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홍인규

 


율법은 바울 신학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것은 바울의 신학과 윤리의 여러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주제이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을 공부하는 데 절대 필요하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Schoeps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복잡한 교리적인 이슈”이다. 그 난해성은 주로 바울의 율법관에서 나타난 외견상의 모순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을 부정적으로 말한다. -때로는 아주 냉혹하게. (1)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갈 2:16; 3:11; 롬 3:28). (2) 율법은 약속보다 열등하다(갈 3:15이하). (3) 율법은 범법함을 (생산하기)위해서 주어졌다(갈 3:19). (4) 율법은 죄를 더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롬 5:20; 7:5, 8-13; cf 고전 15:26). (5) 율법은 생명을 공급해 주지 못한다(갈 3:21). (6)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갈 2:19; 롬 7:4).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갈 3:25; 5:1 롬 7:6). (7)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롬 10:4). 등등.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1) 율법은 거룩하고 (롬 7:12), 영적이다(롬 7:14). (2) 율법은 지식과 진리의(구체적) 표현이다(롬 5:20). (3) 계명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롬 7:10; cf 갈 3:12). (4)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을 세운다(롬 3:31) (5) 모든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갈 5:14; 롬 13:8, 10; cf 갈 6:2; 롬 8:4) 등등.

 

그러므로 지금까지, 특별히 지난 20-30년 동안에, 바울과 율법에 대하여 막대한 양의 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엄청난 학자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의견의 일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더욱 더 많은 다양한 의견들만 생산되었다. 모든 의견들을 여기서 다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현재까지 제안된 것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만 소개하겠다.

 

1.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사용된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을 구분하거나(Burton, Cranfield, Moule, Ladd),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분하거나 (Haufe, Kaiser, Schreiner), 또는 모세의 토라와 메시야 토라 사이를 구분하여(Davies, Longenecker. Stuhlmacher) 바울의 율법관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2. 어떤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불일치(inconsistencies)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진술들을 발전적인 구도(developmental scheme) 안에서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 Drane, Huebner, Wilckens에 의하면, 바울의 사상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에 로마서를 쓸 때 사이에 의미있는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는 데 반하여, 로마서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적 부정에서 긍정으로 발전되었다고 이해한다.

 

3. Sanders는 갈라디아에서 로마서로 직선적인 발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로마서에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내적 긴장과 불일치가 있음을 인식한다. 예를 들면, 롬 1:18-2:29에서 바울은 우주적인 죄를 주장한다. 그러나 2:14-15, 25-29에서는 어떤 자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보고 있다.

 

Raeisaenen은 Sanders보다 더 과격한 입장을 취하여, 바울의 율법 신학에서 모순과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율법의 계속적인 유효성, 성취 가능성 등.

 

4. Dunn은 Raeisaenen와 Sanders의 견해에 만족치 못하고, 그들이 바울의 저작의 (서신의) 사회적인 문맥과 그 당시의 문맥과 그 당시의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의 온전한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Dunn에 의하면,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구분하는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우월의식을 공격하고 있다).

 

5. 이상의 모든 주장에 반대해서, Westerholm은 바울에 대한 Luther의 이해를 복원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은 생명을 이해서 “doing"(순종)을 요구한다(갈 3:12; 롬 10:5; 레 18:5).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상의 모든 견해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바울과 율법이란 주제는 이해할 만한 해결을 위해서 과학적인 탐구(연구)를 요구하는 문제이다.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바울 서신의 각권에 들어 있는 율법에 관한 진술에 대하여 완전하고 철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의 각권은 그것의 독특한 수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상황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복잡성 때문에 필자의 연구는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때때로 로마서와 다른 바울 서신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I. ν?μο?에 대한 바울의 이해

율법은 헬라어로 ν?μο?이다. 이 ν?μο?는 갈라디아서에 32번 나온다. (롬 72번). 갈라디아서에서 ν?μο?는 때때로 정관사와 함께 (? ν?μο?, 11번), 다른 때는 정관사 없이 (ν?μο?, 21번) 나타난다.

 

Lightfoot에 의하면, ? ν?μο? 와 ν?μο?는 의미의 차이 없이 서로 바꾸어 사용된다(갈 3:11-12, 23-24; 롬 2:23-27).

 

Blaeser에 의하면. 정관사의 존재와 무는 다음과 같은 언어학적인 규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ν?μο?가 소유격으로 사용될 때는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갈 2:16; 3:2,5,10). 둘째로,, 전치사구에서 ν?μο?는 보통 정관사를 동반치 않는다(갈 2:19, 21; 3:11, 23; 4:4, 5, 21; 5:4, 18). 예를 들면, ?πο ν?μον ?ν ν?νω, 그러므로 ? ν?μο?는 ν?μο?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ν?μο?는 갈라디아서에서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압도적으로 가리킨다(3:17; cf. 4:24). 그러나 예외가 있다. (1) 3:21b는 가정적인 진술인데, 거기서 두 번 사용된 ν?μο?는 any divine law를 의미한다(비록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divine law의 최고의 예로 생각했겠지만). (2) 4:21에서 ν?μο?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갈의 이야기를 지칭한다.

 

5:23b에 나오는 ν?μο?를 많은 학자들은 예외적인 범주에 포함시킨다(Burton, Guthrie, Moo, Yates). 5:23b를 읽으라.1 그러나 필자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갈 5:18-23에서 바울은 성령과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5:18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 아래”는 모세의 율법의 저주 아래를 의미한다. 5:18의 선언의 기본적인 사상은 5:23b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육체의 일에 반대되는 성령의 열매를 나열한 후에(5:19-23a), 5:23b에서 바울은 κατ? τ?ν τοιο?των ο?κ ??στιν ν?νο?라고 말한다. 이 헬라어의 문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율법은 이러한 것들(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을 반대하지 않는다”가 된다. 그 이유는 5:14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온 율법은 성령의 주요한 열매인 사랑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cf. 롬 8:4). 그러므로 갈 5:23b의 ν?νο?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또한 Bultman, Gutbrod, Bauer, Fitzmyer, Raeisaenen과 같은 학자들은 갈 6:2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법”을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5:14에서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 “온 율법”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6:2의 “서로 다른 짐을 지라”는 5:14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명령의 구체적인 표현 그 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의 complete unit 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바울이 ν?νο?를 항상 단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의식법, 시민법, 또는 윤리적인 법 사이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갈 5:3에서 바울은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율법 전체”는 5:14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 가운데서 완성이 되는 “온 율법”과 동일하게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 전체를 하나로 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모세의 율법을 바울은 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것들은 시내산 언약의 의무, 예속시키는 능력(세력),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다.

 


 

II.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

1. 율법은 구원(입회)의 조건이 아니다.

갈라디아 지방에서 활동한 바울의 대적자들의 주 issue는 누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방 갈라디아인들을 아브라함의 언약의 국외자(outside)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 대적자들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는 믿음 외에 할례와 율법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분명히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믿음을 수단으로 한 구원과 행위를 수단으로 한 구원과를 대조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와 율법을 이방인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추가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새 언약의 시대에는 누구든지 믿음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것은 즉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필요 충분 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다 할례와 율법을 더 요구하는 것은 믿음을 불 충분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효화하고 하나님의 절대 은혜를 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기의 율법관을 제시하고 있다.

 

율법은 구속사에서 여러 기능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에 관한 한, 율법은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의도된 적이 없다. 바울은 갈 3:6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칭의는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드는 것은 지극히 권위가 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갈 3:6에서 창 15:을 인용하고 있다.2

 

대적자들은 율법의 선재(pre-existence)를 전제하여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해석한다. 시련의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표현되는 데, 이것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시험 때에 가장 극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렇게 대적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적 성취(meritorious achievement)로 이해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righteousness)의 실제 행위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창 15:6을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말은 창 15:5의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리라고 확신했다는 뜻이다.3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 수용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어떠한 선행과도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면 율법은 430년 이후에 주어졌기 때문이다(갈 3:17)4.-여기서 율법 선재 개념은 부인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롬 4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믿음은 행위와 반대 개념이다(롬 4:2-4).5 그것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롬 4:5),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롬 4:5, 17)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이루어지기 힘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롬 4:18-21).6 이러한 과격한 믿음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위와 같은 아브라함의 예에서 바울은 3:7에서7 믿음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테제를 도출해 내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들은 그의 참 자손이다는 것과 믿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윈리는 새 시대에 이방인에게도 적용된다. 왜냐면 갈 3:88-여기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칭의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유한 자들은 누구든지(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없이) 아브라함과 함께, 즉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것은 구속사의 초두부터 믿음만이 하나님의 정하신 칭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Howard는 갈 3:7(또한 갈 3:9)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구절에서 믿음이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한 Hays는 갈 3:7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란 구가 3:11에 인용되어 있는 메시야적인 구절인 합 2:4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믿음이 메시야의 신실성이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이와 같은 의견들은 바울의 논쟁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다. 여기서 여러 가지 반대 주장을 제시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3:7의 첫 단어인 ??ρα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 헬라어 단어는 추론적인 불변화사인데, 그것은 3:7이 3:6에서 추론된 statement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3:7의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행위가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인간의 행위이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Howard나 Hays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튼 아브라함과 똑같은 성격의 믿음으로써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3:1-5).9 여기서 그들이 성령을 받은 방법은 ?εκ ?αλο?? π?στε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헬라어는 많은 해설가들을 당황케하고 있다. 그 이유는 ?ακο?나 π?στι?나 모두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ακο?는 능동적인 의미로는 듣는 행위, 또는 수동적인 의미로는 들어지는 것(즉 메시지 또는 보고)을 가리킨다. 한편 π?στι?는 능동적인 의미로는 믿는 행위 또는 수동적인 의미로는 믿어지는 것(즉 기독교 메시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가까운 문맥이 그 헬라어 구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한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갈 3:2, 5에서 ?ακο? π?στεω?가 ??ργα ν?μου와 대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ργα는 율법을 준수하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ργα와 평행 관계를 이루고 있는 ?ακο?가 똑같이 인간의 행위(즉 듣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ακο? π?στεω?라는 구에서 π?στι?는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갈 3:6의 초두에 나타난 부사 καθ??에 특별한 관심을 모아야 한다. Louw와 Lida에 의하면, 이 부사는 사건과 상태에 유사점을 나타내는 표시물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받음과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은 같은 성격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 갈라디아 사람들은 ?εκ ?αλο?? π?στεω?로 성령을 받았다. 이 평행적 관계는 ?κο? π?στεω?라는 구에서 π?στι?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κο?와 π?στι?를 모두 능동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ακο?는 듣는 것을 의미하고 π?στι?는 믿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듣고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것처럼,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경험이다. 왜냐면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최초로 반응을 보일 때, 그들은 모세의 율법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받음은 그들이 갈 4:6의10 말씀처럼 아들의 영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의롭다하고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케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은 동일한 사건이다. 사도행전에 근거해서, 구원받고 그 후에 성령을 받는다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갈 3:8에서 인용된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창 12:3의 우주적인 약속이 성령을 받음으로 성취되었음을 본다. 이와 관련하여 갈 3:14하반절에서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의 복의 참여하는 것이 성령의 약속(=약속된 성령, 이미 성령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을 받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평행 관계 역시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약속된 성령의 수여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약속의 성취는 갈 3:6에 함축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무수하리라는 약속의 성취로 자연스럽게 성취된다. 만약 이방인(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들)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여 그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수많으리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우리는 성령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앞에서 언급한 두 약속의 성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약속들은 성령의 약속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아래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재해석한 것이다.

 

갈 3:14에서11 성령과 관련되어 ?επαγγελ?α(약속)라는 단어가 처음으로(물론 갈라디아에서) 사용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단어는 다음에 따라오는 pericope들에서 자주 나타나면서 중심주제가 된다. (3:16, 17, 18, 19, 21, 22, 29). 이것은 3:14에서 언급된 약속과 3:16-29에서12 취급된 약속 사이에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3:16에서 언급된 약속들은 땅에 대한 약속들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 이유는 3:16의 κα? τ? σπ?σματ? σου(네 자손이라)라는 구가 땅에 대한 약속들과 관련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창 <LXX> 13:15; 17:8; cf. 12:7; 15:7; 24:7). 3:16이하에서도 다른 약속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한 약속이 계속 바울의 염두에 있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그 땅은 원래 가나안 땅을 가리켰다. 바울이 볼 때, 그것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세계를 의미한다. 롬 4:13을 보라.13 이 땅에 대한 약속은 3:6, 8에서 언급된 다른 두 약속과 날카롭게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세계를 소유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가족 안에 수많은(3:6)14 이방인들(3:8)이15 포함됨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약속 또한 성령의 선물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성령의 오심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의 성취이다.

