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니즘 >


박해는 누가 보더라도 교회에 치명적인 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박해는 교회 밖에서 왔으며, 복음을 드러내 놓고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박해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 2세기 교회에 있었는데, 이는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형태로 찾아왔다.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영지주의, 말시온의 가르침, 몬타니즘

영지주의는 처음부터 완전한 이사상이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의 가르침에 유입되었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는데 이들의 가르침이 훗날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다.


<< 영지주의(gnosticism) >>

복음이 전해지자 세상은 구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철학은 지식인들의 마음에 만족을 주었지만,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제국의 종교는 냉담했고, 성격상 종교적이기 보다는 제국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자연종교는 제국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갈급한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민간에 널리 퍼진 것이 신비종교들이다. 신과 연결시켜주는 비법을 알려준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2세기에 강력한 세력을 이루며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던 종교 사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이다. 

이 용어는 신, 인간, 구원에 대한 참 지식을 제공해 준다는 뜻이다. 영지주의 사상은 인도, 바빌론, 페르시아 지역에서 유래했다. 이 사상은 그리스 철학의 기본 사상과 유사하다.

영지주의에 심취된 자들은 기독교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예수와 그분의 메시지를 자기들 종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영지주의는 동양 종교, 그리스 사상, 기독교 사상을 혼합한 종교이다. 


1. 영지주의의 문제

그리스와 동양의 모든 종교들은 매우 크고 기본적인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다. 
이들은 신은 절대로 물질 세상과는 그 어떤 관련도 맺지 않는다고 믿었다.
악은 물질에서 나오는 것이며, 신은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로 부터 멀떠 떠나 계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악한 물질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선한 신과 관계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악은 무엇인가? 
신이 선할진대, 영적 세계에 무슨 잘못이 벌어져서, 신의 후손인 인간이 악하게 된 것일까? 
인간은 악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영지주의자들이 물었던 것들이다.  

그들은 구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자들이다. 
인간이 어떻게 다시 신과 교제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떻게 하면 순수한 영혼들의 세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이런 물질적 실재에서 벗어나려면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가?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기독교 안에 존재한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은 특별히 좋아했다. 그분과 그분의 행적을 영지주의자들은 매우 중요시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방세계의 사상과 기독교적인 요소를 혼합시켰다.
영지주의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영지주의가 복음에 지극히 해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인간, 악, 그리고 구원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알아보자.

영지주의는 확신한 것으로 한가지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어떤 것이 영적인 세계를 악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사람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순수한 영적 존재로 부터 타락하여 물질에 갇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답한다. 인간 타락의 원인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마련된 것에 대하여 묻고 답한다.

영적 세계에 관련하여 하나의 그노시스(gnosis,지식)을 제시한다. 부조화한 곳에 그노시스가 들어와서, 조화를 회복하고, 회복된 조화의 결과로 인간이 구원된다는 것이다.

이 지식은 영적 세계에서 온 계시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 비밀스런 그노시스에서, 영지주의란 이름이 생겼다.
이 지식, 곧 그노시스를 다른 말로 하면, 신화이다. 


2. 플레로마(Pleroma)

- 영지주의는 원래 혼자 존재한 유일신을 믿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 그는 '알려지지 않는 아버지'(Unknown Father), 아비스(Abyss), 태어나지 않은 자(Unbegotten)라고 다양하게 불렸다. 
- 때로 그는 Silence라는 여성을 동반자로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그는 혼자 남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Mind와 Truth라고 불리는 존귀한 남자와 여자,이 두 Aeons(신적존재들)을 생산한다. 
- 이들은 다른 두 커플을 생산한다. Word-Life와 Man-Church를 말이다. 
- 이들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Silence는 함께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함)와 같이 플레로마(Pleroma), 혹은 신적 존재들이 거하는 Fullness를 만든다. 
- 그들은 그곳에서 연이어 생산을 한다. Word-Life는 다른 10명의 Aeons을 생산한다. 그래서 총 18명이 된다.
- Man-Church가 12명의 Aeons를 낳는다. 그래서 총수가 30이 된다. 
- 영지주의자들은 30명의 Aeons에 대한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따왔다. 
- 포도원에 보낸 일꾼들의 비유에서, 어던 이는 첫 시간에 보내지고, 다른이들은 삼시에, 나머지는, 육시, 아홉시, 열한시에 보내진다. 
- 이들 숫자를 더하면 삽십이 된다. 더우기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가 삽십세이시다. 이런 우화적인 성경적용은 많은 그리스도인에서 매우 심오한 것으로 인상을 남겼다.
- Man-Church에게서 태어난 마지막 Aeon은 Wisdom이라고 이름한 여성이다. 
- 그녀는 알지못하는 아버지를 사모하였다. 그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자, 그녀는 매우 낙심하게 된다. 
- 그녀는 근심하는 가운데, 그녀의 남성 파트너의 도움이 없이, 불확실이라는 뜻을 가진 Achamoth라는 이름의 자식을 낳는다. 
- Achamoth는 Pleroma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떨어져 나온다. 
- Wisdom은 자기가 한일을 보고, 심히 슬퍼했고, 극도로 불안해 졌다. 다른 모든 Aeons도 그녀와 함께 슬퍼했고 급거 그들은 Mind와 Truth에게 그녀를 도와달라고 청한다. 
- 그러자 두 명의 다른 Aeons를 생산해 냈는데, 그 이름은 Christ와 Holy Spirit이다. 이 둘은 Wisdom을 슬픔에서 구해준다. 
- 이렇게 해서, 플레로마에 조화가 회복되었다. 이를 감사하여, 모든 Aeons 30명이 함께 또 다른 Aeon을 생산하여 그 이름을 Jesus라고 하였다. 
- 이런 일이 플레로마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또한 플레로마 밖인, 자연계에도 사건을 일으켰다.


3. 창조, 악, 그리고 구원

- Achamoth는 Demiurge(그리스어로, 일꾼이란 뜻, 특별히 세상을 만든, 창조자를 가리킴)라 이름하는 후손을 낳았다.
- Achamoh는 모든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열등한 기원과 무가치한 특성 때문에, 물질은 악하다. 
- Demiurge는 이 물질에 형태와 모양을 주었다. 그는 그러므로 적합한 창조자이다. 그로 부터 또한 인간들의 영혼들이 나왔다. 
- Demiurge가 Achamoth를 통하여 Wisdom과 관계를 맺은 이래, 그녀는 비록 Demiurge가 이것을 모르고 있지만, 플레로마로 부터 Demiurge를 조정한다. 
- Wisdom의 영향력으로 Demiurges는 선이라는 영적 요소들을 가진 존재로 인간들을 창조한다. 
- Wisdom은 또한 Aeon Jesus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도록 하였다.
- 예수가 사는 날동안 그는 이런 지식을 그가 선택하신 자들에게 밝히 보여 주었다. 
-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에 의해서 선한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가 살았던 지상의 몸에서 격리되어 천상의 Aeon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Aeon Jesus는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
- 이런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선택된 사람들인데, 죽음으로써, 그들은 몸에 포함되어 있는 악한 물질로 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 그들은 자기들에게 영적 존재를 부여했던 플레로마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물질은 마침내 무질서와 멸망에 굴복하게 된다.
- 이는 매우 단순화 시킨 그림 언어로서, 부조화가 어떻게 플레로마에 들어왔는지, 그 결과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원래 조화가 마침내 회복되는지 보여준다. 
- 이것은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160년경에 죽은 대표적인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 사상과 그리스 사상, 그리고 동양 사상을 혼합시켰다.


4. 영지주의와 기독교

교회는 영지주의를 거부한다.

