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중생]

1. 그 필요성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완전히 타락했고, 그의 지능과 의지와 정서는 철저히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지능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그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죄가 그의 이해력을 어둡게 하여 영적으로 완전한 소경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의지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이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요 8:34)이기 때문이다. 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는 말씀대로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서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롬 8:7)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전혀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없으니 선한 일을 할 수도 없다. ”구스 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뇨?“(렘 13:23) 물론 할 수 없다(렘 13:23, 롬 3:10-12). 그것은 물리적으로나 자연 법칙상으로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악에 익숙한“ 그도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육에 속한 자)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려면 반드시 그의 생명 안에 성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만이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킬 수 있고 영적으로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은 인간에게 있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새 피조물을 낳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2. 그 방법

이제 방향을 돌려 성령께서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지, 어떻게 거듭나게 하는지 살피기로 하자. 첫째로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성경은 성령의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조금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일이다. 바울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신비하게 신도들과 연합되는가 하는 것은 비밀이다. 이 연합은 그 형적을 찾아낼 수도 분석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그건 마치 원자의 에너지와 같아서 그의 파괴력에 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원자의 힘의 궁극의 기원은 인간으로선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그 결과를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중생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 결과는 분명하고 놀라우며 뚜렷하게 볼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 안에서의 그의 작용을 정의하기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당할 수 없다. 물론 그 이유의 하나는 인간의 영혼이나 성령은 다 영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들을 분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의 방법을 설명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그의 중생의 역사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다.

(1) 중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식물의 성장처럼 몇 달이나 몇 해에 거쳐 서서히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거듭난 사람이거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거나 그 어느 한쪽이다. 성경적 비유는 흔히 그리스도인은 찰나적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말로써 중생을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조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물건이 존재하든가 아니면 존재치 않든가 이다. 거기 점진적 중간 단계라는 것은 없다. 한 죽은 사람이 깜짝할 사이에 부활 되며, 그는 죽은 사람이든가 아니면 산 사람인 것이다. 그 중간 단계란 없다. 한 아기는 순간적으로 잉태된다. 생명이 있든가 아니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도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2) 성령은 사람의 영혼에 와서 무엇인가를 행하신다

그는 다만 그 마음에 기독교의 진리를 제공하기만 하고 그의 선택 여부를 사람에게 내맡겨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온갖 논리와 추론으로써 설복하려 드는 한낱 외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속, 그의 영혼, 심령 또는 마음속(다 같은 뜻임)으로 침투한다. 중생이란 단지 행위의 변화, 생활의 개혁, 사상이나 언어, 행동의 혁신만이 아니다. 중생 시 성령은 이 모든 행위의 근원 바로 그것인 사람의 심령에 작용한다. 그는 문제의 심장 곧 모든 인간 행동의 중심이고 최저 동기인 사람의 심장, 내심(內心)에 작용한다....

(3) 성령 사역은 무엇을 더하거나 새 기능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어느 새로운 것을 부가하거나 생각하고 믿는 더 많은 영이나 새 기능을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성향을, 죄에 대한 사랑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았을 때 그는 새로운 눈이나 귀나 손이 더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이 이미 있었다. 오직 그는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생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를 다시 소생시킨 것이다.

비슷한 모양으로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의 영적 생명에 새로운 지성이나 의지나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의 타락에 상관없이 이러한 기능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는 영혼 없는 동물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릇된 것은 이 기능들이 그릇된 목표 – 하나님을 위하는 대신 사단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바는 사람에게 지성이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대신 그를 위하여 쓰이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들의 용도(用途)의 방향을 변경시키신다.

(4) 사람의 중생 시에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다

성령은 꼭 그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중생을 어떤 방법으로 조정할 수 없다. 중생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임의로 분다“(요 3:8). 아무도 바람을 명하지 못한다. 아무도 서인도 제도의 태풍을 플로리다 주로 부는 대신 바다로 불도록 명할 수 없으며 또 그 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예수의 말씀대로 바람은 임의로 분다. 그와 같이 성령도 임의로 중생시키신다....