 

만약 이방 갈라디아인들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럼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에 참여하였다면, 그 구원의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믿음에만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약속들을 상속하기 위해서 할례와 율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선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만이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자손이 되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한 구원의 수단이다. 믿음은 율법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첫 시도가 끝난 후 두 번째로 주어진 길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결코 의도된 적이 없었다.(CF. 루터교파와 세대주의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대조시킨다. 아담-아브라함-모세-새언약).

 


 

2. 율법은 시내산 언약 안에 계속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다.

갈 3:10-13은16 이방인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을 담고 있는 3:8과17 그 약속이 성령의 선물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3:14과의18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3:10-13은 어떻게 아브라함의 복(즉 이신칭의)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자. 그럼으로써 3:10-13은, 특별히 3:10과 13은 바울의 율법 신학의 새로운 차원을 계시해 주고 있다.

 

갈 3:10은 율법의 저주에 대한 문제를 소개하고 있다(3:10을 보라).(우리는 이미 이 절을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3:10의 ??ργα ν?μου(우리 말 성경에는 “율법의 행위”로 번역되어 있음)는 전통적으로 율법의 요구에 순응한 행위로 이해되었다.(Moo; Raeisaenen; Fung; Westerholm).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최근에 여러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Burton, Bring, 그리고 Cosgrove는 ??ργα ν?μου가 율법의 유대적인 오해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ργα ν?μου가 항상 칭의의 조건인 믿음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표현을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율법주의적인 율법준수로 해석한다. Full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ργα ν?μου는 선행을 근거로 해서 축복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을 매수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ργα ν?μου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cf. Bultmann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로써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행위로써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이 말 자체는 옳다). 그러나 바울은 3:13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율법의 오해로부터의 구속이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갈 2:16, 21; 3:11; 5:4에서 ??ργα ν?μου가 율법과 맞바꿔 쓰여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ργα ν?μου를 시내산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의무의 총계로서의 율법과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롬 3-4에서 τ? ??ργα το? ν?μου와 평행관계에 서 있는 ??ργον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은 ??ργα ν?μου를 율법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Dunn은 갈 2:1이하, 11이하; 4:10; 5:2이하; 6:12-13에서 제기된 특별한 이슈들을 주목하면서 ??ργα ν?μου를 일반적인 선행으로 이해하지 않고 할례, 음식법, 그리고 특별한 축제일과 같은 율법의 특정한 준수로 이해한다. Dunn에 의하면, 이러한 특정한 율법 준수는 이방인과 구별된 유대 공동체의 독특성을 드러내 주는 “Jewish identity makers"로서의 역할을 한다.(cf. Tyson, Heligenthal, Lambrecht, Hamerton-Kelly).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율법의 의식적인 조항들만 주창한 것이 아니라 전율법의 순종을 요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ργα ν?μου가 교체되어서 사용된 것은 ??ργα ν?μου가 단순히 율법의 특수한 준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시사한다. 게다가 롬 3-4에서 τ? ??ργα το? ν?μου와 기능적으로 동등한 ??ργα는 의식적인(cultic) 율법 준수아닌 일반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Gaston은 ??ργα ν?μου와 대조되어 사용된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faithfulness를 가리킨다고 전제하고 ??ργα ν?μου는 주격적인 소유격, 그니까 율법이 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Gaston에 의하면, 율법은 능동적인 세력으로서 저주, 죄, 그리고 죽음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 또한 잘못된 전제위에 서 있다. 위에서 주장한 대로 갈 3:1-14에서 칭의와 관련된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인간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ργα ν?μου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롬 3-4에서 τ? ??ργα το? ν?μου와 병행되어 나타난 ??ργα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ργα ν?μου를 율법에 순응행위로 이해한 전통적인 해석이 여전히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3:10상반절은 율법 순종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3:10상반절의 진술에 대하여 10하반절에 인용된 신 27:26은 그 이유를 제공한다. 이 신명기 인용은 율법 순종 불가능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Drane, Bruce, Moo, Schreiner. Gundry, Lambrecht).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바울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 (1) 율법을 완전히 순종치 못한 사람은 다 저주를 받는다(10하). (2) 그러나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다(암시된 전제). (3) 그러므로 율법 순종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10상). (enthymeme).

 

그러나 Sanders는 이러한 일반적인 학설을 반대해서 3:10에서 바울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논거들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Sanders의 설득력있이 없는 모든 논거들을 취급하지 않고 (관심있는 사람들은 내 논문을 보라). 그 중에서 흥미있는 것 하나만 소개 비판하겠다. Sanders에 의하면, 빌 3:6하반절은 율법이 완전히 성취될 수 있음을 말한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바울이 율법을 조금의 흠도 없이 순종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 3:6을 이해할 때 그것은 개종전의 자신에 대한 바울의 평가이다.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율법 순종이 완벽했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물론 그의 율법 순종이란 자신이 실패에 대하여 성전에서 속죄 제사를 드린 것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밝은 빛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무서운 죄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안에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자신의 종교적 윤리적 파산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존재했던 율법과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새롭게 깨달은 것을 포함한다(cf, 롬 7). (이러한 바울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믿기 전에는 제법 의로운 것처럼 생각했으나, 주님을 만난 후 엄청난 빛이 우리 마음속에 밀고 들어와 숨겨진 모든 죄가 드러나는 경험을 한다.). 그러므로 Sanders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갈 3:10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은 여전히 안전하다. 롬 1:18-3:20과 7:1-25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나 Sanders는 이 로마서 구절들에서조차 바울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Sanders의 논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이 칭의의 수단이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의 이유는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e.g,. Wilckens, Moo, Huebner). 이 말은 누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면, 그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 더 나아가서 그것은 율법과 믿음 공히 칭의의 수단으로서 서로 경쟁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견해는 바울의 율법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약속보다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은 약속을 폐하지 못하고(갈 3:17) 약속을 반대하지도 않는다(3:21). 또한 바울은 갈 3:18에서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의 약속에 참여하는 수단으로서 결코 계획된 적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계획을 취소시킬 의도가 단 한 번도 율법에게 주어진적도 없다. 갈 3:11에 의하면,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12은 계속해서 율법은 믿음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원칙적으로 칭의의 대안이 아니다. 만에 하나 어떤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 소개한 Bultmann의 주장은 옳다.

 

우리가 갈 3:10-13에서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을 제대로 이해할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여야 한다 : 왜 율법은 그것을 완전히 순종치 못한 사람들을 저주하는가?(이미 우리는 이 문제를 논의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논의의 일부분을 좀 더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바울은(이) 범죄자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신 27:26를 인용할 때 히브리 원문에 나타나 있는 “이 율법”을 갈 3:10하반절에서 “율법 책”으로 대치함으로써 그 신명기의 저주를 전 모세의 율법에 적용시켰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야웨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공동체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야웨의 특별한 관계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 야웨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은혜로 약속하시길(창 17:7)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야웨는 후에 이삭과 그 다음엔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족장과의 언약 때문에 야웨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출애굽 이야기는 실제로 이렇게 시작된다. 출 2:4이후. 출에굽이라는 위대한 구원 사건을 통하여 야웨는 언약에 신실하심을 보이시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입증하였다. 그 후 그는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어 자기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니셔티브(initiative)로써 먼저 설립되고, 그 후에 율법이 선포되었다. 환언하면, 언약이 율법을 선행한다. 이것은 즉 율법이 언약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임을 말한다. 율법은 언약의 설립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언약을 맺는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에의 순종은 언약을 설립하기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이것은 율법이 언약의 의무임을 뜻한다. 율법준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안에 머물도록 한다. 갈 3:12에19 인용된 레 18:5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 “산다”는 말은 오는 세계에서의 삶을 가리키지 않고, 언약안에서의 삶,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이미 주어진 생명이 계속 이어진다-이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은 생명의 축복을 향유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축복이 언약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Noth는 말한다. “사실 신 28에 포함된 축복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 순종으로 새롭게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미 주어진 언약과 그것 안에 들어 있는 축복이 계속 유지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경험한 언약 백성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cf. 순종-보상, Bultmann의 말을 기억하라). 그러나 율법 위반은 언약의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저야 할 충성의 포기이다. 그것은 즉 율법을 파기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저주를 초래한다. 이 저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저주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언약 안에 존재하는 모든 축복의 몰수를 의미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가져온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Noth가 말한 것처럼 “순종과 불순종, 축복과 저주는 양자 모두 똑같은 차원 위에 서 있지 않다.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개의 선택 가능성이 아니다. 율법 준수는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보상도 요구할 수 없고, 다만 언약에 속한 축복이 계속 유지된다. 반대로, 범법과 그 결과인 저주는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cf. 국방의 의무).

 

바울이 볼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이것은 갈 3:10,13,22,23; 4:4-5에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Sanders는 바울 당시 유대인은 율법 안에 있는 속죄 수단들(즉 제사와 회개)이 범죄를 속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건의 빛 아래서 그러한 속죄 수단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만약 그것들이 완전한 것들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바울이 그러한 속죄 수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임박한 파멸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스라엘 위에 놓인 율법의 저주를 제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갈 3:13에서 일인칭 복수 “우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유대인은 모든 민족의 대표 역할을 함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유대인을 구속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우주적인 결과, 즉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는 갈 3:8에 인용된 창 12:3에서20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우주적인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을 본다.

 

이제 바울은 갈 3:10-13에서 율법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언약의 의무이다. 그것은 결코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완전히 지켜진다해도, 율법에의 순종은 단지 언약과 그 안에 있는 축복이 계속되게 할뿐이다. 그러나 율법 위반은 저주를 불러 일으키고 그 범죄자를 언약에서 추방시킨다.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십자가 위에서 종식되었다(cf. 롬 10:4)21.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례없는 구원의 행위로 새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율법의 이해는 어떤 율법주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똑같은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다른 바울서신에도 나타난다. 롬 10:1-10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의와 하나님의 의이다(3절). 전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10:5)이고 ; 후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10:6)이다. 이 둘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Ridderbos, Beker, Wilckens 등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의, 즉 율법에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의 율법주의적 준수에 기인한 이스라엘의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에서는 바울이 율법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의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힌트가 없다. 또한 바울은 10:2에서 실제로 율법에 대한 열심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Dunn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의는 이스라엘만의 의, 그러니까 언약의 의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Dunn은 롬 10:3에서 사용된 ??δο?(one's own)를 “peculiar to me"(나에게 독특한 또는 고유한)의 의미로서 ”mine"(and not yours)로 이해한다. 그리고 στ?σα?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로 보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세우거나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율법에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롬 10:5에서 레 18:5를 인용한다.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Dunn에 의하면 이 레위기 구절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의무의 전형적 표현이다.” 이것은 행위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하지 않고 언약안에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의, 즉 언약의 의는 율법을 행하고 그 언약 안에서의 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이란 자기 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의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대속하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세우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중단되었다(롬 10:4). 여기서 τ?λο?는 종지 또는 종료(goal)를 의미한다.

