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거리마다 캐롤송이 울리고 있네요

상점마다엔 아름다운 상품들로 그득그득 쌓였습니다

구세군들의 벨소리가 참 아름답군요

 

사람들은 저마다 흥겨운듯 보이는데요.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더욱 경쾌해 보이고

마치 리듬을 타며 춤추는 듯 행복해 보이네요

 

“Are you ready for Christmas?”

이맘 때가 되면 미국인들이 자주 쓰는 인사말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지요

믿지않는 불신자분들은 선물준비를 생각하고 하는 말이기도 하구요

성탄의 의미가 잘못 변질이 된 한 단면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이렇듯, 사람에 따라서 성탄의 의미는 부쩍 다르게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헤롯대왕은 크리스마스의 Point를 잘못 맞추어

죄없는 어린 아기들을 많이 죽여야만 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여인숙들은 크리스마스의 Point를 잘못 맞추어

성탄의 주인에게 내어드려야 할 방 한칸을
 내어드리지 못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Point를 향락의 밤 정도로 착각하지 마세요

형제에게 싸구려 선물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랍니다

 

성탄의 참된 의미는 "섬기며 죽기 위해서 낮아지심'입니다

성탄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은 바로
'섬기며 죽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벌레보다못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냄새나는 마굿간에 탄생하신 것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려 하심입니다

그렇게 낮아지셔서 죄인들을 섬기시다가
끝내 십자가위에서 죽어주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내 가정과 내 이웃을
보다 잘 섬기리라 다짐하는 마음...
내 자아와 내 고집과 정욕,
내 이기심 이런 것들을 십자가밑에
못박아
죽기를 결단하는 마음...


이런 마음으로 준비한다면...
그 영혼이야말로 성탄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아는 사람이며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 있는 준비가 잘 되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이시간 앞서간 믿음의 선조님들의 발자취를
뒤돌아 봅니다.

성탄을 맞을 준비가 바로 되신 그분들이 부럽습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에게 쉽지만은 않은
크리쓰마쓰가 될 것같습니다
Recession..., 흥청망청할 때가 아닙니다


“당신은 정말 크리스마스를 맞을 준비가 됐나요?”

 

Have a Merry Christmas!!!

 

 

저의 목양연가를 찾아주시는 사랑하는 님들,
즐거운 성탄을 맞으세요.

그리고...성육신하신 주님과 함께
늘~ 행복하시기를 기도드려요. 샬롬~~

 

최송연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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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NTV -

 


주일 오후가 되면 늘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주일 오후몹시 피곤했던 그는 자기집 서재에서 조용히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11살 된 아들이 아버지가 집에 계신 것을 보고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빠, 오늘은 전도지를 나누어 주러 가지 않으세요?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구나. 그는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그럼 비가 오는 날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으시나요?

 놀란 그는 아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릴 때에는 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없단다. 게다가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하거든.  아빠, 그렇다면 오늘은 제가 아빠 대신 나갈까요?

 

아들의 진지한 모습을 본 그는 전도지를 주면서 다 나눠준 후 곧장 집으로 돌아 오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지를 나눠주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어둑 어둑한 저녁이 되어서야, 마침내 소년의 손에 한 장이 남게 되어 그는 가장 가까운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시죠? 몹시 침통한 표정의 나이 많은 여인이 문을 열었습니다. 소년은 얼굴에 큰 웃음을 띠고 공손히 말했습니다. 미안해요. 아줌마, 저는 아줌마께 이 전도지를 전해 드리러 왔어요.”   

그리고 다음 주일 예배 시간에 찬송과 기도 그리고 말씀이 끝난 후,  목사님께서 주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싶은 분이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한 나이 많은 여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안과 환희의 기쁨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저는 일찍이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어버린 후 인간의 모든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오랜 갈등 후, 제자신과 이 세상을 저주하며 자살을 결심했고, 비가 많이 쏟아지던 지난 주일 밤, 목을 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생기가 발랄한 천사와 같은 한 아이가 서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제게 전도지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전도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으며 하나님께서 아직도 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 나를 떠난 것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나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20절참조)

 

세상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것같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고통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3:16)

 오늘 내게 주어진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 안에는 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4:6절 참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다고 믿기에... 다시한번 힘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 CGNTV 보경님 방에서 -



최송연/사모



나는 얼마 전에 워싱턴 주에 있는 '콜롬비아’강에서 산란기가 된 연어(Salmon)떼들의 귀향길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었다. 우리가 배운 대로 연어의 특성은 산란기가 되면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반드시 자기가 산란 된 곳, 다시 말해 연어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귀향하고 그곳에서 알을 낳고 나서 죽는 것이다. 해마다 이런 연어(Salmon)떼의 귀향길을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을 위해서 워싱턴 주 정부에서는 콜롬비아 강 상류에 건물을 지어놓고 강물 밑을 환하게 드려다 볼 수 있도록  특수 유리벽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유리벽을 통해서 먼 태평양 바다에서부터 콜롬비아 강을 따라서 귀향을 하고 있는 연어(Salmon)떼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거센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곳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며 올라가려고 필사의 힘을 다하는 연어들을 무심코 바라보며 서 있던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고된 귀향길을 감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들의 외모가 잘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인데….쇠작살에 등이 찍혔었던지 등이 길게 찢어져 있는 놈, 아직도 상처 주위에는 검붉은 피가 엉겨붙어 있는 놈, 한쪽 눈이 터져 나간 놈, 한쪽 날개(지느러미)가 떨어져 나간 놈,  비늘이 다 벗겨져 핑크빛 살갗이 벌겋게 드러난 놈, 옆구리에 깊이 상처가 나고 살이 터져 너덜거리는 놈, 그야말로 두 눈 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는 참상이었다. 글자 그대로 피맺힌 사투의 귀향길이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요즈음은 연어고기의 기름이 불포화 지방산으로서 (이 불포화 지방산이 동맥경화를 비롯 각종 심장병을 유발하는 나쁜 콜레스트롤 (L.D.L)수치를 떨어트려 준다고함) 전 세계인들의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연어를 잡으려는 강태공들이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날카로운 낚싯대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미끼를 끼워서 여기저기 드리워놓고 연어들이 그 미끼를 물어주기만을 바라며 가만히 숨어 있다고 한다. 또 넓고 깊은 콜롬비아 강엔 갑상어떼들도 많이 출몰한다고 한다. 이 갑상어떼들이 제일 먼저 공격을 하는 놈은 조금이라도 약하거나 병이 들어 비실거리거나 혹은 떼 중에서 이탈하는 놈이라고 한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매 한 가지가 아닐는지…? 우리들의 귀향길 역시 만만치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 성도들도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기도로 무장하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약해지고 병이 들어 비실거리게 된다. 또 작은 일에 시험이 들어서 교회란 공동체를 이탈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갑상어떼보다 더 무서운 사단의 공격을 받게 되고 약한 자, 병이 들어 비실거리는 자, 공동체를 이탈한 자, 그런 사람이 제일 먼저 사단의 밥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사단은 오늘도 각종 유혹의 미끼들을 곳곳에 쳐 놓고 우리가 그 미끼들을 물기를 바라는 음흉한 눈을 가지고 숨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쳐 놓은 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온갖 아름다운 미끼들 뒤에는 날카롭고도 무시무시한 지옥의 쇠갈고리가 숨겨져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찮은 미물인 연어들은 알을 낳고 죽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사투의 귀향길을 마다하지 않고 저렇게도 안간힘을 다 쏟고 있건만….우리는 과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설사 우리가 가야할 이 길이 눈물의 길이요 피 맺힌 사투의 귀향 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길을 달려 갈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아야만 주님을 만나 뵐 수가 있으리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위에서 피흘려 죽어주심도 마다치 않으신 사랑의 주님…그 주님을 만나 뵈옵는 영광의 그 순간을 바라 보면서….찬란하고도 아름다운 그곳,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집을 향하여서…오늘도 내일도 선한 싸움을 싸우며 전진해야 하리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말씀)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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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 사모
 

요즈음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한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크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고 말라기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 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 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십일조를 내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양, 성도들을 기복사상으로 유도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 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 되고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물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 내게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영 죽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다는 고백, 내가 누리는 이 구원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확산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 십 분의 일을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되 자원하는 심령으로 모든 헌물(십일조 포함)은 드려져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어떤 이들은 십 분의 일이 아니라 십 분의 이나 삼, 더 나아가서 십 분의 구까지도 기꺼이 드리는 성도가 있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을 수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 주님은 즐겨 내는 자를 기뻐 받으시지, 의무나 인색함으로 하는 예물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흠향하지 않으신다. 주님이 받지도 않으시는 예물을 바쳐야 할 필요가 어디있는가?(고후 9:7절 참조)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서 뜨겁게 올라온다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아까울 것인가?

