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원하는 것을 왜 할수 없는지 이해할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공백 기간을 허락하시면

그 공백을 스스로 채우려 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그 기간은 당신에게 성화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성화 이후에 봉사가 무엇인지 가르치시기 위해 허락될수 있습니다


만일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생기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 생길때마다 멈추십시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이는거 같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기도 하고 어떤 사업관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충동적인 감정에 의해 행동하지 마십시오

분명한 인도함없이 무턱대고 진행했다가 오히려 복구하는데

많은 세월을 보내야하는 어려움을 당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완만하게 드러내실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마음 상함이나 후회가 없도록 주께서 친히 행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ㅡ오스왈드 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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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분별력

빌립보서 4: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참된 성도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 받을 말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다.

참된 거룩은 덕과 기림이 될 만한 행위들을 분별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분별의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 중에 하나이다 (고전 12:10). 참된 분별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성령이 허락하시는 분별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영화롭게 하며 비복음적인 요소들을 걸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들은 성도들에게 마땅할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성령의 분별을 통해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등을 구별하여 내어 행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성령의 분별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은 영적 오류를 단번에 인식한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주님의 양”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낯선 음성을 따라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영적 분별은 하나님의 영광과 매우 긴밀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단히 예민하다.

영적 분별력을 지닌 성도는 빛 가운데 행하며 빛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들이다. 주를 향한 참된 순종과 영적 분별력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잊지 않도록 하라.

-오스왈드 챔버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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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오스왈드 챔버스 (Oswald Chambers)

조바심과 불평없이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가?
기다린다는 것은 손을 접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는 
언제나 기다림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진리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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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왈드 챔버스 (Oswald Chambers)

 

 

성경적인 자기 성찰

데살로니가전서 5:23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성령의 신비한 역사는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는 가장 깊은 마음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 세계를 훨씬 초월하는 가장 깊은 마음의 영역까지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호하실 때 당신의 그 깊은

영역까지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는가? 주님의 보호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고 깊은 차원에서 진행된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당신은 이 내용이 당신이 의식할 수 있는 죄악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더 큰 자비가 임하여 바른 깨달음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하는 ‘모든 죄’는 당신이 다 헤아릴 수 없는 너무나 크고 깊고 넓은 차원에 속한다.

사실 죄로 인해 인간은 이미 그 마음이 어두워졌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를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성경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는 우리의 영의 깊이만큼 깊고 높은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오직 우리 마음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온전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채우셨던 바로 그 성령으로

당신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라.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강한 역사 가운데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이 보전될 것이다.

[주님은 나의 최고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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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왈드 챔버스 (Oswald Chambers)

 

 

‎사람을 향한 사랑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 ‘주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교훈하셨다.
주님의 이 교훈은 “취하여 붙들려”는 인간의 본성과 상충된다. 어린이가 선물을 받으면 이렇게 말한다. “이거 내거야.”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소욕의 본능이 주는 본능으로 대치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의 법칙은 “주고 주며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주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하게 받았으며 또한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 10:8). 이때 주는 문제는 얼마나 많이 주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지의 문제다.

 

“준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돈을 생각한다. 물론 돈은 피처럼 중요하다. 그러나 돈을 주면서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마음으로는 동정하면서 돈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과 물질 등,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주의 사랑을 행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재하셔야 한다. 그 이유는 성령만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주의 사랑의 생명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준다’는 면에 있어서 우리 주님의 삶에서는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의 관계다. 주님은 사람들의 후대를 받아들이셨다. 세리 및 바리새인들에게 대접을 받으셨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고 비방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잃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바울이 말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고전 9:22).

우리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영적으로’ 주는 것을 뜻한다! 영적으로 주는 사랑만이 주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우 인색해서 자신에게 실질적 유익이 되지 않으면 남들과 대화할 시간마저 갖지 않는다.

[주님은 나의 최고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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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타인을 위한 기도 (2) 만일 기도한다면 / 챔버스의 글들

타인을 위한 기도의 능력과 제한 

 

요한일서 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어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었는지 안지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직 중보기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판단하려 한다면 우리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종종 이러한 실수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련 없는 추상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그분보다 그분이 하신 일에 우리의 믿음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이 잘못되는 것처럼 보이면 중보 기도를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불평한다 

 

          자기 생각에 도취되어 맹신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나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시끄럽게 할 뿐이다. 이러한 기도는 중보 기도가 아니다. 이러한 기도는 천사가 지나가면서 기도의 대접에 담기를 두려워하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려는 자세는 없고 오직 자신의 뜻을 관찰시키려는 비정상적인 정열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를 몰아 세우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듣고 행하셔야 한다고 믿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행하셨다고 해서 항상 똑 같은 패턴으로 일할 것이라고 제한하지 말라. 주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다시 반드시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제한은 종종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망각하고 과거에 그 일을 하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또 그렇게 하시라고 강요하는 기도를 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된 느낌도 얼마나 열심히 이러한 잘못된 기도를 드리는지! 열광적인 기도! 그러나 아무런 능력과 절제가 없는 기도! 이들은 자신의 열정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더니 마침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이루신 구속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따라서 죄와 병마와 인간의 한계와 죽음 등은 구속 안에서 다 해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속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주님의 때에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지금 세대에서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문제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을 주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명하신 뜻은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다. 그러나 병마 및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들의 발생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즉 속죄의 효력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에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의 결정은 내 뜻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있다.

  

          속죄의 효력을 오해한 사람 중에는 이제 속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나는 아프지 않겠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혼돈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치유는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주께서 친히 간섭하시며 만져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께서 만져 주셔야 한다. 한편 죄로부터의 구원은 이러한 구체적인 주님의 간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를 받아들였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진리를 잊은 경우, 우리는 영혼 구원의 문제와 현실의 문제를 혼돈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바리새인적인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역자 주 - 챔버스가 살던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전쟁이 많은 때였다. 일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쓰여진 글들이 많다. 그 당시 흔하였던 가르침 중에는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일까? 아마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라는 바리새인적인 깨달음들이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아파도 아픈 척을 못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재난을 당하면 그가 왜 재난을 당하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저렇게 가난할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식의 사고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적인 사고는 완벽하게 맞다. 즉 속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 말대로 속죄 안에서는 병마가 없어야 한다. 죽음도 없어야 한다. 죽을 필요도 없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제한 받는 일도 더 이상 없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완벽해야 한다. 속죄를 받은 사람에게는 건강한 몸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현재 부활체를 가르치는 자들의 사고와 매우 잘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현재 부활체라는 가르침이 얼마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지! 이 가르침은 온 땅을 돼지 우리로 만들고 있으며 모든 기독교를 익살 또는 장난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신에 자신들이 유추한 추상적인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생각에 도취된 맹신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러한 맹신이 없었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추상적인 진리로 만들어 맹신한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삭을 바치라.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안된다. 만일 맹신자라면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전에 말씀하신대로 그냥 하겠습니다. 나중에 하신 말씀은 사탄의 음성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한 우리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 시대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 섭리가 나타날 것인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많은 기적들을 베푸셨다. 특히 병고침 같은 기적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를 할 경우 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명령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프면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으면서 구원 받았으니 아프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 말라. 기도를 멈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차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반드시 치유하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라.  단지 간절히 기도를 드린 후에 주께서 주의 주권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맡겨라.

 

 

[출처] 40. 타인을 위한 기도 (2)|작성자 스데반 황/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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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 진리의 귀중함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게 되고 기꺼이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길 바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종합적 진리를 알려 주신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이 의미는 주께서 당신을 흠이 없는 고결한 상태로 보전하시겠다는 뜻이다. 고결함(integrity)이란 손상된 곳 없이 흠이 없다는 뜻이다. 특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바울의 중보기도는 일시적이면서 동시에 지속적인 거룩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일시적이면서 지속적인 거룩의 상태란 계속적으로 흠이 없이 고결한 상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보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대한 종합적 진리에 마음을 다 쏟지 않기 때문에 기껏해야 거룩을 회심의 두 번째 현상 정도로만 본다. 그러나 거룩이란 오직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그 위대한 의미를 안고 있다. 거룩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후에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종합적 진리는 온 영과 혼과 몸에 있어서의 거룩의 비결을 알려 준다.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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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선함과 청렴 그 자체에 사람의 시선이 끌리게 해서는 안된다. 선함과 청렴은 다만 다른 이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끌리게 하는 자석의 기능이 되어야 한다. 만일 나의 거룩이 남으로 하여금 주님께 시선을 끌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서가 어긋난 성결이다. 그런 거룩을 지닌 자는 타인에게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풍겨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랑의 참 벗이 아니다. 주님이 아닌 내가 언제나 흥하기 때문이다. 신랑에 대한 바른 우정과 충성을 유지하려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욱 주님과의 생명력이 있는 관계 수립에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력있는 관계 유지인데 여기에는 아무 것도 방해할 수 없도록 착념하며 경계해야 한다. 우리 생애의 대부분은 '의식적인 순종의 계속' 보다는 '주님과의 참 관계', 즉 신랑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혼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신랑의 친구가 되기는 커녕 주님의 무기를 사용하면서 주를 대항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우리의 일생동안 항상 주의를 요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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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타인을 위한 기도 커리큘럼 (2) 만일 기도한다면 / 챔버스의 글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실 것인지를 절대로 예측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귀한 약속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도록 돕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혈과 육의 상식에 따라 가장 현명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을 포기할 때까지 13년 동안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지 않으셨다. 그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 엘 샤다이 -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17:1).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서서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치시며 적극적으로 깨어서 미래를 소망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마다 언제나 놀라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놀라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놀랍다. 너무나 놀라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지를 못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 14:13). 이 말씀이 놀랍지 않은가? 이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라서 우리 중 반 이상은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 7:8). 이 말씀도 놀랍지 않은가? 이 말씀도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라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성령을 달라고 간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너무나 놀라와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18:19). 이 말씀도 놀랍지 않은가?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5:16). 이 말씀도 놀랍지 않은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얼마나 놀랍게 응답하시는가를 본다면 오늘도 당신은 주께서 주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지켜 기다리지 않을까? 당신은 성루에 서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을 꾸준하게 지켜 기다리고 있는가? 혹은 메로스 거민처럼 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의 영이 여선지자 드보라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 5:23).

 

          하박국 1장은 이스라엘에 임할 무서운 황폐함에 대하여 언급한다 (참조, 1:1-11). 오늘날 이 시대에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해 보라.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 대부분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황폐함에 대해 잠들어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깨어있지 못하고 하나님과 함께 서서 어둠의 세력들을 대항하지 않으면 우리도 메로스의 그 지독한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심령술, 미신, 크리스천 싸이언스, 시한부 종말론이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번져 전 지역을 잡아 삼키며 휩쓸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젖먹이 같이 아직도 보채고만 있는가? 어두운 세력이 활개를 치는 이러한 때에도 여전히 많은 신자들은 우리 귀에 즐거운 말만 해 주세요.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분 좋고 신나는 말들을 해 주세요. 선지자적인 난처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삼가해 주세요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루에 올라서서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길 바라신다.

 

          어려움이 닥치고 구름이 덮일 때에 더 강건히 깨어 기도하는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마음이 상해서 다른 길로 빠진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주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푸대접하며 불평한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 16:14).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혼란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를 성루에 다시 서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기다리면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크게 눈을 뜨고 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의 혼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성루에 서서 깨어 기도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하여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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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의 장소 - 13. 예수님께서 평화를 위하여 오셨는가? 도움의 장소 / 챔버스의 글들

 13. 예수님께서 평화를 위하여 오셨는가?

 

이사야 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성탄 메시지 (예언이 아니라 선포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기독교에 관한 여러 관점들은 다시 분명히 확인하여 볼 때 틀린 내용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관점은 평화를 위한 종교이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종교이며 국가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종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관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솔직한 비평가들이 질문합니다. 평화라구요? 평화의 왕, 예수님이 오시고 천사가 평화를 예언한지가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 도대체 평화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천사가 평화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선포했다고 말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즉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평화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존재입니다. 그분은 -인(God-Man)이십니다. 그분에 의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패턴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면 다른 영역으로 거듭나게 되며 그의 모든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거듭남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다는 뜻은 거듭난 그 사람이 그분의 아들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은 구속을 근거로 하여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가장 심오한 것까지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위협 (엄포가 아니라 인격적인 힘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일반적 관점은 예수님께서 전 세계에 사랑과 평화를 알리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온유하시고 친절하시고 자상하신 성품을 지닌 분으로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 것 위에 우리의 생각을 세우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다고 배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 중심은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불타시고 있다는 사실을 매번 잊습니다. 성전에서 우리는 온유하시고 친절하시고 자상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 좇으시는 분노하신 분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온유하심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대로 그분의 아들에게 행하셨습니다. 아들은 완벽한 온유함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성령께서 전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진리를 깨닫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에서는 평화는 사라집니다. 대신 죄책감이라는 검이 당신을 찌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화평이 아니라 소요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는 모든 평화를 향하여 칼을 드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책감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으면 오직 다시 평화를 찾는 길은 거룩 외에는 없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마음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라고 하셨습니다 (참조, 요 15:22). 그렇다면 주님은 왜 오셨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내가 행하기에 충분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속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왜 선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어디에서부터 그 교훈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는 예수님만큼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눈보다 더 희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순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너무나 순결하여 정욕이 전혀 틈타지 못합니까? 당신의 마음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책잡으실 만한 것이 없습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이상을 세우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 이상을 모르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첫째 이유는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주님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으로 사람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거듭나야 할 필요를 깨닫게 됩니다. 이 자리에 이르면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너는 복이 있나니.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의 머리로 믿는 바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 안에 새롭게 침투된 새로운 성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삶의 가장 중심된 자리로 임하십니다. 기독교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자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시기 위하여 나를 위하여 오셨다는 점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원칙이나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맺어진 성도의 마음 속에서 성령께서 임의로 역사하시면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일관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신조와 같은 믿는 바에 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일관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 (설교가 아니라 순결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5:17).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정죄를 받아 마땅한 것은 알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기독교 관점을 어느 정도 취하지만 결국은 내가 믿는 바에 그 관점들을 바꾸어 버립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말합니다. 그럼요,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보이십시오. 당신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처럼 이해타산이 생기면 다투지 않나요? 만일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가 당신의 금전 문제와 결혼 문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질문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이 참입니까? 실제입니까? 현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칩니까?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주님의 구속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반드시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위하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주님 자신의 평화이지 다른 평화가 아닙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외부 상황에 의하여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으로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근거로 한 평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 우리 구세주께서 주시는 평안!

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평안!

 

이 평안이 성경이 알리는 평안입니다.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이며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전능한 평안입니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시몬이라는 ....사람이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눅 23:26)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지불하는 댓가는 불신자들이 치루는 희생에 비하며 훨씬 적은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사랑에 빠져 있으면 순종은 기쁨이 되어 우리에게 하등의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에 차질을 가져오게 한다고 불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란 특정 레벨 하에 우롱을 당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고통은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기피할 수 없는 짐이다. 인간의 자존심은 조롱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순종해야 될 입장에 있다. 주님 자신이 처하셨던 입장을 우리가 벗어 날 수는 없지 않은가!

영적 생활의 침체는 우리들 스스로 모든 일을 무난하게 처리해 버리려고 할 때 생기게 된다. 그러나 주님도 섬기고 딴 사람들로 무난하게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다른 사람들이 즉시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신은 가만히 일을 무사안일하게 처리하는 태도를 벌리고 자존심을 꺾으면서 하나님 충성하려는가, 아니면 남에게 영향이 가는 일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겠는가?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불순종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금시 사태가 호전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슬픔이 된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우리들의 순종 때문에 영향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 돌보아 주실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모든 결과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주님께 순종할 때에 타인에게 끼쳐지는 영향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사태를 통제하려는 습성을 경계하라.


 
 
 
예수가 없는 진리는 오류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는 자는 

결코 진리를 알 수 없다. 

 

모든 진리는 오직 하나의 진리이며

그 하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가 곧 진리니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진리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명언 중에서

1. 기독교적 사고 (Christian Thinking) - 1) 구속 주의 형상을 본받아 / 챔버스의 글들 스데반 황 역

 http://blog.naver.com/thebloodofx/20101151435

 

 

1. 기독교적 사고 (Christian Thinking)

 

< 주님 보여주시는 높이까지 오를 수 없어도

주님 계시하는 깊이까지 내려갈 수 없어도

높은 것은 알수록 좋고

깊은 것은 느낄수록 좋다. > - 진 인젤로 (Jean Ingelow (1820-1897), 영국 시인이며 소설가)

 

기독교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안전한 자세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더 깊은 깊이가 있다는 것과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높은 높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를 공손하게 만들며 자신에 갇혀 옹졸한 마음으로 강퍅하여지는 것을 막아준다.

 

사고(Thinking)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자연적인 생명이던 영적인 생명이든 생각으로 생명이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적 사고란 종교적인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을 근거로 하는 사고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하지만 사건을 근거로 하여 사고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건들이 발생하면 혼동에 빠진다. 만일 기독교적 사고를 하기 원하고 또한 개인적인 체험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기 원한다면 영적인 훈련 뿐만 아니라 지적인 훈련도 해야 한다.

 

1) 구속(Redemption)

 

< 내게 복음이란 단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정욕으로 가득차고 교만과 질투와 악의와 미움과 자기 의로 가득찬 나에게, 모든 비참을 다 당해야 마땅한 나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의 중생케 하심과 깨끗케 하심은 단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복음이다. 나는 여자로부터 난 모든 죽을 영혼들이 왜 동일하게 불가항력적인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  - 파스칼

 

구속은 기독교 믿음의 가장 위대한 외부적 사건이다. 구속은 각 개인의 구원의 체험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사고의 바탕에도 영향을 끼친다. 구속의 계시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곳에 오셔서 십자가 상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모든 인류를 구속의 바탕에 둠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요 17:4).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신 것인가? 세상의 구속을 이루셨다. 사람들은 구속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구속 받았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이는 당신과 나의 개인적인 구원을 이루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속의 바탕 위에 서게 되었다는 뜻이다.

