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은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1818~1883)다. 그는 지배 계급이 종교를 '아편'처럼 이용하여 피지배 계급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이용하려고 꾸며낸 것으로 종교가 단지 정신적인 욕구 해소의 역할만을 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종교를 아편에 비유했던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종교는 아편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허황되다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은 인간이 신을 만들어서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에서 제외된다. 무엇 때문인가? 엄밀히 따져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산 생명의 길이며, 인간이 신(神)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神)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잘 안 되는가?

어쨋거나,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신앙하여 자신의 정치 세계를 쌓아올렸던 ‘레닌’과 그를 추종하던 공산 세력은 철저하게 망했다. 그가 숭상하던 공산 세계의 체계는 인간의 영혼 속에서 신을 죽인 대신, 인간의 두뇌를 로봇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켜버렸다는 것을 공산 세계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러시아인들은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다. 나는, 뒤늦게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국민의 분노가 하늘 찌르는 듯, 레닌 동상을 향해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끝내는 무너트리며 울부짖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이 레닌을 두 번 죽이는 그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말살시켜버리자는 사상은 이렇듯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의 사상을 모든 사람의 머리에서 온전히 사라지게 하지 못하는 것은 칼 마르크스의 사상 체계는 그만큼 깊고 매력적인 사상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칼 마르크스'를 철저한 무신론자 정도로 치부하지만 실상 그는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로 볼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그를 ‘휴머니즘적 유물론’을 탄생시킨 교주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고 그의 사상은 설득력 또한 강렬하기에 어쩌면 세상 종말까지 사람들,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는 ‘악마적 사고의 씨앗’이라고 보는 것이다.(이것은 단지 필자의 견해로서 객관성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반대자님들은 너무 열받지 마시길...^^) 

이런 시점에 아멘넷의 오랜 독자이며 합리주의를 지향한다는 한 분의 입에서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망발(지송~^^)이 나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그분의 말을 누구 하나 반박하는 사람이 없더란 것이다. 아니 오히려 모두 재미있다는 듯, 희희낙락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거의 기절할 뻔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토록 변질하기까지 되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야 많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개인의 삶이나 정신세계, 영혼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다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방종과 부도덕한 삶, 종교 사기꾼들의 가짜 성령행전을 바라보게 된 영혼들이 그들에게서 입은 상처가 너무도 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된 이유를 꼽자면, 그것은 자신의 나태함(안일함)이 산출해낸 부산물일 뿐이다. 이런 변절자들의 일이 처처에 일어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세적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며, 이런 것들이 모두 말세적 한 징조임을 성경이 말씀해주고 경계를 높여주고 있건만, "딱딱하다, 고리타분하다." 등등...이유를 대면서 성경은 읽어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란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통독하여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실 이런 일은 전혀 놀랄 일만도 아니란 것이다. 말세에는 저 배도하는 자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그런 자들이 횡행하는 속에서 성도는 참된 믿음을 지켜야만 그 믿음이 진주처럼 빛나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가짜들은 이미 예정된 길을 걷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수많은 책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성경인가? 우리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금까지 쓰여진 책 중 가장 놀라운 책이라고 한결 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사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나라와 직업이 다른 40 여명이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의 3개 언어로 1, 50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쓰여졌다. 다양성 속에서 그 위대한 주제와 중심 인물이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란 점이 일치된다는 점이 놀랍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 구약 66권 속에서 하고자 하는 그 정의, 그 뜻이 한 치도 어그러짐 없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점, 일관성, 연속성, 그리고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로서는 도저히 꾸며댈 수가 없는 경이로움이 숨쉬는 책이 성경이다.

그 이유가 바로, 성경의 저자는 여느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고 천명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 16)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성령)께서 이것들을 모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 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 (벧후 1: 21) 이 말씀이 그러하지 않다고 비방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것을 증명하고 입증해 낸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고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2)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무슨 책이든지 그 책에는 흐름의 주제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초등학생이 읽는 어린이 동화책 한 권 속에서, 이솝 이야기 속에서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흐름의 주제가 분명히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 주제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 주제가 선명히 들어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성경의 핵심, 곧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 39)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책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목사님들이(모국어 번역문으로 된 성경만을 읽을 때)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하기에 이런 목사님들의 말을 인용하여 이단들, 반기련 소속 첩자들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3) 마지막으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드렸고, 성경의 핵심, 곧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드렸다. 이제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시고 성령님께서 그 책을 모아다가 우리(인간)손에 들려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삶의 잣대로, 생활규범으로 말들을 하지만, 축약하면 “인간 구원”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또 무엇인가? 구원론을 잠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원((救援)의 뜻: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구원’은 각각 ‘예수-아’와 ‘소-테-리아’인데, 보편적으로는 임박한 악과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낸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그 의미를 좁혀 ‘죄로 말미암아 오는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 된 생활에서 구해 내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구원, ‘소테리아’는 신약성경에만 약 150회 정도 나온다. (막3:4, 행27:20참조)

2. ‘쏘테리아’의 원형 동사는 영원한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육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다시 말해 구원이란: 영과 육이 질병과 진노로부터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함 (롬5:9절 참조).

3. 마지막으로 ‘소테리아’는 종말적인 점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비로소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롬13:11,고전5:5, 히9:28절 등, 참조).

기본 구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 구원론이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 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게 되는가? 아니면 죄와는 상관없이 영원 구원인가? 하는 것이 주요 쟁점으로 남게 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그가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 교회의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부터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성도)가 교회의 어떤 직위나 직분에 상관없이 반드시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기에 성도라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중생: (重生, born again) 중생이란 ‘파링게네시아’인데 그 뜻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거듭난 성도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가지 욕심과 미혹에 이끌려 (이때도 반드시 고의성이 없고, 실수라야만 하며 짐짓 죄나 고의적인 죄는 거듭난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 발을 씻는 것,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기도를 올리고 그 죄에서 돌이켜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요13:6-9절 참조 )

결론적으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교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과 내가 잠시 살펴본 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기에 생명을 살리는 책이다. 생명과 아편은 동일시 될 수도 없고 동일시 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이 살아나갈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은 오직 성경 말씀 한 권만이 유일무이한 책이다 ㅁ

우리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 신학 책을 읽는데 할애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성경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해야 하고, 인터넷상에 떠도는 많은 설교자의 설교를 청취하는데 보내는 시간보다 성경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필수다. 자기 자신이 직접 하루에 한 장이라도 성경을 읽어야 산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영혼의 금서(金書)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내 마음속에 담아야 한다. 말세에 성도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 역사 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때는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늘 중심을 잡아 주고, 마지막 환난 날, 그리고 극심한 일상 속의 환난 속에서도 그 말씀이 나를 지켜주신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 10-11)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 14-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브리서 4장12절 말씀)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오래 전 아멘넷 게시판의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 적이 있다.

(무조건 성령 받으라는 게 뭐하라는 겁니까? 기도하고요? 부흥집회 참석하고요?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성령 받게 된다면 수천 번도 더 받았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를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령이 저에게 임하셨다고 1초 만에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던겁니까? 제가 바보라서 그런지 제 믿음이 거짓인 것인지, 제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지, 예수를 믿고도 여전합니다. 까칠한 제 성격을 바꾸자고 뭔짓인들 안 해봤겠습니까? 님은 저처럼 스스로에게, 남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고, 상처줌으로 인해 준 상처를 다시 돌려받는 악순환에 "주여 나를 죽여주세요"하고 기도해 봤나요?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정말 해결방법이 있다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써주세요. 님의 글은 저같은 사람에게 비웃음으로 들릴 수도 있답니다.)

그러고 둘러 보니 웹상으로 이곳저곳에서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참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되어 그 부분을 함께, ‘구체적으로’ 좀 다루되 신학적으로가 아닌,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질문자님께도 긍정적 해답이 되고 우리에게도 다시금 좋은 깨달음이 되도록 성령님의 조명 하심을 간구해 보면서...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이다. 사람의 영혼(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 중생(Regeneration)’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질문자의 말씀대로,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a) 회개(悔改, Repentance)가 있게 된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래서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①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죄로부터 떠나려면 먼저 죄를 죄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율법(롬3:20)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②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포함한다. 참된 회개는 상한 마음(시51:17)을 동반하는데, 사람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③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포함한다.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캄’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뜻으로, ‘슈브’는 ‘돌아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 ‘메타멜로마이’ 역시 ‘뉘우치다’는 뜻으로, ‘메타노이아’는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웨스트민스트 회개 중
 
b) 옛(육신적) 사람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전환(Conversion)된 여정이 시작된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하며 생활로 증거된다. 내가 마음에 예수가 구세주임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롬 10: 9-19절 참조),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요,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만만에 콩떡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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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나올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는 신앙생활이란 영적 전쟁을 치르는 싸움터에서 진군하는 용사들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성도이기에, 날이면 날마다 치러야 하는 영적 전투는 참으로 치열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여서, 믿음이 좋다고 하여서, 시련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악으로 악을 갚을 수 없기에 더욱 절박하다.

물론,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십자가로 이겨놓은 싸움에 우리는 그저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마지막 승리는 이미 획득해 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까지 가는 동안, 성도의 길은 여전히 악전고투의 연속 선상이라고 하여도 결코 무리한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잘 된다.”라고 말하지만, 글쎄, 그 잘된다는 것이 어느 선에서 어떻게 잘되는 것인지, 때때로 막막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은 세상으로 변한지 오래다. 온갖 불법과 불의가 대세를 이룬다. 이런 험악한 말세를 살아가는 현대 성도들에게나 과거의 성도들에게나 당해야 하는 환란과 어려움은 세상 불신자들의 생활보다 어쩌면 성도이기에 더욱더 극심할 수가 있다. 구약의 요셉이 그랬고, 신약의 바울 사도가 그랬고, 초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러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때로는 나의 실수로, 때로는 전혀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오해를 사거나 이런저런,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잦고, 그로 말미암아 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 속, 믿음의 용사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특히, 구약의 왕들 중 ‘여호사밧’과 그의 ‘브라가 골짜기’의 전술(?)과 막강한 전승 기록을 읽게 되었고, 그 방법을 내 삶에 적용시킨 후, 환난과 시련 앞에서, 그토록 두렵던 마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되었으며, 하늘의 평강과 축복을 누릴 수 있었기에 우리 독자님들에게도 이 브라가 골짜기의 비밀을 잠시 소개하고 싶어진다.

역대하 20장에 나오는 “브라가 골짜기”의 전쟁은 다른 말로 ‘드고아 전쟁’이라고 불리는데,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던 때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악명 높은 '아합'이 다스렸고, 남 왕국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사밧’왕이 다스리던 때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거하던 그때, 모압, 암몬, 마온 몇 사람들이 동맹을 맺었고, 시쳇말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유다 나라를 치려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 왕 ‘여호사밧’은 크게 두려워했다.(대하 20: 3) 갑자기 몰려온 연합군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떨고 있던 그는 이 문제야말로, 여호사밧 왕,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인 것을 판단했던 듯, 그는 직면한 문제를 들고 조상적부터 섬겨 오던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온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나이다 우리는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 대하 20: 3-13절)

여호사밧 왕은 이렇게 국가의 위기 앞에서 자기 자신도 기도했지만, 온 백성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선포했음을 보면서 지도자의 선이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지도자란 난제 앞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혜와 통솔력이 필요한 것이다. (작은 단체건 큰 단체건 지도자는 한 두 사람의 말만 듣고 움직이면 안된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이 전술적 지략이라고 내놓은 것이 “백성들아, 금식하며 기도하라.” 라고 하는 것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말을 현대 지도자가 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정신병자라 치부하고 말았을 법한 희안한 전술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구할 때,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유다 백성에게 기적같은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다.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어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셨느니라” (대하 20:10-17) 했다.

이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 왕은 몸을 굽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모두 다 하나님께 경배했고, 그대로 믿고 밀고 나갔다. 무기와 철갑옷과 병거 대신 찬양으로 적군 앞에 나아갔고, 여호사밧 왕은 계속해서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격려하며 앞으로 진군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대하 20:20)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두려움을 물리치고 백성들과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하여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대하 20: 21)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하셨다 (20:21-22) 왕과 백성들이 담대하게 찬송을 부르면서 드고아 전쟁터로 나아갔고, 연합군 앞에서 칼과 무기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부르며 나가자고 하는 것이 두려움의 적을 물리치는 전략과 전술이었던 것이다! 황당한가?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찬양 소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을 때, 이상한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 연합군들의 눈이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인지, 자기네들끼리 서로서로 치기 시작하는데 이건 가관치도 않다. 완전히 다 죽고 멸종할 때까지 그리했다고 기록되었다. 글자 그대로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것이 사실로 성경 말씀에 엄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찬양만으로 유다 왕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은 벌떼처럼 몰려오던 모압, 암몬, 마온, 이 세 나라 연합군들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다 물리쳤던 것이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자칫, 서로서로 미운 마음이 생기면 그때 흔들리면 안된다.)

그뿐이 아니다. 적군들이 가지고 왔던 수많은 재물. 의복, 보물을 전리품으로 거두었는데, 전리품이 얼마나 많았던지 유다 백성들이 그 전리품을 거두는 데만 사흘 동안이나 거두어 들였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대하 20: 22-25) 전리품을 모두 거둔 후에 그 골짜기의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송축의 골짜기” 란 뜻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어려움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을 때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어디에서 건져 주시는가?.

(1)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신다

본문의 암몬 자손, 모압 자손 그리고 마온 사람들, 이 연합군은 영적으로 사탄의 군대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연합군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집어 삼키려고 달려든 것 같이 사단 마귀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침범하는 것이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구세주이심을 믿지 못하게 도전해 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사단을 대적하며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 아군을 향해 총칼을 겨누는 촌극을 벌리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도처에서 보게 된다. 자칫 서로서로를 향해서 총칼을 겨누는 것은 이미 사단의 조종으로 말미암아서 영안이 멀어진 것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이런 사악한 사단의 장난을 인간인 우리가 능히 대적하고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다. 그렇다. 인간은 마귀와 싸워 이길 능력이 없다. 착각하지 마라. 사람이 제 아무리 학술적으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여도 마귀의 요술을 당해 낼 수가 없다. 죽이려고 모함하며 덤비는 데 이길 자가 없는 것이다.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마귀를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화가 나서 달려가면 저쪽에 있던 사탄이 피해 버리면 나만 벽에 부딪혀서 상하게 된다. 영적 전쟁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듯,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수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내게는 없다. 예수님께서도 막 9:20에서 제자들이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보시고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말씀하셨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 권고하신다.

우리는 이미 사탄을 이겼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승리케 하셨음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요 16:33)

(2)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다.
사실상 인간의 근본 문제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 문제이다. 인간이 죄에서 해방을 받고 온전히 변화되기 이전에는 언제나 어두운 생활일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택하는 성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눈을 들어 세상을 한 번 바라보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마귀의 세력이 판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의식주만 해결되고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의를 따라,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가 해결 받지 못해서 그렇다. 내 죄 문제도 주님께 들고 나가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사밧 왕은 자기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겼더니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이다. 우리의 죄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3) 어려운 역경에서도 우리를 지켜 보호하신다.
세상에서 어려움이 없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어려움이란 대개 자기의 잘못을 통해서 오기도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 때도 심한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여호사밧 왕이 그러한 경우이다. 구약 성경에 요셉이 그런 경우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당하는 어려움, 이런 때에는 정말 괴롭다.

그렇지만 염려할 것도 없고 분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전조임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오늘 여호사밧이 당한 어려움은 곧 브라가 골짜기의 축복을 받기 전에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었다. 요셉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후, 극심한 환난과 고통을 모두 통과한 이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이다!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재난이 찾아 왔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 환난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환난은 큰 축복의 장소에 들어가게 하는 충실한 안내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모두 그렇게 된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그렇다. 내가 실수하여 당하는 어려움이건, 모함에 빠져서 당하는 억울한 시련과 환난이건, 그 모든 고난과 환난을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내게 환난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대항하거나 육신적인 싸움을 싸우지 말아야 한다.

이런 때를 당했을 때, 곧 죽고 망할 것 같이 몰려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나간다면, 그때 주님께서 준비해 두셨던 복병을 풀어내 주시고 환난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 도우시면, 환난과 두려움의 골짜기가 ‘축복의 골짜기’, ‘브라가 골짜기’, ‘송축의 골짜기’로 변하게 되는 환희의 순간을 내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좁은 길을 지나가고 십자가의 길을 지났더니 광명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시험의 길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지 않았더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된 것이다. 시험은 힘들고 전쟁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아름다운 송축의 골짜기가 내 앞에 좌~악 펼쳐지게 되는 것, 이것이 ‘브라가 골짜기의 비밀’인 것이다. No cross, no glory라고 했던가…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역대하 20: 20 하반절)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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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끼오~!” 담장 위에 냉큼 올라앉은 수탉이 목청 돋워 새벽 미명을 알리는 울음소리를 신호로, “구구구~” 부지런한 암탉도 어느새 일어나 그 품속에 있는 병아리들의 먹이를 찾아 나선다. 부리로 짚더미를 헤치기도 하고 언 땅을 발톱이 닳도록 열심히 파헤치기도 한다. 수탉에게 질세라, 사립문 틈으로 목을 쑥 빼고 밖을 내다보던 누렁이가 아직은 이른 시간, 호젓한 시골 길, 지나가는 이 하나 없는데, 저 멀리 사라져가는 달그림자를 좇는 것인지, 희부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향해 “컹컹!” 요란하게 짖어댄다. 자신이 주인집을 지키는 지키미임을 과시하는 충성스러운 표현일 것이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끓이는 냉잇국 냄새가 구수하게 집안을 감싸 흐르고, 부지런한 아버지는 손수 만드신 싸릿대 비로 “사그락사그락” 밤새 떨어져 내린 오동잎을 끌어모으기도 하고 “서걱서걱” 긴 작두로 소여물 써는 소리가 꿈결에서 들리듯 정겹다. 어른이 된 후, 각박한 세상을 힘들게 헤쳐가는 동안에도 평화롭던 고향 집은 필자에게 지속적으로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요람처가 되고, 질서정연한 자연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메마른 심령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렇다. 창조주가 맡겨주신 사명을 역행하거나 거스르는 일 없이 순복하는 자연, 질서 정연한 세상은 언제 어디서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우리(여성들)도 모든 분야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말하면, 그 대답은 “Yes,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이다. 능력만 있다면 여성이라고 해서 지도자가 되지말란 법이 없다. 성경에도 수많은 여인이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고 여선지 ‘드보라’는 정치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최고 지도자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여성 사사였다.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라, 사사가 치리했으니, 그때 사사는 현대 대통령과 같은 위치임(사사기 4:4절 참조)) 그리고 그녀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잘 감당해 나왔음을 성경이 증명해 주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어떤 분야에서건,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와 자질, 그리고 지도력을 가졌다면 여자라고 해서 한 단체의 지도자가 되지말란 법은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오랫동안 유교사상에 찌든 문화는 “남존여비”라는 무서운 이념을 체계화시켰고, 때문에 수많은 여인이 어두운 곳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져 한 맺힌 삶을 살아나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국가이기에 그 수치의 역사를 바로 잡는 의미에서도 여자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잘된 일이라고 본다.(필자는 정치를 좋아하지 않기에, 누가 더 좋은가 나쁜가에 관한 matter가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이런 관점에서, 여자 대통령이 다른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것은 글자 그대로, 획기적인 일이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한 많은 여성들에게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건 할 수 있다고 하는 소망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견인차 구실이 될 것이란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그러나 그 책임 사역을 제대로 감당해 나가려면 피나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여인이 한 나라의 운명을 걸머지고 나간다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도, 녹록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나라라는 특성이 그렇고,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남성분들 대다수는 아직도 여성 리더에게 그리 우호적이질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정치와는 상관 없이, 필자도 한 사람의 여인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ㅠㅠ

그렇다면, 신약시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사명은 무엇인가?
 
여성은, 교회 안에서 치리(주관자)자의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우는(helper)사람, 조력자(partner)조용히 배우는 자로서 사명이 주어졌다. 목회 서신서(디모데 전 후)에서는 교회와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치리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여성)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느낌이긴 하지만,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선언한다(고전 11:3; 엡 5:23). 성경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다(엡 1:22, 23; 4:15; 5:23; 골 1:18). 머리는 온 몸과 지체들을 주관하듯,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관하고 다스리듯,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 원리다.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여자를 남자의 몸으로 삼으신 제도와 위계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때부터 설정하신 원리며 제도로서 이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창조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세상적, 유물론적, 정치적 이슈와는 다른 그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천국의 작은 모형인 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께서 지시하신 것이다!!!

“여자의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남자”(아넬, ; an adult male, husband)는 남자 어른 또는 남편을 뜻한다. “주관하는 것”(아우덴테인, ; to exercise authority; 권위를 행사하다) 이 단어는 권위를 행사하다(아우덴테오, ; to exercise authority or to domineer over, 위에 권위를 가지다 또는 지배하다)의 현재·부정·능동이다. 현재 부정사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개념이 있다.

“허락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do not permit;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르치는 것과 연결되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일, 남자 위에서 권위를 행하는 일을 계속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

주관하는 자리(치리권)는 교회에서는 감독(장로, 목사)의 임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17)고 하였다. 여기서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과 인도하는 자들은 동일한 직분을 맡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딤전 3:5; 5:1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자가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여성이 목사 안수 받아 총 책임 지도(주관(leader))자가 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딤전 2: 12-15절 참조) 이 말씀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여자는 교회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란 것이거나, 성경공부도 가르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주관하는 자리 즉, 교회에서 총책임 리더(Leader)격인 목사 안수를 받아서 남자를 주관하는 자리까지는 탐하지 마라...그런 뜻이다.

성경에서 분명히 이브(여자)는 아담(남자)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셨다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 23)' 교회나 가정에서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에 의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여성에게로서가 아니라 남성에게 그 사명이 주어진 것은 보다 나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것이며 누가 더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위계 질서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말씀을 가감하지 마라

얼마 전 올라온 아멘넷 기사엘 보면, "아담을 남자로 보면 큰일 난다." 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기에 인류로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면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는 중성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는 ‘남성(Man)이 틀림없는데, 어찌해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의아해진다. 진리를 거스르려고 하면 다른 이가 아닌 그 자신이 먼저 고통당한다.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고서야 어찌 평안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나라는 과거 '남존여비'사상으로 인해서 여성들이 압박을 많이 받은 나라이긴 하다. 그래서 많은 여인의 가슴에 한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인생의 잣대, 신앙인의 가는 길에 이정표가 되는 성경 말씀마저 변개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남성분들, 특히, 기독교 남성분들이 회개해야 한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스도가 그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준 것처럼 헌신과 사랑을 쏟아붓지는 않으면서 여인들에게만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목사님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인간은 남녀가 동등하다, 그러나 역할 면에서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고 그 구분을 할 수 있는 '매뉴얼'이 성경 말씀이고 그 ‘매뉴얼’대로 순복하는 것이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라고 하여도 성경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호도해서 가르쳐서도 안 되고 내 삶에 끌어당겨서 적용해서도 안 된다...진리는 변개시킬 수도 없고, 또 변질을 시켜 내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 창조 질서를 지키는 것

성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자들의 패역한 교훈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며 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울음을 우는 것이 사명이고, 개는 주인 대신 도적을 보고 힘껏 짖어대는 것이 사명이며, 해는 반드시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져야만 한다. 기차는 철로(railroad)를 벗어나지 않고 달리는 것이 사명이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여인은 남자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 완전케 하는 것이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지 말자. 그것만이 창조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아름다운 신앙의 미덕일지니...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 20-21),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1. J. Glen Gould, I and II Timothy, Titus(B.B.C. Vol. 9), p.577
2. G.L. Archer,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pp.411-413
3. William M. Hendriksen, Timothy and Titus(Banner, 1964), p.109
4. Donald Guthrie, The Pastoral Epistles(IVP), p.76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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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난 옷이냐? 어서 사실대로 말해 봐라. " 환경미화원인 아버지와 작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입고 들어 온 고급 브렌드의 청바지를 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며칠째 다그쳤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아들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죄송해요. 버스 정류장에서 손지갑을 훔쳤어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아들이 남의 돈을 훔쳤다니....' 잠시 뒤 아버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시켰다. 자식의 잘못을 감싸기 바쁜 세상에 뜻밖의 상황을 대면한 경찰은 의아해하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아들의 범죄 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친 것에 마음 아파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판이 있는 날 법정에서 어머니가 울먹였다. "남편의 뜻대로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한 벌을 내려 주세요."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저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흑흑."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드디어 판결의 시간이 왔다. "불처분입니다. 꽝-꽝-꽝." 벌을 내리지 않은 뜻밖의 판결에 어리둥절해 하는 당사자와 주위 사람들에게 판사가 그 이유를 밝혔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 중앙일보 신문기사 중에서..

