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심판의 경건한 모습 (길버트 테넌트)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살후 1:6-9)

참으로 두렵고 비참한 광경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골짜기로 분별없이 서둘러 가는 많은 가련한 죄인들을 본다. 그들의 현재의 불경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건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그러한 죄를 범하는 그들이 반성을 않는다면 그들은 지옥의 심판대 위에서 견디기 어려운 조사를 당하고 끝내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참담과 비애, 가득 찬 시련에 잠기게 될 것이다. 얼마 후에 그들은 숨을 거두게 된다. 반면에 이성적이고 건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결코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들의 본질의 진가를 결코 망각하지 않고 사라져가는 헛된 것들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잠시 동안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결정적인 시간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슴속에 묻어둔 비밀로 최후의 심판의 시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깨우치고 우리의 근면을 촉진하고 우리의 인내심을 뒷받침한다는 그러한 이유이다. 우리의 주님의 오실 날을 모르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매일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라.”고 했다. 한밤중에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이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 나가서 그를 맞으라. 노아와 롯의 시대에 있었던 일은 주님의 아들의 날에도 있으리니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를 든다.” 무서운 생각 때문에 죄인들은 구원을 청하며 산모의 진통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파괴가 그들에게 닥쳐오며, 지구 위에는 홍수가 쏟아질 것을 생각지 못하고 탐욕에만 빠진 것이다.

심판의 장소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심판의 모습과 공정한 심판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땅 위에 가까운 중간 지점이 될 것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쓰여 있는바“...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그리스도에 주셔서 그에게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명확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에게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부여하신 것은 참으로 합리적인 일인 것이다. 또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지식과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인 것이다. 어떠한 비밀의 행동도 그 선과 악의 구별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으로는 보실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으며 인간과 천사들에게 영원한 대가와 벌을 지우시는 것이다.

죄악성은 이에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날 것이며 한층 더 악화된 상태로 나타나 지독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악은 가장 부드러운 동정에 엄격함으로 다스려지게 된다. 그러한 역할은 그를 축복해 주시는 아버지(광명에 찬 영광의 보좌이며 가장 행복한 은혜의 자리인 엄격한 보좌의 중심이신)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비로운 구주가 담당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겸양에 가득 찬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그의 권력으로 다스리고 인간의 영혼을 영원의 파멸로부터 건져내고 영원한 광명과 영광에 찬 생활을 약속하시기 위해 많은 고통과 불행을 견디셨다. 그러한 피로서 겪으신 많은 고통이 지나간 후 그리스도는 구제할 수조차 없은 죄인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쫓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죄악에 대한 혐오감을 마음속에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심판관이 되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왕궁 체제를 확실히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구제주가 최고의 마지막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죽음을 선고하신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장 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고 밝혔다. 최후의 심판의 권리는 그리스도가 심한 굴욕과 고난의 세월에 대한 대가로서 하나님이 주신 주 예수의 권한임에 틀림없다. 빌립보서 2장 8,9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했다.

이러한 말씀은 온 세상에 엄숙한 영원의 심판대가 마련되면 그날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심판관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성경책에 있는 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머어마하고 거대한 권능으로 충만해 있으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주 예수는 하늘에서 불꽃을 감은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시리니” 지금 그리스도는 천국에 계시지만 때가 되면 천국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모든 눈이 주님을 지켜보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실 때는 수많은 천사들에게 호위되어 오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의 길로 만인에게 심판할 것이다. 준엄한 상태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경건함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권세를 가진 천사들은 틀림없이 그 최후의 심판에 정의와 자비의 권력자로 일할 것이다. 그들은 죄인을 심판대로 소환하고 그들에게 곧 판결문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즐거이 그들의 행복에 넘친 안식처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주님은 성령의 불꽃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산은 두려워서 움직이는 것 같았고 불과 연기로 둘려 쌓였었다. 그리고 불꽃 중에서 들려온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 재림의 기록은 굉장히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은 그의 인간미로서 감추어졌었다.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빈곤과 멸시로 태어나셨으며 인간들의 숙명적인 질병도 겪으셨다. 그러나 다음에 온 만물을 심판하려 오실 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신 모양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은 뒤흔들리고 땅에선 지진으로 인하여서 용암이 휩쓸고 땅 속 깊이 흔들릴 것이다. 삽시간에 하늘과 땅은 온통 성한 데가 없이 될 것이며 천사장이 부른 나팔소리는 죽은 자를 그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며 바다에서는 무섭게 파도가 치고 하늘에는 천둥이 몰아치며 땅에서는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저주 받은 인간들이 두려운 비명소리를 지르게 된다.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가 권능과 영광에 휩싸여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죄 많은 자들에게는 보기조차 두려운 광경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그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났었고 입으신 옷은 희고 빛났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가 영광과 위엄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 화려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화려함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이 쓴 성경 가운데 인상적인 구절을 잘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3-16)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동시에 오시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빛과 아름다움 장엄함과 권능은 지금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좌는 크고 희며 순결하며 권능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거기서 빛과 천둥과 음성이 들려온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1900년 전에 이미 권능에 휩싸인 몸으로 계셔 그를 체포하러 왔던 사람이 되돌아가다가 땅에 쓰려져 버렸다면 그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하고 영광과 권능에 가득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실 최후의 날을 기다릴 수 잇겠는가?

그리스도의 권능을 나타낼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지구의 끝까지 퍼지고 하늘을 울리며 어두컴컴한 동굴을 뒤흔들고 육지와 바다의 구석구석까지 들려가며 죽은 자에게는 그들의 영혼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의 모든 과거의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정한 심판을 받고 그때부터 영원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만했던 독재자, 음흉한 정치가, 주제넘은 영웅들은 모든 지위를 빼앗기고 그들이 가졌던 권력과 힘, 위엄은 모두 잊어버린 채 산을 향해서 보좌에 앉아계시는 구세주에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들이 멸시했던 구세주 앞에 끌려가 꿇어 엎드려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엎드려 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때가 늦은 비참한 애원에는 냉정하실 것이다.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몸이라면 그들이 죄에 대해 회개를 하고 자비와 용서를 비는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나 그들이 죽어진 다음에는 너누 늦은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일어나셔서 회개하지 않는 낯에게는 자비와 구원의 문을 굳게 잠가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죄 많은 자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이 되면 그들의 심장은 죄의식과 두려움과 수치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려운 판결소리가 온 만민 앞에서 들릴 때 공포와 당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노하신 심판관은 이미 옛날에 자기 자신을 구세주라 밝히시고 회개하기를 만일에게 종용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들이 불꽃같은 예수의 눈을 바라보고 물소리 같은 음성을 들을 때는 그들의 가슴은 날카로운 고통으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궁지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동정하거나 도와 줄 사람은 하늘이나 땅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반면에 크신 하나님과 한때는 사랑을 베푸시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시며 그 사랑을 받아 회개하기를 권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그들에게 냉정하시며 그들의 참회를 비웃으며 모든 천사의 무리와 영광을 얻은 성자들까지도 그들의 파멸에 기쁨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러나 무서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는 불붙는 심판대 위에 놓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구별을 둔다. “염소는 그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마 25:33) 이에 악한 자와 선한 자는 쉽게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니 주제넘은 위선자는 가면을 쓰고 경건한 영혼 가운데 섞을 수도 있고 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교묘한 거짓은 곧 발견될 수 있으니 곧 선한 자들의 집단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위선자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존귀한 틈으로 침입하게 방임해 두지는 않는다.

그리고 큰 죄뿐만 아니라 작은 죄악도 모두 조사를 받고서 이제는 별 악의가 없다고 인정이 되는 죄악도 조사를 받는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알려주시길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두려운 말씀으로 들리겠는가? 많은 죄인들의 죄가 분석되고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선한 자들이 행했던 신앙과 사랑은 자랑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그들이 옳은 일을 위해서 한 숨은 노력과 기도와 눈물과 고통 등 그들의 미덕은 기억되고 경건하게 간주되어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굶주릴 때 너는 음식을 주었고 병들어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고 헐벗었을 때 그대는 옷을 나에게 주었도다” 그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시, 심지어 냉수 한 잔마저도 결코 잊지 않고 보답없이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영광의 보좌로부터 심판하러 오신 왕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이런 말씀을 듣는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보다 더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어디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당신은 그때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을 것이다.

“오라, 땅 위에서 나를 저버린 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너의 나쁜 친구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더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오라! 나의 날개 아래 있는 죄악과 비참의 세상에서 나의 가슴 안으로 와서 나의 사랑의 기쁨을 맛보라! 와서 너를 위해서 창세적부터 예비해 둔 영광의 나라를 상속 받으라! 오라 너 죄인들에게서 고난을 받아 약해진 영혼아! 오라, 너를 위해 남겨 준 것을 물려주리라!” 영광을 받은 자들은 가슴깊이 스며든 기쁨과 즐거움은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선한 자들의 영광에 가득 찬 문장이 끝난 뒤에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 갈 것이다.

다음에는 죄 있는 자들의 재판이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경시한 행동이 나타나고 인정이 된 불순하고 속된 이러한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두려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니, “너 저주받은 자여! 악마와 그의 무리들을 위해 마련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헛된 욕망 속에 쾌락을 즐기며 남에게 아첨을 해왔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됐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대와 떨어져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종의 무리를 멸시했다.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의 무리와는 영원히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가 판결문을 읽으신 뒤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이 불행한 영혼은 심판대에서 끌어내려져 무서운 지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지옥의 불꽃은 불이 붙었다.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온화한 성도들과 천사들에게서도 영원히 추방되는 것이다. 또한 빛과 사랑의 행복에 넘친 곳에서 모든 기쁨과 영광에서도 멀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가질 수 없었던 어두침침하고 공포에 휩싸인 동굴 속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며 같은 죄인들의 끊임없는 비명소리와 소름이 끼치는 비탄의 소리뿐이다. 하나님의 두렵고 무서운 질책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릴 것이다. 이 불행한 영혼들의 수치와 당황과 고통, 괴로움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 약속, 말씀을 경시할 때는 우리가 이미 수난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요 3:36). 우리가 참회를 하지 않는 이상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계속 죄악을 범한다면 주님의 생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겪었던 그 이상의 벌이 그대를 다스릴 것이다. 지옥은 그 입을 벌리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경건했던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도 역시 공포와 불안으로 떨었을 것이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 12:21),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얼핏 보기만 했지만 그는 공포에 휩싸여, “하나님은 성스럽고 영광이로다”라고 부르짖고는 “나는 도대체 누구냐!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으니”라고 한탄했다. 여러 가지 죄로 비열한 모습을 한 그대는 어떻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심판관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그의 허리는 온갖 금 은으로 둘려 있고 그의 몸은 찬란한 녹주석같이 빛나고 얼굴은 빛 같으며 그의 눈빛은 등불과도 같으며 팔 다리는 청동이 잘 닦여진 것같이 윤기가 나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은 것이다.

