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와 목사님, 혹은 아무개가 보기 싫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났고, 또 떠나고 있다. 누가 그들을 정죄하며 돌을 던질 수 있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조선 시대의 작가, 허균의 조카인 허친이 당대의 정치와 사회의 문란함에 가슴을 치며, 그 집 앞에 ‘통곡헌’(慟哭軒)이란 현판을 새겨 붙였다는 데, 현대 기독교계의 흐름과 거센 비판의 소리는 일부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통곡헌(慟哭軒)이 새겨져 가고 있다. 정말 목놓아 통곡(慟哭)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작금의 기독교계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어느 한 사람의 인격이 부족한 것, 어느 한 개인, 혹은 어느 한 단체에게서 내가 상처를 받았다 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떠나거나, 내 작은 입술로,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거룩한 교회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같은 부모 아래서 태어난 형제 자매도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다투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렇다 하여, 부모나 가정 그 자체를 부정하고 욕하고 가정을 떠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영적으로 한 피 받아 한 몸 된 형제요 자매이며, 사랑으로 묶어진 사랑의 공동체요, 우주적인 가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여든 모든 형제 자매들이 아직은 완전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아니며, 모두가 다 성숙한 인격을 소유한 인격자들로만 구성된 모임도 아니다. 또 교회란, 구원의 방주로서는 완벽하다. 그럼에도 그 방주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아직 온전히 거룩(Sanctification)하게 된 것이 아니다.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부족한 인격체들이기에,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순간순간 옛 성품이 되살아나는 것을 자기 자신이 안다면, 다른 이도 그러할 것이란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은 완전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완전을 바라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니고 무엇이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교회를 떠나는 것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라고 하지만, 사실상 근본문제는 우리가 우리 믿음의 기초를 바로 세우지 못한 까닭일 수도 있다. 믿음의 기초가 든든하게 세워진 사람은 어떤 환난이나 시험 풍파가 몰려와도 결코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 7:24-27절 참조)

1.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페트라’와 ‘페트로스’

지구의 대기권이 주위의 허공 속에 있고, 지구는 땅덩어리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듯, ‘페트라’와 ‘페트로스’는 불가분의 관계요, 생명의 관계이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개인 교회는 인정하나 보이는 성전과 단체가 모여 이루어지는 교회는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 교회는 ‘페트로스’일뿐, ‘페트라’가 될 수 없다. ‘페트라’는 그리스 어로 반석이란 뜻이며, ‘페트로스’는 작은 조약돌을 의미 한다. 물론, 작은 조약돌이라 하여도 그 성분은 반석과 동일하다고 하겠다.

그렇다할지라도 작은 조약돌 혼자서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 건물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반석이 필요하다. ‘페트라(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여 불러내셨고(요 15:16), 구원하신 것은 개인적으로는 성령의 거하시는 전, ‘페트로스’가 되게 하심이고, ‘페트라(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작은 ‘페트로스(조약돌)’인, 개인 교회가,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 올리듯 쌓아 올려져야 하고 그 개인 교회가 모일 때, 비로소 ‘불가시적인 교회’요, ‘우주적인 교회’로 완성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게바(kephas)’가 될 것을 예언 하셨는데, ‘게바’는 아람 어로 ‘페트라’와 ‘페트로스’의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조약돌과 반석의 성분을 의미 하는 것이겠지만, 베드로 그 자신이 ‘페트라(반석)’이 될 수 없다는 데는 신학자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것은, “게바는 번역하면(페트로스)”라고 사도 요한이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요 1:42절 참조)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페트라’란 낱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주님의 교회를 이 ‘페트라’위에다 세운다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페트로스)의 인격을 말씀하심이 아니고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면, 베드로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모실 것이고 그 성령님이 곧 ‘페트라(반석)’이심을 예언해 주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페트로스’ 속에 계신 ‘페트라(성령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영)’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 16: 13-19절 참조) 신학자들은, ‘페트로스’는 작은 조약돌이니,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수가 없기에, ‘베드로(페트로스)의 신앙고백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필자도 오랫동안 이 부분에서 혼동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성령님께서 내게 깨우쳐 주시는 것은 ‘페트로스’는 작은 조약 돌이나, 그 작은 조약 돌의 마음속에 성령 하나님을 모셨으니, 그 ‘페트로스’ 속에 계신 ‘페트라(반석)’이신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반석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페트로스’와 ‘페트라’는 생명적으로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성도, 그 마음 속에 계신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개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렇다, ‘페트로스’는 성령이 내주해 계시는 개인 교회, 영적으로 성도를 일컫는 말씀이다!!

성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롬 10:9-10절 참조) 구원받은 성도만이 그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마 16:16절 하).” 고백할 수 있는 것이며,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님이 내주해 계시니, 그 개인, ’페트로스’ 역시, 하나님의 교회로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페트라’ 없는 ‘페트로스’ 없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닌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와 성도는 뗄래야 뗄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요, 생명의 관계인 것이다!

2. 믿음의 기초를 '페트라' 위에 세우는 신앙

필자는 지난 성지순례 기간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페트라’를 볼 기회가 주어졌었다. 이 ‘페트라(πέτρα)’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Amman)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62km 떨어진 곳으로, 거대한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해발 950m의 산악지대에, 최고 높이 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입구는 붉은색 사암 바위들이 좁은 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여러 바위 유적지 중의 하나인 ‘앗데이르’는 그것은, ‘시크(siq)’라 불리는 협곡, 약 2km의 좁은 통로를 길게 통과해서 들어간 자들만 볼 수 있도록 비밀스럽게 간직해 온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웅장한 아름다움이란 글자 그대로 숨 막히는(breathtaking) 광경이었다. 그 옛날에 바위를 깎아 이토록 정교한 신전과 건물들을 지을 수 있었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이 거대한 ‘페트라’를 깎아 건축한 그때 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 건축물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이다. 아마도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을 것 같다. 무엇 때문인가? ‘페트라’는 반석이기 때문이다. 반석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썩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반석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사실,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 신앙을 세운 사람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이 굳건히 그 자리에 서 있다(마 7: 24-25 참조).

3. ‘페트라’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마셔야 산다

‘페트라’에서 나오는 물은 사람을 살리는 물이었다. ‘페트라’는 광할한 사막지대에 동서방향으로 모세 계곡(Wadi Mūsa)를 관통하고 있고, 이 모세 계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Moses)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Egypt)을 탈출하던 시기인 기원전 1400여년 경, 모세가 광야에서 바위를 칠 때 물이 솟아났다는 곳, 모세 우물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 바위 샘에서는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주위는 온통 사막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페트라’에서 솟아난 물을 마시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성경은 이 생수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씀이라고 하신다.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그 ‘페트라’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살아날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물은 오직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4절 말씀).”

교회란, 개인 교회이건, 단체가 모이는 교회이건, 작은 교회이든지, 큰 교회이든지, 우주적인 교회, 불가시적인 교회든지, 모든 교회가 다 ‘페트라’,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하고, ‘페트라’이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라면, 음부의 권세가 감히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지 못할 때, 작은 비바람에도 흔들리고 넘어지게 되고, 이단들의 감언이설에도 쉽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영원한 구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전도 받아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구원의 완성을 이룰 때까지 교회를 떠나거나 이단 사설에 미혹되지 않고 그 믿음을 잘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며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트로스’, 조약돌 교회는 ‘페트라’,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서 함께 지어져 나갈 때, 온전한 하나님의 교회, 우주적인 교회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가르쳐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 함께 연구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말세적 과제라고 나는 믿는다.

“너 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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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직은 메마른 들녘, 낮으막한 산등성이를 따라 진달래꽃 철죽꽃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고, 노란 개나리꽃이 덮인 울타리 너머로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이른 봄이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눈물 짓곤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몸이 유난히도 약했습니다. 태어나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라면서 어찌된 셈인지 입이 까탈스러워졌고 입이 까다로우니 제대로 먹지를 않아 약한게라고 어머님께서는 늘 핀잔을 주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육미는 육미의 그 특유한 냄새가 싫었고, 생선은 생선대로 비려서 싫고, 계란은 그 속에 병아리가 있다기에 징그러워서 먹기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몸은 바싹 여윈게 눈만 커다랗게 보인다고 언니와 오빠는 놀려대었습니다. 요즘이야 다이어트 미인들이 인기라, 날씬해지려고 젊은 여성들이 심한 다이어트식을 하다 영양실조 현상으로 노인들에게나 있을 법한 골다공증도 걸리고 다이어트 증후군으로 고생들을 한다지만, 필자가 어릴 적만 해도 통통하게 살이 찐 것이 부티(귀티)가 난다 하여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 때였으니, 약하디약한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무척 근심거리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나의 입맛을 돋워 주기 위해, 봄이면 우리 집 식탁에 자주 올라오는 메뉴는 비빔밥과 아기 쑥국이었습니다. 하얀 무와 빨간 홍당무는 송송 채 썰고, 도라지와 고사리는 미리 삶아 물에 불려두었다 건져 내어 따로따로 참기름에 살짝 볶고, 소금물에 새파랗게 데쳐 낸 시금치와 콩나물은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붂 넣고 조물조물 버무립니다. 계란은 노랗게 지단을 부쳐 썰어놓고, 잘게 다져 양념하여 달달 볶은 소고기를 예쁘게 순서대로 하얀 밥 위에 올려놓고, 거기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썩썩 비비면 아주 개운한 맛이 일품인 비빔밥, 무엇보다도 짙은 밤색 빛 고사리를 선두로, 빨강, 파랑 하양 노랑 이렇게 가지각색의 고운 색상이 한데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어린 나의 입맛을 돋우고 거기다 고추장과 참기름은 고기의 특유한 냄새를 제거해 주니 좋았습니다.
 
어린 딸이 잘 먹는다고 그 바쁘신 와중에도 비빔밥을 자주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의 그 따스한 사랑의 손길이 그리워, 이 나이가 되어도 진달래 피기 시작하는 봄이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합니다.
 
내 기억에 소중한 비빔밥, 이 비빔밥은 우리나라 민속 음식으로서 다섯 가지 이상의 야채가 들어가고, 인체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함유하고 있다는 계란이며, 곡물에서 추출하는 생명 원이랄 수 있는 탄수화물, 거기다 단백질 원이 되는 소고기마저 곁들이면, 밥맛이 없는 노약자에게 더없이 훌륭한 영양식이며 건강한 사람에게도 별미로서 아주 좋은 음식입니다. 이 비빔밥을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1800년대 말엽의 '시의전서'로, 비빔밥을 "부븸밥"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하니 과연 그 비빔밥을 일컬어 가히 민족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비빔밥의 특징은 각종 음식의 혼합물이란 데 그 의미가 있고, 입맛을 돋우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각종 사이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입맛이 까탈스럽고 병든 성도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고, 어떻게 하든, 그 병들고 까탈스런 성도들의 입맛을 맞추어 주려는 시도로 부흥강사들이 이런저런 혼합된 이야기들을 말씀 속에 섞어서 양떼들에게 먹이기 시작 한 데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희극배우인지 목사님인지 알 수 없는 어릿광대 같은 부흥강사들의 섞어 복음을 맛있다고 넙죽넙죽 받아먹는 철없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자들이 너도나도 그들, 부흥강사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을 변질시켜 먹이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기도 중에 현대 기독교는 ‘비빔밥’같은 설교를 즐겨 듣고 전하는 것, 그 혼합된 비빔밥 같은 설교와 사상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신 22: 9 절),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 11절),”, 또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레 19:19절 말씀).”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이 가시적인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말씀하심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실제로 우리가 두 가지 재료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해석을 기초로 풀어야만 그 뜻이 정확해 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그 염려는 불가시적이며 영원한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9: 9절 참조)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밭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13, 막 4:3, 막 4; 26-27, 눅 8: 5-11절 참조) 한 밭에 두 가지 씨앗을 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진리는 단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다른 사상을 예수님의 말씀과 혼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옷도 두 가지 직조를 섞어 짠 것을 입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희어진 세마포 이외는 입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인간의 육이 먹어야 할 음식은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하기에, 여러 가지 음식을 섞으면 섞을수록 좋습니다. 다시 말해 육신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영양소가 혼합된 비빔빕이 건강에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만은 비빔밥 같은 사상이나, 교리를 섞어 혼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이 살 수 있는 음식은 단일 식품, 오직 성경말씀 신구약 66권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이 찌고 성장하려고 하면 단일식품이랄 수 있는 성경만을 그대로 풀어 먹여야하고 먹어야만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생명이며 구세주가 되심을 믿어야 하고, 바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십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시며 영원하신 영적존재이십니다.(마3:13-17;28:19;고후13:14) 그 성품으로서는 사랑이 풍부하시며 각 개인의 사사로운 일까지도 매우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는 자상하신 분이십니다.(마11:28;시50:15)
 
WCC의 종교혼합정책, 현대신학의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신학적인 경향, 뉴에이지운동, 에큐메니칼운동 등등…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비빔밥 같은 종교다원주의가 곳곳에서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실상 WCC와 종교다원주의, 이 사상가들의 시초는 힌두교 신학자들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의 神과 손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는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니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비빔밥은 나의 육신은 살릴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합된 영성은 나의 영혼을 죽이는 독극물입니다! 주께서는 밭에 두 가지 씨앗을 뿌리는 것을 금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절 말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잘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요즘 안티기독교인들이 세계적으로 급증, 영화, 책, 음악 등 각종 예술 속으로 파고들어 연약한 영혼들을 뒤흔들어 놓으려 하고 있다. 놀랍게도 지금 자칭 안티기독교도라고 명명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그들은 최근 '반기련'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란 단체를 결성했고, 자신의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 '아인슈타인'을 이용한 반기독교 문구의 현수막을 만들어 몇몇 버스에 부착시키고 서울 시내를 돌며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는 시도로 보이는 홍보활동을 벌임으로써, 이를 지켜보던 많은 지각 있는 이들, 일부 지성인들, 그리스도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현수막을 부착한지 며칠되지 않아, 그 현수막을 내리긴 했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헤프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반기련에 속한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 누리꾼들로 구성되었고 그들 중 대다수가 교회생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라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대다수가 교회생활에서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돌아선 사람들이기에, 교회의 교리를 모두 아는 듯 큰소리치며 ‘기독교교리 분석’이란 칼럼 글을 써서 인터넷 여기저기 올려놓긴 했지만, 정작,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그들이 내세운 기독교교리 분석이란, 얼마나 비성경 적이며, 그들이 깨달았다는 인생관, 지옥관, 구원관 등등… 얼마나 무지한가, 외곡되고 뒤틀린 지론을 진리인양 기염(焰)을 토하는 그 저속함에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들로서는 이번에도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것이, 최고 지성인이요, 천재 과학자라고 세상이 인정하는 ‘아인슈타인’을 이용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착각한 모양이지만,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종교관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도 확실히 알지 못한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낸 소치일 뿐 아무런 효과도 설득력도 기대할 수 없었고 아까운 돈만 낭비했을 것이라는 비웃음의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잠시 살펴보는 아인슈타인의 종교관:

얼마 전에, 약 50년 전의 아인슈타인의 편지,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이, 런던의 블룸스베리 경매소에서 경매에 붙여지는 일이 있었고, 그 내용으로 인해 크게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반기련에서 그 편지 내용의 일부만 보고 아인슈타인은 무신론(無神論)자라고 결론지었던 것 같다. 그러나 관련 기사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이 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긴 하나, 그는 종교에 대해 나름대로 긍정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아인슈타인의 발언을 근거 삼을 수 있다. 그는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으며 과학이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과 다름없다.." Phieippe Frank,Einstein:His Life and Time,p.285 에서 인용(바로 위의 글은 1940년에 과학,철학 그리고 종교에 관한 어느 회합을 위하여 준비한 글에서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밝힌 내용이다.)는 말을 남겼고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인슈타인은 젊어서는 과학자라는 입장에서 철저한 유물론자였던 것 같고, 무신론자이며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처럼, 다윈(Darwin, Charles Robert, 1809~1882)의 영향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탐구를 시작하여 물리적으로만 결론을 내고 싶어 한 것 역시 사실인 것 같다. 그가 주장했던 '상대성 이론'은 일부분 종교적 관점에서 시작했지만 그런 관점조차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으며, '시간은 신(神)이 아니라 물리적 이론에 의해 규정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 신(神)의 존재를 긍정했고, 자신의 주장 중 일부에 대해 회의심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사망했으며, 말년에 그의 심정이 급격히 변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죽음 앞에서 신(神)을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사건이라고 보겠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천재적 과학자라고 해도 약 50여 년 전에 쓴 그의 개인 편지 한 장만, 그것도 전체 문맥을 떠나, 어느 한 구절만 붙들고 단체의 구호로 삼아, 그것으로 세상을 미혹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 그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며, 이런 저급한 행위를 하는 단체를 가르쳐 진정한 지성인들의 단체라고 인정해 줄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혹세무민하는 자들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며, 이런 정도의 수준이 반기련의 정체라면, 우리 성도들은 그런 부류나 단체의 움직임은 별로 개의하거나 신경을 쓸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말세가 되면, 반드시, 적그리스도(anti Christ)가 출현할 것이란 예언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근래 일어나는 이런 사소한 일들은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그 서곡(序曲, overture)일 뿐, 그 실체는 아니란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예언에 관한 역대 설교자들의 관심:

현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역대 설교자들은 적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언제 도래하는가, 또한 이에 앞서 일어나는 '시대의 표징', 즉 자연의 대변혁, 전쟁, 전염병, 기근 및 다른 재앙에 대한 것은 어떤 것인가? 시대별로 따라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여러 재앙들을 향한 강렬한 관심이 지속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14, 15세기에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널리 경고했다. 종교개혁 기간에 종교개혁가들, 특히 마르틴 루터는 교황 개인을 공격하지 않고 교황제 자체를 적그리스도라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악이 교회의 우두머리에게서 구현되고 교황제도 자체를 '적그리스도의 몸'으로 본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적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최근 다시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거나 거절하는 것, 교회와 국가의 정치권력을 신격화하는 것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심도높게 평가하며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분명히, 적그리스도(anti Christ)란 단어와 그가 실제적으로 출현할 것을 성경이 예언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언되어진 적그리스도(Anti Christ)란?

