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속한 기독교?
(grunge christianity?) 존 맥아더목사

반(反)문화가 지닌 죽음의 소용돌이와 복음의 저속화

최근 복음주의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최고의 주제는 어떻게 교회가 "문화를 따라잡는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쇠퇴해 가고 있는 문명의 야만적인 면모를 닮아갈 필요가 있는가? 단지 사회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복음주의 전략가들과 약삭빠른 교회 지도층들이 조언하기를 교회는 현시대의 문화와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 당신도 분명히 이러한 토론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병 속에 담긴 메세지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현세대의 반문화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이상 목회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만일 우리가 복음을 현시대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며, 기독교를 새로운 세대에 맞게 재구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젊은 청년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시대와 발을 맞추어 가야한다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무(無)스타일이야 말로 복음의 전파에 가장 큰 위협이고 교회가 그 효력을 잃게되는 실제적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로 자신이 세속화된다는 문제를 크게 문제삼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쿨~하게 보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주류에 속한 복음주의 운동은 이미 반세기 전에 세속주의에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수십년 전에 이미 실용주의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1985년 이후 눈에 띄게 성장한 모든 유명 초대형교회들은 이 실용주의 철학위에 세워졌으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중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 주어 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 남은 중요한 문제는 정말 효과적인게 무엇이냐 이다.

대다수의 교회들은 고의적으로 문화적이고 싶어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현재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트렌드를 쫒는 신세대 교회 설교자들을 보고 있다. 그들은 모든 대중적 스타들과 내용들을 언급하고, 모든 잡다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모든 무미건조한 풍류를 쫒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속적 풍속의 변덕스러운 환상과 허망한 트렌드를 쫒는 것이다.

세속적인 설교자들은 길을 벗어나 육욕적인 의견을 표면적으로 들어내고 있다. - 심지어는 설교 가운데서 말이다. "문화"를 빙자하여 그들은 자신들도 사람들이 최근에 MTV(음악프로그램)에서 본 프로그램들을 보았노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최근 텔레비젼 드라마의 주요 주제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최신 가요와 헤비메탈을 들었으며 소위 말하는 성인영화들을 수도없이 보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유행의 최신과 과거, 앞과 뒤, 처음과 나중을 모두 알고 있는 듯이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언어들과 스타일을 도입한다. 심지어는 정숙한 사회모임에서 쓰기 어려운 저질의 언어도 서슴지 않고 쓰고 있으며 이를 강단에서 유감없이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으며 사람들이 이를 통해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한다.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은 이와 같은 사상의 대표적인 주자이다. 그는 매우 효과적인 대화창구이다. 밝고 재치가 넘치며, 영리하고, 웃기고, 통찰력이 가득하고, 세속적이며, 저속하며, 일부러 사람들을 놀래키고,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그의 구원관은 정확히 옳다, 하지만 이는 그의 세속적 취향과 더불어 더욱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애틀에 있는 드리스콜의 교회는 "저속한" 교회 음악의 탄생지이자 이러한 류의 문화들이 숨가쁘게 배출되는 근원지이다. 드리스콜의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적인 언어들은 "저속함을 지난"듯 하다. 그의 언어들과 설교들은 일부러 정제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최신 재즈음악의 가사에 나오는 저속한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날드 밀러(대중적인 작가이자 "떠오르는 교회"운동의 아이콘격인 사람으로 드리스콜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는 드리스콜에게 " 입이 걸한(cussing pastor) 목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드리스콜이 개인적인 담화에서 어떤 말을 하는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설교 몇 편을 들었으며 공정하게 평가한 결과 그는 소위 말하는 외설적인 말들-방송에서 금지된 말들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즐겨쓰는 단어와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쓰기에는 부적절한 품위가 없고 예의바르지 못하며, 원색적인 것이었다. 내가 들은 모든 메세지들 속에는 적어도 설교 단상에서 쓰기에 벗어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드리스콜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들 중에는 내가 대중적으로 언급하기에 꺼려지는 것들이 있다. 그렇기에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내 몇 블로그에서 논하여 진 바있다. 올해 초 팀 챌리는 드리스콜의 저속한 경박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그의 빈티지 지저스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드리스콜의 언어적 문제가 아니다.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에 관한 것이며 이는 사회를 쫒아 로마서 1장의 길을 따라 "문화를 따라잡자"를 목표로 삼는 것이다. 우린 우리 문화의 어두운 면에 과잉적으로 노출될 수 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오늘날 오락적 문화에 깊이 빠진 채로 영적으로 건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을 한번 다루어 보자. 세상의 가장 호감있는 유행들 중 많은 부분은 독성이 있으며 우리 사회가 죽음의 소용돌이에 더욱 휘말릴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 속에 잠겨 있을 때에는 그 효력을 즉시 알아챌 수 없으며, 그 영혼을 죽이고 파괴하는 피할 수 없는 오염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죄악적 세속의 풍류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로마서 1장 끝부분에는 이러한 자들을 정죄하고 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비록 누군가 이러한 세속주의와 함께 훌륭한 조직 신학과 대속적 구원을 결합시키고자 할지라도, 건전한 신학적 교리는 결코 이러한 실용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사악함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따라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건전한 성경적 교리는 무시되고 모욕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예에서 배울 수 있다. 그는 아레오바고(아레오바고의 뜻은 마스의 언덕, Mars Hill- 드리스콜이 목회하는 교회이름, 역자주)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했다. 사도행전 17:16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바울이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희랍의 학문을 통해 자신의 말할 바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단순한 언어를 통해 선포하였다. 또한 그의 말을 들은 청중들 중 몇은 이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18절) 이것이 바로 얘견되는 바이다. 예수님을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요한복음15:18-19)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는 우리의 세상에 대한 자세와 정당한 관계성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14-16)

주님께서는 언제나 신자들이 세상에 있을 때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들이 신실하게 살려 한다면, 세상은 핍박과 증오의 장소가 될 것이다. 결코 편안한 곳이 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우리의 성화를 위해 간구하셨다. (요한복음 17:17-19)

경건에 대한 "저속한 " 접근방식의 문제는 그것이 성화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들은 몇 편의 설교중에서 드리스콜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성화가 자신의 어깨 높이 밖에 진전되고 있지 않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대속적인 구속은 그의 제자들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표방하는 라이프스타일은 - 특히 그의 더러운 세상 문화에 대한 친근감 - 실제적으로 온전한 성화에 결코 이룰 수 없음을 보장해 준다.

나는 솔직히 어떻게 성경을 마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감히 "문화적으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사회의 저속함에 참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저속함과 문화는 우리의 삶과 정 반대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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