A. 지존하신 하나님을 알며,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B. 세상의 창조는 열등한 신적 존재의 행위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C. 물질계는 악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D. 구속자는 하나님도 인간도 아니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는 인간처럼 보일 뿐, 실제 인간은 아니다.
E. 오직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 일부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F. 부활이 없이 때문에

영지주의는 2세기 중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가 사그러들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저술들은 영지주의의 쇠퇴에 공헌하였다. 

교회의 조직이 강하지 않았을 때, 감독들은 오직 지역에서만 그 권위가 인정되었다. 아직 교회에서 성경이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은 때였다. 교회의 교리도 아직 공유되지 못했다. 

영지주의의 위협으로 인하여 교회의 정치, 성경의 정경화, 교리의 정립이 시급해 졌다.


<< 말시온주의 >>

약 140년경에 말시온(Marcion)이라는 한 그리스도인이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해안도시, 시노페(Sinope)에서 로마로 왔다. 그는 부유한 선박 건조업자였고, 종교심이 깊은 자였으며, 신학적 재능이 있던 자였다. 로마에서 그는 Cerdo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이레니우스(Irenaes)에 따르면, Cerdo의 주요 교리는 이러하다.

율법과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알려졌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으셨다. 한 분은 또한 의롭고, 다른 한 분은 자비롭다.

말시온은 구약과 신약을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읽었다. 말시온은 영지주의와 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교회는 근본적으로 유대교를 따라가는 종교라고 믿었다. 말시온은 영지주의가 교회에 위험한 것이란 매우 좋은 예가 된다. 


1. 구약과 신약

말시온의 신학에는 이온들(Aeons)이 신적 존재에서부터 나왔다는 식의 영지주의적 신화를 설명하는 대목은 없다. 말시온의 전체 가르침은 구약과 신약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 두 언약에 대하여 그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말시온의 관점이 특이하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은 Cerdor가 말한 것처럼 열등한 하나님이 영감을 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하신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Unknown Father)의 계시이시다. 

말시온에 따르면 신약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약에는 너무 많은 유대인들의 사상들과 영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신약 정경을 만들었다. 그것은 누가복음과 디모데서와 디도서를 뺀 바울의 서신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 서신들이 기록자들에 의해서 직접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에서 편집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바울의 서신들을 빼버린 것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그 사도가 존경한다고 했기 때문이라며 그와 관련된 모든 내용들을 삭제한 것인데, 창조에 관여한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도가 예언서에서 인용한 구절들 또한 삭제했는데, 그가 삭제한 내용은 주님의 도래에 대하여 미리 예언자들이 말한 내용들이다.

비슷한 편집 과정이 누가복음에도 적용되었다. 말시온이 자기만의 경전에 몇 가지 책들을 선정한 이유는 분명하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거절하였고, 오로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말시온은 세상을 창조하고 율법을 주신 열등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열등한 하나님은 의롭고, 복수심에 불타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실수를 하신다. 그래서 그 열등한 하나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가르쳤다. 

반면에 선한 하나님은 자비, 용서, 그리고 사랑을 가르치며 실행하신다. 

이들 두 하나님은 말시온의 가르침에는 완전히 구별된다. 두 하나님 사이에는 관련성이 없다. 말시온은 두 하나님 사이에 어떤 관계도 설정해 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 이스라엘과 교회는 완전히 분립되어 있다. 구약, 율법, 그리고 이스라엘은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신약, 복음,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선한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2. 말시온의 그리스도

말시온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상과 상응한다. 그는 티베리우스(주후 29년) 황제 15년에 갑자기 등장하셨다. 그는 그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의 육체는 물질이 아니고, 겉으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는 하늘에서 직접 오셨고, 인간의 역사나 부모를 가지지 아니한다. 

그의 선하고 의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창조자 하나님은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다. 그의 몸은 사실 물질 혹 신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고통을 받지 아니하였다. 창조자 하나님은 십자가에 의로운 그리스도를 달리게 함으로써 그가 자기 자신의 구약 율법을 깨뜨려 버리게 된 것을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부당한 일에 대한 대가로, 그는 그리스도에게 구원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값을 지불하신 것이 분명하다. 

말시온의 다른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 같은 관점으로 일관된다. 물질은 악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는 여전히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을 것이며, 죽은 자의 부활도 없다. 그리스도, 선한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여기서 사는 동안 순전히 영적인 것이다. 창조된 세상이 회복되는 일이란 결코 없다. 


3. 말시온의 영향

말시온은 교회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가 있게 했다. 이들로 인하여 창조주와 구원주는 하나이시며, 꼭 같은 하나님이시란 진리가 선언되었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창조주시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어 있다.

말시온은 로마 교회에 의해서 출교를 당했다. 그는 그 자신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2세기에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의 숫자가 상당하였다. 그 세력이 7세기까지 지속되다가 이후로는 사라지게 되었다.



<< 몬타니즘(Montanism) >>

몬타니즘이라고 불리던 운동이 기독교 내부에 있었다. 교회의 신조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를 믿었다.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렇지만 이 종교 운동은 교회가 수용하지 않았다. 몬타니즘은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이해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1. 초기 역사

몬타니즘은 소아시아 중심부인 프리기야(Phrygia)에서 주후 156년에 일어났다. 이 사상은 황홀경을 가져오는 소위 “영적인 것”을 강조한다. “황홀경”(ecstasy)은 문자적으로 정신이 육체를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즉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경험을 말한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이교도 제사장은 금식, 고행, 춤, 환상, 그리고 예언을 한다. 몬타누스(Montanus)란 사람은 그런 프리기야 지방에서 이교도 사제 출신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는 이방종교를 포기했지만, 그는 자기가 받아들인 새로운 종교를 옛 종교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런 그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방식은 보편적 교회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두 여인과 연합했는데, 막시밀라(Maximilla)와 프리스킬라(Priscilla)였다. 이 들은 몬타누스를 돕기 위해 자기 남편들을 떠났다. 처음에 이들은 보편 교회 안에서 일했으나, 곧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기자 교회 조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2. 가르침

몬다누스는 자기를 통해서 파라클레토스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가르쳤다. 훗날 그는 예언자인 몬타누스와 자기를 돕던 두 여인을 통해서 파라클레토스가 오셨다고 말했다. “새로운 예언”은 이제 실제가 되었다. 새 예루살렘은 곧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페푸자(Pepuza)라고 불리는 도시 근교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금식할 것이며, 자기들의 세상 직업을 버릴 것이고, 종말을 기다리기 위하여 페푸자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몬타니즘이 확장되면서, 여타 교리와 실행 지침이 첨가되었다. 사람은 오직 한번만 결혼할 것이며, 영적인 이유로 인하여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영적 은사들을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순교를 장려했으며, 순교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죄라고 하였다. 세 명의 지도적인 예언자들인 몬타누스와 두 여인은 죄들을 사해 줄 수 있고,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여자도 교회에서 직분을 맡을 수 있다.


3. 몬타니즘과 보편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은 몬타니즘을 반대하였다. 예언과 영적 은사를 강조하자 그런 것을 소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의심하였다. 세 지도자가 죄를 용서하고, 성령을 소유한 여타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감독들을 심히도 자극했다. 그들은 교회를 자기들의 권한 아래 두고자 하였다. 몬타누스의 추종자들은 세상과 온전히 구별될 것을 가르쳤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가능하면 열리기를 원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몬타니즘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급속히 퍼져갔다. 소아시아를 휩쓸고, 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들어갔다. 박해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표로써 몬타니즘을 환영하였다. 교회의 삶이 세속화가 되면 될수록 몬타니즘은 더욱 받아들여졌다. 몬타니즘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엄격한 모습으로 되돌아 가자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도 속해 있었는데, 그는 207년 경에 몬타누스 추종자가 되었다.


