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장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중생을 통하여 죽은 사람 곧 싸움터에 한 주일 동안이나 쓰러져 누워 있는 병사의 시체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킴을 보았다. 성령께서는 죽은 사람들이 죽은 상태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던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영적 생명을 부여한다. 이것은 커다란 기적이다.

이 영적 생명과 그전에 있은 죽음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이 흔히 병약(病弱)하다는 것은 너무도 부인할 수 없는 뻔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짓는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가 너무 죄를 짓기 때문에 새 생명이 그를 완전히 떠나고 그가 다시 죽어 버린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의 연약함은 죽음에는 이르지 않으며 또 불치(不治)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점차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가 정말로 병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중생한 자도 범죄한다는 것은, 성경으로 또 자신의 경험으로 분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마다 너무도 쓰리게 자신의 생활에서 죄악적인 실패를 맛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 생애 가운데 죄가 득세해 보이기 때문에 낙담하고 회개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그는 겸손하게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필요를 느낀다. 요한은 만일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을 포함하여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요일 1:8,10) 말하여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좀 더 거룩하고 좀 더 성별되면 그만큼 더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수록 죄에 대한 그의 감각은 더욱 민감하다. 그의 현저한 죄가 그를 슬프게 할 뿐 아니라 전에는 외견상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서 마음을 괴롭히지 않던 죄들이 이제는 그의 마음에 크게 떠오르게 된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가 그토록 고수준(高水準)의 성화의 단계에 도달해서 죄에 대하여 민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사야가 거룩한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고 창화(唱和)할 그때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3,5)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누구든지, 아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성도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없다. 중생한 자도 여전히 범죄한다. 그는 생명을 가졌으나 병든 생명이다.

이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는 이 죄에 어떻게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분노, 성냄, 증오, 시기, 음욕 그리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른 악한 것들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1. 성화에 대한 비성경적 해결책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성화의 근원(根源)이시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밝히기 위하여는 먼저 죄에 대한 이 문제에 항용 주어지는 두 가지 해답을 고찰함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총력을 다해 죄와 싸우라는 요지요,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죄와 싸울 것 없다는 것인데 이 두 해결책은 다 그릇된 것이다.

(1) 자력(自力)에 의하여

첫째 번 해결책은 우리로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도록 명한다. 성화를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긴다.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라고 한다. 덕행의 유익과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무의 합리함을 보여 준다. 죄가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에 현세와 내세에서 미치는 결과를 들며 선함과 거룩함이 무엇임을 알았으니 이제 네 생명을 주장하라고 한다. 모든 악성을 정복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규율, 결의, 자제력들을 발휘하라.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람의 모범을 좇으라. 그는 자서전에 기록하기를, 자기의 악습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자신을 개선하였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우리의 이성과 결의를 사용하면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죄를 정복할 수 있다 한다.

(2) 타력에 의하여

둘째 번 해결책은 첫째 번과는 정반대이나 꼭 같이 그릇되다. 첫째 것이 우리가 자력으로 죄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릇됐다면, 이번엔 우리가 조금도 죄와 싸워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위해 싸우게 하라는 신앙이므로 그릇되다. “전부를 하라,”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는 표어 간의 차이다.

예를 들면, 케즈윅 지도자들은 주장하되 “구원은 (죄에서) 분투나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으며 진지한 결의나 극기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만일 죄를 이기려고 무엇을 한다면 죄가 그를 이길 것이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으로 그 인격을 붙잡으시도록 그에게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 성령께서는 그 인격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시도록 하기까지는 할 수 없다.

한나 휘톨 스미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생활의 비결]에서, 신자는 주께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의 생명을 마치 토기장이 손안의 진흙과 같이 창조주의 손안에 맡기고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토기장이가 일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처지를 주의 손에 맡겼으니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만약 우리가 스스로 짐을 지면 주께서는 져 주시지 않는다.”

트럼불은 그의 승리의 생활 운동에서 “가만 두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표어를 강조했다. 또한 “쉽지 않으면 좋지 않다.” “무릇 내가 얻기를 노력함으로 얻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 값진 은혜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노력은 “그러한 승리를 못 거두게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못 거둔다.” 승리가 얻어질 때는 “전투에 의한 승리라기보다 자유에 의할 것이며” 모든 “죄악된 충동”으로부터 “노력 없는 자유”다. “그러므로 노력을 그치라. 그가 모두 하시도록.”

