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자각의 필요성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에 그 권위를 두고 있고 교회사에서 강력한 증거를 얻는다. 모든 시대에 복음주의 신앙이 강력하고 활기를 띠었던 곳에서 죄의 자각의 필요성에 대해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는 죄의 자각이 있느냐를 그 신앙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영혼이 진정 구원을 얻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영적 절망과 하나님으로 인한 거듭남과 죽음, 지옥을 경험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만일 모든 것(그들의 경험)이 즐겁고 조용하며 열렬하며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영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들이 설사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왔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들을 인정하지 말라. 크리스천의 유일한 시금석이자 확실한 영분별인 인자의 표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기를 통해 이런 믿음이 널리 퍼졌다. 대표적 청교도 설교자 로버트 볼턴은 단언했다.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 율법으로 상처받은 후 복음으로 치유받는 과정을 걸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먼저 겸손해야 한다.”

 

17세기 후반 복음주의 신앙과 영성이 다시 쇠퇴하고 있을 때 존 오웬은 1674년에 죄를 깨닫게 하는 설교가 학식 높은 신학자와 신실한 복음 사역자들의 주된 특징이었던 시대를 회고했다. “그들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회심시키는 데 유용하고 열매 맺는 사역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은 비난받고 거부당하고 있다--- 죄에 대한 자각, 죄의식과 그에 대한 통한,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저주와 진노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번민은 어리석은 상상이고 육체적 질병의 영향이며 인간의 무질서한 죄에서 일어나는 광적인 관념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교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설교가 세상에서 사라져 갈 무렵그것은 복음주의 부흥 속에서 다시 강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휫필드는 깊은 상처에서 치유받은 새로운 설교자 세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죄를 자각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위로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점에 대해 지나치게 부주의했고 자주 너무 급하게 위로하려고 했다. 주님이 그런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는 진리의 말씀을 더 옳게 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구한다.”

 

19세기 초반 미국의 두 번째 각성을 일으킨 부흥이 있고 난 뒤 1844년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썼다. “내가 아는 한 율법에 의한 죄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일반적으로 근대 부흥에서 우세했다.” 그것은 1859년에도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번 죄의 자각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흥은 수시로 죄의 자각을 모르는 자들이 결단하는 통로가 되었다. 1882년에 스펄전은 썼다.

 

때로 우리는 현대 부흥 운동의 많은 부분이 축복보다는 저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수천 명을 자신의 비참함을 알기도 전에 평안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탕자를 아버지 집으로 데려왔지만 그가 결코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 방식의 죄의식을 멸시한다. -- 그 결과 사람들은 신앙 속으로 뛰어들어왔다가 다시 뛰어나가고 만다. 그들은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에 왔고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 안에 머물다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를 떠난다.”

 

그러나 스펄전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영적 쇠퇴가 뒤를 따랐다. 복음이 율법 없이 선포될 때, 믿음이 회개 없이, 천국이 지옥 없이 선포될 때 부주의한 영이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복음주의의 본질은 율법을 설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복음주의의 일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심리학도, 이단 종교도 한다. 복음이 다른 모든 가르침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선포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된 문제,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법 앞에서 죄인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다.”

 

이에 대한 많은 사람의 반응은 로이드 존스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회심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교회로 가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이안 머리, 오래된 복음주의-새로운 영적 각성을 위한, pp 39-44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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