 

당신은 구속을 믿는가? 당신이 아는 가장 악한 사람을 생각해 보라. 조금도 애착이 가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라. 당신의 삶에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가시 같은 사람을 떠올리라. 가장 비열한 사람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사고를 시작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정말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악한 사람을 만날 때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라고 말은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 속에는 그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불신앙이 우리 주변의 영혼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마 13:58). 그러나 자신의 더딘 믿음을 극복하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게 되면 그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을 전달하는 발전기가 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무도 예수님의 유일한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당신은 구속 위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죄와 잘못들을 방관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살시키는 것은 아닌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8). 즉, 구속에 기초한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아직 자신들이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자들이 깨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

 

우리는 구속의 계시와 중생의 체험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은 체험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 때문에 살아있다. 마찬가지로 구속 그 자체는 체험이 아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중생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인간의 속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곧 그 사건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구속은 사람이 의식하는 차원을 훨씬 초월한다. 구속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주를 위한 것이며 물리적인 이 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죄와 마귀가 건드려서 망가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전하게 구속된 것이다. 구속이 현실 가운데 완전하게 드러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새로운 인류와 함께 새하늘과 새땅이 임하는 날이다. 만일 구속과 중생을 혼동하면 우리는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생의 체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지만 이 중생을 가능케 한 구속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구속의 위대한 계시적 사건을 설명하면 오해를 한다. 각 사람이 체험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체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놀라움과 경이함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성경은 인생의 깊은 저변에 흐르는 근본적인 것들을 다룬다. 이러한 근본적인 것들 중에 하나가 모든 사람에게는 죄의 성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연대(solidarity)라는 의미는 입장이 같다는 뜻이다. 인류의 연대성이라는 표현은 인간 생명의 저변에는 공통적인 연결이 있다는 뜻이다.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연결은 죄의 유전을 말하는 것인데 이 유전은 마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롬 5:12).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롬 6:6)이라고 말할 때 그는 죄의 유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속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며, 우리의 옛사람에 의하여 연결된 죄의 본체로부터 끊어지게 된다. 즉, 우리는 완벽히 그리고 온전히 죄의 성향과 굴레에서 구원 받게 되는 것이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롬 6:18). 죄의 보편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구속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구속이 다루는 것은 각 개인의 죄악이기 보다는 전인류의 죄다. 즉, 죄의 유전이라고 불리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다룬다. 가짜 복음주의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따로 떼어내어 그것을 구속이라고 부름으로 구속의 의미를 왜곡 시키고 있다.

 

기독교적 사고의 기반은 하나님께서 죄의 유전으로 인한 저주의 가능성으로부터 세상을 구속하였다는 사실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후 5:19). 계시에 해당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형벌을 받으셨다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책임을 묻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죄의 성향을 물려 받은 것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내 자신의 출생 및 죄의 유산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만일 잘못된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내게 책임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잘못된 성향에서 건지시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도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이 빛을 보고도 어두움을 좋아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참조, 요 3:19).

 

상식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당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결코 분별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신대로 되돌려 놓으시기 위하여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알게 되면 당신은 구속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구속의 가장 놀라운 계시는 구속은 모든 사람을 속죄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깨달으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제자도는 구원을 얻는 것과 다른 문제다. 자기 자신을 준비하여 제자도의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일들이 이 세상에 있다. 구속을 바탕으로 하여 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나의 삶은 현실 속에서 제자의 삶을 살게 된다. 즉, 나는 예수님의 생명을 나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샘명수 쉼터/한아름님




전가(Imputation)와 전이(Impartation) 

 신학에서 전가(Imputation)는 복음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마틴 루터의 신학을 요약하면 전가이다. 즉, 신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되는데, 예수님과 연합할 때 (즉, 언약이 맺어질 때), 예수님의 의는 믿는 신자에게, 신자의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인데 이는 그가 완전한 예수 안에서 완전한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이루신 의가 그 사람에게 전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율법을 범한 죄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그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여 치른 것이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대속이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 개념은 전이(Impartation)이다. 이는 카톨릭 교회가 사람이 태어나 영세를 받으면 거듭나게 되면서 의가 전이 된다고 가르침으로 인하여 용어 자체를 위험하게 보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복음을 통해 성령이 하시는 일을 영세라는 예식으로 대치시킴으로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거슬렀다. 이러한 죄는 성령 모독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성령이 복음과 함께 일으키는 전이의 사실을 등한시  함으로 인하여 개신교 성도들은 법적인 확신을 누리는 반면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즉, 전가로 인한 즐거움을 누리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전이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신학 용어이다. 거듭난 자는 예수님의 생명, 즉 영생을 소유한 자임을 말한다. 전이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이 핵심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 하겠다.

 따라서 신자는 완전하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나아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 이 생명이 없다면 신자의 삶은 오직 위선 밖에 없으며 세상 사람들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녔기 때문에 성령으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전이는 성도들마다 실제적인 삶에서 증거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면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대속을 하셨음을 깊게 깨달으며 더욱 주를 사랑하며 순종하게 된다.

 전가와 전이는 '십자가의 도'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전가를 알게 되며, 전가를 깨달은 자들은 자신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며 그 생명을 나타내게 된다. 즉,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명의 속성이 나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오직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을 통해 내가 죽고 그리스도를 살게 한다면 .... 

  스데반 황 목사님 역

http://cafe.naver.com/thebloodofx/1024 

  출처: 생명수 쉼터

 

그때 그 일이 있은 후에야
나를 거룩하게 구별하신 내 주님을 만났다네.

어쩌면 오스월드는 조지 폭스(George Fox)의 경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폭스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비참한
악조건', 즉 인간의 마음속에 드러나는 끝도 없는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깊은 연민과 관심을
갖게 되었던 사람이다.

오스월드의 경험 역시 그를 타인의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체임버스는 위대했던 영혼들의 경험을 어설프게 흉내내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었다. 바울, 어거스틴, 루터,
그밖의 여러 성인들이 거친 영적 경험들은 과연 하나님께서
처절한 궁핍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어떻게 보살피시는지
보여주는 귀감들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들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금물이다.
구도자의 영혼이 구세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빛 속으로
도달하기 위한 명목하에 너무나 엄청난 고뇌를 스스로
감수하려 한다면 체임버스로서는 결코 그 고뇌의 길을
추천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체임버스의 경험은 회개와 헌신이
한낱 번지레한 입발림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 위선을
경고하는 적절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토록 놀라운 경험에 대해 체임버스 자신이 언급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 훗날 그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은혜를 베푸시사, 그분이 나를
훈련시키셨던 것과 같은 그런 훈련을 자네는 결코
받을 필요가 없기를 기도하네.

그분은 나를 스올로 데려가셔서 내 온 마음을 부수셨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고뇌의 시기에(만약 자네가
그 고뇌를 알게 된다면, 능력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고통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거야), 나는
겨우 한두 줄의 글밖에는 쓸 수 없었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도 나는 그 일을 거의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야 그 일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는군.

지금까지 그 일들은 갈갈이 찢긴 작은 조각들로
깊은 심연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던 모양이야...

들어보라! 저 다가오는 울음소리!
껍데기를 찾던 내 영혼의 울음소리...
이상한 곳을 내달리던 공허한 열정의 울음소리...
그 고통에 찬 목소리가 부르나니
그 넘치는 눈물이 흐르나니
고통에 찢긴 내 생명
다시 즐거운 삶이 있을까...

슬픔에서 떠날 수 있을까...
이렇게, 눈물 속에 잠겨야 하는구나.

그때 그 일이 있은 후에야 나를 거룩하게 구별하신
내 주님을 만났다네.

청렴한 영혼의 사람 ‘오스왈드 체임버스’

(데이비드 램버트 지음/ 김대웅 옮김/ 기독신문사)
1부 체임버스 인품. 48~50p에서 발췌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님


 10. 조화

 

1) 건강 신체적 조화 (실제와의 화평)

 

창세기 2:15-17 (참조, 2:1-9)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조화는 부분이 서로 함께 하면서 전반적으로 서로 연결된 것을 뜻한다. 신체의 조화 또는 건강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창세기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내용은 성경 전반에 걸쳐 주제에 대한 모든 언급을 특색짓는다. 건강 (신체의 조화), 행복 (도덕의 조화), 거룩 (영적 조화) 모두 인간의 삶이 이루려는 주요 목표에 대한 다양한 면들이다. 신체의 조화인 건강은 우리의 유기체와 외부 세상과의 완벽한 균형이다.

 

(1) 멋진 동물을 숭배함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 147:10).

 

멋지게 관리된 건강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있을 것이다. 구절은 하나님께서 건강, 신체의 조화를 사람이 두려고 하는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체의 건강을 예배하는 현대의 이름은 크리스찬 사이언스다. 건강 숭배의 가장 오류는 사람의 도덕적, 영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점이다.

 

(2) 병에 대한 자세를 숭배함

 

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 39:10; 참조, 39:6-11).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비참의 화려함에 도취한다. 그들이 숭배하는 한가지는 고통, 아픔, 약함, 고통에 예민함 등이다. 아픈 태도를 숭배하는 것은 인류 역사 가운데 안정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유는 시대마다 영향을 끼쳤던 위대한 사람들 대부분이 다들 어느 정도는 신체적인 질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엘은 높은 예민함과 교양을 갖춘 남성이었는데 살아있기 조차 벅찰 정도로 병이 심했고 또한 평생 병약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에 썼다. “병이 가장 먼저 호출하는 것은 신적 가치이다. 비록 병마들은 악하게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정말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내려오는 호소,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마음으로 채찍을 대시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이러한 자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픈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를 숭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병에 대한 성경적 입장은 믿음-치유(faith-healing) 믿는 사람들의 자세와 전혀 다른다. 성경적 입장은 하나님이 병을 보내시거나 또는 병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병은 하나님과 사탄에 의해 사용되는 사건으로 본다. 절대로 당신의 자신의 체험 위에 원칙을 세우지 말라. 개인적 체험은 이러하다. 나는 생애 가운데 한번도 아무 탓할 이유가 없이 아픈 적이 없었다. 병이 내게 허락되었는지 이유를 알기를 주께 구할 때마다 나는 결코 잊을 없는 교훈을 배웠다. , 나의 신체적 건강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코 당신의 믿음을 어떤 교리나 다른 사람의 언급에 두지 말라. 대신 하나님의 책을 붙들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영적인 성품에 정확하게 맞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개인적으로 다루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취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오리 무중에 빠진다. 하나님의 책은 사실들을 다룬다. 건강과 병은 공상이 아니라 사실들이다. 성경에는 지금 우리 시대처럼 기적적으로 치유된 여러 경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서 치유의 기적들이 발생하였는가? 우리가 사건들을 흉내내도록 하기 위해서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건들은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분별할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건강이나 병의 사실에 기인되는 화평은 무지한 것이며 위험한 것이다. , 건강하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평안한 사람들은 평안 때문에 그들 마음은 종종 무디어진다. 반면에 병든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건강한 모든 것을 향해 비뚤어진 눈을 갖기 쉽다. 사람이 건강을 우상으로 만들때 이는 피조물 중에 가장 잔인한 우두머리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다.

 

나는 의도적으로 주제를 애매하게 두며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겠다. 사실 답이 없을 있다. 가장 곤란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답변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일어나는 사실들을 증명할 없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건강의 사실, 병의 사실은 항상 있다. 우리가 선택할 있는 사실들이 아니다. 건강과 병은 오고 간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다른 차원, 도덕적 차원과 다음 차원인 영적인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2) 행복 도덕적 조화 (원칙과의 화평)

 

행복 또는 도덕적 조화는 성향과 우리의 상황 가운데서의 완벽한 조화이다. 원칙과의 화평은 사람의 도덕적 속성이 조화의 상태 가운데 있게 한다.

 

(1) 고결함(Integrity) 긍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18:11).

 

고결함은 아무런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고결함 가운데 사람이 느끼는 긍지는 행복함을 만들어낸다.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기도한다면 기도는 높은 하늘 위에서 평안함의 독백일 것이다. 우리 주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행복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기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혼자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을 보라. 그리고 사람 자리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것이다. 당신은 그가 어디에 사는 지를 알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 자기-의에 만족해 하는 이런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주의하라. 바리새인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자신의 지성과 도덕적 행위로 행복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행복은 하나님과 마귀에게 난공 불락이다. 이러한 행복의 상징이 있다면 얼음이다. 만일 당신이 모든 종류의 도덕적 또는 비도덕적인 성품을 분석해 보고 싶다면 성경을 들여다 보라. 누가복음 18장의 그림은 세상의 사람들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의 그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바리새적인 거룩함에서 만족을 얻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죄악으로 인한 고통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18:13).

 

상태는 원칙과의 화평이 무너진 상태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 39:11). 예수 그리스도께서 꾸준히 반복하시는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 대해 도덕적 화평을 누리는 자들은 악한 삶을 사는 사람보다 훨씬 마귀에 가깝다.

 

신체적 그리고 도덕적 조화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 사람의 몸의 모든 부분들이 외부 세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과의 도덕적 조화 가운데 행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은 사람이 도덕적 안녕을 희생시키면서 신체적인 건강을 유지할 있고, 또한 영적인 안녕을 희생시키면서 행복을 느낄 있음을 계시한다.

 

3) 거룩 영적인 조화 (하나님과의 화평)

 

영적인 조화 또는 거룩은 우리의 성향과 하나님의 모든 사이의 완벽한 균형이다. 당신의 기질, 사건들에 대한 당신의 감각을 신뢰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드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새로운 성향을 심으신다. 그러나 사람의 기질을 바꾸시지는 않으신다. 성도는 새로운 성향에 따라 그의 기질을 형성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령을 주시기 , 당신이 성결의 삶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당신의 경험들을 돌아보라. 당신의 기질과 감각은 어떤 사건들을 대하면서 당신 안에 공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그러한 사건들을 완전히 다른 태도로 대한다. 이러한 자신을 보면서 당신은 내가 이렇게 둔해진 것일까!”라고 말한다. 전혀 둔해진 것이 아니다. 당신은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의 기질은 성향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성향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이 사건들을 보시는 관점에 동감하게 되면서 당신은 이제 이상 감각의 동물이 아닌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감각을 훈련시키는 것이 어려워서 낙심해 있다면 실망하지 말라. 다시 도전하라. 처음에는 우리의 감각들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걸려 넘어지기 쉽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위의 보좌에 계시더라도 당신이 바로 그분의 명을 수행하는 총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1) 공포가 만질 없음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 112:7).

 

우리 주님은 한번도 신체적, 도덕적, 지적인 당황스러움을 겪으신 적이 없다. 이유는 그는 하나님 안에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 2:24-25). 당신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당신의 감각이 당신을 어떻게 공포로 몰아갔는지를 보라.  또한 공포 속에서 현실들을 거짓으로 믿으려 했던 당신 자신을 기억해 보라. 사탄이 성도들을 사로 잡을 그는 인간의 감각을 이용한다.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지니라” ( 1:12).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내용으로 , 사탄이  우리를 다스리는 성향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온전히 깨어있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의 감각을 건드려 속박할 있다. 당신이 영적으로 속박을 느낄 때마다, 지옥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당신은 잘못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절망, 당황) 언제나 잘못된 것이다. 사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전혀 공포에 빠지지 않는 누군가를 알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축복이며 당신은 사람을 언제나 의지할 있다. 당신은 조급한 상태에서, 불처럼 타는 신경질 가운데, 머리는 백지같이 비고, 가슴은 거의 죽어가는 나비같이 펄럭이는데, 사람에게 가면 2-3 내에 평정을 갖게 된다.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인가? 사람으로 인해 당신 안에 나타난 변화는 이상 당신 자신의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보다는 생명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마음이 모아진 것이다. 거룩은 공포가 건드릴 없다. 바울은 환난 가운데말한다. 환난이 무엇인가? 팥죽이 끓어 오르는 그림이 환난이다. 그러나 그러한 환난 가운데 내면의 평정을 누리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며 이러한 성품의 사람만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자로 우뚝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향해 서신 것처럼 그렇게 있는 성향을 자신들 안에 지닌 사람들은 결코 환난 가운데 당황하지 않는다. 악한 자들은 성도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없다. 세상의 눈에는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언제나 불합리하게 보이겠지만, 그러나  환난이 오면 그들은 성도를 보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2) 박해에 의해 꺽이지 않음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 112:10).

 

하나님의 책은 내내 거룩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뚜렷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위에 있는 동네(도시)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5:14). 주님은 제자들에게 늑대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숨기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진리를 증거할 때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격분하거나 조롱하는 것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자연스럽게 겁장이들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성향을 바꾸어 주실 우리는 겁장이들이 되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시는 성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붙들기 때문이다. 성도의 가장 주된 특징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철저하게 공감하는 것이며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책에는 두개의 평행선이 달린다. 특히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그러하다. 그의 공중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다룰 때를 보라.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엄하며 조금의 양보가 없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을 대할 때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으로서 다정하고 친절하게 다룬다. 오늘날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현대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대충 쉽게하라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설교의 기준을 보라.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들의 기준에 설교를 맞추는 것이 첫째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가 막혀 있다. 그렇다. 막힐 밖에 없다. 감히 진리를 설교할 없다.