기독교 종말론적 성구, 성경에 맨 먼저 나타난 듯한 적그리스도라는 명칭은 먼저 바울 서신서 중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저 불법의 사람'으로 암시되었다. 다음, 정확히 ‘적그리스도’란 명칭이 언급된 곳은 요1 2:18, 22, 요1 4:3, 요2서 7, )등 이며, 마지막 때에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미혹할 것임을 경고해 주고 있다. 사실, 더 오랜 구약성서 다니엘서에서도 적그리스도의 모형이 나타나고 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바울 서신 둘째 편지)나타난 것으로. 여기서 적그리스도는 표징과 기적을 행하는 유혹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려는 자로 묘사된다. 또 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는 자, 사주자로도 나타난다. 계시록에서는 666의 표를 가진 짐승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요한 서신에서 볼 수 있는 적그리스도(이단)의 특징:

첫째는 기독론에 관한 것.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1요12:22, 5:1참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1요 4:3, 15, 5:5참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1요4:2참조).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사도 요한의 반론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1요2:22, 5:1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요4:15, 5:5참조),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다고 하는 것이다(1요4:3, 요이1:7참조).

둘째는 죄와 구원론에 관한 것.
이단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강조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죄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등한히 여기도록 미혹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과 그 미혹에 넘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안다고 하면서도 어두움에 거하는 행동을 하였고, 형제를 미워한다(1요3:13-19, 4:20참조). 특히, 요일2:9절을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단들의 주장에 대해서 요한은 일관되게 계속적으로 말한다. 즉, 형제를 사랑하고 빛 가운데 살라는 것이다(1요2:7-11, 3:11, 4:7-21참조).

요한 서신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교훈은 기독교의 3대 핵심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앙, 사랑, 윤리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며, 윤리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윤리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은 곧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이요 잘못하는 것이다 주장한다. 이것은 비단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만을 구별해 주는 것만은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윤리적인 삶, 즉 빛의 자녀처럼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삶, 다시 말해서, 실천신학의 열매를 보아야 하며, 그 열매들이야말로 이단들과 우리(성도)를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이요, 바로미터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을 미혹의 길, 영벌의 길로 이끌고 갈, 진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서곡은 이미 울려퍼졌다! 거기에 동조하는 단체인 ‘반기련’같은 단체가 결성된 것은 심히 가슴아픈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까지 사악하게 된데는, 먼저 믿는 우리들의 책임이란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안티가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목회자들 자신이 말씀을 제대로 읽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안티들의 악성 댓글은 물론, 기독교계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으려는 악성 댓글들일지라도 성도들이 같은 악성 댓글로 맞대응하는 것은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 그들의 신음소리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의 고통으로 절규하시는 음성이며, 그분의 신음소리이기 때문이다.

양떼들이 흩어지고 양무리를 떠나 산으로, 들로, 이리의 발톱 아래로 떠돌아다니도록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들 속에 너와 내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교회 안에서의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이 세상을 미혹의 길로 이끌고 갈, 진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서곡(序曲, overture)을 듣고 술렁이기 이전,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이런 자세로 계속 나가다가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과연 그 주님 앞에서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우리는 그때가 오기 전, 저 흩어져서 울고 있는 양떼들의 울부짖는 소리, 고통하는 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너와 내가 좀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한다. 이것이 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소리인 것이다. 이미 울려퍼지고 있는, 안티 크라이스트(anti Christ), 그 서곡(序曲, overture),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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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며칠 전, 우연히, 한 사이트에 들어 가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 여류 칼럼니스트가 필자의 지난 칼럼 글을 허락도 없이 가져다 삽입시켜놓고 “신앙인의 아나키즘”이란 거창한 제목과 함께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송구영신 예배에 성경구절을 뽑아 바구니에 담아 놓고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집어 낸 그 말씀이 구약의 제비뽑기와 같은 형식이며, 그 제비뽑은 말씀을 일 년 동안 개인과 가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타당하다고 본다는 것이고, 그것을 ‘샤머니즘적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비본질적이며,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편협한 사고를 가진 자요, 지식적으로 많이 부족(?)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를 허는 자다라고까지 심하게 몰아부치는 그런 요지와 함께, 이런 태도가 바로 '신앙인의 아나키즘’, 곧 신앙의 무정부 상태’로 본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 칼럼니스트의 그 글이 적어도 그곳 사이트에서만은 최고 인기 뉴스로 급부상하는 영예(?)를 누리고 있었다. 어떤 마음에서 그런 터무니 없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큰 관심이건 작은 관심이건 관심을 준 것은 사랑이고, 그 받은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어 던지는 그 마음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앞에서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뒤에서 눈 흘기는 처사나 행동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가 아닌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글을 정리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주님 앞과 독자들 앞에서 밝히며 확실히 해 두고 싶다.

다른 이의 말이나 글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은 창의적이랄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대개 상처가 많다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기에(꼭 그 칼럼니스트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임), 그런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먼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옳지 않은 말이나 폄훼하는 글은 염두에 둘 가치조차 없기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오늘 아침 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다. 비본질을 본질인양 말하는 것은 뒤로하고라도 우선 복음을 뒤틀어 억지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 뿐 아니라 그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도 문제를 안겨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 주시기를 바라고, 이것을 기회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 지표, 잣대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내 신앙이 올바르게 잘 세워지고 정립되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1. 말씀 제비뽑기는 신 구약 그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분이 제비뽑기에 비유하면서 증거로 든 성구들은 꽤 많았다. 아래 그분의 글을 잠시 인용해 보면(그분이 먼저 시도했으니, 이해하실 듯…^^),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속죄 제물 결정등(아사셀 염소 결정: 레16:7-10) 이스라엘의 민족적 중대사를 판결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아 제비 뽑기의 도구란 해석이 유력시 되고있다. 제비 뽑기는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 가나안 땅 분배시 모세에게 명하신 것으로 (민26:52-56; 수14:2)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업의 분배 방식이었으며, 전쟁등 국가의 대위기시 (삿1:1-3; 20:27), 범인을 찾을 때(수7:14; 삼상14:41- 42; 욘1:7), 사무엘이 사울왕을 뽑을 때등 특별 인물 선출이나 레위지파의 직분 배치시(대상24:5), 신약시대엔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 맛디아를 선출시(행1:26) 행해졌다. 가나안 땅 분배시 땅의 크기는 인구비례제로 정해졌으나 그 위치는 제비뽑기로 결정(민26:52-56)하게 하신 것은 특정 지파에 특혜를 주는 것을 막고, 각 지파의 기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특성등을 고려하여 당신의 주권에 의해 나누어주는 것임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분쟁이나 시비없이 감사함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또 다윗이 아론의 자손의 두 가문에게 성소의 직임을 맡길때 제비 뽑기로 결정한 것은 각 가문의 수(數)에 관계없이 성소의 직임만큼은 동등한 입장에서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역상24:5). 그러면 제비뽑기의 근본 정신은 무엇인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는 말씀이 나타내듯 제비 뽑기는 그 결과를 온전히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돌리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이 제비 뽑기는 고대 근동의 여러 국가들에게서도 행해졌던 것인데 그들의 제비뽑기 정신은 운명에 맡긴다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의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위의 성구들이 나타내고 증거하듯, 구약의 제비뽑기는 대개 인간 관계에서 다툼이나 분쟁이 없도록 하기 위한 구약 법, 그러니까, 이미 받은 하나님의 말씀중 한 법이란 것이다. 이런 구약적 법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 와서는 그 모든 구약 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뿐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히 9:10-11절 참조) 구약의 모든 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몸으로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은 예외가 없이 주께서 택하신 선지자들의 입으로 친히 말씀하셨다.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받는 것을 제비뽑기 한 흔적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신약시대는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들 속에 임재하셔서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가르치신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절 말씀).” 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비뽑기 형식으로 받는 것은 미신적 행위일 뿐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로채는 월권 행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신앙인(信仰人)에게 아나키즘(Anarchism)이란 있을 수 없다.

아나키즘(Anarchism)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무정부’란 뜻이다. 그리고 그 칼럼니스트도 분명히 그런 뜻을 알고 그 단어를 취사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고 답은 ‘No, 아니다!’이다. 신앙인(信仰人)이란 a believer(or believers)로서, 물론, 여러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하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를 신앙(信仰)하는 사람이란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라면 ‘아나키즘’은 분명히 잘못 선택된 단어이다. 신앙인(信仰人), 신앙생활에 ‘무정부’란 있을 수 없고, 그 단어야말로 성경과는 무관한, 극히 인본주의적 단어 선택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내어놓는다 하여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그 글이 신앙 글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기억하고 염두에 두고 선별 사용해야 하는 용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text인 성경을 근거한 용어들로 기도 중에 신중히 선택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 한마디에 우리의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 달렸고, 인본주의가 인간존재의 가치를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두려는 이념이므로 이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관심을 떼어 놓으려는 사단의 전략일 뿐임을 간과할 수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의 인본주의는 모든 철학 이념 종교 사상 등을 인간 잠재력 개발의 도구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기에, 이런 인본주의에 깊이 물들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맞춰져야 할 우리 눈의 초점(focus)이 오히려 인간의 성공, 자기존중에 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성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에서는 신앙인, 신앙생활, 곧 영적 세계에 있어서 ‘아나키즘(Anarchism)이란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에는 ‘사각지대’마저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이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으로 사고하고 다른 이, 곧 그리스도의 그 흘리신 고귀한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신바 된 한 형제.자매들의 글을 자세히 읽고 소화시키기 이전에, 그 글을 부정적으로 몰아가는데만 급급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요,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글을 쓰건 설교를 하건 주님의 말씀이 가는 데까지만 가고 주님의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는 반드시 멈추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지식 자랑이나, 인기를 위해, 혹은 다른 이를 치기 위해, 말씀을 준비하거나 말씀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끌어다 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그런 것은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그런 인본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가 없을 것이다.

3. 신앙생활, 영의 세계에는 빛과 어두움의 세력, 두 정부가 있을 뿐이다!

신앙생활에는 빛에 속한 빛의 자녀(살전 5:5절 말씀)던지, 아니면 어둠에 속한 어둠의 자식(엡 5:8절)이 있을 뿐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에 영의 세계도 단일정부,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단이 이 세상 어둠의 주관자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엡 6:12절 말씀).”

우리는 빛의 자녀요, 그리스도께 속한 영적 군대들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가? 다른 형제 자매를 시기하여 끌어내리려는 마음을 버리고 온전한 믿음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함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하고 승리하는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 8-9절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믿는 믿음과 형제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여야 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극히 세상적이며 짧은 지식을 가지고 형제 치기를 계속한다면 어찌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라 하겠는가?

이런 사람은, 마치,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지 못하는 정신 나간 군인과 같다고 보겠다. 군인이라면, 마땅히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여, 손에 들려진 총칼로 아군은 옹호하고 적군을 향해 맹공격을 퍼부어야 하는데, 오히려 뒤돌아서서 아군을 향하여 총칼을 겨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런 사람이 군인이라면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영적 전투장에서도 매한가지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과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치열한 영적 전투장에서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도가 나가야 할 길은 넓고 안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며 치열한 전투장임을 기억할 때, 나는 때때로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즈’를 떠올리며 도전을 받는다.

1519년 스페인의 ‘코르테즈’ 장군은 멕시코 정복의 꿈을 안고 열한 척의 배에 700명의 병사들을 태웠다. 이렇게 적은 수로 멕시코를 정복한다는 것은 보통 각오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코르테즈’ 장군은 비장한 각오로 멕시코의 베라쿠르즈 항구에 도착했다. ‘코르테즈’는 자신의 군대가 너무 적고, 모든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이 많은 멕시코 인들은 상대로 싸워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이 전투는 무모한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병사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코르테즈’장군은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타고 온 배 열한 척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자 이제 우리는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해야 한다. 우리는 되돌아 갈 수 없다.” 칠백 명의 병사들은 생각했다. ‘더 이상 우리는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이기는 것뿐이다. 지면 죽는다. 승리가 생명이다.’ 병사들의 눈에는 불이 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었다. 그들의 싸움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출발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을 누가 당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에는 사각지대 없고, ‘아나키즘(Anarchism)’상태란 더더욱 없다. 이런 영적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분별하게 되면, 결코 형제를 시기 질투하거나, 그 형제. 자매 끌어내리기 작전으로 헛된 소모전을 벌이고 아까운 시간과 힘을 분산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힘을 합쳐 구령 사업에 박차를 가해야 할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이 형제.자매 치기에만 급급하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르켜 과연 빛의 자녀라 말 할 수 있겠으며, 그리스도의 군사라 말 할 수 있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비록 순간적이었다 할지라도 그 순간만은 어둠의 세력자 사단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이고(마 16:22-23절 참조), 사단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아무런 유익 없고, 우리 주님 편에서 보면 큰 손실이기에 속히 돌이켜 회개해야 된다.

고로 말세지말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는 이 악한 시대에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늘 깨어서 기도하며 자기 자신 속에, 인본주의적 사고나 육신의 생각들이 숨어 있는가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를 것은 잘라내고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빛의 갑옷으로 재무장 해야 한다. 우리 성도가 자신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굳게 믿는 믿음 뿐이며, 또한 신앙생활의 길에서 적과 아군을 잘 분별하여 적은 힘써 대적하고, 형제. 자매이면, 그가 비록 나와는 약간 다른 견해가 있드라도 그것이 말씀에서 증명하는 일이면 서로 격려해 주고 내 몸같이 서로 사랑하며 주님의 깃발 아래 굳게 뭉치는 것 뿐이다. 그런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최후 승리를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절 말씀).”"저가(예수 그리스도)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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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송구영신 예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질문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래 서 목사님의 말씀에 힘을 받아 질문 드려봅니다. 송구영신 예배도 세시풍속의 또 다른 이름이란 생각이 스쳐서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기울인 노력을 헛되게 하는 것이란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지난 칼럼 글 아래 어느 독자가 남긴 질문이다. 참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필자가 보고 느낀 점도 있고 하여 함께 송구영신예배의 그 허와 실을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에,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무리없이 이해되고 나누어졌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정리해 본다.

부정적 견해:

송구영신(送舊迎新)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다른 나라의 성도들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여지고 있는 특이한 현상인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처음 시작은 글자 그대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그 시간을 주님께 드리자는 좋은 취지로 생겼을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상혼, 그동안 무속신앙에 젖어 살던 우리 민족들이기에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교묘한 악의 축이 교회 안에서도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해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뽑기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강대상 앞에 바구니를 놓고 그 안에 긍정적이고 축복된 성구들만을 성경에서 골라 뽑아 담아 놓는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나서, 모든 성도들을 한 사람씩 강대상 앞으로 나오게 하여, 바구니 속에 들어있는 성구들 중 한 개를 집어 내도록 권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 성도가 집은 그 성구가 곧 그 해 그 성도와 그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새해가 되면 그해의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돈이 있는 자들은 유명한 점술가들, 혹은 유명한 절을 찾아 액을 물리치는 굿도 하고, 비싼 부적을 사서 1년이면 12달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있는 점술가들을 찾기도 한다. 그들은 그해의 운수를 적어놓은 글귀들을 바구니에 담아놓고, 잘 훈련된 새 한마리가 나와 그 사람의 운수가 담긴 글귀를 물어다 준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해 그 사람의 운수를 가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샤머니즘 신앙에 찌든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어느 머리 좋은 인쇄소에서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교회에서 그런 사악한 무속신앙을 그대로 흡수, 접목하여 송구영신 예배 시간에 버젓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속 신앙의 최고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성도는 날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레마'로 들어야지 제비뽑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어떤 교회는 마지막 주일에 신년감사헌금 봉투를 두 개씩 나누어 준다고 한다. 하나는 신년 첫 주에 드리는 헌금봉투이고 다른 하나는 송구영신예배 때 드리는 헌금봉투란 것이다. 그러면서 송구영신 때에 드리는 헌금봉투에는 기도제목을 적어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 년 동안 담임목사가 개인적으로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첨부한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담임 목사가 기도를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인지….

이런 경우 교회를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이용하는 무당 신앙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크고, 이런 기회를 '수입'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역시 기독교의 무속화를 부채질하는 부작용이 일어나 성경적 개혁신앙이 설 자리가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악한 행위를 교회에서 감행하는 한, 주님께서는 결코 그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 앞에서 시간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질 뿐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 2절 말씀).” 이런 세계관으로 온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의 왕으로 즉위하셨고 통치하시며 다스리신 지가 이미 2009년이나 지나갔다. 이렇게 주님께서 친히 인간을 다스리시기 위해 오신 해(AD= Anno Domini)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부터 영원의 연속이다. 성도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혼합종교 풍토다. 주님의 교회가 더 이상 이런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내가 잘 사는 ‘넓은 길'보다는 내가 조금 어렵고 힘이 들어도 십자가의 길 "좁은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견해:

예배란 어떤 예배던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마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마음이면 모두 아름답다. 절기에 얽매이거나 억지로 드리는 마음이 아니라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답다고 본다. 우리가 어떤 마음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요 4:24절 참조).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경'하여 드림으로 '시간 중심'의 송구영신, ‘절기중심’의 송구영신, ‘기복사상 중심’의 송구영신 보다는 '주님 중심'의 송구영신, 즉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영접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것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옛 것이란 단순하지만 불변의 진리인 성경적 가르침에(고후 5: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한 간점선에서, 뒤돌아보며, 지난 한해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또 앞으로 나가야할 다른 한해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묵은 해의 마지막 끝자락과 새로 맞는 한해의 새벽 미명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드려진다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다운 것이다. 예배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드려지면 좋고, 그것이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면, 더 많이 드리면 더 많이 드릴수록 더 좋다.

일 년이면 열두 달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오직, 내 가족,내 육신을 위하여만 사용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 기뻐하시는 주님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일 예배를 드리면 더욱 좋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우리다. 어느 특별한 날자, 어느 중요한 한 시간을 따로 떼내어 그날만이라도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구속의 은총에 감사를 드리는 예배 시간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은 또 절기에 얽매이는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자체를 부정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지난 날, 잘못 살아온 내 삶을 성찰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남은 여생을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 갈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각오와 연약한 나를 주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서원하는 마음이라면, 송구영신 예배,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 같다는 것이,성경 말씀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 1-2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나게 하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들어나게 하시리라(사3: 16-17).”

