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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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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 이승구 교수님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1)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 교회가 좀더 개혁신학이 지향하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서,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인 벨직 신앙 고백서에 대한 강해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7년 개신교회의 순교자로 소천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 s, 1522-67)가 1561년에 당시에 스페인의 천주교 정부에 의해서 박해받던 프란덜스(Flanders)와 네덜란드(Netherlands) 교회들의 변호를 위해 불어로 작성한 것을 1566년 안트베르프(Antwerp) 대회(Reformed Synod), 1571년 엠덴(Emden) 대회, 1574년 도르트 대회(Dort Synod)와 1581년 미델부르그(Middelburg) 대회에서 수납하고,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때인 1619년에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거쳐 도르트 전국 대회(the National Synod of Dort)에서 개정하여, 지금까지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과 도르트 신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고 있는 귀한 개혁파 신조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1 조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de Natura Dei)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단순하시고 영적인 한 존재가 계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영원하시고, 불가해적이시며[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으시며], 보이지 아니하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모든 선의 넘쳐흐르는 원천이시라는 것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칼빈과 그의 학생이었던 앙뜨안느 드 라 로셰 샨디우(Antione de la Roche Chandieu)가 작성하여 1559년 파리 대회(a synod at Paris)에서 개정되어 받아들여진 프랑스 신앙 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 제 1 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유일하며 단순한 본질을 가지신, 영적이고,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불변하시며, 무한하시고, 불가해적이며(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으시고), 이루 말할 수 없으며(ineffable),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전히 선하시고, 온전히 의로우시며, 온전히 자비로우신 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벨직 고백서는 하나님을 "단순하시고 영적인 유일하신 존재"(one only simple and spiritual Being)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신 6:4; 왕상 8:60; 고전 8:6; 딤전 2:5;). 그런데 그 유일하신, 하나이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십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인 얼굴, 눈, 코, 입, 등, 손, 손가락, 발 등을 가지고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일종의 의인법적 표현, 정확히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을 볼 때에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성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이렇게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1:20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라고 말한 것에 의존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영적인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디모데 전서 1:17과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이시니"라고 말하는 디모데 전서 6:16의 말씀도 같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이지 아니하시고 볼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해당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하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을 뵈옴(visio Dei)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디모데전서의 말씀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볼 자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월필드는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뵌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당신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뵌 이는 그 자신이 피조물로서, 더구나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는 무자격함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께서 조인을 받아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감격과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6], p. 491). 이렇게 진정한 신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이렇게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더욱 더 분명히 하나님을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은 단순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하다는 말은 사람이 단순하다고 말할 때의 단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본질이 복합적이지(compositeness) 않으시다, 따라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지거나 할 수 없다(free from division into parts)는 뜻에서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즉, 전통적 신학이 늘 강조해 온 바와 같이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을 일으킬 수 없게 하나로 있다는 뜻에서의 단순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 속성이, 그 절대적 온전성 때문에, 그의 존재 전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each of the properties of God, because of their absolute perfection, is identical with His Being). 이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벨직 고백서의 내용에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자체를 생각해 보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알아 가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한 기쁨의 근원이 되듯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묵상 자체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2)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 하나께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관련해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에 대해서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공간의 어느 한 점이나 한 영역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시공간을 전혀 초월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전혀 내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초월만을 인정하여 내재성을 전혀 부인해 버리려는 20세기초의 사상을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에 "초절주의"(超絶主義)라고 번역하여 그 특징을 분명히 표현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초절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말하려는 내재주의(內在主義, immanentism)에 대한 좋은 반발과 반박이 되지만, 이 역시 한 극단으로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과 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과 관련한 무한성은 편재성(遍在性, 어디에나 계시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시간 안에 내재하시며,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따라서,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초월과 내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시간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조차도 상대화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늘날 많은 잘못된 신학자들과 함께, 문자적 성육신은 모순이요 부조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바로 이해하는 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시간 안에로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벨직 신앙 고백서에서는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그저 그의 "무한성"이란 말에서만 시사되고 있으나, 공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충만히 채우시며, 오히려 모든 공간을 창조적으로 붙드시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시다고 가능성에 대한(per potentiam) 진술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질로(per essentiam) 어디에나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없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잘 깨달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시 139:10)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향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는 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으신 분(God is in becoming을 강조하는 융엘 등), 아니면 적어도 변하실 수 있음을 한 측면으로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려는 것(과정신학 등)이 오늘날의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상 전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아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없으시다 거나, 아주 답답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을 따라서, 말라기 3:6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 야고보서 1:17의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시를 믿을 만하게 하는 것이 그의 불변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시는 일에서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 3:6의 진정한 의미도 이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시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온전히 소멸하지 않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으신다는 특성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변성은 후의 언약의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변하지 않고 당신님의 존재를 유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지 않은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능성은 우리가 후에 생각할 창조와 역사를 그 목적에로 까지 인도하여 가시는 통치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른 위치에 잇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열심인 것도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어, 그 전능성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실 때에도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끊고서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3)

공유적 속성들(1)