이 대목을 읽어나가던 필자의 가슴이 뭉클, 눈시울이 뜨거웠던 이유는, 비록 가난하나마 진실함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던 한 훌륭한 아버지가 부족한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목숨을 내건 그 큰 사랑에서 우리 예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가리켜서 판사는 “훌륭한 아버지”라고 정의한다. “훌륭한 아버지.” 그는 부자도 아니었고 지식인도 아니었고 정계를 주름잡는 유명 인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진실했고 정직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은 그 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들에게 그가 가야할 길은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직의 길이란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지금 세상이, 교회가 이토록 시끄러운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 "진실과 정직 실종"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세상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목회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딘가? 그 길은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길, 외롭고 척박한 길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따르는 길, 의로운 길을 걷는 것이 부름 받은 자들의 길이란 사실을 망각한 데서부터 진실과 정직은 실종된다. 진실함과 정직함이 생명이어야 하는데, 그 길을 이탈해 버린 자들의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긴 양 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내기도 하고, 그 양 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 버리는 것도 예사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목숨과 맞바꾼 자녀들, 그분의 이름이 걸려 있는 귀한 신분이다. 이런 우리이기에, 우리는 흙탕물에 휩쓸려 맥없이 떠내려갈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란 흙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사탄의 덫을 인지(認知)하라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인간을 어떻게 유혹하는가에 대한 최고의 통찰력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고참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에게 어떻게 인간을 유혹해서 함정에 빠뜨릴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 잠시 소개해 보면,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라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도록. 내가 말하는 교회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뻗어 나가며 영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교회,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처럼 무서운 그런 교회가 아니니까. 자네한테 고백하는데 그런 광경은 우리의 가장 대담한 유혹자들까지도 불안하게 만들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인간들은 그 광경을 전혀 보지 못한다네.” 물론, 이 대목은 “fiction”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어지러운 교회(공동체 교회, 개인 교회) 때문에, 모든 교회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를 흔들어 깨는 것, 이것이 사탄의 덫이다!!

2. 엘리트 의식을 버려라.
엘리트 의식이란, 다른 사람(공동체)보다 내가 더 나은 그 무엇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의 사이에 뭔가 뚜렷한 차이(distinguish)가 드러나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별로 없다. 생각해 낸 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에서 사기를 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인양, 신령한 척 하기도 하고, 급기야는 없는 학위마저도 부풀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두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지 않으면 그 모든 아성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 선생을 지금에 와서 무시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모두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사탄이 쳐둔 올무에 사정 없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 피로 깨끗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주님의 몸이다. 이에서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런고로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선 공동체 속의 한 일원임을 명심해야 실수가 적을 것이다.

3. 성령으로 충만케 하라
오늘날 기독교계가 이토록 심각하게 병들게 된 그 원인을 찾으라면, 필자는 "잘못된 성령론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라."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기현상, 화끈하고 뜨끈해야만 한다는 것, 쓰러트리고 쓰러지는 현상, 심지어는 횡설수설 하는 술취한 현상이 성령 충만이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고 있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함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에 두는 것이 문제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되지 않은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분이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하라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성도라 이름하는 이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동시에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천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생명과 맞바꾼 생명, 이토록 귀한 우리가 또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려서야 하겠는가?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대와 나, 이제 돌아가자. 가슴을 찢고 여호와 우리 주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나와 내 자녀가 사는 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무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호 6: 1, 3, 6,7)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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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일괄적인 톤으로 한 하나님이 삼위(세 위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는 분명히 특별계시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고, 인간 이성으로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기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라고 말들 하지만, 필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 받는 그때부터 그 사실이 분명한 사실로 믿어졌다. 이것이야말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성령 하나님의 조명 하심이라 믿으며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혼동에 처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삼위일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던 유능한 신학자, 목회자가 이단으로 지목받아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극심한 논쟁으로 이어져서 사랑 안에서 하나로 굳게 뭉쳐져야 할 형제 자매가 서로 손가락질 하며 한 치의 양보함 없이 다투기도 하여, 안티와 이단들이 손뼉치며 즐거워하도록 하는, 정말 가슴 아픈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쉽게 설명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영혼들을 바로 세워줄 수가 있을 텐데…늘 기도하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오늘 아침, 주께서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이다.” 깨우쳐 주신다. (요 10: 30절 참조)

그림자와 실체는 엄연히 그 생김새나 모양이 다르고 활동영역도 다르다. 그림자는 빛의 경로 상에 불투명한 물체(object)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 때문에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란 것이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필자는 아주 오래전(약 6년 전쯤인 것 같다),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과 삼위일체 론에 부딪혀 한 판 설전을 크게 벌렸던 적이 있고, 그때, 아멘넷 운영자 님과 편집위는 필자의 손을 들어준 고마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전도사님이란 분의 주장인즉슨,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主)시요, 메시아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강하게 우겼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전도사님의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 목회자님들의 질문이며, 이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기에 많은 이단들이 정통교단에서 파생되기도 하고 여호와증인 같은 이단 종파들이 즐겨 인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만 제대로 정립된다면 삼위일체가 그리 어려운 교리적 산물만은 아닌, 성경의 핵심 사상인 것을 믿을 수 있고, 예수가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단코 이단으로 넘어가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여,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되심, 그리고 정통 교단이 인정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시는가?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대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2.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성부, 말씀(성자),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심을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 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서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 (빌2:5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4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 2;13)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시록 1: 8절)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 8절) 성경의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 13) 천명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고 계신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 증거하신다.
대부분의 말씀이 그러하듯, 요1서 5:7절 말씀은 한글 번역판보다 영어성경이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현대 우리나라의 많은 목사님들께서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림자, 실체, 그리고 빛의 관계성:
예수님, 그림자, 빛, 이 셋을 따로 떼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예수님 한 분을 신약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실체( 요1:1 ), 빛(요 1: 4), 구약의 율법(오실 이의 그림자, 골 2: 16- 17)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율법)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오실분의 그림자인 율법)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6-17)

 
그림자 =율법(율법=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 실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빛(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는 물로서, 바위로서 표현되기도 하나 관계성을 설명하려니까 그림자와 실체 그리고 빛을 연관짓되 성경의 정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 1-9) =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그분은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성경은 증거하신다. 그러나 온전히 다른 위격을 소유 하신 분, 한 분 하나님이시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 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번역문
 

결론적으로, 인간인 우리의 그림자(shadow)가 실체(substance))와 따로 떨어져서 일 할 수도 없고 그림자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빛을 통하여 생성되는 그림자와 실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 10: 30절 참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려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그분의 신비함(mysterious)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숨겨진 비밀이며 주의 영으로 계시(revelation)해 주시고 성령의 조명 하심을 입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의 비밀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것일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도록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림자에 생명을 입힐 수도 있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실 수도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히 알게 된다면, 삼위일체 론(論)이 이해되지 않을 이유 없고, 성경에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그 정신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이시니,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 물 그리고 피니 이 셋이 하나로 일치하니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요 5: 7-8)
 
위 성구는 KJV 의 같은 구절을 필자가 그대로 직역해 본 것입니다. 삼위 일체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주의:

어떤 사람이 모함하여 말하기를,
필자가 빛은 하나님, 말씀(예수 그리스도 곧 실체), 성령님은 그림자(예수님의 그림자)라고 설파한다고 몰아가며 비방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설명할 때, 그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갖추신 분이란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 5)예수님이 빛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실체)시요, 율법(그림자)은 오실 그리스도,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란 것이다

 
성령: 1. 하나님의 성령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 16)" 
2, 하나님의 영은 곧 그리스도의 영: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사람이 아니라”( 8:9)
 
이외에도 행 16: 7, 빌 1:19, 벧전 1: 11 = 성령은 그리스도, 곧 예수의 영이심을 증거하심

 
아래는:
본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밝히신 독자님의 글을 이곳에 옮겨다 놓습니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별이 사모님의 칼럼에 발제자의 영성을 신뢰하기에 +10 추천으로 우선 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언뜻 이해하기에 벅찼습니다. 처음 대하는 “빛과 물체((object), 실�(substance))” 라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설명 하는 새로운 명제에 걸려 더 이상 읽어 내려 갈수가 없었습니다.

발제자가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전제를 달아 놓았듯이 의아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명제 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와 실체”로 설명하는 예가 성경에서 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 갑니다.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골2:17),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계속 드리는 똑같은 제사로는 예배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히10:1)”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위와 같이 율법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예로 성경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으로, “그림자와 실체”로 “삼위일체” 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 전혀 무리가 있다 할 수 없다.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확인 합니다.

"삼위일체" 를 설명하는 새로운 대 발견이다.
“휴” 과연 별이 사모님 이시다. 안심 입니다.) - 잠긴동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 속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신을 찾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느 민족이건 그들의 문화 속에, 물론, 그 정도나 형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을 섬긴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고 그 출발점은 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좇겨난 때부터가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쫓겨난 그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유전으로 물려받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가는 곳마다 신을 찾으려하고 신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위로 받으려하는 모습을 연출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이 귀소본능(歸巢本能) 부분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영적 무지(無知) 상태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은 오히려 여러 가지 형태의 신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신을 섬기기도 한다는 것이 필자가 본 견해입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1.이방인들의 하나님: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장 22절 하)”라고 지적한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많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그 어느 국민보다 더 종교성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다고(행 17: 23절)바울 사도가 지적하듯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모든 만물이 다 신입니다. 산에는 산신령, 돌, 나무, 폭포수, 물에는 용왕님, 하늘에는 일월성신님, 부엌에는 삼신님, 심지어 우리가 먹는 된장 간장독마저 모두 신이 관장한다고 믿을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국민의 종교성이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2.기독교인들의 하나님: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나 막상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라고 물어보면 정작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 신앙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 안에서 잠시 분류해
보면:

a.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개념은 막연합니다. 하나님이란 하늘 공중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나 만나볼 수 있는 염라대왕쯤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 천당이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그뿐이니 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 '천국보험'을 들어 두는 심경이라고나 할까요?

b.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늙은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복신앙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라 보면 틀림 없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기분이 좋아진 하나님이 복을 한 아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좀 시원치 않으면 화가 난 하나님은 당장에 매를 때리기도 하고 병을 주기도 하며 또 물질에 큰 손해를 끼치게도 한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다른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에 큰 질병이라도 들면, 그것을 저주받은 것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성도가 물질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잘못된 하나님을 믿는 것에 길든 성도들은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란 불안과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했음을 아는 상태에서 병이라도 들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틈을 타 자칫 신령하다는 자들의 안수기도를 받으면 뭔가 해결될 것같다는 심리를 이용하는 사이비 치유사역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전지전능 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도덕적 속성으로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시며, 신실과 공의가 완전하신 분,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짧은 지면에 다 말씀을 드릴 수 없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고 하나님을 믿어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부. 성령 하나님을 보이게 나타내려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 바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요1: 18절 참조)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
 
하나: 하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합니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입니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청지기 자세'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잠시 말씀드린 대로, 청지기란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내가 누리는 것 중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내 건강, 내 생명, 내 자녀, 내 물질, 모두 주인의 것이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 받아 누린다는 개념입니다.(시 24: 1절) 따라서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내는 것은 복 받으려고 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그동안 받아 누렸으니 그 은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 분의 일을 드립니다.(요즘은 십분의 일 그 자체에 제동을 걸어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있는 듯, 몰아가는 일부 안티들의 목소리도 거세지만...)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의 것인데, 십일조뿐 아니라 내 재산 모두 드려야 마땅하지만 십 분의 일이라도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이런 자세가 선한 청지기의 올바른 물질관입니다.

둘: 하나님을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입니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구원관입니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뜻이 함축돼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입니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 입니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우리가 죽어서나 만나 보는 염라대왕도 아닙니다. 변덕 많고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재 정립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이 신앙이 올바른 신관입니다.

고로, “당신의 하나님은?” 하고 묻는다면,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믿는다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 하나님의 아들(성자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을 때, 그 속에 성도가 지녀야 할 올바른 물질관, 구원관, 신관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가장 올바른 정답이 됩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 15-18)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화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 11- 12절 말씀)”

USA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 칼럼


숲을 지나며 다람쥐가 풀밭에다 도토리 숨기는 것을 볼 시간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이겠는가?”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현대는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바쁜 일상에 끌려다니느라고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한 것인지, 우린 다람쥐가 풀밭에 도토리를 숨기는 서정적 그림을 잊은지 아득히 먼 옛날이다. 바쁜 일상에 쫓기느라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Go, Go!” 외치면서 무작정 달리기만 하던 인생, 갑자기 들판의 하얀 고드름 저 너머 흰 눈이 새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하늘과 만나게 되면 주춤거리면서 당황스러워한다. 무얼 잃어버린 것일까,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날부터 마음마저도 휑~ 하니 허전해 지는 것은 또 어인 일일까…

지식수준, 환경의 수준, 경제 수준, 나이별 수준에 따라, 모든 사람의 느낌이 꼭 같을 순 없을 테고, 확실한 이유야 알 수 없다지만, 돌이켜보면 지난해 특별히 성취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속절없는 세월 따라 나이만 자꾸 들어간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분 앞에 서야만 하는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주 앞에 내어 드릴만한 일, 변변한 것 하나 없다고 하는 이 불편한 진실 때문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만 초조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한해가 끝나는 시점이면, 우리(인간)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그 어떤 신앙도 가지지 않은 불신자이건, 마음이 연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神의 힘 같은 것에 매달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 그간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悔恨), 그 누군가가 조금만 도와주었더라면 이보다 더 잘해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 같은 것도 생기고, 새해가 되면 새로운 삶, 아름다운 오색 무지개를 꿈꾸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런 마음들이 연말연시가 되면, 그동안 생각조차하지 않았던 神,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온갖 잡다한 미신적 행위가 방방곡곡에 유행병처럼 휩쓸고 지나감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샤머니즘에 찌들대로 찌든 유교적 산물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듯, 초창기 기독교인들의 삶이라고 하여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성도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자는 선한 취지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기독교는 ‘송구영신 예배’를 접목 하였고, 현대는 ‘송구영신 예배’가 정통 예배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그렇다면, 작금의 “송구영신 예배”, 과연 성도에게 필요한 예배의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할까? “남이 장에 가니까 나도 장에 간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생각 없이 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아테네 사람을 향한 바울 사도의 질책이 생각난다.(행 17: )20-23 참조) 우리는 송구영신예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오늘은 송구영신 예배의 그 허와 실이란 주제로 함께 생각하면서 한 번쯤 꼼꼼히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고 조명하여 주심으로 깨달아지고 주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송구영신 예배의 기원:
송구영신(送舊迎新), 사전적 의미로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이며, 송구영신 (送舊迎新) 사자성어에 예배란 말을 덧붙인 것이다. 놀랍게도 송구영신 예배의 기원은 우리나라 선교초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예배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풍성한 정초 세시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섣달그믐에는 모든 연중거래를 마무리하고 새해 준비를 하게 되는데, 그날 저녁에는 ‘해 지킴’(守歲)이라 하여 집 안팎에 불을 밝히고 새벽까지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고는 했다.

정월 초하루는 '설날'이라 하여 연시제(年始祭)를 지내며 집안과 동네의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세배하러 온 손님들에게는 음식을 대접하고, 설날에는 덕담을 나누면서 서로 새해를 축하하고 축복하는 인사를 나누고는 했다. 이러한 전통 문화의 토양 위에서 자연스럽게 한국교회의 송구영신예배는 시작되었다”(『송구영신예배의 유래와 의의』라는 글에서 발췌) 우리 아멘넷엔 승려에서 개종하신 서재생 목사님께서 이미 세시에 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에, 더 자세한 내용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같고…송구영신예배의 기원만 잠시 살펴보자.

기록에 따르면 1887년 12월 31일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사역하던 서울의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와 베델 교회(현 정동감리교회)가 연합하여 드린 것이 최초의 송구영신 예배였다고 한다. 당시, 복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나 교회 역사에 대한 바른 안목이 모자란 상태에 있었던 초창기 우리나라 믿음의 선조에게 “송구영신 예배”는 한국 전통의 무속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고, 역으로 그동안 얽매였던 모든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도약한다는 깊은 의미도 내포되었을 것 같다.

송구영신예배에 대한 부정적 시각:
잠시 언급하였듯이,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다른 나라의 성도들이 송구영신(送舊迎新)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여지고 있는 특이한 현상인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처음 시작은 글자 그대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그 시간을 주님께 드리자는 좋은 취지로 생겼을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상혼, 그동안 무속신앙에 젖어 살던 우리 민족들이기에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교묘한 악의 축이 교회 안에서도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해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뽑기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강대상 앞에 바구니를 놓고 그 안에 긍정적이고 축복된 성구들만을 성경에서 골라 뽑아 담아 놓는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나서, 모든 성도들을 한 사람씩 강대상 앞으로 나오게 하여, 바구니 속에 들어 있는 성구 중 한 개를 집어내도록 권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 성도가 집은 그 성구가 곧 그 해 그 성도와 그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새해가 되면 그해의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돈이 있는 자들은 유명한 점술가들, 혹은 유명한 절을 찾아 액을 물리치는 굿도 하고, 비싼 부적을 사서 1년이면 12달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있는 점술가들을 찾기도 한다. 그들은 그해의 운수를 적어놓은 글귀들을 바구니에 담아놓고, 잘 훈련된 새 한 마리가 나와 그 사람의 운수가 담긴 글귀를 물어다 준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해 그 사람의 운수를 가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샤머니즘 신앙에 찌든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어느 머리 좋은 인쇄소에서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교회에서 그런 사악한 무속신앙을 그대로 흡수, 접목하여 송구영신 예배 시간에 버젓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속 신앙의 최고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성도는 날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지 제비뽑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어떤 교회는 마지막 주일에 신년감사 헌금 봉투를 두 개씩 나누어 준다고 한다. 하나는 신년 첫 주에 드리는 헌금 봉투이고 다른 하나는 송구영신 예배 때 드리는 헌금 봉투란 것이다. 그러면서 송구영신 때에 드리는 헌금 봉투에는 기도제목을 적어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 년 동안 담임 목사가 개인적으로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첨부한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담임 목사가 기도를 해 주지 않겠는다는 것인지….

이런 때, 교회를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이용하는 무당 신앙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크고, 이런 기회를 '수입'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역시 기독교의 무속화를 부채질하는 부작용이 일어나 성경적 개혁신앙이 설 자리가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악한 행위를 교회에서 감행하는 한, 주님께서는 결코 그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 앞에서 시간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질 뿐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 이다(시 90: 2절 말씀).” 이런 세계관으로 온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의 왕으로 즉위하셨고 통치하시며 다스리신 지가 이미 2009년이나 지나갔다. 이렇게 주님께서 친히 인간을 다스리시기 위해 오신 해(AD= Anno Domini)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부터 영원의 연속선상이다. 성도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혼합종교 풍토다. 주님의 교회가 더 이상 이런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내가 잘사는 ‘넓은 길'보다는 내가 조금 어렵고 힘이 들어도 십자가의 길 "좁은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송구영신예배에 대한 긍정적 시각:

예배란 어떤 예배던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마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마음이면 모두 아름답다. 절기에 얽매이거나 억지로 드리는 마음이 아니라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답다고 본다. 우리가 어떤 마음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요 4:24절 참조).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경'하여 드림으로 '시간 중심'의 송구영신, ‘절기 중심’의 송구영신, ‘기복사상 중심’의 송구영신 보다는 '주님 중심'의 송구영신, 즉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영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것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옛 것이란 단순하지만, 불변의 진리인 성경적 가르침에(고후 5: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한 간점선에서, 뒤돌아보며, 지난 한해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또 앞으로 나가야 할 다른 한해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묵은해의 마지막 끝자락과 새로 맞는 한해의 새벽 미명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드려진다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다운 것이다. 예배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드려지면 좋고, 그것이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면, 더 많이 드리면 더 많이 드릴수록 더 좋다.

일 년이면 열두 달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오직, 내 가족,내 육신을 위하여만 사용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 기뻐하시는 주님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일 예배를 드리면 더욱 좋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우리다. 어느 특별한 날짜, 어느 중요한 한 시간을 따로 떼내어 그날만이라도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구속의 은총에 감사를드리는 예배 시간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은 또 절기에 얽매이는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자체를 부정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지난날, 잘못 살아온 내 삶을 성찰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남은 삶을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각오와 연약한 나를 주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서원하는 마음이라면, 송구영신 예배,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 같다는 것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 이다(시 90: 1-2절 말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

전규성 ㆍ 2012-11-29 (목) 13:44 IP: 175.xxx.128 ㆍ조회: 236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19.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갈 2:20. 말씀입니다.
갈 2:19. 말씀과 갈 2:20. 두 말씀은 분리하여
해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연관 지어 해석하여야 합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히 7:18-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새 계명이 주어짐으로 전엣 계명이 기능을 잃었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갈 2:20. 말씀하신 바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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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최송연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 15)=개혁개정
“by abolishing in his flesh the law with its commandments and regulations. His purpose was to create in himself one new man out of the two, thus making peace,” (엡2: 15)= NIV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 개역한글
“Having abolished in his flesh the enmity, even the law of commandments contained in ordinances; for to make in himself of twain one new man, so making peace” (엡 2: 15)= KJV

법조문은 판사의 능력 안에서 해결되었고 그 육체로 완성된 것이라고 봄. 인간(죄인)이 법조문(율법, 계명)을 지켜서 사면(용서)받을 수 없으니, 사면받은 인간(죄인) 편에서는 자유함을 얻는데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않게 된 법조문이나 그분(예수 그리스도)편에서는 십자가로 완성시킨 계명으로서 영원히( 그 나라가 임하기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완전무결,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면 안되는 것은 성경은 한 두 구절로 그 뜻을 들어내려하면 문제가 되고, 통전적이고 유기적ㅡ 문맥의 전 후 좌우를 살펴서 그리스도의 뜻을 온전히 들어내려 할 때,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밝히 깨닫게 됨.

은혜( Grace) 역시 같은 맥락임: 뜻= 값없이 그저 주는 것. 은혜를 입은 쪽에서는 값없이 거저 받은 선물(구원)이나 그 은혜를 베푸신 자(그리스도)편에서는 십자가 형틀이라고 하는 무지막지한 고통을 댓가로 지불하고 쟁취한 것임.

따라서 죄인이 율법을 지켜서 온전하게 되려고 하는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되고 오직 그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명심할 것이나,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몽학 선생'으로서 지금도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분을 인간이성으로서 재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함. 주님의 말씀은 더하거나 빼거나(가감)할 수 없음. 계시록 참조.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율법(계명)은 온전케 된 (개혁 된 )된 것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것임을 들어내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도록 이끄는 몽학 선생(갈 3: 24-)이라고 성경에서 밝히  말씀하고 있음.