1. 구약의 모든 율법은 폐하였고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진 것이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마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to fulfill)케 하심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십자가 위에서 온전케 하셨다. 요한복음19:3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그것은,
첫째: 구속사역을 다 이루심(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둘째:  율법을 온전케 하심(사랑 안에서 온전케 됨)
구속사역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율법을 온전케 하심이란:
마태복음 22:37-39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약하여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됐다.
1. 위로는 하나님 사랑  2. 아래로는 이웃(사람)을 사랑.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자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함이 곧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성도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반드시 십 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마태복음23:23-24절을 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십일조를 말씀하심이고, 저것이란 의와 인과 신을 말씀하심이다. 곧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성립이며, 두가지(both) 모두 다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이기에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막12: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믿음이 먼저 들어간 후에 의무는 이행가능한 것이다. 쉬운 예로, 한 국가를 보면, 아이가 어릴 때에는 보호를 받고, 18살 인가, 20살인가?, 성인식이 끝난 후에 국민의 의무를 준행 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 아이에게 국민의 의무 운운 하면... 그 아이가 그 나라의 국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아직 어린 관계로 그 의무가 무거운 짐이 되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영적인 세계에도 젖을 먹어야 할 만큼 어린 아이가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있다?바울사도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 (히5:12-14)

3. 축복받기 위해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사람들: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조건적이다. 믿음은 결코 조건적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말씀)” 고 말씀하신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요, 율법준행 자들의 케케묵은 소리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일 뿐,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성도)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신앙고백 행위가 되어야한다.

결코 의무나 억지로 해서도 안 되고 또 복을 받기(기복사상)위해서 행해서도 안 된다.

고로, 십일조는 내어야(성숙한 성도라면) 되고, 내지 않아(신앙이 어릴 때)도 되지만,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전 재산은 드리지 못해도 내 수입의 십 분의 일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적은 재물이 사용되어지는 곳에서 잃어진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널리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는 것이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십일조를 대하는 올바른 마음자세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반드시 넘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농사의 원리처럼 모든 헌금에도 ‘증수의 원칙’이 성립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는 말로써 고후9:6절에서 밝히고 있는 말씀의 요지이다. 단 억지로 하지 않을 때, 이 말씀이 적용이 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니라. (고후9:7절 말씀)”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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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이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습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 노 간호사인 로라 (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쵸코릿 접시에서

쵸코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용기를 얻고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얘기했고, 그 얘기의 빈도 수가 높아졌습니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으로 밝은 웃음을 찾았습니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습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헬렌 켈러 (Helen Keller)이고,

그 선생님이 앤 셜리번(Ann Sullivan) 입니다!

 

로라는 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사랑으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냈고,

앤도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 주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했습니다.

헬렌이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는 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면서

그녀의 손에 강의내용을 적어주었습니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앤 셜리반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셜리반 선생님을 보고싶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상한 마음은 사랑만이 최고의 명약입니다!

 

 

 

최송연/사모

 

 


 



 

 

 

 

구원론(救援論, Salvation)

우리(성도)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다름아닌 구원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구원론을 다루기를 회피하는 것은 구원론이란 사실 신학상의 용어로서 잘못하면 오해를 가져오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가 나가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지도자들의 견해를 있는 그대로 받고 수용하여 자기것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어떤 성도가 구원론을 접하게 되면 그것의 깊이와는 상관이 없이 ‘내가 아는 이것이 정답이다. 다른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칫 흑백주의로 흘러들어 갈 수 있다.

그래서 오늘 필자는, 우리(성도)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구원론은 과연 어떤 것인가? 광범위하게 신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구원론의 진리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구원((救援)의 뜻: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구원’은 각각 ‘예수-아’와 ‘소-테-리아’인데, 보편적으로는 임박한 악과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낸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그 의미를 좁혀 ‘죄로 말미암아 오는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 된 생활에서 구해 내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구원, ‘소테리아’는 신약성경에만 약 150회 정도 나온다. (막3:4, 행27:20참조)

2. ‘쏘테리아’의 원형 동사는 영원한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육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다시 말해 구원이란: 영과 육이 질병과 진노로부터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함 (롬5:9절 참조).

3. 마지막으로 ‘소테리아’는 종말적인 점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비로소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롬13:11,고전5:5, 히9:28절 등, 참조).

기본 구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 것이 기본 구원론이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게 되는가? 아니면 죄와는 상관없이 영원구원인가? 하는 것이 주요 쟁점으로 남게 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그가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 교회의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부터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성도)가 교회의 어떤 직위나 직분에 상관없이 반드시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3: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기에 성도라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중생 (重生, born again) 중생이란 ‘파링게네시아’인데 그 뜻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거듭난 성도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가지 욕심과 미혹에 이끌려 (이때도 반드시 고의성이 없고, 실수라야만 하며 짐짓죄나 고의적인 죄는 거듭난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 발을 씻는 기분으로 회개기도를 올리고 돌이켜서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요13:6-9절 참조 )

그러나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 곧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
요1서5: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세상의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 경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과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교회에는 수없이 다녔으나 교회 마당만 밟을 뿐,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속에 모신 삶이 아닌 종교인의 행위에만 그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도 언제든지 그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영생은 주어진다. 죽기 직전에 가서라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그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고 어떤 중직을 맡아서 일을 했다고 하여도 죽기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선다면, 그런 자에겐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많은 이들의 죽음앞에서 두 가지 길로 갈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born again)기 전에는 구원이 없고, 형태는 있으나 알갱이가 없는 가라지들이며,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에 구원을 잃을만한 대죄를 지을 수 없도록 주께서 지켜주신다. 요1서5:18절 말씀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가 거듭난 자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있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간단하다. 그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 삶이 엉망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는 능력이나 병자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인다고 하여도 그것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적과 이사는 사단의 힘을 빌려서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령의 선한 열매가 생활 속에 맺혀져야 한다. 즉 다시 말해, 진실로 거듭난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성령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듭나고 구원을 맛본 자가 하나님보다 그 죄의 유혹이 더 크므로 인하여 죄에 졌다면(반드시 고의성이나 짐짓(계속) 짓는 죄가 아니어야만 함)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가 있다. 그 죄가 만일 ‘음란이나 간음’ 죄라면, 눈물로 자백하고 예수님께 고하면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그 죄를 지은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 주어 멸하고(고전3:17, 고전 5:1-5절 참조)그 영혼은 구원을 받게되니, 영원한 구원이 성립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12:31-32참조)와 배도, 즉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에서 만은 돌이켜야 한다. 이런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불만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무리 강같이 넘쳐 흘러도 그 강물 속에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기지 않는다면, 조상(원죄)적부터 내려오는 죄의 형벌을 속죄받을 수 없고 자기가 그 모든 죄(조상(원죄)의 죄와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요3: 36절 첨조)

