태공들은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날카로운 낚싯대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미끼를 끼워서 여기저기 드리워놓고 연어들이 그 미끼를 물어주기만을 바라며 가만히 숨어 있다고 한다. 또 넓고 깊은 콜롬비아 강엔 갑상어떼들도 많이 출몰한다고 한다. 이 갑상어떼들이 제일 먼저 공격을 하는 놈은 조금이라도 약하거나 병이 들어 비실거리거나 혹은 떼 중에서 이탈하는 놈이라고 한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매 한 가지가 아닐까?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성도의 귀향길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다,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귀향길 역시 녹록지도 만만하지도 않음을 알 수 있고, 우리의 귀향길에서 갑상어 때보다 더 무서운 사단으로부터 쉴새없는 공격을 받고, 곳곳에 쳐놓은 사단의 덫이 무수히 깔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귀향(歸鄕)길에서 우리가 받고 있는 사단의 공격 무기는 무엇이며, 우리가 조심해야 할 사단의 덫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

혼합 영성의 덫을 피해야 한다

현대는, 매우 불길한 징조의 검은 그림자가 전 세계의 기독교계를 뒤덮고 있다. 이는 수십 가지의 각기 다른 신비주의적 현상, 강신술 (降神術), 각종 이적과 기사,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 현상, 그리고 천사들의 계시, 치유사역, 예언사역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신비한 형태로 포장되어 뒤덮고 있다. 잠시만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면, 얼마나 허수룩한가 금방 알 수 있는데, 말씀이 없는 영혼, 순수 복음을 떠나 미혹의 길로 달려간다. 이런 신비적 현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매우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강신술, 때를 맞추어 각 서점마다 천사와 영들과의 접촉 내용을 담아 내기만 하면 날개돋친 듯 팔린다고 한다. 이때를 자신의 영달의 기회로 삼으려는 거짓 선지자들, 기회주의자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내용이 바로 이 강신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성자 아무개와 대화했다, 천사를 보았다, 금가루가 쏟아져 내린다. 등등, 이런 오컬트적 이야기들로 꾸며진 책은 순식간에 best seller가 되고, 그런 영적 세계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린다는 사람은 단번에 유명 강사가 되는데, 어찌 구미가 당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19, 20)" 하는 말씀으로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성경에 기록된 "율법과 증거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이 쳐놓은 무서운 덫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욕(物慾)의 덫을 피해야 한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넘치지 않는다. 현대는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말세지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물욕, 제어하지 못해서 직장에서 신임을 잃고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더 심하면 그 물질 때문에 자살까지도 하게 된다. 목회자들이라하여 이에서 제외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는 말씀은 가롯 유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물질을 탐하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마 2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의 사건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물질을 탐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좋은 예가 된다. 오늘날 부르심을 입은 주님의 백성들, 우리 모두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예임에 틀림없다.

정욕(情慾)의 덫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 性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최대의 죄악도 바로 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스러운 곳이다. 침소를 더럽히지(히 13:4절 참조) 말아야 한다. 성경에 별처럼 빛나던 인물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모세도 이방인이었던 구스여인을 취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므로 그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민 12:1).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 금지된 성(性)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탐했다가 두 눈 모두 빼이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라. 얼마나 많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목사님들이 사단이 쳐놓은 이성의 덫에 걸려 넘어지고 쓰러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우리는 속히 피해야 한다.

명예욕의 덫을 피해야 한다

이 명예욕은 정말 무섭다. 이 명예욕은 사단의 속성이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다 쫓겨난 천사라는 기록이 있다. (겔 28장 참조) 명예욕이 무서운 것은 그 속성 때문이다. 올라가려고 하는 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한다.(잠 14:30절 참조) 동생을 시기한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란 오명을 영원히 남길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요셉의 열한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애굽의 종으로 팔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에 넘겼다.(마 27:18, 막 15:10 참조)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0:6, 11절 참조)

우리 성도들도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기도로 무장하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약해지고 병이 들어 비실거리게 된다. 또 작은 일에 시험이 들어서 교회란 공동체를 이탈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갑상어떼보다 더 무서운 사단의 공격을 받게 되고 약한 자, 병이 들어 비실거리는 자, 공동체를 이탈한 자, 그런 사람이 제일 먼저 사단의 밥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단은 오늘도 각종 유혹의 미끼들을 곳곳에 쳐 놓고 성도가 그 미끼를 물어주기를 바라는 음흉한 눈을 가지고 숨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각종 이단 사설의 덫, 이성의 유혹, 재리의 유혹, 명예의 유혹, 각종 함정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들이 쳐 놓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온갖 아름다운 미끼 뒤에는 날카롭고도 무시무시한 지옥의 쇠갈고리가 숨겨져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어디 그뿐이랴, 더욱 무서운 것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적들, 한 공동체 안에서 변질된 영혼들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이단들로부터 당하는 공격보다 더 무섭고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길을 가야한다.

하찮은 미물 연어는 알을 낳고 죽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저렇게도 안간힘을 다 쏟으며 사투(desperate struggle)의 귀향길을 감행하건만…, 나는 과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설사 내가 가야할 이 길이 눈물의 길이요 피 맺힌 사투의 귀향 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길을 달려 갈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리라, 이 길의 끝에는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며 사모하던 주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에, 그분 앞에 서는 날, 내 눈에 눈물을 씻겨주실 그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그리며, 나는 오늘도 내일도 선한 싸움 싸우며 이 길을 달려가리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행동하는 신학 (act theology)
 
그야말로 쟁반같이 둥그런 보름달이 샛노란 빛을 발하여 더욱 청승스런 기운을 뿜어내는 늦가을 밤, 갈바람 소리 스산해서인가 밤이 깊어가건만 어인 일인지 통 잠을 이룰 수 없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느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뒤척이고 있으려니까, 새까만 밤하늘의 별들처럼 두 눈은 점점 더 초롱거리고 머리는 더욱 맑아진다. 이런 때는 차라리 귀뚜라미의 합창소리나 들으며, 성삼문의 詩라도 한 편 읊어보리라, 창문을 드르륵 열고 쏟아져 내리는 달빛 속에 베토벤의 교향곡만큼이나 가슴 설레일 귀뚜라미들의 합창 소리를 기대하며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귀뚜라미 소리는커녕, 개구리 한 마리 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뿔싸,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시골 고향 집에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심의 밤, 하늘은 고향 하늘이고 달빛도 그 달빛이건만 그토록 청아하던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는 간곳없고, 여태껏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객들이 무섭게 밟아대는 자동차 엔진의 시끄러운 소리만 정적을 깨트리고 들려오는 삭막한 현실, 갑자기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이기적 발로, 육신의 편리만을 위해, 온갖 욕심을 따라,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린 인간이 순수 자연의 소리를 그리워한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은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삶의 질을 올려줄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변질시켜 버린 인간에게 자연은 또 어떤 재앙으로 보복을 가할는지, 파괴, 변질, 폭동, 이런 무서운 단어들이 이 밤에 홀로 깨어 있는 나를 더욱 울적하게 만든다.

변질한 생태계, 엘니뇨 현상, 태풍과 지진, 이 모든 것이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것이 어찌 자연계에만 국한된 것일까? 어느 분야이건 변질된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편리와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켜나가야 할 질서도 무너뜨리고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도 한 순간에 짓밟아 버리는 험한 세상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진리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세대에 살고 있다.’라고… 매 순간마다 그 말을 절감케 하는 현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최근, 암담한 교계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우리 게시판에는, 주의를 요망하기에 충분한 호소문이 하나 올라와 있다. 내용인즉, 어느 교회 담임 목사가, 성경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 잘못된 성도들을 치리 하기 위해 개 교회 종교재판을 열었다는 충격적인 호소문이다. 뿐만아니라, 법정 효과(?)를 높이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동원, 교회 문을 닫아걸고, 그들을 가두었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가슴이 아프다. 읽는 내내 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 무슨 회괴한 일이란 말인가?

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system)가 문제인가, 신앙인격이 문제인가

과연 그들, 자칭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기존 교회의 시스템(system)이 갈아엎어 버려야 할 만큼 썩고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렇게 보지를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현 개신교계에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 문제가, 교리적으로나 시스템(system)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 안에 몸담고 있는 개인 신앙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선교사로 헌신된 남편 목사님과 함께, 아주 젊은 날부터, 이곳저곳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만나본 사람들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 과학자, 교수들, 정치인들, 사업가, 농사꾼, 학생들, 혹은 평민들 등등…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중 예수님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던지, 믿지 않는 사람이던지,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싫고, 그래서 교회 나가기조차 싫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변질한 성도들의 삶이 역겹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이타적인데, 예수를 따른다는 ‘예수 따르미’들의 삶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란 것이다. 입은 아주 믿음이 좋은 신앙인인데, 말과 행동은 다르다는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따로 국밥의 신앙,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변질한 신앙인의 형태, 가라지 신앙인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배척받아 마땅할 종교적 행위자라고 규정짓고 탄핵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포기했는가? 어쩌자는 것인가? 가장 많이 예수님을 닮아야 할 오늘날 교계 지도자들은 밥그릇 싸움이나 한다는 지적을 받고, 성추행, 간음, 횡령, 폭행, 사기 등등…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도 당당하다. 정말 기막히다. 그 옛날 주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 책망받던 과거 바리새인이 밟고 가던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머리로만 알았을 뿐, 행동과 실천 신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인 우월감이었다. 그들은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변질’해 버린 것이다 고로, 현대 기독교가 배척을 받는 것은 분명, 제도적, 시스템적 문제가 결코 아니란 것이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도는 변화를 받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 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데서 오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워지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도자가 되었건, 평신도가 되었건,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산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옛사람 그대로인 채, 다른 곳, 신사도 운동, 평신도 교회, 치유사역, 예언자 학교, 이런 곁길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면, 앞으로는 기독교인 수가 점점 더 줄어들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무서운 대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었고 그가 나치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언제나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강조,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와 역사의 중심이고, 神과 자연의 중보자란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for me)라기 보다 ‘우리를 위하여 (for us), 결국에는 ‘타인을 위하여 (for others) 살아가셨던 분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예수 따르미’의 숭고한 사상으로는 ‘남을 위한 존재 (dasein for andere, being for others)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고 그런 삶을 살다 끝내 희생되었다. 후대는 그런 그를 가리켜 ‘행동하는 신학자’, '실천하는 신학자' 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아니지만, 행동하는 삶의 좋은 예가 더 있다. 우리나라 육군 사관 학교에 가면, 교정에 높은 기념비가 하나 우뚝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기념비의 주인공은 계급이 남달리 높았거나 부유층이었거나, 참모총장이어서가 아니라, 기념비적 삶을 살다간 강재구 소령의 덕을 기리기 위함이다. 보통 남자라면, 특히, 군인이라면, 우리나라 60만 대군이 한결같이 그 어깨에 별(star)을 달아 보기를 소원할 것이다. 또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그 소원하던 별(star)이 되었다고 하여, 훗날에 그 별(star)을 기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유없이, 별(star)이라고 무조건 기념을 해 준 예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홀로 우뚝 선 기념비, 그는 과연 누구한 말인가?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 37분, 힘과 신념으로 옹찬 스물아홉의 한 젊은 장교가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시키던 중, 부하 한 명의 실수로 수류탄 1개를 오발, 병력 대부분이 유효반경 내에 있었기에, 큰 살상이 예상되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그는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쳤고, 수류탄과 함께 일순간에 산화했던 것이다.