율법폐기론을 더 이상 받쳐줄만한 성경적 근거가 미약합니다, 전규성 님. 이제 그만 하심이 어떻겠는지요? 정신이 산만해져서요. 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는 합니다만...아멘넷 게시판에 은혜의 말씀, 복음의 장으로 가꾸어 가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거듭난 사람(born again Christian)은 ‘성령의 사람’이며, 생물학(生物學)적 용어를 빌리면,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이다. ‘바이오제네시스’, 생물은 생물에서만 난다는 설,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 생명을 받는 것, 生에서 生이 난다는 것, 죽음에서는 결코 生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생물학(生物學)적 원리다. 이런 원리로, 산 생명이신 성령 하나님이 마음속에 내주한 사람은 생명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생명이 없으며 이름과 형체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이다.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거듭남의 고백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정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롬 10: 9-10)함 없이 직분을 받은 자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비일비재 일어나는 탓에, 주님의 교회는 지금 큰 수난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저지르는 온갖 추악한 죄악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모두 전 세계의 성도들과 주님의 교회가 함께 뒤집어쓰게 된 오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인가…. (말씀에 의지하여 바로 살아보려고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마저 무더기로 “개독교인”이란 소릴 듣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이다. ㅠㅠ)

죽은 송장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고, 산 생명에서는 생명의 향기가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2:14-16절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산 생명이 아니다. (1요 5: 12)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주님의 영광을 실추시키는 자리에서 떠나고 나중에 주님의 얼굴을 만나 뵙기 원하면 먼저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 자기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재점검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고후 13: 5) 성령과 성령의 사람을 알지 못하는 무지(ignorant)가 빚어내는 촌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현상으로 미혹하는 영이 활개를 치는 세상, 정신을 차리고 분별하지 않으면 내가 잠식당하게 된다. 짧은 지면에 모두 다 논하기는 어렵지만, 간단히나마 성령과 성령의 사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 새해에는 우리 다 함께,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보자는 슬로건이라도 내어걸고 싶은 심경으로 정리를 해 본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神이심을 믿는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한다

“성령”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성신” (루-아흐 코드쇼) 2회 사용되었다. (사 63: 10, 11) 신약에는 “성령”이란 말이 93회가 인용되었다. 구약에는 “루-아흐”가 단독으로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선한 신”(Spirit, 대문자로 표현)으로 번역되었다. (느 9:20, 30, 시 139:7, 슥 7:12) 신약에도 (프뉴마)가 단독으로 “성령, Spirit”으로 표현되지만, (마 4:1, 22: 43, 등 13회가 사용되며, 또는 ‘하나님의 성령’ (το Πνεύμα του Θεού)가 사용되고(마 12: 28, 고전 6: 11, 7: 40), ‘주의 성령’ (the Spirit of the Lord, το Πνεύμα του Κυρίου) (눅 4: 18 ), 또는 ‘예수의 성령’ (the Spirit of Jesus, το Πνεύμα του Ιησού)( 행 16: 7 )으로도 인용된다. 또 (바람)이라든가 ‘호흡’이라든가 공기의 진동을 뜻하는 것이 본래의 의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해당 되어지는 (생명), (영혼)의 뜻이 된다. (창 2:7, 출 35: 31, 욥 7: 11)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 주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삼위일체의 신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 원어 대사전 참조

성령의 사역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의 하시는 사역을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을 어떤 마술의 영으로 착각할 수 있고, 신성을 버리고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을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이비 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성령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해주신다.(요 16: 8절), 성령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Lord)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고전 12: 3절), 성령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성령의 세례(침례)를 주신다. (고전 12:13절) 성령은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요 6: 63절), 성령은 신자들 안에 거하신다. (고전 6: 19절), 성령은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 롬 8: 16절) 성도의 일상 삶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성령은 지 정 의(知情意)를 온전히 갖추신 인격적인 신(神)이시다. 불신자들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고전 2: 12-14절) 섬기는 일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고전 12: 7-11절),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도 성령께서 친히 결정하신다.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벧전 4: 10, 고전 12: 7절)

성령의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

1.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곧 ‘외식(hypocrisy)’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조심하라” (눅 12: 1下)고 경고하신 것이다. ‘외식’, 그렇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외식’인 것이다. 외식이란 글자 그대로 안과 겉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외적인 현상은 오직 그 열매뿐이다. 그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 타인은 누구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과 자기 자신은 알 것이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든지, 바리새인의 누룩(외식)으로 포장하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누룩이란, 확산되어 본질을 부패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기독교계 안에서 불거져 나오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목사들의 간음, 성폭행 문제나 재정비리 의혹, 세습 문제 등, 전 세계의 기독교계를 절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즐기다 그 덫에 치어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고로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바리새인의 누룩을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 믿음의 상태를 비추어 살펴보아 바르게 분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깨달아졌으면 회개하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 돌이켜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다.

2.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거짓 은사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주 간단(simple)할 것 같은 issue건만 각처에서 뜨거운 감자로 달아오르고 있는 은사론, 신사도 운동, 은사중지론 등은 세기를 두고 신학자들 간의 논쟁이 치열했으나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결말이 나지 않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 천착지학(穿鑿之學),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기의 사상이나 지식의 틀에 끼어 맞추려고 말씀을 끌어다 붙이기 때문이며, 성도들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은 목사님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은사중단론 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극단적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은 모두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축자영감설’을 그대로 믿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방언도 다른 은사들처럼 교회와 개인의 건덕을 위해서 주시는 성령님의 선물로 믿어야 하고,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해야하되 영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모든 방언이 다 성령의 주시는 선물로서 온 것이 아닌, 사단의 장난질 방언도 있다는 것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을진대, 외국어로 들려지고 알아지는 방언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인간의 소리가 아닌, 영으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알아듣지 못할 방언도 있다는 것도 인정하자. 모든 방언이 각 지방 언어들로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면 영들을 다 믿지말고 분별하라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두었겠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면 관계로 간증을 넣을 수는 없지만, 나는 외국어로 방언하는 것과 같은 현상, 어릴 적 고아로 자라,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여 일자무식한 사람이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 영어 성경을 줄줄 읽을 수 있고 영어로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부인을 만난 적 있다. 또 방언을 한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원망하며 밤새도록 저주하는 것도 들어본 적 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7 ), 놀라운 것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는 자를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참 선지자도 아니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며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미혹의 길로 끌고 가려는 사단의 졸개들이다. 계속해서 다시 보자. “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고후 11: 14-15)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떤 독자님이 댓글로 남긴 말이 가슴에 와닿기에 여기 옮겨본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성경말씀을 인간적인 사고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함께 눈에 보이는 이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참.. 성경 말씀은 상당히 함축적, 암시적인 표현이 많은데...그것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추론한다는 것이 참 어불성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런데 기존의 정통 교회들도 그 방향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구...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 안스럽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 중에서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고 고쳐나가며 눈에 보이는 이적을 구하기보다 말씀에 드러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들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옳은 말씀이 아닌가, 성령의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깨달음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죄에게 굴복하지 아니한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 성이 남아 있어 죄의 유혹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받는다고 하여도, 죄가 그 사람을 주장할 수 없도록 주님의 영이 지키신다. 때문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가슴과 머리, 말과 행위가 모두 함께 나간다. 거듭난 사람은 작은 죄를 지어도 성령의 탄식하시는 세미한 음성이 들려져 그 양심이 심히 괴롭다. 그러면 기도하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과 회개의 영으로 죄사함을 받고 돌이켜 구원함에 이르는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른, 외식으로 포장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Holy Spirit)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요 5: 18절 말씀) 죄의 소원은 성령의 사람에게도 있으나 죄가 그를 주장하거나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 이것이 성령의 법, 곧 생명의 법이다!

성령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

a)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시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새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새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새해에 우리는 극단적 신비주의나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물든데서 돌이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정욕, 이런 육신에 속한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 봐야 성령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요즘처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위상이 바닥을 친 시대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교회 등록하고 매주 교회 출석하는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으로서. 반드시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Holy Spirit, 삼위 일체의 영)으로 중생한(born again)사람, 성령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옳다. (요 3: 3-9절 참조)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이런 사람은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 생명의 신이 그 속에 내주해 계신, 거듭난 사람( born again Christian)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성령의 사람은 생명의 열매가 그 생활 속에서 맺히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별첨1:
지난 번, 필자가 정목사님의 글 아래 남긴 댓글인데, 칼럼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곳에 별첨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정.의(知情意)를 온전히 구비하신 인격적 神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1. 성령은 知적인 神이시다.
인간은 아무리 유능해도 그 知적 능력에 한계가 있으나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知적 신(神)이시며, 이는 성령의 지혜와 통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성령 앞에서 숨기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a)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신(神)이시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사 11: 2)
b)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알고 계신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 고전 2:10)
c) 우리와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계신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 고전 2: 11)
d)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세계를 가르쳐 알게 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 13)

2. 성령은 감정을 지니고 계신다.
성령의 인격적 속성에는 감정적 속성이 있으므로 기뻐하시고, 근심하시고, 사랑하시며, 탄식하기도 하신다.
a) 성령은 근심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엡 4: 3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으니…” (사 63: 10)
b) 성령 하나님은 탄식하기도 하신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니라” ( 롬 8: 26)
c) 성령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신다.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 롬 15: 30)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기뻐하시지만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 근심하시며, 탄식하신다. 성도는 결코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

3. 성령은 意지적 속성을 지니고 계신다.
성령은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갖추시고 사역하신다.
a) 성령은 그 뜻(의지)대로 은사를 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 고전 12:11)
b) 성령은 명령하고, 지시하신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행 13: 2),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 행 8: 29)
c) 성령은 성도들을 인도하신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 14)
d)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전 12:3) )



산호의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되 뿜어내는 바다는 푸르다 못해 녹색을 띠고 작열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해변의 얕은 물 속에는 물과 하나가 된 꼬마들이 키득거리며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고, 세계 각 곳에서 휴가차 모여든 중.노년들이 햇볕을 즐기려고 파둔 커다란 모래찜질 통(?)속에는, 하마처럼 불룩한 배들 때문인지 이곳저곳에 작은 모래 산을 이루는 풍경이 사뭇 나른하고 한가롭기 그지없다. 젊은 청년들은 검붉게 탄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듯, 손바닥만 한 작은 판자 위에서 각종 묘기의 서핑놀이로 파도를 타는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듯 싱그럽다..

사면이 바다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공기와 물이 깨끗하고 맑아 어른들은 물론, 갓태어난 신생아에게마저도 수돗물 그대로를 받아 분유를 타서 마시게 해도 좋다고 의사들이 권한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다투어서 피고 지는 곳, 제각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각종 이름도 모를 꽃들이 풍겨내는 향기는 비행기 트랩을 밟고 내리는 순간부터 그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아름다운 꽃 중의 꽃, 단연 으뜸인 꽃이 있는데, 그 이름은 ‘푸루메리아’이다. 이 꽃은 생김새는 소박하고 색갈은 천사의 날개처럼 하얗고(가끔씩 붉은 색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흰 색이 많다.) 속은 노란 것이 보기에 무척 우아하고 단아하지만, 그 향기만은 단연 양귀비의 미소처럼 고혹적이며, 그 달콤한 향기는 가까이 코를 대면 아찔할 정도로 강열하다. 고운 여인의 눈망울처럼 매혹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암튼, 필자의 짧은 수사학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다.ㅎ

밤낮으로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해풍은 고기의 비릿함이 섞인 짭짤한 바다 내음을 실어 나르고, 제아무리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여름날이어도 집이나 그늘에만 들어서면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것이 마치 청량음료수를 마신 것 같다. 혹독하고 모진 겨울 추위가 없기에, 각종 예쁜 새들이 집 앞에도, 상점이나 식당 앞에도 사람을 친구하자며 날아들어 재재거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음식을 먹을 때면, 한 입 달라는 듯, 더욱 가까이 와서 까만 눈망울을 도르르 굴리면서 애교를 부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기에, 굳이 흠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겨울이 없기에 매일 그날이 그날 같고, 또 하얀 눈꽃 송이를 구경할 수 없다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필자가 사는 곳은 (러시아’ 선교사를 자원한 남편과 함께 ‘러시아’로 발길을 옮기기 전이나 지금이나) 세계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한국에서 온 어느 짓궂은 여행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이야말로 천당 바로 아래 999단쯤 된다.” 고 말하였을 정도라니까, 가히 그 아름다움은 짐작이 갈 것이다. (별님이 사는 곳이 어디메냐고요? 안드로메다? 꼭 집어서 말을해 달라고요? 그것은 독자님의 상상에 맡기려고 해요. ^^ 너무 열어버리면 재미가 없거든요. ㅠㅠ)

정작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사는 지역의 예찬론이 아니라,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을 때, 내가 그 아름다움을 얼마나 즐감하면서 살았던가? 그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었던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일어나는 작은 어려움에 불평이 더 많았던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싶은 마음 진심으로 간절하다. 그때는 내가 처한 환경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열악하고 가장 힘든 것만 같았다. 개척교회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어쩌다가 부정적인 말이 들리기라도 하면, 그 한마디에 여린 성품인 나는 상처를 받고 가슴앓이를 하느라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수없이 많다. 그런 상태였으니까, 주위의 아름다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라고는 전혀 가져보지 못하였다고 해야겠지…

그러다가 막상, 러시아, 그것도 시베리아에서 가깝다는 ‘우수리스크’(연회 주)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삭막함이란 이루 말로 다 형언키 어려웠다. 글자 그대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 척박한 땅이요, 각박한 인심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시사철 겨울이 없는 열대 지방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백팔십도로 회전, 이제는 여름이 없는(있다고 하여도 아주 짧은 순간뿐) 곳에서 겨우내, 밤도 낮도 없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 흰 눈이 무릎까지 폭폭 빠지는 곳, 내게는 낭만적이기만 하던 그 하얀 눈꽃 속에 파묻혀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폭설에 갇혀서 몇 날 며칠 밖에 나갈 수도 없이 집안에만 갇혀서 지내야 했던, 말만 듣던 동장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기를 지녔는지 체험하고 전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좋은 곳에서, 행복 조건을 두루 갖춘 곳에서, 천혜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던가? 뒤늦게야 깨달았고, 주님께 눈물로 회개 자복했던 기억이 감사절을 맞아 새롭게 떠오른다. 감사를 회복하니까, 생활도 회복시켜 주신 주님,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많았던 나를 가르쳐주시고 길러주시기 위함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감사를 제사로 여겨 기쁘게 흠향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시 116: )

우리 인간도 그러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것 같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주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 이런 인간의 심리가 하나님의 성품 중 한 부분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ㅠㅠ 요즘처럼 어려운 세태 속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해한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중에서, 종의 자리에 던져졌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하는 중에서라도 요셉은 어떠했는가?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따로국밥이 아니라면 말이다.

요셉, 그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던져졌더라도 절대 원망하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다.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런 요셉을 주님께서는 애급 제국의 대 국무총리 자리까지 번쩍 들어 올려놓으신 결과를 보면서 우리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각인 시켜야 한다. 요셉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욥도 마찬가지다. 욥도 최악의 상황에서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저주성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아내의 원망 소리에도 굴하지 않더니 결국 그도,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승리자로 주께서 일으켜 세워주셨던 것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늘 듣게 되는 소리가 ‘감사하자’라고 하는 소리이기에, 우리 마음이 무디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형식적인 감사, 표면적인 감사 생활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나의 감사에 대해 전반적인 ‘퍼스펙티브(Perspective)’ 가 이루어져야 한다. 감사의 본질은 무엇이던가?

기왕에 감사할 거면,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 감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니까, 나의 감사 생활을 살펴서 제대로 된 감사 생활로 업그레이드(upgraded) 시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감사에도 세 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다고 한다. 영어로 1. If (~ 만일의 감사), 2. because of (~때문에 감사), 3. in spite of (~ 그럼에도 감사)로 나눌 수 있다.
 
첫째, If의 감사. 이것은 조건부 감사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주신다면(물질을 주시면, 건강을 주시면, 내 병을 고쳐주시면 등등.)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조건 단서를 붙인 감사다. 이것은 가장 차원이 낮은 감사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

다음, because of =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내게 물질 축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나와 내 가정의 건강을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내 자녀가, 내 사업이 잘되어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Because of)감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상대적 감사이다. 물론, 이 때문에 감사(상대적 감사)마저도 범인인 우리네에게 있어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음, 실질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영국이 낳은 유명한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0.18~1714)가 도둑을 맞고 낙심 중,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훈련을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옮겨 보면,

1. 이전에 도둑을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2. 자신의 생명이 도둑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3. 아직도 자신에게 무엇(가족, 건강, 이웃 등)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고
4. 자기 자신이 도적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어떤가? 우리는 매튜 헨리의 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3. in spite of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다”. 이 감사는 절대적 감사로서 인간 이성을 넘어선 감사,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욥이나 하박국 선지자가 드린 감사로 극한 환난이나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만 감사하는 것이다. 이런 감사는 인간의 지. 정, 의로 느껴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전적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다. 사실, “감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우’(Ευχαριστώ)인데, 이 말은 ‘’은혜’ (Χάρης, 카리스)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필자가 아주 오래전, 한 번 들려드린 기억이 있으나, 너무도 감명 깊은 실화이기에 다시 금 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한다. 절대적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 환경에서나 느낌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오는 것, 실제 인물의 이야기이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고 하는 유명한 장애시인이 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심한 열병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 결과로 그는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며 말도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식물인간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고통스러운 몸과 마음이 되어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런 그에게 이웃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찾아와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척추가 마비되어 앉을 수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엎드린 채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작은 나무받침대를 하나 만들어 그 위에 성경을 펼쳐놓아 주었다. 어머니가 나무 받침대 위에 성경책을 펴놓아 주긴 했으나, 겐조는 손가락을 쓰지 못하니까 책장을 넘길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겐조가 성경 한 장을 다 읽고 나서 눈으로 껌벅껌벅 신호를 보내면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어머니가 책장을 한 장씩 손으로 넘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도 교회도 다닐 수가 없었던 겐조는 남아 있던 눈으로만 성경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러든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읽다가 그 속에서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 외아들을 보내신 것, 성부 하나님과 동등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신 것, 육신을 입고 고난을 받으시다가 종내 십자가를 지신 그 귀한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글로서 표현하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말을 안 들으니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고,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녹음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두 눈만 끔뻑거렸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철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그 앞에 놓아두고 막대기로 한자씩 짚어 나가면서 아들의 눈동자를 살폈다.

어머니가 들고 있는 막대기 끝이 자기의 원하는 글자에 가서 닿으면 그것이 맞는다고 겐조는 눈으로 신호를 보내었고… 그러면 그의 어머니가 그 글자를 뽑아서 다른 종이에다 옮겨 적었고, 이렇게 고통 중에서 겐조가 눈으로 한 자 한 자 모아서 적은 글이 시집으로 출간되었는데 그곳에는 아름답고 영감 있는 시가 170여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 한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제목은 ‘괴롭지 않았더라면…'

괴롭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정말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고 깨달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시, 깊은 영감이 흐르는 아름다운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즈노는 그에게 닥친 환난 때문에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만났다면 장애가 더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은 그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광야는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축복의 통로임을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며 절대적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감사는 차원 높은 최상의 감사로 엎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성구를 소개하고 싶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외우고 또 외우는 말씀이다. 주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이끄심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환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 28) 이 말씀이 환난 가운데서 나를 지켜주시고 모든 환난으로 인해서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됨을 믿을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는 점점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주님이심을 알 수 있다. 이 복된 추수감사 절기에, 풍성한 감사를 마음속에 품되, 만약(If)에, 때문에(Because of)가 낮은 차원의 감사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 감사의 개념(concept)을 한층 더 up grade 시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 12-14)

**별똥별의 방을 찾아주시고, 졸글이나마 늘 격려의 박수로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지만 여의치 못해, 지면을 통해서나마 인사를 드려요. 지난 한 해동안도 감사했어요. ^^ 앞으로 더욱 많이 기도하면서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가내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Happy ThanksGiving Dear Friends!! "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 신앙칼럼 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아 2: 10절 말씀).” 아가서는 솔로몬 왕의 사랑노래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 노래야말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이 햇살처럼 곱게 퍼지며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영혼의 노래, 아름다운 나도향기를 발하는 샤론의 수선화 같이 고운 사랑, 우리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핏빛 사랑 노래임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듯, 필자는 아가서의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 그리스도의 그 절절한 사랑이 가슴을 파고들어 온 밤을 지새우며 감동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다.

모진 겨울은 영원하지 않다.

모진 겨울비가 그치고 언 땅이 풀리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이 어두운 역사를 끝내고 주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미한다.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야가 구속 주로써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다. 그 주님이 이제는 고난의 주가 아니라, 왕 중의 왕으로, 심판 주로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봄날같이 우리 앞에 화사하게 펼쳐질 것을 예언해 주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 또한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때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고 모질게 추운 겨울 날씨처럼 어렵고 고달픈 때가 있을 수 있다. 예기치 않던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되는 수 있고, 그런대로 잘 이끌어 가던 사업체가 한 순간의 실수로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도 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고 가족간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 고통받을 때가 있다.

우리들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격려의 음성이며, 영적 전쟁의 전투장은 그리 녹록지가 않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잃지 말고 힘써 싸우라 격려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라.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 15절 말씀)” 여기에서 포도원을 허는 여우는 과연 누구인가? 영적으로 사단을 의미한다. 이 여우는 옛날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던 낙원에 들어가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어떤 여우를 잡아야 하는가?

1. 뒤를 돌아보는 여우를 잡아내어야 한다.

여우의 습성 중 하나가 뒤를 돌아다 본다는 것이다. 여우는 앞으로 잘 가다가도 뒤를 휘딱휘딱 돌아보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장망성인 세상을 한 번 빠져나왔으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악습, 구습, 더러운 행습, 이런 것들에서 돌이켰으면, 그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키고 두 번 다시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여우가 들어온 것을 속히 잡아내지 않으면 그 여우가 나를 뒤돌아 보게끔 계속 충동질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성지 순례 길에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 사람 형상을 한 큰 소금 기둥 한 개가 세월의 풍상에 녹아내려 어슬픈 몰골에 더러운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 쓴 채, 초라한 모습으로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가련함을 보면서, 세상으로 되돌아 간 수많은 성도들이 떠올라 내 마음이 심히 어두웠던 기억이 있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의 지도하에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약속의 땅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를 들어보라. 모든 원망의 말 속에는, 그들이 방금 빠져나왔던 애굽을 뒤돌아보며 그 노예생활을 그리워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의 병폐로 떠오르는 것 역시 뒤를 돌아보는 나쁜 습성 때문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로, 한 번 빠져 나온 죄악 세상을 되돌아가고 싶도록 유도하는, 뒤를 돌아보는 여우가 내 마음속에서 자리잡지 못하도록 속히 몰아내야 앞으로 전진이 가능하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9: 62절 말씀)."

2. 유혹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여우의 또 다른 습성은 간사하고 교활한 것이다. 여우가 짐승 중에 가장 교활하고 간사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여우는 하룻밤에 열두 번도 더 변한다고 한다. 사단 마귀의 속성이 그렇다. 사단은 변신의 명수다. 사단이 나타날 때, 내가 사단이다 하고 나타나면 누가 넘어지겠는가? 뱀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용으로 변하기도 하고 광명의 천사로, 아름다운 절색 가인으로 가장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정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 한 번 재미를 본 사단은 지금도 영적인 낙원인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고 가정에 들어가서 파괴의 역사를 조장시킨다. 그는 광명한 천사로 변신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 ‘드릴라’로 변신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 거짓 능력자, 거짓 치유사역자로 변신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 가는 것이다.

삼손에게 나타난 사단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여인 ‘드릴라’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삼손은 그 유혹의 여우를 잡아내지 못해 일생을 망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건장한 남자가 두 눈을 다 뽑히고 목에 맷돌을 매달고, 두 발은 죄악을 상징하는 쇠사슬에 묶여 버렸다. 이런 슬픈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하려 함이니(고전 10: 5절).” 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다서 1: 7).”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삼으라고 경계해 주신다는 것이다.

유혹이란 것은 처음에는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고전 6: 12-20절 참조) 돈의 유혹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 10절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지만 여전히 돈을 사랑하다 믿음에서 떠나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 심하면 목숨까지 끊어 버리는 것이다.

하늘나라에도 품계(品階, rank)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권고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기에 그는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겼다. 모든 것이 거울로 주셨음은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늘나라 시민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 의지해서 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리의 의나 옳은 행실이 첨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국 시민권자들에게도 품계(品階)가 있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리라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눅19:16-19절 말씀)."

주님은 열 고을 권세 자와 다섯 고을 권세 자를 나누시겠다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열 고을 권세 자와 다섯 고을 권세 자가 같은 품계(rank)라 볼 수 없다. 분명,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 종의 충성 여하에 따른 품계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천사장 미가엘을 선두로 천사들이 각종 임무를 맡아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받들어 섬기듯, 우리 구원받은 백성 또한 품계(品階)가 있다고 성령께서 오늘 아침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며 전하라 명하셨다. 부활한 육체도 그 아름다움이 모두 다르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1절 말씀).” 성도들이, 심지어는 가장 올바른 자세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목사님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속에 파고들어오는 유혹의 여우를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이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치유사역 등등…번영신학에 물들어 그쪽 방향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날,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예수쟁이들이 뻔뻔스럽다고 손가락질 한다. 무엇 때문인가? 오늘 죄짓고 내일 회개하고 다음 날 또 그 죄악을 여전히 짓는 파렴치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은 또 왜 일어나는가? 구원과 죄와 상관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때문이다.

물론, 구원 받는 조건과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자들에게도 엄연히 따르는 보상도 다르고 품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구원에도 영광스러운 구원이 있고, 불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도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고전 3:13-15절 참조). 이런 사실만 분명히 알면 성도가 죄와 더불어 짝하기보다 죄를 멀리 하고 그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려 할 것이다.