붉은 예복을 입으신 심판관들이 심판대 위에 선 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포로 두렵겠는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헤치고 내려오셔서 그가 심판대에 찬연히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후회를 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순간에 우리가 하늘의 천둥소리와 요동치는 소리를 듣고 사방에는 갑자기 무서운 불빛이 번득이고 발밑에는 대지가 우리를 삼키려는 듯이 움직이며 갈라지고 열려진 하늘의 문에서는 태양보다 밝은 광채로 천사들로 에워싸인 그리스도 심판관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질려 불안에 잠기어서 하나님에게 때늦은 자비와 용서를 울며 애원하겠는가?

그리스도는 그가 오시는 날을 연기까지 하지지만 어리석은 죄인들은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심판의 날에 대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갖가지 죄를 짓고 계속 죄악 속에 머무는 모든 불쌍한 심령들은 그대의 죄악을 다스리러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죄인들은 영원히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추방되어 무섭고 영원한 파멸과 고난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엄하신 정의와 저들의 무섭고 끝없는 파멸에 오히려 영광을 내리실 것이다. 형제들이여! 만일 그대들에게 이러한 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한 벌이 그대들을 다스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이교도인 빌립도 이러한 형벌의 말씀을 듣고서 공포에 떨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자비심을 빌어 그대들에게 빨리 다가올 어쩌면 내일 새벽이 기 전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준비하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도록 권한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는 “한밤에 커다란 소리가 있으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로서 여러분에게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빨리 회개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하기를 바란다. “죄인들이여, 회개하라”

나는 우리들이 최후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죄악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봉사로 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다시금 겸손하게 행하는 모든 행동은 천국에 똑똑히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기록이 될 것이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분이 직접 교회의 봉사자가 되어 있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피의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죄악으로부터 성스러운 몸이 되시오.

죄인들이여!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형제들이여! 심장을 죄악의 소용돌이에서 깨끗이 닦아내십시오. 우리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이 있는지, 그대들의 손을 씻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오. 주저하는 자들이여!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시오. -삶은 짧고 영생은 긴 것, 죽음은 가깝고 심판은 문 앞에 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구원의 기회는 자나가 버릴 것이다. 그대들 중에 죄악과 위기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함으로써 귀중한 보석같이 보존을 하고 그러한 확신을 일깨우시오. - 그대에게는 어떤 희생이 오더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봉사를 하시오. 진지한 신앙은 보다 큰 대가가 치러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이러한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에 비해 비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퇴폐하고 그릇된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더라도 그대는 그렇게 생각 말라는 것이다. 죄진 자들이여!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빌어 바라노니 그대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 만일 당신이 선한 행동을 진실된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는 날이 될 것이며 그대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게 될 것이며 “주 예수여! 속히 오서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아멘.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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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이 시대의 설교와 신학은 세상 지식의 메아리, 메아리일 뿐이다 / 프란시스 쉐퍼

 

 

선지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선지자는 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 메시지를 되풀이한다. 여러분이 듣는 것은 모두가 메아리이다. 마치 속이 텅 빈 판자집 속에 있는 것 같다. 듣는 것은 온통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일 뿐이다. 이 시대의 신학을 공부해 보라. 여러분이 듣는 것이라고는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뿐이다! 무엇이 메아리치는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 저 사람이 말하는 것, 유물주의 사회학이 가르치는 것, 유물주의 심리학이 가르치는 것, 유물주의 경제학이 가르치는 것, 유물주의 철학이 가르치는 것이 메아리친다. 그들이 신학적 용어를 써서 그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성수로 적신 것처럼 메아리치고, 메아리치고, 메아리친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오 이세대여, 그리고 동요하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이여, 나는 거듭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렘23:2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30절).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1) 이 제사장들은 어떠한가? 이 선지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주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메아리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오늘의 형편과 같다. 우리 세대에 전해지고 있는 신앙에 귀기울여 보면 대개 신앙이 없는 철학자나 사회학자가 말하는 것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너희를 심판에 이르게 할 것이다.”

 

렘12:10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교 지도자들이 그 백성들에게 가져온 파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신다.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정원을 밟아 파괴하였다. 정원을 황폐시키고 황무지로 만든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다. 확실히 그렇다면, 황폐화시키는 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자의 양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23:1) 양무리를 흩어지게 한 자들이 누구인가? 역시 종교지도자들이다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연한 결과로 인해 너희를 보응하겠다. 절대 기준을 제거한 자유주의는 황무지로 가고 있다. 오늘날의 양무리들은 예레미야 당시의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흩어졌던 양무리들보다 더욱 흩어지고 있다. 확실히 최대의 죄는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진리를 외면하며, 사람들에게 현대 세속 사상의 메아리인 상대주의를 제시하는 교회에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렘23:11)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 이것은 무엇인가? 상황 윤리 아닌가?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23:13-16)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21절). 그들은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며 말하였으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들 내부에서 흘러나오며 그들 주변의 사회에서 회자되는 것을 메아리로 되풀이할 뿐인 그들 자신의 말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증오하는 것은, 나의 백성들이 나에게 반역을 했기 때문에 나의 심판 아래 있는데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한다고 주장하는 그 선지자들이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를 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4). 진지한 것을 가볍게 말하며, 온갖 이차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면 제사장들, 선지자들, 백성들이 일어나서 그 메시지에 대항한다.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서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보고 경악했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불태우지 않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도 한 때 그랬던 것처럼 성경을 금서 목록에 넣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석의 형태로 그것을 파괴한다. 즉 그들은 성경을 다루면서 성경을 파괴한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무시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 속에 있는 명제적 계시인 성경 자체의 관점을 바꿈으로써, 성경의 ”영적“ 부분만이 우리에게 권위를 갖는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파괴한다.

 

스스로를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여러분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손상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고,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말로 표현하신 명제적 의사가 그렇게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도 슬픔이 차오르지 않고 “당신은 그 결과를 깨닫지 못한단 말이요?” 라고 울부짖지 않는다면, 나는 여러분이 그의 말씀을 사랑하는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격정이 없이 철학에서, 예술에서, 과학에서, 문학에서, 드라마에서 전투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예레미야가 감동되었던 것 같은 감동 없이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 눈물을 흘리던 그 선지자처럼 눈물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심판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38-52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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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한 신앙고백서들의 증거 / 로버트 레이몬드

믿음은

4.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한 신앙고백서들의 증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5.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들었고, 지금 모여들고 있고, 장차 모여들게 되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의 충만이다.

유형 교회 또한 복음시대에는 보편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다(이전 율법 시대처럼 한 민족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이 유형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참 종교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권속이다. 이 교회를 떠나서는, 즉 교회 밖에서는 통상적으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 보편적인 유형 교회에게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모으는 일과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직과 말씀과 규례를 제정해 주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따라, 그 자신의 임재하심과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효과적으로 모아지며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 보편적 교회는 때로는 쉽게 볼 수도 있고 때로는 보기가 더 어렵기도 한다. 그 보편적 교회에 속하는 개 교회들은 그들 안에서 복음의 교리를 가르치고 받드는 데 따라, 또 성례가 시행되고, 공동 예배를 순수하게 행하고 안하고에 따라 더 순수하기도 하고 덜 순수하기도 하다.

지상에서는 아무리 순수한 교회일지라도 혼잡함과 과오를 범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공회당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게 마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달리 아무도 없다. 다만 교황은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및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에 비하여 자신을 높인다.


‘최신 조직신학’(로버트 레이몬드) 1088p에서 발췌, 기독교문서선교회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3



2장 죄를 보는 것과 예수님을 보는 것

1.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게 하는 십자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우리가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고 교제할 때뿐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이 없이 죄를 영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영혼은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죄책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보혈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를 따로 떼어 놓고 오직 죄만을 바라보고 죄만 독대할 경우, 죄는 인간이 마주 대할 수 있는 대상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도 섬뜩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의 사악함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완전한 용서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처럼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가장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우주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지옥의 모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의 그 무한한 깊이를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선포하고 가르치는지요! 예수님의 그러한 십자가 죽으심이 얼마나 보배롭고 강력한지를 체험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의 무한한 깊이를 알고 십자가의 죽으심이 얼마나 보배롭고 강력한지를 체험해야만 풍성한 위로를 누릴 수 있고 온전한 거룩에 도달할 수 있으며 견고한 소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요소이며, 사실상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기에 결국 우리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다. 죄의 짐이 완전하게 제거되었습니다. 모든 죄의 짐이 예수님께 전가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의 짐을 다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는 영원히 잊혀진 바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죄의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의 손이 그렇게 옮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그렇게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예수님은 항상 우리의 죄를 담당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은 우선 우리의 죄가 완전하게 사함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사 겟세마네 동산에서 깊은 슬픔을 맛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셔야 했던 그 죄들을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않도록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는 자신의 죄를 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확실하고 행복하며 소망스러운 죄 사함과 용납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 속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전에는 결코 죄를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며, 죄의 존재와 죄책과 권세를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사악함과 죄책과 저주받은 상태를 알아야만 비로소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하며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악한 것인지를 가장 깊이 각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책과 압제와 저주로부터 얼마나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구원받았는지를 가장 분명히 확신하게 됩니다.