“어머나 어떡해, 난 몰라, 몰라!!!”
둘째 언니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린다. 모처럼 맞은 공휴일, 아침식사를 막 끝내고 느긋한 마음으로 방바닥에 배를 착 깔고 엎드려 신나게 동화책을 읽고 있던 나는 평소 늘 조용하기만 하던 둘째 언니답지 않은 호들갑에 의아해 하며 읽던 책을 덮어놓고 멀뚱하게 바라보자니, 언니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에 할머니들처럼 흰 수건을 둥둥 두른 채, 흡사 사냥꾼에게 좇기고 있는 토끼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얘, 너 빨리 밖에 나가, 그분을 안채로 모시고 들어가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해라, 응? 어서 나가봐, 어서!!!” 거의 울상이 되어 애원한다. “그분이라니?”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언니가 하도 애원을 하니, 마지못한 듯,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내다보던 나는 그만 화들짝 놀랐고,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우리 둘째 언니의 약혼자가 그 허여멀쑥 잘생긴 얼굴에 겸연쩍은 웃음을 띠고 미안한 듯 두 손을 맞잡고 서성거리며 서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어린 나도 언니가 왜 그렇게 자지러지게 놀라 소리를 질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당시 우리 둘째 언니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미인이었다. 그런 둘째 언니가 그 전해 가을에 약혼했고, 그 약혼자는 안심된 듯, 미국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있어야 할 그가 소식도 없이 갑자기 우리 대문 안에 들어섰고, 때마침 둘째 언니는 잠옷만 걸친 채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당에서 머리를 감던 중이었으니, 그 당혹감이 얼마나 컸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모습,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약혼 한 처녀의 마음이었을 텐데…흐트러질 때로 흐트러진 상태에서,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사랑하는 이를 맞이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을 것 같다. 그 짓궂은 분이 바로 지금은 머리가 하얗게 센 내 둘째 형부 시다.

남자분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갑자기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처녀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최대한의 고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청년들이여, 내가 단언하건대, 처녀들이란 모두 그런 마음일 것이다. 단정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모습만을 그대에게 보여 드리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런 처녀들의 마음을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처녀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주님께서는 신랑인 내가 도적같이 올 테니까, 처녀 성도들은 깨어 준비하고 신랑 되신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5:1-13절 참조).

처녀들이 지녀야 할 덕목:

순결과 정절을 지키고 정결함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여기에서 정결(cleanness)과 순결( purity, pure)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정결은 깨끗함을 의미하고 순결은 처음부터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적으로 성도의 정결함(cleanness)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가능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그 피로 깨끗게 하여 주셨기에 모두 정결(cleanness)하다고 보겠다. 그러나 순결(purity, pure)은 자기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정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때까지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 19-20절).”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 15절 말씀).”

처녀들이 기억해야 할 말세적 예언(이사야 편):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약 700-750여 년 전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 년 전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현 세대를 사는 우리네 여인들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초상화를 그리듯이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게 잘 묘사했는지, 정말 기막힌 일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준 참된 선지자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교만한 여인들과 늘인 목(사 3: 16절상):

이것은 현대 여인들의 사고와 옷차림을 의미한다. 말세적 시대의 여인들은 교만하여 늘인 목으로 다닌다고 했다. 과연 그 말대로, 요즘 여인들은 목을 더 많이 늘이기 위해 목 주위를 깊게 파다 못해 아예 가슴과 등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젊은 여인들은 배꼽티라고 하는 거의 위험수위가 노출될 정도로 깊게 팬 옷들을 걸치고도 부끄럼 없이 거리를 활보한다. 그렇다. 요즘 세대의 여인들처럼 당당하다 못해 교만한 여인 천하는 일찍이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부장 제도였다. 가장이 그 집의 주인이요, 지배자란 뜻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남자 아닌 여자나 아이들은 숫자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를 보면, 우리 부모의 세대처럼 한 가정의 남편이 주인처럼 지배하며 군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오히려 안주인이 된 아내들이 남편들 위에서 군림(?) 하는 느낌이다.

또 필자가 어릴 적만 해도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런 소리 하다가는 오히려 큰일 난다고 한다. 요즘 시대는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하지 않는 남편은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심하면 쫓겨(?)난다 고하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 가정에서 호주로 존경받으며 대우받던 남편들이 이제는 아내에게 쫓겨날까 전전긍긍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여인들이 그렇게까지 교만해지고 말았는가? 그것은 바로 말세 적 예언의 성취시대가 도래했다는 증거다.

2. 아기죽 거려 행하며 발로 쟁쟁한 소리를 내는 신발 신은 여인들(사 3: 16절하):

필자는 아주 어릴 적에 고무신이란 것을 신어본 기억이 있다. 우리 부모님들도 고무신을 신었고, 그 이전의 분들은 짚신을 신었다 했고, 또 그 이전의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무엇을 신었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거나 이사야 선지자가 본 환상적 여인들처럼 아기죽거리며 걸을 수 있는 신발을 신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걷는 여인을 묘사할 때는 어떻게 묘사하는가? “삽뿐, 삽뿐 걷는다” 이다.

요즘 현대 거리에서 삽뿐 삽뿐 걸어 다니는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없다. 그런 여인들은 이미 구세대, 전설 속의 여인들로 멀어져 갔을 뿐이다. 지금은 “여인들이 아기죽 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며 걷는 시대다. 반드시 말세가 되어야만 신게 예언되어 있는 여인들의 신발, 쟁쟁 소리를 내며 아기죽 아기죽 걸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신발의 이름은? 그것은 바로 ‘하이힐’이다! 이 하이힐이란 굽이 뾰족하고 높은 신발로써, 모든 여인들 뿐 아니라, 필자에게도 사랑받는 신발이다.

이 신발만 신으면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커보여서 좋고, 키가 큰 사람은 큰 키가 더욱 늘씬하게 뻗어보여서 또 좋다. 여인들이 착 달라붙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오리처럼 아기죽 아기죽 걷는 모습, 그야말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나게 해 주어서 입가에 쓴 웃음이 돈다. 그뿐인가?. 하이힐 뒤꿈치에는 징이라고 하던가? 뾰족한 쇠붙이가 달려서 아스팔트 위를 걸을 때마다 “딱딱딱, 쟁쟁쟁.”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난다. 재밌지 않은가? “아기죽 아기죽, 딱딱딱, 쟁쟁쟁….” 2,700여 년 전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을 여러분과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3. 정을 통하는 눈은 재론할 여지도 없을 것 같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 내가 어릴 때 배운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나 하고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 같다. 남녀칠세자동석이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이다.

처녀들이 기억해야 할 말세적 예언 성취 시대(다니엘 편):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 4절).” 여기를 보자. 다니엘은 말세의 징조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1.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2. 지식이 더할 것이라 하고 예언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시대만큼 사람들이 빨리 왕래한 적은 아마 없는 것 같다.

바로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상도에서, 한성,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까지 가려면 적어도 석 달 열흘(3개월 10일)이 걸렸다고 한다. 필자가 어릴적만 해도 부산에서 서울 가는 완행열차를 타면 밤새도록 달려야 그 이튿날 아침 늦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가? 비행기만 타면, 부산서 서울 가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다. 어제 서울에 있던 사람이 오늘 뉴욕에 있을 수 있고, 오늘 미국에 있는 사람이 내일 한국에 있을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이 놀랍도록 빨리 왕래하는 시대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말세에는 “지식이 더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지니고 있던 지식 외에 그 어떤 다른 신지식이 더해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식 위에 더해진 그 지식이야말로 바로, 지금 이 컴퓨터 시대를 가르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 하나면 전 세계의 정보를 한눈에 읽을 수 있고, 현대 컴퓨터 공학이야말로, 인간의 지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을 창출해 낸 것이다.

처녀들이 기다리는 신랑은 언제 어떻게 오시는가?
1.    아버지만 아신다(마 24: 36, 42-43, 행 1: 6-7절),  2. 생각지 않은 때 오신다(눅 12:40절), 3. 밤에 도적 같이 오신다(살전 5:2절), 4. 번개가 동에서 번쩍하여 서편에 이름 같이 오신다(마 24: 27절). 5.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와 함께 오신다( 마 16: 27절).

그가 오실 때의 세상 형편은 어떠한가?
1. 노아의 때와 같이 자기 일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 2.안전하다 평안하다 (자기 안일 상태)(살전 5: 3절), 3. 거짓 선지자가 미혹하고 표적과 기사로 미혹함(마 24: 24절), 4. 곳곳에 전쟁이 터지고(천재지변).

이단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a) 재림의 긴박성을 지나치게 부추기기 위해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마 24:36, 42-43절 참조) b) 주의 재림은 없다고 가르친다. “먼저 이것을 알 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3-4절 말씀)”.

이런 때에, 우리 처녀들(성도들)은 순결을 지키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기름준비 잘 하고, 자신을 지켜 정결하며 매일 매 순간을 순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삶을 살다가 신랑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을 때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1-24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피그말리온'(Pygmalion)효과란 말이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이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의 이름입니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백옥 같은 상아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만들어 세워두고 그 조각을 진짜 여인처럼 늘 쓰다듬어 주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아꼈더니 어느 날, 그 조각이
진짜 여인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스티그마(Stigma)효과란 말도 있습니다.
오명, 낙인, 치욕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말대로 모든 사물과 정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접근하면
결과도 기대치 이하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이지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부정에서 긍정을
창출해 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것은
그녀가 나중에 어떠한 여인으로 변화 받게 될 것,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쏟아붓고 눈물로 그 발을 닦으며
주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믿음의 여인으로 성화 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또 배신자 베드로에게 당신의 고귀한 생명과 맞바꾼
당신의 어린 양떼들을 맡길 수 있다고 믿어주셨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 11: 1)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진정한 교육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를 심어주려 노력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물며, 믿음의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뜻밖에, 믿음의 말,
'피그말리온'효과를 전달하는 긍정적 말에는
매우 인색한 것을 알 수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조차
믿음의 말, '피그말리온' 효과를 전달하는 긍정적 말보다
오히려 '스티그마' 효과를 일으키는 부정적 언사들을 남용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말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라도, 내 사랑하는 아내, 남편,
내 가족, 직장 동료, 내 이웃, 나와 함게하는 믿음의 공동체,
피곤한 사역자들, 피곤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말을 사용하십시다.

믿음의 말도 사랑처럼 활용할수록 배가됩니다.
다른 이를 향해, 나 자신을 향해,
먼저 믿음의 말, '피그말리온' 효과를 내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십시다.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지식으로 알고 있던 '피그말리온' 효과라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돌 같이 딱딱하고 완고한 자신의 마음이 먼저 부드러워지고,
곧이어 믿음의 사람, 긍정적인 사람으로, 나도 변하고,
내 이웃도 변하여 가고 있음을 깨닫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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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 18-19절 말씀)”

신약 교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두 가지 의식(예식)이 있다. 그것은 첫째: 성만찬 의식(Communion Service), 둘째: 침례(세례)식이다. 침례식도 세례식도 각 교파에 따라 다른 것을 취하 듯, 성만찬 의식 역시 각 교파마다 다른 견해를 주장한다. 우리는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을 따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성령님께서 각자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는 은혜대로 선택하면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성만찬 예식에 대해서 함께 생각할 때,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우리들 사이에 크게 나타나 아무런 오해도 없이 모두 깨닫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성만찬식(Communion Service)의 유례:
 
성만찬식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흘리신 피를 기념하며 그 피를 믿고 죄 씻음 받는 신앙고백 행위이며 유례는, 출12: 1- 30절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마지막 밤,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장자를 치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과 그 무서운 재앙의 밤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 안에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다. 과연 그날 밤, 그 약속을 믿고 그대로 순종한 사람은 머리 털 하나 상치 아니했지만, 그 말씀을 알지 못했거나 설사 안다고 하여도 믿지 않거나 순종치 않은 사람의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재앙의 천사가 지나갈 때 애굽 땅에서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쳐서 죽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희생된 어린 양은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었고 오신 메시야는 그 예표 된 대로 십자가 위에서 찢기고 상하셨다. 아무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우리 마음속에 뿌리운 자는 더 이상 죽음이 왕 노릇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심을 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성만찬의 유례다.

1. 성만찬 식의 기원과 그 중요성:

성만찬 식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막 14:22-26, 눅 22: 14-20, 등)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떡과 잔을 가지시고 축사하신 후, 성찬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다. 그때부터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찬 예식을 거행해 왔다. 성찬예식의 중요성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느냐,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느냐, 다시 말해, 사느냐 죽느냐의 중대사가 달렸다고 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 53-56절 말씀)”

2. 성만찬이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특별 의미:

a. 속박으로부터의 구속을 가리킨다. (Redemption, 눅 22:20절 참조.)
b. 한 몸과 한 피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쳬의식을 강조한다. (Unity, 고전 10: 16-17, 고전 12: 13절 참조.)
c.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 신앙이 내포되어 있다. ( Anticipation, 눅 22: 16- 18절 참조.)

3. 성만찬 예식(의식)에 따른 몇 교파의 견해 요약:

화체설 = 로마 캐톨릭: 성만찬식에 마시는 포도주와 먹는 떡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함

성체 공재설 = 루터 교회:떡과 포도주가 물질적인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은 아니나 보이지 않는 형태로 실제적 임한다고 함.

신비적 임재설 = 칼빈(칼뱅) 교회, 일부 감리교회 일부 장로교회의 견해 일부 장로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신비적으로 특별한 방법(특별한 은혜)로 임한다고 함.

칼빈의 성만찬은 쯔빙글리의 기념적 행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means of grace)이었다. 칼빈은 루터의 공재론처럼 성만찬에서의 주님의 사실적 임재론을 피하고 있다. 그는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하다"고 피력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성만찬에 실제적으로(really), 그리고 전적으로(fully) 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찬을 행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여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러한 신학이 영적 임재설로서 오늘에 이른다.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만찬의 임재론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기념 혹은 상징설 = 침례교, 일부 장로교회: 단순히 기념하고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나 살이 마술적인 어떤 방법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함.

어떤 사람이 성만찬 (의식)예식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인가?

자격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때, 대단히 까다로운 것 같다. 고전 11: 23절에 보면 자격 없는 자가 분별없이 먹고 마셨기 때문에 그중에 많은 사람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이 말씀을 잘못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선행에다 그 기준을 두고 있음을 본다. 자기의 생활이 깨끗지 못한 사람들, 죄가 있는 사람들은 성찬 예식에 참예하지 말라고 권하는 목사님들도 계시고 또 그런 권면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이 깨끗지 못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히 성만찬 식에 참예할 자격이 없다하여, 스스로 성찬식을 거절하는 사례도 자주 보아 왔다. 잘못된 가르침이 주는 엄청난 오류라 하겠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자격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구하려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몸을 찢기고 상하신 것 또한 죄인을 위해서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 13절 말씀)”

필자가 어릴 때 길리움 받은 교단은 아주 엄격한 교단이었다. 우리 교회서는 성만찬 예식이 있기 전에 목사님께서 늘 광고를 하셨다. “곧 성만찬 예식이 있을 텐데 성만찬 예식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깨끗이 지켜 정결케 한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니 자기를 살펴 깨끗치 못한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를 하던지, 아니면, 자기 앞에 잔이 올 때 그 잔을 받지 말도록 하라.”고 친절(?)한 안내까지 해 주셨다. 이것은 칼빈(칼뱅)주의에서 비롯된 것인데, 칼빈(칼뱅)은 성찬식 준비 기간은 "각 사람이 성찬식을 가치 있게, 그리고 성찬식을 합당한 경건함으로 받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전 주일에 선포했다. 어린이들과 외부인들은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상당한 자기 검사와 자기 성찰 후에 성찬식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성찰적 경건은 개혁파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말씀을 읽으며 성령님의 조명하에 깨달은 말씀은 그것과는 약간 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잔에 참예 하려면 “상당한 자기 검사와 성찰” 후에,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가 성만찬 식에 참예할 자격자가” 아니란 것이다.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 또 내가 얼마나 많은 의를 행했는가? 하는 것에 성찬식에 참예할 수 있고 없고의 기준을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죄가 많으면 많을 수록 더욱 주님의 피와 살이 필요하고 그 공로로 깨끗하게 될 수 있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런 마음의 자세야말로 주님이 기뻐 흠향하시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속죄하는 능력이 우리 주님의 피와 살에 있음을 믿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겸손한 마음,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은 주님의 피와 살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하는 결단의 마음으로 그 잔과 떡에 참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필자는 개혁 신학과 개혁 교회와 무관하지 않기에, 칼빈의 신학을 지지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꼭 같아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성경은 성만찬 예식에 참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자기 성찰후 깨끗한 삶을 사는 의인이기에 참예한다는 의인 의식보다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눈물로 그 앞에 나가는 용서 받은 죄인,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인 의식이어야 그 피와 잔을 기념하는 예식에 참예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의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광명한 하나님의 빛 앞에서 부끄러울 것 뿐, 주 앞에 내세울 수 없다. (욥 25: 4-6, 롬 3: 10-18, 23절 참조.)

2. 침례나 세례를 받은 성도이다.

각 교단별로 교리가 약간씩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자격을 세례교인 혹은 침례교인으로 한정 시키는 것은 모든 교회가 대부분 일치를 보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회중 앞에서 그 입으로 신앙 고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절 말씀)”

아무 흠도 없고 죄 하나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흘리신 그 피를 의지하는 마음, 주님이 구주 되심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성도라면 자기의 부족함을 빌미로 성찬예식에 참예하기를 거부하기보다는 더욱 열심히 성찬예식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은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복된 성도가 될 것을 권하고 싶다.
 

뉴욕 아멘넷 칼럼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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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삶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면서
나를 ‘주’라고 불러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존 비비어의 ‘순종’중에서-

황해도 출신 김익두는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런 그가 우여곡절 끝에 여자 선교사의 전도함을 받아,
회심하고 변화 받은 후, 바깥출입을 일절 하지 않고
두문불출했습니다. 궁금해진 옛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은 김익두에게 늘 하던 대로,
같이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김익두는 "아니야, 나 지금 약 먹기 때문에
술 못 마셔.", "그래, 무슨 약을 먹는데?"
"응, 나 지금 신약과 구약을 먹고 있다네."하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회심하고 난 후, 10달째 되던 날,
세례를 받을 때쯤, 그는 벌써 성경 100독을 뗐다고 합니다.
한 달에 신구약 10독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그가 나중에 목사가 되었고,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큰 능력의 종이 되었습니다.
김익두, 천추만대에 길이 칭송받을 부흥사,
"예수 천당”을 외치며 살다,
끝내 사악한 공산당의 손에 잡혀 처형당했습니다.