4. 쇠퇴

시간에 흘러, 몬타누스가 설교하기 시작한지 50년 정도 지났을 때, 몬타니즘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새 예루살렘이 페프자에 내려오지 않았다. 상당히 많은 예언들이 불발되었다. 초기와는 달리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몬타누스, 막시밀라, 그리고 프리스킬라가 죽었다. 

초창기 몬타니즘은 엄력한 그리스도인의 삶, 금식, 세상과의 분리, 매일 매일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함, 믿음으로 인한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207년 터툴리안이 몬타누스 교회에 가입했을 때만 해도 그러했다. 작은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그 강력한 운동은 멈추게 되었다. 보편 교회 안에 존재하는 보수적인 모임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그 결과 몬타누스 교회가 계속해서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점차 숫자가 줄어들다가 550년경 이후에는 자취를 감췄다.


5. 영향

영지주의와 말시온 주의같이, 몬타니즘은 보편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결국 예언을 장려하지 않았고, 비상식적인 영적인 능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로 인하여 교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의 치리와 신생하는 모든 신앙 운동들에 대한 판단을 위해 성경의 정경화가 더욱 요청되었다. 몬타니즘은 교회에서 영적 은사의 남용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다. 한편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열린 마음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 신약성경의 정경화 >>

사도들의 죽음으로 무엇이 복음이며,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살아있는 권위의 목소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이제 구전과 기록된 전승에 살아 있었다.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자들이 이런 전승에 등장하였다. 약 140년경에, 말시온은 그 전승을 확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바울만을 오로지 참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받아 들였다.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말시온의 가르침에 아주 적합한 듯이 보인다. 그는 자기의 신학적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신약 정경화를 위한 첫번째 시도로 알려져 있다. “정경”(canon)이란 그리스어로 ‘표준’ 또는 ‘잣대’란 의미이다. 당시 캐논은 진리라고 여겨지는 경건한 서신들의 모음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말시온이 정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어떤 책들과 서신들을 복음을 위해서 권위있는 책으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속 사도들이 인용한 많은 글들과 참조 문헌들이 오늘날 정경화가 완료된 신약성경에서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구약 성경과 같이 ‘경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문헌이 당시에 완벽하게 수집되지 못했다.

1. 초기 모음들

2세기에 일련의 모음글들이 존재하였다. 영지주의에 대한 답변과 부분적으로 말시온에 대한 대답을 담은 문헌이 상당수 존재했다. 후에 신약성경이 된 모음들이 점차 증가했고, 교회들에 널리 퍼졌다. 사실 처음에 여러 개의 문헌들로 존재하던 모음들이 오늘날 신약성경이라고 불리는 한 묶음의 성경이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모음들이 앞부분에 복음서가, 그런 다음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이, 일반서신들과 계시록의 순으로 묶여졌다. 이런 발전 과정에서 신약성경에 현재 존재하는 책들 대다수가 이미 초기 때부터 모두 교회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 일부는 몇 몇 교회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다른 곳에서는 의심을 받았다. 몇 책은 처음에는 받아들여졌지만, 후에 거절된 것도 있다. 

신약성경의 가장 초기의 목차는 무라토리안 프라그멘트 (Muratorian Fragment)라고 알려진 고대 사본의 조각에 포함되어 있다. 이탈리안 학자인 루도피코 무라토리(Ludovico Muratori)가 이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에 그는 8세기 기독교 신학 문서에서 그 조각을 발견하였다. 이 조각은 170년 경에 쓰여진 것인데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들, 요한 1서, 요한 2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이었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3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베드로 묵시록 (Apoclypse of Peter)와 후기에 거절된  한 권의 예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의 신약 성경에 있는 대다수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 외에도, 다른 모음집들이 있었다. 허메(Hermas)의 목자서, 바나바 서신서, 디다케, 히브리인의 복음서, 솔로몬의 지혜서, 바울 행전 등 다양한 목차가 수록되어 있었다.


2. 정경의 권위

200년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초대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a. 어떤 책이 정경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표준은 “사도성”(apostolicity)이었다. 사도들이 썼든지, 아니면 사도와 가까운 사람이 쓴 책이어야 했다. 마가복음(마가는 베드로의 조력자였다), 누가복음(누가는 바울의 조력자였다)이 그러기 때문에 정경에 포함되었다. 같은 이유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3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은 그 책에 대한 사도들의 저작권이 확실치 않아서 정경으로 인정하는데 지체되었다. 바나바의 서신, 허마의 목자서, 솔로몬의 지혜서 등 은 사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정경에서 제외 되었다.

b. 오늘날 우리가 가진 신약성경의 전목록을 처음으로 확립한 사람은 367년에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이다. Augustine의 지도하에 북아프리카의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 393)과 Carthage(397)에서 개최된 두 번의 공의회(synods)에서 현존하는 신약성경과 흡사한 공식적 정경하가 이루어졌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아프리카의 예를 따랐다. 

c. 정경은 근 3백년동안 논쟁을 거듭해야 했다. 이는 최종적으로 입증된 책들만 모든 교회가 수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정경은 아다나시우스의 공적인 선언이나, 중요한 공의회의 결정에 의한 결과로 확정된 것이 아니다. 이들 공식적인 선언은 단지 교회가 이 책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랜 동안 받아 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다. 신약 성경의 책들이 정해지고 교회가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d. 정경을 가지고 교회는 믿음과 설교의 기초의 근거로 삼았다. 교회의 신앙에 대해 이단들이 도전을 해왔기 때문에 정경화가 이루어 졌다. 그 성경상 사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권위를 가진다. 성령께서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의 완전성을 말씀해 오셨고, 성경의 영적인 탁월성과 적절성을 증거해 오셨기 때문에 긴 세월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38202%BF%A1%BC%AD


로렌 커닝햄 목사는

올해 75세로 1960년 초교파 선교단체인 국제예수전도단(YWAM)을 창설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따라 ‘젊은이를 일으켜(Youth With A Mission)’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예수전도단은

현재 전 세계 150여개국에 1000여개 지부가 있으며 2만명이 넘는 스태프들이 일하는 단체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생이나 자원봉사자, 간사로 훈련받거나 사역해 왔다.

그는 또한 선교 지원자들의 전문적인 훈련을 위해 하와이 코나에 열방대학도 설립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벼랑 끝에 서는 용기’ ‘네 신을 벗어라’(예수전도단) 등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906287&cp=nv

 

 

YWAM(예수전도단) 창립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알파코스에 대한 공신력은 국내외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추천에서 잘 드러난다.

외국의 경우 릭 워렌, 빌 하이벨스, 리처드 포스터, 알리스터 맥그래스,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로렌 커닝햄 등 수많은 이들이 알파에 대한 지지와 찬사를 내놓았다.

 

한국 교회에서도 조용기 김장환 김삼환 최홍준 고용수 김의원 목사 등 영향력 있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앞다퉈 극찬하고 있다.

이동원(지구촌교회)목사는 "전도 폭발이 전도 훈련 그 자체로 한국 교회를 도울 수 있었다면

알파코스는 성경 공부와 전도를 접목한 새 시대 한국 교회 부흥의 알차가 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1175108&cp=nv

 

 

“대추수는 끊임없는 기도와 금식을 반드시 요구한다. 캔자스 시에서 마이크 비클이 하고 있는

 중보기도 사역은 대위임 명령의 완성을 위해서 절대 필요한 것이다.”

-로렌 커닝햄(국제 예수전도단 총재)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8034

 

 

YWAM 대표 로렌 커닝햄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결코 YWAM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358279&cp=du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는 12주의 강의와 12주의 전도여행을 통해 이뤄지는

 예수전도단의 가장 기본적인 제자 훈련과정이다.