그림에서 평행선으로 음영을 나타내는 해칭(hatching)이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인상적이듯이, 어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죄와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를 균형있게 바라보는 이런 믿음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의 많은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삶입니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십자가 아래서“ 중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82 a

아래 글은 천국상급에 대한 류재룡님의 글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혼동하는 것 중 하나는 구원과 상급을 같이 보는 것이다. 신자들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또 무슨 상급이 주어진다는 말이냐? 상급을 주장하다 보면 자기 행위에 대한 자기 의를 과시하게 되고 이는 곧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가 되고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중세 로마 카톨릭의 타락을 목격한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을 강하게 배격하였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에서 특히 개혁주의 일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개인의 행위에 주어지는 보상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을 배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자의 선행에 주어지는 상급을 분명히 제시한 성경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또 다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 또 상급을 강조하다 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고, 상급은 자기 행위에 대한 공로로 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잘못된 사상이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다. 상급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수반되어 주시는 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핍박과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현실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상급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인간이 상받을 공로가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상급문제는 성경 전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에 대한 바른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신약 시대 이래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논쟁 되어온 해묵은 문제이다.1)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책임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선택권을 부여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매우 제한적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역할 분담하여 50:50 또는 90:10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려 한다.2)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동시에 인간도 전적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도 일하시며 인간도 일한다고 가르친다. 즉 100% 하나님의 주권이요, 100% 인간의 책임이라고 해야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있다.3)

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는 상급 문제(賞給問題)에 있어서도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여 준다. 상급의 은혜성과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의 상호 모순되는 듯한 성경의 상급 교리를 바로 이해하는데 본 논문의 목적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 상급교리에 대한 양 극단의 공로 사상과 상급 무시 사상을 배격하고 상급 교리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영위해 갈 수 있다.

천국 상급을 연구하기 위해 먼저 상급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강조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상급 교훈은 유대주의나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제시할 것이다.

다음에 이러한 성경의 상급 교훈을 유대주의자와 로마 카톨릭은 어떻게 왜곡시켰으며 종교 개혁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가 그리고 상급에 대한 최근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는 어떠한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음에 천국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 그 다양한 내용들을 상급과 신자의 선행과의 관계, 상급의 은혜성, 상급의 동기와 목적, 천국상급의 등급과 그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차례로 고찰해 볼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해 신, 구약 성경을 최고의 참고서로 채택하여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의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것이다. 또한 상급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밝히게 될 것이다.

II. 상급에 대한 성경적 개념


1. 구원과 상급의 구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급에 대한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하고 공로사상에 빠지거나 상급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구원과 상급을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하여 성경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행위는 털끝만큼도 상관이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지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든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신자는 죄로 말미암은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이제 받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감당하셨기 때문이다(벧전 2:22-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행위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전 5:10).

우리의 행함에 대한 심판이 있고 그 결과에 따른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다.''..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심판이 있다. 하나는 정죄의 심판이고 다음은 상급의 심판이다. 첫 번째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앞으로 심판받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받을 심판대는 행위 따라 상급을 주시는 상급 심판이다.''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1:12).

''이방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 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계 11:18).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소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장 41-42절). 하나님은 그 백성 각자에게 그들이 일한 대로 상을 주실 것이다(계 22: 12).

구원과 상급의 또 다른 구분은 구원은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고 상급은 열매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3장10-15절에 보면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 둔 구원이다.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지은 자가 있고 나무나 풀, 짚으로 집을 짓는 자가 있다. 그 집을 지은 행위에 대한 심판은 불로서 한다고 하였다. 불이나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불타고 없어지면 해를 받는데 이런 사람은 ''구원은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집짓는 재료를 가리켜 공력이라고 하였다.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 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3一15).

여기서 공력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구원은 얻지만 믿음의 행위가 없으면 상급을 얻지 못하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위하여 달음질하고 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을 얻는 자는 하나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성도는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상급을 위하여 맡은 일에 충성을 하여야 한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상급을 연구하기 위해 상급에 대한 성경적 용어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성경의 상급 사상을 고찰하도록 한다.


2. 구약에 나타난 상급

1) 구약의 상급용어

(1) 사칼(ר

성화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좋은 글이 하나 있어서 펌하여 올립니다.
소요리 문답이나 신앙고백서를 언급한 것을 보니 김효성 목사님은
개혁주의 목사님신 것 같은데 특정 부분에 있어서 소이한 차이는 설령
있을지라도 이 정도면 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비교적 무난하게 수용될
수 있을 성화론으로 여겨져서(제 개인적인 생각에)성화론에 관심있는
분들께 한번쯤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구원의 과거적 단계는 중생과 칭의(稱義)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구원의 현재적 단계는 성화(聖化)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 속에서
지금 진행 중이다. 구원의 미래적 단계, 곧 구원의 완성은 영화(榮化)이다.

성화의 본질

성화(聖化, 거룩하여짐; sanctification)가 무엇인가?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重生) 의롭다 하심을 받은(稱義) 자들이 그 인격과
삶에 있어서 실제로 거룩해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소요리문답 제35문답,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일인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全人)이 새로워지고,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전인(全人)의 실제적 변화

성화는 전인(全人)이 새로워지는 것, 즉 영육 전체, 지정의(知情意)의 전 인격,
전 생활이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죄는 죄책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칭의는 우리의 죄책이 법적으로 제거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칭의에 근거하여 우리의 부패성이 실제로 극복되는 과정이다.
또 칭의는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성화는 내면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인격과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성화는 사람의 인격과 삶의 실제적 변화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적용하신
법적 의(義)를 성도들이 인격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도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내용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통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의
성화의 정도는 별로 크지 않은 듯하지만, 지식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그것은
상당히 진전된다. 성도들은 일생의 성화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성과
무능함,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다. 물론 그는 그것과
함께 거룩함과 의로움, 선함과 사랑과 진실함 등의 도덕성에 있어서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9:2 등).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 .”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2-24, “(받았으니) 곧 옛
생활방식에 관하여 너희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라”(원문 직역).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화는 성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예물과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셨음같이 너희도 사랑으로
행하라”(원문 직역). 골로새서 3:13, “피차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점진적이며 불완전함

성화는 점진적이다. 중생은 영적 출생이며 성화는 영적 성장이다.
사람이 출생한 후 자라듯이, 성도는 영적으로 중생한 후에 점점 성화된다.
중생(重生)과 회개와 칭의는 단회적(單回的)이며 즉각적이지만,
성화는 중생에서 시작되어 일평생 동안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야곱의 생애를 흔히 성화에 비교하듯이, 성도의 일생은 성화의 훈련 과정이다.
채소가 자라려면 단지 수개월이 필요하나 참나무는 백 년이 필요하듯이,
성도들의 성화는 오랜 기간과 많은 훈련들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가
점점 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지만, 성화는 매우 더디어 보인다.

또한 성화는 지상에서 불완전하다. 육신의 죄악성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경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도의 구원은 이런 불완전한 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번 속죄의 의(義)에 의존한다. 성도의 성화가 아무리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루어주신
의(義)에 미치지 못한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의 때문에 완전하며 성도는 최종적 영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간다. 그것은 성도가 죽을 때 그 영이 즉시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가르친 성경의 여러 구절들(눅 23:43; 고후 5:8; 빌 1:23 등)에
당연히 내포된 진리이다. 거룩한 영이 아니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3은 천국에 올라간 영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렀다.

소요리문답 [제37문]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습니까?
[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 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므로 부활
때까지 그 무덤들에서 안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성도가 지상에서 완전 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경험에 배치된다. 마태복음 6:12, 1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로마서 7:7-26,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 .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라디아서 5:17,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스려 욕심을 내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리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원문 직역).

다음 성경구절들은 잘 해석해야 한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보일 뿐이다. 야고보서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135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의 온전함은 완전 무죄가 아니고,
영적 성숙함을 의미한다. 노아나 욥 등도 완전 무죄한 자들이 아니었다.

요한일서 3:6, 8,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범죄치 아니하나니’
136)라는 말은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씨
곧 새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요일 3:9).

성화해야 할 이유

성도는 왜 성화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성화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성화가 구원의 당연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정상적인 일이다. 기형아가 아니라면, 아기는 자라게 마련이다.
영적으로도 똑같다. 성화는 반드시 중생, 회개, 칭의를 따른다.
각 사람의 성화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성화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치 않는 구원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라는 말은 성도들 가운데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음을 의미하는가? 중생하고 칭의함을 받은 자들
가운데 성화에 실패하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중생한 자, 참으로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세상을 이길 것이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성도가 성화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너무 큰 은혜,
즉 너무 귀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목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죄 짓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 행하는 것이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 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성화는 필수적 과정이므로 성도는 자신의 성화를 위해 분발해야 한다.

성화의 방법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됨

성화는 하나님의 전적인, 값없으신 은혜요 그의 하나님의 초자연적 활동이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 . .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히브리서 13:20, 21, “영원한 언약의 피로 말미암은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특히, 성령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중생시킨
성도들 속에 거하신다.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행하게 도우신다. 요한복음 14:16, 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위로자, 권면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성령은 또한
그들을 도우신다. 성도들은 계속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함

성화는 사람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선행의 능력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인격적 존재로 취급하신다. 사람은 중생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소극적이었지만, 성화에서는 능동적, 자발적, 협력적이어야 한다.
성화에서 인간의 성실한 노력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다.

빌립보서 2:12-13,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매튜 풀(Matthew Poole)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는 구원의 일에 있어서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구원의 공로나 값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주께서 풍성하게
완성하신 것을 적용하는 것이며, 구원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고 단지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는 과정과 수단일 뿐이다’
(Com- mentary on the Holy Bible, III, 691).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 .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고린도후서 7:1,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데살로니가전서 4:1-3,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 .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성화의 수단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몇 가지 수단들을 주셨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 및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 등이다.

