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새 언약적 순종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 / 마이클 호튼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 자체가 우리에게 두 가지 구별된 형태의 언약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즉 두 가지 언약이란 율법과 약속인데 약속은 은혜 언약의 기초가 된다. 분명 우리는 죄 안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맹세에 기초해서만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율법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우리에게 임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상속받지만, 구원은 먼저 가장 철저한 순종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아주 실제적인 의미로, 우리는 행위 즉 그리스도의 행위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받을 행동을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이러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율법은 세워진다. 그리고 율법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명령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우리 역시 가장 큰 우주적 심판대에서 변호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값없는 칭의의 복음 안에서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최후심판에서의 무죄 선언은 심지어 지금 우리에게 속해 있으며, 우리의 세례에 의해 확증되고, 주의 만찬 안에서 경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성취된 것 말고 율법이 세워진다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가? 만일 시내 산 언약이 더 이상 강제력이 없고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면 - 즉 율법이 아니라 약속의 언약 아래 있다면 -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배척해야 할 어떤 율법의 원리가 있는가? 우리는 구약의 모든 윤리적 교훈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신약에서 발견하는 명령만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어쨌든 성도의 삶 속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좋은 소식으로써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죄인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여러 장에 걸쳐 설명한 후, 로마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만일 우리가 들은 복음 설교가 우리가 완전히 율법과는 관계없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들은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아니오' 다. 바울의 반응은 율법 언약의 반응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만일 너희가 계속 죄안에 거한다면, 너희는(상급상실 또는 심지어 구원상실) 고통스러운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오히려,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세례받은 사람은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성령에 의해 새 생명을 받았다. 그 좋은 소식은 점점 더 좋아져서 죄책만이 아니라 죄의 왕 노릇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순종은 단지 어떤 기록된 법을 따를 필요가 없이 일어나는 것인가? 율법을 규범으로서 보는 관점은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 주셨을 때, 율법이 죽이는 문자를 대체한다는 의미인가?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

 

새 언약 안에서의 율법의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가 중요한 구분짓는 것을 실패함으로써 잘못된 출발을 한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집단들이 성도를 위한 율법의 규범적 용도를 단순하게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르게 인식하는 데 필요한 율법의 구분은 무엇인가?

 

첫째, 율법 자체와 율법 언약 사이의 차이점을 마음에 간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주석가들은 '율법'과 '복음'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했다(내 생각에는정당하다). (1) 율법의 원리(율법의 언약조항을 개인적으로 성취하는 것)는 약속/복음의 원리와 구별된다. (2) 옛 언약(약속)은 새 언약(성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이 모세오경으로서의 '율법' 안에 계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명령)과 약속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칭의를 받는 문제에 있어 심지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며 구분된다.

 

원리로서의 '율법'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형(하라와 하지 말라)의 형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어떤 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십계명, 상세한 성전 청결 규정, 이혼과 재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갈라디아서 5장 16~24절에 나오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위한 지침 등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명령에 대해 조금도 차이가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구약을 율법, 신약을 약속으로 나눌 수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명령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명령은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표현이다. 성경이 애써 보여 주려는 것은 성도를 위한 규범적 율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율법 언약에 따라 하나님과 관련될 가능성을 배제하면,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신명기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심지어 시내 산 언약도 약속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언약의 범주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 성경 안에 복음(약속으로서의 복음)이 있다는 의미라면, 율법 안에도 복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만일 신약 성경(성취로서의 복음)안에 명령들(율법의 원리)이 있다는 의미라면 복음 안에도 율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은혜 언약의 기초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적, 구속적 은혜(율법과 복음이 혼합되지 않은)이면, 분명히 은혜 언약의 제도 안에는 명령과 약속이 있다. 우리가 언약의 기초를 말할 때, 율법과 복음은 엄격하게 반대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율법과 복음을 율법 언약과 약속 언약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할 때마다 율법과 복음은 구분되며 심지어 반대된다.....

 

 

둘째, 새 언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는 율법의 종류인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을 구분해야 한다.