그런고로: 우리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말씀) 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서 있나 확증하고 (고후13:5절 참조) 또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항상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여(롬10:9-11)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부끄러움과 회한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김과 구원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립니다!!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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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곳저곳에 선지(예언자) 학교란 특별 학교가 세워지고 자칭 사도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현재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선지 학교와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더 좁혀서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어떤 것이며 예언자의 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1. 예언의 정의:

예언이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예언(豫言)과 동음어인 예언(預言) 이 두 단어의 뜻이 모두: ①앞에 올 일을 미리 말함 ②또는,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말을 듣고 신의 의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③또는, 그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한자로 보면 예언(預言)이 아니라 동일한 동음인 豫言 (예언)을 뜻한다. 또 영어 'predict (prediction)라는 단어와  'prophesy'(prophecy)라는 단어는 같은 뜻 같으나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predict란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의미의  단순 예언(預言)을 뜻하며,  'prophesy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로서의 예언 ((豫言), 신탁()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豫言)자의 개념:

하나님의 선견자(先見者) 로에 대변자 (代辯者), 나비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대변자, 선견자란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말은 그 자신들의 영(spirit)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Holy Spirit)에 의해 말하게 한 대언이었기 때문이다(삼상 9: 9, 23: 16, 13: 2절 참조).

 

구약 시대에도 선지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고 성경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선견자(대선지자, 소선지자 포함)들은 선지 학교 출신들이 아닌,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선견자나 선지자, 예언자의 특성상, 인위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신탁에 의해 주어진 말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주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대언자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교훈도 하시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인 제사장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만인 대언자가 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대언이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인위적인 방법의 선지 학교나 그곳에서 배출된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진정한  예언= 우리에게는 오직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서인 신구약 66권 외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다.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 말씀이다 (벧후 1:19-20).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언이라기 보다는 대언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보혜사 성령님께로부터 성도가 신앙생활을 더 잘 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써,  때로는 예언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말씀을 레마로 주시기도 한다. 곧 양이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직통계시적 형태를 취하는 태도를 삼가야 한다. 우리(성도)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의 역활이시요, 사용되어지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있이어야만 한다. (27:22-25)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

1.      특별계시, 혹은 기록(문서)계시,  2.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성경말씀을 가르키며,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 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 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 속에서나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따로이 선지학교가 필요없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손에 이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무릎꿇고 기도하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따로이 선지 학교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대언 영으로 주시는 말씀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a)  은사로서의 예언: 권면하며 안위하며 덕을 세우기 위해서 대언의 영으로 증거(예언)할 수가 있으나, 반드시 교회와 사람(개인)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고전14:3, 계시록19:10절 참조.) 사업이 잘 될는지, 자녀가 학교에 입학 가능한 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혼은 어떤지...등등, 점치는 형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b)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신명기18:18-22 ).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말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 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c)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4:32절 말씀 ).

d) (다 불과) 두 세사람이 증인, 검증이 되어야 한다.

(고전14:27)

 

d)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3절하반절)".

e)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26
)

f)
다른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1:41-45
)

 g)
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결론적으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악한 영에 미혹 받지 말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잘 인도되어지고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는 것 없고 내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고 온전하신 말씀 안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성도가 복된 성도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미즈노 겐조라고 하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장애시인이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심한 열병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 결과로
그는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며
말도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식물인간처럼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는 고통스러운 몸과 마음이 되어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데.

그런 그에게 이웃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찾아와

성경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겐조의 어머니는 척추가 마비가되어

앉을 수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엎드린채라도

성경을 읽을수 있도록 작은 나무받침대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겐조의 어머니가 나무 받침대위에
성경책을 펴놓아 주긴 했으나,

겐조는 손가락을 쓰지 못하니까
책장을 넘길 수 조차 없었지요.

그래서 겐조가 성경 한장을 다 읽은 후,

눈으로 껌벅껌벅 신호를 보내면 옆에 앉아있던

그의 어머니가 책장을 한장씩 한장씩
손으로 넘겨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해서 학교도 교회도 다닐 수가 없었던 겐조는

남아있던 눈으로만 성경책을 읽고 또 읽었답니다.

그러든 어느날, 그는 성경을 읽다가 그 속에서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레보다못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신 것과 십자가를 지신 그 귀한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게된 그는 울고 또 울었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글로서 표현하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말을 안 들으니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고,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녹음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두 눈만 껌뻑거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철자가 적혀있는 종이를 한장

그앞에 놓아 두고 막대기로 한자 한자 짚어 나가면서

아들의 눈동자를 살폈습니다. 어머니가 들고 있는 막대기 끝이
자기의 원하는 글자에
가서 닿으면 그것이 맞다고 겐조는
눈으로 신호를 보내었고
그러면 그의 어머니가 그 글자를 뽑아서
다른 종이에다 옮겨 적었고,
이렇게 고통 중에서
 겐조가 눈으로
한자 한자 모아서 적은 글이
 
시집으로 출간 되었는데
그곳에는 아름답고 영감있는
시가 170여편이나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편을 여기에 소개하면,

제목은 괴롭지 않았드라면…’ 하는 것인데,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드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드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드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정말 눈물없이는 읽을 수가 없고 깨달은자 만이
 쓸 수가 있는 시요,
깊은 영감이 흐르는
 아름다운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 보면

내가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우리가 쉬운데로 부모자식간의 예를 한번 살펴 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치 않는 것은 받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 입니다.

부부지간도 형제자매도 이웃간에도 꼭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설령 내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그저 나와함께 있어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같이 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떨며 울고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안그래요?

 

이것은 육신적인면도 그러하지만 영적인면도

 매 한가지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의 사랑그것 하나만 생각하여도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이 생명 다 하는 그날까지 감사 또 감사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란.오직 깨닫는 자만 느낄 수가 있고

누릴수 있는 특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주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한 주간만이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해 보십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해 보십시다.

감사가 있는 곳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50:23)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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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칭 '선한 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이곳 저곳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게 나아오는 자는 좋은 꼴을 먹으리라!.하는

아주 멋들어진 구호를 내어걸고 나팔을 불어대며 대대적인 선전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서 매일, 매달, 매년 목자들의 모임이라는 모임도 가졌고,
어떻게 하면 양떼들에게 더 좋은 꼴을 먹일 수가 있는가? 어디에 가면 잃어진
양떼들이 더 많이 흩어져서 울고 있는가? 또는 어떻게 하면 병든 양떼들을 보다
치료해 줄 수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주제로 가르키기도 하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떠벌리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답니다.

 

내게로 나아오는 자는 좋은 꼴을 먹으리라!