이름없는 무명의 용사, 강재구 소령, 그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그의 삶이 기념비로 남게 된 것은, 그가 남보다 높은 학벌의 소유자였기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을 소유했거나 인물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그는 바로 행동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로, 행동하는 신앙이란, 남을 위해 사는 삶, 열매를 맺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예수 따르미”들이 반드시 본받고 실천해야 할 거룩한 성도의 참모습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끝으로, 게시판에 평신도 교회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독자, 필명 '짐보'님께서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는 간곡한 부탁의 댓글을 남기셨기에, 우리 모두 함께 귀기울여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 옮겨본다.

(자기 자신에게 꼭 물어보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목회가 교회중심인가? 예수중심인가?"
우리는 늘, 넓은 문과 좁은 문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성령님의 인도를 간구하며
믿음의 분별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분별"이라 생각합니다.
분별을 잃어버린 세대...
우리 모두 그분의 긍휼로, 은혜로, 세상과 가치관이 분별된 믿음을 위해 회개해야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 1-26)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사진: 큰뒷부리도요새

얀 반데 캄 (생태사진전문가, 네덜란드)

 
누가 심었을까? 방조제를 가로지르는 길가에 가녀린 소녀의 자태처럼 청초하기 그지없는 코스모스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다소곳이 줄지어 선 채 살랑살랑 춤을 추며 피곤함에 지친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방축으로 된 도로의 양면이 모두 시퍼렇게 출렁이는 바다이다.
 

새만금, 그 어마어마하고 웅장한 모습에 놀라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벌어졌던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쭉 곧은 교각 위 단정한 도로를 따라 얼마쯤 들어가니 전망대가 나오고 전망대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천사의 석고상이 아직은 때 묻지않아 새하얗게 눈부시다. 우리나라 지도를 바꾸고 있다고 하는, 이 새만금 방조제는 네덜란드의 주디찌 방조제(32.5km)보다 더 긴 33km이며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새만금 그 위용은 정말 대단했다.

전망대를 벗어나 한참을 더 달려가니, 눈앞에 보이는 둑길 제방 저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가 평화로워 보인다. 그곳 들판에는 소란한 세상 소리, 자동차 소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벼알은 가을 땡볕 아래서 황금빛으로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채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조금 더 가자니, 넓디넓은 갯벌, 이미 메말라버린 거전갯벌에는 바다식물 나무 제가 듬성듬성 흩어진 채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고 거기에 경제와 산업, 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비상할 녹색 성장과 청정생태환경의 “글로벌 명품 새만금’을 꿈꾼다고 하는 곳, 이명박 대통령은 "새만금 방조제는 단순한 방조제가 아니라 동북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 가는 대한민국의 미래 경제고속도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새만금이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생각도 지역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지역 한계를 벗어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새만금의 미래도 활짝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라며 역설했다고 한다.
 

또 "새만금은 4대강 사업과 더불어 대한민국 저탄소 녹색 성장을 위한 우리의 또 다른 노력, 4대강 사업이 죽어가는 강을 살리는 것이라면 새만금 사업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녹색도시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새만금은 나라의 자존심이라고 불리울 수 있도록 웅장한 간척사업장이요, 대통령의 꿈, 한 사업가의 원대한 비전이 현실화되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 그곳 어민들과 생태보존학자들은 새만금을 괴물이라고 부르며 울상을 짓는다고도 한다. 거전갯벌은 수천 수만 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면서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고, 갯벌은 거기에 의존하는 수많은 생명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갯벌에서 태어나고 갯벌에서 자라고 갯벌과 함께 늙어가다가 갯벌의 품속에 안기는 사람들, 갯벌이 주는 풍요를 누리며 갯벌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던 어민들,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그들 삶의 터전이 무참히 짓밟히고 한순간에 파괴된 것이다!

새만금, 이 거대한 힘 앞에서 수많은 도요새, 백합과 조개 그리고 게들, 갯벌에서 생명을 이어가던 뭇 생명은 죽어가고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 새만금지역의 거전갯벌에는 큰뒷부리도요새 긴다리도요새, 붉은부리도요새 등등,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철새들이 때가 되면 날아와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유도 모른 채 많은 철새가 죽어가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수천 킬로미터의 비행을 하면서 이곳을 찾아온 도요새 몇 마리가 메마른 갯벌에서 먹이를 찾지 못하고 끝내 주검으로 남은 것을 사진으로 찍어 들고 다니면서 갯벌을 보호애야 한다 호소하는 조류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친구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내어준 봉고차에 우리를 태우고 안내를 하시던 그곳 교회 나이 많은 장로님은 "밀물 때와 썰물 때를 맞추어 바구니와 망태기를 든 아이들과 여인네, 지게를 지고 백합을 주우려고 나가는 할아버지들, 또 갯벌에서 개구리를 잡는 민첩한 도요새의 정겨운 모습을 이제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리 쉬었다.

한편으로 세간에서는 이 웅장한 새만금을 가리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만리장성,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하고 백성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는 명분을 꿈으로 포장하여 앞에 내세운 강자의 욕심일 뿐이었다. 결국 그 강자는 백성을 위한다는 자신의 거짓 꿈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약자의 생명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진정한 꿈은 너도나도 모두 살리는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대에도 강자의 무리한 욕심은 꿈이란 이름으로 포장시켜 약자를 희생시키고서야 얻어내는 것, 정작 약자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헛된 것이요, 재앙일 뿐이다.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갯벌의 무수한 작은 생명을 죽여서 일구어낸 새만금, 수많은 젊은 생명을 희생시켜서 일구어낸 진시황제의 만리장성, 결국 약자인 너를 울게 해야만 이룩해 내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이 모두가 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친 욕심의 발로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너무 지나친 말일까?

나는 생태보존학자도 아니고 갯벌을 사랑하는 어민의 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거대한 새만금 방조제 위를 달리는 내내 마음이 많이 울적했다. 왜일까? 그것은 새만금이나 만리장성을 보면서 내게는 그들의 업적보다는 그들의 무리한 욕심과 지금 우리가 당면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향해 높이, 더 높이를 외쳐대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고대 사람들처럼 무엇이든지 크고 높고 강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들, 그들을 큰 종이라 따르며 숭배하는 어리석은 성도들,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가들이 주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들의 무리한 욕심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포장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수히 작은 교회를 쓸어트리고 성도들의 헌금을 갈취한다.

교회당 건물은 주님께 예배 드리기 위한 목적보다는 부와 권력과 능력의 상징이라도 되듯 하늘 높은지 모르고 더 크게 더 높게 올라만 간다. 어디 건물뿐이랴,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교회와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영혼을, 사업,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것 같다. 성도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단다. 사업가적 마인드가 뛰어난 몇몇 삯군 목자들은 목회보다는 성도관리 차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시켜 사고팔기도 한다. 이런저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 상품들로 성도들의 영혼을 유치(그렇다 유치가 아니고 무엇이랴)하기 급급하다.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신자들을 각종 프로그램과 상품으로 미혹해서 더 많이 수용하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작은 교회도 엄연히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건만, 약한 교회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교회 내에서도 심각한 빈익빈 부익부 기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문어발처럼 자신의 교세 넓히기 경쟁이라도 하듯,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 많은 돈과 인재들을 투자해서 지교회를 세운다. 이런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크게 부각시키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반기련도, 극단적 신비주의 자들도,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각종 이단 사설을 양산(produce)해 내는 그 어떤 단체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성공하겠다고 생각하며 남을 짓밟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이랴? 우리는 이제 서로 연합해야 산다. 연합하여 일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서로 도우는 교회가, 서로 도우는 성도가 되어야 그날에 주님께로부터 잘했다 칭찬과 함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0여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슴에 각인시키고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죽음을 택하셨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삼 일 만에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신 것이다.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구속을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뉘어 사역하시는 아픔을 참으셨으며, 협력하여 일하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다!!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 십자가 원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큰 교회는 내 몸집만 키울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믿음에 강한 성도는 약한 성도를 도와야 한다. 남을 죽이려고 하면 나도 죽는다. 성도는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상생(相生)의 원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이 인정하지 않는 비전은 불법이요, 불법을 행하는 자는 아무리 그 업적이 훌륭하다고 해도 주님께서 결코 인정치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이웃과 이웃, 목회자와 성도, 교회와 교회, 국가와 국가, 나의 꿈이 너를 울게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라 터무니 없는 한 개인의 욕심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소박하나마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꿈,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복된 꿈을 꾸며, 가꾸며, 서로 도와주고, 살려주는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 23),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2-3)"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칼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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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련의 위력으로 기독교는 반드시 박멸되고, x 집은 문닫고, x 먹(목사)은 산업현장에서 땀을 흘리게 되며, x 독들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내년도(2011년도) 통계청에서 전국인구센서스를 하게 되는데, 내년도까지 기독교인구는 적어도 10-20% 이상 줄 것으로 저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10-20%는 곧 x 독교가 망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징조입니다. )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 문구는 자신들의 혁혁한 공로로 우리 기독교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자랑하느라 신바람이 난 어느 반기련 인사가 그의 게시판에 올려놓은 황당한 발언 중에서 가장 mild한 문장을 카피해 온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란 긴 세월을 자랑하며 내려오지만, 정서는 유교 사상과 샤머니즘 사상이 뼛속 깊이 파고든, 그것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는 턱없이 미련하고 패역한 민족이었을 뿐이다. 샤머니즘에 물든 우리 조상은 삼라만상 모든 것을 신(神)으로 간주하여 거기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recognized)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때가 되어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주의 보수신앙은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우리 땅에 소개했으며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먼저 받아들인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알지 못하여 망해가는 민족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은 굶주리고 헐벗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들은 신앙의 보수를 부르짖었고, 새벽마다 울부짖는 눈물의 기도가 방방곡곡 울려 퍼졌으며 깨끗하고 청결한 삶을 몸소 실천실행함으로써 성령의 사람이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도 모든 기독교 역사가 지닌 공통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피 흘린 발자취’ 위에 건축이 된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분들의 눈물 어린 기도로 이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새벽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선교도 가장 열정적으로 하는 나라, 통계를 보면, 개신교인 숫자만 전체 국민의 21.6%(2009 년)가 되기까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나오고 있었다. 그뿐이랴, 비행기를 탄 채 밤하늘에서 잠시 내려다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십자가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 이토록 훌륭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 현대 기독교인의 실상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그 찬란한 신앙의 업적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으로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덕스러운 향기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닮은 신실한 사람들’이란 명예로움을 향기처럼 흩날리던 멋진 공동체였으나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x 독교’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운 공동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많은 지각있는 성도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겠다. 이제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돌아 보며 문제를 파악하고 조율(調律)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이토록 혼란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심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지켜 나가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치중하는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조직신학 교수님이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도 같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는 2천 년이라는 긴 역사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성경을 기초로 다듬고 다듬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며,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의 무수한 논쟁을 거쳐나오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긍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을 받은 위대한 산물이요, 보배로운 유산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개인이 자신의 입맛대로 새로운 자가신학을 양산(量産)해 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급히 조율(調律)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많지만 우선 몇 가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교는 정(靜)적이요, 기독교는 동(動)적이다.