 

만일 시내 산 언약이 지금도 절대적이라면, 시내 산 언약에 포함된 구체적인 명령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사실 시내 산에서 주어진 십계명은 엄격하게 말해 이스라엘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다. 나머지 우리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명령들은 고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사회적이며 문화적 삶을 규정하는 신정 수립의 율법과 함께 주어졌다.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는 것, 땅과 이방인과 죄수들을 취급하는 것 등과 관련된 시민법은 분명 신정자체가 존재하는 동안만 유효하다. 예배를 관장하며, 구체적인 정결의식, 사람뿐만 아니라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사이의 구별, 성전, 제사장, 제물 등을 포함하는 의식법도 비슷하게 신정이 존재하는 동안만 '규범적'인 것이다. 정결한 짐승과 비정결한 짐승에 대한 환상을 본 베드로는 이방 선교를 완전히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옛 언약이 이제 폐지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전적인 사례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를 상징하는 더 엄격한 정결법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행10:9~43). 그러므로 칼빈(루터파 개혁자 필립 멜란히톤처럼)이 옛 언약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 많은 교부들을 따랐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존재로 인해 우리 양심에 새겨져 있다(롬1~3). 십계명은 신정을 지배하는 다른 법들의 핵심으로 기능하는데, 십계명 가운데 많은 내용들이 심지어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문명(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은 고전적인 사례)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도덕법의 개념은 신약 성경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신약 성경은 도덕법의 요구를 축소시키는 대신, 내적인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도덕법의 요구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것은 단지 외적으로만 지키고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임을 보여 주며, 새 언약의 복 가운데 하나는 성령이 율법을 사람의 마음속에 기록하고서 그것을 지키도록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계명의 두 돌판의 의미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한 것은 하나님의 요구라는 관점에서 언약 사이의 연속성을 증명해 준다(마22:37과 병행 구절) 도덕법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대는 구약에서 신약에 걸쳐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도덕적 성향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의 삶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바울의 놀라운 묘사는 단지 도덕법의 내적인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도덕법의 의미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이라기보다 태도와 성향과 동기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새 언약의 신자들은 더 큰 의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신약 성도들의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고, 그래서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로서 이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보다 더욱 '합리적인 예배'로 간주된다(롬12:1). 그러므로 시민법과 의식법이 배타적으로 신정에 해당되며, 더 이상의 구속력이 없는 대신,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도덕법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양심에 각인되어 있다.

 

셋째, 새 언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도덕법의 세 가지 용도를 구별해야 한다.

 

때로 성경에서 율법은 범죄에 대한 억제로서 간주된다..... 

 

도덕법은 적어도 불신자에게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도덕법으로 인해 악을 행하는 자들은 국가의 형벌이라는 빛 아래서 두 번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종종 율법의 정치적(civil) 용도라 불린다.

 

도덕법의 두 번째 용도는 죄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종 교육적(pedagogical) 용도라 불린다. 비록 율법이 우리 죄 때문에 나쁜 소식과 죽음을 초래한다 할찌라도 바울이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 임이니라.....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7~13)라고 말한 것은 도덕법의 교육적 용도를 의미한다.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는 종종 규범적(normative) 용도라 불리는데 이는 도덕법이 신자의 삶을 위한 규범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도덕법의 규범적 용도는 오직 신자만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율법의 저주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저주할 수 없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다 지킨자로 보며, 또한 율법은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 말, 행동 속에서 율법을 어기기는 하지만 율법은 우리에게 빛이 된다(롬7:21~24).

 

율법과 사랑은 적대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처럼 율법과 사랑은 고대 근동 조약문서와 성경 모두에서 함께 간다. 우리 주님은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고,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 말했다. 재미있게도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구절 바로 앞에서 다시 반복한다(갈5:14). 그러므로 우리는 새 언약이 율법의 의무를 사랑의 의무로 대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언제나 사랑의 의무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생 얻는 조건으로서 율법을 완성해야 할 개인적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길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로부터 우리는 율법의 이러한 구분이 조직신학에서 연역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본래적으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만이 아니라 루터와 루터파도 신자의 삶을 위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중요한 의미를 포함해서 율법의 3가지 용도를 모두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새 언약에서의 조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복음 안에(좁은 의미 즉 신약성경) 율법(넓은 의미 즉 계명들)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는 분명한 조건들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이며 불변하며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맹세인 약속의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적 순종-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에서 발췌, 241~251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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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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