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죄를 보는 것과 예수님을 보는 것

1.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게 하는 십자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우리가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고 교제할 때뿐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이 없이 죄를 영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영혼은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죄책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보혈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를 따로 떼어 놓고 오직 죄만을 바라보고 죄만 독대할 경우, 죄는 인간이 마주 대할 수 있는 대상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도 섬뜩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의 사악함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완전한 용서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처럼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가장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우주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지옥의 모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의 그 무한한 깊이를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선포하고 가르치는지요! 예수님의 그러한 십자가 죽으심이 얼마나 보배롭고 강력한지를 체험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의 무한한 깊이를 알고 십자가의 죽으심이 얼마나 보배롭고 강력한지를 체험해야만 풍성한 위로를 누릴 수 있고 온전한 거룩에 도달할 수 있으며 견고한 소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요소이며, 사실상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기에 결국 우리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다. 죄의 짐이 완전하게 제거되었습니다. 모든 죄의 짐이 예수님께 전가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의 짐을 다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는 영원히 잊혀진 바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죄의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의 손이 그렇게 옮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그렇게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예수님은 항상 우리의 죄를 담당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은 우선 우리의 죄가 완전하게 사함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사 겟세마네 동산에서 깊은 슬픔을 맛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셔야 했던 그 죄들을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않도록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는 자신의 죄를 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확실하고 행복하며 소망스러운 죄 사함과 용납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 속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전에는 결코 죄를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며, 죄의 존재와 죄책과 권세를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사악함과 죄책과 저주받은 상태를 알아야만 비로소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하며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악한 것인지를 가장 깊이 각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책과 압제와 저주로부터 얼마나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구원받았는지를 가장 분명히 확신하게 됩니다.

그림에서 평행선으로 음영을 나타내는 해칭(hatching)이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인상적이듯이, 어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죄와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를 균형있게 바라보는 이런 믿음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의 많은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삶입니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십자가 아래서“ 중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82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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