1. 예수님께서는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
성경을 보면 세 초부터 세 말까지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 동(動)적인 하나님이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일하셨다. 병자를 고치기도 하셨으며, 잃은 영혼을 찾아 헤매는 일을 하셨고, 각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전도의 일을 감당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지금까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일하시는 분, 동(動)적인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요 8 : 29)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의 사역 시작은 보내(파송) 하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많은 무리 중, 70인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주신 사명이 ‘각 동네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명하셨다. (눅 10 :1- )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지상명령)도 역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 28 :19)...!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희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세상으로 가라.” 하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佛敎, Buddhism)에 대해 깊이 공부한 바 없어 확실히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잠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불교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른 종파와 매한가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라고 보겠다.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니 그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고행이요, 신(神)의 경지를 자기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이루어 내어야 하니, 도를 닦으며, 참선 (參禪)도 하고, 좌선 (坐禪)도 하고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앉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 성도는 참선(參禪)이나 좌선(坐禪)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도를 닦아야 하는, 정(靜)적인 불교(佛敎)의 불자(佛者)들이 아니라 그분(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역동(力動)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이런 윈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닫고 알기만 한다면 하루는 24시간 1년이면 365일을 가만히 앉아서 찬양과 기도만 하고 들어 앉아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그것이 신탁(神託, oracle)이건, 예언이건 간에, 처음부터 성경적 개념이 아니며, 이치에 맞지도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면 ‘주께서 가라시면 세상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마 28 : 16 - 20)

구약 성경에 느헤미야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삽을 들어 예루살렘 성곽을 세우는 일에 힘을 다했다. 느헤미야는 일하는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느3: 15-23 참조).

3.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정(靜)적이어야 할 불교는 세상으로 내려와 동(動)적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반대로 가장 역동(力動)적이어야 할 기독교는 정(靜)적이 되어야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비우고 깊이 기도에 착념하면 하나님의 심장까지 들락날락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 종교에서 도입한 ‘관상기도’의 현주소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는 12시간, 1년이면 365일을 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고 찬양만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생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좋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지상명령은 “세상으로 나가라!”하는 것인데, 언제 세상으로 나가서 언제 전도할 수 있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 가정에 가장이 생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이렇게 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성도이고, 그럴 수 있는 여건이 허락지 않는 성도나 목회자들은 매일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그들을 흠모하게 될 것이며, 그런 그들은 그렇지 못한 성도들보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듯, 영의 세계에서도 상하(上下), 우열(優劣)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動)적이어야 마땅할 기독교가 정(靜)적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며, 변질한 사례일 뿐이다. 모두 욕심을 따라 변질시킨 것이다. 우리는 돌이켜야 산다. 아직도 늦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느 특정 구절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말씀 속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하고 날마다 나의 신앙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조율(調律)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 :6-8)



아멘넷, 별똥별 / 최송연의 칼럼 글

 

 

 

알타이 산맥 끝자락 서쪽 평원 안에 위치한 ‘타쉬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한 외곽지에 우리 고려인 후손들의 농장이 많이 흩어져 있다. 오래 전, 우리는(남편 목사님과 필자) 그 농장에서 기거하는 고려인을 상대로 성경공부를 가르쳤던 적이 있고, 그때 아프가니스탄이 마주 보이는 우즈베키스탄 국경지점인 ‘침관’이란 곳을 가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곳을 가는 동안, 작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마리의 양 떼를 이끌고 풀을 먹이며 서서히 이동하는 목자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어서, 필자는 성경에서나 읽어볼 수 있는 목자와 양 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예수님 당시의 목자들은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중동지역은 우리나라의 농장들처럼 풀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산이라고는 하지만, 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완만하게 경사진듯하나 가까이 가보면 가파른 돌산이고 곳곳에 파인 자연동굴, 석회암벽으로 높은 산맥이 형성되어 있고, 그리고 평지는 바싹 메마른 광야에서 광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열악한 곳이지만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이나 땅속에 물이 저장된 곳은 그런데로 풀이 무성하기도 하다는 데, 목축업을 하는 많은 목자가 그렇게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양들을 이끌며 밤낮으로 헤매고 다니는 것이다.

때로는 험한 골짜기도 만나고 때로는 사나운 맹수를 만나는가 하면 때로는 무서운 강도 떼를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때,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채 양 떼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맹수와도 싸워야 하고 강도 떼와도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푹풍과 벼락이라고 한다. 이런 무서운 대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기 위해 목자들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 한다는 것이다.

목숨을 바꾸어서 지켜내는 목자의 사랑, 이 사랑 속에서 양은 보호받으며 지나는 동안 목자와 대단히 가까워지고 목자가 없으면 양의 생명도 없는, 글자 그대로 생명적 관계로 발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때때로 양들이 목자를 잃고 방황하다가 이리나 곰의 밥이 되기도 하고, 험한 낭떠러지나 굴 속으로 떨어져 죽기도 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토록 사랑하며 불철주야 지키는 목자가 있는데 양이 목자를 잃게 되는 것은 또 왜일까?

양이 목자를 잃게 되는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으나 첫 번째 이유는 양의 속성이 멍청하다는 데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양이 목자의 음성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대개는 앞에 있는 먹이에 마음을 너무 빼앗기는 것, 엄밀히 말해서 탐욕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목자의 탈을 쓰고 가만히 들어온 거짓 목자가 실제로 있어서 양들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배를 더 채우려 하는 것, 이것 역시 탐욕의 발로라고 보겠다. 우리는 모두(성도, 사역자) 탐욕을 버리고 참 목자이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양)가 따라야 할 참 목자의 음성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경 말씀,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인도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음성이란 또 어떤 것일까? 성령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딱딱할 수도 있지만, 성령님의 속성과 그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며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성령은 인격인가, 영향력인가?

여호와 증인들은 성령을 영향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증거하시는가? 성경은 성령 님을 지(知) 정(情) 의(意)를 온전히 갖추신 인격적 신(神)이심을 증거한다. 1. 지(知)적이시다. (고전2:11, 롬8:26-27, 고전12:8) 2. 정(情) 적이시다. (롬15:30) 3. 의(意)지적이시다. (고전12:4-11, 요16:13, 마12:31-32 ) 성령은 우리(성도)에게 끌려다니는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생이 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요 14: 26) 우리에게 일을 시키신다. (행 13: 2) 그분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요 16: 1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 롬 8: 26) 성령님은 근심하기도 하신다. (엡 4: 30)

우리가 어느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인격적인지 그렇지 않으면 비인격적인지 하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나타나는 인격 됨됨이에 따라서 우리가 그를 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최근 이곳저곳에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몇몇 신령(?)한 단체의 집회와 그 현상을 바라보면, 놀랍다 못해, 경악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와 impartation, 과연 인격적인가? 누가 보아도 그들을 주장하는 그 무엇이 있긴 한데, 그 무엇이란 것의 인격적인 면이 많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강사의 명령 한마디에 엉금엉금 기어다니기도 하고 짐승들의 소리를 내면서 울부짖기도 하고, 데굴데굴 구르며 킬킬거리기도 하고 쉴새없이 주절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좌우로 심하게 흔들기도 하고 때때로 펄쩍펄쩍 뛰면서 광기가 서린, 광(狂)춤을 추기도 한다. 이렇게 어느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성령 하나님… 인간의 눈에도 비인격적이랄 수 밖에 없는 이런 괴현상이 과연 성령님의 현현이요, 지.정.의를 온전히 구비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고, 그런 비인격 적인 모습의 실체가 성령 하나님의 인격이라면 단언하건대 나는 그런 성령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들이 주장하는 그 성령의 impartation 적 인격은 내가 보기에 심히 비인격적이며, 안타깝게도 부족하고 모자란 나의 인격보다도 더 한참 낮은 수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분별의 은사를 활용하란 것이다!! 

보혜사 (保惠師 ) 성령은 하나님이신가?