 

하지만 당신이 개인의 구원의 충만함을 설교하는 즉시, 그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율법과 완벽한 조화 가운데 있는 성향을 받아야 하며, 성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낼 있도록 힘을 준다는 진리를  선포하면 사람들은 가책 분개와 당황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결코 핍박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감춰 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이 동료들을 다루게 당신의 자세는 어떠한가? 항상 기억하라. 지금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또한 거룩한 면에서 뭔가를 이루었다면 누가 당신을 현재의 당신으로 만드셨는지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내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것이라” (고전 15:10) 말한다. 무한한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영혼들을 대하라.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항상 잊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오래 참으신 것처럼 당신도 당신 자신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 기껏 2 정도 성결한 은혜 가운데 살아왔으면서 20년의 은혜를 받은 만큼 성숙하고 강하지 못한지, 성급한 가운데 영적으로 골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당장 성화될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 주의 은혜로 자라나도록 인내하라. 영적 위험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보다 부분에서 훨씬 많다 (참조, 12:5-11). 마귀는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들어오는 즉시 모든 것이 마쳐졌다고 새악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룩하게 것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무리된 사역에 들어왔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정되었지만, 지금부터 달성을 시작하는 것이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나기” ( 4:15)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 가지는 다함께 천천히 자라난다. 첫째, 영적인 거룩함을 기반으로 하여, 둘째, 도덕적 행복을 세워가며, 셋째, 신체적 건강으로 장식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성장한 사람은 정확하게 그리스도 예수처럼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4:13).

 

[출처] 10. 조화|작성자 스데반 황

 


 

9. 인류

 

시편 2

 

하나님은 주의 사업을 하신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라. – 아미엘

 

오늘날 추세는 하나님의 손에서 우주의 관리권을 빼앗는 것이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내면의 우주를 다스리는 일은 간과하고 있다.

 

1) 인류를 향한 열광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 2:2).

 

인류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중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충분한 자유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악한 , 사탄에게도 거의 완벽한 자유를 허락하신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벧후 3:9).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뭐든지 있는 넉넉한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만물의 끝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과 그분의 심판이 옳다고 고백하게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하나님은 보좌에 심판관으로 앉으셔서 인류를 망치로 두들겨 주님이 원하시는 모양을 만들고 계시다는 사상을 버려야 한다. 가끔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제시되는 때가 있는데 이는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원칙,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12:2)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분명하게 확실하게 임할 것이며 사람들은 심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인류와 마귀에게 주의 목적과 심판이 틀린 것인지 확인해보고 입증해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신다.

 

열광은 관심이 강하다는 뜻이다. 인류를 향한 열광과 성도를 향한 열광은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후자에 속한다. 도덕적인 면에 관련된 세력들과 문제들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은 대표들을 보자.

 

(1) 인류의 대표

 

그러므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5:12).

 

아담은 인류의 언약의 대표다. 그는 죄악된 인간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덕에 대한 핵심 열쇠이다. 이러한 덕들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의 잔재로 이해되어야 하지 사람이 이루게 약속으로 보면 곤란하다. 도적적 문제는 다음과 같이 찾아온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어떤 주요한 덕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덕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털끝만큼도 사용할 것이 못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면 이러한 덕들은 거의 언제나 도움보다는 방해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훈을 통해 요구하시는 덕들과 파괴된 인성 안에 잔재로 남아있는 주요 덕들을 비교해 보라. (물론 잔재로 남은 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인류의 약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신은 아무리 우리의 자연적인 덕들을 뜯어 고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에 근처도 가지 못하는 것을 알게 것이다.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며 전적으로 새로운 덕들을 개발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 2:15) 되어야 한다. 부분이 바로 성경을 다루지 않는 교사들이 갖게 되는 문제의 부분이다. 도덕 윤리에 대한 책들은 자연적인 덕들을 취해 사람들이 이루어야 약속들로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적인 덕들은 한때 아담에게 있었던 덕들의 잔재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덕들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점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매우 이상하고 당혹스러운 자세를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은 자연적인 덕들을 사랑하신다. 하지만 주님은 자연적인 덕들은 구원을 위해 매우 부질없는 것으로 언급하신다. 부자 청년의 자연적인 덕들을 고려해 보라 ( 10:17-22).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그를 사랑하셨다 점을 읽게 된다. 자연적인 덕들은 예수님의 눈에도 아름답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도 없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데, 바로 자연적인 덕들은 사람이 이룰 약속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에게 남은 영광의 잔재이며, 영생에 있어서 그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자 청년에게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벗어 던지고 자신을 주께 드린 후에 주님께 와서 주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전부 새로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 망가진 인류

 

그러므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5:12).

 

망가진 인류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말한다. 우리는 전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엉망이 되었다. 아담 이후 인류를 보면 개인적이던 집단적이던

어떻게 죄가 도덕적으로 망가진 상태를 만들어 내었는지 말해 준다. 인간들 안에는 주요한 덕들이 매우 강하고 분명하게 있지만 성경은 덕들 안에도 죄라고 불리는 다른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아무도 요소를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죄의 요소야 말로 사람들을 철저히 망가뜨리는 요소이다. 당신은 죄의 요소를 인간의 자연적인 덕들로부터 어떻게 분리해 내야 하는지 모른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덕들은 선하고 다른 상황에서는 그르다. 문제는 당신이 사람들의 인격 속에서 어떤 한가지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만을 유일한 것으로 삼을 발생한다. 예를 들어, 오스카 윌데는 감옥에서 슬픔과 절망의 늪에서라는 글을 썼다. 그는 그의 인격 중의 한가지 요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상적인 지적 관심을 전부로 삼았다. 그는 심각하게 책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인격 내의 다른 요소들이 특별한 요소와 상반되는 점을 간과하였다. 후에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아리러니하게도 그의 인격을 주관하게 요소들은 감옥에 있을 때의 특별한 요소가 아니라 그와는 상반되는 다른 요소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망가진 인류 의미하는 바이다. 인간들이 성경을 벗어나 만지는 것들마다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열악하여진다. 이러한 엉망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된다. 바로 죄이다.

 

(3) 불법의 사람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살후 2:3-4).

 

성경은 인류와 사회를 망가뜨리는 죄가 궁극적으로 죄의 사람, 또는 적그리스도로 성육신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계시한다. 현재 상태 가운데 인류 자체를 위한 인류의 열광은 궁극적으로는 기껏해야 다시는 돌이킬 없는 참사로 이어질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류가 개선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연적인 덕들은 우리의 장래의 약속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죄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무시한 인류의 열광은 반드시 재난으로 마쳐질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도들의 공동체를 향한 열망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망가진 것을 감당하시고 인류를 새롭게 만드실 것을 의미한다. 인류는 타락 전의 인류의 시조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들(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형상을 본받게 하는자리까지 나아갈 것이다.

 

2) 인류의 곤혹

 

시편 2:4-6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1) 비정상적 결속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6:5). 

 

징계는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12:8).

 

결속(solidarity)이란 같은 관심에 합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결속은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가지 같은 관심이 있음을 말한다. 성경이 전부 죄의 비정상적 결속을 다루고 있음을 주목하라. 인간의 마음은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 그후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요소들의 선상에서 활동하며 살아갈 있다. 이러한 인류의 모든 개인들이 이러한 사람들이 인류는 철저한 부신론적 공동체로 묶여진다. 이러한 인류 공동체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인류가 대단히 많이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분열을 계속 해결되어질 것이다. 이유는 인간의 속성 안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말살하는 것을 성공한다면, 인류는 거대한 무신론적 집단을 이룰 것이다.

 

(2) 영혼의 바벨

 

그러므로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더라” ( 11:9, 참조, 11:1-9).

 

위의 구절은 인류가 과거에 첫번째 결속을 시도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인류를 곤혹하게 하고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항상 비웃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가운데 무신론의 완벽한 조직화를 방해해온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조롱을 대표하는 성도들이었다. 만일 성도들이 제거된다면 완벽하게 구성된 무신론적 집단이 세워지게 것이다.

 

(3) 신비한 죄의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6:6).

 

죄의 인류의 저변에 깔려 있는 단단한 무신론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이다.  죄의 안에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몫을 사람이라고 부른다. 개인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그의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죄의 몸의 궁극적인 패배와 멸망은 더욱 자명하다. 죄의 몸은 사람 안에 있지 않다. 사람 안에 있는 것은 사람”, 죄의 몸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육에 속한 마음이 있다. 죄의 결속은 사탄의 능력의 바탕을 형성하면서 인류 가운데 흐르며 인류가 무신론이 되도록 하고 있다. 죄의 초기 상태는 단지 하나님이 없는 상태다. 바울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는 이유는 죄의 몸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죄의 몸과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되는 사람들마다 사탄에게 그리고 죄의 거대한 결속체를 향해 계속 커다란 충격을 날리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 죄의 신비한 몸인 두개의 신비체가 있다. 죄의 신비한 몸으로부터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되기 시작하면 그는 어쩔 없어라고 말한다. 말은 정확하게 맞다. 하나님의 책은 모든 악한 행동과 오류의 배후에는 어마어마한 세력, 악의 거대한 역사가 있음을 계시한다. 세력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초자연적 세력이다. 우리는 혈과 육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 6:12)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되면 그는 죄의 몸으로부터 떼어진다. 따라서 사탄이 지지하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은 영혼을 향해 끊임없는 공격을 한다. 이때 거룩하게 영혼을 지킬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다. 능력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그는 완벽하게 안전하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세상은 죄의 결속과 무신론의 위협에 직면하게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인류를 섬기는 것인가 아니면 인류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 포시스

 

사람이 성경을 떠나면 그들은 인류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용어의 개념은 성경과 다르다. “하나님이란 용어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란 단지 인간의 유익을 돕는 일반적 경향에게 주어지는 이름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 모든 것에 침투해 들어간다. 우리는 신앙 체험을 말하면서도 이러한 영에 사로 잡힌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단지 우리를 축복하며 우리의 유익을 조장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상이 슬며시 들어온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곳에서 우리는 완전히 정반대의 사상을 발견한다. 우리는 중생에 의해 하나님과 조화하고 연합하게 됨으로써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유익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3) 인류의 골칫거리

 

골치라는 의미는 혼란 속에 관여된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있으면 사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예수님의 계시면 사탄과 인류는 온통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만일 인류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결코 이상 혼란에 빠지거나 흥분하지  않게 것이다. 예수님은 점을 분명하게 하셨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죄를 핑계할 없느니라” ( 15:22). 사탄과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골칫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20세기 전에 사도 요한은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일 4:3).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예수를 분석하여 제거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추세를 주의하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기 원한다. 그들은 그분이 땅에 사시지 않았다거나 매우 주목받는 분이셨음을 부인할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분석을 통해 그리스도를 분해하는 일을 한다. , 예수 그분은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의 계획을 엎으신다. 사실 때문에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비열한 자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리고 그에게 날인을 찍어 그의 미친 이야기를 내어 쫓으라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이성에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간의 사고 체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꿰어 맞출 없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이 논리적이며 설명이 된다. 세상은 진화에 설명될 있지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화론에 꿰어 맞출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에게 성가신 존재이며, 넓게는 세상의 옆구리에 가시이고, 개인의 죄에는 절대적인 걱정거리다. 우리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날인을 찍어 내쫓으면 이상 골칫 거리가 없게 된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8:7)라고 말한다.

 

(1) 과거의 슬로건은 종교는 인류를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종교 선생들이 잘못 가르친 것은  엄청난 주권적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무런 근거 없이 자기 멋대로 인류를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2) 현재의 슬로건은 과거의 슬로건과 반대로 이제는 인류가 하나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아무런 목적없이 그저 사랑하시는 성향을 가지신 분이니 인류가 하나님을 이용하여 인류 자체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고 의롭게 있다는 것이다.

 

(3) 변함없는 말씀은 위의 슬로건의 오류들을 지나친다. , 그리스도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인류를 연합시킨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놀라운 구속을 수단으로 하여 거룩한 하나님과 불경건한 인류를 연합시키실 있다. 연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다가갈 있는 유일한 유형의 사람으로서 서신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얻은 인류의 핵심적인 모습을 대표하며, 찬란한 새인류가 그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영적 자원들을 개발할 있도록 도우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유한 영적인 생명, 성령을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부여하실 있는 권한이 있으신 분이시다. 나아가 주님은 그들을 개발시켜 주님처럼 때까지 도우신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고려치 못하도록 애쓰는 것이다.

 

4) 사람의 자유함

 

시편 2:10-12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도다.

 

어떤 죄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려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도덕적으로 인정하면 그는 죄로부터 해방된다. 도덕적 결정은 대단히 감상적인 지적 결정과는 다르다. 도덕적 결정이란 나의 하나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죄에 대하여 내리신 주님의 판결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안의 죄성이 주님의 죽음과 함께 일치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리에 이르는 즉시, 우리는 구속을 통한 주의 놀라운 능력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자유함은 더욱 촉진된다. “그리스도는 영광된 하나님의 핵심 모습을 대표하며, 사람의 주된 목표는 화목과 구속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을 근거로 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1) 둘째 사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 5:17-18).

 

하나님은 둘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자유하게 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라고 불렀다. 만일 첫째 아담이 인류가 망가진 원인이었다면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해방의 열쇠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이시는 기준이시며,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이시는 분이시다.

 

(2) 거룩하게 사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2:5; 참조, 2:1-10).

 

거룩하게 사람은 죄의 성향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는 죄의 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유하게 자이다. 나아가 그는 주께서 땅에 계셨을 주께서 사셨던 하늘의 장소로 들려 올려졌다. 놀라운 사실이 요한일서 1:7절에 요약되어 있다. “그가 가운데 계신 같이 우리도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는 성도들의 사귐을 위한 열정으로서 인류가 하나님이 없이 결속하려는 열정과 비교된다. 이러한 선상에서 사고할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아는 것들을 체험적으로 증명할 있게 된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기억에 의해 일깨워질 우리는 훨씬 능력으로 있게 된다 (참조, 벧후 3:1). 우리는 땅에서 비록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위에 들려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누리게 되고 또한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을 통해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기는 힘을 소유하게 된다.

 

(3) 최고의 비밀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 5:32).

 

 성도 주변에는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악한 자가 그들을 만지지도 못한다” (요일 5:18). 개인의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진리들은 모든 성도들에게 집합적으로 해당된다. , 과거에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무신론적 결속을 지지하던 요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거룩의 결속을 지지한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 12:32). 시대마다 볼일 없는 적은 무리들이 부름을 받아 왔다. 성도들은 언제나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기독교의 고독한 소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괜찮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탄과 죄가 행할 있는 모든 것을 뒤엎을 있는 주의 놀라운 목적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 2:4). 사탄과 죄가 망쳐 놓은 모든 것들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속을 통해 다시 재건되고 새롭이 복구될 것이다.

 

[출처] 9. 인류|작성자 스데반 황

 

 

8. 양심

 

양심은 인간의 영혼 안에 내재하는 기능으로서 그가 무신론자이던 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아는 최고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는 최고는 하나님이다. 무신론자가 아는 최고는 자신의 원칙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은 엉터리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만일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그 음성은 모든 사람 안에서 똑같아야 한다. 바울은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 26:9)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의 양심에 따라 행했다. 우리 주님은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순종하기 위해 당신을 죽일 것이다.

 

우리의 눈은 보는 것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눈을 단지 기록만 할 뿐미여 그 기록은 그 기록을 보는 빛에 따른다. 양심은 영혼의 눈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배운 것에 기초하여 밖을 본다. 양심이 어떻게 기록하는지는 하나님의 대해 어떤 빛이 비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해 비치는 유일한 참된 빛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그는 새로운 양심을 얻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해 비치는 완전히 새로운 빛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빛에 따라 양심이 기록을 하기 시작하면 그는 그 결과로 죄의 책망을 철저하게 느끼며 당황하게 된다.

 

1) 양심의 조항들(the articles)

 

양심의 조항들이란 창조주의 손으로 사람 안에 새로워진 양심의 규칙들을 의미한다. 그 조항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다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염두하라.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나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하신 아담 같은 존재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복이지만, 아담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우리들에게는 그 사랑은 정말로 지옥의 고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거룩하시며 가까우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순진무구한 관계를 가진 처음 사람 아담에게는 순수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그분을 아는 것이 지독한 공포가 되었다. 하나님은 주님 자신처럼 사람을 순결하게 정결하게 하실 때까지는 결코 사람을 결코 떠나실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양심의 규칙들은 거듭난 영혼 뿐만 아니라 타락한 영혼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2) 양심의 태도들

 

하나님이 사랑, 거룩, 가까우신 분으로 계시될 때 사람의 양심은 죽음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그 계시는 사람에게 평화의 삶이 아니라 지옥을 가져다 준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10:34).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곳마다 주님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그러면 사람은 주님 앞에서 두려워 떤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리에 다른 것을 두려고 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그 깜짝 놀랄 순결함 가운데 자신에게 가까이 오심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고 싶은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그 순간 양심은 하나님은 거룩하며 거룩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따라서 주님의 실재하심은 죄인에게 고통을 준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 15:22).

 

(1) 자아-의식

 

양심이 하는 첫째 일은 자아-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인데 이때 당황스러움이 발생한다. 어린 아이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자아-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아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모든 부자연스런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깨어나게 되면 자아 의식이 생기면서 마치 박쥐가 빛을 피해 도망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양심이 무슨 일에 성공시키는지 잘 모르고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너무나 가볍게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명된 양심의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에 일초라도 서 보라. 당신은 그 즉시 창세기 3:7절의 언급된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 3:7). , 당신은 짐승과 유사할 뿐 하나님의 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 세상-의식

 

양심의 빛에 의해 가책을 느끼면 우리는 외부의 여러 시끌법썩한 것으로 달려간다. 기독교 초기 시절에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마음을 앓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심리학자들이 우리에게 더 건강한 방법은 죄에 대하여 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방법으로는 세상 일에 바쁘게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심을 잠재우기 위해 일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특징이다. 쉽게 살라. 건강한 몸을 유지하라. 절대로 양심을 불편하지 않게 하라. 어떻게 하든 종교적 만남을 피하라. 우리 앞에 병적인 추세의 사건들을 가져오지 말라. 이 표현에서 병적인 추세의 사건들이란 성령의 책망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의식

 

우리 자신의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세상 일에 관심을 갖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모든 논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온다. 은연중에 하나님을 느끼게 되면서 우리의 평강은 혼란에 빠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형성하실 때 넣어 두신 기본적 바탕 요소들을 내어 버리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것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 만일 거룩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 함께 하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고통 밖에 없다. 양심이 하나님의 의해 깨어나면 우리는 간교한 위선자가 되거나 또는 성도가 된다. 하나님의 율법이 양심을 통해 역사하면 우리는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곳으로 가게 된다. 또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 때문에 우리의 종교적 자세에 변화가 생긴다. 하나님이 계시면 불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할 수 있기만 하다면 무엇이든지 한다.