이러한 운동에서는 종종 이차적 축복이 강조된다. 사람이 아무 행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에 그리스도를 받는 것처럼 성화 시에 그가 칭의를 받는 믿음과 구별되는 별개의 믿음의 행위로 재차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칭의 시에 신자는 순간적으로 완전히 그리스도를 받는 것과 같이 성화에서도 점차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눈 깜박일 새에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차이는 처음엔 그가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받으나 둘째 번엔 모든 알고 있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주시는 주(主)로서 받는다. 이것이 소위 이차적 축복에 의한 즉각적인 무죄 – 완전이란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를 위해서 제시된 이 방안은 둘 다 비성경적이다.


2. 성공적인 성경적 해답

이제 우리는 유일하고 성공적인 해결책 곧 성경적 해답이 무엇인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력으로 전심 분투하는 것으로만은 거룩함을 결코 찾지 못한다. 그 외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곧 초자연적 도움이다. 또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분투함이 없이 초자연적 도움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는 피상적으로 이 둘의 결합인 듯이 보이는 것에 의하여 얻어질 것이며 그럴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거룩의 비결은 두 겹의 활동 곧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길이다.

(1) 성령의 중생의 역사(役事)

우리의 생활에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는 데 우선적으로도 필요한 것은 성령의 중생의 역사다. 성령께서 우리 생명 안에서 일하시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사 거처를 정하신다. 우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그와 연합된 것이다. 이것은 두 친구 간에 있을 수 있는 기억이나 감정 혹은 사랑으로 연합된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 안에 오사 거하시며 우리와 연합된 것이다. 이 연합은 포도나무에 가지들(요 15장)이나 삼위에 있어 아버지에 아들(요 17:21)이나 몸에 머리의 연합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사실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할 만큼 실제적인 일이다.

이처럼 성령께서 중생시키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뤄지면 그때 죄에 대한 승리 곧 점진적이 아닌 즉각적 승리가 따른다. 분명히 지상에 있는 신자 내에 죄의 완전한 근절은 없으나 순간에 얻은 승리가 있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요일 5:4)”라고 쓸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강하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14)”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죄는 정복되었다. 죄인이 승리한다. 물론 그가 범죄할 것이나(요일 1:8) 그의 의지에 반(反)하여 그리할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때로는 그가 아무 소망도 없고 죄에 대한 승리자이기보다 패배자인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으로 나서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는 자신을 죄에 내맡길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죄가 그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가 어느 기간 여러 모양으로 승리할는지 모르나 종국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죄를 완전히 멸할 것이다. 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의 운명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싸우며 떨어져 가는 것이다.

그 승리는 1945년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에 비교할 수 있으리라. 승리는 얻었다. 일본은 항복했고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평화 조약이 조인되고 일본군의 태반이 항복한 뒤에도 미군이 섬들을 점령하려고 했을 때 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군인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한 자의 생명에서 승리는 이미 얻어졌다. 사단과 죄는 패배했다. 그러나 아직도 게릴라 전투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때로는 대규모적으로 일어나나 승리는 조인되어 반항(조)의 마지막 잔재가 청산되기까지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런 성경적인 뜻에서 승리의 생활은 가능하다(요일 5:4).

성령의 성화하는 일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중생과 꼭 같이 신비다. 다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2) 성령의 성화의 역사

성화는 주로 성령의 일이다. 전에 말한 것같이 영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하는 데서 오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신자 안에 거하신다 하셨으며(요 14:23) 삼위의 역사를 나눌 수 없음을 아는 바이나 성경은 성화가 주로 제삼위의 일이라고 표시한다. 그는 중생시키시는 분이며(요 3장), 새롭게 하며(딛 3:5), 거룩하게 하며(살후 2:13; 벧전 1:2), 인도하며(롬 8:14), 사람 속에 거하며(요 14:17; 롬 8:9; 고전 3:16), 사람의 마음에 편지를 쓰신다(고후 3:3). 그리고 바울은 분명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한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생활을 하려면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가리킨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다. 즉, 그의 생명을 나눠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 안에 거하여 그를 거룩히 하려면 성령을 통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나 성부께서 내재(內在)하여 직접 매개 없이 성화시키지 않고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하신다. 성화는 주로 제삼위의 일이다.