첫째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다.
골로새서 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유익한 책이다.

둘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성례이다. 바르게 집행된 성례는 말씀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증거하고 기억케 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큰 은혜와 유익을 준다.

셋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적 도움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성도의 기도 제목들 가운데 영적 성장,
곧 성화는 매우 중요한, 기본적 제목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넷째로, 그 외에도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섭리적 훈련과 지도는 성도의
성화를 위한 수단들이다. 예를 들어, 직업 현장에서의 훈련, 시험과 유혹,
고난 등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다 성도를 겸손케 하고 성결케 하는
수단들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성도는 이러한
수단들을 성실히 사용함으로 영적으로 점점 더 자라며 거룩해져야 한다.

성화와 상(賞)

선행은 구원의 목표인 동시에 성화의 당연한 열매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선행에 대한 상(미스도스)에 관해 많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상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상(賞)은 각각 다를 것

상(賞)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다니엘 12: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11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16-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19-21,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각각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종종 오해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말씀은 일반 성도의
성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성경적 교훈을 말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그릇된 인간적 교훈을 말한다. 이 말씀의 요지는,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면 마지막 날 상을 받을 것이지만,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 받을지 모르나 자기의 교훈을
받던 자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상(賞)은 하나님의 은혜임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5). 또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고 역사상 아마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종이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또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계 4:10-11).

더욱이,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은 진술하기를, “그들의 순종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라도 공로를 쌓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이 의무상 해야 할 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실 상도 그의 은혜이다. 주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마땅한 자들이다(눅 17:10)]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교제



사단은 언제나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모두 믿는 것을
훼방하고 거짓으로 호도하여 성도의 일한대로 받는 상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게 하여 마치 성도들은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처럼 또는  주 하나님께서 행위구원 보상론을
성경에 계시한 것처럼 호도합니다.

성경적인 심판론은 성경말씀으로 증거되고 변론되나 인본적인
심판론은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의의 상급심판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적 바램에서 나온 논리로 점철될 뿐이라는 차이가
있지요.

성경사전에 성도가 받는 심판은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사망과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말씀이다(롬8:1-2)
그런데 성경 곳곳에서 성도들도 심판을 받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마 25:14-30,31-46/눅 19:12-28/고전 3:12-15/고후 5:10/롬 14:10
벧전 1:17/계 20:12)

그것은 불신자들이 받는 정죄와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롬 8:1-2) 성도 자신에게 맡겨주신 재능,시간, 물질,은사
기회, 책임등을 어떻게 사용하였느냐에 따라서 칭찬가 책망등
보상(상급)이 따르는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마 12:36/롬 14:10
엡 6:8/골 3: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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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서 타락으로(?) (히 6:4-6)

1. 히브리서의 배경
1)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 이후부터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관심을 받고 살아온 민족이다.
2) 그들은 ( 모세 )를 통해서 율법을 받았고, ( 제사장 )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 선지자 )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즉 한번 ( 비췸 )을 얻고 하늘의 ( 은사 )를 맛보았다. 또한 이런 일들은
( 성령 )에 참예한 일들이었다.

3)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 기름부음 )을 받은 자들이 증거하는
핵심인, 언약대로 오신 메시야를 거부했다. 다만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천사, 모세, 아론 등은 위대하게 보았다.
(눅 24:44-47)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 율법 )과 선지자의 ( 글 )과 ( 시편 )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 성경 )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 기록 )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외형적인 율법의 행위와 제사제도에만
집중하며(- 외식 ) 오신 메시야를 거부하는 히브리인들
(-대표적으로는 바리새인)에게 “화 있을진저”의 저주를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이다.

5) 율법과 제사로 종교의식을 거창하고 화려하게 함으로
비췸을 얻고 은사를 맛보는 경험을 했다(-성령에 참예했다)고
할지라도, 정작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므로 결코 ( 구원 )에 이르지 못하고,
너희를(- 불택자 ) 위해서는 어떠한 회개의 방편도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6)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 믿다가 타락하면 얻은 구원을 잃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예수를 믿지 아니한 히브리인들을
두고 한 말씀이며, 이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종교의식에만
빠져있었기 때문에, 정작 의식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2. 문제 제기 - 구원을 받았던 자가 구원을 못 받는다?

(히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1) 본문은 구원을 받았지만 타락하면 다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대부분이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에 거하게 하시고 구원하신 자(- 택자 )가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 십자가 )의 공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월등한 존재가
있다는 ( 이원 )론이나 ( 영지 )주의에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2) “타락한 자들”이란 구원의 증거를 듣고, 보고, 만지고도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 떠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떠나가지 않고 예수께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3. 본문 해석
“한번 비췸을 얻고”
(요 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 참 빛은 누구에게나 비추어진다. 문제는 참 빛을 구원의
빛으로 알지 못하는(- 영접하지 못하는 )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는(- 영접하는 ) 사람도 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1) 요한복음 6장의 전반부는(6:1-25)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 표적 )의 사건이며, 후반부(6:26-71)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사건을 ( 해석 )해주시고, 해석의
( 결과 )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즉 예수께서는 복음서에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 구약 )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을 증거 하시면서 하늘의 비밀을 밝혀주셨다.

2)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직접 듣고, 보고, 만지고도 그분을
떠난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므로 하늘이 주신
( 은사 )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떠나간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처럼....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 이처럼 예수께서 성령을 힘입어 행하시는 모든 표적들을
직접 본 사람들, 만진 사람들, 즉 성령에 ( 참예 )하였던
사람들은 허다하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다 믿음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2) 또한 성령을 통한 오병이어의 표적과 그 떡을 먹었던 수많은
사람들, 병 고침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표적을 직접 보고 거기(- 성령 )에 참여하고도, 그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달으라고 외쳤다.
(마 27:22)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 27:23)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3) 구약성경을 통해서 증거 되었던 메시야는 곧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였고, 이분은 구약을 ( 해석 )해 주심은 물론,
구약의 예언대로 ( 표적 )을 일으키시며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마 11:4-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고도 이들은 떠났다. 이들은 분명히 성령에 ( 참예 )했고,
하늘의 ( 은사 )를 맛보았고, 참 빛의 ( 비췸 )을 받았었다.

(요 5:39-42)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 내 )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 내 )게 오기를 ( 원 )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 없음 )을 알았노라]

-퍼온 글
By: 교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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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님의 질문에 대한 교제님의 답

엡 1:3-4절은 해석 차이가 있는 난해 구절이 아니므로 주석 참고하시기를
주석내용이 너무 길어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였으니 이해해 주시구요

[(1)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 - 혹자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A. Allan). 그러나 본서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제할 수가 없다(2:6, Lincoln).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짐을 시사한다(Bruce).

(2) 하늘에 속한(*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본문과 같은
전치사구가 본서에서는 다섯번 나타난다(3 20절;2:6;3:10;6:12).
이것은 본절의 '신령한'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Foulkes, Bruce).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영역과 연결시키는
구원의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미래에 맛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속하는 축복이다(Lincoln).

(3) 신령한 복으로(* 엔 율로기아 프뉴마티케) - 여기서 '신령한 복'은
성령의 현존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가리킨다(5:19; 골1:9;3:16).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이다(Foulkes, Lincoln, Bruce).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택하사'의 헬라어
'엑셀렉사토'는 '선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클레고'의 단순과거
중간태이다. 이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선택이

(1)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역이며
(2)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주는  표현이다(Wood).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됨을 시사한다(Lincoln).
한편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영원전에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공적이나 일시적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주권적 은혜임을
시사하며 동시에 '창세 전에'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나타낸다(골 1:15-17, Lincoln).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거룩하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순결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여 도덕적인 결점이나 죄를 없게 하고 성령의 열매들을
소유하게 하심을 시사하며(갈 5:22, 23) '흠이 없게'는 결함이나 오점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가리킨다(5:27).

이런 두 가지 용어는 구약의 희생 제물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LXX 출 29:36, 37; 민 6:14;19:2) 결점이 없는 윤리적 순결성을 의미한다.
이런 윤리적 순결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안에서 나타난다.]

롬 5장 18-19절은 정죄 사망(영)과 칭의 중생에 대해 비교 언급한
장으로서 선악과 언약 대표자 아담의 불순종과 그 결과, 십자가
언약 대표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결과가 서로 댓구를 이루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 5:18-19절로 바로 직행하기 전에 바울 서신서에 자주 언급되는
"모든" 이라는 단어가 어떤 전제를 담고 있는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롬 11:32절의 주석을 인용하겠으니 참고해 주시구요

[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본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되어 30, 31절의 결론이 되고 있으며,
5:12-21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내용을 매우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심이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본서의 전체적인 주제를 상기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버려두신 것은 그들의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이 각성되어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태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궁극적 목적을 위해 이방인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도구로,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이방인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는 결국 구원의 전체성, 즉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만인 구원을 인정하는 구절은 아니다
(25, 26절).

본절의 '모든 사람'은 그 범위가 제한된다. 즉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 '긍휼을 얻을 모든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NIV:
Consequently, just as the result of one trespass was condemnation for
all men, so also the result of one act of righteousness was justification that brings life for all men.

kJV:
Therefore as by the offence of one judgment came upon all men to condemnation; even so by the righteousness of one the free gift came
upon all men unto justification of life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NIV: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 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KJV:  For as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so by the obedience of one shall many be made righteous.


위 영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all man(모든 사람)과
many(많은 사람이 함께 쓰였고 롬 5장 18-19절이  만인 정죄론이나
만인 칭의론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니기에 롬 11:32절처럼
"범죄한 모든 사람""순종한(회심) 모든 사람"이라는 전제가 되어져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집어넣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화를 내며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냐!
빨리 집어넣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신하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은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감옥에 혼자 가두어
놓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와서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중얼대지요.
그러니까 혼자 두게 되면 오히려 그에게 잘해주는 셈이 되지요."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는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그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극도로 화가 난 황제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는 더욱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들 중에
목 베임을 당하려 나올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황제는 기가 막혀서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신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말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임을 이 이야기를
통하여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어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작성자 미토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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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율법무용폐지론이 아니라 율법변역완성론을 교훈합니다.

