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 마이클 호튼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우리 자신의 활동을 포함한다(요15:2, 8, 16; 롬8:12~13, 12:9, 16~17; 고전6:9~10; 고후7:1; 갈5:16~23, 6:7~8; 골3:5~14; 벧전1:22). 매일 죽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의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자들이다.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들이었던 우리는 거듭남과 칭의를 위해 은혜에 협력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능동적이지 않았고 다만 복음을 통해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이들로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받았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매일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구원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점점 더 많이 실현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실 때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성부께 영광과 기쁨이 되도록 이끄신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5~26).

 

우리가 우리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지금 무에서부터(ex nihilo) 새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에 기쁘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또한 지속적인 재창조 사역을 하시면서 성령을 통해 성자 안에서 하신 말씀의 효과를 불러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 있으라"라는 명령적 선언이 "땅은 ~을 내라"라는 명령법을 통해 보완된 것처럼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판결은 이제 타락한 피조물이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한 상황을 창조한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씀을 향해 돌아섰으므로 우리의 회심(믿음과 회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표시하는 결정적이고 단회적인 인간적 돌아섬이며, 이 회심은 '거듭해서' 평생에 걸쳐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린다. 그러나 돌아섬이라는 이 매일 행하는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죄에서 돌아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이나 경건이 아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벌코프는, 고대 교회에서 분명히 나타난 도덕주의가 칭의와 성화를 혼동했을 뿐만 아니라 성화를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고 바르게 논평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다시 낙원으로 가는 길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필요했지만 세례 이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는 언제나 은혜에 대한 협력과 선행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최소한 중세뿐만 아니라 고대의 기독교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성화가 마치 명백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칭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얻기를 소망하는 도덕적 노력의 과정인 것처럼 성화를 다루려는 경향이 있었다.

 

감각 세계로부터의 영혼의 상승이라는 신비적인(플라톤주의의) 이론과 더불어 이런 도덕주의적인 성화관은 분명 고대 교회에서 금욕주의와 수도원주의가 일어나게 된 주된 이유다. 벌코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은혜로움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취하여 성화를 하나님이 인간 안에 넣어 두신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속하시는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끊임없이 몰두해야 할 필요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성화란 오직 인간의 고등한 자아의 지배를 통한 하등한 자아의 점진적 구속에 있다. 성품에 의한 구속은 오늘날의 표어 가운데 하나이며 '성화'라는 용어는 단순히 도덕적 개선을 의미하게 되었다.(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29.)

 

그러나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심지어 윤리적 의미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함의가 암시하는 것처럼 "거룩함은 단순히 도덕적 올바름이 아니며 성화는 결코 단순히 도덕적 개선이 아니다. 성경은 "성화를 하나님의 일로(살전5:23; 히13:20, 21),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의 열매로(요15:4; 갈2:20, 4:19),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일이 될 수 없는 일로(엡3:16; 골1:11) 묘사하며 또 성화가 성령의 사역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나타남에 대해 말한다"(갈5:22).(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33.) 

 

성화와 관련해서 피해야 할 가장 분명한 두 가지 위험은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이다. 둘 다 특별히 신자들과 도덕법과의 관계에 관한 오류다.

 

 

A. 율법주의 (생략) (665~674p)

 

B. 도덕률 폐기론 (생략) (674~679p)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에서 발췌, 663~665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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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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