너무나 멋진 그들의 슬로건을 보고 솔깃해진 몇몇의 흩어진 양떼들이 선한 목자의

우리 라고 크게 써 붙인 우리 안으로 찾아서 들어 갔습니다. 캄캄한 밤중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살금살금 기어오드니 양 우리의 문을 덜컹!하고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목초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지금 막 잠이 들어있는 양떼 중에서 몇마리를 콱! 움켜쥐고는
밖으로 질질끌고 나가버렸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자고있던 양돌이와 양순이가  없어졌다고 우리안의 양떼들이 술렁이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중에 힘께나 쓴다는 양이 목자에게 가서 따져서
묻자고 했습니다. 양떼들의 말을 듣고있던 자칭 선한 목자들은 "별 일이 아니니
조용히 하라.두 눈을 부라렸을 뿐, 시원한 대답조차 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우리에
들어간
양떼들은 병이 들어도 고침을 받지 못했고, 상한 양떼들은 싸매임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발길질을 당하고 강포를 당했지요. (겔34장 참조) 이렇게
해서 매일 밤
양떼들은 한마리씩 두마리씩 시라져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염려를 하던 중에 자국의 양떼들을 지키시려고
선한 목자선발 대회를 여시기로 했습니다. 선한 목자의 자격이 주어진 자에게만
자국의 모든 양떼들을 맡기시겠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격을 따는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죽음의 계곡까지 단신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선한목자의 자격을 따 내는 것에 목슴울 걸어야 한다니흥, 어림도 없는
소리야... 라고
말하면서, 자칭 선한 목자들은 그 누구도 이 컨테스트에 응시하는
자가 없었지요.
이것을 본 하나밖에 없는 그 나라의 왕자님이 자원을 하셨습니다.
자국의 양떼들을 자신이 지키시겠다는 결심이셨지요.

 

이 말을 들은 자칭 선한목자들은 왕자님을 증오했습니다.

어떻게하든지 왕자님을 편안하게 죽음의 계곡까지 들어갔다가 나오시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떼를 지어 왕자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시는 왕자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채찍으로
때리며 발로 차기도
했고,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지요. 그래도 분이 안풀린 그들은
큰 나무를 세워놓고
그곳에다 왕자님의 양 발과 양 손에 대못을 박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엮어서
푹 씌운 후, 날카로운 창으로 옆구리를 푹 하고 찔렀답니다. 그리곤
고통 당하는 왕자님의 발 밑에 둘러서서 낄낄거리다가 결국 죽음의 계곡으로
질질 끌고 가서는 발로 툭! 차서 언덕 아래로 밀어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너무나 화가 나서 군사들을 풀어서 죽음의 계곡아래

떨어져서 쓸어져 있던 왕자님을 궁전으로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군사들이 쓸어진 왕자님을 안고 가는데왕자님이 가시는 길에는

왕자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임금님의 궁전은 양떼들을 보호하는 우리를 크게 짓고 그곳에 들어오는

모든 양들은 누구든지 보호받고 좋은 꼴을 마음대로 먹으면서 안전하게

살 수가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이 목숨으로 바꾸신 선한 목자 타이틀 아래로 찾아오는

모든 양떼들에게는 선한 목자되신 왕자님이 아픈 상처는 싸매어주시고...

병든자는 고쳐주시며...배고픈 자에게는 좋은 꼴로 먹이시며...

친히 돌보아 주신다고 하네요.

 

그 길을 어떻게 찾을 수가 있느냐구요?

그것은 염려마세요.

왕자님이 가신 그 길에는 샛빨간 핏자국이 선명하답니다!

피가 점점이 배어 있는 그 길로만 찾아오세요.

결코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답니다!

 

그때 그 자칭 선한 목자의 후예들이 지금도 그때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내게로 오는 자는 좋은 꼴로 먹이리라!!" 고 하면서 대대적인 홍보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네요. ..... 

 

사랑하는 형제자매 양떼들이여, 속지맙시다!

우리는 오직 핏자국 선명한 그 길로만 갑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절 말씀)


최송연/사모

 


        

본국에서 유명한 어느 기독교 싸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자신의 신분을 ‘서울의 어느 신학대학원의 교수라’고 밝힌 L교수님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가 있는가?’ 라는 거창한 명제 아래 밝힌 글의 요지는 결국, 현대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끝을 맺고 있음을 보았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더욱이 놀라운 것은 모신학대학교 교수라고 자신을 밝힌 L교수님은 이런 엄청난 명제를 다루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해 줄 수있는 단 한구절의 성경말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청교도들의 신앙고백인 ‘웨스터민스터’의 신앙고백과 또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가 그러함으로 그러하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경솔함에 놀랍다 못해 경악을 금치못하겠다. 다시말해서 L교수님은 성경말씀을 감(減)하는 죄를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범하고 있으며 들은 풍월로 성경을 다시 써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성도)는 오늘날도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10장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10장26절)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라고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직통계시적 형태를 배재해야 한다. 우리(성도)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의 역활이시요, 사용되어지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있이어야만 한다. (행27:22-25)

계시속에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1. 특별계시, 혹은 기록(문서)계시,  2.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성경말씀을 가르키며,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계시도 자연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속에서나 혹은 일반계시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성도(양)는 반드시 목자의 음성, 곧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중에서 우리들의 속에 계시면서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의 몫이며, 반드시 성경말씀을 레마로 들려져야하고 말씀이 생각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양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목자로서 양들을 바른 길, 구원의 길,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다. 언제 어느 때 장사가 잘 되고 또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고 없고, 등등…이런류의 점치는 형식이나 쪽집게 점쟁이식의 음성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다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음성듣기 분변법 성서적근거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21절 말씀”. 했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 할 때나 무시로 기도 할 때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그 음성을 판별하지 못해서 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었을적 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 내는 훈련을 시키셨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되어진 대언은, 그 정확성에 있어서 단 한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1.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절하반절)".

2.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26절)

3.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4.다른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1:41-45절)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키므로서 성령님의 역활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의식이나, 직통계시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많이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 풍월, 혹은 배운 신학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서 항상 살아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과 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드려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된다.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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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대로 지난 화요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돈이 엄청나게 많으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공황당의 노련한맥케인후보를 제치고, 이름도 없던 민주당의 젊은 후보, ‘오바마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Point  Mccain 163,  Obama 349)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건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이야 여러가지가 되겠지만, 가장 교훈을 꼽으라면, 필자는 이번일로 인해서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과 꿈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은 아직도 꿈의 나라로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앞으로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를 논하는 것은 정치가들의 몫이요, 사람의 일반시민이요, 크리스챤인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바마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대표적 인물이요, 거듭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거는 기대치를 높이기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로, 그의 지나온 과거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대통령선거가 한참 치열한 때에, 필자는 CNN 뉴스에서 오바마 대통령 후보의 살아온

삶에 대해서 기자들과 대담을 갖는 것을 경청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흑인

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0살이 때까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채 자랐습니다  10살때 한번 만나본 아버지는 다시 그의 고향인 케냐로

돌아갔고,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젊은 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해서 오바마곁을 떠났습니다., 졸지에 홀로 남게   그를 백인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맡아서 키웠습니다  다행히 그는 머리가 좋아서 하와이에서 최고 수재들만 어간다는 사립학교푸나호 들어가긴 했으나, 시만 해도 그곳에는 다수가 돈많은 집의 백인 아이들이었습니다  (Punahochool:: Hawaii에서 전통있는 명문사립학교로써 옛날 왕족들만을 위해서 세운 학교임)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그만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체성을 잃은 그는 끝내 마약에까지 손을 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났고 대학교에 가서( Occidental) 그의 삶은 완전히

뀌어졌습니다. 뉴욕에 있는콜롬비아 대학하바드 법대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젊은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죽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기 하루 , 월요일 , 어린 그를 맡아서 길러주시던 그의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아픔과 역경을 딛고 당당히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일로

인해서 미국은 지금 흥분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가 아브라함 링컨을 연상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브라함 링컨은 흑인은 아니지만, 그가 역경을 딛고
일어선 대통령이요, 흑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써, 아브라함 링컨 역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에서 비교할 하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1900년대에 경제 공황을 이기고 승리한 미국의 26 대통령 이였던

루즈벨트 기억합니다.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1858-1919)대통령은
어릴 소아마비를 앓고 휠체어가 없으면 걷기조차 힘이 지체장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그가 대통령이 , 남긴 멋진 연설은 경제 대공황에 빠져서 허덕이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안정시키고 국민에게 새로운 새로운 꿈과 비젼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두려움 자체입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환경이나 주어진 조건만을 바라본다면 가장 먼저 죄절할  밖에 없는루즈벨트대통령의  말은 모든민들의 마음에 하면 된다고 하는 도전의식과 뜨거운 열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다시 힘을 얻은 모든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일어서서 열심히 일을 댓가로 미국은 세계에서 경제대국이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을 획득해 내었다고 봅니다.