*변역-제사 직분 변역을 통해 옛 제사 정결례 관련한 의식법을
        폐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성결법을 세움(히7)
        언약대상 변역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되던 옛
        시민법을 폐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새시민법 세움,
        옛 윤리 도덕법 강화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된 복음서와 주의 계시를
         받아 나온 신약 서신서)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들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
새언약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케 되어진 하나님의
법으로 보는 눈이 부재하다 보면

영지주의 이단 사설에 미혹되어 율법에 대한 점진적 계시
유기적 해석은 간과한 채 율법을 그저 낡아지고 쇠하여
없어진 구언약과 동일시하고 폐지되었다 오해하여 복음진리를
호도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들을 언약백성으로 하고 레위 족속을
제사장 삼아 짐승의 피로 속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내산 언약이 구언약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되어진 자들을 언약
백성으로 하고 언약백성 모두를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삼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 제물되어
십자가에서 완전한 속죄를 위해 흘린 그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십자가 새 언약이 도래하였고 새언약의 백성은
믿음으로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폐하는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자들입니다.
       
율법이 그 자체로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신령한 법,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법임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에
연약하다 무익하다 아무것도 온전케 하지 못한다,원수된 것,
의문에 속한 것이라고 언급된 이유는 율법을 받아 준수하고
생명과 복을 받고 살아야 할 자들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생명이 되어야 할 율법이 육신에 속한 자들에게 결과적으로
죄와 사망의 법,저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성도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겨도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긴다는 말씀이 바로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는 성경적 증거

모든 사람이 죄 있는 육신,연약한 육신(flesh.sinful nature)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사람이 율법 아래서 범죄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율법이 폐지되었다면 이는 율법이 없는 것과
같으니 죄가 죄로 여김받지 않고 죄가 죽은 것이고 죄가 계명으로
기회를 타서 속여 범죄케 할 수 없으니 죄의 종,죄인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성경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 폐지되었으면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
아래서 죄인 되었다는 것인지 ,율법대신 그리스도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되어 모든사람을 저주아래 두었다는 것인지?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은 죄와 사망의 법 폐지를 의미합니다.
(율법과 죄의 상관성은 신약 로마서에도 기록되었음)

하나님께서 유대인 이방인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율법
아래 나게 하시고 죄 아래 불순종가운데 두신 이유는 유대인
이방인 가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함이고 죄 가운데 은혜가 넘치게 하신 것이
바로 구속사를 작정 계획 성취하시는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지혜,심오한 경륜임이 로마서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약속의 자손이 오실때가지 그대로 있다가 약속의
자손이요 믿음의 주,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역과정을 거쳐 새언약의 하나님의 법으로 완전케
된 것입니다.

새언약의 하나님의 법=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율법
+ 믿음에서 난 그리스도의 법

헌법이 개정되면 법전에 구 규정과 새 규정이 함께 기록되듯
성경도 구약 신약으로 나누어 기록되었고 바뀐 규정은 바뀐
규정대로 지키고 폐지되지 않고 바뀌지 않은 규정들은 그대로
지켜야 할 규정으로 남아 있는 법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법이 근친상간 ,동성연애,수간같은 음행이
더 이상 음행이 아니라고 한 바 없고 음행을 버리라고 하였으니
음행을 버리기 위해서는 음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양심으로도 알 수 있지만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니 율법의 음행을 버려야 하고

우상의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왜 피를 멀리해야 하는 것인지
우상의 더러운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키는 것인지가 또한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에
성령은 믿는 자들로 신구약 성경을 모두 상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신자가 율법이 폐지되었다 여기고,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만 지키면 율법은 다 지킨 것과 진배없다
착각하여 무당집에 가서 점을 치고도 죄가 아니라고 우기면
어떻게 죄를 자백하고 어떻게 그 죄에서 돌이키겠는지요
혹자는 아 성령이 자동적으로 알려주니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기에 성령이 율법을
통해 그것이 죄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9>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9>

형제,이웃,원수,동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명한 옛 계명들을
축약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이 주어졌다고 옛 계명들이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사랑
관련한 옛 계명을 지키는 것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서로 다른 저자를 가지고 있어도 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섭리의
연속성을 일관적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신약의 <모든 성경은
....온전케 하느니라>라고 말씀에 이미 새언약의 하나님의 법이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율법+믿음에서 난 그리스도의 율법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케 된 율법임이 계시되었는데 특정구절에
치우치니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심비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졌다는 의미는
성도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며 섬기게(롬 7:22,25),
굳게 세우게(롬 3)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변역을 거쳐 완전케 되어 그대로 있고 다만,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영혼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의 저주 아래서 죄의 주관을 받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옮겨주어 믿음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USA아멘넷 게시판/교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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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 | 아타나시우스

진실 2009.09.09 10:27   http://blog.daum.net/kkho1105/2435 

 Ⅰ. 서 론

기독교의 대박해는 콘스탄틴 시대(니케아 시대)종식 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박해가 끝이 나고 평안의 시대가 교회 안에 주어졌을 때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리의 논쟁이었다.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었던 최대의 교리 논쟁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성,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등의 문제는 주후 수세기 동안 초대 교회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이라 한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러한 삼위일체 논쟁들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는 이러한 교리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회가 참여하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아리우스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니케아회의가 소집되었다. 따라서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를 연구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과 기타 여러 교리논쟁을 정리하는데 중요한 일이며 가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Ⅱ. 본 론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삼위일체 논쟁의 기원은 기독교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온 신학적 발전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속사도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 성부/성자/성령을 하나님으로고백.
②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폴리갑 - ‘예수 그리스도는 만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

변증가
①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신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삼위일체 개념을 분명히함.
② 저스틴 -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종속설과 유사)
③ 데오필루스 - 삼위일체(Trinity:Trias).
④ 저스틴,타티안,아테나고라스 - 로고스를 삼위의 제2위로 인정.

교 부
①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 함
② 이레니우스 - 창조주가 성자이심을 고백하고 성자와 성부를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함.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모든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는 것이다.’
③ 터툴리안 -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
삼위의 한 본성(one substans),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
성부, 성자, 성령을 연관시킴.
*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 - 단일신론
단일신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로 아리우스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류
단일신론 (Monarchianism)
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 성부 고난설 Patripassianism
역동적 단일신론 Dynamic Monarchianism 샤벨리안주의 Sabellianism

주장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오류들
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각기 다
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으로 봄.
② 성부고난설에서는 성자가 성육신하신 성부 자신이며, 따라서
성부 자신이 고난받고 죽으셨다고 주장함.
③ 시벨리안주의는 단일신론의 대표적인 이단으로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성령의 다른 양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였다고 주장.

영향
역동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삼위를 구분하
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 그리스도를 단순히 신성이 충만한
인간으로 봄.- 에비온파(Ebionites)
<영향>
에비온파 --> 데오도투스의 양자설 --> 사모사타의 바울 -->

2. 아리우스 생애와 사상
1) 생 애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키가 크고 연설을 잘했으며 열성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는 안디옥 신학교의 교장인 루시안(Lucian312)에게 배웠으며,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260-272)의 여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 서신 그리고『향연(饗宴,Thaleia)』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극단적으로 종속적인 기독론을 가르쳤다.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와 충돌한 뒤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귀한하여 니케아 신조에 형식적으로 동의함을 복직되었다.

2) 사 상
이미 사모사타의 바울이나 시벨리우스는 성자를 성부로부터 발산된 형태, 또는 성부의 뜻과 행동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이해했었다. 이에 대하여 터툴리안, 오리겐 등은 보다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받아야 하는 강제력을 가진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었다. 아리우스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후에 사모사타의 바울에게서 배웠다. 아리우스의 사상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알렉산더 감독이 삼위일체신의 현현(顯現)에 대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리우스가 그것이 사벨리우스설이라고 공격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3) 아이우스의 교리체계
① 하나님의 특징은 단독과 영원이다.
② 하나님 안에 지혜와 말씀이 거하지만 이들은 위격체가 아니다.
③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한 독립된 실체를 만물 창조의
도구로 존재케 하셨다.
④ 아들은 아버지와 별개의 존재이며 실체와 본성에 있어 아버지와 다르다.
⑤ 아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고 소위 말씀과 지혜에 불과하다.
⑥ 하지만 이들은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다.(완전한 피조물)
⑦ 그리스도는 실제로 신체를 취하였으나 로고스가 영혼을 대신하므로 그
것은 영혼이 없는 몸이었다.
⑧ 기타 피조된 존재들 가운데서 성령은 제2의 독립된 실체로서 아들 곁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성령은 아들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렉산더 감독으로부터 이단적 사상이라는 반박을 받게 되었다.

3.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와 신학
1) 생 애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서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였다. 그는 약 3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고 373년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작성하는데 기여했고, 그의 여생을 그것을 옹호하는 데 바쳤다. 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소유한 그는 지도자와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적 신학자였다. 그는 수도원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며, 에집트의 수도사들중에 그의 최대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신학자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253년에 사망한 오리겐과 354년에 출생한 어거스틴 사이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 신 학
그의 신학과 신앙은 벧후1:4에 있는 말씀에 지배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서방 신학과 동방 신학간의 큰 차이점에 직면하게 된다.

서방 신학
서방신학의 중심된 문제는 죄의 제거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고, 우리는 그분 앞에 죄인으로 서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제거되지 않고는 다시는 그의 호의를 누릴 수 없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화육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동방 신학
인간의 타락의 문제였다. 창조의 머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그의 창조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서 인성은 신성과 결합했고, 그 안에 인간의 타락된 사망은 아름다운 영생으로 변환되었다. “우리에게 신성을 주시기 위하여” 아다나시우스는 말하기를 “그는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이 아니면 구원은 없다.

