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이 죄를 회개한다 하고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고자 나름 죄를 끊기 위해 노력한다 하면서도 죄를 끊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계시거나 혹은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완전히 끊고 죄를 안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단정지어버리고서 말로만 회개한다 하고 또 돌아서서 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아래의 성경구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살전 5:22-23)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새번역]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됨이라"[새번역]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죄를 아무리 지어도 대충 회개만 하면 무조건 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 10:26-27)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서 진리를 깨닫고도 짐짓 죄를 짓는다면 다시는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릴 수 있는 제물이 없고 다만 심판과 반역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죄를 회개한다 하면서도 죄를 끊는 것을 어려워하고 죄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되는 이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증거 한 내용을 올려보고자 하니 이 글을 꼭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이라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어둠의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로는 아담과 함께 만물이 저주를 받았지요. 이후로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합니다. 누가복음 4장 6절에도 보면 사단이 예수님께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라고 했지요. 누군가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범죄 하면 그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전히 죄에 속한 죄의 종이요 원수 마귀 사단에게 매인 것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주인은 종에게 “동쪽으로 가라” 하고 다른 주인은 종에게 “서쪽으로 가라” 하면 종이 어떻게 두 주인에게 다 순종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여 의의 종이 되거나, 세상을 사랑하여 죄의 종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는 것은 거짓말이지요.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로 마음에 소중히 간직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립니다. 그러지 않고 세상을 계속 사랑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과는 멀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이 육은 육을 끌어당기는 속성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것을 취하기 시작하면 취하면 취할수록 점점 더 취하기를 원하지요. ‘이 정도면 세상 것은 충분히 취했으니 이제는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자’ 이렇게 금방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쉽게 단순한 비유를 하나 들어 보지요.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기도회 시간 전에 저녁 내내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기도하러 갈 시간이 거의 다 되었지만 드라마는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고 있지요. 지금까지 여러 시간 보았으니 ‘이제 족하다’ 하고 마음을 정리하여 쉽게 집을 나설 수 있습니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보던 내용이 아직 안 끝났으니 미련이 남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철야 시간에 지각하기 십상입니다. 다 끝나고 늦게나마 기도하러 왔다 해도, 기도 중에 계속 드라마 내용이 떠오르지요. 다음 스토리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까 본 내용이 연상되기도 하여 중심으로 기도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다음 날도 이어지는 내용을 보기 위해 어찌하든 시간 맞춰서 텔레비전 앞에 앉지요. 이렇게 하다 보면 기도 시간에도 자꾸 지각하고 기도만 아니라 예배 시간까지 방해를 받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점점 충만함이 사라지고 은혜가 식어집니다. 기도나 예배에 대한 사모함도 없어지고 미지근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한다 해도 세상을 멀리 하지 않고 계속 취해나가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오지를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지혜와 목숨을 다해 ‘어찌하면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 ‘어찌하면 더 성화되고 충성할까?’ 이런 것에 생활의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쉬운 비유로 드라마를 들어 설명했지만 결국 세상에 속한 것은 다 마찬가지이지요. ‘세상’은 이성이든, 돈이든, 명예나 권세든,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다 해당됩니다. 혹시 자신의 마음에 은혜가 전보다 덜하고 성령 충만함이 식어버렸다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집중하고 있는가?’ 또 ‘죄를 버리고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매일매일 온 힘을 다하고 있는가?’ 자신을 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부터, 무엇이 내 생활 속에 틈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 갔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여기서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어두움의 세상이라 했지요. 이런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의 사람들도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틉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해서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다 벗어 버린 것은 아니지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다시 말해 육을 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벗어 버리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집니다.

 

반면에, 육을 버리고자 노력하지 않고 세상을 계속 취해 나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식어지지요.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빠져나가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이 소멸되고 구원과도 멀어지는 무서운 결과를 낳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속히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기 전에 자기 안에 채워진 육의 내용물을 부지런히 뽑아 버려야 하지요. 벗어 버려야 할 육의 내용물들을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했지요. 지금부터 이 세 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은, 육신을 좇아 범죄 하려고 하는 속성입니다. ‘육신’은 사람의 몸과 죄 성이 결합된 것입니다. 여기서 ‘몸’이란 아담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영의 지식이 빠져나간 뒤에 남겨진 사람의 몸을 의미하지요. 사람에게 있는 죄 성이 겉으로 표출되려고 하는 욕구, 곧 범죄하고 싶은 욕구가 ‘육신의 정욕’입니다. 간음하고 싶고, 혈기 내고 싶고, 도적질하고 싶은 욕구, 미워하고 싶은 욕구 이렇게 죄를 짓고 싶은 욕구가 다 육신의 정욕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죄 성들이 있으면 그 속성대로 행하고 싶어집니다. 시기가 있는 사람은 그 시기, 질투를 발하고 남을 깎아내려야만 속이 시원하지요. 판단 정죄라는 죄 성을 갖고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고 말하며 판단하는 것이 입에 달고 재미있습니다. 혈기가 있는 사람은 분이 나는 일이 있을 때 분을 발해야만 통쾌하고 편안합니다. 잠잠히 참으려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속이 너무 불편하지요. 이렇게 육신의 정욕이 동하고 발해지는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죄 성이 있으면, 그 죄 성을 근거로 비 진리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곧, 마음에 육이 있는 만큼 생각할 때도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육신의 정욕이 발동을 합니다.