깡패였던 김익두, 그가 영광스런 순교자의 반열,
하나님 앞에서 최대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고, 거짓 회심을 하고,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 읽기 100독은 커녕, 하루에 단 한 줄도 읽기 싫고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다고 하여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변화를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심지않는 데서 거두시는 하나님,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기행각만큼이나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봅니다.

그저 쉽게 능력을 받고, 능력 있어 보이는 강사들,
그들의 몇 마디 달변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하늘로서
비같이 쏟아져 내릴 것이라 착각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김익두 목사님의 실천신학은 좋은 교훈이며, 큰 도전이 됩니다.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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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에 하나님의 교회 존속[存續], 존재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는 기현상이 각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물론, 이런 기현상들은 기업화된 대형교회들이나 사명감을 저버린 일부 황당한 목사님들에게 그 책임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성교회를 벗어나야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기성교회는 아예 구원이 없는 것 같은 속임수이건만, 표면적으로는 사역자들의 비리에 항거하는 거센 목소리, 진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목소리인 것처럼 미화시켜 내어 놓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말에 현혹된 성도가 교회를 멀리하고 집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이단이나 다른 사이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 갑니다. 구원 받는 백성이 줄어 들고 교회를 찾는 발걸음이 사라지게 하려면, 하나님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리고 교회를 불신하게 만드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 중 하나임을 성도들이 인지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는 통계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근(語根):
교회(敎會)란 히브리어로는 큐리아코스(kuriakos = 주에게 속하는),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 라틴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이며, ‘불러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청받은 무리, 성령의 부르심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대관식에 참예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의 모임이란 뜻이 있습니다. ‘카할’은 구약에서 회중,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하며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에서 구약교회를 ‘광야 교회(congregation)', 그곳에 모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행7: 38절).

교회(敎會)의 구분:
1. 민족적으로, 첫째, 예루살렘 교회인 초대교회, 둘째, 이방인 교회입니다. 이방 세계의 각 나라, 각 족속, 각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를 총칭할 수 있습니다 .

2. 영적으로, 첫째, 개인 교회(고전 3:16절), 둘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말할 수 있는데,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다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보이는(가시적인)교회: 보이는 교회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말하며, 성경은 이 교회를 가르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골1: 18절),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 28절, 벧전 1: 17-19잘), 또는 거룩한 무리(히 13: 12절, 벧전 1:2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비가시적인 교회: 이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로써, 주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계 21:장 전장 참조). 지역과 인종과 역사를 초월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모여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성도를 총칭합니다.

3. 교회를 영적으로도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입니다. 둘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무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입니다.

땅 위에 교회(敎會)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후 특별히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 지상에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를 세우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1.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눅19: 10절).
2.하나님께 경배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엡1: 4-6절).
3.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창 되게 하기 위함( 마 28: 19-20).
4.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 요 6: 49절).
5.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함(엡 3: 9-11, 3: 20-21, 5: 9).

교회를 저주해서 안 되는 이유:
a.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 18절, 엡5: 23절 참조).”

b.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지역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성도는 마땅히 주신바 탈란트 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15절 말씀).

c. 성경은 혼자 예배드려도 은혜받을 수 있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면 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 24-25절).”

d.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깨어지면 안됩니다. “두세 사람이(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20절 말씀).”

e. 성도는 믿음 안에서 친교(코이노니아)해야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친교란 영어로 fellowship,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koinonia)입니다. 여기에는 물건을 함께 쓴다의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초대 교회는 물건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행2: 44, 4: 32절 참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요소라면 다음은 회원 간의 친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 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롬 12: 5, 고전 12: 27절 참조)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 되어진 성도들임을 깨닫는다면, 결코 '혼자만 정결하다, 방에서 혼자 계속 예배드려도 된다' 라고 주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f. 보이는 성전,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거룩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 내 집(가시적 교회)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막 11: 7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적 교회 성전 건물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가시적인 교회(보이는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클레시아, 즉 하나님의 대관식에 초청받은 무리는 보이는 교회를 거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회(천국)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교회를 섬기는 직분 자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망령된 행실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부정한 것이지 하나님 교회, 공동체 모두가 부정하거나 타락한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들, 마땅히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할 사역자들이 그렇지 못하고 타락한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은 주님께서 친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삼상 1장이하에 나오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엘리 제사장이 그 좋은 예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주님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어 주었을 때 한나는 놀랍게도 그 축복 빎을 받은 대로 이듬해에 그렇게도 소원하던 아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최고 영도자였던 사무엘이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종 엘리는 부족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낯을 구한 자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응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축복권이 하나님께만 있고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친히 징계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 하여 엘리 제사장이 신령한 자도 아니지만, 그의 악행이 회개없이 덮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비방하거나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도가 한데 모여 말씀의 떡을 떼며 구속의 은총을 찬양하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열심히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더 이상 우리 주님의 몸을 찢지 마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너와 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신 그때 그 모진 고통 한 번만으로도 족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고전 11: 22절 상)”“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28절 하 참조).”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 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 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복음성가 245장 1절)

아멘넷 별똥별 칼럼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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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동시에 청지기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군들입니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습니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군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청지기 의식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청지기에 대해서 같이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청지기(steward)의 뜻:
청지기 직분이란 주인의 재산이나 가옥을 일시적으로 위임받아 주인의 뜻을 따라 보관하고 관리하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의 것을(이익, 불이익) 돌려 드리는 것이다.

2.구약에 나타난 청지기 직분
많이 있지만, 시간 관계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의 아내 될 신부를 구하고자 먼 나라로 보낸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신뢰받는 청지기이다. (창24:2-3)

3.청지기의 의식주
그 소유주가 전적 책임이며 주인의 집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

4. 청지기의 사역
때를 따라 양식(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먼저, 청지기들은 삶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해야 합니다.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인쳐 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사역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음, 청지기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팔아먹어서도 안 될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힘을 합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합쳐야 하며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그분만이 우리들의 주인 되심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주님만이 자기 종들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청지기 된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 되고, 어떤 특정 교회에 국한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받아 지느냐? 아니면 성령님의 은혜로 깨달아 지느냐? 두 갈래로 나누이게 됩니다. 사실, 영적인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깨닫을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시는 영역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성령님의 몫(하나님의 고유 권한)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중 누군가가 잘못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주인께서 심판하실 날이 멀지않았으니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로서 아룀이 좋으며 내 영혼에 거울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책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아카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똑바로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될 때, 비본질 적인 것을 본질인양 가르치기도 하고, 자신의 뜻을 섞어서 가르치기도 하고 약한 자들을 질책하기도 하므로, 오히려 본질을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22:11-12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각 사람(everyone)에 주의를 기우려 주십시오. (Individuality)입니다.!! 상급도 개인적이요, 벌도 개인적입니다! 다른이들의 비행 때문에 내 영혼에 상처가 되거나 내 영혼이 병들거나 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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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면, 잔치가 대연(大宴) 이건 소연(小宴)이건 한 가지 통일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청하는 데는 그만큼 기쁜 일이 그 집에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이 결혼한다든지, 사랑하는 가족 중에서 생일을 맞아도 기뻐서 잔치를 베풉니다. 회갑연이나 돌잔치가 그런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거나 잔치를 배설하는 집에서 볼 때, 잔치란 기쁨의 극치를 표하는 것이요, 즐거운 날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부인네들은 그 하루를 위해서 몇 날 며칠동안 밤을 지새우면서 온갖 정성을 들여서 각종 맛있는 음식도 만들고 예쁘게 집 안팍을 치장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정든 이웃과 지인들을 초청합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바쁜 일, 슬픈 일, 언짢은 일들을 모두 잠시 뒤로 접어두고 힘들지만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이 잔치에 참석하여 그집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양 웃어주기도 하고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마시며 함께 즐거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은 잔치를 베푼 사람을 즐겁게 해 주려고 가는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해서 그 집사람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듯, 즐거워도 해주고 축하도 해주고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도 저절로 같이 즐겁고 함께 기쁜 마음이 생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꼭 좀 와 주십시오 하고 초청장을 드렸건만 시간이 되어도 무슨 일인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얼굴도 내밀지를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참 많이 섭섭할 것입니다. 초청과 그 집의 명예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이 고통의 역사(십자가)를 끝내고 황금의 시대를 여시고 큰 잔치를 배설하실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은 그동안 수고하고 눈물 흘린 당신의 종들에게 상을 주시고 영원한 기쁨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대연의 자리,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 되심을 천하 만국 백성이 그 입술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날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비웃고 조롱하던 간악한 무리가 우리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통쾌한 날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통쾌하고 기분 좋은 날, 이 기쁜 날을 위해서 주님은 모든 준비를 다 완료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피로 준비된 목욕물, 예복, 화려한 궁궐, 수종을 들 천군 천사, 모든 준비는 완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초청장도 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하나 같이 모두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면서 차갑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1.“내가 밭을 샀는데 가 보아야 겠으니 참석하지 못하겠다.”
2.“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야 하니
    참석치 못하겠다.”
3.“내가 내 아내를 맞이 했으니 가지 못하겠다.”

잔치에 참석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얼핏 들으면 모두 제각기 다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가지입니다. “내 기쁨이 충만한데 당신의 기쁨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너의 잔치가 내게 무슨 소용인가?”하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중심적이요, 초청한 자를 무시할 때만 가능한 태도입니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고통도 그분의 사랑도 너무 가볍게 받아 드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잔치에 모실 손님들을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 음식을 장만해 놓았는데, 막상 잔칫날, 그 음식을 먹고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섭섭할 것입니까? 조금 잠을 자지 못한 수고를 했을 뿐임에도 그것이 애석하고 분해서 두 번 다시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며 이를 갈기도 하고 분해서 방방 뛰기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 주님의 수고는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채찍질 당하고 얼굴에 침 뱉음 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갈갈이 찢기셨습니다. 가시로 만든 치욕의 면류관이 짓누르며 살 속 깊이 파고  들었지만, 한 마디 말도 없이 주님은 그 고통을 묵묵히 참아 내셔야만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대연(大宴), 혼인 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업을 해야 하고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베푸실 잔치자리에 나아갈 권리를 던져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면서까지 그곳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주여, 내가 무엇이라 말씀하오리까? 기도하며 몸부림치는 내게, 성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잔치 준비는 모두 끝났다고 알려라!!" 성도라고 하면, 마25장의 열 처녀 비유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자격임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 같아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준비하지 않은 그 다섯 처녀의 가는 길과 준비를 잘한 다섯 처녀의 가는 길은 엄연히 다르다고 하는 것, 영원한 형벌이냐, 영원한 기쁨의 혼인 잔치 자리냐, 선택과 결단만 남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의 혼인 잔치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완료되었음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라고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이, 경고의 나팔 소리 되어 크게 들려지는 복된 귀, 열려진 영의 귀들이 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알렸고, 여러분은 들으셨습니다.  듣지 못해 준비하지 못했다,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중략,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 15-, 23-24절 말씀)”  



뉴욕아멘넷, 별똥별의 신앙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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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몽(恩夢)

허몽(虛夢), 헛된 꿈, 환몽(幻夢), 허황(虛荒)한 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꿈에 해당되는 꿈이라고 하겠다.) 다음은, 실몽實夢, 사실(事實)과 부합(符合)하는 꿈이 있으며, 또 영몽(靈夢)이란 것도 있습니다. 꿈도 이렇게 다양한 상태로 鈞霞?보아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꿈, 그러면 다음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1. 프로이트식 반응, 2. 영몽(靈夢) 반응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아직까지는 위 두 가지 반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번,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칼 융이 꿈에 대한 정의를 학술화 한 것으로써, 꿈이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생각들, 그러니까 무의식의 한 측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번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뇌 속에 이상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으로써, 구약 성경에 보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극단적 프로이트 지지파가 있는가하면 극단적 영몽(靈夢)지지파가 있습니다. 저는 무엇이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꿈이 다 프로이트식의 꿈이라고 고집한다면, 성경을 부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꿈이 다 주님께서 뇌 속에 이상으로 부어 넣어 주시는 영몽(靈夢)도 아닙니다. 어떤 꿈은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생각이 꿈으로 나타날 수 있고, 어떤 꿈(극히 드물게)은 주께서 인간의 뇌 속에 이상으로 넣어 주시는 꿈도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균형잡힌 신앙자세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 중에, 허몽(개꿈)도 환몽도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넣어 준 이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믿기도 하고 그 꿈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꿈에도 이런 여러 가지 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꿈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독자님들 자신의 자유입니다. 다만, 저로서는, 주께서 제게 베푸신 은총으로 주신 꿈, 은몽(恩夢)이며, 전도에 열심을 다 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야 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어느 바닷가였어요,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지요…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보석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그 보석 상자 안에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진주 등, 값비싼 장신구들이 가득히 들어 있었어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요…, 나는 그중에서 제일 싼 것을 하나 (14k gold로 된 금귀고리 같았음, 왜 나는 그때 그 많고 좋은 보석 중에서 제일 값진 것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지를 못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집어서 그곳에 있던 어느 중년부인에게 건네주면서 예수님을 소개했어요, 그제야, 그 여인은 만족해하면서 고국에 (한국에서 온 여행객 같았음) 가면 “당신이 전하는 예수를 믿어보겠다."라고 대답을 했지요.

내게서 보석을 받은 여인만 약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외에는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던지 그들에게 전도해 보려고 애쓰고 있던 중, 갑자기 저쪽 하늘에서 구름이 변하는가 싶더니 하얗고 아름다운 말 세 마리가 그 구름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처음에는 그 말들이 구름이 변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것뿐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하늘을 나는 그 말들이 너무나 힘차고 멋있게 보였기 때문에 “여러분, 저 하늘을 보세요! 우리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저렇게 하실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처음에 구름이 변화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하늘 말들이 힘차게 바람을 가르면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중에 한마리가 나를 향해서 돌진해 온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새, 나는 그 말 밑에 드리워진 줄을 잡고 바다 위를 나르고 있었어요.  그 순간 나는 지금 예수님께로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자연히 알아지더군요. 어릴 때부터 사랑한 나의 예수님, 그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이, 목회 길이요, 여자는 자신이 목사가 되기보다는 목사를 내조하는 사모가 되면 더 효과적으로 주의 일을 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대로 목사 후보생인 가난한 전도사와 결혼했고 사모가 되어서 성도들을 섬기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긴 지가 삼십여 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소리없이 삼켜야만 했던지요….

어느 목사님이 지은 책의 제목이던가요.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 말이 바로 내 말이라고 공감하면서 또 펑, 펑, 울었던 기억들…교회를 깨고 싶어 안달하는 사탄의 전략인지조차 모르고, 이 영적 전쟁에서 힘을 합쳐서 구령사업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방해작전을 하고만 있는 일부 사역자님들의 반목과 불화들…, 또 사탄에게 속고 사탄의 하수인 된 철없는 양떼들의 비방, 모함, 오해 등, 온갖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도 “행여나 가라지 뽑다가 알곡 뽑힐까 조심하라"고 하신 내 주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흔한 전화 한 번 해서 따져주지 못한 사모 생활…, 개척교회 배고픈 시절의 그때, 그 서러움….

“주님, 너무나 피곤해요. 이제 그만 넉넉하오니 제 생명을 거두어 가 주세요…” 그 옛날, 로뎀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처름 억지를 쓰면서 울던 때가 그 얼마던가…, 기도할 때마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성령의 음성으로 달래어 주시며 위로해 주시던 나의 주님, 나를 태운 하늘 말이 바다 위를 나르는 동안 잔잔한 기쁨과 뜨거운 환희의 만감이 나를 감아 교체하는데… 아, 이제야 나는 내 주님 앞에 가는구나…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예수님의 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얼굴은 직접 뵙지를 못하였다지… 하지만, 나는 이번에 예수님께 가면 꼭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와야지…. 저 멀리 건너편 언덕에 하얀 세마포를 입으신 예수님이 천군 천사들과 함께 큰 바위 위에 앉아계신 것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그 하늘 말은 나를 예수님 앞에 사뿐히 내려놓았지요. 꼭 예수님 얼굴을 뵙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것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 앞에 도착한 나는 그만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에 넙죽히 엎드려 경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하, 창조주 하나님 앞에 오면 고개를 들 수가 없으니 아무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겠구나…” 혼자서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네가 세상에서 내 이름으로 참고 게으르지 아니한 그 모든 수고와 흘린 눈물과 충성을 내가 보았고 또 알고 있단다. 그러나 말세를 사는 내 백성이 한가지 경계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빠지기 쉬운 죄로서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이란다. 이것은 너도 한 때 빠졌던 죄들로서, 이런 모든 죄가 더 이상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나는 이런 것들을 아주 싫어한단다(갈라디아서5:26)." “주님, 제게도 그런 마음이 있나요? 정말로 죄송해요. 앞으로 그런 죄까지라도 삼갈 수 있게 저를 도와주세요.”  대답하는 순간, 갑자기 흰 옷을 입으신 내 주님이 내가 엎드린 맞은 편에서 같이 엎드리시더니 심하게 오열을 하시면서 통곡을 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너무나 놀랍고 민망해진 내가 “예수님, 예수님, 어쩐 일이세요?”하고 물었어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을 참고 견디며 내 목숨을 내어 놓았고, 그 피의 대가로 너희들에게 천국으로 오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제 내가 곧 다시 세상에 갈 때가 임박하였는데, 세상에 있는 내 백성이 전도는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리사욕과 시기, 질투, 분쟁만 일삼고 있구나."라고 대답을 하시면서 통곡을 하셨어요. (예수님과 제가 한 대화의 형식은 입술의 언어가 아니고 성령으로서 서로 말없이 깨달아 알아지는 영적 대화였음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나는 “주님, 주님, 제가 세상에 다시 가면 꼭 전도하고 또 전도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게요…” 예수님의 그 말씀에 마음이 너무나도 아파진 나는 엉, 엉,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예수님과 함께 통곡을 했어요. 한참을 그렇게 오열하시며 통곡을 하시던 예수님께서 내가 올리는 말에 만족 하신 듯...,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셔서 천사들과 함께 저쪽 편으로 가시는 것이었어요.