물론, 이단들, 특히, 신천지의 이만희는 자신이 보혜사(保惠師)라고 주장한다. 보혜사(保惠師)란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스승’이기에, 자신이 성도들을 도우니 선생이요, 보혜사(保惠師)란 것이며, 이에 근거하여, 구약 성경의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도 보혜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보혜사가 아니라 단순한 하나님의 대언자(messenger)로서의 족장이며 예언자일 뿐이다.

성경의 보혜사(保惠師 ) 라는 말은 변호인을 뜻하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의 번역으로서 스승이라는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보혜사(保惠師 ) 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이며 진리와 말씀의 영(요 14:26, 15:26)으로서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성령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 속에만 들어가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직접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믿는 사람들 (고전12: 3절 참조)의 마음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언제 어디서나 무시무종으로 역사 하시는 거룩한 영( Holy Spirit), 참 하나님의 영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이신 증거들: 세상이 창조될 때 성령이 계셨다. ( 창 1: 2), 하나님의 특성인 영원성(히 9:19), 편재성(시 139: 7), 생명, 새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욥 33: 4, 요 3: 5-6) 생명을 취하여 거두기도 하신다. (행 5: 1-10)

신약의 보혜사(保惠師 ) 성령님과 구약의 성령님은 동일한 신(神)이신가?

(보혜사 성령님과 구약의 성령님은 다 같은 성령님이신가? 삼위일체만큼이나 헷갈린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는데, 구원과는 다른 사건으로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는 성령세례, 두 사건이 어떻게 구분 되어지는지, ) 이 질문은 얼마 전, 우리 아멘 넷의 독자님 중 한 분이 실제로 필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우리 중에 이런 질문을 품고 계신 분들이 혹 더 계실까 하여, 참조해 보시고 도움이 되시기 바라는 마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과 필자의 답변을 여기에 올려본다.

질문 사례: 1. 보혜사 성령님과 구약의 성령님은 동일하신가? 에 대한 필자의 답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 4-6절 말씀) 구약의 성령님, 신약의 성령님, 보혜사(保惠師 ) 성령님등...그 역할과 명칭은 변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속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해도 하나, 달도 하나, 우리 자신의 몸도 하나이듯, 주님의 거룩하신 성령 님은 세기는 변해도 변하지 않으시는 한 분뿐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요, 저는 그 이상은 한 발짝도 더 나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는데, 구원과는 다른 사건으로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는 성령세례, 두 사건이 어떻게 구분 되어지는지, ) 이 부분은 상당히 까다로운 것 같지만, 아주 간단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속에 이미 내주해 계신 성령님을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그분의 충만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새롭게 다른 성령이 오셔서 충만케 된다고 오해를 하시면 위험합니다. 이것을 알아듣기 쉽에 예를 들면, 빈병이라고 보이는 것에는 빈병이 아니라 공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병에 물을 붓는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물이 들어가는 것만큼, 공기는 빠져나갑니다. 계속해서 물을 채우면 결국 공기는 하나도 없고 물로서만 가득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우리의 죄 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의 영이신 성령 님께서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가르쳐 지키게 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하는 만큼,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던 죄성은 점차 빠져나가고 주님의 영(Holy Spirit)으로 가득히 차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상 술어로는 성화(sanctification)되어 간다고 말하지요. 성화(sanctification)도 인간의 마음대로 되는 것 아니고,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그 나라에 갈 때까지, 성령님께서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 용어로는 견인이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내가 내 속에 계신 성령 님의 음성에 순종을 하면 하는 만큼, 내 속의 죄 성보다 주님의 성품이 더욱 크게 나타나게 되고 그때부터는 우리가 성령충만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직통 계시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다음은 우리 아멘넷 독자님의 또 다른 질문 사례 2: (직통 계시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언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저도 이부분에 의문과 관심이 많아 글을 쭉 읽어보니 어떨 때는 같은 의미로 어떨 때는 다른 의미로 쓰고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미리 감사합니다. )

필자의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의 글과 토론을 관심가지고 듣고 읽고 계신다고 하시니 더욱 감사 드립니다. 주님께서 친히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려봅니다.

직통 계시: 한자로 啓示, 영어로 revelation입니다. 먼저 계시의 뜻을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계(啓 열다) 시(示 보이다)의 뜻입니다. 거기에 직통이란 직접 나와 통한다란 뜻이 되겠습니다.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지금까지 숨겨졌던 비밀을 하나님께서 내게 직통으로 열어 보여주셨고, 말씀해 주셨다)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내주해 계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계시, 감추어졌던 비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경으로 완성된 신구약 66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신 업적 등이 생각나게 해 주시고 의로 교육하시고 죄를 회개케 하시고 미래에 되어질 일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요 14장 참조) 

필자의 체험을 예로 들면,
성경 속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도 전혀 몰랐는데, 기도 중에 어느 한 구절이 뜨거운 감동과 함께 떠오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 18: 18-22절 참조)

또, 어느 날은 말씀을 듣는 중, 성경말씀을 읽는 중, 또는 찬송을 부르는 중, 그 중에서 한 구절이고 두 구절이고 갑자기 그 말씀이 내 영혼에 부딪혀 오면서 뜨거운 감동으로 인하여
(24: 32절 말씀 참조) 회개면 회개, 감사면 감사가 통곡과 함께 부각 되어 오기도 하고 내 마음에 각인 되기도 합니다.

다른 이를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릴 때, 지금 자칭 예언자들이나 선지자들이 예언해주듯, 그렇게 쉽게 주절주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그 사람의 형편과 상태가 방언기도로 나오게 하시고 그 뜻이 연달아 통역되어서 나오는 경험이 있는데, 그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 내용이 들어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그 방법을 보면 십수 년 후, 가끔씩 찾아가셔서 말씀해 주셨다는 것도 기억하십시다.)

이렇게 미리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해 주신 그 말씀을 주님께서는 보혜사(保惠師 ) 성령으로서 우리 개인 교회나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신다고 (요 14: 16-17, 26절 참조) 약속하신 그대로입니다. 나에게만 직통으로 주어진다니요? 무서운 말입니다. 그래서 영분별의 은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정리해둔 검증법도 성경 속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자가 양에게 들려주는 음성,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도록 도와주시고,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나에게만 들려지는 직통 계시가 아니라,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양이 말씀과 기도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 목자의 음성을 다른 소리와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 분별하는 것이지요.

이 두 단어의 뜻이 질문 자 뿐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밝히 보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드려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론의 중심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 아래서 그 주권을 통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어야 하고, 각종 은사는 교회의 (개인 교회, 공동체 교회)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사 일변도로 나가는 성령론은 그리스도의 Lordship에 대한 순종보다는 능력 혹은 power를 강조하여 신앙질서 즉, 성령세례를 통한 거듭남과 성령열매를 통한 성품변화를 초월해 버리는 지나치게 초월주의, 혹은 신비주의 관점으로 나갈 우려가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뭔가 좀 더 잘 되고 잘 풀리기 위해서,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목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 독초가 섞인 꼴을 하나님의 말씀에다 비빔밥처럼 섞어서 먹이는 행위, 이 모든 것들은 탐욕에서 비롯된다. 믿음의 분수를 넘으려 말고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우리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 내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내 마음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도 밝고 선명하게 들려질 것이고 그런 양은 결코 목자를 잃고 헤매거나 곁길로 빠져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으리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겔 34: 1-5절 말씀)


별똥별/최송연의 아멘넷 칼럼 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아 2: 10절 말씀).” 아가서는 솔로몬 왕의 사랑노래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 노래야말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이 햇살처럼 곱제 퍼지며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영혼의 노래, 아름다운 나도향기를 발하는 샤론의 수선화 같이 고운 사랑, 우리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핏빛 사랑 노래임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듯, 필자는 아가서의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 그리스도의 그 절절한 사랑이 가슴을 파고들어 온 밤을 지새우며 감동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다.

모진 겨울은 영원하지 않다.

모진 겨울비가 그치고 언 땅이 풀리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이 어두운 역사를 끝내고 주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미한다.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야가 구속 주로써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다. 그 주님이 이제는 고난의 주가 아니라, 왕 중의 왕으로, 심판 주로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봄날같이 우리 앞에 화사하게 펼쳐질 것을 예언해 주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 또한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때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고 모질게 추운 겨울 날씨처럼 어렵고 고달픈 때가 있을 수 있다. 예기치 않던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되는 수 있고, 그런대로 잘 이끌어 가던 사업체가 한 순간의 실수로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도 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고 가족간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 고통받을 때가 있다.

우리들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격려의 음성이며, 영적 전쟁의 전투장은 그리 녹록지가 않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잃지 말고 힘써 싸우라 격려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라.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 15절 말씀)” 여기에서 포도원을 허는 여우는 과연 누구인가? 영적으로 사단을 의미한다. 이 여우는 옛날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던 낙원에 들어가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어떤 여우를 잡아야 하는가?

1. 뒤를 돌아보는 여우를 잡아내어야 한다.

여우의 습성 중 하나가 뒤를 돌아다 본다는 것이다. 여우는 앞으로 잘 가다가도 뒤를 휘딱휘딱 돌아보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장망성인 세상을 한 번 빠져나왔으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악습, 구습, 더러운 행습, 이런 것들에서 돌이켰으면, 그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키고 두 번 다시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여우가 들어온 것을 속히 잡아내지 않으면 그 여우가 나를 뒤돌아 보게끔 계속 충동질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성지 순례 길에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 사람 형상을 한 큰 소금 기둥 한 개가 세월의 풍상에 녹아내려 어슬픈 몰골에 더러운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 쓴 채, 초라한 모습으로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가련함을 보면서, 세상으로 되돌아 간 수많은 성도들이 떠올라 내 마음이 심히 어두웠던 기억이 있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의 지도하에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약속의 땅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를 들어보라. 모든 원망의 말 속에는, 그들이 방금 빠져나왔던 애굽을 뒤돌아보며 그 노예생활을 그리워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의 병폐로 떠오르는 것 역시 뒤를 돌아보는 나쁜 습성 때문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로, 한 번 빠져 나온 죄악 세상을 되돌아가고 싶도록 유도하는, 뒤를 돌아보는 여우가 내 마음속에서 자리잡지 못하도록 속히 몰아내야 앞으로 전진이 가능하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9: 62절 말씀)."