 묵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법, 예배, 중보기도, 영적전쟁, 내적치유, 성경적 세계관,

전도 및 선교 등이 주 강의내용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6894

 

 

 

It is a ministry within YWAM but run by and for Catholics.

Kerygma Teams is a branch of the interconfessional lay - missionary organisation

YWAM Youth With A Mission.

Kerygma Teams supports Catholic parishes, renewal movements,

and groups active in evangelisation, mercy ministries, and training in the Catholic Church

 

( 이것은 예수 전도단안에 있으나 카톨릭을 위하여 그리고 카톨릭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케리마팀은  인터코페션널 래이( 평신도 고해성소)의 지부이다.

미션을 가진 예수전도단이라는 사역조직이다.

 케리마 팀은 카톨릭의 교구를 지원하고 부흥운동, 복음주의에 속한 그룹들, 구제 사역,

 카톨릭 교회안의 훈련등을 추진한다. )


Youth With A Mission (YWAM), which now fields more than 12,000 full-time workers in more than 140 countries, was founded in 1960 by Loren Cunningham,

an ordained Pentecostal pastor of the "Assemblies of God" denomination in the U.S. Cunningham's original aim was to offer young people from various churches the chance to participate in international evangelistic endeavors during their school holidays.  

( 예수 전도단은  1960년 오순절 주의 목사인 로렌 커닝햄이 설립하였는데 지금 140개국의 나라에서 12000명의 풀타임 사역자가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다양한 모든 교회들의  젊은이들이

여름 방학 기간 중 국제적인 복음주의의 열정적 집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한다. )

 

http://blog.daum.net/alphacourse/11296663

 

 

 

YWAM and Benny Hinn agree to work together!

Benny Hinn’s new target audience is the youth;

and who has been involved with the youth more than the missionary organization YWAM.

They have done a good job in evangelizing in the past but something very different is now taking place.

 

 

The Head of YWAM on Hinn’s program

 

On Feb. 4-9, 2002 just a few weeks after the crusade took place here in Hawaii,

Benny Hinn had Loren Cunningham on his program solidifying the ties

that he had previously with YWAM through Dawson.

Previously we watched Joy Dawson with Cunningham as Hinn toured the YWAM base here

on the Big Island of Hawaii.

 

http://www.letusreason.org/curren29.htm

 

 

Joy Dawson Of Youth With A Mission (YWAM)
Joins Forces With Benny Hinn

http://www.deceptioninthechurch.com/hinnywam.html

 

 

 

Youth With A Mission

Ecumenical (Catholic/Charismatic) Evangelism

http://www.rapidnet.com/~jbeard/bdm/Psychology/ywam.htm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얼마 전 한 일간지를 통해 ‘교회 건물을 여호와 증인에게 매각 결정’이 보도돼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당시 교회 관계자는 교회 매각 문제가 논란이 되자 ‘보고만 받았을 뿐’이라 변명하기에 급급했고, 이런 교회의 행동에 실망한 몇몇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최근 크리스천 포스트에 한 건물 안에 교회 예배와 사탄숭배자들 미사가 함께 드려지는 것과 관련된 논란이 보도되었다. 사탄 숭배자들과 한 건물에서 예배 드린다는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해당 교회 목사는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고 당당히 목회 소신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끌고 있다.

오클라호마시 커뮤니티 교회(Oklahoma City Community Church, OKC) 담임인 톰 매닌(Tom Mannin)은 최근 자신들이 예배 드리는 건물 안에 있는 시청 뮤직홀에서 사탄숭배자들의 블랙미사(black mass)를 이달 말부터 같이 할 수 있도록 허락한 시의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매닌 목사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랑의 사도로서 반응하길 원하며, 예수께서 그를 반대하고 싫어했던 이들에게 하셨던 그 방식대로 우리가 대응하길 희망한다”라며, “우리는 은혜와 평화로 다양한 믿음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길 기도한다”고 말하며 시청센터에서 블랙미사를 가지려는 Dakhma of Angra Mainyu를 향해 언급했다.

그는 블랙미사를 올리려는 이들에 대해 적개심을 표현하는 이들에게 ‘다른 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마태복음 5장 38-42절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미움을 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아주 쉽다”라며, “하지만 누군가가 싫어함에도 사랑으로 대한다면 그 미움은 지속될 수 없다. ‘응보의 법’을 뛰어넘어 사랑의 법칙으로 승화시킨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클라호마 시는 금년 초 주정부가 운영하는 시민 센터(civic center)에서 블랙미사를 가지려하는 사탄숭배자 그룹(satanist group)에게 극장 사용을 허락했으며, 이 그룹은 오는 9월 21일(일)에 미사를 드릴 예정이다.

이 소식은 오클라호마 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했으며, 반기독교 의식을 허락한 오클라호마시의 결정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7월엔 블랙미사 중단을 요구하는 3만 7천명의 서명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오클라호마 공화당 주지사인 매리 폴린(Mary Fallin)은 사탄그룹의 의식을 ‘가톨릭 신앙에 대한 역겨운 조롱’(disgusting mockery of the Catholic faith)이라 폄하하면서, “미국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보호를 받긴 하겠지만, 그것이 비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라며, “뉴욕 사탄숭배자들이 오클라호마까지 왔다는 사실이 충격이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유발하는지 깨닫고 이 행사를 취소하길 기도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호와 증인’에게 건물 매각을 한다는 점이 두려워 남 탓으로 일관한 교회의 태도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걸 알면서도 나름 소신을 밝힌 매닌 목사의 태도를 단지 문화의  차이로 돌리기에는 찜찜한 여운이 남는 두 장면이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빅토리아 오스틴 발언 미 교계 파장 불러와
“예배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니


 
▲ 빅토리아 오스틴 [조엘 오스틴 미니스트리 동영상 캡쳐 ]


번영신학의 대표주자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의 아내 빅토리아 오스틴의 발언이 최근 미 교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빅토리라 오스틴이 유튜브에 올린 한 동영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할 때 그분도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며,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은 말은 그것이 하나님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 나올 때, 예배드릴 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때 조엘 오스틴 목사는 그녀의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이에 플로리다 팜 시티 크로스교회 스티브 캠프 목사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빅토리아의 발언은 인본주의적이며 성서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다”라며,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다”라고 전했다.

보수 성향 블로그 레드스테이트닷컴의 편집장 에릭 에릭슨은 영화 <빌리 메디슨(Billy Madison), 1995년 작>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해 “당신이 한 말은 내가 지금껏 들어본 말 중 가장 어리석고 희한한 말이며, 전혀 이성적인 발언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보가 됐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길”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편, 미국에서 간혹 교회 목사의 사모가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는데, 때로 이번 경우처럼 논란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부인 빅토리아 오스틴의 문제의 발언 동영상

송금관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출처: USA아멘넷


자유주의(Liberalism)

 

1. 칸트와 헤겔

 

18세기는 칸트(I. Kant)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시대였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적인 지식론을 바탕으로 플라톤이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를 구분한 것처럼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혹은 본체계. 오성으로 인식되는 체계)로 구분하고, 이성의 한계에서 종교의 가능성을 논함으로서 초자연의 세계를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종교의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주제들을 도덕의 영역으로 격하시킴으로서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Liberalism)란 18세기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계몽주의와 이후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자극에 의해 출현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헤겔(Hegel)은 대표적인 관념론자이다.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을 강조했다면 헤겔은 이성의 관념을 확대하여 정신의 모든 측면과 이성을 동일시하는 사상을 전개했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학적으로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헤겔의 철학적 동기가 슐라이어마허와 같이 원래는 기독교신앙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의 철학은 가장 포괄적인 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절대적 진리의 주장들이 어떻게 역사와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기를 역사 전체를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로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그의 변증법이 출현했다. 즉, “상대의 세계는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이며, 모순을 지닌 채 운동과 생성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생성은 이 자기 모순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러 자기 안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무한한 진행은 아니고 일체의 상대적 관계가 경과함에 따라 절대정신이 개현된다고 본다. 절대자는 정적 실체자일 수 없고 일체의 상대를 그 안에 포괄하고 있는 살아 있는 주체이다. 이 운동은 이성과 실체에 통하고 그 이성의 법은 변증법이다”라고 하였다. 헤겔의 이 변증법을 성경과 기독교의 본질연구에 적용한 대표적인 신학자로 스트라우스와 바우어가 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와 이상적 예수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보고자 노력했다.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 신학

 

칸트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가 발현했고, 자유주의는 개인주의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세상의 풍조들은 신학자들에게도 많은 도전을 주었다. 그런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종교를 멸시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풍조에 휩쓸렸다.