(3) 성령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역사

이 성화의 특성은 중생에서와 꼭 같이 성령께서 사람의 바로 중심 혹은 영혼을 움직인다. 그는 도덕이나 합리적 설복을 사용하고 성화는 사람으로 하든지 말든지 그에게 맡겨 두는 것이 아니요 그의 기본 성질을 움직여 사람이 협동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는 잠재의식, 영혼의 깊은 곳에 작용한다. 결과는 선행이 따른다. 나무의 열매는 그 성질에 좌우되며 마음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나기 때문이다(잠 4:23).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 우리가 저항할 수도 없는 영혼의 잠재의식의 영역에서 일하시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항상 저항함으로 우리는 결코 성화되지 못할 뻔하였을 것이다.

(4) 전인적(全人的) 성화의 역사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가 변화받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지만을 거룩케 하여 선행을 결심케 하되 선을 깨닫지 못하거나 선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법이 없다. 사람의 전부 곧 그의 의지와 감정과 이해력을 다 거룩하게 한다. 신생(新生)에 있어 완전한 성화를 주시지는 않지만 사람의 전체를 변화시켜서 전 존재로써 거룩한 길을 출발시키는 성화를 주신다. 완전하게 창조된 아기의 출생 및 성정과 유사하다. 아기는 비록 작기는 하지만 마음과 몸의 전 기능을 가졌다. 그의 손톱은 자그마할지 모르나 완전하게 만들어졌다. 손가락, 발가락, 귀, 눈썹, 또 내부 기관이 충분히 발육되지 않았어도 있어야 할 수(數)는 다 갖춘 것이다. 같은 모양으로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를 중생시키고 성화시키신다. 겨우 시작에 불과할지라도 사람의 각 부분이 변화받는다. 영적 이해력이 의지를 무시하고 자라지도 않고 그의 의지가 감정을 저해하고 발달치도 않는다. 각 부분에서 자란다. 그는 각 부분에서 완전하다. 단지 정도에서 불완전할 뿐이다.

이 성령의 일의 포괄성은 마음이 사람의 전 활동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잠언 4:23이나 예수께서 마음에서 나온다는 모든 악을 마가복음 7:20-23의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심층부 곧 그의 심장 혹은 영혼이 변하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도 역시 변할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의지와 지식과 감정이 각각 거룩해졌다고 말함은 여러 곳에서도 볼 수 있다.

(5) 성화의 점진성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일의 특성은 그 과정의 점진성(漸進性)이다. 사람은 결코 땅 위에서 즉각적이며 죄 없는 완전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죄 많음에 맞추어 하나님의 수준을 낮추는 사람만 자기가 완전하다고 그릇 생각한다. 성경은 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갑자기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싸움 끝에 구원이 온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과정이 느리고 때론 빨라지지만 아무튼 일정한 기간을 요하는 일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하였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신자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죄와 사단과의 끊임없는 싸움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배드로도 “은혜와 지식으로 뛰어들어 가라.” 하지 않고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성화가 점진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6) 성화의 과정이 완성되는 순간

그러나 이 점진적 과정은 죽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될 것이다. 하늘나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없으며, 죄가 완전히 폐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27). 그러므로 신자가 죽어 바로 하늘나라로 갈 때 성경에서 명시하는 대로 성화의 과정은 순간에 완성되고 일초도 못되어 죄없이 완전케 된다[눅 23:43; 히 12:23-개혁주의 신행협회 출간, [소교리 문답 강해](184쪽, 제 37문답)와 [불멸의 생명] 참조:편집자 주].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성령의 계속적인 일이 죄에 대한 승리, 비록 그것이 쉽지는 않으나 그 승리를 위해 불가결의 조건이다. 우리가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필수요 근본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지 않고는 부분적인 승리일지라도 얻을 수 없다. 굳은 결의, 결심, 고통스러운 노력도 성령과 그리스도 없이는 쓸데없다. 그 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치 씨나 작은 사과를 어느 나무에 붙여 놓고 아름답고 붉고 즙 나는 사과를 내려고 하며 그것들이 자라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다. 그런 외부적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차라리 바른 성질, 사과나무의 성질을 가진 나무를 골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서 적당히 재배하면 그 나무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좋은 사과를 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대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그로부터 생명과 생명력을 받아 자라 포도를 맺는 것과 같이 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와 성령으로부터 내적 힘과 생명과 선행을 할 힘을 얻는다. 그래서 절대로 묵고 마르고 죽음 막대기로부터 포도를 낼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 생명을 주지 않으시면 거룩하게 되기는 불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로부터 죄를 이기는 힘, 우리 안에 없는 이 힘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외적인 수단 곧 금욕이나 단련이나 도덕적 훈계나 벤자민 프랭클린의 반성 목록 등, 성령 없이 자력으로 하는 수단으로 죄를 정복하려고 함은 마치 묘목(苗木)의 껍질을 늘리고, 가지를 잡아당기고, 줄기를 들어 올림으로 큰 나무로 만들려 함과 같다. 그런 외부적 방법으로 강제될 수 없다.

