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은 없다

 

내가 태어난 모국에서보다 오래 살았던 , 그래서 2 고향이라고 있는 하와이는 사면이 바다인 탓에 싱그러운 해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여름, 바깥 기온이 상승하고 내리쬐는 강한 햇볕으로 땀을 줄줄 흘리다가도 일단 손바닥만 하게 작은 공간일지라도 그늘진 곳에나 혹은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너무 시원하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금세 가셔버리는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더운 여름이어도 우리는 밤낮으로 창문을 열어 놓고 지냈으며 바다에서부터 산을 타고 흘러내려 오는 바람, 시원함 때문에 1 12 에어 컨디션을 켜본 없이 30 년간을 지냈다.  물론 그런데도 여전히 에어 컨디션을 켜고 사시는 분도 많이 있었지만, 우리는 자연 바람이 좋았기 때문에 그랬다.

 

더운 지역에서 더운지 모르고 지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원한 바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는 우거져 푸르건만 나무들마저 찜통더위를 견디기 힘들어 모두 졸고 있는 , 한여름 햇살은 쨍쨍 내리쬐는데 바람마저 없으니 숨이 턱에 닿고 여간 고통스러운 아니다. 다행히 집집이 센트럴 에어 컨디션이 있어서 바람을 대신하긴 하는데, 나는 에어 컨디션 바람이 지금도 별로다.

 

시원한 자연 바람이 없는 대신, 에어 컨디션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여름을 견디는 사람들, 이런 것을 대안에 만족하는 삶이라고 해야 하겠지. 어찌 생각해 보면  세상은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대안이 있는 사람이 살아갈 있고 문제가 있을 대안을 찾는 것은 그리 나쁘다고 수만은 없다. 그래서 각종 분야의 모든 것에 대안을 찾느라 고심하는 과학자들, 공학자들, 그리고 많은 분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기 때문에 삶의 질이 조금은 향상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대안은 어디까지나 대안일 , 대안이란 것이 본질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엄밀히 말해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부자들의 착취 아래 고통당하는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제 아래 혁명을 일으켰던 스탈린과 추종세력들, 결과는 참혹하다. 

 

기독교 역시 대안은 없다. 지금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내가 하나님이다.나를 따르라.” 하고 소리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중의 왕이시다. 그러하기에 모든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하에 운행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났기 때문에 세우기를 좋아하고 왕의 자리에 앉았어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에 수많은 죄악을 저질러 왔음을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 제일 먼저 해야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 그분의 주권을 회복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 여정이 시작돼야 한다. 우리가 거울로 삼아야 이스라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는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의 노예생활에서 모세의 지도로 극적으로 애굽을 탈출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 앞을 가로막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광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하였다.

 

모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간 , 속히 내려오지 않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다.’하고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아론을 무섭게 채근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신을 경배하기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백성의 마음을 알고 있던 아론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라 불렀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번제와 화목제 여호와의 절기에 금송아지에게 바친 것이다. “이는 너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너희 신이라( 32: 4).”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대안으로 보이는 우상을 만든 것이다! 손으로 만든 우상과 하나님이 주신 언약적 제사제도와 혼합시킨 , 이것이  혼합종교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시요,  인격적인 신이며, 생명의 신이시다. 인간이 손으로 만들 있는 그런 잡신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는 헛된 행동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시하신 그대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받지 않으신다. 내가 만든 우상을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하여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없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으로 통하는 길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오직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예수님 분만 구원이심을 믿어야 산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만(Only Christ) 말을 싫어한다. 세상의 모든 神들을 통해서도 구원의 길이 있고 종국에는 하나님께로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최근에 유행처럼 번져가는 WCC 혼합종교다. 안타깝게도 우리 기독교계 유명한 목사님들도 모두 대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주를 섬기는 올바른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생명의 길에 대안은 없다!

 

생명의 길에서마저도 대안을 추구하고 인간의 어그러진 , 넓은 길로 가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서 섰을 ,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뵙게 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여기서 우리는 불법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불법은 세상의 모든 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세상 법보다 중요한 법은 하나님의 언약 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법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분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섬기며, 예수님의 길에서 살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을 따르다가 앞에 서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이란 칭찬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만 사랑하는 주와 함께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only savior)구원자 시다.’이것이 구원의 속성이요,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자이다.” 라고 하는 말은 틀렸다. 개인 신앙생활이건, 단체 신앙생활이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안은 없다. 본질(essence) 돌아가고 본질에 충실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보았느니라"( 14: 6-7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 5)."

 

 

 

 

출처: 목양연가: 글/최송연

  

 

 

십일조,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요즈음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한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고 말라기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 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 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십일조를 내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양, 성도들을 기복사상으로 유도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 되고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물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 내게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영 죽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다는 고백, 내가 누리는 이 구원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확산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 십 분의 일을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되 자원하는 심령으로 모든 헌물(십일조 포함)은 드려져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어떤 이들은 십 분의 일이 아니라 십 분의 이나 삼, 더 나아가서 십 분의 구까지도 기꺼이 드리는 성도가 있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을 수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 주님은 즐겨 내는 자를 기뻐 받으시지, 의무나 인색함으로 하는 예물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흠향하지 않으신다. 주님이 받지도 않으시는 예물을 바쳐야 할 필요가 어디있는가?(고후 9:7절 참조)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서 뜨겁게 올라온다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아까울 것인가?

1. 구약의 모든 율법은 폐하였고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진 것이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마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to fulfill)케 하심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십자가 위에서 온전케 하셨다. 요한복음 19: 3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그것은,
첫째: 구속사역을 다 이루심(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둘째: 율법을 온전케 하심(사랑 안에서 온전케 됨)
구속사역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율법을 온전케 하심이란:
마태복음 22: 37-39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약하여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됐다.
1. 위로는 하나님 사랑 2. 아래로는 이웃(사람)을 사랑.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자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함이 곧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성도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반드시 십 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마태복음 23: 23-24절을 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십일조를 말씀하심이고, 저것이란 의와 인과 신을 말씀하심이다. 곧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성립이며, 두가지(both) 모두 다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이기에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막12: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믿음이 먼저 들어간 후에 의무는 이행가능한 것이다. 쉬운 예로, 한 국가를 보면, 아이가 어릴 때에는 보호를 받고, 18살 인가, 20살인가?, 성인식이 끝난 후에 국민의 의무를 준행 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 아이에게 국민의 의무 운운 하면... 그 아이가 그 나라의 국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아직 어린 관계로 그 의무가 무거운 짐이 되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영적인 세계에도 젖을 먹어야 할 만큼 어린 아이가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있다고 바울사도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 (히5:12-14)

3. 축복받기 위해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사람들: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조건적이다. 믿음은 결코 조건적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말씀)” 고 말씀하신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요, 율법준행 자들의 케케묵은 소리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일 뿐,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성도)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신앙고백 행위가 되어야 한다.

결코 의무나 억지로 해서도 안 되고 또 복을 받기(기복사상)위해서 행해서도 안 된다.

고로, 십일조는 내어야(성숙한 성도라면) 되고, 내지 않아(신앙이 어릴 때)도 되지만,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전 재산은 드리지 못해도 내 수입의 십 분의 일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적은 재물이 사용되어지는 곳에서 잃어진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널리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는 것이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십일조를 대하는 올바른 마음자세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반드시 넘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농사의 원리처럼 모든 헌금에도 ‘증수의 원칙’이 성립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는 말로써 고후9:6절에서 밝히고 있는 말씀의 요지이다. 단 억지로 하지 않을 때, 이 말씀이 적용이 된다.

“각각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니라. (고후9:7절 말씀)”

 

글: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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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소고(小考)

"언니, 우리 교회 주보에 'Ash Wednesday'라며 모두 엄숙하게 지키라는 예전에 볼 수 없던 문구가 있던데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가 있나요?" "글쎄, 우리 개신교에서는 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다종교 문화가 대세인지라 아마 개신교에서도 천주교의 형식을 이전보다 더 많이 따르려는 것이겠지." 장로교회를 다니는 여동생과의 전화 내용이다. 그렇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나 사순절,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의 순간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뜻의 기념일을 나무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80e23836a3b5bc79a720057cd8f90a1_1488812569_28.jpg다만, 천주교회에서 하는 모든 절기를 무조건 따라하는 개신교회가 늘어나고 다른 교회가 다 하니까 우리 교회도 해야 한다고 하는....내면을 가다듬기보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기보다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행태를 성도님들이 알게모르게 도입하고 점차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십자가를 이마에 긋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순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형식과 외적 지향적인 신앙생활의 결과물에서 벗어나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그 의미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 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 : 19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준다. -'매일의 미사' 중에서. 

 성경에서 인간은 흙(dust)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흙에서 나왔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맞다. 그런데 재(Ash)와 흙(dust)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억지해석일 뿐이다. 재를 태워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것으로 회개의 상징이 된다고 하니, 개신교에서 자란 나의 눈에는 어이없는 우상숭배로밖에 보이질 않는데, 문제는 그런 형식을 따라 한 줌의 재를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개신교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얼마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재는 아니라지만, 기름을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예식을 자신도 하고 다른 이에게도 강조하여 물의를 빚은 것을 안다. 이렇게 절기에 치우치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탓에 결국은 이단에게 핍박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를 마음속에 새긴다면 또 모르겠지만...유행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과연 우리(성도)가 행할 일인지.... 

 금식(禁食)과 금육(禁肉 ) 

‘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자들은 금식재와 금육재를 의무로 지킨다. 금식재[禁食齎]란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점심식사는 평소대로 하되 저녁식사는 요기 정도만 하는 것을 말한다. 금육재[禁肉齋]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재의 수요일과 모든 금요일에 지켜야 한다. 금식재는 만 18세 이상 60세까지,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킨다. ​ 

 가톨릭 신자가 금식재와 금육재를 동시에 지켜야 하는 날은 ‘재의 수요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둔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틀이다. 십자가의 길: 천주교 성당이나 성지에 가면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14개의 조각을 볼 수 있다. ‘14처(處)’라 불리는 이 미술품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 중 하나인 ‘십자가의 길’을 위해 설치된 것이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14개 사건을 묵상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1-2세기 신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지나간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사순시기 매주 금요일과 성 금요일에 하도록 권고된다.  - [사순절, 사순시기 의미] 중에서 

 이마나 머리에 재를 뿌리는 형식,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가 아닌, 교회의 법으로 제정하고 의무로 금식을 해야하는 것이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일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질 않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 2: 12-13)  

 그렇다. 우리는 이 사순절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사순절이 되면 그리스도의 그 모진 고난을 기억하면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진심으로, 마음을 찢는 듯)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형식과 절기에 얽매이고 마음은 따로라면....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실까? 

 

나는 아주 오래 전,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적이 있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숭고한 길,“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는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카”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카’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벌거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 

(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랬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이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한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이다. 하물며 한줌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우상숭배적 행위로 변질된 교회이겠는가?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본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라도 형식에 치우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니겠는가?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마음을 찢고 주께 돌아오라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출처: 목양연가/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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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는 훌륭한 장로님이고, 권사님이고, 여전도회장입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완전 달라요.” “아무개 집사님은 매일 교회서 살다시피 하는데 그의 삶은 정말 기막혀요.“ 잘 아는 어느 권사님의 한탄 섞인 음성이다. 어찌 그 권사님만의 한탄일까? 우리 모두 입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같은 탄식이 쌓여가고, “어찌 저럴 수가!!” 마음속에 분노로 끓어오름을 꿀꺽 삼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믿음의 선조 님들이 피 흘리며 지켜왔고 2,000여 년 간 생명으로 전수해 내려온 교회,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이런 황망한 이야기들이 계속 들리는 걸까? 교회 안에 가짜가 많다고 하신 어느 목사님의 설교처럼 교회 안에 정말 가짜가 많아서일까? 교회 안에서 누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종교개혁 500주년,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이미 오래고 우리는 지금 초대교회 선조들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곳으로 한참 많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현실이다.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인 성경을 자신의 입맛대로 마구 비틀어 전하고 행하는 것,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사역자 중에서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육신의 사람이 빚어내는 잡다한 소식들이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아닐 텐데 …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일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다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 교회는 개인이 교회라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한 공동체가 가시적 교회인만큼 한두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모든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나 한 사람이 병들면 너도 병들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 병드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체 운명이다. 곳곳에서 교회가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는 드높은데, 너 자신이 개혁하라고 외치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이 먼저 개혁하고서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잠시 눈여겨 살펴보면 여러 형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지식수준이 달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고, 성경말씀을 근거로 모든 성도를 크게 나누면 다음 두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  2.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영의 사람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靈)적인 존재로서 두 세계에서 共存한다.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런 인간의 본질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고전3: 1-3) 또는 "혼(Psyche, natural) 자연적인 사람" (고전2 : 14), 영(Pneuma) 영적인 사람"(고전3:1)이라고 표현하셨다.

교회 안에서 모두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지만 육신을 쫓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 육신으로 너무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의 빛이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탄핵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부터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8 : 13)"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매 순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좋을 텐데....심히 안타깝다.

육신으로 사는 사람

본능은 쾌락을 원하고 육신은 편하기를 소원하기에 육신 스스로 쾌락이나 탐욕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 과거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많은 제국들이 멸망한 원인을 육신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한 것에 그 이유를 찾아도 좋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뿐 아니라 인류 최초로 문명의 발산지가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지혜의 대명사처럼 불리우던 ‘수메르 인’들마저 동성애와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과거 왕이나 백성이 성적타락, 동성애, 음주, 폭력 등 육신의 쾌락에 빠져 기강이 해이해지고, 근면 성실하게 일하기 보다 한탕주의나 불로소득을 추구했기 때문에 모두 멸망했다면 너무 억측일까?

그렇다고 하여서 육신은 죄악이고 영은 깨끗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사에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육신은 멸망할 것,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행동했다.

그들은 오직 영적인 사람들, 자신들만 빛을 소유한 자들로서 그들 내부에 이미 빛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람을 나누기 좋아했는데, 자신들보다 열등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psychikoi)”과 단지 물질로만 구성된 ‘육적인 사람(sarkikoi)’, 즉 짐승과 같은 사람으로 구분지었다. 혼에 속한 사람들은 그래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조금 있지만, 육적인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고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것 뿐이라고 정죄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서운 신학적 오류인가? 이런 영지주의적 사상은 헬라문화와 유대교 유일신 사상과 바벨론의 점성술, 그리고 근동지방의 이원론적 신앙이 혼합된 퓨전신학의 대표다. 육신은 죄악된 것이고 영혼은 선한 것, 이런 논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른 신학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창조하셨고 이 육신으로 선한 일에 봉사하도록 지으셨다. 육신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고전 6장 19절 참조). 따라서 육체를 죄악시 해서 안 된다. 육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선하게 사용하면 선하게 되고 악하게 사용하면 죄의 도구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 육신에 속한 사람(육신으로 기울어진)은 사망의 길로 나가고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평안의 길로 나간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롬 8: 13).

어쨌거나 이런 인간의 특수성은 사람을 때때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성향을 띌 수 있는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 (고전3: 1-3)이라 부른다. 육체의 길과 성령의 길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내가 어느쪽으로 더 기울어지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영으로 사는 사람

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육신 그 자체를 죄악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죄악으로 달려가기를 즐거워하는 육신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기다린 분이 있었다. 누구인가? 성령이었다. (눅 4: 18 참조)  여기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기다리신 것은 무엇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무슨 일이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전 섣불리 결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기도를 받아야 마땅한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늘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다. 이 또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기 위하심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속에 성령 하나님의 운행 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성령님께 물어보고 성령님과 함께 모든 일을 시작하고 모든 일을 그분이 일하시기 전 내가 먼저 앞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결정한다면 결코 성령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순간순간 육신의 생각이 그를 장악하기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칠 수 있다. 여기는 사역자도 그렇고 직분자들도 그렇고 평신도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자고 하면,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 같다.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을 모른다. 성령의 사역을 모르니까  흉내쟁이 사탄의 장난질에 미혹되어 엉터리 예언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놓는다. 그의 영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인지 분별하지 못하니까 지레 겁먹고 성령의 사역 그 자체마저 멸시하는 목회자들이 있어서 은사중단론까지 발전한 것이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맹점이 아니겠는가? 그들 거짓 영의 장난질에 얽매인 자들 때문에 참된 성령의 사역마저 멸시함을 받고 있다. 제발 분별하자. 분별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산다.

한국의 박 아무개 권사란 사람은 작년 12월에 성령을 빙자하여 예언을 했다. "내 년 3월에 일본 열도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또 홍 아무개 전도사란 여인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한국에 몇 월 몇 시에 전쟁이 일어나니까 빨리 피하라고 하신다." 이런 엉터리 예언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믿고 재산을 팔고, 하던 일을 접고, 해외로 도망을 간 사람들이 평신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회자 중에도 많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 기막힌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예언이 불발로 끝나는 바람에 정작 타격을 받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진리의 영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진실한 성도들이다. 처음부터 성령의 속성도, 성령의 하시는 사역도 모르는 무지가 이런 해프닝을 만드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하면 먼저 그분의 속성과 하시는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을 오해하면 성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조건 영적인 일을 쫓다가 사탄이 쳐둔 함정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을 꼭 환청이 들리고 환상이 보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그런 것은 설사 성령님의 열매라고 하더라도 성령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이 될 수 없다. 성령은 지정의(知情意)를 온전히 갖춘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길을 인도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도우신다.  그분이 하늘 저 끝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심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7)

보혜사 성령님의 하시는 사역은 많지만 우리를 견인하시고 이끌어주시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결코 기록된 성경을 넘어 가지도, 상충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식 없이 영의 세계에 너무 심취하게 되면, 자칫 사탄에게 영혼을 내어주고 헛된 예언을 쏟아내기 쉽상이다. 성령은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 맑은 물이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게 하듯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에 비추어 잠시만 살펴보아도 현대 교회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변질한 것인가?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환청인가? 아니다. 성령님은 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나의 깊은 자아(ego)를 깨우쳐 주신다. 죄를 사랑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진다면, 그런 상태가 곧 ‘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개혁 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뿐이다.  개혁은 다른 데서부터 찾는게 아니라 나 개인이 개혁되어야 하고 나부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 두 사람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되어 결국은 온 교회가 정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때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 영으로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 5-9)"

 

출처: 목양연가/최송연

핏자국 선명한 그 길로만....            


어느 날, 자칭 '선한 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이곳저곳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게 나아오는 자는 좋은 꼴을 먹으리라!” 라고 하는 아주 멋들어진 구호를 내어 걸고 나팔을 불어대며 대대적인 선전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매일, 매달, 매년 목자들의 모임이라는 모임도 가졌고, 어떻게 하면 양떼들에게 더 좋은 꼴을 먹일 수 있는가?어디에 가면 잃어진 양떼들이 더 많이 흩어져 울고 다니는가? 또는 어떻게 하면 병든 양떼들을 보다 잘 치료해 줄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주제로 가르치기도 하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떠벌리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답니다.

“내게로 나아오는 자는 좋은 꼴을 먹으리라!” 너무나 멋진 그들의 슬로건을 보고 솔깃해진 몇몇 흩어진 양떼들이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선한 목자의 우리’ 라고 대문짝만큼 크게 써 붙인 우리 안으로 찾아들어 갔습니다. 캄캄한 밤중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살금살금 기어오더니 양 우리의 문을 덜컹!하고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목초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지금 막 잠이 들어 있는 양떼 중에서 몇 마리를 콱! 움켜쥐고는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버렸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양돌이와 양순이가없어졌다고 우리 안의 양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중에 힘깨나 쓴다는 양이 목자에게 가서 따져서 묻자고 했습니다. 양떼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자칭 선한 목자들은 "별 일이 아니니 조용히 하라.”고 두 눈을 부라렸을 뿐, 시원한 대답조차 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우리에 들어간 양떼들은 병이 들어도 고침을 받지 못했고, 상한 양들은 싸매임을 받기는 커녕,오히려 발길질을 당하고 강포를 당했지요. (겔34장 참조)

이렇게 해서 매일 밤 양떼들은 한 마리씩 두 마리씩 사라져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염려를 하던 중에 자국의 양떼들을 지키시려고 ‘선한 목자’선발 대회를 여시기로 했습니다. 선한 목자의 자격이 주어진 자에게만 자국의 모든 양떼들을 맡기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격을 따는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죽음의 계곡’까지 단신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선한 목자의 자격을 따 내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흥, 어림도 없는 소리야... 라고 말하면서, 자칭 선한 목자들은 그 누구도 이 컨테스트에 응시하는 자가 없었지요. 이것을 본 하나밖에 없는 그 나라의 왕자님이 자원을 하셨습니다. 자국의 양떼들을 자신이 지키겠다는 결심이셨지요. 이 말을 들은 자칭 선한 목자들은 왕자님을 증오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왕자님을 편안하게 죽음의 계곡까지 들어갔다가 나오시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떼를 지어 왕자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시는 왕자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채찍으로 때리며 발로 차기도 했고,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지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들은 큰 나무를 세워놓고 그곳에 왕자님의 양발과 양손에 대못을 박고머리에는 가시관을 엮어서 푹 씌운 후, 날카로운 창으로 옆구리를 사정없이찔렀습니다.

그리곤…고통 당하는 왕자님의 발밑에 둘러서서 낄낄거리다가 결국,… 죽음의 계곡으로 질질 끌고 가서는 발로 툭! 차서 언덕 아래로 밀어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너무 화가 나서 군사들을 풀어서 죽음의 계곡 아래 떨어진 채 쓰러져 있던 왕자님을 궁전으로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군사들이 쓰러진 왕자님을 안고 가는데… 왕자님이 가시는 길에는 왕자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임금님의 궁전은 양떼들을 보호하는 우리를 크게 짓고 그곳에 들어오는 모든 양은 누구든지 보호받고 좋은 꼴을 마음대로 먹으면서 안전하게 살 수가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왕자님이 친히 목숨으로 바꾸신 ‘선한 목자’ 타이틀 아래로 찾아오는 모든 양떼들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왕자님이 친히 아픈 상처는 싸매어 주시고...병든 자는 고쳐 주시며...배고픈 자에게는 좋은 꼴로 먹이시며...돌보아 주신다고 하네요.