만일 중생이 신앙의 선행(先行)치 않고 그 뒤에 오며 그에 의존한다면 구원은 로마서 9:7 말씀과는 정반대로 달음박질하는 자나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다....

성경에 의하면 신앙이 중생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된다. 사람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단 한 가지라도 행하기 전에 중생이 필요하다. 중생에서 사람은 100퍼센트 수동적이고 성령은 100퍼센트 능동적이다.

이와 같이 성령이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지만 이만큼은 우리가 안다. 중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바로 사람의 영혼(심령)에 어떤 일을 행하시고 이것은 또한 마음이나 행위 간에 그의 모든 행동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에게 어느새 실체나 새 기능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가진 영혼을 소성시킨다. 그는 또한 사람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데 반하여 주권적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행하신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 전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신비일 따름이다. 우리는 바람을 못 보듯이 성령을 볼 수 없다.

3. 그 결과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으나 그의 결과는 볼 수 있다. 폭풍이 나무를 뿌리째 뽑고 집을 떠밀어 버릴 때 우리는 바람이 발휘하는 능력을 본다. 마찬가지로 중생에 있어서도, 우리는 성령의 작용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예수께서 예시(例示)한 바,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옛 죄는 벗겨지고 새 덕행이 대치될 것이다. 이전에는 죄를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던 것이 이제는 온통 변했으니 이는 성령께서 새로운 성향과 새 욕망을 심은 때문이다. 쓰디쓴 샘이 달디단 샘으로 변하여 그 흘러나오는 물이 이제는 달다. 가시밭이 포도원으로 변하여 찔레 대신 포도가 자라며(눅 6:43-45), 돌 같은 마음이 생명 있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된다. 한 인간이 출생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어떤 새것이 창조된 것이다. 옛사람은 원칙상 벗겨졌고 새 사람이 입혀졌다. 예수께서 이를 요약하여,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난 자는 이젠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는 잃어버린 자에 대하여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왜냐면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때 역경에 처했을 때 고국에 편지하기를 ”우리는 이곳에 아주 개척하기 어려운 밭을 가지고 있습니다....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시고 또 앞으로도 하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절망하여 포기할 뻔했습니다.“라고 썼다.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이디오피아 인이 그 피부를 바꾸지 못하나 하나님이 그의 영을 보내시면 그 백성들은 저항할 수 없이 회개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활발치 못한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여러 번 아무 결과를 보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나 흔히 그들은 낙망하게 된다. 표면상의 결과가 없으면 그들은 그것이 가치가 있는지 의아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중생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더 기도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앞서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의 책망하는 역사를 인하여 그를 찬양하라! 그 책망은 사람을 몹시 불안하게 하고 그의 양심은 그를 번민케 하여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적대하는 것 같고 그의 죄가 그 앞에 크게 떠오른다. 양심이 그를 괴롭히어 그는 부르짖게 된다. 그는 성령이 오순절에 임했던 삼천 명과 같이 마음에 찔리어 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한 것같이 부르짖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망을 통하여 그는 죄의 대속자인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는 회개하고 믿고 그리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책망의 고통을 통하여 그는 기쁨을 얻고 심령의 괴로움을 통하여 평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제지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성령께서 책망하실 때 그가 아무리 잔인하였건, 아무리 괴팍스런 죄인이었건 그의 과거를 불문하고 성령 앞에서 그가 녹아서 눈물 흘리며 그의 마음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죄 가운데 죽은 극히 냉담한 죄인도 성령에 의한 출생을 지극히 작은 규모로도 거역할 수 없다. 그는 믿고야 만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만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다. 우리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누리려면 또한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데 성공하기 위하여는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 안에 오셔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령의 중생시키는 감화력(感化力)을 위하여 기도하라.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29-14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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