 

빌 3:9에도 똑같은 구원사적인 대조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울의 의(율법에서 난 의)와 대조적인 하나님의 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난 의)이다. 바울은 전자를 그리스도를 아는 빛아래서 “해(loss)"로 여긴다(3:8). 롬 10:3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이처럼, 여기 율법에서 나온 바울의 의도 전통적으로 인간의 업적에 근거를 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해석되었다(Bultmann, Beare, Ernst). 그러나 문맥에서 그 의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다는 암시가 없다. 오히려 3:7은 그것을 ”유익하던 것(gain)“이라고 불리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3:5-6에서 율법에서 난 의를 다른 언약적 특권들(즉 할례, 이스라엘에 속함, 율법에 대한 열심)에 포함시킨다. 이것은 그 의가 율법주의적인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아니라 언약의 의(covenant-righteousness)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율법은 언약의 의무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바울의 대적자들이 이방 갈라디아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자손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했지만, 그들도 또한 율법을 언약의 뼈대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순종 덕분으로 선택되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선, 그리스도는 율법을 확인하고 시내산 언약을 강화하기 위해 온 새로운 모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언약을 파괴했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위에 놓인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럼으로써 새언약을 수립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바울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행위 의(work-righteousness)의 종교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Sanders는 1977년 그의 저서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그 유대교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언약 종교라는 것을 아주 설득력있게 입증하고 있다(cf. Neusner).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유대교는 Babylonian exile 이후에 율법주의적인 종교로 변질되었다).

 

요컨대 갈 3:10-13은 바울이 모세 언약의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율법은 언약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고 언약안에 머무는 조건이다. 그러나 율법은 범죄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이러한 율법의 이해는 롬 10:1-10과 빌 3:9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율법과 언약과의 관계에 관한 한, 갈라디아에서 활동한 바울의 대적자들과 1 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도 기본적으로 바울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3.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독특성의 심볼이다.

최근에 율법에 대한 바울의 비판의 핵심은 율법의 사회적 기능이다는 주장이 상당한 세를 형성해 가고 있다. Dunn이 이러한 유행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cf. Helilgenthal, Watson. Gordon). Dunn에 의하면, ??ργα ν?μου는 유대인의 독특성을 나타내 주는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특정한 율법준수를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identity를 결정하는 율법의 기능을 공격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3:10에서 말한 율법의 저주라는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이스라엘에게만 제한시키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Dunn의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비록 흥미가 있지만, 많은 약점이 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주장한 대로 ??ργα ν?μου는 율법의 어떤 부분만 행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전체를 요구하는 순종행위이다. 둘째, 율법에 대한 바울의 공격은 Dunn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바울이 저주하고(3:10.13), 범죄를 생산하고(3:19), 예속시키는(3:23이하)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 또한 율법을 죄의 세력(3:22), 마귀의 세력(4:3,9),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반대되는 육체의 세력과 관련시킬 때, 그는 전 율법을 염두해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율법의 그러한 민족주의적인 이해로 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서 경건치 못한 민족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자연적으로 boundary maker(표시) 역할을 하는 율법을 소유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데 있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 악한 세상으로 부터의 종말론적인 구속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Dunn의 학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사회학적인 기능에 대한 암시가 갈라디아서에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갈 2:15에서 바울은 이방인을 유대화시키려는 베드로에 반대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제거하기에 앞서 일단 유대인의 관점을 수용한다.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유대인은 원래 이방인을 죄인 취급하였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니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완전히 율법밖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ο?ι ?αν?νοι 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율법의 백성으로 간주하였다. 왜냐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때문에 그것을 지킬 엄숙한 의무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율법은 원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묶으려고 계획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의 순종은 필연적으로 이방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불경스러운 우상 숭배의 관습과 습관으로부터의 분리를 포함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 7:1-11과 에스라 10:11에서 율법에 순종하라는 명령과 불경스러운 이방 민족과 분리하라는 명령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호소는 암시적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이웃 백성들로부터 분리하라는 요구이다. 이처럼 원래 언약의 의무로서의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과 구분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우리는 ??ργα ν?μου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율법의 특정한 준수를 가리킨다는 Dunn의 의견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의식법 준수가 유대인의 독특성을 유별나게 특징적으로 드러내 준다는 Dunn의 주장에 동의한다. 왜냐면 도덕법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될 수 있는 데 반하여 그 의식법은 이스라엘에게만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2:3에 언급된 디도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받았고, 2:11-14는 안디옥에서의 issue가 유대 음식법임을 말하고 있으며, 4:10은 선동자들의 설득으로 갈라디아인들이 받아들인 것은 Jewish calendar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 특별히 음식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유대교의 identity symbol로서 기능하였다. 그것은 엡 2:14-1522에 언급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새 시대를 도래케 함으로써 그 벽을 허물어 버리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유대인 위에 놓인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심으로써 새 언약을 세우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까지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와 무할례, 그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의 옛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구별시키는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은 소멸되었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이다.

 


 

III. 예속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율법

1. 율법과 죄

이미 말씀 드린바와 같이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방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할례와 율법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으며, 또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믿음으로 성령, 즉 아브라함의 약속의 실제적인 성취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3:18에서 유업이 율법에 근거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바울이 볼 때, 율법은 약속을 폐할 능력이 없다(3:17).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3:21). 오히려 그것은 약속 성취의 길을 예비한다. 율법은 원래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이스라엘이 위반하자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구속하셨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었다(3:13-14). 이 성취와 함께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폐지되었다. 이리하여 율법의 시기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 일시적으로 제한된다.

 

이 시점에서 바울은 구속사에서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3:19a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3:19b에서 찾아진다 : τ?ν παραβ?σεων χ?ριν προσετ?θη. 여기서 χ?ριν이란 전치사는 목적 혹은 이유를 뜻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범법을 목적으로)범법을 위하여)”, 그러니까 범법을 생산하거나 자극하기 위하여라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범법함을 인하여”, 그러니까 범법함을 처리하거나 방지하기 위하여라는 뜻이 된다. 후자의 뜻은 토라를 죄로부터의 방지를 위한 울타리로 이해하는 유대적인 전통과 일맥상통한다. Keck과 Lull은 이 견해를 취한다. 그러나 갈에서나 다른 바울 서신에서는 이 의견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첫 번째 견해가 바울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e.g. Cranfield, Eckert. Betz, Ebeling, Fung). 그들은 그 근거로서 롬 3:20; 4:15; 5:13, 20 ; 7:5.7-24; 고전 15:56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갈라디아서 자체에서 충분한 근거를 차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갈라디아서가 그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충분한 인디케이터들(indicators)을 제공한다. 첫째, 3:8-14를 보면, 약속은 율법이 선포되어지기 훨씬 저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 약속은 율법의 저주를 제거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 약속이 주어졌을 때 율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특별히 범법)이 전제되었다. 이것은 율법이 범법을 생산함으로써 약속의 성취를 돕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지킬 능력을 주었다면, 율법은 약속을 분명히 취소시켰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율법의 예속시키는 능력을 주목해야 한다. 3:23을 보라. 여기서 묘사된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는 4:3-9에서 마귀의 세력 아래 있는 노예 상태와 병행되어 나타난다. 율법의 이러한 부정적인 성격은 범법을 생산하는 율법의 기능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범법(παρ?βασι?)가 법 용어로서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 공포된 법을 범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롬 4:15과 5:14에 의하면, 아담과 모세 사이에 ?αμρτ?α는 있었지만 παρ?βασι?는 없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παρ?βασι?는 율법이 온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τ?ν παραβ?σεων χ?ριν를 “법범함을 인하여”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번역은 율법 없이도 범법함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χ?ριν를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3:19은 율법은 범죄를 생산할 목적으로 더해졌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23

 

이와 관련하여 롬 5:20상반절을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5:20 상반절24 :ν?μο? δ?ε παρεισηλθεν, ??να πλεον?ση τ? παρ?πτωμα. 여기서 παρ?πτωμα는 παρ?βασι?보다 더 더 넓은 개념이다. 그러나 παρ?πτωμα는 마귀적 세력으로서의 ?αμαρτ?α와는 다르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 논문을 보라). Cranfield에 의하면 παρ?πτωμα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잘못된 행동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롬 5:20 상반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 율법은 이미 생겨난 죄악된 행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들어 왔다. 이 상은 갈 3:19b의 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율법이 인간의 기존 상태를 악화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갈 3:19b로 돌아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 어떻게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는가? 불행하게도 이점에 있어서 갈라디아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만약 롬 5:20a가 갈 3:19b와 기본적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롬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롬 7:5ff가 갑작스런 진술인 롬 5:20a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7:5a :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이 사상은 7:8ff에서25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율법이 없을 때, 죄(하마르티아)는 상대적으로 활기가 없었다. 그러나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오자 죄는 그 계명을 통하여 인간에게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이처럼 죄가 인간의 죄악된 정욕을 자극하도록 작전 기지를 제공함으로써, 율법은 비록 간접적이나마 범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26(이 설명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아담을 유혹한 창 3에 나오는 타락 이야기에 대한 분명한 암시적 언급이다). (나는 7:7-13)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곤경 상태를 바울이 크리스챤의 눈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 아니다27).

 

3:19b의28 결과는 3:22a에 나타나 있다.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그것이 의인화되어 기술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권위 수여 받은 전성경을 가리킨다. “가두다(συγκε?ω)”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긍정-보호, 부정-자유제한),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모든 것(τ? π?ντα)”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죄아래(?πο ?αμαρτ?αν)“이란 표현은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인 ‘죄의 속박 아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3:22a가 제시하고 있는 그림은 감옥인 것 같다. 성경은 치안 판사, 모든 사람은 죄인들, 그리고 죄수는 간수를 대표한다.

 


 

2. 율법의 속박

3:15-2229의 과도적인 부록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를 다룬 후에, 바울은 3:23-4:730에서 율법의 속박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자됨과 대조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노예 상태는 3:23과 4:4-5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상태(being. ?π? ν?μον)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3:25에서 παιδαγωγ?? 아래의 상태(being. ?π? παιδαγωγ?ν), 4:2에서 ?επιτρ?που? κα? ο?ικον?μου? 아래의 상태(being. ?π? ?επιτρ?που? κα? ο?ικον?μου?), 4:3에서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 아래의 상태(being. ?π?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와 비교되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가 죄 아?(?π? ?αμαρτ?αν. 3:22)의 노예 상태처럼 범법을 자극하는 율법의 기능의 결과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율법에 관한 여러 가지 analogies의 취지를 고려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갈라디아서에 사용된 ?π? ν?μον의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π? ν?μον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παιδαγωγ?? 와 ?επιτρ?που? 그리고 ο?ικον?μου?의 역할을 그레코-로만 사회의 배경 안에서 조사하는 것을 먼저 한다(e.g. Longenecker, Belleville, Young). 그러나 이런 순서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유들의 의의는 바울이 ?π? ν?μο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π? ν?μον이란 표현은 3:23에서31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동사 ?εφρουρο?μεθα와 분사 συγκλει?μενοι과 동반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믿음이 오기전의 유대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의 상태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있다. (1). Gordon은 율법의 기능을 이방인의 불경한 수상 숭배로 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2). Bellevile은 율법 아래의 상태를 중립적인 것으로 본다. 그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죄의 무서운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한 감시(잘못에 대한 처벌 포함)와 율법의 보호가 필요하다. (3). Young은 율법 아래의 상태를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율법 아래의 상태를 율법의 제한 아래 있는 것으로 본다. 율법의 제한이란 율법이 유대인을 이방인과 자유롭게 교제하는 것을 막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존재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23절의 율법 아래 있는 상태는 22절의 죄 아래 있는 상태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상태가 매우 부정적임을 시사한다. 둘째, 그렇다면 22절에서의 죄의 예속시키는 능력과 관련되어 사용된 “가두다(συγκε?ω)”는 동사가 23절에서도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절에서 언급된 범법함을 생산하는 율법의 기능 또한 매우 부정적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23절에 묘사된 율법 아래의 실존이 부정적인 것으로서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억압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와 같은 것임을 말해 준다.

 

율법의 속박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π? ν?μον이란 표현이 두 번이나 나타나 있는 4:4-5을 보자.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서도 being ?π? ν?μον는 노예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는 ?ξαγορ?ζω(속량하다)는 단어가 구출 또는 해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사가 갈 3:13에서 두 번이나 나오는 “우리”는 이미 주장한 대로 유대인만을 가리킨다. 3:10에 의하면, 그들은 율법 순종에 실패함으로 저주아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3:13a가 4:4b-5a와 상통함이 현저함을 보이기 위해서 13절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저주가 되셨다. 이제 이것을 4:5a과 비교하면, 우리는 4:4b-5a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 아래의 실존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실존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 즉 율법의 자주 아래 있는 실존을 묘사하기 위해서 바울은 갈 3:24-25에서 παιδαγωγ??라는 metaphor를 고용하고 있다. παιδαγωγ??는 선생이 아니라, 종으로서 주인의 아들이 어디를 가든지, 특별히 학교를 갈 때 동행한다. 그의 임무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 소년을 보호하고, 그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행동에 대해서 책망과 처벌을 포함한다. 이 παιδαγωγ??는 그 소년이 성년이 되기까지 그를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한다. 그런데 그 당시 많은 παιδαγωγ??들 중에는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례하고 거칠게 소년들을 다루는 자들이 많았다.