그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구요? 그것은 염려 마세요. 왕자님이 가신 그 길에는 샛빨간 핏자국이 선명하답니다! 피가 점점이 배어 있는 그 길로만 찾아오세요. 결코,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답니다!

그때 그 자칭 선한 목자의 후예들이 지금도 그때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내게로 오는 자는 좋은 꼴로 먹이리라!!" 고 하면서 대대적인 홍보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네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양떼들이여, 속지
맙시다! 우리는 오직 핏자국 선명한 그 길로만 갑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영성훈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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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言語)의 위력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빛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말로 사랑을 표현하고 말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인생살이를 한마디로 축약한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로운 표현이다. 사실, 말을 많이 한다고 말 잘하는 것 아니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정확히 그 뜻을 알고 사용하는 것과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비록 매끄럽지 못하고 조금은 거칠게 보여도, 화자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 진솔하게 하는 한 마디 말이라면 그것은 곧 금은과 같으리라.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럼프 씨가 바로 그 한 예다.

그를 보면, 알고(knowing) 사용하는 언어, 그 위력이란 어떤 것인가? 가르쳐준다. 모든 언론, 대다수의 미국민, 그리고 모든 국가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 지적 당한 것이 그의 말이었다. “막말 가, 인신공격 자, 인종차별 자,”등으로 불리우며 그는 많은 지성인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심하게는 그를 가리켜  ‘미친(Insane)자”라고까지 비웃었다. 그러나...트럼프는 끝까지 자신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고 그의 막말은 더욱더 강도를 높여가는 것같아서 보는 이들의 눈에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다. 저런 사람이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개표결과는 완전 충격 그 자체였다. 글자 그대로 세계를 경악게 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지지표를 얻은 후보는, 모두가 기대했던,  세련되고 知적인 힐러리 후보가 아니라 ‘막말 가’로 언론의 비웃음을 샀던 바로 그 ‘트럼프’였다. 놀랍지 않은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의 언어 능력이 일구어낸 결과라고 본다.  그랬다. 민심을 파고드는 그의 언어능력은 탁월했고 많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언어,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미국 내에서도 기득권자들에 의해 버림받았다며 울분을 토하는 노동자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동성애 천국으로 변해가는 미국을 보면서 개탄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을, 그리고 무차별적 완화정책(똘레랑스 정책)으로 망가져 가는  국제정세까지… 이런 사회적 그늘을 그는 한 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 정부를 향해서 울분을 토하고 막말을 쏟아붓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의 아픈 부분을 정확히 찌르면서 그들의 감성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보는 ‘트럼프’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탁월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라 말하고 싶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공약을 지켜나가는 참된 지도자일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정치계나 사회생활에서만 언어가 위력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말씀이(logos)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구속주가 되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을 입을 수 있다니?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음은 더욱 놀라운 힘이요, 위력이다.  뿐만 아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사탄이 최초의 인간, 하와를 미혹할 때 쓴 무기도 다름 아닌 바로  ‘현란한 말의 위력’이 그 기초였다는 것을 아는가?  잘못된 언어 사용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말(언어)이란 위선의 방패로서 한 방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종종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죄된 본성을 잘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것일까? 이렇듯, 언어란 사용하기에 따라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그 말 때문에 영벌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니,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언어 능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이런 사실을 매순간 인식하고 내 입에서 나가는 모든 말이 정제되고 절제될 수 있다면 후회가 없는 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저주의 말을 쉽게 내뱉지 말아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다. 한 기독교 병원에 만삭이 된 젊은 임산부가 해산하러 왔다. 그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기에 벽마다 예수의 성화 액자를 걸어두었다. 그것을 본 젊은 임산부가 짜증을 내면서 “저 액자 좀 떼세요, 보기 싫어요.”  "저희들 맘대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간호사들의 말에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남편은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남편의 권한으로 저 액자를 내리고야 말겠어요. 태어날 내 아이에게는 절대로 저 예수라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너무 화를 내는 임산부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병원 측에서는 하는 수 없이 원장과 상의하여 예수님 액자를 모두 떼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 여인은 아주 건강해 보이고 잘생긴 아들을 출산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여인의 말대로 이 아이는 영원히 예수님의 액자를 볼 수 없는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볼 만한 예가 아닐까 싶다. 말이란 이렇게 위력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성경에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 : 28)"라고 심판의 기준을 우리 입에서 나온 말대로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심을 본다.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사건이 바로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 정권과 협렵자들이 12년(1933~45)동안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국가 차원의 체계적이고 관료적인 탄압과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불에 의하여 희생된 제물(번제)' 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라는 뜻에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홀로코스트의 결과 사망한 유대인은 575만여 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과사전

이것이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아픈 역사이건만, 무엇 때문에 유독 유대인들이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시기 질투에 눈이 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선동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친 유대민족들, 그 포학한 입술의 열매란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마땅할 죄인이라며 끌고 온 예수,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대야에 물을 떠다가 군중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씻는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에게 선동을 당한 어리석고 무지한 군중들은 외쳤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 (마 27장 24-25절 참조)” 얼마나 무서운 저주의 말인가? 그들이 무심코 뱉어낸 그 저주의 말이 훗날에 그대로 그들과 그 자손들이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다음, 어려운 때일수록 믿음의 말(언어)로 승리해야.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 그 자체가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 소망마저 끊어졌으나 그럴수록 더욱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고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분 안에서만 내세의 소망이 있음을 매순간마다 고백하며 증거하기를 쉬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실제 어려움의 무게일 수 있고 어쩌면 신앙의 성숙도까지 갈 것도 없이 정서적, 인격적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 별것 아닌데 작은 이권에 “아웅다웅” 잡아 죽일 듯 목숨 걸고, 입으로 상대를 저주하기도 하며 “죽겠다, 죽겠다”. 부정의 소리로 자신을 옭아매기도 한다. 더 심하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생명마저 던져버리기도 한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내가 하는 모든 언어들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생각을 한다면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벧후 3 : 10절 참조)". 했다.

마음 설레며 새해를 맞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3주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한해의 삶을 계획하기도 하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새해라고 해서 늘 행복한 일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앞에 언제나 평탄한 대로(大路)만 펼쳐져 있겠는가? 우리가 지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수두룩 널려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마치 거대한 바위 같고 태산 같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걸어야 할 길(路),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오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바라다가 안 된다 절망하고 주어진 삶을 내 입술로 저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어둡고 캄캄한 때일수록 밝은 등불이 필요하듯, 다가올 캄캄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의 길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면 “새해는 생명을 살리는 언어”로 내 가슴 한가득 채우고 날마다 내 입술로 믿음의 언어를 선포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 기준이 되는 언어의 위력을 항상 기억하면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성숙함이 내게 더할 수 있기를….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 14 : 1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더디하라( 약 1: 19).”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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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고, 궤도를 벗어나 끝없이 추락하는 행성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2000여 년 전, 아기 예수가 오시기 전의 그때 그 시대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지금 현 세상이나 캄캄한 암흑기에 진입한 것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목소리 드높아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퇴색되어 그 빛을 잃고 캄캄하여진 지 이미 오래다.
 
사람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BC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 (필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주님께서 두 번 오시기 전에 일어날 한 징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으라면, 무엇보다도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현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맘몬 신에게 절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십일조가 무슨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듯, 앞에서 풍월치는 그들의 욕심은 바벨탑만큼이나 높아가더니 결국 ‘십일조 폐지 운동이 곧 개혁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오늘 이 지경까지 몰고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절제되지 못한 명예욕, 성욕, 인간의 본능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사정없이 넘어진 목회자들이 홍수처럼 쓸려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뒤흔들어 댄다. 또한 근세에 일어난 ‘자유주의 사상’ (자유주의 사상: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사상이다.)

다음은, 생의 바퀴를 돌리며 고달픈 삶을 영위하느라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헛점을 노려서 깊이 파고 드는 이단사설이 고달프고 굳세지 못한 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하고 사냥질 해간다.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또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교계가 재앙을 만나게 된 원흉을 “십일조”에 두고 “개혁’이란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혹은 난도질하며 폄훼하기도 한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기독교 이대로 가다가는 안된다. 기독교계는 개혁되어야 한다”, 의식 있는 성도들의 거센 목소리가 질풍처럼, 성난 물결, 우는 파도소리처럼 이곳저곳에서 거세게 불어친다. 다 옳은 말이다, 동의한다. 아무렴, 우리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안되고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자질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다음은 내가 개혁하자. 너와 나 우리 모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자.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방법론이 문제다.

개혁(改革, reformation)을 먼저 알아야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이것이 개혁의 사전적 의미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 잘못된 종교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개혁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은 무엇이며 우리 기독교 안에서 잘못된 제도나 기구는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주먹 구구식의 개혁, 말만의 개혁은 분란만 일으킬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어오던 성경,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는 옷을 재단하기 전, 먼저 ‘패턴’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빌딩을 짓기 전 ‘조감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상 물질 세계에서도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그에 합당한 ‘패턴’이나 ‘조감도 (architecture)’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자고 호소하는데 그만한 ‘조감도’ 나 ‘잣대(Cannon)’가 없이 개혁하자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되겠는가? 이런 말이다.

게다가 완전무결하다고 할만한 ‘척도’요 ‘잣대’(Cannon)이며, 인생이 나가야 할 여정의 지도(map)며, ‘조감도(architecture)를 훼손시키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일까? 변질과 개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현 교계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성도의 삶이 변화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종교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몇 구절을 변개시키고 잘라낸다고 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변화다.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개혁이다!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누가(who)?= 내가. 무엇이(what)? = 나의 삶, 나의 인성이, 어떻게(how)? =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기에, 성도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불리우지 않았던가? 프론티어(the frontier), 앞서가는 개척자 선구자라고 불리우지 않던가? 우리는 앞서가는 개척자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탓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 개혁, 그 시금석(試金石)
“1517년 어느 쌀쌀한 가을날 오후, 성경을 연구하던 어떤 작달막한 수도사가 교회의 문 앞(지역 게시판)에 학문적인 토론을 위한 일련의 논제를 못으로 박아 내걸었습니다. 그는 장차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알려질 이 사건을 널리 퍼트릴 사람들이 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수도사(신부)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요한 문제는 면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판매했던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기독교권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던 로마 베드로 성당의 준공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황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성당 완공을 위한 건축 분담금과 맞바꿔 버렸습니다. 교황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도미니칸 설교자였던 테첼(John Tezel, 1455-1519)이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가장 교활했습니다. 심지어 테첼이 여행 중에 불렀던 사중주곡조차도, '동전이 금고 안에서 원을 그리며 땡그랑 소리낼 때, 한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는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의 취향대로 '동전이 금고 안에서 소리를 낼 때, 교황은 더욱 부유해진다' 등과 같은 유사한 곡들을 남겼습니다.- JuNick님의 댓글 중

루터가 종교를 개혁했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안다. 루터의 개혁은 완벽하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일게다. 그렇다면 그 루터가 외친 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그는 개혁이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루터의 종교 개혁 5대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다음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이다. 그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개혁주의마을

개혁주의의 (튤립)이라고도 하는 5대 교리 역시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리를 지지하자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란 무엇인가? 개혁을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기에,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튤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우리가 개혁을 부르짖기 전, 개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고 어떤 부분을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언젠가도 한 번 말한 기억이 있지만, 재론하건데,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기도 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우리(성도)가 개혁을 하되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해야 한다. 인간 자신이, 내가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거나 가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생의 잣대가 되고, 천국가는 길의 약도가 되며, 안내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시키고서야 어떤 개혁을 하고자 한들 그 개혁이 올바를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불변의 진리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을 가감하려고 시도하지 마라. 십일조 낼 형편이나 믿음이 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 구원과 십일조 상관관계 없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변질시키거나 빼거나 더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정한 개혁은 내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찌들리고 파묻혀서 진리를 외면하고 있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개혁의 시금석을 저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의 시금석이 되는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있음에도 그 성경을 입맛대로 풀이하거나 가감하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말씀을 호도하는 것이 개혁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개혁가들을 위한 사랑의 권면:
1. 십일조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2. 십일조가 축복의 바로미터라고 떠벌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3. 내게 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바꾸자고 하여 말씀을 가감(加減)하거나 재단하여 잘라내는 자유주의 신학은 더욱 위험하다.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그대를 이끄리니....
 
지구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고, 양복 재단사가 '패턴'없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없고, 성도에게 훼손된 말씀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쓸모 없는 휴지로 만들고서야 어찌 그분의 낯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 그 흘린 피의 발자취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근간이요,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리는 더욱 위헙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성도가 진정한 개혁을 논할 수 있는 자격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힘들지라도 성경 말씀에 내가 순종하며,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개혁이요, 성경이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진리는 사수되어야 한다!!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 10-11)

 

출처: 목양연가: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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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보여주어라

지난해를 돌이켜 보니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누구든지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 지난해처럼 어려웠던 때, 폭풍의 눈 속을 통과하는 듯, 모질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던 시기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는 오지 않고, 희망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쌍무지개와 같은 것일까? 열심히 사느라 살았건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제 정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아녀자가 보기에도 위태롭고 위기감마저 느끼는 요즘이다. 깊은 혼란과 혼돈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신약시대 바울 사도가 죄수로 끌려가며 탔던 배, 풍랑을 만나 좌초될 뻔한 ‘알렉산드리아’ 호가 오버랩되기에 몇 자 적어본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그 동족에게 시기와 질시, 미움과 핍박을 받고 신성모독죄와 소란죄로 피소되어 로마 총독에게 끌려가 몇 번씩이나 심문을 받다가 유대 땅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알고 ‘가이사’ 황제에게 직접 심문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이었다. 바울이 탄 배가, ‘미항’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10월 초에 있는 ‘대속죄일’을 그 항구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대속죄일 후에는 대개 풍랑이 거칠어서 항해하지 않던가, 항해를 하더라도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직시한 바울이 ‘미항’에서 겨울을 지난 후 떠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선장은 자기가 선장이란 자부심 때문인지, 죄수복을 입은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작은 ‘미항’ 보다 더 큰 ‘뵈닉스’ 항으로 떠나겠다 고집한다. 이런 때, 죄수들의 총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에게 결정권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바울의 말보다 그 배의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더 경청했고 결국은 그들의 뜻대로 ‘뵈닉스’ 항을 향해서 떠났던 것이다.

항해를 시작한 처음 며칠 동안은 남풍이 순하게 불었다. “저희(선장과 선원, 그리고 백부장 율리오)가 득의 한 줄 알고(행 27 : 13)”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돌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유라굴로’라고 하는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배는 큰 위기에 빠졌다. 잘못 생각하는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알렉산드리아’ 호는 좌초하기 직전의 위급함에까지 빠져들게 된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사태가 그때 그 ‘알렉산드리아’ 호의 신세처럼 좌초하기 직전의 상태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유라굴로’는 동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유루스’와 북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킬로’의 합성어로 ‘동북풍’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폭풍은 그곳의 전형적인 지형 때문에 형성되는 돌풍으로서 그레데 섬의 한가운데 솟아 있는 ‘이다(Ida)' 산맥에서 형성된 두 반대 기류가 맞부딪칠 때 발생하는데, 순한 남풍이 이런 돌풍과 겹쳐 북풍으로 급격하게 변하기 때문에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한 번 이 바람에 휩싸이면 배가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다 결국은 파선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서운 풍랑 속에 알렉산드리아 호가 빠져들었다.

기록을 보면, 알렉산드리아 호 승객은 죄수를 포함해서 276명이 타고 있었다고 하니 지금부터 약 2,000여 년 전의 배치고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던 것 같다. 그 속에 탄 사람들의 신분도 가지각색이었다. 따라서 그들 정신세계, 사상의 세계도 가지각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나누어 보면 두 부류가 거기 있었을 뿐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백부장 ‘율리오’를 비롯한 군인들, 선장을 비롯한 뱃사람들이 지배자라면, 바울을 포함한 모든 죄수가 피지배자들이라 하겠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은 비록 지위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현대 젊은이들의 표현대로라면 ‘금수저’ ‘흙 수저’로 나누어지겠지만, 그래 봤자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같은 운명이란 사실이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그 배와 함께 풍랑을 겪어야 하고, 배가 파선하면 그 안에 탄 사람들은 직위, 지식, 부와 빈에 관계없이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호에 탄 사람들의 공동운명이다.

당시에 내가 지배자란 마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던 선장과 그의 말에 부화뇌동(?) 됐던 백부장 ‘율리오’를 보게 된다. 피지배층인 바울의 말은 무시해도 된다는 교만한 지도자들이 배에 탄 모든 승객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트리게 된 것이다. 현대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정치인들이 민중을 선동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살 길을 보여주는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바울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었는가? 참 흥미롭다.

밤낮 사흘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이제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 앞에서 기진해 갔다. 행여나 살 길이 있으려나? 선장과 선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그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으랴. 사도행전 기자 누가 선생은 “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하고 그 당시의 절망적 상황을 사실적 표현으로 잘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이 순전히 지배자들의 잘못이지만 문제는 피지배자들의 태도이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지도자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만 원망하고 있다면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때 바울처럼 살 길을 보여주는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은 없는가?

오늘 우리도 누구 때문인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로 어렵고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국가의 권력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자기 살 길을 찾아 달아날 생각을 하지 말고 불안에 떨고 있는 민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한다면 좋을 텐데….서로 잘못이 없다고 상대를 향해서 손가락질만 해대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캄캄하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캄캄함을 밝혀줄 빛(등대)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 불평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 없다. 불평보다는 차라리 해법(solution)을 찾아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지배자들과 달라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비록 작은 무리이며 약하고 천대받는 피지배층이라고 할지라도 분연히 일어서서 외쳐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 길이 있노라고…”

어느 나라에서나 기독교인은 사람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할 사명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욱 거세게 몰아가는 이들에게 편승하여 배를 더욱 위기에 몰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무장하여 자기가 먼저 든든히 서고, 그리고 흑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살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 25)"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 그분이 말씀하셨으니 내 실생활에서 그대로 될 줄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2017년 새해, 이 한해는,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다른 모든 이에게도 살 길을 보여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믿음의 용장들이 나라마다 교회마다 동네마다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며 소원해 본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시 119 : 105)"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 27: 20- 26)"

 

출처: 목양연가/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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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찌뿌듯한 것이 금방 진눈개비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 같은데, 온종일 흐리기만 할 뿐, 비도 오지 않고 눈도 오지 않는다. 오늘 아침 일기 예보는 분명히 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늘상 빗나가기만 하는 일기예보, 제대로 한 번 맞추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정말 믿으면 안되는 것이 일기예보구나 혼자서 궁시렁거리다가 나의 인생길의 달음박질은 과연 어떨까? 늘상 빗나가기만 하는 일기예보처럼 내 인생도 목적지에서 한참 빗나간 달음박질을 달려가고 있지나 않은지, 갑자기 인생길의 달음박질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마침, 아주 오래전 읽어본 책의 주인공, 빗나간 달리기를 하다가 망한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떠오르기에 잠시 나누어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이 연말연시에 조금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 책은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에게는 과연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책인데 아마도 독자 여러분도 모두 읽어보았을 것 같다. 그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줄거리를 대략 요약하여 소개하면 이렇다. "러시아에 바흠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땅을 많이 소유한 대지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우크라이나 지방에 가면 땅값이 엄청나게 싸기 때문에 적은 돈만 있어도 대지주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바흠은 지체하지 않고 없는 돈을 긁어 모은 후, 개나리봇짐을 지고서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향했다. 수십 일이 걸려서 그는 마침내 우크라이나에 도착을 했고, 살펴보니 과연 듣던대로 엄청나게 땅값이 쌌다. 인심도 좋아서 땅을 거래하는데 한 평 두 평씩 파는 것이 아니라 하루치에 얼마씩 해서 거래가 되고 있었다. 땅을 사는 사람이 아침에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출발을 해서 열심히 뛰어서 해가 질 때까지 그가 밟은 모든 면적을 값을 매겨서 사고 팔고 하는 것이다. 바흠은 그 지방 촌장의 땅을 사도록 주선이 되었고 내일이면 그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너무나 흥분한 바흠은 한 숨도 자지못하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 일찍 그는 돈과 함께 빵과 물, 그리고 곡괭이를 들고서 약속장소에 나갔다. 이미 촌장과 그의 하인들이 출발점을 알리는 말뚝을 박아놓고서 바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흠은 자기가 준비해 온 돈을 촌장에게 건네주었고 촌장은 그 돈을 받으면서 바흠에게 분명히 다시 한번 “자네, 이것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게나. 자네가 아무리 많은 땅을 밟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지, 해가 지고 나서 돌아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네!” 하고 약속을 일깨워 주었고, 바흠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동편에 해가 힘있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바흠도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지평선을 향해서 힘있게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하는 일념에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중간 중간에 멈추어서 곡괭이로 땅에 표시를 하는 것 외에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고 오직 대지주가 될 수 있는 단 한 번의 이 기회를 놓칠 새라 그는  뛰고 또 뛰었다.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고 오랜간만에 뛰어서 그런지 온몸이 천근처럼 무거웠으나 쉴 수도 마실 수도 없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4분의 3정도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을 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뛰고 돌아가야지 하면서 뛰다가 “반드시 해가 지기전 까지…” 라는 촌장의 말이 생각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 접고 그는 방향을 되돌려 출발점을 향해서 다시 뛰기 시작을 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끝이다. 그래서 그는 죽을 각오를 가지고 뛰고 또 뛰었다. 다행히 저 멀리 촌장과 그의 하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가물가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흠의 정신도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버릴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달렸다. 드디어 해가 서산에 꼴깍 넘어감과 동시에, 바흠은 출발점에 도착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심장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말았고, 바흠은 그자리에 쓰러져 영영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촌장은 주위에 있는 하인들에게 그를 잘 묻어 주라고 명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인간에게는 자기가 묻힐 여섯자 땅만 있으면 되는 것을…!”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야 여러가지이겠지만, 결국 요약하면,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자기가 죽어서 묻힐 6자 무덤뿐이란 것이다. 요즘은 그 6자의 땅마저도 아깝다고 화장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높지만 말이다.  바흠은 무조건 뛰기만 할 것이 아니였다. 가다가 좀 쉬면서 주위를 둘러도 보고, 물도 좀 마셔가면서 여유를 가지고 지금 자기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이리도 열심히 뛰고 있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좀 살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오늘도 뛰고 또 뛴다. 명예를 위해서, 지식과 부를 위해서, 인기를 위해서 글자 그대로 숨가쁘게 질주를 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교계 안에서는 또 어떠한가? 교계를 넓혀서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좀 더 좁혀서 생각해 보면 작금의 목사님들마저 뛰고 또 뛴다. 땅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하는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욕심에 이끌려 무작정 뛰기만 하다가 망한 ‘바흠’처럼, 현대도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성공가도를 향해 무섭게 질주를 하고 있다. 주님께로부터 부름받은 목적 마저 상실한 채 그저 달리고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양떼들이 아프다고 울어도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Caring이란 남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목사님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 받은 목적이 무엇인가? 목사님들을 부르신 목적은 요한복음21:15-19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곳에 보면 “주님의 양떼를 1.먹이고 2치고 3.먹이는 것, ‘ Tend와 Feed’ 이다. 무슨 뜻인가? 여기에서 Tend란 ‘시중들다, 돌보다’의 뜻이며, 'Feed’란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것을 말한다.