 

3) 깨어난 양심

 

(1) 죄로 무장된 양심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다. 우리 주님은 이 사실을 설명한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 11:21-22). 이 세상 신이 다스리면 사람들은 죄로 자신을 무장하게 된다. 이 말은 반드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 악한 자세를 취하게 됨을 뜻한다. 따라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더 이상 죄로 인한 불편함이나 혼동이나 당황함이 없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 73:4-7).

 

(2) 죄 가운데 깨어남

 

그러면 양심은 어떻게 깨어나게 되는가? 사람이 사람의 양심을 깨울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깨우실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강한 사람은 더 강한 사람과 전쟁을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11:22)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이 죄로 무장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시기만 하면, 그의 무장은 제거되고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고통과 아픔과 당황을 체험하게 된다. 전에 그는 이 세상 신의 평화로 무장했었다. 그의 양심은 모든 것이 괜찮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양심은 하나님의 빛 앞에서 그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기록한다. 내면의 요새는 쑥대 밭이 되고 평화가 기쁨은 사라지며 그는 소위 죄의 책망 하에 있게 된다.

 

(3) 거룩을 향해 달려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 16:8). 우리는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 엉뚱한 것으로 죄의 책망을 하기 쉽다. 죄의 책망을 체험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7:9). 회심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는 죄의 책망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직 궤도에서 벗어남에 대한 책망과 어둠과 고통에 대한 책망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 안에서 뜨겁게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지낸 후 그는 죄에 대한 분석을 쓰기 시작한다. 죄에 대한 감각은 거룩에 대한 감각과 비례한다. 다음 찬송을 정확하게 그 내용이 옳다.

당신을 최선을 다해 섬기려는 자는 자신 안에 가장 악함을 의식하는 자이다.

이 의미는 내재하는 죄와 내재하는 거룩이 함께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재하는 죄는 내재하는 거룩과 결코 함께 거할 수 없다. 이것이 정확하게 바울이 말한 내용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 7:18).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고후 1:9). 우리들 대부분은 거룩을 향한 각성 후에 따르는 끔찍한 뼈아픈 고통에 대한 언급없이 거룩에 대한 헛소리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계속 우리를 이끄셔서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심으로 우리의 진짜 속성은 죄라는 사실을 보게 하신다. 만일 당신이 죄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죄악을 범한 죄인보다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깨달은 성도에게 물으라.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 줄 것이다. 지은 죄악에 볶이는 사람은 그 죄악 때문에 처절하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죄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때만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인간이 헤어릴 수 없는 저 깊은 곳까지 정결하게 하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참조, 요일 1:7). 종종 하나님의 성령은 바울에게 하신 것처럼 성도들로 하여금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딤전 1:13). 이 고백을 할 때의 바울은 성숙한 성도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붙잡기 전의 과거의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종종 돌아보고 있었다.

 

양심은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내면의 인식이다. 당신의 하나님의 영을 통해 양심에 의해 죄의 책망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감히 당신을 용서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감상적인 말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시기에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은 오직 멸망 밖에 없다. 속죄는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기 때문에 맘껏 죄를 짓고 맘껏 용서함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속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여 그를 성도로 변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절대로 하실 수 없는 일을 속죄 때문에 하실 수 있게 되셨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당신은 사람들이 증언할 때 그들이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아서 증언하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들의 균형이 깨져서 고통을 받는 것인지 언제나 분별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의 양심 가운데 죄를 책망 받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단지 어린아이 장난 같을 뿐이다. 만일 당신이 죄에 대해 책망을 받았다면 당신은 가장 큰 원수의 신발의 먼지라도 핥아서 털어주라고 하면 얼마든지 기꺼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성령으로 죄를 책망 받으면 사람과의 관계는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당신의 진정한 고통에 끼지 못한다. 정말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있고, 하나님의 거룩에서 벗어나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신다는 생각 가운데 공포로 떤다. 이것이 바로 죄의 책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부분이 오늘날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요소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좌의 예수 그리스도의 백열을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선의 기준을 들어올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사람의 본된 행위를 사람 위에 들어올린다. 그들은 우리에게 동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부담이 사라지면서 자기 의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2). 그러나 성령에 의해 양심이 밝아지면 다음 세가지의 놀라운 조항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 라는 사실이 우리의 내면의 생명에 곧바로 깨달아지게 되면서 우리는 공포로 인해 위나 아래나 아무 곳도 바라 볼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하기 시작하면 그의 삶에는 전혀 골찌를 썩힐 필요가 없는 거대한 자유의 공간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그 사람의 작은 상세한 부분까지 교육시키신다. 신체적 삶의 모든 구부러진 것과 뒤틀려진 부분들, 생각과 감정 등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나님께 보고되어진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가 이 모든 면에서 흠이 없기를 요구하신다. 이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절대적인 절망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주께서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신 모든 것을 우리를 통해 행하시기 시작하신다.

 

속죄의 놀라움은 바로 이 사실이다. , 완벽하신 구세주께서 그의 완벽함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같이 내가 빛 가운데 거하면 생명의 모든 부분, 즉 몸과 감정과 영적인 모든 부분이 거룩 안에서 흠이 없게 보존될 수 있다. 나의 의무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나머지를 다 알아서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며 또한 이제 그 정도면 너는 다 됐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종종 고통을 만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지만 또한 소멸하는 불”( 12:29)이시기 때문에 계속 우리를 뜨겁게 타오르게 하실 것이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위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탈 것이 없을 때까지 그래서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로만 탈 때까지 계속 태우시고 흔드시고, 흔드시고 태우신다.

 

[출처] 8. 양심|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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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혹

 

고린도전서 10:12-13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유혹(Temptation)이라는 단어는 계속 사용되어 내려오는 단어인데 오늘날에는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 유혹은 죄가 아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를 받는 것이다. 유혹이란 유혹 받는 자의 속성에 잘 맞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혹은 유혹 받는 대상의 속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모든 사람은 각각 나름대로의 유혹을 받는다. 유혹을 잘 설명하는 예는 철이 시험받는 방법이다. 철은 시험받는 과정에 부하가 걸리는데 걸리는 부하를 통해 내구력이 점검된다. 유혹은 어떤 인격체가 가지고 있는 내적 소유들이 외적인 힘에 의해 시험되는 것을 뜻한다. 유혹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우리 주님이 받으신 유혹을 설명하여준다. 주님은 주의 위격(인격) 안에 인류의 왕이시며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붙들고 계셨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성경에서 사탄이라고 불리는 외부 세력이 찾아와 주를 시험하였다.

 

유혹은 인격체의 소유들을 신속하게 이루고자 하는 모진 시험이기도 하다. 유혹은 순진 무구함(innocence)을 성품으로 훈련시킬 수 있고 또는 타락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유혹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유혹들을 대해야 하는 더 높은 차원에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추슬러 유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후로부터는 전에 의식하지 못했던 영적인 유혹의 세력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1) 유혹과 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2-15).

 

유혹은 죄와 크게 다르다. 유혹은 원하는 목적의 경로지만 복잡한 상황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사람은 그 딜레마 가운데 어떤 요인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죄 지을 가능성과 죄를 짓는 경향은 서로 다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있지만 살인하는 경향은 없다. 죄의 경향은 그 경향이 실천에 옮겨지던 말던 행위와 다름 없다 (롬 2:1; 요일 3:15). 사탄에게는 불순종의 가능성이 있었다. 딜레마에 빠뜨리는 유혹이 왔을 때,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경향을 띄었다. 아담에게도 불순종의 가능성이 있었다. 딜레마에 빠뜨리는 유혹이 그에게 찾아오자 그는 뜻을 다해 불순종의 경향을 띄었다. 그 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성향은 온 인류의 유전 형질이 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죄의 성향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것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반란이다. 그 성향이 남아 있는 한, 유혹은 내 안에서 죄의 경향을 찾아낸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죄의 성향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시면 유혹의 시간은 내 안에서 죄의 경향을 찾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가능성만을 시험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도 불순종의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딜레마에 빠뜨리는 유혹이 그에게 왔을 때, 그 유혹은 불순종의 경향을 찾지 못했다. 주님에 의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마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진다 (참조, 히 2:11; 4:151-6). 중생을 하고 거룩하게 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우리 주님이 받으신 유혹의 일반 특징이 무엇인지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죄없는 완전함이라는 이단(the sinless perfection heresy)은 이 부분을 혼동한데서 야기된다. 이 이단은 죄의 성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감사하게도, 죄의 경향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죄의 가능성이 제거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불순종의 세력이 제거되었다면 우리의 순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더 이상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은 영광스럽지만, 그렇다고 하여 결코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여진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기에 그러하다. 도덕성은 이 시대의 질서에 있어서 전투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넉넉히 이긴다 (롬 8:37).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시험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아는 시험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4).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유혹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 우리는 다른 영역으로 올려지게 되면서 다른 종류의 유혹들을 접하게 된다. 즉, 우리 주님께서 겪으셨던 종류의 유혹들이다. 예수님이 겪으신 유혹들은 자연적인 인간의 속성 안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주님이 받으신 유혹들은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다. 인간 내면의 성향, 즉 인간이 자신의 인격성 안에 소유하고 있는 것은 외면적으로 그가 무엇에 의해 유혹 받는지를 결정한다. 유혹은 언제나 우리를 다스리는 성향의 선상에서 찾아온다. 죄는 자아-사랑의 성향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권을 부추기는 모든 유혹에 굴복한다. 죄는 글자 그대로 자아-중심적 통치로서 하나님이 없이 자기 삶을 다스리려는 성향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성향에 의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탐하도록 배운다. 욕심은 바른 성품을 왜곡시켜 타락으로 이끈다 -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보여주는 종착지는 특별히 황홀해 보인다. 대단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욕심은 만일 그것이 명성이 아니라 치욕을 가져온다는 고려로 인해 저지되지 않는다면 앞을 다투어 질주한다. 욕심이란 나는 당장 그것을 가져야 한다. 나는 내 욕구가 만족되어야 한다. 나는 그 어떠한 제지도 견딜 수 없다는 마음을 의미한다. 유혹에 지면 그 사람의 삶에 죄가 싹트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야고보서 1장의 이 구절은 유혹의 자연스런 과정을 말해준다. 성경에서의 욕심은 비도덕적인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쓰인다. 욕심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당장 가져야 한다는 정신이다.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욕심은 우리의 우상 신이 된다.

 

우리 주님의 삶에서 유혹의 기간은 영적으로 높임을 받은 직후에 찾아왔다 (참조, 마 3:16-17; 4:1). 이는 시험하는 세력의 기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한 역사적 유혹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릇된 방법으로 이루라는 선명한 그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상 죄를 감당하라는 사명을 받아들이셨다. 그러자 곧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마귀가 시험하는 곳으로 이끌리셨다. 그러나 주님은 지치지 않으셨다. 주님은 죄 없이 유혹을 지나시고 주의 인격 안에 있는 소유들을 그대로 유지해 내셨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1). 당신이 유혹을 잘 이겨냈을 때 나타나는 표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2) 유혹과 예수 그리스도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1).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5-16).

 

외부 환경은 내면의 욕구에 정확하게 대응하도록 형성되는데, 각 사람마다 다른 환경이 주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 주님의 유혹은 가룟 유다의 유혹과 전혀 다른데 그 이유는 내면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당한 유혹은 실제가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실제 유혹이 아니었다면 우리 주님의 유혹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단지 우스개 소리이며 현혹시키기 위한 것이 된다. 또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라고 말한 히브리서 저자는 진실하지 않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받으실 수 있으셨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다. 그 이유는 유혹과 죄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유혹과 예수님의 유혹은 성격상 매우 다르다. 평범한 우리에게 임하는 유혹들은 죄의 성향으로 인해 모이는 것들이다.

 

누가복음 3:23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라고 알려주고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람이 성숙하여지고 모든 힘이 완벽하여지는 때가 바로 삼십 세 때이다. 성인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때이다. 그때까지는 인생은 약속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부터는 시험과 성취가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그 위에 내려오신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말하자면 그를 보호하시던 손을 떼시고 마귀로 맘껏 최악을 행하도록 하셨다.

 

우리 주님이 받으신 유혹과 우리의 유혹은 우리가 거듭나서 주님의 형제가 되기 전까지는 (히 2:11) 서로 다른 영역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유혹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 어떻게 유혹을 받으셨는지에 대한 기록이지 사람이 어떻게 사람으로서 유혹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예수님의 유혹들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당하는 그러한 유혹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당하신 유혹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유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히 2:17). 그분의 형제들이란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성경 그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반 사람들인 우리들처럼 유혹을 받으셨다는 내용이 없다. 중생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형성되면 주님은 주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가지셨던 똑 같은 상황을 우리의 신체적 삶 안에서도 그대로 갖게 되신다. 당신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생명을 둘러싼 상황들 가운데서 주님께 항상 충성하겠는가? 마귀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는 이미 우리를 죄 가운데 붙들기에 충분한 욕심이 다 있다. 그러나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게 되면 유혹은 순식간에 바뀌며 이제 유혹이 조준하는 것은 다름 아닌 거듭남으로 통해 임한 새 성향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주님은 주님 자신의 인격적 생명 안에 담긴 것, 즉 이 세상의 구세주시며 인류의 왕이신 사실을 완성시키기 위해 시험을 받으셨다. 사탄의 유혹은 주님이 그 완성을 지름길로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주님의 유혹들은 주님 자신의 성향에 의해 정해졌다. 주님은 욕심이 없으셨으니 욕심에 의해 유혹을 받으실 수 없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주의 성육신하신 목적을 달성시키는데 있어서 하늘 아버지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취하도록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은 예수님께 광명의 천사로 다가왔다. 그리고 유혹의 핵심 내용으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당신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우리 주님의 모든 답변의 중심에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는 것이었다. 사탄은 우리 주께서 그가 제안한 지름길을 취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를 약속하였는데 그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참조, 요 6:15).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탄이 제안한 그러한 차원에서의 인류의 왕이 아니셨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고통을 전혀 피하지 않는 멀고 먼 길을 택하셨다 (참조, 히 2:9-10).

 

3) 유혹, 죄인과 성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 22:28).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4-15).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셔서 다른 종류의 유혹을 겪게 하시는 것을 거부할 경우 우리는 모두 겪지 말아야 할 쓸데 없는 유혹들을 겪게 된다.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은 자연적인 것에 대한 애착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1)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자연적 생명 안에는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최선을 이룰 것이다. 내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 내 자신을 훈련시키려고 한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나기까지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목표는 자아-실현이다. 자연적으로 우리의 인격이 가진 특별한 소유들은 끝까지 버틸 힘이 있는지 외부적인 힘에 의해 시험을 받게 된다. 이때의 유혹은 우리가 악이라고 알지 않고 선으로 알고 있는 것을 향하게 한다 (참조, 눅 16:15). 유혹은 한동안 우리를 완전하게 혼란하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는 그 유혹이 바른 것으로 이끄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영적인 삶은 마법의 알약을 먹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선택에 의해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하게 보이는 것들을 영적인 차원에서 시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적인 삶과 도덕적, 영적인 삶의 기초는 똑같다. 우리가 각 영역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싸움에 의한다. 건강은 나의 신체적 생명과 외부적 자연 간의 균형이다. 만일 내면 속에서 싸우는 힘이 줄어들거나 손상되면 나는 병에 든 것이고, 외부의 것들이 나의 생동력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도덕적 삶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덕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은 내 안의 덕의 원수다. 내가 내 안에 얼마나 강한 도덕적 도량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덕의 원수를 이기고 덕을 세울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만일 영적으로 싸울 충분한 힘이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닮은 성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성품은 이루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우리를 잘못된 것들로 유혹하지 않는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해 우리 안에 넣으신 것을 우리가 잃게 되도록 애를 쓴다. 즉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가능성을 없애려고 한다. 마귀가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할 때 사용했던 핵심 무기는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 안에 그대로 임한다. 즉, 내 자신의 대한 나의 권리를 주장하게 만든다.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을 폐위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 성향을 통해 사탄이 이루려는 모든 목표는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폐위시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사탄은 절대로 잘못을 행하거나 죄악의 책임이 있는 존재로 제시되지 않고,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하는 악한 존재로 제시된다.

 

유혹에는 제한이 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혹 자체를 막아주시지는 않으신다. 대신 주님은 유혹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히브리서 4:15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시험은 타락한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임하는 시험이 아니라 거룩하게 된 영혼에게 공통적으로 임하는 시험을 의미한다. 우리 주님께서 주의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주님은 야고보 사도가 언급하는 시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끌려 받은 시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를 보호하시던 손을 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결의 역사를 지나 성도의 삶이 참으로 시작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주의 손을 떼시고 세상이 그 모든 최악을 우리에게 행하도록 두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 안에 있는 주님이 그를 대항하는 자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때문이다.