 

많은 학자들은 παιδαγωγ??의 주요 임무가 소년을 모든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에게 합당한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 3:34-25의 문맥에서 우리는 율법의 그러한 보호적이고 교육적인 역할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문맥은 παιδαγωγ??의 불유쾌한 속박이 metaphor의 핵심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3:24에서32 바울이 παιδαγωγ??와 율법을 비교한 것은 3:23의33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23절은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으로 παιδαγωγ?? 아래의 실존은 자유가 없는 노예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율법의 지배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Luther, Ridderbos, Cole, Suh). 그들은 3:24에서 ε?? χριστ?ν을 “그리스도에게로”라고 이해하여, 율법이 억압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 대한 열방을 창조함으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ε?? χριστ?ν의 ε??는 문맥에서 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cf. 3:19; 3:23(2번); 3:25; 4:2, 3). 또한 우리가 고려할 것은 갈 3:15-4: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전의 율법의 예속시키는 기능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갈 4:2에서34 바울은 율법 아래의 노예상태를 being ?π? ?επιτρ?που? κα? ο?ικον?μου?으로 묘사하고 있다. (4:1의 초두에 나온 λ?γω δ?가 암시하는 것처럼, 갈 3:23-29의 기본사상이 4:1-7에 반복되어 있다.) ?επ?τροπο?는 아버지나 법원이 정한 때까지 미성년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후견인이다. ο?ικον?μο?는 보통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4:1에서 바울이 “(갈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상태는 어린 상속자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자기 재산에 대하여 아무런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노예상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4:3이하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의 노예상태를 being ?π?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와 비교하고 있다.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는 4:9에서 단순히 τ? στοιχε?α 라고 불리우고 있다. 헬라 고전 문학에서 τ? στοιχε?α 는 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1) 지식의 요소 또는 근본적인 원리들; (2) 땅, 물 공기, 그리고 불과 같은 우주의 물질적인 요소들. 이것들은 이방인에 의해서 신들로 숭배되었다. (3) 그러나 Justin Martyr의 Second Apology를 보면, στοιχε?α가 천체들, 특별히 자연의 계절에 영향을 미치는 해와 달, 그리고 다른 혹성들을 가리킨다. 이것들도 이방인들에 의해서 신들로 숭배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내 논문은 8개의 다른 학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다양한 학설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1) 4:3-5에서35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와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의 노예 상태가 병행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율법과 στοιχε?α를 비교하지 않음). (2) 4:8은36 στοιχε?α가 이방인에 의해서 신들로 여김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자들”이란 표현은 이방 다신교에 대한 전형적인 유대인의 비판을 상기시킨다.(e.g. 사 37:19; 레 2:11; 5:7; 16:20).37 (3) 마지막으로, 4:9은38 갈라디아인들이 στοιχε?α의 노예로 돌아가려는 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4:10에서 천체 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칼렌다 준수를 갈라디아인들이 행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στοιχε?α가 이방 종교에서 신으로 숭배된 천체와 우주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는 Betz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을은 1:4에서39 언급된 “ 이 악한 세대”를 지배하는 마귀적인 세력을 대표한다. 이 마귀의 세력은 그리스도 이전과 밖에 있는 모든 인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στοιχε?α 밑에 있는 노예 상태와 율법 아래 있는 노예 상태를 바울이 동일시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실존 상태는 자유가 없고, 압박에 복종된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율법 아래의 실존과 육체에의 복종을 바울이 갈 5:16-18에서40 병행시키고 있음을 관찰한다. 5:18과 5:16. 여기서 육체는 성령과 반대되는 세력으로서,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이다. 이 세력에 복종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율법의 저주 밑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므로 육체에 복종하는 것과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과는 동일한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 결과 율법은 모든 범죄자를 그 저주 아래 가둔다. 바울은 이러한 감금상태를 3:25에서 소년 인도자, 그리고 4:2에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놓인 자유 없는 상태와 비교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율법 아래의 감금 상태를 3:22에서 죄, 4:3, 9에서 마귀의 세력, 그리고 5:13 이하에서 육체 아래의 노예 상태와 연결시킨다.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유대인의 실존이다. 이 특수한 노예 상태는 죄와 마귀의 육체 아래 있는 우주적인 인간의 절망 상태를 대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서문에 해당한다.

 


 

3.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갈 3:25에서 바울은 율법의 지배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식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4:4b는41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셨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진술은 하나님께서 선재하는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4:4c는42 그 아들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참된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 구속하러 온 사람들의 수준까지 낮아지심을 의미한다.

 

“율법 아래 나다”라는 말은 주석가들을 당혹시키는 말이다. Burton이나 Cole 같은 학자들은 그 말을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야 만 하는 의무를 가진 유대인의 한사람으로서 태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율법 아래”가 ‘율법의 저주 아래’를 가리킨다는 좀전의 우리의 주장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주장이 옳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탄생시에 유대인이 율법을 불순종함으로 초래한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 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성이신의 깊은 낮아지심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수치스러운 도성이신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의미 있는 단계이다. 그 도성이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 복종하고, 오해를 받고, 천대를 받고, 거절당하고, 고난을 받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으셨다.(우리는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형을 당하신 것은 그가 이미 저주가 되셨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완전히 제거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셨다(갈 3:13). 이 특수한 구속(유대인의 구속)은 우주적인 결과, 즉 죄와 마귀의 세력과 육체로부터 모든 사람의 구속을 가져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 모든 인류의 대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성이신, 고난,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완전히 동일시하셨다.

 

3:23-4:7과 병행되는 갈 2:18-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수혜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갈 2:19에서 “나”는 바울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우선적으로 대표한다. 또한 2:19의 율법은, 율법과 하나님이 대조되어 나타난 것으로 봐서, 3:23-:7에서와 같이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을 가리킨다. 이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죽었다. 이것은 율법의 예속시키는 능력으로부터 완전한 결별을 의미한다.(여격 ν?μω와 θε?는 관계를 나타내는 여격이다). 그 결별의 결과는 율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율법에 대한 죽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리는 2:19a(실제로는 2:20a가 19절에 포함되어 있음)에서 환언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당하심과의 사이에 아주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 본 대로 율법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율법의 저주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으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믿는 자들 또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율법의 저주와 그것의 포악한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구출된 것을 옛 기대로부터 새 시대에로의 종말론적인 이동이라고 이해하고 있다(cf. 1:4; 6:14). 그러므로 이 구출은 죄와 마귀와 육체와 같은 옛 세력들로부터의 구출이다.

 

이 해방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2:19b). 하나님께 대한 이 새로운 삶은, θε?를 advantage(여격)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으로 이해되었다(Burton, Ridderbos, Fung). 이 의미가 여기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바울의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2:19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과 옛 세력으로서의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 정면으로 대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새 삶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다스림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다. 2:20a는 이 삶을 새 시대의 주인인 그리스도께서 안에서 사시고 control하는 삶으로 묘사되어 있다. 5:25에서 그 삶은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에 지배를 받는 삶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IV.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1. 율법과 사랑

우리는 앞에서 율법의 두 독특한 기능인 시내산 언약의 의무와 예속시키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종식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무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어떤 학자들이(Drane, Huebner) 주장하는 대로 갈라디아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완전히 부정적인가?

 

위에서 본대로, 선동자들의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서 혼동과 논쟁과 분쟁을 일으켰다. 그럼으로써, 아주 심각하게 그들의 하나 됨을 위협하였다. 5:15은43 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5:14에서44 말하고 있다. 5:13-14에 나타난 일반적인 권고는 6:1-2에서45 상술되고 있다. 1절에서 바울은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여기서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5:14과 6:2에서 율법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대치하거나, 그것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 사랑은 완성(the fulfillment of the law)이라고 말한다. (5:14 fulfill{πεπλ?ρωται - πληρ?ω} ; 6:2 ναπληρ?σετε - ναπληρ?ω). 이것은 바울이 5:12까지 율법을 냉혹하게 비판한 것을 고려할 때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 ; 율법의 저주 ; 율법은 범법을 생산한다 ;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긍정적인 율법에 관한 진술을 앞에 나오는 부정적인 율법에 대한 견해와 관련시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Raeisaenen이 주장한대로, 바울은 자기 모순에 빠져있는가? 아니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율법과는 다른 율법을 5:13이하에서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는 율법의 다른 측면을 제시하고 있는가?

 

5:14과 6:2에서 나오는 율법의 긍정적인 진술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5:14의 ?ο π? ν?μο?와 6:2의 ?ο ν?μο? το? Χριστο?의 identity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러나 Huebner는 그것이 모세의 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Huebner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자세한 것은 내 논문을 보라.

 

그러면 6:2의 ?ο ν?μο? το? Χριστο?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에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Davies는 ?ο ν?μο? το? Χριστο?를 메시야의 법, 즉 메시야의 새로운 토라이다고 주장한다. 비슷하게 Stuhlmacher는 그리스도의 법을 시내산 토라와는 다른 시온 토라라고 생각한다. Dodd는 그리스도의 법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한다. Gutbrod, Furnish, Beker, Fung과 같은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이 5:14에서 언급된 사랑의 계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Guthrie, Raeisaenen, Hays는 그리스도의 법의 ‘법’을 은유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의 법이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모범적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ο ν?μο? το? Χριστο?가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그 이유로 우리는 5:14과 6:2이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두 진술을 똑같은 주제, 즉 사랑에 의한 율법의 완성을 다루고 있다. 이 두 진술의 주동사는 πεπλ?ρωται와 ναπληρ?σετε인데, 그들은 동의어로서 같은 어간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5:14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6:2은 특수한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조 분석에 의하면, 5:13-24과 5:25-6:10은 일반과 특수의 관계에 서있다.) 실제로 6:2의 권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5:14의 권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의 특수한 표현이다. 이러한 관찰 때문에 우리는 6“2의 ‘그리스도의 법’은 5:14의 ‘온 율법’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5:14의 온 율법이 모세의 법이기 때문에 6:2의 그리스도의 법은 반드시 모세의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온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면, 모세의 법이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성취된다, 완성된다)라는 5:14과 6:2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2을 우리는 이렇게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짐<하나의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으로써 성취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fulfill이다. 이 영어 단어는 5:14에서 πληρ?ω이고, 6:2에서는 ναπληρ?ω이다. 그러나 롬에서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8:4; 13:8) πληρ?ω만 사용되었다.

 

Schlier, Raeisaenen, Huebner, Thielman 등은 πληρ?ω가 poi?ω와 같은 의키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Betz가 올바로 관찰한 대로, 바울이 율법을 ‘행하는 것’과 ‘성취하는 것’과의 사이에 조심스런 구별을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시내산 언약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다 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갈 34:10, 12 ; 5:3; 롬 10:5). 그러나 새 언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의무 아래 있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율법을 ‘성취한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결코 명령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율법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갈 5:14; 6:2; 롬 8:4; 13:8; cf. 롬 13:10; 마 5:17).

 

Furnish와 NEB, JB, TEV, NIV와 같은 영어 성경 번역들은 πληρ?ω를 롬 13:9에 나오는 νακεφαλαι?ω(sum up)과 동등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롬 13:8-9에서 바울은 πληρ?ω를 νακεφαλαι?ω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둘째, πληρ?ω가 sum up의 의미로 사용된 예가 신약, LXX, 그리고 고대 헬라 문헌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내 생각엔, 가장 좋은 해석은 πληρ?ω를 ‘참된 의도를 충족시킨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Westerholm, Barclay).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낱낱이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율법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으로(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의 참된 목적과 의미가 사랑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말은 사랑이 전 율법을 취소하거나 대치하거나 혹은 흡수해 버린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상세한 지침이 없는 사랑은 낭만주의에 기초를 둔 막연한 관대함이나 또는 충동적인 즉석 연주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롬 13에서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말하면서 바울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라고 분명히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진술은 십계명 중 4계명의 인용 바로 다음에 따라 온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그러한 계명들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그전 13:6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비록 사랑은 율법의 계명들을 낱낱이 지키는 것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오히려, 사랑은 율법을 올바른 관점으로 조명하여 율법이 사람들에 의해서 오용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궁극적으로 사랑의 표현임을 말해준다. (공의와 사랑과의 관계, 공의는 사랑 없이도 존재,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포함하면서 초월).