그제야 간신히 고개를 들고 예수님을 바라보니, 흰 세마포를 입으신 예수님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시면서 나에게 잘 가라고 하시는 듯 손을 살짝 흔들어 주시는 것이었어요. 그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을 멀리서나마 바라 뵈면서 나는 또 “우리 예수님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우신가?’ 라고 하는 방정맞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드는 즉시 천사 중의 하나가 “ 너는 어찌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남자 여자에 대한 세상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느냐?”하고 책망을 했어요. 그 천사의 책망을 듣고 부끄러워진 나는 예수님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을 때, 예수님은 괞찮다고 하시는 듯 나를 향해서 인자하게 웃고 계셨어요. 그때 어느새 내 손은 나를 데리고 왔던 그 하늘 말의 밑에 달린 줄을 잡고 있었고, 그 하늘 말은 다시 바다 위를 날아서 이편 바닷가에 내려 놓고는 하늘 저편으로 날아 가 버렸습니다.

바다를 건너 이편에 오니까, 그곳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그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치며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아무도 내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를 않았고 나는 그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 하면서 가슴이 찢어지 듯 심하게 오열을 하고 통곡을 하다가 번쩍 눈을 떠 보니 꿈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이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도 성령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 드리며, 우리 다 같이 전도에 열심을 다 했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왕상3:14- 15절 상),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단2: 28절 하)”

후기:
이 이야기는, 오래 전에 저희가 섬기는 교회에서 두 주간의 휴가를 보내어 주어, 미국 N.C 에서 사업을 하는 여동생네 집에 들렀다가 “언니, 목회하시느라고 피곤하셨을 텐데  옥돌로 된 침대에서 몸 좀 풀고 가세요."하고 내어 준 따뜻한 옥돌 침대 위에 누웠더니 잠시 여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그냥 잠을 자기는 죄송하고 하여, 옥돌 침대 위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던 중, 깜박 꿈이라기보다는 비몽사몽 간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선명한 사실임을 하나님 앞에서 말씀드립니다.

아멘넷에 올린 칼럼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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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넘지 말라

다음은 필자가 지난 번에 올린 글 아래, 댓글로 단 어느 형제님의 질문을 요약한 것이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 맞지요? 그러면 지금 세상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침묵으로 기도로만 임하라고 하시는 건지요.(물론, 필자는 글 속에서 말하는 뜻, 그 이상을 넘어선 생각으로 쓴 것은 아니다) 글을 쓰신 이유가  지금 아멘넷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논쟁들도 한몫을 했으리라 사료 됩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데 그러려니, 낙태가 아무 제재 없이 이뤄지는데 그러려니, 동성애가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만연하려고 하는데 그러려니, 죽은 자를 그리워하며 인본주의자들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려 하는데 그러려니 하는 것은 믿는 사람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요? 아시겠지만 요즘 너무나도 물탄 복음이 난무하고 사람들을 의식하는 형제.자매가 많아서 걱정이 돼서 올렸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침묵으로 기도로만 임하라고 하시는 건지요?라는 요지였다. 아마도 많은 독자분이 같은 질문을 심중에 품고 있을 것이란 것과, 그 문제를 놓고 함께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성도는 불의에 항거하되 성경이 말씀하는 곳까지만 가야 하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고전 13: 6 절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거기에 보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의를 보고 침묵하면 안된다. 불의는 반드시 항거해야 한다. 정부에 대한 잘못, 권력 남용에 대한 지적, 필요하다. 그러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던, 다른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을 한 번 찾아보자.  “너는 저희(성도)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므로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디도서3:1-2절 말씀)”, 또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는 심판을 자취 하리라 (로마서 13: 1-2)”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1. 권세는 하나님께로 났다. 2. 성도는 권세 자에게 복종하고 굴복해야 한다. 3.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통령이 잘못 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된 우리가 대언의 영이신 성령님을 힘입고 담대하게 ‘진리가 무엇인지, 불의가 무엇인지, 낙태가 왜 안되는지, 동성연애가 왜 옳지 않은지’, 똑바로 그에게 전하되 목소리 높여 큰 소리로 전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서는 행동으로 과격하게 시위를 한다거나, 다투거나 거역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고 외친 후, 그래도 듣지 않을 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기도로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간구 해야만 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아멘넷의 댓글 논쟁이나, 우리 조국 교회의 지도자, 그리고 성도들의 열띤 논쟁은 그 도를 넘어 다툼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도가 성도로서의 할 도리, 그 이상을 넘어서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서론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성도는 불의에 항거하고 진리를 밝히는 메세지를 전해야만 하고 서로 떡을 떼는 마음으로 말씀을 풀어 강론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그것으로 끝을 내어야 함에도, 끝까지 자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런 태도는 결국, 하나님 자리에 자기가 앉으려는 태도로써 성도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고 했음에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태도일 뿐,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해야할 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 구분하라는 것이다. 니느웨 성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선지자의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까지 바라고 원망을 하던 요나에게 주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교리가 다르면 그것은 순교까지 각오를 하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워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아군과 적군을 분별해야 한다. 아군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고, 적군이란 공중 권세잡은 자에 속한 자들로써, 세상에 속했거나, 다른 교리를 전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 받고 한 형제 자매가 된 것을 말씀으로 검증하고 확인되면, 그 다음에 서로간에 약간 견해차가 있다고 해도, 교리, 구원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고, 삼위일체 교리가 분명함)같고 천국과 지옥론이 분명하면 지위의 높고 낮음, 빈부의 귀천,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두 아군이요, 한 피로 맺어진 형제요 자매다. 서로 돕고 서로 감싸주며 서로 세워주어야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우리 부모님은 그 자녀들이 다툴 때, 마음 아파 하신다.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도 그러하건데, 하물며 온전하신 그분의 사랑,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랑으로 너와 나를 사셨는데,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더 아프시겠는가....우리는 말씀의 떡을 떼며 강론을 하되, 도(道)를 넘지는 말자.

먼저 분별의 은사를 사용하되 말씀으로 비추어서 확인한 후에, 확실히 해야 한다. 한 번 그렇게 믿었으면, 설령, 자신의 견해와 약간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하여도, 이단이 아닌 이상, 다투거나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부분이 변질된 사람은 입으로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해도 그 양심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아니며, 계속 그대로 간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절제된 한계는 말씀에 의한 성경66권, 즉 말씀에 의한 분별까지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형제를 정죄하기 앞서, 묵묵히 참으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뢰고 그분의 얼굴을 구해야 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되심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양보하고 져 주어라.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 1-3절 말씀)


"My confession in the Cross"/ The true

I've been the first to point fingers, to bring up someone
else's fault to light, and to argue for changes. I was
hoping and convinced this was how I would make
our faith better and do a service to our Lord. This
was my way of justice.

나는 처음에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끄집어 내어,
빛으로 들고 나오기도 했으며,
변화를 위해 다투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을 잘 섬기는 길이요
우리의 믿음을 보다 성숙게 만드는 길이라
확신했고 소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 방식의 의로움이었습니다.

Then, I came to realize that I was pointing fingers to
myself exposing my own faults. I saw myself on the
very person who I was pointing fingers at.

다음에,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 자신의 잘못들을 드러내며
지적하는 손가락들이 있음을...

나는 보았습니다.
내가 손가락질하며 지적했던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Then, I saw our Lord still weeping in the Cross after
all this time while I was claiming being on the true
side. I saw it was I keeping Him up there.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내가 진리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던 내내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여전히 눈물 흘리고 계셔야 했음을. ...

나는 보았습니다, 내가 남을 정죄하는 그것들이
우리 주님을 십자가 위에 계속 매달아 놓는 것임을.

Then, I realized that the silent suffering of Him in the
Cross for someone else's sins was and is His way of doing justice.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하여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것이 의로움을 위한 그분의 방법이란 것을....

번역/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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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데스바네아'의 비밀

`가데스'란 「거룩한」 또는 「성별된」이라는 뜻이며, 팔레스틴에는 `가데스' 또는 `게데스'라는 이름의 도시가 많습니다. `바네아'란 이 가데스를 다른 많은 가데스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일 것이라고도 하며, '바네아'란 말의 뜻은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 '가데스바네아'는 바란 광야에 있는 한 오아시스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진을 치고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까지는 불과 3일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하신 땅으로 곧바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왜 '가데스바네아'에 머무르게 하셔야만 했던가?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크게 낙심하거나 좌절하여 넘어질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데스바네아'는 현실과 믿음 사이에 결단을 요구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민수기 13장, 32: 8절 참조)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 바란 광야의 '가데스바네아'에 진을 쳤고, 거기서 모세는 각 지파에 한 명씩 12명을 선출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오라고 보내었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12 정탐꾼들의 보고는 대단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포도 송이가 얼마나 컸던지, 포도 한 송이를 장대에 꿰어 장정 둘이서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민13: 23절).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풍요로운 땅을 보고 돌아온 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이 본 가나안 땅은 풍요롭고 기름진 땅임에는 분명했지만, 그곳에는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장대한 거인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니까,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마치 메뚜기같이 작아 보였다고 성경(민13: 33절 참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자신들이 탐지하고 돌아온 아름다운 땅을 오히려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했습니다(13: 32-33절 참조). 그것이 그들이 육신의 안목으로 바라보게 된 현실의 실체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힘과 힘으로 대결해서 그 땅을 빼앗아야만 한다면, 당연히 몸집이 더 큰 사람의 힘이 더 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현실만 바라본다면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가데스 바네아’입니다. ‘가데스바네아’ ‘하나님의 성소’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열명의 정탐꾼들은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현실 위에 계시면서 현실을 주도하고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대신, 현실만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은 '믿음의 역군이었다' 라는 빛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자리에서 탈락, 육신의 사람이요, 실패자란 이름으로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고 만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서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이나 메마른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다 죽어가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된 이유는 가나안 정탐 사십일 동안, 불신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사십년 동안 메마른 광야를 헤매고 다녀야만 했습니다(민14: 33-34절 참조). 이것이 가데스바네아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거나 인생을 살아 나갈 때, 영적인 광야의 '가데스바네아'를 만날 때가 많습니다. 현실을 바라볼 것이냐, 아니면 현실 위에 계시면서 현실을 주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냐?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 신앙은 결단입니다!!

굳이 신앙생활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여정 길에는 결단을 요구하는 곳이 군데군데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최근 우리나라에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싯점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저 안타깝고 참담한 마음으로 유족과 국가를 위해서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분 나름대로 힘겹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던 것이고, 그 문제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메뚜기 자화상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떠난 사람을 애도하는 마음이야 크지만, 애도하는 마음을 넘어서 자살한 사람을 너무 영웅화 시키지 말아야 할 것은, 청소년들의 모방 자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여정 길은 늘 평탄한 곳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험준한 굴곡의 길, 눈물의 길, 가시밭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는 길에,  바싹 메마른 광야를 만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철통같은 여리고 성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이 답답할 때도 있고, 때로는 넘실거리는 홍해가 앞을 가로 막는 것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편안하다 안전하다 가르치는 자들은 모두 거짓 교사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자고 꼬드기는 번영신학에 물든 거짓 교사들을 삼가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다 불 시험, 물 시험, 사자 굴같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성도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수 많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로 다져진 터 위에서 신앙생활의 바톤을 이어 받아 뛰고 있는 주자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안전한 포구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거듭되는 난제에 난제를 만나서 끙끙거리기도 하고, 심한 태풍을 거스르며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눈동자처럼 사랑하며 아끼시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가데스바네아'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환경으로 이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대한 아낙 자손같은 문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현실만 바라보고, 메뚜기 자화상이나 그리고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는 현실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홍해도 건너고, 요단 강도 건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풀무 불과 같은 시련도 만나고, 다니엘처럼 금방이라도 굶주린 사자의 이빨에 찢겨 죽을 것만 같은 절박함도 통과해야 합니다. 그 후에 주께서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약1:12절 참조).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하여 주저 앉을 것이냐, 현실 위에 계시는 그분의 얼굴을 구할 것이냐?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 이것이 곧 '가데스바네아'의 비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 1-3절 상반절 말씀).”



아멘넷 칼럼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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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그랑~댕그랑~” 주일학교 준비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어느 작은 마을에 눈이 똥그랗고 귀엽게 생긴 한 천진한 소녀가 일곱 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동네에서, 교회에서, 존경받는 부모님 아래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매 주일 아침이면, 해맑은 아침 햇살이 소녀의 방 창 틈새로 사르르 내려앉는 이른 새벽...., 부엌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가 만드시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소녀의 작은 코끝을 간질거리며 살금살금 파고듭니다.

“으-흠, 으-흠.” 교회에 가는 시간이 늦을세라 늦잠을 자는 아이들을 깨우시는 신호탄으로…, 사그락사그락 앞마당을 쓸고 계신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점점 잦아지시고…. 어느새 눈을 떴는지, 소녀의 오빠는 방에 뛰어 들어와 소녀가 덮은 이불을 확! 끌어당기며 소녀의 가녀린 등줄기를 간질여대며 키드득거립니다.

“으잉~ 더 잘 거양!” 화가 난 척 투덜대며 소녀는 휙! 돌아눕지만…, 잠은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행복을 머금은 어린 소녀의 두 눈은 별처럼 초롱초롱 빛이 납니다.

결코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정에서 사랑을 먹으며 마냥 행복했던 그 소녀는 이다음에 자라서 어느 작은 개척교회의 사모가 되었고.... 가정에서 먹고 자란 사랑과 주일 학교에서 배운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자가 되어 오늘도 더 많은 약한 자들을 섬기면서 우는 자들을 부둥켜 안고 같이 울며 한없는 눈물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 소녀의 지금 이름은 송연사모라고 불리우고 있네요. ㅋㅋ

어느 책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더군요. 돈이 있으면 침대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잠은 살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화려한 옷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과 인격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호화로운 주택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사랑이 있는 가정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세상에 있는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느냐고 질책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정합니다. 사실, 저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부모는 다 자기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잘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키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 있는 모든 자녀가 다 그 부모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훌륭하게 잘되어 주는 것은 또 아니란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지위와 돈이 엄청 많은 한 가정을 압니다. 그런 집의 아이들은 모두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돈은 많았지만, 그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던지, 아버지 어머니는 밖에서 사시다시피했습니다. 갖난 아기였을 적에는 어머니 대신에 유모가 젖을 먹였고, 조금 자라서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음식을 해 주는대로 먹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자라는 아들에게 미안해서였던지, 그 아버지는 아들이 달라고 하는 대로 액수에는 상관하지 않고 돈을 주었습니다. 늘 혼자 외로웠던 그는 같은 환경에 있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마약에 손을 대었고, 친구에게도 마약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둘은 친해졌고 아버지가 얼마든지 주시는 돈으로 손쉽게 마약을 구해서 즐겼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마약환자도 중독이 될 때까지는 아무도 눈치를 챌 수가 없나봅니다. 결국 그 아이는 나중에 정신 착란증세를 보였고, 그제서야 눈치를 챈 부모들이 모든 일을 다 제쳐놓고 그 아이를 구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늑嗤륫?이미 때는 늦어서 그 아이는 요양원에 보내어 졌고,  증세가 조금 호전되면  집으로 데리고 나와보지만, 또 다시 같은 증세를 보이고, 이렇게 들어갔다 나왔다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조건 돈으로 기르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병든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은 요람 속에 있을 때부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관이 비뚤어져 있으면,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많은 교육을 시킨다고 해도 그 자녀를 제대로 길렀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22: 6절)”고 권면하십니다. 여기에서 마땅히 행할 길이란 바로 올바른 가치관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어느 책에서 북한의 김일성의 성장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김일성의 할아버지는 교회의 장로님이었고, 그 어머니는 집사였다고 합니다. 어린 김일성이가 학교에 갔다와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엄마, 하나님이 정말 있는 것 맞아요?”하고 물었답니다. 그때 “하나님이 살아있기는 뭐가 있냐? 할아버지가 교회에 다니라고 하도 잔소리하시니까 나가는 거이지.”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답니다. 물론, 저는 이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그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이 그 아들의 신에 대한 가치관으로 고정되었을 가능성은 크고, 그런 어머니의 잘못된 가치관이 아들을 희대의 악마로 길러내는 씨앗이 되었다고 해도 결코 무리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미국에서 우상처럼 존경받는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가정은 글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독실한 신자였기에, 어릴 때부터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나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천사같은 내 어머니가 나를 신앙가로 양육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굳이 물질이 많아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걸림돌이 될 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물질로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영(Spirit)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짐승들처럼 단지 먹고 사는 것, 그것 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영과 육이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교육, 그것을 우리는 전인교육이라 부르고…. 그러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나눌줄 아는 가정,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가정, 그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가정 안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이 있는 가정이야말로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는 최상의 학교요, 진실로 부요한 가정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났고 “(잠언15:16),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났느니라.(잠언15:17)"


글/최송연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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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에 와서 예언자나 선견자는 성서적으로 볼 때 성도에게 붙일 수 있는 합당한 호칭이 아니라고 봅니다. 선견자(先見者, Seer, 로에라, 하지), 선지자( 나비)는 모두 비슷한 역활로써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해주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신약시대에 와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구약시대의 선견자(先見者, Seer) ... 선지자들과 같은 개념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선견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선견 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우리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딤전3:15절 참조)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들의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말씀이 주는 깊은 뜻을 깨닫게도 해 주시고 개인에게 레마로 친히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성도가 특별한 사명 자로서, 굳이 따로이 이름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바이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바이더(Provider), 사전적 의미로는 ‘공급자, 준비자’ 그런 뜻입니다. 가족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는 사람, 가족의 모든 생계, 미래를 책임지고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활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세상보다 한걸음 앞서 가는 사람이요, 주님의 말씀으로 미래에 닥칠 재앙을 대비해 착실히 준비하는 '프로바이더'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서 예측할 수도 없어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  어린 아이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대재앙, 지구 종말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바로 선견자적 사명을 가진 프로바이더들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먼저 듣고 먼저 아는 우리가 종말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만 하는가 하는 그 방법론도 확실히 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備無患(유비무환) 사전에 준비를 잘 하면 뒤에 근심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열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를 기록한 글입니다.   그가 고종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處善人 動惟厥時).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矜其能 喪厥功). 오직 모든 일에는 다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惟事事乃其有備 有備無患).”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을 위강에게 보냈습니다. 위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편안히 지낼 때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하며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이다(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則無患).”(위키백과사전 참조)

현대 과학자들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주범으로 ‘지구 온난화’를 듭니다. 지구 온난화(地球溫暖化, global warming) 또는 온난화(溫暖化)는 지표 부근의 대기와 바다의 평균 온도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입니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기후변화위원회가 참조한 기후모델에서는 1990년에서 2100년 사이에 1.1 ~ 6.4 ℃의 온도 상승이 예측되었다고 합니다.