 

‘시기’라는 죄 성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지요. 어떤 사람의 마음에 시기가 있습니다. 자기 동료가 윗분에게 칭찬받는 것을 보자 ‘시기’라는 육의 속성에서 육신의 생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뭘 그렇게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지? 남보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닌데 윗분이 번번이 저 사람만 드러내서 칭찬하시네. 저렇게 자꾸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시면 남들도 저가 정말 뛰어나다고 잘못 생각할 텐데 너무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지요.

 

이렇게 육신의 생각이 진행되면 이내 육신의 정욕이 발동하여 ‘시기’라는 육신의 일이 겉으로 나오게 됩니다. 속이 불편하고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지요. 상대를 대할 때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험담과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육신의 정욕이 동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육신의 생각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동료가 칭찬받을 때 ‘왜 저 사람이 칭찬받지? 그리 잘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다, 불편하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 그 생각을 딱 차단해 버려야 하지요. 육신의 생각을 안 하려고 애를 써도 자꾸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억지로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선한 생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생각만 아니라 느낌도 바꿔 나가야 하지요. 상대가 칭찬받을 때 불편하고 속상한 느낌을 행복하고 좋은 느낌으로 바꿔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가 칭찬받으니 감사하고 좋다, 윗분이 사랑해 주시고 힘을 주시니 좋다” 이렇게 선한 생각과 느낌으로 돌려나갑니다.

 

이렇게 노력하면서 동시에 해야 하는 더 중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 성 자체를 마음에서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죄 성을 마음에서 뽑아 버리려면 자기가 시기하는 순간의 마음과 느낌을 명심하여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시기하는 느낌과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날마다 불같이 기도해야 하지요. 이렇게 죄 성을 뽑는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원래 시기, 질투가 강한 사람도 있고 시기하는 마음이 별로 강하지 않아서 쉽게 뽑아 버리는 사람도 있지요. 또 살아가면서 자기가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할 때, 그때마다 마음에 슬픔과 서운함을 쌓아가서 시기 질투의 속성이 강해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힘든 상황을 겪는다 해도 늘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선하게 생각한다면 시기라는 죄 성을 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자신이 못 가진다 해서 서러워하고 남이 더 가진 것을 보고 속상해하며 상대에게 불편함과 감정을 품는 등, 이렇게 악한 생각과 느낌을 자기 안에 계속 받아들일수록 시기의 죄 성이 강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스스로 결단하여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 나가면 그 죄 성을 버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마음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깨닫는 것이지요.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시기라는 죄 성이 자신을 얼마나 해롭게 하는지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만큼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릴 것이고 선한 마음, 선한 생각으로 바꾸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게 되지요. 그 노력과 간절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 성이 버려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또 죄 성들을 하나씩 버려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충만한지 체험하게 되면 성결 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집니다.

 

이렇게 육을 버려 나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육을 버리고자 한다면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육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곧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경험하면서 ‘좋다’는 느낌과 함께 마음에 담아 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음에 그 경험을 연상시키는 것을 보고 들을 때 좋았던 그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빨간 사과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사람이 다음에 빨간 사과의 사진을 보면 전에 먹었던 기억과 느낌이 되살아나지요. 달고 시원한 맛, 아삭아삭하게 씹히던 촉감, 이런 것이 연상되면서 ‘맛있겠다, 먹고 싶다,’ 하는 욕구가 생기지요. 그 욕구가 강해지면 실제로 사과를 먹으려고 하고요. 반면 사과를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은, 사과의 사진을 본다 해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안목의 정욕도 이와 같습니다. 예전에 좋은 느낌으로 세상을 취했던 사람이 그 느낌을 되살릴 만한 것을 접하게 되면 다시 세상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욕구를 좇아 육을 취하게 되지요. 이런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세상 것을 떠올리게 하는 요인을 자신의 주변에서 차단해야 합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령 술을 끊으려는 사람이 술집에 가서 남들이 마시는 모습을 보고, 술 냄새를 맡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 냄새 좋다, 맛있겠다, 나도 딱 한 잔만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몰려오지요. 애써 눌러 놓았던 술에 대한 욕구가 평소보다 훨씬 간절해지지요. 그러니 술을 끊고 싶은 사람은 아예 술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학생들이 오락을 끊고 싶다면 먼저는 오락기나 컴퓨터를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치워야 합니다. 혈기를 버리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폭력적인 내용의 것들을 멀리해야 할 것이고, 간음을 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음란한 것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지요.