젖에도 두 가지가 있다. 모유가 있고 분유가 있다. 물론, 신생아에게 있어 모유보다 더 좋은 영양소는 없다. 모유에는 분유가 가지고 있지 않은 각종 영양소가 면역 항체성 물질과 함께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어머니들이 손 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아기에게 모유보다는 분유를 더 많이 먹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 목사님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의 어린 양떼들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꼴,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고 각종 병균, 이단 사설로 부터 보호할 수 있는 면역체계를 갖춘 가장 좋은 양식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Feeding해야만 성도들이 병들지 않고 더 성숙해져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분은 그리 많지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생명의 꼴인 성경은 너무 딱딱하다는 이유로, 또 성도들이 즐겨듣지를 않는다는 이유로, 각종 다른 교훈과 철학서적들을 섞어서 먹이기도 하고, 성경에도 없는 이적과 기사를 상품으로 내 걸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릿광대의 역활도 서슴치 않는다. 그래야만 더 많은 성도들을 쉽게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은 성도들을 모아야 더 좋은 차 를 굴릴 수 있고, 큰 종이라고 떠받들림도 받고 대접받는다. 다 좋다. 그렇다고 하여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할 일이다.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곧 사명자란 소리고 사명자라면 사명을 부여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이고, 사명을 주신 그분 앞에서 반드시 셈해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달려가도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절 말씀)”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는 영벌과 영생에 대한 심판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냐, 아니면 자신이 지은 죄, 자기자신이 다 당해야만 하느냐? 두 갈래로 갈라놓는 백보좌 심판이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청지기로서의 심판, 사명에 대한 충성과 불충성에 대한 심판, 상급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는 좀 쉼표를 가지면 어떨까 싶다. 쉬면서 좀 살펴보자.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뛰어왔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 뛰어갈 것이냐?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좀 뒤돌아 보자. 그만큼 뛰어 왔으면 족하다. 이제는 돌아가야할 본향도 좀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내 이웃도 좀 돌아보자. 그들의 고통과 삶의 무게도 좀 나누어서 담당해 보자.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달려왔고,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으며, 내가 받은 이 사명이 누구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 하는 것도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이 한해도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이 한해뿐 아니라, 평생을 두고 살펴보아야할 과제가 바로 나는 부름의 목적에 빗나간 달리기를 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쉼표는 마침표가 아니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다. 무조건 뛰고 달린다고 해서 제대로 달렸다고 할 수 없고, 무조건 뛰고 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쉼표를 찍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시점이 바로 오늘이 아닐까? 급하게 돌아가는 세월이긴 하지만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잠시 쉬면서 한 번 둘러보자. 그래야, 더 늦기 전에 해결책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좀 빗나간 달리기를 멈추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별똥별/최송연 선교사


 




찜통처럼 후끈거리고 무덥기만 하던 여름도 어느새 다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진 것을 보니까, 가을이 완연하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지나고 나면 곧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진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가을은 계절로서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는 것이다.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꼭짓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 때문에 급기야는 분열하고 갈라서야만 하는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터닝 포인터(Turning point)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시각, 긍정적인 시각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넘어, 초대교회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주신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큼 밀접한 관계로 함께 이방인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던 멋진 동역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주던 과격한 성품의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그 이름이 주는 뉘앙스대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 있었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 바로 이 바나바였던 것이다(행 9: 27). 그 후로, 이 둘은 서로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사이로 급진했으며,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나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그들에게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김을 볼 수 있다.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라고 하는 요한을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둘은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만,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강하게 반대한다(행 15: 37-38).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불화가 시작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마가였다. 왜일까?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던 1차 선교 여행지 중의 한 곳인 '밤빌리아'에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을 등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되돌아와서 두 사도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런 마가의 행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데도 매개변수였다. (행 15:37∼39)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큰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행 4:36), 바나바에게서 좀더 배울 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 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로 비쳐질 뿐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화목할 수 없을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의 주장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피치 못할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불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포인트가 되겠다. 사상이나 견해가 서로 너무 맞지 않을 때는 심하게 다투고 죽기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무익하다. 그럴 경우에는 서로 축복해주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대 교회 이방인의 선교사역은,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은 두 사람의 지도자가 각기 등돌리고 돌아서게끔 악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막 태동한 이방인 선교사역에 큰 위험을 주는 요소였고, 큰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을 바라보게 된 마가 역시 마음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도의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애통하는 때가 그에게 있었지 않을까? 그런 그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마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여기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록할 때,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희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비겁한 마가가 아니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훗날, 이런 마가를 가리켜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며 아꼈고, (벧전 5:13) 로마에 있던 바울은 마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 골로새로 보내면서 골로새교회에게 그를 잘 대접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골 4:10). 순교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마가를 데려오라고 간절히 부탁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딤후 4:11)

이렇듯, 훌륭한 두 사도의 격렬한 다툼의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듯, 마가의 남은 여정은 신실한 일꾼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국에 가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던 바울 사도에게마저 중요한 사람, 인정받는 동역자로 거듭난 것이다. 마가는 한 때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조성한 원인 제공자였던 부족한 사람이지만, 회개한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뉴욕 교계의 분쟁과 불화의 몸살은 우리가 모두 함께 앓고 있는 심한 몸살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바 된 귀한 형제 자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생명이다. 이런 귀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이다. 그럼에도 앞선 몇몇 지도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한, 아름다운 화음을 울려야 할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인하여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작금의 뉴욕 교계 역시 모두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 아집이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다툼으로 분열될 지경까지 가게 되었으나, 그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고 그 일 때문에 더욱더 훌륭한 선교의 장이 열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분쟁도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고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찢고 겸손한 무릎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자신의 주장, 자기 의(Self- Righteousess)에 갇혀서 살았다면, 자기 살을 찢어내는 아픔, 고육지책 (苦肉之策)을 감행하고서라도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 되기 힘써 지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세포분열을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오늘이야말로 뉴욕교계가 바른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순간들을, 결코 가볍게나 헛되이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멋진 날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세계에 흩어진 성도들)는 뉴교협 교역자님, 평신도 지도자님들, 그리고 뉴욕 교협에 소속한 모든 성도님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 이 아픔을 딛고 잘 해내실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멋지게 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믿어보고 싶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사도행전 15:36~41)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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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창 시절, 교정에서 애국가를 열창할 때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란 소절에서는 아주 신나하며 목청을 돋우어 힘차게 불렀던 기억이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애국가에도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내 친구들은 종종 ‘하나님이 맞냐, 하느님이 맞냐’하고 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주저함 없이 ‘하느님’이시다, 왜?”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하늘에 계신 분이니까, 하느님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현대도 같은 질문으로 성도들 간, 혹은 목사님들 간에 서로 심각한 대립현상을 보이며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주요 논점으로 대두하고 있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문제를 두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잠시 고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느님'의 사전적이나 일반적 의미:

과연 국어사전은 ‘하느님’과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종교어로서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됨.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짐. 하늘. 황천'이라고 정의된다. 이를 살펴보면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하느님’이란 모든 종교인이 사용하는 용어이며 '그리스도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 천지(天地)의 창조주(創造主)이며 전지전능하고 영원한 존재로서, 우주 만물을 섭리로써 다스림, 천주(天主), 하느님'이라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사전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하느님을 개신교(改新敎)에서 이르는 말'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일반적인 천공신(天空神) 개념으로 볼 때 ‘하느님’은 우리말로는 하늘, 한자로는 천(天)의 존칭어인데, 광활하고도 높은 창공은 종교적 궁극자 및 최고원리의 상징으로서 인류 종교현상 속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종교표현이다. 종교학자들은 고대인들이 하늘이나 땅을 단순한 현상이나 물체로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힘을 보고 그 거룩함의 신성을 경외한 것임을 밝혀내었다. 가장 오래된 문자문화를 지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누(Anu)신, 가나안 지방의 엘(El)신, 그리스의 제우스(Zeus)신들은 모두 천공신(天空神)으로서 다신(多神)들 중에서 그들이 아버지 혹은 천상회의의 임금으로서 권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다신(多神)주의자들 개념으로서 절대주권자, 천주님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이 이름은 모세에게 4개의 히브리어 자음(YHWH)으로 계시되었다. 바벨론 유수(BC 6세기)가 끝난 뒤, 특히 BC 3세기부터 유대인들은 2가지 이유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더는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유대교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얻어 보편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모든 신에 대해 보편적인 주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신'이라는 뜻을 지닌 일반적인 명사 '엘로힘'을 '야훼'라는 이름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야훼라는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발언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회당 예배에서는 아도나이('나의 주')로 발음했는데,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 역은 이 단어를 '키리오스'(주)로 번역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이 지니는 이 고유한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Yahweh-Asher-Yahweh)는 것이 가장 정확한 뜻이라고 믿는다. 사무엘 상에서 하나님은 야훼 테바오트(Yahweh Teva-'ot), 즉 '그는 만군(萬軍)을 존재케 한다'는 뜻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서 '만군'은 하늘의 왕국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나님의 이 고유한 이름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인데, 이것은 '야훼'라는 이름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기독교는 왜 ‘하느님’ 대신 ‘하나님’이라 부르기를 더 선호하는가?

기독교는 공식적인 '하나님' 칭호에 대한 태도는 시대별로 사용한 성서기록에 따랐다. 우리들의 '하나님' 칭호에 대한 변천은 성서 번역사와도 연관되어 있다. 먼저 대체로 한글성서의 번역과 사용시기를 구별해 보면 개인역 시대(1882-1903), 공인역 시대(1904-36), 개역 시대(1937-51), 맞춤법 통일안에 따른 개정판 시대(1952-70), 신.구교공동번역 시대(1971-현재)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한글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 채택할 때 계속적으로 상관된 개념은 곧 '하늘'(heaven)과 '하나'(one)이다. 그리고 이들 개념의 복합, 지역적 방언, 한글맞춤법과 한국어 발음의 변천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서 완벽하다.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란 명칭이 옳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를 의미하므로 유일(唯一)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크다'를 의미하는 '한'에 통하는 말이므로 신의 위대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명칭보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올바르다고 본다. ‘하나님’과 ‘하느님’ 사이에 무슨 근본적 차이는 없는 것으로 인정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현재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그리스도교의 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통속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무당 종교의 신으로 오해한다는 것이 개신교도들의 입장이다. 이렇듯 기타 토속, 외래종교도 사용하는 신 명칭인 '하느님'과 구별, 기독교의 하나님을 선별 호칭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하나, 유일(唯一)신되심을 천명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사 45: 5-7 참조), (출 20: 1-17참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심을 강조하셨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 12:29절 말씀), (요 5: 44절 참조), (요 17: 3절 참조 ).
 
‘하나님’이란 용어가 ‘하느님’이란 용어보다 부적절하다는 견해: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란  표현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고 하며, 그 이유로는 하나라는 수사에 존칭 명사인 님을 붙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수사학자가 아니기에 그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라는 것이 수사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 숫자에다 님자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신 분, 한 분,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 하나에다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에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오히려 그런 발상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 주장에 따르면, 또 다른 이유로는 ‘하나님’으로서는 하나이기에, 삼위일체 신앙을 충분히 표현하기에 부족하며, 하나는 하나이지 삼위가 될 수 없고 단일 신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느님의 삼위를 설명하기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글쎄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하나란 숫자를 표기하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본다. ‘하느님’이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본 바로는, 천공 신이요, 다신(多神)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속에 든 다른 위로 보지 않고 각각 다른 세 분의 신으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다신(多神)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성부 하나님 따로, 성자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부터 알아야하지만, 다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짧고 우선 간단히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란: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곧 하나이며, 하나 속에 포함된 세 가지 다른 역할로 본다는 그런 의미다. 성서적 근거로는, 요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역할 분담의 정의는, 에베소 1: 3-10절을 근거한다.
성부 하나님= 창세 전에 인간 구원을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분, 성자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인간 구원을 이루심, 성령 하나님 = 예수의 그날까지, 구원받은 백성을 인치시고 지키시고 견인하심. 이렇듯,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나뉘어져서 일하시는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고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유일(唯一)하신 하나님을 다신(多神) 종교와 혼합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본다. 이외에 신학적인 논쟁은 더 많이 일어날 수 있지만,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기에 그 어떤 논쟁도 피하려고 하며, 여기에 필자가 근거한 것은 신학적 자료가 아닌, 일반 사전적 의미와 성경에서 주는 교훈을 그대로 적용한 것일 뿐으로 더 이상의 깊은 신학적 질문은 나에게 물어보아야 대답할 여력이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것을 따져서 설왕설래 다투며 변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앙양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다만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각자가 성경에 입각해서 올바른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절히 구할 따름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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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분별력의 중요성!

 

 

 

얼마전부터 소위 ‘부흥의 물결’ 이라는 명제 하에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치유사역’, ‘입신’, ‘금가루현상’, 죽은 사람 수십 명을 살렸다’ ‘하늘에서 금발의 미녀 천사가 (싸구려)보석을 떨어트렸다’ ‘초자연적 능력’, 등등…인간이 상상할 없는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사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이야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경을 신앙 생활의(Cannon)잣대로 알고 믿는 성도 중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단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함도 있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인터넷에 올려진 이런 말들과 자료들을 접했을 , 혹시, 19세기에 일어났던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런가?…사실, 기대하는 마음과 긍정적 시각으로 사실을 바라보려고 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아주사 거리의 부흥이 우리 세대에도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아주사 거리의 부흥 자체를 이단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현대,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부흥의 불길이란 것에 무언가 예감이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 있다.  이상한 것은 그들대로 뭉쳐서 예언이란 이름으로 서로서로 올려주기도 하고 세워주는가 하면 성경에도 없는 ‘입신’이란 이름 아래 천국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드나들고, 각종 보석(싸구려)들을 천사가 떨어트렸다고도 하고… 심히 수상쩍은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본다. 글쎄다, 그런 조잡한 일들이 과연 성서적이며 창조주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은사(선물)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 입신상태의 ,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같다고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수가 있다.

 

1.       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 )

 

2. 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 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 직분 자들

 

3. ‘샤머니즘’적 신앙, (무당 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사단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 ,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드기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더욱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같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다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로 신비주의 자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보이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도들의 대처 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한다는 성경 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22:18_19, 벧후1:20 참조)

 

2.이적과 기사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말씀에 따라서 반드시 영을 믿지 말고 말씀을 토대로 검증할 (14:1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14:26, 15:26, 고전12:3 )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쳐주시는 사역,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수가 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한다. 성령님께서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 성경을 풀이할 ,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주신다. (2432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한다고 한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 사도가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상태가 ‘입신’이다 라고 수도 없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 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구태여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다.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들의 꿈에나 혹은 비몽사몽 간에라도 나타나셔서 통곡하셨다면, 이유가 오직 사람들의 잃어진 영혼을 위해서요, 사람의 영혼을 전도하지 않는 게으름과 주의 종들의 시기질투로 말미암아 전도문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어야만 한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이외에 어느 것도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의 눈에 눈물을 흘리시게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설사 통곡하시는 주님을 환상에서나 비몽사몽 ( 역시 그런 체험이 있다!) 뵈었다고 하여도 이유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는 선전도구로 활용하거나 다른 성도들보다 신령하다고 착각을 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사람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떨어진 자요 그런 영혼은 이미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전락된 상태일 뿐이라고 저는 믿는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팔아먹어서도 것이며, 무조건 모든 기적과 이사는 폐지되었다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 모든 이적과 기사가 검증없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고 저는 확신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합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모두어야 하며 위에 세워진 교회, 하나님의 피로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주인이 되심을 믿고, 주님의 청지기로서 서로 섬기며 봉사해야 함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어떤 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허락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내가 신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섬기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고, 어떤 특정교회에 국한된다고 하는 생각으로 신령한 사람을 따라 다니는 습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 이런 사기극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 1)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 15)

 

 

    : 별똥별/최송연

 

 

 

 

 


 
나는 오래 전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 적이 있다.

(무조건 성령 받으라는 게 뭐하라는 겁니까? 기도하고요? 부흥집회 참석하고요?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성령 받게 된다면 수천 번도 더 받았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를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령이 저에게 임하셨다고 1초 만에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던겁니까? 제가 바보라서 그런지 제 믿음이 거짓인 것인지, 제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지, 예수를 믿고도 여전합니다. 까칠한 제 성격을 바꾸자고 뭔짓인들 안 해봤겠습니까? 님은 저처럼 스스로에게, 남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고, 상처줌으로 인해 준 상처를 다시 돌려받는 악순환에 "주여 나를 죽여주세요"하고 기도해 봤나요?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정말 해결방법이 있다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써주세요. 님의 글은 저같은 사람에게 비웃음으로 들릴 수도 있답니다.)