우리는 내 교회에, 내 가정에, 내 마음속에, 가만히 들어와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의 수고를 부끄럽게 만드는 저 여우를 잡아야 한다. 한순간의 유혹이 영원토록 부끄러운 수욕을 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때가 임박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읽고 바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많이 배출되도록 우리 모두 힘을 다해 중보기도 해 주어야 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단 12: 3절 말씀)." ,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 13- 15절 말씀)." (마 5:19, 마18:4, 마20:20~28, 마23:11, 눅9:48, etc)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드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뿐인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적이다

중국 북경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도록 지시한 폭군, 진시황제(秦始皇帝) 는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불로초(不老草), 불사초(不死草), 그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해오라고 3,000명의 동남 동녀를 배에 태워서 해동국(海東國) 으로 보내었으나 제주도까지 내려갔지만 그런 것을 구할 수 없었던 그들은 영영히 돌아가지 않았다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불로초와 불사초가 있다면, 그것을 구해서 먹지 않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고 하면 거북이며, 지렁이며, 달팽이며, 심지어 산에 독사도 남아나지를 않는다고 할 정도이니, 늙지 않고 죽지 않게 하는 풀이 있다면 아마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것을 구해다 먹으려고 욕심낼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불로초도 불사초도 불사약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음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이다. 과학자들과 의사들도 인류의 적인 죽음과 맞서 보려고 세기를 걸쳐 온갖 노력을 다 해보지만, 과학도 의술도 아직까지는 인간의 죽음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영원히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죽음은 피하고 싶은 원수, 인류의 적이며,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에, 인류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 죽음의 공포를 물리쳐 보려고 시도하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현대 과학은 이제 인간의 유전자(DNA)를 연구하므로써 늙지 않게 하고 죽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나…글쎄, 더 두고 볼일이다.

사후 세계(Beyond Life)에 대한 인류의 관심

지난 번, 성지순례 기간에 이집트 관광의 최대로 꼽을 수 있고 이집트인의 긍지로 삼는 거대한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안내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나는 우선 그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피라밋은 고대 파라호, 그러니까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집트의 파라호들이 자신의 무덤을 저렇게 큰 피라밋으로 만든 것은, 그들 또한 내세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쓰던 물건들, 침대며 집기며, 집채만큼 큰 유람선하며, 심지어는 자기가 부리던 신하들, 아름다운 동녀들까지 죽여서 같이 묻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파라호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거대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스핑크스는 왕들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도 한다. 스핑크스를 쌓아 올린 재로는 흔한 일반 돌이 아니고 천연 화강암이었다. 그 정교함과 웅장함은 대단했다. 나는 오래전에 북경의 만리장성을 보고 그 규모에 놀란 적이 있는데, 피라밋을 보니, 만리장성은 피라밋과 스핑크스와는 비교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피라밋은 대개 화강암으로 쌓여 졌는데 돌 하나가 작은 것은 1.5톤에서 2톤, 보통은 3-4톤, 큰 것은 20-30톤까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4500년 전에 이렇게 엄청난 무게의 돌들을 어떻게 저렇게 높이, 그리고 빈틈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일까?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아직 철기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때에, 도대체 어떤 연장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까지 정교하게 다듬어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규모다. 이렇게 자신의 무덤을 피라밋으로 쌓고, 그 앞에는 거대한 수호신까지 세워두었다는 것은 그들, 고대의 왕들은 죽음 저편의 세계가 있음을 믿었고, 그곳에 가서도 자신들이 왕노릇을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비욘드 라이프(Beyond Life), 죽음과 사후세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死亡)이란 단어를 쓴다. 사망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사망, 죽을 사(死)자, 망할 망(亡)자, 즉 ‘죽음’이란, ‘죽고 망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깔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문제에서 도피하는 길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했다. 인간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육신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 영혼은 그 주신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전도서12: 7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 ‘죽고 망한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쉬는 것이요,‘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절)”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 28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친히, 영은 불멸하며 사후에는 선악 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하셨다.

B 플러스 D인생을 C인생으로 만들라

한국에서 존경받는 어느 학자가 역설한 말이다. 그분의 말인즉,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우리 인생은 B (Birth)로 시작해서 D(Death)으로 끝나는 인생이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신은 우리에게 B와 D사이에 C를 주셨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C란:
1. 선택(Choice)
2. 변화 (Change)
3. 기회 (Chance)
4. 도전 (Challenge)다
요약하면, 1. 우리가 선택을 잘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2.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자기가 세상에 변화를 당한다. 좋은 말이다. 3. 기회를 선용하란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역경을 기회로 삼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너무나 멋진 말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인생은 B에서 D로 끝난다고 하지만, 그 D도 (Death)이냐 하는 것과 꿈(Dream)이냐 하는 것은 도전 정신에 달렸으니, 나이 핑계하지 말고 환경 이유 대지 말고 더 크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용기있는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네 가지 C만 가지고서는, 삶의 질을 약간 향상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 문제 B(Birth) + D(Death)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물론, 사람이 젊고 건강할 때는 그것만 있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람에게는 선택도, 변화도, 기회도, 도전도 통하지 않는 말이다. 당장 눈 앞에 다가온 죽음과 죽음 저편, 곧 사후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궁극적 목적을 해결해 줄 수 있는 C는 단 하나뿐이다” 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C (Christ)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 C (Christ)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백보좌 심판으로 나아갈 것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6-27절 말씀)”





“목사님, 아드님을 저희 교회 교육 전도사로 모시고 옵시다. 아드님은 이중 언어에 능통하니, 우리 교회의 청년부를 맡깁시다. 청년부를 맡아서 가르치는 동안에 목사님의 목회 방법도 익히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이다음에 목사님께서 은퇴하시는 날, 목사님의 아드님을 우리 교회 담임 목사로 내정해 둔다면 교회가 안정되고 더욱 든든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목사님들이라고 하여도 너무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믿을 사람이 있어야지요. 우리는 목사님을 주님의 참된 종으로 믿을 수 있고 목사님의 아드님 또한 믿을 수 있으니 교회의 미래를 보아서 다시 없는 훌륭한 적임자입니다.

목사님 편에서 생각해 본다고 해도 나쁠 것 없는 것은, 우리 교회는 목사님께서 개척하셨고, 그동안, 고생 많이 하신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이 정도의 성장을 하였는데 이토록 잘 짜여진 좋은 교회를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목사님, 아드님을 후임으로 세우고 이곳에서 아드님과 함께 목회하시면서 주님 나라에 가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시다.”

오래 전, 우리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대표급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 위원장 장로님과 재무부장 안수 집사님께서 우리 부부를 불러내어 맛있는 점심을 사주면서 간곡하게 권면하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웠고 무언가 울컥 하는 것이 올라오면서 뽀얀 안개로 갑자기 눈 앞이 흐려옴을 느꼈다. 아, 사탕처럼 달콤한 이 유혹(?)의 목소리, 멋진offer를, 남편 목사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는 잠시 숨을 죽이고, 남편 목사님의 답변에 집중했다.

“그건 절대로 안될 소립니다. 그런 일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세습입니다.” 두 번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서 대답하는 남편 목사님의 답변에 두 분께서는 무척 상심이 되신 듯,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셨고, 우리 목사님의 단호한 결단의 대답도 몇 번이고 꼭 같은 톤으로 일관하셨다.

그렇다. 세습, 그 달콤한 유혹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교회와 목사, 양쪽의 욕심(?)이 작용하게 된 사례라고 본다. 입술로 주인이라고 고백하던 그 하나님께서 전혀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인간적인, 극히 인간적인 욕심 말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여서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학교, 우리 지역 최고 비싼 사립 학교에 풀 아카데믹 장학금을 받으면서 전교 학생회장을 하던 장한 내 아들, 중고등부 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설교 원고를 받아서 영문으로 번역하던 아이(물론, 어려운 모국어는 엄마인 나의 지도 아래였긴 하지만...),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유명 대학에서 아카데믹 풀 장학금을 주고 데려가더니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을 지급받으면서 공부하던 아들, 대학을 졸업하자 곧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대기업이 놀랄만한 초봉으로 스카우트해 데려간 내 아들…이토록 고마운 아들놈이, 제 부모를 존경한다면서 자기도 목사가 되겠다고 한다.

낮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또 야간으로 신대원을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틴에이저 나이에는 부모의 속을 썩인다고 울상들을 짓는데 내 아들놈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내 속을 썩여본 적이 없는 장한 놈이다. (자식 자랑은 팔푼이라던가, 구푼이라던가? ㅋㅋ) 하나님께 감사함을 이렇게라도 고백하는 맘이다.

우리 교회의 식구님들이라면 우리 아들의 이런 장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하던 그 교회 담임 목사의 아들을 후임목사로 모시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담임에 대한 신뢰감이 자리한 때문일 것이고, 신뢰할 수 있는 목사의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아들 목사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낯선 목사님보다 마음이 편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때는 담임 목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습 그 허와 실

세습이란 사전적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세습(世襲,世習)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한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가)자손에 의해 대대로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자자손손 그 왕권이 세습돼 내려오다가 고종 황제 때 나라의 멸망과 함께 세습도 끝나게 되었다.

이런 안목으로 볼 때, 목회자가 대물림하는 것을 무조건 세습이란 용어로 비난 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세습의 정의가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물려받는 것이라면, 목회자의 가정에서 무슨 물질과 명예를 물려받을 수 있기에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 그 자체만을 놓고 세습이라 비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말이다. 

교회 재산은 분명히 아버지 목사 개인의 재산이 아니다. 재산이나 직위를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을 전수한다면,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구두 수선하는 아버지, 혹은 요즘 한창 인기 절정인 드라마에 나오는 극 중 인물, 김탁구, 그 아버지의 빵을 만드는 기술과 직업을 그 아들이 물려 받아 대대로 이어가는 것을 세습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하여 크게 칭찬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대를 이어 목사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요 복된 자리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날,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수행하던 목사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되는가? 세습, 그 허와 실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 보자.

1. 우리나라 특성상, 지금 한반도의 북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3대 세습의 부정적 이미지가 교회로 파고들어 온 때문일 수 있다. 국가 최고 원수의 자리에 애송이 청년 (20대 ~ 30대 초반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파랗게 젊은이가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3대 째, 권력의 최고위급으로 급부상한 데 대한 암묵적 반항심은 우리를 철저한 세습반대자의 입장에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다.

2.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 요인이랄 수 있는 1% 미만(그렇다. 확실히 1%미만일 뿐)의 대형교회 담임 목사들의 횡포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자신들을 글자 그대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착각하는 듯, 그들은 교회 재산을 사유 재산인양, 남용하기도 하고, 착복(?)하기도 하고, 그 아들들에게, 또는 부인에게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마구 물려주어도 좋은 것처럼 착각한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야 당연히 그 직분과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니 ‘세습’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3. 아버지가 피땀 흘려 이룩(?)한 교회를 이어 받으려는 것은 사명자의 자세가 아니라, 물량주의자로 변질된 자세일 뿐이다. 그런 마음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 안일한 길, 평탄한 길, 넓은 길의 목회를 하겠다는 것, 발람의 교훈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진정한 목회자라면, 교회 재산은 사유 재산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부르심’ 즉 위로부터의 calling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Calling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면 다음은 그분의 양 떼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그에게 부여되고 그 부여된 책임을 인지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명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부르심이나 사명의식이 없는 목사라면 교회를 하나의 기업으로 치부하게 되고 그 기업의 총수가 자신의 전 생애를 투자하여 이룩한 자산이랄 수 있는 기업체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자신의 아들을 지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거기다, 85 vs 14, 주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낸다면…ㅠㅠ. 그러나 그 99명 중 14명, 소수의 약한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설곳을 빼앗긴 교회를 향해 탄식하시는 우리 주님의 아픈 음성이 섞여있음을 알아야 하고, 변질된 교역자를 향해서 우뢰처럼, 벽력같이 질타하시는 그분의 책망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야만 하지 않는가?

아들아, 광야로 가라

불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 가도 가도 끝없는 황량한 벌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바싹 메마른 땅, 시뻘건 모래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그곳, 끝없는 들판에는 짧고 앙상한 가시나무 떨기가 듬성듬성 어른의 주먹 뭉치만 하게 군데군데 엉겨붙어 있는 것 외에는 생명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그곳, 광야로 가라.

너는 오직 그곳에서만 하늘의 만나를 먹을 수 있고, 광야의 모진 가시 떨기 나무 아래서 너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광야의 불뱀과 전갈이 너를 해치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너의 앞길을 가로막는 홍해가 너의 간구로, 네 눈 앞에서 좌~악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곳, 그곳은 오직 광야에 들어섰을 때뿐이란 것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네온싸인이 휘황찬란한 곳에서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그곳에는 안일함과 평안함이 너의 영혼을 좀먹게 할 것 뿐이다. 아들아, 광야로 가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 8)“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 7-9)




글: 별똥별/ 최송연





성경말씀에 어디에 레위인이 목사라고 나왔습니까? 레위인은 레위인입니다. 십일조는 목회자에게 사례비로 사용되어지면 안되고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구제비로만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도에게 드리는 답변이기에, 한 분에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혹시 같은 생각을 품고 계신 분이 계실까?하여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우리(모든 믿는 자)들의 보혜사 되시며 우리들의 스승이되신 성령님께서(요한복음14:26절 말씀 참조) 친히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변론이 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나눔(Share)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이곳에 올립니다.

먼저, 우리(성도)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은 아래의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 문자적 해석 (Literally)
2. 영적 해석 (spiritually)

1) 구원론:
반드시 문자적(liter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에 구세주로 믿어야 구원함을 얻는다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말씀 외에 여러 곳) 것은 불변의 진리요, 따라서 그 어떤 다른 해석도 주석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로, 필자는 여기서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인 구원론이나 문자적 해석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성경말씀에 영적 해석이 왜 필요하며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십일조의 사용도에 관해서 잠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축복론
영적인(spiritu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성경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봅시다. 갈라디아서 3:6-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3:29절 말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엔 문자적 (literally)인 해석은 불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가르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예,이런 경우엔 영적 (spiritually)해석이 필요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결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해석으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3) 하나님의 집
마가복음11:16-17절 말씀에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하신 것을 문자적 해석이라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그러니까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가리킴입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영적 해석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집은 천국이란 해석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만 성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으로서의 하나님의 집, 그러면 그곳은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곳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곧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 교회와 공동체 교회, 연합한 모든 교회를 지칭합니다. 기능은 다르나 주의 성령을 모신 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본론:
자, 이런 맥락에서 십일조와 레위인에 대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키3:10절 말씀)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허기야, 십일조폐지론 자들은 이 부분도 다른 이단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도, 뒤틀고 왜곡시켜 입맛대로 바꾸고 있지만...ㅋㅋ)

1. 십일조를 드려야만 하는 이유,
2. 십일조를 받는 대상.
3. 십일조를 내는 목적.
4. 십일조를 드리는 장소.

여기에서 1번에서 2번까지는 우리 모두(성도들) 잘 아는 사실이라 재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같고, 제 3번과 제 4번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과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3.십일조를 드리는 목적:
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에 양식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말 3: 10절 하반절)

그렇다면,
4.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장소가 분명 어딥니까?
예, 그것 역시
나의 집(말3:10하반절), 곧 하나님의 집, 땅 위의 (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성전이 됩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레위인은 오늘 날 누구인가? 아직도 이스라엘(야곱)의 12아들중 3째의 후손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레위는 분명 야곱의 세째 아들이요, 그들의 후손에 국한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레위인은 상관관계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일부를 걸러내고 믿는 것이며, 갈라디아서3:6-9절, 15-16절은 삭제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과연 현대인, 그리고 이방나라의 사람들로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성도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영적자녀들이라면 그 영적가족들 중에서 레위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며, 이는 그 역활 면에서 구분이 지어질 수가 있습니다. 즉 만인제사장 시대에서 굳이 레위 지파가 비록 영적이라고 하더라도 필요한가? 생각해보면,

구약시대의 레위인은 누구며 그들의 역활은 무엇이었는가? 레위지파는
1. 전적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지파였다.
2. 그들에게는 세상 기업이 없어야만 했다.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했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 (민수기 4:15절, 신명기18:1-2절, 대상15:2절.로만 생활 해야했다.

영적으로 레위인을 오늘날 목사, 교사, 혹은 복음사역자들로 보는 정당한 이유: 목사, 혹은 복음 사역자들은,

1.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 있는 자란 점.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 (로마서 10장 15절 말씀) 했다.
2. 목사나 복음 사역자들은 세상에 다른 직종을 갖지 말아야 한다.
3.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한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성도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전 9장1-18절 말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과 십일조는 하나님의 창고와 하나님의 집인 성전(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교회)에 양식이 되며, 그것으로 레위인(영적 목사, 복음사역자) 포함, 객(나그네)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신명기14:28-29말씀 참조)


십일조와 헌물로 구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자세는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어야 하고 그 재물을 사용하는 자 또한 주님 앞에서 잘 사용하도록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오시는 그날 악하고 게으런 종이라 책망받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넘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별똥별/최송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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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에 와서 예언자나 선견자는 성서적으로 볼 때 성도에게 붙일 수 있는 합당한 호칭이 아니라고 봅니다. 선견자(先見者, Seer, 로에라, 하지), 선지자( 나비)는 모두 비슷한 역할로써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해주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신약시대에 와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구약시대의 선견자(先見者, Seer) ... 선지자들과 같은 개념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선견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선견 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우리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딤전3:15절 참조) 성경을 읽고,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들의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말씀이 주는 깊은 뜻을 깨닫게도 해 주시고 개인에게 레마로 친히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성도가 특별한 사명 자로서, 굳이 따로이 이름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바이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바이더(Provider), 사전적 의미로는 ‘공급자, 준비자’ 그런 뜻입니다. 가족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는 사람, 가족의 모든 생계, 미래를 책임지고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세상보다 한걸음 앞서 가는 사람이요, 주님의 말씀으로 미래에 닥칠 재앙을 대비해 착실히 준비하는 '프로바이더'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서 예측할 수도 없어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어린 아이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대재앙, 지구 종말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바로 선견자적 사명을 가진 프로바이더들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먼저 듣고 먼저 아는 우리가 종말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만 하는가 하는 그 방법론도 확실히 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備無患(유비무환) 사전에 준비를 잘 하면 뒤에 근심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열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를 기록한 글입니다. 그가 고종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處善人 動惟厥時).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矜其能 喪厥功). 오직 모든 일에는 다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惟事事乃其有備 有備無患).”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을 위강에게 보냈습니다. 위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편안히 지낼 때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하며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이다(居安思危思則有備 有備則無患).”

현대 과학자들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주범으로 ‘지구 온난화’를 듭니다. 지구 온난화(地球溫暖化, global warming) 또는 온난화(溫暖化)는 지표 부근의 대기와 바다의 평균 온도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입니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기후변화위원회가 참조한 기후모델에서는 1990년에서 2100년 사이에 1.1 ~ 6.4 ℃의 온도 상승이 예측되었다고 합니다.

지구 표면의 온도상승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강수량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켜,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빙하의 후퇴와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등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앞으로 얼마 만큼의 온난화가 진행되며 지역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온실 가스에 대처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였다고 합니다. (위키백과사전 참조)

이 모든 것은 2,0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신 것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지난 9.11테러 사건이나, 동남아 일대를 강타한 무서운 해일, 중국의 지진피해, 요즘은 멕시코의 돼지인풀루엔자까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신종바이러스의 공격도 있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곤경을 당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종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살다가도 이런 재앙을 만날 때만이라도 종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는 이미 제대로 된 ‘ 프로바이더’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바른 인식

종말에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한부 종말론, 즉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절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언제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바이더들의 맹활약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9.11테러나 지난번 해일과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사람들이 다 대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는 숨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가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지옥과 종말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들이 잘 못하는 것입니다. 인기를 위해서 시시한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받는 박수갈채는 한때뿐이고 그분의 진노는 영원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날자와 시간은 알 수없다.” 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그 틈을 노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로부터 영적테러를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무장되어야만 합니다.

종말이 꼭 세상 종말만 종말이 아니지요, 개인적인 종말, 죽음도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날과 그때는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종말이나, 지구 종말의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징조들을 보거든 대비하라고 하십니다. 지구의 종말도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 준비 잘 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바로 '굿 프로바이더'입니다.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먼저 아는 우리들이 “Good Provider”가 되어야만 하고, 다른 이에게도‘Good Provider’가 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 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6-8)”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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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넘지 마라

다음은 필자가 오래전 아멘넷에 올린 칼럼 글 아래, 댓글로 단 어느 형제님의 질문을 요약한 것이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 맞지요? 그러면 지금 세상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침묵으로 기도로만 임하라고 하시는 건지요.(물론, 필자는 글 속에서 말하는 뜻, 그 이상을 넘어선 생각으로 쓴 것은 아니다) 글을 쓰신 이유가 지금 아멘넷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논쟁들도 한몫을 했으리라 사료됩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되어 낙태가 아무 제재 없이 이뤄지는데 그러려니, 동성애가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만연하려고 하는데 그러려니, 죽은 자를 그리워하며 인본주의자들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려 하는데 그러려니... 하는 것은 믿는 사람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요? 아시겠지만 요즘 너무나도 물탄 복음이 난무하고 사람들을 의식하는 형제.자매가 많아서 걱정이 돼서 올렸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침묵으로 기도로만 임하라고 하시는 건지요?라고 묻는 요지였다. 아마도 많은 독자분이 같은 질문을 심중에 품고 있을 것이란 것과, 그 문제를 놓고 함께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성도는 불의에 항거하되 성경이 말씀하는 곳까지만 가야 하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고전 13: 6 절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거기에 보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의를 보고 침묵하면 안 된다.

불의는 반드시 항거해야 한다. 정부에 대한 잘못, 권력 남용에 대한 지적, 필요하다. 그러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던, 다른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을 한 번 찾아보자.“너는 저희(성도)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므로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디도서3:1-2절 말씀)”, 또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는 심판을 자취 하리라 (로마서 13: 1-2)”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1. 권세는 하나님께로 났다. 2. 성도는 권세 자에게 복종하고 굴복해야 한다. 3.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통령이 잘못 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된 우리가 대언의 영이신 성령님을 힘입고 담대하게 ‘진리가 무엇인지, 불의가 무엇인지, 낙태가 왜 안되는지, 동성연애가 왜 옳지 않은지’, 똑바로 그에게 전하되 목소리 높여 큰 소리로 전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서는 행동으로 과격하게 시위를 한다거나, 다투거나 거역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고 외친 후, 그래도 듣지 않을 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기도로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간구 해야만 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아멘넷의 댓글 논쟁이나, 우리 조국 교회의 지도자, 그리고 성도들의 열띤 논쟁은 그 도를 넘어 다툼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도가 성도로서의 할 도리, 그 이상을 넘어서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서론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성도는 불의에 항거하고 진리를 밝히는 메세지를 전해야만 하고 서로 떡을 떼는 마음으로 말씀을 풀어 강론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그것으로 끝을 내어야 함에도, 끝까지 자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런 태도는 결국, 하나님 자리에 자기가 앉으려는 태도로써 성도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고 했음에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태도일 뿐,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해야할 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 구분하라는 것이다. 니느웨 성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선지자의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까지 바라고 원망을 하던 요나에게 주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 받고 한 형제 자매가 된 것을 말씀으로 검증하고 확인되면, 그 다음에 서로간에 약간 견해차가 있다고 해도, 교리, 구원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고, 삼위일체 교리가 분명함)같고 천국과 지옥론이 분명하면 지위의 높고 낮음, 빈부의 귀천,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두 아군이요, 한 피로 맺어진 형제요 자매다. 서로 돕고 서로 감싸주며 서로 세워주어야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하시던 우리 부모님은 그 자녀들이 다툴 때, 마음 아파 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도 그러하건데, 하물며 온전하신 그분의 사랑,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랑으로 너와 나를 사셨는데,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더 아프시겠는가....우리는 말씀의 떡을 떼며 강론을 하되, 도(道)를 넘지는 말자.

먼저 분별의 은사를 사용하되 말씀으로 비추어서 확인한 후에, 확실히 해야 한다. 한 번 그렇게 믿었으면, 설령, 자신의 견해와 약간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하여도, 이단이 아닌 이상, 다투거나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부분이 변질된 사람은 입으로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해도 그 양심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아니며, 계속 그대로 간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절제된 한계는 말씀에 의한 성경66권, 즉 말씀에 의한 분별까지 이다.

