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새 언약적 순종 (언약과 조건) / 마이클 호튼

  

언약과 조건

 구속 언약 - 삼위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조약 - 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다윗, 새 언약의 약속은 본질에 있어 불변하며, 깨어질 수 없으며,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관계없는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영원한 언약에 있어 우리는 수혜자지 파트너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하여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며 자신의 방법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언약은 시행상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은혜 언약은 신자와 신자의 후손들과 맺은 언약이다. 은혜 언약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선택받은 것은 아니다. 즉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은 천상에 있는 이스라엘 보다 범위가 더 넓다. 광야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사용해서 동일한 은혜 언약 아래 있는 신약 시대의 상속자들에게 경고했다(히4:1~11).

 

신약 성경은 우리 앞에 최종 구원을 위한 많은 조건을 열거한다. 처음의 회개와 믿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는 견인은 '이것 없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거룩함의 부분들이다(히12:14). 이러한 거룩함은 전달되는 의라기보다는 전가되는 의인 우리의 칭의 만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되는 우리의 성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신앙고백의 표지에 의해 양과 염소가 분리될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24장). 그러나 양들은 자신들이 배고픈 자를 먹이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고, 가난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주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염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했노라고 주장했다. 거룩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되는데, 보통 우리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은 우리 영화와 분리될 수 없는 조건이다. 즉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순종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있다(히6:4~5).

 

이것은 우리가 행위 언약과 구분하고자 했던 무조건적인 약속의 좋은 소식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특히 성경이 있는 이런 중요한 경고를 받아들이는 데 대해 우리 시대에 아주 많은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조심스럽게 차이점을 다시 살피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칭의를 성화와 영화와 구별해야 한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칭의와 구원을 아무런 구별 없이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외에 다른 조건 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구원은 성경에서 넓게 이해되며 타락한 피조물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을 포함한다.

 

우리가 본 것처럼 칭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선행되는 다른 조건들이 있다. 회심한 어떤 사람의 경험을 상기해 보자. 어떤 사람은 그에게 성경을 주었고, 다른 사람은 그를 교회에 데려갔으며,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그를 회심시키셨다. 물론 세부적인 것은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조건들이며, 그러한 것 없이(인간적으로 말해서) 구세주를 아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율법을 들어야 하고, 율법에 의해 죄를 깨달아야 하며, 회개하여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 마음은 변화되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한때 거부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의 하나도 칭의의 근거나 수단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신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그들에 의해서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 칭의의 수단이라는 것이 아니다. 조건은 수단이 아니다.

 

의롭게 된 자들은 거룩하게 되며, 어느 날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엡2)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자가 아닌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된다(롬6:4~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적인 눈멂과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화되고 있는 사람만이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런 내적 거룩을 칭의와 구별해야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의롭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새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것며,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율법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과 약속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을 구별해야 한다. 율법은 명령할 수 있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다(갈3:21). 율법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 자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율법 언약에서 조건을 말하는 것은 '이것을 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라는 공식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은 언약조항의 성취에 근거해서 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 언약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분명 율법의 요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근거는 변한다.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은 우리 돌같은 마음을 살같은 마음으로 바꾸시며 그 마음에 자신의 율법을 기록하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워 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해 준 결과다. 약속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것을 또한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 죄 용서를 약속하시고 난 다음 우리 자신의 돌같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 반역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제공하시는 구원은 총체적인 것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칭의 만이 아니라 중생, 성화 그리고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이 이 무조건적인 약속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은혜 언약은 기초와 관련해서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구속 언약에 의존한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고집 센 후손들 그리고 다윗과 그의 악명 높은 아들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 계획을 그들을 통해 성취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계획은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각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양 무리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끝까지 보호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와 같은 조건이 우리에게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고 -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면 어쨋든 우리가 만족시켜야 할 조건 -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언약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 끝까지 보호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밀 가운데 섞여 있는 가라지나, 돌짝 밭에 떨어지거나 가시덤불에 의해 질식한 씨다. 어떤 가지들은 열매 맺지 못하고 잘릴 것이다. 이것은 사실 떨어져 나간 사람들, 자신의 장자권을 다른 하찮은 것에 팔아넘긴 에서같은 사람들에게만 위협이 된다. 외적으로는 언약 공동체 안에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종말에 최후의 추방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매주 함께 모여 언약 갱신 의식에 참여하는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6장에서 무서운 경고 다음에 이런 위로의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6:9).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은 언약 공동체의 회원이며, 언약 공동체 내에 있었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심지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놀라운 유익을 얻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적 연대감이 그 자체로 "구원에 속한 것"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복음 설교로 우리 마음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며 성례로 믿음을 굳게해 주신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성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말씀과 성례를 통해 자신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경고들이 그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결코 꺼져 가는 촛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과 순종- 언약과 조건)에서 발췌, 251~25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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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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