그러고 둘러 보니 웹상으로 이곳저곳에서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참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되어 그 부분을 함께, ‘구체적으로’ 좀 다루되 신학적으로가 아닌,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질문자님께도 긍정적 해답이 되고 우리에게도 다시금 좋은 깨달음이 되도록 성령님의 조명 하심을 간구해 보면서...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이다. 사람의 영혼(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 중생(Regeneration)’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질문자의 말씀대로,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a) 회개(悔改, Repentance)가 있게 된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래서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①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죄로부터 떠나려면 먼저 죄를 죄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율법(롬3:20)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②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포함한다. 참된 회개는 상한 마음(시51:17)을 동반하는데, 사람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③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포함한다.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캄’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뜻으로, ‘슈브’는 ‘돌아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 ‘메타멜로마이’ 역시 ‘뉘우치다’는 뜻으로, ‘메타노이아’는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웨스트민스트 회개 중
 
b) 옛(육신적) 사람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전환(Conversion)된 여정이 시작된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하며 생활로 증거된다. 내가 마음에 예수가 구세주임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롬 10: 9-19절 참조),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요,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 (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만만에 콩떡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없지않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엄마, 새로 산 내 운동화 어딨어요? 엥~! 학교 늦겠는데!” “그건 네가 네 방에 가져다 두던 것 같던데 왜 밖에서 찾느라고 그러냐, 아가, 너무 허둥대지 말고 네 방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찾아보렴.”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내던지고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면서 평소와는 달리 소리부터 질러대는 어린 딸을 타이르시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몸이 유난히 허약했던 어린 시절, 나는 책벌레란 소린 들었지만,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전날 저녁서부터 가슴이 설레었고 새벽부터 일어나 방방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내가 어린 시절에는 봄, 가을 운동회란 것이 있었고, 이 운동회는 학교의 행사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 지역의 큰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운동회 날이면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인근 마을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 들고 와글와글 학교 마당으로 모여들었고, 경기 종목도 다양해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어른도 아이도 함께 어우러져 신나는 축제의 한마당을 연출했던 즐거운 날이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펼쳐졌지만, 그중에서 모두에게 인기 있었던 종목은 단연 ‘줄다리기’였다. 유약하고 운동신경도 둔하기만 했던 나에게도 유난히 기대되었던 종목은 역시 줄다리기였다. 나는 어떤 종목에서건, 개인기만으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미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ㅠㅠ 그러나, 단체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줄다리기 같은 종목은 축구처럼 고도의 테크닉과 뛰어난 개인기를 요하는 종목도 아니다. 그저 줄을 잘 서, 그날 힘센 아이들이 많은 팀에 잘 배치되기만 하면 함께 승자가 될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줄다리기를 할 때, 선생님은, 힘이 세고 건장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나처럼 유약한 소녀들은 맨 꼴지에 세운다. 맨 뒤에 서 있는 사람도, 물론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겨야 하겠지만, 이기고 지는 일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조역일 뿐이다. 아닌 말로 줄을 잡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여도, 앞에서 힘센 아이들이 잘 해내기만 하면 모두 함께 승자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청군 홍군, 혹은 청군 백군으로 나뉘었고, 모두 자신이 소속된 팀의 칼러를 상징하는 청색 홍색 또는 백색의 예쁜 띠를 하나씩 건네받아 머리에 둘러 표식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팀은 색깔로 정해지고, 내가 좀 약해도 내가 속한 팀이 강해서 그들이 이겨주기만 하면 나도 덩달아 이기는 것이 되니, 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가!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흘리신 피를 믿고 구원(Salvation)받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의 공로가 전혀 가산되지 않는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 31)”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은 영적으로 보면, 내가 어느 팀에 속할 것인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 어둠의 권세자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에게 속할 것인가, 소속팀(?)이 결정지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상 술어로는 기본 구원론이라고 하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 외에 우리(성도)가 해야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기본 구원론, 여기에 우리(성도)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니 성도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 회개만 하면 된다,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대는 잘못된 구원관이 오늘날 기독교를 싸구려 구원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성도)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한순간에 공로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확실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 자녀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 구원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로서 삶에서 승리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ry, prosperity gospel)은 성경을 왜곡시킨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변질 시킨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logy, prosperity gospel) 은 같이 설 수 없다. 하여, 수많은 개혁교 신학자들, 목사님들, 성도님들이 오늘날 이 번영신학이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우리 중에는 번영신학을 논하기만 하면, 오순절 교회를 비방한다, 라고 생각하며 섭섭해 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 모든 것은 뒤로하고 우리는 서로 말씀의 떡을 떼며, 내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가 어느 교단이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한가 다투기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좀 더 바로 깨닫고 바로 믿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단은 제외)

진정한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최근 우리나라에는 '고지론(高地論)' 이 왕성하다고 한다. 이 "고지론(高地論)”이란, 기독교인이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위치에 오르는 것이 더욱 그 파이를 크게 한다고 하는 지론으로서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의 또 다른 모습이며,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도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함으로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더욱 확대하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의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종 질병, 가난, 고통, 그리고 불운 등에 아니 심지어 사회적 현상인 전쟁과 정치에도 영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서, 회개하지 않아 당하는 고난이라 주장한다는데 있고, 고지론(高地論), 번영신학의 취약점은, 십자가의 도, 좁은 길을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거스린다는데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고백과 결단,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감수하는 신앙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런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 좁은 길,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앙이다. 이렇게 될 때, 순교도 가능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본래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prosperity)란, ‘번영’외에도, ‘잘 해내는(doing well), 성공하는(successful), 그런 뜻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나 목사님들이 승리하는 믿음을 이야기 할 때, 대체적으로 이 prosperous란 단어를 ‘번영’에만 국한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victor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Victory는 완전한 승리란 뜻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단 한 번의 그 십자가 사건이 완전한 승리(victory)인 것이다! 그러니까, victory가 결과라면, prosperous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기본 구원론( 그리스도가 이루신 (victory)와 삶에서 지속하는 성화론(sanctification), 승리하는 믿음(prosperous faith)은 반드시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고로, 필자는, 번영(prosperity, prosperous)란 단어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뒤바뀐, 잘못 사용되는 (prosperity gospel)이 문제라고 본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일하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육신만을 위해 일을 해 주시느냐?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번영 신학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우선순위가 뒤바뀐 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나쁠게 없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후 5:7)”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은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도라면,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대개 ‘소년 다윗과 골리앗 장군’ 아니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후, 사건 은폐를 위해 충신 '우리야'를 죽인 다윗 왕의 이야기 정도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극히 사소한 일부로서 다윗의 신앙과 삶을 부요케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게 된 결정적 동기는 아니란 것이다. 다윗, 그가 ‘프라스프러스'(prosperous) 신앙의 소유자일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 그 숨은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이다!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 속에 승리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로 돌리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삼하 16: 7-8)

‘시므이’의 저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그 저주성 폭언마저 자신의 죄에 대한 채찍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함으로 받았다. 바로 이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수의 저주성 폭언에 대처하는 방법,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doing well)신앙, 성화된 신앙으로 정진할 수 있느냐,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인 실패자로 남느냐 갈림길의 시금석을 가르는 놀라운 비밀이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잘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다!

반면,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울컥울컥 순간순간 보복 심리로 기울고 있는 초라한 내 자신, 감정을 다 풀었노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틈만 있으면 미해결의 감정이 속을 헤집고 올라와 낑낑대는 몸부림, 위장된 겸손, 자기 실력을 가꾸고 다듬어 빛을 보려는 생각보다 쓸데없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를 공격할 틈만 노리는 비루한 사울의 편협함, 내 가슴 시리고 아픈 것만 생각하고 형제의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을 다독일 줄 모르는 유아적 사고, 다윗처럼 듬직한 감정으로 대범함을 보이는 대신, 감정처리가 잘 되지 않아 들쑥날쑥, 팔팔끓는 냄비처럼 찼다 더웠다 바글대는 사울의 얄팍함, 성령의 사람답지 못한 이런 한심한 자화상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원수가 저주하는 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단으로부터 오는 사악한 음성이라며 혈기 내고, 비아냥거리고, 한 개 받으면 열 개로 되돌려주지 못해 안달이다. ‘당신이 사단이다, 아니다, 네가 사단이다.’ 들어본 적 있는 소리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들이기에…

물론, 다윗은 우리네 범인과 다른 점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된 처량한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맹렬한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 왕의 부하 장수 중 하나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허락만 하시면 당장에 칼로 쳐죽이겠다고 왕께 간언했다. 그때 다윗 왕의 반응,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너무 허허롭고 너무 멋지다. 그 호기, 그 믿음을 배우고 싶다.

내가 만약, 이웃의 저주성 발언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혹시 실수로라도 잘못된 길에 들어갈 것을 염려하셔서 속히 그 자리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프라스퍼러스(doing well, successful)신앙을 소유한 성도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줄다리기 시합 같은 영적 경기장에서, 나도 승리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연약하고 힘이 없어, 언제나 꼴찌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나마 굳게 잡고 있어야 할 말씀의 줄을 맥없이 놓아버리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으리만큼 피곤한 때가 너무 잦은 것도 탈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잡고 있는 구원의 밧줄만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데, 손바닥이 아프고 쓰리다 하여, 시합 도중에 잡고 있던 줄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면, 나는 ‘탈락자’가 될 것 뿐이다. 내가 강하든지 약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줄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나는 이미 그 팀의 소속 요원이 아닌 것이다. 어찌하던지, 주님의 은혜 속에서 승리(doing well)해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벗어난 자는 주께서 이루어두신 찬란한 승리(victory)와는 무관한 불쌍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말세가 가까워져 옴을 볼수록, 더욱더 주께 바싹 붙어 있어야 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 주님께 붙어 있는 신앙,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주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의 힘, 주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 12)”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 10)” 

출처: 목양연가/글: 최송연의 신앙 칼럼

"마라나타", "마라나 타", "마란 아타"의 뜻과 기원

 

 

 

 

 

 

  

 

Maranatha (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 is a two-word Aramaic formula occurring only once in the New Testament (see Aramaic of Jesus) and also in the Didache, which is part of the Apostolic Fathers' collection. It is transliterated into Greek letters rather than translated and, given the nature of early manuscripts, the lexical difficulty lies in determining just which two Aramaic words comprise the single Greek expression, found at the end of Paul's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 Cor 16:22).

 

마라나타(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마라나 타 혹은 마란 아타)는 두 단어의 아람어식 어구로는 ( 예수님의 아람어를 참조하라) 신약 성경에서 그리고 디다케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것을 ‘사도의 아버지’ 수집(collection)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초기 원고의 성격, 두 단어의 아람어가 단 하나의 그리스어 표현을 포함하는 결정에 어휘의 어려움이 있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지기보다 그리스 문자로 바뀌어(음역되어) 졌고 , 고린도전서 16: 22절 바울 서신의 끝머리에 표현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고전 16: 22)

 

If one chooses to split the two words as מרנא תא (maranâ thâ), a vocative concept with an imperative verb, then it can be translated as a command to the Lord to come. on the other hand, if one decides that the two words מרן אתא (maran 'athâ), a possessive "Our Lord" and a perfect/preterite verb "has come," are actually more warranted, then it would be seen as a credal expression. This interpretation, "Our Lord has come,"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n equivalent of this in the early creed acclamation found in the biblical books of Romans 10:9 and 1 Corinthians 12:3, "Jesus is Lord."

 

만약, 누군가 두 단어로 (마라나 타) 띄어 쓰도록 선택한다면, 필수 명령형 동사 호격 개념으로는주여 오시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누군가 소유격으로 번역하고저 할 때는우리의 주님이 가능하며 완료형/과거 동사의 표현은Has come, 오셨다가 사실상 더 보장되는데 오래전 신조(교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번역은 성경 로마서 10:9과 고전 12:3에 나타나는 "예수는 주시라"는 교회사에서 일찍이 신조(교의승인(허락)을 토대로 이 해석 방법의 타당성을 지원받기도 한다.  

 

In general, the recent interpretation has been to select the command option ("Come, Lord!"), changing older decisions to follow the preterite option ("Our Lord has come") as found in the ancient Aramaic Peshitta, in the Latin Clementine Vulgate, in the Greek Byzantine texts, Textus Receptus, critical Greek
texts like Westcott and Hort, Tischendorf, Cambridge, etc., and in the English translations like the King James Version, the Finnish Raamattu, etc. one reason the change from the previous scholarly view has occurred is that the P46 papyrus (ca. A.D. 200) divides it as μαρανα θα ("marana tha").
 
일반적으로, 최근의 해석은 고대 아람어 페쉬타에서, 라틴 크레멘타인 벌기트 성경에서, 그리스 비잔틴 텍스트들에서 발견되어진 것처럼 “우리 주님이 오셨다”의 이전 결정을 변경, “오소서, 주님!” 명령형으로 선택했다. 그리스 비잔틴 교재들, 까다로운 웨스트코트와 같은 그리스 텍스트들과 호르트, 라틴 클레멘타인 벌기트 성경, 호르트비스첸도르프, 캐임브리지 등등, 그리고 킹 제임스 버젼과 같은 영어 번역들, 핀란드 라아마투 등등에서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바꾼 단 하나의 이유는 중요한 그리스어 교재 학술 보기 P46 파피루스 (ca. A.D. 200) 같은 곳에 “마라나 타”로 띄어 분리하는 일이 나타났던 것이다.

 

The NRSV of 1 Cor 16:22 translates the expression as: "Our Lord, come!" but notes that it could also be translated as: "Our Lord has come"; the NIV translates: "Come, O Lord"; the NAB notes:

 

고전 16: 22을 “NRSV"에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메모는 역시 "우리 주께서 임하셨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NIV 에는 "오시옵소서, 오 주여로 번역되었다; NAB 메모:

 

"As understood here ("O Lord, come!"), it is a prayer for the early return of Christ. If the Aramaic words are divided differently (Maran atha, "Our Lord has come"), it becomes a credal declaration. The former interpretation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 Greek equivalent of this acclamation in Book of Revelation 22:20 "Amen. Come, Lord Jesus!""

 

여기서 (“O Lord, come”)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있으시기를 구하는 하나의 기도문이다. 만약 아람어식 단어를 다른 형태로 나누면 "우리 주님이 오셨다(임재하셨다)”이며, 이것은 신조(교의)로 선포되었다. 이전의 번역은 그리스 어의 계시록 22: 20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동등한 타당성을 지원받는다.                  

 

The 1985 New Jerusalem Bible translates 1 Cor 16:22, "If there is any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a curse on such a one. Maran atha." In the context of First Corinthians, understanding the Greek "maranatha" as Aramaic "Maran atha" in the preterits sense would provide substantiation for the preceding anathema. That is, 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is accursed because our Lord has ascended and come unto his throne (e.g., Dan 7:13) and wields power to implement such a curse. It would also substantiate the following prayer for grace from the ascended Lord Jesus, who has come to his throne and then sends the Holy Spirit.

 

1985년 새 예루살렘 성경은 고전16:22을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Maran atha"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으로 보아서, 과거의 판단력 안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maranatha"를 아람어 "Maran atha"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앞에 말한 저주에 대한 입증을 제공할 것이다. 즉 주님의 승천과 그의 보좌 (단 7: 13)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무서운 저주를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왕위와 승천하신 주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임하실 그분의 보좌, 그리고 거룩한 성령을 보내어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출처: 영어 본문/ 위키피디아: 번역: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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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따르릉!’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눈이 떠졌습니다. 얼떨결에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아직도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고, 모든 만물이 고요 속으로 헤엄치듯 하느적 거리는데…간밤에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온몸이 천근같이 무겁고 머리가 지근덕거렸습니다.

“누가 이런 새벽에 전화를 걸었을까?”
웬만히 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이 없을 텐데… 혹시,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무슨 문제라도…? 갑자기 불안한 생각에 쿵덕거리는 가슴,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여보세요!” 들려오는 낯선 음성은 구슬같이 밝고 명랑한 것을 보니 별로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담 도대체 누가 이 밤중에 사람을 깨운담…, “여보세요? 누구시지요…?” “사모님! 저예요, 저… 김 선화(가명)말이에요. 절 모르시겠어요?” “김…누구 시라구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해도 잠결이라 그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왜 있잖아요? 한국에 계실 때, 교회마당 아래 살던 사람…김 선화 말이에요.” “아, 그때 그 지독한 사람…” 그제야 철거민 촌에서 개척할 때, 어려웠던 젊은 시절의 기억과 함께 우리를 많이도 괴롭혔던 그녀의 누렇고 둥그런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신학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서, 우리가 개척을 시작한 곳은 부산 지역의 어느 철거민 촌이었습니다. 단칸방에서 개척을 시작해서 고생하기를 몇 년…, 이제 겨우 언덕 위의 조그마한 밭떼기를 교회터로 장만하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말은 성전부지였지만…실은 손바닥만 한 언덕 위의 밭떼기였지요. 그 땅을 파고 반듯이 고르게 다듬어야만 교회로서의 허가가 나온다는데 …맨손으로 땅을 고르자니 막막했습니다. 근로자를 사서 하려니 돈도 없고 도와줄 만한 성도도 없어서 남편 전도사님이 혼자 삽과 괭이를 가지고 올라가서 열심히 그 땅을 고르느라 손바닥엔 피가 다 맺혔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고생 끝에, 겨우 손바닥만 하게 반반한 터를 만들고 그곳에다 가마때기를 깔아 놓고 나니 우리의 눈엔 더없이 훌륭한 성전 터가 된 것입니다. 그 가마때기가 우리들이 하나님께 눈물로 봉헌한 최초의 성전이었지요. 그곳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우리 전도사님은 매일 낮에는 그곳에 올라가서 일했고… 새벽 미명이면 일어나 그곳에 올라가 깔아놓은 가마때기 위에 엎드려서 혼자 눈물의 새벽 재단을 쌓고는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해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새벽기도는 따라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갔다가 들어 오는 남편에게서 심한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예요…?” 놀라서 묻는 내게 “글쎄, 지난밤에 누군가가 우리 성전터에 오물을 쏟아붓는 모양이요. 나도 역겨워서 기도가 다 헷갈리더니만…이런, 이런…바짓가랑이가 홀랑 다 젖어버렸군그래….” “어떻게 하죠? 우리 집에는 물도 귀한데….” 사실, 그 당시만 하여도 철거민 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수돗물이란 사치의 대명사였었지요. 집집이 수도를 놓아준 것이 아니라 한 동리에 하나씩 공동 수도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저는 오물이 잔뜩 묻은 그 바지를 싸서 멀리 동구 밖 개천까지 나가서 빨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밀가루 수제빗국으로 대충 때운 전도사님은 삽을 들고 교회 부지로 올라가서 그 오물들을 깨끗이 치우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깨끗이 치웠으니 괜찮겠지…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다음 날도…또 그 다음 날도…누군지는 모르지만, 오물을 쏟아붓는 일을 그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남편 전도사님의 단벌 바지는 물이 마를 사이가 없이 빨아서 말리느라 또 진땀을 빼고는 했지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누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교회부지 아랫동네 삼십 대 초반의 한 아주머니가 좀 수상쩍긴 했지만…, 그렇다고해도 그들은 모두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이니…따져서 물어볼 수도 없고… , 그렇게 오물과의 쓰라린 전쟁을 묵묵히 참아내기를 몇 년…, 이제 자그마하게나마 아름다운 성전도 지었고 성전 뒤에 칸을 막아서 그곳을 사택으로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도 나날이 부흥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처음 보는 듯한 아주머니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교회 언덕 아래에 사는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도 혼자 남아서 한참을 오열하고 있던 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사택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다짜고짜 “전도사님, 저같이 나쁜 년도 교회에 나올 수가 있습니까?”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며 목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편이,
“그럼요. 아주머니 정말 잘 오셨습니다. 교회는 모든 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주머니는 꺼이꺼이 목을 놓고 한참을 통곡하고 나서,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이 년이 천벌을 받아도 싸지요, 싸…흑, 흑, 제가 천벌을 받은 거예요…천벌을…”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면서 우느라 말을 채 잇지 못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내가 “아주머니, 천벌은 무슨…울지만 마시고요,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좀 해 보세요. 그래야, 우리가 기도라도 해 드리지요.” 하면서 달랬습니다.

 

그제야 하시는 말인즉, 그 아주머니는 불교를 믿는 사람인데,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매일같이 밤만 되면 온갖 더러운 배설물이 든 요강이며…멸치젓 찌꺼기며…할 수 있는 대로 더러운 것이란 더러운 것은 다 동원을 해서 성전 터에 들고 와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젊은 전도사님 내외분이 한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오히려 더 얄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쓰레기가 모자라면 동네에 있는 것까지 모두 거두어 밤이면 교회 터에 가져와 쏟아붓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리기간도 아닌데 갑자기 하혈이 비치면서 심한 악취마저 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뭐 괜찮겠지…하면서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것은 남편이 양복점 기술자였지만, 계속되는 불경기에 아이들은 올망졸망 5명씩이나 되니 그 어린 것들의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워서였답니다. 하기야, 그때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철거민들이었고 보니… 대부분 모든 사람이 다 어려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개척하는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끼니를 거르는 날이 밥을 먹는 날보다 더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건강만 있으면 그런대로 버텨나갈 수가 있었는데 건강을 잃고 병원까지 들락거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여유가 없는 그녀는 병원에도 한번 가 보지 못하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하고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몸이 점점 더 이상해 오고 기운이 빠지면서 밥맛도 없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산부인과를 찾아가 진찰을 받은 결과 자궁암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는 암 말기에 3개월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들 부부는 좋다는 약은 다 써보고 용하다는 무당은 다 불러서 굿도 해 보고 효험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는 절간에 올라가서 삼천 배도 드려보고…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고…남편마저 일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데 아내가 아프니 정신이 다 나가서 그런지 일은 점점 더 어렵게만 꼬여갔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빚을 얻어서 메꾸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들에게 더 이상은 돈을 꾸어주지를 않더라고 합니다. 3개월 시한부 생에 돈을 더 꾸어주었다가 언제 받겠느냐는 것이겠지요. 하는 수없이 낙심한 상태에서 포기한 그 아주머니는 집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울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자기가 지난날, 교회터에 온갖 더러운 오물을 다 쏟아붓던 악행이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이 떠오르면서 속에서부터 벌벌 떨려오기 시작을 하는데 나중에는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심한 두려움이 몰려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두려워 떨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 내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죽기 전에 지난 날 내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나 빌고 죽어도 죽어야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새벽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이렇게 교회로 올라온 것이라고 합니다.“ 아, 그랬었구나…그때 그 지독한 사람이 바로 이 아주머니가 틀림없었구나….” 생각해 보면 그때 일이 괘씸하기는 하지만…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보아하니 이제 30대 초반, 나보다 겨우 네댓 살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올망졸망 다섯 명이나 되니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서야 하겠는가… 하는 불쌍한 마음이 더 앞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주머니를 부둥켜안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용서를 하셨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이제 예수님이나 잘 믿어 보자고…교회에 찾아오셔서 너무나 고맙다고 위로하고 기도해 주면서 같이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아주머니는 저녁만 되면 이불을 싸들고 교회로 올라와서는 밤새도록 혼자 울면서 기도하다가 새벽기도를 마치면 집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때가 10월 중순쯤 된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그런 모진 추위에도 그 아주머니의 애절한 철야기도는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때로는 저도 방에만 누워서 잠을 청하기가 너무 미안해서 아기 둘을 재워 놓고 나면 살며시 빠져나와 교회에 나가서 울면서 같이 기도하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들어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지나고 의사가 선고한 3개월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서리치게 추운 가난한 철거민 촌의 기나긴 겨울도 다 지나가고 이제는 3월… 아름다운 개나리꽃이 여기저기 다투듯이, 노랗게 떼를 지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3개월이면 죽어야 할 아주머니가 6개월이 넘어도 죽지를 않고 오히려 몸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고…누렇고 핏기없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아오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해 주었다.”하고 여기저기 간증을 하고 다녔고… 남편을 비롯한 온 가족을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것을 본 빚쟁이들이 괜한 헛소리 하지 말라면서 정말 그런지 어디 같이 한 번 처음 암이라고 진단을 내렸던 그 병원에 가서 확실한 진찰을 받아 보자고 하며 그 아주머니를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그때 그 산부인과를 데리고 갔었습니다. 다시 자세히 검진해 본 담당의사가 나오더니, “당신이 정말 그때 그 김 선화 씨가 확실하냐? 암이 있었던 흔적마저 사라졌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좋으신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은 죄를 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회개한 자를 용서해 주시고 치료까지 해 주심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하든지요...