 

종종 어떤 충격적인 범죄에 대해 영화나 뉴스에서 자세히 다루고 나면 그 후에 모방 범죄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도로 방송한 것인데 오히려 비슷한 범죄가 늘어나는 것이지요. 그 전에는 죄를 지을 욕구가 있어도 차마 구체적으로 행동은 못한 사람이, 언론을 통해 범죄 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게 되니 쉽게 따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큰 범죄를 따라하는 경우는 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지요.

 

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이 독특한 말투를 쓰거나 욕을 많이 하는 영화를 한참 동안 보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주인공의 말투나 욕을 따라 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노래를 계속 듣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게 되지요. 그러니 성결을 사모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살펴서 근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육의 것을 보고 듣고 가까이 하면 그 육을 쉽게 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술을 끊으려는 사람이 술자리에 가서 남들이 마시는 모습을 보고 냄새를 맡으면 술을 마시고 싶어지지요.

 

(잠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아예 보지도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을 받아들이면 원래 있던 죄 성이 발동될 뿐 아니라 그 죄 성이 힘을 얻어 더 강해지기도 합니다.

 

비유를 들어, 여러분이 한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중이라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력을 다해 성을 공격하기는 하는데 포위망의 한 쪽이 뚫려 있어서 성안으로 계속 지원군이 들어옵니다. 적군이 군사와 식량, 무기 등을 계속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안의 적군은 힘을 얻어 계속 저항할 수 있고 그 싸움이 빨리 끝날 수가 없지요. 포위하고 있는 성을 빨리 함락시키려면 공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급로를 차단하여 지원군을 막아야 합니다. 이때 성안의 적군이 마음 안의 죄 성이라면 안목의 정욕은 지원군의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하며 성결 되려고 해도 안목의 정욕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으면 죄 성이 버려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 죄 성을 뽑아 버리는 노력과 함께 육의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더러운 물이 담겨 있는 그릇 안에 계속 깨끗한 물을 부어 넣으면 결국 그릇 안에는 깨끗한 물만 남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깨끗한 물을 부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더러운 물을 함께 부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릇의 물은 더럽지요. 더러운 물을 더 이상 붓지 않아야 그릇 안의 물이 깨끗한 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그릇 안의 죄 성을 뽑아버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 성을 뽑아 버리는 노력과 함께 육의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선한 것만 보고 선한 것만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지요.

 

안목의 정욕을 차단한다고 해서 무조건 안 듣고 안 보고 세상을 피해 다니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세상 것을 접하면 무조건 안목의 정욕이 들어와서 범죄 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지요. 세상 것을 좋게 여겨서 받아들이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상 것을 접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들이 세상을 취하고 즐기는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할 때도 있지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선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해야 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도 중요한 것은 정신을 차리고 세상 것이 자기 안에 틈타지 않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적군을 진멸하고 어떤 물건도 취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듣고도 아간이라는 사람은 값비싼 보물을 보자 탐심이 동하여서 외투와 금, 은 등의 물건을 몰래 숨겼습니다. 결국 이것이 발각되어 아간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전투를 하다 보면 당연히 적군이 가진 보물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간이 “나는 안목의 정욕이 틈타면 범죄 하게 되니까 무조건 보물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아예 싸우러 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보다는 아무리 값진 보물을 보았다고 해도 탐심이 동하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지켰어야 합니다. “저것을 갖고 싶다, 몰래 숨길까?”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보물로 인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보물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누가 손에 쥐어 줘도 멀리 던져 버렸겠지요.

 

여러분이 세상과 육을 대할 때도 이런 마음을 다져 나가면 됩니다. 억지로 눌러 참으면서 계속 피하고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의 열매가 결국 사망인 줄을 깨달아서 마음에서부터 싫어하고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같이 기도하여 마음 근본에 있는 죄 성들을 뽑아 버려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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