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1.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종교개혁은 유럽사회의 지축을 흔드는 대지진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에 반발해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비단 교회 뿐 아니라 전 유럽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촉진시켰다. 당시엔 교회와 정부 모두 교황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교황주의에 대한 부정은 즉시 세속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군주들에 대한 반역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반역은 화란에서부터 점화되었다. 원래 화란은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라인강 하류의 낮은 지대에 속하는 17개 주로 구성된 나라로서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란의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로서의 결집력을 자랑했다. 크게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황제 카알 5세(Karl ∨, 1550-1558)의 통치하에 있었고, 작게는 부르군드 공화국에 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카톨릭을 신봉했고 개신교는 매우 미미한 세력에 불과해 하나의 이단적 종파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더욱이 칼빈주의는 몇몇 지식인들 그룹에서만 소개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파고가 드높아지자 당시 화란의 통치자인 황제 카알 5세는 즉시로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필립 2세(Philipp ∥, 1555-1598)는 탄압을 더 가중시켰다. 그는 카톨릭교회에 대한 충성과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선포하는 한편 왕권신수설을 앞세우고 종교개혁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핍박이 가해질수록 개신교도들의 종교개혁과 정치, 사회, 경제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뜨거워져 갔다.

 

그 기반에는 일찍부터 발달한 화란의 경제력이 깔려 있었다. 특히 화란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안트워프 등은 중세후반부터 한자동맹에 가입하고 북해 무역을 주도하였고, 신대륙 등의 발견이후 세계무역의 50% 이상을 담당하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화란 내의 도시 수만 200여개에 달했고, 이 도시들에 의해 거두어진 세금은 당시 강대국 스페인이 중남미 식민지국에서 거둬들인 세금보다 무려 7배(은을 기준)나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카톨릭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는데 그 대안으로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만나게 되었고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어두운 커튼이 열리며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빛이 비추어지자 대세는 개신교로 기울어져 갔다. 드디어 화란은 통치자인 스페인과 결별하기 위해 이른바 독립전쟁을 치루고 1609년에 네덜란드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화란의 독립은 유럽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독일의 영주국인 팔쯔 선제후국은 1560년에 칼빈주의의 개혁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으며, 스코틀랜드는 1576년에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다. 이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개신교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확산의 원인으로는 개신교의 관용정책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개신교를 수용한 여러 국가나 교회들은 카톨릭과 달리 비록 칼빈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해도 종교의 자유를 소지할 있도록 종교적 관용정책을 베풀었는데 이것이 많은 점에서 개신교가 급속도록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이후 새로운 화란은 칼빈주의를 국가의 종교와 국민들의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들였으며 도르트회의를 통해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수립하는 등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칼빈주의 신학과 영성의 가장 중요한 무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화란은 아브라함 카이퍼, 루이스 벌콥, 헤르만 바빙크 등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들을 배출하여 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적으로 개혁주의의 본산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Selection)

③ 제한적 속죄(Limited Salvation)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reservation of Saints)

 

2. 알미니안주의

 

16세기 이후 유럽사회는 칼빈이 대세였다. 루터교 등 다른 교파들도 공존했지만 칼빈주의의 득세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칼빈의 바다에 별안간 풍랑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화란 태생의 칼빈주의자이자 베자를 스승으로 둔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라는 한 인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다른 모든 칼빈의 신학적 사상들을 수용했지만 칼빈의 예정설만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반펠라기안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하나님의 절대예정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라이덴대학의 교수로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같은 대학교수이자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에 의해 고소를 당했다.

 

처음에 이 문제는 상호 중재의 노력으로 수면 아래로 감추어지는 것 같았으나 아르미니우스가 죽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칼빈주의에 반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태동하자 다시 분쟁의 문제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들을 교회의 회의에 고소하게 되었고,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네덜란드 정부에 자기들의 5대 교리를 작성하여 항의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도르트에서 회의를 열었다. 1618년 11월부터 소집된 회의는 1619년 5월까지 무려 154회에 걸쳐 열렸다. 공식적인 구성원만도 네덜란드 정통 칼빈주의자가 128명, 외국의 칼빈주의자 28명, 그리고 아르미니안주의자 13명 등 모두 170여 명에 달했다. 회의는 압도적 다수를 점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었다. 그 내용으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함과 동시에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칼빈주의와 예정론은 법적으로 승리하였고 반대자들은 모두 사형과 종신형 등에 처하며 패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곤잘레스는 자기 스스로 칼빈주의자로 자처했고, 영원히 칼빈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던 아르미니우스는 본인의 사망 이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알미니안주의의 창시자가 되고 이단의 괴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다. 이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자유의지

조건적 선택

보편적 구속

거부할 수 있는 은총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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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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