 

세상은 지금 전쟁과 기근의 소문, 경제의 어려움, 이런저런 암담한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제 미국과 세계는  다시금 어려움에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먼저 믿는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고 담대한 믿음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다음에 일어서서 굳세게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이방인들과 악조건의 환경이

여러분과 앞에 굴복을 것입니다. 요셉의 두형님들이 요셉앞에 무릎을 꿇게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내가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을 먼저 회복해야만 합니다.
이제는 우리 성도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의연히 일어서서 일해야 때입니다.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활을 감당해 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소금의 맛을 잃은 자들이요, 밖에 버리워져서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이렇게, 성도라는 자기 정체성을 그리스도안에서 확고히 해두 아니하, 어려운 현실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살이라고 하는 마지막 보루마저 스스로 무너트리는 어이없는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분연히 일어나지 아니하면 이방인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짓밟을 것입니다!  경제 난국이다, 말세다, 네가 옳다 내가 옳다언제까지 서로 반목하며, 개탄하고, 시커멓게 몰려오는 태풍만을 바라보고 두려워 떨면서 뒤로 물러가기만 하고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잃고 방황했을 , 흑인이라 괄세받고 천대 받던오바마’, 부모에게 마저 외면 당했던오바마’,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 모든 악재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나갈 수 있었고, 그럴 때, 세상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고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먼저 찾고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자의 사랑받는 아들과 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내가 깨달아야할 우리들의 정체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값주시고 자신의 아들과 딸을 향해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41:10하반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인오바마 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여러분과 나도 있습니다!  

 

 최송연/사모

 


 

    심리학자 젤린스키는 걱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나 일에 대한 것이고,

    걱정의 22%는 안 해도 될 사소한 것이고,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고,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걱정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청교도들의 7가지 감사의 조건에서 나는 큰 힘을 얻습니다.


    첫째,    180톤 밖에 안되는 작은 배지만, 그 배라도 주셨음에 감사.

    둘째,    평균 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

    셋째,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

    넷째,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져 나갔으나 배가 파선하지 않았음을

                감사.

    다섯째, 여자들 몇명이 심한 파도 속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되었음을 감사.

    여섯째,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한 달 동안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곳에

                상륙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

    일곱째,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단 한명도 되돌아 가자고

                고집하는 사람이 없었음을 감사.


    또 구약 성경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환란과 역경속에서도

    하나님 한분으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는 언제나 즐거운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건강에 어려움, 가난의 어려움,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이웃과의 갈등 등등...

    각가지의 어려움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려운 현실에만 내 시선을 너무 집중시키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님에게

    내 시선을 집중시킬 수만 있다면 ,

    우리도 여호와 한분만으로 즐거워하는 마음이 항상 넘칠 수가

    있음을 믿습니다! 이런 감사야 말로 차원이 높은 감사입니다.


    이 아름답고 복된 추수절기에 우리도

    우리 믿음의 조상들처럼 '아무것도 없고, 없고, 없을찌라도

    오직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분이 내게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노래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감사수준으로

    내 신앙을 끌어올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최송연/사모






 

최상의 선택

 

우리는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해야할 일들을 만나게됩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직업, 결혼대상을 선택해야 하는 것,

어찌보면 매일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입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감옥 안에서 후회하며 지내야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순간 잘 된 선택으로 일생이 별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선택이란 단어 자체는

간단하고 쉬운 말같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쉽게 생각해 버릴 사안은

또 아니란 것입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시절, 보리스 콘펠드라고 하는 젊은 유대인

의사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함을 얻고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겠다

것과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겠다였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다시 의사로서 일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불법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전날,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해 준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늦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의사는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 이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약속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이 의사로 인해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순간의 선택,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한 영혼을 구원시킬 것이냐, 아니면 그냥 방치해 둘 것이냐 하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고 그냥 넘겨 버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당신의 일생에 허락된 그 많은 선택의 시간들 중,

과연 “최상의 선택”에 사용되어진 시간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12:3절 말씀)”

 
최송연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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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를 게을리 마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모가 섬기는 교회는 언제나 부흥한다. 그것은 어떤 역경이 와도 기도를 많이 하게되면 담대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기 때문이다.

2. 말씀을 많이 읽어라.(성도들은 목사님뿐만 아니라 사모도 성경박사이기를 원한다. 평소에 꾸준히 읽어놓으면 갑작스런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줄 수가 있다.)

3. 좋은 어머니가 되라.(문제부모가 문제아를 낳는다는 말은 목회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알라. 비뚤어진 자녀가 있는 목회자 가정은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그 부모의 신앙인격이 이중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 어머니가 올바른 신앙관점으로 자녀들을 훈계로 양육하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설사 잠시 빗나간다 해도 다시 되돌아 온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4. 목사님을 잘 내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명심하라. (목사직은 영적인 일로서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책이다. 따라서 사모가 그의 건강관리도 잘 해주어야 하지만 때로는 그의 애인도 되어주고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때로는 친구도 되어 주어야 하며  때로는 야당이 되어 비뚤어진 길을 가지못하게 따끔한 충고도 서슴치 않고 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5. 교회일에 간섭하지 마라. (헌신이란 이유로, 개척교회란 이유로 사모가 교회안에서 동분서주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길러내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재능이 많은가? (피아노 혹은 꽂꽂이) 내가 직접하려말고 조금 부족해도 성도들 중에서 그 일을 하게 하라. 그것도 안되면 가능성이 있는 성도를 택해서 무료 개인지도를 시켜서라도 그들이 하게 하라. 일군이 없는가? 그래도 사모는 앉아 있으라 그러면 주께서 적재적소에 적당한 일군을 보내심을 깨닫고 놀랄 것이다.)

6. 돈을 사랑하지 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 어떤 명분으로도 투기성투자는 사모가 할 일이 아니다. )

7. 매력적인 사람이되라. (궂이 사모가 아니드라도 너무나 화장이 짙거나 사치스러우면 눈살이 지푸러진다. 하물며 사모이랴. 또 너무나 남루하게 하고 다녀도 궁상맞아 역시 보기에 좋지가 않다. 외모는 성경에있는 대로 단정히 하고 무엇보다 속사람( Inner person)을 강건히 하라. 지식과 교양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 잘 다듬어지면 반드시 ‘고운 우리 사모님’이란 칭호와
함께 여성 성도들의 사랑과 신망을 받게 된다.)

8. 지식과 정보에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많은 교양서적들을 읽고 가능하다면 적어도 한가지 외국어 정도는 능통하도록 노력하라. 특히 이민목회자의 가족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성도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되면 존경보다는 멸시가 뒤따르게 된다.)

9. 구제에 힘쓰라. (구제를 많이하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후히 갚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10.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라. (여자성도들의 매서운 입씨름에 말려들지 않는 최선의 방법중 하나는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원수까지라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사모가 가장 참기어려운 때가 바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말을 (대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사모에게 상처를 주려고 만들어 내는 말들로서 신빙성이 없는 소리들이다.)들었을 때 자기의 결백함을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때가 바로 사탄에게 칼을 넘겨 주게되는 때임을 깨닫고 결코 분노하거나 또는 말질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란 명분으로라도 말을 쏟아 놓아서는 않된다.