그 후로 우리는 곧 외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왔고…우리가 떠난 다음에도 그 교회에 남아서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물질로도 크게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남미에 있는 어느 큰 회사에서 양복 기술자 중 최고 책임자로 뽑혔고… 지금은 온 가족이 남미에 이민을 하여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요 …헤어진지 20년이 더 넘은 지금도 그녀는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목사님 내외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한다는 것이…그만 이곳 남미와 그곳 미국의 시차를 잘 몰라서 실수했노라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용서라니요…집사님은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체를 몸으로 보여주신 산 증인이신데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2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성령의 사람이란...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다 고백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의 사람이라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많으나 실제 삶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이 글을 정리하는 나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인가? 그러하기에,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사람인 듯, 다른 목회자들을 형편없는 사기꾼 정도로 몰아가면서 뛰어난 화술로 말씀을 강론하던 한 유능한 목사가 자살이라고 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우리들 때문에 흑암의 세계 속에 강력한 빛으로 나타나야 할 교회는 오히려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고, 서로 잘믿는다고 내세우는 말의 홍수 속에서 정신세계는 대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는 한 번쯤,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성경을 되새김질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다닌다고 모두 성도가 아닌 것이다. 요란하게 떠들고 소리 지른다고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삶 속에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다. 사람의 영(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많은 성도들의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하는 것부터 정립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내가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며,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는다. 성령으로 가장한 사단, 광명의 천사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줄 것뿐이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성령의 사람은 곧 말씀의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출처: 목양연가: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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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소리 드높아만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성도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AD 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나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눈이 먼 탓이며, 주님 다시 오심을 보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는 목회자들, 성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니 너희는 그 길에서 속히 돌이켜 떠나야 한다.”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이 아침에 큰 울림으로 내 영혼을 때리며 들려온다.. 그렇다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1. 시날(r[;n]vi )의 역사적 배경:

시날(r[;n]vi ), (신아르), 시날(shinar)은 강 두 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시날을 둘러 있는 두 강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으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유명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졌으며 후에는 바벨로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창10:10에서 위대한 전제 군주이자 제국 창설자인 니므롯이 시날 땅의 바벨, 에렉(수메르 어로는 우룩), 악갓(아가데), 갈레에 그의 왕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니므롯은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앗수르까지 밀고 나아갔으며(창10:10), 패역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여 그 유명한 바벨탑을 세운 곳이 바로 이곳 시날이었다(창11:2).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도 요한은 이 종교 제도를 언급하여 바벨론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칭하였다(계17:5). 탐사자들은 바벨론의 위치는 힐라옵 동북방 9.6km 지점과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이며,지금도 그곳에는 예루살렘의 왕을 잡아다가 유폐시켰던 현장을 비롯하여 53개의 신전(神殿)과1,300개의 제단이 더러는 부서진 채 남아 있다고 한다. 아간이 훔친 외투는 시날의제품이었으며(수7:21),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나 전부 금실로 짠 매우 값진 수놓은 옷인 것 같다.(참조: H. J. Austel; Wycliffe BE).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은 음란의 도시, 교만의 도시,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장악한 곳,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 바쳐진 물건, 하나님께 드려진 그 구별된 물건에 욕심을 부렸던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과 그 가족이 망하고, 아무 죄없던 그 이웃마저 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바로 그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했고, 결국 아간은 그 범죄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들, 딸들, 소들, 나귀들, 양들과 장막 그리고 그가 흠모하여 훔친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 금과 은과 함께 돌무더기에 깔리고 불살라져서 아골 골짜기에 묻혀버렸다.

여호수아서의 기자는 그때 여호와께서 극렬히 분노하셨다고 표현했다(수 6:21~26).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물건에 대한 욕심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나 한 사람이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미혹되어 눈이 멀게 되면, 나도 망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 전부가 망하거나 아니면 큰 해를 당하게 된다.

2.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앞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산의 외투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엄청나게 값진, 금실로 짠 옷으로서, 그 외투를 한 번 보게 되면 누구나 탐낼만한 매력적인 물건인 것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써 인간이 가로채서는 안될 그 무엇,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금지된 실과,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에도 비유될 수 있다. 영적으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지만 따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 취해서는 안 될 그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보아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을 전제로,

a) 성도는 금지된 물욕(物慾)을 제어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는 영적으로 물질이다. 현대는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말세지말이다. 성도는 내게 허락되지 않은 물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물욕, 곧 금지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탐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서 직장에서 신임을 잃고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더 심하면 그 물질 때문에 자살까지도 하게 된다. 목회자들이라하여 이에서 제외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헌금을 자신의 임의대로 유용하는 것이나, 정한 사례비 외에 판공비를 받아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본다. 물론 목회자가 정해진 사례비 외에 목회 활동비가 있어야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목회 활동비를 100% 그 용도 그대로 정직하게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는 말씀은 가롯 유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물질을 탐하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마 2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의 사건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물질을 탐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좋은 예가 된다. 오늘날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예임에 틀림없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그 어떤 직위를 받았다고 하여 그 직위 자체가 구원을 줄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롯 유다도 사도로 택함을 입었지만, 그 직위가 그를 구원시키지 못했다.

b) 성도는 금지된 정욕(情慾)을 제어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 性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최대의 죄악도 바로 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스러운 곳이다. 침소를 더럽히지(히 13:4절 참조) 말아야 한다. 성경에 별처럼 빛나던 인물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모세도 이방인이었던 구스여인을 취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므로 그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민 12:1).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 금지된 성(性)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탐했다가 두 눈 모두 빼이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c) 성도는 금지된 명예욕을 제어해야 한다.

명예욕은 정말 무섭다. 이 명예욕은 사단의 속성이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다 쫓겨난 천사라는 기록이 있다. (겔 28장 참조) 명예욕이 무서운 것은 그 속성 때문이다. 올라가려고 하는 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한다.(잠 14:30절 참조) 동생을 시기한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란 오명을 영원히 남길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요셉의 열한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애굽의 종으로 팔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에 넘겼다.(마 27:18, 막 15:10 참조)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0:6, 11절 참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문제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고의 말씀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린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선한 말씀을 오용 내지, 악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중략-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절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情과 慾心)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절 말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절 말씀)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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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가 개척하였고, 20여 년간 열과 성을 다하여 분신처럼 아끼면서 섬기던 교회를 젊고 유능한 후임 목사님께 물려준 후, 후임 목사님이 편하게 목회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정든 곳을 등지고 머나먼 곳, 낯설고 물 설은 이곳으로 떠나왔다. 이제는 쉬겠다 말하여도 누구 한 사람 나무라지 않을 나이지만 젊어서부터 개척교회에 대한 애착과 특별한 사명이 있는 남편의 뜻에 따라 새로운 지역에 둥지를 트는 즉시 다시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개척교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종철 대표님께서 “마음에 감동이 오시면 칼럼 글로써 한번 쓰셨으면 합니다. 저도 개척교회에 대한 애정이 유달라서...” 하신다. “개척교회에 대한 애정이 유다르다.”라고 말씀하신 이종철 대표님의 말씀,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인정한다. 그랬다. 내가 아멘넷에 몸담기 시작한 때, 가장 내 마음을 뜨겁게 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그러니까 아멘넷이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들른 아멘넷, 마침, 인기절정에 있던 한 분, 칼럼니스트 목사님의 글 아래는 매일같이 열띤 논쟁이 벌어졌고, 나도 관심을 두고 읽다 보니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약간 반하는 의견을 남겼다가 의외의 강한 반응을 받았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 어차피 미련 둘 이유도 없는 곳, 이참에 아멘넷을 아예 등지면 되는것이다. 떠나기 전, 잠시 눈팅이나 해볼 요량으로 혼자 이리저리 클릭하고 다니던 중, 광고 배너 난에서 나의 시선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물론, 아멘넷이 다른 사이트와 달리 짜임새가 알찬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유료 광고 배너 숫자보다 개척교회의 무료 광고 배너 수가 더 많은 아이러니(?) 한 진풍경이었다. 그랬다. 그때 나는 가슴이 뭉클, 어떤 뜨거운 감동이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멘넷이 이제 첫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것 같았으니, 경제적인 부분 역시 쉽지 않을 것 같았고, 대표님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여러 가지로 열악한 조건일 것이 자명한데 의외의 편집방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척교회를 배려하는 마음” 이런 정신으로 일하는 아멘넷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여 아멘넷 발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고 하는 뜨거운 사명감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고 (그 사명감 때문에 때로는 지나치게 깊게 관여를 하려는 통에 어쩌면 아멘넷 대표님을 피곤하게 한 적도 많겠지만…ㅎ) 두리번거리다가, 뒤 꼍 구석진 곳에 보니까 혼자서라도 쉽게 글을 올릴 수 있는 독자공간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부지런히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단이 들어오면 이단의 베일을 벗기느라 애쓰며 논쟁도 불사하였고…이런 별이의 열정에 점점 더 많은 독자님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한 분 두 분 뜻을 모아 함께 해주시는 분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많은 분이 떠나고 누지문서 장로님과 짐보 형제님 외 몇 분이 남아 계시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내 마음에 큰 감동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바로 아멘넷의 개척교회에 대한 배려와 따스한 마음이다. 개척교회 담임목사님들의 고충과 어려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번 기회에 개척교회의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정리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모두의 생각이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더욱 더 나은 견해들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나누는 시간, 이 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모든 개척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께 바치고 싶다.

개척교회의 현주소:

개척교회의 실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없고, 없고, 없다.”이다. 재정이 없고, 건물이 없고, 성도가 없고, 함께 일할 일꾼이 없다. 대형 할인점 때문에 중소상인들이 모두 죽는다고 세상이 아우성치듯, 부끄럽지만, 교계 내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이미도 부른 배를 더 불리기 위해 각종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손짓한다. 우리 교회는 수평이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과연 있을까? 이런 기현상을 두고 “양 도둑질”이란 듣기 거북한 소리가 한 때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적도 있었다.

이 싯점에서,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내 교회 소속된 성도 중 과연 내가 전도해서 키운 성도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것, 내 교회 울타리 안의 모든 성도가 진정 내가 전도하여 키운 양 떼들이라고 주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곳곳에서 전도하여 눈물로 기르던 양들, 몇 명 안 되는 양 떼나마 주께로부터 맡았기에 애지중지, 감사하며 기르던 양들인데 좋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재정적 능력 덕분에, 뛰어난 화술을 달란트로 받은 덕분에, 내 교회로 몰아들여 온 양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내가 전도하여 키운 양보다 더 많다면?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내 교회의 몸집이 큰 것은 나의 능력이요, 주님이 내게 베푸신 복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웃의 약한 개척교회를 돌아보고, 위해서 기도해 주며, 비록 단기별로라도 일꾼을 파송하고, 물질을 풀어 지원해 주기도 하며 ”힘내라.” 토닥여주는 참된 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진실한 목사님은 진정 찾아볼 수 없는가? 한 세대는 가고 다른 세대가 오기 전, 주 앞에서 생각하며 한 번쯤 반성하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어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분 앞에 서는 날, 후회함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 : 20)했다. 물론 이때 말하는 “남의 터”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먼저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의 본이 되는 바울 사도처럼 목숨 걸고 전도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적어도 남이 전도하여 가르친 양들을 몰아올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개척교회” 는 초대교회와 가장 가까운 교회이며,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목회방법이 아닐까 싶다.

개척교회 목회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무슨 말인가? 비본질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본질에 마음을 다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잃은 영혼을 찾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이다. 비본질이라 함은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 방법을 배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멀어지고 기도하는 시간보다 크게 부흥했다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프로그램을 줏어오려고 이곳저곳 쫓아다니게 된다. 기도하며 말씀 전하는 일에 주력하기보다 대형교회의 성공방식을 배워 자신의 교회에 접목하려 애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것이 과연 옳은 자세일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일꾼을 부르실 때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부르셨고 사용하기 원하신다. 모두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두 달란트, 혹은 한 달란트를 맡기신 것이 아니란 것이다. 자신이 어떤 달란트로 주님의 양 떼를 섬겨야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 기도로 주님께 아뢰어 보고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돈독히 하게 되면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 주력했다면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교인 숫자가 많으면 성공했다고 하고 교인 수가 적은 교회의 목회자는 실패한 목사로 볼 수 있지만 과연 우리 주님께서도 그렇게 보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처음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는 꿈도 많고 비전도 크다. 믿음이란 명분 아래 자신감도 넘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좌절의 벽에 부딪힐 수가 있다. 대체로 개척을 시작한 지 1년에서 2년까지는 그래도 마음에 꿈도 있고 비전도 있고 도와주는 손길도 있어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도 수가 늘어나지 않게 되면 마음이 초조해지고 이때부터 주님을 바라보던 눈을 그치고 대형교회들의 프로그램 위주로 눈을 돌리게 될 수도 있다. 모든 개척교회 사역자분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누구를 만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삶의 질과 품격이 결정되어 진다고 한다. 삶의 품격이 있는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자신의 품격도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없지 않아 있다. 개척교회를 나가면 시설면도 그렇고 뭔가 품격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가난하고 찌든 사람들이 모이는 개척교회 목회자와 사모의 옷차림 역시 품격으로 보면 형편없다. 제대로 꾸밀 수도 치장할 수도 없는 현실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 영혼의 귀중성과는 관계없이 상류층은 상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있고, 하류층은 하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따로 있다. 요즘은 ‘금수저 은수저, 심지어 흙수저”라고 비교하던가…

내가 철거민 촌에서 개척교회를 하면 나도 철거민 촌의 주민들과 같이 절로 저질스러워지고, 상스러워지고, 그저 그렇게까지 변해갈 필요야 없겠지만 그 상황을 견뎌내려면 같은 수준이 못되드라도 적어도 비슷한 수준으로라도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결코 살아 남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셨음을 배워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 논리적이고 세련된 설교 스타일, 찬란한 비전과 고급스러웠던 신앙관은 막노동판의 노동꾼 같은 사고와 신앙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필사 각오로 개척에 임해야 한다.

젊은 날, 우리는 철거민 촌에서 개척하였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밥을 굶기를 부자가 떡을 먹듯 했고, 일을 하려고 하여도 함께할 일꾼이 없다는 생각에 가슴 아팠던 적도 많았다. 작은 건물이라도 지어야 예배를 드리겠는데, 돈이 없으니 일꾼을 살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남편과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던 막노동을 직접 하기로 했다. 나는 조그만 그릇에 돌과 자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남편은 어깨에 메고 우리는 매일같이 작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선교부에서 사준 작으마한 밭떼기를 고르고 벽돌을 찧고 했다. 그렇게 몇 개월 노동을 했더니 나중에는 목이 뻣뻣하고 굳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들고 아려 밤잠을 설치며 눈물로 기도하였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원망과 불평 없이 맡은 일에 감사를 느꼈던 것은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나에게 주님의 일꾼이란 칭호를 붙여주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유혹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더 큰 교회나 교단으로 옮겨가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해주시고 잡아주신 주님의 은혜였다.

아무런 욕심도 없이 주어진 시간에 충성을 다할 때 주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느 순간에 번쩍 들어서 철거민촌을 떠나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내가 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잃어진 한 영혼을 바라보고 험한 길도 마다치 않고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충성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어느날 큰 것으로 맡겨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본질에 충실하려면 먼저 세상 비전(욕심?)으로 가득찬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좁은 길을 따를 일사 각오(주기철 목사님의 말씀)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고 오직 주께서 이끌어주신 은혜를 따르는 것이라면 한 영혼도 귀한 것이다. 자칫 세상적인 방법이나 그들의 방법을 도입하려다가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면, 일생을 바쳐 일한다 하여도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기라성 같은 별들,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말로가 어찌 되고 있는가?주님의 부르신 뜻 안에서 충성을 다한다면 교회가 부흥이 안 되어도 좋고 부흥이 크게 된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주 안에서는 실패도 성공도 없는 것이다.

이삭을 줍는 일에 목숨을 걸자.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아지랑이가 산천을 하얗게 휘감아도는 아직은 이른 봄날, 희망을 노래해야 할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들의 별님, 생뚱맞게도 왠 이삭? 제목을 보며 의아해하셨을 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자연원리나 물리적 현상으로 보면 “이삭”, 그러면 당연히 가을, 그것도 늦가을의 대명사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청년의 때나, 장년의 때나 노년기, 어느 때든지 상관없이 주인이 불러들이는 그날이 곧 알곡을 거두어들일 추수기가 되는 셈이다. 꼭 인생 가을추수기에 가서만 거둘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 아니란 것이다.

이삭줍기의 사전적 의미는 “농작물을 거두고 난 뒤, 논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줍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농사를 짓거나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안다. 가을이 되어 곡식이 무르익게 되면 농부들이 익은 곡식을 알뜰하게 거두어 들이나. 거두어들이는 과정 속에 수많은 곡식알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주워가는 농부들이 있다. 구약 성경에 나오미의 자부, 룻이 이삭줍기를 하여 그 시모를 공경하다가 주께로부터 큰 복을 받게된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잘 안다. 다시 말해서 땅에 떨어진 곡식이라고 해서 쓸모 없는 허접쓰레기가 아니란 것이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이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알차게 정리된 여러 프로그램과 인재들을 잘 활용하여 주님나라에 들어갈 곡식을 열심히 추수해 들이고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교회, 잘 갖추어진 교회라고 하여도 그곳에서도 못다 거두어들이는 알곡들이 땅에 떨어져 죽어가고 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도태되어 있디면 누구 책임일까?

“밭에 추수할 곡식은 휘어졌는데 일꾼이 적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다 함께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알곡”이라고 하시고 믿지 않는 자들, 혹은 외형적인 크리스천을 가리켜 ‘가라지’ 라고도 하고 “쭉정이”라고도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날, 알곡이면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겠지만, 만약 쭉정이었다면? 그 영혼이 가야할 곳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개척교회 사역을 작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이삭, 큰 교회에서 못다 거두어 들여 도태되고 병든 영혼을 전도하고 주님 섬기듯이 섬기면 그 상 또한 기억해 주실 주님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기왕에 개척 교회를 맡았으니 힘을 다하여 이삭줍기에 전력하려 한다. 적은 일에 충성한 착한 종이라며 위로해주실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그날까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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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 교회의 여자 성도님들은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대장의 연동운동을 활성화 시켜서 변비를 막아보려는 목적으로 훌라후프 돌리기가 한창이랍니다. 그리고 훌라후프를 많이 돌리면 허리둘레도 날씬해진다고 하네요….^^

얼마 전, 교회 대청소가 끝난 후 식당에 모여 앉아 Coffee를 마시며 쉬고 있던 여자 집사님들이 너도나도 훌라후프 예찬론과…하루에 45분 혹은 1시간씩 훌라후프를 돌렸더니 허리 둘레가 몇 인치 줄었다는 등…, 여기저기서 열변들을 토했습니다.