 

[출처] 7. 유혹|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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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타락

 

(요한복음 6장)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유혹이 있을 가능성을 허락하셨다. 아담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증거한다. 거듭났다고 하여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아진다. 가장 센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1) 안일해지려는 경향

 

<

가만히 있으면 편견으로 돌아간다는 이러한 예외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

 

신체적으로 안일해지려는 경향은 인간의 몸의 자연스러운 법칙이다. 도덕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도 도덕적인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은 비영적인 것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1) 쉼의 욕구 욕망의 포로

 

요한복음 6:10-15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참된 영적인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연합하고 싶은 원함이 있다. 이 원함을 실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서 쉼을 얻으려는 경향은 욕망의 포로가 된다. 영적 축복만을 구하면 영적으로 잠이 들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 가운데 안일하여지려는 경향은 타락의 시초이다. 나는 하나님과의 연합만이 목적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다른 이유가 있는가? 수고도 없이 예수님을 통하여 빵을 먹고 싶은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닌가? 요한복음 6장의 군중들의 모습은 인간의 속성에 내재하는 안일하고 싶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이 욕구가 만족되어지면 모든 성품이 무너지게 된다.

 

(2) 실체의 부패 -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움

 

요한복음 6:30-31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실체란 하나님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예를 들어, 거룩하게 됨)을 내 삶의 마지막 목적과 목표로 삼는다면 그 순간부터 내 영적인 삶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거룩하게 됨은 하나님과의 실제적 연합을 위한 입구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과의 연합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생의 상태이다. 베드로는 이 점을 그의 서신에서 분명히 한다. 그는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으며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잠이 들면서 거룩함의 축복을 최종 목표로 오해하는 위험에 빠진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거룩하게 됨은 단지 입문일 뿐이다 (참조, 벧후 1:12-13). 우리는 성령으로 충분히 잘 배워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자들을 격려하여 더욱 하나님과의 완벽한 하나됨, 곧 실체중의 실체에 임할 수 있도록 하겠는가?

 

타락하려는 경향은 매우 은밀한 곳에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재촉하신 것은 당연하다 (마 26:41; 막 14:38). 타락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위험이다. 따라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안일함에 빠지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신체에는 휴식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삶에는 휴식이란 있어서는 안 된다. 욕망의 포로가 되는 때는 영적인 축복 가운데 안일한 때이다. 특히 자신이 영적으로 이룬 일들로 만족하고 있을 때 영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다 이룬 것 같아.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내신 것으로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엡 4:13). 완전 성결(entire sanctification)의 결과로 오는 안식과 안일함의 쉼은 전혀 다른 것이다. 참된 실체의 쉼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한 안식이다. (역자 주 챔버스에게 있어서 완전 성결의 단계는 하나님께 내 자신에 대한 나의 모든 권리를 철저하게 내려 놓고 주님과 연합된 상태의 단계를 의미한다.)

 

(3) 휴식하고 싶은 꿈 - 재난의 밤

 

요한복음 6:34-35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퍼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염려하시는 영적 안일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헛된 비전과 꿈이 생긴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어떠한 환상을 가지는가? 영적인 삶의 가장 큰 함정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꿈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지 않고 나름대로의 환상과 꿈을 키우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궤도에서 벗어나 광명의 탈을 쓴 마귀에서 속아 넘어간다. 안일해지고 싶은 욕구에 지는 자마다 영적 재난이 뒤따른다. 성도의 유일한 자세는 언제나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는 (빌 3:13) 자세여야 한다.

 

2) 복귀하려는 경향

 

<

삶이란 도덕 시험이 아닌가?

망설임의 상태가 영혼이 시험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

 

유기체적인 생명은 원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다. 꽃들과 식물은 잘 개발되어 경작될 수 있어도 몇 년을 내버려 두면 경작되기 전의 모습으로 복귀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가만히 두면 하나님의 자녀들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더욱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참조, 롬 8:29).

 

(1) 마음이 상할 가능성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

 

사람들 사이에 마음이 상한다는 것은 뭔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예수님께 애착이 없던 사람은 예수님에 의하여 마음이 상할 리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마음 상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비교, 마 11:6). 사탄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제안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에게 이러 저러한 일들을 하라고 당부하시지는 않으실 거야.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식으로 당신을 인도하실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으로 인하여 마음 상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2) 마음이 상한 후에 삐뚤어지는 마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0-61).

 

삐뚤어지는 마음은 내가 마음을 다하던 대상이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이러한 삐뚤어진 마음을 갖게 되는 때는 거듭나기 전이나 혹은 후에도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할 때 그것이 전에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이면 당장 내 마음에 삐뚤어진 마음이 든다.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 주지 않으셨는데 당신에게 알려 주셨을 리 없다. 마음이 상하게 되면 그 다음은 삐뚤어진 마음이 들게 된다. 마음이 상하고 삐뚤어지게 되면 더 이상 내 편견과 일치되는 내용이 아니면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도들 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진리에 대하여 귀를 막고 있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그들의 마음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따라서 영적 침체에 빠질 뿐만 아니라 외고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 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 같이 언제나 빛 가운데 머물기를 힘쓰는 것이다.

 

(3)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의 배반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6).

 

자기 뜻대로 사는 삶으로 돌아가 내 소견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고집하게 되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매우 불성실한 삶이 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상하게 한 그 진리를 향해 적극적으로 대적하게 된다. 진리를 향하여 가장 완고하게 대적하는 자는 보통 그 진리를 잘 아는 자이다. 이러한 배반의 극단적인 예가 히브리서 6:4-6절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만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불순종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여 버린다면 우리의 순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순종이 더 이상 마음의 자발이 아니라 기계적인 일이 되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된 후에 나는 내 멋대로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만일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롬 15:3) 라는 내용이 절대로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순종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순종은 그만큼 가치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잘못된 성향의 노예들이기 때문에 주님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잘못된 성향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실 때 그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사람에게는 유혹이 가능하게 된다. 유혹은 죄는 아니다. 유혹은 하나님과 자녀 간의 관계를 더욱 가치 있게 한다. 기계적인 노예라면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화롭게 할 리도 없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주님께) 합당하도다(히 2:10)는 말씀은 노예들이나, 쓸모없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부지런히 항상 깨어서 마음과 뜻을 다하여 자신의 모든 힘과 재능을 주께 완벽하게 헌신하는 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3)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

 

<

개별성의 특징인 독립하려는 마음은 각 개인에게 언제나 임하는 영원한 유혹이다.

>

 

영적 반란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통치자 밑으로 들어가기로 계약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퇴보와 반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퇴보하는 경향에 대해 다루어 왔다. 적극적인 면보다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면을 다루었다. 즉, 이 정도면 만족이다. 여기에 머물겠다는 타락의 면을 다루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지 아니면 다시 뒤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퇴보는 긍극적으로 반란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일탈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의도적으로 다른 통치자와 계약을 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나를 버린 것은 타락이라기 보다 퇴보이다. 퇴보와 반란이 이 두 가지는 결국 타락으로 이어진다. 주께서 타락과 관련하여 끔찍한 단어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눈에 타락이 어떻게 비쳐지는지에 대한 묘사를 보면 도덕적 의식이 있는 각 개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계시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렘 3:8).

 

(1) 진리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한 반응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1).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

 

진리를 접하였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더 강퍅해지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본 후에 그 비전을 놓치면 우리는 , 그렇지. 그 비전은 다른 사람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었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거의 느끼지 못한다. 진리를 접한 후에 깨닫지 못한 영혼들을 사탄이 가로챌 가능성에 대해 주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의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얻도록 하셨으며 따라서 깨닫지 못한 점에 대하여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생명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받지 않은 채 깨달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그들의 자세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후에 주께서 우리에게 알도록 계시하시는 것을 붙들지 못한다면 이는 주님께 무의식적인 모독이 된다. 이런 경우 주께서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맛을 잃은 소금은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영향을 준다. 거룩을 잃은 성도는 영적인 세계 속에서 전염병 같은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눈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성도의 모습을 잃는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죄악 및 실수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면 그 삶은 언제나 어린아이가 같이 진실하고 기쁨이 넘친다.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순종한다. 또한 부탁을 통하여 자신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얻어내는 비결을 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방탕한 자녀가 될 위험에 빠진다.

 

(2) 순종치 않은 자들의 수군거림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1).

 

하나님의 생명을 진실로 맛보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안 후에, 또는 몇 달 혹은 몇 년 전에 주의 뜻을 이미 알았지만 순종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지 않았다면, 그 뜻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현상은 반드시 일어난다. 우리가 했어야만 한 일을 하지 않았을 때 그 기준에 대하여 수군거리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도록 한 경우 우리는 순종하지 못한 진리에 대하여 수군거린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막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이려는 사업이다. 보이려는 사업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이러할 경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낮추어 사람에게 맞추려 한다. 둘째는 동감이다.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동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서로 동감을 느끼는 경우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준에 대하여 수군거리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노골적인 욕설을 발설하기 보다는 매우 경건한 한숨으로 말할 것이다. , 안돼. 절대로 그렇게 까지는 될  수 없어. 당신은 아마 완전 성결을 가르치고 당신의 메시지는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역자 주 오스왈드 챔버스에게 완전 성결은 우리의 모든 자아를 주께 전적으로 맡기고 주님과 일치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말하길,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이지만, 물론 이렇게 될 수는 없지요라고 한다. 이때 이 메시지를 듣는 영혼들에게는 한가지 결과만 나타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기준을 수군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에 따라 우리 모두는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많은 사역자들이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기준을 쉽게 선포한다. 그러나 곧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러한 완전 성결의 자리에 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이 말은 무섭도록 잘못된 말이다. 그 이유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까지 나를 이끄실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또한 완전 성결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이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대하면 우리가 완전 성결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고 자명하고 쉽게 말한다. 모든 하나님의 명령은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 있지 못한 자들에게 절대로 동감하지 말라. 우리 주님은 결코 까다롭거나 잔인한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온유한 연민과 자상함의 본체시다.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뭔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 놓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명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할 것이다.

 

(3) 불신앙으로 인한 거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 6:70-71).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의해 세워진 기준을 수군거리는 것이 가능할 뿐더러 가룟 유다가 행한 일을 할 가능성도 있다. 곧, 불신앙 가운데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유다를 최악의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만,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한편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주의 은혜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언제나 내 자신이 가룟 유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러한 진리는 소름 끼치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그 더운 밤의 공포는 우리로 하여금 말로 다할 수 없는 안전한 포구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욱 이끈다. 성경에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라는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다.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험하게 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위험 신호를 그 길에 달아 놓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사악한 자의 길은 분명하게 경계 신호들로 가득하다. 따라서 잘못된 길을 쉽게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내게로 오라(마 11: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라고 하신 말씀의 그 심오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출처] 6. 타락|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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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심판

 

<

,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침몰하였네. 하나님만이 아시네.

그러나 침몰을 하는 순간 완전히 침몰한 것은 아니네.

 

비록 흔치 않지만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때,

우리는 참된 영혼의 선물을 받게 되네.

참된 영혼의 선물은 뚜렷하게 거짓 것과 구별된다네.

 무엇이 잘못인가를 보네.

 

옳은 길 또는 그른 길

무엇을 추구하던지,

승리 또는 멸망으로 향하게 될 걸세.

 

-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ing)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건강하려면 비전 가운데 허락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체험이던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들마다 어떤 근본적인 진리, 곧 속죄, 성령, 죄 등등에 대한 진리의 비전을 갖고 있다. 만일 그들이 비전을 잃으면 그들의 영혼은 위험에 처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결단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 항상 젖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비전을 붙들려고 하지 않는 점이다. 그들은 희미하게 비전을 보지만 붙들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행 26:19)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받은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살았던 것이다.

 

진리의 비전을 보았지만 그 비전을 붙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가장 슬프다. 이들에게 심판이 임한다. 이는 지적 분별의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그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 제시하는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그 비전을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문제이다. 당신이 받은 비전과 관련된 위대한 진리에 계속 빠져들라. 잠이 들 때도 그 진리의 비전을 생각하라. 아침에 일어날 때도 그 비전을 생각하라. 당신의 모든 생각이 그 비전의 포로가 되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특별한 그 진리와 관련한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비전을 주시며 그 비전을 붙든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

 

1) 위기의 주요 의미

 

그 정죄는 이것이니.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사람들은 이리 저리 헤매는 평범한 나날들에 의해 정죄를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시험이 온다. 위기는 인생의 흐름을 급하게 바꾼다. 그때 사람의 정체가 드러난다. 위기 가운데 사람들은 삶을 돌아본다. 이때 특히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을 순종하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한다. 삶을 지나면서 갑자기 위기가 오고 그 위기를 통하여 심판을 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기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기가 오기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산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언제나 중대하여진다.

 

(1) 중대한 이슈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막 6:16).

 

헤롯의 경우 그의 위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파할 때 임하였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막 6:14). 헤롯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번잡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그 위기는 헤롯에게 번민을 주었던 공포가 무엇인지 드러냈다. 헤롯은 사두개인이었는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이 시끄럽게 널리 퍼지자, 그는 미신적인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목을 자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참조, 막 6:14)

 

(2) 죄책감을 주는 생각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 6:18).

 

죄책감을 주는 생각은 헤롯이 요한의 말을 들음으로 발생했다. 요한이 그에게 진리를 말하자 헤롯은 죄책감에 빠졌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막 6:20). 그러나 한 가지만은 거절했다. 헤롯은 빛이 주어졌을 때 빛에 순종하기를 거절하였다. 바로 위기는 헤롯이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3) 확인된 의도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막 6:21).

 

기회가 좋은 날은 언제나 온다. 죄를 만족시킬 기회의 날이다. 이는 일반 법칙인데 많은 사역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죄는 만족되던지 그렇지 않으면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목이 졸려 죽어야 한다. 지옥은 모든 죄가 만족되는 곳이다.

 

감상주의는 실체를 접해보지 않은 속성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못하도록 기독교 사역이던 뭐든 끝없이 일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없는 참회와 고해를 보인다. 하지만 당신의 눈에는 여전히 그들의 잘못된 점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점을 보기를 거절하며 당신이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거절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가차없이 그 사람의 감상을 벗겨내어 잘못된 그 한가지를 직면하게 해야 한다.

 

모든 위기는 위의 세가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위기는 성품을 드러낼 뿐 성품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그 누구도 자신의 성품을 자각하면서 살 수 없다. 성도의 삶의 특징은 근본적인 숨김없는 진실함이다. 위기의 순간 외에는 성품을 온전히 다 의식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 입장이라면 이러 저러하게 했을텐데. 그러나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다. 위기의 속성은 당신이 의식할 수 없게 발생하는 것이다. 갑자기 발생한다. 그 때 당신이 어떤 길을 택하느냐가 당신의 성품을 드러낸다. 자신도 놀라는 길을 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올 때, 가령 사별이나 사업이 실패했거나 병이 들거나 했을 때, 놀랍게도 그 사람은 당신이 생각했던 그러한 사람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당신의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가장 정이 많고 관용이 많다. 위기를 통하여 당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그 사람의 속성이 드러난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매우 친절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위기를 겪자 당신 및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그 사람은 가장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으로 증명된다. 이와 같이 위기는 사람을 정확히 심판한다.

 

2) 가장 위대한 도덕적 기준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세상에 온 빛이 그 기준이라고 하신다. 누가 세상의 빛이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인자)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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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위해서는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하며 공의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치우치거나 정에 빠지면 안 된다. - 아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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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깊게 생각해보면 최고의 성도들까지 객관적인 심판의 기준으로 인도하셔야 하는 성령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개인적인 관점으로 보려는 생각이 언제나 우리 안에 잠재하여 있다. , 그래.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헌신하며 충성한 것을 잘 아실거야. 그러나 최근에 너무 힘든 일이 많았어. 내게 있어야 할 행운들이 없었어.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 그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러한 모든 자세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주님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적용한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나는 빛에 순종하는가? 사적인 이해가 주님의 기준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걸어야 한다. 이는 모든 죄로부터 계속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조, 요일 1:7).

 

(1) 이방인을 위한 심판 기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9; 참조, 마 25:31-46; 롬 2:11-16).

 

이 기준에 대해 나오는 가장 첫번째의 질문은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였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참조로 주어진 구절들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언급한다. 곧 그들이 참 빛을 본적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에 의하여 심판 받는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접하기까지는 양심에 의하여 심판 받는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자들과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자들은 영원히 지옥 불에 갈 것이라는 광포한 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2) 기독교 국가를 위한 심판 기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기독교 국가의 심판 기준은 받은 빛이 아니라 받아만 했어야 하는 빛이다. 기독교 국가마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각 영혼이 멸망을 향하게 되는 시작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거절하는 때부터이다. 또는 주님에 대하여 알게 되었는데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때부터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주의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25장은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르는 나라들에 대한 심판 기준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심판 기준은 우리 주님이시다.

 

(3) 교회를 위한 심판 기준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1-13).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 각 개인들의 삶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공동체적 삶에 관한 것이다. 각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이 없이 개인적으로 온전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주셨으니. 어떤 목적으로 주셨는가? 그들이 얼마나 영리한가를 보이기 위함인가? 그들이 받은 은사를 드러내기 위함인가? 아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은사들 하나 하나가 항상 그 목적에 의해 제약을 받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한다고 하는데 바로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그 어떤 성도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데로 있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으면 완전할 수 없다. 자신들을 붙든 목적을 강하게 붙들려는 성도들이 많지 않다. 그들은 구원과 거룩하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 자리에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들이 온전케 되는데 방해가 된다.

 

3)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선택을 하면 영원히 바꿀 수 없다.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운명을 정한다. 어떠한 느낌을 가졌었는지 감동을 받았는지 영감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위기에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가 중요하다. 이 결정이 우리를 세우기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 조만간 모든 인생에 질문이 올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리신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하기로 결정합니까? 만일 인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던지 또는 나중에 결정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도 결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1) 어두움을 향한 선입견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 6:23).

 

위기가 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 사람 외에 그 사람의 성향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변하지 않은 자연적 성향을 우리 주님은 어두움이라고 부르셨다. 이는 빛에 대항하는 선입견을 의미한다.