봄철에 나무들을 보면 성경적 방법을 알 수 있다. 죽고 마르고 바삭바삭하며, 갈색이 된 잎사귀들이 아직 가지들에 붙어 있다가도 생명이 내부로부터 발현하자, 그 묵은 잎사귀는 자연히 떨어지고 새롭고 파릇한 새싹이 나타나 시초엔 작으나 점점 완전하게 모양을 갖추어 성숙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실 때 우리에게 능력과 생명을 주심으로 옛 죄는 하나씩 떨어지고 대신 비록 새싹과 같이 작지만 주님을 닮은 새 덕(德)들이 생겨 점점, 그러나 확실히 자라간다.


이와 같이 성화는 큰 결심이나 의지력으로써 내적 능력의 근원과 별도의 외적 수단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신자 아닌 자들이 갖지 못한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케 되는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능력과 승리의 비결 곧 성공의 길이 있다.

이제는 범하기 쉬운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승리가 성령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힘써 일하여선 안 된다.” 우리는 “그(성령)로 다 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격을 맡으시게 하고 우리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지고 말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노력 없는 승리를 얻어야만 한다.”


3. 성경적 두 요소(수동적.능동적)의 결합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은 참말이다. 그분들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편에서 행하기를 촉구(促求)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일이 우리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는다.

중생에서 신자는 수동적일 뿐이다. 그가 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만 태어나는 것뿐이요, 출생에 있어 협력하지 않는다. 아기와 꼭 같이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추가된 일면이 있다. 사람은 수동적이며 동시에 능동적이다. 확실히 사람의 생명 내에서 잠재의식의 영역, 그 마음에서 주권적으로 역사(役事)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므로 사람은 이 일에서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다. 사람이 성령이나 그리스도를 주관하지 못하며, 그들(성령과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사람은 성화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다. 신령한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이뤄 나간다. 우리가 시계를 감아서 책상 위에 놓으면 제대로 똑딱거리며 가는 것같이 취급되지 않는다.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지와 감정, 지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성화시킬 때는 이런 기능들을 인정하여 사용하며 그들로 활동케 하신다. 따라서 성화는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은혜임과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께서 수동적으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내리시는 은혜요, 일단 성령을 받았으면 그 받은 자들이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의무이다.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행치 않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할 힘과 능력을 은혜로 주시는 한에서만 행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반만 역사하여 우리를 발동만 시키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100퍼센트 일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 100퍼센트 일한다 하겠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나, 적극적 선을 행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나, 우리가 하는 윤리적인 행위 하나하나마다 성령께서 그것을 하도록 능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것이 참이지만 우리가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그로 모두 다 하시게 하거나" "노력 없는 승리"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성령은 가르친다. "열심히 하는 것 아니면 선하지 않다."고.

승리가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어질지라도 성경은 우리를 항상 격려하여 죄와 마귀로 더불어 싸우라고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엡 6:11,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벗어버리고...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신자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도록(마 5:48) 힘쓰라고 권고하는 이상과 같은 성경을 인용하자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신자가 행해야만 되고 무엇을 해야만 될 것을 지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에는 매우 능동적인 면이 있다.