잠잠히 주님만 바라고 참고 있노라면 반드시 주께서 일어나 도와주신다. 그렇게 되면 시험의 물결은 곧 잠재워지게 되고 오히려 그런 사모가 신뢰를 받게된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면 억울하고 분한 소리를 액면 그대로 받게되고 그 때 자신이나 목사님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가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장10절 하반절 말씀)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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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이적과 기사, 입신- 모두 성경적인가?

 

요즘 소위 부흥의물결 이라는 명제하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치유사역, 입신, 금가루현상, 수십명의 죽은 사람을 살렸다 하늘에서 금발의 미녀천사가 (싸구려)보석을 떨어트렸다 초자연적 능력, 등등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이야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다고 치드라도 성경을 잣대로 알고 믿는 성도들 중에서도 갈피를 잡지못하고 이단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함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인터넷에 올려진 이런 말들과 자료들을 접했을 때, 혹시, 19세기에 일어났던 그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련가?사실, 기대하는 마음과 긍정적시각으로 그 사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또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아주사거리의 부흥이 우리 세대에도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부흥의 불길이란 것에 무언가 예감이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대로 뭉쳐서 예언이란 이름하에 서로가 서로를 올려주기도 하고 세워주는가? 하면 성경에도 없는
입신이란 이름아래 천국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을 제 집 안방 드나들 듯이드나들고, 각종 보석(싸구려)들을 천사가 떨어트렸다고도 하고 심히 수상쩍은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봅니다. 글쎄요, 그런 조잡한 일들이 과연 성서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글, 입신상태의 말,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다 똑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1.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그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급)

2.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더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및 직분자들

3.‘샤마니즘’적 신앙, (무당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것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차,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득이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것같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본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적으로 있어서 그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듯,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듯 보여지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의 대처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플지 말아야한다는 성경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말것 (계22:18_19절, 벧후1:20절 참조)

2.이적과 기사가 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그 말씀에 의거해서 반드시 영을 다 믿지말고 말씀에 따라 검증할 것 (요1서4:1절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그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말것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할 것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 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켜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됨을 인쳐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풀이할 때,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눅24장32절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 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 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볼 때,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상태가 꼭 ‘입신’이다 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궂이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들의 꿈에나 혹은 비몽사몽간에라도 나타나셔서 통곡하셨다면, 그 이유가 오직 사람들의 잃어진 영혼을 위해서요, 그 영혼을 전도하지 않는 게으럼과 주의 종들의 시기질투로 인해서 전도문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어야만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고, 그 이외에 어느 것도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의 눈에 눈물을 흘리시게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설사 통곡하시는 주님을 환상에서나 비몽사몽간(저 역시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에 뵈었다고 하여도 그 이유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는 선전도구로 활용하거나 다른 성도들보다 더 신령하다고 착각을 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떨어진 자요 그런 영혼은 이미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전락된 상태일 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양심을 팔아먹어서도 안 될 것이며, 무조건 모든 기적과 이사는 폐지되었다 주장을 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이적과 기사가 다 검증없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안에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합치고,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합쳐야 하며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교회가 다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며 주인이 되심을 믿고, 신령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이는 가르키는 자로, 또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 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김을 위해서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섬기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 되고, 어떤 특정교회에 국한된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이런 사기극에 휘말리지 않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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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조(共命鳥)

공명조(共命鳥)란 실크로드에 전해지는 전설속의
새입니다.

공명조(共命鳥)는 머리는 2개 몸은 하나인 새,
한편은 낮에 일어나고 다른 한 편은 밤에 일어나
언제나 서로 시기하고 으르렁대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공명조(共命鳥)는 결국 시기심을 끊지
못하고 다른 한편에 독약을 먹여 같이 죽고 만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전설이 지닌 본래의 의미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인간 마음의 모순과
갈등을 상징하고 있다지만….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한 몸같은 부부, 한 몸같은 이웃,
한 몸같은 교회, 한 몸같은 국가,

한 몸에 머리가 둘이되면, 사고에 혼란을 가져오고
지적능력을 마비시켜,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인지 원수인지 조차 구분이 안되어
밤낮  시기하고 질투하며 으르렁대다가
결국 같이 망하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가요?

공동체의 머리는 언제나 하나이어야만 합니다.
물론, 서로가 도우며 생각을 함께 모두는 것은 좋지만,
머리되겠다고 서로 우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머리되시고 모든 영적지도자들은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협력하고 사랑하며
내 몸같이 섬기는 교회,

아내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가장을 머리로 하는 가정,
아랫 사람을 자기의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지도자가 머리되는 직장과 국가로
이루어 나갈 수 만있다면,
이 사회는 지금보다 얼마나 더 풍요롭고
얼마나 더 아름다울가요….

오늘은 왠지 전설속의 공명조(共命鳥)가
더욱더 가슴시린 이야기로 떠오릅니다.

우리 주님은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가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가 없다(막3:24-25절 말씀)” 고 하십니다.

내 자아 속에서, 내 가정에서, 내 이웃에서, 내 교회에서
서식하고 있는 공명조(共命鳥)를 몰아 내지 못한다면….
결국은 모두 망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최송연 사모



'찌르르, 찌르르, 쓰르르, 쓰르르'
풀벌레 소리 요란하며...
코스모스가 만발한 가을입니다.

이 가을이 지나면....곧 겨울이 오겠지요.
울 문턱에 서 있자니...
이솝이야기 중에 한 편이 생각나더군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녹음방초가 우거진
한여름 개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하고 있었을 때 베짱이는 시원한 그늘 밑에 누워서
노래하며 놀기만 했더래요...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간 후
어느덧 무서운 겨울이 찾아왔지요.
매서운 북풍에 온 땅은 얼어붙고…
밤낮으로 몰아치는 된서리와 눈보라는
산과 들을 하얗게 뒤덮어버렸는데

아뿔싸, 준비 없던 베짱이는 가엾게도
그만 굶어 죽게 되었더래요.

그제야 베짱이는 후회하며 울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온 여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준비했던 개미네는 따뜻한 집에서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와 있던 한편의 이솝이야기입니다. 아시죠?

준비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준비하라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는데…


문제는,
우리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으로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기름준비를 잘한 다섯 처녀와 기름준비를 전혀 하지 아니한 다섯 처녀…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냉혹히 분류하시는 때가 있는데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도 개미
신자와 베짱이 신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디에 속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 깨어서 준비하라!”
애타게 경고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읍쓰~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다구요?
쉬운 이야기 속에 진리가 담겨져 있거든요. ^^



별똥별/ 최송연



'아킬레스’(Achilles)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한 신화적 인물로서 아버지 ‘펠레우스’(Peleus)와 어머니인 바다의 요정 ‘테티스’(Thetis)사이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을 불멸의 인간으로 만들려는 생각에 물에 담그기만 하면 불멸할 수 있다는 마술의 ‘스투스’(Styx)강물에 어린‘아킬레스’를 담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한쪽 발목을 잡고 물에 담근 후 다시 다른쪽 발을 물에 담그는 것을 그만 깜빡 잊어 버렸다.

때문에 ‘아킬레스’는 성장한 후 그 어떤 화살이나 무기에도 끄떡을 하지 않는 불멸의 영웅이되어 가는 곳마다 대 승리를 얻긴하지만 그에게는 약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그의 다른 한쪽 ‘발목의 힘줄’(Achilles tendonitis)였다.