 

(2) 고집스런 방향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막 6:26-27).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었다. 헤롯은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케 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계속되는 죄악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그의 양심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증거하신 모든 것이 그에게 농담이 되었다. 누가복음 23:8-9절을 보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헤롯이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하도록 명령하자 그렇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삶은 타락으로 달렸다. 그의 삶은 보기에 무섭도록 잘 풀리는 것 같았어도 그의 마음은 죽어 있었다. 헤롯이 닿은 이 상태가 더 이상 선과 순결과 공의를 믿지 않는 끔찍한 상태이다. 성경은 이 자리까지 이른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가지 죄를 덮으려는 위험에 처한 자를 보면 아무리 아프고 그 영혼이 당신을 귀찮게 할지라도 그 죄가 제거될 때까지 분명하게 하라. 그 죄를 두둔하거나 동정하지 말라. 오늘날 참으로 부족한 것은 개인적으로 또한 교회적으로 많은 죄악들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 덮여지고 있지만 이에 대항하는 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3) 운명을 선포함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눅 23:9).

 

주님께서 아무 것도 대답지 아니하신 이유는 마가복음 6:26-27절에 나온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헤롯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케 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앞에 섰으나 그분에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양심의 가책도 더 이상 없다. 사람이 헤롯처럼 그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라는 인생의 결정을 내리면 그 영혼 속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케 하는 것은 삶 속에서 저주의 시작이다. 그리고 영원한 저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삼상 28:15). 하나님이 더 이상 사울에게 대답하지 않으시는 상태는 그의 삶에 저주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침묵은 빛으로 나아오기를 거부하고 그 빛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궁극적인 운명이다.

 

빛이 주어졌음에도 그 빛에 사로 잡히지 못한 영적인 삶은 가장 비참하다. 빛이 주어진 때는 밤일수도 있고 낮일수도 있다. 유아 시절일수도 있고 신앙 생활 초기일수도 있다. 심지어 생생히 기억나는 지난 주일일수도 있다. 아무튼 당신만이 그때가 언제인지 알겠지만, 이는 당신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 이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 빛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라고 하겠는가? 어떤 근본적인 문제와 함께 어떤 빛이 당신에게 주어질 때마다 그 빛을 거절한다면 당신의 멸망은 분명하다. 하나님에 의해 강한 진리의 분명한 비전이 지적인 차원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임하였는데, 그럼에도 다른 길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면 그 비전은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왕자요 공주여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멀리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심지어 거룩하게 된 자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단계에서 주님과 더 이상 동행하기를 거절하더니 남겨진다. 하늘의 비전을 순종하는 대신에 형편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취하는 자연스럽고 영리한 결정을 내린다. 이는 구원과는 상관없는 결정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놓치는 결정들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즉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택함을 입은 사실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비전이 올 때, 간절히 부탁하는데, 그 비전에 불순종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오직 한가지 목적만이 있는데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출처] 5. 심판|작성자 스데반 황




4. 실체

 

내 영혼 깊은 곳 어딘가에

비밀스런 내가 잠들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깊은 잠에서 나를 깨우지 않으며

친구마저도 주위의 구름을 흩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행운의 책에는

어느날 음악을 연주하는 손길과 함께 음성을 듣게 될 때

잠든 내가 온전히 깨어 일어나 가장 충만한 삶을 살게 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9:23).

 

실체(Reality)란 우리의 생명 가운데 숨겨진 모든 능력이 그 자체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또한 하나님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러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실체가 실제로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순종하면서 조금씩 실제가 되어간다. 이는 가짜인가 실체인가, 위선인가 실체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진심(sincerity)이 실체로 변형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진실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가 없을 수 있다. 이것은 실체가 아니다. 유일한 실체는 내 자신 및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대한 실체를 향하여 역사하시며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 그 실체를 향하여 수고하게 된다.

 

1) 자연적 차원에서의 자아-실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아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생명이 시작될 때는 자아를 의식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주변 사람들과 자기를 구별하려는 자아-실현이 없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어린이가 자라나며 자기를 실현하기 시작하면서 자아를 의식하게 되고 그의 고통은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더니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점점 자만에 빠지거나 아니면 우울에 빠진다.

 

(1) 개별주의의 느낌

 

사람의 인생 가운데 매우 결정적인 순간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이다. 내가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 자신에게 법이 된다. 이 의미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나름대로의 구실을 대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는 그 구실을 적용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내가 받은 유혹은 특이한 것이야. 내 상황은 너무 이상해. 내 속에 있는 그 특이한 세력들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를거야.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은 불법과 모든 부도덕의 씨앗이 뿌려지는 때이다.

 

(2) 직감의 느낌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안다는 느낌, 내게는 특별한 직감이 있다는 생각은 개별주의의 느낌보다 더 위험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느낌은 영적 기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종교적 속성을 띈 영적 기만은 자연적인 속성에서의 지적 교만과 견줄 수 있다.

 

(3) 고립된 느낌

 

외로움을 느낄 때 잘못된 애착에 빠질 위험이 크다. 아가서에 있는 이 놀라운 구절을 주목한 적이 있는가?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 2:7, 3:5).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힘은 영혼의 참된 연인, 즉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 전에 영혼의 사랑을 흔들어 깨우려 한다. 교회에서 복음을 위하여 봉사할 때 영적인 면 보다 도덕적인 면을 더 강조하게 되면 이러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성도가 복음적 봉사를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갑자기 이를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서 생각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도덕적 기준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하는 영적인 일들이 논리적이지 않게 보인다. 또한 혼자 외롭게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때 두려움이 찾아오고 동료를 구하게 되는데 사탄이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 오랜 격언을 기억하라. 너무 오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면 마귀가 문을 열지도 모른다. 성경은 바른 인내도 있지만 잘못된 인내도 있음을 지적한다. (역자 주 - 영적으로 고립되지 말고 주님과 연합하여 주 안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하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 쓸데없이 홀로 오래 있다보면 사탄이 틈탄다는 의미이다.)

 

자연스럽게 자아-실현을 한다는 의미는 자연적인 선상에서 나의 속성을 개발한다는 뜻이다. 나는 개별적인 존재이기에 나와 같지 않은 그 누구도 나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신경쓴다. 내 영혼은 내가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자연적인 속성을 향해 강한 애착을 느낀다. 외로움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동료가 되어줄 친구들을 선택한다. 한편 하나님의 성령은 주께서 창조하신 이러한 자연적인 취향들이 바른 채널을 통하여 흘러오지 않으면 강하게 거부하신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런 신체의 성장과 함께 여러 종교적인 표시들이 나타나지만 전혀 영적이지 않은 것들이 많다. 10대의 청소년들 중에는 놀라울 정도의 종교적 취향을 나타내는 소년 소녀들이 있다. 이때 이러한 종교적 취향을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역사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순간에 사역자들은 영적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영적인 생명이 있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된다. 성령의 역사가 아닐 때는 하나님을 향한 인식이 애매하다. 젊은이들에게는 이것 저것 아무 것에나 열망이 많고 간절함이 크지만, 그 열망과 간절함은 하나님께로 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들에게 가장 큰 필요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시는 일이다. 우리 주님께 있어서 가장 최상의 순간은 누구든지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하는 때이다. 엄청난 중보의 능력이 여기서 역사한다. 복음의 부모님들, 선생님들, 친구들이 그들의 자녀의 삶에서, 학생들과 친구들 삶에서 이러한 영적 각성의 순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이러한 각성의 순간들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이때 성령은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꼼짝 못하게 붙드시고 그 친구들의 참 친구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신다. 당신에게 중보기도의 중요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마귀가 가장 염려하는 한 가지는 중보기도이며 끝까지 우리에게 못하게 막으려는 것도 중보기도이다. 만일 우리가 기도는 중요하지 않아. 그들은 아직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잖아라고 하면 마귀는 안심한다. 먼저 선수를 쳐서 마귀를 막으라!

 

우리는 인간들의 자아-실현의 속성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알지 못한다. 매우 어릴 때부터이거나 그 후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중보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주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는 주께서 우리에게 중보 기도하라고 보낸, 또한 경고할 수 있도록 보낸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얼마나 눈이 가려져 있고 무지하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대신에 그들의 잘못을 발견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일은 기도다. 그래서 각성이 찾아오면 그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자연적인 선상에서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거나 아니면 망치게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들의 자연적인 선호에 잘 맞으면 그들은 마치 초기의 제자들처럼 자연스럽게 예수님께 매료된다. 아직 거듭나지는 않았어도 그들의 자연적인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료된 것이다. 이러한 삶에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세상, 육체, 마귀가 그 사람을 먼저 사로 잡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찾기 전에 대혼란이 따라야 한다.

 

2) 그리스도-실현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자아 실현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과 일치할 것을 요구하신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께 합당한 분명한 충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은 가장 준엄하시고, 분명하시고, 넘치는 능력의 말씀을 소유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일치시킴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 데니

 

자아-실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고려치 않는다. 예수님께서 살던 죽던, 무엇을 했던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는다. 죽음과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자아-실현이다. 자아-실현은 그리스도-실현과 완벽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상반된다. 참된 자아-실현은 우리 주님의 삶에서 잘 드러난다. 그 실현은 하나님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인간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조화를 이룬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17:22) 라고 기도하신다.

 

(1) 금욕의 힘

 

금욕은 뭔가를 포기하려는 열정으로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들의 삶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만일 금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포기하길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 한다면 귀한 것이 될 것이다. ,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금욕이 이러한 목적을 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금욕은 사람들의 삶에 무한한 피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성결하게 된 영혼 안에서의 금욕의 힘은 제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프로그램에서 순교가 얼마나 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계속 하셨다. 주님께 충성하려면 가장 친한 관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문맥 속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 거룩하여진 후에 주님을 알게 된 자들에게 이 말씀이 이해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너무나 거칠게 들릴 뿐이다.

 

한 사람의 운명이 그가 주님께 충성하는가 아닌가에 달렸다고 선포하는 이 분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생각해보자. 그분은 완벽한 충성을 요구하시는데 이 충성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희생하는 것, 또한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에까지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충성을 요구하신다. - 데니.

 

(2) 몰두되는 열정

 

자연적으로 각성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주님의 완벽한 매력에 몰두된다. 그는 죄에 대한 책망도, 성령도, 심지어 믿음도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몰두되는 열정을 갖는다. 대단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성숙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매료된 상태에서 책도 쓰고 집회도 인도한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듣다보면 우리는 그들에게 뭔가 모자른 것을 느낀다. 무엇인가 모자른데, 뭘까? 그들이 빠뜨리고 있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가졌던 그 관계를 하나님과 갖도록 인도함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쓴 찬양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찬양들 속에는 성도에게 필요한 진정한 힘이 담겨 있지 않다.

 

몰두되는 열정은 또한 성결의 초기 단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아마 다른 단계에서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구별된 생명의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 십자가를 지는 삶, 자기 부인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들 단어에도 없고 생각에도 없다. 그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이 단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하는 이 한가지로 이끌지 못하면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된다.

 

(3) 동경하는 인내

 

예수님께서 자연적인 생명을 만지시면 그 삶은 계속되는 헌신의 시간이 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언제나 원한다. 언제나 기도하길 원하고 신앙 서적을 읽길 원한다. 어떤 자연적인 생명은 황홀의 경지까지 간다. 그러나 성결하게 된 생명의 특징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된다.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이 된다. 그 삶은 뜨거운 에너지가 차고 넘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동경심이 생긴다. 바울이 말하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2:20)고 하였다. 정체성이 바뀌었으며 예수님께 있었던 그 믿음, 그 속성이 이제 내 안에 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구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을 충만하게 이루기까지 자라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 4:13). 우리는 이 일을 홀로 이룰 수 없다.

 

 

3) 영적 차원에서의 자아-실현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성결의 첫번째 체험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자리가 끝이 아니다.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적인 정체성을 잃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정체성을 의식하며 얻게 된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된 영혼을 다루시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어두움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이상하다고 오해하는 그러한 때를 지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치신 것을 배운다.

 

나의 목표는 하나님 그분이지, 기쁨이나 평화가 아니라네.

심지어 축복도 아니고, 오직 그분, 나의 하나님이라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 16:12).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주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다.

 

(1) 인내의 헌신

 

십자가를 지고…”

 

성결의 삶의 미성숙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분명한 인내의 헌신으로 발전한다. 영적인 성급함이나 모든 당황스런 마음이 사라지고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뜻을 더욱 깨달아간다. 우리가 꾸준하게 져야 하는 십자가는 나는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헌신된 삶이 무엇인지를 알며 그 삶을 벗어나게 하는 어떠한 유혹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는 믿음의 참 생명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2) 평범한 나날들

 

날마다…”

 

참 생명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은 성도의 체험에 있어서 중대한 단계이다. 이 땅에서의 성도의 진정한 삶은, 즉 예수님께 가장 영광이 되는 삶은 특별한 환희의 체험없이도 꾸준하게 매일의 일상적인 삶과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기도회의 예수님, 부흥회에서의 예수님,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 변화산 상의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변화산 상의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순간의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가운데 일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보고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1:29). 이것이 실체에 대한 시험이다. 독수리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거나, 달려도 지치지 않는 (참조, 40:31) 체험은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걷지만 지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며 예수님의 마음을 충만하게 만족시키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평범한 하루 삶, 유별나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삶이지만 오직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놀라움을 드러낸다.

 

(3) 꾸준한 헌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는 마음 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으로 인해 순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앞에는 오직 한분만 계시는데 그 분은 주 예수님이시다. 다른 사람들은 성도들이던 죄인들이던 그림자일 뿐이다. 헌신된 삶의 특징은 꾸준함이다. 영적 경련은 돌아올 때 또는 떠날 때의 삶의 특징이다. 만일 누군가가 계속적으로 그냥 내 버려두었으니 이제 긴장해야 한다. 용기를 내어 일하자라고 느끼고 있다면 그는 참된 생명의 원천에 가까이 가고 있던지 아니면 정반대로 진짜 죽음으로 가고 있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하나님과 우리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다. 영적인 차원에서의 자아-실현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본으로 하게 된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 거짓 제자로 드러나느니 목을 메고 가장 비참한 죽음을 죽는 것이 낫다. - 데니

 

순교 사상은 성도의 삶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때 언제나 순교의 모습을 사용하셨다 (참조, 21:18). 순교의 단계에 이른 성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묻는 지점을 통과한 상태다. 그가 하나님의 뜻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나를 축복하시고 저곳에서 나를 사용하시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나는 승리를 얻었네라고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순교의 단계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찢겨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로 만드신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찢겨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로 사용하시도록 한다.

 

이 메시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목적이 우리 마음과 가슴에 새겨지길 바란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 우리의 모든 능력을 하나로 묶어 완벽하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영적인 어린아이가 아니며 우리의 생각과 가슴 속에서 구속의 의미를 이해한다. 이제 서서히 분명하게 성숙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자랑스럽게 추천하는 삶을 산다. 천사들이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솜씨에 입을 다물 수 없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살후 1:10).

 

[출처] 4. 실체|작성자 스데반 황


3. 구원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 51:50).

 

구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위대한 단어이다. 이 단어에 상당하는 다른 단어도 없으며 이 단어의 의미를 감출 수도 없다. 구원은 죄악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단어를 가장 적절하게 정의를 내리려면 평생이 걸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의 의미를 제한한다. 거듭남에만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정죄함과 관련해서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구원을 신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인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1) 구원에 있어서 파멸되는 요소들

 

칼을 면한 자들이여…”

 

예레미야 51장은 전체가 불로 타오르고 있다. 강하고 맹렬한 파멸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파괴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준다. , 주님의 것을 구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파괴를 위한 파괴를 볼 수 없다. 인간 및 사탄은 파괴를 위한 파괴를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것을 구하시기 위하여 악한 것과 마귀를 멸하신다.

 

(1) 칼의 목적

 

칼의 목적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구원의 과정에서 첫째 단계는 파괴이다. 이 단계는 사람들이 거부하는 부분이다. 이를 마음에 두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돌아보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10:34). 우리 주님은 죄를 은폐하면서 누리는 모든 평화와 행복과 무지를 파괴하는자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비교, 3:10).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를 가져오시는 분이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 들린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화평을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한 가지는 사람들의 참된 해방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번창하고 평화롭다는 사실이 그들이 하나님의 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들이 행복과 평화와 안녕과 안일함을 누리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삶이라면 오래지 않아 칼을 맞게 될 것이며 결국 그들의 모든 평화와 쉼과 기쁨은 파괴될 것이다.

 

(2) 칼의 위험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옳게 들리지만 사실 위험한 말이다. 잘못 오해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절대로 죄인을 벌하시지 않는다고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 안에 더 이상 죄인이 없게 만드신다.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란 표현은 그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란 뜻이다. 만일 죄인이라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파괴하시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오직 한가지 결론 밖에 없다. 내 죄와 함께 내 자신도 파멸하는 것이다.

 

주님의 임재의 빛은 죄를 책망한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 15:22-24). 죄는 의식되지 않는 한,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이 구절들은 구원의 요소 속에 파괴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쉽게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그분과 내 자신의 차이를 알게 된다. 감출 수도 없으며 변명할 수 조차 없다. 만일 주께서 드러내신 죄악으로부터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허락하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주님이 파멸하시고자 하는 것들과 함께 파멸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3) 칼의 힘

 

고대 전설에 어떤 대장장이가 엄청난 칼을 만든 후에 유명하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주장하길 그 칼은 그 어떠한 방패도 한 칼에 쪼갤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은 그의 자랑을 듣고 그 대장장이를 불러 왕이 가지고 있는 방패를 자신 앞에서 한 칼에 쪼개라고 말하였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허튼 자랑을 하였기에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대장장이는 방패 주위로 가볍게 칼을 한번 휘두르고 다시 칼집에 넣었다. 왕은 대장장이에게 결투를 신청하려고 하는데, 대장장이는 흔들어 보십시오. 폐하라고 말하였다. 왕이 방패를 흔들자 그 방패는 둘로 쪼개어져 있었다. 이 전설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칼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예화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4: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의 죄를 효과적으로 다룬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위기를 가져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저 밑바닥부터 바뀌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사람이 같을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몇 달 후에 위기가 찾아오면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목을 잡아 조인다. 말하자면 당신의 삶 가운데에서 지옥의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서 이러한 말씀이 온 것이지?라고 묻는다. 이는 몇 년 전, 또는 몇 달 전, 심지어 몇 주 전에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무의식적인 마음에 임하였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당신은 주의 말씀이 당신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계셨다. 이제 질문은 당신이 그 칼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 칼이 찌르려는 것과 함께 멸망하겠는가?