 

랍비 유대교에서도 또한 우리는 사랑이 율법의 모든 계명들의 핵심으로 여겨 지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아키바라는 랍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토라 라에 있는 대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교의 이러한 입장은 바울의 입장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랍비들에게 있어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의 모든 규례들을 실제적으로 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할례 그리고 율법의 다른 조항들이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이장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갈 5:6; 6:1546(cf. 2:3이하; 6:12-13)은 그리스도안에서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2:14이하는 유대 그리스도인이 음식법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음식법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4:10은47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의 축제일들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과거 신들을 섬기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율법의 이 조항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유대적이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그것들은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강력한 유대인의 상징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Sanders는 이에 대해 바울이 아무런 이론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답을 바울의 그리스도의 사건의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저주를 짊어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도래시켰다. 이 은혜의 시대에 아브라함의 축복은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근거하여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받아 들이셨다.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바울의 “이웃”에 대한 개념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유대교 안에 있을 때 바울은 “이웃”을 동료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이웃”을 민족과 국적을 초월한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크는 것으로 본다. 그 결과, 바울은 레 19:18의48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유대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배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 그리스도인들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규례들, 즉 유대인을 이방인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율법의 조할들의 준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조항들을 지키는 것을 고집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 안에 하나의 벽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 공동체의 사랑의 하나됨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다(cf. 갈 2:14이하).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율법의 특수한 준수들을 갈라디아서와 다른 서신에서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Raeisaenen과 Sanders가 주장한 대로, 이웃 사랑안에서 완성되는 “온 율법”(갈 5:14)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이 제외된 축소된(그러니까 소우 도덕법만을 포함하는) 율법인가? 여기서 우리는 “완성”이라는 말이 율법의 모든 문자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요구의 참된 의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 율법”이 율법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갈 5:14의 진술뒤에 있는 바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예 언약에서 율법 준수는 출애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다.

(2) 새 언약에서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다(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한 측면이 아니라 그 삶의 전 내용과 방식이다).

(3)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전 율법의 종말론적인 완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비록 율법의 어떤 조항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하지 않지만 전 율법의 참된 정신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은 오직 율법의 내적 의미만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율법을 구체적인 도덕 가이드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갈 5:14에서 레 19:18을 인용한다.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사상이 또한 나타나 있는 롬에서 바울은 십계명을 13:9에서 인용하고, 1:24-27에서 동성 연예를 정죄하면서 레 18:22과 2:13을 염두해 두고 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고전 14:34에서49 여자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면서 율법에 호소하고 있고, 5:1-5에서 성적 문란을 꾸짖으면서 레 18:8과 20:11을 의심없이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바울이 율법을 그것을 민족적인 제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의 표현, 특별히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율법은 올바로 해석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표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믿는 자에게 율법을 행하라거나 순종하라고 결코 명령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히려 그는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단순히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율법 완성이 사랑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 완성에 대해서 말할 때 결코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있다.

 


 

2. 율법과 성령

갈 5:14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은 5:16-24에서 더욱 발전되고 있다. 5:16에 있는 λ?γω δ?가 이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의 완성이 궁극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의 결과임을 단언하고 있다. 외냐면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5:22).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는 사랑의 표현이다. Cf. 고전 13:4-7). “열매”라는 Metaphor가 시사한 대로 성령은 사랑의 내적 원천과 힘이다. 믿는 자의 사랑은 성령의 내적 사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리하여 율법은 성령의 능력 아래 사는 믿는 자의 삶 안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5:23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κατ? τν τοιο?των οκ ??στιν ν?μο?. 중성복수 τν τοιο?των은 9개의 성령의 열매를 가리킨다.

 

κατ?는 againinst를 의미한다. NEB와 Styler는 그것을 dealing with, with respect to, in realtion to로 이해하여 성령의 열매를 율법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로 5:18을 가리킨다. 그러나 5:18의50 under the law = under the curse of the law이다. 또 우리가 앞에서 본대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율법의 페지로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κατ? + 소유격은 dealing with, with respect to, in realtion to의 의미로 사용된적이 한 번도 없다. 또 많은 학자(Burton, Guthrie, Yates, 한국말 성경)들은 ν?νο?를 일반적인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5:23이하의 사상은 5:14과 5:18의 사상과 잘 들어 맞는다(아래를 보라). 그러므로 5?:23이하의 ν?μο?는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5:23이하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율법은 그러한 것들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즉, 율법은 그러한 것들을 반대하여 심판을 선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5:21과 비교하라). 사실,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기본 정신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5:23이하는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참된 의도를 완전히 만족시킨다는 말을 강조하는 단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자동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 5:13은51 육체가 이미 성령을 소유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윤리적인 삶의 심각한 위협임을 말하고 있다. 육체는 옛 시대의 악한 세력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정과 욕심을 소유하고 있으며(5:24),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육체의 일을 생산한다. 그럼으로써 육체는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을 율법의 자주 아래 끌어내린다(5:18). 사실, 육체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성령과 반대되는 세력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는 육체와 성령의 갈등 안으로 인도되었다. 그리하여 5:1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절은 많은 해석가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이다. 어떤 학자들은(Lightfoot, Althaus, Ridderbos, Dunn, Cole, Raeisaenen) 갈 5:17을 롬 7:14-25와52 연결시켜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묘사하는데, 그 결과는 육체가 믿는 자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Jewett, Guthrie, Arichea & Nida) 16의 약속의 빛 아래서 17절을 이해한다. 그들에 의하면, 17절은 육체와 성령의 갈등을 말하고 있는 데, 그 결과 성령은 믿는 자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17절은, 특별히 17절 이하는, 육체 또는 성령의 일방적인 승리보다는 육체와 성령의 상호 적대를 분명히 묘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17절은 “너희의 원하는 것”이 육체나 혹은 성령에 의해서 자극된 원함을 가리킨다는 어떤 인디케이터가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5:17이 성령과 육체의 갈등안에서 믿는 자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Fung, Hong). 그는 육체를 섬기든지 아니면 성령을 따르든지 해야 한다. 여기서 17이하의 ??να는 결과를 나타내고, “너희의 원하는 것”이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믿는 자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자유로운 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육체에 복종하든 아니면 성령을 따르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한다.

 

물론 이것은 승리가 온전히 믿는 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 기억해야 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이 악한 세대에서 구출하셨다는 것과 믿는 자는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함으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5:24).53 그 결과 믿는 자는 지금 성령 안에 산다(cf. 5:25).54

 

이와 같이 신학적인 바탕에 근거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5:16에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로 한 심각한 결심을 포함한다. 성령은 옛시대의 악한 세력인 육체의 세력을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자신을 성령의 능력에 맡기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한다.

 

이러한 진리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성령은 육체에 저항 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특징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생산하는 능력을 공급한다. 4:6에55 보면,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정하게 된다. 나는 이 인정이 필연적으로 그의 아들의 십자가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바울은 롬 5:5에서56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문맥을 고려할 때 subjective genitive로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더 나아가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도록 인도하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권하다고 말할 수 있다. 믿는 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이웃(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의 동료 일원을 가리킴)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희생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자기 사랑을 보여 준 것처럼, 믿는 자들은 자기 이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해진 이 믿는 자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리하여 바울은 5:18에서 만약 믿는 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다면, 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6:8b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말한다. “(갈6:8)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육체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의 혜택을 포기하고 육체 아래의 옛 노예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율법을 완성하지 못하고 육체의 일을 생산하므로, 정죄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5:21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6:8a도 동일한 선언을 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cf. 롬 8:1-4; 13:8-14).

 

그러면 이와 같은 행위 심판의 교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토록 정렬적으로 논증하고 선포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결국 부인하는 것인가? 이 두 가르침은 서로 상반되는 것인가? 그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함 법정적인 개념으로서 죄용서함을 선언받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근본적으로 언약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죄용서함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 악한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주인에게 모든 충성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와 마귀와 육체와 같은 악한 세력들이 지배하는 악한 시대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로 이동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볼 때,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이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이 세상 주관자들에게 노예처럼 완전히 예속되어 살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계속적으로 이 악한 세상의 절대 군주들에게 구원을 받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성취 불가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다스리심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이다.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생산하게 된다. 그리하여 율법은 완성된다. 이런 자들에게 율법은 정죄를 선언할 수 없다<갈 5:23이하>.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에게 주어지고, 영생의 복이 임한다<갈 6:>).

 

결론적으로 말하면, 비록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시내산 언약의 의무와 예속시키는 능력으로서의 두 기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믿는 자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결코 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옛 언약 시대에는 율법의 모든 외적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의무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 시대에는 그것이 더 이상 효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훨씬 더 깊은 헌신, 즉 성령의 절대 주권적인 다스림에 전 삶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이웃을 사랑하도록 강권을 받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안에서 율법의 전 의도는 실현된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모든 계명은 명시적이든지 아니면 암시적이든지 사랑의 총망라적인 요구를 표현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연구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연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1. 바울은 유대 종교의 율법을 잘못 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Raeisaenen은 바울이 자기 당대의 율법을 언약의 틀에서 분리시켜 구원의 수단으로 완전히 잘못 제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이 유대교를 포함하여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대교가 율법주의적인 종교이고 율법이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되어 있기 때문이거나(전통적인 해석), 혹은 당대의 유대교가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하였기 때문이거나(Sanders), 혹은 율법이 유대종교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특수한 민족에게 한정시키는 사회학적인 기능 때문이(Dunn, Wright, Barclay) 아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범죄 때문에 그들 위에 임하였던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써(갈 3:10,13),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우주적인 구원의 약속(창 12:3; 갈 3:8)을 성취시켰으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와 더불어 새 언약을 재정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에 의하여 파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2.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관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Huebner는 바울의 초기 서신인 갈라디아에서는 율법이 전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어 있고, 반면에 후기 서신인 로마서에는 갈라디아서와는 대조적으로 긍정적인면이 많이 나타나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두 서신 사이에 율법에 관한 진화론적인 발달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권면 부분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은 모든 율법의 성취라고 말하면서 새 시대에 있어서는 율법의 유효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Huebner의 주장은 정당치 않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묘사되어 있는 율법이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는 것은 율법에 관한 바울 자신의 사상적 발달 때문이 아니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수신자와 그들의 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강조점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3. 갈라디아서에 있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취급이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Raeisaenen은 갈라디아서 자체 안에서도 율법에 대한 바울의 묘사가 서로 불일치를 보이고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이 상호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바울이 다른 관점에서 율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언약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율법 준수를 언약에 머물러 있기 위한 조건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는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율법의 역할을 존재하는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기 위하여 범죄를 산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Raeisaenen의 접근은, 비록 그의 주장이 가끔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단수하여 바울의 부유한 사상을 잡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결론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에 관한 언급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일 우리가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주제를 접근하는 데 있어서, 각 서신의 전체적인 수사학적인 구조와 상황,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과 그리고 다양한 신학적인 관점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불일치에 관한 대부분의 비판이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1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3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4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5 (롬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롬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6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7 (갈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8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10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11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2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13 (롬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15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16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7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18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9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20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21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22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3 하나님은 미혹자이신가? 어떻게 자기 백성이 죄를 짓도록 율법을 주신단 말인가? 법이란 죄를 지은자를 벌하기 위함이며 또한 법이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억제 역할을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짓게 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이 죄를 생산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단 말인가? 물론 죄를 짓게 하여 더 큰 목적을 이루신다는 의도가 있을지라도--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이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만약 율법의 기능 중에 하나가 죄를 생산하기 위함이라면 목적, 즉 메시야를 바라보게 하는 목적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이 죄를 짓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생산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죄에 속박되어 죄의 종이 되고 죄로 말미암아 죽은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하여금 죄는 우리 등뒤로 멀리 멀리 버리셨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죄를 멀리 하게 하셨다. 그런데 율법의 기능이 죄를 생산하기 위함이라면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어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죄와 범법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이고 창조 때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분명한 범법 행위이다. 이러한 범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땅에 들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범법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그 순간부터 있어 온 것이고 또한 동시에 죄는 그 범법을 타고 이 땅에 침투해 들어 온 것이다. 범법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므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최초의 죄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있어 왔고 또한 죄는 아담이 최초의 죄를 짓는 순간부터 범법은 있어 왔다.