 

이 때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풍조 앞에 종교의 본질을 논함으로서 도전받는 기독교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는 종교는 형이상학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며 또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은 종교라는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그는 종교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세상의 그릇된 사조에 반기를 든 것은 높이 평가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신학과 사상은 훗날 자유주의신학을 태동시킴으로서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종교를 우선 직관과 감정의 영역으로 설명하면서 새로운 자유주의신학의 체계를 완성시켰다. 그는 전통적인 신학의 방법을 버리고,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에 심히 고무되어 인간의 이성, 직관, 감정, 기타 체험을 이용하여 성경과 신학을 자유롭게, 역사비평에 근거하여 재해석하는 신학을 출현시켰다. 이후 대부분의 유럽의 신학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심지어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슐라이어마허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칼 바르트마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벗어난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강력한 것이었다.

 

한편, 칸트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인간의 윤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리츨과 그의 학파들이 대표적으로 이런 경향을 가졌다.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을 신학의 주제로 삼고, 헤겔이 정신에 역점을 두었다면 리츨은 윤리에 신학의 중심을 두었다. 그는 예수를 인간이 따를 위대한 윤리의 모범자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예수와 함께 발전하고 성숙되어진 도덕적인 나라라고 했다. 그는 죄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죄는 무지의 결과로서 도덕적 양육과 교육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리츨과 그의 추종자들은 칸트에서 나타나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왕국의 영역으로 종교의 수준을 끌어들인 결과를 낳으며 자유주의 신학의 종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3.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첫째,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재해석의 작업으로 출범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개인적 사상과 진술에 따라 기독교를 다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재해석의 작업은 기독교라는 범주를 넘어선 특정한 시대적 산물이 되었을 뿐이다.

 

둘째, 신학의 기초와 방법을 성경에 두지 않고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 경험에 두고 있다. 경건주의가 강조한 개인주의적 성경연구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신학 방법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활용하여 성경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이성, 감정,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즉, 신학을 하나님 중심에서 보지 않고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신학의 방법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신학의 주체이고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신학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은 어거스틴

의 하나님의 은총론에 맞서 인간의 선택의 힘을 강조했던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비슷하다.

 

셋째, 내재적인 신학이다.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성을 파괴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초월성을 강조하지 않고 내재적인 신학으로 빠져 들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느낌으로 이해했다. 그는 종교를 한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 무한자(the infinite)와 교제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이성의 한계를 넘지 않고 윤리만을 강조하는 칸트보다는 더 종교적이지만 그의 내재주의는 초월주의, 즉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키에르케고르도 헤겔의 관념주의를 비판할 때 이것을 강조했다)를 강조한 칼 바르트에 의해 철저하게 공격을 받았다. 실상 자유주의신학은 칼 바르트에 의해 붕괴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언급이 아니다.

 

넷째, 낙관주의 신학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인간의 능력을 믿고 다분히 인간이 모든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인간은 충분히 선을 가지고 있기에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상을 복된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생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안일한 생각들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이후 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이 대세로 자리 잡는다.

 

다섯째, 윤리의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자유주의신학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주제들을 버렸다. 그들의 목표는 도덕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다. 따라서 모든 영적인 주제들과 내세적인 소망들을 폐기시키고 오직 인간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영향으로 라우센부쉬가 주도한 사회복음주의운동이 태동하였고, 최근에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끝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적 역사비평학적 입장(종교사학파의 입장)에서 예수를 연구하여 하나의 종교적 모델로서 제시하는 한편, 그런 차원에서 예수의 인간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 등으로 예수의 신성은 사라지고 예수는 그저 타종교의 지도자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예수가 타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순간, 기독교는 참 진리를 가진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러자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대표적으로 존 힉(John Hick) 같은 자는 성육신 사건을 상대화시킴과 함께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각자의 진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종교 간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선 기독교가 주장하는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절대적이며 독선적인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WCC, KNCC 등이 중심이 되어 시도하고 있는 운동이 최근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그 본질은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4. 자유주의 신학의 세 가지 흐름

 

첫째 흐름은 슐라이어마허로 대변하는 감정의 신학이다. 네안더, 니이체, 슈바이처, 트베스텐 등이 이에 속한다.

 

두 번째 그룹은 헤겔학파의 신학이다. 칸트 이후 서양철학을 주도한 헤겔철학에 기반을 두고 역사 비평적인 신학을 추구했다. 헤겔은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 바우르, 비더만(1819-1885)과 구약성서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동원한 벨하우젠(Wellhausen,1844-1918) 등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 그룹으로 칸트 철학에 기반을 둔 리츨학파의 신학과 트뢸취의 종교사학파의 신학이다. 슐라이어마허의 탁월한 해석자요 자유주의 개신교의 왕자로 불리우는 리츨(A. Ritschl, 1822-1889)은 칸트의 추종자로 그의 비판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현상계와 본체계와의 구분,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한계성, 도덕과 종교의 일치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 경험에 호소한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인 신학방법을 거부했다. 이후 헤르만, 하르낙(1852-1930), 카텐부쉬, 숄츠 등이 리츨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19세기 말엽 독일에서 발현한 학파가 종교사학파이다. 이 학파는 모든 종교를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보려 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그들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요소가 모두 고대 근동지방의 신비종교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고 모두 제거해 버렸다. 궁켈(H. Gunkel, 1862-1932), 부세트(W. Bousset), 바이스(Johanes Weiss, 1863-1918) 등이 이에 속하고 대표적인 인물이 트뢸취(E. Troeltsch, 1865-1923)이다.

 

5. 기타 자유주의(Liberalism) 신학의 발전과 양태

 

1) 리츨학파 - 리츨, 하르낙, 헤르만, 카덴부쉬, 루푸스, 트륄치

2) 후 불트만 학파 - 불트만, 콘젤만, 반 두센, 하롤드 등

3) 급진파 - 본회퍼 등

4) 세속화 신학 - 반 부렌, 하비 콕스 등

5)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도드, 니버, 폴 틸리히

6) 독립파 - 몰트만

7) 구속사학파 - 오스카 쿨만, 슈바이처, 알란 리차드슨, 헌터 등

8) 신 자유주의 - 부로우스, 필슨, 조지 라이트, 브라텐, 앤드슨

9) 한국 - 송창근, 김재준, 정경옥, 김경재, 길희성 등

 

6. 비평

 