이것을 안 그의 정적 ‘파리스’(Palis)가 그를 죽이기 위해서 아킬레스의 취약점인 ‘건’(발목을 받쳐주는 힘줄)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했고, 결국, 정적 'Palis'가 쏜 독화살 한 개가 아킬레스의 발목 힘줄을 관통하므로 아킬레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쓰러져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Point는 '아킬레스’가 죽은 이유이다. 물론, 불멸의‘아킬레스’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독화살이라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취약점인 ‘발목 힘줄”이 적에게 노출된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우리자신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아킬레스건’을 사단에게 결코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세간에서 한 때, 유명하던 목사님들, 유능한 영적 리더들이 왜 무참히 땅에 떨어지고 쓸어지는가? 또 온누리에 별처럼 밝게 빛나던 연예계의 몇몇 유명인사들이 왜 자살이라고 하는 마지막 보루를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택해야만 했던가? 그것 역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좌절의 쓰디쓴 잔이라 할지라도 미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셔야만 하는 잔이라 여기고 능히 들이킬 수 있는 믿음의 힘, 요셉처럼, 욥처럼 오늘의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게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길러내지 못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도 모든 면에서 뛰어나 보였던 그들에게 오직 그 부분이 취약점이였고, 그들의 아킬레스 건이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다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찾아서 막지 못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약성경의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택함을 입은 큰 능력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이방여인과의 사랑놀이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삼손은 사단에게 코를 꿰여 두눈을 다 빼앗겼고, 결국 목숨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또 신약성경에서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의 열두제자중에서도 유능하여 재정출납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물질의 유혹 앞에서 여지없이 넘어져 버렸다. 어이없게도 그는 단돈 은 30냥에 스승인 예수를 팔았고 결국 목매어 자살함으로서 천추에 한을 남긴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아킬레스건’은 어떤 것인가, 돈?여자?명예? 혈기? 교만? 이기적인 성격? 그 어떤 것이든지 상관이 없다. 우리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아킬레스건’이 없는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
(롬3:10-12절 참조)

문제는 나의 ‘아킬레스건’을 속히 찾아내어 주님께 갖다드리고 그 약한 부분을 막아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거기에 문제가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교활한 사단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내게 있는 나의 취약점을 사단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단은 그 부분을 쉴새없이 공격을 해대고 있음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가 있는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속히 찾아내어  주님께로 들고 나가 그 약한 부분을 주님의 보혈로 막아달라고 간구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베푸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0-12절 말씀)"

최송연/사모



        


나는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구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동물, 아니,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선택의지능력’을 인간에게만 부여하셨음을 알게하여 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요, 우리에게는 권리장전의 표식이요, 선과악을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멋진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무조건 순복하도록 창조되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짐승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도 또 그분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선택의지능력도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율권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악을 택할 수도 있고 선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율성의 능력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사랑보다 자신이 선택한 자율적인 사랑이 더 의미가 있고 더 가치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들을 용서하시는 방법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 죄인들을 향해 “너의 죄를 사하노라…”  어느 영화장면의 한 대사처럼 그렇게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셔도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요10:18절 참조) 그러길래 십자가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값진 사랑이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 남편보다 훨씬 더 잘 생기고 유능한 남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즐거이 내 남편을 사랑하며 내 가정을 지킵니다.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요 내가 선택한 내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다 미쓰 코리아는 아니며 다 팔등신 미인들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며 가정을 지키려고  애를씁니다. 내가 택한 나의 가정이요 내 아내이기 때문이겠지요…우리는 때때로 선택권을 남용해서 실낙원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한 예로,
얼마 전, 뉴욕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 중의 한 유능한 목사님이 7계명을 범하고 추락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들(특히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잠시잠간의 쾌락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늘의 유혹과 싸워 이길 것이냐? 선택의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당당히 승리할 것을 택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요, 정욕을 택하는 것도 자신의 몫입니다. 만약, 그 목사님께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십자가의 길을 택했더라면, 가족의 행복은 물론, 그의 목회여정은 한결 더 빛이 났을 것이고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라 하는 칭찬과 예비된 상급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보다는 보이는 육신의 쾌락을 택했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사랑스런 가정을 어둡게 했으며 에덴동산같이 사랑스럽고 축복된 교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을 선택할 수도 있고 선을 선택할 수도 있는 자율권이 주어진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멋진 피조물들입니다!  처음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이 권리를 남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낙원,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선택의 능력을 남용한 인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나에게 주어진 이 멋진 선택의 권리를 남용하지만 않는다면 이 선택의 능력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찾을 수가 있고, 그 길을 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택하고 실낙원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로, 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예수 그리스도)을 택하고” (신명기 30:19)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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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Win)윈(Win) 전략아래 뭉치는 성도

몇 년 전에는 예기치 못한 해일로 인해서 동남아 일대가 무섭게 내려앉는 고통을 보았고, 요 얼마전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큰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슴을 잃고 쓸어지는 것을 속수무책의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었다. 또 이삼일 전에는 가장 건재하다고 생각하던 미국의 한 곳,  ‘루이지아나’주가 갑자기 몰아친 태풍 앞에 맥없이 주저앉고 많은 사람들이 집과 재산을 잃고 울부짖는 것을 보게되어 마음이 아팠다. 이제 어디가 안전하다는 것인가? 이 지구촌은 이제 더 이상 안전지대란 없다. 왜그런가? 이미 이세상은 예수님께서 예고해 주신대로 D-day를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우리성도가 해야할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윈(Win)-윈(Win)”작전을 세우신 그 분의 뜻 아래 뭉쳐야만 하고 그분의 명하신 지상명령,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파해야만 한다.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따지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윈(Win)-윈(Win)작전이란 무엇인가? 남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전략, 상생의 원리를 말한다. 다시말해서 나도 상대방도 다 함께 잘되고 승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에서 값진 메달을 많이 획득했다. 물론, 모든 메달이야 다 값진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궂이 한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세계 랭킹 1위인 인도네시아 팀을 이기고 여덟 번째 온 국민에게 안겨 준 환상의 혼합 복식 팀, 이효정과 이용대선수가 따낸 금메달이 아닐까 싶다. 이성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팀을 이루고 마음을 같이해서 따 낸 금메달이기에 더욱 빛나고 더욱 값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탁구도 그랬다. 시청하는 국민들의 손에 땀나게 한 남녀 복식팀이 일본과 강대국 오스트리아를 너끈히 물리치고 두 개의 동메달을 따 낸 것이다. 이들이 얻은 매달은 두 사람이 호흡을 같이 하지 못했다면 결코 일구어 낼 수가 없는 케거인 것이다. 한 개인이 따 낸 메달도 물론, 값진 것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협력해서 얻은 메달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성격이 다르고 실력이 다르고 배움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고 성(sex)이 다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자신의 모든 점을 살려가면서 다른 이와 함께 호흡을 같이 했고, 그 결과는 선수라면 누구나 소원하는 일이지만, 모든 선수가 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었고, 우리 온 국민들에게는 영광의 메달을 안겨주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연합하여 일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본다.

자기 자신만이 성공하겠다고 생각하며 남을 짓밟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세상의 기업들이 이 “윈(Win)-윈(Win)”전략을 많이 권장하고 있고 그런 방침을 실천실행하는 기업체는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음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런데,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윈(Win)윈(Win) 전략을 세상기업들이 창출해 낸 아이디어인 것 같지만, 실은, 2000여년 전에 우리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실천하신 전략일 뿐이란 것이다. 그 분의 십자가 사건을 보라. 자신이 죽으심으로 남을 살리셨다. 삼 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다른 사람도 죽음을 이기게 도와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윈(Win)-윈(Win) 전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구속을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뉘어 사역하시는 아픔을 참으셨으며,  협력하여 일하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다!!

성도라고 한다면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예수님의 이 전략을 제대로 이해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전략아래 굳게 뭉쳐야만 한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도와야한다. 믿음에 강한 성도가 약한 성도를 도와야 한다. 그럴 때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긴다. 그러나  남을 죽이려고 하면 나도 죽는다. 우리는 더불어서 잘 사는 상생의 원리를 배웠다. 이제 실천을 해야할 때이다. 이제는 지구촌이 하나다. 어디인들 안전하랴. 우리는 우리 예수님의 윈(Win)-윈(Win) 전략아래 뭉쳐야만 살 수가 있다. 오직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만이 영원하고 그 나라의 주인이 가신 그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그들만이 주님과 함께 영원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에...