지구 표면의 온도상승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강수량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켜,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빙하의 후퇴와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등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앞으로 얼마 만큼의 온난화가 진행되며 지역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온실 가스에 대처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였다고 합니다. (위키백과사전 참조)

이 모든 것은 2,0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신 것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지난 9.11테러 사건이나, 동남아 일대를 강타한 무서운 해일, 중국의 지진피해, 요즘은 멕시코의 돼지인풀루엔자까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신종바이러스의 공격도 있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곤경을 당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종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살다가도 이런 재앙을 만날 때만이라도 종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는 이미 제대로 된 ‘ 프로바이더’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바른 인식

종말에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한부 종말론, 즉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절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언제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바이더들의 맹활약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9.11테러나 지난번 해일과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사람들이 다 대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는 숨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가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지옥과 종말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들이 잘 못하는 것입니다. 인기를 위해서 시시한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받는 박수갈채는 한때뿐이고 그분의 진노는 영원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날자와 시간은 알 수없다.” 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그 틈을 노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로부터 영적테러를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무장되어야만 합니다.

종말이 꼭 세상 종말만 종말이 아니지요, 개인적인 종말, 죽음도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날과 그때는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종말이나, 지구 종말의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징조들을 보거든 대비하라고 하십니다. 지구의 종말도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 준비 잘 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바로 '굿 프로바이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먼저 아는 우리들이 “Good Provider”가 되어야만 하고, 다른 이에게도  ‘Good Provider’가 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 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6-8)”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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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드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 날것 뿐인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적이다

중국 북경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도록 지시한 폭군, 진시황제(秦始皇帝) 는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불로초(不老草), 불사초(不死草), 그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해오라고 3,000명의 동남 동녀를 배에 태워서 해동국(海東國) 으로 보내었으나 제주도까지 내려갔지만 그런 것을 구할 수 없었던 그들은 영영히 돌아가지 않았다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불로초와 불사초가 있다면, 그것을 구해서 먹지 않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고 하면 거북이며, 지렁이며, 달팽이며, 심지어 산에 독사도 남아나지를 않는다고 할 정도이니, 늙지 않고 죽지 않게 하는 풀이 있다면 아마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것을 구해다 먹으려고 욕심낼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불로초도 불사초도 불사약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음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이다. 과학자들과 의사들도 인류의 적인 죽음과 맞서 보려고 세기를 걸쳐 온갖 노력을 다 해보지만, 과학도 의술도 아직까지는 인간의 죽음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영원히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죽음은 피하고 싶은 원수, 인류의 적이며,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에, 인류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 죽음의 공포를 물리쳐 보려고 시도하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현대 과학은 이제 인간의 유전자(DNA)를 연구하므로써 늙지 않게 하고 죽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나…글쎄, 더 두고 볼일이다.

사후 세계(Beyond Life)에 대한 인류의 관심

지난 번, 성지순례 기간에 이집트 관광의 최대로 꼽을 수 있고 이집트인의 긍지로 삼는 거대한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안내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나는 우선 그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피라밋은 고대 파라호, 그러니까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집트의 파라호들이 자신의 무덤을 저렇게 큰 피라밋으로 만든 것은, 그들 또한 내세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쓰던 물건들, 침대며 집기며, 집채만큼 큰 유람선하며, 심지어는 자기가 부리던 신하들, 아름다운 동녀들까지 죽여서 같이 묻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파라호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거대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스핑크스는 왕들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도 한다. 스핑크스를 쌓아 올린 재로는 흔한 일반 돌이 아니고 천연 화강암이었다. 그 정교함과 웅장함은 대단했다. 나는 오래전에 북경의 만리장성을 보고 그 규모에 놀란 적이 있는데, 피라밋을 보니, 만리장성은 피라밋과 스핑크스와는 비교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피라밋은 대개 화강암으로 쌓여 졌는데 돌 하나가 작은 것은 1.5톤에서 2톤, 보통은 3-4톤, 큰 것은 20-30톤까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4500년 전에 이렇게 엄청난 무게의 돌들을 어떻게 저렇게 높이, 그리고 빈틈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일까?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아직 철기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때에, 도대체 어떤 연장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까지 정교하게 다듬어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규모다. 이렇게 자신의 무덤을 피라밋으로 쌓고, 그 앞에는 거대한 수호신까지 세워두었다는 것은 그들, 고대의 왕들은 죽음 저편의 세계가 있음을 믿었고, 그곳에 가서도 자신들이 왕노릇을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비욘드 라이프(Beyond Life), 죽음과 사후세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死亡)이란 단어를 쓴다. 사망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사망, 죽을 사(死)자, 망할 망(亡)자, 즉 ‘죽음’이란, ‘죽고 망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깔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문제에서 도피하는 길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했다. 인간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육신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 영혼은 그 주신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전도서12: 7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 ‘죽고 망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쉬는 것이요,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절)”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 28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친히, 영은 불멸하며 사후에는 선악 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하셨다.

B 플러스 D인생을 C인생으로 만들라

한국에서 존경받는 어느 학자가 역설한 말이다. 그분의 말인즉,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우리 인생은 B (Birth)로 시작해서 D(Death)으로 끝나는 인생이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신은 우리에게 B와 D사이에 C를 주셨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C란:
1. 선택(Choice)
2. 변화 (Change)
3. 기회 (Chance)
4. 도전 (Challenge)다
요약하면, 1. 우리가 선택을 잘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2.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자기가 세상에 변화를 당한다. 좋은 말이다. 3. 기회를 선용하란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역경을 기회로 삼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너무나 멋진 말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인생은 B에서 D로 끝난다고 하지만, 그 D도 (Death)이냐 하는 것과 꿈(Dream)이냐 하는 것은 도전 정신에 달렸으니, 나이 핑계하지 말고 환경 이유 대지 말고 더 크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용기있는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네 가지 C만 가지고서는, 삶의 질을 약간 향상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 문제 B(Birth) + D(Death)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물론, 사람이 젊고 건강할 때는 그것만 있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람에게는 선택도, 변화도, 기회도, 도전도 통하지 않는 말이다. 당장 눈 앞에 다가온 죽음과 죽음 저편, 곧 사후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궁극적 목적을 해결해 줄 수 있는 C는 단 하나뿐이다” 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C (Christ)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 C (Christ)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백보좌 심판으로 나아갈 것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6-27절 말씀)”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뉴욕아멘넷 칼럼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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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손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을 보여주는 콥틱 그리스도인(십자가가 많이 흐리네여..)


저는 지난 성지순례 기간에 이집트에 있는콥틱 그리스도인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슬람국가인 이집트 내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기독교인이 있었고, 그들을 일컬어콥틱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이집트 내에, 콥틱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인구의 10-12%를 차지하는 전성시대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이집트 인구의 5% 미만이라고 합니다.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당시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소아시아지역을 비롯한 각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이때 이집트에도 복음이 들어왔으며, 콥틱교회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마가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집트 내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그 역사가 대단히 오래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닌 이집트 안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매한가지, 무술림들의 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성장하지 못하고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합니다. 역사에 박식한 한국 안내원이 들려 준 콥틱 그리스도인들 삶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슬람의 무술림이 이집트의 주도권을 잡은 지난 천이백 여년 동안, 사회의 모든 지도권, 상류층의 사람들이 모두 무술림이다 보니, 기독교인들은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허락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선뜻 좋은 직장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일정 수입근원을 지원받지 못하는 그들의 생활수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정부로부터 보조도 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지목되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는 그들은 시내에서 살지도 못합니다. 외각지, 그것도 지난날, 쓰레기 수거지로 쓰이던 곳으로 쫓겨나, 그곳에 땅굴 같은 것을 파고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물 공급도 잘 안 되니 깨끗이 씻을 수도 없습니다. 그 동네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역겨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며 대대로 그 신앙을 전수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물림한다고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기독교인인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아들의 팔목에다 십자가표식의 문신을 새겨넣어 준다고 합니다. “너는 세상과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겝니다.

때마침, 우리 일행 앞에는 팔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 넣은 한 초라한 할머니가 자신의 팔에 새겨진 십자가 문신을 보여주면서 무슨 말인가 열심히 전하려 했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관광객들처럼, 바싹 마른 그녀의 손바닥에 1달러 지폐 한 장을 쥐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콥틱 그리스도인..., 슬프도록 아름다운 영혼들입니다. 무섭도록 놀라운 충정입니다. 그들의 사랑의 수고는 분명 하늘나라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초라한 그들 앞에서 상대적으로 내 영혼은 너무도 초라하고 너무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들의 종교적 행위, 십자가 문신을 손목에 새겨넣는 것만큼은 결코 지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문신이 되었건 다른 어떤 형태이건, 몸에 문신을 새겨넣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손목에 문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성령의 뜨거운 불로 각인 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 신학자, 또는 그들을 추종하는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신 그 고통을 기념하는 것, 그 자체마저 금기시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주간을 지키려고 하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이단시 하기도 하며,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극단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십자가는 죽음의 표식일 뿐,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사랑은 반드시 기념되어져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2: 19)” 십자가에서 찢기는 것을 기념하라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에게도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11:23-24)”.

물론, 고난주간도 다른 여러 절기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에서 제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는 한, 1년 중 어느 한 주간만이라도 세상 향락을 사랑하던 마음을 모두 끊어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견해입니다. 이 고난 주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큰 것은, 바로 주께서 너와 나를 위하여 찢기고 상하신 그 고통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마음을 찢으며, 죄의 자리에서 돌이켜 결단하는 재헌신의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겸허함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콥틱 그리스도인들처럼 십자가 문신을 몸에 새겨넣어서도 안 됩니다. 또 십자가를 신성시하거나, 우상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과 그 크신 사랑을 기념하는 한 주간이 정해져 있는 것, 그 자체마저 인정하지 않는 마음, 그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직한 신앙의 마음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죄인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내어주신 그 핏빛 사랑마저 기념하지 않겠다고 고집해서는 더욱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할 때, 그분의 죽으심과 사랑, 그리고 다시 오심을 바라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으로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53: 5-6절 말씀)”


-뉴욕 아멘넷 칼럼글- 최송연




기도 응답은 과연 불가사의(不可思議)인가?

 

얼마 전, 필자는 미국에서 인기있는 TV프로그램 중 하나인“Unsolved Mystery Channel” 을 방청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되겠지만…, 우리말의 뜻으로는 한자어역인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울 것임) 놀라운 것은 그들이 '불가사의'라고 하는 많은 사건 중의 한 가지가 ‘기도의 응답 ’이었습니다. 그날 소개된 사건은, 한 죽어가는 남자 아기가 기도 응답으로 기사회생 되는 일이 일어났고 이것이 불가사의’, “Unsolved Mystery”라는 것입니다.

 

잠시 소개하면, 1991년에 제임스라고 하는 11개월 된 남자아기가 선천성 간 질환으로 오늘 내일 하면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행히 간 기증자가 생겨서 간 이식 수술을 할 수가 있었고 그 수술은 미국에서 간 이식수술로서는 최고의 권위자라고 하는 로버터(가명)박사님이 집도를 맡았습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기가 너무 어린 탓인지 이식을 받은 간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아기는 점점 더 중태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아기의 부모에게 그 의사는 “우리는 최선을 다했소, 그러나 아기에게 희망은 없는 것 같소, 지금부터 48시간이 문제이긴 한데…, 아기를 포기하고 떠나보낼 마음에 준비를 하는 편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놀라고 상처가 된 이 젊은 부부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는 없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고…, 각 신문사에 호소해서 전국에 있는 교회와 교우들에게 이 아이를 위해서 특별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 전역에 흩어진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어린 아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서 의사가 말한 48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아기가 48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상태가 급속히 호전되는데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경이롭기까지 하다고 담당의사가 놀랄 지경이었답니다. 그때 그 아기는 지금 14세의 의젓한 소년이 되어서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하는 실화였습니다. 그러면서 진행자는 기도응답받은 사실이 “불가사의”중에 하나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이것을 바라보던 필자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심 은근히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기독교 국가라는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으며, 청교도신앙 고백위에 기초를 두고 세워진 국가로 자타가 인정하는 미국이란 나라가 기도 응답에는 전혀 생소한 것처럼 놀라워 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미국이 그러할진대 다른 국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입장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역사는 유교문화 불교문화가 공존하면서 내려오고 있고, 서민층에서는 그 문화마저 뒤틀려져 샤머니즘형태로 굳어져 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기도 응답이란 실제적으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며 ‘불가사의 한 일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 응답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 응답은 과연 ‘불가사의’한 일인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필자는  단연코 ‘No!’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은 결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기도 응답은 성도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기도하는 자에게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아침 해가 동편에 떠서 서편으로 기우는 그 장엄함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할지언정 불가사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천지가 창조된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운행 되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진리요, 그 명령이 한 번 떨어지면, 대자연이라고 해도, 그 명령에 순응해야만 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과 지식으로 알고, 또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에 당연한 결과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4: 13) 말씀하신 분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치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며, (1: 15-16)”말씀하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야 모르겠지만, 잘 믿던, 못 믿던, 그래도 성도라고 한다면 기도 응답을 약속하신 분과 하늘에 해가 동쪽에 떠서 서쪽으로 지게 명하신 분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부인할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부인해서도 안됩니다. 설사, 그 마음에 확신이 없다고 해도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음을 부인하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 하나만 분명히 알게 되어도, 성도가 기도 응답 받은 것, 하나도 이상할 것 없고 불가사의한 일이라 호들갑 떨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결코 변개함이 없습니다.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믿지 못하고, 말씀에 깊이가 없는 연약한 성도들을 유린하기 위해 약삭빠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신령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유교와 불교, 토속적인 무속의 문화속에 살았던 민족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도 무속신앙의 형태를 그대로 지속시키려고 하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래된 습관이나 사상과 가치를 바꾸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샤머니즘’곧, 무당종교에 길들어져 있는 우리 민족의 혼을 사로잡아 가기 위해 경쟁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에서 자칭 선지자들, 신유의 은사 소유자들, 심지어는 예수님의 심장 속까지 자유자재, 임의로 들락거리며, 성도의 미래를 기막히게 알아맞힌다는 영적 뚜쟁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이 하나님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기도해주면 모든 병이 치유된다, 내게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언제, 어디서, 집회할 때 수많은 병자가 털고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큰소리치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도 말하지만 그 증거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라 그런지, 그렇게 큰소리치기만 하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백절 치듯 많이 모여든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앞길에는 부와 명예가 약속되어져 있는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도라면 누구든지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도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누가 하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인간(설사, 그가 흉악범이라고 해도)의 기도는 다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강청기도로 불치의 병에서 놓임을 받은 한 사람을 압니다. 그분은 30대 초반에 자궁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로부터 삼 개월의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살아보려고, 절에도 가 보고, 소위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 다 해보았으나 모두 다 헛수고였습니다. 그때 불신자였던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저희가 섬기고 있던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밤마다 이불을 싸들고 성전에 올라와서 혼자 밤을 지새우며 주님께 매달리더군요. 아무도 그녀에게 철야하라고 말해 준 적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께서 그녀를 어루만져 주셨고 그녀는 완전히 병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는 그녀를 위해 중보기도는 해 주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몸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해 준 적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녀는 그 후, 28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강하게 교회를 잘 섬기며 그렇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자 역시, 10여 년 전에, 허파에 혹이 생기면서, 프리 스테이지의 암 증세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오늘까지 살아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물론, 저는 의사나 의술 무용지론자가 아닙니다.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받아야 하겠지요, 의사에게 지혜를 주시고 능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니까요. 다만, 의사가 할 수 없는 일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고, 치유의 기적은 꼭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세기 18:14)"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기도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선하고 미쁘시사 응답 해 주시고 치료의 광선을 발해 주십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도 응답을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불가사의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거기서 거깁니다. 신령한 사람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모두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직분과 직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긴 했으나, 그 격에 있어서는 동등합니다. 만약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아진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신령하거나 다른 성도들보다 더 사랑 받는 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도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 뿐입니다(딤전 2:5절 참조).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기도 응답’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사건이요, 큰 이벤트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기도 응답’이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요, 당연한 결과일 뿐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강청기도를 드리던, 무시기도를 드리건,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던, 운전대를 붙잡고 운전하면서 기도하건, 부얶에서 기도하건 안방에서 기도하건, 큰소리로 기도하건, 입안에서 중얼거리는 기도를 하건,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는 우리의 작은 두뇌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기도 하고, 또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불가사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것이며, 너와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참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사랑이, 바로, Unsolved Mystery, '불가사의'중에 '불가사의' 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편 1161,2)."




 
-뉴욕 아멘넷 칼럼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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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이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습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 노 간호사인 로라 (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쵸코릿 접시에서

쵸코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용기를 얻고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얘기했고, 그 얘기의 빈도 수가 높아졌습니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으로 밝은 웃음을 찾았습니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습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헬렌 켈러 (Helen Keller)이고,

그 선생님이 앤 셜리번(Ann Sullivan) 입니다!

 

로라는 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사랑으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냈고,

앤도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 주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했습니다.

헬렌이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는 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면서

그녀의 손에 강의내용을 적어주었습니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앤 셜리반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셜리반 선생님을 보고싶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상한 마음은 사랑만이 최고의 명약입니다!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어나 얻을 수 있는
강한 체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구했더니
도리어 몸에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간구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
오히려 지혜를 배웠습니다.

한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나는 세력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은연 중에 나는 모든 것을 얻었나니
내가 구하지 않은 기도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부족하되
만인 중에서
가장 풍족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작자미상-

Following
-----------------------------------------------------------------------------------
필자는,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신앙인이 가져야 할 물질관과 영적 전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세적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성도들이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정면 돌파가 최선인데
요즘은 세상과 화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타협을 가르치는 게 대세인 것 같습니다...