첫째, 자유주의신학은 신학의 출발점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지 않고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에 주었다. 계시종교를 윤리와 도덕의 종교로 전락시켰다. 말씀중심의 기독교를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바꿔치기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신학은 주관주의적 신학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중심의 신학방법을 따르지 않고 주관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 감정적, 경험적인 새로운 방식을 사용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정통적인 신학의 체계를 허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교회공동체를 약화시키는 주범이 되었다.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지켜지고 계보를 이어왔던 기독교 신학의 공동체가 약화되고 말았다. 신정통주의자인 폴 틸리히는 “유럽의 개신교는 자유주의로 인해 죽었다”고 까지 진단했다. 이것은 하나의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악한 영향을 끼치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산 교훈이 된다. 한편 한 개인의 신학의 방법과 내용은 성경과 기존의 건전한 신학적인 전통에 의해 검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신학이 새로운 독창성과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부분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신학을 형성하였는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말씀을 벗어나면 그것은 참다운 신학이 될 수 없고 그런 신학을 쫓는 자는 사망과 곤경에 처해질 뿐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둘째, 자유주의신학은 성경 본문을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방법으로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면서 정통교리를 무시하고 말살했다. 그들은 주관적인 경험을 하지 못하고 단지 지식만 있는 신앙을 무차별 공격했다. 이 영향으로 신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났고 교리무용론이 득세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가 교리에 붙들려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통이 화석화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취득하는 지식이 문제이며,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만든 비성경적인 교리가 문제임을 간과했다. 그들은 성경을 절대적인 최종 권위로 두지 않는다. 성경은 단지 좋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좋은 교과서요 윤리적인 지침이요 참고서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라 훌륭한 윤리교사이다. 최고의 신의식을 지닌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은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신앙을 위한 좋은 참고자료라고 여긴다. 성육신과 동정녀탄생, 부활 승천 따위는 실제역사가 아니라 믿음의 역사적 사건이라 치부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경에 일점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경고했다.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셋째, 자유주의신학은 하나님의 공의를 삭제하고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했다. 진노의 하나님을 삭제하고 미소 짓는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우레 소리와 함께 심판을 단행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질겁한다.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시고 나와 늘 즐겨 대화하시며, 나의 짓궂은 장난과 개구쟁이 같은 행동에도 머리를 긁적이며 다 받아주시며 나와 농담도 자주 하시며 내가 언제든지 달려가면 만나주시고, 나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하면 들어주시는 친근하고 재미있는 분으로 각색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내재성 즉,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므로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이다. 내재주의로 인해 묵상기도, 관상기도 등이 나타났고 영성훈련을 한다고 법석을 떨게 되었다.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악을 미워하시고 무섭게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사라졌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자기 백성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여기서 지옥이 부정되고 영혼멸절설이 나타났다. 자유주의교회에서 더 이상 회개를 요청하는 설교는 사라졌다. 그들은 신자가 잘못을 해도 권징하지 않는다. 용서가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그러나 공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공의는 절름발이일 뿐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악을 미워하고 우상숭배를 엄하게 금하시고 다른 신에 대해 질투하시고 백성들의 죄악을 친히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징계의 채찍질을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징계하지 않는 자마다 사생아에 불과하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장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 8, 벧전 5:9, 계 3:19)

 

넷째, 자유주의신학은 낙관적인 인간론을 펼침으로 기복신앙을 낳았다. 그들은 예수만 잘 믿으면 부자 되고 성공한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고 반복했다. 낙관론은 아담으로부터 형성된 원죄를 부정하면서 나타난 사상이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선한 존재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얼마든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적극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행, 불행은 인간의 책임이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예정에 달려 있지 않다고 했다. 칼빈이 주창한 예정론 교리는 그런 의미가 아님에도 그들은 예정론을 한 번 정해진 운명론으로 몰고 갔다. 잘못된 예정론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의지로 개척하고 극복하지 않고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불행을 형해 달린다고 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물론 자유주의 신학은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왜 그들이 특수한 시대의 철학과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새로운 신학의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유주의신학에 대해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그들의 실수를 통해 올바른 신학,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가 신학을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방법으로 다루지 않을 때 얼마나 위험해 질 수 있는 가를 보여준 단적인 실례라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로마 카톨릭교회가 만든 인위적이고 비성경적인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했던 역사적 교회들의 전통과 신조들, 그리고 개혁적 신학사상을 말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문주의자들의 역사적 문법적 해석방법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은 인문주의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방법들을 성경과 연결하여 차원 높은 신앙적 원리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성경의 권위를 버리고 인문주의적 방법을 고수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은 철학의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지나치게 현실과의 조화에 치중하다보니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부정하고 세상의 논리와 타협을 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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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1.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종교개혁은 유럽사회의 지축을 흔드는 대지진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에 반발해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비단 교회 뿐 아니라 전 유럽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촉진시켰다. 당시엔 교회와 정부 모두 교황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교황주의에 대한 부정은 즉시 세속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군주들에 대한 반역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반역은 화란에서부터 점화되었다. 원래 화란은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라인강 하류의 낮은 지대에 속하는 17개 주로 구성된 나라로서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란의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로서의 결집력을 자랑했다. 크게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황제 카알 5세(Karl ∨, 1550-1558)의 통치하에 있었고, 작게는 부르군드 공화국에 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카톨릭을 신봉했고 개신교는 매우 미미한 세력에 불과해 하나의 이단적 종파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더욱이 칼빈주의는 몇몇 지식인들 그룹에서만 소개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파고가 드높아지자 당시 화란의 통치자인 황제 카알 5세는 즉시로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필립 2세(Philipp ∥, 1555-1598)는 탄압을 더 가중시켰다. 그는 카톨릭교회에 대한 충성과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선포하는 한편 왕권신수설을 앞세우고 종교개혁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핍박이 가해질수록 개신교도들의 종교개혁과 정치, 사회, 경제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뜨거워져 갔다.

 

그 기반에는 일찍부터 발달한 화란의 경제력이 깔려 있었다. 특히 화란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안트워프 등은 중세후반부터 한자동맹에 가입하고 북해 무역을 주도하였고, 신대륙 등의 발견이후 세계무역의 50% 이상을 담당하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화란 내의 도시 수만 200여개에 달했고, 이 도시들에 의해 거두어진 세금은 당시 강대국 스페인이 중남미 식민지국에서 거둬들인 세금보다 무려 7배(은을 기준)나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카톨릭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는데 그 대안으로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만나게 되었고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어두운 커튼이 열리며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빛이 비추어지자 대세는 개신교로 기울어져 갔다. 드디어 화란은 통치자인 스페인과 결별하기 위해 이른바 독립전쟁을 치루고 1609년에 네덜란드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화란의 독립은 유럽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독일의 영주국인 팔쯔 선제후국은 1560년에 칼빈주의의 개혁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으며, 스코틀랜드는 1576년에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다. 이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개신교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확산의 원인으로는 개신교의 관용정책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개신교를 수용한 여러 국가나 교회들은 카톨릭과 달리 비록 칼빈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해도 종교의 자유를 소지할 있도록 종교적 관용정책을 베풀었는데 이것이 많은 점에서 개신교가 급속도록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이후 새로운 화란은 칼빈주의를 국가의 종교와 국민들의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들였으며 도르트회의를 통해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수립하는 등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칼빈주의 신학과 영성의 가장 중요한 무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화란은 아브라함 카이퍼, 루이스 벌콥, 헤르만 바빙크 등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들을 배출하여 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적으로 개혁주의의 본산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Selection)

③ 제한적 속죄(Limited Salvation)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reservation of Saints)

 

2. 알미니안주의

 

16세기 이후 유럽사회는 칼빈이 대세였다. 루터교 등 다른 교파들도 공존했지만 칼빈주의의 득세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칼빈의 바다에 별안간 풍랑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화란 태생의 칼빈주의자이자 베자를 스승으로 둔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라는 한 인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다른 모든 칼빈의 신학적 사상들을 수용했지만 칼빈의 예정설만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반펠라기안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하나님의 절대예정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라이덴대학의 교수로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같은 대학교수이자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에 의해 고소를 당했다.