24 (롬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25 (롬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6 계명이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인간은 죄를 지어 왔다. 즉 탐심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기 전에도 인간은 탐심을 품고 있었고 탐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를 짓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탐심의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하여--그러므로 계명이나 율법은 선하다(롬 7:12)--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죄, 즉 사단은 그 계명을 이용하여 인간이 탐심의 죄를 짓게 하였다. 그 이유와 증거는 최초의 법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사단은 아담에게 이용하였다. “정녕 하나님께서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죽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등등. 그러므로 율법이나 계명은 죄를 생산하거나 더 하거나 짓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창조 때부터 사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한 목적으로 주신 것들을 악용하여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시 인간에게 왜 선악과를 주셨는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게명을 주셨는가가 좀더 구체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즉 인간의 입장에서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것이 의문이 아니라 왜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가?이다. 왜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만드셨는가? 이는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인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동산 중앙에 있다는 것은 매일 같이 주시할 것과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드신 목적과 계명을 주신 목적은 동일하다. 만드신 목적은 인간은 피조물임을 인식하게 하여 창조주께 순종케 함이요, 계명의 목적은 그 계명을 받은 자와 수여자는 주종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은 반드시 수여자에게 순종하여야 한다. 만드신 목적과 그것을 통하여 요구하시는 것이 동일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7 즉 바울의 개종 후의 경험이나 심정이 아니다(我言)

28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9 (갈3: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30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갈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31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32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3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34 (갈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5 (갈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6 (갈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37 (사37:19)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레2: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레5:7)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 가되 하나는 속죄 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레16:20)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38 (갈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39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40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41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42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43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44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45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46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47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48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49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50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52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53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4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55 (갈4:6) 너희가 아들 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56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본문스크랩] 바울의 율법과 복음 -홍인규|작성자 이덕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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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한다 / 윌리엄 퍼킨스

 

 

설교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1) 설교는 교회를 모으고, 선택받은 모든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도구다. 2) 설교는 주님의 양무리에게서 늑대들을 쫓아 버린다. 설교는 플렉사니마 즉 영혼의 ‘유혹자’다 설교로 인해 자의적인 마음이 누그러지고, 불경건한고 이교적인 삶의 양식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회개하는 삶으로 전환된다. 고대 이교도들의 근원을 흔든 것이 설교라는 무기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14:3)

 

말씀의 사역자에게는 오직 두 가지 의무가 있다. 하나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대언이라는 말은 설교만이 아니라 기도에도 적용된다(대상25:1). 그러므로 모든 대언자의 임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목소리로(설교로)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백성의 목소리로(기도로) 아뢰는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대언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은혜로 부름을 받고 은혜 안에서 보호하심을 입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로 오게 하셨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백성에게 간청한다. 이는 우리를 시켜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18-20).

 

성경의 완전성과 내적인 연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한다.

성경은 설교의 유일한 주제이며 설교자가 끊임없이 일해야 할 유일한 밭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거룩한 진리이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딛 1:1-2).

 

성경의 본질이 가진 탁월함은 완전성 또는 순결성 또는 영원성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의 완전성은 충족성 또는 순결성에도 있다.

 

성경의 충족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완전해서 어느 것도 성경에 더하거나 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어느 것이나 적절한 목적을 위해 항시 제자리에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19: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성경의 순결성은 성경이 실수나 속임이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12:6).

 

성경의 영원성은 침범할 수 없는 특성을 말한다.

성경이 명하는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다 이루어진다(마5:18).

 

성경의 효력은 두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1. 인간의 영을 꿰뚫는 능력(히4:12).

2. 양심을 묶는 능력,

즉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 변명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한다(약4:12, 사33:22).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성경 속에 있다. 성경은 성령의 서기나 비서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교회를 위해 적절한 언어로 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우리가 성경을 정경이라 부르는 이유는 주님이 사용하는 잣대 또는 줄이기 때문이다.

정경의 도움으로 진리를 발견하고 검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모든 논쟁에 따른 판단과 최종적이며 최고의 결정은 성경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의 핵심과 본질을 다음과 같은 논증(삼단논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전제: 참된 메시야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 되실 것이며, 다윗의 씨를 통해 오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 아버지의 품에서 태어나실 것이다. 메시야는 율법을 만족시키실 것이며,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한 희생으로 자기 자신을 드리실 것이다. 메시야는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이기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에 올라가실 것이고, 때가 되면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소전제: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 예수는 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신다.

결론: 따라서 예수님은 참된 메시야이시다.

이 삼단 논법에서 대전제는 모든 예언서의 범위 내지 주된 요지이며

소전제는 모든 복음서와 사도 서신 속에 담겨 있다.

 

- 윌리엄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출처: 자기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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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율법폐기론, 도덕폐기론이 잘못된 것임을 압니다.
그렇다면, 613가지 율법 중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은 무엇이고, 더 이상 지키지 말아야 할것들은 대표적으로 무엇이며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지킬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혹은 지키지 말야아 할])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지키지만 구약의 절기는 더 이상 따르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모두 따르지만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또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을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음식을 먹습니다.

율법 중에서 지켜야할 것과 더 이상 지키지 말아야할 것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답변

구약에 언급된 율법은 편의상 언약법, 의식법, 정결법, 도덕법, 시민법으로 나눕니다. 기본적으로 구약의 율법과 새 언약 성도의 삶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연속적인 것은 이 시대에도 계속 적용되는 것이고, 불연속성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식법과 시민법, 정결법은 폐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모든 의식을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그림자는 실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골 2:17). 옛 언약의 제사에서 그려진 것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원히 가시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정결법과 의식법 그리고 시민법과 관련된 규례, 즉 씨를 섞어서 뿌리는 것이나 실을 섞어서 베를 짜는 것 또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 구분, 안식년, 희년 규정, 이자 규정, 등과 같은 것은 지금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약법과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사숭배, 살인, 도적질, 거짓말, 간음, 동성애와 같은 규정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실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법과 정결법 그리고 시민법이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규정의 영적인 의미, 그 정신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정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즉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희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희년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희년의 정신, 즉 이웃 사랑, 평등, 자유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현대인은 이자를 받아도 상관이 없지만 그 기본 정신은 이웃 사랑입니다.

제사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은 모든 악으로부터 완벽한 대속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이것을 성찬식에서 기념합니다. 구약의 의식적인 제사는 무의미하지만 그 의미는 산제사로 나타납니다(롬 12:1: 히 13:15-16; 벧전 2:5). 우리는 감사의 산제사를 드리면서 찬양의 제물로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고 고백합니다. 은혜의 시대에 우리는 이전의 제사 의식의 연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 후에 준비된 축제의 음식은 가난한 자와 이방인, 과부와 고아에게 혜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감사의 산제사를 드리라고 부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율법의 명령을 처음 받은 이스라엘과 같이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갈 3:29). 이 해석의 중요한 원리는 계시역사의 전진입니다.

고신대학교 구약학
신득일 교수 드림

 

크리스챤 신문

개혁주의 마을/Grace

 

요한복음을 쓴 이유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아들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에 대한 조명을 위해 요한복음을 설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와 형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복음서로서, 주님의 모든 모습과 신자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적용적 설교)

요한복음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고, 그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오류들을 지적합니다. (가현설, 인간예수, 외경복음)

그래서 요한은 대체 이들을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 이들에게 정확히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자문하며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해 주목해봅시다.

그는 그저 일반적인 위로의 편지를 쓰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좀 더 편하고 행복하고 위로해주는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칭찬과 위로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말을 들으려고 교회를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위로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위로는 진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성도를 위로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이끌어가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하기위해 가르침을 중시합니다. 교리입니다.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습니다.

 

지식과 삶은 마치 십계명의 두 돌판과 같습니다. 첫 돌판이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두 번째 돌판이 인간에 대한 계명이라면, 이 순서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먼저고, 그 지식에 따른 삶으로의 귀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과 삶은 함께 가야 합니다.

이 말은 교리에서 출발하여 삶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리에서 생명이 나오고 체험이 나오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요한의 위로이며, 우리 상황에 합당한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마침내 그를 찾고 알고 놀라고 경탄하게 될 때까지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위로요 여러분에게 필요한 도움입니다.”

 

Q> 설교에서 교리를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데, 이것이 청교도들이 흔히 해왔던 조직신학적 교리설교와는 어떤 차이를 갖는 것인가? (예를 들어 예수의 신성이 성경의 메시지에 나왔을 때, 이에 대한 조직신학적 설교를 말함)

 

Q> 소위 ‘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어떠한 자리에 서게 될까? (즉 복음만 설교하고, 율법에 대한 부분을 도외시한다면, 구원받음만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하지 않음)

 

첨부파일 1. 요한복음을 쓴 이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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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자각의 필요성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에 그 권위를 두고 있고 교회사에서 강력한 증거를 얻는다. 모든 시대에 복음주의 신앙이 강력하고 활기를 띠었던 곳에서 죄의 자각의 필요성에 대해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는 죄의 자각이 있느냐를 그 신앙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영혼이 진정 구원을 얻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영적 절망과 하나님으로 인한 거듭남과 죽음, 지옥을 경험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만일 모든 것(그들의 경험)이 즐겁고 조용하며 열렬하며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영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들이 설사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왔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들을 인정하지 말라. 크리스천의 유일한 시금석이자 확실한 영분별인 인자의 표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기를 통해 이런 믿음이 널리 퍼졌다. 대표적 청교도 설교자 로버트 볼턴은 단언했다.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 율법으로 상처받은 후 복음으로 치유받는 과정을 걸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먼저 겸손해야 한다.”

 

17세기 후반 복음주의 신앙과 영성이 다시 쇠퇴하고 있을 때 존 오웬은 1674년에 죄를 깨닫게 하는 설교가 학식 높은 신학자와 신실한 복음 사역자들의 주된 특징이었던 시대를 회고했다. “그들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회심시키는 데 유용하고 열매 맺는 사역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은 비난받고 거부당하고 있다--- 죄에 대한 자각, 죄의식과 그에 대한 통한,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저주와 진노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번민은 어리석은 상상이고 육체적 질병의 영향이며 인간의 무질서한 죄에서 일어나는 광적인 관념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교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설교가 세상에서 사라져 갈 무렵그것은 복음주의 부흥 속에서 다시 강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휫필드는 깊은 상처에서 치유받은 새로운 설교자 세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죄를 자각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위로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점에 대해 지나치게 부주의했고 자주 너무 급하게 위로하려고 했다. 주님이 그런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는 진리의 말씀을 더 옳게 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구한다.”

 

19세기 초반 미국의 두 번째 각성을 일으킨 부흥이 있고 난 뒤 1844년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썼다. “내가 아는 한 율법에 의한 죄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일반적으로 근대 부흥에서 우세했다.” 그것은 1859년에도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번 죄의 자각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흥은 수시로 죄의 자각을 모르는 자들이 결단하는 통로가 되었다. 1882년에 스펄전은 썼다.

 

때로 우리는 현대 부흥 운동의 많은 부분이 축복보다는 저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수천 명을 자신의 비참함을 알기도 전에 평안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탕자를 아버지 집으로 데려왔지만 그가 결코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 방식의 죄의식을 멸시한다. -- 그 결과 사람들은 신앙 속으로 뛰어들어왔다가 다시 뛰어나가고 만다. 그들은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에 왔고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 안에 머물다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를 떠난다.”

 

그러나 스펄전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영적 쇠퇴가 뒤를 따랐다. 복음이 율법 없이 선포될 때, 믿음이 회개 없이, 천국이 지옥 없이 선포될 때 부주의한 영이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복음주의의 본질은 율법을 설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복음주의의 일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심리학도, 이단 종교도 한다. 복음이 다른 모든 가르침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선포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된 문제,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법 앞에서 죄인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다.”