아리우스는 완전한 신성도, 완전한 인성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다나시우스는 전심 전력 그를 반대했다.

4.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의 세계적인 회의의 효시(嚆矢)로서 당대의 최고 사건이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적인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것과 기독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사실 두 학파는 신학적 접근 방법이나 강조점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이단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니케아 논쟁은 기독론에 기초한 삼위일체 논쟁이다. 그것은 유일신 사상과 기독론의 피상적 부조화에서 오는 아리우스의 오해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기독론’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1) 발 단
아리우스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32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지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아리우스는 직분을 박탈당하였고, 그의 추종자인 세쿤두스(Secundus)와 데오나스(Theonas)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같이 루시안에게서 배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동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은 보기에 ‘하찮은 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에게는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통일성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를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세계적인 대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2) 과 정
콘스탄틴은 각 지방의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띄웠다. 각 지방에서 2인의 장로와 3인의 수행원을 파견하는데, 정부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으며 체재비용과 왕복 여비를 모두 황실에서 지출해 주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Nicea)에 최초의 세계회의가 소집되었다. 모인 인원은 300여 명이었는데 이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서방측에서는 10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그리고니케아․칼케돈․에베소 감독들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호시우스 등의 소수-.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립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등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콘스탄틴은 다만 통일과 평화 유지만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신조를 제출한 것은 아리우스파의 니코메디아의 제출한 신조가 수정이 가해져서 채택되었다. 아다니시우스는 ‘유사본질’(Homoiousios)이 아니라 ‘동일본질’(Homoousios)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주장
아리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유사본질이다(΄ομοιουσιοςHomoiousios-Like Substan -ce)
인 성:그리스도는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다.

아다나시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이시다(΄ομοουσιος:Homoousios-one Substance)
인 성: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3) 결 과
니케아 회의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수정하여 니케아 신조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의 추방, 부활절 날짜 재정, 멜리티우스(Melitius) 분파 문제 등을 다루었다.

4) 니케아 신조 전문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시었고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 부터의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지도 만들어지지는 아니하시었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 하시고 사람이 되시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시었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또한 성신을 믿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은 즉,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또한 그는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물이나 본질로부터 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주장하는 자들을 카톨릭적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회의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은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의 종말은 준비되어 있었고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제1기:콘스탄틴대제의 사망까지(337년5월)
①니케아 신조가 ‘진실한 신앙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짐.
②그러나, 황실 교회 고문으로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임명된후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확장됨
③안디옥 감독 유스타스유배, 아다나시우스의 감독직을 박탈하고 파문, 앙크라의 마르셀루스 파문 유배.
④ 337년 아리우스와 콘스탄틴 황제 사망으로 새로운 국면.

제2기: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직후부터 361년까지
①정치적,교회적 혼란기
②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의 유배를 두고 동서방교회간에 논쟁, 타협안으로 아다나시우스 복직.
③정치적으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가 황제의 고문이 되어 아다나시우스파를 정죄, -칼라리스의 루시퍼,베르셀라이의 유세비우스 ,밀란의 디오니시우스, 로마의 리베리우스을 추방 알렉산드리아의 아다나시우스를 몰아내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조오지를 감독으로 임명, 안디옥에도 아리우스주의자 유독시우스를 감독으로 임명.동방교회의 혼란.
④아다나시우스와 앙크라의 바실파의 동맹

제3기:줄리안의 즉위부터 데오도시우스 1세까지
①줄리안의 즉위 - 아다나시우스와 니케아신조에 호의적 : 아리우스주의 영향력 상실
②데오도시우스 즉위 - 아리우스주의 배척
③아다나시우스 활동의 절정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2)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은 앞에서의 설교 속에 밝혀져 있습니다. 즉, 첫째로는, 율법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방법으로서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비록 여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고, 복음을 확장한다는 구실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모두 파괴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간에)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과 대치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성결의 필요성이 거의 없거나 또는 그 필요성의 정도가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성결의 필요성이 요청되겠지만믿고 있기 때문에 성결이 우리에게 거의 필요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인의 자유란 어떤 종류나 어떤 정도의 성결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선행이 아니라 은혜의 계약아래 있다는 것,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 는 진리를 외곡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이러한 사실들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비록, 원칙에서는 아니지만 행동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믿음 때문에 성결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처럼 생활하거나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떻게 보다 나은 방식을 따르면서,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문제만이 남게 됩니다.

2. 실제로 우리는 낡은 의식적 율법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율법이 영원히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전체를 수립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을 완성하고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마치 우리가 의롭게 되는 조건인 것처럼 생각하여 도덕법 (너무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만)을 세우자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생전 의롭게 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직도 사도 바울이 의미한 바와 같이 '율법' 즉 도덕법을 '세우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첫째로, 도덕법을 따라 율법을 세웁니다. 우리는 위대한 바울 사도가 지상에 살 동안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전면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훈계하신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라도 말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게 하시오' 하는 말씀을 따름으로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가르치고 이것을 기록했던 그 옛날 경건한 성도들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비하신 주님의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비하신 주님의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숨김없이 말하게 될 때 언제든지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가르치심을 어떤 제한이나 유보함이 없이 사람들에게 선포함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율법을 수립하기 위하여 매우 분명한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혀 온 많은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즉 (나쁜 포도주를 가공하는 사람들처럼)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중들의 구미에 맞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불순하게 하거나, 뒤섞거나, 질을 떨어뜨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말씀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르도록 진리를 표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 우리가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율법을 선포하게 될 때 교리에 따라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의 자비하신 주님과 사도들에 의해서 율법이 전해진 그 충만함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가 그 율법을 고도로, 깊게, 길게 그리고 넓게 공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을 충분하게, 그리고 문자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원리와 마음 속의 생각, 욕구, 의도에 유의하여 선포하게 될 때 비로서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3. 그리고 참으로 우리가 율법이 가장 심오한 중요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즉, 나무가 악하다면, 그리고 마음의 성향과 기질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면, 모든 열매, 즉 모든 언행은 계속적으로 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중요한 것 만큼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도 않고 이해를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보다 열심히 율법을 전하게 됩니다. 즉, 거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영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고찰한다면 역시 '율법은 창조 때부터 시시대대로 숨겨져온 것 이라고' 진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감추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자랑스러운 지혜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록된 글로서는 물론 율법의 정신은 더욱 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더욱 더 어두워졌습니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우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유대민족에게 있어서도 거의 동일하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그렇게 즐겨 선포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로서 자신에게 대하여도 선고를 내리게 되는 것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똑같은 저주와 똑같이 지독한 무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크게 곡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들일지라도 주님의 끊임없는 질책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십시오. 이것은 그들이 율법을 너무나 엄청나게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결함을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된다는 사실을 증거하십시오. 그들이 단지 컵의 겉만을 깨끗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실, 그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만 드리면, 즉 외적인 정확성만 기하게 되면, 공정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등한히 해도 내적인 불결함을 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 중 가장 현명한 자들에게도 율법의 영적인 의미가 너무나 절대적으로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가장 유능한 랍비의 한 사람도 시편의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만일 내 마음이 불의를 즐거워한다면 주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내 마음 속에서만 그렇다면, 그래서 내가 외적인 죄악만 범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여기에 대해 개의하지 않으시며', 내가 외적인 행동으로 죄를 짖지 않는 한 주님은 나를 벌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4. 아! 그러나 내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단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소위 기독교 세계에서도 감추어져 있으며, 적어도 그들 대다수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인 의미는 아직까지 이들에게도 역시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암흑과 무지로 가득찬 캐토릭 국가들에 있어서만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개신교들이라고 불리우는 대다수에 있어서도, 그 율법의 순수함과 영적인 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율법은 종교의 능력이 아니라 형식만을 소유하고, 자신의 눈에서만 일반적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의견으로만 의롭다고 생각해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종교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마음의 종교가 없이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먹이기 위해 나누어 준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게 될 때 그들은 더욱 더 화를 내게 됩니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있는 말을 참든지 간에 우리의 영혼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성서 가운데 있는 모든 말씀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발견된 모든 약속 뿐만 아니라, 모든 경고들도 다같이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배하신 모든 축복과 특권을 선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유용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잠자는 자들을 일깨우고,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빈약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로하고, 또한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고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요 참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책'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그가 마침내 완전해지고 결국 그가 그것으로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합당하도록' 하기 위해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다 선포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때 참으로, 아무런 비난도 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의이신 주님을 증거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세상과 화해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세히 설명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가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는 그런 주님을 높이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기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모든 직능을 선포하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길을 위해 사람 가운데서 택함을 받고 사람을 위해 성별 된' 우리의 위대한 대 제사장으로서, 즉 '주님의 보혈로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고 지금까지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즉 그분의 말씀과 영으로써,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왕으로서, 즉 그의 피로 사신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의 은혜를 처음 회복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는 왕으로서, 그리고 '모든 만물이 그의 발아래 복종할 때까지, 즉 모든 죄를 완전히 물리치시고 영원한 의를 가져올 때까지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1.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성결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즉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간에 마음과 생활에 모든 종류의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믿음 자체, 기독교적인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택인 믿음, 하나님의 역사인 믿음까지도, 단지 사랑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계속 선포해야 됩니다. 이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이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것이지만 계명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에만 이런 명예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고 사랑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믿음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원한 비죤속에서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은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과 직무는 여전히 같은 것이네.
그 불빛은 영원히 불타오르고,
그 불꽃은 소멸되지 않네.
죽음이 없는 승리 속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끊임없는 선함이 넘쳐 흐르고,
영원히 찬양을 받게 되네.

2. 매우 훌륭한 일들이 믿음에 대해 언급되어 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동참자는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은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도 사랑과 비교하게 되면 그 모든 우수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영광이 율법의 영광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아주 적적하게 피력한 것은 사랑의 영광이 믿음의 영광보다는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보다 우월한 영광 때문에 영광을 상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것이 영광스럽다면 남아 있는 것은 더욱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사라지기 전에 있었던 믿음의 모든 영광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사랑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목적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제정하였던 아주 일시적인 수단입니다.