 

처음에 이 문제는 상호 중재의 노력으로 수면 아래로 감추어지는 것 같았으나 아르미니우스가 죽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칼빈주의에 반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태동하자 다시 분쟁의 문제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들을 교회의 회의에 고소하게 되었고,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네덜란드 정부에 자기들의 5대 교리를 작성하여 항의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도르트에서 회의를 열었다. 1618년 11월부터 소집된 회의는 1619년 5월까지 무려 154회에 걸쳐 열렸다. 공식적인 구성원만도 네덜란드 정통 칼빈주의자가 128명, 외국의 칼빈주의자 28명, 그리고 아르미니안주의자 13명 등 모두 170여 명에 달했다. 회의는 압도적 다수를 점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었다. 그 내용으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함과 동시에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칼빈주의와 예정론은 법적으로 승리하였고 반대자들은 모두 사형과 종신형 등에 처하며 패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곤잘레스는 자기 스스로 칼빈주의자로 자처했고, 영원히 칼빈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던 아르미니우스는 본인의 사망 이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알미니안주의의 창시자가 되고 이단의 괴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다. 이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자유의지

조건적 선택

보편적 구속

거부할 수 있는 은총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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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

 

교회사에서 2-3세기를 이단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그만큼 정통기독교 내에서 교리적인 확립을 이룩하지 못한 때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행히 교부들과 변증학자들의 공헌과 각종 교회회의들의 결과로 교회는 조금씩 교리적 기반을 다지고 순항의 닻을 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4세기는 교회의 빠른 성장기로 본다. 그러나 성장의 후유증은 반드시 병폐를 수반한다. 로마제국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갔다. 국경은 게르만족과 고트족과 훈족 등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고 제국의 위용은 붕괴되고 있었다. 오히려 붕괴는 국경에서가 아니라 로마라는 중심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400년경, 아일랜드 출신의 한 수도사가 로마를 방문한다. 당시 로마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이상향이었고 새로운 예루살렘이었다. 누구든지 로마를 한 번 방문해보고 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 수도사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의 눈에 비친 로마는 영적으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도시로 타락해 있었다. 로마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퇴폐로 물들은 소돔이자 고모라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 젊은 수도사는 고민했다. ‘왜 로마가 이렇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이 수도사가 바로 교회사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그 유명한 자유의지의 주창자인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이다. 그는 원죄, 그리스도의 구원, 세례 등을 부정한 이른바 ‘펠라기우스주의’의 원조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원인이 어거스틴(Augustin, 354~430)에 의한 ‘운명론적인 결정론’에 있고, 이로 인해 로마사회가 극도로 퇴폐하고 타락하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어거스틴이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책임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드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무엇보다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 중요함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충분한 자유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신의 은총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모든 사람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아담의 죄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죄인은 이를 모방할 뿐이다.

3) 인간은 대부분 죄를 짓지만 신앙에 의해 죄를 용서받으면 인간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므로 성령의 능력이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니다. 은총은 단지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며 사람의 의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은총의 수락여부는 개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자연적인 강태에서는 하나님의 은총과의 어떤 협력도 할 수 없으며 신앙의 촉발도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고 정의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펠라기우스는 정반대로 본 것이다. 그는 412년과 418년에 칼테이지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교회회의와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2차 세계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한편 429년부터 남부 갈리아지역의 일부 수도사들에 의해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일어났다. 수도사 카시아누스, 빈켄티우스, 파우스투스 등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하다고 한 펠라기우스주의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어거스틴주의를 절충하여 ‘영혼의 구원에는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첫째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상호 대척점에 있는 주장들을 절반씩 취했다는 이유로 교회사에선 이들을 ‘반(semi)펠라기우스주의’라 부른다.

 

그들은 특히 어거스틴의 핵심적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예정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전도의 목적을 파기하고 도덕적 정신을 약화시키며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끈다고 선포했다. 초기엔 예정론만 아니면 그들은 어거스틴의 추종자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강하게 질타했다. 펠라기우스의 원죄부정과 자력구원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원죄란 인간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힘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이 타락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에 하나님의 은총이 우선 필요하다고 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어거스틴을 따랐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거스틴을 완전히 주장하지 않았다. 타락도 완전 타락이 아니라 부분 타락으로 보았다. 결국 그들이 정리한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손을 내밀 때 인간 쪽에서도 같이 손을 내밀어 서로 붙잡을 대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른바 ‘신인협력설’이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490년 파우스투스가 죽은 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중세의 금욕적이고 율법 편중적인 신심의 태도와 융화되어 카톨릭교회 내에서 정착하면서 활발하게 살아나 반펠라기우스주의 후기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6세기 들어 펠릭스 4세 교황(526-530)이 이 사상을 경계하자 세력이 약화되었고 마침내 529년 제2차 오렌지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전통은 여전히 죽지 않고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후기에서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능력을 불어넣는 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밖에서 들려지는 복음처럼 순수하게 외적인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들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능력으로 구원을 향하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하지 않으며, 이 선택에서 제외한 사람의 입장에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 아니므로 인간에게도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위구원은 이렇게 해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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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Gnosticism)

 

배경

 

주후 1세기경, 로마를 비롯한 몇몇 중심 도시들을 제외한 여타지역은 극심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모든 정신적 자원도 고갈된 상태였다. 이러한 때 기독교가 가진 구원의 복음은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 단비와 같은 희소식이었다. 기독교는 점점 세를 확장해 갔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미는 생명의 손을 잡은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로마제국 내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기독교 예배공동체가 생겨났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나와 가정이나 공동의 공간을 이용하여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사회는 헬레니즘에 침식된 철학적 개념과 주제와 더불어 혼합주의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대개 혼합주의는 겉으로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일치와 연합을 주무기로 사용한다. 그래서 보기에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혼합적인 문화에 대해 먼저 우려를 표명하고 대응책을 논한 그룹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지성적 탐구자들인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의 타락과 재앙으로부터 인간의 구원을 논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궤를 같이 하지만 이들의 가르침은 헬라철학에 비해 매우 신비스럽고 우아한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점점 영지주의자들의 호소가 기독교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갔으며 급기야 대세로 확산되어 초대교회의 복음에 일대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들이 득세한 데에는 자연의 재앙들이 영향을 끼쳤다. 63년에 지진이 갑자기 발생했고, 79년에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서 당시 휴양지였던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 두 도시가 폐허가 되었으며, 80년대 중반에는 로마제국 전체에 흑사병이 창궐해 사람들은 염세주의에 빠졌다. 사람들은 비관적인 상태에서 현실세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차에 영적세계를 소개하는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 것이다.

 

영지(그노시스)란, 곧 지식을 뜻하는데 이 지식은 단순히 세상에서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깊은 영적인 체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을 말한다.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의 손에 이끌려 영적 체험의 현장으로 모여 들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어 절대자를 만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적 체험을 하고 영험한 지식을 획득한 이들은 일종의 신적 우월감을 가지고 하류의 인간그룹을 지도하고 관장해 나갔다. 점점 이들의 손에서 성경이 중요치 않게 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에 영지주의자들의 주요한 하나의 특징이 발견된다. 그들은 신비적인 방식으로 신을 체험하는 것을 절대화했는데, 이 결과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 만족을 하지 못하고 성경 이외의 더 깊은 세계를 탐닉하고 여행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정통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인 기준이요 성경 안에 모든 구원이 다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성경만을 고수하지 않고 성경을 포함한 다른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탐험가들은 깊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 결국에 어떤 궁극적인 영을 만나고 그 영과의 합일을 추구하며, 드디어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신적 경지를 터득하고 누린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단의 공통된 특징이다. 한 마디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모든 이단의 원형이다.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이단은 영지주의에 속하거나 영지주의의 한 분파일 뿐이다. 모든 이단은 영지주의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예컨대 신비주의와 체험주의, 고행주의와 내재주의, 그리고 혼합주의와 다원주의 등은 모두 영지주의의 산물이다. 영지주의는 반 기독교적 철학과 사상과 종교의 집합체이다. 영지주의는 한 마디로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다. 영지주의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원수 삼아 괴롭히고 멸망케 하려는 모든 미혹의 술법과 책략들이 다 들어 있다. 영지주의 이후에 나타난 모든 이단들은 단지 영지주의의 변형이자 위장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단을 알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영지주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그를 잘 간파하면 될 일이다.