핍박을 피하며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더없이
좋은 메세지가 될 것은 사실이지만...

글쎄요,
우리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실지...

주님은 분명 핍박이 있을 것을 가르쳤건만,
정작 중요한 싸움에서는 맥없이 주저앉게 만들고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싸우라고 합니다.
그것이 현실, 기독교계의 병폐란 생각이 듭니다.

거짓 교사들의 공통점은
형통을 앞세워서 사람들을 모으고
착각 속에 빠지게 합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도 주님의 축복을 갈구하지만,
우선순위 문제란 생각도 듭니다.

축복 받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축복(십자가의 귀한)이 감사해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축복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은 바 은혜가 감사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도
주님께 바치고 싶지만...십분의 일이라도 드립니다.

우선순위가 뒤바뀌어진 신앙생활은 자신의 유익이 채워지지
않으면 뒤돌아서게 되지요.

재정적 유익만을 추구하던 가룟유다, 예수님을 팔게 된 것,
우리에게 주는 경고임에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성경 속의 한 이야기로 끝나버리면 안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1,~3 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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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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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그분의 기쁨입니다

     

    캐슬린이란 아름다운 여대생이

    한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둘은 결혼까지 약속을 했고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얼마후 남자의 마음이 변해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큰 상처를 받게된 캐슬린은

    집을 뛰쳐나와서 거리로 헤매며

    술과 마약을 입에 대기 시작을 했고

    자기를 버린 남자를 원망하면서

    그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

    이 남자 저 남자를 바꾸어가면서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그렇게 타락을 하여 결국은 마약을 구하려고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십수 년, 이젠 캐슬린도 나이가 들어서

    찾아주는 남자들도 없어지고 더우기 술과 마약으로 찌든 육체는

    병마저 들어서 더 이상 지탱하기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삶을 마감하기로 하고 강가에 나갔습니다.

    유유히 흐르고 있는 뉴욕의 허드슨(Hudson)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문득 십수 년 전에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죽는 것이야 서두를 것이 없지, 지나 간 십여 년 동안 얼마나 늙으셨는지
    멀리서나마 어머니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본 다음,

    죽어도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길로 시골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동네에 도착한 그녀는 자신의 몰골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산속에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 누가 볼세라 살금살금 대문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집엔 마당이며 방이며 대낮같이 환하게

    등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하면서

    대문을 약간 밀어보니 잠 구어 놓지를 않았는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습니다.

    깜짝 놀란 캐슬린이 얼른 도망치려하자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캐슬린이냐?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내어다 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늙어버린 것입니다.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캐슬린이 네 어머니,

    그런데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왠 불을 이렇게

    밝혀 놓았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늙으신 어머니가 맨발로 달려 나와서 우두커니 서 있는 딸을

    부둥켜 안으면서 얘야, 나는 네가 이렇게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엄마는 네가 나간 후로 단 하루도 집에 불을 꺼 본 적이 없단다.
    집이 깜깜하면 혹시 네가 못 찾고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그렇습니다.

    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그 딸을 찾을 때까지

    결코 쉴수가 없을 것입니다. 집을 떠난 딸도

    부모의 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결코 행복이 없지요.

     

    나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나 하나쯤이야

    없어져도 괞찮겠지.라고 스스로 저울질하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부모에게는 그 하나야말로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자식이요,

    기쁨이니까요.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아흔 아홉 마리의 집에 있는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진 양이 더욱더 귀하다.”라고....
    (눅15:3절말씀 참조)

     

     

    우리 하나님에게는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시는

    수고를 마다치않으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나 하나, 잃어진 양 1마리,

    이미 찍히고 다쳐서 아무 쓸모도 없는

    병신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다수(Multitude)도 용납되지만
    극히 개인(Personal)적임을 잊지마십시다.

     

    한인격 한인격, 한사람 한사람, 일대일의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양 한마리 한마리의

    이름을 다 아시고 불러내시는 목자이십니다.  (요3:10절 참조)

     

    누가복음15: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지금도 방마다 등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잃어진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 불을 끄시지 않는답니다!

     

    당신은 그분에게 생명보다 귀한 존재요,그분의 기쁨입니다!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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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탄트(Instant)시대의 부산물이련가..., 너무나 쉽게 만나고 너무도 쉽게 헤어지는 부부가 많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기독교인을 포함) 요즘은 남편보다 아내 쪽에서 더 많이 이혼을 요구하는 실정이라고도 한다.  물론, 그들이 헤어져야 할 만큼 여러 가지 남모를 아픔과 고충이 당사자들에게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성격 차이'를 들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못해 아연실색할 일이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결혼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 또는 환경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인격체가 결합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성격이 꼭 같다면 오히려 이상하지가 않는가? 사실, 이 세상에 성격이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부모 자식 간이나 혹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여도 여러모로 닮은꼴이야 많겠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하물며, 완전히 다른 성(sex)의 소유자인 남녀의 결합이야 두말할 것이 있겠는가?

결국, 성격 차이란, 두 사람이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할 문제이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격이 맞지 않고 남편이 여러모로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이혼만이 능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혼은 남편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큰~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설사, 남편의 간음이 확인되었다고 해도 용서해 주고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을 남편에게 실어 주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어느 기독교 싸이트에서 한 젊은 이혼녀의 아픔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여기에 퍼다 놓는다.

< 많이 아파요.
이제 나 마음이 그만 아프고 싶어요
너무 많이 아팠거든요 그와 부부였을때도 ...헤어진 지금도...
그도 평생 외로워 아내도 있어야 하고 애인도 있어야 했기에
그의 아내로 있을 때도 참 많이 외로웠었죠
헤어진 후엔 그의 아내가 아니라는것 때문에 또 외로워요
내가 그를 버렸음에도 그에게 가까이 있는 여자 때문에 내가 버림받은 느낌이예요 우리 인연의 끈은 얼마나 질긴지 헤어지고 난 뒤에도 아직 아픈 사랑을 하고 있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아직도 나도 놓지못하고 또다른 여자도 놓지못하는 거죠 어쩜 우린 겉으로 보기엔 옛날 보다도 더 좋은 관계예요
이젠 싸우지 않으니까요  허지만 그건 이젠 그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권리 주장을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또 다른 아픔이지요
너무 아파서  너무 아파서 이제 그만 그를 떠나려구요
그에게서 자유하고 싶어요
이제 그를 친구로 ...아이들 아빠로 남겨두고  내 마음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구요  이젠 채워지지 않는 사랑 붙잡히지 않는 사랑 상처만 받는 사랑은 그만 할 거예요  내 소중한 마음을 더 다치게 안 하려구요
이제 내 아픈 마음을 만져주실 하나님의 손을 잡으려구요
그분만이 상처없는 사랑으로 내 빈 마음을 채우실테니까...
그래서 남은 내 삶 예쁘게 살고 싶어요>  출처: CGNTV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인인가? 그런 여인이, 자기의 철없는 남편을 버린 후, 오히려 자신이 더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몸서리치는 고독에 울고 있음을 본다. 가슴 시린 이야기다.

그렇다..
가정을 지키는 데는 쌍방의 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가 가정을 잘 지켜주면 철없는 남편(죄송 ^^*)들이 빗길로 갔다가도 곧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남편들이란, 독처해서는 안될만큼의 불완전 품(여기에서 오해를 하는 분들이 계실까 하여, 잠시,  하나님 창조물로서 불완전 하다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반드시 둘이 한 몸을 이루도록 설계되어진 창조물로써, 혼자일 때는 불완전하다는 뜻이니 오해가 없으시기를...)이었고 때문에 도와주는 아내를 위해 갈빗대 하나를 뽑아내어야만 하는 고통을 감내 해야만 하지 않았던가? (극중, 드라마에서의 남자 주인공들은 사랑에도, 인격에도 모두 완벽한 남성상을 그려내고 있지만, 허상일 뿐, 성서 적으로 보면, 완벽한 남성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아내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내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창조되어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란 돕는 배필이다. 남편의 모자란 부분을 도와서 완벽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됐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창세기 2: 20절 참조). 돕는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이 부족할 때 그 부분을 채워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결코 남자가 더 우월하다거나, 여자가 더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우는 자가 도움을 받는 자보다 열등해서야, 어찌 도울 수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남녀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가진 동등한(equality) 인격체이다. 이 다른 특성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남자들에게서 없는 부분이 여자들에게 꽤 많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면이 여자들보다 우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정다감한 감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떨어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경향이 많고,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가족들 간에나 혹은 동료들 간에 어려움을 야기시킬 수가 있다. 그럴 때, 보다 감성이 예민한 아내가 잘 살펴 따뜻한 어조로 조언해 준다면 남편이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한결 수월할 것이다.

남편의 모자라는 부분을 찾아내 보충하며 잘 내조하는 것이 아내들의 본분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생각하는 여인은 반드시 그 남편을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 남편을 가리켜, "주(Lord)"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하여, '사라'가 '아브라함'의 사랑받는 아내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음을 명심하라.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은 그런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품에 첫 아들을 안겨 준 애첩, '하갈'이였지만, 아내인 '사라'가 요구했을 때, 즉시, 하갈과 함께 그녀가 낳은 자기 아들을 광야로 내어 좇기도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 남편들은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자기를 주(Lord)라고 까지(뭐 꼭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좋다)존중해 주고, 부족한 부분을 확실하게 채워주며 잘 내조하는 아내, 그런 사랑스러운 아내를 곁에 두고 싶어 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 지혜로운 아내를 버리거나 떠날 바보 같은 남편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가정에서 대우받고 행복한 남편은 사회의 각 분야에서 성공할 확률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더 높다고 하는 통계가 이미 나와 있다.

남편이 성공하면 그 성공은 결국, 행복이란 멋진 선물과 함께,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 아내의 품에 안겨다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남편을 도우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도우는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부응하는 것임을 명심한다면..., 성격 차이뿐 아니라, 그 어떤 고난과 난관이 있다고 하여도 그렇게 쉽게 이혼을 하려 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울음을 우는 것이 사명이고, 개는 주인 대신 도적을 보고 힘껏 짖어대는 것이 사명이며, 해는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져야만 한다. 기차는 철도(railroad)를 벗어나지 않고 달리는 것이 사명이다. 아내의 창조목적은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서 완전케 하는 것이다!

아내들이여, 철없는 남편들 때문에 힘이 드는가? 그들에게 너무 기대하지 마라, 차라리, 그들은 당신보다 더 모자란 부분이 있는 자들,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결코 혼자(독처)살아 나갈 수 없는 자들임을 기억하고, 가여운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라. 그리고 가정을 지켜라. 그것이 창조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늘 말한다. 사명이 있다는 것은 사명을 부여한 분이 계시다는 것이고, 그분 앞에서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잘 살아 간다면, 그런 사람은  이생에서나 내세에서 결코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고운 것도 거짓 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잠언 31:10-31절 참조)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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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로써 크게 나누어 부분으로 일하게 하심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1) 천사장 :  가브리엘 =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천사장입니다

           1: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했습니다  1: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했습니다  이렇게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요한이 것을 (기쁜 소식) 알렸읍니다 (1:18-19)  같은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이르러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1:26-38) 했읍니다  후에 2:13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을 미리 알리기 위하여 기쁜 소식을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알리면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 (2:11-12) 가브리엘은 알렸고 허다한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2:11-14)


          
우리가 구약에서도 보면  다니엘8:16 “내가 들은 을래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처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상을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다니엘에게) 하더니 그가 나의 곳으로 나아 왔는데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상은 정한 ….  끝에 관한 일임니니라” (8:16-19) 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9:20-27까지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와서 하나님의 기한이 차면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기쁜 소식) 

이렇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주는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가브리엘을 하나님은 세우신 것입니다  ( 외에 참조 :  9:26, 20:12, 10:4 )

 

2) 천사장 :  미가엘 =  악의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하나님의 천사장입니다

             다니엘 10:21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미가엘 뿐이니라했는데 싸움은 바사군과 헬라군의 싸움을 칭하였읍니다  말씀은 현대에 있어서 무엇 또는 무슨 나라를 두고 말씀하는지는 모르겠읍니다 (난해구절)

다니엘 12:1 “ 때에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환란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때까지 없던 환란일 것이며했읍니다  유다서 9절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했읍니다  그러니 사탄을 상대로 해서 싸우는 천사장 미가엘입니다  (참고사항 : 전쟁의 천사장 미가엘이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것을 보면 겸손한 천사장임을 읽을 있읍니다 )  계시록 20:1-3 “천사가 무저갱 열쇠를 가지고 쇠사슬로 용을 잡아 무저갱에 던져 넣었고  12: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들이 내어 쫓기니이는 천하를 꾀는 자라” (12:7-9) 했읍니다  이렇게 미가엘 천사장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하나님의 대군 입니다  전쟁은 하늘에 있는 악한 (6:10-12) 이요  세상에서의 악으로 흘러가는 국가를 말하며 (16:12-16)  바벨론을 말하며 (예레미야 50:1-46, 51:47-48, 63-64,  18:1-10,  4:28-37)  세상을 꾀는 악한 영들 (12:7-9) 대하여 대군 미가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천사장인 것입니다

 

3) 구별되지 않는 천사장 ( 가브리엘인지 혹은 미가엘인지 )

             사실은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에 행하실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있습니다

          

                                                           - 3 -

*** 9: 1 “다섯 천사가 나팔을 부니했고 8:2 “일곱 천사가 있어  두째 천사 (8:8), 세째 천사 (8:10), 네째 천사 (8:12),  이렇게 하나님은 천사들의 경고를 말씀하셨습니다

*** 마태 16:27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때에

*** 마태24:31 “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했고

***마태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벧후2:11 “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천사들과 의의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4) 성도를 향한 천사의 임무

             천사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1:14)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천사들입니다 (103:21)  여호와을 봉사하여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했읍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103:21) 하나님의 천사는 우리가 예배하는 (섬기는) 대상이 아니요 (2:18) , 천사는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인것 입니다 (1:14)  확실하게 요약하면 마태25:34 나타난 오른편에 있는 아버지께 복받을 사람들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은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신

입니다 (1:14)

 

5) 천사가 나으냐 아니면 구원받은 성도가 나으냐 ?  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구분이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육체안에 있을 때에는 천사의 도움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어떤 제한된 범위속에서 활동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앞에 서게 되는 때에는 하나님의 통치권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므로 오히려 우세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요, 신부요 , 하나님의 것을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1:11-14, 3:20)  그러나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받은 우리를 봉사하고 섬기고 또는 하나님의 영물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평화를 누리면서 살도록 섬기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1:14)

  (1) 사람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22:43) “사자가 하늘로 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했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지만 육체를 입고 있는 육체의 무너짐의 고통을 친히 경험해야 하고 (2:9) 찢어져야 되기에 자신은 고민하고 슬퍼했던 것입니다 (26:38, 14:34)  육체의 고통을 이길 있게 하나님의 사자가 예수님을 도운 것입니다 ( 참고 :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을 친히 맛보려 하심이요 (2:9하반절)  ,  그리고  (2:18) 자신이 시험을 당하셨기에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것입니다  )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 천사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고 난관을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사자의 도움이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천사보다 조금 못한 것입니다 

시편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했고  2:7에는 저를 잠간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했읍니다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고 있읍니다  (2:5-9 ) 

(그러나 시편 8:5 사람을 칭하고 있읍니다  천사(1)  아래에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이란 말을 쓰지 못하고  천사라고 칭하여 해석한 같습니다   원문에서는 천사를 엘로힘” (Elohim) 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

 

                                                                       - 4 -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고 있을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돕더라 했는데 (22:43)  우리 인간이 육체를  입고 있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전쟁에서나 마찬가지 입니다


(2)
그렇다면 현대 성도들은 어떤 면에서 어떻게 도움을 받습니까 ?