2. 유혹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여우의 또 다른 습성은 간사하고 교활한 것이다. 여우가 짐승 중에 가장 교활하고 간사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여우는 하룻밤에 열두 번도 더 변한다고 한다. 사단 마귀의 속성이 그렇다. 사단은 변신의 명수다. 사단이 나타날 때, 내가 사단이다 하고 나타나면 누가 넘어지겠는가? 뱀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용으로 변하기도 하고 광명의 천사로, 아름다운 절색 가인으로 가장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정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 한 번 재미를 본 사단은 지금도 영적인 낙원인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고 가정에 들어가서 파괴의 역사를 조장시킨다. 그는 광명한 천사로 변신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 ‘드릴라’로 변신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 거짓 능력자, 거짓 치유사역자로 변신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 가는 것이다.

삼손에게 나타난 사단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여인 ‘드릴라’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삼손은 그 유혹의 여우를 잡아내지 못해 일생을 망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건장한 남자가 두 눈을 다 뽑히고 목에 맷돌을 매달고, 두 발은 죄악을 상징하는 쇠사슬에 묶여 버렸다. 이런 슬픈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하려 함이니(고전 10: 5절).” 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다서 1: 7).”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삼으라고 경계해 주신다는 것이다.

유혹이란 것은 처음에는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고전 6: 12-20절 참조) 돈의 유혹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 10절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지만 여전히 돈을 사랑하다 믿음에서 떠나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 심하면 목숨까지 끊어 버리는 것이다.

하늘나라에도 품계(品階, rank)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권고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기에 그는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겼다. 모든 것이 거울로 주셨음은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늘나라 시민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 의지해서 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리의 의나 옳은 행실이 첨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국 시민권자들에게도 품계(品階)가 있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리라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눅19:16-19절 말씀)."
 
주님은 열 고을 권세 자와 다섯 고을 권세 자를 나누시겠다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열 고을 권세 자와 다섯 고을 권세 자가 같은 품계(rank)라 볼 수 없다.  분명,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 종의 충성 여하에 따른 품계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천사장 미가엘을 선두로 천사들이 각종 임무를 맡아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받들어 섬기듯, 우리 구원받은 백성 또한 품계(品階)가 있다고 성령께서 오늘 아침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며 전하라 명하셨다. 부활한 육체도 그 아름다움이 모두 다르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1절 말씀).” 성도들이, 심지어는 가장 올바른 자세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목사님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속에 파고들어오는 유혹의 여우를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고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이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치유사역 등등…번영신학에 물들어 그쪽 방향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예수쟁이들이 뻔뻔스럽다고 손가락질 한다. 무엇 때문인가? 오늘 죄짓고 내일 회개하고 다음 날 또 그 죄악을 여전히 짓는 파렴치함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일은 또 왜 일어나는가? 구원과 죄와 상관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때문이다.

물론, 구원 받는 조건과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자들에게도 엄연히 따르는 보상도 다르고 품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구원에도 영광스러운 구원 있고 불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도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고전 3:13-15절 참조). 이런 사실만 분명히 알면 성도가 죄와 더불어 짝하기보다 죄를 멀리 하고 그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려 할 것이다.
 
우리는 내 교회에, 내 가정에, 내 마음속에, 가만히 들어와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의 수고를 부끄럽게 만드는 저 여우를 잡아야 한다. 한순간의 유혹이 영원토록 부끄러운 수욕을 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때가 임박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읽고 바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많이 배출되도록 우리 모두 힘을 다해 중보기도 해 주어야 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단 12: 3절 말씀)." ,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 13- 15절 말씀)." (마 5:19, 마18:4, 마20:20~28, 마23:11, 눅9:48, etc)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IHOP이 있는 캔자스시티는 신사도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으로 인해 최근에 자주 거론되는 도시이다. 신사도 운동은 과거의 자유주의 신앙운동과 종교다원주의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교회에 끼치는 마귀의 운동이다.) 위의 글은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최신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IHOP에서 조용하게 하나님과 개인이 함께 하는 분위기이며 그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wholistic encounter) 영적인 만남의 장이요,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형태의 기도방(The Prayer Room, The House of Prayer)을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과 비전을 가져본다.) 이 역시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다른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 “교회내 민주주의는 반성격적, 성경으로 돌아가야," 라는 거창한 제목과 함께, 목사에게만 교회 내의 치리권도 있고 주권, 목회권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기사도 있다. 다른 한 편, 우리 게시판에는 ( “교회의 주인은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제목과 함께 평신도가 교회의, 사회적 주인이기에, 교회는 민주주의가 타당하며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인 성도들이다.) 라고 역설하는 글도 올라와 있다. 모두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한다. 극과 극, 심각한 대립현상이다. 헷갈린다.

우리의 딜레마는 이 글을 쓴 필진들이 이단의 창시자도, 그들의 교주도 아니고 모두 우리(성도)가 믿고 신뢰하며 따라야 할 소위 정통교회 목사님들이시란 데 있다. 그분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강하고 높으며 집요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더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일까?  대단히 혼란스럽다. 우리 독자들은 혼란상태에서 어제까지 믿음의 동지로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서로 등을 돌리며 “내가 보기에 이 목사님의 말씀이 더 옳다. 다른 목사님을 지지하는 네가 틀렸다.” 서로 손가락질하며 다투기도 하는 가슴아픈 헤프닝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성경을 두고 무엇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함께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자신의 신앙에 발란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고,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말씀이 주는 참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견을 먼저 뼈대로 세워놓고, 그 주견에 맞은 말씀 성구만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인용하는, 이헌령비헌령(耳懸鈴鼻懸鈴),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의 주견을 앞세우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둘 때 내 신앙에 무리가 오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며 총체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발란스가 필요한 부분과 그 해법
신앙의 발란스라고 하면, 넓게는 구원론에서부터 신론, 기도론까지 다양하고 복잡하겠으나, 아쉬운대로 좁은 의미로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발란스는 어떤 것인가, 정립을 해보면,

a) 신사도 운동은 과연 성경적인가?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란 그리스 원어의 뜻이 있다. 그렇다면, 보내는 자가 계시고, 보내시는 목적이 분명 있고서야 보냄을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다. 사도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분은 그분(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엡 4: 11절 참조), 보내신 목적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는 붓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초대 교회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도 희귀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한데 묶어져 있지않은 때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 줄 사도들이 필요했었고, 이를 위해 주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친히 불러 사도로 세우셨고 그들,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벧후 1:20절 참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완성된 정경 신구약 66권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따로 직통계시로 받아 우리에게 전해줄 사도(Apostle)직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22:18-19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말씀 외에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되었기에, 그 대답은 분명 “No!”이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이 친히 우리들 속에 임재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데, 그런 우리에게 따로 선지자나 예언자가 특별히 필요한가? 그것도 역시 대답은, “ No!” 이다.
 
b)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교회의 주인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두 주님이 주인이시다. 주인 = "주"(Lord)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 헬라어로는 "큐리오스" 즉 "주인, 상전"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Lord 이 역시 주 종과의 관계성에서 상전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지는 뜻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로서 기능과 신권정치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개인 교회건, 가시적 교회건 비가시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건) 그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인’이란 단어보다는 '청지기'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용어가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성도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서 마저 그분의 설 자리가 없고 통치권이 박탈당한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되겠는가?

(주인의 것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종) 이것이 우리, 목회자건, 직분자건, 평신도이건...성도가 주님의 몸을 섬기는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런 자세가 바로 발란스 잡힌 신앙인의 태도라고 본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

c)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마귀의 장난을 분별하는 방법

아래는 오래 전, 작자 미상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이웃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 도움을 받고 참조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롭게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비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던 크리스천들도 마귀들의 장난이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처럼 작용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장난을 성령님의 인도처럼 착각하여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런 실수의 대부분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는 마귀의 장난과 매우 다르다."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와 마귀의 장난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 인간을 미워한다! 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빌2:13)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한 통제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한다.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면, 너무나 온화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어떤 것이 성령님이고 어떤 것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나 마귀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늘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마귀들이 자신들의 잠재의식 일부의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위의 진술은 사실이다.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제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들이다. 새 시대 운동에 속한 죄의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 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며, 또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찬미하도록 한다. 교만은 마귀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10:5)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빌2:13)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능력이 크시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우리의 의식을 누르시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지만 이 때에도 깨끗하고 질서 있게 행하신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되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 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능동적이며 강력한 의식을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시키도록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고 변경하여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준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실 때, 우리를 고치시거나 통찰력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같은 일을 두 번 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틀에 박힌 일이나 혹은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습 방언과 같이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뒤 이 마귀들은 그 사람이 부를 때마다 와서 그 사람이 원할 때 치료하는 일 을 행하곤 한다. 또한 마귀들은 의식과 예식 등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영계를 많이 보여준다. 성령님의 은사를 마귀가 모방 할 때 그는 대개 이 일을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통제하에서 수행한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병 고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 을 갖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통제를 받아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이나 감정의 치솟음 등과 같은 일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계를 보여주시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병을 고칠 수 없으며, 방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단지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아뢸 뿐이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빈번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계를 보게 하며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자주 환상을 보거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우리도 의도적으로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 그분께서는 단지 조용히 뒤로 물러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형극에서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이나 로보트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밥티스마(침례)를 받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즉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 불변하며, 단지 그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즐겁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너무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에는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재빨리 징계한다. 그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으려고 힘쓰며 그것을 점령하고 통제하기에 민첩하다. 마귀들은 인형이나 로보트들을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 앞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파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한 죄값을 친히 지불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릴 것을 요구해 왔으며, 자기들을 위해서그들이 정화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피흘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성도들을 향해 마귀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신자들 스스로 부과한 모든 종류의 얽어매는 규례와 엄격한 형식에 따른 율법 조항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경우에도 마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처럼 꾸며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마귀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준수 등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거짓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항상 위기의식이나 죄의식 등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벧전 3:18)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요 14:26) 반면에 마귀들은 혼란을 가져와서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도들의 모든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자랑하길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 거짓말쟁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배우는데 능동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정보 은행으로서 봉사하길 원치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보 은행이 되어 주며, 그 결과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의지대로 정보나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기도만 하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점 같은 것은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기도, 축복성회 등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영어도 유창하게 하고 대학생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경우의 대부분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경우이다. 하나남께서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아이로 태어나 지식이 자라고 영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동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커서 잘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마귀가 떠나면, 그 아이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며, 더 이상 정보나 지식 창고로 존재하던 마귀가 없으므로 그 아이는 사회의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능동적인 의식과 자신의 뜻이 연합되어 우리 가운데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쉽게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점쟁이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예견력을 주시지 않는다.(마6:34) 반면에 마귀들의 가장 일반적인 속임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간단한 예견에 불과한 "거짓 지식의 말들"을 주는 것이다. 마귀들은 또한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한 많은 개인적인 "예언들"을 말해 준다. 성경의 예언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학 진학,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 등을 위해 소위 용하다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처럼 보이나, 사실 이들은 대부분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어서도 안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용 해석을 하려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부분적으로 치우치게되면 극단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이단사설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로 간구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앙 생활의 발란스를 유지하도록 힘쓰자!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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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인터넷 상에 올라온 글들과 필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 아멘넷 독자님들도 주의를 요망하는 사건들이 계속이어지기에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러 독자님들은 읽어보시고 믿음에 굳건히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1. 이단들은 기성 교회, 기독싸이트에 파고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보다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말씀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들은 이단들의 목표물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짜가 어느 쪽인지 확인해 보자며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고른 성경 구절을 가지고 달려들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이단들 중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곳은 신천지입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신천지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며 기성 교인들 중에 신천지로 넘어간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천지는 처음에 무료성경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으로 많은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체계적으로 성경을 배우지 못해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무료성경공부로 끌어들인 신천지는 모여든 사람들을 미혹하여 신천지 교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신천지의 기성 교회 침투 작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동영상의 공개로 유명해진 “산 옮기기 작전”은 작은 교회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전략인데, 교회에 신천지 교인이 파고들고 세력을 확보한 후 담임 목회자를 쫓아내고 신천지쪽 사람을 리더로 세워 교회를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얼마나 소름끼치는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교회들에서는 새신자들이 오는 것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가워할 수만도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새신자가 온 것이 아니라 신천지에서 목적을 가지고 찾아들어온 사람들도 있을 수 있기에 경계의 눈초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신천지의 활동은 이제 인터넷을 향해서까지 그 활동폭이 넓혀지고 있습니다. 여러 토론방에서 신천지 교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 속에는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의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들은 조선일보 토론마당에 올라 있는 신천지 쪽의 글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 잘 담겨 있습니다.