 

이에 대한 많은 사람의 반응은 로이드 존스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회심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교회로 가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이안 머리, 오래된 복음주의-새로운 영적 각성을 위한, pp 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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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혼동/마이클 호든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또다른 방법은,그리스어에서 서술법과 명령법 차이다.

서술법은 우리에게 사실 그대로를 말해 준다.예를 들어,고양이가 매트위에 앉아 있다는 식이다.

명령법은'고양이를 매트 위에 데려다 놓아라.'처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명령법이지 직설법이 아니다

 

명령법 자체(그리스어에서는 수월하게 분별된다)가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나는 참으로 더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논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권면,심지어 그렇게 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이

복음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나에게 어떤 것을 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때,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의

강력한 힘을 조금도 희석시키지 않고 받어들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대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될수 있는 모든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를 상실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범한 자들로 정죄 받는다 .

우리의 의는"더러운 옷"(사64:6)과 같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칭의)로 옷 입혀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중생)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하신다(성화)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율법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러나 오직 복음만이 율법의 법조문과 죄와 죽음의 지배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율법과 복음이 각각 단순히 십계명과 요한복음 3장16절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덕적 기대를 보여 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구원 하시는 목적과 행동을 보여 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복음이다.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복음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많은 권면,명령,그리고 명령법들이 있다,이런 것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복음은 아니다.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복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지침도 필요하다.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야 깨끗해 질 수있고,우리의 죄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이것들이 우리를 감사가 넘치는 순종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율법(행위들)에 부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에 대해서라면 복음(믿음)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을 얻는 수단으로 착각함으로써,우리의"선행"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가장

공격적인 죄가 되고 만다.그러나 오직 믿음만으로 이 선물을 받을때,

믿음은 즉시 의의 열매를 생산해 내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좋은,거룩한 그리고 적절한 것들 조차 복음과 섞여버릴 때는,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즉 끝없이 펼쳐지는 드라마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中

부흥과 개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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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법은 본성의 법과 다릅니다 / 스테판 차녹

 

 

1) 마음의 법은 회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법입니다

마음의 법, 마음에 새겨진 법은, 본성(nature)의 법칙과 전적으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단지 올바른 이성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이 행위언약의 법이라면, 마음의 법은 은혜언약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지만, 이 은혜의 법은 특정한 사람들 속에만 있습니다. 본성의 법은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마음의 법은 그의 회심 때에 주어졌습니다. 본성의 법에는 중보자에 대한 믿음이 없지만, 은혜의 법에서 믿음은 중요합니다. 본성의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죄와 불신앙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죄와 불신앙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본성의 법은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육신으로 태어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법은 성화의 한 부분이 되어서, 몸의 지체의 법과 싸웁니다. 물론, 본성의 법도 사악한 범죄들에 대항해서 전쟁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 자체에 대항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방향 제시의 법'으로서의 마음의 법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과 같이, 마음의 법, 또는 은혜의 법은, 죄에 대항해서 싸웁니다. 죄는 마치 자기가 사람의 인생을 지도하고 질서를 잡아 주는 것처럼 흉내 내고 있는 하나의 법인 것입니다.

 

2) 타락 이전에는 본성의 법과 마음의 법이 같았습니다

마음의 법은 원래 본성의 법이었던 그 법의 회복입니다. 처음에 아담의 마음속에 새겨졌던 그 법을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은, 아담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다가 잃어버린 그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니고 있었던 그 의는 율법의 의였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 둘째 돌판에 있는 인간에 대한 의무를 포함하는 의, 그리고 (아마도 그 거룩과 의, 두 가지 모두에 대하여) 더해진 진리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과 인간에 대한 그 의의 표현 방식과 목적에 있어서 회복된 마음의 성실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창조되었을 때에 마음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법이 희미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속에 이 법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을 통해서 영혼 속에 새롭게 새겨지는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다른 법을 두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나의 법'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법, 곧 아담과 우리의 선조들에게 주셨던 '나의 법'을 말합니다. 마음에 새겨지는 법은, 아담의 본성에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인간이 이 법을 지워 버리고, 그분의 의를 잃어 버렸으며, 오히려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적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법 대신에 죄의 법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죄의 법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나님의 법을 그 합당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3) 마음의 법은 마음속에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모든 법과 모든 명령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명령을 돌판에 새기셨던 것처럼, '마음의 판(심비, 心碑)'에도 전체의 법을 새기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참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참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율법의 한 부분만을 새기시고 나머지는 새기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명령의 반쪽만을 새기시고 나머지 반쪽은 새기시지 않고 남겨 두어서, 흠이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이 전체의 법이 아니라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한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괴물에 가까울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형상을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본성 속에 다른 어떠한 것과 일치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 둘은 전체의 본성에 있어서도 일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본성이 그 법의 본성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음의 법은 외적인 법을 필요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외적인 법은 여전히 하나의 규칙으로서 가능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내적인 법은 외적인 규칙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법은 구칙 자체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법은, 성령의 손길에 의해서 외적인 말씀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법의 진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법을 의뢰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어떤 인간적인 법률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개념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의 행동이 그 법의 문자와 목적을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죄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규칙이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진 은혜의 법이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규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만이 그 기준이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법은 비록 그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외적인 율법과 조화를 이루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규칙이 되려면 기록된 율법과 같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 속에 기록된 법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 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이 말씀에는 주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약속되어 있으며, 또한 내적인 가르침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이것은 복음의 빛이 비춰지는 시대에 있어야 할 지식의 풍성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지식은 유대인의 제의(祭儀)들의 여명(黎明) 속에서 희미하게 비춰졌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복음 아래에서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기 이전의 유대의 박사들보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을 전혀 무의미하게 보셨던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셨다면 왜 사도, 목사, 교사 등을 세우시고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겠습니까? 이러한 내적인 가르침의 약속이 외적인 가르침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법을 새기는 것은 문자로 쓰인 법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적인 법을 확립하고 진전시키며, 또한 존중하게 만듭니다. 외적인 법은 목수가 집을 지을 때 규칙으로 삼는 집의 모델과 같습니다. 그 규칙에 따라서 목수는 마음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에 맞춰서 집을 짓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가지게 되는 그 생각이나 그림은 그에게 이미 주어져 있던 외적인 규칙에 맞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수는 그 규칙을 항상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법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어떠한 조건 속에 있든지, 자연 상태에있든지 은혜의 상태에 있든지, 아니면 영광의 상태에 있더라도 순종해야 할 법인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 162~167p 에서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의 자녀됨: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받게 되는 이중 은총 / J. 토드 빌링스

 

 

.....요한 칼빈은 사도 바울과 요한의 글에서 강조되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 안에 거함의 개념들을 토대로 하여, 이 새로운 신분이 어떤 것인지 잘 조명해 주고 있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께 입양되어 우리가 받게 되는 구원의 실체는 우리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고, 그 연합 안에서 받게 되는 이중은총에 있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사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스도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중은총을 받게 된다. 첫째로는,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재판관 대신 은혜로운 성부 하나님을 하늘에 모시고 있게 되는 은총을 말한다. 둘째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받게 되는 성화의 은총을 가리키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경되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Inst. 3. 11. 1.)

 

칼빈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대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의 구별된, 그러나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은총을 받게 된다. 칭의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되며, 성화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덧입어 점진적으로 새롭게 재창조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받게 되는 이 이중은총은 완악하며 자족적인 노예상태에 있던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하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사모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주는 일차적 은총은 법정적인 것, 법정에서 판사가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결정을 변경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여잡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옛 사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양자된 새로운 신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입은 우리에게 주시는 바 그리스도의 의라는 이 은총 외에 우리가 첨가할 수 있는 노력은 아무 것도 없다.

 

칼빈의 당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이 자기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의로움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공로 외에는 없다고 가르치는 오늘날의 MTD(도덕적 치유적 이신론(理神論)) 신학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칼빈은 우리의 구원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드러내는 "선한 행위"가 필연적으로 따르지만, 그렇다고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칼빈이 생각할 때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성화 역시 의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우리의 구원은 용서(칭의)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성화)도 포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화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과 같은,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서 보이는 "우리 편에서의 반응"이 아닌 것이 된다. 칭의가 그러하듯 성화도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칭의와 성화 사이의 논리적 상관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구별은 존재하지만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칭의와 성화 사이에 시간적 간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를 받으면서 다른 은총은 받지 않는 경우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 두 은총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은총을 분리됨 없이,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것은 거부하면서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죄의 사면만을 받으려는 것은, 킬빈 자신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그리스도를 둘로 찟으려는 시도"라 하겠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을 입양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하나님 자녀라는 법적 신분은 받아들였으나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도 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모습으로 빚어 나가시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예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 듣기와 읽기, 성찬 참여, 기도와 교제, 궁핍한 자들을 위한 섬김에 이르기까지. 지면상의 제약으로, 나는 칼빈이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는 기도성만찬, 이 두 주제에 집중하려고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와 성만찬은 모두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덧입도록 우리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이중은총적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 안에서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으며," 그러므로 우리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은 우리가 필요한, 그러나 결핍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 안에 풍성하게 있다는 것과, 성부께서는 그 풍성함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차고 넘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넘쳐나는 샘에서 우리의 결핍된 것들을 길어 올리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향한 초점, 그리스도를 향한 이런 갈구야말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바탕인 것이다. 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 입양 절차의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서, 성부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자격으로 기도에 들어갈 수 있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간구를 예수님의 기도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맛보는 기도의 삶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칼빈도 말하고 있거나와, 우리는 기도할 때에 그저 우리의 힘과 노력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이 입양 절차의 보증이 되시기에,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한껏, 목 놓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주저함이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잊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기도할 수 있는 담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십사 언제나 성령님을 우리 앞에 붙잡도록 하자. 우리만 놓고 보면, 두려움 때문에 이 땅의 임금에게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입양의 주관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근심을 가슴으로 받아주시고자 부드럽게 부르고 계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하늘의 임금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에 우리가 받게 되는 이중은총의 맥락에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칭의를 통한 사면과 새로운 삶이라는 은총을 거저 주고 계시다는 사실의 반증이 된다. 우리의 의와 새로운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우리 양심은 잠잠해지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거리낌 없이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과정 가운데,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과 전능하신 왕의 자녀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수납에 대해 가르침에 있어서, 그리고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바, 성찬에 있어서 떡과 잔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가시적이 되었다는 내용을 칼빈이 언급할 때, 입양의 언어는 그 중심에 위치한다. 자신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에서 성찬론을 다루는 칼빈의 첫 문장이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종으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단번에 우리를 그 가족으로 입양하셨다"고 입양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될 정도이다. 입양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의 수혜자가 되었다. 킬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에게 관심을 가지신다. 그렇기에 자녀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시기 위해 우리 생 전체를 통틀어 우리를 먹여 기르시는 역할을 책임지신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풍성함 가운데 우리를 계속해서 양육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온 입양아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친히 증거하신대로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이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참되고 복된 영원한 생명을 받는 영적 만찬"을 베푸신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의 유일한 음식이 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의 안에 거하는 것과 말씀과 성찬을 먹음으로 양분을 공급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단순 모방하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묻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삶에 합쳐져야만 한다. 이 합쳐짐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의미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이렇게 해서 입양과정과 입양된 자녀로서의 새로운 삶의 효력이 발생한다. 하나님께 입양된다는 것, 그것은 영성훈련이나, 빈민구제, 이웃 사랑을 하는 등의, 우리 노력을 통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맺게 되는 열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for you) 이루신 사역의 열매(칭의)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in you) 하고 계시는 일(성화)의 열매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은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이 복음이 전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흉내 내거나 예수님이 하셨을 법한 일을 하는 우리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기쁜 소식은 실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신 새로운 삶 속으로 참여해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J. 토드 빌링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3. 하나님의 자녀됨: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받게 되는 이중은총)에서 발췌, 71~81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마태복음 18장 이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스베가스의 여름은 바퀴벌레와 귀뚜라미의 천국이다. 이 놈들이 밖에서만 돌아다니면 좋은데
집 안에서도 유유히 돌아다녀서 가족들의 비명을 종종 자아내게 만든다.
하루는 식탁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는데 겁도 없는 바퀴 한녀석이 징그러운 더듬이를 더듬거리며 식탁위로 기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가족 모두 괴성을 지르며 필자를 쳐다 보는데...