“사모님! 사모님도 훌라후프 좀 해보세요! 매일 아프다고만 하시니 어디 덕이 됩니까?” 그중에서 입이 잽싸기로 유명한 멋쟁이 H. 집사님의 일침이었습니다. 이크,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없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내게 그만… 불똥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구나…내가 약하면 남에게 덕이 되지를 않겠구나…, 나도 훌라후프라도 좀 배워야 하는가…?” 어릴 적부터 저는 유난히도 유약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내 어머니의 근심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랄 때 별로 심한 운동을 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젊을 때야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건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건 겉으로 봐서 별반 차이가 나지를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유약해 보이는 내 모습이 더 여성(?)스럽다며 조금은 우악스럽고 건장하게 생긴 내 친구 애들은 골골이 나를 부러워하며 생짜로 몇 끼씩 굶기도 했다는군여…. 그런데 그것이 중년을 넘기면서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줄이야… “으잉…나도 운동을 해야지…”

나는 돌아오는 길에 당장 근처 슈퍼에 들러서 건강에 그만이라는 굵직한 자석이 잔뜩 달린 예쁜 훌라후프를 40불이라는 거금(?)을 주고 하나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누가 볼세라 방에 숨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예쁜 훌라후프를 몸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폼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아뿔싸…평소에 운동을 제대로 해 두지 못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돌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놈의 훌라후프가 자꾸만 내 몸에서 튕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튕겨져 나가 떨어지면서 그 훌라후프에 달린 자석들이 나를 여기저기 사정 없이 때리는 통에 순식간에 내 몸은 시퍼렇게 피멍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엉…엉…

운동이란 평소에 늘 연습을 해야만 하고 어느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배운 셈이지요.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리신 피를 믿고 구원(Salvation) 받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성화(sanctification)되는 것은 부단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나 수도사들은 물통 하나, 식기 몇 개 달랑 들고 광야생활을 합니다. 낮이면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광야를 헤매기도 하고, 밤이면 딱딱한 암석바닥에 마른 풀을 깔고 누워서 잠을 잡니다. 고행과 절제의 생활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강한 훈련을 함으로써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키려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잠복해 있는 동물적 본능, 나태함과 온갖 육신적인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물리치고 오직 주님만을 그리워하는 자신임을 증명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은 사막의 수도사나 교부들 같은 그런 맹훈련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속에 숨겨져 있는 세상에 속한 정욕의 찌꺼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자신을 괴롭힌다면, 그것까지라도 주님께 기도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침을 받는 것이 자기 자신의 땡볕 고행, 금욕, 금기의 고행보다 몇 배나 더 능률적이고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성도가 자신들의 속에 있는 세상 정욕을 물리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 역시 성도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많은 사역자님이 자기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일, 매일의 삶 속에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을 가르치려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 정죄하기에 바쁜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솔직한 것이 좋다고 하여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무절제한 지도자들의 어그러진 사생활 때문에, 이것을 바라보는 보다 연약한 영혼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자기 자신은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유혹이란 무서운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고 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 하나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 25상, 27절)”하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진실한 성도라면, 머리와 언어, 그리고 가슴이 일치하지 않는 행위, 외식하는 행위도 배제해야겠지만, 절제하지 못하고 쏟아 놓는 무절제한 언어생활이나 행동은 더욱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제되지 못한 언행 심사는 결국 방탕함으로 치닫고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파괴하는 무서운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삶의 절제가 없이 무절제한 사람은 , 설사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죄를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외식이란, 속과 겉이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절제는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절제되며 정제된 아름다운 언어와 선한 생각들을 연습(Practice)할 때 주님께로부터 칭찬받고, 세상으로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는 멋진 삶을 남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망의 1월도 다 지나고 벌써 2월로 접어들었습니다. 나의 살아온 날이 얼마가 되었던, 오늘 이 시간까지 훈련되지 못한 삶, 후회스러운 세월들로 얼룩졌다고 해도, 아직 늦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가정에서는 어버이들이, 교회에서는 영적 지도자들이, 직장에서는 상사들이, 정치계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실천 실행하여 우리들의 사랑스런 자녀들과 후대에 좋은 본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건강한 개인,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국가를 세워나갈 수만 있다면 이에서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매일의 삶에서 허리둘레를 줄여나가듯, 나쁜 습성들을 줄여나가는 훈련을 나부터 실행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 7-8절 말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로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1:27절 말씀)"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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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다닥! 인기척에 놀란 다람쥐가 새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나무 뒤로 달아났으나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못내 궁금한 듯, 나무 사이로 빠끔히 내어다 보는 한가로운 가을, 건강을 위한 등산을 목적으로 우거진 가을 숲을 찾는 사람들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허기진 배를 안고 식용 버섯이라도 채취해서 먹어볼까 하고 산을 찾던 일가족이 그날 저녁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남편과 나)가 러시아에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종종 들을 수 있던 허망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더랬는데,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우리나라 영덕에서도 유사버섯(독버섯)을 식용버섯인 줄 알고 채취해다가 끓여 먹고 일가족 3명이 그날 밤 한꺼번에 절명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어느 신문에선가 읽고 슬펐던 기억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유사하다고 하여서 함부로 먹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은 버섯의 인공재배가 많아 시장에서 다양한 버섯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버섯이 가지고 있는 순기능 때문에 건강기능식품으로의 역할도 점점 커지고 있기에 인기가 많지만, 버섯은 그 종류가 다양하여, 우리나라만 하여도 1,680여 종이 있다는데, 이중 약 10% 정도가 독버섯에 해당한다고 하니 버섯을 단순히 보고 관찰하는 것이나 재미로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듯하게 생긴 버섯들이 상대적으로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는 버섯도 많으니 자연산 버섯을 주의하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우리가 어릴 때 독버섯은 화려하고 예쁜 것이라고만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잘못 배웠던 탓도 있다.그러나 알고보니 색깔과 모양만으로는 절대 구별하기 어려운 유사버섯이 심각한 독버섯 중에도 많이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독버섯이 위험한 가장 큰 이유는 먹을 수 있는 식용버섯과의 구별이 어렵다는 점 때문이라고 한다. 아예 종류가 다른 버섯이면 상관이 없겠지만, 유사버섯(독버섯)과 식용버섯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눈으로는 비슷비슷해 보이고 그 모양새나 색깔은 전문가들조차도 구분이 어려운 것이 많다고 하니 먹어보겠다고 버섯을 채취하려는 분들이라면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그러나 한 편, 인간사에서는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Different doesn’t Mean Wrong)라는 말이 있다. 그 말도 맞다. 인간의 외모 혹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는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나와 다르게 생겼다고 하여서 틀린 사람이라고 몰아가거나 틀린 생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장애인들은 우리와 다른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그분들이 우리와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우리와 약간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서 그분들을 우리와 틀린 사람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만물의 영장이며,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이라면 모두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실력으로 따진다면 장애인들이 정상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춘 분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음도 우리는 안다. 출생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거나 살다가 어떤 사고를 만나 장애인이 되어 비록 외형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우리와는 약간 다르다고는 하나 그분들도 타고난 재능에 따라 노력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얼마든지 뛰어날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헬렌 켈러 여사가 그랬고, 음악의 거장 ‘베토벤’이 그랬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장애우님들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중 한 분을 소개하자면 이희아 씨가 그렇다. 손가락이 다섯 개인 우리와는 달리, 손가락 4개만으로 태어난 이희아 씨, 그런 그녀가 웬만한 피아니스트들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밀려드는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앞이 뽀얗게 흐려졌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길에서는 어떠한가? 과연, 구원의 길마저 “그렇다.” 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NO!, 결코, 그럴 수 없다!”이다. 무엇 때문인가?

      영적 세계에서는 다른(유사(similarity))것은 틀린(wrong) 것이다!

      영적 세계는 사각지대가 있을 수 없고,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왜 그런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경고해 주고 있기에 그렇다. 영적 세계에서 ‘다르다'(異)고 하는 것은 곧 '틀리다'(誤(오))류란 뜻이다. 영적 세계, 구원의 길에서는 다른 길은 죽음과 직결됨을 알아야 한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씀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 1-2) 하는 말씀이 있다.

      내용인즉슨,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며 제사장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소의 불을 켤 때, 성소의 불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없신 여기고,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드렸다. 불은 불이나 다 같은 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불은 거룩한 불이며 인간이 마음대로 변개시키거나 뚯대로 바꾸면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불이라면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의 불과 유사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 인간이 만든 우상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명하신 것 외에 다른 불로 제사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성소에 밝히는 불이라면 더욱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불로 드려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인간이 마음대로 밝힌 불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교만한 그들의 생명마저 취해가셨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불(레 9:24)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 것, 땅에서 온 불이기에 그 불은 속죄의 근거를 갖지 못한 불이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지시하신 신령한 불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태워 인간에게 허락하신 속죄의 불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성령의 불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행 4: 12절 참조)

      W.C.C.는 다른 신(神)을 용납하기에 틀린 것이다

      W.C.C.가 종교다원주의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7차 총회 때 있었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 이화여대 교수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소복차림으로 사물놀이패를 앞세우고 무대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춤을 추고는 초혼 문을 읽으며, 초혼제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정 교수는 이 특강에서

      “한이 많은 영혼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고는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고 하면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은 정교수의 특강 일부분이다.

      『오소서! 애굽인 하갈의 영이여!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버림받은 흑인 여성입니다. 오소서! 우리아의 영이여! 당신은 다윗 왕에 의하여 전쟁터로 파병되어 살해된 충성스러운 군인입니다. 다윗의 음욕이 당신을 죽게한 것입니다. 오소서! 예수 탄생시 헤롯 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어린 아기들의 영이여! 오소서! 잔 다르크의 영혼과 중세기에 화형으로 살해된 무당들의 영이여! 오소서! 십자군 때 죽은 사람들의 영이여! 오소서! 토착민의 영이여! 식민지 시대와 기독교 선교시대에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틀러 유대인 학살 당시 가스실에서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탄에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오소서! 인간들의 금전욕에 의해서 고문당하고 착취당한 흙, 공기, 물의 영들이여! 오소서! 걸프전에서 죽어가는 군인들, 민간인들, 해양생물들의 영혼들이여! 오소서! 십자가상에서 고문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 형제이신 해방자 예수의 영이시여! 』

      정 교수는 기독교에서 금하는 초혼제를 드렸으며, 민중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해방자 예수’를 주장하고 있으며, 한(恨)의 신학을 주장하고, 더욱이 성령과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동일시하였다. 또한 한국기독교교육협의회의 홈페이지 기도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인 구미정 교수의 “생명의 강 살릴 종교 여성 공동기도문”에도 이와 유사한 혼합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오 하나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 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마리아님과 소태산 재조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아멘』 - 김길성, “WCC 한국총회를 앞둔 한국교회의 방향과 전망”,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 WCC대책위원회편,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2011), p. 39

      그런고로 우리는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하며 살아갈지라도 신앙만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다른(異)것, 유사한 것이라고 하여 용납하거나 따라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자는 오직 우리 주 예수님 한 분 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온 인류가 망하고 죽게 된 그 첫 번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음성과 ‘유사 음성을 분별하려 하지 않고 유사 음성을 그대로 용납하고 수용하였던 때문이다! 기차노선이 두 갈래로 나 있다고 하여서 그 길의 끝이 모두 한 곳에 닿지는 않는다. 철로길이 유사하다고 하여서 서울 가야 할 사람이 부산 가는 열차를 타면 안 된다.

      우리가 성도라면 매사에 조심하며 오실 그분을 사모하여야 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유사음성을 주의하여야 한다! 성령의 흉내를 내는 사단의 음성도 있다. 가짜가 있으면 진짜가 있는 것이다! 도금한 것이 화려하고 번쩍거린다고 하여서 순금은 아니다. 종교는 모두 다 같다고 하는 미혹의 음성, 각종 유사(類似) 음성이 만연한 세대다. 이런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삶의 잣대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자. 거짓의 아비, 미혹의 영이 활개치는 이런 것이 모두 말세적 한 징조임을 깨닫고 혼미한 세계를 벗어나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들의 주께서 권면하신다. "너희는 유사(類似)음성을 주의하라"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 1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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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이곳저곳에 선지(예언자)학교라는 특수 학교가 세워지고 자칭 사도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현재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선지(예언자)학교와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좀 더 좁혀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어떤 것이며 예언자의 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란 사각지대(死角地帶)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벨리알의 사람이냐, 둘 중 하나, 영생의 길이냐, 영벌의 길이냐로 갈라지기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검증이란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예언의 정의:
      예언이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예언(豫言)과 동음어인 예언(預言) 이 두 단어의 뜻이 모두: ①앞에 올 일을 미리 말함 ②또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신의 말을 듣고 신의 의지(意志)를 사람들에게 전(傳)하는 일 ③또는, 그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한자로 보면 예언(預言)이 아니라 동일한 동음인 ‘豫言’ (예언)을 뜻한다. 또 영어 'predict’ (prediction)이라는 단어와  'prophesy'(prophecy)라는 단어는 같은 뜻 같으나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predict’란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의미의  단순 예언(預言)을 뜻하며,  'prophesy’란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로서의 예언 (豫言), 신탁(神託)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豫言)자의 개념:
      하나님의 선견자(先見者) ‘로에’ 와 대변자 (代辯者), ‘나비’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대변자’, 선견자란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말은 그 자신들의 영(spirit)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Holy Spirit)에 의해 말하게 한 대언이었기 때문이다(삼상 9: 9, 렘 23: 16, 겔 13: 2절 참조).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 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선견자(대선지자, 소선지자 포함)들은 선지 학교 출신들이 아닌, 평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선견자나 선지자, 예언자의 특성상, 인위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탁에 의해 주어진 말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주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대언 자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교훈도 하시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인 제사장’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만인 대언자’가 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대언이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인위적인 방법의 선지 학교나 그곳에서 배출된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진정한  예언= 우리에게는 오직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서인 신구약 66권 외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계22:18-19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다.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 말씀이다 (벧후 1:19-20). 성경말씀을 벗어난 그 어떤 형태의 예언도 있을 수 없다. 즉, 직통계시가 없다는 말씀이다.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대언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보혜사 성령님께로부터 성도가 신앙생활을 더 잘 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써,  때로는 예언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말씀을 로고스(레마)로 주시기도 한다. 곧 모든 양이 그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직통계시적 형태를 취하는 태도를 삼가야 한다. 우리(성도)가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시요, 사용되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있어야만 한다. (행27:22-25)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몇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예수 그리스도), 혹은 기록(문서)계시(성경),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문서 계시인 성경 말씀 역시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롬1:19-20절 참조)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 계시, 혹은 문서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계 22:18-19절 참조),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 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기록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해석돼야 한다. 성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손에 이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따로 선지(예언자)학교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대언의 영으로 주시는 말씀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a)  은사로서의 예언:
      권면 하며 안위하며 덕을 세우기 위해서 대언의 영으로 증거(예언)할 수 있으나, 반드시 교회와 사람(개인)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고전14:3절, 계시록19:10절 참조.) 사업이 잘될는지, 자녀가 학교에 입학 가능한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혼은 어떤지...등등, 이런 류의 점치는 형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b)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신명기18:18-22 ):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말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 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c)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d)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이때 들려지는 말씀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절하반절)".

      e)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레마(로고스)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26절)

      f)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성구)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1:41-45절)

       g) 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절)”.                               

      결론적으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악한 영에 미혹 받지 말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잘 인도되고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는 것 없고 내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고 온전하신 말씀 안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겸손하게 주와 동행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출처: 목양연가: 글/최송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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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가까워진 그날

       

       

      지식적 분야에서나 물질적 세계에서나, 영적 세계관, 그 어디를 바라보거나 현대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인심도 바뀌고 사회질서도 바뀌고 교통수단도 바뀌었다. 교통수단: 우리네 조상처럼 말을 타고 다니던 그런 때는 아니더라도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유행가 가사처럼 느릿느릿 지나가는 풍경을 음미하며 달리던 기차 여행은 이미 먼 옛이야기가 되었고 비행기를 타면 하루 만에 가지 못할 곳이 없다.

      통신수단 역시, 사랑하는 이에게 소식 한번 전하려고 문장을 다듬으며 때로는 밤이 맞도록 편지를 쓰고 찢고, 다시 쓰고 찢던 그런 정서적 시대는 이미 구석기 시대다. 와이어레스 전화기 한 대면 전 세계 어디서든지 다 통한다. 이 모든 현상을 요약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별똥별"처럼 빨라졌다 하겠다.

      인심, 내가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는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먹다가 사립문 밖으로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불러서라도 집에 들어오게 하였고 한 술이라도 함께 뜨고서야 길을 가시도록 권장을 했던 때가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여도 그랬다. 그 이전은 더욱더 인심이 좋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안으로 불러들이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다.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여도 당신이 먹은 것은 당신이 지급하고 내가 먹은 것은 내가 지급한다. 오히려 부담이 없고 그것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종교계도 급속도로 바뀐다. 요즘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단체와 유명세를 타던 목사들이 있고 안타깝게도 많은 목사님들이 그들의 괴변에 동조하며 함께한다.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을 이루던 시대도 이제 옛말이다. 남자는 남자와 여자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한다. 그것이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란다. 목사님들마저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발로 짓밟고 뭉개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관도 바뀐 탓이겠다.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마지막 때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기에 세상이야 그러려니 해야 하겠지만 참 씁쓸하다.

      그러나 우리(성도)가 과연 이대로 살아도 좋은가? 물결이 치면 치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휩쓸려가야만 하는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정결한 신부로 신랑을 맞이할 처녀의 마음이 되라. 술 취함과 방탕함을 버리고 늘 단정히 행하고 깨끗하게 단장하는 삶을 살라고 명하시지 않았는가? 더욱 가까워진 그날(주님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는 이런 때, 성도가 지향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성도(처녀)들이 지녀야 할 덕목:

      순결과 정절을 지키고 정결함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여기에서 정결(cleanness)과 순결( purity, pure)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정결은 깨끗함을 의미하고 순결은 처음부터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적으로 성도의 정결함(cleanness)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가능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그 피로 깨끗게 하여 주셨기에 모두 정결(cleanness)하다고 보겠다. 그러나 순결(purity, pure)은 자기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정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도(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때까지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 19-20절).”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 15절 말씀).”

      성도(처녀)들이 기억해야 할 말세적 예언(이사야 편):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약 700-750여 년 전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 년 전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현 세대를 사는 우리네 여인들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초상화를 그리듯이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게 잘 묘사했는지, 정말 기막힌 일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준 참된 선지자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교만한 여인들과 늘인 목(사 3: 16절상):

      이것은 현대 여인들의 사고와 옷차림을 의미한다. 말세적 시대의 여인들은 교만하여 늘인 목으로 다닌다고 했다. 과연 그 말대로, 요즘 여인들은 목을 더 많이 늘이기 위해 목 주위를 깊게 파다 못해 아예 가슴과 등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젊은 여인들은 배꼽티라고 하는 거의 위험수위가 노출될 정도로 깊게 패인 옷들을 걸치고도 부끄럼 없이 거리를 활보한다. 그렇다. 요즘 세대의 여인들처럼 당당하다 못해 교만한 여인 천하는 일찍이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부장 제도였다. 가장이 그 집의 주인이요, 지배자란 뜻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남자 아닌 여자나 아이들은 숫자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를 보면, 우리 부모의 세대처럼 한 가정의 남편이 주인처럼 지배하며 군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오히려 안주인이 된 아내들이 남편들 위에서 군림(?) 하는 느낌이다.

      또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런 소리 하다가는 오히려 큰일 난다고 한다. 요즘 시대는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하지 않는 남편은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심하면 쫓겨(?)난다 고하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 가정에서 호주로 존경받으며 대우받던 남편들이 이제는 아내에게 쫓겨날까 전전긍긍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여인들이 그렇게까지 교만해지고 말았는가? 그것은 바로 말세 적 예언의 성취시대가 도래했다는 증거다.

      2.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 쟁쟁한 소리를 내는 신발 신은 여인들(사 3: 16절하):

      나는 아주 어릴 적에 고무신이란 것을 신어본 기억이 있다. 우리 부모님들도 고무신을 신었고, 그 이전의 분들은 짚신을 신었다 했고, 또 그 이전의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무엇을 신었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거나 이사야 선지자가 본 환상적 여인들처럼 아기죽거리며 걸을 수 있는 신발을 신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걷는 여인을 묘사할 때는 어떻게 묘사하는가? “삽뿐, 삽뿐 걷는다” 이다.

      요즘 현대 거리에서 사뿐 사뿐 걸어 다니는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없다. 그런 여인들은 이미 구세대, 전설 속의 여인들로 멀어져 갔을 뿐이다. 지금은 “여인들이 아기죽 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며 걷는 시대다. 반드시 말세가 되어야만 신게 예언되어 있는 여인들의 신발, 쟁쟁 소리를 내며 아기죽 아기죽 걸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신발의 이름은? 그것은 바로 ‘하이힐’이다! 이 하이힐이란 굽이 뾰족하고 높은 신발로써, 모든 여인들 뿐 아니라, 나에게도 사랑받는 신발이다.

      이 신발만 신으면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커보여서 좋고, 키가 큰 사람은 큰 키가 더욱 늘씬하게 뻗어보여서 또 좋다. 여인들이 착 달라붙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오리처럼 아기죽 아기죽 걷는 모습, 그야말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나게 해 주어서 입가에 쓴 웃음이 돈다. 그뿐인가?. 하이힐 뒤꿈치에는 징이라고 하던가? 뾰족한 쇠붙이가 달려서 아스팔트 위를 걸을 때마다 “딱딱딱, 쟁쟁쟁.”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난다. 재밌지 않은가? “아기죽 아기죽, 딱딱딱, 쟁쟁쟁….” 2,700여 년 전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을 여러분과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3. 정을 통하는 눈은 재론할 여지도 없을 것 같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 내가 어릴 때 배운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나 하고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 같다. 남녀칠세자동석이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이다.

      성도(처녀)들이 기억해야 할 말세적 예언 성취 시대(다니엘 편):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 4절).” 여기를 보자. 다니엘은 말세의 징조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1.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2. 지식이 더할 것이라 하고 예언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시대만큼 사람들이 빨리 왕래한 적은 아마 없는 것 같다.

      바로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상도에서, 한성,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까지 가려면 적어도 석 달 열흘(3개월 10일)이 걸렸다고 한다. 필자가 어릴적만 해도 부산에서 서울 가는 완행열차를 타면 밤새도록 달려야 그 이튿날 아침 늦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가? 비행기만 타면, 부산서 서울 가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다. 어제 서울에 있던 사람이 오늘 뉴욕에 있을 수 있고, 오늘 미국에 있는 사람이 내일 한국에 있을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이 놀랍도록 빨리 왕래하는 시대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말세에는 “지식이 더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지니고 있던 지식 외에 그 어떤 다른 신지식이 더해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식 위에 더해진 그 지식이야말로 바로, 지금 이 컴퓨터 시대를 가리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 하나면 전 세계의 정보를 한눈에 읽을 수 있고, 현대 컴퓨터 공학이야말로, 인간의 지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을 창출해 낸 것이다.

      성도(처녀)들이 기다리는 신랑은 언제 어떻게 오시는가?
      1.    아버지만 아신다(마 24: 36, 42-43, 행 1: 6-7절),  2. 생각지 않은 때 오신다(눅 12:40절), 3. 밤에 도적 같이 오신다(살전 5:2절), 4. 번개가 동에서 번쩍하여 서편에 이름 같이 오신다(마 24: 27절). 5.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와 함께 오신다( 마 16: 27절). 주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날짜 풀이에 관심이 더 많다. 그러다 보니까 사탄이 쳐둔 그물에 걸려 헛된 날짜를 예언하다가 불발이 되면 잠시 부끄러움을 당하고 조용한 듯하다가 어느새 다시 또 고개를 쳐들고 세상을, 믿는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한다. 본질보다 비본질에 관심을 더 쏟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가 오실 때의 세상 형편은 어떠한가?
      1. 노아의 때와 같이 자기 일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 2.안전하다 평안하다 (자기 안일 상태)(살전 5: 3절), 3. 거짓 선지자가 미혹하고 표적과 기사로 미혹함(마 24: 24절), 4. 곳곳에 전쟁이 터지고(천재지변).4. 음란이 팽배해진다.  

      이단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a) 재림의 긴박성을 지나치게 부추기기 위해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마 24:36, 42-43절 참조) b) 주의 재림은 없다고 가르친다. “먼저 이것을 알 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3-4절 말씀)”.

      이런 때에, 우리 성도(처녀)들은 순결을 지키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기름준비 잘 하고, 자신을 지켜 정결하며 매일 매 순간을 순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삶을 살다가 신랑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을 때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욱 가까워진 그날, 그 영화로운 천국 잔치에 들어갈 준비를 잘 하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1-24절 말씀).”