신천지에서 올린 글의 제목은 “신천지, 칼빈교와 예수교와의 비교”입니다. 그 글에서는 신천지와 기성 교회 가운데 어느 것이 이단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나온 예수교는 가톨릭교이고 가톨릭에서 칼빈교를 이단이라 규정한 이유는 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절대 예정론을 믿지 않는 자와 칼빈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을 이용하여 장로교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 글에는 또한 칼빈이 세운 장로교가 칼빈같이 자기 교리와 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또 개종하지 않는다 하여 성도를 정신병원에 감금하였으며, 심지어 가족으로 하여금 성도를 때려죽이게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로교는 이방 신에게 절했던 솔로몬같이 일정(日政) 때 이방 신(일본의 천황 신)에게 절한 후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장로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며 장로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고신파가 그것을 증거해 준다고 하는 대목까지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기성교회, 특히 장로교를 비판하는 내용의 주장을 하다가 결국 신천지만이 정통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말세에 정통은 없으며, 있다면 계시록에 약속한 대로 다시 창조된 신천지예수교의 12지파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성경을 통달하고 육하원칙에 의해 증거하는 계시 신학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부인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그 뜻대로 창조되지 못한 자는 정통(正統)이 아니며 전통(傳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 글을 시작하면서 이단 소리를 듣는 신천지에서 어느 쪽이 이단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오직 성경이라고 하더니 그 성경에 의하면 기성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단들이 하늘이 정한 12지파를 이단이라 하나, 신천지 12지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경적 정통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다음의 내용입니다. “성경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신천지예수교를 이단이라고 하는 자마다 이단이며, 성경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곳에서는 교묘하게 빼놓고 있지만 신천지에서 주장하는 모든 내용의 최정점엔 신천지의 교주인 이만희씨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상홍증인회에서 안상홍씨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최근에 접한 신천지 교인 하나는 이만희씨가 죽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만희씨도 죽을 것이라고, 나이가 워낙 많아서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나보다 빨리 죽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길길이 뛰면서 화를 냈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속이는 이단이 오히려 기성교회를 이단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합니다. 각 가정을 방문하거나 기성교회로 파고드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인터넷 공간마저 교회를 허물고 이단 사상을 전파하고 있으니 신천지의 열정에 소름이 끼치기도 합니다.

필자는 지난 번, 그들 중 몇 사람과 일대일의 대담을 가지는 동안, 정작 그 자신은 지식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했으며, 사실, 왠만하면 다 알 수 있는 '개론'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더 이상의 자기 변론이 없었다면, 그는 개인의 갈등을 표출한 한 사람의 순수한 성도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필자는 그의 다음 행보를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된 것입니다.

예견한 대로, 다음 날 아침, 그가 다시 올린 글의 수준은 여전히 다른 댓글들과 같은 내용으로서,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를 총 망라해 설렵한 듯. 어느 신학박사의 개론도 그만큼 화려하기 어려울 것 같은 내용과 상당히 높은 지식을 소유한 자만이 설파할 수 있는 수준의 글, 역사에서부터 과학까지...대단한 미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가만히 분석해 보니까, 다른 곳에 단 댓글과 거의 같은 내용, 흡사한 내용을 마치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올리는 모든 글, 댓글과 게시판의 글들은, 곧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개인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식인들을 타겟으로 작성된 고도의 전도용 문구일 뿐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신천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등 비교를 하면서 자신이 새롭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2. 그들, 교회에 시험든 길잃은 양으로 가장한 신천지 요원의 공략 목표:

a.기존교회와 목회자를 신랄하게 비난함
b. 기독교의 방언관 구원관이 틀렸다고 주장함
c. 예수님의 피공로를 흐리게 함
d. 유대교에서 나온 예수교는 가톨릭교이고 가톨릭에서 칼빈교를 이단이라 규정한 이유는 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절대 예정론을 믿지 않는 자와 칼빈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을 이용하여 장로교나 모든 기성교회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3. 다음은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중요합니다.(골1:18절)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써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토록 존귀한 주님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그 어떤 말을 할지라도 양의 탈을 쓴 이리요, 고뇌하는 지성인척 가장하는 야누스임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시대임을 깨닫고 기도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들지 않도록 철저한 말씀 훈련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 속에 이단들이 파고들 여지를 만들지 않도록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터넷 분야를 이단들이 장악하지 못하도록 대비하는 일도 필요할 것입니다. 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엉뚱한 곳에서 소모전을 펼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 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2 년여 간의 댓글들을 유추해 볼 때 신천지의 요원이 우리 아멘넷에도 집중적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음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요즘 들어 고뇌하는 지성인, 교회에 시험이 들어서 탈퇴한 지성인의 대표인듯, 이곳저곳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열심을 내던 그들과 유사한 댓글객들의 수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은 불쌍히 여겨야 하지만, 교회를 헤치고 성도들의 영혼을 유린하기 위해 가만히 들어온 야누스의 얼굴을 결코 관망만 해서도 용납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1요 4: 1-2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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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모님, 목사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오랜만에 한국 반찬 가게를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이웃교회 사모님을 만나게 된 필자는 그분의 남편 목사님께서 간암 말기란 소문을 얼마 전에 들었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어 보았던 것이 화근이다. “우리 목사님 다 나았어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염려 할 것 있나요?”무슨 그런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듯, 질책하는 눈빛으로 짧게 바라보시더니 휭하니 돌아서서 어느새 저만치 가버리신다.

‘아차,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것인가? 남편 목사님께서 병든 것, 그리고 그 병이 낫지 않는 것과 하나님 살아계신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만약, 저러시다가 남편 목사님의 병이 영영히 낫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되는 걸까?’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그후로 그분을 같은 가게에서 두어 번 더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분께 남편 목사님의 건강을 물어볼 수가 없어서 진열장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기듯 피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달 후, 안타깝게도 그 목사님은 오 십대 중반의 한참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소(서재생 목사님의 말씀) 하셨다.

어디 그 사모님 뿐이랴. “믿습니다! 믿습니다!” 휘황찬란한 조명등이 현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꽃장식으로 화려한 (저런 돈 아껴서 선교사들이나 밀어주면 좀 좋을까, 믿음이 없는(?) 나는 궁시렁거리며 둘러보느라 은혜도 안 된다.) 무대처럼 꾸민 강대상 위에서 쇳소리가 섞인 듯한 음성으로 강사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질러대는 괴성, 거기에 맞추어 “믿습니다! 믿습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성도들, 은사 집회란 곳이나 혹은 무슨무슨 부흥집회란 곳을 한 번 참석해 보면 믿음(faith, belief)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자못 희한하기 그지없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주문(?)외우듯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자기 암시 내지 자기 신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믿음(faith)의 정의부터 한 번 생각해 보자.

위키백과 사전에서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철학,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념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신앙, 신심, 신앙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믿음과 신념의 차이를 명확히 분류해 두지 않았다.

성경은 믿음(faith)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절 말씀)” 즉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자기가 소원(바라는) 하는 것들이 어느 시간에 실제적인 형태(실상)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리고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자기 신념과 별반 다를 것 없어보인다. 그러나 믿음과 자기 신념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여러 부분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믿음(faith, belief)은 자기신념이 결코 아니다.

믿음(faith)의 대상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철과 지식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세와 부를 믿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믿고 의지하다가 배신을 당해 가슴 아파한다. 우리 아멘넷 토론방에서 한참 치열하게 논의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담임 목사의 말을 믿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더란 것이고,이런 것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너무 상처가 되어서 자칫 교회를 등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한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언어)이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말씀 하신 것일까?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인생을 살아갈 수록 그말이 더욱 절감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권력과 명예를 믿고, 돈을 믿고, 자기의 인기를 믿었지만 그 믿음이 자기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이끌어 넣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인생인 것을…, 안타깝다못해 가슴이 저민다.