그러나, 만약, 교리가 다르면 그것은 순교까지 각오를 하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워야 한다. 바울 사도는 날마다 때마다 거리에서건 회당에서건 바른 교리를 가르쳐 지키게 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조심해야할 것은,먼저 아군과 적군을 분별해야 한다. 아군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고, 적군이란 공중 권세잡은 자에 속한 자들로써, 세상에 속했거나, 다른 교리를 전하는 자들이다!영혼을 사냥질하는 이단 사설을 향해서도 침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근무태만 죄가 성립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형제를 정죄하기 앞서, 잘못을 깨우쳐주는 정도에서 토론을 끝내어야 한다. 그 다음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뢰고 그분의 얼굴을 구해야 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되심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양보하고 져 주어라.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 1-3절 말씀)

My confession in the Cross"/ The true

I've been the first to point fingers, to bring up someone
else's fault to light, and to argue for changes. I was
hoping and convinced this was how I would make
our faith better and do a service to our Lord. This
was my way of justice.

나는 처음에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끄집어 내어,
빛으로 들고 나오기도 했으며,
변화를 위해 다투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을 잘 섬기는 길이요
우리의 믿음을 보다 성숙케 만드는 길이라
확신했고 소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 방식의 의로움이었습니다.

Then, I came to realize that I was pointing fingers to
myself exposing my own faults. I saw myself on the
very person who I was pointing fingers at.

다음에,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며
지적하는 손가락들이 있음을...

나는 보았습니다.
내가 손가락질하며 지적했던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Then, I saw our Lord still weeping in the Cross after
all this time while I was claiming being on the true
side. I saw it was I keeping Him up there.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내가 진리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던 내내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여전히 눈물 흘리고 계셔야 했음을...

나는 보았습니다, 내가 남을 정죄하는 그것들이
우리 주님을 십자가 위에 계속 매달아 놓는 것임을.

Then, I realized that the silent suffering of Him in the
Cross for someone else's sins was and is His way of doing justice.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하여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것이 의로움을 위한 그분의 방법이란 것을....
번역/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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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몽(恩夢)

허몽(虛夢), 헛된 꿈, 환몽(幻夢), 허황(虛荒)한 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꿈에 해당되는 꿈이라고 하겠다.) 다음은, 실몽實夢, 사실(事實)과 부합(符合)하는 꿈이 있으며, 또 영몽(靈夢)이란 것도 있습니다. 꿈도 이렇게 다양한 상태로 鈞霞?보아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꿈, 그러면 다음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1. 프로이트식 반응, 2. 영몽(靈夢) 반응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아직까지는 위 두 가지 반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번,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칼 융이 꿈에 대한 정의를 학술화 한 것으로써, 꿈이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생각들, 그러니까 무의식의 한 측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번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뇌 속에 이상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으로써, 구약 성경에 보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극단적 프로이트 지지파가 있는가하면 극단적 영몽(靈夢)지지파가 있습니다. 저는 무엇이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꿈이 다 프로이트식의 꿈이라고 고집한다면, 성경을 부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꿈이 다 주님께서 뇌 속에 이상으로 부어 넣어 주시는 영몽(靈夢)도 아닙니다. 어떤 꿈은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생각이 꿈으로 나타날 수 있고, 어떤 꿈(극히 드물게)은 주께서 인간의 뇌 속에 이상으로 넣어 주시는 꿈도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균형잡힌 신앙자세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 중에, 허몽(개꿈)도 환몽도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넣어 준 이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믿기도 하고 그 꿈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꿈에도 이런 여러 가지 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꿈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독자님들 자신의 자유입니다. 다만, 저로서는, 주께서 제게 베푸신 은총으로 주신 꿈, 은몽(恩夢)이며, 전도에 열심을 다 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야 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어느 바닷가였어요,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지요…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보석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그 보석 상자 안에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진주 등, 값비싼 장신구들이 가득히 들어 있었어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요…, 나는 그중에서 제일 싼 것을 하나 (14k gold로 된 금귀고리 같았음, 왜 나는 그때 그 많고 좋은 보석 중에서 제일 값진 것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지를 못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집어서 그곳에 있던 어느 중년부인에게 건네주면서 예수님을 소개했어요, 그제야, 그 여인은 만족해하면서 고국에 (한국에서 온 여행객 같았음) 가면 “당신이 전하는 예수를 믿어보겠다."라고 대답을 했지요.

내게서 보석을 받은 여인만 약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외에는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던지 그들에게 전도해 보려고 애쓰고 있던 중, 갑자기 저쪽 하늘에서 구름이 변하는가 싶더니 하얗고 아름다운 말 세 마리가 그 구름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처음에는 그 말들이 구름이 변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것뿐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하늘을 나는 그 말들이 너무나 힘차고 멋있게 보였기 때문에 “여러분, 저 하늘을 보세요! 우리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저렇게 하실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처음에 구름이 변화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하늘 말들이 힘차게 바람을 가르면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중에 한마리가 나를 향해서 돌진해 온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새, 나는 그 말 밑에 드리워진 줄을 잡고 바다 위를 나르고 있었어요.  그 순간 나는 지금 예수님께로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자연히 알아지더군요. 어릴 때부터 사랑한 나의 예수님, 그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이, 목회 길이요, 여자는 자신이 목사가 되기보다는 목사를 내조하는 사모가 되면 더 효과적으로 주의 일을 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대로 목사 후보생인 가난한 전도사와 결혼했고 사모가 되어서 성도들을 섬기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긴 지가 삼십여 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소리없이 삼켜야만 했던지요….

어느 목사님이 지은 책의 제목이던가요.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 말이 바로 내 말이라고 공감하면서 또 펑, 펑, 울었던 기억들…교회를 깨고 싶어 안달하는 사탄의 전략인지조차 모르고, 이 영적 전쟁에서 힘을 합쳐서 구령사업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방해작전을 하고만 있는 일부 사역자님들의 반목과 불화들…, 또 사탄에게 속고 사탄의 하수인 된 철없는 양떼들의 비방, 모함, 오해 등, 온갖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도 “행여나 가라지 뽑다가 알곡 뽑힐까 조심하라"고 하신 내 주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흔한 전화 한 번 해서 따져주지 못한 사모 생활…, 개척교회 배고픈 시절의 그때, 그 서러움….

“주님, 너무나 피곤해요. 이제 그만 넉넉하오니 제 생명을 거두어 가 주세요…” 그 옛날, 로뎀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처름 억지를 쓰면서 울던 때가 그 얼마던가…, 기도할 때마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성령의 음성으로 달래어 주시며 위로해 주시던 나의 주님, 나를 태운 하늘 말이 바다 위를 나르는 동안 잔잔한 기쁨과 뜨거운 환희의 만감이 나를 감아 교체하는데… 아, 이제야 나는 내 주님 앞에 가는구나…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예수님의 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얼굴은 직접 뵙지를 못하였다지… 하지만, 나는 이번에 예수님께 가면 꼭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와야지…. 저 멀리 건너편 언덕에 하얀 세마포를 입으신 예수님이 천군 천사들과 함께 큰 바위 위에 앉아계신 것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그 하늘 말은 나를 예수님 앞에 사뿐히 내려놓았지요. 꼭 예수님 얼굴을 뵙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것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 앞에 도착한 나는 그만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에 넙죽히 엎드려 경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하, 창조주 하나님 앞에 오면 고개를 들 수가 없으니 아무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겠구나…” 혼자서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네가 세상에서 내 이름으로 참고 게으르지 아니한 그 모든 수고와 흘린 눈물과 충성을 내가 보았고 또 알고 있단다. 그러나 말세를 사는 내 백성이 한가지 경계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빠지기 쉬운 죄로서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이란다. 이것은 너도 한 때 빠졌던 죄들로서, 이런 모든 죄가 더 이상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나는 이런 것들을 아주 싫어한단다(갈라디아서5:26)." “주님, 제게도 그런 마음이 있나요? 정말로 죄송해요. 앞으로 그런 죄까지라도 삼갈 수 있게 저를 도와주세요.”  대답하는 순간, 갑자기 흰 옷을 입으신 내 주님이 내가 엎드린 맞은 편에서 같이 엎드리시더니 심하게 오열을 하시면서 통곡을 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너무나 놀랍고 민망해진 내가 “예수님, 예수님, 어쩐 일이세요?”하고 물었어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을 참고 견디며 내 목숨을 내어 놓았고, 그 피의 대가로 너희들에게 천국으로 오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제 내가 곧 다시 세상에 갈 때가 임박하였는데, 세상에 있는 내 백성이 전도는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리사욕과 시기, 질투, 분쟁만 일삼고 있구나."라고 대답을 하시면서 통곡을 하셨어요. (예수님과 제가 한 대화의 형식은 입술의 언어가 아니고 성령으로서 서로 말없이 깨달아 알아지는 영적 대화였음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나는 “주님, 주님, 제가 세상에 다시 가면 꼭 전도하고 또 전도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게요…” 예수님의 그 말씀에 마음이 너무나도 아파진 나는 엉, 엉,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예수님과 함께 통곡을 했어요. 한참을 그렇게 오열하시며 통곡을 하시던 예수님께서 내가 올리는 말에 만족 하신 듯...,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셔서 천사들과 함께 저쪽 편으로 가시는 것이었어요.

그제야 간신히 고개를 들고 예수님을 바라보니, 흰 세마포를 입으신 예수님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시면서 나에게 잘 가라고 하시는 듯 손을 살짝 흔들어 주시는 것이었어요. 그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을 멀리서나마 바라 뵈면서 나는 또 “우리 예수님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우신가?’ 라고 하는 방정맞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드는 즉시 천사 중의 하나가 “ 너는 어찌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남자 여자에 대한 세상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느냐?”하고 책망을 했어요. 그 천사의 책망을 듣고 부끄러워진 나는 예수님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을 때, 예수님은 괞찮다고 하시는 듯 나를 향해서 인자하게 웃고 계셨어요. 그때 어느새 내 손은 나를 데리고 왔던 그 하늘 말의 밑에 달린 줄을 잡고 있었고, 그 하늘 말은 다시 바다 위를 날아서 이편 바닷가에 내려 놓고는 하늘 저편으로 날아 가 버렸습니다.

바다를 건너 이편에 오니까, 그곳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그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치며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아무도 내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를 않았고 나는 그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 하면서 가슴이 찢어지 듯 심하게 오열을 하고 통곡을 하다가 번쩍 눈을 떠 보니 꿈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이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도 성령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 드리며, 우리 다 같이 전도에 열심을 다 했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왕상3:14- 15절 상),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단2: 28절 하)”

후기:
이 이야기는, 오래 전에 저희가 섬기는 교회에서 두 주간의 휴가를 보내어 주어, 미국 N.C 에서 사업을 하는 여동생네 집에 들렀다가 “언니, 목회하시느라고 피곤하셨을 텐데  옥돌로 된 침대에서 몸 좀 풀고 가세요."하고 내어 준 따뜻한 옥돌 침대 위에 누웠더니 잠시 여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그냥 잠을 자기는 죄송하고 하여, 옥돌 침대 위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던 중, 깜박 꿈이라기보다는 비몽사몽 간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선명한 사실임을 하나님 앞에서 말씀드립니다.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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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도둑질" 혹은 "수평이동", 이런 말은 요즘 유행병처럼 인터넷과 기독신문에서 번져나가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성도들과 그 배후 세력에 대한 불평에서 터져 나온 말일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런 말이 주는 의미와 우리 사역자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을 잠시 생각해 봄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데 피차 도움이 되었으면 소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대형교회로의 수평이동' 물론 마음 아픈 일이긴 합니다. 그런 "허섭쓰레기" (어느 목사님의 표현 법)양이라도 좀 와 주었으면... 바래기도 하는 개척교회 사역자님들의 고충 또한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요. 그 아픈 마음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저 역시 대형교회를 섬기는 사역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표현은 좀 너무 지나치다고 봅니다.

저는 양들의 수평이동이란 말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양들이 지금까지 섬기든 교회를 자연스레 떠난다면 (이사, 혹은 다른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만, 대개의 양이 자신의 사업관계로 교회를 이용하기도 하고, 혹은 잘못된 목사님들이 교회를 상업으로 알고 양들을 꼬드겨서 데리고 떠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양 도둑질"이란 말은 여기에 합당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그렇게 주장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우리 한 번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1. 양의 소유주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양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10:27절 참조)주께서는 양들을 가리켜서 "내 양"이라고 천명하시기를 기뻐하신 말씀이 신구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양들을 지키려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위에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사도행전 20: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양들의 주인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은 누구냐? 양들의 소유주가 아니라, 주인의 양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 생명의 양식, 곧 꼴을 먹이며 목양하는 목자의 대리인 곧 청지기들입니다.

2. 청지기(steward)의 뜻:
청지기 직분이란 주인의 재산이나 가옥을 일시적으로 위임받아서 주인의 뜻을 따라 보관하고 관리하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의 것을(이익, 불이익) 돌려 드리는 것이다.

3.구약에 나타난 청지기 직분
많이 있지만, 시간 관계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될 신부를 구하고자 먼 나라로 보낸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신뢰받는 청지기이다. (창24: 2-3)


4. 청지기의 의식주
그 소유주가 전적 책임이며 주인의 집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면, 같은 목사님들끼리 서로 손가락질하며 "양 도둑질"이란 말은 결코 사용할 수가 없는 단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 잠시 위탁된 하나님의 양들일 뿐, 내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로 설사 꼬드겨서 이동해 갔다고 하여도 그것은 주인과 그 사람과의 관계일 뿐 주인 편에서 보면 오른쪽 주머니에 있으나 왼쪽 주머니에 있으나 매일반이란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내 교회에 있는 양은 다 내 것"이란 착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이런 무모한 발언을 계속 사용할 것이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우기고 다른 이에게 "양 도둑"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삿대질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것입니다.

진정한 양 도둑이 있다면, 그것은 양들의 영혼을 사냥질하는 이단 사설이요, 양들을 지옥으로 이끌고 가는 사탄과 그 졸개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양들의 안위요, 양들의 영혼에게 바른 꼴을 분별해서 먹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양 떼들을 돌보는 데도 양들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엔, 이단만 아니라면, 그 양이 그곳에 가야 더 살이 찔 수 있어서 그리로 보내시는 분이 주님이시라고 믿고 아픈 가슴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대형교회는 아니더라도, 주께서 그 종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책임을 져 주십니다.

우리(신약의 청지기)의 주인은 누구인가? 소유주는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청지기의 식생활(의식주)은 누구에게로 받습니까? 주인에게로 받습니다.

주인의 수입 근원은? 성도의 십일조와 헌금(헌 물)입니다! (성도는 십일조와 헌금을 주님께 드리고, 사역자들은 그것이 많든지 적든지 교회의 형편에 따라 주님께로 받는다. 이것이 청지기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피차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말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결론적으로:
다만 바라기는 제가 드리는 모든 말씀이 “인간의 지식 자랑, 혹은 어리석은 변론”이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의 떡을 떼며 같이 나누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 7)"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씨앗을 뿌렸다면, 다른 교회에서 그 열매를 거둔다고 하여도 내가 맡은 직무에 나는 충실히 행할 것뿐이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현 한국교회의 (특히 대형교회)의 옳지 않은 여러 가지 처사에 마음 아파하시는 일부 사역자님들의 마음은 저의 마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잘못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주인께서 심판하실 날이 머지않았으니 우리는 잘못 가는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로써 아룀이 좋으며 내 영혼에 거울로 삼음이 좋을듯 합니다.

계시록22: 11-12절 말씀으로 권고해 드립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하십니다.

여기에서 각 사람(everyone)에 주의를 기울여주십시오. 개인적(Individuality)입니다.!! 상급도 개인적이요, 벌도 개인적입니다! 다른 이들의 비행 때문에 내 영혼에 상처가 되거나 내 영혼이 병들거나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끝까지 읽어 주신 여러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이 늘~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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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얼마 전, 촬스 스윈돌 목사님이 ‘Sincere’라는 단어를 아주 재밌게 해석한 것을 '사모님사모님' 카페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기억 나는 대로 이곳에 잠시 옮겨보면, 라틴어 ‘Sine Ceras’가 영어 ‘Sincere의 어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Without Wax’ 즉 ‘왁스가 없다’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Sincere’란 ‘정직하다’ ‘진실하다’라는 뜻인데 무엇 때문에 ‘왁스가 없다’라고 하는 뜻을 담고 있을까?

그 유래는 이렇다. 우리나라도 그랬겠지만, 아주 오래 전, 유럽에서는 도자기가 무척 귀한 물품이었다고 한다. 질이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늬, 색감, 모양, 모든 것이 좋아야 했지만, 무엇보다 금 간데가 전혀 없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금이 간 곳이 있으면 그 도자기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폭락해버린다.

그럼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일부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은 금이 간 도자기를 깜쪽 같이 속여서 파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진주 같이 투명한 왁스를 살짝 바르면 도자기의 금을 감출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교묘한 위장술로서 당시 상인들 사이에 이 방법이 아주 성행했다고 하니, 어디든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매일반, 가짜와 진짜가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반인의 눈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이런 교묘한 방법도 전문인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깜쪽 같이 속여 칠한 왁스를 전문인이 알아 내는 방법은 무엇일가? 그것은 도자기를 밝은 햇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고 한다. 밝은 햇빛에 도자기를 들고 비추면, 제 아무리 깜쪽 같이 발라둔 왁스라고 하더라고 햇빛에는 그 실체가 모두 들어나기 때문에, 이 ‘Sincere’의 헬라어 어근은 또 다른 말로, ‘Suntest’, 즉 ‘햇빛에 실험하다’ 라는 뜻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무엇이건 귀한 것은 반드시 모조품이 있고, 모조품 즉, 가짜와 진짜를 가려러내는 햇빛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특히, 우리 성도는 ‘Sontest’ 즉, 하나님 아들의 실험대 앞에서 살아야 한다라고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말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금도 그렇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순금보다 도금한 금이 더욱 번쩍거리지만, 가짜 금, 도금을 드러내는 불이 있다. 금은 불 속에 들어가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요즘처럼 가짜와 진짜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시대가 다시 없을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가짜 예수, 가짜 구원자, 가짜 메시야가 우리나라만도 부지기수이고, 게다가 요즘은 가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역사마저 흥왕하는 시대이니 다시 더 말해서 무엇하랴.

최근, 우리 게시판에 "여보 제발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요"라는 예쁜 제목과 함께 대대로 믿음의 가정이요, 장로교의 뿌리로 신앙생활(본인의 고백대로라면 '종교인 생활')을 착실히 해 나오던 한 성도님 가정이 순복음?(조 아무개 목사님)의 스타일 교인으로 바뀌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 성도님의 신앙이 가짜 신앙이란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주요 흐름의 맥을 짚어보자면, 당신 가족이 믿음의 뿌리를 가진 신자로서 지금껏 성장해 나오던 장로교에서 가르침 받지 못했던 '예수님 이름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순복음 교회의 조아무개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이란 책에서 배움을 받았고 그 책에 서술된 대로 따라 했더니 생활 속에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이야말로 "제대로 믿는 믿음"이란 지론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딱히 그 책의 내용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또 비판할 자격도 없다. 다만, 우리 게시판에 올라온 글, 그 내용을 토대로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침 고비야 목사님께서 별이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셨으니, 그분의 뜻을 존중하는 뜻에서 답변을 댓글로 남길까 생각도 했으나, 기도하는 중, 이곳에 올려 더 많은 분들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에 따로 정리해 본 것이다.)

하늘에서 10전짜리 동전이 차 안에 떨어졌고 그 동전에 의하면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는 US 달라로 10전의 가치도 없는 교회다, 그러니 나와 내 가족은 그런 교회, 미련 없이 훌훌 떠난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다 좋다.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계속 그렇게 점치는 듯한 작은 기적을 체험하고 거기에 내 진로를 맡기고, 이런 태도가 과연 “제대로 믿는 믿음, 바른 믿음의 표상일까?”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적을 따라가는 자는 결국 그 기적 속에 자신의 신앙을 걸기 때문에 매우 위험해 진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필자는 기적을 체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 소리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마시기 간곡히 바란다. 하늘에서 10전 짜리 동전 하나가 떨어진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그러나 필자 역시 글자 그대로 amazing, wondrous 한 기적을 수없이 많이 체험했음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그들은 선민이었다. 그들 앞에 가로막혔던 홍해, 넘실거리던 요단 강이 쫘~악 갈라지는 기적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철통 같은 여리고 성이 그들 눈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적도 체험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만큼 놀라운(wonderous) 기적을 많이 체험한 백성이 다시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백성”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기적이란,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고, 사이비 교주들이 가장 많이 팔아먹는 것 또한 유사한 기적이다. 모세의 지팡이로만 뱀이 나온 것이 아니라, 둘러선 거짓 영성가들이 들고 있던 지팡이 역시, 뱀으로 변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소히 작은 기적이건, 엄청나게 큰 기적이건, 기적을 너무 사모하거나 너무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말씀보다 기적을 우선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수많은 기적을 베푼다는 소문이 자자하였고, 하늘 기적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우리나라의 그 유명한 조 아무개 목사님, 그리고 그 가족의 가는 길이 어떠한가? 
 
또한, 성령님의 능력이나 기적이 성도의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초대교회로서 중단되었다는 말도 따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22: 23~30)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작금의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말씀이 주는 참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견을 먼저 뼈대로 세워놓고, 그 주견에 맞은 말씀 성구만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인용하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의 주견을 앞세우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둘 때 내 신앙에 무리가 오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며 총체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 우리(성도)에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다. 그렇다면 생명을 구하는 것이 무엇으로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어디로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로마서10:16-21) 그러니까, 일생에 기적은 단 한 건도 체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이 확실히 믿어진다면, 그는 최상의 것, 가장 귀한 보배를 소유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죽을 생명에서 건짐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이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복하며 복종하는 것이 남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것, 여기에는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고, 내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릴 때도 있고, 내 눈앞에 죽음의 강이 놓여져 있을지라도 묵묵히 순종하고 따르는 마음가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내려, 십자가를 벗어던지는 것은 큰 기적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셔야만 하셨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는 귀신의 영과 성령의 역사를 분별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드리는 말세적 현상이 극에 달한 때이기에, 이상한 일들이 곳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적, 기적을 더 강조한다. 말하자면, 본질보다 비본질을 더 크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사를 추구한 나머지 성경을 넘어서는 것도 아무런 꺼림도, 두려움도 없고, 직통 계시, 거짓 영성을 마구 남발하고 심하게 말하면, 속여 팔아 먹는 자도 있다.(지송~^^)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거짓 영성을 팔아먹는 한심한 자들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간음을 한 목사도, 성폭행을 상습적으로 하다 들통이 난 목사마저도, 용서라는 이름으로 덮어주자며(누가 하나님인지...), 말만 잘하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든다는 것이다!

2)우리(성도)의 주인은 누구시며 그분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교회(성도)의 주인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두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주인 = "주"(Lord)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 헬라어로는 "큐리오스" 즉 "주인, 상전"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Lord 이 역시 주 종과의 관계성에서 상전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지는 뜻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로서 기능과 신권정치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개인 교회건, 가시적 교회건 비가시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건) 그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인’이란 단어보다는 '청지기'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용어가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성도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서 마저 그분의 설 자리가 없고 통치권이 박탈당한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되겠는가?