      글/ 최송연: 목양연가 "영성훈련" 중에서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엄동설한 모진 바람도 이제는 한풀 꺾인 듯, 남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제법 싱그럽게 느껴진다. 겨우내 누렇게 메말랐던 잔디가 파릇파릇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언덕을 따라 아지랑이가 사르르 휘감아 도는 이른 아침, 혼탁한 교계도 겨울 옷처럼 낡고 더러워진 사고들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새로운 봄, 주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했으면 좋으련만…이 생각 저 생각 가슴 아픈 교계의 현실을 개탄하며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고향 집 뒷산에 있던 작은 옹달샘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도토리나무, 소나무, 대나무며 잣나무가 울창하고, 진달래꽃 철쭉꽃 각종 들꽃이 철 따라 다투어 피고 지는 곳,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목이 빽빽이 들어찬 나지막한 야산이 병풍처름 둘러쳐진 뒷산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조금만 따라 올라가면, 거기 울퉁불퉁 큰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그 중 제일 큰 바위 밑에는 밤낮으로 퐁퐁 쉬지 않고 솟아나는 조그만 옹달샘이 하나 있다. 산속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기에 그곳의 물은 언제나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며 차디찬 것이 정말 시원하고 상큼한 청량음료수 맛이었다.

      혹독한 된서리 몰아치는 겨울, 삼라만상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어도 그 옹달샘만은 얼어붙는 법 없이 수면 위로 약간의 살얼음이 사르르 한 정도일 뿐, 그 살얼음을 살짝 고사리 손으로 걷어보면 속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보드라운 물결무늬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솟아오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여름, 간혹 논밭이 타들어가는 가뭄이 와도 그 작은 옹달샘은 결코 마르는 법 없이 늘 한결같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좋은 물이란, 물줄기가 땅속 깊은 곳 원천(源泉)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원천에 연결된 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철이라고 하여도 물이 더 많이 불어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가뭄에 물이 말라버리거나 장마철에 물이 넘치는 샘은 가까운 개울이나 빗물이 얕은 땅으로 스며들어 샘을 이루는 물이고, 그런 샘의 물은 좋은 물이 아니란다.” 방금 언니가 길어온 차가운 옹달샘 물에 고소한 미숫가루를 듬뿍넣은 그릇을 간식으로 챙겨주시며 어린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지혜로우신 울 어머니의 ‘좋은 물 나쁜 물’의 수질 검증법(?)이시다.

      이렇게 물 하나에도 좋은 수질을 분별하는 검증법이 필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 물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최근에 와서야 어머님의 그 깊으신 마음이 조금씩 깨달아 알아진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살고 죽는 것, 그것은 무엇이 되었건 바르게 분별을 해야만 한다. 분별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먹거나 마시면 자칫 귀한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이라고 분별없이 마구잡이로 입에 넣다가 귀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서는,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들이 산에 놀러갔다가 식용버섯이라며 채취해 온 독버섯을 끓여 먹고 일가족 모두가 즉사했다는 끔찍한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을 얼마 전에 읽어 보았다. 또 복어의 맹독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끓여 먹은 노부부가 이튿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일본에서는 지금 음식이나 물에 인간이 섭취해서는 안 될 방사능이 들어 있어 초비상이다. 인간이 먹어도 해가 되지 않을만큼의 방사능 기준치는 얼마만큼이어야 하는가? 물과 음식에 포함된 방사능 성분의 기준치를 분별해 내는 검사를 쉴 새 없이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 일본 열도가 울고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날마다 집중 보도되고 있다.

      이렇듯, 세상에는 육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필수조건을 충족시켜줄, 좋은 물, 좋은 음식도 많이 있지만, 반대로 그 속에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극물도 함께 섞여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분별하고 먹고 마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의 세계로 직결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음료와 영의 양식이랴? 모든 교리를 분별함 없이 무조건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theory만큼 위험천만의 말은 다시 없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을 잃은 현대 교계를 잠시만 둘러보면, 어지럽기 그지없다. 모두 제각각이다. 극단적 신비주의, 극단적 세대주의 극단적 자유주의, 극단적 폐쇄주의(?)등등.. 천차만별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때에 정작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분별법의 척도가 되고 인생의 잣대(Canon)가 되는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오히려, 말씀으로 분별하고 바르게 믿자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성령체험이 없는 자, 페쇄적 근본주의자, 불량한 짓을 저지르는 악당 패거리라도 되는 듯 호도하고 비방하는 거센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지금 최바울 목사님이 지탄받는 것도 바로 “영적 도해”란 책의 내용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목사님들이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개인의 상상력을 동원, 과장하여 왜곡시켜 전하는 데서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사 43: 7, 21)라고 성경이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 그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믿을 수 없으면, 그것은 내가 이해되지 않아 그런 것이지 그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란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 되었지만, 저자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란 데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난해구절이란 것이 있고, 난해구절은 난해구절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상상력으로 풀이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범죄행위다. 그러기에, "경의 모든 말씀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 (벧후 1:20-21)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할 목사님들마저 말씀을 읽지 않고 경시한 탓에, 말씀의 분별력 상실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부흥이 되는 듯하고 구변이 좋기만 하면, 아무것이나 모두 수용하는 데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너무도 큰 현실이다. 그의 위험천만한 사상을 분별함 없이 무조건 지지하며 따르는 수많은 목사님들이 계시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1) 영(靈)의 세계를 너무 생각하지 마라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靈)적인 존재로서 두 세계에서 共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의 본질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고전3: 1-3) 또는 "혼(Psyche, natural) 자연적인 사람" (고전2: 14), 영(Pneuma) 영적인 사람"(고전3:1)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많은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임을 우리는 잘 안다. ) 어쨌거나 이런 인간의 특수성은 사람을 때때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띌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 (고전3: 1-3)이라 부르고 영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수성을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외에, 인간이 지나친 영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영의 세계에 도전하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만큼 영의 세계가 인간의 영역 밖의 세계,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이기에, 인간의 도전 정신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형이상학적(
      ) 세계로 도약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의 한 표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인간이 영의 세계, 神의 세계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집착의 보다 근원적 출발은 인간이 神과 같이 되고 싶은 탐욕 때문일 것이다.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그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탐욕은 道를 넘는 행위로서 물리적이건 영(靈)적이건 모두 우상숭배만큼이나 가증한 것, 인간에게 금지된 계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반대로 이런 인간 본성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는 간교한 사단이 성령의 역사를 흉내 내어 거짓 예언, 환청, 환상, 이런 영의 세계를 미끼로 사람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이끌어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성도가 영의 세계를 너무 깊이 파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릴 때, 그 욕심이 그를 주장하여, 영적인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악한 영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기 쉽고 어둠의 권세자들의 조종을 받게될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따라서 인간에게 허락된 한계, 성경에 기록된 영(靈)의 세계, 그 이상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 건전한 신앙인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2) 영(靈)의 세계에 속한 힘, 권능들을 부릴 수 있는 권세가 성도에게 주어졌는가?

      그 대답은 ‘No, 그럴 수 없다.’ 하는 것이다. 성도가 이 영적 존재들,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theory는 분명히 비성서적이다.

      물론, 영의 세계는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두 종류 즉 좋은 존재와 악한 존재로 나누어지는데, '세라핌', '케루빔', '천사들'(좋은 천사와 나쁜 천사), '정사들', '권능들', '어두움의 주관자들', '악한 영들'(엡6:12), '왕좌들', '지배들'(골1:16), '타락한 천사들'(벧후2:4), '옥에 있는 영들'(벧전3:18-20), '마귀들', '미혹하는 영들'(딤전4:1) 등으로 구분된다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보기보다는 그들(천사들)을 부릴 수 있는 권이 천사들 뿐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히 1: 14절) 천사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수종자이고 신약시대(지금)는 천사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는 '성령 시대, 은혜 시대'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 중에 천군 천사가 동원하여 지켜주십사 주님께 부탁하는 것과 성도가 천사들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약시대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성서적인 표현과 신앙은 성령님(하나님의 영(Holy Spirit, Holy Ghost)으로써)께서 친히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또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보호하신다. 이런 사랑의 주님께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마다, 우리를 건져주시고 지켜달라고 기도하면,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어떤 때는 천사를 보내기도 하시고 친히 그 권능의 손을 펴시사 풀무불 속 같은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어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고로, 성도는 천사를 명령하는 등, 영적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갈구하는 기도를 매순간 주님께 올려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영적 원리이다.

      개혁 교회의 신앙과 삶의 원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다. 이 원리에 가장 충실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청교도들”(Precisians or Puritans)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모든 활동의 가장 중심에는 성경이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福音)이란 고대 그리스어의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유앙겔리온’(Ευαγγέλιον: euangelion, 라틴어 Evangelium),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은 우리를 위해 이땅 위에 오신 주님,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신 분,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이 예수님을 힘써 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생명의 샘, 생수의 근원이요, 원천인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우리 모두 힘써 그분께로 돌아가자. 끝으로 우리 아멘넷의 한 논객이신 cy님의 경고의 말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DK대사(악령)로부터 받아적은 뉴에이지 바이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세계질서에서는 영성이 신학을 대신할 것이다. 살아있는 체험이 신학적 수용을 대신할 것이다. 영적 실재가 갈수록 뚜렷하게 나타나고 형태적 측면은 뒤로 사라질 것이다. 동적이고 표현적인 진리가 신세계종교의 기조가 될 것이다." –cy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현대는 뉴에이지 사상이 종교, 문학, 예술, 과학, 정치 각 분야로 급속도로 확산, 침투하고 있는 무서운 말세지말이다. 이런 무서운 말세를 살아가는 선도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 神의 영역을 탐하는 탐욕을 제어하고, 영의 세계를 너무 알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할 것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수 없느냐"(마 16: 2-3)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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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

       

      날이면 날마다 1년이면 12달,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는 곳,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부드럽게 늘 출렁거리는 푸른 바다, 각 곳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로 하루를 여닫는 곳, 아름다운 섬 하와이를 떠나 사계절이 분명하다는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처음 맞이하는 가을, 뒤뜰에는 노란 낙엽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겨우살이를 위한 열매를 모으려는 것일까? 똥그란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이 나무 저 나무로 오르락거리는 다람쥐의 빠른 발걸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부산스럽다.

      어찌 다람쥐뿐이랴? 모든 동식물에 넉넉한 품을 제공하며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끌어안던 푸른 나무도 이제 벌거벗기 시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은 늘 향기롭고 늘 관용을 베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냉혹하리만큼 모질게 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생(生)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나 봄일 수 없고 언제까지나 여름일 수 없는 인생…, 가을을 지나야 하는 인생이라면, 나는 과연 다가올 겨울 준비를 얼마나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얼마 전, 젊은 영혼의 열기가 한창 뜨겁게 달궈지던 ‘바타클랑’ 극장, 생명의 향기로 충만했어야 할 장소가 테러범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하였고 아무 죄 없는 생명들이 무참히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늘 봄이며, 항상 여름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겨울, 그 다음에 가서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날 그 시간에 참혹한 겨울이 올 것임을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근면(diligent)한 삶을 택하지 않았을까? 인생의 삶이란 너무 폐쇄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관용(똘레랑스,tolerance)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오늘 따사로운 햇살이 생(生)의 뜨락에 쏟아질 때는 받아드리고 내일 모진 눈보라가 몰아칠 것도 예상하면서 살아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조금 더 나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실과를 거두어 들일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개중에는 많은 젊은이가 근면. 성실한 삶, 포용할 때는 포용하고 닫을 때는 닫고 최선의 길, 최상의 선택적 삶으로 잘 가꾸어 나가던 중, 어쩌다 그 광란의 장소를 찾게 되어 죽음을 맞게된 억울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연주한 록밴드의 실상을 알았다면 그들의 광란의 춤과 노래를 삶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을 것 같다. 죄악이 넘쳐나는 장소에 내 몸을 맡기는(관용?) 일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은 사탄을 찬양하고 사탄을 숭배하는 가수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근면, 성실한 청년들이 그곳에 참여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너무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우리 모두가 그토록 참혹한 일이 일어나게 된 동기나 이유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시점에 이른 듯하다. 프랑스 경찰과 정부가 힘을 합쳐 사건의 경위를 분석하고 조사한 결과, 구원론이 잘못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만행이었음이 만천하에 들어났고 그 끔찍한 현실에 전 세계인이 분노했다. 더 놀라운 것은 테러들 대다수가 시리아 피난민을 가장해서 들어온 IS요원이었다는 것이다. 피난민을 가장하고 들어온 테러단의 만행을 막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는 하겠지만 그들 테러리스트에게 강경책으로 대응하려다보니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순수한 난민들이란 것이 나를 화나게 한다.

      미국의 911테러 사건, 이 경악할 참상을 지켜본 유럽에서는, 생각하기를 ‘미국이 매일 이라크를 공습하고 이슬람 국가들과 원수로 지내니까 저런 테러공격을 당하는구나, 우리는 이슬람에게 관용을 베풀자, 그들에게 잘 대해주자.’ 그 후부터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민자들에게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다. 그들의 종교도 그들의 사상도 물어보지 않은 채 다문화 그대로를 무조건 받아주기 시작했다. 그 똘레랑스(Tolerance) 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유럽으로 이주했다. 그들의 종교는 산아제한이란 것을 할 수 없고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된다. 그러니 그들은 자녀를 낳고, 낳고 또 낳았다. 유럽인구의 출산비율보다 여덟 배 아홉 배, 심지어 열 배가 넘었다.

      프랑스는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탓에 이번 같은 사건이 터졌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슬람 교리에는 분명하게 자신들의 세력이 약할 땐 평화의 종교로 위장하고 있다가 세력이 커지면 ‘지하드’를 개시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리에는 “알라를 위해서는 그 반대자를 반드시 죽여라. 포교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 라는 말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어찌 되었건 유럽 사회에서 그동안은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으나 이슬람이 확산된 이후에 수많은 국가들이 이것이 프랑스 정부의 똘레랑스(Tolerance)정책의 부산물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 허둥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들(이슬람종교)의 교리의 포학성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무조건적 관용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각 나라 국경선의 문턱이 갑자기 높아진 것이 그것이다. 갑자기 이민 정책을 재검토하는 어리석음보다 처음부터 어떤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맞게 서로가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지 늦장 대응의 후유증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큰 피해가 아닐 수 없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고 하던 우리 선조님들의 지혜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건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신앙인)도 각성해야 한다.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 아름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으나 결코 가볍게 사용해서도 안되는 말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그 단어의 뜻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다가는 이번처럼 무시무시한 참사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리 모두 자각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와 살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 법률을 준수하고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질서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장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에 무조건적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은 자기 자신에게나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보다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엄격하게 잣대를 두고 성경의 기준으로 자신을 맞추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좁은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똘레랑스(관용, Tolerance)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현대 교회의 병폐요 폐단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지적일까? 현대는 신학자는 많으나 알고 있는 만큼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은 너무 적다. 왜 다른 사람의 신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특히 이단 사역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잘못은 덮어두고 다른 이의 신앙생활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짐을 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 천국 가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 앞에 설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대 기독교가 점점 하향하는 추세라며 염려하는 목소리는 높은데 “회개”를 외치는 사람은 적다. 초대교회는 달랐다. 다른 사람을 질책하고 비판하기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진실되게 살아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믿는 사람이 날로 늘어갔다. 진실한 성도,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되어 결국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더 나아가 내가 개혁되어야 전 세계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사다난하였던 이 한 해도 얼마남지 않았다. 지금껏 내 자신의 죄악에 대해, 게으름에 대해 관용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내 삶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바늘 도둑 같은 작은 죄라도 회개하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 모진 십자가 형벌을 감내하셨음을 잊지 말자.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나 자신의 죄를 관용하는 자, 남의 죄에만 관심이 많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장 미워하셨음도 기억하자. 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을 자각하자.


       글: 최송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영성훈련" 중에서

       

       

      주님의 몸, 교회(敎會)

       

      근세에 들어 하나님의 교회 존속[存續], 존재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고 위협하는 기현상이 각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이런 기현상들은 기업화된 대형교회들이나 사명감을 저버린 일부 황당한 목사들에게 그 책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한 방법으로 왜곡시켜 전하고 통전 적이고도 유기적인 말씀을 앞 뒤 문맥을 살펴 총체적인 뜻을 밝혀 전하려하지 않고 한 구절만 똑 떼내어 그 구절에만 매달려 전체적인 뜻을 흐리게 하여 가르치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성교회를 벗어나야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기성교회는 아예 구원이 없는 것 같은 속임수이건만,표면적으로는 사역자들의 비리에 항거하는 거센 목소리, 진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목소리인 것처럼 미화시켜 내어 놓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말에 현혹된 성도가 교회를 멀리하고 집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이단이나 다른 사이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간다.

      구원 받는 백성이 줄어 들고 교회를 찾는 발걸음이 점점 사라지게 하려면, 하나님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리고 교회와 말씀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 중 하나임을 성도들이 인식해야 한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 요즘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는 통계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어근(語根)부터 살펴보자:
       
      교회(敎會)란 그리스어로는 큐리아코스(kuriakos = 주에게 속하는),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 라틴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이며, ‘불러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청받은 무리, 성령의 부르심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대관식에 참예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의 모임이란 뜻이 있다. ‘카할’은 구약에서 회중,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하며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에서 구약교회를 ‘광야 교회(congregation)', 그곳에 모세가 있었다고 했다(행7: 38절).

      교회(敎會)의 구분:

      1. 민족적으로, 첫째, 예루살렘 교회인 초대교회, 둘째, 이방인 교회다. 이방 세계의 각 나라, 각 족속, 각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를 총칭할 수 있다 .

      2. 영적으로, 첫째, 개인 교회(고전 3:16절), 둘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말할 수 있는데,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다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보이는(가시적인)교회: 보이는 교회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말하며, 성경은 이 교회를 가르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골1: 18절),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 28절, 벧전 1: 17-19잘), 또는 거룩한 무리(히 13: 12절, 벧전 1:2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비가시적인 교회: 이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로써,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계 21:장 전장 참조). 지역과 인종과 역사를 초월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모여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성도를 총칭한다.

      3. 교회를 영적으로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둘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무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땅 위에 교회(敎會)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후 특별히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 지상에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를 세우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1.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눅19: 10절).
      2.하나님께 경배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엡1: 4-6절).
      3.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창 되게 하기 위함( 마 28: 19-20).
      4.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 요 6: 49절).
      5.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함(엡 3: 9-11, 3: 20-21, 5: 9).

      교회를 저주해서 안 되는 이유:
      a.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 18절, 엡5: 23절 참조).”

      b.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지역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성도는 마땅히 주신바 탈란트 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15절 말씀).

      c. 성경은 혼자 예배드려도 은혜받을 수 있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하신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면 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 24-25절).”

      d.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깨어지면 안된다. “두세 사람이(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20절 말씀).”

      e. 성도는 믿음 안에서 친교(코이노니아)해야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친교란 영어로 fellowship,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koinonia)다. 여기에는 물건을 함께 쓴다의 뜻이 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초대 교회는 물건을 함께 나누었다. (행2: 44, 4: 32절 참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요소라면 다음은 회원 간의 친교이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롬 12: 5, 고전 12: 27절 참조)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 되어진 성도들임을 깨닫는다면, 결코 '혼자만 정결하다’라고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이다.

      f. 보이는 성전,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거룩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 내 집(가시적 교회)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막 11: 7절)."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시적 교회 성전 건물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개인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 장소 또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파는 곳을 술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모신 개인 교회가 모여서 거룩한 분께 예배드리는 그 장소를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주님을 모신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관계없이 천국이요 거룩한 곳, 성전이다.

      이런 것을 볼 때, 가시적인 교회(보이는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에클레시아, 즉 하나님의 대관식에 초청받은 무리는 보이는 교회를 거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회(천국)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는 것은 그분의 뜻이다
       
      1.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마 3: 12)”

      본문에서 (his threshing floor)이라고 소유격을 사용하셨음을 주목하자. 그 뜻은 이미 불러냄을 받은 무리(개인교회)가 그분의 소유이다.(광의적으로는 모든 세상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개인교회가 모여 공동체 교회(가시적 교회)를 이룬 곳을 주님께서는 (나의 타작마당)이라고 소유격을 특별히 붙여서 사용하시기 기뻐하셨다.(나의 백성, 내 백성 등등)

      2.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Let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harvest. At that time I will tell the harvesters: First collect the weeds and tie them in bundles to be burned; then gather the wheat and bring it into my barn.(마 13: 30)

      마태복음 13장의  "세상"은 육신 세계를 의미하고 추수 때 교회와 분리시키실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라함은, 믿는 자, 믿지 않는 불신자 모두 섞여 살아가는 육신 세계를 총칭하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모든 세상 사람이 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롬 3: 10절 참조) 과 의인(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개인 교회)을 양이라 하고 주께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고 갈라내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러하다.

      마태복음 13장 한 구절만 풀이하여 “세상”에는 가라지가 있으나, 교회 안에는 모두 알곡만 있다라고 주장 한다면 모순이다. 교회(개인교회나 공동체교회), 예수님을 마음에 구세주로 믿는 자가 되면, 그 즉시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벗어나서 하늘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을 가리킴이라면 그 성전된 육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육신, 가시적 교회)는 세상에 속하였으나 그 권위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주님의 피로 깨끗게 된 알곡이지만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기 까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주님의 때가 되기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서로 부대끼며 자라고 있는 들판이 세상 속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명이 알곡된 자들에게 주어졌고, 그 사명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단이 날이면 날마다 가라지를 뿌려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인 교회가 모여모여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임인 (공동체 교회) 안에도 사단의 회가 있다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계 2장 참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가롯 유다가 나왔다. 가라지는 분명히 있다.