3. 모든 일을 삼켜 버릴 정도로 정도에 지나치게 믿음을 찬양하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이 사랑에 대치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의 본질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은 믿음 후에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욱 생각하십시오. 창조된 순간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 천사들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평가되는 믿음을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신앙, 즉 예수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소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나 특수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에는 믿음이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설자리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즉 위대한 사랑의 대양 안에,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창조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로운 창조주로부터 즉시 이를 받아들여 존재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4. (많은 사람들이 교묘하고 그럴 듯하게 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 일반적인 의미에서까지도, 낙원에서는 설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단편적이고 상세하지 못한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기 전에는 아담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동행했던 것이지 믿음으로 동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성의 눈은 강하고 맑았기 때문에
(태양을 바라 볼 수 있는 독수리처럼)
그리고 총명한 천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가까이서 창조자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었다네.

그때, 아담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지금은 우리가 볼 수가 없고 그 얼굴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담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력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이 믿음의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5. 다른 한편, 특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믿음이 그 당시 불필요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는 죄와 죄인들에 대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필연적으로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없다면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기 위하여 속죄의 행위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타락 이전에는 속죄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속죄에 대한 신앙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사람이 당시에는 모든 죄의 허물로부터 깨끗해졌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했기 때문에 사랑이 사람의 마음 속을 채웠고, 어떤 경쟁자도 없이 인간을 지배했었습니다. 단지 사랑이 상실되었을 때에만이 믿음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인간이 타락시킨 그 사랑을 인간에게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에 응답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도록 계획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이 첨가되었는데 이것은 그 전에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구속적인 사랑에 대한 이 확신은 '여자의 자손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라는 약속이 맺어질 때까지는 그 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6. 그런고로, 믿음은 사랑의 율법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본래적으로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해서 믿음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거나 그것의 당연한 칭송을 빼앗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면에 그것의 진가를 들어내고 믿음을 적합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지혜가 부여한 바로 그 자리에 믿음을 놓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본래적으로 창조되었을 때 그 속에 있었던 거룩한 사랑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수단입니다. 비록 믿음 자체는 어떠한 가치가 없을지라도(어떤 다른 수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목적,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세우는 목적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에 있어서 믿음이 이 세상에 있어서 사랑의 법을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사랑에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1. 그리하여 셋째로, 이것은 자연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즉, 율법을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세우는 일입니다. 사실 이것 없이 다른 모든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교리로서 율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전면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율법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영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들어 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직무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모든 보화를 더하게 하여 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안에도 만약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가 전한 율법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가리로' 보다도 하나님 앞에 쓸데없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선포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직 우리의 파멸만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2.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의 마음 속에 율법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생애에 율법이 충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한 요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배운 바와 같이 이러한 목적에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민첩하게 성결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꾸준히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더욱 더 세상에 대해 못박히고 세상은 우리에게 못박힌 바 됩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을 일시적인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고착시키고 우리의 애정을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여 위의 것에 집착하게 합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믿음은 모든 의와 진정한 성결을 증진시키며,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룩하고 영적인 율법을 세우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인 것입니다.

3. 그리고 보다 특수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주님의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그렇게 강하게 이끄는 동기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확신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넘친 사랑의 원리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역시 생기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랑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에 근거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랑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관찰했던 바와 같이 사랑은 부정적인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하는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다른 계명이 있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 이웃에게 어떤 악행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시간과 기회가 있는데로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종류와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완성시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4. 단지 외적인 면으로만, 믿음이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율법을 성취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게 하고 모든 악한 감정으로부터 율법을 께끗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서 깨끗하신 것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모든 욕구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악하고 과격한 감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육욕적인 마음 전체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이 완전하게 역사하게 된다면 모든 선과 의와 진리로 인간을 가득 채웁니다. 믿음은 사랑의 영혼에 모든 천국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속에 계신 것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빛속에서 걸어가게 합니다.

5.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받은 모든 능력을 사용함으로 우리 자신 속에 율법을 세우도록 노력 합시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빛을 마음 속에 회상하면서, 그 빛을 우리가 끄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때 우리가 성취한 것을 단단히 붙들도록 합시다.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파괴한 것을 다시 세우지 않도록 하고, 크건 작건 간에,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것,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 것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시 계속하지 않도록 하고, 또는 크건 작건 양심의 가책이 없이는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도록, 하여 어떤 것에도 유혹을 받지 맙시다. 이전에 받았던 빛을 더 증가시키고 완전케 하기 위하여 이제 믿음의 빛을 첨가합시다. 주님께서 전에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보다 깊은 의미로, 보다 온유한 양심으로, 죄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전에 주신 은사를 확신하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가 기쁨을 가지고 영원한 두려움이 없이 이것들을 분명히 확고하게 바라보며 살아 간다면 우리는 쾌락, 부귀, 칭찬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물 위에 뜬 거품처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아무것도 바랄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장막 속에' 있는 것 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6. '당신은 나의 불의에 대해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내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장차 도래하는 그 때를 위해 뱀의 얼굴을 보고 피하듯이 죄를 보고 피하도록 하십시오. 죄가 당신에게 지금 심각하게 죄악적으로 보입니까! 이 죄는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얼마나 흉악한 것입니까! 다른 한편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뜻을 지금 당신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빛 속에서 바라다 봅니까! 그러므로 지금 당신 안에서 그 뜻이 성취되도록 하고, 당신에 의해서 성취되도록 하며, 당신에게 성취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더 이상 죄를 짖지 않도록 조심하고 기도하십시오. 또한 주님의 율법의 가장 적은 부분이라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피하십시오. 태양이 어두운 곳을 비출 때 당신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티끌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이 당신의 마음 속에 비칠 때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죄를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 모든 면에서 당신이 받아 들였던 빛을 따라 살기 위해 부지런히 행하십시오! 매일 매일 빛을 받으며,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 그리스도의 영, 그분의 생명,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더욱 더 받도록 열심을 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이미 얻은 모든 지식, 사랑, 생명,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이 목격함으로 삼켜진 바 되고 사랑의 법이 영원히 성취될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속해서 전진하고 거룩한 사랑 안에서 매일매일 성장합시다!



 

[ 18:21-32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와 십일조를

받아서 다시 십일조를 내는 레위인들의 십일조를 다루고 있다.

십일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얻는 생활수단으로서의

소득과 기업인만큼 중요한 것이다.(21:24,28)

 

그러나 십일조 제도는 단순히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기업과 삶의 주인이심을 택한 백성들에게 알리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하신 거룩한

제도라는데 의의가 있다.

 

1.기원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1/10 준데서 시작된다.( 14:17-20)

야곱도 소득의 1/10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있다.( 28:2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의 조상들과 역사가 깊은 십일조를

출애굽 당시에 다시 언급하시고 구체적으로 설명,제도화 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배려는 제도의 기원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기 위한 조치였다( 3:7-12)

 

2.성경의 기록

 

모세 율법 가운데에서 십일조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은 27:30-33,

18:21-32, 12:6-12. 14:22-29등에 나온다. 이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취하는 모든 산물, 곡물,과일,가축 등에서 1/10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해야 함을 밝혔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있다.(대하31:5,10:37-39;12:44;13:12,

3:10, 23:23, 11:42)

 

3.종류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세가지로 구분된다.

 

. 일의 십일조( 18:21-24)-성전에서 봉사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일반백성들이 소출의 1/10 바치는

 

. 이의 십일조( 14:23-27)- 성전에 가져가서 잔치용으로 사용

(돈으로 바꾸어 가져갈 있고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있게

허용)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는 ,성도간의 교제와 관련지어짐

 

삼의 십일조 ( 14:28-29, 26:12-13)- 안식년을 기준하여

3년과 6년에는 이의 십일조로 잔치를 하지 않고

성에서 모아 가난한 자와 고아 그리고 과부를 돕는 구제비로

사용, 용도만 다를 이의 십일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님

 

이때 책임자는 이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 거짓없이 사용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해야 되었다.( 26:13-15)

 

 

4. 유대인들의 헌금 정도

 

유대인들은 여기 언급된 십일조 외에도 첫열매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바쳤으며 일명 예물이라고 하는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양털 가운데 일부를 제사장에게 주었다

( 18:4-5)

히브리인의 주석인 미쉬나에 의하면 소득의 1/40-1/60 정도로

바쳤다고 한다.

 

한편 제일의 십일조는 예물을 제외한 나머지 양의 1/10 ,

그리고 이의 십일조와 삼의 십일조는 또한 앞의 헌물을

제외한 것의 1/10이었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물은 성막건축

특별한 목적으로 바치는 예물( 35:20-29) 제사 제물을

제외하고도 소득의 20% 이상에 이른다.