주인이 원하시는 것은, 첫째도 말씀 증거요, 둘째도, 세째도 모두 그분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전하는 것, 이것 뿐이다! 주인의 것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종, 이것이 우리, 목회자건, 직분자건, 평신도이건...성도가 주님의 몸을 섬기는 자의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런 자세가 바로 발란스 잡힌 신앙인의 태도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 기적과 이사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분께서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분의 방법으로 나타내시고,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기적을 추구하며 따르다가 사단의 거짓 기적, 거짓 영성에 미혹받을 수 있음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마귀의 장난을 분별하는 방법(부록)

아래는 오래 전, 작자 미상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이웃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 도움을 받고 참조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퍼왔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롭게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비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던 크리스천들도 마귀들의 장난이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처럼 작용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장난을 성령님의 인도처럼 착각하여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런 실수의 대부분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는 마귀의 장난과 매우 다르다."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와 마귀의 장난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 인간을 미워한다! 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빌2:13)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한 통제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한다.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면, 너무나 온화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어떤 것이 성령님이고 어떤 것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나 마귀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늘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마귀들이 자신들의 잠재의식 일부의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위의 진술은 사실이다.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제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들이다. 새 시대 운동에 속한 죄의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 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며, 또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찬미하도록 한다. 교만은 마귀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10:5)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빌2:13)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능력이 크시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우리의 의식을 누르시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지만 이 때에도 깨끗하고 질서 있게 행하신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되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 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능동적이며 강력한 의식을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시키도록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고 변경하여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준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실 때, 우리를 고치시거나 통찰력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같은 일을 두 번 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틀에 박힌 일이나 혹은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습 방언과 같이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 뒤 이 마귀들은 그 사람이 부를 때마다 와서 그 사람이 원할 때 치료하는 일 을 행하곤 한다. 또한 마귀들은 의식과 예식 등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영계를 많이 보여준다. 성령님의 은사를 마귀가 모방 할 때 그는 대개 이 일을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통제하에서 수행한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병 고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 을 갖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통제를 받아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이나 감정의 치솟음 등과 같은 일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계를 보여주시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병을 고칠 수 없으며, 방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단지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아뢸 뿐이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빈번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계를 보게 하며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자주 환상을 보거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우리도 의도적으로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 그분께서는 단지 조용히 뒤로 물러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형극에서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이나 로보트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밥티스마(침례)를 받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즉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 불변하며, 단지 그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즐겁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너무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에는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재빨리 징계한다. 그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으려고 힘쓰며 그것을 점령하고 통제하기에 민첩하다. 마귀들은 인형이나 로보트들을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 앞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파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한 죄값을 친히 지불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릴 것을 요구해 왔으며, 자기들을 위해서그들이 정화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피흘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성도들을 향해 마귀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신자들 스스로 부과한 모든 종류의 얽어매는 규례와 엄격한 형식에 따른 율법 조항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경우에도 마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처럼 꾸며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마귀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준수 등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거짓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항상 위기의식이나 죄의식 등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벧전 3:18)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요 14:26) 반면에 마귀들은 혼란을 가져와서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도들의 모든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자랑하길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 거짓말쟁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배우는데 능동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정보 은행으로서 봉사하길 원치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보 은행이 되어 주며, 그 결과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의지대로 정보나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기도만 하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점 같은 것은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기도, 축복성회 등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영어도 유창하게 하고 대학생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경우의 대부분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경우이다. 하나남께서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아이로 태어나 지식이 자라고 영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동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커서 잘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마귀가 떠나면, 그 아이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며, 더 이상 정보나 지식 창고로 존재하던 마귀가 없으므로 그 아이는 사회의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능동적인 의식과 자신의 뜻이 연합되어 우리 가운데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쉽게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점쟁이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예견력을 주시지 않는다.(마6:34) 반면에 마귀들의 가장 일반적인 속임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간단한 예견에 불과한 "거짓 지식의 말들"을 주는 것이다. 마귀들은 또한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한 많은 개인적인 "예언들"을 말해 준다. 성경의 예언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학 진학,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 등을 위해 소위 용하다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처럼 보이나, 사실 이들은 대부분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어서도 안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용 해석을 하려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부분적으로 치우치게되면 극단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이단사설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로 간구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된 삶이란 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이고 내 귀에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말씀)위 굳게 서서 나가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복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능력이다. 죄악 중에 죽었던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는 것, 이 것이 기적 중에서도 가장 큰 기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 17)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선교사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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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인터넷 상에 올라온 글들과 필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 아멘넷 독자님들도 주의를 요망하는 사건들이 계속이어지기에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러 독자님들은 읽어보시고 믿음에 굳건히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1. 이단들은 기성 교회, 기독싸이트에 파고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보다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말씀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들은 이단들의 목표물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짜가 어느 쪽인지 확인해 보자며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고른 성경 구절을 가지고 달려들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이단들 중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곳은 신천지입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신천지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며 기성 교인들 중에 신천지로 넘어간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천지는 처음에 무료성경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으로 많은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체계적으로 성경을 배우지 못해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무료성경공부로 끌어들인 신천지는 모여든 사람들을 미혹하여 신천지 교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신천지의 기성 교회 침투 작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동영상의 공개로 유명해진 “산 옮기기 작전”은 작은 교회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전략인데, 교회에 신천지 교인이 파고들고 세력을 확보한 후 담임 목회자를 쫓아내고 신천지쪽 사람을 리더로 세워 교회를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얼마나 소름끼치는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교회들에서는 새신자들이 오는 것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가워할 수만도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새신자가 온 것이 아니라 신천지에서 목적을 가지고 찾아들어온 사람들도 있을 수 있기에 경계의 눈초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신천지의 활동은 이제 인터넷을 향해서까지 그 활동폭이 넓혀지고 있습니다. 여러 토론방에서 신천지 교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 속에는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의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들은 조선일보 토론마당에 올라 있는 신천지 쪽의 글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 잘 담겨 있습니다.

신천지에서 올린 글의 제목은 “신천지, 칼빈교와 예수교와의 비교”입니다. 또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의 비교로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그들은 신천지와 기성 교회 가운데 어느 것이 이단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땅 위에서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나온 예수교는 가톨릭교이고 가톨릭에서 칼빈교를 이단이라 규정한 이유는 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절대 예정론을 믿지 않는 자와 칼빈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글에는 또한 칼빈이 세운 장로교가 칼빈같이 자기 교리와 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또 개종하지 않는다 하여 성도를 정신병원에 감금하였으며, 심지어 가족으로 하여금 성도를 때려죽이게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로교는 이방 신에게 절했던 솔로몬같이 일정(日政) 때 이방 신(일본의 천황 신)에게 절한 후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장로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며 장로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고신파가 그것을 증거해 준다고 하는 대목까지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기성교회, 특히 장로교를 비판하는 내용의 주장을 하다가 결국 신천지만이 정통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말세에 정통은 없으며, 있다면 계시록에 약속한 대로 다시 창조된 신천지예수교의 12지파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성경을 통달하고 육하원칙에 의해 증거하는 계시 신학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부인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그 뜻대로 창조되지 못한 자는 정통(正統)이 아니며 전통(傳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 글을 시작하면서 이단 소리를 듣는 신천지에서 어느 쪽이 이단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오직 성경이라고 하더니 그 성경에 의하면 기성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단들이 하늘이 정한 12지파를 이단이라 하나, 신천지 12지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경적 정통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다음의 내용입니다. “성경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신천지예수교를 이단이라고 하는 자마다 이단이며, 성경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곳에서는 교묘하게 빼놓고 있지만 신천지에서 주장하는 모든 내용의 최정점엔 신천지의 교주인 이만희씨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상홍증인회에서 안상홍씨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최근에 접한 신천지 교인 하나는 이만희씨가 죽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만희씨도 죽을 것이라고, 나이가 워낙 많아서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나보다 빨리 죽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길길이 뛰면서 화를 냈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속이는 이단이 오히려 기성교회를 이단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합니다. 각 가정을 방문하거나 기성교회로 파고드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인터넷 공간마저 교회를 허물고 이단 사상을 전파하고 있으니 신천지의 열정에 소름이 끼치기도 합니다.

필자는 오래 전, 그들 중 몇 사람과 일대일의 대담을 가지는 동안, 정작 그 자신은 지식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했으며, 사실, 왠만하면 다 알 수 있는 '개론'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더 이상의 자기 변론이 없었다면, 그는 개인의 갈등을 표출한 한 사람의 순수한 성도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필자는 그의 다음 행보를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된 것입니다.

예견한 대로, 다음 날 아침, 그가 다시 올린 글의 수준은 여전히 다른 댓글들과 같은 내용으로서,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를 총 망라해 설렵한 듯. 어느 신학박사의 개론도 그만큼 화려하기 어려울 것 같은 내용과 상당히 높은 지식을 소유한 자만이 설파할 수 있는 수준의 글, 역사에서부터 과학까지...대단한 미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가만히 분석해 보니까, 다른 곳에 단 댓글과 거의 같은 내용, 흡사한 내용을 마치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올리는 모든 글, 댓글과 게시판의 글들은, 곧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개인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식인들을 타겟으로 작성된 고도의 전도용 문구일 뿐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신천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등 비교를 하면서 자신이 새롭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2. 그들, 교회에 시험든 길잃은 양으로 가장한 신천지 요원의 공략 목표:

a.기존교회와 목회자를 신랄하게 비난함
b. 기독교의 방언관 구원관이 틀렸다고 주장함
c. 예수님의 피공로를 흐리게 함
d. 유대교에서 나온 예수교는 가톨릭교이고 가톨릭에서 칼빈교를 이단이라 규정한 이유는 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절대 예정론을 믿지 않는 자와 칼빈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을 이용하여 장로교나 모든 기성교회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e. 방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크게 랄랄랄 따라 하라
f. 기독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간증들을 모방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라
g. 수없이 많은 아이피와 아이디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h. 교회는 수없이 많이 옮겨다닌다. (정체가 탄로날만하면 옮겨 간다. 일명 철새교인)
i. 이단 성이 들통이 나면 지원 사격자가 즉각 출동해서 위험해 처한 동료를 옹호한다

3. 다음은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중요합니다.(골1:18절)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써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토록 존귀한 주님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그 어떤 말을 할지라도 양의 탈을 쓴 이리요, 고뇌하는 지성인척 가장하는 야누스임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시대임을 깨닫고 기도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들지 않도록 철저한 말씀 훈련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 속에 이단들이 파고들 여지를 만들지 않도록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터넷 분야를 이단들이 장악하지 못하도록 대비하는 일도 필요할 것입니다. 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엉뚱한 곳에서 소모전을 펼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 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6 년여 간의 댓글과 게시글을 유추해 볼 때 신천지의 요원이 우리 아멘넷에도 집중적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음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요즘 들어 고뇌하는 지성인, 교회에 시험이 들어서 탈퇴한 지성인의 대표인듯, 이곳저곳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열심을 내던 그들과 유사한 댓글객들의 수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은 불쌍히 여겨야 하지만, 교회를 헤치고 성도들의 영혼을 유린하기 위해 가만히 들어온 야누스의 얼굴을 결코 관망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1요 4: 1-2절 말씀).”

글: 별똥별/최송연 선교사 
 

흐르는 곡은 2008년도에 심혈을 기우려 편집을 끝낸 BEST 복음
성가 모음 곡 입니다.
CD 한장 분량 1시간20분에 걸쳐 19곡의
복음송이 연속 Play 됩니다.
저의 신앙고백과 같은 곡들 입니다.
 - 윤기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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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필자가 아주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기점으로 연날리기가 성행했었다. 다른 都보다 경상남도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유독 활기를 띄게 된 것은, 그 유래가 신라가 근원지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한국 연의 역사를 문헌에서 잠시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여왕 元年(西紀 647年) 비담(琵曇)과 염종(廉宗)의 반란 때 김유신 장군이 연을 사용했다는 기록(三國史記列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47년 신라 진덕여왕을 반대하는 일부 대신이 반란을 일으켜 김유신(金庾信)이 토벌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성안에 큰 별똥이 하나 떨어졌고, 별은 왕을 상징하는 것, 별똥이 떨어진 것은 곧 왕이 떨어진 것이라 하여 군사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사기가 떨어질 대로 다 떨어졌다.

이것을 본 명장 김유신이 꾀를 내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로 띄워올렸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어제저녁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으니 진덕여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소문을 내어 싸움에서 이겼다는 재미난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연 날리기 대회는 그 시작부터가 상대를 속이고 아군마저도 속이기 위한 권모술수에서 비롯되었다고나 할까?(ㅠㅠ)

연날리기 대회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연날리기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민속놀이,그저 재미로 연을 하늘에 띄우고 높이높이 날리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가 않다. 동네 연날리기 대회 하나에서도 규칙이 있고 정해진 규칙은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반칙이나 꼼수나 술수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많은 꼼수와 술수가 빈번한 것이 또 이 연날리기 대회였다니, 기막히지 않을 수 없다. 지략이라 일컫는 김유신 장군의 꼼수를 이어받은 것인지...ㅋㅋ

연날리기 대회의 최고 압권이라 할 수 있고, 가장 재밌는 볼거리라면, 역시, 방패연으로(쉽게 말하면 일명 싸움 연이다) 상대의 연을 감아서 떨어트리거나 줄을 끊어 먹는 것인데, 이 연 시합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며칠 전서부터 연줄에 풀을 먹이고 젖은 실을 햇볕에 말리고, 마르면 다시 또 풀을 먹이고, 여간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나쁜 심성을 가진 사람은 풀에다 유릿가루를 섞기도 했다고 한다. 유릿가루를 몰래 섞는 것은 상대의 줄을 끊어내기 위한 꼼수요, 술수였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동네 어른들은 모여서 연날리기 대회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의 연줄을 철저하게 검사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이에도 승부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느 한 곳에다 몰래 유릿가루를 감추어 상대를 꺾으려 하는 일도 비일비재, 심심찮게 들려오던 후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들통이 나게 되면 승리는커녕 혼줄나기가 십상이나 여전히 그런 악습은 알게 모르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지금은 아예, 모든 연줄에 유릿가루를 묻히도록 허락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조건을 가지고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기란 뜻일 게다.

동네 어른들이 심판으로 뽑히기에 웬만하면 봐줄 법도 하건만 연날리기 대회를 맡아보는 동안만은 아저씨도 없고 삼촌도 없고 오직 당당한 심판만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단체전은 규칙이 있고 그 규칙대로 싸우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연이 멀리 그리고 높이 올라간다고 해도 무조건 탈락이다. 또 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는 연을 가진 팀이 이긴 팀이요,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경기에서 승자가 되려고 하면, 노력과 기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꼭 기억해야 할 말은 “규칙 준수”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일 것이다. 단체전이라면 협동도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어떤가? 무조건 이겨놓고 보자는 심산인지 정치계도 종교계도 온갖 술수와 꼼수가 난무하여 어지럽고 혼탁하기 그지없다.

지금 우리 아멘넷 뿐아니라,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Hot Issue가 무엇인가? 그것은 처음 잘 달려가던 사람들이 변질하여 정도(正道)를 버리고 꼼수를 부리고 무리수를 두다가 그런 사실이 발각되었는데도 인정하지 못하고 더욱더 교묘하고 공교한 말로서 이치를 흐리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성도가 걸어야 할 길,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의(義)로운 길이다. 그렇다면 의로운 길은 또 무엇인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 앞에서 걸어나가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주 앞에서 사는 사람에게 꼼수나 권모술수가 통하겠는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절 말씀).” 이 말씀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이미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하며,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간과해 버리기 쉬운 말씀이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말씀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론 다음으로 기억해야할 중요한 말씀이다. 구원론이 미래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현재 천국이 미래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 시대가 아니고 은혜 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는가?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는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곧이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죽음의 강을 건널 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늘의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채워주시고 그런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훨씬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에 꼭 그런 단어는 없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말씀도 있다.

또 순교자도 주께서 힘을 주셔야 순교할 수 있는 것이지,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입증된다. 스데반 집사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갈 때를 보라. 죽음 직전에, 그의 영안이 열리고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절 말씀).” 그렇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섬기던 그 주님, 평소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자기의 사랑받는 종, 스데반이 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그리고 스데반을 응원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이쯤 되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내가 평생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흘린 눈물을 기억해 주시고 내가 오는 것을 환영해 주시려고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님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나 십자가 강도의 죽음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사단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갈기갈기 찢으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고통 중에서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려면 글자 그대로 필사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구원받았다 하여, 나 또한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백성 되기로 마음에 작정한 그날부터 성도는 그분의 통치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계속돼야 하고, 이런 훈련이 계속된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1 5:18절 말씀)

다시 말하지만,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행위나 내 의지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주님을 입술만으로가 아닌 가슴과 행동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자가 됨을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 그분을 십자가에 현저히 두 번 못박는 일을 계속하겠다 고집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인 우리도 싫어한다. 하물며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서 내 사랑을, 내 순전을 어찌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그런고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야 한다.

성도여, 꼼수를 버려라, 저기 저 앞에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경기장에서 다름박질하는 선수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우리가 평생을 사모하며 그리던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구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고전 12-13 참조) 삶의 결승전, 그 자리에서 나는 벌거벗은 구원자로 판정, 사랑하는 그분과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야 하는 현실 앞에서 가슴을 치며 영원한 후회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오늘 잠시 누릴 세상 부귀영화, 꼼수와 술수로 아성을 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 3-5)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인도의 성자라 불리우며 사상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였고,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 그는 인종 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 수양, 무저항, 이 세 가지를 가르치며 진리 구현을 평생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인도의 문호 ‘타고르’는 그런 그를 가리켜서 ‘마하트마’라 불렀습니다. ‘마하트마’란 이름이 아니라,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서 간디의 호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아는 간디입니다.

이런 그가 매일의 일상에서 예수님의 산상 보훈을 읽고 묵상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회자 되고 있습니다. 간디가 그렇게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란 칭호를 들을 만큼 성숙한 인격을 소유하게 된 동기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인 산상 보훈을 매일 같이 읽고 그의 삶에 적용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한 기자가 찾아가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대답은 “No!”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 만난 크리스쳔들의 행위가 그 말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위선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 우리들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만약 진정한 크리스쳔으로 개종 되었더라면, 지금의 인도는 그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영어에서 말하는 “knowing”그리고 (“knowledge”( intellectual knowledge)) 의 차이를 잠시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학적으로 증명된 것이기보다, 필자의 개인적 소견임을 밝혀 둡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knowing”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며 knowledge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요17: 3절 말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knowing Jesus Christ’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뜻은 하나로 합해진다 그런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영생을 얻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이 막연한 어떤 추상적 개념이나, 지식적(the knowledge of God)으로,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 이런 생명적 유기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속에서 만나고 체험으로 아는 상태, 이 상태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 똑같이 사도 바울처럼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세처럼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그분의 현현을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1: 1). 이 말씀인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실히 알고(knowing God), 가슴으로부터 확실히 믿어(faith)져야 합니다.

지식(knowledge)은 벽(wall)과 같습니다. 벽이란 적당히 높으면 자기 방어에도 도움되고, 바깥세상도 내다볼 수 있어 좋지만, 그 벽이 너무 높으면 역으로 자신이 그 벽 속에 갇혀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바깥세상을 내다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종교적 지식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벽 속에 갇혀 버리게 되고, 그런 사람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게 되는 우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몰라서 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성경 지식(knowledge)은 가졌으나 그 말씀(율법)도, 그 하나님도 가슴으로 알지(knowing)도, 믿지도 않았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막7:6절 참조). 사도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적으로 알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미 지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대해서 너무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종교 지도자였지만,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자리에 기꺼이 합류했던 것입니다. 체험 없이 지식으로만 아는 종교인은 최악의 경우 살인까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무서운 대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벽 속에 갇힌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지식 속에 갇힌 믿음이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이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주위는 더 황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성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많고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 가슴 속에 참 빛을 품지 않은 상태에서 빛의 아들의 삶을 살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종교적 열심은 자칫 위선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그만큼 문제가 더 커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외적 그리스도인, 외적인 열심 주님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 자처하기 전에,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는(knowing God)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Arthur Burns라는 경제학자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워싱턴 DC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었고,1970년대에는Fed Chairman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유태인이었던 그에게 어느 정치인들의 모임에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그 자리에 앉은 참석자들을 엄청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Lord, I pray that Jew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유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I pray that Buddhist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불교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I pray that Muslim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무슬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Lord, I pray that Christian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그리고 주님,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번역: David Choi’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절 말씀).”



다음은 오래전 본글에서 아곡(교제)님이 남긴 댓글입니다. 본글을 보충하는 자료로서 훌륭하기에 여기에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참된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아멘입니다!

“사모님^^지식(knowledge)과 앎(knowing)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색할 시간을 갖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덕분에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고 칼럼의 내용과 조금은 다른  방향이기는 하지만 서로 관련이 있고 함께 살펴보면 유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부족한 제 생각들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knowledge)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knowledge)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벧후 3:18> 참으로 안다는 것(knowing)은  성령을 통해 깨닫는 말씀에 대한 지식(knowledge)을 진리로 알고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며  신앙생활 체험을 통해 축적된 말씀에 대한 영적 지혜가 함께 조화를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지식, knowledge) 정(믿음, faith) 의(행함, deed)로 알아야 참으로 아는 것이 되는 것이겠지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미처 경험하지 못한 과거와 미래의 일들도 성경말씀을 통해 깨달아 알게 하시고 은혜로 믿게 하시고 믿음에서 난  그 지식과 함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게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에 대한 지식과 앎이냐는 것일겝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하기도 하고 읽기도 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기본 지식이 있다고도 합니다. 우리가 부처나 알라를 믿지 않아도 대충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지식정도는 갖고 있듯 오늘날의 불신자이나 안티기독교인들도 그러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삼위일체 성자하나님으로서 또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구주로 영접하여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안다고 할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율법을 듣고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망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복음을 전해 듣고서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자들의 헛된 지식이지요.

거듭난 신자들은 비록 사람에 따라 신학자들처럼 삼위일체에 대해서 장황하게 신학적 전개를 펼치지는 못한다 해도 성령이 주시는 지식의 말씀으로 인해  성부,성자,성령이 한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배움이 짧은 시골 교회 어른들도 또 어린 아이들도  이해가 되느니 안되느니 따지지 않고 순전하게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리 증거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체험을 통해 삼위일체를 알게 된다기 보다 성령이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에 대해서 그리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진리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식의 말씀과 지혜와 믿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은사이지요. (고전 12장)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고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하는 복음서이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점진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간디가 성령을 통해 참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졌다면 예수님을 동양의 공자 맹자같은  성인수준에 놓고서 그 교훈에만 집착하는 대신 또, 무늬만 신자인 자들의 비그리스도인다운 행위에 걸려하는 대신,자기 영혼을 위해서 예수님을 창조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열망했을 것입니다.

간디는 예수님께서 한 인간으로서 행하신 의로운 일과 가르침에 대한 지식만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인격적,민족적 고민만 했지 자신의 인간적 본질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영적 관심과  고민과 지식은 없었다 보여집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지식이전에 경험으로 먼저 알았습니다. 그 능한 손으로 자신들을 애굽의 압박과 종의 신분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하고 인도하심을 체험하고도 곧 패역의 길을 걸었지요

자기들을 인도한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엄히 금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에 대한 지식은 버린채 하나님의 법도대신 자기들이 편할대로 생각하고 자기 좋을 방식대로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기에 시내산 언약을 맺은 후 얼마되지 않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려 한 것을 보면 지식없이 망한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율법주의자들 ,유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 그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 능력을 직간접으로 체험하고도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고 망한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어서,바른 메시야 관을 가지지 못해서, 하나님의 참 뜻에 순종하지 못하게 된 것에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였다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성경도 깨달아 알수 있었을 것이고 바른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그들에게  하나님과 율법과 메시야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보이나 성경은 말하길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카톨릭도 기독교 이단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고 나름대로 예수님의 가르침 따라 신앙생활 (예배 ,전도,봉사,선행,..)을 한다고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참 지식,바른 지식이 없어서,그 성경적 지식을 거부하는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옳다 인정함을 받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이라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지식은 없었던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시대에도예수님을 알고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 지식이 없는 모든 자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다고 봅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29>

거듭난 성도안에 역사하는 성령은 말씀을 통해 그런 진리를 지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고 마음으로 믿게 하시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신앙생활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생각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바르지 못한 지식에  믿음이 갇히는 것 같고  성령이 주시는 참 지식은 믿음을 가두는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영생하게 하는 지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또 우리가 가져야 할 지식(knowledge)과 앎(knowing)이 무엇에 대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자 해서 견해를 적어 보았습니다.” -아곡(교제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천사와 사탄

 

흑암의 역사를 알려고 하면 먼저 천사의 기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탄과 마귀들의 전직이 천사라서 천사에 대해 알아야 사탄과 마귀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천국에서 창조하신 피조물로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하늘 군대인 천군도 있어서 악한 존재로부터 천국을 지키고, 지상에서 마귀들과 싸웁니다.인간과 천사의 다른 점은 인간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에서 살 수 있지만, 모든 천사는 육신의 부모가 없이 창조된 피조물이며 언제든지 하나님의 앞에서 수종 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 영이 천국에 간다고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와 같게 살 수 있다는 것과 천사로 변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천사는 여러 계급이 있고 각기 하는 일이 다릅니다. 유명한 천사는 하늘 군대를 맡고 있는 '미가엘' 천사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하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있습니다. 

 

1. 천사는 모두 날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천사는 날개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날개가 있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가 하늘을 날아 다닐 수는 있으나 날개짓으로 날아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호위하고 찬양하는 특별한 존재인 세라핌과 케루빔(그룹)은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6/2 그 위에는 스랍들이 서 있어 각기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그 둘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며 둘로는 날았더라.
성경에서 여러 차례 천사가 사람에게 나타났지만, 천사인 줄 모를고 사람으로 오인한 것을 보면 날개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랍은 세라핌(Seraphim)을 말하며 예수님 곁에 서 있고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케루빔에 대해선 '사탄과 마귀' 단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 천사에게 성(性)이 중요한 것 아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천사들도 모두 남성 명사인 그(He) 로 대명하지만 인간이 지닌 성(sex)과는 구별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천사는 모두 그(he)로 대변됩니다. (창세기 18/22, 창세기 19~20장, 사사기 13~15장, 삼하 24/10, 마가 16/5, 누가 24/4, 대상 21/15, 사도행전 12/7, 계시록 22/9) 이 세상에서는 대를 잇기 위해 남성과 여성이 필요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천사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모두 성(性)이 상관 없기에 굳이 남성이라고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누가 20/34~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고,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부활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은 부활한 성도가 하늘나라에서 시집 장가가지 않으며, 죽지도 않고, 천사와 동등해지며, 부활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천국에 가서도 男, 女로 구분, 세상의 성(性)은 유지되지만 더 이상 후손을 잇기 위해 남녀가 결혼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서 천사들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비교할 수 없는 휠씬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하나님으로부터 누리고 삽니다.