      세상(코스모스)에서 교회는 제외된다고 그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주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 거듭난 영혼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귀한 무리이기에 하늘에 속하였으나,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땅, 곧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갈 2장 4절 그리고 고후 11장 26절에서 바울은 거짓 형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거짓 형제에게서 해를 많이 당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가라지들이 있었음을 가리킴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듦으로써 훨씬 더 많은 가라지들이 들어왔음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교회 안의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낼 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주님께만 있다.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자격이 우리(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가라지와 알곡을 가르고 골라내시는 분은, 농부 되신 우리 주님의 고유권한이며 그분의 주권하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라지 같다고 하여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다. 가라지를 찾아내고 갈라내고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른 분별을 하도록 말씀의 떡을 떼는 것,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을 밝히고 논하는 그 선(line)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이다. "너는 가라지" 혹은 "너는 사단의 자식"이라고 쉽게 정죄하거나 손가락질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내가 갈라내려 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그 정신을 논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내가 알곡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여 나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내가 참 열매인가? 그렇다면 가지 되신 주님께 더욱 바싹 붙어 있어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죽이는 말을 하기 전, 세워주고 밀어주고 살려주는 말을 하자. 다시는 우리 주님의 몸인 교회(개인교회)를 찢지 말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신 것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하심이다. 주께서 당하신 그때 그 모진 고통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찢을까 삼가 조심하자. 말세가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28절 하 참조).”



      글:최송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사진: 큰뒷부리도요새

      얀 반데 캄 (생태사진전문가, 네덜란드)

       
      누가 심었을까? 방조제를 가로지르는 길가에 가녀린 소녀의 자태처럼 청초하기 그지없는 코스모스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다소곳이 줄지어 선 채 살랑살랑 춤을 추며 피곤함에 지친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방축으로 된 도로의 양면이 모두 시퍼렇게 출렁이는 바다이다.
       

      새만금, 그 어마어마하고 웅장한 모습에 놀라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벌어졌던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쭉 곧은 교각 위 단정한 도로를 따라 얼마쯤 들어가니 전망대가 나오고 전망대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천사의 석고상이 아직은 때 묻지않아 새하얗게 눈부시다. 우리나라 지도를 바꾸고 있다고 하는, 이 새만금 방조제는 네덜란드의 주디찌 방조제(32.5km)보다 더 긴 33km이며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새만금 그 위용은 정말 대단했다.

      전망대를 벗어나 한참을 더 달려가니, 눈앞에 보이는 둑길 제방 저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가 평화로워 보인다. 그곳 들판에는 소란한 세상 소리, 자동차 소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벼알은 가을 땡볕 아래서 황금빛으로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채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조금 더 가자니, 넓디넓은 갯벌, 이미 메말라버린 거전갯벌에는 바다식물 나무 제가 듬성듬성 흩어진 채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고 거기에 경제와 산업, 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비상할 녹색 성장과 청정생태환경의 “글로벌 명품 새만금’을 꿈꾼다고 하는 곳, 이명박 대통령은 "새만금 방조제는 단순한 방조제가 아니라 동북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 가는 대한민국의 미래 경제고속도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새만금이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생각도 지역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지역 한계를 벗어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새만금의 미래도 활짝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라며 역설했다고 한다.
       

      또 "새만금은 4대강 사업과 더불어 대한민국 저탄소 녹색 성장을 위한 우리의 또 다른 노력, 4대강 사업이 죽어가는 강을 살리는 것이라면 새만금 사업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녹색도시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새만금은 나라의 자존심이라고 불리울 수 있도록 웅장한 간척사업장이요, 대통령의 꿈, 한 사업가의 원대한 비전이 현실화되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 그곳 어민들과 생태보존학자들은 새만금을 괴물이라고 부르며 울상을 짓는다고도 한다. 거전갯벌은 수천 수만 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면서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고, 갯벌은 거기에 의존하는 수많은 생명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갯벌에서 태어나고 갯벌에서 자라고 갯벌과 함께 늙어가다가 갯벌의 품속에 안기는 사람들, 갯벌이 주는 풍요를 누리며 갯벌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던 어민들,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그들 삶의 터전이 무참히 짓밟히고 한순간에 파괴된 것이다!

      새만금, 이 거대한 힘 앞에서 수많은 도요새, 백합과 조개 그리고 게들, 갯벌에서 생명을 이어가던 뭇 생명은 죽어가고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 새만금지역의 거전갯벌에는 큰뒷부리도요새 긴다리도요새, 붉은부리도요새 등등,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철새들이 때가 되면 날아와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유도 모른 채 많은 철새가 죽어가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수천 킬로미터의 비행을 하면서 이곳을 찾아온 도요새 몇 마리가 메마른 갯벌에서 먹이를 찾지 못하고 끝내 주검으로 남은 것을 사진으로 찍어 들고 다니면서 갯벌을 보호애야 한다 호소하는 조류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친구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내어준 봉고차에 우리를 태우고 안내를 하시던 그곳 교회 나이 많은 장로님은 "밀물 때와 썰물 때를 맞추어 바구니와 망태기를 든 아이들과 여인네, 지게를 지고 백합을 주우려고 나가는 할아버지들, 또 갯벌에서 개구리를 잡는 민첩한 도요새의 정겨운 모습을 이제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리 쉬었다.

      한편으로 세간에서는 이 웅장한 새만금을 가리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만리장성,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하고 백성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는 명분을 꿈으로 포장하여 앞에 내세운 강자의 욕심일 뿐이었다. 결국 그 강자는 백성을 위한다는 자신의 거짓 꿈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약자의 생명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진정한 꿈은 너도나도 모두 살리는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대에도 강자의 무리한 욕심은 꿈이란 이름으로 포장시켜 약자를 희생시키고서야 얻어내는 것, 정작 약자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헛된 것이요, 재앙일 뿐이다.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갯벌의 무수한 작은 생명을 죽여서 일구어낸 새만금, 수많은 젊은 생명을 희생시켜서 일구어낸 진시황제의 만리장성, 결국 약자인 너를 울게 해야만 이룩해 내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이 모두가 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친 욕심의 발로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너무 지나친 말일까?

      나는 생태보존학자도 아니고 갯벌을 사랑하는 어민의 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거대한 새만금 방조제 위를 달리는 내내 마음이 많이 울적했다. 왜일까? 그것은 새만금이나 만리장성을 보면서 내게는 그들의 업적보다는 그들의 무리한 욕심과 지금 우리가 당면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향해 높이, 더 높이를 외쳐대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고대 사람들처럼 무엇이든지 크고 높고 강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들, 그들을 큰 종이라 따르며 숭배하는 어리석은 성도들,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가들이 주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들의 무리한 욕심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포장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수히 작은 교회를 쓸어트리고 성도들의 헌금을 갈취한다.

      교회당 건물은 주님께 예배 드리기 위한 목적보다는 부와 권력과 능력의 상징이라도 되듯 하늘 높은지 모르고 더 크게 더 높게 올라만 간다. 어디 건물뿐이랴,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교회와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영혼을, 사업,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것 같다. 성도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단다. 사업가적 마인드가 뛰어난 몇몇 삯군 목자들은 목회보다는 성도관리 차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시켜 사고팔기도 한다. 이런저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 상품들로 성도들의 영혼을 유치(그렇다 유치가 아니고 무엇이랴)하기 급급하다.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신자들을 각종 프로그램과 상품으로 미혹해서 더 많이 수용하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작은 교회도 엄연히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건만, 약한 교회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교회 내에서도 심각한 빈익빈 부익부 기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문어발처럼 자신의 교세 넓히기 경쟁이라도 하듯,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 많은 돈과 인재들을 투자해서 지교회를 세운다. 이런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크게 부각시키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반기련도, 극단적 신비주의 자들도,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각종 이단 사설을 양산(produce)해 내는 그 어떤 단체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성공하겠다고 생각하며 남을 짓밟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이랴? 우리는 이제 서로 연합해야 산다. 연합하여 일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서로 도우는 교회가, 서로 도우는 성도가 되어야 그날에 주님께로부터 잘했다 칭찬과 함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0여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슴에 각인시키고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죽음을 택하셨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삼 일 만에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신 것이다.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구속을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뉘어 사역하시는 아픔을 참으셨으며, 협력하여 일하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다!!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 십자가 원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큰 교회는 내 몸집만 키울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믿음에 강한 성도는 약한 성도를 도와야 한다. 남을 죽이려고 하면 나도 죽는다. 성도는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상생(相生)의 원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이 인정하지 않는 비전은 불법이요, 불법을 행하는 자는 아무리 그 업적이 훌륭하다고 해도 주님께서 결코 인정치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이웃과 이웃, 목회자와 성도, 교회와 교회, 국가와 국가, 나의 꿈이 너를 울게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라 터무니 없는 한 개인의 욕심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소박하나마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꿈,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복된 꿈을 꾸며, 가꾸며, 서로 도와주고, 살려주는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 23),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2-3)"

      글: 별똥별/최송연의 칼럼글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찜통처럼 후끈거리고 무덥기만 하던 여름ning도 어느새 다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진 것을 보니까, 가을이 완연하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지나고 나면 곧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진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가을은 계절로서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는 것이다.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꼭짓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 때문에 급기야는 분열하고 갈라서야만 하는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터닝 포인터(Turning point)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시각, 긍정적인 시각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넘어, 초대교회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주신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큼 밀접한 관계로 함께 이방인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던 멋진 동역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주던 과격한 성품의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그 이름이 주는 뉘앙스대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 있었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 바로 이 바나바였던 것이다(행 9: 27). 그 후로, 이 둘은 서로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사이로 급진했으며,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나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그들에게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김을 볼 수 있다.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라고 하는 요한을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둘은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만,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강하게 반대한다(행 15: 37-38).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불화가 시작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마가였다. 왜일까?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던 1차 선교 여행지 중의 한 곳인 '밤빌리아'에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을 등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되돌아와서 두 사도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런 마가의 행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데도 매개변수였다. (행 15:37∼39)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큰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행 4:36), 바나바에게서 좀더 배울 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 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로 비쳐질 뿐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화목할 수 없을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의 주장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피치 못할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불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포인트가 되겠다. 사상이나 견해가 서로 너무 맞지 않을 때는 심하게 다투고 죽기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무익하다. 그럴 경우에는 서로 축복해주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대 교회 이방인의 선교사역은,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은 두 사람의 지도자가 각기 등돌리고 돌아서게끔 악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막 태동한 이방인 선교사역에 큰 위험을 주는 요소였고, 큰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을 바라보게 된 마가 역시 마음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도의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애통하는 때가 그에게 있었지 않을까? 그런 그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마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여기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록할 때,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희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비겁한 마가가 아니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훗날, 이런 마가를 가리켜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며 아꼈고, (벧전 5:13) 로마에 있던 바울은 마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 골로새로 보내면서 골로새교회에게 그를 잘 대접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골 4:10). 순교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마가를 데려오라고 간절히 부탁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딤후 4:11)

      이렇듯, 훌륭한 두 사도의 격렬한 다툼의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듯, 마가의 남은 여정은 신실한 일꾼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국에 가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던 바울 사도에게마저 중요한 사람, 인정받는 동역자로 거듭난 것이다. 마가는 한 때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조성한 원인 제공자였던 부족한 사람이지만, 회개한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뉴욕 교계의 분쟁과 불화의 몸살은 우리가 모두 함께 앓고 있는 심한 몸살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바 된 귀한 형제 자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생명이다. 이런 귀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이다. 그럼에도 앞선 몇몇 지도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한, 아름다운 화음을 울려야 할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인하여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작금의 뉴욕 교계 역시 모두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 아집이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다툼으로 분열될 지경까지 가게 되었으나, 그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고 그 일 때문에 더욱더 훌륭한 선교의 장이 열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분쟁도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고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찢고 겸손한 무릎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자신의 주장, 자기 의(Self- Righteousess)에 갇혀서 살았다면, 자기 살을 찢어내는 아픔, 고육지책 (苦肉之策)을 감행하고서라도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 되기 힘써 지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세포분열을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오늘이야말로 뉴욕교계가 바른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순간들을, 결코 가볍게나 헛되이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멋진 날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세계에 흩어진 성도들)는 뉴교협 교역자님, 평신도 지도자님들, 그리고 뉴욕 교협에 소속한 모든 성도님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 이 아픔을 딛고 잘 해내실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멋지게 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믿어보고 싶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사도행전 15:36~41)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소리 드높아만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성도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AD 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나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눈이 먼 탓이며, 주님 다시 오심을 보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는 목회자들, 성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니 너희는 그 길에서 속히 돌이켜 떠나야 한다.”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이 아침에 큰 울림으로 내 영혼을 때리며 들려온다.. 그렇다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1. 시날(r[;n]vi )의 역사적 배경:

      시날(r[;n]vi ), (신아르), 시날(shinar)은 강 두 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시날을 둘러 있는 두 강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으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유명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졌으며 후에는 바벨로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창10:10에서 위대한 전제 군주이자 제국 창설자인 니므롯이 시날 땅의 바벨, 에렉(수메르 어로는 우룩), 악갓(아가데), 갈레에 그의 왕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니므롯은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앗수르까지 밀고 나아갔으며(창10:10), 패역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여 그 유명한 바벨탑을 세운 곳이 바로 이곳 시날이었다(창11:2).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도 요한은 이 종교 제도를 언급하여 바벨론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칭하였다(계17:5). 탐사자들은 바벨론의 위치는 힐라옵 동북방 9.6km 지점과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이며,지금도 그곳에는 예루살렘의 왕을 잡아다가 유폐시켰던 현장을 비롯하여 53개의 신전(神殿)과1,300개의 제단이 더러는 부서진 채 남아 있다고 한다. 아간이 훔친 외투는 시날의제품이었으며(수7:21),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나 전부 금실로 짠 매우 값진 수놓은 옷인 것 같다.(참조: H. J. Austel; Wycliffe BE).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은 음란의 도시, 교만의 도시,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장악한 곳,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 바쳐진 물건, 하나님께 드려진 그 구별된 물건에 욕심을 부렸던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과 그 가족이 망하고, 아무 죄없던 그 이웃마저 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바로 그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했고, 결국 아간은 그 범죄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들, 딸들, 소들, 나귀들, 양들과 장막 그리고 그가 흠모하여 훔친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 금과 은과 함께 돌무더기에 깔리고 불살라져서 아골 골짜기에 묻혀버렸다.

      여호수아서의 기자는 그때 여호와께서 극렬히 분노하셨다고 표현했다(수 6:21~26).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물건에 대한 욕심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나 한 사람이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미혹되어 눈이 멀게 되면, 나도 망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 전부가 망하거나 아니면 큰 해를 당하게 된다.

      2.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앞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산의 외투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엄청나게 값진, 금실로 짠 옷으로서, 그 외투를 한 번 보게 되면 누구나 탐낼만한 매력적인 물건인 것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써 인간이 가로채서는 안될 그 무엇,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금지된 실과,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에도 비유될 수 있다. 영적으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지만 따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 취해서는 안 될 그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보아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을 전제로,

      a) 성도는 금지된 물욕(物慾)을 제어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는 영적으로 물질이다. 현대는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말세지말이다. 성도는 내게 허락되지 않은 물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물욕, 곧 금지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탐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서 직장에서 신임을 잃고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더 심하면 그 물질 때문에 자살까지도 하게 된다. 목회자들이라하여 이에서 제외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헌금을 자신의 임의대로 유용하는 것이나, 정한 사례비 외에 판공비를 받아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본다. 물론 목회자가 정해진 사례비 외에 목회 활동비가 있어야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목회 활동비를 100% 그 용도 그대로 정직하게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는 말씀은 가롯 유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물질을 탐하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마 2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의 사건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물질을 탐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좋은 예가 된다. 오늘날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예임에 틀림없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그 어떤 직위를 받았다고 하여 그 직위 자체가 구원을 줄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롯 유다도 사도로 택함을 입었지만, 그 직위가 그를 구원시키지 못했다.

      b) 성도는 금지된 정욕(情慾)을 제어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 性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최대의 죄악도 바로 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스러운 곳이다. 침소를 더럽히지(히 13:4절 참조) 말아야 한다. 성경에 별처럼 빛나던 인물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모세도 이방인이었던 구스여인을 취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므로 그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민 12:1).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 금지된 성(性)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탐했다가 두 눈 모두 빼이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c) 성도는 금지된 명예욕을 제어해야 한다.

      명예욕은 정말 무섭다. 이 명예욕은 사단의 속성이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다 쫓겨난 천사라는 기록이 있다. (겔 28장 참조) 명예욕이 무서운 것은 그 속성 때문이다. 올라가려고 하는 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한다.(잠 14:30절 참조) 동생을 시기한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란 오명을 영원히 남길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요셉의 열한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애굽의 종으로 팔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에 넘겼다.(마 27:18, 막 15:10 참조)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0:6, 11절 참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문제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고의 말씀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린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선한 말씀을 오용 내지, 악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중략-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절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情과 慾心)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절 말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절 말씀).

      별똥별/ 최송연의 칼럼 글

       


       
      요즘 웹상으로 무섭고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는 이상한 교리가 있어 성도들의 주의가 요망된다. 그 일로 인해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도 한참 열띤 논쟁이 벌어졌었고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인즉, 기독교가 유대교 교리보다 떨어지고 천주교 교리보다도 떨어진다고 하며 그 주된 이유로는 구약에서 메시야가 대제사장이란 것을 뒷받침해 줄 성구가 없고, 구약에서 예표된 성구가 한 구절도 없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도 대제사장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신약, 그것도 히브리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란 성구가 있고, 또 예수님이 레위 지파에서 태어나지 않고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셨기에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으로도 메시야로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은 물론, 구속 주로 받아드리거나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논지였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근거로 함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말씀을 정리해 보았다. 이 말세지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흐리게 하는 무서운 이단사설, 가만히 들어와 우리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 넣는 미혹의 영들을 경계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밝히 조명해 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나눔의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 본다.

      1. 대제사장의 사역과 선지자의 사역 구분

      먼저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역부터 구분해 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사역과 선지자의 사역은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아주 대조적이다. 대제사장이나 선지자는 모두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시고 기름부으신 자란 뜻에서는 동일하다. 그럼에도 사역에 있어서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필자가 지난번 칼럼 글에서도 잠시 언급한 대로 제사장은 인간 편에서 인간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이라면,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해 주는 파수꾼 역활이다. “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세웠노니 너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라( 겔 3: 17절).” 하셨다. 고로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반드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 대제사장을 세우신 목적:

      대제사장의 사역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구약의 제사장 사역을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제사장직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택하여 기름 부음을 받아야 제사장으로 인정했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외국인이 그들의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뜻은 단순히 민족적으로 같은 종족이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민이기에 자신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지만 대제사장은 선민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고 선택된 레위지파, 아론과 그 자손들만 대제사장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민족적으로서보다 하나님과 백성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만큼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기름부어 세워야한다는 의미로서가 더 강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제사장은 여러가지 형태로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받았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제사는 1. 속죄(건)제, 2 번제, 3. 화목제(위임제)이다. 위에 열거한 제사 중, 1번과 2번은 '인간의 죄를 속하는 제사임'으로 그 제물은 반드시 짐승의 피와 기름이 사용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화목제는 구운 떡이나 처음 열매로도 가능했다. 화목제란 속죄받은 후, 그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다음은 4. 소제= 고운 가루로 드리는 것(레2: 1-3), 5. 구운 떡으로 소제를 드리는 것 (레 23: 17), 6. 처음 익은 곡식으로 소제를 드림( 레 23: 17), 소제란 히브리어 (민카)이며, ‘선물’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성에게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장 자신도 같은 예식으로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다른 이를 위해 제사를 드려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롬 3: 10절)말씀이 성립된다.

      3. 구약에서 메시야로 예언된 대제사장.

      a.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한 마리의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물 삼으시고 아담과 하와의 육신이 당장 죽는 것을 면하도록 하는 예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거행하심으로, 이때,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고 그 몸으로 단번에 제사를 지내실 대제사장 메시야는 이미 예표되셨다(창 3: 21절).

      b.샬렘왕이시요, 평강의 왕 ‘멜기세댁’은 오실 대제사장 메시야의 예표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 4절 말씀).” 구약의 멜기세댁(창14: 18-20)은 신약에 나오는 멜기세댁과 동일함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 19-20절 말씀, 7: 1- 28절 참조).”

      4. 메시야로서의 대제사장은 반드시 유다 지파에서 탄생해야만 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 10절 말씀).”, “유다는 나의 홀이며(시108: 8).” 여기에서 홀이란 영어로 lawgiver이며 다스리는 자이시다. 그 예언대로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셨다.(마 1: 1, 히 7: 11-14)

      **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율법으로 인한 구약 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되어 졌다. 따라서 구약법 제사장 제도 역시 변혁되었기에, 레위지파는 오실 이의 표상일 뿐, 실제적인 대제사장이 오신 후 제사 직분이 변혁되어야 율법도 변혁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
       
      “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For the priesthood being changed)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우리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히 7: 12-13절).”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메시야이시며 대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탄생하시면 오히려 나실인이 아니란 것이다.

      5. 신약에서 예수님은 친히 그 몸으로 제사를 드리시므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본문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하였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반드시 죄에 상응하는 그 무엇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리지 아니하시고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다. 침례(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던 것이다(요 1:29). 인간 대제사장들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그때마다 죄없는 짐승을 잡아야 했고 자기 자신도 먼저 그 피로 정결케 하고서야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 그 피로 단번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 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 10-14절 말씀).”

      그런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야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단 한 분, 우리들의 죄를 위해 그 몸으로 영원한 속죄를 드려주시고 죽고 멸망할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자격을 온전히 갖추신 유일무이(唯一無二)하신 대제사장이 되심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하며, 그 피를 힘입을 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 12-14절 말씀).”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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