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 / 마이클 호튼

옛 언약의 율법과 새 언약의 율법의 차이는 주로 종말론적이다. 옛 언약의 신정체제를 지배하는 의식들과 시민법은 단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는 십계명에 일시적으로 부가된 것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시민법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와 그에 뒤이은 쇠퇴는 결코 이 두 돌판의 영원한 타당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는데 이는 율법의 두 번째 돌판의 요약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그리스도]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2:7~8). 이 명령은 그 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도덕적인 뜻이다. 그러나 흔들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 속으로 끌려갔다가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생명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존되지 않는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위협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옛 창조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있는 새 창조에서는 가능하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며 그러므로 "당신 안에서" 참이다. 밤은 지나가고 있고 낮은 이미 밝아 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밝은 대낮이 아니라 새벽녘이다.

칼빈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즉, 신자들을 인도하는 용도)를 "주된 용도"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신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의를 떠난 모든 의에 대한 율법의 정죄를 들을 필요가 있지만 칼빈은 설교자들이 율법을 신자들의 양심을 위협하는 데 이용할 때 이를 설교자들의 직분에 관한 중대한 과오로 간주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것처럼 신자들을 다시 사망의 직분으로서의 율법 아래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관용"을 논하면서 칼빈은 로마서 8장15절에 나오는 "종의 영" 대 "양자의 영"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자를 바울은 종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를 율법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후자를 양자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복음에서부터 나온다. 전자는 이전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주어졌으며 후자는 지금 확신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바울은 진술한다. 바울이 확증하고자 하는 우리 구원의 확실성은 보다시피 상반되는 것들의 그와 같은 대조로부터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그 부사로부터 또다시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바울은 율법에 그 자체의 성질을 할당하며 그로 인해 율법은 복음과 다르다.(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269.)]

그러므로 율법 자체에는 은혜로움이 없다. 율법은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 칼빈은 여러 곳에서 율법의 첫 번째 용도(즉, 죄인들을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절망하도록 몰아가는 기능)를 일차적인 용도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율법은 언제나 고발한다."는 루터의 격언을 되풀이한다.

[율법은 사망만을 낳는다. 율법은 우리의 정죄를 늘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타게 한다.....하나님의 법은 우리 마음에 말하지만 우리 마음을 개혁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욕구, 우리의 기질과 생각이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과 반대된다면 우리는 정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말한 대로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더 비난받을 만하게 만든다....왜냐하면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너는 이 일이나 저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독생자가 너의 구속자임을 믿으라. 그의 죽음과 수난을 너의 불행에 대한 치유책으로 받아들이라. 그의 피 아래 네 자신을 내던지면 그 피가 너의 씻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I. John Hesselink, Calvin's Concept of the Law, p.212.)]

율법은 마치 거울처럼 단지 우리의 더러운 얼굴을 폭로할 수는 있지만 깨끗이 닦을 수는 없다. "바울은 종종 '율법'이라는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자신의 소유인 것을 요구하시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의 소망도 주지 않으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장 작은 명령에 있어서라도 벗어나면 저주를 더하시는 그런 의로운 삶의 규범을 말하고자 한다. 요컨대 "율법의 생명은 인간의 사망이다." "복음의 약속들은 값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반면, 율법의 약속들은 오직 행위의 조건에만 의존한다.

그러므로 신자도 불신자 못지않게 북음이 "교회에서 매일 반복되게" 해야 한다. 성화에 있어서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율법과 복음의 대조를 이해해야 하며 이 구별로부터 우리는 율법이 행위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믿음을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고 추론한다."고 칼빈은 쓰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은 어떻게 율법의 세 번째 용도가 신자들을 위한 율법의 주요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또다시 칼빈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의 새로운 종말론적 상황을 인식한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우선 율법은 정죄의 핵심에 있어서 신자에 대해 사법권이 전혀 없다. "율법은 이제 우리에게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집행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목표'를 가리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율법이 고발하기만 했지만 이제 율법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이제 율법에는 신자들을 권면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신자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섬김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능력이다. 신자는 율법의 위협이 아니라 율법의 지시에 귀를 기울인다. 실제로 워필드는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루터의 믿음과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두려움" 보다 "아버지다운 자비심"을 루터보다 훨씬 더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한 루터파 신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따라서 워필드 자신은 이렇게 결론짖는다. "한마디로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훨씬 강한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심지어 열심조차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를 지킨다는 의식으로 인해 고취되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칼빈이 때때로 루터보다 더 신자의 믿음의 연약함을 강조했고 그 결과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명제도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또한 한 인간을 새롭게 하고 그에게 거듭남을 주는 한편 그가 끊임없이 선을 행하지 않기가 불가능하도록 그를 새로운 삶의 태도와 방식으로 인도하는 매우 강하고 능동적이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바쁜 것이다. 선행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믿음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과 행위의 필연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루터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겠지만 새 피조물의 자발적인 순종에 대해서는 다소 덜 확신했다. 칼빈은 신자의 지속적인 의심과 게으름을 종종 강조하며 이런 상태는 심지어 거듭난 상태에 있는 참된 신자에게도 사실이다. 순종은 믿음에서 흘러나오지만 주님의 명령에 생각과 마음과 몸이 언제나 자동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선행에 필요한 감사를 낳아야 하지만 율법은 신자에게 그의 의무를 상기시킴으로써 신자의 게으름을 방해한다. 우리가 의를 구할 때 의무는 법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율법의 우렛소리가 잦아들면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시고 그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가던 길을 생각나게 하시는 데 율법을 사용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일 이상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오직 복음의 약속만이 우리를 감사의 순종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는 교훈뿐만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은혜의 약속도 붙잡으며 이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들어 준다. 만일 율법이 조르고 위협하는 것만 가지고 두려움을 통해 영혼을 괴롭게 하고 공포를 통해 영혼을 낙심시킨다면 율법보다 덜 사랑스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다윗은 특히 자신이 율법에서 중보자를 깨달았고 그 중보자가 없으면 기쁨이나 감미로움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Calvin, Institutes, 2.7.12.)]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V.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췌, 679~682p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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