우리가 진정 믿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5)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했을 때,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어야 한다. ( 히 13:8절 참조)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믿음 (faith)의 근간(根幹)

믿음의 근간(根幹)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감정의 변화나 오래 교회에 다닌 역사나 또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도중 유라굴로라고 하는 태풍을 만나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고 모두 크게 두려워서 떨고있을 때,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25절)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른 믿음의 근간(根幹)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아니요, 성경지식이 많은 신학자도 아니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란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는다, 하는 것이고, 따라서 행동에 옮기기 전,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로고스(Logos) 혹은 레마(Rhema))을 먼저 받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이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창 12:1절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인간으로서는 최초, 최말로 물 위를 걸은 위대한 사람, 베드로 역시 물 속에 혼자서 마음대로 뛰어든 것이 아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주께 먼저 간구했고,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되." ( 마 14: 28-29절 말씀)  모든 믿음의 근간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과 선택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란 것을 인지하고 그 말씀에 동의해야 한다. 믿음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10:17)

결론적으로 믿음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임이 틀림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그분이 허락하시는 때에, 내 앞에 실상(현상)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자기 신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하여 내 몸에 병이 들지 말라는 법 없다. 그리고 내가 병들었을 때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해주시는 은혜를 입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병에서 놓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불러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런고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치유 은사 사역자도 아니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소리질러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들뜨게 하는 유명 부흥강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Logos, Rhema) 약속한 바 없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병을 낫게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강렬한 입술의 선포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 암시적이며 자기 신념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일 뿐 참 믿음이 아니다.

믿음(faith, belief)이란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주권과 섭리하심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내가 살던지 죽던지 그분께 영광 돌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evidence)인 것이다! 고로, 신념은 인간 스스로의 정의이며, 믿음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이고 소유이며 은혜라 정의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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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픈 형 '에서"를 붉은 죽(팥죽?) 한 그릇으로 유혹하여 그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노안으로 앞을 잘 보지못하는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권을 가로챈 야곱, 그것 때문에 화가 난 형 ‘에서’를 피해 멀리 밧단아람에서 살고 있다는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야곱은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황량한 벌판을 지나게 되었고, 상거는 먼데,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을 광야에서 맞게 된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 리브가가 새벽부터 일어나 손수 만들어 보따리에 넣어준 말랑거리던 빵도 저녁이 되니 딱딱하게 굳어 쇠심줄 같았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다. 딱딱한 빵을 한 입 깨물어 먹은 야곱은 두리번거리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돌 하나를 주워 그것으로 베게 삼아 캄캄하고 황량한 벌판에 혼자 덩그러니 누웠자니,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을 것이다.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던 때가 그립고 눈은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 이삭의 푸근한 부정(父情)도 그리웠을 것이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들려오는 들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깜박 잠이 들었고, 한 놀라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거대한 사닥다리가 놓인 것과 그 사닥다리를 타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닥다리가 닿은 하늘 끝에는 하나님께서 서 계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의 음성마저 들려주셨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지금껏 우리가 익히 들어오던 성경 이야기이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목사님은 여기서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가 헤아리기보다는 '야곱의 십일조 서원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연결짓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오늘 아침, 성경을 읽어나가던 중, 십일조보다 더 큰 영적 의미가 이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셨기에,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 그리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주는 참된 의미를 기존 생각과는 약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접근해 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권을 볼 수 있다.

야곱이 광야에서 잠이 들었을 때 찾아와 주신 하나님이셨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셨고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 아니고 내가 선하게 행동해서 구원받는 것 아니고 내가 구원받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요, 주권적 선택하심으로 받은 축복이란 것이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 13) 야곱이 장자 권을 갈구한 것을 의로 여긴 것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내가 구원받도록 선택되어진 것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2.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표상이요, 예표다.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는 사닥다리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창 28:12절) 무슨 뜻인가? 야곱이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유일한 길, 그 길은 오직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 뿐이란 것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사닥다리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죄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 죄인된 내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나와 하나님 사이에 사닥다리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 16) 구원의 길이란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자, 그러면, 어느 목사님의 글에서 말하고 있는 바위목회라고 했는가? 본처목회라고 했던가? 그 본처라고 대명 된 천주교회의 구원론(救援論)은 어떤 것인가? 우리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총의 사닥다리

어머니
당신의 이름은 사닥다리
하느님과 인간을 오르내리는
은총의 사닥다리입니다

저희의 기도가 당신을 통해
하느님께 닿고
하느님의 은총이 당신을 통해
저희에게 전해지오니
당신은 사랑의 사닥다리입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당신의 응답은
강생의 신비를 열었던 문이었고
구원의 샘이 되었습니다

이 기도문은 어느 신부님의 기도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 천주교회의 구속주가 과연 누구인가? 하늘과 땅을 잇는 은총의 사닥다리를 누구로 표현하고 있는가? 마리아이다. 우리가 이런 종교를 한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요즘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우리 개혁교 안에서도 부쩍 높아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들은 "현 세상에 종교는 하나가 아니고 다수이며, 절대 종교는 있을 수 없으니 각 종교의 우열을 논하지 말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인정하고 서로 보완 협력 조화하여 평화를 이루어 반목하지 말고 인류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는 기치 하에 국내외의 목사, 신학교 교수 등이 반성경적인 다양한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독일 뮌헨대의 신학자인 'Wolthart Pannenberg'교수의 "성경과 코란 이해가 기독교, 이슬람교의 화해의 첫걸음이다." 라고 하는 황당한 발언을 지지하는 파가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이란 것을 아는가?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의 주장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이성적이요, 합리적일 수 있다는 데 있다. 더우기 휴메니테리안 성격을 띄고 있기에 상당수의 지성인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첫째: 그들은, 신,구약 성경만이 참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시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성경이나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각기 다양한 특징을 가진 동일한 권위의 종교서적으로 보고 있다. 성경이나 불경이나 코란이나 모두 문화와 역사의 산물로서 각기 다른 문화, 각기 다른 역사 속에서 다르게 진화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가치는 서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후 1:24-2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둘째, 그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정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특징은 각 종교의 우상 신들과 성경의 하나님을 동일한 신으로 보고 있다는데 있다. 이 같은 그들의 생각과 주장은 결국 성경의 절대지존자 하나님을 우상종교의 우상 신들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며 다신(多神), 혹은 범신론적 주장인 것이다. .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한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영국 종교철학자, 신학자 John Hick교수) "각 종교의 숭배대상으로서의 신적 대상은 한 신의 다른 표현이다."(John Hick)

그러나 성경은 결코 다신(多神), 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사 45:5)."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 12:29)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낫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전 8:4-6)

셋째, 그들은 우상종교나 우상 숭배자들을 인정하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

"유일신(Monotheism)"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신이란 모든 것을 통섭하고 근원 지우는 존재를 말한다. 여호와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한 신의 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로고스(Logos), 법(法), 도(道), 이(理)는 모두 진리를 가리키는 용어들로 문화권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 중 로고스만이 옳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한국H 신학대 K교수)

하나님은 우상종교, 우상, 우상숭배자들의 집단으로 규정하시고 회개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책망하시고 심판하셨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 자들은 이런 우상숭배 자들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타협하고 심지어 칭찬도 아끼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런 행위는 우상종교, 우상, 우상숭배자들을 인정하는 극악한 죄악을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후 6: 15절 참조) 다르게 말하면, 이들(에큐메니즘)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자신들이 바로 고치겠다는 것으로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오르려고 하는 사악한 행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바벨탑 숭배자들과도 같다.

넷째,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십계명을 부정하는 행위다.

"나는 오직 구원의 길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제일 분노를 느낀다."(미국 유니온 신학대학, J교수. 여성해방신학자)

"구세주가 우주적이고 온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신의 보편적인 구원의 경륜으로서 예수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인 것이 아니다. 타종교도 저들 스스로의 구속과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한국K대 신학대 B교수)

그들이 우상종교의 실체를 인정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종교와 가치가 있는 동일한 종교라 하면서 그들의 우상교리를 인정하는 행위는 결국 십계명, 일계명과 이계명 삼계명을 부정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다섯째,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부정하는 행위다.

"종교간의 대화는 우리 시대의 분명한 요청이다. 역사적으로 선교와 개종작업에 적극적이었던 기독교도 이제 종교간의 대화를 선교의 새로운 형태로서 고려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독일 뮌헨대 Wolthart Pannenberg교수, 신학자) 있다."(독일 뮌헨대 Wolthart Pannenberg교수, 신학자) (위 다섯 가지 소대지 참조: 커뮤니티 게시판)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그들(다원주의 자들)중 얼마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타 우상종교에도 다른 여러 메사야들이 있고 예수는 그 중에 한 메시야라고 뜻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들은 오직 예수님 만이 메시야라는 성경의 근본 진리를 부정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처, 공자와 동일시하거나 인간 중에서 제일 완전하고 선한 인간으로 주장하므로 결국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 아닌 예수님을 말하여 간교한 수법으로 예수님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극악한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말이나 글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사 45:5)."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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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따뜻한 물에 한 숟가락씩 꿀과 함께 타서 마시고, 밥맛 없다고 굶지 말고 그럴 땐 매실 장아찌를 참기름 듬뿍 넣은 양념 고추장에 무치고 밥은 물에 말아서라도 자주 좀 떠 먹어 보도록 하렴, 젊은 사람의 얼굴색이 그래서야 어디 쓰겠느냐…?”

대문을 막 나서려고 하는데, 어느새 준비해 둔 것인지, 무거워서 들고가기 싫다고 하는 나의 가방을 억지로 열고 손수 정성껏 담가 두었던 매실 장아찌와 매실 엑기스를 옷가지 사이에다 끼워 넣으며 언니는 사랑이 담뿍 담긴 고운 눈을 살짝 흘기듯 웃어 주십니다.

