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회의 4가지 신앙고백서


 개혁주의 신조는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신경,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벨직 신앙고백


1.벨직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1년, 화란의 개혁교회가 핍박받고 있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다. 화란을 다스리던 필립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아버지 찰스 황제처럼 가톨릭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 당시 화란은 프랑스와 긴밀한 교류 있었고, 프랑스에 확산되었던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개혁의 움직임을 언짢게 여겨왔던 필립 2세는 이 개혁을 근절하기 위해 Spanish Inquisition(스페인의 탄압)이라는 스페인의 종교탄핵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시의 분위기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자연의 모든 위대한 힘이 이 핍박에 동원되었다. 불은 사람을 태우는 데, 물은 사람을 수장시키는 데, 공기는 공중에 사람을 매다는 데, 흙을 사람들을 생매장시키는 데에 사용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립 2세는 개신교인을 살려두기보다는 네덜란드를 초토화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필립 2세 아래서 순교당한 개혁교회 성도의 숫자가 1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초대교회 때에  로마 황제 아래서 순교당한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 터툴리안이 말하기를 "기독교회가 부흥한 데 있어서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강한 개혁교회가 세워진 밑거름에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다. 개혁교회의 전통 위에 있다는 것은 순교의 전통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참된 기독교 신앙은 순교 신앙이다. 개혁주의적인 신앙고백자는 순교적 삶을 살아간다. 순교 신앙은 자신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하여 그리고 아직도 교만한 자신에 대해서 철저히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매일 죽는다"라고 말하는 바울의 신앙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Daily dying and rising. 성공적인 신앙의 비결은 매일 자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개혁교회에서 아주 강조하는 것이다. 실지로 육적인 죄의 생각이 죽으면 행복해지고, 아주 편해진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먼저 죽으시고, 부활의 영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 부활의 영의 능력이 아닌 자기의 육적인 에너지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힘들고 어려워진다.


벨직고백서는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귀도 드 브레스(Guido De Bres)가 작성하였다. 가톨릭신자였다가 금서였던 성경을 읽고 개혁주의를 전파하다가 1567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의 처절한 편지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을 준다. 벨직고백서는 신학자의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작성된 것이다. 벨직고백서는 순교자의 신앙의 생명력을 표현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칼빈주의 맥락 속에서 발전된 신앙고백서이다.


2. 벨직 신앙고백서의 내용적 특색


1). 하나님을 아는 방법(1-9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주셨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보여주셨으나 우리 맘이 어두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계시인 성경으로 분명히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이 고백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방편으로서의 성경에 대해서 먼저 논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함께, 혹은 성경보다 전통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계시인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주어지는데, 자연계시(일반계시)에서도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evidence)를 주셨다는 것이다. 자연과 이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아퀴나스는 거듭나지 않은 지성을 가지고도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지성으로는. 구원에 대한 지식,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 등은 알 수가 없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2중 구조를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칼빈은 자연신학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지침과 척도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죄의 문제는 자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의 증거로만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의 증거를 보면서 살지만, 그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증거를 보는 즉시 눈을 감아 버리고, 특별 계시에로 나아가지 않고, 부인해 버리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안의 부패성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로서, 마음이 부패한 문제이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문제이다.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을 왜곡시켜 버리고, 부인해 버린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시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논쟁을 벌였다. 에라스무스는 우리 안에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유의지가 철저히 손상되었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의지밖에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에 메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 전에는 죄의 결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가 선을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어쩔 수가 없이 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의지적으로 죄를 원하고, 그것을 선택한다(롬 7장).  우리는 자신들의 부패한 마음에 부합되는 부패한 길만을 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돌이킬 수가 없다. 우리는 육신의 범죄에 속한 것만을 선택을 한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선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육신의 범주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좀 더 고상한 것을 선택한 것이지만, 육적인 동기로 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행위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기 원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작용한 결과이다. 이것이 Total Depravity(전적부패)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10-21장).


기독론의 맨 앞부분에서 선택(election)을 다루고 있다. 왜 선택이 이 부분에 나오는 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적 부패를 다루고 난 다음에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도록 선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구원을 이루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오직 삼위하나님께서만이 전적으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셔야 한다. 바로 그 구원사역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불의한 자를 위한 죽음이다. 그는 죄인의 자리에서 지옥을 맛보셨다. 그 대가로 우리는 완전한 의인의 자리에서 그 축복을 받게 됐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전충족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다. All sufficiency of Jesus' atoning work


3).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방법(22-37장).

 

22장은 믿음을 다룬다.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그 방편이 믿음이다. 믿음은 성령의 은혜다. 믿음은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게 아니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공로나 조건이 되지 않는다. 구원의 근거로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의 은혜가 주어지는데, Sola fide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믿음이 공로적인 측면에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방편이다( instrument channel))이다. 믿음은 구속의 은혜가 이루어지는 통로, 그릇(vessel)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로 믿음의 그릇도 만들어서 내려주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혜의 산물이다.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선재하여, 믿음을 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믿음은 지적 승인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예수님의 축복과 예수님을 분리하지 않는다. J. I. 패커 "믿음이란 예수님의 공로를 움켜잡는 빈 손이다." 믿음은 자기를 의존하지 않고 예수와 그의 의만 절대적으로(only and entirely) 의존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교만을 죽이는 것이다.


24장에서는 성화와 관련해서 믿음이 어떤 것인가 다룬다. 우리를 new man으로 볼 뿐 아니라, new generated man으로 본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연결시킨다. 이 믿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믿음이다. 순종을 가능케 하는 믿음이다. 온전히 순종하는 것과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온전한 순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믿음이란 우리로 선행의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행의 열매를 맺으니까. 성화에 대한 믿음도 우리로 자랑할 게 없게 만든다.


의롭게 하는 믿음과 성화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가? 의롭게 하는 믿음은 수납한다(reception)는 것이고. 성화의 믿음은 역사한다는 것이다(operation). 24장 첫 부분은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뒷부분은 구별성 강조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 결과 의롭게 산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낸 의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한 순간이라도 자기 공로로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 거절하신다.


성령론을 그 다음에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은 객관적(objective)이다. 이 객관적 사역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관적(subjective)인 체험이 되도록 전환하는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다. 성령께서는 과거의 주님이 현재의 주님이 되도록 한다. 역사적인 주님이 오늘날의 실존적인 주님으로 만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Christ for us -> Christ in us. )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2000년 전의 역사적인 예수를 믿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에 모셔드리고, 그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성화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소유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실제화하고 주관화시키는데, 성령께서는 예수와 내가 생명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Union with Christ).

 

27-29항까지 참 교회의 표식 세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 말씀전파(순수한 복음설교), 바른 성례의 시행, 권징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참된 영적인 성숙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키프리아누스가 했다. 어거스틴도 주장했다. 칼빈도 말했다. 모든 교인은 교회에 속해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조장하지 않는다. 그 다음 마지막 부분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정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그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재세례파와 같이 교회의 신자들은 정부를 거스림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벨직 신양고백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칼빈주의 맥락에서 발생한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에 기초를 제공했다. 초대교회에서는 기독론과 삼위일체 논쟁의 가열에 따라서 그에 대한 신앙고백의 항목이 확대가 되고, 증보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이후에는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에 대한 항목들이 증보되었다. 또한 그와 관련된 여러 부분의 교리들이 재조정되고 확대됨으로써 교리의 내용은 조직신학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벨직 신앙고백서와 같은 역사적인 신조를 통해서 오늘날의 완성된 조직신학적인 교리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6maZ&articleno=15711268&looping=0&long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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