           그것은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천사의 도움도 받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스승이며,  인도하시는 인도자 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시고  우리 영혼과 육체가 구원얻은 성도로서 언제나 하나님안에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천사는 우리를 여러가지 다른 면으로 돕습니다  위험한 일을 만났을 또는 좋은 일을 만날 때, 천사는 우리를 돕고 섬깁니다  때로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면에서 꿈으로도 나타나고  여러가지로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 주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위치와 천사의 위치

           성도는  =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고전 4:1-2),  그리스도의 일꾼 (고전 4:1-2) ,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3:1-5),  그리스도의 사신 (고후5:20, 6:20),  하나님의 자녀 (1:12),  복음 부탁 받은 (28:18-20, 1:8),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3:29, 2:5, 21:7),  그리스도의 신부 (25:1-11, 21:9 하반절),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 (3:20)

           천사는  =  우리, 구원받은 성도를 섬기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1:14)

    

     이상의 구분 해설이 우리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도 합니다

 성도는 천사숭배를 금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글/최송연

 

 

 

1)

 

    천사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두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자, 둘째는 영적인 존재로 쓰입니다  구약의 천사는 사자( Messenger , The angel of the God ) 로서의 천사로 나타냅니다

천사의 기능은  (1)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에게 전하는  
  
(2)
특별한 일을 예고 는 것, 3) 의로운 개인이나 집단을 보호하고 대적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것, (4) 이스라엘 백성중 죄인과 교만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도구의 역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봉사자입니다

-           

-          천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입니다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이 부리는 , 하나님은 천사들의 창조주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섬기도록 지어 놓으셨습니다

-           

-          칼빈 선생은 천사를 지을 어떤 순서로 지었느냐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로서는 현명하기를 원하며 천사의 성질이나 순위 그리고 천사의 수에 관해서 기록하지 않느냐의 질문에 칼빈은 답하기를 하나님은 부리는 영에 대하여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           

-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마모레 상수리 나무 수풀에서 천사 3인이 나타났는데 3인에게 아브라함이 떡과 버터로 천사를 대접하였습니다 (18:1-9)  그리고 야곱이 얍복강 나룻터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에게도 나타나셨는데 이것이 전부 천사였습니다

 

(1) 천사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수종자이고  신약시대(지금) 에는 천사의 나타남보다도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기도중에도 천군천사가 동원해 달라는 것은 하나의 구약적인 생각에 젖어있는 표현입니다  기도의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신약시대에서는 가장 뚜렷하고 가장 성서적인 표현과 신앙은 성령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영으로써)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또한 주무시지고 않으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18:1, 32:1-28,  14:19,  23:20, 여호수아 5:14 ( 여기에서는 군대 장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심 : 6:12, 13:22, 4:11, 22:43, 28:5-7, 24:5, 왕하19:35, 37:36, 왕하6:17, 10:13, 12:1, 18:10, 3:1-2 

 

따라서 주님께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하면, 주께서 뜻대로 천사를 보내시기도 하고 친히 손을 펴시사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사를 구하기보다는 주님의 낯을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2) 천사의 수과 계급

             12: 1, 유다서 9, 천사장의 소리 (살전4:6) , 열두 더되는 천사 (26:53) 그리고 7:10 보면 그에게 수종하는 천사는 천천이요 시위하는 자는 만만이라 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천사장의 한사람 입니다 (8:16, 9:21  1:19, 26) , 그룹들 (3:24, 28:14, 16 , 25:18, 26:1  , 9:5)  스랍들 (6:2)  , 여섯 날개의 천사 (6:2)

             칼빈은 신비적 종쥬와 충분한 계시는 최후일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너무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봉사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들의 의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보호를 위해서 쓰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는 천사란 하나님이 자기 능력의 표현으로서 주신 것입니다 

 

                                                                         -  1 -

시편 103:20 에서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했는데 여기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는 천척 영으로써 군사와 같이 하나님을 호위하는 하늘군대 세력입니다  천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자로써 우리를 위해서 주고 신앙을 굳게 하며 광야에서 방황하는 하갈을 위로하고 고독한 아브라함과 야곱을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각사람을 호위하는 천사가 단수인 경우도 있고 복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지방과 왕국이 천사로써 보호를 받고 감시된다고 말하고  이상은 확실치 못하다고 칼빈은 말하였습니다  천사에 대해서 있는 것은 방비군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3) 천사의 실제

예수님의 교훈에서 : 18:10, 13:32, 8:38, 13:41, 26:53 

바울의 교훈에서 (바울은 천사를 인정했으나 천사 숭배는 엄격히 금하였습니다)

살후 1:7,  2:18,   1:51, 12:7, 22:9,  벧전3:22,  벧후2:11, 유다서9 ,  22:43,  8:38,  12:22

 

(4) 천사의 성질

1) 피조물이다 (1:16) “하늘과 땅에서보이지 않는 것들…” (천사를 뜻함)

2) 죽은자의 영도 아니요 영광된 인간도 아니다 (12:22-23, 9:6)

3) 영적인 존재입니다 (1:14, 104:4)

4) 영물이지만 때때로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인간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19:1, 2:1,  6:11-22, 1:20, 1:26, 20:12)

5) 권세와 능력의 소유자이다 (벧후2:11)  소돔과 고모라성을 진멸시키기도 하였고 애굽의 장자를 쳐죽이기도 하였고 무덤의 돌을 옮기기도 하였고 마귀를 사로잡는 능력도 가졌습니다 (20:2-10) 37:36에서는 십팔만 오천명의 앗수를 대군을 순식간에 쳐죽였습니다  살후1:7 보면 천사는 전능자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전능자이십니다  이같이 천사는 원수의 존재를 위해서 전쟁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와 싸움) 천사의 성질은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는 도구로 보면 됩니다

 

(5) 여러가지 계급

           천사장 미가엘, 가브리엘 또는 천사장입니다 (유다서 9, 살전14:16, 벧전3:22, 1:16)

 

(6) 천사의

           12:22, 왕하6:17, 26:53, 25:3

 

(7) 천사의 타락

           벧후2:3,  유다서6  ,  천사의 타락은 1:1-2 사이에 중간시대에 생겼다고 봅니다  창세기1:1 2 사이에는 천년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창조이전 최초 창조된 세계가 (1:1)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이것은 천사 타락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합당치 않는 견해입니다

 *** 천사 타락의 원인 ;  6:1-4 그들의 거취를 떠나 사람의 딸들과 동거했다는 , 이것이 육욕인지 오만인지, 불순종인지 자세한 것을 수가 없습니다 (28)

 *** 타락한 천사의 ; 10:10-14, 13:16, 25:41, 12;26-27, 6:12,삼상28:7-10  결과적으로 심판이 오는 것입니다 (유다서 6, 벧후2:4, 25:41)

 *** 천사에 대하여는 성경에 나타난 것으로 알고 이상의 것은 마지막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억지로 추정하거나 지나치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탄의 정체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도는 사탄의 교활함을 알고 사탄과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은 성도와 싸우는 적이요  원수입니다  인간은 생명과 지식과 의지와 느낌을 지닌 실제적인 인격이나  사탄은 영적 존재이며 인간의 몸을 소유하지도 못합니다 (꼬리도 뿔도 없음) 필자는 성경에 나타난 사탄의 정체를 파 헤치고 사탄을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히브리어 :  사타나 Sathahnah) , (헬라어 : 사타나스) 되어 있는데   
   뜻은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성도를 대적합니다 **

 

1) 구약 성경에서 나타난 사타나 ( Sathahnah )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최초 시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3:1) , 아합을 속인 거짓 선지자의 (왕상22:22) , 사울 왕을 괴롭힌 악귀 (삼상16:14-23)  이러한 것이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며 사람을 괴롭게 하는 존재임을 밝혀져 있습니다

 

2)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사타나스

             사탄은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에 반항하는 사탄의 활동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1) 예수님에게 나타난 사탄 ;  마태4:1- 에서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서 40일을 금식하신 뒤에 시험하는 마귀가 예수님을 3번씩이나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3:23에서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실 주님 자신의 능력이 사탄의 거짓 시험을 받았다고 공격을 받아 혼돈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3:22-26)


(2)
예수님은 사탄을 지적하였습니다  (10:18)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사야 14:12  아침의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하시면서 사탄의 기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
사탄이 하는 일을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을 빼앗는 (4:15)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말씀을 들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했습니다

   -  악의 씨를 뿌리는 (마태13:24-30)

사탄이 가라지 씨앗을 덧뿌리고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모든 질병과 불행을 일으키는 (13:16)

그러면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 사탄은 자기의 왕국을 형성하여(3: 23-24) , 하나님의 왕국인
하나님의 교회를 반항하는 작업을 하는 ( 2:9-10)


(4)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것도 사탄의 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
16:23)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인간의 생각으로
예수님께 아부함으로 일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크게 책망 하셨습니다

 

3)  바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사탄에 대하여

     -  사탄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2:2)

     -  어두움의 주관자라고 하였습니다 (6:12)

         사탄들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타락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후2:11)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이간을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6:11)

 

                                                                          - 1 -

                                                      

     -  이렇게 사탄의 속임수와 이간에 넘어가서 신앙을 잃고 타락한 사람은 마귀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3:10)

     -  죄지은 고린도 교인을 사탄에게 넘겨준다고도 했습니다 (고전5:5)

 

4)  사도 요한은 사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

     -  12: 9  인류를 유혹하는 이라고 했습니다

     -  12:3   일곱 머리와 뿔을 가진 붉은 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붉은 용은 13장에서 세상 권세를 대표하는 짐승으로서 하나님의 교회 내부를 부패시키는 거짓 선지자들과 다른 짐승을 통해서 성도들의 신앙을 빼앗는 작업을 합니다

 

5)  사탄이 하는

             사탄(마귀) 사람의 약점과 제약을 이용하여 죄의 길로 유도합니다 (5:5)  사탄은 세상의 여러가지 유혹물도 동원합니다 (요일2:15-17, 4:4)

     -  사탄은 삼킬 자를 찾습니다 (벧전5:8)

     -  가라지나 나쁜 교리들을 뿌립니다 (13:25-30)

     -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합니다 (고후 4:4)

     -  형제들을 참소합니다 (12:10)

     - 그리스도인을 시험합니다 ( 22:31)

     - 인간의 육신을 파괴합니다 (고전 5:5)

             악마(사탄)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고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침륜케 하려고 합니다 (13:38)  원수 가라지라는  말도 있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고 신자들을 괴롭게 하나 하나님은 악마들을 완전히 지배하십니다

 

6)  사탄의 하수인들

             성도들은 때때로 (베드로가 16:22-23 에서 행한 같이) 무심결에 사탄에게 이용 당하기도 합니다  언제나 인간을 돕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빗나가도록 유도 합니다

     - 사탄의 사자들, 악한 영들, 더러운 영과 악마들 (벧후 2:4,  유다서 6)

     - 정사, 권세, 세상 주관자, 악의 영들 (6:12)

     - 자기 멋대로 하는 죄인들 (8:44)

             악마는 하나님이 보낸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반역 하도록 하는 것이며 거짓은 악마의 본질입니다  악마 (사탄) 이념적 존재가 아니라 오직 악마가 이념적 존재에 불과하다면 현실의 인간은 정신적인 면에서 악마의 손으로 부터 자유로와질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악마를 바로 알고 악마를 조소할 있는 (물리칠 있는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음을 있습니다 (12:28)

 

7)  사탄 (악마) 운명

     - 장래에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 것입니다 (12:7-8)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로 싸우니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 악마는 하나님을 대항해서 사람들을 선동할 것입니다 (12:12)

땅과 바다는 있을 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 그러나 사탄은 천사에 의하여 결박될 것입니다 (20:1-3)

 

                                                                 - 2 -

   내가 보내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쇠사슬을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용을으니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
일천년 결박하여...” - 사탄은 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질 것입니다
(
20:3) - 후에 잠간 풀려나서 사람들을 미혹하려 나와 하나님께
반역 하기를 꾀할 것입니다

     (20:7-8) “천년이 차매 사탄이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 사탄 (악마)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 멸망 당하게 됩니다 (20:7-10)

 

8)  사탄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대결책

 만일 우리가 악마를 대적하지 아니하면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공격하며 우리들 어느 누구도
사탄 (마귀) 공격 목표에서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 깨어서 대적해야 합니다 (벧전 5:8-9, 4:7)

-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4:7)

-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6:10-18)

-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13:14)

- 성경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 (4:1-11)

- 적극적인 자세를 위해야 합니다 (5:22-23)

-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5:16)

-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6:18)

-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나의 영혼을 감싸는 일입니다  (12:11)

  그리고 형제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사탄) 이겼다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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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마세요 글쓰기를 좋아하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열한 살에 드디어 동화 한 편을 썼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쓴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냉담했습니다. 소년은 크게 실망하고 풀이 죽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소년을 꽃밭으로 데리고 가 이제 막 돋아난 잎새를 보여주며 "얘야, 이 잎새를 보아라. 지금은 여린 모습이지만 이제 얼마 있어 키가 자라고 봉오리가 맺히면 아름다운 꽃을 피울 거야. 너도 지금은 여린 잎새와 같단다. 그러나 이제 영양분을 받아 잘 자라면 아름다운 꽃을 피울 날이 올 거야. 조금도 실망하지 말거라." 소년은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아름다운 언어를 전보다 더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 어린 소년은 바로 덴마크가 낳은 위대한 문호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무능함을 볼 때에
    우리는 낙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때,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반드시 좋아질 거야
    언젠가는 꽃 피울 날이 올거야
    하고 격려 해 주는 이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의 그 격려의 말 한마디가
    낙심하고 우는 자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 속에 숨겨진

    각종 재능의 씨앗을 싹틔우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하는
    필수 영양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살전 5;14절)
     
    글/최송연
오전 8:58:37

    당신은 그분의 기쁨입니다

     

    캐슬린이란 아름다운 여대생이

    한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둘은 결혼까지 약속을 했고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얼마후 남자의 마음이 변해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큰 상처를 받게된 캐슬린은

    집을 뛰쳐나와서 거리로 헤매며

    술과 마약을 입에 대기 시작을 했고

    자기를 버린 남자를 원망하면서

    그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

    이 남자 저남자를 바꾸어가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렇게 타락을 하여 결국은 마약을 구하려고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십 수년, 이젠 캐슬린도 나이가 들어서

    찾아주는 남자들도 없어지고 더우기 술과 마약으로 찌든 육체는

    병마저 들어서 더 이상 지탱하기 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삶을 마감하기로 하고 강가에 나갔습니다.

    유유히 흐르고 있는 뉴욕의 허드슨(Hudson)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문득 십 수년전에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죽는것이야 서두를것이 없지, 지나간 십여년동안 얼마나 늙으셨는지
    멀리서나마 어머니의 얼굴이라도 한번 본 다음,

    죽어도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길로 시골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동네에 도착한 그녀는 자신의 몰골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산속에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 누가볼새라 살금살금 대문으로 가까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집엔 마당이며 방이며 대낯같이 환하게

    등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하면서

    대문을 약간 밀어보니 잠구어 놓지를 않았는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습니다.

    깜짝 놀란 캐슬린이 얼른 도망치려하자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캐슬린이냐?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내어다 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늙어버린 것입니다.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캐슬린이 네 어머니,

    그런데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왠 불을 이렇게

    밝혀 놓았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늙으신 어머니가 맨발로 달려 나와서 우두커니 서 있는 딸을

    부등켜 안으면서 얘야, 나는 네가 이렇게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엄마는 네가 나간 후로 단 하루도 집에 불을 꺼 본적이 없단다.
    집이 깜깜하면 혹시 네가 못찾고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그렇습니다.

    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그 딸을 찾을 때까지

    결코 쉴수가 없을 것입니다. 집을 떠난 딸도

    부모의 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결코 행복이 없지요.

     

    나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나 하나쯤이야

    없어져도 괞찮겠지.라고 스스로 저울질 하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부모에게는 그 하나야말로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자식이요,

    기쁨이니까요.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아흔 아홉 마리의 집에 있는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진 양이 더욱더 귀하다.”라고....
    (눅15:3절말씀 참조)

     

     

    우리 하나님에게는 나 한사람 한사람이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시는

    수고를 마다치않으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시각으로보면 나 하나, 잃어진 양 1마리,

    이미 찍히고 다쳐서 아무 쓸모도 없는

    병신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는 다수(Multitude)도 용납되지만
    극히 개인(Personal)적임을 잊지마십시다.

     

    한인격 한인격, 한사람 한사람, 일대일의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양 한마리 한마리의

    이름을 다 아시고 불러내시는 목자이십니다.  (요3:10절 참조)

     

    누가복음15: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지금도 방마다 등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잃어진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 불을 끄시지 않는답니다!

     

    당신은 그분에게 생명보다 귀한 존재요,그분의 기쁨입니다!

     

     

    /최송연

     

     

    이미지 전체보기 ♬ 흐르는 곡 ~ ♡ 들어라 주님의 음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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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에 어디에 레위인이 목사라고 나왔습니까? 레위인은 레위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십일조는 목회자에게 사례비로 사용되어지면 안되고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구제비로만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도가 있기에, 그 분에게 드리는 말씀이였는데, 혹시나 같은 생각을 품고 계신 분이 계실까?하여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우리(모든 믿는 자)들의 보혜사 되시며 우리들의 스승이되신 성령님께서(요한복음14:26절 말씀 참조) 친히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변론이 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나눔(Share)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먼저 우리(성도)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은 아래의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 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 문자적 해석 (Literally)
2. 영적 해석 (spiritually)

1) 구원론:
반드시 문자적(liter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에 구세주로 믿어야 구원함을 얻는다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말씀 외에 여러 곳) 것은 불변의 진리요, 따라서 그 어떤 다른 해석도 주석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로, 필자는 여기서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인 구원론이나 문자적 해석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성경말씀에 영적 해석이 왜 필요하며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십일조의 사용도에 관해서 잠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축복론
영적인(spiritu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성경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봅시다. 갈라디아서 3:6-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3:29절 말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우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엔 문자적 (literally)인 해석은 불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가르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예,이런 경우엔 영적 (spiritually)해석이 필요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결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해석으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3) 하나님의 집
마가복음11:16-17절 말씀에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하신 것을 문자적 해석이라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그러니까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가리킴입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영적해석입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집은 천국이란 해석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으로서의 하나님의 집, 그러면 그곳은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곳에 흩어져 있는 크리스토의 몸된 교회, 곧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안그렇습니까?

본론:
자, 이런 맥락에서 십일조와 레위인에 대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키3:10절 말씀)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1. 십일조를 해야만 하는 이유,
2. 십일조를 받는 대상.
3. 십일조를 내는 목적.
4. 십일조를 드리는 장소.

여기에서 1번에서 2번까지는 하하님이나 우리 모두(성도들) 잘 아는 사실이라 재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같고, 제 3번과 제 4번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과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3.십일조를 드리는 목적:
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에 양식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말3:10절 하반절)

그렇다면,
4.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장소가 분명 어딥니까?
예, 그것 역시
나의 집(말3:10하반절), 곧 하나님의 집, 땅 위의 (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성전이 됩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레위인은 오늘 날 누구인가? 아직도 이스라엘(야콥)의 12아들중 3째의 후손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레위는 분명 야콥의 세째 아들이요, 그들의 후손에 국한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레위인은 상관관계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일부를 걸러내고 믿는 것이며, 갈라디아서3:6-9절, 15-16절은 삭제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과연 현대인, 그리고 이방나라의 사람들로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성도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영적자녀들이라면 그 영적가족들 중에서 레위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며, 이는 그 역활 면에서 구분이 지어질 수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레위인은 누구며 그들의 역활은 무엇이였는가? 레위지파는
1. 전적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지파다.
2. 그들에게는 세상 기업이 없어야만 했다.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했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 (민수기 4:15절, 신명기18:1-2절, 대상15:2절.로만 생활 해야했다.

영적으로 레위인을 오늘날 목사, 교사, 혹은 복음사역자들로 보는 정당한 이유: 목사, 혹은 복음 사역자들은,

1.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 있는 자란 점.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 (로마서 10장 15절 말씀) 했다.
2. 목사나 복음 사역자들은 세상에 다른 직종을 갖지 말아야 한다.
3.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한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성도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해야만 한다.(코린도 전서 9장1-18절 말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과 십일조는 하나님의 창고와 하나님의 집인 성전(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교회)에 양식이 되며, 그것으로 레위인(영적 목사, 복음사역자) 포함, 객(나그네)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신명기14:28-29말씀 참조)

하나님의 은혜가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넘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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