아마 빌립보 2:12,13과 같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관계를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같이 수동적이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노력하지 말라, 단지 성령께서 모두 하시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강조하여 명확히 말한다. “일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성화에서 능동적인 면,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하여 말함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거룩히 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발휘하라고 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라, 그가 다 하시리라, 우리는 힘쓰지 않으리라 하지 않고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성취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면이 직후에 따른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다 이루라! 네 가진 모든 것, 네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라. 그것이 네 의무다. 그러나 잊지 말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을.

거기에 성경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있고 성공의 비결이 있다. 만일 타 부분이 없이 한 부분만 시도되면 실패가 올 것이다. 성령 없이 힘쓰면 우리는 좌절하리라. 반면 모두 다 성령께 맡기고 힘쓰지 않으면 또한 우리는 실패로 마치리라. 그러나 성령에 힘쓰는 것을 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리라. 거룩한 생활의 비결은 이 결합에 있다. 이로써 신자는 성공을 얻을 수 있다.


4. 최후 승리를 위한 3대 촉진제

완전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신자가 취하여(물론 순전히 성령의 은혜로) 마지막 승리를 촉진시키는 데 도울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중요한 방법 셋을 제시하고 싶다.

(1) 기도

자기 생명 안에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위하여 기도할 일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성령과 그리스를 구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심이 사실이나 우리가 그의 내적 임재를 믿음으로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의 생명 가운데 더 오시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손이 우리 몸을 위하여 양식을 취하는 도구이듯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하셨다. 바울은 에베소 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 하였고 갈라디아 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며 자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생명을 누린다(갈 2:20)고 선언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충만히 거하시는 열쇠요 따라서 죄를 이길 능력을 얻는 열쇠다. 우리의 생명에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시도록 믿음으로 기도하자. 그러면 받으리라.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충성이나 감사의 표시만이 아니라 능력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한 요구를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께 나가는 꾸준한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대답을 원하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은 시리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닌, 그가 우리 기도를 들으시라고 믿고 기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히 11:6).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는 지식과 아울러 신뢰하는 요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을 주실 수 있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그렇게 하시리라고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이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갈  때에 자기의 선하고 거룩한 은사를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을 주심을 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최대하여 대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첫째로 긴요한 일이요 중요한 방법이다.

(2) 말씀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홀로 묵상하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경우 외에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별도로 일하시지 않는다. 그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은혜의 방도를 소홀히 하고 우리에게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보여 주는 유일한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모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 자신의 생명을 위해 씌어진 교훈이 밝히 혹은 내포(內包)되어 나타나 있다. 만일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닮을 것이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와 친숙해져야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성경 매장에 기록된 대로 지키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우리는 게으르게 성령께서 기적적으로 계시를 또 보여 주리라고 바랄 수 없다. 아니다. 우리는 그 말씀으로 가득 차야 한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먹을 때 성령께선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더욱더 성화되게 하신다. 예수께서 분명히 진리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고 하셨다(요 17:17,19). 베드로는 이것을 확증하여 “순전하고 신령한 젖(말씀)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하였다. 그러면 우리로 우리 하냐 남아 있는 죄를 이길 수 있게 하는 둘째 번 구체적인 일은 철저하고 개인적인 말씀의 묵상이다.

(3) 공중 예배 생활 충실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신자는 공중 예배에 충실할 것이다. 말씀의 진실한 전파를 통하여 성령은 말하며 죄를 책망하여 거룩함에 인도할 것이다. 성례에서 또한 그의 믿음이 굳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목사가 성화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어떤 죄와 싸우고 있던 신도 중 몇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자기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인 선언을 듣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성장이 뒤지게 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의 공적인 해명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래서 거룩히 되고자 하는 신자는 모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부지런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길을 따라가면 죄에 대한 승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생활상 어느 죄든지  - 가령 분노, 참지 못함, 미움, 시기, 음욕, 술 취함,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그 외 어떤 죄든지 이긴다. 성화는 이중(二重)의 역사다. 첫째로 100퍼센트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그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내주를 체험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가 함께하시면 우리는 모두 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화는 사람이 결심하여 꾸준히 추구하는 일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을 향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이 두 요소-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를 묶으라. 그러면 결과는 죄에 대한 승리다. 분명히 죽음 이편에선 죄는 근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거룩을 향해 달려가면 현저하고 분명한 진보가 있을 것이며 죽음 건너편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더 높은 생활”의 비결이요 이것이 “승리의 생활”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49-17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