매실 장아찌, 비빔밥만큼이나 그리운 어머님의 또 다른 손맛입니다 …. 어릴 적, 내 고향 집 뒤뜰에는 어머님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먼 산등성이엔 하얀 눈이 아직도 덮여 있는 이른 봄이면, 북풍한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운다고 해서 설중매(雪中梅)라 불리기도 하고, 어떤 어려움도 이기고 견디어 낸다는 절개로 비유되기도 하는 그 매화나무에 새하얀 꽃이 피기 시작해서 3월 중순이면 만개와 함께 세차게 불어 젖히는 시샘 꽃바람에 흔들리며 서서히 낙화하기 시작합니다. 어스름 달빛에 하얀 꽃잎이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창가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유도 없이 가슴이 사르르 아파오면서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던 소녀적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매화꽃이 떨어지고 나면, 그제야 파릇파릇 돋아나는 잎사귀 사이로 어느 틈엔가 대추씨 같은 매실이 조롱조롱 매달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월 중순∼7월 초순경이면 매실 과육이 단단하며 가장 질이 좋은 상품이라시며 해마다 그때쯤이면 청매(靑梅)를 따서 매실 장아찌를 담구시느라 어머니의 손길이 더욱 바빠지십니다.

잘 익은 청매(靑梅)를 흠집 없는 것으로 골라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빼고 소금물에 폭 잠기도록 담가 하룻밤을 재운 후, 아침에 눈이 뜨이는 대로 소금물에 재어두었던 청매(靑梅)를 건져 햇볕이 잘 드는 장독대 위에 고운 대를 깔고 쭉 늘어놓고 한 사나흘 동안, 이리저리 뒤적여 주며 바싹 말립니다. 화사한 여름 햇살에 꼬들거리며 잘 마른 매실을, 다시 깨끗한 수건으로 잘 닦아 고추장 항아리에 쑥쑥 박아 약 한 달가량 익히면 맛도 좋고 건강에도 그만이라는 매실 장아찌가 숙성되는 것입니다.

잘 익은 매실 장아찌를 꺼내어 씨를 빼고 그릇에 담아 놓고, 거기다 고추장, 파, 마늘,설탕,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뿍 넣어 조물조물 무쳐서 상에 올려놓습니다. 매실 장아찌가 상에 올라오는 날이면, 그 새콤달콤한 맛이 얼마나 개운한지 나도 그날만은 내 앞에 놓여진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어치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매화꽃이 피고 떨어지고 청매가 알알이 익어갈 즈음이면, 더욱 그리워지는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계시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고향 집은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는 듯했고, 뒤뜰의 매화나무도 벌써 잘리워졌다는 소식이 들린 후로 나는 고향집을 두 번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선교사인 우리는 열악한 환경의 제 삼국을 이곳저곳 해매고 다니노라면, 마음은 보람되고 기쁘지만, 몸이 약한탓에 금세 지치고 허약해져 나는 때때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울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싸늘한 냉기마저 감도는 고향 집을 찾는 대신, 나는 서울에 계신 언니를 찾아갑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손맛을 쏙 빼닮은 언니가 집에서 열린 매실은 아닐지라도 제철이면 청매실 홍매실을 구해서 어머님처럼 장아찌도 담그고 매실 액기스도 만들어 두었다가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찾아가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면서, 조금이나마 어머님의 손맛을 느끼게 해주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아부어 주시는 언니의 극진한 사랑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빵만 먹고 살 수 없는 존재란 말이 맞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침대 위에서 편히 누워 잠을 잔다고 하여도 그것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신 적임과 동시에 정신 적인 존재이기에 정신 적으로 만족을 누려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쉬운 예로, 개나 소, 돼지 같은 짐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짐승들은 먹을 것만 주면 그릇이야 깨어졌든지 더럽든지 정성이 있든지 없든지 그런 것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찌그러지고 깨어진 더러운 그릇에 먹을 것을 담아 발길로 툭! 차서 밀어주면 그저 만족하다고 꼬리를 흔들면서 좋아라 먹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먹을 것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하여도 인간 대접을 해주지 않거나 사랑이 없는 음식을 주면 아주 기분나빠 합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밥은 먹지않겠다, 고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가정은 한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리라 (창 2: 27-28절 ).” 이 말씀은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자 하셨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에덴 동산에 있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며 만물을 다스리는 삶, 바로 천국의 모형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맺게 되는 관계도 역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이라고 하는 보금자리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란 원래 가정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사는 내 가정이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내 이웃, 내 가정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새 계명이요, 인간이 원래 창조된 목적에 부응하는 길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 사랑의 진수입니다.

현대는 너무 많은 가정이 이유도 아닌 이유들로 깨어지고 갈라집니다. 이방인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도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가정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데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흔히들 말하는 그런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감상적이며, 표면적인 감정의 유희는 더더욱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 헌신과 자기희생이 요구됩니다.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너를 위해 내가 소멸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가정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모두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줌 같이 그리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엡 5:1-2절 참조.)

겨울 된서리, 폭풍 한설에도 꿋꿋한 절개로 견뎌내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햇살 가득한 오월이면, 청매(靑梅)가 알알이 영글어가듯, 환난 풍파 모진 된서리 쉬지 않고 몰아쳐도 꿋꿋한 절개를 지켜나가는 너와 나의 사랑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햇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알알이 영글어 가는 축복을 받아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엡 5: 24-25, 요1서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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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가면 좀 늦을 것 같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시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온 종일 병원 심방을 다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으려니까 너무 피곤한 탓인지 밥이 모래알을 씹는 듯 입 안에서 뱅글거리는 것이 영 넘어가지를 않는다.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 숟갈을 놓고, 대충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서, 따끈한 녹차 한 잔을 끓여 손에 들고 잠시 쉬기라도 할 겸, 소파에 앉아 아무런 생각도 없이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나는 그만 화들짝 놀라 숨이 멎는듯했다.

백령도 천안함의 실종자를 구출하려다 순직한 한주호 준위 부인의 오열하는 모습, 실종자 가족들의 울부짖는 안타까운 모습, 모든 것을 집어삼켜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집채만큼 큰 파도가 마치 머리를 산발한 유령들이 흐느적거리듯 시커멓게 곤두서서 출렁대는 물결이 구조선의 조명을 받아 화면 한가득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애쓰다 결국 자신도 함께 그렇게 가고 만 것인가? 그렇다면, 실종자들은 지금 저렇게 거센 파도 속 어딘가에 고립되어 사투를 벌리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춥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나님, 왜입니까? 왜 나여야 하며, 왜 하필 우리 가족이어야 합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당황하게 되며 절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의 일 같지가 않고 가슴이 아려서 더 이상 현미 녹차의 구수한 향을 즐길 마음마저 사라져버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슬그머니 탁자 위에 내려놓고 말초신경마저 곤두세운 채 웅크리고 앉아, 뉴스 앵커의 해설을 듣느라 화면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백령도 서남쪽 1마일(1.6km)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하였다. 원인은 여러 가지 설만 있을 뿐 불확실한 상태이며, 승조원 104명 중 구조자는 58명, 사망자는 1명, 실종자는 45명이라고 했다. 실종자 가족들의 애타는 소원과 온 국민의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실종자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리고 있다니 더욱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살다 무엇 때문에 갔는가? 그들은 자신을 낳아준 조국과 사랑하는 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살다가 장렬하게 순직한 것이다. 아직 한창 일할 젊은 나이인데…정말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과 동족의 안전을 위해 대신 죽은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반대로 위클리 지구촌 리포터의 말을 빌리면 파키스탄에서는 이제 겨우 열 살을 갓 넘긴 어린이들이 마구잡이로 살인폭탄 테러에 동원되고 있다고 한다. 탈레반이 검문을 피하기 위해 어린이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파키스탄 북서부에 위치한 탈레반의 자살폭탄 테러범 훈련소 벽에는 천국을 묘사한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하게 꾸며두었다고 한다. 몇 푼의 돈을 부모에게 건네주는 조건으로 팔려온 이 아이들을 탈레반 전문가들이 맡아서 훈련시킨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이란 쓰레기일 뿐이며 알라를 위해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얘기하여 순교정신을 고취시키고 또 그들 탈레반은 천국엔 우유, 꿀 등 먹을거리가 가득하다며 매일 같이 아이들을 세뇌교육시킨다고 한다. 평소 가난과 허기에 시달려 온 아이들은 그런 말에 금세 현혹되는 것이다. 자살폭탄 테러가 되기에는 아직 너무도 어린 알리란 소년이 잡혀서 남긴 말이 듣는 이의 가슴을 찌른다. "신께서는 어째서 자살 폭탄 테러를 권장하시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끝없는 분쟁과 가난으로 하루 한 끼를 잇기 어려운 어린이들, 공짜로 밥 먹여주고 천국 보내준다는 말이 달콤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알라를 위하여 살다가 알라를 위해서 죽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살 테러범들의 최고 목표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인간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인지, 그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이토록 맹목적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나의 생명, 누구를 위해 바칠 것인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하며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맡은 사역자들이라면 더욱더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역자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일해야 한다. 특히, 부름을 받은 사역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역자는 행동하기 전, 먼저 본인의 삶 속에 사랑의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내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가?” 확실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에만 집착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남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 마음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와, 충만함, 그리고 참사람, 그리스도의 피로 회복된 전인적 인격을 갖춘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복음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동역 자들, 부교역자나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나는 거룩하고 나는 신령하고 내가 가장 많이 알고…등등의 자고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는가? 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역이란 말인가? 사역이 우상화된 사례라고 보겠다.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 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보고 우리들의 사역자세도 재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감당하신 사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 함이 아니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혈기를 죽여야 한다, 교만을 죽여야 한다, 정욕을 죽여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정신없이 뛰고 있는가? 일의 동기 가치를 부여하라(value entitlement), 목적에 가치를 부여하라, 발걸음(행보)에 가치를 부여하라, 삶의 가치를, 죽음의 가치를 부여하라.

우리는 심지 않은 것, 거두어 들이는 일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심은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 생명을 거두어 들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종일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지 않은 생명을 주와 함께 거두어 들이는 기쁨을 누리는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육신대로, 정욕대로 살겠다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지금 열심 내고 있는 그 일 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이 빠졌다면 문제다. 그런 사람이나,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역, 역시, 자살폭탄 테러범만큼이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며,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그야말로 일말의 가치조차도 없는 하찮은 일에 목숨 거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병기로 사용되게 원수에게 내어주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일, 그리스도의 일꾼,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도록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느냐.”그날 저녁,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듯 울려오는 성령님의 음성을 나는 들었던 것이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 4:36-37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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