 

당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과거의 당신의 관점과 지금의 당신의 관점을 비교하라. 과거에 그토록 거부했던 관점을 지금은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바뀌게 되었는가? 당신이 정직하다면 당신 스스로 의식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 55:11).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신은 사람들이 말씀을 싫어하던 거절하던 아니면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던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절대적으로 무관심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뿌리졌으면 조만간에 그 말씀의 효과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가장 큰 함정은 우리가 말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해서는 안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누구에게 인정받도록 힘써야 하는가? 사람들인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다. 나는 주님의 참된 종들 중에 다른 사람들이 항상 인정하는 말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을 위한 일꾼으로서의 당신의 삶에는 언제나 당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진리들을 접하게 된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에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진리들을 알려주면 그들은 나는 동의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이때 논쟁을 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냥 남겨 두라.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실수를 발견하도록 두라. 삶을 흔드는 위기가 찾아오면 자신들을 붙들어주던 과거의 생각들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가? 하나님에 의한 파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파괴되어야 하는 것들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칼을 드신 분의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

 

< 어떤 교리의 심오함은 그 교리가 죄에 대해 그리고 죄의 치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

 

나는 죄는 교정될 수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파괴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만일 죄를 단지 교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면 성경의 상징은 채찍이어야지 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이기 위한 상징을 사용하신다. 죄란 죽여야 하는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아니하는 사상들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죄를 점점 덜 지을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에 빠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에게 결코 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은혜 가운데 매일 자라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파괴적인 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또한 우리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막는 것들로부터 구원 받았음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죄에 대한 관점은 항상 구원에 관한 견해와 연관된다. 오늘날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견해들이 슬며시 교회에 기어들어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주의하여야 한다. 죄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지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자유를 위해서는 죄와 관련된 것들은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것처럼, 죄로부터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2) 구원의 방향 요소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가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연구해보면 놀라운 것들을 발견한다. 우리 모임 중에서 가라는 단어와 주세요라는 단어 중 무엇을 더 많이 사용하는가? 우리는 주세요라는 단어를 더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라를 강조한다. 만일 칼날을 피하였으면 가라!

 

(1) 죄의 마비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노예는 갑자기 자유가 주어질 때 종종 과거로 돌아가기를 더 선호한다.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었을 때, 그들은 주어진 자유로 무엇을 해야할 지 몰랐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청했다. 전에 자유를 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다시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청원한 노예들이 많다. 이러한 마비 현상은 갑자기 구원을 받았을 때도 나타난다. 죄인이 죄로부터 처음으로 구원 받으면 이러한 마비 현상의 순간들을 겪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장 자신들을 유혹이 전혀 없는 천국 같은 곳으로 데려가길 바란다. 말로 노골적으로 그렇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암암리에 그렇게 원한다. 그래,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심을 믿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채우심도 믿고. 만일 하나님이 나를 천국 같은 곳으로 직접 데려가시면 참 좋을텐데.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러운 입을 가진 자들 사이에 여전히 살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과거에 내가 어떻게 계속적으로 죄에 물들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미래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줘. 사탄은 이러한 마비의 순간을 최대한 활용한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방향이 필요하다. 많은 복음 초청 집회가 가지고 있는 함정이 바로 이 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도록 배운다. 오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방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경이 주는 조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증거하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라. 사람들이 이러한 방향을 알지 못할 때 다시 침륜에 빠지기 시작한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방향성이 바르게 제시된 적이 거의 없다. 그 방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가라는 것이다.

 

(2) 구원 받은 자의 고통

 

오랫동안 절이던 수족이 풀리면 그 순간에 지독한 고통을 경험한다. 이 고통은 생명이 있다는 표시다. 하나님의 진리를 맨 처음에 깨닫게 되면 보통 환희의 순간을 맛보게 된다. 삶은 기쁨과 행복과 밝음으로 차고 넘친다. 아무런 고통이 없고 단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기쁨만 있다. 그러나 가라는 말씀에 따르기 시작하면 구원의 성장의 아픔(growing pain)을 겪기 시작한다. 이때 사탄이 광명한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다가와서 그만 가라. 이제 멈춰라 라고 말한다. 심지어 찬송의 언어로 이렇게 속삭인다. 고통을 피하고 영원한 지복만 누리세!

 

우리는 영적으로 행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 받기 전까지 죄에 속박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 6:19). , 우리의 지체를 다르게 사용하라는 말이다. 글만 쓰던 어떤 사람이 대장장이가 되었다고 하자.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느라 한동안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연습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이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일에 조정된 근육이 만들어진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떻게 행하는지를 계속 가르치시는데, 우리는 아프다고 짜증내며 불평한다. 하나님께서 영적 유아 상태에서 끝없이 짜증만 내를 우리를 구원하시길 바란다. 똑같은 것만 계속 가르쳐 주세요.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하지 마세요. 쉬운 복음만 알려 주세요. 즉 항상 믿어온 것은 믿겠지만 전에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은 고통스러우니까 가르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비교, 5:12).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부탁을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심을 감사하자. 그 성장의 고통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3) 구원하는 열정

 

우리 주님께서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 18:31)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가만히 서 있는 열정이 아니라 나아가는 열정을 의미한다. 짧던 길던 은혜 가운데 있었던 당신의 신앙 생활을 돌아보자.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 어떤 기간에 하나님을 가장 많이 알게 되었는지 질문해 보라. 모든 것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번영할 때였는가? 절대 그럴 리 없다! 어려움의 때, 긴장의 때, 갑작스런 사고의 때이다. 그 기간은 이 땅에서의 과거의 삶의 한계를 느끼고 가라는 열정을 배우는 때이다. 자연 세계 속에서의 큰 재난은 - 가령, 죽음, , 사별 등 - 그 사람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안락한 삶만 산다면 어두움에 감춰진 보화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구원이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실 처음으로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기 시작한다. 성령의 열정이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시기 때문에 이를 모르면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 1:3) 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이 성경에 신경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나는 이 주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싶지 않아. 끌리지가 않아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성령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애착을 느끼지 않는 주제들을 직면하게 하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3) 구원에 있어서 훈련의 요소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 땅에서라도 주님을 향한 기억은 당신을 충분히 강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께서 사용하셨던 말씀을 주목해보자.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22:19).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가신 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곳에 계신 분을 기억하는 것이다.

 

(1) 위험한 안심 (Infatuation)

 

안심은 스스로 안정감을 느끼는 어리석은 느낌을 말한다. 종종 병든 사람들 중에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끼는 위험한 안심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위험이 있다. 번연은 이를 홀리는 땅(the enchanted ground)이라고 불렀다 (비교, 벧후 2:12-13). 우리에게 그래, 지금 모든 것이 다 좋아. 이곳에서 쉴 수 있겠어라고 안심할 때마다 사실 위험에 처하여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 주님 안이다. 구원의 체험, 거룩의 체험이 있다고 하여 안심해서는 안된다. 우리 주님 그분 안에서만 안심하라. 다른 곳에서 안심을 느끼면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안심입니다라고 하면 당신은 분명히 사탄에게 패하게 될 것이다.

 

(2) 신적인 명령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생각하라는 명령은 단지 기억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주님과 당신 자신을 다시 일치시키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명령에 소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큰 위험에 빠진다.

 

< 장애물들과 난관들이 마치 감옥의 벽과 같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누워 잠이 드네. >

 

이런 자세는 영적으로 메말라가는 단계이다. 이러한 영적 질병이 몰래 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신체적 피곤은 계속 느껴지지만 영적은 피곤은 그렇지 않다. 영적 피곤의 증상은 이렇다. 은혜가 넘치지 않더라도 전에 한번 받은 은혜로 계속 버티자.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라서 이 정도야 봐 주시겠지. 과거에 주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으니 지금은 쉬어도 괜찮겠지. 이러한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음이 확실하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10:10).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지 게으르고 안일에 빠지라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영적 게으름에 빠질 때마다 주저 앉거나 멈춰서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주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삶을 돌아보면 영적으로 메마르는 위험에 처할 때 마다 또는 궤도를 벗어나 홀리는 땅에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사 삶의 지진을 허락하심으로 모든 것이 박살나고 당신도 무너지게 하셨다. 당신은 한동안 당황하고 놀랐지만 갑자기 주께서 당신을 일으키신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13:14).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뜻한다.

 

(3) 헌신된 지성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빛이 비치는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내 마음에 무엇이 들어오도록 하는가? 정원을 내버려 두면 정원은 잡초로 무성하여지더니 폐허가 된다. 성도의 마음도 내버려 두면 곧 사탄의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쓰레기 봉지가 될 것이다. 성도가 자기의 마음을 돌보지 않을 때 어떤 것들이 그 곳에서 자라나는지 바울의 글을 읽어보라. 예를 들어,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이다 (참조, 3:5).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는 명령은 우리가 받는 지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의 지성을 한가지 목적을 위해 헌신하라는 뜻이다. , 하나님의 빛이 비치는 예루살렘에 합당한 것들만 받아 들여야 한다.

 

“… 두라. 이것은 명령이다. 따라서 당신의 마음을 주의 깊게 관리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생각들만이 받아들여지도록 하라. 밤마다 잊지 말고 기도하라. 악에서 구하옵소서 ( 6:13). 간절히 드리는 이 기도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꿈마저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는 자세이다. 주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출처] 3. 구원|작성자 스데반 황

 
 죄의 철학 / 챔버스의 글들
2010/05/04 03:37 

복사 http://blog.naver.com/thebloodofx/20105129692

 

 

 2) 감쪽같이 속인 사탄의 최초의 함정

 

창세기 3:6-7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사탄은 자신의 의도를 숨긴다. 하와와 아담은 사탄이 누구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탄은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의도를 감쪽같이 숨기고 최초의 함정을 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a son of God)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순종을 통하여 발달되게 하셨다. 자연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연적이었다. 순종은 아담 자신의 계속적인 도덕적 선택으로 가능하였다. (역자 주 - 챔버스가 도덕적 선택(moral choices)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인간의 인격인 지..의의 자유의지를 통해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탄은 바로 이 부분에 최초의 덫을 놓았는데 자신의 의도를 감쪽같이 속였다.

 

(1) 자연적인 관심에 의하여 오염된 영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 3:6).

 

이 구절은 사탄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사탄은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하와는 인간의 영혼이 자연의 생명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와는 뱀(사탄)을 수상하게 여기거나 의심하는 대신 친근감과 호기심을 보여주었다. 처음의 죄를 보면 죄의 속성 및 죄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을 양으로 말하셨다. 양은 잘못된 길로 가려는 의도가 없다. 그들은 단지 방황한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러한 예를 사용하셨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양들처럼 방황하지만 어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사탄은 맨처음에 사람들을 어리석고 멍청한 양들처럼 취급하여 감쪽 같은 덫을 놓는다. 사탄의 속이는 방법은 아직까지 바뀐 적이 없다. 그리고 그의 방법은 하나님의 책에 분명하게 적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적인 관심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오염될 수 있다는 경고를 무시한다.

 

(2) 자연적인 친밀감에 의하여 덫에 빠진 영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3:6).

 

우리는 이 구절에서 두 개의 친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원하는 물질을 향한 친근감이고 둘째는 가장 가까운 살아있는 관계다. 하와는 과일이 맛있다는 것을 알자 남편을 데려왔다. 혼자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브에 대하여 바울이 말하길, 사탄이 그녀를 속였다고 하는데 이 뜻은 하와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분명한 이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는 속은 것이 아니다 (딤전 2:14). 그는 알면서 그 과일을 먹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면서 행한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죄다.

 

(3) 자연적인 영향에 의하여 죄를 지은 영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 3:7).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자연적 삶을 영적인 삶으로 승화시켜야 했다. 자연적인 삶은 도덕적(moral)이거나 부도덕적(immoral)이지 않다. 우리 몸은 도덕적이지도, 부도덕적이지도 않다. 우리 주님도 몸을 갖고 계셨다. 주님은 배가 고프셨다. 배가 고픈 것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만일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받으실 때 음식을 드셨다면 이는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이었기에 죄가 되었을 것이다. 몸이 죄가 아니며 자연적인 식욕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를 희생하기를 거부하면 죄가 된다. 사탄의 맨처음의 전초 기지는 순진한 자연적 영역이다. 우리는 잠깐 이곳에 정을 붙이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요. 호기심이 나서 그러는데 뭐가 문제겠어요라고 말한다. 성경이 베일을 거두고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탄의 유혹은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3) 영적인 순종을 뒤엎으려는 속셈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사탄은 자신의 속셈을 속이는데 성공하였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셨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와는 사탄이 무엇을 하는지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과정이 어떠하던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그 순간에 죄에 대한 책임을 핑계할 수 없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때마다 그 즉시 사탄의 첫째 함정은 성공하게 된다. 또한 첫째 함정에 빠지면 그 나머지 함정에 빠지는 것은 매우 쉽다. 한번 하나님의 뜻에 자연적인 삶을 희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원칙이 되면 그 나머지는 전부 주의 뜻을 쉽게 거부한다.

 

(1) 가장 깊은 곳에 의심이 들어옴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3:1).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가장 깊은 내면이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이다. 제일 먼저 무너지는 곳은 마음이다. 성경은 인간의 속성 안에는 불치의 병이 있는데 그 병은 하나님을 향한 의심의 병이라고 계시한다. 그 의심의 병의 기원이 성경 안에 설명되어 있다. 그 기원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였던 두 존재에게 있는데, 하나는 사탄이 된 천사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관계를 맺은 아담이다. 이 기원은 어떻게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보이는 물질 세계에서 단지 뛰어난 동물로서 산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황당하게 느껴질 것이다.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성경은 거룩한 책이라고 가르쳤기에 성경을 귀하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성경을 거룩하게 여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계를 체험할 때, 외부에서 벗어나 내면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아무도 그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한다. 자연적인 삶의 마지막 지점에 닿게 되면 우리는 자연적인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경이 죄의 문제를 다룰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라는 불치병을 다룬다. 이 의심의 병 배후에는 엄청난 초자연적인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병은 속죄(Atonement)가 없이는 치유될 수 없다. 바울은 그 병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병을 육신(the carnal mind)이라고 말한다. 육신은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 정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치유될 수 있겠다. 바울은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 8:7)라고 말한다. 모든 죄의 절정은 하나님을 향한 의식적이며 피 묻은 반역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아담의 죄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의식적인 반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담의 죄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통해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란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아담의 죄는 모든 죄의 절정이라기 보다는 모든 죄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짓는 죄악은 그가 어떠한 죄를 짓던 첫번째 죄악의 특징을 지닌다. , 첫번째 죄와 같은 원칙 및 성향을 띄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참으로 말하셨는가?라는 의심이다. 만일 이 의심을 받아들이면 그 영혼은 완전하게 황폐케 된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은 마치 둑에 틈이 생긴 것과 같다. 둑이 부서지면 그 물살을 막을 길이 없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한 비방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이 특이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지식 속에 그리고 가장 깊은 내면에 하나님을 의심하는 첫째 죄가 들어온 이후 그 성향이 인류를 통하여 계속 내려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은 순전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위험하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시길,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7:21)라고 하셨다. 그러나 당신은 말도 안됩니다. 내 마음에는 그러한 더러운 것들이 없습니다. 나는 순전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날 주어진 상황은 당신의 순전함이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오직 사람의 마음에 관하여 언급하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완벽한 진리임을 깨닫게 한다.

 

(2) 내면 속에 존재하는 거부할 수 없는 육욕 (Sensuality)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3:5).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 공의에 대한 의심이 인간의 마음 속에 일단 들어오면 육욕의 수문이 활짝 열기게 된다. 육욕(Sensuality)이라는 뜻은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유지해보려고 주변의 자연적인 것들을 이기적으로 취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는 육욕이라는 단어를 아주 무섭고 끔찍한 죄악들을 의미할 때 사용하지만, 그 뜻은 훨씬 크다. 육욕은 가벼운 구름처럼 품위있게 세련될 수 있다. 또한 육욕은 영적이면서도 지독히 감각적일 수 있다. 육욕은 지독한 영적 교만 가운데 내 한가지 소원은 착한 것입니다. 나의 특별한 소망은 구원받아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 또한 육욕이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 들어오면 육욕의 범람은 끝이 없다. 성경은 정욕(Lust)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 우리는 정욕이라는 단어를 육체의 더러운 죄악을 말할 때 사용하지만 성경은 그 이상의 뜻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지 그것을 당장 가져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신체적인 욕구일 수 있고 영적인 욕구일 수 있다. 정욕이 가진 원칙은 당장 그것을 원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다. 하나님은 너무 무관심하다라는 것이다. 정욕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한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주목하라. 주님은 언제나 죄의 성향을 대면하셨다. 주님은 결코 사람들을 외적 행위로만 평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인간들의 부도덕 및 사람들의 육체의 죄악으로 인하여 당황하신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그러한 죄악을 전혀 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젊잖은 교만을 더욱 심각하게 다루셨다. 이러한 젊잖은 교만의 삶은 자신을 지배하는 성향에 모든 외부 상황이 잘 조화가 되도록 지혜롭게 약삭빠르게 행동한다.

 

(soul)이란 단지 사람의 영이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어린아이의 영은 거의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혼은 분명하지 않다. 한편 성경에서 은 거의 언제나 육체적 속성과 연결된다. 육체를 통해 사람의 진짜 영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혼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후에 나타나신다 (고에쓰 -Goethe). 이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마지막 순간에만 나타나신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만 산다면 성경은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 자체가 역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는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사람의 정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죄에 대해서는 오직 성경의 설명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성경과 상관없이 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불쌍해 보일 따름이다.