 

5. 십일조의 영적의미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댓가성 물질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며 인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고 베풀어주신 물질에 감사하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자발적으로 드리는 올바른 신앙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 스스로

정하신 법칙에 따라 인간에게 시간과 물질의 일부를 특별히

구별하여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칠일 가운데 하루를 바치는

안식일이 시간에 대한 기준이요 의무조항이라면, 소득의

십의 일을 바치는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기준이요 의무

조항이다.  그러나 이는 7 가운데 하루만 혹은 소득의

 1/10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율법의 중한 의와 인과 신을 따라서 이러한 규례의
올바른 준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법으로 정하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바침은
모든 시간과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청지기에
불과함( 25:14-30)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올바른
십일조 헌물관을 정립하여 청지기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의 관계를 모르면서 율법과 은혜를 논하는 성경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빠져 율법폐기주의를 성경 진리라 여기는 분들이 늘어가는 이런
시대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귀한 글을 이렇게 올려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계시의 점진성을 고려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유기적, 통전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특히
율법처럼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서로 나뉘어 기록된 경우에는
율법의 본질이 바로 생사화복, 선악을 명시 규정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법,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믿는 자들을 의로
교훈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기초위에 율법의 양면을 통시하여야
성경적으로 균형잡히고 바른 율법관을 정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성교단과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신학이론은 율법 폐지론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율법 완성론이고 기성교단과 교회에서
수용하는 신학주의는,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율법주의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오만방자하게 율법 폐지와 무용론을 주장하는 율법폐기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진리(하나님의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 율법성취주의(롬 3),율법을 법있게
쓰는 율법선용주의 (딤전1),곧 하나님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 순종주의입니다(신 30).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기에 율법을 지킬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믿음에서 난 의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명하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성령의 뜻을 좇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좇아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서 세울수 있는 법이지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빛의 자녀들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치고 돕고 인도하는 진리의 영이 바로
성령이고 하나님의 자녀 곧 빛의 자녀들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아 교훈하는 책이 바로 신구약으로 완전온전케 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성경의 목적이 기록된 딤후3장 참조)

율법의 근본은 하나님 사랑이고(신 6) 율법의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명하는 계명이고,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폐하거나 금하는 법은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계시와 교훈은 하나님을 믿으니 율법과
선지서에 예언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고 율법이 명하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행위에 의지하지 말고 믿음에
의지하여 좇아 의의 법에 이르라는 교훈이고 그리스도의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없이 하거나 헛되게 하는 법이 아니라 완전케 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말씀이 구약의 말씀을 완전케 하였듯)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 10:16>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롬 2>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딤전 1:8>

율법(성문화된 율법이 없는 자들에겐 양심법)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있는 법이고 사람은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전 12/롬 2/고후5) 다만, 하나님의 은혜 아래
곧 믿음의 법(은혜법,복음법 곧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에서 그 영혼이 해방되어
죄의 주관을 받지 아니하고 결코 정죄함이 없는 신령한 복이 있기에 정죄심판에서
벗어나 저마다 일한대로 받는 상급심판이 적용되는 것입니다(고전 3)

성경에서 율법이 있다는 것은 율법 준행의무와 율법에 따른 심판이 있다는 의미로
(롬,약 참조)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육신에 있고 행위에 속하여 율법의 저주아래,
죄와 사망 아래 죄의 종으로 매였다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영에 있고(롬 8:9) 믿음에 속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의와 생명의 주관을 받으며 의을 성취할 의 종으로 매여 있다는 의미로
구분되어 기록되었으니 성경적으로 구분되어 기록된 것을 구분하여 성경말씀으로
성경이 해석되게 하지 않으면,율법에 대한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여도 율법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함이듯 법의 제정자요 해석자요 변역자요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율법 아래 나시고
율법 아래서 율법의 형벌을 다 받으시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신 것임.

모세 율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계명의 법입니다. 모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고 믿음의 주, 속죄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요,율법 외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계명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고
있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령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굳게 성취되도록,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모세율법이 믿음의 때가 되어 육신으로
오신 믿음의 주 곧 온전케 하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완전케 되어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언약하신 복음의
말씀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분리됨
없이 또 차별없이 믿음에서 난 의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의 구원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되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가운데 굳게 세워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약성도에게 주어져
있듯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믿음 법)이 함께 하여 완성된
하나님의 법으로 신약 성도에게 주어져 있음을 인지하여야 왜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섬기나 육신으로는 마음이
원치 않는, 율법이 아닌 불법 곧 죄의 법을 섬긴다라고 하였는지,
왜 신약성도인 바울이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고전 9:21> 라고 하고
though I am not free from God's law but am under Christ's law
being not without law to God, but under the law to Christ
though not being without the law of God but under the law of Christ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하였는지
Do we, then, nullify the law by this faith? Not at all! Rather, we uphold the law.
Do we then make void the law through faith? God forbid: yea, we establish the law.

왜 신약성도를 요한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 설명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서로 연결됨을 깨닫게
됩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Then the dragon was enraged at the woman and went off to
make war against the rest of her offspring -- those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hold to the testimony of Jesus.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

This calls for patient endurance on the part of the saints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remain faithful to Jesus

율법에 대한 성경의 점진적 계시를 적용하고 유기적 통전적으로
해석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론과 연결되게 성경적인 율법관을
설파하는 신앙의 선배들 예를 들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나 아멘넷에서
오랫동안 바른 글들로 유익을 더하고 넷상에서 다양한 신학적인 질문에
성경적인 답변을 해오신 박신 목사님 같은 분들의 주장에는 귀를 닫고

믿음에 의지하여 좇으면 의와 생명의 법이 되고 행위에 의지하여 좇으면
죄와 사망의 법이 되는 율법의 양면성,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섬기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성도의 상태를 통시하지
못하고

성경이 율법이 있는 것(준행의무 있음)과 율법 아래 있는 것(죄와 사망의 저주
아래 있음), 율법주의(은혜에서 떨어지는 주의)와 율법성취선용주의
(은혜 아래서 믿음으로 행하는 주의)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도,

그 이유를 간과하고 그 차이를 구분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법을 오해하고 성경말씀과 함께 가지 못하는 율법관을 설파하는 거짓
성경교사들의 주장에 귀를 열면

마치 기존의 정통교단과 교회가 미처 깨닫지 못한 영적지식을
새로이 깨달은 것 마냥 기독사이트를 돌며 복음진리를 호도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을 하는 그릇된 열심을 보이며 각 사이트에서
율법 논쟁을 촉발하고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소란케 하게 됩니다.

은혜를 언급하여도 행위에 속한 율법 준수를 구원의 전제 또는
궁극적 조건으로 삼으면 결국 교회가 경계해야 할 율법주의이듯
그리스도의 율법을 언급하여도 그리스도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
폐지나 율법무관,무용성을 복음의 전제 또는 궁극적 내용으로
삼으면 결국 교회가 경계해야 할 율법폐기주의라는 사실을 알아야
율법에 대한 양대 오류에서 벗어나 성경적으로 균형잡히고 바른
율법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을지라도 은혜로 받는 구원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으니 전형적인 율법주의는 아니다 또는
모세 율법 폐지나 무관,무용성을 주장하고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말하고 있으니 전형적인 율법폐기주의가 아니다
라는 식은 결국 성경에서 벗어난 반쪽짜리 불완전한 이론에 대한
비성경적인 궤변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으니 구약의 모세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고
율법은 구약 성도와는 관계가 있을지라도 신약성도와는 상관없으며
신약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율법만 지키면 된다는 분들은 하나님의
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모르고 그 뜻과 명령도 모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계시에 무지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유대인에게 먼저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폐하고 그리스도의 율법을 새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언약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온 세상 각 족속 나라에 주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굳게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모세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이고 그렇기에 모세율법이 기록된 구약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율법이
기록된 신약의 말씀이 함께 하여 온전한 성경으로 신약성도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계시와 교훈은 바로 신약성도에게 바로
그것을 교훈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

성경 말씀을 통해 성경에 기록된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연약하고 무익하고
아무것도 완전케 못하는 계명의 율법이란 것이 무엇인지,그것이 폐해진 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 것이 세워지는 율법의 변역을 통해 율법이 완전케 되었다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로마서의 믿음으로 율법을 폐할 수 없고 도리어 굳게
세운다는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자가 된다는 말씀은
율법의 계명 하나만 어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율법적 원리를 통해 율법적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교훈하기 위한 구절임이 그 전후 문맥을 통해 분명해지는데

그 구절을 오해하여 도출한 율법 단일체론으로 율법은 단일체라 일부만 폐하거나
일부만 적용시킬 수 없으니 전부 폐하거나 적용시키려면 전부 적용시켜야 한다고
하는 율법폐기주의자들은 성경이 율법의 제사직분을 분리하여 페할 것 폐하고
새로 세울 것 새로 세우는 율법 변역과 율법 재해석을 통해 강화시켜 완전케
하였음을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믿지 못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이 율법중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규례로 정하여
이방인 성도들에게 지키게 하였다는 사실이나 바울이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하고 디도에게는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한 사실들을 두고도 율법은
단일체론 운운하며 율법적 할례를 받게 하였으니 또 폐해진 율법의 규정
일부를 지키게 하였으니 은혜에서 떨어져 율법 아래로 돌아가게 한 것이라고
할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과 구원의 복을
누리며 살았던(롬 4:1-12) 구약 유대인 성도가 여호와의 율법 (the law of the LORD)
을 즐거워하고 섬기며 성취하며 찬양하였듯 (시편 1편 ,시편 32편,시편 119편,합2)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과 구원의
복을 누리며 사는 신약 성도도 유대인 이방인 가릴 것 없이 함께 하나님의 법
(the law of God)을 즐거워하고 섬기며 찬양하고 살 수 있습니다(롬 7).

하박국과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구원원리가 다르지 않음을,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 ,특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예표된
복음의 법, 은혜의 법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성취되어 나타난
것임을, 바울이 구약 말씀을 통해 그 서신서에서 기록하여 설명하고 있고
또한 복음의 법 은혜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어느 언약안에서건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기록하여
교훈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난 의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폐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율법 폐함을 정당화 하려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핑계하는 이론과 주의가 있다면 바로
그런 이론이나 주의가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와 함께 다른 복음을
전하고 복음진리를 호도하는 이론 주의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에게로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가 어떻게 율법에 자유하게 되었고 율법의 무엇에 자유하게 되었는지
(롬 6),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여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옮겨지게 된
자들, 행위에 속하여 율법의 저주아래 있다가 해방되어 믿음에 속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옮겨지게 된 자들, 곧 육신에 있지 않고 행위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하나님께 종이 되고 의의 종된 자들에게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의 뜻을 좇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통해 교훈하고 있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율법아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율법완성-
성취선용론인지 아니면 은혜와 그리스도로 율법을 핑계하여 믿음으로
율법폐지-무용폐기론인지 성경 말씀으로 검증해 보기를 율법 폐지
무용을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으로 기운 분들에게 제안해 봅니다.

By: 이정숙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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