"빨리 안 잡고 뭐해!" 하는 표정으로... 왜 집안의 벌레는 꼭 내가 잡아야 하나?
언제나 남편 이겨먹는 마누라도 있고 덩치도 필자만한 큰 아들놈도 있건만... 이런 생각을 하는 찰라 둘째딸이 "아빠!" 하고 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기에 눌려 식탁 위에 놓인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신중을 기해서 내리치는 순간 간발의 차로 상황을 알아차린 바퀴가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비껴 맞고 말았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는 바퀴... 냉장고 옆틈새로 들어가 버리고 가족들의 실망속에 눈총을 한몸에 받으며 밥을 다 먹을 즈음... 아니...그 놈이 또 기어 나왔다. 겁도 없이..
용맹스러운 건지 부상이 아물어서 좀 전 사건을 잊은건지.. 두번째도 실패한다면 가장의 위신 문제이기에 심기일전 하여 신문지도 집어던져 버리고 맨손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한 번에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손바닥으로 덮어버렸다.
놈은 즉사했고 시체를 확인하자 가족들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고 도망갔다.
변기안으로 장례를 치러주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바퀴의 한계구나.."

모르긴 몰라도 바퀴나라의 율법에는 분명 "인간이 밥먹을 때는 근처에 알짱거리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계명은 바퀴들의 본성과 충돌을 일으킨다.
그것을 알고 또 실천할 수 있다면 바퀴가 아니라 바퀴 신이다.
일반 바퀴는 맞아죽는 그날까지 식탁을 배회할 것이다. 바퀴는 그렇다 치고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바퀴보다 나은가?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한다.
우리는 이 말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인정하는 척 하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이 죽을 밖에 없는 죄인이..." 하면서 죄인임을 고백하지만 막상 누가
"이 죽일 놈아!" 하고 말하면 그날 잠을 못이룬다.^^ 

우리는 우리가 연약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죄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심각성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언행을 조심하며 됨됨이가 바른 기독교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은닉하고 자신을 변호하려는 노력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의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다.

영생이 걱정이 되어 예수를 찾아온 부자청년은 영생의 방법을 예수께 묻는다.
예수는 그 청년에게 되 묻는다. "계명을 다 지켰느냐?"
그는 대답한다. "예 지금까지 다 지켰습니다."
예수는 그의 속을 휜해 다 들여다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 재산을 다 처분하고 나를 따르라."
그는 그 말에 괴로워하다 예수를 떠나고 만다.
어떤이는 말한다. 부자청년이 예수의 말대로 재산을 버리고 따랐다면 영생을 얻었을 것이라고...
정말 그럴까? 물론 그가 결코 그런 결단을 내릴수 없는 자라는 것을 예수는 미리 아셨을 것이나
예상을 깨고 그가 예수의 명을 따랐다 한들 그의 믿음을 예수는 온전히 보셨을까? 
부자청년의 평생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신있어 하는 모습에서 지금의 도덕성으로 교회봉사로 포장한 모범적인 교인들을 본다.

본질이 바뀌었는가? 아니다. 본질은 그대로이고 옷만 좀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기특한 일이나 신앙하고는 무관하다. 오히려 자신의 그 기특함이 남에게 정죄의 칼날이 될 수가 있다. 그것이 다름아닌 바리세인이다. 바리세인은 우리집 바퀴벌레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아니 우리 모두가 바리세인이요 바퀴벌레이다. 아무리 인간 밥상근처에 알짱거리지 말라는 계명이 있어도 또 그 말에 "아멘" 한다 해도 바퀴는 밥상 앞에서 오늘도 죽어간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마음이 부패하여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망각하고 적당히 개조하여 하나님앞에 의로워지려는 시도를 한다.

예수가 부자청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부자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 말한다. 그는 계명대로 도둑질 하지 않았다 말하지만 예수는 말한다. "네 탐심을 어떡할래?" 
또 그는 계명대로 간음하지 않았다 말하지만 예수는 말한다. "네 음욕은 어떡할래?"
그는 계명대로 살인도 해 본일이 없다 말하지만 예수는 "네 증오심은 어떡할래?" 하신다.
여러분은 해결책이 있는가?^^ 

인간에겐 해결책이 없다. 부자청년이야기 결말부분에 에수께서 해답을 말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이것 외에 그 어느것도 기독교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8장 8절 9절은 말한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경이 얼마나 죄에 대하여 단호하며 치를 떠는지 짐작이 가는 구절이다.
네 손이나 발이 죄를 지으면 잘라 내 버리라 말씀하신다.
실제로 과거에 브라질의 한 청년이 어느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가 고민고민하고 있을 때
이 성경구절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결단하여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
이 기사를 접했을 때 그의 행동은 어이가 없었으나 필자는 그의 믿음을 대단히 평가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역시 바퀴벌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자신이 생식기뿐 아니라 몸뚱아리 아니 마음까지도 몽땅 죄덩어리 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원래 우리 몸 전체가 죄가 없었는데 어느날 손과 발이 헤까닥해서 범죄했다면야 그 놈들만 잘라내면 천국가겠지만...^^ 우리는 총체적인 죄인이다.
다시말해 손과 발과 눈을 범죄케 한 장본인은 손과 발과 눈이 아니라 부패한 마음을 가진
그 사람전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손 양발 양눈 모두제거하고 몸뚱이만 남아도 아니 그 몸뚱이까지 제거해도 천국갈 수 없다.
그러나 제거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부녀를 사랑한 그 청년이 자신의 그것을 제거한다고 깨끗한 몸이 되어 천국갈 수 있겠는가.
죄는 자기자신이 저질러 놓고선...애꿎은...
하나님은 온전한 것만 원하신다.
계명을 다 지키고 하나를 못지키면 계명 전체를 거부한 것으로 인정하신다.
죄인인 인간이 깨끗해 지려고 더러운 부분들을 제거하고 보완한다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는 조건은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막아서신
예수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의미는 죄를 향해 퍼붇는 하나님의 저주의 융단 폭격을
예수의 등뒤에 숨어 피한다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글/essence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 월터 J. 챈트리 ('잃어버린 복음'에서 발췌)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 다시 살아난 인간 마음의 행동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하나님께서 부자 청년 안에 새 영을 창조하실 때, 그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성향을 주시지 않는다면, 즉 하나님이 자비 가운데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는 거듭남, 즉 중생의 결과이다.

 

회개도 생명의 선물을 받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31)라고 선포했다. 만일 부자청년이 회개했다면 죄 사함을 얻었을 것인데, 그럴 경우 회개 자체가 구주의 선물이다. 죄인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주권적 하나님께서 그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야 한다(겔36:26 참조).

 

부자 청년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재산을 전부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분명히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자기가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순종하지 못하도록 주님이 막으셨기 때문이 아니다.(주님은 그렇게 하도록 그에게 촉구하셨다). 그의 외부에 있는 어떤 다른 힘이 그의 회개와 믿음을 방해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회개와 믿음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의 악한 마음이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막10:21)라고 명령하는 것은 코끼리에게 하늘을 날라고 명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굶주린 사자에게 눈앞에 있는 양을 잡아먹는 대신 시금치를 먹으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부자 청년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띤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의 말씀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이 떠난 다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저 청년이 내 명령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의 본성을 바꾸실 수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드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어 자신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꾸셔야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7)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온전히 의지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 구주(救主)의 교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숨을 쉬고 걸으라고 말씀하신것이다. 부자 청년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께서 그에게 탐욕의 무덤에서 걸어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에게 도덕적 생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에게 재물을 버리고 자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 주님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간청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열매를 바라는 소망을 주님 안에 두어야 한다. 전도 대상자의 의지 또는 여타의 정신적 능력에 두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전도라는 미련한 것으로 죽은 죄인들을 다시 살리기를 기뻐하신다(고전1:21 참조).

 

 

월터 J. 챈트리의 '잃어버린 복음'에서 발췌(137-1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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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왜 무엇 때문에 믿으라고 하십니까?

김정한 ㆍ 2014-03-05 (수) 21:52    

내친 김에 하나 더 올려 봤습니다.

예수, 왜 무엇 때문에 믿으라고 하는지? 이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간에 우리 목사들이 제대로 된 복음진리를 전했는가? 정말로 복음의 기초요 핵심이랄 수 있는 예수님을 성경대로 전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께로써 그리스도 일을 하라는 사명을 받고 제자들 앞에서 십자가로 사명을 완수하신 후 제자들에게 남은 사명(하나님 나라를 땅 끝까지 전하라는)을 명하신 뒤 승천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택민인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듯 죄와 사망의 법아래 흑암에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고 하나님께로 하나님나라의 일원이 되도록 하여 기업을 얻을 자녀로 후사로 자라게 하고 세우라고 하신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런데 필자의 보기엔 작금의 목사들이 예수님을 전하되 세상에서 출애굽 시키는 구원이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를 믿으면 부요한자로 성공자로 만들기 위해 구원하고 불러냈다는 식으로 전하고 설교하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전자의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을 후사들이 되도록 하게하려면 그것은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야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속해서 살던 자신의 죄성과 행함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예수를 믿으면 부요한 자가 성공 자가 된다는 메시지는 죄악된 죄인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 메시지 대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예를 들어가며 저들처럼 되어야 된다 는 것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의 인물들을 인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신약의 예수님 중심에서 구약의 인물들 중심이 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모른다고 볼 수밖에 없고 성경의 핵심주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나라 경륜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몸으로 장성시켜라 는 엡 4:11-16절의 의미하는 바를 알고 목회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필자 역시 초창기 성경 말씀에서 목회의 길을 찾지 않고 당시에 번영복음 주창자들에게서 목회의 길을 찾으려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싶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되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잘 알았던 사도들에게서 배우자고 하고 싶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일상에도 있는 복음의 위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5:3)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인간이 휘두르는 폭력으로 인해 당하는 핍박은 서로 다르다. 하나님의 손은 공의롭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범한 죄책은 우리 영혼을 그리 유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질병이나 친구의 죽음이나 그밖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로부터 오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시련일 뿐이다.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할 때는 슬픈 울음이나 겸허함 뿐만 아니라 거룩한 용기와 확신을 가져야 한다.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5:22)

 

믿음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받는 이로 하여금 현재의 모든 사건들을 이겨내도록 해 주는 것이 믿음의 참된 역할이다. 심지어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신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당하는 시련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아닌한 그들의 슬픔에 무관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런 생각은 커다란 오류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복음의 위로라는 것도 오직 순교의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일상적인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단과 인내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다. 

 

- 토마스 맨튼,야고보중에서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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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법 없이는 자유도 없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나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항상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 이 진리는 우리가 믿음을 처음 가졌을 때나 믿음을 가진 후에나 결코 변함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의지해야만 한다. 우리의 본성이나 행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거나, 그리스도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항상 부족할 뿐이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싫어 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방법, 체계, 혹은 기준을 마련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허무한 노력을 계속하고자 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신이 되려 하거나, 좀더 나은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무엇을 얻으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려고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세운 업적과 공로를 잣대로 삼아 각자의 가치와 지위를 측정하려고 한다. 이 모든 일이 사회, 경제, 교욱 등과 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은혜의 율법이 아닌 공로의 율법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공로의 율법에 따라 행동하려는 습성에 젖어 있다.
    우리는 다만 은혜의 샘에서 생수를 마심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그분의 계명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율법폐기론은 어둡고, 혼돈스럽고 영적으로 위험한 세상에서 아무런 안내도 해 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안개와 같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와 같은 율법폐기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하나님의 계영에 순종할 때만 우리는 죄를 극복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죄의 종'(로마서 6:20-22)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과 그릇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속박된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와 야망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살아 온 생을 후회하게 된다.
    믿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율법은 믿는 자의 삶에 있어서 여전히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런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 하나님의 법 없이는 자유도 없다는 성경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벤자민 워필드, Mark. D. Baker, Bryan Chapell.   
    글/창골산 봉서방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복음, 율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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