 

 

3. 천사는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천사가 영적인 존재인 줄로만 알고 있지만, 천사는 영과 함께 영적인 몸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사람인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두 천사는 아브라함과 함께 식사를 했고, 두 천사가 롯에게 가자 롯은 그들을 나그네로 대접했습니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은 두 천사를 사람으로 오인하여 동성연애을 하기 위해 롯에게 두 천사를 내 놓으라고 협박했습니다.

요한 20/11~13 그러나 마리아는 돌무덤 밖에 서서 슬피 울더니 슬피 울면서 몸을 구부려 돌무덤 속을 들여다보매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몸이 놓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쪽에, 하나는 발 쪽에 앉았더라. 그들이 그녀에게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슬피 우느냐? 하니 그녀가 그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를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무덤에 있던 천사는 흰 옷을 입고 있었고, 마리아는 그가 천사인지 모르고 인간으로 여기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영적인 몸은 초능력적인 몸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닐 수 있고, 병 들거나 늙거나 죽지 않습니다. 큐빗은 신체를 이용한 길이 단위인데 사람과 천사의 치수가 같다면 천사는 인간과 비슷한 체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계시록 21/17 또 그가 그 도시의 성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큐빗이니 이것은 사람의 치수 곧 그 천사의 치수에 따른 것이라.

 

 

4. 천사는 엄청난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시편 103/20 능력이 뛰어나고 주의 말씀의 음성에 경청하여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너희 그의 천사들아, 주를 송축하라. 삼하 14/20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같은 형태의 말을 돌려서 하게 하려고 이 일을 행하였음이니이다. 그러하오나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천사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모든 일을 아시나이다, 하니라.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엄청난 능력과 지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천사 한명이 사탄과 싸워 이겨 그를 무저갱에 가둡니다. (계시록 20/1~2)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자 천사가 사슬을 풀고 감옥문을 열어 베드로를 구해 냅니다. (사도행전 5/19, 12/7)


천사 한 명이 지진을 일으키고 예수님의 무덤 동굴 입구를 막은 큰 돌을 굴려 움직였습니다. (마태 28/2)

다니엘이 굶주린 사자에게 둘러 싸였을 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건들지 못하게 합니다. (다니엘 6/22) 남유대를 침공했던 앗시리아 군대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에 의해 하룻밤에 18만 5천명이나 몰살하였습니다. (왕하 19/35) 천사가 이렇게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사탄과 마귀들도 인간이 신으로 오인할만큼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과 마귀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며, 내 힘으로는 절대로 사탄과 마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5. 미가엘과 가브리엘

a) 전쟁의 천사장 미가엘

다니엘 10/13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개역 한글) 다니엘 10/13 그러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가로 막았도다. 그러나 보라 , 최고 통치자들 중의 하나인 미카엘이 나를 도우러 왔고, 내가 페르시아 왕들과 함께 거기 있었노라. (한글 킹제임스) 다니엘 10/13 But the prince of the kingdom of Persia withstood me one and twenty days: but, lo, Michael, one of the chief princes, came to help me; and I remained there with the kings of Persia. (KJV)

구약 시대에 다니엘 앞에 한 천사(예수님의 형상을 묘사한 것과 같음)가 나타나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으로는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어 한글 킹제임스와 KJV로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이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끝에 인자와 같은 이(예수님의 모습임)가 나타났는데,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가 그 천사를 21일 동안 가로 막았다고 합니다. 이 때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도와주어서 기도하는 다니엘의 기도 응답 시간에 맞추어서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 형상의 천사를 가로 막은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일단 사람인 페르시아 왕이 영의 존재인 천사(예수님 형상)를 가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단원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바빌론과 페르시아는 사탄과 마귀를 신으로 섬기는 사탄의 왕국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2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Wherein in time past ye walked according to the course of this world, according to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 the spirit that now worketh i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KJV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를 뿐만 아니라 공중 권세의 통치자를 따른다고 합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통치자는 사탄을 말하는데 통치자는 영어로 Prince입니다. Prince에는 왕자라는 뜻 외에도 군주 또는 통치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왕이 다스리는 왕국(Kingdom)이고, 왕들이 있으며, 성도가 왕국을 상속받는다고 합니다.

마태 6/10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가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 18/36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 왕국이 여기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6/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벧후 1/11 또 이같이 하면 주께서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하는 왕국에 들어감을 너희에게 풍성히 베푸실 것임이라. 계시록 1/6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로마 제국을 예로 들어 볼 때 중앙에 황제가 있지만 각 지역의 속주는 총독이 다스렸고, 중국에서도 중앙에는 황제가 있지만 지방은 제후가 다스렸습니다. 사탄은 예전에 하늘나라 제국의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제후였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수 많은 천사들과 함께 배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페르시아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당시 신으로 추앙 받던 사탄입니다. 마가엘은 'One of the chief princes' 라고 했는데 Chief는 장 또는 우두머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가엘의 계급은 사탄보다 한 단계 높은 제후들의 장이고, 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다니엘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으나,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패망한 뒤에는 페르시아 왕국 안에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자 천사가(예수님 형상) 응답을 주러 갔는데 페르시아를 쥐고 흔드는 사탄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 세상을 주관할 권세가 있어 천사라고 하여도 무작정 들어갈 수가 없었지만, 21일이 지나 다니엘의 기도 조건이 성립되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탄을 억제시켜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천사장 미가엘이 와서 도와주었다고 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을 페르시아의 통치자인 사탄과 싸우도록 그곳에 남겨둔 다음에 천사(예수님 형상)는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권세는 사탄이 쥐고 있고,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도 미혹하여 끌고 가려고 우리 주위에 사탄과 마귀의 졸개들은 수두룩 널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서 1/9 그러나 천사장 미카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그를 모독하는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느니라.”고 말하였느니라.
(Yet Michael the archangel, when contending with the devil he disputed about the body of Moses, durst not bring against him a railing accusation, but said, The Lord rebuke thee.) KJV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두고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차마 욕설에 가까운 비난은 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책망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이 죽어 영이 분리되면 천국에선 천사가 지옥에선 마귀가 그 영을 데리러 옵니다. 구원 받은 영은 천사들의 안내로 천국으로 가지만 구원 받지 못한 영은 마귀한테 억지로 끌려 지옥으로 갑니다.

 

b) 하나님의 소식 전달자 가브리엘

다니엘 9/21~22 곧 내가 기도로 말하고 있을 때 내가 처음에 환상에서 보았던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와서 저녁 예물을 드릴 즈음에 나에게 이르니라. 그가 내게 알려 주며 나와 함께 말하였는데, 말하기를 “오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명철을 주려고 나왔느니라.

다니엘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가브리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날아와서 지혜와 명철을 주고 미래에 대한 계시를 주었습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고,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으로부터 가지고 내려와 전달해 줍니다.

누가 1/19 그 천사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기쁜 소식을 네게 말하여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누가 1/26~27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나사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도시로 가서 다윗의 집에 속한 요셉이라 하는 남자와 정혼(定婚)한 처녀에게 이르니 이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가브리엘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나이가 들고 자식이 없으나 엘리야의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할 사람(요한)을 낳을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나사렛에서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해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줍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면전에 섰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전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천사는 인간을 도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

시편 34/7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는도다.

시편 91/11 이는 그가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시어 너의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임이라.

마태 18/10 삼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히브리서 1/14 천사들은 모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인간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며,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천사들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각종 위험과 사탄 마귀들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천사들은 우리의 행동을 관찰해 천국의 하늘책에 기록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합니다.
천사들은 우리보다 능력이 많지만, 구원의 상속자가 될 성도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영들입니다.

시편 104/4 주께서는 주의 천사들을 영들로, 주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며

요한 1/51 또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 계시록 8/5 그 천사가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 불을 담아서 땅에 쏟으니 거기에서 음성들과 천둥들과 번개들과 지진이 일어나더라.

천사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중보자(사다리)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오갑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인간을 도와 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인간을 심판할 때도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천사란 단어가 84개나 나오며, 세상과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고, 사탄 마귀와 싸워 이깁니다.

 

 

7. 천사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사야 6/1~3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내가 또 보았는데, 주께서 높게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더라.  그 위에는 스랍들이 서 있어 각기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그 둘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며 둘로는 날았더라. 그리고 서로 소리쳐 말하기를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여,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 하였더라.  계시록 4/8 네 짐승들은 각각 자기 주위에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로 가득하더라. 또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말하기를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여!” 하더라.

이사야서에서는 세라핌(Seraphim)이 거룩한 주님을 찬양하고, 계시록에서는 케루빔(Cherubim)이 거룩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라핌과 케루빔은 일반 천사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세라핌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케루빔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도 있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주로 성부 하나님을 의미하고, 주님은 주로 성자 예수님을 의미하는 듯 하지만, 구분할 필요는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신이신 한 분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부를 때도 있고, 성령님을, 또는 성부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때가 있기에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8.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

요한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요일 4/2~3 하나님의 영을 너희가 이렇게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것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지금 그것이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

'삼위일체론' 단원을 참조하시면 예수님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이자, 말씀의 신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인간에게 신이 임한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모습(성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이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20 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이는 나를 보고서 살 자가 아무도 없음이니라." 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나타나면 불의한 인간은 그 밝은 빛에 타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격체(신격체)를 이루는 구성요소로는 성품, 지식, 지위, 능력 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의 성품과 지식은 유지하지만 신의 지위와 능력은 버리고 인간의 지위와 능력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육신을 쓰고 나타나셔서 같이 식사하고 담소하신 적이 있습니다.(창세기 18장)

마태 22/42~45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고 하시니,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다윗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더라.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 안에서 그를 주라 부르며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였겠느냐?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그를 주라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고 하시니, (관련구절 시편 110/1)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니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 받아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고, 주(하나님)께서 내 주(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내(하나님)가 네(예수님) 원수(사탄)를 발 아래에 굴복시킬때까지 너(예수님)는 나(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으므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으니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다윗의 혈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므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의 씨를 받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면 아담의 원죄를 상속 유전 받게 되므로 우리 죄를 대속할 흠 없는 순전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더라. (And Simon Peter answered and said, Thou art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kjv  창세기 6/2 하나님의 아들들사람들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니라.
(That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en that they were fair; and they took them wives of all which they chose.) kjv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What is man, that thou art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thou visitest him?) 유다서 1/6 또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주께서 영원한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사람의 아들 또는 딸'인 인간은 격에 있어서 완전히 다릅니다. 홍수 심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천사)이 '사람들의 딸들'(인간 여자)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노아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과 태어난 거인들을 물로써 멸하시고,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을 사슬에 묶어 심판 때까지 무저갱에 가두셨습니다.

요한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KJV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구원주로 우리에게 주셨는데, 영문성경에서 '독생자'(only begotten Son)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빌 2: 5)

 

요한 8/16 만일 내가 판단을 한다 해도 나의 판단은 옳으니라.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있기 때문이라 요한 14/9~10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행하시느니라.

예수님의 판단이 공정한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들은 스스로 한 말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셔서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신다고 합니다.

창세기 1/26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리하여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모든 땅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니라. 요한 17/5 이제 오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갖고 있던 그 영광으로 친히 나를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을 말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인 세 분이 함께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피조물(우주만물 포함)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를 지칭할 때 쓰는 '하나님의 아들들'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떨어뜨려 처녀 탄생과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기적과 몸의 부활과 승천을 부인하고, 개역한글 성경은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구절을 삭제하거나 변조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이고, 아버지와 하나 되셔서 함께 행동하시며, 태초부터 계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 위 글은, 출력용 워드문서 사에서 정리한 것을 다운로드 받아 복음에서 약간 옆길로 빚나간 부분을 복음적으로 올바르게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 별똥별/최송연

 

 

 

많은 목사님들, 혹은 현대 신학자들이 잘 알지못하거나 혹은 관심이 없거나 역사를 왜곡시킨 발언을 함으로 말미암아 자칫 기독교 전체의 분위기를 살벌한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것같아서 (사람들의 의도하는 본심이 아닐지라도) 사뭇 염려가 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재침례파들은 초대교회의 후손들로서 그들은 처음부터 로마 캐톨릭의 박해를 받아왔고 땅굴 속으로 숨어들어 가서 살던 순교자들의 후예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변질된 교회가 있게 마련이고 재침례파들이 이런 변질된 교회와 결별을 고한 시기는 251년입니다. (참조로: 재침례교란 다른 교회들이 박해하기 위해서 부르던 이름이란 것도 아시면 좋습니다. 이유는: 유아침례와 침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거부,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황이 교회의 머리됨을 거부, 그들(재침례파)의 모임에 입교하려고 온 사람들에게 재침례 받을 것을 요구한 때문에 (Ana-Baptist)라 불렀음)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관용령"을 내려 모든 교회는 화합을 하자고 하는 초청장을 발부했으나 재침례파들은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지 황제가 될 수 없다." 고 하는 신앙고백으로 그 초청을 단호하게 거절했고, 변질된 교회湧� 모두 흡수된 것입니다. 그 댓가로 무서운 박해가 은밀히 이루어졌고 수없이 많은 재침례파 성도들이 계속되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로교를 비롯한 다른 모든 교파는 16세기에 와서 캐톨릭 신부들을 중심으로 개혁된 교회들입니다. 그러한 관계로 재침례파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면서 극한 박해를 한 원흉은 캐톨릭입니다.

캐톨릭이 그 원흉이고 뒤를 이어 영국교회와 다른 모든 개혁교파들도 재침례파들을 박해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칼빈 선생이 그렇게 한 것처럼 왜곡시키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칼빈 선생은 재침례파들의 올바른 신앙 고백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서 기독교 강요를 작성할 때, 신교의 개혁에 때맞추어 땅굴 속에서 고개를 내민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장로교회나 침례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몸인 지체들이라고 고백하는 현 싯점에 와서 이간질 하여 불화하는 발언은 자제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초대교회서부터 피흘리며 내려온 침례교회는 재침례파들의 후예로서 캐톨릭에서 개혁된 개신교가 아닙니다.)

아멘넷 기사에 난 WCC를 주도하는 인사들 중, 미남침례교회의 은퇴 목사인 김장환 목사, 조용기 목사, 김삼환 목사가 WCC를 동조한다고 하는 발언을 하였으나 그것은 개인의 취향, 혹은 개인의 신학이지 전체 교단의 뜻으로 반영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이곳 아멘넷의 지난 기사에 나타난 대로, 각 교단별의 허락을 받은 것도 지지함을 받은 것도 아닌 사람들, 즉 침례교회에서 한 명 장로교회에서 한 명, 순복음 오순절 계통에서 한 명, 이런 사람들이 주가 되어서 교계를 병들게 하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WCC에 관한한 인본주의적 발상을 토대로 세계 모든 종교는 하나다 라고 불교도 이단 종파도 캐툴릭도 모두 함께 존중하며 나가자 하는 의도로 모이지만, 그것은 모든 잡신들을 다 인정하자는 것으로서 '유일 신, 창조 주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악한 행위일 뿐이란 것은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WCC가 반기독교적 행위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으로 토론장을 이끌어나가지 않고 세계기독교 역사 쪽으로까지 일을 크게 벌리기 시작한다면 그 끝이 어디일 것인가...참으로 난처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닌...

만약에 역사를 다루기 원하시면 좀 더 확실한 자료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재론하지만, 오히려 칼빈 선생은 땅굴 속에서 올라온 재침례 파의 지도자들에게서 바른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조언을 받아서 기독교 강요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과 나중에는 결별을 했다지만..

요점은,
재침례파들을 죽이면서까지 핍박한 원흉은 캐톨릭이란 것이고, 다음으로는 다른 교파 (영국국교, 장로교 포함)들도 재침례파(Anabatist)를 박해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됩니다만 칼빈 선생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겨서는 안됩니다. 역사를 논할 때는 좀 더 정확한 근거 제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곡되게 전하는 역사는 무서운 앙화를 부르게 됩니다. 절제해 주십시오.

 

WCC에 대한 요점 정리:

한 번만 더 견해를 피력한 뒤 저는 들어가겠습니다. WCC에 대하여 얼마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WCC는 단순한 "교회통합"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의 통합이라는데 그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고 기독교 역시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인 셈입니다. 실제로 W.C.C.는 무속종교와 아프리카의 토착종교, 마녀들의 마술과 점성술,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수용하고 있습니다. W.C.C.는 무당의 푸닥거리조차 성령의 역사로 보며 영지주의를 정당한 기독교로 승인하는 것이, 모든 종교는 통합되어야 한다 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말입니다.

 

위 글은 아멘넷 WCC에 관한 어느 목사님의 글 아래서 본인의 반론 댓글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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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도 톡, 빠지직!’ 
꽁꽁 얼어붙었던 산개울의 두꺼운 얼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온풍(溫風)에 녹으면서 깨어져 내리고 겨우내 조였던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 마냥 즐거운 듯 ‘졸졸 조르르~’ 얼음장 밑에서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서곡(序曲)으로 냇가에서는 버들강아지가 사브작 거리며 움트기 시작하고 기나 긴 겨울 동안 어디에 숨었다가 모두 뛰쳐나오는 것인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작고 귀여운 새들이 짝을 찾느라 재재거리며 이리 폴작 저리 폴작 아직은 엉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폴작 거리는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리고....
 
각종 곤충과 식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부산스런 숲 속의 이른 아침, 새하얀 안개 너울은 마치 천사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산허리를 감싸며 흘러내린다. 그토록 모질고 매섭던 겨울 冬장군의 혹독함도 살랑이며 불어오는 춘풍(春風) 아기씨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게 되고 봄은 그렇게 우리 곁을 찾아오는가 보다. 
 
봄이 오는 소리, 그것은, “죽음이 끝나고 생명이 살아나는 소리” 이다. 저만치서 힘차게 달려오는 봄의 발걸음 소리는 그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활기찬 ‘생명의 선율’이 되어 꽁꽁 얼어붙은 마음마저 녹여주고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게 하는 힘이 있기에 좋다.

‘희망’이라고 하니까 오래전, 필자가 처음 러시아 선교지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젊음 탓인지 그때는 그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ㅋㅋ) 반짝(?)이는 별이의 눈에 비친 러시아 어(語) 사전에 ‘희망’이란 단어는 있는데, ‘소망’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7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사회주의 사상, 그 무서운 장벽 속에 갇혀 있던 지하교회 성도들, 그들에게도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또 하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성경에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 빌 3 : 20절 성구가 통째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두 눈을 씻고 잘 살펴보았지만 성도들에게 큰 소망과 위안을 주는 그 뜻깊은 구절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다!

아하, 그럴 테지,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상가들이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시킨 사람들이기에“하늘나라 시민권자”란 구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눈엣가시 같았을 것이고 그 성구를 삭제시키는 것이야 하등 이상할 것이 없겠지… 하지만, ‘소망’이란 단어가 구소련(러시아 語)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필자로서는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명쾌하게 이해되지가 않아서 당시 우리에게 러시아 어(語)를 지도해 주시던 교수님, 극동대학에서도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지도 교수님 (러시안 정교회 실세님)을 찾아가 그 사실을 여쭈어보았지만, ‘소망’이란 단어가 ‘러시아 語’ 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만 대답하셨지 그분 역시도 그 이유는 잘 알지 못하시는 듯했다.

흠~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과 ‘소망’에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들은 ‘소망’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싫어한 것일까? 이것은 분명히 낯선 젊은 이방인의 호기심과 궁금증 신경세포를 간질거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하여, ‘희망’과 ‘소망’이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뜻을 생각하느라 밤이 늦도록 그 단어에 몰입해 본 기억이 새롭다.

물론, 영어도 ‘희망’과 ‘소망’ 두 단어를 모두 ‘hope’로만 표기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한국인들의 정신세계가 더 복잡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국어에는 분명히 두 단어의 뜻이 다르게 사용됨을 알 수가 있다. 1. 희망 (希望) = 앞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함. 또는 그러한 기대. 2. 소망 (所望) = 바라고 원하다. 간곡하게 바라다. (국어사전) 그러니까, 희망을 이야기할 때 개인이나 단체의 감정이 기대하는 것으로 어떤 막연함이 배어 있다면, 소망을 이야기 할 때는 개인과 단체의 감정이 기대를 넘어 더욱 간절함, 즉, 더욱 강렬한 뜻으로 사용된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희망’은 절대적일 수 없고, ‘소망’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내가 앞일에 대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희망’이라면, 내가 앞일에 좋은 결과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 이 둘의 차이점은, 내가 ‘기대하는 어떤 결과는 ‘이루어져도 그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만으로서 희망하고 기대만 한다면 막연한 것이고, 내가 ‘소망하는 어떤 결과를 더욱 간절함과 간곡한 마음이 ‘소망’ 이란 단어 속에 함축돼 있다면, 소망한다는 단어 속에는 그 어떤 보이지 않는 힘, 즉 神의 힘을 의지하도록까지 집약되고, 이런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神)을 찾게 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기에 합당한 단어는 막연한 뜻을 지닌 ‘희망’이 아니라 더욱 확실한 표현으로서의 ‘소망’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소견이다.^^ 아마도 이런 뜻을 잘 알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구소련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단어가 ‘소망’이기에 그들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삭제하였으리라고 하는 것이 필자의 연구(?) 결과이다. 그 정확도는 확실하지 않지만…ㅠㅠ

이 시대는 과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것을 희망(기대)할 만한가?

안타깝지만, 그 대답은 ‘No! 희망은 없다.’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희망’은 없지만 ”우리에게 ‘소망’은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너무 역설적인가?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현 세대는 글자 그대로 한 치 앞도 가름하기 어려울 만큼 캄캄한 암흑기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무서운 冬장군이 장악하고 만듯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버린 혹독한 때다. 지금은“역사의 마지막 때”이며, 한 마디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때란 것이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마태복음 24장 예언이 성취되어가는 시점에 놓였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와서 평화를 노래하고 새 시대(New Age)가 이 땅 위에 도래할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로서 성도의 영혼을 미혹하기 위해 꾸며내는 간교한 이단자의 거짓 미소일 것뿐이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살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식어지고, 남자나 여자가 性을 순리대로 쓰기를 싫어하고 역리로 사용하며, 자기를 사랑하며, 자고(自高) 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기 그지없다. 상식 실종 시대, 윤리 실종 시대, 표리부동 불법이 성행하는 시대다.

과학문명이 우리를 건질 수 있다고? 지금 와서 누가 그런 헛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인가?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문명의 이기(利器)는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극한 위기를 몰고 왔고, 인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인지(認知)하고 있다.

폭발하듯 늘어나는 인구, 자연고갈, 식량부족, 각종 유해물질에서 방출되는 독 gas, 방사능 먼지, 이런 과학 물질의 공해로 말미암아 지구는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 오만하던 과학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에다 세상을 단숨에 불태우고 한순간에 산산조각으로 흩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공포의 핵무기의 양만 늘렸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경을 근거로 살펴보면, 세상을 수십 번 불태우고 남을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핵무기가 만들어진 것마저도 성경적 예언이 들어맞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소리란 것이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을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명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벧후 3: 6-7)

과거에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불로서 세상을 심판하시려 계획(plan)하셨고 그 계획하심을 따라 이 세상 과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핵무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죽음의 겨울은 영원하지 않다.

필자가 즐겨 읽는 성경 말씀 중에서, 아가서가 있다. 그곳에 보면, 모진 겨울비가 그치고 언 땅이 풀리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다고 예언해 준다. 이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이 어두운 역사를 끝내고 주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미한다.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야가 구속 주로써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다. 그 주님이 이제는 고난의 주가 아니라, 왕 중의 왕으로, 심판 주로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봄날같이 우리 앞에 화사하게 펼쳐질 것을 예언해 주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 또한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때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고 모질게 추운 겨울 날씨처럼 어렵고 고달픈 때가 있을 수 있다. 예기치 않던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되는 수 있고, 그런대로 잘 이끌어 가던 사업체가 한순간의 실수로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도 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고 가족 간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 고통 받을 때가 있다.