 

주요 내용

 

그들이 가르친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좀 더 논하기로 한다.

첫째, 이원론(dualism)적 관점으로 모든 것을 논한다. 이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특히 플라톤의 이원론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세상을 두 부분으로 본다. 빛의 영역과 흑암의 영역이다. 이 두 질서의 불행한 만남과 혼합으로 영자아의 타락과 추방이 일어났다. 흑암의 세계 즉 우주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이고 다른 것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들은 물질세계는 악한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는 정신의 세계만이 선하다고 전제하고,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 어떻게 악한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이 계신 빛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모든 신자는 철저히 금욕을 실천해야 하고 무지를 추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신적인 계시를 받고 높은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두 개의 세상 즉 충만(플레로마)이라고 하는 영, 즉 재료의 본래적이며 신적인 세계와, 공허(케노마)라고 하는 열등하고 물질적인 세계라는 두 질서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의 특성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실재하고 중요한 것은 충만 속에서 발출한다. 하지만 이것은 가시적 우주의 낮은 수준에서 전위된 양식으로 모방된다. 공허는 충만의 그림자나 상이다.

 

셋째, 빛의 세계는 영(프뉴마)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 더 낮은 세계는 혼(프쉬케)과 물질(휠레), 육체(싸륵스)로 이루어져 있다. 두 세계는 서로 다른 신이 이끌고 있는데 물질적 우주의 조성자가 '데미우르고스'이고 이는 하나의 신이며 유대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만 영의 세계에 속한 구성원이 아니며 그저 혼의 재료로 이루어져 있고 사물의 참된 근원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의 세계의 주인이신 분의 지성적 복제이다.

 

넷째,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내면적이고 참된 자아에서 영이며, 그들의 고유한 고향은 충만에 있다. 그런데 참자아를 가진 영적 존재인 자기들이 이질적인 우주에서 길을 잃었고 다시 길을 찾기 위해선 계시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은 선민이며 유대교의 하나님보다 월등하며 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질서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주장했다.

 

다섯째,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 1그룹은 희망도 없이 육 혹은 물질의 세계에 잡혀 궁극적으로 멸망할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고, 제2 그룹은 혼의 차원에서 유대교 성경의 하나님에게 속한 기독교인들로서 멸망하지 않지만 2등급의 구원을 얻는 부류익, 제3 그룹은 마지막으로 영들(Spirituals)로서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며 신적인 세계의 충만에 속하게 된다고 했다. 모드 이단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자기에게 속한 구성원들을 계급이나 신분 등으로 나누어 차별화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혹은 예수와 더불어 구원의 계시를 가진 자로 여겼으며 다른 사람과 자신들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그렇지만 예수는 혼의 그리스도일 뿐이라고 했다.

 

특색들

 

첫째, 통일된 내용이 없다. 마치 오늘날의 WCC처럼 특정한 신학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각자의 주장이 중구난방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2세기경의 기독교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둘째, 영지주의가 기독교보다 연대 상으로 아주 앞서지는 않아도 영지주의가 표현하는 운동이나 종교적 경향은 교회와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셋째, 종종 영지주의는 교회 안에서 자란 하이레시스(hairesis, 분파, 이단)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들은 신앙에 있어서 영지주의의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현상이 목격되기도 했다.

 

넷째, 대개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며, 소수에게 계시되고 본질적으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이 소유하는 지식(영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의 강화에는 의도적인 수수께끼 같은 성질이 있다. 모호하고 복잡하고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 속에 빛이 있다고 가르쳤다.

 

다섯째, 또한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계시로서 나타나는 이 영지는 초월적이고 원초적인 실재에 대하여 이야기 형식(뮈토스)을 띤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추상적인 철학적 혹은 신학적 개념 혹은 일반적인 상징들이 담겨 있다.

 

여섯째, 영지주의 문학에는 공상적인 내용이 포함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창조이야기에는 이교신화로부터 혹은 점성술로부터 마술로부터 나오는 주제와 개념들을 끌어다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기본교리에 대한 반박의 도구가 되었다.

 

역사적 자료들

 

<플로라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Flora)>

- 영지주의자인 프톨레미의 작품으로 이 안에 <피스티스 소피아>가 들어 있는데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뒤에 <위대한 로고스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55년엔 <요한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모습을 보였다. 영지주의에 반대한 기독교 변중가들인 리용의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터툴리안, 로마의 히폴리투스 등의 작품에서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 한편,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에서 4세기경의 영지주의 작품들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엔 총 48개의 짧은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진리의 복음>, <도마복음>, <트리파르티트 트락타테>, <레기스에게 보내는 서신>, <부활에 대한 논문> 등이 대표적이다.

 

영향

 

영지주의자들은 초기 기독교 문학과 전승에 진지하고 중요한 해석가들이었다. 대표적 영지주이자인 발렌티우스(130-160년에 활약)는 바울서신으로부터 자신의 영감을 발견하고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 그리고 육적인 것으로 나누었고 테오도투스는 골로새서를 가지고 충만을 설명했으며, 헤라클레온은 요한복음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시도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의 학문적인 부분에 하나의 충격을 던진 것이다.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영지주의의 심각한 왜곡과 가르침에 대해 화가 났다. 궁극적인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창조주와 다르다는 주장에 대해 분노했으며, 영은 자동적으로 선하고 육은 그 자체로 악하고 구속받을 없는 것이라는 운명론 또는 결정론에 대해 반론을 펼쳤다.

 

한편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이며 새로운 이단의 주장을 하는 부유한 기독교인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마르키온(110-160)이다. 주후 139년부터 로마에서 활약한 그는 바울서신을 기준으로 새로운 성경을 만들었으며 독립된 교회를 세웠다. 특히 유대교의 율법과 복음사이에는 대립과 모순이 있다고 추론했으며, 모세의 언약의 하나님과 예수와 바울의 하나님이 전혀 다른 존재라고 했다.

 

영지주의는 170년경 이상한 예언주의자인 몬타누스를 등장시켰다. 그는 자신이 성령이라고 했으며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채 살며 다가올 종말을 선언했다. 정결과 순교를 원칙으로 내세워 두 아내인 브리스길라와 막시밀라도 몬타누스와 헤어졌다. 179년 막시밀라는 죽으면서 '내 이후로는 더 이상 여성 선지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운동은 시리아와 안디옥에 퍼졌고, 로마와 서방세계를 휩쓸었다. 겉으로 보기에 매우 경건한 그들의 삶이 매력을 던졌던 것이다.

 

결론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상 가장 심각한 내부의 위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것은 타락하고 악한 것에 불과했다. 영적인 것만이 선하고 순수할 따름이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영적인 지식, 즉 세상의 악의 기원을 알게 됨으로써 구원을 완성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지식. 즉 그노시스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택받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노시스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스럽고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진리의 그림자로 규정하고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12개 정도의 분파로 나누어진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을 부정해서 성경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내용을 배격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육신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따로 구분했다. 이는 19-20세기경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따로 분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의 평범한 젊은이를 잠시 사로잡은 어떤 영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선택받은 일부에게 있는 영이 현재 육체에 갇혀 있으므로 이 몸에서 해방되면 다시 영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핵심교리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구전이나 비밀문서들이 전해주는 은밀한 진리에 관한 믿음이다.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매우 쉽게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이것이 이단들이 갖는 대중적인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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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영적 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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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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