 

(3) 개별성(the individual)의 사악한 굴복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 3:7).

 

사악한(Iniquitous)이라는 의미는 왜곡된 불의 또는 불평등을 뜻한다. 개별적(individual)이라는 의미는 인격이 분명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제일 먼저 의심이고 그 다음은 육욕이며 마지막으로 파멸이 드러난다. 죄가 초자연적인 악의 창시자와 함께 근본적으로 비틀어진 것이라면, 구원은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창조주와 다시 잘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구원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는 통탄할 만한 일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기껏해야 사탄이 한 일을 맞먹는 정도라면 그분의 이름은 구세주가 아니라 문화라고 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마리아에게 주님의 계시된 속성에 대해 누차 언급하였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1:21). 구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관점들, 사람들의 공감을 사려는 표류하는 관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수 있는 일은 고작 어떤 원칙에 상응하는 또다른 원칙 정도를 제안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관점은 한계에 달한 사람에게 그 한계로 인해 하나님을 모독하게 만든다. 이러한 결과는 언제나 죄에 대한 잘못된 엉터리 관점에서 온다. 만일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이 여러 원칙 중에 또 다른 원칙 하나를 제안하는 것이라면 주님을 구세주라고 부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죄의 실체를 직면했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그른 관점이 말하는 구원에 대해 조금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단지 교육 예찬이며 문화 및 여러 인간적 방침들이 그 일을 감당할 것이다.

 

성경과 인간의 체험은 구원 및 죄를 근본적인 것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직 당신의 유전형질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셨다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에 의하여 당신의 유전형질을 바꾸실 수 있다. 이 진리만이 죄에 대한 바른 관점이요 바른 생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 ,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죄를 다루기 위함이지 인간들의 여러 작은 실수들을 대처해 주기 위함이 아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실수를 대처할 수 있다. 주님이 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유전 형질을 주시기 위함이다. , 주님 자신의 속성을 그들에게 친히 심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은 사람의 영혼 가운데 있는 사탄의 능력을 대항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멸절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주의 성령을 보내시고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시키시면,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나타나는 삶에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까? 당신은 여전히 전과 같은 몸과 전과 같은 몸의 자연적 욕구들, 또한 전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당신의 지체들은 과거에 죄의 종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본이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희생하셨다. 당신도 성도로서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지성을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셨다. 당신도 성도로서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셨다. 당신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사탄이 아담을 만났던 것과 똑같이 자신을 변장하고 우리 주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로 이끄셔서 사탄과 맞부딪히게 하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참조, 4:4-11). 사탄은 처음의 의심을 집어 넣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먹혀들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의심하기를 거절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탄의 유혹을 극복하였다. , 주님은 자신의 자연적인 삶을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삶으로 변형시키셨다. 우리는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해야 한다.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주님의 뜻에 희생시켜야 한다.

 

 


 

 

 

   2) 양심에 진실함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한 그 심오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히브리 기자는 양심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9:14).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에 있어서 양심은 마땅한 자리에 있는가? 병적으로 양심에 예민한 사람들(Hyperconscientious people)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는 자들이다. 아닙니다. 제가 이 사람에게 잘못했으니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잘못한 후에 고통스러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십자가에 대하여 말해준 것은 다 맞지요. 그러나 내 자신이 너무 비열하고 악하기에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내가 책임져야 해요. 이런 말을 들으면 그들이 매우 고결한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일은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죽어 마땅합니다. 십자가의 그 참혹한 죽음이 내게 마땅합니다. 주님, 그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죄요 내 잘못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이 자리에 임할 때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양심을 씻는다. 그후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놀라운 자유함이 깃든다.

 

양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보다는 잘못된 관계다. 거듭난 이후에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가만히 앉아서 지금은 어쩔 수 없지. 다 지난 일인데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는가! 라고 말해야 하는가?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바꾸실 수 있다! 우리는 사과를 하고 편지를 써서 나름대로 손상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보이는 삶 뒤에 가려진 지옥과 같은 비극들을 들춰내시기 시작하신다. 그러면 속죄함을 받았으니 과거를 생각할 필요 조차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양심이 살면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풀리지 않은 관계의 부분이 정확하게 우리의 신경이 마비되는 곳이요 사탄의 굴레가 역사하는 곳이다. 삶의 여정을 보면 깨어진 친구 관계가 이곳 저곳에 즐비하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관계들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이러한 비틀린 삶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시기 시작하면 신기한 부담이 생긴다. 어떻게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오셨는지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 예민한 마음의 고통으로 인하여 정신병자가 되기도 한다. 이 땅의 많은 정신병 환자들이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면 그들의 문제는 치유된다. , 우리가 저질러 놓은 피해가 모든 사람을 속죄하는 주님의 십자가의 효력을 통해 회복되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효력이 우리 안에서 선물로 나타나게 할 뿐만 아니라 관계 회복을 이루는데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나게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은 마침내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놓으신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 2:25).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심을 씻기시는가! 주님은 죄의 권능 및 죄로 인한 손상에서 자유케 할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망가진 마음과 생각을 온전케 하신다. 죽은 행실로부터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양심을 다른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간이점으로 사용하신다. 우리의 양심은 과거의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중보기도를 드리게 된다 ( 8:26-27).

 

죽은 행실에서

 

죽은 행실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는 모든 행실이 죽은 행실이다. 모든 기도, 모든 가르침, 모든 증거, 심지어 희생적인 행위마저 하나님이 없이 행하여지는 것이라면 생명을 막는 죽은 행실이다. 잠시라도 당신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말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면 주의 자비가 임하길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되어진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우리의 생명을 숨막히게 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 성도의 저주는 그의 잘남인 것을 깨닫는가! 아무 것도 붙들지 말고 흐르게 두라. 오직 십자가에 진실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행실로부터 당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도록 하라. 많은 성도들이 성결하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자연적인 덕에 대하여 오해한다. 자연적인 덕은 우리가 바라보는 약속들이 아니라 피조된 인간에게 타락 이후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들이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인내, 정직, 양심등을 귀하게 여기지만 우리는 하늘 위나 땅 아래에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성 및 고상한 영적 자원들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차단한다. 이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제 내 손에는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당장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말한 체험을 얻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 이후로 우리가 다시 세우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모든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셨음을 증명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뜻은 예수님을 위하여 내려 놓은 삶을 말한다. 예수님을 위하여 좁은 길을 걷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의도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 갑자기 달아오르는 열광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 목적을 향해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는 삶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을 위하여 영혼을 얻으려는 목적으로서 이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이다. 이는 영혼을 향한 열정이 아니다. 이보다 더 무한하게 심오한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성령의 열정이다.

 

영혼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진 섬김에 지나친 인간적 정이 스며드는 경우들이 있다. 하나님의 요청이 아닌 인간적 요청 때문에 이러한 섬김의 삶이 장애를 받는 경우도 많다. , 인간들 간의 뜨거운 열정적인 사랑이 장애물이 되는 경우다. 이러할 경우 그 모든 섬김은 철저한 낭비가 된다. ,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철저하게 낭비되는 섬김들! 그렇게 슬피우는 고통과 자기 연민, 그리고 기회를 놓친 후의 애통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애통으로 주의 생애를 한 순간도 낭비하신 적이 없다. 우리가 무엇으로 애통하는가를 보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숨어있는지가 보인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사회적 양심이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죄악을 보며 충격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양심이 있다. 자신이 믿는 신조와 부딪히는 것을 만나면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양심이 새롭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항하는 것들에 대해 놀랍도록 예민하게 된다.

 

나는 모든 영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무 계산도 하지 말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당신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내려 놓으면 절대로 슬플 수 없다. 당신의 구원과 거룩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주님께서 당신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심을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취하여 주의 죽음과 일치시키도록 하라.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십자가 밑의 그 빛만 있게 하라. 당신의 생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지게 하라.

 


 

 

2. 구속에 대한 교육적 통찰 - 1) 십자가에 진실함 죄의 철학 / 챔버스의 글들

  

2. 구속에 대한 교육적 통찰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9:14).

 

1) 십자가에 진실함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성령께서는 우리를 더욱 성경의 중요 주제로 이끄신다.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의미이다. 우리 자신에 관한 권리 주장은 그 어떠한 모습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단번에 제거되어 다시는 나타나서는 안된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더 깊게 깨달을 수 있도록 교육 받도록 하자. 십자가와 우리의 관계는 삶에서 뿐만 아니라 생각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어찌 .

 

거듭남으로 거룩하여진 후에 알아야 할 것이 얼마나 더 있는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깨끗하여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 우리는 십자가로 인도함을 받았고 십자가를 통하여 성결하게 되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나님을 넘치도록 섬기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된 이후의 성도의 특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서 계곡으로 내려와 그 계곡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깨어지고 찢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리 주장을 위하여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영적 축복을 누리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는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하여 이곳에 있다. 그 목적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진리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성이 예수님의 속성을 닮게 만든다. 그래서 점점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간다.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과거보다 오늘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죄로부터 놀랍게 해방되는 그 기이함과 사랑과 찬양에 푹빠지기 시작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닮아가면서 주님의 가족으로서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피가 .

 

이 피는 순교자의 피가 아니다. 염소나 송아지의 피도 물론 아니다. 흘리신 피는 그리스도의 피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 세상을 위하여 희생된 것이다. 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표현을 보라! ( 20:28). 완벽하신 하나님의 모든 근본적인 속성들이 그 피에 다 들어있다. 인류는 그 피에서 가장 거룩한 것들을 모두 확보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속성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깊은 죄의 자리까지 닿을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이러한 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없는 영적 차원이다. 십자가 상의 그 절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7:46)는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고통의 절규를 조금이나마 그 근처까지 가 본 사람이 누구일까? 순교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버려져 죽게 된 외로운 선교사도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기에 놀라운 기쁨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맛본 자가 있다면 아마 가인 같은 자들일 것이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4:13). 혹은 에서와 같은 자이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 27:34). 또는 가롯 유다와 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어떤 인간보다 깊게 경험하신 분이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순교자였다면 우리의 구원은 신화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절규가 의미하는 바,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지옥과 저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죄와 일치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매우 간교하게 조작된 신화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이 절규의 깊이는 그 어떤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절규는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온 절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얻은 구원의 깊이와 높이는 오직 보좌에 않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또한 지옥의 중심까지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측량하실 수 있다. 매우 경건하게 보이는 신자들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이 위대한 주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본다. 오직 십자가 앞에 서는 자들만이 모든 경건의 모양을 벗을 수 있다. 당신은 현대의 정신에 물들어서 십자가를 단지 죄로부터의 구원 및 거룩의 본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거룩케 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자. 그러나 또한 감사할 것은 구원과 거룩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불하셨는가를 깨닫도록 하는 통찰력을 감사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를 일치시켰던 하나님의 맥박은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나아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열정을 준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삶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성령께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어떠하실 지 우리는 안다. 예수님의 깊은 의식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친히 계셨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행위 뒤에는 영원한 성령이 계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성령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사이에는 유사점도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영원하신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성육신하셨지만, 우리 안에서는 결코 성육신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 하고 거룩케 하심으로 우리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 속의 깊은 의식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 ( 3:3).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벽하게 성육신하셨던 영원한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예수님의 죽음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게 하신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19).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

 

자신을 드린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흠이 없으시며 완벽하게 깨끗하시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순교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개념을 단번에 제거한다. 주님은 순교자가 근처도 갈 수 없는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은 의인의 죽음이 아니라 악인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그분의 마음 속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대속적인 고통이 있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이나 입다가 자기의 딸을 희생제사로 드리는 사건을 대할 때 불쌍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불쌍하다는 차원에서 보면 안된다. 주님의 희생은 우리의 연민을 초월하는 차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감상보다 훨씬 무한하게 심오한 차원의 것이다. 이는 너무나 깊어서 우리에게 신비한 영역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마귀에게 영감을 받은 자들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다. 주님은 인류의 끓어오르는 미움을 한 곳에 모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성령을 의지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 주님은 성령으로 사셨듯이 성령 안에서 죽으셨다.

 

우리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선포함으로써 십자가에 진실하여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 하나님의 타오르는 강렬한 거룩을 망각하면 안된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이 선포되면 사람은 죄책감을 느낀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 죄를 드러낸다. 성령께서 심하게 죄를 책망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이라도 감히 죄를 용서하실 수도, 죄를 용서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속죄함이 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사람들의 의분이 하나님을 정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과 함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한 용서의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죄의 철학

1) 사탄의 최초의 죄의 감취어진 기원

 

이사야 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우리는 죄의 경험을 다루기 보다는 어떻게 죄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사고를 위한 근거가 필요하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계시로 우리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취한 이사야의 본문은 초대 교부들의 설명처럼 물리적인 꼭두각시 인간들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성경이 사탄에 대해 계시하는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는 사탄은 종종 사람이나 동물에게 들어와 그것들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참조, 3:15, 16:23). 하나님의 성령과 우리 주님은 시간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영역을 추적한다. 이 영역이 바로 우리가 죄의 불투명한 기원을 알아 보려고 하는 영역이다. 우리에게는 죄라는 것이 전혀 그렇게 들어온 것 같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우리는 결국 오직 성경만이 죄의 진정한 속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죄가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믿기 어려운 죄의 원조(Originator)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 14:12).

 

성경은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능력을 소유하고 있던 천사가 죄의 원조임을 계시한다.

 

(2) 신비의 차원에서의 반역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 14:13).

 

이 구절은 사탄의 반역은 신비의 차원임을 계시한다. 사탄의 반역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영적인 반역이었다.

 

(3) 하나님을 능가하려는 정신나간 마음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 14:14).

 

이 구절은 사탄이 하나님과 맘 먹으려는 결심을 보여준다.

 

인간의 사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위의 세 가지 내용을 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사탄과 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조롱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논한 것처럼 그들이 아직 자신의 한계를 느끼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사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성경은 이 문제를 설명하는 유일한 책이 된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이론이 죄의 기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죄는 인간의 속성 안에 있는 요소로서 그 기원은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 다음가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있다. 사탄의 죄에 대해서는 오직 희미하게 계시되어 있지만 그 희미한 계시는 사탄의 죄가 모든 죄의 최정상이요 완전하고 자발적이며 의식적인 영적인 죄임을 나타낸다. 그 죄는 유혹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덫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사탄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가장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죄를 저질렀다. 우리는 이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베일로 감추어져 있다.

 



죄의 철학

 

서언

 

목차

1. 죄의 철학

2. 구속에 대한 교육적 통찰

3. 구원

4. 실체

5. 심판

6. 타락

7. 유혹

8. 양심

9. 인간의 속성

10. 조화

 

서언

 

죄의 철학은 죄의 끔찍한 결과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영구적인 관심의 주제이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어떤 파괴적인 힘이 사람들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분명한 표시들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은 상실한 가운데 있고 인간의 삶은 문제로 가득차 있으며 인류는 불행과 슬픔으로 가득하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모든 불행과 슬픔과 문제의 원인은 사람의 죄,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떠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해 이러한 모든 비참한 결과들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죄의 철학』은 죄가 무엇인지를 다루며 그 치유책을 알려준다. 이 책은 인류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며,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말해 준다. 그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속죄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죄를 섬멸하는 구원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죄는 초자연적인 악의 창시자와 함께 근본적으로 비틀어진 것이며,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창조주와 다시 잘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죄인들을 향한 참된 복음이며, 만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이 복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여러 중요한 이슈들, 즉 양심, 외적인 행동, 감정, 지성, 신체적인 삶, 환경, 신경, 영적 실체, 자연적 본능, 그리고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 등을 다룬다. 이 책을 대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고민할 때 반드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쓴 가장 큰 목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거룩과 의의 높은 수준에 이루는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도라 그린웰의 기도를 함께 드리게 하기 위함이다.

 

,

주께서 이루신 일을 내가 보게 하소서.

주의 영혼의 고통이 내 안에서 느껴지게 하소서.

주의 역사를 감사하는 가운데

언제나 나의 사랑하는 구세주와 함께 하게 하소서.

 

- 데빗 람버트 (David Lambert, 1871-1961; 감리교 목사이며 오스왈드 및 비디 챔버스의 친구였다. 1917년부터 1961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챔버스 부인을 도와 오스왈드 챔버스 출판 협회와 함께 했다.)

 

1. 죄의 철학

 

모든 죄의 공통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하나님의 정하신 목표가 아닌 인간의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는 욕구는 세상의 사조 및 인류의 근본적인 죄의 공통 속성이 되었다.

 

죄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성경 밖에 없다. 죄에 대하여 삶에서 경험하여 아는 지식과 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적으로 아는 것은 매우 다르다. 우리 인간들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는 것 같다. 처음에 우리는 필요를 느낀다. 그후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만족을 추구한다. 그 필요가 채워지면 그 필요가 어떻게 채워졌는가를 설명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 지적으로 또는 여러 면에서 구세주를 추구하다가 결국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고 구원을 경험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 과정을 설명해야 할 필요를 크게 느끼게 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마지막 부분을 그리스도인들이 무시한다. 그들은 구원을 체험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정체되어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죄, 구원, 그리고 인생에 대하여 무엇을 계시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만 나타나신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그때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사고(thinking)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매우 영리한 동물처럼 하나님을 고려함이 없이도 생각을 하며 잘 지낸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문제가 없을 때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건강하고 행복해서 좋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신의 사고에 한계를 느끼면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낮은 차원에서 만족하는 자들에게는 성경은 황당한 책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한계를 느낄 때 성경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책이 되며 하나님은 유일하신 존재가 되신다.

 

 

[출처] 1. 죄의 철학 - 사탄의 최초의 죄의 감취어진 기원|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수 쉼터/ 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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