우리들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격려의 음성이며, 영적 전쟁의 전투장은 그리 녹록지가 않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잃지 말고 힘써 싸우라 격려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부활절이 가까워오면 다시 오실 주님의 발자국 소리, 언땅에 새봄이 찾아오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절이 4월이다. 아니다.” 어리석은 변론을 즐기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가 있다. "죽음의 겨울 저너머 새봄이 찾아올 것을 소망하는 예표가 부활절이다. 4월이면 어떻고 춘삼월이면 어떠리...!!"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종말을 맞지 않을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사람도 먼저 가고 나중 가는 차이는 있지만, 개인적 종말이던지, 역사적 종말이던지, 반드시 한 번은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숙명 아래 놓여 있다.

죽음, 역사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종말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면 죽음 그 자체가 그리 두려울 것 없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한다면, 지금처럼 절망할 수밖에 없는 캄캄한 역사의 흐름도 그리 절망할 일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절망이란 소망의 반대 현상이라면, 환경의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낙담할 이유가 없다.
새로운 세상이 이 땅 위에 도래할 것이라며 꼬드기는 말은 모두 WCC, 뉴에이지 사상 그리고 각종 사이비들의 부질없는 속임수일 뿐이다. 결코 새로운 신세계는 도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신이 종국에는 같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이 땅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음에도 새세계가 이땅 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이 새로워진다는 WCC가 다원주의가 아니라고? 눈감고 야옹 하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 중 어제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다고...

봄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이다.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죽음의 터널, 절망적인 어둠의 세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모질고도 긴 혹한의 冬雪을 지나고서야 소망의 봄이 오는 것이다. 성경에서 1518번이나 재림을 약속하고 있으니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인류의 봄이 되신 그리스도, 그분께서 저만치서 오시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이 땅이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는 속임수에 귀기울여서 흔들리는법 없어야 하고, 어느 때, 어느 시에 오신다고 하며 성경에도 없는 말로 사람을 미혹하며 몰아가는 극단적 종말론 자들의 거짓 예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적 세계가 혼탁해질수록 성도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그대,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가....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3:1-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 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5-27).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 20)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IHOP이 있는 캔자스시티는 신사도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으로 인해 최근에 자주 거론되는 도시이다. 신사도 운동은 과거의 자유주의 신앙운동과 종교다원주의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교회에 끼치는 마귀의 운동이다.) 위의 글은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최신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IHOP에서 조용하게 하나님과 개인이 함께 하는 분위기이며 그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wholistic encounter) 영적인 만남의 장이요,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형태의 기도방(The Prayer Room, The House of Prayer)을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과 비전을 가져본다.) 이 역시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다른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 “교회내 민주주의는 반성격적, 성경으로 돌아가야," 라는 거창한 제목과 함께, 목사에게만 교회 내의 치리권도 있고 주권, 목회권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기사도 있다. 다른 한 편, 우리 게시판에는 ( “교회의 주인은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제목과 함께 평신도가 교회의, 사회적 주인이기에, 교회는 민주주의가 타당하며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인 성도들이다.) 라고 역설하는 글도 올라와 있다. 모두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한다. 극과 극, 심각한 대립현상이다. 헷갈린다.

우리의 딜레마는 이 글을 쓴 필진들이 이단의 창시자도, 그들의 교주도 아니고 모두 우리(성도)가 믿고 신뢰하며 따라야 할 소위 정통교회 목사님들이시란 데 있다. 그분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강하고 높으며 집요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더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일까?  대단히 혼란스럽다. 우리 독자들은 혼란상태에서 어제까지 믿음의 동지로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서로 등을 돌리며 “내가 보기에 이 목사님의 말씀이 더 옳다. 다른 목사님을 지지하는 네가 틀렸다.” 서로 손가락질하며 다투기도 하는 가슴아픈 헤프닝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성경을 두고 무엇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함께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자신의 신앙에 발란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고,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말씀이 주는 참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견을 먼저 뼈대로 세워놓고, 그 주견에 맞은 말씀 성구만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인용하는, 이헌령비헌령(耳懸鈴鼻懸鈴),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의 주견을 앞세우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둘 때 내 신앙에 무리가 오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며 총체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발란스가 필요한 부분과 그 해법
신앙의 발란스라고 하면, 넓게는 구원론에서부터 신론, 기도론까지 다양하고 복잡하겠으나, 아쉬운대로 좁은 의미로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발란스는 어떤 것인가, 정립을 해보면,

a) 신사도 운동은 과연 성경적인가?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란 그리스 원어의 뜻이 있다. 그렇다면, 보내는 자가 계시고, 보내시는 목적이 분명 있고서야 보냄을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다. 사도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분은 그분(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엡 4: 11절 참조), 보내신 목적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는 붓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초대 교회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도 희귀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한데 묶어져 있지않은 때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 줄 사도들이 필요했었고, 이를 위해 주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친히 불러 사도로 세우셨고 그들,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벧후 1:20절 참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완성된 정경 신구약 66권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따로 직통계시로 받아 우리에게 전해줄 사도(Apostle)직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22:18-19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말씀 외에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되었기에, 그 대답은 분명 “No!”이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이 친히 우리들 속에 임재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데, 그런 우리에게 따로 선지자나 예언자가 특별히 필요한가? 그것도 역시 대답은, “ No!” 이다.
 
b)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교회의 주인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두 주님이 주인이시다. 주인 = "주"(Lord)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 헬라어로는 "큐리오스" 즉 "주인, 상전"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Lord 이 역시 주 종과의 관계성에서 상전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지는 뜻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로서 기능과 신권정치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개인 교회건, 가시적 교회건 비가시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건) 그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인’이란 단어보다는 '청지기'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용어가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성도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서 마저 그분의 설 자리가 없고 통치권이 박탈당한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되겠는가?

(주인의 것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종) 이것이 우리, 목회자건, 직분자건, 평신도이건...성도가 주님의 몸을 섬기는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런 자세가 바로 발란스 잡힌 신앙인의 태도라고 본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

c)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마귀의 장난을 분별하는 방법

아래는 오래 전, 작자 미상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이웃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 도움을 받고 참조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롭게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비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던 크리스천들도 마귀들의 장난이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처럼 작용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장난을 성령님의 인도처럼 착각하여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런 실수의 대부분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는 마귀의 장난과 매우 다르다."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와 마귀의 장난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 인간을 미워한다! 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빌2:13)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한 통제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한다.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면, 너무나 온화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어떤 것이 성령님이고 어떤 것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나 마귀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늘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마귀들이 자신들의 잠재의식 일부의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위의 진술은 사실이다.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제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들이다. 새 시대 운동에 속한 죄의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 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며, 또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찬미하도록 한다. 교만은 마귀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10:5)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빌2:13)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능력이 크시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우리의 의식을 누르시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지만 이 때에도 깨끗하고 질서 있게 행하신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되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 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능동적이며 강력한 의식을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시키도록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고 변경하여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준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실 때, 우리를 고치시거나 통찰력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같은 일을 두 번 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틀에 박힌 일이나 혹은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습 방언과 같이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뒤 이 마귀들은 그 사람이 부를 때마다 와서 그 사람이 원할 때 치료하는 일 을 행하곤 한다. 또한 마귀들은 의식과 예식 등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영계를 많이 보여준다. 성령님의 은사를 마귀가 모방 할 때 그는 대개 이 일을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통제하에서 수행한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병 고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 을 갖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통제를 받아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이나 감정의 치솟음 등과 같은 일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계를 보여주시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병을 고칠 수 없으며, 방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단지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아뢸 뿐이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빈번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계를 보게 하며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자주 환상을 보거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우리도 의도적으로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 그분께서는 단지 조용히 뒤로 물러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형극에서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이나 로보트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밥티스마(침례)를 받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즉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 불변하며, 단지 그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즐겁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너무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에는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재빨리 징계한다. 그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으려고 힘쓰며 그것을 점령하고 통제하기에 민첩하다. 마귀들은 인형이나 로보트들을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 앞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파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한 죄값을 친히 지불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릴 것을 요구해 왔으며, 자기들을 위해서그들이 정화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피흘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성도들을 향해 마귀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신자들 스스로 부과한 모든 종류의 얽어매는 규례와 엄격한 형식에 따른 율법 조항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경우에도 마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처럼 꾸며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마귀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준수 등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거짓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항상 위기의식이나 죄의식 등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벧전 3:18)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요 14:26) 반면에 마귀들은 혼란을 가져와서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도들의 모든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자랑하길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 거짓말쟁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배우는데 능동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정보 은행으로서 봉사하길 원치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보 은행이 되어 주며, 그 결과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의지대로 정보나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기도만 하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점 같은 것은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기도, 축복성회 등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영어도 유창하게 하고 대학생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경우의 대부분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경우이다. 하나남께서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아이로 태어나 지식이 자라고 영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동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커서 잘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마귀가 떠나면, 그 아이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며, 더 이상 정보나 지식 창고로 존재하던 마귀가 없으므로 그 아이는 사회의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능동적인 의식과 자신의 뜻이 연합되어 우리 가운데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쉽게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점쟁이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예견력을 주시지 않는다.(마6:34) 반면에 마귀들의 가장 일반적인 속임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간단한 예견에 불과한 "거짓 지식의 말들"을 주는 것이다. 마귀들은 또한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한 많은 개인적인 "예언들"을 말해 준다. 성경의 예언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학 진학,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 등을 위해 소위 용하다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처럼 보이나, 사실 이들은 대부분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어서도 안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용 해석을 하려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부분적으로 치우치게되면 극단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이단사설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로 간구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앙 생활의 발란스를 유지하도록 힘쓰자!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뉴욕의 아멘넷 기사에 올라온 우리나라 어느 대학의 신학부 교수님은 방언은사는 우리나라가 유럽보다 많다고 하며, 그 이유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아래는 필자가 그 글아래 남긴 댓글인데, 행여 방언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이곳에 올려둡니다.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왜 한국교회에 많이 나타나나

 사람들은 현재 교회에서 체험하는 방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왜 유독 우리나라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 교회에서는 방언 은사 체험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에서도 어떤 교회에는 대다수의 성도가 방언을 체험하는데 반해 다른 교회에서는 극소수가 방언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한국 교회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앙적인 측면보다 한국의 샤머니즘적 신앙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성서적 해답을 얻었다. 우선, 바울에 따르면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고전 12:11)과 신자의 사모함(고전 12:31)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겠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 때문에 사람이 은사체험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그 은사에 대한 신자의 태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신자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려면 열심히 사모하라고 바울은 권한다(고전 14:1). 이렇게 은사 체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이것은 말씀이 실제화되는 주요 원리 중의 하나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은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순종할 때다. 종교개혁 때 마틴 루터가 바울이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깨닫고 외쳤을 때 그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요한 웨슬레가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원리를 깨닫고 선포했을 때 역시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많이 연구되지도 않았고, 활성화되지도 않았던 방언에 대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고 선포할 때 역시 방언을 체험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 교회에 방언 현상이 적게 나타난 것은 유럽 교회는 전통적으로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십 번 인도한 방언 세미나 혹은 집회를 통해서도 이 진리를 누누이 경험했다. 이 집회에서 필자는 대략 1시간 정도 방언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들어 그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전에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 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교정 받는다.

그러고 나서 방언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같이 기도하면 많은 경우에 그 자리에서 방언을 체험한다. 조사를 해 보면 자리에서 그냥 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방언을 체험한다.

어떤 이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어떻게 자리가 그 은사 체험과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공부도 잘 하고 은혜도 더 많이 체험한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에 동의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앞으로 나와 같이 기도하면 대부분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방언에 관련해서 말하면 앞자리에 앉았다가,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우리 한국의 어떤 샤머니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방언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방언체험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다. 성경 어떤 말씀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결단할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고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계속)

김동수 논설위원 / 평택대 신학과 교수
ⓒ뉴스미션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1. 방언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 2. 방언 은사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으로 분류하신 것 같네요. 교수님께서 분류하신 대로 하자면,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철야기도 시간에,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방언 은사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도,

주께서 원하시는 시간,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시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은사 중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열정적인 사회나 더 열정적인 개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은 바른 성경관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고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방방언도 여러 가지 방언이 있듯, 영언도 여러 가지임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열심있는 자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1. 개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2.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원하시는 때에 주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고전 14장 참조)

 

인간 지성의 잣대로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사를 재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나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경험은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복종해야지,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와, " 꼭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래 '질문'님이 우리 독자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도 그가 설파하고자 하는 말이 모두 다 틀렸다기 보다는 질문님의 논리 역시, 자신의 경험의 반경,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주장하는 개론에 "성경적 뒷받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권적 은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논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살펴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요, 우리가 취해야할 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전제로, 모든 주권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은사의 주체와 은사를 선물로 받는 객체를 먼저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약 강사의 초청에 의해서 강대상 앞으로 나간 사람이 더 많은 은사를 체험한다고 주장하시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간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습니다만...그것이 전부인양 말씀해서는 안 되겠지요.

 

요즘 부흥회나, 인터넷에 떠도는 'so called' 신령한 부흥강사님들, 신유집회 동영상을 보게 되면, 강사님들이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 ! !, 불로, 불로!, !!" 등등...강한 명령어를 사용함을 봅니다....주체와 객체가 뒤바껴 버린, 기형적 모습이 바로 그런 사상, 강대상 앞이 더 신령하고, 어떤 개인,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강사들이 더 신령하다고 보게 되도록 유도하는, 영적 특권의식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사상이 만연할 때, 과거 박태선 장로나 전주 율리아 같은 이단을 양산해 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곳에서 과연 지.. 의를 온전히 갖추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래 전, 철야기도 중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방언을 한다고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합니다. 저는 아무런 생각없이 한 쪽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님께서 저의 영의 귀를 열어주심일까요? 그 여집사님의 방언이 통역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는 뜻없는 말이란 것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욕하고....너무도 놀라서 저는 제가 잘못 듣고 있는가? 못들은척 하려고 하였으나, 듣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어나 그 여집사님께로 가서 어깨를 건드려,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고, 방언이 터져서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고...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께서 하시는 방언은 사단이 장난을 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주님을 욕하고 원망하고 ...듣기가 거북할 정도이니 본 마음이 그게 아니시라면 절제하시지요." 그 여자 집사님은 그 말을 듣더니 너무도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이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저의 말을 듣고 절제를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바울 사도가 통역이 없으면 방언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신,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제가 모든 방언을 다 통역되어진다고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제가 다른 분의 방언을 듣는 대로 모두 통역되어지는 것은 또 아니더군요. 꼭 필요한 때, 주님께서 귀를 열어주셔야 되는 것임을 깨닫고 저는 그때부터 더욱 조심합니다. 그리고 영언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단이 그 사람의 혼을 사로잡아 장난질 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더기 무숴워 장못담그랴? 사단의 장난이 무서워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부정하느냐? 라고 몰아가는 사람이 있기에 말을 아끼려합니다만...제가 경험한 바로는 무조건 마음이 열려져 있는 무방비 상태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은사자라 부르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는 것이 모두 성령의 선물로서 방언은사가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교제님이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이여, 가장 신령한 것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재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방언은사를 이유없이 뜻없이 받아누려야 할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내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신령하게 보이고 느껴지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순간이 바로 사단이 틈타기 가장 좋은 교만의 순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는다면서, 이리저리 그대보다 더 신령(?)하다고 나팔을 부는 자들을 따라다닐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골방에 들어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이웃을 위해, 국가를 위해, 하다못해 우리 아멘넷을 위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진정한 기도를 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더욱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 신령한 은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은 숨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런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윗이 양치는 목자로 있을 때, 주님은 그를 아시고 기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던지, 개의치 마시고 주님 앞에 겸손해지도록 마음을 낮추는 자가 주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만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교제님께서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면서, 영적 사깃꾼들의 작태가 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가 좀 더 분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오래 전에 있었던 실제적 체험담도 생각이 나고...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간증을 올려드렸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별똥별/최송연

 

 

 
http://www.youtube.com/watch?v=3oMlZmJIZ6c
저 목사 누군지 아시는 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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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련의 위력으로 기독교는 반드시 박멸되고, x 집은 문닫고, x 먹(목사)은 산업현장에서 땀을 흘리게 되며, x 독들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내년도(2011년도) 통계청에서 전국인구센서스를 하게 되는데, 내년도까지 기독교인구는 적어도 10-20% 이상 줄 것으로 저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10-20%는 곧 x 독교가 망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징조입니다. )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 문구는 자신들의 혁혁한 공로로 우리 기독교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자랑하느라 신바람이 난 어느 반기련 인사가 그의 게시판에 올려놓은 황당한 발언 중에서 가장 mild한 문장을 카피해 온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란 긴 세월을 자랑하며 내려오지만, 정서는 유교 사상과 샤머니즘 사상이 뼛속 깊이 파고든, 그것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는 턱없이 미련하고 패역한 민족이었을 뿐이다. 샤머니즘에 물든 우리 조상은 삼라만상 모든 것을 신(神)으로 간주하여 거기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recognized)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때가 되어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주의 보수신앙은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우리 땅에 소개했으며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먼저 받아들인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알지 못하여 망해가는 민족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은 굶주리고 헐벗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들은 신앙의 보수를 부르짖었고, 새벽마다 울부짖는 눈물의 기도가 방방곡곡 울려 퍼졌으며 깨끗하고 청결한 삶을 몸소 실천실행함으로써 성령의 사람이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도 모든 기독교 역사가 지닌 공통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피 흘린 발자취’ 위에 건축이 된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분들의 눈물 어린 기도로 이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새벽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선교도 가장 열정적으로 하는 나라, 통계를 보면, 개신교인 숫자만 전체 국민의 21.6%(2009 년)가 되기까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나오고 있었다. 그뿐이랴, 비행기를 탄 채 밤하늘에서 잠시 내려다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십자가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 이토록 훌륭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 현대 기독교인의 실상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그 찬란한 신앙의 업적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으로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덕스러운 향기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닮은 신실한 사람들’이란 명예로움을 향기처럼 흩날리던 멋진 공동체였으나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x 독교’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운 공동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많은 지각있는 성도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겠다. 이제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돌아 보며 문제를 파악하고 조율(調律)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이토록 혼란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심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지켜 나가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치중하는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조직신학 교수님이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도 같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는 2천 년이라는 긴 역사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성경을 기초로 다듬고 다듬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며,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의 무수한 논쟁을 거쳐나오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긍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을 받은 위대한 산물이요, 보배로운 유산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개인이 자신의 입맛대로 새로운 자가신학을 양산(量産)해 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급히 조율(調律)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많지만 우선 몇 가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교는 정(靜)적이요, 기독교는 동(動)적이다.

1. 예수님께서는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
성경을 보면 세 초부터 세 말까지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 동(動)적인 하나님이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일하셨다. 병자를 고치기도 하셨으며, 잃은 영혼을 찾아 헤매는 일을 하셨고, 각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전도의 일을 감당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지금까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일하시는 분, 동(動)적인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요 8 : 29)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의 사역 시작은 파송(보내) 하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많은 무리 중, 70인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주신 사명이 ‘각 동네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명하셨다. (눅 10 :1- )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지상명령)도 역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 28 :19)...!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희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세상으로 가라.” 하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佛敎, Buddhism)에 대해 깊이 공부한 바 없어 확실히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잠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불교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른 종파와 매한가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라고 보겠다.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니 그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고행이요, 신(神)의 경지를 자기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이루어 내어야 하니, 도를 닦으며, 참선 (參禪)도 하고, 좌선 (坐禪)도 하고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앉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 성도는 참선(參禪)이나 좌선(坐禪)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도를 닦아야 하는, 정(靜)적인 불교(佛敎)의 불자(佛者)들이 아니라 그분(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역동(力動)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이런 윈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닫고 알기만 한다면 하루는 24시간 1년이면 365일을 가만히 앉아서 찬양과 기도만 하고 들어 앉아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그것이 신탁(神託, oracle)이건, 예언이건 간에, 처음부터 성경적 개념이 아니며, 이치에 맞지도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면 ‘주께서 가라시면 세상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마 28 : 16 - 20)

구약 성경에 느헤미야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삽을 들어 예루살렘 성곽을 세우는 일에 힘을 다했다. 느헤미야는 일하는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느3: 15-23 참조).

3.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정(靜)적이어야 할 불교는 세상으로 내려와 동(動)적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반대로 가장 역동(力動)적이어야 할 기독교는 정(靜)적이 되어야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비우고 깊이 기도에 착념하면 하나님의 심장까지 들락날락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 종교에서 도입한 ‘관상기도’의 현주소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는 12시간, 1년이면 365일을 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고 찬양만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생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좋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지상명령은 “세상으로 나가라!”하는 것인데, 언제 세상으로 나가서 언제 전도할 수 있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 생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이렇게 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성도이고, 그럴 수 있는 여건이 허락지 않는 성도나 목회자들은 매일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그들을 흠모하게 될 것이며, 그런 그들은 그렇지 못한 성도들보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듯, 영의 세계에서도 상하(上下), 우열(優劣)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動)적이어야 마땅할 기독교가 정(靜)적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며, 변질한 사례일 뿐이다. 모두 욕심을 따라 변질시킨 것이다. 우리는 돌이켜야 산다. 아직도 늦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느 특정 구절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말씀 속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하고 날마다 나의 신앙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조율(調律)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 :6-8)



By: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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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 속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神을 찾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느 민족이건 그들의 문화 속에, 물론, 그 정도나 형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을 섬긴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고 그 출발점은 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좇겨난 때부터가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쫓겨난 그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유전으로 물려받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가는 곳마다 신을 찾으려하고 신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위로 받으려하는 모습을 연출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이 귀소본능(歸巢本能) 부분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영적 무지(無知) 상태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은 오히려 여러 가지 형태의 신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신을 섬기기도 한다는 것이 필자가 본 견해입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1.이방인들의 하나님: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장 22절 하)”라고 지적한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많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그 어느 국민보다 더 종교성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다고(행 17: 23절)바울 사도가 지적하듯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모든 만물이 다 신입니다. 산에는 산신령, 돌, 나무, 폭포수, 물에는 용왕님, 하늘에는 일월성신님, 부엌에는 삼신님, 심지어 우리가 먹는 된장 간장독마저 모두 신이 관장한다고 믿을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국민의 종교성이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2.기독교인들의 하나님: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나 막상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라고 물어보면 정작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 신앙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 안에서 잠시 분류해
보면:
 
a.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개념은 막연합니다. 하나님이란 하늘 공중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나 만나볼 수 있는 염라대왕쯤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 천당이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그뿐이니 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 '천국보험'을 들어 두는 심경이라고나 할까요?
 
b.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늙은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복신앙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라 보면 틀림 없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기분이 좋아진 하나님이 복을 한 아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좀 시원치 않으면 화가 난 하나님은 당장에 매를 때리기도 하고 병을 주기도 하며 또 물질에 큰 손해를 끼치게도 한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다른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에 큰 질병이라도 들면, 그것을 저주받은 것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성도가 물질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잘못된 하나님을 믿는 것에 길든 성도들은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란 불안과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했음을 아는 상태에서 병이라도 들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틈을 타 자칫 신령하다는 자들의 안수기도를 받으면 뭔가 해결될 것같다는 심리를 이용하는 사이비 치유사역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전지전능 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도덕적 속성으로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시며, 신실과 공의가 완전하신 분,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짧은 지면에 다 말씀을 드릴 수 없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고 하나님을 믿어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성경이 계시해 주고 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 하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합니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입니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청지기 자세'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잠시 말씀드린 대로, 청지기란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내가 누리는 것 중에 내 것이란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내 건강, 내 생명, 내 자녀, 내 물질, 모두 주인의 것이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 받아 누린다는 개념입니다.(시 24: 1절) 따라서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내는 것은 복 받으려고 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그동안 받아 누렸으니 그 은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 분의 일을 드립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의 것인데, 십일조뿐 아니라 내 재산 모두 드려야 마땅하지만 십 분의 일이라도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이런 자세가 선한 청지기의 올바른 물질관입니다.
 
둘: 하나님을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입니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구원관입니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뜻이 함축돼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입니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 입니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우리가 죽어서나 만나 보는 염라대왕도 아닙니다. 변덕 많고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재 정립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그 나라에 가기까지 견인해 이끌어주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 신앙이 올바른 신관입니다.
 
고로, “당신의 하나님은?” 하고 묻는다면,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고 답하고 그대로 믿는다면, 그 속에 성도가 지녀야할 올바른 물질관, 구원관, 신관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가장 올바른 정답이 됩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화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 11- 12절 말씀)”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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