"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2-3)"

 



최송연/사모
구원론(救援論, Salvation)

우리(성도)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다름아닌 구원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구원론을 다루기를 회피하는 것은 구원론이란 사실 신학상의 용어로서 잘못하면 오해를 가져오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가 나가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지도자들의 견해를 있는 그대로 받고 수용하여 자기것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어떤 성도가 구원론을 접하게 되면 그것의 깊이와는 상관이 없이 ‘내가 아는 이것이 정답이다. 다른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칫 흑백주의로 흘러 들어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필자는, 우리(성도)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구원론은 과연 어떤 것인가? 광범위하게 신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구원론의 진리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구원((救援)의 뜻: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구원’은 각각 ‘예수-아’와 ‘소-테-리아’인데, 보편적으로는 임박한 악과 위험으로 부터 구출해 낸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그 의미를 좁혀 ‘죄로 말미암아 오는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된 생활에서 구해 내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구원, ‘소테리아’는 신약성경에만 약 150회정도 나온다. (막3:4, 행27:20참조)

2. ‘쏘테리아’의 원형동사는 영원한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육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다시말해 구원이란:영과 육이 질병과 진노로부터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함 (롬5:9절 참조).

3. 마지막으로 ‘소테리아’는 종말적인 점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비로소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롬13:11,고전5:5, 히9:28절 등, 참조).

기본 구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 것이 기본 구원론이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게 되는가? 아니면 죄와는 상관없이 영원구원인가? 하는 것이 주요 쟁점으로 남게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그가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 교회의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부터 연구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성도)가 교회의 어떤 직위나 직분에 상관없이 반드시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3: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기에 성도라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중생 (重生, born again) 중생이란 ‘파링게네시아’인데 그 뜻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거듭난 성도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가지 욕심과 미혹에 이끌려 (이 때도 반드시 고의성이 없고, 실수라야만 하며 짐짓죄나 고의적인 죄는 거듭난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 발을 씻는 기분으로 회개기도를 올리고 돌이켜서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요13:6-9절 참조 )

그러나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 곧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
요1서5: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세상의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 경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과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교회에는 수없이 다녔으나 교회 마당만 밟을 뿐,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속에 모신 삶이 아닌 종교인의 행위에만 그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도 언제든지 그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영생은 주어진다. 죽기 직전에 가서라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그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고 어떤 중직을 맡아서 일을 했다고 하여도 죽기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선다면, 그런 자에겐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많은 이들의 죽음앞에서 두 가지 길로 갈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born again)기 전에는 구원이 없고, 형태는 있으나 알갱이가 없는 가라지들이며,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에 구원을 잃을만한 대죄를 지을 수 없도록 주께서 지켜주신다. 요1서5:18절 말씀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가 거듭난 자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있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간단하다. 그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 삶이 엉망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는 능력이나 병자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인다고 하여도 그것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적과 이사는 사단의 힘을 빌려서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령의 선한 열매가 생활 속에 맺혀져야 한다. 즉 다시말해, 진실로 거듭난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성령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먼, 거듭나고 구원을 맛본 자가 하나님보다 그 죄의 유혹이 더 큼으로 인하여 죄에게 졌다면(반드시 고의성이나 짐짓(계속) 짓는 죄가 아니어야만 함)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가 있다. 그 죄가 만일 ‘음란이나 간음’ 죄라면, 눈물로 자백하고 예수님께 고하면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그 죄를 지은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 주어 멸하고(고전3:17, 고전 5:1-5절 참조)그 영혼은 구원을 받게되니, 영원한 구원이 성립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 성령을 홰방하는 죄(마12:31-32참조)와 배도, 즉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에서 만은 돌이켜야 한다. 이런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불만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무리 강같이 넘쳐 흘러도 그 강물 속에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기지 않는다면, 조상(원죄)적부터 내려오는 죄의 형벌을 속죄 받을 수 없고 자기가 그 모든 죄(조상(원죄)의 죄와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요3:36절 첨조)

그런고로: 우리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말씀) 하신 말씀위에 굳게 서서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서 있나 확증하고 (고후13:5절 참조) 또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항상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여(롬10:9-11)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부끄러움과 회한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김과 구원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립니다!!  


최송연/사모



요즈음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되어 심각하게 대립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한 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크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한 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고 말라기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 놓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이는 십일조를 내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양, 성도들을 기복사상으로 유도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 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되고 도둑이되지 않기 위해서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물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 내게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영죽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다는 고백, 내가 누리는 이 구원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학산되어지도록 하기위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 십분의 일을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되 자원하는 심령으로 모든 헌물(십일조 포함)은 드려져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어떤이들은 십분의 일이 아니라 십분의 이나 삼, 더 나아가서 십분의 구까지도 기꺼이 드리는 성도가 있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을 수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 주님은 즐겨 내는 자를 기뻐 받으시지, 의무나 인색함으로 하는 예물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흠향하지 않으신다. 주님이 받지도 않으시는 예물을 바쳐야할 필요가 어디있는가?(고후9:7절 참조)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서 뜨겁게 올라온다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아까울 것인가?

1. 구약의 모든 율법은 폐하였고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율법은 예수 크리스토안에서 완성되어진 것이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마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to fulfill)케 하심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십자가위에서 온전케 하셨다. 요한복음19:30절, 예수 크리스토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위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그것은,
첫째: 구속사역을 다 이루심(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둘째:  율법을 온전케 하심(사랑안에서 온전케됨)
구속사역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율법을 온전케 하심이란:
마태복음 22:37-39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약하여 율법은 사랑안에서 완성되어졌다.
1. 위로는 하나님 사랑  2. 아래로는 이웃(사람)을 사랑.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자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함이 곧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성도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반드시 십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마태복음23:23-24절을 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십일조를 말씀하심이고, 저것이란 의와 인과 신을 말씀하심이다. 곧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성립이며, 두가지(both) 모두 다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이기에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막12: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믿음이 먼저 들어간 후에 의무는 이행가능한 것이다. 쉬운 예로, 한 국가를 보면, 아이가 어릴 때에는 보호를 받고, 18살 인가, 20살인가?, 성인식이 끝난 후에 국민의 의무를 준행 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 아이에게 국민의 의무 운운 하면... 그 아이가 그 나라의 국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아직 어린 관계로 그 의무가 무거운 짐이 되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영적인 세계에도 젖을 먹어야할 만큼 어린 아이가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있다고 바울사도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 (히5:12-14)

3. 축복받기 위해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사람들: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조건적이다. 믿음은 결코 조건적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말씀)” 고 말씀하신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요, 율법준행 자들의 케케묵은 소리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일 뿐,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성도)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신앙고백 행위가 되어야한다.

결코 의무나 억지로 해서도 안되고 또 복을 받기(기복사상)위해서 행해서도 안된다.

고로, 십일조는 내어야(성숙한 성도라면) 되고, 내지 않아(신앙이 어릴 때)도 되지만,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전 재산은 드리지 못해도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적은 재물이 사용되어지는 곳에서 잃어진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널리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는 것이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십일조를 대하는 올바른 마음자세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반드시 넘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농사의 원리처럼 모든 헌금에도 ‘증수의 원칙’이 성립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는 말로써 고후9:6절에서 밝히고 있는 말씀의 요지이다. 단 억지로 하지 않을 때, 이 말씀이 적용이 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니라. (고후9:7절 말씀)”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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