지난번까지 논의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아주 독특하게 하나님께서만 가지신 속성들입니다. 이번에 생각하려는 속성들도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마는, 어떤 제한된 의미에서는 피조물인 우리도 그런 속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선배들은 이를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공유적'이라는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공유적 속성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절대적으로, 가장 뛰어나게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피조물 수준에서 반영하는 정도로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공유적 속성들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공유적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이런 용어를 써 왔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공유적, 비공유적이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항상 그만한 차이가, 천지의 차이,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금 개혁파의 후렴 어귀의 하나인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지혜로우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각하면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는" 것입니다(고전 1:25). 따라서 하나님께서만이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와 과정과 관련해서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과정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가는 과정을 경탄하며 보아야 합니다. 창조와 섭리와 구속 사역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십시다. 그는 의 자체이시고, 그에게는 불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본성이 의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법(eternal law), 또는 영원법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서 그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주장하고 나가시는 데서도 당신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공의를 행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창 18:25).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고, 온 세상에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선하십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이는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그저 선한 사람, 선한 선생님으로 보고 인간적인 한도 내에서 아주 선하다고 하는 뜻의 "선한 선생님이여"라는 말에 대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선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그 수준에서, 즉 신성의 수준에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fons omnium bonum)이십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약 1:1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체적으로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은혜로우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선(summum bonum)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선의 원천이시라는 이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항상 옳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도 할 수 있고 (시73편, 렘 12장, 하박국 1장, 욥기), 하나님께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 마지막에 도달하게 될 때 온 세상은 그저 그 입을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우심을 생각하면서 다시 그 입을 벌려서 그저 그분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혜와 의로우심과 선하심,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적 신정론(eschatological thedic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세상 끝에 가서야 하나님이 옳은지 아니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 끝에는 그 옳으심이 온전히 선언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어느 시점에서나,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옳으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항상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특히 공유적 속성을 연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혜로우려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만이 지혜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려고 하는 이도 하나님을 가까이해야만 합니다. 선한 것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반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여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을 지혜롭게 살피고 판단하며, 항상 옳고 의로운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며, 선한 성품을 드러내서 참으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오래 참아 나가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당신님의 성품을 잘 깨닫고 반영할 존재들을 두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의미이고, 구속의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비록 피조물의 수준에서나마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고귀한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고 개혁된 형상을 지닌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4)

공유적 속성들(2):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께서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시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는 그 지혜로우심의 한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지식은 이 세상 진리의 원천이고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둘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2) 그의 피조계 전체에 대한 지식.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다 아신다(comprehension)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지 않을 실 수 없는 지식이요, 그의 의지의 작용의 결과로 아시는 지식이 아니라는 뜻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예로부터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이라고 불려져 왔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신학(theologia Dei)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와 의식 전체를 온전히 다 아십니다. 이것을 우리 선배들은 "하나님께는 존재와 의식과 지식이 동연적(同延的, coterminu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잠재 의식이나 무의식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다 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점차 알아 가시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에 숨기어졌던 자신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영원적 지식(eternal knowledge)을 가지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종합적 지식일 수 없으며, 논의적(discursive) 지식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은 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계에 대해서도 온전한 지식을 가 지십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그가 알지 못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피조계에 대한 참(진리)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실재적인 세상에 대해서는 결국 자신 의 온 세상에 대한 불변하는 온전한 작정(decree)에 근거해서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 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 은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의 우연적 존재(contingent beings)인 이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근거해서 알고 계신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찰적으로(intuitive) 단번에 아시는 것입니다(scientia visionis). 하나님께서 무엇을 관찰하시거나 추론해서 어떤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지식의 증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연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이런 인식을 바르게 가진다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학적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된 문제, 섭리와 관련된 문제, 십자가의 구속의 범위와 관 련된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적 지식도 아니고, 우연적 지식도 아닌 소위 '중간 지식'(scientia media)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 이런 문제의 해결이 더 쉽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에 대해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 하시는 자"(시 94:10)이신 하나님께 그 무엇이라도 숨 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웃기는 (ironical) 상황입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숨기려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 있을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라고 외칩니다(사 29:15). 그러므로, 한나의 기도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이 온전하신 "지식의 하나님께" 우리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삼상 2:3).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듯이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해 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러내고 있는 이런 태도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사야는 이렇게 묻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 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사 40:37). 그렇게 생각하거나 묻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구 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마 6:8). 이처럼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신학적 질문을 모두 답해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천적 문제들도 거의 다 해결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한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해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우리도 하나 님의 온전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생각하시는 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지식을 갖 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인지적 사명(cognitive mandat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식에 따라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인(analogical) 관계 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원형적 지식(original knowledge, archetypical knowledge)이라면, 우리의 지식은 유비적 지식(analogical knowledge)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 유비성에 충실할수록 우리의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 그 자체는 우리가 능히 다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수사적으 로 묻고 있듯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전 2:16). 그러나 하나님 께서 드러내 주신 바 계시가 있으므로,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2:16). 그리고 자신이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말합니다(고전 2:13). 그러므로 우리의 유비적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드러내어 보이신 계시에 의존하는 지식, 계시 의존적 사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에 신학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 학문(scientia christiana)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 나님의 온전하신 지식을 우리의 피조물의 수준에서 유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지식 이고, 참된 학문입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 분과가 추구하는 진리의 기 준이 바로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부디 우리의 인지 적용이 이렇게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생각하는 바르고 온전한 인지 작용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는 실천적 의미의 하나가 바로 이런 우리의 인식 작용이 바르게 작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게 하나님의 지식과 이에 대해 유비적인 우리의 지식 활동을 논할 때 이 를 공유적 속성으로 언급했던 우리 선배들의 의도가 부분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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